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사(연의X)기준으로

군웅할거 시기인 192년부터 196년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순서대로

아시는 분 정리 부탁드립니다.


A. 손견, 유표군과의 전투에서 사망

B. 동탁, 여포에게 배신당해 사망

C. 이각과 곽사, 여포를 몰아내고 장안 점령

D. 조조, 청주병을 휘하에 두다(포신 사망)

E. 원술, 진류를 공격하지만 조조에게 패배하고 수춘으로 근거지 변경

F. 공손찬, 유우 처형

G. 조조의 서주 대학살

H. 여포, 조조의 부재를 틈타 복양 점령

I. 유비, 도겸으로부터 서주를 양도 받음

J. 손책, 원술에게 의지

K. 마등, 한수가 유언과 연합하여 장안을 공격하지만 실패(유언의 아들 2명 사망)

L. 여포, 조조에게 패배하여 서주의 유비에게 의탁

M. 헌제 장안 탈출 후 낙양 도착

N. 장제, 남양 공략 중 유시를 맞고 사망

O. 조조, 헌제를 옹립하기 위해 낙양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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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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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무신

2016.09.11
18: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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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눈팅만 몇년째 하면서 파성넷통해서 취미생활로 삼국지 역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혼자서 삼국지 역사를 연도별로 정리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사이트 들을 뒤지면서 정리한 부분들입니다.
틀린 부분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서운 비판은 하지 말아주시고 틀린점은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글은 잘 몰라서 이렇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문제되면 알려주세요. 삭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192년 역사만 올려봅니다.

192년 초평3년

<조식의 출생>
조식(曹植) 자건(子建), 위왕 조조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나다

<노식의 죽음>
[후한서 노식열전] 초평 3년(192)에 죽었다. 임종에 닥쳐 그 아들에게 땅구덩이에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관은 쓰지 말며, 부장품은 비단 한 채만 할 것을 유언할 뿐이었다. 저술한 비(碑), 뇌(誄) 표(表), 기(記) 등이 무릇 6편이었다.
논하여 말한다. 바람과 서리가 초목지성(草木之性)을 분별케 하고, 위태롭고 어지럽지만 충정과 선량의 절개가 보인 즉, 노공의 마음을 알 수 있음이라. 무릇 봉채(蜂蠆)*무리가 회(懷)에서 일어나 뇌정벽력이 귀를 놀라게 하니, 비록 분(賁), 육(育), 형(荊), 제(諸)의 무리라 하더라도 그 분수를 벗어나 분수에서 벗어나 머뭇거리지 않음이 없었을 것이다. 응당 노식이 엄합(嚴閤)* 아래에서 번뜩이는 칼을 빼어들고, 하진(河津)에서 보위하며 황제를 따르다가, 창칼을 물리치고 나아가 죽일 것을 결단하니, 어찌 앞서 계획된 것이겠는가? 군자는 충의에 관해서는 황급하더라도 반드시 이를 지키고, 엎어지거나 자빠졌을 때에도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노육전] 속한서에 이르길: 노식은 나중에 늙고 병들어 관직을 버리고, 상곡(上谷) 군도산(軍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초평 3년(192)에 죽었다. 노식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노육은 막내다.
노육은 열 살 때, 고아가 되었는데, 자기가 태어난 주에 난리가 일어나 두형이 전란 속에서 죽었다. 그때는 원소와 공손찬이 교전할 때로서 유주와 기주에는 기근이 발생했는데, 과부가 된 형수와 고아가 된 형의 아들을 양육했으며, 학식과 품행은 칭송을 받았다.

<공융의 치적>
[공융전]황건의 잔당이 모두 격파되고 성읍이 수복되자 학교와 상서(庠序)를 세우고 현명한 인재를 천거하여 유학자들이 세상에 진출하도록 했다. 팽구(彭璆)를 방정(方正)으로, 병원(邴原)을 유도(有道)로, 왕수(王修)를 효렴(孝廉)으로 추천했다. 고밀현(高密縣)에 고하여 특별히 정현(鄭玄)을 위한 마을을 하나 세워서 정공향(鄭公鄕)이라 부르기로 했다. 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죽은 사족들을 모두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서 장례를 올려 주었다. 군민들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가 일찍 죽은 사람이 있으면 공융은 자신이 그를 돌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곧 현에서 사당을 지어주도록 했다. 현자에 대한 그의 예는 이와 같았다

<북해 지역의 상황>
[왕수전] 왕수王脩는 자가 숙치(叔治)이고 북해군(北海郡) 영릉현(營陵縣) 사람으로서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을의 제삿날에 죽었는데 이듬해, 이웃 마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왕수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매우 슬퍼했다. 이웃 마을에서는 이것을 듣고 그를 위해서 제사지내는 것을 멈추었다. 20세 때 왕수는 남양(南陽)에서 유학했는데, 장봉(張奉)의 집에서 머물렀다. 장봉은 온 식구가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그를 보지도 않았다. 왕수는 친히 그들을 끌어안아 보살폈으며, 그들의 병세가 점점 좋아지자 곧 떠났다.
초평(初平) 연간(190~193)에 북해태수(北海太守) 공융(孔融)이 왕수를 불러 주부(主簿)로 삼아 고밀현(高密縣)의 현령(令)을 대행하게 했다. 고밀현의 손씨(孫氏)라는 사람은 본래 세력과 협기가 있는 사람인데, 자식이나 손님들이 자주 법을 어겼다. 백성들 중에서 약탈하는 자가 있었는데, 도적이 손씨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면 관리들은 잡을 수 없었다. 왕수는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손씨의 집을 포위했다. 손씨가 집안 사람들을 동원해 저항하며 지키자,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워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왕수가 관리와 백성들에게 명령했다. “감히 공격하지 못하는 자는 적과 똑같은 죄를 짓는 것이다.”
손씨는 이 말을 듣고 두려워 도적을 내주었다. 이로부터 호족들은 복종하게 되었다. 효렴(孝廉)에 천거되었을 때, 왕수는 병원(邴原)에게 양도하려고 했으나, 공융(融)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주: 당시에 공융이 왕수에게 말한 내용이 《융집(融集)》에 실려 있다.
“병원이 현명한 사람인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옛날에 고양씨(高陽氏)에게는 8명의 유능한 아들이 있었지만, 요(堯)는 그들을 모두 등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순(舜)은 그들을 모두 등용했다. 병원은 자리가 없어도 염려하지 않을 사람이다. 나중까지 현자로 남아도 되지 않겠는가?”
[왕수전] 당시 천하에 큰 난리가 일어났으므로 시행되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군에 반역을 하는 자가 있었다. 왕수는 공융에게 어려움이 닥쳤음을 듣고 밤중에 공융에게로 달려갔다. 도적이 처음 일어났을 때, 공융은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수뿐일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왕수가 도착했다. 공융은 그를 공조(功曹)로 임명했다. 당시 교동(膠東)에는 도적이 많았으므로, 왕수에게 명하여 교동의 현령을 맡도록 했다. 교동 사람 공사로(公沙盧) 일족은 강력하여 스스로 진영(陳營)과 참호를 만들어 놓고, 부역과 조세도 바치지 않았다. 왕수는 임지에 도착한 후, 혼자서 기병 몇 명을 데리고 그 문으로 직접 들어가 공사로의 형제들을 죽였다. 공사씨(公沙氏)는 경악을 하며 감히 경거망동을 하지 못했다. 왕수가 그 나머지 사람들을 위로하니, 이로부터 도적은 줄어들어 없어졌다. 공융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왕수가 비록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지라도, 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융은 항상 왕수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면했다.
?[시의전] 시의(是儀)는 자가 자우(子羽)이고 북해군(北海) 영릉(營陵) 사람이다. 그의 본래 성은 씨(氏)이다. 그는 처음에는 현(縣)의 관리(吏)로 임명되었다. 그 군의 상(相)으로 있던 공융(孔融)이 시의를 조롱하면서, “‘씨(氏)’자는 ‘민(民)’의 위쪽 부분이 없는 것이므로 ‘시(是)’로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을 바꾸게 된 것이다.

???월 <유비 평원 통치>
[선주전] 자주 군공을 세웠으므로 임시로 평원령 대행을 명받았고, 그 뒤에 평원상(相)에 임명되었다.
(유비는 공손찬과 원소의 전투시 공로를 인정받아 처음으로 '군(郡)'을 다스게 되었다.)
[관우전] (192년 즈음) 선주가 평원상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로 임명하고, 각각 부대를 지휘시켰다.

<유평의 유비 자객보냄>
[선주전] (평원)군 군민(郡民)인 유평(劉平)이 평소 선주를 깔보며 그 아래에 있음을 수치스러워 하여, 객(客-문객, 노객)을 보내 선주를 찔러 죽이게 했다. 객(客)이 차마 찌르지 못하고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나니, 그가 인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위서]魏書 – 유평이 객(客)으로 하여금 유비를 찌르게 했는데, 유비는 그 일을 모르고 그 객(客)을 심히 후대하자 객이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났다. 이때 인민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다.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사(士-선비 or 병졸?) 중의 아랫사람이라도 필히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전예의 유비에의 종군>
[전예전] 유비가 공손찬에 달아날때 스스로 유비에게 의탁하다
[〈선주전〉에서 유비가 ‘고당령을 지내다 적에게 격파되어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고 공손찬이 유비를 별부사마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원소를 막도록 했다’는 것으로 볼 때 191년이나 그 직전의 일로 보입니다. 전예는 가평 연간 쯤에 82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이때는 대략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나이에 해당합니다.]


192년 1월
[헌제기] 봄 정월 정축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헌제기] 원소와 공손찬이 계교(界橋)에서 싸웠는데, 공손찬의 군대가 크게 패했다.
[헌제기] 원술이 장수 손견을 보내 양양현(襄陽縣)에서 유표(劉表)와 싸우게 했다. 손견이 싸우다 죽었다.
<주준의 연합군과 연합><이각과 곽사의 주준 격파>
[후한서 주준 열전] 동탁은 나중에 관중에 들어가 주준을 낙양洛陽에 들어가 지키게 했다. 이에 주준은 산동의 제장과 공모하여 내응을 약속했지만, 동탁이 습격할 것이 두려워 관을 버리고 형주에 도망쳤다. 동탁은 홍농弘農 사람 양의楊懿를 하남윤으로서 낙양을 지키게 했다. 주준은 그것을 듣고, 다시 군사를 진군시켜 낙양으로 돌아갔다. 양의는 도망쳤다. 주준은 하남이 파괴에 휩싸였기 때문에 물자를 얻지 못하고, 동쪽 중모中牟에 주둔했다.
그리고 주군에 글을 보내 출병을 요구해 동탁을 토벌하려 했다. 서주 자사徐州刺史 도겸陶謙이 정병 3천여 명을 보내주어 물자의 보급을 약간 받게 되었다. 도겸은 주준을 추대하고 거기 장군車騎将軍의 직무(행 거기장군)를 행하게 했다. 동탁은 이것을 듣고 부장 이각•곽사 등 수만 명에게 하남을 지키고 주준을 막게 했다. 주준은 요격하지만, 이각•곽사에게 패했다. 주준은 자군自軍이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관 아래에 머무르며 굳이 전진하지 않았다.
[이각.곽사 열전] 처음에 동탁은 우보牛輔를 사위로 맞았으며, 평소에 친분과 믿음을 나눴기에, 섬陝현으로 보내 병을 주둔하도록 하였다. 우보는 교위 이각, 곽사, 장제에게 보기 수만을 나누어 보내, 하남윤 주준을 중모中牟에서 공격하여 깨트렸다.
<동탁의 폭정>
[무제기] 이 때에, 동탁의 위세가 천하를 능멸하고 있었는데, 태조가 순욱에게 묻자 순욱이 동탁의 포학이 이미 극심하여 필히 변란으로 끝날 것이니 할만 한 것이 없습니다라 했다. 동탁이 이각 등을 보 내니 관동(關東)으로 나가 가는 곳마다 노략질하고 영천.진류(陳留)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고향사람 들 중 머물러 있던 자들은 많이 살해되고 노략질 당했다
<동탁군의 약탈>
[이각.곽사 열전] 진격하여 진류(陳留). 영천(潁川)의 모든 속현의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끌고 가, 그가 지나가는 곳에서 목숨을 부지한 자가 없게 되었다.
소제(少帝)의 황후 당희(唐姬)] 소제가 이유(李儒)에게 살해당한 후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 가던 중 영천으로 쳐들어온 이각에게 잡히고, 이각이 아내가 될 것을 권하자 이를 거절하여 이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계교전투 계속 [광천전투] : 원소 vs 공손찬>
[자치통감] 원소는 국의에게 정예의 군사 800명을 이끌고 먼저 올라가서, 강력한 쇠뇌 일천 장으로 이들을 협승 하도록 하였다. 공손찬은 그 병사의 수가 적은 것을 가벼히 보고는 기병을 풀어 오르게 하였다. 국의의 군사들은 방패 아래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다가 10여 걸음도 채 안되는 지점에 도달한 순간에 일시에 함께 쇠뇌를 쏘고 환호성을 질러 땅을 움직이듯 하자 공손찬의 군사들이 대패하였다. 그가 임명안 기주 자사 엄강의 목을 베고 갑병의 머리 천여 급을 획득하였다. 쫓아가서 계교에 이르자 공손찬이 군사를 수습하여 돌아와 싸웠으나 국의가 다시 이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공손찬의 진영에 이르러 그들의 아문을 뽑아버리니 나머지 무리는 모두 달아났다.
[원소열전(후한서)] 공손찬은 군사 3만을 늘어세워 방진을 치고, 돌격 기병 1만 필을 나누어 양익으로 좌우에 두었는데 그 기세가 심히 정예하였다. 원소는 먼저 국의에게 군령을 내려 정병 8백과 강노 1천대[張]로 선봉을 삼았다. 공손찬은 그 병사가 적음을 깔보고 기병을 풀어 나아가게 하였는데 국의의 병사들은 방패 아래 엎드려 있다가 일시에 모두 발사하니 공손찬군은 크게 패하였고 공손찬이 임명한 기주자사 엄강을 참하고 갑사들의 머리 1천여급을 얻었다. 국의가 추격하여 계교(界橋)까지 이르렀는데 공손찬은 군사를 거두어 다시 싸웠으나 국의가 다시 이를 깨트리고 마침내 공손찬의 군영에 이르러 그 아문(牙門)을 점령하니 남은 공손찬의 무리들은 모두 달아났다.
원소는 뒤 십수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공손찬이 이미 격파되었다함을 듣고 안장을 내려 말을 쉬게 하니, 오직 원소의 막사 아래에 강노 수십대와 대극을 지닌 병사 백명 남짓이 호위 할 뿐이었다. 이때 공손찬의 흩어진 병사 2천여기가 갑자기 이르러 원소를 여러겹 포위하고 화살을 쏘니 비오듯 쏟아졌다. 전풍이 원소를 부축하여 비어있는 담장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원소가 두무(兜鍪)를 벗어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앞에서 싸우다 죽어야 하거늘 어찌 도리어 담장 사이로 도망하겠는가?” 하고는 재촉하여 모든 노를 다투어 발사하도록 하니 공손찬의 기병이 많이 상하였다. 공손찬의 무리들은 이가 바로 원소임을 알지 못하고 점점 물러났다. 마침 국의가 와서 맞아 싸우니 기병들은 이에 흩어져 달아났다. 3년, 공손찬이 또 병사를 보내 용주에 이르러 도전하자 원소는 다시 이를 공격하여 깨트렸다. 공손찬은 마침내 유주(幽州)로 돌아가 감히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공손찬전] (192년 정월) 원소는 광천(廣川)에 진을 치고, 대장 국의(麴義)를 앞쪽에 배치하여 공손찬과 싸우게 하였고 엄강을 사로잡았다. 공손찬군은 발해(勃海)로 패주하고 공손범과 함께 계(薊)로 돌아가 계현의 큰 성 동남쪽에 작은 성을 쌓으니 유우와 서로 가까워 점점 더 서로 원망하였다.
[허유(許攸)] 자는 자원(子遠)으로,어려서 원소 및 태조와 친했다. 188년, 기주자사 왕분 등과 함께 합비후 옹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초평(初平) 연간 원소를 따라 기주에 있으면서, 항상 좌석에 있으며 의론을 했다.
<동소의 위군태수 업무>
[동소전] 위군(魏郡)의 태수 율반(栗攀)이 병사에게 살해되자, 원소는 동소에게 위군태수의 일을 맡겼다. 그 당시 군 경계의 치안이 매우 혼란스러워 적의 숫자가 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동소는 사신을 파견하여 오고 갔으며, 교역과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동소는 그들을 후하게 대해 주었으며, 이것을 빌려 이간시켜 허점을 틈타 토벌하고는 즉시 크게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이틀 동안에 승리를 알리는 우격(羽檄)이 세 차례나 도착했다.


