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도 발번역인데다가 초벌인데다가 어렵기까지 해서 오역이 아주아주 많을 겁니다.


모르는 부분은 원문을 그대로 남겨 놓았습니다.


나머지 원문은 병기하려다가 보기 복잡할 것 같아서 지웠습니다.(라고 쓰고 '오역을 숨기기 위해'로 읽으시면 됩니다.)



——


정현(鄭玄)은 자가 강성(康成)이고, 북해(北海) 고밀(高密) 사람이다. 8대조 정숭(鄭崇)은 애제 때 상서복야를 지냈다.


정현은 어렸을 때 향색부(鄕嗇夫)가 되었는데,[1] 휴가를 얻어 돌아와서는 일찍이 학관(學官)으로 나아가며 관리가 된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부친이 수차례 꾸짖었으나 금지[禁]하지는 못했다.[2] 마침내 태학(太學)으로 나아가서 수업(受業)을 들었고 , 경조(京兆)의 제오원선(第五元先)을 사사(師事)했는데, 처음에 《경씨역(京氏易)》,《공양춘추(公羊春秋)》,《삼통역(三統曆)》,《구장산술(九章算術)》을 익혔다. 또한 동군(東郡)의 장공조(張恭祖)를 따라 《주관(周官)》,《예기(禮記)》,《좌씨춘추(左氏春秋)》,《한시(韓詩)》,《고문상서(古文尚書)》를 익혔다.


[1] 

서에서 말하기를 향에는 색부가 있어, 송사를 듣고[聽訟] 부세(賦稅)를 걷는다[收]고 했다.


[2] 

《정현별전》에서 말하기를 : 정현이 11~12세 때 모친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는데, 정랍(正臘:섣달) 때의 모임에 같은 열(항렬?)에 10여 인이 있어, 모두가 아름다운 옷으로 성대하게 꾸미고, 한가롭게 말을 나누는데 정현만이 홀로 막연(漠然)하여 다가갈 수가 없었다. 모친이 사사로이 여럿을 꾸짖었는데, 이에 (정현이) 말했다. “이는 제 뜻이 아니며, 제가 원하는 바도 아닙니다.”


* 필자 추가 (세설신어 현별전): 

정현별전에서 말하기를 : 정현은 어려서 서수(書數)를 배우는 것을 좋아해, 13세에 오경에 통했으며 천문(天文)과 점후(占候:기후를 점치는 것), 풍각(風角:길흉을 점치는 일종의 방술)과 은술(隱術:?)을 즐겼다. 17세에는 큰 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현(縣)에 이르러 말했다 


“모시에 마땅히 화재가 있을 것입니다.”


모시가 되자 과연(果然) 그러했기에 지혜 있는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산동(山東)에는 마땅히[足] 물을 만한 이가 없어, 이에 서쪽의 관문으로 들어갔는데, 탁군(涿郡)의 노식(盧植)으로 말미암아 부풍(扶風)의 마륭(馬融)에게 사사하게 되었다. 마륭에게 문도(門徒)가 사백여 인이나 있었는데, 당에 올라 나아갈 수 있는 이는 (겨우) 오십여 인이었다. 마륭은 본디[素] 교귀하여(驕貴:교만) 정현은 문하에서 3년이나 있었지만 그를 볼 수 없었고, 고업제자(高業弟子)들로 하여금[使] 정현에게 보내어 가르칠[傳授] 뿐이었다. 정현은 밤낮으로[日夜] (학문을) 탐구하고 외워, 일찍이 태만하고 게으르지 않았다. 때마침, 마륭이 모든 생도들[諸生]을 모아서는 도위(圖緯)를 강론[考論]하다가, 정현이 산술에 뛰어난 것[善算]을 듣고, 이에 불러 누상에서 보았는데, 정현이 이에 이어서 (마륭의) 의심나는 모든 점을 대답하였고, 물음을 마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마륭이 홀연히[喟然] 옆에 있던 문인(門人)에게 말했다.


“정생(鄭生:정현)이 지금 떠난다니, 나의 도(道)도 동쪽으로 가겠구나.”[3] 


[3] 

한서에서 말하기를 : 전하(田何)가 역(易:주역)을 정관에게 전수하여, 학문을 이루어 낸 정관이 동쪽으로 돌아갔으니, 전하가 문인에게 “역이 동쪽으로 가는구나”라고 말했다.


