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서 Rexhistoria에 있는 "한문 정사"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은 어디까지나 진서 종실열전의 일부로 사실상 진서 종실열전의 반 정도밖에 번역하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한문 정사에 있는 문서 자체는 완역한 것은 사실이라서 "날림완역"이라 칭합니다.

 

*본문은 수많은 의역과 억측을 통한 번역 등이 난무하는 날림완역본으로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이중 특히나 오역이 확실하다 싶은 부분들은 빨간색으로 표기했습니다. 이 부분은 고수분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安平獻王孚字叔達,宣帝次弟也。初,孚長兄朗字伯達,宣帝字仲達,孚弟馗字季達,恂字顯達,進字惠達,通字雅達,敏字幼達,俱知名,故時號「八達」焉。孚溫厚廉讓,博涉經史。漢末喪亂,與兄弟處危亡之中,簞食瓢,而披閱不倦。性通恕,以貞白自立,未嘗有怨於人。


안평헌왕(安平獻王사마부(司馬)의 자()는 숙달(叔達)이다선제(宣帝-사마의)의 차제(次弟-다음번째 동생)이다본래 사마부()의 장형(長兄-맏형사마랑()의 자()는 백달(伯達), 선제(宣帝-사마의)의 자는 중달(仲達)이다사마부()의 동생 사마규()의 자()는 계달(季達), 사마준()의 자()는 현달(顯達), 사마진()의 자()는 혜달(惠達), 사마통()의 자()는 아달(雅達), 사마민()의 자()는 유달(幼達)이다모두 함께 이름을 알리니그러므로팔달(八達)이라 불리었다사마부()는 온후(溫厚)하고 염량(廉讓-청렴하고 양보함)하니경사(經史-경서와 사기)에 박섭(博涉-널리 사물을 견문함)하였다후한말(漢末)의 상란(喪亂)에 형제들과 거주하는 곳이 위망(危亡)하던 중,  소쿠리에서 먹고 바가지로부터 마셨지만 능히 파헤치고 읽으며 게으르지가 않았다성품이 어질고 인자하니이로써 곧고 결백해여 자립(自立)하였고타인을 원망한 적이 없었다.


陳留殷武有名於海,嘗罹罪譴,孚往省之,遂與同處分食,談者稱焉

 

진류(陳留)의 은무(殷武)가 해내(海內)에서 이름을 떨쳤는데일찍히 근심하여 잘못을 깨닫자사마부()를 보러 떠났다마침내 (은무와 사마부가)한자리에 모여서 더불어 나누어 먹으니담자(談者)들이 (이를칭찬하였다고 한다.

 

魏陳思王植有俊才,選官屬,以孚文學掾。植負才陵物,孚每切諫,初不合意,後乃謝之。遷太子中庶子。


()의 진사왕(陳思王조식()이 재주가 있었는데청렴한 관속(官屬)들만 가리니이로써 사마부()를 문학연(文學掾)으로 삼았다조식은 재주에 힘쓰지 않고재물을 가볍게 여겼는데사마부는 매번 절간(切諫-간절히 간함)하였다. (그러므로처음에는 뜻이 맞지 아니하였으나후에 도리어 (조식이사과(혹은 화해?)하였다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관직을옮겼다.


魏武帝崩,太子號哭過甚,孚諫曰:「大行晏駕,天下恃殿下命。當上宗廟,下萬國,奈何效匹夫之孝乎!」

 

위무제(魏武帝-조조)가 붕어()하자태자(太子-조비)과하게 울부짖으며 곡하자사마부()가 간하며 말하였다:군왕께서 안가(晏駕-임금의 죽음을 뜻함)하기고천하(天下)는 전하의 목숨()에 의지하고 있습니다마땅히 위로는 종묘(宗廟)를 위하여 하며아래로는 만국(萬國)을 위하여야 하는데어찌하여 필부(匹夫)의 효()를 본받고 계십니까

 

太子良久乃止,曰:「卿言是也。」


태자가 오래 있다가 마침내 (곡을그치고말하였다:경이 말하는 것이 옳다.

 

時群臣初聞帝崩,相聚號哭,無復行列。


이 때군신(群臣)은 처음으로 황제(-조조)가 붕어했다고 듣자서로 모여서 호곡(號哭)하였는데행렬(行列)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자치통감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표현함.)


孚厲聲於朝曰:「今大行晏駕,天下震動,當早拜嗣君,以海內,而但哭邪!」孚與書和洽罷群臣,備禁衞,具喪事,奉太子以即位,是文帝

 

사마부()가 엄한 소리로 조정()에서 말하였다이제 왕께서 안가하셔서천하가 진동하고 있으니서둘러 사군(嗣君-대를 이어 임금이 될 사람)을 찾아뵙고 내해(海內)를 진압하여야 하는데 단지 곡이나 하고 있는가!사마부()와 상서(화흠(和洽)이 신하의 무리를 내쫓고금위(禁衞)의 일을 지키자상사(喪事)를 수습할 수 있었다이로써 태자(太子-조비)가 즉위(即位)할 수 있었고이에 문제(文帝)가 되었다.

 

時當選侍中、常侍等官,太子左右舊人頗諷諭主者,便欲就用,不調餘人。孚曰:「雖有堯舜,必有稷契。今嗣君新立,當進用海英賢,猶患不得,如何欲因際會自相薦邪!官失其任,得者亦不足貴。」遂更他選。


이때시중(侍中)과 상시(常侍)가 사람을 선발하는데태자(太子)의 좌우(左右)에 있던 옛 사람과 주인에게 편파적인 풍유(諷諭)를 하는 사람(※아첨하는 사람을 뜻하는 듯자치통감에서는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사람”으로 서술함.)이라면 쓰려고 하고다른 사람을 쓰고자 하지 아니하였다사마부가 말하였다비록 요순(堯舜)이라 하더라도직설(稷契-요와 순의 신하 직과 설을 뜻함.)이 반드시 필요했었습니다지금 사군(嗣君)께서 새로 즉위하셨는데마땅히 해내의 영현(英賢-뛰어나고 슬기로운 사람.)의 쓰셔야지걱정()만 하는 것은 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어찌하여 다시 만난 것으로 이용하여 스스로 서로를 천거()하려고 하십니까!  관료가 맡은 임무을 해네지 못한다면얻었다고 하더라도 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마침내 개선하여 다르게 선발하였다.


轉孚中書、給事常侍,宿省內,除黃門侍,加騎都尉

 

사마부()는 전임되어 중서랑(中書), 급사상시(給事常侍)를 맡았는데성내(省內-궁궐 안을 뜻하는 듯)에서 오래 일하자 황문시랑(黃門侍)으로 임명되고 기도위(騎都尉)를 더했다.

 

時孫權稱藩,請送任子,當遣前將軍于禁還,久而不至。天子以問孚,孚曰:「先王設九服之制,誠以要荒難以德懷,不以諸夏禮責也。陛下承,遠人率貢。權雖未送任子,于禁不至,猶宜以寬待之。畜養士馬,以觀其變。不可以嫌疑責讓,恐傷懷遠之義。自孫策至權,奕世相繼,惟與弱,不在一禁。禁之未至,當有他故耳。」後禁至,果以疾遲留,而任子竟不至。大軍臨江,責其違言,吳不貢獻。


이때손권(孫權)이 번(-꼬붕)을 칭하였는데아들을 (인질로보낼 것을 청하였다마땅히 전장군(前將軍우금(于禁)이 돌아왔어야 했는데오랬동안 도달하지 아니하였다이로써 천자(天子-조비)가 사마부()에게 묻자사마부()가 말하였다선왕(-조조)께서 구복의 제도를 설치하였는데정말로 황난(難以)이 벌어지자 덕을 품으실 수 있으셨으나 이로써 제하(諸夏-중국의 본토를 일컬음.)의 예도를 책망한 것은 아닙니다폐하께서는 승서(-선대의 사업을 이음.)하셔서 먼 사람(-손권)을 조공을 바치게 하며 거느립니다손권()이 비록 아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우금(于禁)이 오지 아니하였더라도오히려 마땅히 너그럽게 대접하셔야 합니다가축을 길러서 군사와 말을 갖추는 것처럼변화를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이로써 혐의(嫌疑-꺼리고 싫어함)를 책양(責讓-꾸짖음)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다치는 것을 두려워하니 멀수록 위로하며 품어야 합니다스스로 손책(孫策)의 정도에 이른게 손권()이며큰 세상(世相-세태)을 이으고 있습니다생각하는 것에 강함과 약함이 더불어 있고우금같은 자는 세상에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우금이 도착하지 않은데에는 마땅히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이후 우금이 도착하였는데과연 병으로 머물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러나 (손권이아들은 마침내 보내지 아니하였다대군(大軍)을 임강(臨江)에 보내고약속한 바를 어긴 것을 책망하니()는 드디어 조공을 바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後出河內典農,賜爵關侯,轉河太守


이후 하내(河內)의 전농(典農)이 되었으며관직을 주어 관내후(關內侯)로 삼고청하태수(河太守)가 되었다.


