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서 Rexhistoria에 있는 "한문 정사"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은 어디까지나 진서 종실열전의 일부로 사실상 진서 종실열전의 반 정도밖에 번역하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한문 정사에 있는 문서 자체는 완역한 것은 사실이라서 "날림완역"이라 칭합니다.

 

*본문은 수많은 의역과 억측을 통한 번역 등이 난무하는 날림완역본으로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이중 특히나 오역이 확실하다 싶은 부분들은 빨간색으로 표기했습니다. 이 부분은 고수분의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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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平獻王孚字叔達,宣帝次弟也。初,孚長兄朗字伯達,宣帝字仲達,孚弟馗字季達,恂字顯達,進字惠達,通字雅達,敏字幼達,俱知名,故時號「八達」焉。孚溫厚廉讓,博涉經史。漢末喪亂,與兄弟處危亡之中,簞食瓢,而披閱不倦。性通恕,以貞白自立,未嘗有怨於人。


안평헌왕(安平獻王사마부(司馬)의 자()는 숙달(叔達)이다선제(宣帝-사마의)의 차제(次弟-다음번째 동생)이다본래 사마부()의 장형(長兄-맏형사마랑()의 자()는 백달(伯達), 선제(宣帝-사마의)의 자는 중달(仲達)이다사마부()의 동생 사마규()의 자()는 계달(季達), 사마준()의 자()는 현달(顯達), 사마진()의 자()는 혜달(惠達), 사마통()의 자()는 아달(雅達), 사마민()의 자()는 유달(幼達)이다모두 함께 이름을 알리니그러므로팔달(八達)이라 불리었다사마부()는 온후(溫厚)하고 염량(廉讓-청렴하고 양보함)하니경사(經史-경서와 사기)에 박섭(博涉-널리 사물을 견문함)하였다후한말(漢末)의 상란(喪亂)에 형제들과 거주하는 곳이 위망(危亡)하던 중,  소쿠리에서 먹고 바가지로부터 마셨지만 능히 파헤치고 읽으며 게으르지가 않았다성품이 어질고 인자하니, 이로써 곧고 결백해여 자립(自立)하였고, 일찍이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적이 없었다.


陳留殷武有名於海,嘗罹罪譴,孚往省之,遂與同處分食,談者稱焉

 

진류(陳留)의 은무(殷武)가 해내(海內)에서 이름을 떨쳤는데, 일찍이 죄를 얻어 형벌을 받았는데 사마부가 가서 살펴보고는 마침내 (은무와 사마부가)한자리에 모여서 더불어 나누어 먹으니담자(談者)들이 (이를칭찬하였다고 한다.

 

魏陳思王植有俊才,選官屬,以孚文學掾。植負才陵物,孚每切諫,初不合意,後乃謝之。遷太子中庶子。


()의 진사왕(陳思王조식()이 재주가 있었는데청렴한 관속(官屬)들만 가리니이로써 사마부()를 문학연(文學掾)으로 삼았다조식은 재주에 힘쓰지 않고재물을 가볍게 여겼는데사마부는 매번 절간(切諫-간절히 간함)하였다. (그러므로처음에는 뜻이 맞지 아니하였으나후에 도리어 (조식이사과(혹은 화해?)하였다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관직을옮겼다.


魏武帝崩,太子號哭過甚,孚諫曰:「大行晏駕,天下恃殿下命。當上宗廟,下萬國,奈何效匹夫之孝乎!」

 

위무제(魏武帝-조조)가 붕어()하자태자(太子-조비)과하게 울부짖으며 곡하자사마부()가 간하며 말하였다:군왕께서 안가(晏駕-임금의 죽음을 뜻함)하기고천하(天下)는 전하의 목숨()에 의지하고 있습니다마땅히 위로는 종묘(宗廟)를 위하여 하며아래로는 만국(萬國)을 위하여야 하는데어찌하여 필부(匹夫)의 효()를 본받고 계십니까

 

太子良久乃止,曰:「卿言是也。」


태자가 오래 있다가 마침내 (곡을그치고말하였다:경이 말하는 것이 옳다.

 

時群臣初聞帝崩,相聚號哭,無復行列。


이 때군신(群臣)은 처음으로 황제(-조조)가 붕어했다고 듣자서로 모여서 호곡(號哭)하였는데행렬(行列)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자치통감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표현함.)


孚厲聲於朝曰:「今大行晏駕,天下震動,當早拜嗣君,以海內,而但哭邪!」孚與書和洽罷群臣,備禁衞,具喪事,奉太子以即位,是文帝

 

사마부()가 엄한 소리로 조정()에서 말하였다이제 왕께서 안가하셔서천하가 진동하고 있으니서둘러 사군(嗣君-대를 이어 임금이 될 사람)을 찾아뵙고 내해(海內)를 진압하여야 하는데 단지 곡이나 하고 있는가!사마부()와 상서(화흠(和洽)이 신하의 무리를 내쫓고금위(禁衞)의 일을 지키자상사(喪事)를 수습할 수 있었다이로써 태자(太子-조비)가 즉위(即位)할 수 있었고이에 문제(文帝)가 되었다.

 

時當選侍中、常侍等官,太子左右舊人頗諷諭主者,便欲就用,不調餘人。孚曰:「雖有堯舜,必有稷契。今嗣君新立,當進用海英賢,猶患不得,如何欲因際會自相薦邪!官失其任,得者亦不足貴。」遂更他選。


이때시중(侍中)과 상시(常侍)가 사람을 선발하는데태자(太子)의 좌우(左右)에 있던 옛 사람과 주인에게 편파적인 풍유(諷諭)를 하는 사람(※아첨하는 사람을 뜻하는 듯자치통감에서는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사람”으로 서술함.)이라면 쓰려고 하고다른 사람을 쓰고자 하지 아니하였다사마부가 말하였다비록 요순(堯舜)이라 하더라도직설(稷契-요와 순의 신하 직과 설을 뜻함.)이 반드시 필요했었습니다지금 사군(嗣君)께서 새로 즉위하셨는데마땅히 해내의 영현(英賢-뛰어나고 슬기로운 사람.)의 쓰셔야지걱정()만 하는 것은 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어찌하여 다시 만난 것으로 이용하여 스스로 서로를 천거()하려고 하십니까!  관료가 맡은 임무을 해네지 못한다면얻었다고 하더라도 귀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마침내 개선하여 다르게 선발하였다.


