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사항 : 사료 참조는 파성넷에서 했으며, 파성넷에 나온 사료 분류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1.  유표의 세력은 생각 보다 불안정했다. 장선의 반란이 대표적

후에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유표는 형주를 인솔하여 원소를 호응했다. 환계는 장사태수 장선(張羨)에게 권하여 말했다.

"무릇 큰 일을 거행하면서 도의에 근본을 두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은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제환공은 제후들을 통솔하여 주왕을 받들었고, 진문공은 숙대를 방축시켜 주왕을 영접했습니다. 지금 원소는 이것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고, 유목은 이에 호응하고 있는데,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방법입니다. 명부께서 반드시 공로를 세워 정의를 밝히고 행복을 보존하고 화를 멀리하시려고 한다면 그와 연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선이 말했다.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향하면 괜찮겠소?"

환계가 대답했다.

"조공은 비록 세력은 약하지만, 의로움에 기대어 병사를 일으켜 위험에 빠진 조정을 구하고, 황상의 명령을 받들어 죄있는 자를 토벌하였는데,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네 개 군을 들고 세 강을 보존하면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위해 안에서 호응한다면 역시 옳지 않겠습니까!"

장선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장사와 옆의 세 군을 인솔하여 유표에게 항거하고, 사자를 보내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마침 이때, 원소와 조조가 전투를 계속했으므로 조조의 군대는 남쪽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표는 급히 장선을 공격하였고, 장선은 병들어 죽었다. 성은 함락되었으며, 환계는 스스로 몸을 숨겼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유표는 그를 종사좨주로 임명하고, 처의 여동생 채씨(氏)를 그에게 시집보내려고 생각했다. 환계는 스스로 이미 혼인했다고 설명하고 거절하였으며, 그것을 기회로 병을 핑계삼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조조는 형주를 평정한 후, 환계가 장선을 위해 계책을 세웠다는 것을 듣고 그를 평가하고는 불러서 승상연주부로 임명하고, 조군태수로 승진시켰다. 위나라가 처음 세워졌을 때, 호분중랑ㆍ시랑이 되었다. 당시 태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임치후 조식이 총애를 받았다. 환계는 문제의 덕이 높고 나이도 많으므로 응당 태자가 되어야 한다고 자주 진술했다. 공개석상에서 충언하고 은밀하게 권하였으며, 앞뒤로 지극히 간절했다.<삼국지 환계전>

건안 3년 장사태수 장선(張羨)이 영릉, 계양을 가지고 유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유표는 병사를 파견해 포위하여 공격하고 장선을 퇴패시키고선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렇게 유표가 개척한 토지는 굉장히 넓었는데 남쪽으로 오령에 접하고 북쪽으로 한천에 접했으며 지방이 수 천리요 갑사가 10만명 이었다. 당초에 형주의 인정은 요동되기 쉬웠는데 이에 더해 사방이 진동하니 도적이 창궐하고 곳곳이 불안하였다. 유표는 인재를 초빙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방도가 있어 무력과 안무를 겸하여 써서 간활한 숙적이 오히려 그를 위해 힘을쓰고 만리가 청정하니 노소를 불문하고 기뻐하면서 복종하였다. 관서,연주,예주의 학사들중에 귀부한 사람이 수천명이었는데 유표는 이들을 안위하고 구제하여 모두들 완전한 조력을 얻을수 있었다. 마침내 학교를 일으키고 널리 유술을 구해 기모개(綦母闓), 송충(宋忠)등이 5경장구를 찬립했는데 이를 후정()이라고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기르면서 종용히 형주를 지켰다.<후한서 유표전>

[주1] 헌제춘추에 이르길 “장제가 무리를 이끌고 형주에 들어왔는데 가후가 이를 따라 유표에게 귀부했다. 양양성의 태수가 이들을 받아 들이지 않자 장제가 이를 공격했는데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제의 종자인 장수(張繡)가 무리를 거둬들여 퇴각하였다. 유표는 자책하길 스스로가 빈주의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여겨 사절을 보내 장수를 불러들였다. 장수는 마침내 양양에 진수하여 형주의 북쪽 울타리가 되었다.”