初,魏文帝置度支書,專掌軍國支計,朝議以征討未息,動須節量。及明帝嗣位,欲用孚,問左右曰:「有兄風不?」云:「似兄。」天子曰:「吾得司馬懿二人,復何憂哉!」轉度支書。孚以擒敵制勝,宜有備預。


처음에위의 문제(文帝-조비)가 도지상서(度支)를 뒀는데오로지 지계(支計)로 군국을 헌신하니조정에서 정벌을 의논하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였는데마침내 동요하여 절양(節量)하였다명제가 자리를 이었을 때(즉위년도 227), 사마부()를 쓰고자 하니좌우(左右)에게 물으며 말하였다(-사마의)의 면모가 존재하지 아니하오?답이 이를기를(-사마의)과 닮았습니다.천자(天子-조예)가 말하였다내가 사마의(司馬懿)를 두명이나 얻었는데 어찌 근심하겠소(사마부를도지상으로 임명하였다이로써 사마부는 적을 사로잡으며 승리를 거뒀는데이에 걸맞는 예를 갖췄다.


每諸葛亮入寇關中,邊兵不能制敵,中軍奔赴,輒不及事機,宜預選步騎二萬,以二部,討賊之備。又以關中連遭賊寇,穀帛不足,遣冀州農丁五千屯於上邽,秋冬習戰陣,春夏修田桑。由是關中軍國有餘,待賊有備矣。後除書右僕射,進爵昌平亭侯,遷書令。

 

매번 제갈량(諸葛亮)이 관중(關中)을 침략하였는데변방의 병력들은 적을 능히 당해내질 못하자 (사마부가중군(中軍)을 이끌고 급히 도달했는데,번번이 사기(事機)에 미치지 아니하였다마땅히 보병과 기병 2만을 엄선하여 두 부대로 나누어 도적(=촉한)들을 토벌하기 위해 갖추었다또 관중(關中)에 도적들이 침공하자 우연히 마주하였는데곡식과 비단이 부족하여기주(冀州)로부터 농정(農丁) 5천을 보내어 상규(上邽)를 진을 치도록 하였다. (장정들에게가을과 겨울에 전진(戰陣)하는 법을 배우고봄과 여름에는 밭과 뽕나무를 일구도록 하였다말미암아 이에 관중(關中)의 군국(軍國)에 여분이 있게 되었으며도적들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이후 상서우복사(書右僕射)로 삼고나아가서 창평정후(昌平亭侯)로 봉하였으며상서령(書令)으로 옮기게 하였다.


及大將軍曹爽擅權,李勝、何晏、鄧颺等亂政,孚不視庶事,但正身遠害而已。及宣帝誅爽,孚與景帝屯司馬門,以功進爵長社縣侯,加侍中。

 

대장군(大將軍조상(曹爽)이 권세를 갖고 마음대로 하며이승(李勝), 하안(何晏), 등양(鄧颺등의 무리가 정사를 어지럽히자사마부()는 서사(庶事-모든 일을 뜻함.)를 맡지 아니하였고정신(正身-본인)을 더러운 것으로부터 멀리하였다. (※다만 “이미 멀리 쫓겨났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듯함…선제(宣帝-사마의)가 조상(曹爽)을 베자사마부는 경제(景帝-사마사)와 더불어 사마(司馬)씨 가문을 보호하였다이 공으로 장사현후(長社縣侯)로 삼아지고더해서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將諸葛恪圍新城,以孚進督諸軍二十萬防禦之。孚次壽春,遣丘儉、文欽等進討。諸將欲速擊之,孚曰:「夫攻者,借人之力以功,且當詐巧,不可力爭也。」故稽留月餘乃進軍,吳師望風而退


당시 오()의 장수 제갈각(諸葛恪)이 신성(新城)을 포위하였는데그로인해 사마부() 20만의 제군(諸軍)을 이끌고 나아가 방어(防禦)하였다.사마부()가 수춘(壽春)에 이르자관구검(丘儉)과 문흠(文欽)을 보내어 (제갈각을토벌하였다제장(諸將)들이 (적을빨리 칠 것을 원하자사마부()가 말하였다무릇 (적을친다면사람의 힘을 빌려서 공을 세우는 것이니마땅히 사교(詐巧-남을 교묘하게 속임)를 해야지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힘을 써는 것은 아니되옵니다.이에 한달 동안 계류(稽留-머무름.)하여 마침내 진군하였는데오의 군대는 멀리서 (아군의위세를 바라보자 물러나였다.

 

魏明悼后崩,議書銘旌,或欲去姓而書魏,或欲兩書。


()의 명도후(明悼后-조예의 황후)가 붕어()하자, (모두의논하여 정()에 글자를 세겼는데혹시나 위(자를 거성(去姓-대역죄인을 성을 빼고 부르는 것.)할 것을 대비하여만일의 경우를 위해 두 문장을 준비하였다.

 

孚以:「經典正義,皆不應書。凡帝王皆因本國之名以天下之號,而與往代相別耳,非擇美名以自光也。天稱皇天,則帝稱皇帝;地稱后土,則后稱皇后。此乃所以同天地之大號,流無二之尊名,不待稱國號以 自表,不俟稱氏族以自彰。是以春秋隱公三年經曰『三月庚戌天王崩』,尊而稱天,不曰周王者,所以殊乎列國之君也。『八月庚辰宋公和卒』,書國稱名,所以異 乎天王也。襄公十五年經曰『劉夏逆王后于齊』,不云逆周王后姜氏者,所以異乎列國之夫人也。至乎列國,則曰『夫人姜氏至自齊』,又曰『紀伯卒』,書國稱姓,此所以異乎天王后也。由此考之,尊稱皇帝,赫赫無二,何待於魏乎?尊稱皇后,彰以謚號,何待於姓乎?議者欲書魏者,此以天皇之尊,同於往古列國之君也。或欲書姓者,此以天皇之后,同於往古之夫人也。乖經典之大義,異乎聖人之明制,非所以垂訓將來,萬世不易之式者也。」遂從孚議


사마부는 이로써 말하였다경전(經典)이 바르고 옮음에도 불구하고모두 다 문장에 (이름을 쓰는 것에응하지 아니하였습니다무릇 제왕(帝王)으로 인하여 모두 본국(本國)이 있는 것인데 이름으로만 천하(天下)를 부르짖는다면 왕여(往代-지난 지 썩 오래된 때)하여 상별(別耳)하였는데,미명(美名)으로써만 스스로 빛나는 것만을 간택하면 아니되어야 합니다하늘()이 황천(皇天)을 칭하되법칙()에 맞게 임금()이 황제(皇帝)를 칭하고땅이 후토(后土)를 칭하되법칙()에 맞게 후()를 황후(皇后)라 칭하는 것입니다이에 일을 함에 있어서 천지(天地)의 대호(大號-큰 이름?)를 화합해야 하며국호(國號)를 칭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듯이 스스로 이를 표하면 되고씨족(氏族)을 칭하는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듯이 스스로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이것에 대해 춘추(春秋)시대 은공(隱公) (시대삼년의 경()3월 경술(庚戌)천왕(天王-옥황상제)이 붕어()하였다라 말하였고하늘을 높이 칭하여 주왕자(周王者)이라 하는 것이 아니니이로써 여러 나라(列國)의 군주()가 다른 것입니다.8월 경진(庚辰)송공이 화하게 졸()하였다서국(書國)에서 이름을 칭하니 이로써 천왕(天王)이 하려는 바가 다른 것입니다양공 15년의 경이유하(劉夏)가 왕후(王后)를 거스르니 공손하게 되었다주왕후(周王后강씨(姜氏)를 거역한게 아니니 이로써 여러 나라의 부인이 다른 것입니다여러 나라에서 또한 이르기를부인(夫人강씨(姜氏)가 자제해야 한다.또 말하기를:()의 백희(伯姬)가 졸()하였다.서국이 성을 칭하니이로써 천왕후(天王后)와 다른 바입니다말미암아 이에 대해 생각하며황제를 높여 부르니 둘도 없이 빛나고도 빛나는데 어찌하여 위()를 기다리겠습니까? 황후를 높여 불러서 이가 들어남으로 시호를 받는다면 어찌하여 성씨(書)를 기다리겠습니까? 위(魏) 자를 쓰고자하는 것에 논의하는 것은 천황의 수준으로 격상하는 것이며, 옛적의 여러 나라의 국왕과 동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성(姓)자를 쓰고자 한다면, 이는 천황의 후의 수준으로 격상하는 것이며, 옛적의 여러 나라의 부인들과 동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대의를 거슬러서 성인의 명제(明制)와 어찌 다르게 하겠습니까. 이가 장래(垂訓)에 수훈(將來)이 되서는 안되며, 만세(萬世)를 거쳐서도 이 제도를 고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마침내 사마부의 의견을 따랐다.

