저본 : 책세상 출판사, 이내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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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장군·군사평론가. 나폴레옹은 그의 저서 《대규모 전술에 관한 논문》을 읽고 참모장교로 임명했고 니콜라이 3세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했다. 군사평론가로 전략과 전술 및 병참의 구분을 처음 체계화했다.



1798년 프랑스군 참모로 자원하여 군인생활을 시작하였다. 1805년 나폴레옹은 그의 저서 《대규모 전술에 관한 논문》을 읽은 뒤 참모장교로 임명하였다. 조미니는 울름전투(1805), 예나전투, 아일라우전투(1806)에 참가했으며, 1808년 네 원수와 함께 에스파냐 원정을 떠났다. 1813년 네 원수의 참모장이 되었다. 네 원수는 조미니를 사단장으로 추천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조미니는 1813년 프랑스군을 떠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부관이 되어 러시아를 위해 싸웠다. 

1826년에 니콜라이 1세의 부관이 되었다. 1828년 터키와 싸웠고, 1830년에는 러시아 육군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그후 군에서 제대하여 1837년에는 러시아 황제 아들의 군사 가정교사를 지냈다. 1854년에는 니콜라이 3세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군사평론가로서 전략과 전술 및 병참의 구분을 처음으로 체계화하였다. 저서로는 《전략원리》(1818), 《나폴레옹의 생애》(1827), 《전술의 요점》(1838) 등이 있다. <두산백과>











 본 장에서는 정치가가 전쟁의 적합성 - 시의성 - 긴요성 여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고, 전쟁목표의 달성을 위해 요구되는 제반작전을 결정하는 데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다루고 있다.


 정부가 전쟁을 치르는 목적은 다음과 같이 9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특정한 권리의 회복 및 수호

(2) 상업 - 제조업 - 농업과 같은 중대한 국가이익의 보호 및 유지

(3) 정부의 안전이나 세력균형에 필요한 인접 국가들의 존립 지지

(4) 공세 및 수세 동맹 임무의 완수

(5) 정치적 또는 종교적 신조의 확산, 타파 및 옹호

(6) 식민지 획득을 통한 국가의 영향력과 세력의 확장

(7) 위협당하고 있는 국가의 독립 보전

(8) 명예 훼손시 이에 대한 보복

(9) 점령을 위한 기습



 이들 상이한 종류의 전쟁은 그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필요한 노력과 작전의 성격 및 범위 설정에 어느 정도까지는 영향력을 미치게 됨에 유념해야 한다. 다음 사례와 같이 전쟁을 선동한 측이 수세적으로 위축될 수 있고 전쟁을 비난한 측이 공세적인 자세를 취할 수도 있는 바, 전쟁의 성격과 형태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게 될 환경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



(1) 한 국가가 서로 동맹을 맺고 있는 여러 국가에 대항하여 전쟁을 할 수 있다.

(2)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항하여 무분별하게 전쟁을 할 수 있다.

(3)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 국가가 단일 적대국가와 전쟁을 할 수 있다.

(4) 한 국가가 전쟁의 주도국이나 보조적인 국가가 될 수 있다.

(5) 전쟁에서 보조 역할을 하는 국가의 경우 개전 초기아 개전 이후에 합세할 수 있다.

(6) 적국, 동맹국 또는 자국의 영토가 전구에 해당할 수 있다.

(7) 만일 전쟁이 침략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이는 인접 또는 멀리 떨어진 영토에서 행해야 하므로, 이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또는 과감하고 모험적으로 수행될 것이다.

(8) 전쟁 대상이 피아 어느 쪽이건 간에 국민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9) 내란이나 종교전쟁이 있을 수 있다.




 전쟁은 항상 전쟁술의 대원칙에 입각하여 수행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환경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에, 실행될 작전의 성격에 따라 상당한 자유재량권이 부여되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일치단결된 스페인 국민을 굴복시키려는 20만 명의 프랑스군은(나폴레옹 전쟁 중 반도전쟁) 평화를 강요하기 위해 비엔나나 다른 어떤 수도로 진군하는 프랑스군에 비해 그 규모에 걸맞은 기동성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군이 보로디노에서 러시아군과 싸웠던 것처럼 미나의 유격대와 싸우지는 못할 것이다. 프랑스군이 라인 강과 인 강 또는 다뉴브 강과 엘베 강 간의 정부 및 지역사회의 풍조와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비엔나로 진격하는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야전 연대는 언제나 거의 동일한 방법으로 전투를 하지만,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은 처한 상황과 전투의 성격을 충분히 고려해야만 한다.