轉孚中書、給事常侍,宿省內,除黃門侍,加騎都尉

 

사마부()는 전임되어 중서랑(中書), 급사상시(給事常侍)를 맡았는데성내(省內-궁궐 안을 뜻하는 듯)에서 오래 일하자 황문시랑(黃門侍)으로 임명되고 기도위(騎都尉)를 더했다.

 

時孫權稱藩,請送任子,當遣前將軍于禁還,久而不至。天子以問孚,孚曰:「先王設九服之制,誠以要荒難以德懷,不以諸夏禮責也。陛下承,遠人率貢。權雖未送任子,于禁不至,猶宜以寬待之。畜養士馬,以觀其變。不可以嫌疑責讓,恐傷懷遠之義。自孫策至權,奕世相繼,惟與弱,不在一禁。禁之未至,當有他故耳。」後禁至,果以疾遲留,而任子竟不至。大軍臨江,責其違言,吳不貢獻。


이때손권(孫權)이 번(-꼬붕)을 칭하였는데아들을 (인질로보낼 것을 청하였다마땅히 전장군(前將軍우금(于禁)이 돌아왔어야 했는데오랬동안 도달하지 아니하였다이로써 천자(天子-조비)가 사마부()에게 묻자사마부()가 말하였다선왕(-조조)께서 구복의 제도를 설치하였는데정말로 황난(難以)이 벌어지자 덕을 품으실 수 있으셨으나 이로써 제하(諸夏-중국의 본토를 일컬음.)의 예도를 책망한 것은 아닙니다폐하께서는 승서(-선대의 사업을 이음.)하셔서 먼 사람(-손권)을 조공을 바치게 하며 거느립니다손권()이 비록 아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우금(于禁)이 오지 아니하였더라도오히려 마땅히 너그럽게 대접하셔야 합니다가축을 길러서 군사와 말을 갖추는 것처럼변화를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이로써 혐의(嫌疑-꺼리고 싫어함)를 책양(責讓-꾸짖음)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오히려다치는 것을 두려워하니 멀수록 위로하며 품어야 합니다스스로 손책(孫策)의 정도에 이른게 손권()이며큰 세상(世相-세태)을 이으고 있습니다생각하는 것에 강함과 약함이 더불어 있고우금같은 자는 세상에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우금이 도착하지 않은데에는 마땅히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이후 우금이 도착하였는데과연 병으로 머물고 있었던 것이었다그러나 (손권이아들은 마침내 보내지 아니하였다대군(大軍)을 임강(臨江)에 보내고약속한 바를 어긴 것을 책망하니()는 드디어 조공을 바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後出河內典農,賜爵關侯,轉河太守


이후 하내(河內)의 전농(典農)이 되었으며관직을 주어 관내후(關內侯)로 삼고청하태수(河太守)가 되었다.

初,魏文帝置度支書,專掌軍國支計,朝議以征討未息,動須節量。及明帝嗣位,欲用孚,問左右曰:「有兄風不?」云:「似兄。」天子曰:「吾得司馬懿二人,復何憂哉!」轉度支書。孚以擒敵制勝,宜有備預。


처음에위의 문제(文帝-조비)가 도지상서(度支)를 뒀는데오로지 지계(支計)로 군국을 헌신하니조정에서 정벌을 의논하는 것을 그치지 아니하였는데마침내 동요하여 절양(節量)하였다명제가 자리를 이었을 때(즉위년도 227), 사마부()를 쓰고자 하니좌우(左右)에게 물으며 말하였다(-사마의)의 면모가 존재하지 아니하오?답이 이를기를(-사마의)과 닮았습니다.천자(天子-조예)가 말하였다내가 사마의(司馬懿)를 두명이나 얻었는데 어찌 근심하겠소(사마부를도지상으로 임명하였다이로써 사마부는 적을 사로잡으며 승리를 거뒀는데이에 걸맞는 예를 갖췄다.


每諸葛亮入寇關中,邊兵不能制敵,中軍奔赴,輒不及事機,宜預選步騎二萬,以二部,討賊之備。又以關中連遭賊寇,穀帛不足,遣冀州農丁五千屯於上邽,秋冬習戰陣,春夏修田桑。由是關中軍國有餘,待賊有備矣。後除書右僕射,進爵昌平亭侯,遷書令。

 

매번 제갈량(諸葛亮)이 관중(關中)을 침략하였는데변방의 병력들은 적을 능히 당해내질 못하자 (사마부가중군(中軍)을 이끌고 급히 도달했는데,번번이 사기(事機)에 미치지 아니하였다마땅히 보병과 기병 2만을 엄선하여 두 부대로 나누어 도적(=촉한)들을 토벌하기 위해 갖추었다또 관중(關中)에 도적들이 침공하자 우연히 마주하였는데곡식과 비단이 부족하여기주(冀州)로부터 농정(農丁) 5천을 보내어 상규(上邽)를 진을 치도록 하였다. (장정들에게가을과 겨울에 전진(戰陣)하는 법을 배우고봄과 여름에는 밭과 뽕나무를 일구도록 하였다말미암아 이에 관중(關中)의 군국(軍國)에 여분이 있게 되었으며도적들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이후 상서우복사(書右僕射)로 삼고나아가서 창평정후(昌平亭侯)로 봉하였으며상서령(書令)으로 옮기게 하였다.


