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序

 

삼국지 고사 중에‘수어지교’라는 말이 있다. 직역해보면 물과 물고기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제갈량과 유비간의 돈독한 관계에서 유래된 고사이다. 실제로 제갈량전을 보면 수어지교를 말하는 구절이 있다.

 

[제갈량전]

(출처 : http://rexhistoria.net/1307 참고)

 

이에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제갈량과 유비의 관계는 연의에서도 관우와 장비를 능가하는 깊이로 종종 묘사된다. 임종의 자리에서 유선의 자질이 부족한 것 같으면 제갈량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말한 것도 그렇고, 제갈량 역시‘주군께서는 제가 초야에 나온 이래 계책을 말하면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유비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대목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약간 생각이 다르다. 유비의 행적을 가만히 살펴보면 과연 그가 제갈량의 말을 귀담아들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수어지교라는 외형처럼 그 둘이 전략을 논의함에 있어 돈독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유방의 예시로 비교하자면 유비와 제갈량은 유방과 소하의 관계였지, 유방과 장량의 사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다음의 목차에서 살펴보자.

 

 

2. 유비 생전 제갈량의 역할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초려를 나온 이후 유비의 작전참모로서 전투마다 종군하여 계책을 짜내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실제 정사의 모습은 다르다. 승상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기까지의 제갈량이 맡았던 벼슬은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ⅰ) : 형남4군 점령 이후 군사중랑장이 되어 세금을 거두고 군대에 무기와 양식을 보급함.

ⅱ) : 입촉 이후 군사장군 서좌장군부사로서 성도에 머무르며 식량과 병사를 보급함.

 

제갈량은 유비가 원정을 떠난 사이에 내부를 단속하고 물자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조의 경우로 따지자면 순욱의 위치에 제갈량이 있었고, 곽가와 순유의 역할은 법정과 황권이 맡았다. 그렇다면 왜 유비는 제갈량에게 본거지 수비 임무를 맡겼을까?

 

본거지 수비는 가장 신임하는 인물에게 맡겨야 되기 때문이다. 유비와 조조는 본인이 직접 원정을 다니는 지휘관형의 군주였는데 그럴 경우 자신의 기반이 되는 본거지의 수비를 맡길 적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관우와 장비의 경우에는 한 번씩 본거지 수비를 맡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더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후방보급을 담당할 인물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가 바로 제갈량이었다는 소리다.

(자세한 내용은 동글뱅이님 블로그의 유비의 권력분배에 관한 글을 참고)

 

그렇다면 필자의 의견이 모순이 아닌가? 본거지 수비는 가장 신임하는 인물에게 맡기는 것인데 그 역할을 맡은 제갈량이 어째서 유비와 돈독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서두에다가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유방과 장량이 아닌, 유방과 소하의 관계라고 말한 것이다. 즉, 유비는 제갈량을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관으로서는 신임했으되, 측근에서 전체적인 전략을 논의하는 참모로서의 능력에는 마찰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것이 필자의 논리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 기록으로 살펴보는 유비의 행보

 

필자는 본문의 주장을 가장 뒷받침하는 근거로 손권과의 형주분쟁을 든다.

 

제갈량이 초야에서 나온 이후 줄곧 견지했던 천하삼분지계에 따르면, 유비는 대업을 위해 손권과 협력관계를 취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제갈량은 몸소 강동으로 건너가 손권을 설득하여 동맹관계를 이끌어냈으며 이릉대전으로 끊어진 양국간의 연결을 부활시키고, 더 나아가서 굴욕적인 절맹호의까지 반포하며 손권과의 친선을 유지한다(절맹호의에 대해서는 http://blog.naver.com/begagi/50172233325 참고).

  

하지만 이릉대전 전까지의 유비의 행보는 어떠한가? 형주분쟁에서 시종일관 손권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begagi/50169360010 참고)

 

형주에서 패배하여 근거지 하나 없이 쫓겨 다닐 때는 몸을 바짝 엎드려 손권에게 온갖 아부를 떨다가, 남군을 양도 받고 익주를 점령하면서 천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자 태도를 돌변하여 손권과 전쟁이라도 불사할 강경책을 펼친다.

