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8월 2일 무오 1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남쪽 지방의 조세는 육지 운송 대신에 모두 배로 운반하도록 하다







남계(南界)의 부세(賦稅)를 모두 수운(水運)하라고 명령하였다.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박돈지(朴惇之)가 상소하기를,

"공부(貢賦)의 수운(輸運)은 삼한(三韓) 이래로 모두 해도(海道)로 하여, 남방 백성들이 배[舟揖]에 익어서 폐단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구의 난(亂)이 있을 때부터 육지로 운반하는 방책을 정하였는데, 사람과 짐승이 지고 싣는 데에 지치어 길에서 죽는 것이 매우 많으니, 그 폐단이 심히 컸습니다. 개국한 이후에 왜구가 조금 잠잠하여 다시 해로로 수운하게 하였는데, 공부가 들어오는 것이 배나 되었습니다. 기묘년 가을에 여러 번 풍파를 만나 인명이 많이 상하였으므로 불편하다고 의논하는 사람이 있어, 남계의 공부를 다시 육로로 운반하게 하였는데, 두어 해가 못되어 그 폐단이 수로로 수운하는 것보다 많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다시 수로로 수운[漕轉]하는 의논을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다. 의정부에 내리니, 삼부(三府)가 함께 의논하여 상소하기를,

"수로로 수운[漕運]하는 것은 고금을 통하여 이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진언(陳言)한 바가 실로 마땅합니다. 하물며, 금년의 공부(貢賦)는 쌀로 수납하니, 육지로 운반하는 것이 더욱 미편합니다. 경상도 상도(上道)의 주현(州縣)의 전부터 육로로 운반하던 것 외에는 모두 바다로 수운하게 하고, 그 배는 각각 그 관(官)에서 만들게 하며, 사공(沙工)과 격인(格人)은 해로에 익숙한 사람을 소모(召募)하여, 사선(私船)의 예(例)에 의하여 세가(稅價)를 주어 실어 보내게 하고, 각도의 병선(兵船)으로 호송하게 하소서."

하여, 유윤(兪允)하였다.



한줄 요약 
편리함 : 수로>>>>>>>>>>>>>>>>>>>>>>>>>>>>>>>>>>>>>>>>>육로

하지만....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 34척이 해중(海中)에서 침몰되어, 죽은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중략) 우대언(右代言) 이응(李膺)이 말하기를,

"육로(陸路)로 운반하면 어려움이 더 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마(牛馬)의 수고뿐이니,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조운선이 침몰해 사람이 죽어나가니깐, 태종은 다시 육로로 원상복구한다.


근신(近臣)과 더불어 남도(南道)에서의 쌀의 운반을 수로(水路)로 할 것인가, 육로(陸路)로 할 것인가의 가부(可否)를 의논하니, 박석명(朴錫命) 등이 모두 말하기를,

"육로로 운반[陸轉]하는 곤란이 수로로 운반[漕運]하는 것보다 심합니다. 수로로 운반하는 것은 바람과 물만 살피면 근심이 없을 수 있습니다. 간혹 침몰되는 것은 전수자(典守者)가 바람과 물을 살피지 않고, 전도(顚倒)하여 발선(發船)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육로로 운반하는 것은 비록 어려우나, 인명(人命)은 상하지 않는다.


수로가 더 편하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사람이 먼저다'라며 육로 운반을 고집한다.


그리하여 전라도의 곡식을 한 때 육로로 운송하도록 했다.

하지만....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홍유룡(洪有龍)이 상서(上書)하였다.