 어느 정도는 정략에 속하는 문제지만, 이러한 상이한 원칙들의 결합에는 단순하게 부대를 관리하는 문제에 대한 내용이 추가될 수 있다. 이른바 군사정책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는 절대로 외교는 물론이고 전략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인과 장군이 계획을 세울 시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여전히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제 1절 권리 회복을 위한 공세전쟁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권리를 요구할 경우에, 무력을 동원한 강압이 항상 최선의 방법일 수는 없다. 행동을 취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공익을 고려해야 한다. 


 가장 정의로운 전쟁은 의심할 바 없는 권리를 기반으로 한 전쟁이다. 이에 더하여 전쟁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오구되는 희생 및 초래될 위험과 균형을 이룰 수 있음을 국민에게 약속하는 전쟁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시대에는 의문스러운 권리를 다투느라 일어나는 전쟁이 너무나 많다. 분명히 유산이나 유언 또는 결혼 등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그러한 전쟁들도 대부분 사실은 사리사욕 때문에 일어나는 전쟁에 해당한다. 루이 14세 치하의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는 매우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성한 의지에 의해서 정착된 것이 명백했으며, 가족 내에서 그리고 스페인 국민의 보편적인 합의에 의해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유럽 국가들의 치열한 전쟁을 불러왔고, 합법적 계승자에 대항하는 동맹체제의 출현을 가져왔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리드리히 2세는 자국의 권리를 요구하면서 슐레지엔으로 진군하여 그곳을 점령함으로써 프러시아의 세력을 배가시켰다. 이는 천재적인 일격이었으므로, 만일 그가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가 정당화될 수 있는 한, 진취적 기상의 위엄과 중요성이 그의 시도를 합법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의 전쟁에는 아무런 원칙도 적용될 수 없다. 매 상황마다 주의 깊게 관찰하여 이를 통해 유익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원칙이다. 공세적 기동은 유익을 취하려는 이러한 목적에 합당하게 수행되어야 한다. 가장 합당한 절차는 분쟁중인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므로 당사국들의 상대적인 노력, 적으로부터 영토 할양을 보장받을 수 있는 목적, 그리고 적국의 영토 심장부에서 적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에 따라 공세작전이 수행될 수 있다.


 모든 문제는 타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당사국들의 동맹 관계와 동맹국들의 군사적 자원에 달려 있다. 공세적 기동을 행할 경우에 타국의 마음을 불러일으켜 적국을 이롭게 만들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 해야 한다. 이러한 사태의 발생을 예견하여 타국에게 적절한 설명과 보증을 제시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사태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정치인에게 맡겨진 임무이다. 




 제 2절 정치적인 수세전쟁과 군사적 견지의 공세전쟁


 옛 권리의 경신을 요구하는 외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한 국가가 전쟁을 하지 않고 그러한 요구에 굴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그 국가는 그것이 보다 영광스러운 결정이라는 판단하에 항상 자국의 영토 방어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적국이 국경선으로 공격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에 먼저 공세 행동을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


 보통은 침략전쟁의 경우에 이점이 있으나, 자국의 영토 내에서 적을 기다리는 경우에도 이점은 있다. 내부적으로 불화가 없고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위험이 전혀 없는 국가는 항상 전쟁을 적국의 영토 내에서 치르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방책은 자국의 영토가 황페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적국의 희생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며, 장병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또한 적국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군사적인 의미에서는, 자국의 영토 내에서 작전하는 부대의 경우에는 모든 천연 및 인공 지형지물을 숙지하고 있는 전구에서 국가의 정보와 시민의 호의, 그리고 정부 당국의 협조로 제반 기동을 뒷받침받을 경우 커다란 이점이 있음은 확실하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는 전쟁에 관한 제반 설명에 나름대로 적용되지만, 만일 전략의 원칙이 불변이라면, 전쟁의 정치적 측면에선느 다르다. 전쟁의 정치적 측면은 집단사회의 풍조, 지역특생, 국가 및 군 고위층 인사들의 성격 등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전쟁에는 규치깅 없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군사학이 능동적이고 기교 있는 적국의 전면에서는 원칙에 의존하더라도, 전쟁의 도덕적, 정치적 측면에서는 원칙의 변경이 필요하다. 작전계획은 상황에 따라서 변경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대원칙이 준수되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군 - 오스트리아군 - 러시아군에 대항하기 위한 전쟁 계획은 용맹스럽지만 무질서하고, 기동력이 미약하며, 역경에 처하여서는 견디지 못하고 오합지졸로 변해버리는 터키군과 싸울 전쟁계획과 비교할 경우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제 3절 임의적인 전쟁


