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절 사상전쟁



 사상전쟁, 국민전쟁, 내란은 간혹 혼동되기도 하지만, 각별한 주의를 요할 만큼 큰 차이가 있다. 사상전쟁은 대내적인 전쟁, 대내 및 대외적인 전쟁, 그리고 대내적 또는 내란이 아닌 대외적이거나 외부적인 전쟁일 수 있다.


 두 나라의 사상전쟁은 분류상 역시 개입전쟁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결국 개입을 자초하게 될 한 당사국이 자국의 인접국들 간이 유포시키려는 교리나 주입시키려는 신조dogma의 결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신조에서 연유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는 국민전쟁과 같이 가장 큰 비난의 대상이 되는 전쟁이다. 왜냐하면 최악의 격정을 초래하여 보복적이고도 잔인한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교 전쟁, 십자군 전쟁, 30년 전쟁, 연맹 전쟁 등은 거의 동일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간혹 종교가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구실이 되지만, 전쟁이 진정한 신조의 하나가 될 수는 없다(이 부분은 문맥상 '종교가 진정한 신조의 하나가 될 수 없다.' 로 보이지만, 원문은 성가셔서 안 찾아봄). 마호메트의 후게자들은 회교 경전을 강론하는 것보다 그들 제국의 확장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광신자였던 필리프 2세가 로마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목적에서 프랑스의 연맹을 유지시킨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안셀로트가 이집트에서 십자군에 종군했을 때, 루이 9세가 성묘의 장악보다는 인도와의 통상에 주력할 것을 요구했음을 인정한다.


 정치적인 전쟁에서는 지지받거나 저항에 부딪힐 기회가 거의 같다. 이것은 1792년에 광신자 연합이 어떻게 하면 그 유명한 인권선언을 전 유럽에 유포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지, 각국 정부는 어떻게 정확하게 경고를 접하고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원위치시키고 진정시킬 목적만 갖고 출전태세에 돌입했던가를 회상하게 한다. 그 수단은 불운했는데, 전쟁과 침략은 일시적이고 단기간에 더욱 난폭해지는 인간의 격정에서 나오는 악을 다스리기에는 부적절한 조치이다. 시간만이 모든 사악한 격정과 무질서한 교리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 된다. 문명국가가 당파적이고 억제당하지 않은 대중을 속박함으로써 단기간은 견딜 수 있을지 모르나, 이 격동기가 지나가고 나면 곧바로 이성적인 동요가 일어난다. 이러한 폭도를 외국군을 이용하여 진압하려는 시도는 이미 점화된 지뢰를 폭발하지 못하게 제어하려는 시도와 같다. 이 폭발을 중지시키려다가 실수하여 폭사당하는 것보다는 일단 폭발할 때까직 기다렸다가 나중에 화산의 분화구를 메우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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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무리에




 혁명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하여 나는, 만일 지롱드파가 국회가 외국군에 의해 위협받지 않았다면, 그들이 감히 연약하지만 존경할 만한 루이 16세의 머리 위에 신을 모독하는 안수(按手)를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뒤무리에의 실패와 침략에 대한 위협이 없었더라면, 지롱드파가 산악파에 의해 결코 분쇄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거리낌없이 서로 충돌하도록 허용되었더라면, 그 끔찍한 의회를 계승하는 대신에 프랑스의 오랜 전통과 필요에 따라 아마도 서서히 입법의회를 선하고 온유한 군주적인 교리로 원상회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침략국이 적군과 조우하게 될 뿐만 아니라 격분한 당사국이 모든 공공자원, 부대, 기지시설, 군비를 장악하고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다면, 그러한 수단을 보유하지 못한 집단에 대하여 어떠한 지원이 유효하겠는가? 10만 명의 방데 지역 사람들과 10만 명의 연방주의자가 1793년 정부의 연립에 어떠한 기여를 했겠는가?