(※최대 발번역 구간으로 발언 자체의 번역상 어려움+익숙하지 않은 고사 남발로 번역하는데 굉장히 어려웠습니다자치통감이나 정사 삼국지에서 기재되어 있기를 바랬는데 이건 진서 오리지날로 보입니다번역해본 제가 읽어도 사마부의 발언이 쉽게 이해되지가 않은데명도후가 그리 깔끔한 죽음을 당하지 않은 만큼 (위서 명도모황후전 참고일각에서는 조예를 눈치를 봐서 문서상 魏로 표기할지 아니면 실제 성씨로 표기할지 두 문서를 만들어서 꼼수를 부리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그러자 사마부는 魏로 표기할 경우에는 예법상과 경전상 황후의 예가 아닌 황제의 예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솔직히 처음 들어보는 예법이고魏로 표기한다는게 무슨 뜻인지 잘 상상이 안가는 만큼 이 구간은 다른 고수분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遷司空。代王淩為太尉。及蜀將姜維寇隴右,雍州刺史王經戰敗,遣孚西關中,統諸軍事。征西將軍陳泰與安西將軍鄧艾進擊維,維退。孚還京師,轉太傅


사공(司空)을 맡게 되었다왕릉()을 대신해서 태위(太尉)를 맡았다마침 촉의 장수 강유가 농우를 침범했는데옹주자사(雍州刺史왕경(王經)이 전투에서 패하자, (사마)()에게 서쪽으로 향하여 관중(關中)을 진압하도록 하니제군(諸軍-모든 군사)을 통솔하게 하였다정서장군(征西將軍진태(陳泰)와 안서장군(安西將軍등애(艾進) ()()를 향해 진격(進擊)하자 ()()는 물러났다. (사마)부가 경사(京師-낙양)으로 돌아왔는데태부(太傅)를 맡게 되었다.

 

及高貴公遭害,百官莫敢奔赴,孚枕尸於股,哭之慟,曰:「殺陛下者臣之罪。」奏推主者。


고귀향공(高貴-조모)이 해를 당하자백관 중 감히 거두어 가는 사람이 없자급히 달려나갔다사마부()가 시신의 넓적다리를 베고 통곡하며 말하였다:폐하(陛下)를 살해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임금을 높이 받들이며 아뢰었다.


會太后令以庶人禮葬,孚與群公上表,乞以王禮葬,從之。孚性至。宣帝執政,常自退損。後逢廢立之際,未嘗預謀。景文二帝以孚屬尊,不敢逼。後進封長樂公 


태후(太后)가 모이자 (조모를서인(庶人)으로써 예장(禮葬)을 하려 하자사마부()와 공()의 무리들이 상표(上表)를 올려()으로써 예장(禮葬)을 할 것을 빌자이를 좇았다사마부의 성품이 조심스러움이 지극하였다선제(宣帝-사마의)가 정권을 잡았을 무렵항상 스스로 물러나 손해를 보았다이후 황제를 폐립(廢立)하고 새로 옹립하려 하자, (사마부는의논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이에도 경제(景帝-사마사)와 문제(文帝-사마소)는 사마부()를 웃어른으로 예우하고(※자치통감은 “사마부가 높은 친척”이어서 핍박하지 않았다고 번역한다.), 감히 핍박하지 아니하였다이후 (사마부는승진하여 장락공(長樂公)으로 봉해졌다.

 

及武帝受禪,陳留王就金墉城,孚拜辭,執王手,流涕歔欷,不能自勝。曰:「臣死之日,固大魏之純臣也。」詔曰:「太傅勳德弘茂,朕所瞻仰,以光導弘訓,靜宇內,願奉以不臣之禮。其封安平王,邑四萬戶。進拜太宰、持節、都督中外諸軍事。」


무제(武帝-사마염)가 수선(受禪)하여 황제로 즉위하자진류왕(陳留王-조환)이 금용성(金墉城)에 머물게 되었다사마부가 (황제에게절하며 인사하면서(-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흐느끼며 한탄하여 (이를스스로 극복하지 못하였다말하기를()은 죽는 날까지진실로 위대한 위의 순신(純臣)일 것입니다.(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말하길태부의 훈덕(勳德)이 크고 무성하여짐은 그저 우러러보고 있다이에 (사마부는광도(光導)하여 널리 가르침을 선사해 온 세계를 진정()시켰으니 신하()의 예를 받을 수 없는 바이다(사마부)를 안평왕으로 봉하며 식읍 4만호를 내린다이에 더하여 태재(太宰)로 봉하고지절(持節)을 내리며도독(都督중외제군사(中外諸軍事)로 삼는다.

 

有司奏,諸王未之國者,所置官屬,權未有備。帝以孚明德屬尊,當宣化樹群后作則,遂備置官屬焉。又以孚內有親戚,外有交游,惠下之費,而經用不,奉絹二千匹。


이뤄여할 사무가 있음에도제왕(諸王)들이 (본인들의()에 가지 아니하니관속(官屬)을 설치하였음에도 권세를 갖추지 못하였다황제(-사마염)은 이로써 사마부()의 명덕(明德)을 무리들에게 공경하게 하고, (사마부가 이들을마땅히 베풀고 가르쳐 군후(群后)들에게 법칙을 짓도록 하자듣디어 관속(官屬)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또한 이로써 사마부가 (각각의 국의내부에 있어도 교류(交游)하였고, (국의밖에 있어도 교류(交游)하여서 은혜가 아래까지 닿으니경비가 그리 넉넉하지가 않자비단 2천필을 받게 되었다.



及元會,詔孚乘輿車上殿,帝於階迎拜。坐,帝親奉觴上壽,如家人禮。帝每拜,孚跪而止之。又給以雲母輦、蓋車


원회(元會)에서 모이자,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사마부()에게 예거(輿車-황제의 수레)를 타고 입궐하게 하였으며황제(-사마염)에 이르자 조계()에서 (사마염에게절을 하여 인사하였다. (사마염은이미 앉아있었는데황제(-사마염)은 이에 친히 상수(上壽)에게 잔을 내렸으니이는 집안 사람에 대한 예와 같았다황제(-사마염)가 매번 절을 하자사마부()는 꿇고 말을 잇지 못하였다또한 이로써 (사마염은운모연(雲母輦-황제가 타는 수레의 일종)과 청개차(蓋車-푸른 덮개를 갖춘 수레)를 내렸다.

 

孚雖見尊寵,不以榮,常有憂色。臨終,遺令曰:「有魏貞士河內溫縣司馬孚,字叔達,不伊不周,不夷不惠,立身行道,終始若一。當以素棺單槨,斂以時服。」泰始八年薨,時年九十三。


비록 사마부()는 황제(-사마염)의 총애를 받았지만이를 통해 영화를 이루려하지 않았고항상 근심한 낯색을 가졌었다. (사마부가임종(臨終)하자유령(遺令)을 남겨 말하기를위의 정사(-곧은 선비)인 하내 온현 사람인 사마부가 있었으니, (그의자는 숙달이고이윤이 되지 못하고,주공이 되지 못하였으며관이오가 되지 못하고유하혜가 되지 못하였지만 몸을 세워 한 길을 걸어서 끝에 비로소 처음과 같았다마땅히 수수한 관을 사용하고시복(時服-평상시의 옷)을 입혀라.태시(泰始) 8(272)에 훙()하였으며이때 93세였다.