 

이는 제갈량이 융중계에서 말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행보이다. 실제로 형주를 둘러싸고 벌어진 양국간의 분쟁은‘유비 & 관우 vs 손권’의 구도였지‘제갈량 vs 손권’의 대치가 아니었다. 그 증거로 공안에 머무르던 제갈량이 유비를 구원하기 위해 익주로 들어가고 그 뒤를 받아 관우가 형주도독이 된 이후부터 양국간의 마찰이 심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즉, 제갈량이 유비군이 나아갈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은 맞으나 그를 실행함에 있어 구체적인 전략은 제갈량보다는 유비나 관우, 장비 같은 기타 강경파 무장들의 입김이 더 많이 반영된 것 같다. 실제적으로도 제갈량은 후방에 거주하고 있었고 유비를 따라 다니며 전투를 수행했던 이는 관우나 장비 같은 이들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여겨진다.

 

 

4. 결론

 

법정전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출처 : http://rexhistoria.net/7427 참고)

 

선주가 존호에 칭한 뒤 장차 동쪽으로 손권을 정벌해 관우의 치욕을 되갚으려 하니 뭇 신하들이 여럿 간언했으나 하나같이 따르지 않았고, 장무 2년(222년) 대군이 크게 패하고 백제(白帝)로 돌아와 머물게 되었다. 제갈량이 탄식하며 말했다,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능히 주상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시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동쪽으로 가셨다 하더라도 필시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워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뭇 신하들이 이릉대전을 반대했다는 사실과 제갈량의 탄식을 고려해본다면 제갈량 역시도 이릉대전을 반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유비는 그들의 의견을 묵살했고 결국에는 육손에게 패배하여 백제성으로 퇴각하고 만다. 필자는 바로 이 대목이 유비 생전 제갈량의 위치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즉,“제갈량 너는 내가 없는 동안 내부단속이나 잘하고 있어라. 나가서 싸우는 것은 내 몫이다”이게 바로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라는 것이다. 장량이 아닌 소하의 임무를 맡기는 것. 따라서 구체적인 행보에 있어서 유비와 제갈량은 의견대립이 많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형남4군 점령 이후 이릉대전까지의 역사는 제갈량이 그리던 융중계와는 분명 어긋난 행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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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 http://blog.naver.com/begagi/5017538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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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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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2013.10.24
17:32:12
(*.103.140.13)
토론 제목이 상당히 섹시하네요. 이 글 예전에 백랑님 블로그에서 본 것 같은데.

이것저것 차치하고 이 논의의 핵심은 사실상
'유비 생존 시절 제갈량의 역할은 후방 보급 -> 제갈량은 전투에 특화된 인재가 아니었다.(=not 장량, but 소하)'
인 듯 합니다.
더 나아가 유비(+관,장)가 바로 그런점(군략 미진)에선 제갈량의 의견을 딱히 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인듯 한데.

근데 그 부분에 대한 반론은 둘째치고,
설령 소하와 유방의 관계였다한들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런지요.
이 글에선 '장량과 유방같은 수어지교가 아니라, 소하와 유방같은 수어지교' 로 결론을 내신듯 하지만.
(아니라면 지적 부탁 드립니다.)

1. 序에 대한 반론 - 제갈량의 초기 포지션

크게 입촉 이전 - 이후와 이릉의 건을 가지고 논하셨는데, 저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짚어보고자 합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맞을 때, 과연 그의 어떤 부분에 감탄을 했을까요.
다름 아닌 그가 입안한 융중대책, 천하삼분지계입니다.

이는 그때까지만해도 유비에게 부족하던 하나의 큰 그림인 '전략'을 제시해준 것입니다.
형주를 먹고, 익주를 먹고, 그걸 기반으로 진천-완락으로 진군하라.
이건 소하의 역할이 아닙니다.

난세의 군략가였던 유비가 끝내 깨닫지 못했던 부분의 눈을 틔워주었다는 것,
수없이 난세를 떠돌며 볼장 다 본 유비가 스물 일곱의 서생에게 감탄한 이유는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추후에 제갈량의 사상이나 능력이 내치에 더욱 뛰어남을 알게되었겠지만, 그건 추후의 문제고.
유비가 처음 그에게 반하게 된 것은 다름아닌, 자신을 뛰어넘는(혹은 비등/보완하는)
'전략가'임을 꿰뚫었기 때문입니다.