"조운(漕運)은 국가의 큰일[大務]이고, 토지가 기름지고 조세(租稅)가 많음은 전라도만한 곳이 없습니다. 요즈음 조운을 폐(廢)하고 육수(陸輸)의 법을 세웠으나, 신의 생각으로는 배를 만들어 조운함은 어려운 듯하면서도 실지로는 쉽고, 전체(傳遞)256) 하여 육수(陸輸)함은 쉬운 듯하면서도 실지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전라 수군절제(全羅水軍節制)의 직임에 비원(備員)257) 되었으니, 각 포구(浦口)의 요해처(要害處)와 풍수(風水)의 험순(險順)한 연유를 다 알고 있는데, 요해지로 정박할 만한 곳은 수십처(數十處)에 불과하고, 나누어 정박하여 수어(守禦)할 배[船]가 많은 데는 10여 척[艘], 적은 데는 7, 8척이면 넉넉하니, 만약 60척을 더 만들어 지난번에 만든 40척과 합하면 1백 척이 됩니다. 또 전라도의 1년간 조세(租稅) 숫자는 대체로 7만 석(石)이오나, 4, 5월의 바람이 순한 때를 맞아 하번 선군(下番船軍)에게 역사를 시키되, 1척마다 5백여 석을 싣게 한다면 5만여 석을 수송할 수 있고, 그 나머지 2만여 석은 사선(私船)에 나누어 실어 모두 운반한다면, 예전의 전함(戰艦)은 그대로 수어하게 하여도 지금 만든 배로써 조전(漕轉)할 수 있어 일거 양득(一擧兩得)이 될 것입니다. 만약 육수하면 조세는 많고 우마(牛馬)가 적은데다 험난한 곳을 발섭(跋涉)하게 되어 실로 이루기 어려우며, 그 소가 꺼꾸러지고 말이 쓰러져 가면서 제휴(提携)하고 전수(轉輸)하는 괴로움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다가 불우(不虞)의 변이 있게 되면, 사람이 고단하고 말이 약해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이르기를 ‘육로(陸路)로 수송하면 단번에 백폐(百弊)가 생긴다.’ 하였습니다. 또 배를 만드는 공(功)을 육로로 수송하는 노고에 비한다면 어찌 백배(百倍)에 그치겠습니까?"

전 절제사(節制使) 김문발(金文發)도 상서하였는데, 대의(大意)는 개략 같았으므로, 정부에 하명(下命)하여 제경(諸卿)과 공신(功臣)을 모이게 하여 의논하니, 모두가 조운을 편하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였다.

"바야흐로 육수(陸輸)를 의논할 때에는 일찍이 한 사람도 불가하다는 사람이 없더니, 이제는 모두 어렵게 여기니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온 나라가 조운(漕運)을 편한 것으로 여기고 있은즉 내 중의(衆議)를 따르겠다."


요약 : 수로로 운송하면 많은 양의 곡식을 실을 수 있고, 육로 보다 훨씬 편하다.

때문에 전라도 미곡 운반은 원래대로 수로로 하게 되었다.

다만, 태종은 육로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경상도의 미곡을 육로로 운반하게 한다.


정부에서 아뢰었다.

"지금 비록 각도에서 육수(陸輸)의 법을 파(罷)한다 하더라도 경상도에서는 폐함이 불가합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아들 세종도 조운선 침몰 때문에 경기 지역의 수운을 폐지하고, 육로로 대신했다.

호조에서 계하기를,

"경기 수원부(水原府)에서 지난 갑진년에 조운(漕運)하던 곡식이 배가 파선되어 모두 침몰하였는데, 이제 또 바람을 만나 전복되어 익사한 자가 6명이나 되오니, 청컨대 경기의 수로(水路)로 조운하던 각 고을들은 이제부터 다 육로로 수송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렇듯 조선은 수로의 폐해(한 번 잘못되면 인명 피해가 속출) 때문에 일부 교통로를 육로로 바꿨다. 그리고 '육로 vs 수로' 떡밥은 이후에도 계속 된다. 실제로 육로 수송도 나름 한 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주 사용로는 수로였다. 이는 현실적 어려움 때문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접대에 필요한 물품은 비록 모두 수로(水路)로 운반하여 민폐(民弊)를 없앤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부득이해서 육로(陸路)로 수송하는 곳에 농우(農牛)를 사용하게 된다면 어찌 그 폐해가 없겠습니까? 또 시위(侍衛)하는 인마(人馬)가 적더라도 수천(數千)이하는 아닐 것인데, 이때를 당하여 민간의 곡초(穀草)가 이미 모자라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9월을 기다려 개성에 거둥하여 제릉(齊陵)을 배알(拜謁)하고 성터[城基]를 정하고 이내 강무(講武)를 한다면 거의 다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문종실록>