 

帝於太極東堂哀三日。詔曰:「王勳德超世,尊寵無二,期在位,朕之所倚。庶永百齡,諮仰訓導,奄忽殂隕,哀慕感切。其以東園溫明祕器、朝服一具、衣一襲、緋練百匹、絹布各五百匹、錢百萬、穀千斛以供喪事。諸所施行,皆依漢東平獻王蒼故事。」其家遵孚遺旨,所給器物,一不施用。


황제(-사마염)은 크게 탄식하여동당(東堂-정침의 동쪽에 있는 당)에 가서 삼일간 상을 진행하였다. (황제 사마염은조서를 내려 말하였다:(-사마부)의 공적은 일생을 뛰어넘을 정도로 위대하여둘도 없는 총애를 받은 바기이(-100)의 세월 동안 재위(在位)에 있는 동안(※사마부의 긴 수명을 고려하고사마부도 안평왕이었다는 점에서 이 “재위”의 소재는 사마염이 아닌 사마부인 것으로 추정했는데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 (사마부에게크게 의존하였다거의 100년의 긴 세월 동안그의 훈도(訓導)를 묻고 우러러봤는데돌연히 사망하니 원통하게 슬프고 그립도다그로인하여동원(東園1)의 온명비기(溫明祕器2)와 조복(朝服) 한 구, 옷 한 벌, 비단 백 필, 견포(絹布) 각 오백 필, 돈 백만 전(), 곡식 천 휘()를 내려 상사(喪事)를 이바지한다. 모두 맡은 일을 시행하고, 모두 한()의 동평헌왕(東平獻王3)의 고사(故事)대로 하여라. 」그(사마부)의 집안은 사마부()의 유지(遺旨)를 좇아서, 주어진 기물(器物)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1.동원(東園): 황실의 장사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하는 관청.-권중달 자치통감

 

2.온명비기(溫明祕器): 모양이 네모난 칠통과 같은데 한쪽을 열면 칠로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그 가운데 거울이 있으며 이것으로 시체를 덮는 관을 말한다.-권중달 자치통감

 

3.동평헌왕의 고사한 장제 건초 8(83)에 동평왕이 죽자 시호를 헌왕이라고 하고대홍로를 파견하여 지절을 가지고 상례를 감독하게 하고, 4성의 소후와 제국의 왕들이 모두 정례에 참석하게 하였다.-권중달 자치통감

 

帝再臨喪,親拜盡哀。及葬,又幸都亭,望柩而拜,哀動左右。給鑾輅輕車,介士武賁百人,吉凶導從二千餘人,前後鼓吹,配饗太廟。


황제(-사마염)는 두번 친히 문상하여직접 절을 올리고 울면서 슬픔을 다했다장사를 지내는 중도정(都亭)으로 향하자 사마망()이 관을 향해 절을 올렸는데 좌우(左右)가 슬픔에 동요하였다난로경차(鑾輅輕車-황제가 쓰는 수레의 일종)를 내리며개사(介士)와 무분(武賁백 명길흉을 좇을 도종(導從이천여 명에게 모시도록 하였으며앞뒤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게 하여 태묘(太廟)에 배향(配饗)하도록 하였다.

 

九子:邕、望、輔、翼、晃、、珪、衡、景


9명의 아들이 있었다사마옹(司馬), 사마망(司馬), 사마보(司馬), 사마익(司馬), 사마황(司馬), 사마괴(司馬), 사마규(司馬), 사마형(司馬), 사마경(司馬).



邕字子魁。初世子,拜步兵校尉、侍中。先孚卒,追贈輔國將軍,謚曰貞。


사마옹()의 자()는 자괴(子魁)이다처음에는 세자(世子)를 역임했으며, (이후보병교위(步兵校尉),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사마부()보다 먼저 졸()하자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추증되었으며시호는 왈정(曰貞)이었다.

 

邕子崇世孫,又早夭。泰始九年,立崇弟平陽亭侯隆安平王。立四年,咸寧二年薨,謚曰穆。無子,國


사마옹의 아들 사마숭()을 세손(世孫)으로 높였으나또한 일찍 죽었다태시(泰始) 9(273), 사마숭(平陽亭侯)을 평양정후(平陽亭侯)로 삼고,더욱 높여서 안평왕(安平王)으로 임명하였다. 4살이 되었을 때함녕(咸寧) 2(276)에 훙()하였다시호는 왈목(曰穆)이었다아들이 없었음으로 대가 끊겼다.

 

義陽成王望字子初,出繼伯父朗,寬厚有父風。仕郡上計吏,孝廉,辟司徒掾,歷平陽太守、洛陽典農中將。從宣帝討王,以功封永安亭侯。遷護軍將軍,改封安樂侯,加散騎常侍。時魏高貴公好才愛士,望與裴秀、王沈、鍾會並見親待,數侍宴筵。公性急,秀等居職,急有召便至。以望外官,特給追鋒車一乘,武賁五人。


의양성왕 사마망()의 자()는 자초(子初)이다백부(伯父사마랑()의 뒤를 이었는데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니 아버지(-사마부)와 닮았다벼슬하여 상계리(上計吏)가 되었는데효렴(孝廉출신으로사도연(司徒掾-사도의 보좌역)을 맡고평양태수(平陽太守)와 낙양의 전농중랑장(典農中)을 역임했다선제(宣帝-사마의)를 따라서 왕릉()을 토벌했는데이 공으로 영안정후(永安亭侯)에 봉해졌다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관직을옮기자 안악향후(安樂)로 고쳐 봉하고산기상기(散騎常侍)를 더했다이때 위()의 고귀향공(高貴-조모)가 재주를 좋아하고 선비를 아꼈는데, (사마)()과 더불어 배수(裴秀), 왕침(王沈), 종회(鍾會)가 모두 친하게 지내고수시로 연회를 모시곤 했다(-조모)은 성품이 급()했는데내직을 맡은 무리중 빼어난 이들을 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곧바로 불러내곤 했다이로써 망()은 외관(外官)을 맡자특별히 추봉차(追鋒車-빠른 거마일승(一乘)을 주고무분(武賁-虎賁호분의 피휘다섯명을 더했다.


時景文相繼輔政,未嘗朝覲,權歸晉室。望雖見寵待,每不自安,由是求出,征西將軍、持節、都督雍涼二州諸軍事。在任八年,威化明肅。先是蜀將姜維屢寇關中,及望至,廣設方略,維不得寇,關中賴之。進封順陽侯。徵拜衞將軍,領中領軍,典禁兵。尋加驃騎將軍、開府。頃之,代何曾司徒

 

이때 경제(-사마사)와 문제(-사마소)가 서로를 이어가며 정사를 도왔는데,  조회를 열지 않으니권위는 진실(晉室)에게로 돌아왔다그리하여도 사마망() (조모의총애를 받곤 했는데이를 편하게 여기지 않아말미암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정서장군(征西將軍지절(持節), 도독옹양이주제군사(都督雍涼二州諸軍事)를 역임하였다역임한지 8년이 되는 해위엄이 있고 명숙(明肅)하였다이전에 촉()의 장수 강유(姜維)가 여러차례 관중(關中)을 침략했는데급히 사마망() (침공지에이르어서 방략(方略-일을 해 나갈 방법과 계략)을 널리 베풀자강유()는 침공함으로 이득을 얻지 아니하였고관중(關中)은 그(사마망)를 믿고 의지하였다나아가서 순양후(順陽侯)로 봉하였다위장군(衞將軍)으로 부름받으니중영군(中領軍)을 거느리고금병(禁兵)을 주관하였다거듭하여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하였으며개부(開府)하도록 하였다잠시후하증(何曾)이 사도(司徒)를 대신해서 맡았다.

 

武帝受禪,封義陽王,邑萬,給兵二千人。


무제(武帝-사마염)가 제위에 오르자, (사마망을의양왕(義陽王)으로 봉하였고식읍 1만 호와 병사 2천 명을 내렸다.