及大將軍曹爽擅權,李勝、何晏、鄧颺等亂政,孚不視庶事,但正身遠害而已。及宣帝誅爽,孚與景帝屯司馬門,以功進爵長社縣侯,加侍中。

 

대장군(大將軍조상(曹爽)이 권세를 갖고 마음대로 하며이승(李勝), 하안(何晏), 등양(鄧颺등의 무리가 정사를 어지럽히자사마부()는 서사(庶事-모든 일을 뜻함.)를 맡지 아니하였고정신(正身-본인)을 더러운 것으로부터 멀리하였다. (※다만 “이미 멀리 쫓겨났다”로도 번역될 수 있는 듯함…) 선제(宣帝-사마의)가 조상(曹爽)을 베자사마부는 경제(景帝-사마사)와 더불어 사마(司馬)씨 가문을 보호하였다이 공으로 장사현후(長社縣侯)로 삼아지고더해서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將諸葛恪圍新城,以孚進督諸軍二十萬防禦之。孚次壽春,遣丘儉、文欽等進討。諸將欲速擊之,孚曰:「夫攻者,借人之力以功,且當詐巧,不可力爭也。」故稽留月餘乃進軍,吳師望風而退


당시 오()의 장수 제갈각(諸葛恪)이 신성(新城)을 포위하였는데그로인해 사마부() 20만의 제군(諸軍)을 이끌고 나아가 방어(防禦)하였다.사마부()가 수춘(壽春)에 이르자관구검(丘儉)과 문흠(文欽)을 보내어 (제갈각을토벌하였다제장(諸將)들이 (적을빨리 칠 것을 원하자사마부()가 말하였다무릇 (적을친다면사람의 힘을 빌려서 공을 세우는 것이니마땅히 사교(詐巧-남을 교묘하게 속임)를 해야지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힘을 써는 것은 아니되옵니다.이에 한달 동안 계류(稽留-머무름.)하여 마침내 진군하였는데오의 군대는 멀리서 (아군의위세를 바라보자 물러나였다.

 

魏明悼后崩,議書銘旌,或欲去姓而書魏,或欲兩書。


()의 명도후(明悼后-조예의 황후)가 붕어()하자, (모두의논하여 정()에 글자를 세겼는데, 혹 성을 없애고 魏자만 쓰자거나 혹은 두 글자를 모두 쓰자고 하였다.

 

孚以:「經典正義,皆不應書。凡帝王皆因本國之名以天下之號,而與往代相別耳,非擇美名以自光也。天稱皇天,則帝稱皇帝;地稱后土,則后稱皇后。此乃所以同天地之大號,流無二之尊名,不待稱國號以 自表,不俟稱氏族以自彰。是以春秋隱公三年經曰『三月庚戌天王崩』,尊而稱天,不曰周王者,所以殊乎列國之君也。『八月庚辰宋公和卒』,書國稱名,所以異 乎天王也。襄公十五年經曰『劉夏逆王后于齊』,不云逆周王后姜氏者,所以異乎列國之夫人也。至乎列國,則曰『夫人姜氏至自齊』,又曰『紀伯卒』,書國稱姓,此所以異乎天王后也。由此考之,尊稱皇帝,赫赫無二,何待於魏乎?尊稱皇后,彰以謚號,何待於姓乎?議者欲書魏者,此以天皇之尊,同於往古列國之君也。或欲書姓者,此以天皇之后,同於往古之夫人也。乖經典之大義,異乎聖人之明制,非所以垂訓將來,萬世不易之式者也。」遂從孚議


사마부는 이로써 말하였다: 경전의 정의에 의하면 모두 응당 써서는 안됩니다. 무릇 제왕은 모두 본국의 이름으로 인해 천하의 호칭으로 삼는데 전대와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였지 아름다운 이름을 택해 스스로를 빛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황천이라고 하기에 임금을 황제라고 하고 땅을 후토라고 하기에 왕후를 황후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침내 천지의 큰 호칭과 동일하고 전해지는 둘도 없는 존호이기에 국호를 칭하여 스스로를 표방하거나 성씨를 칭하여 스스로를 표창하길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춘추 은공 3년의 경문에 이르길 『3월 경술 천왕이 붕어하였다.』고 말하고는 天으로 높이고 周王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열국의 임금들과는 다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8월 경진일 송공 화가 죽었다.』에서 나라와 이름을 적으니 천왕과는 다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말하길 『부인 강씨가 제나라로부터 이르렀다.』또 말하길 『기 백희가 죽었다.』하여 나라와 성을 칭했으니 이것은 천왕후와 다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고증하건대 황제로 존칭하는 것이 혁혁하여 두 가지 방법이 없는데 어찌하여 魏라는 글자를 사용하겠습니까? 황후로 존칭하는 것은 시호로 표창하면 되지 어찌하여 성씨를 사용하겠습니까? 논의하는 사람들이 魏자를 쓰고자하는 것은 천황의 존귀를 옛날 고대 열국의 임금과 같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혹 성씨를 쓰고자하는 사람은 천황의 후를 옛날의 부인과 동등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대의에 어긋나고 성인의 밝은 제도와 다르니 장래에 교훈을 드리우고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법식으로 하고자하는 바가 아닙니다.


遷司空。代王淩為太尉。及蜀將姜維寇隴右,雍州刺史王經戰敗,遣孚西關中,統諸軍事。征西將軍陳泰與安西將軍鄧艾進擊維,維退。孚還京師,轉太傅


사공(司空)을 맡게 되었다왕릉()을 대신해서 태위(太尉)를 맡았다마침 촉의 장수 강유가 농우를 침범했는데옹주자사(雍州刺史왕경(王經)이 전투에서 패하자, (사마)()에게 서쪽으로 향하여 관중(關中)을 진압하도록 하니제군(諸軍-모든 군사)을 통솔하게 하였다정서장군(征西將軍진태(陳泰)와 안서장군(安西將軍등애(艾進) ()()를 향해 진격(進擊)하자 ()()는 물러났다. (사마)부가 경사(京師-낙양)으로 돌아왔는데태부(太傅)를 맡게 되었다.

