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관우의 북진에는 위촉오의 이권과 갈등이 여러 모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관우의 전술을 분석하고자 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우의 북진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융중대와 한중전 직후 유비군의 상황


 장군께서는 제실(帝室-황실)의 후예인데다 사해에 신의(信義)를 떨쳤으며, 영웅들을 총람(總攬)하며 현인 그리워하는 것을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 하십니다. 만약 형주, 익주를 타넘어 차지해 그 엄조(巖阻-험조)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제융(諸戎-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밖으로는 손권과 결호(結好-화친을 맺음)하고 안으로는 정리(政理-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洛-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秦川)으로 출병하신다면, 단사호장(簞食壺漿-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 제갈량전

 

 (주6) 선주가 조공(曹公)과 함께 다툴 때 형세가 불리했다. 의당 퇴각해야 했으나 선주가 크게 화를 내며 퇴각하려 하지 않으니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법정이 선주의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선주가 말했다,

 “효직은 화살을 피하시오.” 

 법정이 말했다, 

 “명공께서 친히 시석(矢石-화살과 돌)을 당해내시는데 하물며 소인이겠습니까?” 

 이에 선주가 말했다, 

 “효직, 내가 그대와 함께 물러나겠소.” 

 그리고는 퇴각했다. - 법정전 주석


 건안 23 년(218)에 도적 마진, 고승등이 처에서 모반하여 수만 명을 모아 자중현으로 진격했다. 그 당시 유비는 한중에 있었고, 이엄은 다시 병사를 징발할 수 없었다. 단지 그 군의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서 마진과 고승등의 머리를 베었을 뿐이다. - 이엄전


 유비는 한중을 차지하려고 다툴 때, 긴급 문서를 내려 병사를 보낼것을 요구했다. 군사장군 제갈양은 이 문제를 양홍에게 물었다. 양홍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한중은 익주의 인후로서 존망의 기회가 되는 지역입니다. 만일 한중을 잃는다면 촉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은 각 가문의 화근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남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여자는 수송을 담당해야 하는데, 병사를 파견함에 있어 무엇을 의심합니까?" - 양홍전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 맹달전


 조조는 수도로 돌아와서 두습을 부마도위로 임명하고, 남아서 한중의 군사를 통솔하도록 했다. 그는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계도하였으므로, 백성들은 스스로 기뻐하며 고향을 나와 낙양과 업성으로 옮기려는 자가 8만여 명이나 되었다. - 두습전


 유비가 한중을 취하고 하변(下辯)에 이르렀을 때, 태조는 무도군(武都)이 내지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곳의 백성들을 옮기려고 하였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토지에 집착할까 걱정했다. 양부는 평소 위엄과 신뢰가 탁월했으므로, 앞뒤로 백성들과 저족(氐) 사람들을 옮겨 그들로 하여금 경조(京兆)ㆍ부풍(扶風)ㆍ천수(天水) 경내에 살도록 하였는데, 총 1만여 호나 되었다. 군청(郡)을 소괴리(小槐里)로 옮기고 백성들은 아이를 엎고 그를 따랐다. - 양부전


 융중대 전략은 기본적으로 형익 양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서쪽, 남쪽의 이민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손권과 화친하여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에 한 명의 상장이 형주에서 완, 낙으로 향하게 하고 유비는 익주에서 진천으로 향한다는 전략입니다.


 하지만 한중전에서 승리한 유비는 더 이상 북진을 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본진이 대파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이엄이 소방수 역할을 할만큼 반란이 거셌고, 병력이 모자라 제갈량에게 충원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막상 점령한 한중도 이미 조조가 많은 인구를 이주시킨 후였습니다.


 다만, 유봉과 맹달 등에게 명해 상용 등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익주와 형주를 잇는 또 다른 중간지대를 확보했을 뿐이었습니다.


3. 관우의 북진은 융중대에 거스르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물론 융중대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아직 이민족들과 화합하지도 못했고, 손권과는 형주를 분할하는 선에서 동맹을 유지했지만 우호적이라고 보기도 힘들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유비는 한중전 이후 주저앉았으니, 형주군만으로의 북진이라면 융중대에 어긋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4. 관우의 북진 의도에 대한 당시 사람들과 이후 사람들의 생각


 양(梁-예주 양국), 겹(郟-영천군 겹현) 육혼(陸渾-홍농군 육혼현)의 군도(群盜-뭇 도적)들이 혹 멀리서 관우의 인호(印號-관인과 봉호)를 받아 그의 일당이 되었고 관우의 위세가 화하(華夏-중국)를 진동했다. 

 
조공이 허도(許都)를 옮겨 그 예봉을 피할 것을 의논했는데,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장제(蔣濟)가 말하길,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필시 원하지 않을 것이니 가히 사람을 보내 손권이 그 배후를 치도록 권할 만합니다. 강남(江南)을 떼어내어 손권을 봉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번(樊)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라 했고 조공이 이에 따랐다. - 관우전

 "산으로부터 흐르는 물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관우가 파견한 다른 군대는 이미 겹현(郟: 허창 인근 하남성의 지명) 아래에 주둔해 있으며, 허성() 남쪽 지역의 백성들은 불안해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관우가 지금 감히 즉시 진격하지 않는 까닭은 우리 군대가 그들의 뒤를 끊을까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만일 도주한다면 홍하(洪河) 이남 지역은 다시는 위나라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잠시 기다려야만 합니다." - 만총전

 육손이 말했다.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처음으로 큰공을 세워 마음은 교만해지고 의지는 안일해졌으며 오직 북진에만 힘쓰고 우리에게는 경계의 마음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질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한다면, 틀림없이 더욱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나가면, 그를 붙잡아 제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려와 지존을 만나는 것은 마땅히 좋은 계략입니다." - 육손전

 왕숙이 말했다.


“옛날 관우(關羽)는 형주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漢江)의 연민에서 [漢濵] 우금을 항복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으로 향하여 천하를 쟁탈할 뜻을 가졌습니다. 후에 손권이 습격하여 그의 장수와 병사와 가족들을 취하였으므로, 관우의 병사는 하루아침에 와해되었습니다. 지금 회남의 장병(將兵:관구검과 문흠의 부하)의 부모와 처자는 모두 내지(內地)의 각 주에 있습니다. 긴급히 출발시켜 방비하여 보호하고, 그들로 하여금 전진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 반드시 관우와 같이 붕괴되는 형세가 나타날 것입니다.” - 왕숙전


 만약 관우가 단지 양번을 점령하고자 하였다면, 조조는 예봉을 피하기 위해 천도를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만총도 진격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분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육손이 북진에만 힘쓴다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왕숙도 천하를 쟁탈할 뜻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우가 북진을 한 애초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칠군 수몰 후의 대체적인 반응은 한마디로 이렇습니다.

 "관우는 북진에 힘을 쏟고 있으며 위 전체와 맞짱뜨려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은 관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비가 옹양주로 나갈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합니다.

5. 결론

 당시 관우의 북진은 융중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비군의 정황만으로 관우의 북진은 북벌이 아니라고 확신할만한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북벌이 아니라는 주장이 성립이 되려면, 최소한 관우전, 육손전, 만총전, 왕숙전의 기록을 상쇄할만한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그 기록을 찾질 못했습니다.

 저는 관우의 북벌이 성공 가능했는지 여부를 고찰하고자 이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당시 관우군의 행동과 여러 사람들의 판단을 종합적으로 살펴 본다면, 관우는 최소한 칠군 수몰 이후에는 최소 허까지 공략하려고 했고 최대로는 조조와 천하를 다투려고 했을거라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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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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