 

泰始三年,詔曰:「夫賢庸勳,尊宗茂親,所以體國經化,式是百辟也。且台司之重,存乎天官,故周建六職,政典首。司徒、中領軍,以明德近屬,世濟其美;祖考創業,翼佐大命,出典方任,入贊朝政,文德著,武功宣暢。逮朕嗣位,弼道惟明,宜登上司,兼統軍戎,內帝室,外隆威重。其進位太尉,中領軍如故。置太尉軍司一人,參軍事六人,騎司馬五人。又增置官騎十人,前三十,假羽葆鼓吹。


태시(泰始) 3(267),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말하였다사부는 더욱이 현명한 모습을 보이며 공훈을 세워친척들에게도 존종(尊宗)이 무성하온데이로써 나라에 봉사함으로 더욱 경화하도록 했으니 백관들을 바로 잡았도다또 태사(台司)는 깊이 생각하여 천관(天官-육조六曹 중 으뜸을 뜻함)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이유로 육직(六職)을 두루 세웠으니경전의 위수()이니라사도(司徒), 중령군(中領軍)으로써 (그의명덕은 무리와 가까이하며그의 아름다움은 일생을 넘어섰도다조상님이 창업(創業)을 성취하셨을 때, (사마망은대명(大命)을 보좌하여 벼슬을 하고 책임을 다하였다예전에 짐이 자리를 이어 올랐을 때도리를 돕고 생각이 밝았으니 마땅히 상사(上司)에 올라 군융(軍戎-군사 업무)를 겸하여 거느리고내부로는 제실(帝室-황실)을 돕고 외부로는 위중(威重)을 높이도록 하여라. (사마망은나아가 태위(太尉)를 역임하여 예전과 같이 중영군(中領軍)을 맡아도록 하라태위군사 한 명참군사(參軍事)  6기사마(騎司馬) 5명을 두어라또관기(官騎) 10병전() 30우보(羽葆)와 고취(鼓吹)를 더하여라.

 

將施績寇江夏,邊境騷動。以望統中軍步騎二萬,出屯龍陂,二方重,假節,加大都督諸軍事。會荊州刺史胡烈距績,破之,望乃班師。俄而吳將丁奉寇芍陂,望又率諸軍以赴之,未至而奉退。拜大司馬。孫皓率衆向壽春,詔望統中軍二萬,騎三千,據淮北。皓退,軍罷。


()의 장수 시적(施績-주적으로도 표기함.)이 강하(江夏)를 침구하자변경 일대가 떠들석했다이에 사마망()은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된 2만의 중군(中軍)을 이끌고 출병하여 용피(龍陂)에 주둔하여 두 곳을 막도록 하였는데가절(假節대도독제군사(大都督諸軍事)로 삼았다형주자사(荊州刺史호열(胡烈)을 불려 시적()을 막도록 했는데, (호열이 시적을깨뜨리자 이에 사마망()은 군사를 반으로 나누었다갑자기 오()의 장수 정봉(丁奉)이 작피(芍陂)를 침공해오자 사마망은 제군을 인솔하여 (작피를향하자, (사마망이도달하지 아니하였음에도 정봉()이 퇴각하였다.대사마(大司馬)로 승진하였다손호(孫皓)가 군사를 이끌고 수춘(壽春)으로 향하자,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사마망()에게 중군(中軍) 2만과 기병 3천을 인솔하여 회북(淮北)에 의지하도록 하였다손호()가 후퇴하자군사를 물렸다.



泰始七年薨,時年六十七,賻贈有加。望性儉吝而好聚斂,身亡之後,金帛盈溢,以此獲譏。


태시(泰始) 7(271), ()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67세였고, (사마염은부의(-상가에 보내는 돈과 물품)를 더욱 많이 주었다사마망()은 성품이 검소하고 인색하였으면서도 취렴(聚斂)하기를 좋아하였는데사망한 이후 금과 비단이 차서 넘쳐나니 이로써 비웃음을 얻었다.

 

四子:弈、洪、整、楙


4명의 아들이 있었다사마혁(司馬), 사마홍(司馬), 사마정(司馬), 사마무(司馬).

 

弈至黃門,先望卒。整亦早亡。以弈子奇襲爵。奇亦好畜聚,不知紀極,遣三部使到交廣商貨,有司所奏,太康九年,詔貶三縱亭侯。更以章武王威望嗣。後威誅,復立奇棘陽王以嗣望


사마혁()은 황문랑(黃門)에 이르었었는데사마망()보다 먼저 졸()하였다사마정(역시 일찍 사망하였다이로써 사마혁()의 아들()사마기(司馬)가 작위를 이어받았다사마기 또한 축취(畜聚)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끝내는 법을 몰라서 삼부(三部)를 교광(交廣)의 상화(商貨)에 파견보내곤 하였는데이런 일이 있자 관리가 아뢰었다태강(太康) 9(288), (황제 사마충이조서를 내려 (사마기를삼종정후(三縱亭侯)로 낮추었다이로써 장무왕(章武王사마위(司馬)에게 사마망()을 잇도록 하였다이후 사마위()가 처형당하자사마기()를 다시 극양왕(棘陽王)으로 복립(復立)하여 사마망()을 잇도록 하였다.

 

河間平王洪字孔業,出繼叔父昌武亭侯遺。仕魏,歷位典農中將、原武太守,封襄賁男。武帝受禪,封河間王。立十二年,咸寧二年薨。


하간평왕(河間平王사마홍()의 자()는 공업(孔業)이었다출계(出繼)해서 숙부 창무정후(昌武亭侯사마유(司馬)를 잇도록 하였다()를 섬겼을 무렵에는 전농중랑장(典農中)과 원무태수(原武太守)를 역임하였고양분남(襄賁男)으로 봉해졌다무제(武帝-사마염)이 제위에 오르자 하간왕(河間王)으로 봉해졌다. (왕으로세워진지 12함녕(咸寧) 2(276)에 훙()하였다.

 

二子:威、混。威嗣,徙封章武。其後威繼義陽王望,更立混洪嗣。混歷位散騎常侍,薨


2명의 아들이 있었다사마위(司馬), 사마혼(司馬). 사마위가 계승하자장무(章武)로 옮겨 봉했다그후 사마위()가 이미 의양왕(義陽王사마망()을 계승했기에사마혼()이 사마홍()을 잇도록 고쳤다사마혼()은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하고()하였다.

 

及洛陽陷,混諸子皆沒于胡。


낙양(洛陽)이 함락당하자사마혼()의 아들들은 오랑캐로부터 몰살당했다.


而小子滔初嗣新蔡王確,亦與其兄俱沒。後得南還,與新蔡太妃不協。太興二年上疏,以兄弟並沒在遼東,章武國,宜還所生。太妃訟之,事下太常。太常賀循議:「章武、新蔡俱承一國不之統,義不得替其本宗而先後傍親。按滔已被命人後矣,必須無復兄弟,本國永,然後得還所生。今兄弟在遠,不得言無,道里雖阻,復非域。且鮮卑恭命,信使不。自宜詔下遼東,依劉群、盧諶等例,發遣令還,繼嗣本封。謂滔今未得便委離所後也。」元帝詔曰:「滔雖出養,自有所生母。新蔡太妃相待甚薄,滔執意如此。如其不聽,終當紛紜,更不可。今便順其所執,還襲章武。

 

소자(小子-어린아이?) 사마도(司馬)가 본래 신채왕(新蔡王)을 잇는게 확실해지자그의 형()과 함께 몰살당했다() (아이를 얻은 이후?) 남쪽으로 돌아오자더불어 신채태비(新蔡太妃)와 협조하지 아니하였다태흥(太興) 2(319), 상소(上疏)를 올렸는데이로써 형제가 나란히 몰살당해 (후손이?) 요동(遼東)에 있어장무국(章武國)이 단절되었으니 마땅히 소생(所生)이 돌아와야했다태비가 이를 쟁론하여태상(太常)이 일을 내렸다태상(太常하순(賀循)이 의논하기를장무(章武)와 신채(新蔡)를 모두 이을 일국(一國)은 계통이 끊이지 아니하였고본종(本宗)을 끊는 것은 옳지 못하니 앞뒤의 방친(傍親)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이를억누르려 하더라도 사마도()는 이미 명을 받아서 인후(人後)를 들이도록 하였으나 형제(兄弟)가 복귀할 수가 없으며 본국이 오랬동안 절단되었으니틀림없이 후(-사마도?)가 돌아온 후에 소생(所生)을 얻어야 합니다지금 형제가 멀리 있어 말해봐야 이득이 없지만 도리(道里)가 비록 막혔다고 하나 회복한다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입니다또 선비(鮮卑)가 명을 받들이니신임할 수 있어 (길이끊이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스스로 마땅히 요동에 조서를 내려 유군(劉群)과 노심(盧諶등의 무리에 의지하여 일을 맡겨서 돌려보내 본봉(本封)을 잇도록 해야 합니다謂滔今未得便委離所後也」원제(元帝-사마예)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사마도()가 비록 낳고 길렀다고 하나 그 소생(所生)의 어머니가 있다신채태비를 대접하였으나 (요새지나치게 야박해졌으니사마도에게 처리하게 하여 뜻이 같다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하더라도 마땅히 분운(紛紜)한 것을 마치고 옳지 않은 것을 개선하도록 하여라현재 편순(便順-편하고 순하니?)하니 맡은 일을 처리하고장무(章武)를 돌아오게 하여 잇도록 하여라