성 쌓는 일은 정지했고, 또 그 역부(役夫)들은 이미 쌀을 운반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안당(安瑭)이 조운(漕運)을 어렵게 여겨, 우선 그 선척(船隻)의 수효를 감하여 편리 여부를 시험한 뒤에 더 만들려고 하는데, 신 등도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육로(陸路)로 수송하는 고통이 조운하는 것보다도 심합니다. 지금 만드는 조운할 배가 1백 척인데, 배 하나가 쌀 백 석을 실을 만하니, 배 백 척으로 한 차례 운반하는 것이 만 석에 불과합니다. 만약 이 수보다 감한다면 그 운반하는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호조 겸판서(戶曹兼判書) 이극배(李克培)·판서(判書) 허종(許琮)·참의(參議) 이육(李陸)이 의논하기를,

"굶주리고 있는 백성들을 써서 종자곡을 옮기는 것은 그 폐단이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전라도의 볍씨는 경기·황해도·평안도에는 맞지 않고 오직 충청도의 볍씨만이 옮겨 쓸 만합니다. 조운(漕運)하기가 비록 어렵다 하여도 백성에게는 폐단이 없습니다. 선박은 많이 준비하여 일찍이 운반하였다가 파종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고, 참판(參判) 이경동(李瓊仝)은 의논하기를,

"볍씨를 선박으로 운반하게 되면 때를 맞추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충청도 여러 고을의 전세(田稅)를 각기 그 근처의 2일정(二日程)이나 3일정(三日程)에 있는 읍창(邑倉)으로 차례대로 옮겨 바치게 하여 경기·황해도로 일단 모이게 하였다가 다시 평안도까지 옮겨 가게 하면 납세하는 백성의 노고와 폐단이 그렇게 심하지 않고도 세 도(道)의 볍씨가 자연히 넉넉해지고 농사철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고,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윤사흔(尹士昕)·홍응(洪應)·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지금 보건대 호조(戶曹)에서의 두 가지 의논이 육로로 운반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만, 사람과 말의 노력이 실로 어려워서 수로로 운반하는 쉬움만 같지 못합니다. 만약 볍씨가 바다 기운을 쐬일 것을 염려한다면 두껍게 싸서 실으면 될 것입니다."

하였으며, 노사신(盧思愼)·한계희(韓繼禧)·강희맹(姜希孟)·이파(李坡)는 의논하기를,

"평안도와 황해도는 모두 가뭄이 심해져 종자를 반드시 관가에서 지급해야만 넉넉해질 것입니다. 가령 그 도(道)에서 스스로 준비하게 해서는 백 분의 일밖에 되지 않아서 다른 도(道)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도에서 점차로 옮겨 바치는 일을 두고 말하면 처음에는 이치에 닿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옳지 못한 일입니다. 황해도와 평안도는 남도 지방과 달라서 고을들이 서로 인접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 여러 날 왕래하면서 운반할 경우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금년은 피차가 모두 굶주리고 있는데, 충청도·경기에서 거둔 곡물은 황해도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지방으로 옮겨 바칠 수 있다 하더라도, 황해도의 서쪽 지방은 모두 적지(赤地)인데 무엇으로 평안도에 옮겨 바치겠습니까? 그러므로 차차 옮겨 바치게 한다는 방법은 황해도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지방에만 가능하며 황해도 전체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평안도에 미칠 수야 있겠습니까? 그래서 해로로 운반하는 편리함만 같지 못합니다. 혹 말하기를, ‘평안도와 황해도는 남쪽 지방에서 멀고 해로(海路)도 대단히 멀어서 바다 기운을 오래 쐬면 곡물의 싹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잘 덮고 두껍게 깔면 혹 만일의 손실이 있다하더라도 모두 못쓰게 되기야 하겠습니까? 또 들으니 1년이 지난 곡물도 잘 간수하면 싹이 나고 열매 열기가 신곡(新穀)과 다름없다고 합니다. 청컨대 양도(兩道)로 하여금 묵은 곡식은 구황(救荒)에 쓰되, 1년밖에 안된 벼는 모두 풀지 말고 종자로 쓰게 하소서."