192년 1월
<양양 전투 : 유표 (勝) vs 손견 (敗) → 손견 전사>
-> 손견, 양양 전투에서 유표와 싸워 전사하다.(1/7)
{ 유표가 황조를 보내 번성, 등성 근방에서 손견군을 맞아 싸우게 하니, 황조가 3일간 손견의 수군을 화살로 공격하나 다 떨어지게 되고 손견이 이 후 장강에 상륙하였다. 황조는 등성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손견에 맞서고, 부하 장수인 장호와 진생을 출전시키나, 장호는 한당에게 목이 베이고 진생은 손책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손견이 황조를 사로잡고 양양을 포위하니, 유표는 채모에게 1만 군사를 주어 맞서게 하였다. 채모는 정보에게 군사의 반을 잃고 양양성으로 후퇴하니, 괴량이 계책을 내어 여공을 보내 원소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문빙은 채모의 부장으로 괴량의 매복계에 참전하여 손견의 퇴로를 막고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
[원술열전] 초평 3년 원술이 손견을 파견해 유표를 양양襄陽에서 공격하게 하나 손견이 전사하였다.
[유표열전(후한서)] 원술과 그 종형 원소(袁紹)가 틈이 있었는데 원소가 유표와 서로 결호하자 손견과 더불어 힘을 합쳐 유표를 습격했다. 유표가 패하자 손견이 양양성을 포위했다. 유표의 장수 황조(黃祖)가 구하러 이르렀을 때 손견이 화살을 맞고 죽자 그 남은 무리들이 퇴주하였다.
전략에 이르길 “유표가 야간에 장수 황조를 보내 몰래 출병시켰는데 손견이 이와 맞서 싸웠고 황조는 패주하여 현산 속에 도망쳐 숨었다. 손견은 승기를 틈타 밤중에 황조를 추격하였는데 황조의 부하들이 대나무 숲속에서 화살을 쏘아 손견을 명중시켜 죽였다.”
영웅기에 이르길“유표의 장수 여개(呂介)가 병사들을 이끌고 산속에 주둔하여 손견과 싸웠을때 손견은 경기병을 이끌고 산속에 들어가 여개등을 탐색했고 여개의 부하병사들이 화살을 쏴서 손견의 머리를 맞췄는데 이때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와는(후한서 본문) 같지 않다.
[유표전] 원술이 남양에 있을 때, 손견과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유표의 주를 습격하여 뺏을 생각으로 (191년 겨울) 손견에게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손견전] 초평(初平) 3년(192), 원술이 손견을 시켜 형주를 정벌하게 하니, 유표를 공격했다. 유표가 황조(黃祖)를 보내 번(樊)과 등(鄧)현 사이에서 역습하게 했다. (삼국지 집해 - 번, 등은 모두 호북湖北 양양성 북쪽에 있다. 번성은, 위지 무기 건안 13년에 보인다. 등현은, 촉지 제갈량전 諸葛亮傳 에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등현은, 남양군에 속한다. 번성은, 주周의 중산보仲山甫의 읍으로, 한수漢水 북쪽에 있다. 조일청이 이르길 : 번은, 번성이다. 등은, 등성이다. 방여기요 권 79 : 번성은 양양부성襄陽府城 북쪽 한강漢江 위에 있어, 양양성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니, 후한 말 지키던 곳이다. 등성은 양양부 동북쪽 20리에 있어, 당唐 정원 말 임한현으로 옮겨, 옛 등성을 치소로 삼아 마침내 등성현이 됐다. 또한 원화지 元和志 : 등새鄧塞의 옛 성은 임한현 동남쪽 22리에 있어, 남으로 완구宛口에 임하고, 작은 산 하나에 의거해, 등새라 불렀다. 손견이 황조를 이 산 아래에서 격파했다. 위가 일찍이 이곳에서 주함舟艦을 정비해 오를 정벌했다. )
손견이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한수(漢水)를 건너 마침내 양양(襄陽)을 포위했는데, 단마(單馬)로 현산(峴山)을 가다, (삼국지집해 : 호삼성이 이르길 : 현산은 양양에서 10 리 떨어져있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79 : 현산은 양양부성 남쪽 7리에 있어, 또한 남현南岘이라 하고, 또한 현수산岘首山이라 한다.) 황조군의 군사에게 활을 맞아 죽었다.
[주 전략에 이르길: 『손견이 그 병사를 다 동원해 유표를 공격했지만, 유표는 성문을 닫고 밤에 장수 황조를 보내 몰래 나가 군사를 일으키게 했다. 황조가 병사를 이끌고 돌아오려 했으나, 손견이 역습하여 전투를 벌였다. 황조가 패주하여 현산 속에 숨었다. 손견이 승세를 타서 밤에 황조를 추격하였다. 황조의 부하 병사들 대나무 사이에서 몰래 손견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오록』에 이르길 「손견의 이 때 나이 37세다」라 한다.
『영웅기』에 이르길 「손견이 초평 4년(193) 정월 7일 죽었다.」고 한다. 또 「유표의 장수 여공(呂公)이 병사를 거느리고 산을 따라 손견에게로 향하자, 손견의 경기병이 산을 수색하며 여공을 토벌했다. 여공의 병사들이 돌을 쏟아 부었는데, 손견의 머리에 맞았고, 이때 뇌가 흘러 나와 죽었다.」고 한다.
// 신 송지가 보건데 서로 말이 다른 게 이와 같다.]
[손견전 삼국지집해] 통감고이에서 이르길 : 범서 : 초평 3년 봄, 손견이 죽었다. 오지 손견전 또한 이르길 : 초평 3년이다. 영웅기에서 이르길 : 초평 4년 5월 7일 죽었다. 원기 袁紀 : 초평 3년 5월이다. 산양공재기에서 실은 손책의 표에서 이르길 : 신의 나이 17에, 의지할 바를 상실했습니다. 배송지가 살피길 : 손책은 건안 5년에 죽으며, 당시 나이 26이었다. 손견의 죽음을 헤아리면 손책은 응당 18이어야 하나, 이 표에서 17이라 일러, 즉 부합하지 못한다. 장번 張璠 의 한기 漢紀 와 호충胡沖의 오력에서 모두 손견이 초평 2년에 죽었다고 여기니, 이가 옳고 본전이 잘못된 것이다. 지금은 이를 따른다.
반미가 이르길 : 배주에서 파로가 초평 2년에 죽었다고 여김이, 옳다. 이 전에서 3년이라 이르고, 영웅기에서 4년이라 이르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노필이 살피길 : 주유전에서 건안 3년, 주유의 나이는 24이었고, 주유와 손책은 동년배라, 초평 2년을 헤아리면, 진실로 17세가 된다. 손책의 표에서 “17에 아버지를 여의었다”라고 일렀으니, 손견의 죽음이 진실로 초평 2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손견의 죽음을 초평 2년으로 헤아리면, 응당 환제桓帝 영수永壽 원년에 태어났다. 손견이 죽을 때 손책의 나이는 17세였고, 손권은 11세로, 손책이 손권보다 6세 연장자였다.

[서부인전(손권의 부인)] 오吳의 주군 손권孫權의 서부인徐夫人은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사람이다. 그의 조부 서진徐眞은 손권의 부친 손견孫堅과 서로 친밀했기에 손견은 그의 누이동생을 서진에게 시집보냈다. 이들은 서곤徐琨을 낳았다. 서곤은 어려서 주군州郡에 임관했지만 한漢 말에 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떠났다. 그는 손견을 따라 정벌하는 데 공이 있어 편장군偏將軍을 받았다.

<환계, 유표를 만나 손견의 시신을 인수하다>
[환계(桓階)전] 환계는 아버지가 죽은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침 손견은 유표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는데, 환계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표를 만나 손견의 시신을 청했다. 유표는 그의 의기에 감동하여 시신을 내주었다.
<손책, 손견의 시신을 이끌고 곡아로 가다>
[손책전] 손견이 죽자(薨), 돌아와 곡아(曲阿)에 장사지냈다. (장례가) 끝나자 이내 장강을 건너 강도(江都)에 거처했다.
[『위서(魏書)』에 이르길 「손책은 의당 후작 자리를 이어야 했으나, 동생 손광(孫匡)에게 양보해 주었다.」라 한다]
[손분(孫賁)전] 손분은 손견의 형의 아들로, 손견이 세상을 떠난 후, 손분은 손견의 직무를 대리하여 남아있는 무리들을 이끌고 손견의 영구를 지켜 고향으로 후송했다. 나중에 원술(袁術)이 수춘(壽春)으로 옮기자, 손분 또한 그에게 의탁했다.
[환계전] 손견의 후임 장사태수 장선(張羨)을 섬겼다.
<손분, 장수와 병사를 이끌고 원술에게 가다>
[손견전] 형의 아들 손분(孫賁)이 장수와 병사들을 거느리고 원술에게로 가니, 원술이 다시 표를 올려 손분을 예주자사로 삼았다. 손견의 네 아들은 손책(孫策), 손권(孫權), 손익(孫翊), 손광(孫匡)이다. 손권이 존호를 칭하게 되자, 손견의 시호를 올려 무열황제(武烈皇帝)라 했다.
[주치전] 마침 손견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주치는 손책을 보좌하여 원술에게 가서 의탁하게 되었다.
[황개전(黃蓋傳)] 손견이 죽자(薨), 황개를 손책과 손권을 따라 갑옷을 걸치고 두루 돌아다니며, 전투를 수행하며 성을 도륙했다.