[주2] 영웅기에 이르길 “장선은 남양 사람이다. 일찍이 영릉, 계양 태수를 하면서 강상지역의 인심을 많이 얻었다. 그러나 성정이 완고하고 순종하지 못하니 유표가 그 위인을 박하게 여겨 존중하지 않았다. 장선은 이로 인해 원한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장사태수(長沙太守)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주 : 『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길 「장선은 남양 사람이다. 앞서 영릉과 계양의 현장이 되었다가, 장강과 상수(湘水) 사이의 민심을 크게 얻었는데, 성품이 굴강(屈强)하여 순종하지 않았다. 유표가 그 사람됨을 천박하게 여기기어, 예우하지 않음이 심했다. 장선이 이 때문에 원한을 품다가, 마침내 유표에게 모반한 것이다.」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張 )을 세웠다.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零陵), 계양(桂陽), 북으로 한천(漢川)을 거두어 땅이 수천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다. <삼국지 유표전>

[주 : 『영웅기』에 이르길 「주 경계의 많은 도적들이 이미 모두 없어지니, 유표가 이에 학관(學官)을 열어 세우자 널리 유생들을 구하게 하고, 기무개(綦毋闓)와 송충(宋忠) 등을 시켜 『오경장구(五經章句)』를 편찬하게 했는데, 이를 후정(後定)이라 부른다.」고 한다] 


건안 3년이면 198년. 관도대전은 200년.


장선의 반란을 몇 년이 지나도 평정하지 못 했다는 삼국지의 구절로 보았을 때, 적어도 장선의 난이 1년 이상은 가지 않았나 싶네요.

관도대전 전에 반란을 진압했어도, 넓은 영역에서의 반란 뒷수습을 단기간에 하는 행위는 어려웠을 겁니다. 



2. 형주 내 호족 세력은 대부분 친 조조 파였다.



조조(曹操)가 원소와 더불어 관도에서 대치하는 때에 이르러 원소는 사람을 보내 조력을 구했는데 유표가 이를 허락하였지만 병사를 보내지 않았고 또한 조조를 돕지도 않고 천하의 변화를 관망하고자 하였다. 종사중랑 남양사람 한숭(韓嵩)과 별가 유선(劉先)이 유표에게 말하길 


“지금 호걸들이 더불어 경쟁하는데 두명의 영웅이 서로 대치하는 이때에 천하의 관건이 장군에게 달려있습니다. 만약 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그 피곤한 틈을 타서 병사를 일으키는 것이 가하고 그렇지 않다면 진실로 장군은 마땅한바를 택하여 따르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10만명의 갑병을 움켜쥐고 앉아서 다른 사람의 성패를 구경하며 구원을 요청해도 구하지 않고 현인을 봐도 귀부하길 원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두 명의 원한이 필시 장군에게 모일테니 중립을 유지하셔서는 안됩니다. 조조는 용병을 잘하며 현준한 사람이 많이 귀부했으니 그 형세가 반드시 원소를 격파할것이고 연후에 병사를 옮겨 강한을 향한다면 장군께서 막아낼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지금의 훌륭한 계책으로는 형주를 들고 조조에게 귀의하는것보다 좋은게 없으니 조조는 필시 장군에게 깊이 감사할것이고 오래도록 복록을 누리고 후세에 까지 미칠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만전의 계책입니다. ”


라고 하고 괴월도 권했지만 유표는 의심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한숭을 조조에게 보내 허실을 염탐하도록 하였다. 한숭에게 말하길 


“지금은 천하가 어떻게 정해질지 모르고 조조는 천자를 데리고 허현에 도읍을 정했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그 틈을 관찰하도록 하시오.”


라고 하자 한숭이 답하길 


“제가 조공의 현명함을 보니 반드시 천하에 뜻을 얻을 것입니다. 장군께서 귀부할 뜻이 있다면 저를 사자로 파견하는 것이 좋지만 만약 유예하는 것이라면 제가 경사에 이르러 천자가 만약 저에게 직위라도 주신다면 거절이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경우 천자의 신하이자 장군의 옛 벼슬아치가 될것입니다. 천자의 곁에 있으면 천자를 위할 뿐이지 다시 장군을 위해 사력을 다하지 않을것입니다. 원하건대 다시 고려해주십시오.”