* 필자 추가 (세설신어 현별전):

부풍의 마계장(馬季長:마륭)은 영유(英儒)로 모두에게 명성이 있었는데, 정현이 와서 이를 따르고자 하여 동이를 참고하였다.[參考同異???]


계장은 왕후(명덕마황후)의 외척[戚]으로, 시사(待士)들을 아름답게 하고 있었는데 정현은 이를 보지 않고 좌우를 왕래하였으며, 스스로 정려(精廬:수행을 위해 세운 집)를 세워 이미[既] 소개(紹介)하는 것으로 말미암아[因] 득통(得通)하였다. 탁군의 노자간(盧子幹:노식)이 문인 중에서 으뜸으로 여겨질 때[冠首], 계장에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7가지가 있었는데, 정현이 다섯을 해석할 수 있었고, 자간은 셋을 해석할 수 있었다.


계장이 자간에게 이르기를 : 나와 너는 모두 그와 같지 아니하다. (그리고) 계장이 따로 임하여, 정현의 손을 잡고 말했다 : 큰 도가 동쪽으로 가는구나. 스스로 힘쓸 것이다!


정현이 스스로 돌아다니며 학문을 익히니, 십여 년이 지나서 향리로 돌아갔다.


집이 가난하여 동래(東萊)의 땅을 빌려 밭을 갈았는데, 학도(學徒)들이 서로 따라 그 수가 이미 수백, 수천 인이었다. 당고의 화[黨事]가 일어나 같은 군의 손숭(孫嵩:손빈석) 등 40여 인이 금고(禁錮)를 피해 와, 마침내 숨어 경전을 닦는 일을 하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임성의 하휴(何休)가 《공양》학을 좋아하여, 마침내 《공양묵수(公羊墨守)》、《좌씨고황(左氏膏肓)》、《곡량폐질(穀梁廢疾)》 등을 지었는데, 이에 정현이 (각각 반박하여) 《묵수》의 발(發), 《고황》의 침(針), 《폐질》의 기(起)를 지었다. 하휴가 이를 보고 탄식하며 말했다.


“강성이 내 방에 들어와 내 모(矛)를 쥐고는 나를 공격하는 것인가.”


처음에, 중흥(中興:후한 건국) 이후에 범승(范升), 진원(陳元), 이육(李育), 가규(賈逵)의 무리들이 고금학(古今學)을 쟁론(爭論)하였는데, 후에 마륭이 북지태수(北地太守) 유괴(劉瑰)에게 답한 것부터 정현이 하휴에게 답한 것에 이르기까지 깊이 통하는 것에 의지하여 이로 말미암아 고학(古學)이 마침내 빛나게 되었다.


영제(靈帝) 말에 당금(黨禁:당고의 금)이 해제되고, 대장군 하진(何進)이 그를 벽소하려고 하였다. 주군에서도 하진의 권력과 위엄 때문에 그(하진)의 뜻에 감히 어긋날 수 없어 마침내 정현을 협박하였으므로 (정현도) 부득이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진이 궤장(几杖)을 베풀고, 예로 대하는 것이 심히 두터웠다. 정현은 조복(朝服)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복건(幅巾)을 쓰고 조현했다. 하루 묵고는 도망쳐 나왔다. 60세 때, 제자인 하내(河內)의 조상(趙商) 등이 스스로 원방(遠方)에서 이르니 그 수가 천이었다. 후장군 원외(袁隗)가 표문을 올려 시중으로 삼았으나, 아버지의 상으로 (핑계를 삼아) 가지 않았다.


국상(國相:북해상) 공융이 심히 정현을 존경하여[深敬] 신발을 질질 끌며[屣履][4] 문까지 세워[造門] 영접했다. 고밀현(高密縣)에 고하여 특히 하나의 향(鄕)을 정현의 이름으로 삼도록 하여 말했다.


[4]

리(屣)는 신발을 바르게 신지[納] 못하고 그것을 끌면서[曳] 가는 것을 칭하며, 급하게 현인을 부르좇는 것[趨賢]을 말한다.


“옛날 제나라는 사향(士鄕)[5] 을 설치했고, 월나라에는 군자군(君子軍)[6]이 있었으니 모두 현명한 사람을 다르게 보는 뜻[異賢之意]이다. 정군(鄭君:정현)은 학문을 좋아하고 실로 밝은 덕을 품었다. 옛 태사공(太史公:사마천), 정위 오공(吳公), 알자복야 등공(鄧公:등선?)은 모두 한의 명신이며, 또한 남산의 사호(四皓)인 원공(園公:동원공), 하황공(夏黃公)은 빛나는 것을 감추고 숨겼으므로, 세상이 그 높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모두 공(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즉[然則], 공(公)이란 것은[者] 인덕(仁德)의 바른 호칭[正號]이라, 삼사대부는 아닐 것이다.(?) 이제 정군의 향을 일컬어 ‘정공향(鄭公鄕)’이라고 하라.