 

及高貴公遭害,百官莫敢奔赴,孚枕尸於股,哭之慟,曰:「殺陛下者臣之罪。」奏推主者。


고귀향공(高貴-조모)이 해를 당하자백관 중 감히 거두어 가는 사람이 없자급히 달려나갔다사마부()가 시신의 넓적다리를 베고 통곡하며 말하였다:폐하(陛下)를 살해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주관한 사람을 규명하자고 주청하였다.


會太后令以庶人禮葬,孚與群公上表,乞以王禮葬,從之。孚性至。宣帝執政,常自退損。後逢廢立之際,未嘗預謀。景文二帝以孚屬尊,不敢逼。後進封長樂公 


태후(太后)가 모이자 (조모를서인(庶人)으로써 예장(禮葬)을 하려 하자사마부()와 공()의 무리들이 상표(上表)를 올려()으로써 예장(禮葬)을 할 것을 빌자이를 좇았다사마부의 성품이 조심스러움이 지극하였다선제(宣帝-사마의)가 정권을 잡았을 무렵항상 스스로 물러나 손해를 보았다이후 황제를 폐립(廢立)하고 새로 옹립하려 하자, (사마부는의논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이에도 경제(景帝-사마사)와 문제(文帝-사마소)는 사마부()를 웃어른으로 예우하고(※자치통감은 “사마부가 높은 친척”이어서 핍박하지 않았다고 번역한다.), 감히 핍박하지 아니하였다이후 (사마부는승진하여 장락공(長樂公)으로 봉해졌다.

 

及武帝受禪,陳留王就金墉城,孚拜辭,執王手,流涕歔欷,不能自勝。曰:「臣死之日,固大魏之純臣也。」詔曰:「太傅勳德弘茂,朕所瞻仰,以光導弘訓,靜宇內,願奉以不臣之禮。其封安平王,邑四萬戶。進拜太宰、持節、都督中外諸軍事。」


무제(武帝-사마염)가 수선(受禪)하여 황제로 즉위하자진류왕(陳留王-조환)이 금용성(金墉城)에 머물게 되었다사마부가 (황제에게절하며 인사하면서(-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흐느끼며 한탄하여 (이를스스로 극복하지 못하였다말하기를()은 죽는 날까지진실로 위대한 위의 순신(純臣)일 것입니다.(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말하길태부의 훈덕(勳德)이 크고 무성하여짐은 그저 우러러보고 있다이에 (사마부는광도(光導)하여 널리 가르침을 선사해 온 세계를 진정()시켰으니 신하()의 예를 받을 수 없는 바이다(사마부)를 안평왕으로 봉하며 식읍 4만호를 내린다이에 더하여 태재(太宰)로 봉하고지절(持節)을 내리며도독(都督중외제군사(中外諸軍事)로 삼는다.

 

有司奏,諸王未之國者,所置官屬,權未有備。帝以孚明德屬尊,當宣化樹群后作則,遂備置官屬焉。又以孚內有親戚,外有交游,惠下之費,而經用不,奉絹二千匹。


이뤄여할 사무가 있음에도제왕(諸王)들이 (본인들의()에 가지 아니하니관속(官屬)을 설치하였음에도 권세를 갖추지 못하였다황제(-사마염)은 이로써 사마부()의 명덕(明德)을 무리들에게 공경하게 하고, (사마부가 이들을마땅히 베풀고 가르쳐 군후(群后)들에게 법칙을 짓도록 하자듣디어 관속(官屬)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또한 이로써 사마부가 (각각의 국의내부에 있어도 교류(交游)하였고, (국의밖에 있어도 교류(交游)하여서 은혜가 아래까지 닿으니경비가 그리 넉넉하지가 않자비단 2천필을 받게 되었다.



及元會,詔孚乘輿車上殿,帝於階迎拜。坐,帝親奉觴上壽,如家人禮。帝每拜,孚跪而止之。又給以雲母輦、蓋車


원회(元會)에서 모이자,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사마부()에게 예거(輿車-황제의 수레)를 타고 입궐하게 하였으며황제(-사마염)에 이르자 조계()에서 (사마염에게절을 하여 인사하였다. (사마염은이미 앉아있었는데황제(-사마염)은 이에 친히 상수(上壽)에게 잔을 내렸으니이는 집안 사람에 대한 예와 같았다황제(-사마염)가 매번 절을 하자사마부()는 꿇고 말을 잇지 못하였다또한 이로써 (사마염은운모연(雲母輦-황제가 타는 수레의 일종)과 청개차(蓋車-푸른 덮개를 갖춘 수레)를 내렸다.

 

孚雖見尊寵,不以榮,常有憂色。臨終,遺令曰:「有魏貞士河內溫縣司馬孚,字叔達,不伊不周,不夷不惠,立身行道,終始若一。當以素棺單槨,斂以時服。」泰始八年薨,時年九十三。


비록 사마부()는 황제(-사마염)의 총애를 받았지만이를 통해 영화를 이루려하지 않았고항상 근심한 낯색을 가졌었다. (사마부가임종(臨終)하자유령(遺令)을 남겨 말하기를위의 정사(-곧은 선비)인 하내 온현 사람인 사마부가 있었으니, (그의자는 숙달이고이윤이 되지 못하고,주공이 되지 못하였으며관이오가 되지 못하고유하혜가 되지 못하였지만 몸을 세워 한 길을 걸어서 끝에 비로소 처음과 같았다마땅히 수수한 관을 사용하고시복(時服-평상시의 옷)을 입혀라.태시(泰始) 8(272)에 훙()하였으며이때 93세였다.