라고 했는데 유표는 그가 사절로 가는 것을 꺼려 한다고 여겨 억지로 보냈다. 허도에 이르자 과연 한숭을 시중, 영릉태수에 임명했다. 돌아와서는 극도로 조정과 조조의 은덕을 칭송하고 유표에게 아들을 조정에 인질로 보내라고 권했다. 유표는 대노하여 한숭이 두 마음을 먹은 것으로 여겨 병사를 진열시키고 그를 욕하면서 장차 참수하고자 하였다. 한숭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천천히 임종을 맞기 전의 말을 했다. 유표의 처인 채씨는 한숭이 현자인 것을 알고 유표에게 간하여 멈추도록 하였다. 유표는 더욱 노해 한숭을 수행한 사람들을 고문하여 죽였다. 연후 유표는 한숭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알았지만 계속 감옥에 가두어 놨을 뿐이었다.<후한서 유표열전>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韓嵩)과 별가(別駕) 유선(劉先)이 유표에게 설득하였다. "호걸들이 병립하여 다투고 조조와 원소가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가 중대해짐은 장군께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장군께서 패업을 이루시려면 그 피폐함을 타고 일어나시고, 만약 그렇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따를 자를 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1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서 편안히 앉아 천하를 관망하십니다. 무릇 현명함을 보고서도 돕지를 아니하고, 화의를 청했는데도 얻지 못함은 양쪽의 원망이 장군께로 모이게 되어, 장군은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조조는 명철하여 천하의 인재들이 모두 그에게 몰리고 있으며, 원소를 깨뜨린 후에 강한(江漢)지역으로 향할 것이니, 장군께서 막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장군의 계책을 실행하려면 고을을 들어 조조에게 항복하면, 조조는 장군을 중히 쓰실 것이고, 오래 복을 누리시다가 후사를 물려주면 되니, 이를 만전(萬全)의 책이라 하겠습니다." 
 
대장 괴월( 越)도 또한 유표를 권하니, 유표가 의심스러워 한숭을 조조에게로 보내 허와 실을 관찰하게 했다. 한숭이 돌아와서 조조의 큰 덕에 감화되어 유표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자고 설득했다. 유표는 한숭이 조조에게 돌아갔음을 의심하여 매우 화를 내며 한숭과 그의 수행원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한숭이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알고는 그만 두었다. <삼국지 유표열전>

[주 : 『부자(傅子)』에 이르길 「처음 유표가 한숭에게 말하길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안정될지 알지 못하는데, 조공은 천자를 끼고 허현에 도읍하였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그 틈을 살펴봐 주시오.”라 했다. 
 
한숭이 대답하길 “성인은 절개에 통달하고, 그 다음은 절개를 지킨다고 하는데, 이 한숭은 절개를 지키는 자입니다. 무릇 임금을 섬기고 임금을 위하며, 군신의 명분이 정해져 있으니, 죽음으로써 이를 지킵니다. 지금 계책과 명분은 인질을 맡기는 것이니, 오직 장군께서 명하신 것이라면 비록 끓는 물에 뛰어들고 불속으로 들어갈 것이며 죽어도 말이 없을 것입니다. 

이 한숭이 살펴보건대, 조공은 지극히 명철(明哲)하여 반드시 천하를 구제할 것입니다. 장군께서 능히 위로는 천자께 순응하고 아래로는 조공에게 귀의하실 수 있다면, 반드시 백세의 이익을 누릴 것이고, 초국(楚國=형주를 지칭)은 실로 그 보우를 받으니, 이 한숭이 할 수 있습니다. 계획이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 한숭을 경사에 사신으로 보내시어, 천자께서 한숭에게 관직을 내리시면, 곧 천자의 신하고 되고, 장군에게는 예전의 관리가 될 뿐입니다.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을 위하는 법이니, 곧 이 한숭은 천자의 명을 지킬 것이고, 의리상 다시는 장군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다시 생각해서, 이 한숭에게 책무를 지우지 마십시오.”라 했다. 
 