2. 유비 생전 제갈량의 역할에 대한 반론

2 - 1. 적벽-형주 시절의 제갈량 역할

제갈량이 전략가임을 증명하는 부분은 또 있습니다.
그는 장판의 퇴각 이후 손권에게 진언하는 자리에서, 손-유 연합이 조조군에 이길 수 밖에 없는 정황을
연합의 강함, 조조군의 약함을 들어 설명합니다.

'북방 군사는 수전에 약하고, 멀리서 왔기에 피폐해져 있으므로
맹장이 지휘하는 수만 군사로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오에도 이와 똑같은 전략을 진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적벽의 주인공, 주유지요.
이 또한 소하의 역할이 아니라 장량의 역할입니다.

형주 점령 시절에도 유비가 제갈량의 군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손권이 익주 점령을 위해 하구에 수군을 보냈을 때,
유비는 잔릉에 주둔하는 동시에 세 명의 휘하를 따로 보내어 이를 견제합니다.

한명이 강릉의 관우, 그 다음이 자귀의 장비, 마지막으로 남군의 제갈량입니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두고 관우-장비 급의 신뢰를 주었음은 물론, 자신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군재를 지녔음을 인정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때도 조운, 황충, 위연은 있었지요.
단순히 본문에 나온 것처럼 보급만 담당했던 것은 아니란 뜻입니다.

2-2. 입촉 시절 ~ 이릉의 제갈량

은근히 많이들 간과하는 것이, 유비가 입촉할 때 제갈량 안 데리고 간 걸 군재 없다는 이유로 잘 쓰는데,
애초에 관우, 장비, 조운 중 누구하나도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럼 유비는 군략도 없는 애들한테 본거지인 형주 진수라는 중임을 맡긴게 되버리는데 이건 명백한 오류지요.

그리고 낙성 공략에 차질을 빚자, 유비가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제갈량을 포함한' 장비, 조운 등이었고,
그마저도 이 세명은 강주를 기점으로 세 갈래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군현을 평정하며 성도에서 만났습니다.
(법정전의 유장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들의 경로며 세갈래 이야기가 자세히 써져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비 시절, 제갈량이 후방에 남아 보급을 담당했던 것은 한중, 이릉전 때 뿐입니다.

미백랑님이 제갈량의 이런 점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건드리신건 아니지만, 전체적인 글의 뉘앙스는
결국 제갈량이 유비시절엔 뒤에 남아 보급을 담당했고, 그가 죽고나서야 군권을 쥐었다.
이런 느낌이 강하여 상등의 이야기를 제 논지의 근거로 덧붙였습니다.

3. 기록으로 살펴보는 유비의 행보에 대한 반론 - 유비는 제갈량의 전략과 똑같이 행동했다.

애초에 형-익주는 융중대의 근간이 되는 땅입니다.
제갈량의 전략과 반대되는 행동이라면 이걸 지키지 않고 그냥 내주는 것입니다.
유비로서는 반드시 그 땅이 필요하고, 이는 손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양가의 불화는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지요.
형주를 지키기위해 전쟁도 불사할 강경책을 펼쳤다는건 결국 제갈량 말 들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형주를 잃고 난 뒤, 제갈량의 북벌은 초기와는 굉장히 다르고 힘들게 진행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관우는 그 성격 때문에 패망한 인물이니만큼, 이걸 제갈량-유비의 관계에 대입하는 것은 좀 오류라 보입니다.
사실상 그때쯤의 관우는 유비가 내린 인수도 잠깐이나마 받지 않을 정도였는데 제갈량의 전략을 본인의 자긍한 성격보다
우선했을리도 없고요.(단, 이건 두 사람의 개인적인 관계와는 무관합니다.)