 

(※또 다른 발번역 구간으로 이 또한 고수분의 도움을 요청합니다분명히 그의 형과 몰살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는 것같은데(其兄俱沒또 멀쩡히 요동에 포류된 듯양 언급하니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저로써도 불명입니다그나마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사마도가 몰살당했으나 살아남은 후가 그의 아이를 아이를 배었는데 신채태비에 의해 방해받아서 제대로된 승계절차를 받지 못했다는 내용인데 그렇다면 왜 요동이 언급되는지가 이해가 안됩니다이후 사마도가 산기상시를 역임했다는 것을 보면 멀쩡히 산 것같기도 한데 왜 또 그의 형과 함께 몰살당했다고 언급하는지  )  

 

滔歷位散騎常侍,薨,子休嗣。休與彭城王雄俱奔蘇峻。峻平,休已戰死。弟珍年八,以小弗坐。咸和六年襲爵,位至大宗正。薨,無嗣。河間王欽以子範之繼,位至游擊將軍。薨,子秀嗣。義熙元年,桂陽太守。秀妻桓振之妹,振作逆,秀不自安,謀反,伏誅,國除


사마도()는 산기상기(散騎常侍)를 역임하였으며 훙()하자 아들 사마휴()가 이었다사마휴와 더불어 팽성왕(彭城王사마웅()이 함께 소준(蘇峻)에게 도주하였다소준()이 평정되자사마휴는 이미 전사(戰死)하였다아우 사마진()의 나이가 8세였으니이로써 어려서 권좌에 앉지 못하였다함화 6(331), 작위를 이으니 대종정(大宗正)까지 이르었다()하였으나계승받을 이가 없었다이로써 하간왕(河間王사마흠()은 아들 사마범()에게 승계하도록 하였다. (사마범은유격장군(游擊將軍)까지 이르었다()하니아들 사마수()가 승계하였다의희(義熙원년(405), (사마수는계양태수(桂陽太守)로 임명되었다사마수의 처가 환진(桓振)의 누이였는데환진()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수는 편안하지 아니하여서 모반(謀反)하였으나 복주(伏誅)당하여 (사마수의 영지를국제(國除-영지를 도로 회수함)하였다.



威字景曜,初嗣洪。咸寧三年,徙封章武。太康九年,嗣義陽王望。威凶暴無操行,諂附趙王倫。元康末,散騎常侍。倫將,使威與黃門駱休逼帝奪璽綬,倫以威中書令。倫敗,惠帝反正,曰:「阿皮捩吾指,奪吾璽綬,不可不殺。」阿皮,威小字也。於是誅威


사마위()의 자()는 경요(景曜)이며 본래(처음부터?) 사마홍()을 잇도록 했었다함녕(咸寧) 3장무(章武)를 옮겨 봉하였다태강(太康) 9,의양왕(義陽王사마망()을 잇게 하였다사마위()는 흉폭(凶暴)하여 조행(操行)이 없었으며부조왕(附趙王사마윤()에게 아첨하였다원강(元康 291-299) 말기산기상기(散騎常侍)로 임명되었다사마윤이 장차 (황위를찬탈하려 하자사마위와 더불어 황문랑(黃門낙휴(駱休)를 부려 황제(-사마충)를 핍박하고 새수(璽綬)을 강탈하였다사마윤()은 이로써 사마위()를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하였다사마윤()이 패하여 혜제(惠帝-사마충)가 반정을 성사하자말하였다:아피(阿皮-사마위)는 나를 가리키며 비꼰데다가나의 새수를 강탈하였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자치통감에서 등장하지 않으나 권중달 교수는 주석에서 “이 사람이 나에게 퇴위하도록 하고 옥새를 탈취혔다” 정도로 요약해서 언급했다여기서 捩吾指 ‘나를 퇴위하도록 하였다’일지도 모른다.아피(阿皮)는 사마위()의 소자(小字-아명)이다이에 사마위()를 주살하였다.

 

隨穆王整,兄弈卒,以整世子。歷南中將,封泉侯,先父望薨,追贈冠軍將軍。武帝以義陽國一縣追封隨縣王。子邁嗣。太康九年,以義陽之平林益隨郡王


수목왕(隨穆王사마정()은 형(사마혁()이 졸()하자 이로써 세자(世子가 되었다. (사마정은남중랑장(南中)을 역임하였으며 청천후(泉侯)로 봉해졌지만 아버지 사마망()보다 먼저 훙()하자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추증(追贈)되었다이에 무제 사마염은 의양국의 현 중 하나를 추봉(追封)하여 수현왕(縣縣王)으로 임명하였다아들 사마매()가 뒤를 이었다태강(太康) 9(288), 이로써 의양(義陽)의 평림(平林)을 더하여 사마매()를 수군왕(隨郡王)으로 임명하였다.

 

竟陵王楙字孔偉,初封樂陵亭侯,起家參相國軍事。武帝受禪,封東平王,邑三千九十七。入散騎常侍、


경릉왕(竟陵王사마무()의 자()는 공위(孔偉)이다본래 악릉정후(樂陵亭侯)로 봉해졌으며 집안이 일어서지자 상국(相國)의 군사(軍事)로 간여하였다.  무제(-사마염)이 즉위하자동평왕(東平王)으로 봉해졌으면 식읍 3,097호가 주어졌다산기상시(散騎常侍), 상서()로 임명하였다.

 

楙善諂諛,曲事楊駿。及駿誅,依法當死,東安公繇與楙善,故得不坐。尋遷大鴻臚,加侍中。繇欲擅朝政,與汝南王亮不平。亮託以繇討駿顧望,免繇、楙等官,遣楙就國。楙遂殖財貨,奢僭踰制。趙王倫位,召還。及義兵起,倫以楙衞將軍、都督諸軍事。倫敗,楙免官。齊王輔政,繇復僕射,平東將軍、都督徐州諸軍事,下邳。成都王穎輔政,進楙衞將軍


사마무는 알랑이며 아첨을 잘하여양준(楊駿)이 곡사(曲事-도리에 어긋난 일)하도록 하였다양준(駿)이 주살당하자 법에 의하면 마땅히 죽었어야 했는데동안공(東安公사마요()와 친했던 덕에 연좌되지 아니하였다대홍려(大鴻臚)로 옮겨 임명하고시중(侍中)을 더하였다사마요()가 조정(朝政)을 마음대로 하려 하자여남왕(汝南王사마량()이 불평(不平)해하였다사마량은 사마요에게 양준(駿)을 토벌하고 사마망을 돌아보도록 부탁하였으나사마요()와 사마무()의 무리를 관직에서 면직시키고사마무()을 보내어 국()을 취하도록 하였다사마무는 마침내 재화(財貨)를 불렸으며사치스럽고 분수가 넘어 제도를 넘어섰다조왕(趙王사마윤()이 제위를 찬탈하자, (사마무를소환하였다의병(義兵)이 일어나자사마윤()은 사마무()를 위장군(衞將軍),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로 임명하였다사마윤()이 패하자사마무()는 관직에서 면직되었다.제왕(齊王사마경()이 조정을 도왔는데사마요()는 종사(僕射)로 복귀하였다. (사마요가추천하여 사마무()를 평동장군(平東將軍), 도독(都督서주제군사(徐州諸軍事)로 임명하고하비(下邳)를 진압하도록 하였다성도왕(成都王사마영()이 조정을 도우자나아가 사마무()는 위장군(衞將軍)으로 임명되었다.