192년 봄
[무제기] [위서] – 어부라(於夫羅)는 (흉노) 남선우(南單于)의 아들이다. 중평(184-189) 중, 흉노병을 징발하자 어부라가 이들을 이끌고 한(漢)나라를 도왔다. 때마침 본국에 반란이 일어나 남선우를 죽이자 어부라는 마침내 그 군사들을 이끌고 중국(中國)에 머물렀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서하(西河)의 백파적(白波賊)과 합쳐 태원, 하내를 깨뜨리고 여러 군(郡)들을 약탈했다.
<흑산전투 : 원소 대 흑산적 장연>
[장연전] 원소가 기주목이 되어 공손찬과 싸우기 되자 장연은 공손찬을 지원하여 군대를 파견하지만 원소에게 격파되어 군세를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원소가 공손찬과의 싸움을 계속하는 틈을 타 장연은 업을 공격해 함락시키나 혼란을 수습한 원소의 역공을 받아 3개월 만에 다시 업을 빼앗긴다)

<흑산전투 : 조조 대 흑산적, 우독>
{ 조조가 돈구(동군 돈구현)에 주둔하자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하니, 조조는 원소의 객장 격으로 연주에 쳐들어온 흑산적을 상대하다. 조조의 제장들이 모두 동무양으로 돌아가 구원하기를 청하나 조조는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흑산에 들어가 우독의 본진을 공격하니, 우독 등이 이 일을 듣고 (동)무양을 버리고 되돌아왔다. 태조는 휴고를 요격(要擊-도중에서 차단하여 공격함)하고 또한 흉노 어부라(於夫羅)를 내황(內黃-위군 내황현)에서 공격해 모두 대파했다. }

[무제기] (초평) 3년(192) 봄, 태조는 돈구(頓丘)에 주둔하고 있었다. 우독 등이 [그 틈을 타서] 동무양을 공격했다. 그러자 태조는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흑]산에 들어가 우독 등의 본진을 공격했다. 우독은 그 소식을 듣자 무양을 버리고 되돌아왔다. 태조는 휴고를 기다렸다가 공격했고, 또 흉노 어부라(於夫羅)를 내황(內黃)에서 공격하여 어느 싸움에서도 대승했다.
[위서] – 어부라(於夫羅)는 (흉노) 남선우(南單于)의 아들이다. 중평(184-189) 중, 흉노병을 징발하자 어부라가 이들을 이끌고 한(漢)나라를 도왔다. 때마침 본국에 반란이 일어나 남선우를 죽이자 어부라는 마침내 그 군사들을 이끌고 중국(中國)에 머물렀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서하(西河)의 백파적(白波賊)과 합쳐 태원, 하내를 깨뜨리고 여러 군(郡)들을 약탈했다.

<순유의 동탁 암살 계획> <하옹의 자살>
[순유(荀攸)전] 순유가 의랑(議郞) 정태(鄭泰)•하옹(何 )•시중(侍中) 충집( 輯)•월기교위(越騎校尉) 오경(伍瓊) 등과 모의하길 동탁은 무도함은 걸주(桀紂)보다 심하여 천하가 모두 그를 원망하고 있소. 비록 강한 군대의 힘을 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낱 필부일 뿐이오. 지금 곧바로 그를 찔러 죽이고 백성들에게 잘 말한 연후에 효관( 關)과 함곡관을 점거하고 왕명을 보필하여 천하에 호령한다면, 이것은 곧 제나라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같은 거사요라 했다. 일을 행동에 옮기려고 할 때 발각되어, 하옹과 순유를 잡아 옥에 가뒀는데, 하옹은 두렵고 무서워 자살했지만, 순유는 말하고 음식먹는 것이 태연자약하였다. 동탁이 죽게 되자 풀려났다.
《위서(魏書)》에는 순유가 사람을 보내어 동탁을 설득하여 풀려났다고 한다.
《한기(漢記)》에는 하옹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하옹은 자를 백구(伯求)라 했으며 어려서부터 곽태(郭泰), 가표(賈彪)와 함께 낙양에서 유학을 했다. 하옹이 태학(太學)에서 명성을 날리자 중조(中朝)의 명신 태부 진번(陳蕃)과 사례교위(司隷校尉) 이응 등이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당고(黨錮)의 화가 발생했을 때 하옹도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그는 성명을 바꾸고 여남으로 도망쳤다가 그 지역의 호걸들과 깊이 사귀게 되었다. 하옹은 조조의 재능을 알아보았으며, 순욱과 원소도 그를 존경했다. 이들은 모두 도망치던 도중에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였다. 이때 천하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당고의 화를 입었지만, 하옹은 1년에 서너번씩 낙양으로 가서 원소(袁紹)와 함께 옥에 갇혔거나 곤란을 겪고 있는 사대부들을 풀어줄 계획을 꾸몄다. 당시에 원술(袁術)도 원소와 함께 호걸로 명성을 날렸지만, 하옹은 그를 꾸밈이 많은 사람이라 여겼다. 원술은 이러한 하옹을 원망했다.
[후한서 하옹열전] 동탁이 정권을 장악하자 하옹을 장사로 삼았는데 하옹은 병을 이유로 취임하지 않았다. 또한 사공 순상, 사도 왕윤등과 공모하여 동탁을 도모하고자 했으나 때마침 공교롭게도 순상이 죽었다. 하옹은 또 다른 계획을 세워 (동탁을 도모하려다)동탁에게 잡히게 되어 이를 원통하게 생각하여 근심하다가 죽었다.
이전에 하옹은 조조를 만나 감탄하여 말하길, "장차 한가(漢家)가 망했을 때 천하를 편안케 할 자는 틀림없이 이 사람이오." 라고 하여 조조는 이를 기뻐했다. 또한 순욱을 일컬어 "영천의 순욱은 왕을 보좌할 재능을 가졌다." 라고 평가했다.
[위서 정혼(鄭渾)전] 정태(鄭泰) 공업(公業)은 정혼(鄭渾)의 형으로 젊은시절부터 재략이 있었고, 계략을 많이 세웠으나, 천하 동란이 일 것을 알고, 은밀히 호걸들과 교우를 맺었다. 동탁은 결국 실권을 독점하여 황제를 폐하였다. 관동에서 의병이 궐기하자, 동탁은 회의석상에서 대대적으로 군을 동원하려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은 모두 동탁을 두려워하여 거스르려는 자 없었다. 정태는 그(동탁)가 힘을 기르면 점차 제어하기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열가지 이유를 들어 산동에 출병할 필요가 필요 없음을 말하다. 동탁은 그제야 기뻐하며 정태를 장군으로 삼아 여러 군을 이끌고 관동을 공략하게 하였다. 어느 사람이 동탁에게 말했다. [정태의 지혜는 보통 사람 이상이어서 결탁하여 산동과 음모를 꾀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에게 병마를 맡기면 그 무리에게 가세하려 할 것입니다. 저는 남몰래 명공을 위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동탁은 그로부터 병마를 몰수하고 (조정에) 묶어두어 의랑의 관직을 내렸다.
후에 또한 왕충과 더불어 계획하여 함께 동탁을 주살하려 하였으나 정태는 탈출하여 무한에서 도주하여 동방으로 귀환하였다. 후장군 원술이 양주자사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관직에 오르기 전에 도중에서 죽었다. 당시 사십일세였다.

<순유의 귀향, 형주에 머무름>
[순유전] 순유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다시 공부(公俯)에 불려져서, 고제(高第; 성적이나 고과가 우수한 자)로 천거되어 임성(任城; 연주의 지명) 상(相)으로 승진되었지만, 가지 않았다. 순유는 촉한(蜀漢)이 험준하고 견고하며 백성들은 풍족해하다고 여겨 촉군(蜀郡)태수가 되길 원했지만, 길이 끊겨 가지 못하고 형주에 머물렀다.



192년 4월
<동탁의 여포 홀대>
[여포전] 일찍이 (여포가) 사소하게 뜻을 거스르자 수극(手戟)을 뽑아 여포에게 던진 일이 있었다. 여포는 용력하고 민첩하여 이를 피하고(布拳捷避之) 동탁에게 사죄하여 동탁의 화 또한 풀렸으나, 이로 말미암아 은밀히 동탁을 원망하게 되었다.

< 절세미인 초선이 연환계를 펼쳤는가?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지 상식 백가지, 2005.12.30, 현암사)
『삼국지ᆞ동탁전ᆞ여포전』을 근거로 하면, 여포는 본디 정원(丁原)의 부장이었지만, 동탁이 여포를 유혹하여 정원을 죽이게 하고 기도위(騎都尉)로 삼아 매우 친애하며 부자(父子)가 되기로 맹세했다고 되어있다. 그리고는 남들이 자신을 해할까봐 겁이 나서 거동하거나 집에 있을 때를 막론하고 늘 여포로 하여금 호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한편 동탁의 악행이 날로 심해지자 동탁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사도 왕윤 등은 여포를 설복시켜 내응하도록 했다.
하루는 천자의 병이 새로 나아서 미앙전(未央殿)에서 큰 모임이 벌어졌다. 여포가 동군(同郡)의 기도위 이숙(李肅) 등을 시켜 친위병 10여 명을 데리고 위사복(衛士服)으로 위장한 뒤 액문(掖門)을 지키도록 하고 스스로는 조서(詔書)를 품고 동탁을 기다렸다. 동탁이 도착하고 이숙 등이 동탁을 가로막자, 동탁이 놀라 여포를 찾는데 여포가 “조서가 있다.”하고는 동탁을 죽이고 그 삼족을 멸했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동탁 피살 장면의 대체적인 줄거리는 이 기록과 상당히 근접한다. 그러나 연환계(連環計)라는 정채로운 내용이 첨가되었고 그 주인공은 바로 초선(貂蟬)이다. 그러면 역사상 과연 초선이란 인물과 연환계라는 사실이 있었던 것인가?
중국 역사상 사대미인(四大美人)중 하나로 불리는 초선이란 여인은 상성(相聲)의 『왜비삼국(歪批三國)』에 의하면 이름은 있지만 성은 없는 인물이다. 정사를 아무리 뒤져봐도 초선이라고 불리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노신이 집록한 『소설구문초(小說舊聞鈔)』에서는 이미 실전된 『한서통지(漢書通志)』의 내용 일부를 근거로 ‘조조가 뜻을 얻지 못하자 먼저 동탁을 유인하기로 하고 조선(刁蟬)을 바쳐서 남편 동탁을 미혹시키도록 했다.’고 하였다. 여기 나오는 조선이란 인물에서 훗날 예인들이 만든 설부에 등장하는 초선의 이름이 유래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서통지』에 등장하는 조선은 여포와는 털끝만큼도 상관이 없다. 이 때문에 조선은 결코 연환계 중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원형이나 전신으로는 간주할 수 없다.
『삼국지ᆞ여포전』에는 ‘동탁은 성격이 강(剛)하면서도 편협해서 한 번 노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일찍이 사소한 불만으로 수극(手戟)을 뽑아 여포에게 던졌는데, 여포가 잽싸게 피했다. •••••• 동탁은 종종 여포를 시켜서 중각(中閣)을 지키도록 했는데, 여포가 동탁의 시비(侍婢)와 사통을 했다. 사실이 발각될까 겁이 나서 마음이 절로 불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사통한 사실이 『삼국지연의』의 줄거리와 비슷한 점이 있기에, 청나라의 양장거는 『귀전쇄기(歸田瑣記)』에서 ‘초선 이야기는 『삼국지ᆞ여포전』에 의거했다.’고 하였다. 『삼국지연의』 중의 초선과 연환계에 관한 묘사는 시비와 사통한 일로부터 나왔을 가능성도 있고, 그 일에서 힌트를 얻어 영감이 크게 일어나서 독자를 감동시키는 이야기로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정사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볼 때, 왕윤과 여포 등이 동탁을 제거하려고 할 때도 연환계나 미인계 따위는 사용한 적이 없었다.
『삼국지ᆞ여포전』에 비록 ‘극을 던지다’거나 ‘시비와 사통했다’는 등의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이 양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한 걸음 물러나서 어떤 관련이 있다고 할지라도 연환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환계는 이야기꾼들의 허구로, 이야기의 생동감과 흡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시도된 창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연의』 이전에 나온 원나라의 잡극 『연환기(連環記)』와 『삼국지평화』에서 바로 초선이란 인물이 나타났으며 아울러 성은 임(任)씨요 여포의 아내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창작한 사람을 나관중이라고는 볼 수 없다. 나관중은 오직 선인들의 기초 위에 가공과 개조를 통해 재창작한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만약 초선이 여포의 처로 등장했다면 후에 연환계를 실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나관중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왕윤의 부중에서 양육되었고 먼저 여포에게 바쳐졌다가 후에 동탁에게 헌납되는 줄거리를 만든다. 두 사람 사이에 위치한 그녀는 갖은 수단을 부린 끝에 마침내 여포의 손을 빌려 동탁을 죽여 버리는 식으로 묘사했다. 이 암투 중에 처한 초선의 기지는 영활하여 간흉을 제거하는 임무를 뚜렷하게 완성함으로써 만인의 칭송을 받을만한 하나의 주인공으로 부상한다.
요컨대 초선과 연환계는 결코 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다만 동탁 죽이기 사건의 줄거리를 좀 더 생동적이고 정채로우며 흡인력이 있도록 하기 위해 창작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창작 과정에서 희미한 역사적 근거를 최대한 찾아내어 활용한 것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독자들도 억지로 꾸며낸 것으로 보지 않고 이를 사실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왕윤의 동탁 암살 계획>
[여포전] 동탁은 늘 여포에게 중합(中閤-중문)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는 동탁의 시비(侍婢)와 사통(私通)하니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며 내심 불안해했다. 그에 앞서 사도 왕윤은 여포가 동향사람이고 무용이 뛰어난 인물이라 정중하게 대해 두었다. 나중에 여포는 왕윤을 방문하여 하마터면 동탁에게 죽을 뻔했던 상황을 말했다. 그 때, 왕윤은 복야 사손서와 동탁암살을 모의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여포에게 이 일을 고백하고 내응시키고자 했다. 여포가 "나와 동탁은 뭐라고 해도 부자관계인데."라 하니, 왕윤이 "당신의 성씨가 여(呂)이니 본래부터 혈연관계가 없소. 지금은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는 게 고작일 텐데, 부자(관계)나 말하면서 계시겠소?" 그리하여 여포는 그 계획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칼을 휘둘러 동탁을 죽였다. 이 일은 동탁전에 기술했다.