하였고, 어유소(魚有沼)·이극증(李克增)·김영유(金永濡)·변종인(卞宗仁)은 의논하기를,

"경기와 강원도의 고을 중에 황해도·평안도와 수로(水路)로 통하지 않는 곳은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볍씨를 황해도의 평산(平山) 등 고을에 바치게 하고, 그 나머지 경기·충청도 각 고을의 볍씨는 본래대로 조운(漕運)에 맡기게 하소서. 그러나 마땅히 먼저 경험 있는 조정의 관리로 하여금 수로의 험하고 쉬운 곳과 선박이 닿을 곳을 조사한 후에 조운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고, 이덕량(李德良)·최영린(崔永潾)·성숙(成俶)·박안성(朴安性)은 의논하기를,

"평안도·황해도의 부족한 볍씨에 대하여 혹은 충청도·전라도의 곡물을 조운(漕運)하자고 하기도 하고 혹은 차례대로 육로로 운반하자고도 합니다만, 전라도의 곡물은 그 풍기(風氣)와 파종 시기가 달라서 다른 지방에 옮겨 심지 못합니다. 차례대로 육로로 운반하는 경우 금년은 각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이 모두 소요(騷擾)할 것이므로 도리어 폐단이 됩니다. 양도(兩道)의 소출(所出)과 회환(回換)750) 을 제하고도 부족한 고을은 부근 경기·충청도의 곡물을 적절히 조운(漕運)하여 보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노사신(盧思愼) 등의 의논을 따랐다.<성종실록>


이극균(李克均)이 아뢴 전라도(全羅道)의 전세(田稅)를 옮겨서 수납(收納)하는 편부(便否)를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일찍이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절도사(節度使)를 역임(歷任)한 재상(宰相)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심회(沈澮)·윤필상(尹弼商)·홍응(洪應)·윤호(尹壕)·정난종(鄭蘭宗)·이숙기(李淑琦)·성준(成俊)·박건(朴楗)·이약동(李約東)·이칙(李則)이 의논하기를,

"국가에서 조선(漕船)·조졸(漕卒)을 마련하고, 해운 판관(海運判官)을 배치하는 것은 조운(漕運)할 때를 당해서 판관(判官)은 조선을 손질하고 조졸을 점검(點檢)하며, 관찰사(觀察使)는 차사원(差使員)을 정해서 거둬들인 조세(租稅)를 나누어 싣게 하며,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는 친히 싣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후(虞候)를 선정하여 충청도(忠淸道)의 지경(地境)까지 호송(護送)하게 해서 교부(交付)하도록 하고, 압령 만호(押領萬戶)를 정하여 운(運)570) 을 나누어 배를 출발하게 하고, 경유(經由)하는 연변(沿邊)의 여러 고을에서는 먼저 물길의 얕고 깊은 것을 살펴서 표(標)를 세우고 친히 뱃길을 지휘하며 인솔하여 호송하도록 되어 있으니, 국가에서 법을 세운 것이 자세하고 면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배 위의 기계(器械)가 간혹 튼튼하고 치밀(緻密)하지 않고, 조졸(漕卒)도 더러는 미약(迷弱)한 자를 대신 보냅니다. 그리고 나누어 실을 때에 경중(輕重)에 적합함을 잃기도 하고, 압령 만호가 간혹 조심스럽게 고찰하지도 않고, 연변(沿邊)의 여러 고을에서도 간혹 몸소 호송(護送)하지 않아 이 때문에 가끔 패몰(敗沒)하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이 어찌 법(法)을 세운 것이 자세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간혹 중도(中道)에서 회오리 바람을 만나는 것은 계산이나 요량으로 미칠 수 없는 것이지만, 지금은 한때의 사람이 조치해야 할 일을 다하지 않아서 패몰(敗沒)하게 되는 것이니, 옛법을 경솔하게 변경시키는 것이 첫째로 불가(不可)한 것입니다. 만약 수로(水路)가 없다면 비록 길이 멀더라도 육로(陸路)로 운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로로 조운(漕運)할 수 있는 이점(利點)이 있는데도 농부(農夫)와 농우(農牛)를 몰아서 육로로 멀리까지 수송하게 한다면 전라도(全羅道)의 사람과 가축이 한꺼번에 피폐(疲弊)하여 소란할 정도로 실망(失望)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로(水路)에서의 풍랑(風浪)은 지척(咫尺)에서 호흡(呼吸)하는 순간에 일어나므로, 만약 조선(漕船)의 운행(運行)을 조심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공세곶이[貢稅串] 이상인들 어떻게 패몰(敗沒)이 없다는 보장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패몰하는 조선의 피해를 제거하려고 해서 반드시 육로(陸路)로 운반하게 한다면 경창(京倉)에다 전수(轉輸)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한 것입니다. 진실로 조졸(漕卒)이 대신 운행하고, 압령 만호(押領萬戶)와 연변 수령(沿邊守令)·해운 판관(海運判官)이 게을러서 고찰(考察)하지 않는 것이 마치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비록 공세곶이[貢稅串]에 운반하는 것도 패몰(敗沒)을 구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예전대로 조운(漕運)하게 하고, 법대로 하지 않는 자는 엄하게 다스린다면 거의 패몰하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손순효(孫舜孝)는 의논하기를,