유표가 마침내 그를 사신으로 보내닌, 과연 그가 말한 바처럼 되어, 천자가 그를 시중에 배수하고 영릉태수로 승진시키니, 돌아와 조정과 조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유표는 그가 다른 맘을 품고 있다고 여겨, 속료(屬僚) 수백명을 크게 모으고 병사들을 배치시켜놓고 한숭을 만났는데, 크게 노하여 부절을 가지고 그를 참수하려 하여, 꾸짖어 말하길 “한숭 네가 감히 다른 맘을 품었느냐!” 라 했다. 
 
모두 다 두려워하여 한숭에게 사죄하라고 하려 했다. 한숭은 움직이지 않고 유표에게 말하길 “장군께서 이 한숭을 책임지셔야 하는 거지, 한숭이 장군을 책임지지 않습니다.”라 하며, 앞서의 말을 갖추어 진언했다. 유표의 분노가 그치지 않으니, 그의 아내 채씨(蔡氏)가 간언하길 “한숭의 초국의 신망을 받는 자입니다. 또 그 말이 정직하니, (그는) 죽여도 사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 했다. 유표가 이에 주살하지 않고 그를 가두었다.」고 한다.] 


건 안(建安) 13년(209) 조조가 유표를 정벌하니, 이르기도 전에 유표는 병들어 죽어버렸다. 처음에 유표와 처는 아끼는 작은아들 유종(劉琮)을 후사로 세우려 하였고, 채모(蔡瑁)와 장윤(張允) 등이 당파를 만들어 큰아들 유기(劉琦)를 강하태수(江夏太守)로 내보내니, 모두들 결국 유종을 후계자로 받들었다. 유기와 유종은 원수가 되었다. 

[주 : 『전략(典略)』에 이르길 「유표의 병들자, 유기가 돌아와 병세를 살폈다. 유기의 성품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채모와 장윤은 유기가 유표를 뵙고 부자가 서로 감복하여 다시 (유기에게) 후계자로 맡길 뜻이 있게 될까 두려워 하여, 말하길 “장군께서는 그대에게 강하를 진무하여 나라의 동쪽 울타리가 되라고 명하셨으니, 그 책임이 지극히 중합니다. 지금 사람들을 풀어놓고 왔으니, 필히 견책과 꾸지람을 받아서, 부친의 기쁜 마음을 해치고 병은 더 위독해 질 것이니, 이것은 효성스럽고 공경하는 일이 아닙니다.” 라 했다. 마침내 대문 밖에서 저지당하여, 뵙지 못하게 하니, 유기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고 한다.] 

괴월과 한숭과 동조연(東曹 ) 부손(傅巽) 등이 유종에게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하였다. <삼국지 유표열전>

유표가 죽은 후, 왕찬은 유표의 아들 유종(劉綜)에게 조조에게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삼국지 왕찬전>

유표는 원소가 강성한 것을 보고 은밀히 원소와 서로 통했다. 왕준이 유표에게 말했다, 


“조공(曹公)이 천하의 영웅이니 능히 패도(霸道)를 일으켜 제환공이나 진문공의 공업을 계승할 것입니다. (원소와 가까이 하는 것은) 이제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만약 하루아침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멀리 막북(漠北-사막 북쪽)에 구원을 청해야 하는 격이니 또한 곤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표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왕준은 나이 64세에 무릉에서 수명을 다하니 공이 이를 듣고 슬퍼했다. 형주가 평정되자 친히 장강에 임해 상여를 맞이해 강릉에 개장(改葬)하고, 표를 올려 선현(先賢)으로 삼았다.<삼국지 왕준전>


이렇듯 유표의 수하들과 괴씨 등 유력 호족들은 조조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유표에게 대놓고 '조조에게 항복하라'고 권했을 정도니;; 더욱이 유표가 친 조조파인 한숭을 죽이려하자, 그의 아내이자 형주 유력 호족 가문이었던 채씨는 한숭을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채씨가 채모 가문의 입장을 대표해 한숭을 변호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채모 쪽도 친 조조파라는 얘기. 실제로 채모는 유종파였고, 유종파는 조조가 형주를 침공했을 때 아무런 힘도 써보지 않고 조조에게 투항합니다. 