<동탁, 왕윤의 연환계에 죽다>
{ 동탁은 이숙이 여포를 끌어들인 공로에 비해 소홀히 대한 게 원인이 되어 이숙이 왕윤(王允)의 동탁 암살 계획에 참가하게 되다. 여포는 이숙(李肅)을 시켜 친병을 거느리고 액문(掖門)을 지키게 하다. 동탁이 미앙전(未央殿) 회합에 참가하여, 동탁이 여포를 부르나 죽임을 당하다. 서영, 동탁이 죽고 왕윤을 섬기다. }
[위키피디아] 192년 4월, 동탁(董卓)이 사도 왕윤(王允)의 연환계에 빠져 양아들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한 뒤 왕윤이 정권을 잡고 황제 헌제(獻帝)도 동탁의 꼭두각시의 역할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왕윤은 사관 채옹(蔡邕)을 동탁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처형시키는 등, 오만해지고 덕이 없는 행위를 하였다.왕윤, 채옹을 처형하는 등 오만해지고 덕이 없는 행위를 하다.
{ 명모호치(明眸皓齒)와 폐월수화(閉月羞花) : 미인을 두고 '침어낙안(沈魚落雁)'이나 '폐월수화(閉月羞花)' 또는 '명모호치(明眸皓齒)'라는 말이 시나 부 등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이는 명모(明眸)란 시원스럽고 맑은것, 호치(皓齒)는 하얗고 아름다운 이를 말한다. '명모호치(明眸皓齒)'는 미인의 조건이 되었다. 나중 시인들은 이 말을 빌어 미인을 뜻할때 '폐월수화(閉月羞花)' 또는 '명모호치(明眸皓齒)'라고 노래했다. }
[여포전] 왕윤은 여포를 분무장군(奮武將軍), 가절(假節)로 삼고 의례는 삼사(三司-삼공)에 비견되도록 하고 온후(溫侯)로 올려 봉하여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동탁열전] 당시에 왕윤이 여포와 공모하고 복야 僕射 사손서 士孫瑞를 포섭하여서 동탁을 처형하려 했다. 어떤 사람이 '여 呂'자를 베[布]에 쓰고서 등에 지고서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포입니다."라고 노래하였다. 동탁에게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었지만 동탁은 깨닫지 못하였다. 3년 4월에 황제가 병에 걸렸다가 새로 치유되자 백관이 미영전에 모였다. 동탁이 조복을 입고서 수레를 타고 가는데 말이 놀라 뛰더니 진흙탕에 빠져서 다시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동탁의 첩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동탁이 듣지 않고 곧 떠났다. 병사 들이 늘어서서 길가를 가득 채웠다. 자신이 사는 보루를 지나서 궁궐에 다다르는데 좌우로 보병과 기병이 호위하여 사방을 방비하고 여포 등에게 명령하여서 앞뒤를 경호하게 하였다. 왕윤이 사손서에게 몰래 그 일을 알려주고 스스로 조서를 쓰게 한 뒤에 여포에게 주었다. 기도위 이숙 李肅과 여포가 한 마음으로 용사 십여 인에게 호위 병사의 옷을 입혀서 북액문 北掖門 안에서 동탁을 기다리게 하였다. 동탁이 들어가려는데 말이 놀라며 가지 않으려 하니까 괴이하고 놀라워서 돌아가려 하였다. 여포가 계속 갈 것을 권하니 마침내 문에 들어섰다. 이숙이 극 戟으로 찔렀지만, 동탁이 속에 갑옷을 받쳐 입어서 극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팔만 다치고서 수레에서 떨어지면서 고개를 돌려 크게 소리쳤다.
"여포야! 어디 있느냐?!" 여포가 말했다. "조서를 받들어서 역적을 죽이러 왔다!"
동탁이 크게 욕했다. "어리석은 개새끼가 감히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여포가 기합을 넣어서 창으로 동탁을 찌르고서 병사들을 다그쳐서 어서 베게 하였다. 주부 전의 田儀와 동탁의 창고지기 두전 頭前이 그 시체를 애도하므로 여포가 죽였다. 말을 달려서 사서 赦書[사면의 문서]를 지니고서 궁궐 내외에 알렸다. 사졸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고 백성들이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장안에서 선비의 부인들은 금은보화를 팔아서 술과 고기를 마련해서 잔치를 하느라 거리를 가득 메웠다. 황보숭에게 명하여 동탁의 아우를 미오에서 공격하여서 그 어머니와 처자식을 죽이고 나머지도 멸족시켰다.
동탁의 시체를 길거리에 내놓았다. 날씨가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동탁이 평소 비만하므로 기름이 땅으로 흘렀다. 시체를 지키던 관리가 동탁의 배꼽에다가 불을 부쳤더니 새벽까지도 계속 탔는데 이렇게 며칠을 꺼지지 않았다. 원 씨 집안의 사람들이 동 씨 집안의 시체를 모아서 불에 태운 뒤에 그 재를 길에 뿌렸다. 미오성의 보물 창고에 황금이 2, 3만 근, 은이 8, 9만 근, 비단 같은 것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동탁전] (초평) 3년(192) 4월, 사도 왕윤, 상서복야 사손서, 동탁의 장수 여포가 공모하여 동탁을 살해했다.
<왕윤의 조정 장악>
[헌제기] 신사일, 동탁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 사도 왕윤을 녹상서사로 삼아 조정 정치를 총괄하게 했다. 장충(張种)을 사자로 보내 산동 지방을 위무했다.
[장료전] 동탁이 패망하자 군을 이끌고 여포에 속했고 기도위(騎都尉)로 승진했다.
[무제기] 여름 4월, 사도 왕윤(王允)이 여포와 함께 동탁을 죽였다.
[자치통감] 왕윤을 녹상서사로 하고, 여포를 분위장군으로 삼아 부절을 주고 의비삼사(즉 대례상의 대우를 삼공과 같이 하는 것)로 삼았으며, 온후(하내군 소속의 현)에 책봉하였고 조정의 정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왕윤의 채옹 살해>
[채옹(蔡邕) 백개(伯喈)] 192년 왕윤(王允)이 동탁을 죽였을 때 왕윤과 같은 자리에 있던 채옹은 동탁의 죽음을 탄식하였다. 이를 노엽게 여긴 왕윤은 채옹을 죽이려 했다. 채옹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한나라 역사를 저술할 것을 원하였고, 태위(大尉) 마일제(馬日磾)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하들도 채옹을 구제하려 했으나 왕윤은 듣지 않고 끝내 채옹을 죽게 했다.
[사승(謝承)의 후한서] 채옹(蔡邕)은 왕윤(王允)과 같은 자리에 있었는데 동탁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탄석(歎惜-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왕윤이 채옹을 책망하며 말했다,
“동탁은 나라의 대적(大賊)으로 임금을 살해하고 신하를 주륙하니 천지(天地)가 그를 돕지 않고 사람과 신령이 함께 그를 미워했소. 그대는 왕의 신하가 되어 대대로 한나라의 은혜를 받았소. 나라의 임금이 위난을 겪음에 일찍이 도과(倒戈-창을 거꾸로 잡음)하지 않았으면서 동탁이 천주(天誅-천벌)를 받으니 다시 탄식하고 애통해하는 것이오?”
곧바로 그를 붙잡아 정위(廷尉)에 넘겼다. 채옹은 왕윤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제가) 비록 불충하나 대의(大義)와 고금의 안위(安危)는 알고 있습니다. 귀로는 듣기 싫은 소리라도 입으로는 늘 놀려 대는 바인데 어찌 나라를 저버리고 동탁을 향했겠습니까? 미치광이 장님의 말이라 그릇됨과 우환이 들락거리긴 하나 원컨대 경수(黥首-이마에 묵으로 글자를 새김)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한사(漢史) 쓰기를 계속하도록 해 주십시오.” 공경들이 채옹의 재주를 아까워해 모두 함께 왕윤에게 간언했다. 왕윤이 말했다, “옛날 무제(武帝)는 사마천(司馬遷)을 죽이지 않아 방서(謗書-(무제를) 비방하는 글. 즉, [사기])를 써서 후대에 전해지게 했소. 이제 바야흐로 국조(國祚)가 중쇠(中衰-번창하다가 쇠망함)하여 융마(戎馬-군마)가 교외에 있는데 영신(佞臣-간신)으로 하여금 어린 주인의 좌우에서 집필(執筆)하도록 할 수는 없소. 뒤에 우리들은 모두 방의(謗議-비방하는 논의)를 받게 될 것이오.” 마침내 채옹을 죽였다.
[장번(張璠) 의 한기] 왕윤이 장차 채옹을 죽이려 하자 이때 명사(名士)들이 다수 그를 위해 말하니(변호하니) 왕윤이 후회하고 그만두려 했으나 채옹은 이미 죽은 뒤였다.
[후한서 황보숭 열전] 동탁이 주살되기에 이르자, 조정은 황보숭을 정서장군에 명하고, 다시 거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그해 가을에 태위에 임명되었으나, 겨울에 별동별이 떨어져 면직되었다.
< 대학자 채옹은 동탁의 시체 위에 엎드려 통곡했는가?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지 상식 백가지, 2005.12.30, 현암사)
삼국지연의』 제9회에서는 왕윤과 여포가 연합해 동탁을 죽이고 그 시체를 저자 거리에 내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동탁의 시체를 본 군사들이 배꼽에 불을 붙이고, 배꼽이 타면서 흘러내린 기름이 땅바닥을 흥건하게 적신다. 이 당시 왕윤을 비롯한 관료들은 크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동탁의 시신 위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는다.
이에 진노한 왕윤이 그 사람을 잡아와 보니 바로 대학자인 채옹(蔡邕)이었다. 왕윤이 노하여 꾸짖자 죄를 인정한 채옹이 “그저 한 때 중임을 받은 인정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곡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경월지형(黥刖之刑)1)을 받아서 『한사(漢史)』 속편 『후한기(後漢記)』를 편찬할 수 있기를 청했다. 이에 여러 관료들이 힘써 구제하려 했으나 왕윤이 허락하지 않고 채옹을 하옥시켜 목매어 죽이도록 명했다.
이 사건은 기본적인 면에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만, 약간의 문제가 있다. 채옹은 동탁에게 중용되면서 사흘 만에 시어사(侍御史), 지서어사(持書御史), 상서(尙書) 등의 삼대(三臺) 벼슬을 두루 역임했지만, 동탁이 피살된 뒤에 결코 시체 위에 엎드려서 크게 통곡한 적은 없었다. 『후한서ᆞ채옹전』을 살펴보면 ‘동탁이 죽음을 당함에, 채옹이 사도 왕윤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달리 말은 없었으나 탄식을 하면서 안색에 동요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탄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사서의 설명이 없다. 동탁의 청을 완강하게 사양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중도에 동탁으로부터 도망치려다가 성공하지 못했던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동탁을 타일렀으나 들어주지 않았는지?
그런데도 왕윤은 도리어 국적 동탁을 위해 마음 아파했다고 뒤집어씌우고는 나아가 ‘어찌 역적과 공모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죄명까지 추단해서 채옹을 죽였다. 사서에서는 비록 목을 매달아 죽였다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기록이 증명하듯 죽음의 속도가 매우 빨랐는데 후회한 왕윤이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미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보건대 옥중에서 죽음을 당한 건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삼국지ᆞ동탁전』에는 동탁이 피살된 뒤에 그의 주부(主簿)였던 전경(田景) 등 세 사람이 동탁의 시신 앞에 와서 애도하다가 모두 여포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기재하고 있다. 이에 나관중이 곧장 전경 무리의 사실을 채옹에게 접목해서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이런 식의 묘사는 일면 채옹이 동탁의 은혜에 대해 생명의 위험마저 돌보지 아니하고 보답함으로써 동탁이 진정으로 채옹의 지기였기에 울음으로 보답하고 죽음으로 몸을 바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서에 나타난 채옹의 탄식의 의미를 시신 위에 엎드려서 크게 울었다는 이야기로 엮었으니 이 또한 채옹을 고의로 죽인 왕윤의 죄를 벗겨주는 수법이 아닐 수 없다.
참혹한 정치투쟁 속에서 태도가 명쾌하지 못하거나 입장이 견고하지 않으면 곧바로 죄를 뒤집어쓰거나 피살될 우려가 큰 것인데, 어느 누가 시신 위에 엎드려 통곡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자신이 학자건 학자가 아니건 그리고 학자로서의 명망이 크면 클수록 그 영향력도 더욱 커진다는 사실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나관중이 채옹에게 경솔한 처신으로 난신을 섬겼다는 식으로 묘사한 것은 채옹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시신 위에 엎드려서 동탁의 죽음을 곡했다고 하는 줄거리로 채옹이 하옥되어 죽을 상황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남송(南宋)의 육유(陸游)가 눈먼 재주꾼이 연출하던 채옹의 이야기를 엮은 설창(說唱) 장면을 보고는, “죽은 자의 옳고 그름을 누가 관장한단 말인가? 온 동네 사람들이 채중랑의 이야기에 빠져 있네.”라고 개탄한 적이 있다고 한다. 분명한 점은 나관중이 묘사한 이 장면은 허구란 것이다. 지하의 채옹이 들었다면 아마도 강력하게 항의했을 것이다.
사서의 기록을 근거로 하자면 채옹이란 사람은 대학자일 뿐 아니라, 비교적 정직하면서도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영제 때에 환관이 전권을 휘두르는데다 당인들마저 서로 배척을 일삼는 상황을 보다 못한 그는 상소를 올려 조정의 득실을 논하고 환관을 탄핵했다. 이 때문에 투옥되어 유배까지 가기도 했다. 동탁이 전권을 농단하면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급기야 협박을 받고서야 출사했다. 출사 뒤에는 동탁에게 정당한 도리로 행할 것을 권하고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기도 했다.
『삼국지ᆞ동탁전』 배주에는 ‘채옹이 비록 동탁의 직접적인 임명을 받은 사람이나, 진심으로 한패거리가 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채옹이 동탁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탄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겨우 이 탄식이라고 하는 한 마디를 근거로 왕윤이 동탁과 함께 역적이 되었다는 죄명으로 엮어 죽이지 않고는 안 되는 골목으로 몰고 간 사실은 너무나 지나쳤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왕윤이 동탁을 죽인 것은 공을 세운 것이지만, 채옹을 죽인 것은 실수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채옹을 죽이려고 하는 왕윤에게 중지할 것을 권한 마일제(馬日磾)가 자신의 권유를 듣지 않는 왕윤을 보고 크게 탄식한 바 있다. “왕공(王允)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기강과 나라의 법전을 없애 버리고도 어찌 장구할 수 있겠는가?” 왕윤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바로 그 말이 적중했다. 오래지 않아 왕윤은 동탁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으니, 이는 아마도 왕윤이 채옹을 죽인 악업에 대한 보응(報應)이 아니겠는가?