입김얘기를 하셨는데, 관우, 장비가 유비군 내에서 건국공신에 해당하는 인물인 만큼, 세세한 전략에서 그들의 입김이
왜 반영이 안되었겠습니까만, 그것이 제갈량과 정면 충돌을 일으킨다고 볼 여지는 없습니다.
무늬를 어떻게 수놓는 가는 그들의 몫이었을 지언정,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4. 결론의 반론

본문에선 '제갈량도 이를 반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유비는 이를 묵살했고, 이는 제갈량 위치를 보여준다'
라고 되어있으나, 저는 여기서도 의문인게,

애초에 형익 동시 진군이 안되는 이상, 융중대는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릉전을 단순히 유비가 개인감정으로 일으킨 전쟁이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 제갈량이 적극적으로 간언하지 않았던 것과 결부시켜보면, 단순히 그렇게 볼 문제가 아닙니다.

일찍이 제갈량은 자신이 맞다-혹은 아니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거의 반드시 관철시켰고, 유비는 이를 존중했습니다.
적벽 때의 외교나, 방통-유파의 등용 문제는 물론 황충의 4방장군 임명시 간언이 이를 증명하는데
그런 인물이 적극적이고는 둘째치고 약하게나마 이릉전을 반대한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점은
그리 간단히 생각할 일은 아니죠. 위치가 낮은 것도 아니고 조운 같은 인물도 반박을 하는 마당에.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융중계 복원 작업(형주 탈환)의 방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두 사람이 생각을 같이했다고 본다면, 제갈량의 미지근한 반응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법정이 살아있었다면 동쪽으로 가더라도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는 말은, 결국 그런 인물들이 보좌했다면
딱히 못 할 전쟁도 아니었다 는 뜻이니까요.

5. 결론

이릉전 직전까지(어쩌면 이릉전까지도) 유비는 철저히 제갈량의 전략대로 싸워왔습니다.
형주를 지키고, 진천으로의 길을 뚫었지요.

제갈량이 후방에 남아 보급만 했다 - 이릉전 때 말 안들었으니 제갈량 말 안들은거다.
즉, 유비가 보기에 제갈량은 군재가 딸린다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는 전부 철저히 편향적인 시각에서 나온 침소봉대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유비며 관우-장비와의 전략적 충돌이 있었다면 사서나 야사에서 그걸 기록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고,
진수며 깐깐한 배송지, 손성이며 사마광(&유소),하작 등의 사가들이 이를 채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 오만한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를 진수했던 3년 동안 아무런 불화가 없었고,
나아가 제갈량과 사적인 편지까지 나누는 사이였으며, 군자 공경하는 장비또한 마찬가지입니다.(법정&유파가 괴롭힐때마다 나서서 해결해준 것이 제갈량)
처음엔 과분한 정을 주는 것 같아 이를 질투했던 두 사람도 제갈량과 마찰없이 사이가 좋았는데,
그를 처음부터 아낀 유비는 말할 필요도 없을테지요.

제갈량이 내정을 담당했던 것은, 그가 내정에 보다 더 특화된 것을 유비가 알았기 때문이지,
그의 군재가 미달하여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조조나 손권도 매번 모주의 계책에 따라 살았던 것이 아닌데, 유비가 한번 이런 결정을 했다고 해서
그걸 갖고 제갈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 라고 해버리는건 너무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합니다.
애초에 그렇게 수동적인 인물이었다면 그건 그냥 바보죠. 유선처럼.

미백랑

2013.10.24
20:13:10
(*.233.63.81)
1. 전략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포괄적이고 방대하기 때문에 딱 꼬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제갈량의 융중계를 군사전략과 연결 짓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예시와 비교한다면 순욱과 저수의 협천자 정도로 볼 수 있을까요? 세력 앞날의 미래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지대한 의의가 있지만, 뛰어난 군사참모로의 근거로는 부족하다는 거죠(사실 이 부분 구분이 매우 애매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용어를 잡아보겠습니다).

2-1 형주에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을 놓고 간 것이 곧 이들의 군사적 재능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는 말은 이해가 안 되네요(물론 이 말은 오류라고 하셨지만). 제가 말한 의미는 군주 유비가 떠난 자리를 대신할 인물로 제갈량을 놓고 그를 보좌할 장군들로 관우, 장비, 조운을 놓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유비는 친정형 군주인데 그가 부재할 시 그를 대신할 사람은 제갈량 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오늘날로 따지면 대통령 부재시에 국무총리가 권한대행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그 밑에 국방부장관으로 관우가 있었고요.
(즉, 국무총리가 권한대행한다고 해서 그가 곧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논리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죠)

