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馬鄴,字表仁,其先河內溫人也。
사마업(司馬鄴)의 자는 표인(表仁)이고 그의 선조(河內)는 하내 온현[溫] 사람이다.
祖德璋,仕唐為杞王傅。父諲,左武衛大將軍。鄴資蔭出身,頗知書,累官至大列。
조부인 사마덕장(德璋)은 당나라 기왕부[杞王]의 부(傅)로 있었다. 부친인 사마인(諲)은 좌무위대장군이었다. 사마업은 재물과 음서로[資蔭] 관직에 나갔으나[出身] 자못 서책을 읽었고 관직이 대열(大列:?)에 이르렀다.
唐天復初,韓建用為同州節度留後。
당나라 천복(天復) 초(901~904년)에 한건(韓建)이 임용해[用] 그 주의 절도유후(節度留後:충무군절도사부)로 삼았다.
韓建傳判官司鄴昭宗之幸鳳翔也,太祖引兵入關,前鋒至左馮翊,鄴持印鑰迎謁道左。
한건이 판관을 보내 전하면서[傳判官] 사마업을 당나라 소종의 봉상부의 재[幸鳳翔]를 맡겼는데[司], 태조(太祖:주전충)가 병사를 끌고 입관하고 나서 그 전봉(前鋒)의 부대가 좌풍익(左馮翊)에 이르자 사마업이 인장과 부고의 자물쇠[印鑰]를 가지고 길에 나서 맞이하여 뵈었다[迎謁].
太祖以兵圍華州,命入城招諭韓建,建果出降。
태조가 병사를 보내 화주(華州:봉상부 근처)를 포위하고 성 안으로 명을 내려 한건을 초유(招諭)하였는데 과연[果] 한건이 나와 항복했다.
及大軍在岐下,遣奏事於昭宗,再入復出。
대군이 기하(岐下)에 있었는데 소종에게 상주[奏]하였다. 입조하여 다시 출사하게 하였다.
又使於金州,說其帥馮行襲,俾堅攀附。
또한 사자를 금주(金州)에 보내 그 지키는 장수[帥]인 풍행습(馮行襲)을 설득하게 하니 한층 견고하게 반부(攀附:세력에 부르쫓음)하였다.
後曆宣武、天平等軍從事。
후에 선무진[宣武], 천평진[天平] 등의 군종사를 역임했다.
開平元年,拜右武衛上將軍。
개평(開平) 원년(907년,후량 개원)에 우무위상장군에 배수되었다.
三年,使於兩浙。
개평 3년에 양절(兩浙)에 사자로 갔다.
時淮路不通,乘駔者迂回萬里,陸行則出荊、襄、潭、桂入嶺,自番禺泛海至閩中,達於杭、越。
마침 회 땅으로 가는 길[淮路]이 막혀 준마를 탄다 해도[乘駔者] 만 리를 우회하여야 했는데, 육로로는[陸行] 형주[荊], 양주[襄], 담주[潭], 계주[桂]를 나와 고개로 넘어간 뒤에, 번우(番禺:현재의 광저우 근방)로부터 바다를 따라?[泛海] 민나라 안[閩中]에 이르르면 마침내 항주[杭]와 월주[越]에 도달했다.
復命則備舟楫,出東海,至於登、萊。
(사명을 마치고 난 뒤) 복명(復命)하기 위하여 배[舟楫]를 준비하여 동해로 나가 (뱃길로) 등주[登], 내주[萊:산동반도]에 이르렀다.
而揚州諸步多賊船,過者不敢循岸,必高帆遠引海中,謂之「入陽」,以故多損敗。
양주(揚州)에는 적의 보병과 선박들이 많았기 때문에 지나쳐 가더라도 강기슭[循岸]은 감히 넘보지 못했으니, 반드시 돛을 높이[高帆] 하고 멀리 바다 깊숙히 돌아가야 했다. 이를 가르켜 ‘양주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손해되고 낭패되는[損敗] 것이 많았다.
鄴在海逾年,漂至躭羅國,一行俱溺。
사마업이 바다에서 해를 넘겼는데[逾年], 결국 표류하여 탐라국까지 갔다. (결국) 일행이 모두 익사했다.
後詔贈司徒。
후에 조서를 내려 사도(司徒)로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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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기가 좀 편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한문병기를 할지 안할지 고민스럽군요.
->[당을 섬겨 기왕을 보좌했다.]
韓建傳判官司鄴昭宗之幸鳳翔也
->[한건이 소종의 봉상으로의 행차를 사마업에게 맡기며 판관으로 옮겼다.]
이부분 좀 어렵네요 제가 한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ㅅ-;;
命入城招諭韓建,建果出降
->[(사마업을) 성 안으로 들어가 한건을 부르게 하니, 한건이 과연 나와 항복하였다.]
出荊、襄、潭、桂入嶺
->영嶺은 지명이름이니 [형, 양, 담, 계을 나와 영嶺에 들어가]
復命則備舟楫,出東海,至於登、萊。
->[명을 완수하고 곧바로 배와 노를 준비해,동해로 나와,등登、래萊에 이르렀다。]
저도 초보지만 의견 남겨봅니다 ㅓ헣허허
오대사라니....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건 그렇고 구오대사 어렵네요.. 신오대사가 편한것같슴다 우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