 

帝於太極東堂哀三日。詔曰:「王勳德超世,尊寵無二,期在位,朕之所倚。庶永百齡,諮仰訓導,奄忽殂隕,哀慕感切。其以東園溫明祕器、朝服一具、衣一襲、緋練百匹、絹布各五百匹、錢百萬、穀千斛以供喪事。諸所施行,皆依漢東平獻王蒼故事。」其家遵孚遺旨,所給器物,一不施用。


황제(-사마염)은 크게 탄식하여동당(東堂-정침의 동쪽에 있는 당)에 가서 삼일간 상을 진행하였다. (황제 사마염은조서를 내려 말하였다:(-사마부)의 공적은 일생을 뛰어넘을 정도로 위대하여둘도 없는 총애를 받은 바기이(-100)의 세월 동안 재위(在位)에 있는 동안(※사마부의 긴 수명을 고려하고사마부도 안평왕이었다는 점에서 이 “재위”의 소재는 사마염이 아닌 사마부인 것으로 추정했는데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 (사마부에게크게 의존하였다거의 100년의 긴 세월 동안그의 훈도(訓導)를 묻고 우러러봤는데돌연히 사망하니 원통하게 슬프고 그립도다그로인하여동원(東園1)의 온명비기(溫明祕器2)와 조복(朝服) 한 구, 옷 한 벌, 비단 백 필, 견포(絹布) 각 오백 필, 돈 백만 전(), 곡식 천 휘()를 내려 상사(喪事)를 이바지한다. 모두 맡은 일을 시행하고, 모두 한()의 동평헌왕(東平獻王3)의 고사(故事)대로 하여라. 」그(사마부)의 집안은 사마부()의 유지(遺旨)를 좇아서, 주어진 기물(器物)을 하나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1.동원(東園): 황실의 장사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하는 관청.-권중달 자치통감

 

2.온명비기(溫明祕器): 모양이 네모난 칠통과 같은데 한쪽을 열면 칠로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그 가운데 거울이 있으며 이것으로 시체를 덮는 관을 말한다.-권중달 자치통감

 

3.동평헌왕의 고사한 장제 건초 8(83)에 동평왕이 죽자 시호를 헌왕이라고 하고대홍로를 파견하여 지절을 가지고 상례를 감독하게 하고, 4성의 소후와 제국의 왕들이 모두 정례에 참석하게 하였다.-권중달 자치통감

 

帝再臨喪,親拜盡哀。及葬,又幸都亭,望柩而拜,哀動左右。給鑾輅輕車,介士武賁百人,吉凶導從二千餘人,前後鼓吹,配饗太廟。


황제(-사마염)는 두번 친히 문상하여직접 절을 올리고 울면서 슬픔을 다했다장사를 지내는 중도정(都亭)으로 향하자 사마망()이 관을 향해 절을 올렸는데 좌우(左右)가 슬픔에 동요하였다난로경차(鑾輅輕車-황제가 쓰는 수레의 일종)를 내리며개사(介士)와 무분(武賁백 명길흉을 좇을 도종(導從이천여 명에게 모시도록 하였으며앞뒤로 북을 치고 피리를 불게 하여 태묘(太廟)에 배향(配饗)하도록 하였다.

 

九子:邕、望、輔、翼、晃、、珪、衡、景


9명의 아들이 있었다사마옹(司馬), 사마망(司馬), 사마보(司馬), 사마익(司馬), 사마황(司馬), 사마괴(司馬), 사마규(司馬), 사마형(司馬), 사마경(司馬).



邕字子魁。初世子,拜步兵校尉、侍中。先孚卒,追贈輔國將軍,謚曰貞。


사마옹()의 자()는 자괴(子魁)이다처음에는 세자(世子)를 역임했으며, (이후보병교위(步兵校尉),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사마부()보다 먼저 졸()하자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추증되었으며시호는 왈정(曰貞)이었다.

 

邕子崇世孫,又早夭。泰始九年,立崇弟平陽亭侯隆安平王。立四年,咸寧二年薨,謚曰穆。無子,國


사마옹의 아들 사마숭()을 세손(世孫)으로 높였으나또한 일찍 죽었다태시(泰始) 9(273), 사마숭(平陽亭侯)을 평양정후(平陽亭侯)로 삼고,더욱 높여서 안평왕(安平王)으로 임명하였다. 4살이 되었을 때함녕(咸寧) 2(276)에 훙()하였다시호는 왈목(曰穆)이었다아들이 없었음으로 대가 끊겼다.


[[의양성왕망]]으로 분리


太原成王輔,魏末野王太守。武帝受禪,封渤海王,邑五千三百七十九戶,泰始二年之國。後衞尉,出東中將,轉南中將。咸寧三年,徙太原王,監州諸軍事。太康四年入朝,五年薨,追贈北將軍。永平元年,更贈衞將軍、開府儀同三司。子弘立,元康中散騎常侍,後徙封中丘王。三年薨,子鑠立


태원성왕(太原成王사마보()는 위(말기에 야왕태수(野王太守)를 역임했었다무제(-사마염)이 즉위하자발해왕으로 봉해지고식읍 5,379호를 내렸다태시 2, (발해?)()에 이르었다이후 위위(衞尉)를 역임하고동중랑장(東中)으로 임명한 후남중랑장(南中)으로 옮겨졌다함녕 4태원왕으로 옮겨졌으며(병주제군사(州諸軍事)로 삼았다태강 4년에 입조하여, (태강) 5년에 훙()하였는데진북장군(北將軍)으로 추증되었다영평(永平원년위장군(衞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고쳐 임명되었다아들 사마홍이 (왕으로세워졌는데원강 (년도산기상시를 역임하였다이후 중구왕으로 옮겨 봉해졌다. (원강?) 3훙하였는데 아들 사마삭(鑠)이 (왕으로세워졌다.

 

翼字子世,少歷顯位,官至武賁中將。武帝未受禪而卒,以兄邕之支子承嗣,封南宮縣王。薨,子祐嗣立,承遂無後。


사마익()의 자()는 자세(子世)이며젊었을 때 현위(顯位)를 역임하였다관직이 무분중랑장(武賁中)에 이르었다무제(武帝-사마염)가 아직 즉위하지 아니하였을 때 졸()하였고이로써 형 사마옹()의 지자(支子-서자사마승()에게 잇도록 하였다. (사마승은남궁현왕(南宮縣王)으로 봉해졌다()하였을 때아들 사마우()가 이어서 (왕으로 세워졌는데), 사마승()의 승계가 마침내 끊이게 되었다.