2-2 입촉한 유비를 도우러 갈 때 제갈량이 관우, 장비, 조운을 이끌었다는 기록으로 제갈량 군재를 증명하는 근거로 쓰는데...... 저는 사실 군사를 이끈 것과 군재가 그렇게 큰 연관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군사적 재능은 과정과 결과물을 비추어 판단해야 된다고 보거든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졸장 원균도 수군통제사였어요. 그리고 제갈량이 유비가 형남에 머무르고, 입촉하여 한중을 노릴 때 뒤에서 보급을 담당했다는 것은 기록에 나와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관직부터가 서좌장군부사 署左將軍府事로서 제갈량의 주된 의무는 행정가였지 군사참모가 아니라는 소리죠. 제가 본문에서 논한 것은 제갈량의 주된 역할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갈량 군재가 떨어진다던가, 그는 군사를 이끌어 본 경험이 없었다.. 이런 게 아니라.

3. 이 부분은 예전 토론 때도 거센 반론이 나온 부분인데, 저는 제갈량의 의중이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라는 점을 전제로 깔았습니다. 융중계에서도 자신들은 손권과 협력해야 되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다는 점에 그 근거지요. 즉, 유비가 보인 행보는 제갈량이 제시한 방향으로의 길은 맞지만 그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다 이 말입니다. 만일, 제갈량에게 전권이 있었다면 익양대치 같은 거 안 일으키고 손권에게 형주3군 돌려줬을 거라고 보는 게 제 입장이거든요.

요립의 지적대로 제갈량 역시 익양대치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면 장로의 세력을 규합하는 데 실패하고 조조의 남진에 하마터면 익주가 결딴날 뻔 했다는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제갈량은 비판 받아야 마땅할 것 같네요(저는 제갈량의 속내를 이렇게 안 보고 있습니다만)

4. 이릉대전에서 제갈량이 찬성했고, 향후 북진을 위해 강릉을 탈환하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이 부분은 논지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


5. 군재가 미달한 것과 군주가 말을 안 듣는 것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제갈량 군략이 딸렸기 때문에 유비와 마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죠.
거듭 말하지만, 유비 생전에 제갈량의 위치는 후방보급과 본거지 수비였어요. 실제 전투에서 종군참모로는 법정과 황권, 방통이 동행을 했죠.
그러다보면 일선에서는 저 뒤에 있는 제갈량보다는 실제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관우, 장비나 법정, 황권의 입김이 더 강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내용을 근거로 익양대치에서 유비가 보여준 몰상식한 행동들을 통해 유비와 제갈량은 큰 그림에서는 뜻을 같이 했으나, 거기까지 나아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 않았나... 추정을 해본 겁니다. 연의와는 달리 유비는 상당히 호전적이고 거친 인사거든요(독우 매질 사건이나, 주유의 익주침공을 반대하는 언사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즉, 제갈량은 상대적으로 온화한 방법을 추구하는 데 실제 유비군의 행보는 손권을 깔아뭉개는 입장이었으니 그것은 제갈량의 뜻이 아니었을 거라 추정을 해본 겁니다. 제갈량 군략이 딸렸기 때문에 유비와 마찰이 생겼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견지하고 있는 맥락과 맞지 않는 것이지요.

미백랑

2013.10.24
20:27:01
(*.233.63.81)
이것저것 차치하고 이 논의의 핵심은 사실상
'유비 생존 시절 제갈량의 역할은 후방 보급 -> 제갈량은 전투에 특화된 인재가 아니었다.(=not 장량, but 소하)'
인 듯 합니다.
더 나아가 유비(+관,장)가 바로 그런점(군략 미진)에선 제갈량의 의견을 딱히 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인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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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제 의견을 표현해보자면

1. 유비 생전에 제갈량의 주된 임무는 후방보급과 본거지 수비.
2. 제갈량 능력과 별개로 유비는 실제 행동에 있어서 방통, 법정, 황권을 데리고 다녔다.
3. 그러다보니 익양대치와 같은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제갈량의 의중보다는 일선에 있는 장군들과 다른 참모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4. 이상의 근거를 토대로 제갈량은 유비와의 관계에 있어서 흔히 말하는 장량이 아니라, 소하와 같은 포지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정도로 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언급하신 '제갈량은 전투에 특화된 인재가 아니었다' 이 부분은 제가 주장하고 있는 바와 동떨어진 맥락입니다.