"전라도(全羅道)의 전세(田稅)를 수로(水路)로 운반해야 한다는 것과 육로(陸路)로 수송해야 한다는 의논이 분운(紛紜)한데, 그것은 오늘부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의논을 근거로 생각해 보면, 본도(本道)는 경상도(慶尙道)와는 비교할 것이 아니며, 조운(漕運)하는 길이 사방으로 통하였으니 끝내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길은 멀고 가까운 것이 있는데, 먼 곳을 육로(陸路)로 수송한다면 매우 고달픕니다. 그래서 부득이 조선(漕船)으로 운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은 육로로 운반할 만하며 끝내 해로움이 없습니다. 신은 망령되게 생각하기를, 한 도(道)를 반으로 나누어 아산(牙山) 공세곶이[貢稅串]와의 거리가 5, 6일 노정(路程)에 지나지 않는 곳은 육로로 수송하게 하고, 그 나머지 먼 고을은 조운(漕運)하는 것이 편(便)하다고 여깁니다. 만약 마소[牛馬]가 죽는 것을 괴롭게 여긴다면, 경상도 백성에게 매년 2월 이전에 전세(田稅)의 수납(收納)을 마치게 하면 농사를 폐기(廢棄)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시행하여 그 편부(便否)를 증험해 볼 만합니다."<성종실록>

전일에 고형산이 안당과 같이 바다에 나가서 파도가 험한 때와 윤순한 때를 자세히 물어보고 와서 말하기를 ‘4월에서 6월까지는 바람이 잔잔하고 바다가 고요하여 조운할 수 있으나, 입추(立秋) 뒤에는 바람이 세어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조운할 시기가 겨우 석 달인데, 지금 배의 수를 감하였다가 그 때가 되어 조운할 수 있는지를 시험한 뒤에 배를 더 만든다면, 어찌 그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함경도는 토지가 좁아 비록 풍년이 들어도 백성에게서 거두는 것이 많지 않아 군수(軍需)가 항상 부족한 것이 걱정인데, 더구나 지금은 흉년이 계속되어 전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으니, 만약 제때에 곡식을 옮기지 못한다면 백성들을 살릴 계책이 없을 뿐 아니라, 변방의 수비도 어렵게 됩니다.이번의 이 조운은 부득이하여 하는 것이나, 이번 일로 인해 수로(水路)가 통하게 된다면 만세토록 이익이 될 것입니다. 큰일을 이루려면 작은 손해는 헤아리지 않는 것이니, 지금 큰일을 거행함에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어코 성공하기를 기할 것이요, 미리 헛 소비만 하고 효과없을 것을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중종실록> 【경상 감사 안당이, 북도 조운의 편리 여부를 장계하였기 때문에 이 의논이 있었다.