[5] 

관중이 환공의 재상이었을 때, 나라를 21개의 향으로 하여 공상향(工商鄕)을 여섯, 사향(士鄕)을 열 다섯으로 나누어 살게 했으니, 이로써 공, 상, 사로 구분하여 살게 한 것이다. 이 일은 국어에 보인다.


[6] 越王句踐,乃中分其師,為左右軍,以其私卒,君子六千人為中軍。注云:「君子,王所親近,有志行者。」見國語。   

월왕 구천이 그 군대를 중분(中分)하여 좌군과 우군으로 삼고 그 사졸(私卒)인 군자 6천 인으로 중군을 삼았다. 주석을 달아 말하기를 : 군자란, 왕 가까이에 두고 몸소 부리며 그 뜻을 행하는 자[王所親近,有志行者]를 말한다고 하였다. 국어에 보인다.


[7] 

오공은 문제 때 하남태수였다. 등공은 경제 때 알자복야였다. 태사공 사마담은 무제 때 사람이다.


[8] 

사호는 고제 때 있었는데 유원공, 하황공, 각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이다. 눈썹이 흰색이라 호(皓)라고 불렀다. 진나라 말에 상락(商雒)의 남산에 숨어 살았는데, 천하가 안정된 때를 기다리다가 한나라가 일어서자 맞이하며 (한나라에?) 이르렀다.


옛 동해(東海)의 우공은 가까스로 하나의 절개만[一節] [8] 있었는데도 오히려 향인들이 그 문려(門閭)를 아름답게 꾸몄거늘, 하물며 정공의 덕으로도 (그 문에) 4필의 말이 끄는 수레가 지날 수 없어서야 되겠는가. 문구(門衢)를 넓게 개통하여 용거나 고거를 지나다닐 수 있게 하고 이름을 지어 통덕문(通德門)이라고 하라.”


[8] 

일절은 결옥을 이르는 것이다.[一節謂決獄也。]


소제(昭帝) 때, 동해군의 우공이란 사람이 현의 옥리였는데 결옥이 공평하여 군에서 생사당을 세우고[生立祠: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사당] 이름지어 말하기를 우공사(于公祠)라고 했다. 먼저 우공의 집과 문을 무너뜨리고, 부로들이 두루 모여[方共] 수리하고 고쳤다[修之].


우공이 말했다.


“어려서 가문을 크게 높이면 (집 안으로) 사마거를 다닐 수 있도록 영을 내려 허용한다고 했다. 내가 처리한 결옥으로 많은 음덕을 쌓았으니 자손은 필시 흥할 것이다.”(????)


동탁(董卓)이 장안으로 천도(遷都)하고, 공경이 정현을 조나라 국상[趙相][9]으로 천거하였으나 길이 끊어져 (조나라에) 이르지 못했다. 마침내 황건적이 청주에 이르러, 이를 피해 서주로 갔는데, 서주목 도겸(陶謙)이 스승의 예[師友之禮]로 맞았다. 건안 원년, 서주에서 고밀현으로 돌아오니, 지나는 길에 황건적 수만 인이 정현을 보고 모두 절하니 서로 약속하기를 감히 현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기로 했다.


[9] 조왕 유건(劉乾)의 상이다.


후에 정현이 비로소 질병이 심해져, 스스로 생각하며 아들 익은(益恩)에게 경계하여 말했다.