<청주 황건적의 반란 > <연주자사 유대의 죽음>
{ 청주 황건적이 연주로 들어와 임성상 정주(鄭遂)(연주 임성국)를 죽이고 진로를 돌려 동평(연주 동평국)으로 들어오니 연주자사 유대가 공격하려 하자 포신이 굳게 수비하기를 간언하나 유대는 포신(鮑信)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건적과 싸우다 살해되다. }
[헌제기] 청주의 황건적이 동평국에서 연주자사(兗州刺史) 유대(劉岱)를 공격해 살해했다. 동군태수(東郡太守) 조조(曹操)가 수장현(壽張縣)에서 황건적을 크게 무찌르고 항복을 받았다.
[순욱전]다음 해 태조가 연주목(兗州牧)을 맡고, 후에 진동장군(鎭東將軍)이 되었는데, 순욱을 항상 사마로써 종군케 했다.
<진궁, 조조에게 연주목 제안>
[무제기] 청주 황건의 무리들 백만 명이 연주로 들어와 임성상(任城相-연주 임성국의 국상) 정수(鄭遂)를 죽이고 진로를 돌려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으로 들어왔다. 유대(劉岱)가 이를 공격하려 하자 포신(鮑信)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무리가 백만이라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사졸들은 투지가 없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적의 무리들이 서로 뒤따르는 것을 살펴보건대 군에 치중(輜重)이 없고 오로지 약탈로 조달하니, 군사들의 힘을 비축하여 먼저 굳게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저들이 싸우고자 해도 싸우지 못하고 또한 공격하려 해도 공격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세력이 필시 흩어질 것이니, 그 후 정예병을 뽑아 요해지를 점거하고 들이친다면 가히 격파할 수 있습니다.”
유대가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더불어 싸웠으나 과연 죽임을 당했다.
[세어] 유대가 죽고 난 후 진궁(陳宮)이 태조에게 말했다, “지금 주(州) 에 주인이 없고 왕명(王命)이 단절되었습니다. 저 진궁이 가서 주(州) 사람들을 설득케 하시고, 명부(明府-주목, 태수 등에 대한 존칭)께서는 뒤이어 와서 주목에 오르시어 천하를 거두는데 바탕으로 삼으십시오. 이는 패왕(霸王)의 업(業)입니다.” 진궁이 (연주의) 별가, 치중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었는데 주(州)에 주인이 없소. 조동군(曹東郡-동군태수 조조)은 명세지재(命世之才-세상을 바로 잡을 인재)이니 만약 그 분을 맞아들여 주목으로 삼는다면 필시 생민들을 평안케 할 것이오.” 포신 등이 또한 이를 옳다고 여겼다. 이에 포신은 주리(州吏-주의 관리) 만잠(萬潛) 등과 함께 동군으로 가서 태조를 맞이해 연주목을 겸하게 했다.
<정욱의 조조 출사>
[위서(魏書) 권 14 정욱(程昱)전] 유대가 황건적에게 살해되고 태조가 연주에 임했을 때, 정욱을 불렀다. 정욱이 장차 떠나려 하자, 그의 고향사람들이 말하길 "어찌 전후의 일이 이렇게 서로 배치되는가!
라고 했다. 정욱은 웃으며 응답하지 않았다. 태조가 그와 얘기를 나눠보고 크게 기뻐하며, 정욱에게 수장(壽張) 현령을 맡게 했다.

192년 여름

< 동군 전투 : 조조 • 포신 (勝) vs 황건 (敗) >

<포신의 죽음><조조의 황건적 격파>
[무제기] (192년 여름) 청주의 황건군 1백만 명이 연주로 침입하여 임성국의 재상 정수를 죽이고 방향을 바꾸어 동평(東平)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유대(劉岱)가 이를 공격하려 하자 포신(鮑信)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무리가 백만이라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사졸들은 투지가 없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적의 무리들이 서로 뒤따르는 것을 살펴보건대 군에 치중(輜重)이 없고 오로지 약탈로 조달하니, 군사들의 힘을 비축하여 먼저 굳게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저들이 싸우고자 해도 싸우지 못하고 또한 공격하려 해도 공격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세력이 필시 흩어질 것이니, 그 후 정예병을 뽑아 요해지를 점거하고 들이친다면 가히 격파할 수 있습니다.”
유대가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더불어 싸웠으나 과연 죽임을 당했다.
[세어] – 유대가 죽고 난 후 진궁(陳宮)이 태조에게 말했다,
“지금 주(州) 에 주인이 없고 왕명(王命)이 단절되었습니다. 저 진궁이 가서 주(州) 사람들을 설득케 하시고, 명부(明府-주목, 태수 등에 대한 존칭)께서는 뒤이어 와서 주목에 오르시어 천하를 거두는데 바탕으로 삼으십시오. 이는 패왕(霸王)의 업(業)입니다.”
진궁이 (연주의) 별가, 치중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었는데 주(州)에 주인이 없소. 조동군(曹東郡-동군태수 조조)은 명세지재(命世之才-세상을 바로 잡을 인재)이니 만약 그 분을 맞아들여 주목으로 삼는다면 필시 생민들을 평안케 할 것이오.”
포신 등이 또한 이를 옳다고 여겼다.
포신이 주의 관리(州吏) 만잠(萬潛) 등과 동군으로 가서 태조를 영접하고 연주목(연州牧)을 인수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태조는] 수장(壽張-동평국 수장현) 동쪽으로 가서 황건군을 공격했다. 포신은 전력을 다하여 싸우다 전사했지만, 가까스로 황건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위서] – 태조가 보기 천여 명을 이끌고 전지(戰地)를 시찰하다 갑자기 적의 둔영에 맞닥뜨려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죽은 자가 수백 명에 이르니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적이 뒤이어 전진했다.
황건은 도적이 된지 오래고 여러 차례 승세를 탔으므로 병사들이 모두 정예하고 사나웠다. 태조의 군사들은 구병(舊兵-오래된 군사)이 적고 신병(新兵)들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기에 전군이 모두 두려워했다. 태조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친히 장사(將士-장병)들을 순시하며 상벌을 분명히 권하니 군사들이 다시 기세를 떨쳤다. 그 기세를 이어 토격(討擊)하자 적들이 점차 꺾이어 물러났다. 이에 적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예전에 제남(濟 南)에서 신단(神壇)을 허물어뜨렸을 때는 그 도(道)가 중황태을(中黃太乙)과 같아 그대가 도를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다시 미혹(迷惑)되었구려. 한(漢)의 운수가 이미 다하고 황가(黃家)가 설 것이니, 하늘의 대운(大運)은 군(君-그대)의 재능과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태조가 격서(檄書)를 읽고는 이를 꾸짖으며 욕했다. 여러 차례 항복할 길을 열어 보여 주고는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을 설치했다. 밤낮으로 어울려 싸워, 싸울 때마다 번번이 포로로 사로잡히자 이에 적들이 퇴주(退走)했다.
포신의 상(喪)을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자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포신의 형상처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곡(哭)을 했다. 황건적을 추격해 제북(濟北-연주 제북국)에 도착하자 (황건적들이) 항복을 청했다.
[자치통감] 조서를 내려 경조사람 금상을 연주 자사로 삼았는데, 바야흐로 자기 부서로 가려고 할 즈음에 조조가 그를 맞아서 치니 금상은 원술에게로 달아났다.
<왕랑, 우금을 조조에게 천거하다>
[우금(于禁)전] 자는 문칙(文則)으로 연주 태산군 거평현 사람으로 포신을 섬기다가 무리를 이끌고 왕랑에게 소속되다. 왕랑은 조조에게 우금이 대장군을 맡을 능력이 된다고 추천하여 부하가 되다. 조조가 우금을 군사마로 삼고 군을 이끌고 서주(徐州)로 나아가 광위를 공격하다. 우금은 광위를 함락시키고 함진도위(陷陳都尉)에 임명되었다.
<필심, 조조의 별가로 임명되다>
[무제기] 당초 공이 연주목이 되었을 때 동평(東平)의 필심(畢諶)을 별가(別駕)로 삼았었다.
<이전, 조조에게 귀부하다>
??[이전전] 이전의 종부(從父)인 이건(李乾)에겐 영웅의 기세가 있었는데, 빈객 수천가를 합쳐 승씨(乘氏)에 두었다.
초평(初平) 중연, 그 무리들을 데리고 태조에게 귀부하여, 수장(壽張)에서 황건적으로 격파하고, 또한 원술을 격파하는데 따라가고 서주를 정벌에 참여하였다.

<여포, 왕윤에게 동탁의 부곡을 죽일것을 제안>
[여포전] 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인 후 양주인(涼州人)을 두려워하고 꺼리었고(※ 동탁은 양주 농서군 임조현 출신) 양주인 들도 모두 여포에 원한을 품었다. 이 때문에 이각(李傕)등이 마침내 서로 결탁한 뒤 돌아와 장안성(長安城)을 공격했다
[자치통감] 여포가 왕윤에게 동탁의 부곡들을 모두 죽이라고 권하자 왕윤이 말하였다. “이들은 죄가 없으니 할 수 없다.”
여포가 동탁의 재물을 공경과 장교에게 나누어주려고 하자 왕윤이 또 따르지 않았다. 왕윤은 평소 여포를 검객으로 대우했지만 여포는 자신의 공로를 짊어지고 스스로 자만과 자랑을 많이 하였는데, 이미 속으로 바라던 것을 잃게 되어 점차 서로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다.
<왕윤의 교만>
[자치통감] 왕윤은 성격이 강하고 모질지만 악한 것을 싫어하였는데, 처음에는 동탁을 두려워하였기에 의지를 꺾고 낮추었었다. 동탁이 이미 섬멸되었으므로 스스로 다시 환란이 없으리라 생각하였고, 자못 스스로 교만하게 구니 이 때문에 여러 아래 사람들이 그를 아주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왕윤이 처음에 사손서와 의논하여 특별히 조서를 내려 동탁의 부곡 사람들을 사면하기로 하고 나서 의심하여 중지하였다.
또 그 군대를 전부 해산할 것을 논의하는데 어떤 사람이 왕윤에게 건의하였다.
“양주사람은 평소 원소를 꺼리고 관동(함곡관의 동쪽, 관동의 군사를 의미)지역의 군대를 두려워하는데, 지금 만약 하루아침에 군사를 해산하고 관문(함곡관의 관문)을 열어놓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마다 스스로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황보숭을 장군으로 삼아서 그 무리를 거느리고 이를 기회로 섬(하남성 섬현)에 머무르도록 하여 그들을 안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윤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관동에서 의병을 일으키 ㄴ자는 모두 우리 무리인데, 지금 만약 험준한 요새를 막고 섬에 주둔하게 되면 비록 양주 사람들을 안심시키기는 하지만 관동 사람들의 마음을 의혹시킬 것이니 옳지 않소.”
<여포, 이숙에게 우보를 공격하게 하다><여포의 이숙 죽임>
[이각 곽사전] 여포는 이숙(李肅)을 시켜 섬(陝)으로 가게 하여 조명(詔命-황제의 명령.조령)으로 우보를 주살하려 했다. 우보 등이 역격해 이숙과 싸워 이숙이 홍농(弘農)으로 패주하자 여포가 이숙을 주살했다. (주21)
(21) [위서]魏書 – 우보는 겁이 많고 실수(失守)하니 스스로 편안해하지 못했다. 늘 병부(兵符)를 쥐고 부질(鈇鑕-도끼
;형구刑具)을 주변에 두어 스스로 강한 것처럼 보이고자 하였다. 손님을 만날 때는 먼저 상자(相者-관상가)를 시켜 그의 상을 보게 하고 반기(反氣)가 있으면 더불어 함께하지 않았다. 또 점을 쳐서 길흉을 알게 한 연후에 손님을 만났다. 중랑장 동월(董越)이 우보에게로 오자 우보가 그를 첨치게 하니 태하리상(兌下離上)의 점괘를 얻었다. 점쟁이가 말하길,
“불(火)이 쇠(金)를 이기니 바깥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을 도모하는 괘입니다.” 라 하자 즉시 동월을 죽였다. /
[헌제기]獻帝紀 – 점쟁이가 늘 동월에게 채찍을 맞으니 이 때문에 그에게 보복한 것이다.
<우보의 죽음>
[이각.곽사 열전] 여포는 이숙에게 섬현의 우보등을 토벌하도록 조서를 내려, 우보등은 이숙과 교전하였고, 이숙은 패하여 홍농으로 달아나 여포에게 주살되었다. 그 이후 우보의 군영 중에는 아무일도 없이 크게 놀랐으니, 우보는 두려워 이에 금은보화를 가지고 성을 넘어 도망갔다. 따르던 자들이 재물에 눈이 멀어 우보를 베었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헌제기] 우보의 장하(수하)인 월지月支의 호적아胡赤兒 등은 평소에 가보를 주며 과하게 대접하여, 스스로 20여개의 둥글넓적한 금과 크고 하얀 구슬 목걸이를 둘렀다. 호인들이 우보에게 말하길 “성북쪽에 이미 말이 있으니, 떠나는 것이 옳습니다.” 하며, 우보 허리에 끊을 묶어 매달아 성 아래로 넘겼으나, 땅에 1장을 못 미쳐 떨어트렸으니, 우보는 허리에 상처를 입어 행동하기가 어려웠기에, 여러 호인들이 그 금과 보석을 취하고, 머리를 잘라 장안으로 보냈다.