 

下邳獻王晃字子明,魏封武始亭侯,拜黃門侍,改封西安男,出東莞太守。武帝受禪,封下邳王,邑五千一百七十六戶,泰始二年就國


하비헌왕(下邳獻王사마황(司馬)의 자()는 자명(子明)이다()에서 무시정후(武始亭侯)로 봉하였다황문시랑(黃門侍)으로 임명()되었으며서안남(西安男)으로 봉해지고동완태수(東莞太守)를 역임하였다무제(武帝-사마염)이 즉위하자먼저 하비왕(下邳王)으로 봉하고식읍 5,176호를 내렸다태시(泰始) 2(266), (하비?)()이 주어졌다.

 

晃孝友貞廉,謙虛下士,甚得宗室之稱。後長水校尉、南中將。九年,詔曰:「南中將、下邳王晃亮中正,體行明潔,才周政理,有文武策識。其以晃使持節、都督寧益二州諸軍事、安西將軍,領益州刺史。」晃以疾不行,更拜書,遷右僕射。久之,出為鎮東將軍、都督徐二州諸軍事。惠帝即位,入車騎將軍,加散騎常侍。將誅楊駿,以晃領護軍,屯東掖門。尋守書令。遷司空,加侍中,令如故。元康六年薨,追贈太傅。


사마황()은 효우(孝友)가 곧고정렴(貞廉)한데다가 겸허(謙虛)하여 선비()들에게 자기를 낮추자 칭찬으로 인해 종실(宗室)에서 얻는 것이 심히 많았다이후 장수교위(長水校尉), 남중랑장(南中)에 임명되었다. 9조서를 내려 말하였다남중랑장(南中), 하비왕(下邳王사마황()은 청량()하여 중정(中正)하고행실이 명결(明潔)한데다가 재주가 두루 정사를 다스릴 줄 아니문무(文武)의 식견을 갖췄다이로써 사마황()을 지절(持節), 도독(都督영익이주제군사(寧益二州諸軍事), 안서장군(安西將軍),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는다이에 사마황은 질병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으니상서()로 고쳐 임명하고우복사(右僕射)로 옮겼다오랜 시간이 지나자진동장군(東將軍), 도독(都督청서이주제군사(徐二州諸軍事)로 삼았다혜제(惠帝-사마충)가 즉위하자입조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되고산기상시(散騎常侍)를 더하였다양준이 주살당하자이로써 사마황()을 영호군(領護軍)으로 삼고 동액문(東掖門)에 주둔하도록 하였다수상서령(書令)을 계승하였다.사공으로 옮기고시중을 더하니 영()은 예전과 같게 하였다 (※예전과 같이 수상서령이라는 뜻인듯). 원강(元康) 6(296)에 훙()하니태부(太傅)로 추증(追贈)되었다.

 

二子:裒、綽。裒早卒,綽有篤疾,別封良城縣王,以太原王輔第三子韡嗣。官至侍中、書,早薨,子韶立


9명의 아들이 있었다사마부(司馬), 사마작(司馬). 사마부()는 일찍 졸()하고사마작()은 위독한 질병에 갈려서 양성현왕(良城縣王)으로 별도로 봉하고태원왕(太原王사마보()의 세번째 아들 사마위() (사마황의뒤를 이었다관직은 시중(侍中), 상서()에 이르었다일찍 훙()하니아들 사마소(司馬) (왕으로세웠다.

 

太原烈王字子泉,魏長樂亭侯,改封貴壽侯。歷振威將軍、祕書監,封固始子。武帝受禪,封太原王,邑五千四百九十六,泰始二年就國。四年入朝,賜袞冕之服,遷東中將。十年薨,詔曰:「乃心忠篤,智器雅亮。歷位文武,有榦事之績。出臨封土,夷夏懷附,守許都,思謀可紀。不幸早薨,朕甚悼之。今安厝在近,其追贈前將軍。」子顒立,徙封河間王,別有傳


태원열왕(太原烈王사마괴(司馬)의 자()는 자천(子泉)이다()의 장악정후(長樂亭侯)였으며 귀수향후(貴壽)로 고쳐 봉하였다진위장군(振威將軍), 비서감(祕書監)을 역임하였으며 고시자(固始子)로 봉해졌었다무제(武帝-사마염)가 즉위하자 태원왕(太原王)으로 봉해지고 식읍 5,496호를 받았으며 태시(泰始) 2(266)에 국()을 취하였다. (태시) 4(268)에 입조하였는데곤면(袞冕)을 내리고 동중랑장(東中)으로 옮겨 임명하였다. (태시) 10(274)에 훙()하였다.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말하였다:사마괴의 마음과 충의가 두터우니 지기(智器)가 맑고 밝았다문무의 자리를 역임하여 간사(榦事-일을 맡아 처리함)의 공적이 있다외부의 봉토를 통차하니 이하(夷夏-오랑캐와 중국)를 끌어들이고허도(許都-허창)를 진수()하여황제의 법도를 위해 끝없이 사모(思謀)하였다일찍히 훙하니 불행하니짐은 심히 슬퍼할지여다이제 안장하여 가까히 있으니그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추증(追贈)한다.아들 사마옹() (왕으로세워서하간왕으로 옮겨 봉하고나누어서 승계하도록 하였다.