 

會惠帝北征,即以楙車騎將軍,都督如故,使率衆赴鄴。蕩陰之役,東海王越奔于下邳,楙不納,越乃還國。帝西幸,越總兵謀迎大駕,楙甚懼。長史王修說曰:「東海宗室重望,今將興義,公宜徐州以授之,此克讓之美也。」楙從之,乃自承制都督兗州刺史、車騎將軍,表于天子。時帝在長安,遣使者劉虔即拜焉


조회에서 혜제(惠帝-사마충)가 북정(北征)을 명하였는데이로써 사마무()는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임명하게 되었으며도독(都督)을 예전과 같이 하였고병사를 거느리고 업()으로 향하게 하였다. (사마무가탕음(蕩陰)에서 전투를 벌였는데동해왕(東海王사마월()이 하비(下邳)에 급히 이르었음에도 사마무()는 돌아가지 아니하였고, (이에사마월()은 국()으로 돌아갔다황제(-사마충)이 서(西)쪽으로 향하자사마월이 모든 병력과 지모를 동원하여 대가(大駕-황제가 타는 수레)를 맞이하였는데이에 사마무()가 심히 두려워 했다장사왕(長史王사마수()가 서술하여 말하였다:동해(東海)의 종실(宗室)이 사마망()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데 지금 장수들이 의를 떠받들고 일어났습니다(-사마월도 마땅히 들고 일어나 서주를 제수받았는데이를 참고 양보한다면 이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사마무()는 이를 좇아서도독(都督연주자사(兗州刺史), 거기장군(車騎將軍)을 스스로 계승하고 천자(天子)에게 표()를 올렸다時帝在長安,遣使者劉虔即拜焉

 

楙慮兗州刺史苟晞不避己,乃給虔兵,使稱詔誅晞。晞時已避位,楙在州徵求不已,郡縣不堪命。范陽王虓遣晞還兗州,徙楙都督州諸軍事。楙不受命,背山東諸侯,與豫州刺史劉喬相結。虓遣將田徽擊楙,破之,楙走還國。帝還洛陽,楙乃詣闕


사마무가 생각해보니 연주자사(兗州刺史구희(苟晞)가 몸을 피하지 못했는데이에 병력을 내어 살육하도록 하였고조서를 사칭(使稱)하여 구희()를 주살하도록 했다이때 구희()는 이미 벗어나서 사마무()가 멋대로 연주()에서 징집해도 조금도 (병력을얻을 수 없고군현(郡縣)은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였다범양왕(范陽王사마효()는 구희()를 보내어 연주(兗州)에 돌아오도록 했는데사마무()는 도독(都督청주제군사(州諸軍事)로 옮겼다. (청주는사마무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고산동(山東)의 제후(諸侯)들은 모두 배신한데다가 더불어 예주자사(豫州刺史)유교(劉喬)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사마효()는 장수 전휘(田徽)를 보내어 공격했는데사마무()를 격파하여 도주하게 하고사마무()는 다시(동평?)()에 돌아갔다황제(-사마치)가 낙양(洛陽)에 돌아오자이에 사마무()는 대궐()에 이르었다.

 

及懷帝踐,改封竟陵王,拜光祿大夫。越出牧豫州,留世子毗及其黨何倫訪察宮省。楙白帝討越,乃合衆襲倫,不克。帝委罪於楙,楙奔竄獲免。越薨,乃出。及洛陽傾覆,亂兵所害


회제(懷帝-사마치)가 천조(-황제의 자리를 계승함)하자, (사마무를경릉왕(竟陵王)으로 삼고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았다사마월이 출병하여 예주를 쳤는데, (사마월이머무르자 세자 사마비는 그의 무리 하륜(何倫)과 함께 궁성(宮省)을 방찰(訪察)하였다사마무가 황제(-사마치)에게 사마월을 칠 것을 아뢰니이에 병력을 모아 하륜()을 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황제(-사마치)가 죄를 사마무에게 돌렸으나 사마무는 도망쳐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사마월()이 훙()하자다시 나타났다. (이때낙양(洛陽)이 혼란스러웠는데병사들의 난에 해를 입었다.



太原成王輔,魏末野王太守。武帝受禪,封渤海王,邑五千三百七十九戶,泰始二年之國。後衞尉,出東中將,轉南中將。咸寧三年,徙太原王,監州諸軍事。太康四年入朝,五年薨,追贈北將軍。永平元年,更贈衞將軍、開府儀同三司。子弘立,元康中散騎常侍,後徙封中丘王。三年薨,子鑠立


태원성왕(太原成王사마보()는 위(말기에 야왕태수(野王太守)를 역임했었다무제(-사마염)이 즉위하자발해왕으로 봉해지고식읍 5,379호를 내렸다태시 2, (발해?)()에 이르었다이후 위위(衞尉)를 역임하고동중랑장(東中)으로 임명한 후남중랑장(南中)으로 옮겨졌다함녕 4태원왕으로 옮겨졌으며(병주제군사(州諸軍事)로 삼았다태강 4년에 입조하여, (태강) 5년에 훙()하였는데진북장군(北將軍)으로 추증되었다영평(永平원년위장군(衞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고쳐 임명되었다아들 사마홍이 (왕으로세워졌는데원강 (년도산기상시를 역임하였다이후 중구왕으로 옮겨 봉해졌다. (원강?) 3훙하였는데 아들 사마삭이 (왕으로세워졌다.

 

翼字子世,少歷顯位,官至武賁中將。武帝未受禪而卒,以兄邕之支子承嗣,封南宮縣王。薨,子祐嗣立,承遂無後。


사마익()의 자()는 자세(子世)이며젊었을 때 현위(顯位)를 역임하였다관직이 무분중랑장(武賁中)에 이르었다무제(武帝-사마염)가 아직 즉위하지 아니하였을 때 졸()하였고이로써 형 사마옹()의 지자(支子-서자사마승()에게 잇도록 하였다. (사마승은남궁현왕(南宮縣王)으로 봉해졌다()하였을 때아들 사마우()가 이어서 (왕으로 세워졌는데), 사마승()의 승계가 마침내 끊이게 되었다.

 

下邳獻王晃字子明,魏封武始亭侯,拜黃門侍,改封西安男,出東莞太守。武帝受禪,封下邳王,邑五千一百七十六戶,泰始二年就國


하비헌왕(下邳獻王사마황(司馬)의 자()는 자명(子明)이다()에서 무시정후(武始亭侯)로 봉하였다황문시랑(黃門侍)으로 임명()되었으며서안남(西安男)으로 봉해지고동완태수(東莞太守)를 역임하였다무제(武帝-사마염)이 즉위하자먼저 하비왕(下邳王)으로 봉하고식읍 5,176호를 내렸다태시(泰始) 2(266), (하비?)()이 주어졌다.

 

晃孝友貞廉,謙虛下士,甚得宗室之稱。後長水校尉、南中將。九年,詔曰:「南中將、下邳王晃亮中正,體行明潔,才周政理,有文武策識。其以晃使持節、都督寧益二州諸軍事、安西將軍,領益州刺史。」晃以疾不行,更拜書,遷右僕射。久之,出為鎮東將軍、都督徐二州諸軍事。惠帝即位,入車騎將軍,加散騎常侍。將誅楊駿,以晃領護軍,屯東掖門。尋守書令。遷司空,加侍中,令如故。元康六年薨,追贈太傅。


사마황()은 효우(孝友)가 곧고정렴(貞廉)한데다가 겸허(謙虛)하여 선비()들에게 자기를 낮추자 칭찬으로 인해 종실(宗室)에서 얻는 것이 심히 많았다이후 장수교위(長水校尉), 남중랑장(南中)에 임명되었다. 9조서를 내려 말하였다남중랑장(南中), 하비왕(下邳王사마황()은 청량()하여 중정(中正)하고행실이 명결(明潔)한데다가 재주가 두루 정사를 다스릴 줄 아니문무(文武)의 식견을 갖췄다이로써 사마황()을 지절(持節), 도독(都督영익이주제군사(寧益二州諸軍事), 안서장군(安西將軍),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는다이에 사마황은 질병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으니상서()로 고쳐 임명하고우복사(右僕射)로 옮겼다오랜 시간이 지나자진동장군(東將軍), 도독(都督청서이주제군사(徐二州諸軍事)로 삼았다혜제(惠帝-사마충)가 즉위하자입조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되고산기상시(散騎常侍)를 더하였다양준이 주살당하자이로써 사마황()을 영호군(領護軍)으로 삼고 동액문(東掖門)에 주둔하도록 하였다수상서령(書令)을 계승하였다.사공으로 옮기고시중을 더하니 영()은 예전과 같게 하였다 (※예전과 같이 수상서령이라는 뜻인듯). 원강(元康) 6(296)에 훙()하니태부(太傅)로 추증(追贈)되었다.