吾家舊貧,不為父母群弟所容,去廝役之吏,遊學周、秦之都,往來幽、并、兗、豫之域,獲覲乎在位通人,處逸大儒,得意者咸從捧手,有所受焉。遂博稽《六藝》,粗覽傳記,時睹秘書緯術之奧。年過四十,乃歸供養,假田播殖,以娛朝夕。遇閹尹擅勢,坐黨禁錮,十有四年,而蒙赦令,舉賢良方正有道,辟大將軍三司府。公車再召,比牒並名,早為宰相。惟彼數公,懿德大雅,克堪王臣,故宜式序。吾自忖度,無任於此,但念述先聖之元意,思整百家之不齊,亦庶幾以竭吾才,故聞命罔從。而黃巾為害,萍浮南北,復歸邦鄉。入此歲來,已七十矣。宿素衰落,仍有失誤,案之禮典,便合傳家。今我告爾以老,歸爾以事,將閑居以安性,賈思以終業。自非拜國君之命,問族親之憂,展敬墳墓,觀省野物,胡嘗扶杖出門乎!家事大小,汝一承之。咨爾焭々一夫,曾無同生相依。其勖求君子之道,研鉆勿替,敬慎威儀,以近有德。顯譽成於僚友,德行立於已誌。若致聲稱,亦有榮於所生,可不深念邪!可不深念邪!吾雖無紱冕之緒,頗有讓爵之高。自樂以論贊之功,庶不遺後人之羞,末所憤憤者,徒以亡親墳壟未成,所好群書率皆腐敝,不得於禮堂寫定,傳與其人。日西方暮,其可圖乎!家今差多於昔,勤力務時,無恤饑寒。菲饑食,薄衣服,節夫二者,尚令吾寡恨。若忽忘不識,亦已焉哉! 


그 때, 대장군 원소(袁紹)가 기주에서 총병(總兵)하고 있었는데 큰 연회를 베풀고 사신을 보내 정현을 요청했다. 정현이 가장 늦게[最後] 도착하였으나 이에 상좌(上坐)에 올라 앉게 하였다. 


원소에게는 호준(豪俊)한 빈객들이 많아 재주와 변설이[才說] 있었으므로 정현을 유자(儒者)로 보고 통하거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서로 다른 학설로 말재주를 경쟁하고 백가(百家)가 번갈아 일어나고 있었다. 정현이 방변(方辯)에 의지하여 대했는데, 전부 의문을 표했으나 모두 답을 듣지는 못하였으니 탄식하며 감복하지[嗟服] 않는 이가 없었다.


때마침,[時] 여남의 응소(應劭)도 역시 원소에게 돌아와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자찬하여 말했다.


“옛 태산태수(太山太守) 응중원(應中遠:응소)에게, 북면(北面)이 (모두) 제자로 칭하고 있다 하니 어떠합니까?”

※ 본인이 본인의 자를 스스로 자칭하는 경우가 없으니, (있다고 하여도 무례한 표현) 

이 물음은 자신을 다른 사람인 양 칭하며 떠보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깔끔할 듯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저도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정현이 웃으며 말했다.


“중니(仲尼:공자)의 문하에서는 4가지 과(科)로만 살폈을 뿐이니, 안회[回]와 단목사[賜]의 무리조차 관벌(官閥)로는 칭하지 못했습니다.”


응소가 부끄러운 빛을 띄었다.


이에 원소는 정현을 무재(茂才)로 추천하고 표문을 올려 좌중랑장(左中郎將)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정현은) 모두 취하지 않았다. (황제가) 공거(公車)로 징소하여 대사농(大司農)으로 삼고, 안거(安車) 1승을 내리고 장사(長吏?史)를 보내 송영(送迎)했다. 이에 정현은 병을 이유로 집으로 돌아오기를 청했다.[乞]


5년 봄, 꿈에서 공자가 나와 말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금년이 진(辰)에 있으니, 내년은 사(巳)에 있다.(????)”


깨어나서, 참위로[讖] 그것들을 합함으로써 수명이 마땅히 끝나는 날을 알았으니 기울여 드러누워서 병을 얻었다.


원소가 조조(曹操)와 서로 더불어 관도(官度)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그 아들 원담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 정현을 핍박하여 군을 따르게 하니 부득이하게 나섰으나, 원성현(元城縣)에 이르러 병을 심해져 나아갈 수 없었고, 그 해 6월에 졸(卒)하였으니 향년이 74세였다. 영을 내려 박장(薄葬)했다. 군수 이하가 일찌기 수업(受業)했던 자였으므로, 상복을 입고[縗絰] 다다라 모인 자들이 천여 인이었다.


문인들이 서로 더불어 《오경》에 대한 정현과 제자의 문답을 기록하고, 《논어》에 의지하여 《정지(鄭志)》 여덟 편을 지었다. 무릇 정현이 주석을 단 책이《주역》,《상서》,《모시》,《의례》,《예기》,《논어》,《효경》,《상서대전》,《중후(中候)》,《건상력(乾象曆)》이었고, 또 저작한 책이《천문칠정론(天文七政論)》,《노례체협의(魯禮禘祫義)》,《육예론(六藝論)》,《모시보(毛詩譜)》,《박허신오경이의(駁許慎五經異義)》,《답임효존주례난(答臨孝存周禮難)》이었으니 모두 백만여 자였다.