 

高陽元王珪字子璋,少有才望,魏高陽侯。歷河南令,進封湞陽子,拜給事黃門侍。武帝受禪,封高陽王,邑五千五百七十戶。歷北中將、督鄴城守諸軍事。泰始六年入朝,以父孚年高,乞留供養。拜書,遷右僕射。十年薨,詔遣兼大鴻臚持節監護喪事,贈車騎將軍、儀同三司


고양원왕(高陽元王사마규(司馬)의 자()는 자장(子璋)이다어렸을 적부터 사마망()의 재능을 가졌다()의 고양향후(高陽)였다하남령(河南令)을 역임했으며나아가 정양자로 봉해지고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으로 올렸다무제(武帝-사마염)이 즉위하자고양왕(高陽王)으로 봉해졌으며 식읍 5,590호가 주어졌다북중랑장(北中), 독업성수제군사(督鄴城守諸軍事)를 역임하였다태시 6(270)에 입조(入朝)하였는데 아버지 사마부는 연고(年高-나이가 많음)하여 계속 머물어서 (사마부를공양(供養)하기를 간청하였다상서()로 임명하였으며 우복사(右僕射)로 옮겼다. (태시) 10(274)에 훙()하였다.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대홍려(大鴻臚), 지절(持節감호상서(監護喪事)를 겸하도록 하였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의동삼사(儀同三司)를 더하였다.

 

珪有美譽於世,而帝甚悼惜之。無子,詔以太原王輔子緝襲爵。緝立五年,咸寧四年薨,謚曰哀。無子,太康二年詔以太原王世子顒子訟緝後,封定縣侯


사마규는 아름다운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황제(-사마염) (사마규를아꼈기에 심히 슬퍼하였다아들이 없었으므로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태원왕(太原王사마보(司馬)의 아들 사마집(司馬)이 작위를 잇도록 하였다. (왕으로세워진지 5함녕(咸寧) 4(278)에 훙하였다.시호는 왈애(曰哀)였다아들이 없었으므로 태강(太康) 2(281), (황제 사마염이조서를 내려 태원왕(太原王사마괴()의 세자(世子사마옹()의 아들 사마송()이 뒤를 잇도록 하였다. (사마송은진정현후(定縣侯)로 봉해졌다.

 

常山孝王衡字子平,魏封德陽侯。進封汝陽子,駙馬都尉。武帝受禪,封常山王,邑三千七百九十戶。二年薨,無子,以安平世子邕第四子敦


상산효왕(常山孝王사마형()의 자()는 자평(子平)이었다()에서 덕양향후(德陽)로 봉하였다나아가 여양자(汝陽子)로 봉해졌으며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임명되었다무제(武帝-사마염)가 즉위하자상산왕(常山王)으로 봉해지고 식읍 3,790호를 받았다. (태시) 2()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그런고로 안평세자(安平世子사마옹()의 네번째 아들 사마돈() (뒤를이었다.

 

常山孝王衡字子平,魏封德陽侯。進封汝陽子,駙馬都尉。武帝受禪,封常山王,邑三千七百九十戶。二年薨,無子,以安平世子邕第四子敦


패순왕(沛順王사마경(司馬)의 자()는 자문(子文)이다()의 악안정후(樂安亭侯)였다간의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무제(武帝-사마염)이 즉위하자패왕(沛王)으로 봉해졌으며 식읍 3,400호를 받았다. (왕으로세워진지 11함녕(咸寧원년(275)에 훙()하였다아들 사마도(司馬) (이후 왕으로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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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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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6.07.12
15:42:39
(*.196.74.143)
안녕하세요. 일단 하나로 합쳤으나

1. 수정이 안 될 가능성이 큽니다-_-;;;; 사이트의 구조적 문제인 것 같은데 혹시 수정하실 내용을 아래에 적어주시면 바로 반영하겠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오류로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2. 원래 작성해주신 8개는 중복 검색을 우려 일반 게시판으로 옮깁니다.

3. 댓글 내용도 옮기겠습니다.

4. 사마망 부분 말고 뒤에 후손 부분이 많아 분리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5. 옛날에 진서에 있는 두예, 왕준, 사마부는 무조건 번역해야 한다고 소리질렀는데 이제 사마부가 나오네요. 감사합니다.

선비욜롱

2016.07.12
17:48:15
(*.34.84.93)
우선 사마부와 사마망 정도는 쉽게 분할될 듯한데 나머지 인물은 좀 내용이 띄엄띄엄해서 어떻게 정리할지 모르겠네요;

코렐솔라

2016.07.13
13:45:41
(*.46.174.164)
저도 그게 걱정인데 일단 이렇게 길게 해놓으면 작성자 분이신 선비욜롱님부터 수정을 못하시니 한은님이 올리신 글처럼 짧게짧게, 아니면 육손 손자들처럼 여럿을 묶어서라도 수정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느낍니다.

코렐솔라

2016.07.12
15:44:20
(*.196.74.143)
dragonrz님:
-------------------------------------------------------------------------------------------------------
未嘗有怨於人。 : 일찍이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적이 없었다.
嘗罹罪譴,孚往省之: 일찍이 죄를 얻어 형벌을 받았는데 사마부가 가서 살펴보고는
主者: 관리선발 업무를 주관하던 관원을 말하는것 같습니다.

或欲去姓而書魏,或欲兩書。: 혹 성을 없애고 魏자만 쓰자거나 혹은 두 글자를 모두 쓰자고 하였다.