<양주 사람들의 불안감 증폭>
[자치통감] 이때 백성들 사이에 양주 사람들을 모두 죽여야만 한다는 말이 와전되자, 동탁에게 속했던 옛 장교들은 마침내 서로 두려워하며 움직여서 모두 병사를 끼고 스스로 지켰고, 또 서로에게 연락하였다.

<우보의 죽음과 이각 곽사의 사면 요청><왕윤의 사면 요청 거절>
[이각.곽사 열전] 이각, 곽사 등은 왕윤과 여포가 동탁을 죽였기에 병주并州 사람들에게 분노하여, 그 군대의 병주사람 남녀수백명을 모두 주살하였다. 우보는 이미 패하여 그 무리는 의지할 곳이 없어져서 각각 흩어지려하였다. 이각 등은 두려워서 이에 먼저 장안으로 사람을 보내, 사면받기를 구걸하였다. 왕윤은 1년내에 사면을 거듭하는 것은 없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각 등은 근심과 두려운 마음을 품는 것이 더해졌으나 해야할 방도를 몰랐다.

[구주춘추]九州春秋 – 이각 등이 섬(陝)현에 있을 때 모두 두려워 떨며 급히 군사를 끼고 스스로 지키려 했다. 호문재(胡文才), 양정수(楊整脩)는 모두 양주(涼州)의 대인으로 평소 사도 왕윤과 친하지 않았다. 이각이 배반하게 되자 왕윤은 이에 호문재, 양정수를 불러 동쪽으로 가서 (양주인을 모두 죽이려 한다는) 오해를 풀게 했는데, 거짓으로라도 온화한 안색을 꾸미지 않고 말하길,
“관동(關東)의 서자(鼠子-쥐새끼)들이 무엇을 하자는 것이오? 경들이 가서 불러오시오.”
이에 두 사람이 떠났으나 (왕윤의 청을 들어 오해를 풀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실은 군사를 불러 되돌아오려는 것이었다.

<가후의 계책에 의한 이각의 장안 진군 계획>
[위키피디아] 한편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번조(樊稠) 등은 동탁의 근거지였던 서량군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들은 왕윤에게 자신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줄 것을 요구하나 왕윤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모사 가후(賈詡)가 꾀를 내어 왕윤이 서량군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서량주 사람들은 모두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10만 명을 넘어섰고 동탁의 사위이자 중랑장 우보(牛輔)도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합류한다.

[이각 곽사 열전] 그때 무위현 사람 토로교위인 가후가 이각 군에 있었기에 말하기를
"듣자하니 장안 내의 의론이 양주(凉州)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한다는데, 여러분들이 군대를 버리고 홀로 가면, 곧 한 명의 정장이 라도 능히 여러분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군대를 통솔해 서쪽으로 가는 것 보다 못하니, 이에 장안을 공격하여 동공(동탁)의 원수를 앙갚음합시다. 일이 이루어진다면, 국가를 받들어 천하를 정벌하게 되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 때 달아나도 늦지 않지 않습니다."
이각등은 옳다고 여겨, 각각 상의 하여 말하기를 “경사는 우리들을 사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죽기로 결단하여야 한다. 만약 장안을 공격하여 이긴다면, 곧 천하를 얻을 것이며, 이기지 못한다면, 삼보의 아녀자와 재물을 노략질하여, 서쪽 고향으로 돌아가 목숨을 연명할 것이다” 그들은 그러하다고 여겨, 함께 동맹을 맺어 수천의 군사를 통솔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

[가후전] 동탁이 패망하고 우보 또한 죽자, 여러 사람들이 두려워 하니, 태위인 이각과 곽사, 장제(張濟) 등은 군대를 해산하고 무사히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가후가 말하길 "듣자하니 장안 내의 의론이 양주(凉州)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한다는데[동탁의 본래 직책이 양주자사였죠. 그래서 동탁의 군대에는 양주출신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군대를 버리고 홀로 가시면, 곧 한 명의 정장[亭長; 현 아래 행정단위로 향(鄕)―정(亭)―리(里)가 있는데, 그 정에 배치된 관리가 정장입니다. 주로 치안유지가 주 임무입니다]이 라도 여러분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군대를 통솔해 서쪽으로 향해 가는 게 나으니, 가는 곳마다 병사를 거두어 장안을 공격하면 동공(董公=동탁)의 원수를 갚게 되고, 다행히 일을 잘 해결하면 국가를 받들어 천하를 정벌하게 되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 때 달아나는 것도 늦지 않지 않습니다." 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각이 이에 서쪽으로 장안을 공격했다.
[동탁전] [이각은] 가후의 헌책(가후, 이각.곽사에게 장안을 공격하는 이점을 간하고 꾀를 내어 왕윤이 서량 사람 모두를 죽인다고 소문을 내게 하는 계책)을 채용하여 그 군세를 이끌고 서쪽(장안)으로 향했다. 가는 곳곳마다 병사를 긁어모아 장안에 도착할 즈음에는 군세가 10만 이상이 되어 있었다.

192년 5월
[헌제기] 정유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정미일, 정서장군 황보숭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헌제기] 동탁의 부곡장 이각(李傕),곽사(郭汜),번조(樊稠),장제(張濟) 등이 모반해 장안을 공격했다.
<이각 곽사의 진군과 왕윤의 대응>
[왕윤] 이각, 곽사, 번조, 장제 등이 모반해 장안으로 진군하니 왕윤은 이각의 기습 계획을 알아채고 호진(胡軫).서영(徐榮).양정(陽定) 등에게 이각을 영격할 것을 명하였다. 서영은 이각.곽사의 군대를 를 신풍(新豊)에서 영격하나 서영은 신풍에서 패배해 전사하였다.
[호진(胡軫)] 초평 3년(192년), 동탁이 암살되고 이각(李傕) • 곽사(郭汜) • 장제(張濟) • 번조(樊稠)가 군사를 이끌고 왕윤(王允) 등 동탁을 주살한 세력을 공격하러 가자 왕윤의 명령으로 양정(楊定) • 서영(徐榮)과 함께 이를 요격했다.
[호진(胡軫)] 호진과 양정은 왕윤의 방만한 태도와 꾸중에 불만을 품고 신풍(新豊)까지 진군하다가 배반하여 이각.곽사군에 투항하였다.
[이각.곽사 열전] 왕윤이 소식을 듣고, 이에 동탁의 옛 장수 호진胡軫, 서영徐榮을 신풍으로 보내 공격하였다. 서영은 전투중 사망했으며, 호진의 무리는 항복하였다. 이각은 길마다 병사를 거두어, 이에 장안에 이르자 그 무리가 십여만명이 되었으며, 더불어 동탁의 옛 부곡인 번조樊稠, 이몽李蒙등과 합하여 장안을 포위한다.

192년 6월
< 장안 전투 : 이각 • 곽사 (勝) vs 여포 (敗) >
[자치통감] 이각이 군대를 거두어 길을 따라가서 장안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10여만 명이 되었으며, 동탁의 옛 부곡인 번조. 이몽 등과 연합하여 장안성을 포위하였다.
< 중남산 전투 >
[위키피디아] 대치한 이각은 여포에게 패해 중남산으로 후퇴하고 여포는 이각을 쫓아 중남산으로 장료와 함께 들어간다. 중남산에는 화산 방면과 중남산 정상 방면으로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이각은 정상 방면으로 후퇴하고 중턱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진지에서 바위를 굴리면서 여포군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이 틈을 타 화산 방면에 매복을 하고 있던 곽사가 기습 공격을 하고 여포는 곽사를 상대하기 위해 산을 내려가지만 곽사도 이각과 마찬가지로 바위를 굴려 여포군을 주춤한다.
그리고 이각군이 다시 공격을 해 여포군은 혼란에 빠지고 여포가 이각군을 치러 가자 곽사군이 다시 공격을 하지만 여포의 부하 장료에 밀려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는다.

<이각.곽사의 장안성 점령>
[위키피디아] 한편 가후와 이각, 곽사가 중남산에서 여포를 잡고 있을 때 장제와 번조가 동탁의 잔당 이몽, 왕방과 내통해 여포의 부하 고순이 지키고 있던 장안성을 급습한다. 장제와 번조는 장안성을 지키던 장수였으므로 장안성의 약점을 알고 그곳을 이용해 들어간다. 장제는 이각의 부하 서황과 함께 장안성을 급습하고 고순이 이끌던 정예부대와 함진영도 밀리고 만다. 결국 여포는 장안성이 습격 받자 장안성으로 급히 돌아가려 하지만 이 틈을 노려 다시 이각과 곽사가 여포를 공격해 여포는 장안성의 왕윤에게 피신을 하라고 알리지만 왕윤은 거절하고 결국 여포는 장료와 고순 등의 몇몇 수하들만 이끌고 남양 태수 원술에게로 피신한다. 결국 왕윤은 물론 태상경 충불, 태복 노규, 대홍려 주환, 성문교위 최열, 월기교위 왕기 등의 산하들이 이각과 곽사에게 살해당하고 192년 6월에 장안성은 함락된다. 이때부터 황제는 이각과 곽사의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이각.곽사 열전] 성이 높아 공격이 불가능하여, 지키길 8일이 되니, 여포군의 수병(叟兵, 촉병을 말한다. 한대에는 촉을 수로 칭하였다.)이 내부에서 반란하여, 이각의 무리를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6월 무오일(1일)에 성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노략질하여, 죽은 사람만 만여명이 되었다. 위위衞尉 충불种拂등이 살해당했다. 여포는 전투에 패하여 밖으로 달아났다. 왕윤은 천자를 모시고 선평宣平성문 누樓위를 보호하였다.
[자치통감] 여포는 성 안에서 이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동탁의 머리를 말안장에 매고 밖으로 달아나 청쇄문( 문 주변에 청색 장색을 새겨 넣은 것은 천자가 있는 황궁에서만 가능했다.) 밖에서 말을 세우고 왕윤을 불러 함께 떠났다.
왕윤이 말하였다.
“만약 사직의 영혼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위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오. 만약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면 몸을 바쳐 죽겠습니다. 조정(황제를 말로 표현할 때 직접 황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보통 폐하라는 말을 쓰지만 조정 또는 국가 등의 용어로도 표현)이 어려서 나를 믿을 따름이니, 환난을 맞이하여 구차하게 벗어나는 것은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힘을 다하여 관동 지역의 여러 공들에게 사죄하고 삼가 국가를 염두에 두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싸우다 죽었다.
[헌제기] 무오일(1일), 장안이 함락되었다. 태상 충불, 태복 노욱(魯旭), 대홍려 주환(周奐) 성문교위 최열(崔烈), 월기교위 왕기(王頎)가 모두 싸우다 죽었다.
[동탁전] 이각 등은 동탁의 옛 부하인 번조, 이몽, 왕방 등과 합류하여 장안성을 포위했고 열흘만에 성이 떨어졌다. 여포와 성 안에서 싸웠고 여포는 패주했다.