 역사는 프랑스 혁명과 같은 투쟁에 대한 한 가지 사례만을 수용하고 있으며, 또한 역사는 극단적으로 흥분한 민족에 대한 공격시 겪게 될 위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군사작전의 부당한 관리가 예기치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전쟁에서 어떤 교훈을 유추해내기 전에, 만일 뒤무리에가 탈출한 다음 요새진지를 섬멸, 탈취 하지 않고 동맹국들이 프랑스의 진지와 용감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데 별다른 애로 사항이 없을 것이기에 애초의 생각대로 장군에게 20만 대군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하도록 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동맹국들은 군주국을 회복시켰을 것이지만, 라인 강까지 후퇴하는 동안에 같은 규모의 부대로부터 엄호를 받지 못했다면, 영원히 복귀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실험은 결코 실행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프랑스 국민과 그 군대의 방책에 달렸을 것이기에 이러한 결과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문제는 두 가지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1793년의 전역이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또다른 해결책이 모색될 수 있을지 여부는 말하기 곤란하다. 오직 실험만이 해결책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쟁이 주는 군사적 교훈은 국민전쟁의 경우와 거의 대동소이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국민전쟁시에는 국가가 점령 및 굴복당하고 요새지역이 포위되고 황폐해지며 군대가 섬멸당하게 된다. 그러나 사상전쟁시에는 국가를 굴복시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부적인 문제로 지체하지 말고 신속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침략당한 국가의 주민들이 독립이나 영토의 보전을 부르짖지 않도록 그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삼가도록 끊임없이 주의해야 한다.


 1823년의 스페인 전쟁은 프랑스 혁명의 방책에 어긋나는 전쟁으로서 바로 위에서 말한 피침략국 국민들의 자극 문제에 해당하는 역사적 사례이다. 조건들이 약간씩 다른 것은 사실이나, 1792년의 프랑스군은 레옹의 급진당보다도 더욱 동질성을 가진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은 사상전쟁, 국민전쟁, 내란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1808년의 최초 스페인 전쟁은 철저하게 국민전쟁이었고, 1823년의 전쟁은 애국심의 요소가 없는 부분적인 사상전쟁이었으니, 결과적으로 이러한 점에서 커다란 차이를 드러낸 것이다.


 더욱이 앙굴렘 공작의 원정은 만족스럽게 수행되었다. 그는 요새진지를 공격하는 대신에 앞에서 언급한 교훈에 입각하여 행동했다. 에브로까지 신속하게 진격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부대를 양분하여 본래부터 대부분의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던 반란군 주동세력을 체포하는 데 성공한 덕분에 그의 부대가 안전하게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장관의 지시대로 작전기지를 얻기 위해 원칙대로 영토를 정복하고 피레네 산맥과 에브로 사이에 있는 요새지를 무력화시킨 다음에 진격했더라면, 그는 1807년 당시와 비슷하게 영토를 점령하고 이로 인해 피침략국의 국민정신을 자극함으로써 아마도 임무 수행에 실패했거나, 적어도 전쟁을 장기간의 혈전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국민의 진정한 환영에 용기를 얻은 앙굴렘은 이 전쟁은 군사작전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작전으로 인식하고, 전쟁을 조속히 종결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여준 행동은 1793년에 동맹국들이 보여준 그것과는 너무도 다른데, 이는 비슷한 사명을 맡고 있는 모든 행위자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3개월 이내에 프랑스군은 반란군을 진압하고 카디즈의 성벽을 탈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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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굴렘 공작(Louis Antoine, Duke of Angoul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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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 스페인 전쟁, '성 루이의 10만 명의 아들들(Hundred Thousand Sons of Saint Louis)'





 

 만일 지금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타당하고도 확실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정략의 성공이라는 유익을 얻을 수 없음이 입증된다면, 그 과실은 부대나 해당 지휘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던 스페인 정부가 난폭한 반동주의자들의 충고를 수용한 데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적대적 이해집단 간의 중재자로서 페르디난트는 왕위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고백한 바 있는 당파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그 세력의 의존했으나, 이들은 결과에는 무관하게 오직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왕실의 권위를 이용하려고 의도했던 것이다. 국가가 두 개의 적대진영으로 나누어진 상태였지만, 평정과 화해를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1823년에 베로나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이들 두 진영은 다시 충돌 했던 것이다.


 역사가 폭력적인 반동은 물론이고 혁명조차도 결코 건설과 결집을 위한 요소가 될 수 없음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중요한 교훈에 입각하여 아름답지만 불행한 이 국토에서 무엇인가 유익을 취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이, 이 무서운 분쟁을 물리치고, 모든 당파를 초월한 훈련된 군대뿐만 아니라 국가의 보편적인 이익에 바탕을 둔 강력하고 존경받는 군주국가가 출현하도록 허락하고,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항상 문제거리였던, 결함에 못지않게 장점도 매우 많은 포용력 없는 스페인 국민에게 모든 지지가 모아지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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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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