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cafe.naver.com/historygall/57166

관우의 북벌은 칠군수몰에 힘입어 조조가 천도를 고려하기도 하였고 조인이 번성을 버리고 도주를 하려는 것을 만총이 만류하고 각지의 도적들이 관우에게 호응하는등 중화를 흔들었습니다. 
관우의 북벌에 대해 오래전부터 논의가 많았지만 왜 관우가 북벌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흔히 관우의 북벌은 양양과 번성을 얻는 목표로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 문제점은 알고있는 사실에 대한 간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관우가 번성을 토벌할 때에 병사를 남겨 공안과 남군을 수비하게 하였고 여몽은 상소에서 수비병을 많이 남긴것은 여몽이 뒤를 치는 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관우는 번성을 치러가는 상황에서 공안과 남군에 많은 수비병을 두고간 것이지요. 

그런데 관우가 관할하는 지역은 형주 전체에서 매우 적은 부분으로 익양대치 이후 강릉 영릉 무릉의 3군으로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강릉 74만7천 영릉 1백만 무릉 25만으로 3군을 합쳐 2백만명 밖에 안됩니다. 또한 익양대치 때에 유비의 원군을 기다려야 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관우가 거느린 병력은 많은 병력으로 보기힘듭니다. 익양대치 이후 병력을 충원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 수효가 매우 많을 수는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오나라의 침공을 걱정하면서 많은 수비병력을 두고 북벌을 한 것입니다. 익양대치 당시 감녕전에 따르면 관우는 노숙을 상대하기 위해 3만이라 과장하고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갔는데 이 점을 고려하면 북벌 당시 관우의 병력은 단독으로 양양과 번성을 취하거나 이를 구원하는 군대를 상대로 수적 우위를 점할 정도라고 보기 힘듭니다.

관우가 북벌한 시기는 관우전에 따르면 219년에 관우가 번에서 조인을 공격했다고 되어있습니다. 다만 무제기와 삼보결록주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218년 1월 태의령 길본등이 허도를 공격하며 관우를 구원군으로 삼으로 하였고 같은해 10월 후음의 난 때에 조인을 불러 치게 했는데 이에 대해 당초 조인은 관우를 토벌하기 위해 번성에 주둔했다고 합니다. 

이는 관우가 번성의 조인을 공격한것은 219년의 일이지만 침공이나 위협은 218년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18년은 유비가 한중에 대한 공세를 가한 시기입니다.

관우의 북벌이 유비의 한중 공세와 연계된 것임을 볼 수 있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1. 제갈량의 융중대계
융중대에 따르면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에게 형주의 군사로 완, 낙양을 유비는 직접 익주에서 진천으로 출병

2. 법정의 상중하책 
상책 조조를 무너트리는 것이고 중책은 옹주와 양주를 잠식해 영토를 넓히고 하책은 굳게 지키며 오래 유지하는것입니다.

3. 요립의 비판
요립전에 따르면 유비가 한중을 친것으로 인해 관우가 죽고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3가지로 볼 때 익주에서 유비가 진격하고 형주에서 관우가 진격하여 최대의 목표는 조조를 멸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옹주와 양주의 땅을 얻는 것이며 최하로는 한중을 얻고 지키는 것입니다. 다만 법정의 계획과 유비의 세력과 조조의 세력을 볼 때 한번에 조조를 멸한다는 것은 꾸미는 말이고 실제로는 한중을 얻고 옹양의 땅을 얻는 정도가 최대 목표인 것입니다. 
요립의 비판의 경우 관우의 북벌이 유비가 한중을 친것과 관계가 없다면 한중을 친것에 대해 관우를 운운할리가 없습니다. 

즉 관우는 유비가 한중을 공격한 것을 돕기 위해 북벌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임무는 형주에서 위나라에 압박을 주어 한중의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지요.

조조의 행보 역시 이것이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조조의 행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218년 7월 군사를 조련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나섬
218년 9월 장안에 도착
219년 3월 야곡을 나와 한중의 양평 도착
219년 5월 장안으로 귀환
219년 10월 낙양 도착

유비의 공세는 218년에 시작되어 조홍이 오란을 격파하고 3월에 장비와 마초가 달아났습니다. 하후연전에 따르면 218년 유비가 양평관에 주둔하자 하후연이 제장들을 이끌고 맞서고 서로지키며 해를 넘깁니다. 그런데 조조는 7월에 출발하여 9월에 도착하였고 하후연이 죽은지 2개월 후인 3월에나 야곡을 나와 양평에 도착합니다. 