유종 사망 후에는 초주 마냥 다들 조조에게 항복하라고 아우성치고요.

'조조와 원소가 싸울 때 유표는 어느 한 쪽을 돕지 않고 관망만 했다'라는 구절 때문에 유표가 우유부단하다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지만, 당시 유표 세력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유표는 관망하고 싶어서 관망한게 아니라 중원에 개입할 힘이 부족해서 개입하지 못 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당장 한숭만 하더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하는데...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점과는 달리, 유표는 우유부단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우유부단한 사람이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제천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했겠습니까? 그것 보다는 유표 세력 내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켜만 볼 수 없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유표 자신은 원소 쪽이었지만, 형주의 각종 호족들과 사대부들은 대부분 조조편이었으니, 유표 입장에서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초평 원년 장사태수 손견(孫堅)이 형주자사 왕예(王叡)를 죽였는데 조서를 내려 유표를 형주자사로 삼았다. 당시에 강남에서는 동족이 결성한 도적떼가 들끓었고 또한 원술(袁術)이 노양에 주둔하고 있어 유표가 갈수 없어 단마로 의성으로 들어와 남군사람 괴월(蒯越), 양양사람 채모(蔡瑁)에게 더불어 모획할 것을 청하였다.<후한서 유표열전>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유표는 형주의 호족 세력의 힘을 빌려 형주의 1인자로 군림한 인물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지지 기반의 뜻과 반하는 행위를 함부러 할 수 없었고요.


3. 유표는 정말 관망만 했는가?


공이 무음(舞陰)에서 돌아온 후 남양(南陽), 장릉(章陵)의 여러 현들이 다시 모반하여 장수(張繡)에게 붙자 공이 조홍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으나 불리했다. 돌아와 섭현에 주둔했는데 여러 차례 장수와 유표의 침공을 받았다. 
 
겨울 11월, 공이 친히 남쪽으로 정벌하여 완에 도착했다. [39] 유표의 장수 등제(鄧濟)가 호양(湖陽-남양군 호양현)을 점거하니 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등제를 사로잡자 호양이 항복했다. 무음(舞陰)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39] 위서 – 육수(淯水-한수의 지류)에 임해 죽은 장사(將士-장병)들에 제사지냈는데,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자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고 애통해했다.
 
3년(198년) 봄 정월, 공이 허도로 돌아와 처음으로 군사좨주(軍師祭酒)를 두었다. 
 
3월, 공이 양(穰-남양군 양현)에서 장수(張繡)를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군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며 군(軍)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40] 

[40] [헌제춘추] – 원소를 배반한 병졸이 공에게로 와서 말했다, 

“전풍(田豐)이 원소에게 허도를 빨리 습격하라고 하면서 만약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면 가히 사해(四海)를 지휘해 평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공이 장수(張繡)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공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공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공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 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안중(安衆-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張繡)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安衆)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공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삼국지 무제기>

태조가 원소(袁紹)를 정벌하려고 할 때, 유표(劉表)는 군대를 일으켜 원소를 구원했으나 관중(關中)의 모든 장수들은 중립을 지켰다.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과 유포가 틈이 벌어지자, 위기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가 되어 익주(益州)에 사신을 보내 유장에게 군대를 파견하게 하여 유표의 군대를 견제하도록 했다.<삼국지 위기전>


197년부터 198년까지 유표는 조조의 배후를 공격합니다. 모두 실패로 끝났기는 하지만, 어쨌든 유표가 관망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유표가 관망했다는 표현은 이후에 나옵니다. 이는 위에서 살펴 보았던 점들(장선의 반란, 형주 호족들의 조조화) 때문.

게다가 유장도 유표를 견제하니, 내부 사정이 안 좋은 유표 입장에서는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었습니다.






번외 : 유표는 왜 천자를 사칭했나?

유선(劉先)의 자는 시종(始宗)이며, 박학하고 기억력이 좋았고, 또한 황로(黃老=황제 노자)의 말을 좋아하였으며, 한가의 전고(典故)를 밝게 익혔다. 유표의 별가가 되자, 장(章=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일종)을 받들고 허도로 가서, 태조를 뵈었다. 