 

二子:裒、綽。裒早卒,綽有篤疾,別封良城縣王,以太原王輔第三子韡嗣。官至侍中、書,早薨,子韶立


9명의 아들이 있었다사마부(司馬), 사마작(司馬). 사마부()는 일찍 졸()하고사마작()은 위독한 질병에 갈려서 양성현왕(良城縣王)으로 별도로 봉하고태원왕(太原王사마보()의 세번째 아들 사마위() (사마황의뒤를 이었다관직은 시중(侍中), 상서()에 이르었다일찍 훙()하니아들 사마소(司馬) (왕으로세웠다.

 

太原烈王字子泉,魏長樂亭侯,改封貴壽侯。歷振威將軍、祕書監,封固始子。武帝受禪,封太原王,邑五千四百九十六,泰始二年就國。四年入朝,賜袞冕之服,遷東中將。十年薨,詔曰:「乃心忠篤,智器雅亮。歷位文武,有榦事之績。出臨封土,夷夏懷附,守許都,思謀可紀。不幸早薨,朕甚悼之。今安厝在近,其追贈前將軍。」子顒立,徙封河間王,別有傳


태원열왕(太原烈王사마괴(司馬)의 자()는 자천(子泉)이다()의 장악정후(長樂亭侯)였으며 귀수향후(貴壽)로 고쳐 봉하였다진위장군(振威將軍), 비서감(祕書監)을 역임하였으며 고시자(固始子)로 봉해졌었다무제(武帝-사마염)가 즉위하자 태원왕(太原王)으로 봉해지고 식읍 5,496호를 받았으며 태시(泰始) 2(266)에 국()을 취하였다. (태시) 4(268)에 입조하였는데곤면(袞冕)을 내리고 동중랑장(東中)으로 옮겨 임명하였다. (태시) 10(274)에 훙()하였다.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말하였다:사마괴의 마음과 충의가 두터우니 지기(智器)가 맑고 밝았다문무의 자리를 역임하여 간사(榦事-일을 맡아 처리함)의 공적이 있다외부의 봉토를 통차하니 이하(夷夏-오랑캐와 중국)를 끌어들이고허도(許都-허창)를 진수()하여황제의 법도를 위해 끝없이 사모(思謀)하였다일찍히 훙하니 불행하니짐은 심히 슬퍼할지여다이제 안장하여 가까히 있으니그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추증(追贈)한다.아들 사마옹() (왕으로세워서하간왕으로 옮겨 봉하고나누어서 승계하도록 하였다.

 

高陽元王珪字子璋,少有才望,魏高陽侯。歷河南令,進封湞陽子,拜給事黃門侍。武帝受禪,封高陽王,邑五千五百七十戶。歷北中將、督鄴城守諸軍事。泰始六年入朝,以父孚年高,乞留供養。拜書,遷右僕射。十年薨,詔遣兼大鴻臚持節監護喪事,贈車騎將軍、儀同三司


고양원왕(高陽元王사마규(司馬)의 자()는 자장(子璋)이다어렸을 적부터 사마망()의 재능을 가졌다()의 고양향후(高陽)였다하남령(河南令)을 역임했으며나아가 정양자로 봉해지고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으로 올렸다무제(武帝-사마염)이 즉위하자고양왕(高陽王)으로 봉해졌으며 식읍 5,590호가 주어졌다북중랑장(北中), 독업성수제군사(督鄴城守諸軍事)를 역임하였다태시 6(270)에 입조(入朝)하였는데 아버지 사마부는 연고(年高-나이가 많음)하여 계속 머물어서 (사마부를공양(供養)하기를 간청하였다상서()로 임명하였으며 우복사(右僕射)로 옮겼다. (태시) 10(274)에 훙()하였다.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대홍려(大鴻臚), 지절(持節감호상서(監護喪事)를 겸하도록 하였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를 더하였다.

 

珪有美譽於世,而帝甚悼惜之。無子,詔以太原王輔子緝襲爵。緝立五年,咸寧四年薨,謚曰哀。無子,太康二年詔以太原王世子顒子訟緝後,封定縣侯


사마규는 아름다운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황제(-사마염) (사마규를아꼈기에 심히 슬퍼하였다아들이 없었으므로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태원왕(太原王사마보(司馬)의 아들 사마집(司馬)이 작위를 잇도록 하였다. (왕으로세워진지 5함녕(咸寧) 4(278)에 훙하였다.시호는 왈애(曰哀)였다아들이 없었으므로 태강(太康) 2(281),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태원왕(太原王사마괴()의 세자(世子사마옹()의 아들 사마송()이 뒤를 잇도록 하였다. (사마송은진정현후(定縣侯)로 봉해졌다.

 

常山孝王衡字子平,魏封德陽侯。進封汝陽子,駙馬都尉。武帝受禪,封常山王,邑三千七百九十戶。二年薨,無子,以安平世子邕第四子敦


상산효왕(常山孝王사마형()의 자()는 자평(子平)이었다()에서 덕양향후(德陽)로 봉하였다나아가 여양자(汝陽子)로 봉해졌으며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되었다무제(武帝-사마염)가 즉위하자상산왕(常山王)으로 봉해지고 식읍 3,790호를 받았다. (태시) 2()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그런고로 안평세자(安平世子사마옹()의 네번째 아들 사마돈() (뒤를이었다.

 

常山孝王衡字子平,魏封德陽侯。進封汝陽子,駙馬都尉。武帝受禪,封常山王,邑三千七百九十戶。二年薨,無子,以安平世子邕第四子敦


패순왕(沛順王사마경(司馬)의 자()는 자문(子文)이다()의 악안정후(樂安亭侯)였다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무제(武帝-사마염)이 즉위하자패왕(沛王)으로 봉해졌으며 식읍 3,400호를 받았다. (왕으로세워진지 11함녕(咸寧원년(275)에 훙()하였다아들 사마도(司馬) (이후 왕으로세워졌다.

조회 수 :
1462
등록일 :
2016.07.11
20:44:42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community_free/157307/aa4/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157307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10월 11일 자정에 정팅개최 합니다. 아리에스 2014-10-09 24707
공지 일시적으로 비로그인 조치 해제합니다. 아리에스 2014-10-01 24760
공지 신 게시판 관리 기준 운영진 2014-01-28 25729
공지 사회이슈 게시판 신설 (이용법) 재원 2014-01-22 25638
공지 (공지입니다.) 이곳은 자유&잡담 게시판 입니다. file 원소본초 2013-08-04 29351
647 자유게시판 관리자만 쓸 수 있도록 했어염. [3] 코렐솔라 2017-07-06 644
646 안녕하세요? 이제 막 가입했습니다. 길동2016 2017-05-01 442
645 졷푸스 따위는 형께 구배이십칠고두 하러 왓엇는데 佈倚仙人 2016-12-24 720
644 조식의 낙신부를 사랑했던 정백(鄭柏) file 이전만성 2016-08-23 1521
643 장비 연기를 잘했던 오천서(吳天緒) file 이전만성 2016-08-23 1197
642 양주화방록을 읽고 있습니다 file 이전만성 2016-08-13 1040
» 안평헌왕부(선비욜롱님 원본 백업용) 선비욜롱 2016-07-11 1462
640 진서 안평헌왕부8 선비욜롱 2016-07-11 1039
639 진서 안평헌왕부7 선비욜롱 2016-07-11 1104
638 진서 안평헌왕부6 [2] 선비욜롱 2016-07-11 1072
637 진서 안평헌왕부5 선비욜롱 2016-07-11 953
636 진서 안평헌왕부4 선비욜롱 2016-07-11 1146
635 진서 안평헌왕부3 [1] 선비욜롱 2016-07-11 967
634 진서 안평헌왕부2 [1] 선비욜롱 2016-07-11 985
633 진서 안평헌왕부1 [4] 선비욜롱 2016-07-11 2391
632 안녕하세요 물극필반 2016-06-17 1029
631 안녕하세요 원커넥트 2016-06-11 924
630 매직 더 개더링 - Cephalid의 유래 코렐솔라 2013-11-04 1846
629 晚上好~ 류화 2016-01-09 1828
628 매직 더 개더링 - Barry's Land ? 코렐솔라 2013-09-01 6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