참고로 만일, 사나이님 말대로 익양대치라든지, 손권과의 일련의 분쟁들이 제갈량이 의도한 바였고 유비를 비롯한 수뇌진들이 그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면 제 논리는 깨지겠지요. 다만, 그리되면 결국에는 형주뒷기치로 연결된 유비군의 비극은 제갈량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는 논지로 바뀌겠습니다만.......

사나이

2013.10.25
00:28:51
(*.103.140.13)
두번째 댓글에서 명확히 정리를 해주시니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알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본문만 놓고 제가 읽었을 때 느낀 것은,
굳이 건드릴 필요 없는 부분을 너무 자극적으로 해석해 결론이 잘못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논제는 섹시한게 참 괜찮다고 느끼지만, 본문의 결론은 아무리 봐도 뉘앙스가 주객전도된 느낌이랄까.
미백랑님이 그 점이 아니라고 댓글에서 말씀을 해주셨지만.

1. 순욱과 저수의 협천자 진언이 군사전략이 아니라면 달리 무슨 말로 이를 표현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원소는 저수의 진언에 근거해 기청유병을 얻었으나, 그 이후로는 전혀 말을 따르지 않아 패망했으며,
조조는 순욱의 진언을 십분활용했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결과 중원의 패자가 되었지요.
사실 이 부분은 미백랑님이 일례로 드신 것일 뿐이라, 딱히 꼬집어 얘기할 부분은 아닙니다만
굳이 이 쪽의 얘기가 나왔으니 드려보는 말씀인데.

순욱-저수는 각각 조조-원소 진영 최고의 군사전략가였지요.
저는 순욱과 제갈량의 포지션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보는 입장인데,
그 역시 조조 생전(이랄것도 없이 평생)엔 야전에서 함께 싸운 공로는 없었지요.
조조의 운명을 결정 지은 관도에서도 그의 주된 임무는 후방 보급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줄곧 그에게 서신을 보내 계책을 물었고, 그에 따라 전략을 수정해나가며 승리를 거뒀지요.
관도의 공은 순유 같은 현장 모주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애초 그 순유나 곽가, 희지재 같은 소위 조조의 전략가들은 대부분, 사실상 순욱 대용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조조가 직접 순욱에게 '공이 곁에 없을 경우, 나를 도와 계책을 낼 사람이 누구요?' 라며
물었던 일화가 이를 증명하지요.

조조군의 2인자로서 후방에 남아 본거지를 진수하고, 보급을 담당해야만 하는 역할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조조를 보좌할 수 있는 '제 2의 순욱' 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즉, 소하의 역할로 돌아간 '장량'을 대신하여, 제 2, 제 3의 새로운 장량(혹은 진평)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2-1.

저는 이를 유비군에 대응시키면, 법정이며 황권이나 방통이 바로 그런 '제 2의 제갈량' 이라고 봅니다.
형주 - 익주라는 본거지를 지켜야만 하는 제갈량 대신에 현장에서 유비를 보좌해줄 인물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위의 세명이었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유장 정벌 당시, 백수(가맹)-부-면죽까지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황충, 위연, 탁응 외에도
현장 보좌관으로서 임무를 다했을 방통-법정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두 명의 모주가 있음에도 낙성에서 난관을 겪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비가 취했던 행동은
다름 아닌, '보급-진수의 임무'를 맡고 있던 제갈량을 호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굳이 자기가 직접 배정해준 그 임무를 철회하면서까지(당연한말이지만 이러면 보급은 관우의 몫이 됨)
그를 부른 이유는, 현장에 있는 휘하들이 못하는 일을 해줄 사람이 '바로 너' 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아닐런지요.
"지금 얘들로는 조금 힘들다. 네가 와서 좀 도와라."


2-2. 그런 점을 대변하는 것이 바로 제갈량이 스스로 일군을 인솔하고 저항하는 군을 평정하며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게 왜 원균이랑 비교가 되어야 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장비 뿐 아니라 조운 제갈량 모두 가는 곳마다 이기며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이미 이론의 여지는 없어보입니다.