이때 빈객들이 아울러 모여 있었는데, 태조가 유선에게 묻기를 


“유목(劉牧=유표)은 어째서 하늘에 교사를 지내는가?” 


라 하니, 유선이 대답하길 


“유목께서는 한실의 심복이 되고 목백의 지위에 계신데, 왕도가 평안치 못함을 만나고, 뭇 흉악한 자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천자에게 바칠) 옥백(玉帛)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조빙(朝聘)하지 못하였고, 장표(章表)를 다듬었지만 임금 있는 곳에 다가가지 못해, 이 때문에 천지에 교사를 지내, 붉은 충실함 마음을 분명히 알리는 것입니다.”


라 했다. 태조가 


“뭇 흉악한 자들은 누구인가?”


라 물으니, 유선이 


“눈 들어 보이는 자가 전부 다 바로 그들입니다”


라 했다. <삼국지 유선전>


형주목 유표는 두기와 맹요(孟曜)에게 명령하여 한나라 황제를 위하여 제사나 조회 때 연주하는 아악(雅樂)을 편성하도록 했다. 아악을 편성한 후, 유표가 관소의 정원에서 아악 연주를 보려고 하자 두기가 그에게 간언하였다.

“지금 장군은 천자를 위해 아악을 편성했는데, 이것을 관소의 정원에서 연주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유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취소했다. <삼국지 두기전>

당시에 형주목 유표(劉表)는 공납을 바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하다가 마침내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낼 때 마치 천자가 가마를 타고 가는 것처럼 했다. 조칙을 내려 그것을 질책하려고 하자 공융은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영형주목 유표가 방자하게도 법도를 어기다가 마침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마치 사직을 갖추려는 것처럼 의식을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우매하여 극악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 죄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지엄한 국체(國體)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만승(萬乘)은 지극히 엄중하고, 천왕(天王)은 지극히 존엄하기 때문에 그 몸을 성스럽게 여겨야 하며, 나라의 신기(神器)가 되어야 합니다. 계급(階級)은 멀리 걸려 있으며, 녹위(祿位)는 한계와 등급이 있습니다.33) 오히려 하늘에는 계단이 없으므로 해와 달까지는 뛰어넘지 못합니다.34) 하찮은 신하라도 이러한 법도를 어기면 빨리 제거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 사방에서 이러한 조짐이 나타나면 그 싹을 미리 막아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비록 중대한 잘못이 있어도 그것을 감추어주고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의는 그와 같은 관용은 쥐새끼에게 그릇을 던져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35) 이는 제나라 군사가 초나라는 제쳐두고 풀을 거두지 않을 것을 책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며36), 왕사가 패했음에도 진나라 사람들을 기록에 남기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37)

전에 원술(袁術)의 죄는 폭로하고 지금 유표에 관한 일은 아랫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높은 억덕을 보려면 말뚝이라도 사용하지만, 천험의 높은 산은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38) 유표의 발호(跋扈)를 살펴보면, 자기 마음대로 열후(列侯)를 죽였고, 조칙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공비(貢篚)39)를 끊고 도둑질을 했습니다. 또한 아주 흉악한 무리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오로지 주상에게 반역을 할 생각을 품은 자들이 연수(淵藪)40)로 모여들고, 고정(郜鼎)이 대묘에 있으니 이보다 심한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41)라는 상황과 같습니다. 뽕잎이 떨어지고 기와장이 깨지는 것을 보면 그 정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42)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유표가 제사를 지낸 일은 모른 척하는 것이 나라의 권위를 세우는 길일 것입니다.”<후한서 공융전>


유표가 천지에 교사(郊祀)를 지내자, 한숭이 바른 말로 간언했지만 따르지 않으니, 점차 거스르게 되었다. 사명을 받들어 허도에 도착하니, 그에 관한 일은 앞의 주에 있다. <삼국지 한숭전>

음악은 반대로 연주하지 못 했어도, 유표는 천지에 제사는 기어이 지냈습니다. 정확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숭전의 내용으로 보아 대략 장선의 난을 진압한 이후가 아닌가 싶습니다.