 프리드리히 대제의 슐레지엔 침공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임의적인 전쟁이었다. 이러한 전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강대국이 상업적 - 정치적 이유로 천연적인 국경선을 확보하기 위해 수행하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한 강대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또는 세력 확장을 사전에 방비할 목적으로 치르는 전쟁이다. 후자는 개입전쟁으로서 한 구각가 위험한 경쟁국을 단독으로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목적 달성을 위해 타국과 제휴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의도는 전쟁보다는 오히려 정략이나 외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제 4절 동맹전쟁 또는 비동맹전쟁


 전쟁시 다른 모든 조건들이 대등하다면, 물론 동맹을 맺는 것이 바람직하다. 두 약소국이 동맹을 맺어 대항한다고 하더라도 강대국 한나라가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그렇더라도 동맹국은 분리되어 있는 국가보다는 강하다. 동맹국은 우방국에 부대의 분견대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평시에는 안전하게 확보될 수 있는 적국의 국경선 일부를 위협함으로써 적에게 심각한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아무리 강력한 세력을 가진 국가라고 하더라도 무시하거나 고려할 가치도 없는 적국이란 없다는 것이 그 동안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제 5절 개입전쟁


 한 나라가 이미 시작된 경쟁 속에 끼어든다는 것은 다른 환경하에서 벌어지는 어떤 전쟁보다도 많은 이점을 약속받게 된다. 왜냐하면 개입하려는 국가는 자국의 전 역량과 영향력을 저울의 한쪽에 투입하고, 국력을 결정적으로 극대화화여 사용할 수 있는 순간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입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인접국가의 내정에 대한 개입이고, 둘쨰는 대외관계에 대한 개입이다.


 첫번째 유형의 개입이 갖고 있는 도덕적 성격에 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지만, 이러한 사례는 가끔식 발생한다. 로마가 이와 같은 개입을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고, 이른바 영국 동인도회사의 절대적인 지배권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확보되었다. 이러한 개입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에 개입함으로써 권력을 신장시켰으나 반대로 혁명기간 중에 프랑스의 내정에 개입하려던 시도로 인해 거의 패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나라에 대한 대외관계에 개입하는 것이 더욱 합법적이고 아마도 더 유익할지 모른다. 한 나라가 다른 국가의 내정에 개입할 권리를 가질 수 이쓴가의 여부는 의문시되고 있다. 그러나 타국이 소란을 인집 국가에까지 파급시킬 경우에는 이에 대응할 권리가 있음은 확실하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해외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3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원조를 제공하도록 구속되고 있는 조약 때문에

 (2)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3) 이미 시작된 전쟁으로 인해 초래될 불리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하여. 또는 다른 방법으로는 취할 수 없는 이점을 전쟁을 통하여 얻을 목적에서이다.


 역사에는 이들 원칙을 무시한 댓가로 멸망한 국가들에 대한 사례로 가득차 있다. "한 국가가 부당하게 세력균형을 도모할 때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일 그 나라가 적기에 그 국력을 균형 조절에 투입한다면, 이류 국가라고 하더라도 여러 국가들의 중재국이 될 수 있다."


 군사적 견지에서 치열하게 각축적인 전개되는 중에 예기치 않게 제 3의 세력으로서 새로운 강력한 부대가 출현한다면, 그것이 전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부대는 이미 야전에 배치된 벼력을 중심으로 하여 지리적 위치에 대한 의존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예컨대, 1807년 겨울에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배후에, 그리고 러시아를 전방에 두고 비스툴라 강을 도하하여 쾨니히스베르크 성까지 위험을 무릎쓰고 진군했다. 만일 오스트리아가 10만 대군으로 보헤미아로부터 다섯 열로 공격을 가해왔다면, 나폴레옹군의 세력은 아마도 종말을 고하고, 라인 강을 재탈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40만 대군이 육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2년 후 40만 대군으로 출진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만일 10만 명의 병력을 적기에 효과적으로 운용했다면, 유럽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이러한 2가지 상이한 개입에서 도출될 수 있는 몇 가지 유형의 전쟁이 있다.