더구나 서좌장군부사 이전에 제갈량이 역임한 관직은 '군사중랑장'입니다. 이건 다름아닌 방통이 똑같이 받은 관직입니다.
즉, 방통이 들어오기 전엔, '군사중랑장'으로서 유비를 보좌한 건 제갈량이라는 뜻이고, 그가 들어오면서부턴
굳이 제갈량 본인이 원정을 따라갈 필요 없이, 방통이 제갈량 대행을 했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군사'장군' 서좌장군부사라는 직함도, 결국엔 군중의 일을 관리하는 엄연한 무관직인데,
단지 이것만으로 군략 제끼고 후방에 짱박아놨다고 보긴 힘들지 않을까요.

3. 익양대치 건의 경우는 확실히 이제는 말씀하신 바를 공감하긴 합니다.
특히 미백랑님의 전제에 대해선 확실하게 동감이기도 하구요.
저는 솔직히 익양대치 뿐 아니라 오와의 모든 불화의 중심에 관우가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지만.

단지 관우를 비난할 순 있어도 이 사건 전체를 놓고 본다면,
유비는 제갈량의 말을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선택한 길은 3군 할양 후
한중평정이었으니까요. 이것은 제갈량의 융중계에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행보입니다.
여기서 유비에 대한 변호는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왜 처음부터 그리 나가지 않았냐고 한다면, 오가 표면적으로는 3군 할양을 평화적으로 원했지만,
달라고 바로 내주었으면 그냥 끝날 문제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결과적으로 오는 형주남부 전역을 차지했고.

무엇보다 ' 형주 3군을 내주면 촉-오 분쟁은 없었다 ' 라는 전제가 참이라면,
유비가 말했던 ' 양주를 얻으면 형주를 주겠다 ' 는 발언도 참일 것입니다.(결론은 말도 안된다는 뜻)

여기서 지도자 입장인 유비가 국가적인 면에서 타국의 요구를 바로 수용했다면,
이는 대외적으로는 오에 약함을 보이는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융중계의 근간을 홀로 흔들어버리는 것이 되버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취했던 행보 - '전투'가 아닌 '대치' - 는 '이제 옛날의 우리가 아니니 얕보지마라' 라는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오는 3군 할양 이후 번성전까지 딱히 형주 영유권에 대해 이전만한 태클을 걸지 않았고.

4, 5의 경우는 대체로 제 생각과도 일치하고, 딱히 논의해야할 부분이 없는것 같으니 말을 줄이겠습니다.

저 역시 의견정리를 해보자면,

1. 제갈량은 순욱처럼, '소하'의 역할로 돌아간 '장량'이었다.

2. (근거 중 하나로)그가 역임한 '군사중랑장'은 방통 역시 역임했고, 이는 방통, 법정이 제갈량의 역할을 대행했다는 뜻이다.

3. 익양대치-나아가 손오분쟁은 관우는 몰라도 유비에겐 변호의 여지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제갈량의 전략을 따랐다.

4. 결론적으로 유비-제갈량의 관계는 소하-유방은 물론, 장량-유방의 관계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저 역시 익양대치-손오분쟁이 가져올 궁극적인 결과(동맹파탄) 가 제갈량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미백랑님과 의견을 함께합니다. 이 글 쓰다보니 오늘 따라 관우를 까고 싶어지네요.

맘평화

2013.10.25
12:00:49
(*.7.31.186)
위쪽에서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서 설명을 잘 해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정확히 같은 의견으로 저도 관우를 비판합니다. 당시 상황을 따져 본 적 있는데
익주 쪽으로 루트 개척을 하고 있는 동안에 최대한 방어를 하고 화친해야 하는데
공격본능이 너무 강했습니다. 기동방어가 혹시 아닌가 따져도 보았는데 이건 기동방어가
아니더군요. 공격을 나가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정에 마속을 보낸 제갈량을
비판했는데 사실 비슷한 관점에서 형주도 관우가 맡으면 안되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마속과는
다르게 전략이라는 그림에서 본 다면 관우 만한 인물도 없다는 점에서 쉽게 비난도 못하는...사실 대안이 없습니다.
7군 수몰이 천재지변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훌륭했고요. 다만 수비가 최우선이 되야할 곳 과 시점에서
공격을 했으니 그 용병이 빛을 많이 바랄 수 밖에 없네요. 이후에 돌아온 후폭풍도 너무 컸구요.
그런 면에서 형주에는 여몽 + 노숙 같은 장수들(여몽은 촉에는 없는 유형이라 생각하고 노숙은 외교나 협상에서 수완이 또 돋보이더군요.)이
적절히 외교전과 전력을 과시하며 압박하고 익주가 강성해지길 기다렸어야 되는데란 생각을 합니다.