<이각의 장안성 입성과 왕윤의 사망>
[이각 곽사전] 장번(張璠) 의 [한기]漢紀 – 이각, 곽사가 장안성으로 들어와 남궁 액문(掖門)에 주둔하며 태복 노규(魯馗), 대홍려 주환(周奐), 성문교위 최열(崔烈), 월기교위 왕기(王頎)를 죽였고 관원, 백성 중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사도 왕윤은 천자를 끼고 선평성문(宣平城門) 위로 올라가 군사를 피했는데, 이각 등이 성문 아래에서 배례하며 땅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이각 등에게 말했다,
“경은 위복(威福-위압과 복덕.또는 그 권한)을 지은 일도 없이 군사를 풀어 종횡하니 어찌하려는 것이오?”
이각 등이 말했다,
“동탁은 폐하께 충성했으나 아무 까닭없이 여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신 등은 동탁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할 뿐 감히 반역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청컨대 일이 끝나면 정위(廷尉)에게 나아가 죄를 받겠습니다.”
왕윤은 궁핍해지자 나가서 이각을 만났고, 이각은 왕윤과 처자, 종족 10여 명을 죽였다. 장안성의 남녀대소(男女大小) 중 눈물흘리며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왕윤은 자(字)가 자사(子師)로 태원(太原)군 기(祁)현 사람이다.
[이각.곽사 열전] 천하에 대사면을 내렸다. 2일, 이각, 곽사, 번조, 등은 모두 장군이 되었다. 마침내 선평문의 누를 포위하였고, 함께 표를 청하여 사도 왕윤이 나오니, “태사는 어떤죄가 있소?” 하고 물었다. 왕윤은 조용히(窮蹙) 내려와 수일 후에 죽음을 맞았다. 이각 등은 병사를 풀어 장안의 늙은이와 아이를 잡아다 모두 다 죽이니, 죽은 자가 어지러이 널려 있게 되다. 남궁(南宮)의 액문(掖門)에 주둔하며, 태복(太僕) 노규(魯?), 대홍려(大鴻?) 주환(周奐), 성문교위 최열(崔烈), 월기(越騎)교위 왕기(王?)를 죽이다. 사도 왕윤이 천자를 끼고 평성문(平城門)에 올라 병사를 물리라고 외치니, 이각 등이 성문 아래에서 절하며 땅에 엎드려 머리를 들다.
황제가 이각 등에게 말하길 "경은 위복(威福)을 만든 일이 없는데, 이에 병사를 풀어 제멋대로 설치니 무엇을 하려 하는가?" 라 하니, 이각 등이 "동탁은 폐하께 충성하였는데, 아무 까닭없이 여포에 살해되었습니다. 신 등은 동탁을 위해 그 무리들에게 보복하고자 하는 것이지, 감히 반역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청하옵건대, 일이 끝나면 정위(廷尉=사법관)에게 가서 죄를 받겠습니다." 라 하다. 왕윤은 (처지가) 궁핍하여 탈출하다 이각을 만나게 되니, 이각은 왕윤 및 그의 처자와 일가 10여 명을 주살하다.
[이각.곽사 열전] 이각 등은 동탁을 미郿현에서 장사를 지냈고, 아울러 동씨 집안의 시체를 태운 재를 모아 거둬 함께 하나의 관에 합해 넣어서 장례를 지냈다. 장례날 큰 바람과 비가 왔으며, 동탁의 묘에 천둥벼락이 쳐서 빗물이 묘에 들어가 그 관이 물에 떴다. 이각은 또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승진, 부서를 열었으며, 영사례교위領司隷校尉, 가절假節을 받았다. 곽사는 후장군後將軍, 번조는 우장군右將軍, 장제는 진동장군鎮東將軍이 되고 모두 열후에 봉해졌다. 이각, 곽사, 번조는 함께 조정을 장악했다. 장제는 출병하여 홍농에 주둔하였다.
[헌제기] 관리들과 백성들 중에서 죽은 자가 일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각 등이 모두 스스로 장군을 칭했다. 기미일,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각이 사예교위 황완을 살해했다. 갑자일, 이각이 사도 왕윤을 살해하고, 그 일족을 멸했다.
병자일, 전장군 조겸을 사도로 삼았다.
<조전의 왕윤 장사지냄>
[자치통감] 이각은 왕윤의 시체를 거리에 매달아놓아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는데, 감히 거두는 자가 없었지만 옛 부하관리였던 평릉현령인 경주사람 조전이 관직을 버리고 시체를 거두어 이를 장사지냈다.
처음에 왕윤이 동탁을 토벌한 공로를 독차지하였고, 사손서는 공로를 돌리고 열후를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포의 피신>
[무제기(조조전)] 동탁의 장수 이각(李傕), 곽사(郭汜) 등이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는 싸움에 져 동쪽으로 달아나 무관(武關)을 벗어났다. 이각 등이 조정을 농단했다.
[여포전] 여포가 끝까지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각 등은 장안을 침입했다. 동탁이 죽은 지 60일 만에 여포 또한 패배하여, (장료.고순등과) 수백 기를 이끌고 무관을 나와 원술에게 가고자 했다.
[장료전] 여포가 이각에게 패하자 여포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왕릉의 피신>
[왕릉전] 숙부 왕윤(王允)이 한(漢)나라에서 사도(司徒)가 되어 동탁(董卓)을 주살하자, 동탁의 부장(將) 이각(李傕)과 곽사(郭汜) 등이 동탁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침입해와 왕윤을 살해하고, 그의 집안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왕릉과 그의 형 왕신(王晨)은 당시 나이가 어렸는데, 성벽을 넘어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향리(鄉里)로 달아났다.
<가후의 열부 책봉 거절> <가후의 관리 선발 임용 업무 수락>
[가후전] 후에 가후를 좌풍익(左馮翊 ; 장안을 기준으로 그 북부 군(郡)을 좌풍익이라 하고 그 장관도 좌풍익이라 부릅니다. 장안을 포함한 경조윤(京兆尹), 그리고 다른 한쪽의 우부풍(右扶風)을 합쳐 삼보(三輔)라 부릅니다. 지금 경기도지사 정도)으로 삼고 이각 등은 그의 공을 생각해 제후에 봉하려 했는데, 가후가 말하길 "이것은 목숨을 구하기 위한 계책일 뿐인데 무슨 공이 있습니까!" 라 하며 완고히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또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삼으니 가후가 말하길 "상서복야는 관리들의 우두머리(師長)로 천하가 바라는 바이며, 제 명성은 무겁지 않아 남을 복종시키지 못합니다. 제가 영리(榮利)에 눈이 어둡게 하시면, 나라와 조정은 어찌 하시려 합니까!" 라 했다. 이에 가후를 상서(尙書)로 고쳐 배수하여 관리의 선발과 임용을 맡게 하자, 많은 것을 바로잡아 제어하니 이각 등이 그를 친근히 하면서도 꺼려했다.

< 여포의 유랑 >
[여포전]여포는 스스로 동탁을 죽여 원술의 원수를 갚았으므로(※ 제후연합군이 봉기하자 동탁이 원외, 원기 등 원씨 일가를 살육했으니 그 원수를 갚았다는 것) 그의 덕을 보고자 했으나 원술은 그의 반복(反覆-언행을 이리저리 고침)함을 꺼리어 여포를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한서 여포전] 여포가 무관(武關)을 빠져나와 남양(南陽)으로 달아나니 원술이 여포를 매우 후대하였다. 여포는 동탁을 죽인 공을 들어 군사들을 함부로 풀어 노략질하여 원술이 매우 근심하고 여포는 불안하여 다시 떠나서 장양(이때 하내태수였다) 에게 갔다. 이각 등이 현상 수배하여 여포를 찾자 장양 휘하의 제장들이 도모하려 하니, 얼마 뒤에 달아나 원소(袁紹)에게 의지하였다

[자치통감] 6월, 병자일(19일)에 전장군(전방을 책임지는 장군) 조겸을 사도로 삼았다.

192년 7월
<마일제, 태부 임명> <헌제의 이유 시중임명 거절>
[헌제기] 가을, 7월 경자일(13일)에 태위 마일제를 태부로 삼고 녹상서사를 겸하게 했다. 이각(李傕)이 이유를 시중(侍中)으로 천거하니 헌제(獻帝)는 조서를 내려 “이유는 전에 홍농왕의 낭중령을 지냈는데, 나의 형을 협박하여 죽였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자 이각은 이에 반박여 “이유는 동탁의 사주를 받아 자신의 본의로 한 것이니 아니니, 죄 없는 자를 벌할 수 없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의 이유>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된 후 초평 원년(190년)에, 원소(袁紹)의 숙부인 태부(太傅) 원외(袁隗)를 죽인 일, 연합군의 공격을 피해 낙양(洛陽)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천도한 일, 낙양에 불을 지른 일, 단독으로 동탁을 추격하던 조조(曹操)를 물리친 일이 모두 이유의 건의로 인해 실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왕윤(王允)이 보낸 초선(貂蟬) 때문에, 동탁과 여포(呂布) 사이에는 갈등이 깊어지고, 나중에는 동탁이 창을 들고 여포를 쫒아가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이때 이유는 초장왕(楚莊王)의 절영지연(絶纓之宴)의 이야기를 하며, "초선은 수많은 시녀중에 하나지만 여포는 하나 뿐인 장군이다"면서 초선을 여포에게 넘기라고 동탁에게 조언한다.
동탁은 그말이 맞다고 생각하였고, 여포에게 가는 것이 어떻느냐고 초선에게 물었는데, 초선이 칼을 들고 자진할 정도로 초선이 반대를 하여, 이유의 조언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동탁이 죽임을 당한 후 이유는 집안 하인들에게 붙잡혀 왕윤에 의해 처형되고 저자에 목이 내걸렸다. 정사에서는 이각이 가로막아 죽이지 못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유는 낙양 궁궐의 궁녀 중 한 명을 살해하고, 그 목에다 옥새를 걸어둔 다음 우물에 던져넣어, 반동탁 연합군이 옥새를 놓고 서로 싸우게도 만들었다.

192년 8월
<관동지역 안정을 위한 마일제 파견>
[헌제기] 마일제 및 태복 조기(趙岐)를 보내 지절을 갖고 천하를 위무하게 했다. 거기장군 황보숭을 태위로 삼았다.
사도 조겸을 파직했다.
[자치통감] 태부 마일제와 태복 조기에게 조서를 내려서 부절(목편 또는 죽편에 글을 쓰고 증인을 찍은 후에 두 쪽으로 쪼개어 한 조각은 상대자에 주고 다른 한 조각은 자기가 보관하였다가 후일에 서로 맞추어 증거로 삼는 것을 말한다) 에 의지하여 관동 (함곡관의 동쪽) 지역을 진정시키고 한무하도록 하였다.
[자치통감] 9월, 사도 조겸이 파직되었다.

192년 가을
<만총의 조조 출사>
[만총] 18세에 군의 독우에 임명되고 고평현령을 대행을 맡다가 유엽의 천거로 조조에게 발탁되다.
[만총전] 만총(滿寵)은 자가 백녕(伯寧)이고, 산양군(山陽) 창읍(昌邑) 사람이다. 열여덟 살 때, 군의 독우(督郵)가 되었다. 당시 군 안의 이삭(李朔) 등이 각각 사병을 끼고 평민들에게 해를 끼쳤다. 태수는 만총을 시켜 그들을 규찰하도록 했다. 이삭 등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다시는 약탈하지 않기로 했다. 만총은 고평현(高平)의 현령을 대행했다. 고평현 사람 장포(張苞)가 군의 도독(督郵)이 되자 탐욕스럽게 직책을 더럽히고 뇌물을 받아 행정을 어지럽혔다. 만총은 그가 관사에 있을 때를 이용하여 관리와 병졸들을 인솔하여 그를 붙잡아 범한 죄를 문책했고, 그날 중에 조사를 끝내자 그대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태조(太祖)가 연주를 지배하게 되자 만총을 불러서 종사(從事)로 삼았다.
<조조, 여건을 불러 종사로 삼다>
?? [여건전] 여건(呂虔)은 자가 자각(子恪)이고 임군 사람이다. 조조가 연주에 있을 때, 여건이 담력과 지모가 있다는 것을 듣고 조조가 종사로 삼아 기병을 인솔하여 호륙湖陸을 지키도록 했다.
[삼국지집해] 군국지 郡國志 : 연주 산양군山陽郡 호륙이다. 일통지 一統志 : 호륙의 옛 성은, 지금의 산동山東 제녕주濟甯州 어태현魚台縣 동남쪽 60 리다.

192년 9월
<이각 등의 열후 임명> <장제의 홍농 주둔>
[헌제기] 이각이 스스로 거기장군이 되었으며, 곽사는 후장군이, 번조는 우장군이, 장제는 진동장군(鎭東將軍)이 되었다. 장제가 [장안을] 나가서 홍농군에 주둔했다. 갑신일, 사공 순우가를 사도로, 광록대부 양표를 사공으로 삼았으며, 둘이 함께 녹상서사를 겸하게 했다.
[자치통감] 9월에 이각을 거기장군과 영사예교위(영직이다. 직접 관부에 가지 않고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이다. 여기서는 사예교위라는 수도 지역의 치안 책임자의 업무를 관장하게 하는 것이다 )로 삼고, 가절을 주었고, 곽사를 후장군으로 삼고, 번조를 우장군으로 삼고, 장제를 표기장군으로 삼아서 모두 열후로 책봉하였다. (이각은 지후, 곽사는 미양후, 번조는 만년후, 장제는 평양후) 이각, 곽사, 번조는 조정의 정사를 관리하였고, 장제는 나아가 홍농에 주둔하였다.
[후한서 양표열전] 순우가(淳于嘉) 를 대신해서 사공(司空)이 되었으나 지진으로 면직되었다.
[자치통감] 9월 갑신일(29일)에 사공 순우가를 사도로 삼고, 광록대부 양표를 사공과 녹상서사로 삼았다.

<마등과 한수의 장안 진군> <마등의 미현 주둔>
[자치통감] 애초에 동탁이 입관하여 한수와 마등에게 함께 산동 지역을 도모하자고 설득하자 한수와 마등이 무리를 인솔하고 장안으로 왔다. 마침 동탁이 죽자, 이각 등은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삼고 금성(감숙성 난주시)으로 돌려보냈으며,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미(섬서성 미현)로 보내어 주둔하게 하였다.
[마초전] 초평 3년(192), 한수(漢遂)와 마등(馬騰)은 군세를 이끌고 장안으로 향했다. 한 조정은 한수를 진서장군에 임명하여 양주의 금성으로 귀환시켰고, 마등을 정서장군으로 임명하여 미현(郿)에 주둔시켰다.
[한수]초평 3년(192년) 한수와 마등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는 동탁은 여포(呂布)에게 살해당하고 이각(李?)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이각은 한수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마등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임명하고 서량으로 돌려보냈다.

192년 10월
<유표의 조정 공물 헌상> <유표 형주목 즉위>
[유표전] (192년 6월) 이각과 곽사가 장안을 침입한 다음, 유표와 손을 잡아 자기편으로 삼기를 원했다. 그래서 (192년 10월) 유표를 진남장군 형주목으로 임명하며 성무후로 봉했고, 절을 수여했다.
[유표열전(후한서)] 이각 등이 장안에 들어왔을 때에 이르러 겨울 유표가 사절을 보내 공품을 바쳤다. 이각은 유표를 진남장군, 형주목으로 삼고 성무후, 가절로 봉해 자신의 후원으로 삼고자 하였다.