천자를 사칭하는 행위는 원술의 사례로 보아, 대놓고 상대 세력에게 어그로를 끄는 행위였습니다. 실제로 197년에 원술이 천자를 참칭했다가 망한 적이 있고요. 유표도 원술을 보고 천자를 사칭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이 큰지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유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자를 흉내냅니다(몇몇 부분은 그만두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서 살펴 보았던 이유들 때문에 유표가 내부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천자를 흉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즉, 협천자를 하는 조조에 대항하고(형주의 호족들이 대부분 조조파였다는 걸 생각해보면, 괴월 같은 형주 호족들을 타겟팅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 뒤숭숭한 형주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 자신을 황제로 칭해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형주의 사대부들에게 강요한거죠.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고서도 유표는 무리수를 둔 셈인데, 역으로 말하면 그만큼 유표 세력이 불안정했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유표 사후 친 조조파의 득세로 인해 조조에게 항복(....). 당장 조조 앞에서 조조 디스를 하며 유표의 천자 놀이를 정당화한 유선마저 친 조조파였으니;;(본문 위의 사료 참조)
조회 수 :
4355
등록일 :
2015.10.11
13:53:08 (*.64.205.67)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community_three/150653/6b3/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150653

하트개미

2015.10.11
21:35:51
(*.46.1.248)
유표는 조조와 연합하여 원술을 남양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는데 후에 장제가 형주 양성으로 와서 유시를 맞고 죽자 조카 장수가 남양으로 가 조조에게 항복하고 연합에 합류하게 됩니다. 이후에 장수가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몇 차례 교전을 하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을 때 무슨 이유인지는 저도 잘 모르나 유표가 장수를 도와 조조를 몰아냅니다. 후에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하지만요.

佈倚仙人

2016.12.11
12:47:17
(*.64.234.99)
완섭이 깝쳣으나 조콩이 바른 것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신 게시판 관리 기준 운영진 2014-01-28 28908
공지 (필독공지) 삼국지 이야기 방입니다. 아리에스 2013-07-24 31434
930 주유 : 5만 달라고요! [4] 포증 2016-01-22 3406
929 협천자의 힘 - 천자를 통해 전국을 굴복시키다 [8] 바람처럼 2015-10-11 3164
» 유표는 정말 우유부단함 때문에 조조를 공격하지 못 했는가? [2] 바람처럼 2015-10-11 4355
927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3] 우울해 2015-10-05 2395
926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이긴 요인이 되는 협천자와 협천자가 당시에 적용되는 과정과 작용 emile 2015-10-03 2648
925 오나라 조명글 3 - 조자, 심형 포증 2015-08-27 2355
924 오나라 조명글 2. - 정통론 포증 2015-08-26 2052
923 오나라 조명글 - 서(序), 장흠(1) 포증 2015-08-24 2276
922 연의에서의 관우도 지휘관으로서는 수준 미달이다. [2] 미백랑 2015-08-21 3655
921 태위 양표는 비순정적이다 마리오 2015-08-21 1795
920 후한의 태위 양표는 로리콘이 아닐까요? [1] 마리오 2015-08-05 2531
919 강유의 북벌과 촉한의 멸망에 대한 고찰 [4] 바람처럼 2015-05-23 5545
918 유선은 왜 황호의 말을 따라서 촉한의 멸망을 초래했는가?? 바람처럼 2015-05-13 3899
917 강유의 북벌과, 강유를 살려둔건 유선의 뜻 바람처럼 2015-03-25 3718
916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낸 사마의 미백랑 2015-01-25 4250
915 강유에 대한 재평가 2 - 방어 전략 역사학도생 2015-01-25 3998
914 강유에 대한 재평가 1- 북벌 역사학도생 2015-01-25 6787
913 강유는 항장 출신이라 견제 받았는가(2) [3] 바람처럼 2014-11-17 4948
912 강유는 정말 항장 출신이라 견제를 받았는가? [6] 바람처럼 2014-11-16 5770
911 호제는 왜 패전의 처벌을 받지 않았는가? [4] 바람처럼 2014-11-16 48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