 (1) 개입이 단지 보조적이며, 이전에 체결된 조약에 의하여 약속된 병력으로 개입한 전쟁

 (2) 인접 약소국의 영토를 방어해줌으로써 그 국가를 유지시켜주고 전장을 다른 곳으로 전환시키는 개입에 의한 전쟁

 (3) 한 국가가 전구 근처에 위치한 주 당사국의 입장에서 개입한 전쟁으로 이 국가와 대항하기 위해 여러 나라가 제휴한 경우를 예상한 전쟁

 (4) 한 국가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싸움에 개입하거나 또는 전쟁 선포 이전에 개입한 전쟁


 한 국가가 조약에 따라 단지 소규모의 분견대만 파병했을 경우에는 하나의 단순한 부속물에 불과하여 주 작전에서 별다른 발언권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주 당사국으로서 강압적인 세력으로 개입한 경우에는 그 상황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전쟁에서는 군사적으로 다양하게 유리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 7년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프러시아를 점령할 때까지는 북방지역에서 주 당사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조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페르모와 솔티코프 장군이 러시아군을 브란덴부르크까지 진군시켰을 때, 이 부대는 전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이익에 영합하여 행동했다. 진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 병사들의 운명은 동맹국 기동작전의 승패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원정은 위험하고 통상적으로 미묘한 작전이다. 1799년과 1805년의 전역은 이들 원정의 군사적 성격을 논의할 때마다 다소 적합치 못한 사례로 인요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제 24절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다음으로 부대의 안전이 이러한 원거리 개입으로 인하여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적대행위의 장소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한 국가의 영토가 쉽게 침공당할 수 없다는 이점이 이러한 불리점을 보완해준다. 그리고 이는 장군에게는 어느 정도 불운일지 모르지만 국가로서는 유익이 된다.


 이러한 전쟁의 특성에서 핵심은 정치가인 동시에 군인인 장군을 보전하고, 주 작전시 각 당사국이 참여할 동맹관계에 대한 약속을 명문화하며, 끝으로 공동이익과 조화를  이루게 될 목표점에 대하여 합의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방책을 등한시함으로써 많은 제휴관계가 실패했거나 동맹관계보다는 약하지만 좀더 잘 단결된 세력과의 전쟁시 어려움을 경험했다.


 세 번째는 국가의 전 역량을 동원하여 국경선 부근에서 개입하는 것으로 다른 개입들보다는 더욱 고무적이다. 1807년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성격의 개입 기회를 가졌으나, 여기에서 유익을 취하는데는 실패했다. 1813년에 다시 이러한 기회가 생겼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20만 대군을 이끌고 거의 완벽한 승전의 확신을 갖고 출전했을 때, 자신의 작전정면을 역순으로 점령하면서 작센에 부대를 집결시켰다. 오스트리아는 2개월 안에 이탈리아를 재장악하고 15년동이나 참사로 인해 상실되었던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했다. 이러한 개입을 통해서 오스트리아는 자국에게 유리한 정치적 - 군사적 호기를 최대의 이점으로 취하는 이중 효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승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확실시되었다. 즉 전구가 병력을 최대한 전개시킬 수 있는 국경선에 매우 근접해 있었고, 동시에 이미 진행되고 있는 각축전에 뛰어들었으며, 가장 적절한 호기에 국가의 전 역량을 이 경쟁에 투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의 이점은 너무도 결정적이기 때문에 강대국은 물론이고 약소국들도 이의 유의를 알게 되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1552년에 작선의 모리츠 선제후는 스페인 - 이탈리아 - 독일 제국의 지배자이자 프랑수아 1세를 격파하고 프랑스를 장악했던 카를 5세에 대항하여 대담하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 기동은 험준한 티롤 지방을 전장으로 만들어서 급기야는 위대한 정복자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1706년에는 사보이 공작 빅토르 아마데우스가 루이 14세와 적대관계를 선언함으로써 이탈리아의 정세를 변화시켰다. 또한 아디게 제방으로부터 투린 성까지 프랑스군을 다시 불러들이는 요인이 되어 외젠 왕자를 불사신으로 만든 대파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적절한 시기에 행해지는 개입이 가져다줄 수 있는 효과와 중요성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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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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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평화

2013.10.21
12:07:52
(*.7.31.18)
죠미니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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