192년 겨울
<조조 청주병 획득> < 조조, 원소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계기 마련>
[위서] 여러 차례 항복할 길을 열어 보여 주고는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을 설치했다. 밤낮으로 어울려 싸워, 싸울 때마다 번번이 포로로 사로잡히자 이에 적들이 퇴주(退走)했다.포신의 상(喪)을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자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포신의 형상처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곡(哭)을 했다. 황건적을 추격해 제북(濟北-연주 제북국)에 도착하자 (황건적들이) 항복을 청했다.
[무제기] 겨울, 항복해 온 병졸 30여 만과 남녀 백여만 명 중에서 정예(精銳)한 자를 거두어 청주병(靑州兵)이라 불렀다. 조조는 황건적을 흡수해 기반을 얻어 이때부터 차츰 원소의 영향에서 벗어나 난세의 군웅으로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되다


192년 12월
[헌제기] 태위 황보숭을 면직했다. 광록대부 주충(周忠)을 태위로 삼고, 참녹상서사(녹상서사의 업무에 참여하는 직책, 참록상서사는 상서대의 업무를 관장하는 사람이 두 명, 혹은 세 명일 경우에 주는 직함)를 겸하게 했다.

<권력을 잡은 이각에게 줄을 대는 조조>
<모개의 조조 출사>
[모개전] 모개毛玠는 자가 효선(孝先)이고, 진류군 평구현 사람이다. 어려서 현리가 되었는데, 청렴함과 공정함으로 해서 칭송받았다. 전란을 피해 형주로 가려했는데, 도착하기도 전에 유표가 정치적 명령에 밝지 못하다는 것을 듣고 곧 노양으로 갔다. 조조는 연주에서 모개를 물러 치중종사로 삼았다.
[자치통감] (192년의 일로 기술) 조조는 진류사람 모개를 벽소하여 치중종사로 삼았다.
<모개의 천하 패업을 이루는 일에 대한 조언> <모개판 융중대>
※ 자치통감은 192년 12월 에 모개와 동소의 일을 기재
[모개전] 모개가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는 붕괴되고, 나라의 주인(헌제)은 수도 밖으로 전전하고 있으며, 백성들은 일을 하지 않고 굶주림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공가(公家, 개인 집을 사가라고 한다면 관부를 공가라고 부른다) 에는 1년을 넘길 만한 식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 백성은 편안히 한 장소에 붙어 있을 뜻이 없으니 혼란함이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지금 원소와 유표는 비록 백성들은 많고 세력은 강성할지라도 모두 천하를 다스릴 만한 원대한 생각이 없으며, 기초와 근본조차도 세울 수 없습니다.
무릇 전쟁이란 정의를 갖고 있는 자가 승리하고, 재력으로 살고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자치통감 해설 : <주역>의 대전에서 이르기를 ‘무엇으로 사람을 모을 것인가? 재물이다. 무엇으로 자리를 지킬 것인 것? 어짊이다.’라고 하였다.)
응당 천자를 받들어야만 불충한 신하들을 호령하고(정치전략), 농경(밭 갈고 곡식 심는 일)에 힘쓰고(경제전략), 군수물자를 축적하십시오.(군사전략) 이와 같이 한다면 패왕의 공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건의를 공경하게 받아들이고, 막부의 공조로 임명했다.

<동소의 장양에 붙잡힘>
[동소전] 동소의 아우 동방(董訪)은 장막(張邈)의 막하에 있었다. 장막과 원소 사이에 틈이 생기자 원소는 참언을 듣고서 동소를 처형하려고 상주했다. 동소는 한 헌제를 뵙기 위해 하내(河內)까지 갔는데, 장양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장양은 위군태수의 관인과 인수를 돌려주었고, 동소는 다시 기도위(騎都尉)에 제수되었다.
<동소, 장양을 설득하여 조조와 연합하게 하다>
[동소전] 그 당시 태조는 연주(兗州)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사신을 장양에게 파견하여 서쪽 장안에 이르는 길을 잠시만 빌려 주도록 요청했으나, 장양은 듣지 않았다. 동소가 장양에게 말했다.
“원소와 태조가 비록 한 집처럼 되었지만, 그런 형세는 오랫동안 모일 수 없습니다. 태조는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실제로는 천하의 영웅이므로 당신은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그와 교분을 맺어야 합니다. 하물며, 지금은 때마침 인연(사자를 통하여 상주문을 장안에 올리려는 조조의 일)도 있으니, 마땅히 길을 통하게 하여 천자를 뵙게 하고, 아울러 천자에게 표를 올려 추천해야 합니다. 만일 일이 성사되면, 영원토록 태조와 깊은 정분(情分)이 있게 될 겁니다.”
<장양, 상소하여 조조를 추천하다>
[동소전] 장양은 태조가 상주한 사자를 통과하게 하고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태조를 추천했다. 동소는 태조를 위해 글을 써서 장안의 장수인 이각과 곽사 등에게 보내고, 그들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은근하게 뜻에 이르게 했다.
[이중톈 삼국지강의] 동소는 자기가 돈을 내서 조조의 명의로 이각과 곽사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이때부터 조조와 조정 사이에 왕래가 생깁니다. 헌제 초평 3년(192)의 일입니다.
<종요의 조조 옹호 설득>
[종요(鍾繇)전] 또 삼부(三府)에 초빙되었고, 정위정(廷尉正)ㆍ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임명되었다. 이 당시 한제(漢帝 ; 獻帝)는 장안에 있었는데, 이각(李 )과 곽사(郭 ) 등이 장안성 안에서 난을 일으켰으므로 관동과는 단절되었다. 조조가 연주목으로 임명되어 있을 때, 사신을 파견하여 헌제에서 글을 올리자, 이각과 곽사 등은 "관동(關東)에서 스스로 천자를 세우려 하고 있다. 지금 조조가 사자를 보낸 것은 사명을 다한 것이지만, 그의 본심이 매우 진실된 것은 아니다." 라고 하며 그들은 조조가 파견한 사신을 억류하여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 때 종요가 이각과 곽사를 찾아가 이렇게 설득했다.
“지금 영웅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각자 군명(軍命)을 빙자하여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오직 조연주(曹兗州)만은 왕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그 충성스러움을 거역하신다면, 장래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각과 곽사는 종요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하게 답변을 대신했다.
( 자치통감 해설 : 당시 동소는 하내에 있었고 종요는 장안에 있었기 때문에 조조가 이들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조조의 일에 협조한 것은 아마 조조의 출중한 능력을 소문으로 듣고 각각 장래를 생각하고 그랬던 것 같다. )
이로부터 태조는 드디어 사신을 보내 황제의 명령을 받을 수가 있었다. 태조는 이미 순욱으로부터 여러 차례 종요에 대한 말을 들었고, 또 그가 이각과 곽사를 설득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대할 수가 있었다.
《사승의 후한서》질병에서 벗아난 종요는 이어서 삼부(三府)에 부름을 받아 정위정(廷尉正),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당시에 한의 황제는 서경(西京)에 있다가 이각과 곽사의 난을 만났기 때문에 관동지역과 단절되어 있었다. 태조(조조)는 연주목(兗州牧)으로 있던 조조는 사신을 파견하여 글을 올렸다.

<주준의 이각 토벌 계획>< 가후의 책략에 의한 주준 소환>
[후한서 주준열전] 동탁이 주살됨에 이르러 이각•곽사은 난을 일으켰다. 주준은 그 때 아직 중모에 있었지만, 도겸은 주준이 명신名臣으로 수많은 전공이 있어 큰일을 맡겨야 한다고 하며, 호걸들과 주준을 추대해 태사太師로 하여 격문을 보내, 한마음으로 이각 등을 토벌하고 천자를 봉영하려고 했다.
한편 이각은 태위 주충•상서 가후의 책략을 이용해, 주준을 소환해 입조케 하려 했다. 부하들은 모두 관중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 도겸에 응하도록 했다. 주준은 "주군이 신하를 부른다면 의로서 마차의 마중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천자天子의 말씀이다. 이각•곽사는 애송이고, 번조는 범아에 불과하다. 그밖에 뭔가 깊은 음모가 있는 것도 아닐 터. 또 그들의 세력은 서로 경쟁하고 있어 변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내가 그 틈을 탄다면 큰일을 할 수 있다."라며 도겸의 제안을 거절했고 이각의 소환에 따라 다시 태복이 되었다. 도겸 등은 결국 계획을 중단했다.
[자치통감] 서주자사 도겸이 여러 태수들과 함께 글을 올려 주준을 태사로 삼도록 추천하고, 이어서 격문을 목백(지방관을 통칭하는 말. 목은 주목 즉 자사이고 백은 군의 태수이다.)에게 보내어 이각 등을 함께 토벌하고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려고 하였다. 마침 이각이 태위 주충과 상서 가후의 대책을 채용하여 주준을 징소하여 입조하도록 하였는데, 주준은 이에 도겸의 건의를 사절하고 징소에 응해 다시 태복이 되었다.

<원소, 계교의 승리 후 공손찬을 공격>
??월[공손찬열전] 공손찬은 전투에 패해 계로 퇴각하였다. 원소는 장수 최거업에게 군세 수만을 통솔케 하여 고안을 포위하게 하였으나,(혜동은 말한다. 고안은 현의 이름으로, 탁군에 속한다.) 함락치 못하고 군세를 돌려 남쪽으로 귀환하였다. 공손찬은 보병과 기병 삼만을 이끌고 추격, 거마 수에서 그 군세를 대파, 적 칠팔천을 죽였다. 승리에 틈타 남진, 각 군현을 공략하면서 평원까지 이르렀고, 이후 청주자사 전개를 파견하여 제(제나라?) 땅을 점거시켰다.
[공손찬열전] 원소는 다시금 군세 수만을 보내어 전개와 2년에 걸쳐 전투를 벌였으나, 군량이 다하여 사졸은 지쳤으며, 서로 백성을 약탈하였으므로 들이 황폐해져 풀한 포기 남지 않았다. 원소는 이후 자식 원담을 청주자사로 삼아 파견하였으나, 전개는 그와 싸워 패하여 귀환하였다.

<유비의 공손찬에 의지>
[무제기] 원술이 원소와 서로 틈이 벌어지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高唐-청주 평원군 고당현)에, 선경(單經)을 평원(平原-평원군 평원현)에, 도겸을 발간(發幹-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만나 이를 공격해 모두 격파했다.
[원소전] 유비•선경•도겸을 평원군, 동군 일대에서 격파하였다.
[원술열전] 공손찬이 유비劉備를 부려 원술과 의논한 뒤 함께 원소를 핍박하게 하니, 원소는 조조曹操와 더불어 공격하여 함께 이를 물리쳤다.
<원소, 공손찬군을 유주로 몰아내다> <발해 전투 : 원소 vs 공손찬> (192년 겨울 ~ 193년 초)
[자치통감] 공손찬이 다시 군사를 보내 원소를 공격하고 용주(산동성 평원현)에 으르렀는데, 원소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공손찬이 마침내 유주로 돌아가서 다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후한서 원소열전] 3년, 공손찬이 또 병사를 보내 용주에 이르러 도전하자 원소는 다시 이를 공격하여 깨트렸다. 공손찬은 마침내 유주(幽州)로 돌아가 감히 다시는 나오지 못하였다.

<조운의 유비에의 종군>
[선주전] (192년, 고당에서) 적에게 격파당해 중랑장 공손찬이 있는 곳으로 도망했을 때, 공손찬은 상표해서 [선주를] 별부사마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와 함께 기주목 원소에게 대항하게 했다.
[ 촉서(蜀書) 권36 조운전(趙雲傳)]조운의 자(字)는 자룡(子龍)이고, 상산(常山)군 진정(眞定)현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公孫瓚)에게 속했는데, 공손찬이 선주(先主=유비)를 보내 전해(田楷; 청주자사)를 위해 원소에 항거케 하였는데, 조운이 마침내 따라다니면서 선주의 주기(主騎)가 되었다.
[선주전]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자, 선주는 (193년 즈음) 전해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제(齊)에 주둔했다.
<조운, 유비와의 작별> 193~194년 사이 [진정조씨족보]
[조운별전] 이때 조운의 형님이 상을 당하자 공손찬의 양해를 얻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굳게 손을 잡으며 헤어지려 하자, 조운은 선주에게 말했다. “끝내 덕(德)을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

<원소의 원유 양주자사 임명, 원유의 죽음>
[자치통감] 양주자사인 여남사람 진온이 죽자, 원소는 원유에게 양주를 관장하도록 하였는데, 원술이 그를 격파하자 원유는 달아나 패(안휘성 회계현)에 이르렀다가,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원술은 하비사람 진우를 양주자자로 삼았다.
[원술전] [주 : 신 송지가 『영웅기』를 살펴보니 「진온의 자는 원제(元悌)이며 여남(汝南)군 사람이다. 앞서서 양자자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죽었다. 원소가 (종형) 원유을 보내 그 주에 남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원유은 원술에게) 패배하여 흩어진 뒤 패국(沛國)으로 달아났는데,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원술이 다시 진우(陳瑀)를 기용해 양주자사로 삼았다.
이와 같이, 진온이 원술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니, 본전(本傳=원술전)과는 같지 않다]

[영웅기] 그 뒤 원소는 원유를 양주(揚州)자사로 삼았는데 원술에게 패했다.
[원유(袁遺)] 자는 백업(伯業)이다. 예주(豫州) 여남군 여양 사람으로 종제 원소(袁紹)에 의하여 양주자사에 임명되나 임지인 산양(山陽)으로 가던 중 종제 원술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여 도주하던 중 부하 병사에게 살해당했다.
[문제(文帝-조비)의 전론(典論)] 태조가 칭찬하기를 ‘장대(長大)하면서 능히 학문에 부지런한 자는 오직 나와 원백업(袁伯業) 뿐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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