정현은 말과 가르침이 질박하여[質], 치우치거나 비웃는 것의 번거로움을 두루 잘 알았다. 경전을 전수하는 데는 흡족하게 무르익는 데까지 이르러 이를 순유(純儒)라고 칭했는데 제나라, 노나라 사람들이 이를 듣고 높이 여겼다.


그 문인인 산양의 치려(郗慮)는 어사대부에 이르렀고, 동래의 왕기(王基), 청하(清河)의 최염(崔琰)은 이름을 세상에 남겼다. 또한 낙안(樂安)의 국연(國淵), 임하(任嘏)는 나란히 어렸을 때 정현이 국연을 나라의 그릇(國器)라고 칭했고, 임하는 도와 덕[道德]이 있다고 하였으니, 기여한 것이 역시 감발(鑒拔)한 바가 많아 그 모두 그 말과 같았다. [10] 정현의 자녀는 오직 익은(益恩) 하나뿐이었으므로, 공융이 북해에서 효렴으로 추거했다. 공융이 황건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익은이 (공융에게) 다다라 난으로 인해 몸에 손실을 입었다.(문맥으로 보아 죽었다는 뜻 같습니다.) 복자(腹子)를 남겼으니 정현이 손수 글을 남겨 이름을 소동(小同)이라 지었다. [11]


[10] 

치려의 자는 홍예(鴻豫)다. 왕기의 자는 백여(伯輿)로 위나라에서 진남장군(鎮南將軍) 안락향후(安樂鄕侯)에 이르렀다. 최염의 자는 계규(季珪)로 위나라 동조연(서조연의 오기)을 지내다 중위(中尉)로 승진했다. 국연의 자는 자니(子尼)로 위나라 사공연(司空掾)에서 태복으로 승진했다. 임하의 자는 소광(昭光)으로 위나라 황문시랑이었다.


[11] 위씨춘추에서 이르기를 : 

정소동은 고귀향공(조모) 때 시중(侍中)이었다. 일찍이 사마문왕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문왕이 비밀 상소를 쓰다가 숨겨두지 않고 측간에 갔다가 돌아왔다.


(사마문왕이) “경은 내 상소문을 보았는가?” 하고 물으니, (정소동이) 답하기를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문왕이 말했다.


“차라리 내가 경에게 빚을 질지언정, 경이 내게 빚지게 하겠는가.”


마침내 짐독으로 정소동을 독살했다.


 ——  

論曰:鄭玄括囊大典,網羅眾家,刪裁繁誣,刊改漏失,自是學者略知所歸。
논하여 말한다 : …… 정현은 대전(大典)을 총괄하고[括囊(괄낭):주머니 안에 묶어넣음], 중가(眾家:백가?)를 망라(網羅)하며, 번거롭고 꾸며내는 것을 깎아내고 다듬어, 누실(漏失)된 것을 간행하고 고쳐내었으니, 이것으로부터[自是] 학자들이 대략[略] 돌아갈 곳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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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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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20.04.24
16:19:51
(*.112.38.50)
오 잘 봤습니다. 황건적 수 만이 정현을 보고 절했다는 부분이 묘하군요 ㅎㅎ

독우

2020.04.24
22:33:04
(*.30.20.69)
감사합니다.^^ 저 시대의 미담에는 왠지 모를 이질감이 있어요 ㅎㅎ

독우

2020.04.27
15:20:09
(*.62.216.17)
[1]~[3]까지 무영전본을 참고하여 주석을 달아보았습니다. 아직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ㅠㅜ

독우

2020.04.27
18:31:50
(*.193.24.235)
주석 전부는 아닌데 어쨌든 이래저래 분량을 채워 보았습니다.

코렐솔라

2020.05.01
13:48:56
(*.46.174.164)
후한서 자체는 이미 번역본이 시중에 있으니 주석이 훨씬 더 값지게 느껴지네요 ㅎㅎ 실수로 주석에 8번이 두 번 들어간 거 같아요. 마지막 주석은 조조로 유명한 대사군여

독우

2020.05.13
19:24:56
(*.30.20.69)
연의의 대사들이 실제 다른 인물의 대사를 그대로 차용하거나 살짝 변용한 게 많은 듯합니다. 저도 몰랐는데 코렐솔라 님이 아니었으면 계속 모를 뻔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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