그러고는 5월에 돌아와서는 5개월 후인 10월에 낙양에 도착합니다. 조조는 무언가 느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비가 직접 나왔는데 장안에 도착하고도 6개월이 되어서야 한중에 갑니다. 흔히 말하는 조조의 천도 운운은 조조가 장안에 있을 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천도 운운하는 상황에서 어째서 2개월이 지나서야 낙양에 갔을까요?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야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조의 몸 상태가 안좋다던가요 하지만 그 보다는 전략적인 점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당시 관우가 형주에서 압박하고 219년에는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였다고 온회전에 나옵니다. 즉 한중이 미끼이고 형주와 양주의 북벌 가능성을 조조는 염려해야 합니다.

반대로 그가 형주나 양주에 집중하게 된다면 유비는 진천으로 나와 옹양을 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조조가 219년 10월에야 낙양에 도착한것은 이러한 점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비의 북벌을 대비하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한중을 얻은 유비는 이상하게도 법정의 중책인 옹양주를 공격하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전혀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지요. 단지 위연을 한중태수로 하였는데 위연의 발언에서 중책을 포기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위연은 포부를 묻는 유비에게 

조조가 쳐들어오면 막아내고 편장이 10만으로 오면 삼켜버리겠다. 포부는 좋습니다만은 모두 방어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한중태수이니 그에 대해 답한것이지만 공세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물론 이런 문답을 가지고 확실하게 이렇다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가 한중승전의 기세를 이어 북벌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적어도 유비는 219년에 북벌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만일 북벌할 의사가 있었더라도 조조가 낙양을 떠나고 관우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 220년에나 시행할 가능성이 존재할 뿐이지요. 

그런데 관우는 어째서 물러나지 않았을까요? 유비가 한중을 얻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위나라의 군대는 양번에 집중될 것입니다. 관우가 단독으로이를 이겨낼 방법은 없지요. 

이에 대해서는 3가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1. 칠군수몰로 얻은 양번 함락의 기회의 욕심
2. 여몽에서 육손으로의 교체로 인한 오나라의 위협이 없다.
3. 아직 관우의 임무는 끝이 나지 않았다. 

1번은 육손전에도 관련하여 다루고 있고 2번은 여몽의 계략으로 인한것이지만 형주의 병력을 더대려 올 수 있으니 1번과 연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것은 3번입니다. 

확실한 기록적인 면에서 보자면 관우는 219년에 싸웠고 8월에 칠군수몰이 이루어집니다. 관우가 더 버티고 위나라를 집중시키고 유비는 잠시 병력을 쉬었다가 조조가 형주로 간 사이 북벌하여 옹양을 들이친다면 법정의 중책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살펴볼 것이 유봉전으로 유봉은 관우가 패한 후에 요청한 지원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관우가 양번을 포위한 상황에서 여러차례 지원을 요청한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관우가 패배한 후 유비는 유봉과 맹달을 원망하고 구원하지 않은 것을 문책하였는데 관우가 패하고 형주를 뺏긴후라면 유봉만이 지원하여서는 구해줄 방도가 없습니다. 실상 관우에 대한 구원은 양번전역에서 그를 도와야 하는데 돕지 않은 것을 뜻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다만 관우는 온전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유봉이 돕지않아 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립전에 따르면 요립은 관우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법칙없이 공격하여 싸우다 끝내 형주와 군대를 잃고 자신도 사망하였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양번을 치게 된것은 단지 기분에 따라 친것이 아닙니다. 헌데 그럼 요립은 왜 그런말을 하였을까요? 

이는 다시 관우의 임무로 돌아갑니다. 관우의 임무는 한중공격을 보조하여 형주에서 압박을 주는 것이고 더 크게 보아도 법정의 중책 실현을 위해 압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우는 단독병력으로 양번을 포위하고 싸웠습니다. 요립이 지적한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다는 것은 그가 무리하여 양번을 포위공격하며 한수 이북에 있다가 끝내 서황에게 패배하게 이른것을 지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우는 물러나던지 아니면 한수 이남에서 양양의 포위를 유지하며 위나라를 압박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칠군수몰이라는 큰 공에 의해 양번을 포위하고 얻으려는 무리를 하였다는것이 됩니다.

논리적 무리나 추정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약
1. 관우의 군대는 영역이 빈약하고 오나라의 위험으로 많지 않았다. 
2. 관우의 북벌은 유비의 한중 공격을 보조하기 위함이다. 
3. 유비는 법정의 중책을 시행하지 못하였고 관우는 홀로 싸우는 상황에 이른다.
4. 관우는 유리해진 상황으로 인해 무리하여 양번의 포위를 계속하였고 그 결과 파멸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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