「經典正義,皆不應書。凡帝王皆因本國之名以為天下之號,而與往代相別耳,非為擇美名以自光也。天稱皇天,則帝稱皇帝;地稱后土,則后稱皇后。此乃所以同天地之大號,流無二之尊名,不待稱國號以自表,不俟稱氏族以自彰。是以春秋隱公三年經曰『三月庚戌天王崩』,尊而稱天,不曰周王者,所以殊乎列國之君也。『八月庚辰宋公和卒』,書國稱名,所以異乎天王也。襄公十五年經曰『劉夏逆王后于齊』,不云逆周王后姜氏者,所以異乎列國之夫人也。至乎列國,則曰『夫人姜氏至自齊』,又曰『紀伯姬卒』,書國稱姓,此所以異乎天王后也。由此考之,尊稱皇帝,赫赫無二,何待於魏乎?尊稱皇后,彰以謚號,何待於姓乎?議者欲書魏者,此以為天皇之尊,同於往古列國之君也。或欲書姓者,此以為天皇之后,同於往古之夫人也。乖經典之大義,異乎聖人之明制,非所以垂訓將來,為萬世不易之式者也。」
경전의 정의에 의하면 모두 응당 써서는 안됩니다. 무릇 제왕은 모두 본국의 이름으로 인해 천하의 호칭으로 삼는데 전대와 서로 구별하기 위해서였지 아름다운 이름을 택해 스스로를 빛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황천이라고 하기에 임금을 황제라고 하고 땅을 후토라고 하기에 왕후를 황후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침내 천지의 큰 호칭과 동일하고 전해지는 둘도 없는 존호이기에 국호를 칭하여 스스로를 표방하거나 성씨를 칭하여 스스로를 표창하길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춘추 은공 3년의 경문에 이르길 『3월 경술 천왕이 붕어하였다.』고 말하고는 天으로 높이고 周王이라고 부르지 않았으니 열국의 임금들과는 다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8월 경진일 송공 화가 죽었다.』에서 나라와 이름을 적으니 천왕과는 다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말하길 『부인 강씨가 제나라로부터 이르렀다.』또 말하길 『기 백희가 죽었다.』하여 나라와 성을 칭했으니 이것은 천왕후와 다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고증하건대 황제로 존칭하는 것이 혁혁하여 두 가지 방법이 없는데 어찌하여 魏라는 글자를 사용하겠습니까? 황후로 존칭하는 것은 시호로 표창하면 되지 어찌하여 성씨를 사용하겠습니까? 논의하는 사람들이 魏자를 쓰고자하는 것은 천황의 존귀를 옛날 고대 열국의 임금과 같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혹 성씨를 쓰고자하는 사람은 천황의 후를 옛날의 부인과 동등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대의에 어긋나고 성인의 밝은 제도와 다르니 장래에 교훈을 드리우고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법식으로 하고자하는 바가 아닙니다.

奏推主者 : 주관한 사람을 규명하자고 주청하였다.


여기서 沒의 의미는 죽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잡혀서 포로가 됐다는 의미인것 같습니다.

추가로 제가 대충 번역한 부분을 첨부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而小子滔初嗣新蔡王確,亦與其兄俱沒。後得南還,與新蔡太妃不協。太興二年上疏,以兄弟並沒在遼東,章武國絕,宜還所生。太妃訟之,事下太常。太常賀循議:「章武、新蔡俱承一國不絕之統,義不得替其本宗而先後傍親。按滔既已被命為人後矣,必須無復兄弟,本國永絕,然後得還所生。今兄弟在遠,不得言無,道里雖阻,復非絕域。且鮮卑恭命,信使不絕。自宜詔下遼東,依劉群、盧諶等例,發遣令還,繼嗣本封。謂滔今未得便委離所後也。」元帝詔曰:「滔雖出養,自有所生母。新蔡太妃相待甚薄,滔執意如此。如其不聽,終當紛紜,更為不可。今便順其所執,還襲章武。」

그리고 작은 아들 사마도는 처음에 신채왕 사마확의 뒤를 이었는데 또한 그 형과 더불어 잡혀 포로가 되었다. 이후에 남쪽으로 돌아와 신채태비와 잘 맞지 않았다. 테흥 2년 상소를 올려 형제가 더불어 요동에 잡혀있어 장무국의 대가 끊기게 생겼으므로 응당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태비가 다투니 일이 태상에게 맡겨졌다. 태상 하순이 의논하여 말하길 :「장무, 신채는 모두 대가 끊어지면 안 되는데 도리 상 그 본종을 대신하여 방친의 후계를 먼저 이을 수는 없다. 생각건대 사마도는 이미 다른 사람의 후계가 되는 것으로 정해졌으니 반드시 모름지기 다시는 형제가 없어 본국의 계통이 영원히 끊어질 경우가 된 연후에야 소생지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 형제가 멀리 있지만 없다고 할 수 없고 길이 비록 험난하지만 절역이 아니다. 또한 선비가 공손히 명을 듣고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자연히 응당 조서를 요동에 내려 유군, 노심 등의 예에 의거하여 (그의 형제들을) 보내 돌아와서 본봉을 잇게 해야 한다. 생각건대 사마도는 지금 바로 후계자로 있는 곳을 버리면 안된다. 」하였다. 원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길 :「사마도는 비록 양자로 나왔으나 스스로 낳아 준 어머니가 있다. 신채태비는 서로 대하는 것이 너무 박하고 사마도의 고집이 이와 같은데 만약 들어주지 않는다면 끝내 분란이 있을 것이므로 더욱 안 될 일이다. 지금 곧 그 고집을 따라서 장무로 보내 자리를 잇게하라.」

코렐솔라

2016.07.12
15:45:33
(*.196.74.143)
그리고 한은님이 작성하신 글과 함께 목차에 추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6.07.12
16:25:38
(*.196.74.143)
"스스로 손책(孫策)의 정도에 이른게 손권(權)이며" 문구와 우금을 높게 본게 인상깊군요. 하지만 손권을 잘 대해라고 한 게 치명적인 실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듯요..

PS: 중간에 사마망 부분에 있는 사람은 하후망이 아니고 사마망 아닌가요?

선비욜롱

2016.07.12
17:41:42
(*.34.84.93)
네 제가 오타낸겁니다;;

코렐솔라

2016.07.18
12:23:51
(*.196.74.143)
일단 사마망의 일족(아들 사마무까지)들을 따로 분리하고 편집지침에 따라 폰트를 수정하고 역주를 파란색으로 처리했습니다.

수정이 안 되는 거 같아 dragonrz님의 번역을 채용하였는데 만약 문제있다면 바로 말씀 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선비욜롱

2016.07.22
22:57:20
(*.34.84.93)
이제서야 봤는데 문제 없습니다 ㅇㅇ

구라뱅뱅

2018.05.16
15:20:45
(*.172.220.193)
찾아본게 아까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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