대체로 병기(兵器) 가운데 활과 화살이 가장 중한 것인데 신이 평안도 사람들을 보니 활과 화살이 전혀 없었습니다. 활은 혹 향각(鄕角)으로도 만들 수 있고 혹은 산뽕나무로도 만들 수 있지만 화살대[箭竹]같이 생산되지 않는 물건은 얻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 전례로 화살대를 수송하여 강의 연변의 사졸(士卒)들에게 공급하여 왔습니다. 신이 변군(邊郡)에서 내지(內地)에 도착하니, 내지 사람들이 1천 명 또는 1백 명씩 무리를 지어 길을 막고 ‘화살대는 항상 변군에만 내리고 우리들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대저 평안도는 중국과 인접해 있으니, 병기를 단련해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지로 운반하면 각역(各驛)에 폐단이 있을 것이니, 수로(水路)로 수송하여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화살을 만들게 하고 백성들에게 무역하게 하여 여기에서 받은 값을 가지고 군자(軍資)에 보충하게 하면 편리할 듯합니다."

하고, 영사 김근사는 아뢰기를,

"심언광의 말이 옳습니다. 신이 일찍이 평안도를 가보았는데 화살대가 매우 귀하였습니다. 과연 해마다 화살대를 수송하려면 역로(驛路)에 폐단이 있어 많이 수송할 수 없을 것이나, 수로로 수송하면 편리하고 많이 수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활과 화살의 용도는 매우 중대한 것이라서 평안도 사람들이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중종실록>

즉,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육로를 사용하게 되면, 민간에서 가축을 징발해야 함. 이는 농업에 큰 타격. 거기에 가축 먹일 사료도 꽤나 들어감

2. 육로로 가면 사람도 힘들고, 가축도 힘들다

3. 육로 보다 수로의 운송량이 더 많음

4. 육로 운반은 각 역에 부담을 줌

5. 곡식의 신속한 운반이 필요한 흉년 지방에 수로가 더 적합.


이러한 이유 때문에 조선은 수로를 더 자주 이용했습니다. 조선이 멍청해서 수로를 더 자주 이용한게 아닙니다. 오히려 육로 운반도 꾸준히 검토된 편이고.



사족

그나저나 '도로를 만드는 것이 외적에게 침략해 올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해 준다고 생각하는 소극적인 국방 정책과 교통 정책을 가진 나라에서 수레의 활발한 운행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는 얘기에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군요. 실록 뒤져보면 이와 관련된 얘기가 없던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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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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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만성

2016.07.22
20:22:53
(*.71.251.199)
그래서 실록을 보면 목우.유마를 만들었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왕이 직접 나와 살펴봤다는 기록이(연의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는 목우.유마가 아니라 그냥 노동력이 덜 필요한 인력거 정도로 인식한듯 합니다) 몇 건 있습니다. 인력거로 전국을 연결한다는 계획이 처음에는 이해가 안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해서라도 육로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던게 아니였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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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역사 살인자 김덕령을 보호해준 선조 바람처럼 2015-12-20 2552
121 역사 선조는 과연 무능한 왕이었는가? 바람처럼 2015-12-19 2598
120 역사 광해군은 대동법을 부정적으로 봤다 바람처럼 2015-12-02 3176
119 역사 정조의 정책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바람처럼 2015-11-28 2668
118 역사 이순신은 과연 현대에 이르러 추앙된 인물인가? 바람처럼 2015-11-14 2894
117 역사 태무제 : 올테면 와라! 우울해 2015-10-20 2753
116 역사 유연의 풍습과 영역 우울해 2015-10-20 2273
115 역사 요동은 과연 우리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1] 바람처럼 2015-10-09 2998
114 역사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 견준다는 고오조高敖曹(고앙高昂)의 무용 [1] 우울해 2015-10-06 2946
113 역사 아주 간단하게 보는 스파르타 왕가와 그 선조들의 계보 [2] 우울해 2015-10-05 3235
112 역사 중종의 밀지는 신권 우세를 보여주는 증거인가 바람처럼 2015-10-01 2902
111 역사 과연 중종은 왕권이 약했지 바람처럼 2015-09-30 2496
110 역사 과연 선조는 의병장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하지 않았는가?(수정) [2] 바람처럼 2015-09-16 3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