망탁조의

2013.10.25
03:17:35
(*.232.249.58)
도검기인가? 보면 유비가 입촉 후에 좋은 철을 구해 다섯자루의 명검을 만들었는데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남은 네자루를 관우, 장비, 조운, 제갈량에게 프레젠또했다는 구절이 있음.
당시 유비가 가장 신뢰한 네명의 신하를 상징하는 일화이며 제갈량에 대한 신뢰가 관우, 장비, 조운과 같은 반열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특히 관우, 장비, 조운은 유주 시절부터 유비를 추종한 공신 중의 공신이란 점에서 제갈량의 위치가 돋보임.

맘평화

2013.10.25
12:03:41
(*.7.31.186)
재미있네요. 관우와 장비의 질투 외에도 생각해볼 만한 구절이네요.

망탁조의

2013.10.25
12:23:37
(*.155.148.94)
사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유비가 검을 공적인 상징성 부여(절월 등)이 아니라 사사롭게 선물한다고 했을 때 저 네 사람 외에 딱히 받을만한 인물이 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유선이나 유봉 같은 친족이라면 또 모를까.

제갈량은 저 4인 중에서 유일하게 문관이라는 점도 의외로 상징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왜 문관에게 검을 줬을까.....

맘평화

2013.10.25
13:28:17
(*.7.31.186)
뭔가 있을 것 같긴하네요. 분명 어딘가 비슷한 전례들이 있을 것 같고 뭔가 상징성이 있는 행위인 것 같은데 궁금하네요.
입촉이후에 하사한 것이라 보면 그냥 선물한 것이라기 보다는 업적을 과시하는 효과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오호대장군 이벤트의 원조인가하는??? ㅋㅋ 농담입니다.

사나이

2013.10.25
14:29:00
(*.103.140.13)
남조 도홍경의 고금도검록 말씀이시군요.
그거 너무 무협지스러운 기록이라 신뢰성이 영;;

저렇게 나눠준 일화 외에도
제갈량 엑스칼리버설이나 황충 100번 베기설 등등
별 희한한 이야기가 넘치는터라 그냥 웃게되더군요.
집해에 주석달려서 읽어보면 혼자뭔가 붕떠있는
기록같고.

장비가 칼에 한장이라고 쓰지않고 촉대장이라 썼다고 기록한 부분에서 하작이 깠는데 공감가더군요.
그냥 적당히 이런게 있다...정도로 넘길 이야기인듯.

망탁조의

2013.10.25
15:28:03
(*.155.148.94)
저 같은 경우 야사나 전설에서 그 나름의 상징성과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고금도검록의 신뢰도가 무지하게 낮다고 쳐도, 사실 역사서만 봐도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가 매우 돈독했음은 여러 정황이 있고, 수어지교라는 말도 유비가 스스로 한 말이니까요.
사실 제갈량이 유봉 제거를 권한 사례만 봐도,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 신뢰가 보통 레벨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아무리 양자라도 황제의 아들인데 신하가 그걸 죽이라고 간언하고 유비는 분노하거나 제갈량을 불경죄로 처벌하지 않고 바로 유봉에게 자결을 명하니까요.

.

2013.11.01
10:31:44
(*.251.18.193)
그냥 유비는 평소에 忍 을 키워온 사람인데 의형제 관우의 죽음으로 한순간에 쌓였던 그 울분들이 한번에 폭팔한거에요. 물론 그전까진 제갈량 의견을 중요시 했겠죠 하지만 친 형제 처럼 지내던 관우가 죽었는데 눈 안돌아가는게 더이상하죠

d12d13

2019.02.02
00:02:33
(*.198.228.131)
댓글 두분 이야기가 정말 재밌습니다. 이미 수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댓글 남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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