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弘,字和季,沛國相人也。祖馥,魏揚州刺史。父靖,鎮北將軍。弘有幹略政事之才,少家洛陽,與武帝同居永安里,又同年,共研席。以舊恩起家太子門大夫,累遷率更令,轉太宰長史。張華甚重之。由是為寧朔將軍ㆍ假節ㆍ監幽州諸軍事,領烏丸校尉,甚有威惠,寇盜屏迹,為幽朔所稱。以勳德兼茂,封宣城公。太安中,張昌作亂,轉使持節ㆍ南蠻校尉ㆍ荊州刺史,率前將軍趙驤等討昌,自方城至宛ㆍ新野,所向皆平。及新野王歆之敗也,以弘代為鎮南將軍ㆍ都督荊州諸軍事,餘官如故。弘遣南蠻長史陶侃為大都護,參軍蒯恆為義軍督護,牙門將皮初為都戰帥,進據襄陽。張昌并軍圍宛,敗趙驤軍,弘退屯梁。侃ㆍ初等累戰破昌,前後斬首數萬級。及到官,昌懼而逃,其眾悉降,荊土平。

유홍(劉弘)은, 자(字)가 화계(和季)이며, 패국(沛國) 상(相)사람(人)이다(也).

조부(祖)인 유복(馥)은, 위(魏)의 양주자사(揚州刺史)였다.

부친(父)인 유정(靖)은, 진북장군(鎮北將軍)이었다.

유홍(弘)은 재간(幹)과 모략(略) 그리고 정사의 재주(政事之才)가 있었다(有). 어릴때(少) 집(家)이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무제(武帝=사마염)와(與) 영안리(永安里)에 함께(同) 거주했으며(居), 또한(又) 동갑(同年)이어서, 나란히(共) 공부했다(研席).

옛(舊) 은혜(恩)로(以) 천거되어(起家) 태자문대부(太子門大夫)가 되었으며, 여러번(累) 옮겨(遷) 솔경령(率更令)이 되었고, 태재장사(太宰長史)로 옮겼다(轉).

장화(張華)가 (유홍을) 매우(甚) 중히 여겼다(重之).

이로(是) 말미암아(由) 영삭장군(寧朔將軍)ㆍ가절(假節)ㆍ감유주제군사(監幽州諸軍事), 영오환교위(領烏丸校尉)가 되었으며(為), 두터운(甚) 위엄(威)과 은혜(惠)가 있어(有), 도적(寇盜)들이 자취를 감추었고(屏迹), 유주(幽), 삭주(朔)에서 칭송(所稱) 되었다(為).

공(勳)과 덕(德)이 나란히(兼) 뛰어남(茂)으로(以), 선성공(宣城公)에 봉해졌다(封).

태안(太安) 중(中)에, 장창(張昌)이 반란(亂)을 일으키자(作), 사지절(使持節)ㆍ남만교위(南蠻校尉)ㆍ형주자사(荊州刺史)로 옮겨(轉), 전장군(前將軍) 조양(趙驤) 등(等)을 인솔해(率) 장창(昌)을 토벌했는데(討), 스스로(自) 지방(方=형주)의 성(城)인 완(宛)ㆍ신야(新野)에 이르어(至), 향하는 곳마다(所向) 모두(皆) 평정하였다(平).

신야왕(新野王) 사마흠(歆)이(之) 패배(敗)하기에(也) 이르자(及), 유홍(弘)으로(以) (사마흠을) 대신하여(代) 진남장군(鎮南將軍)ㆍ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로 삼고(為), 남은(餘) 관직(官)은 이전(故)과 같게 하였다(如).

유홍(弘)은 남만장사(南蠻長史) 도간(陶侃)을 대도호(大都護)로 삼고(為), 참군(參軍) 괴긍(蒯恆)을 의군독호(義軍督護)로 삼았으며(為), 아문장(牙門將) 피초(皮初)를 도전수(都戰帥)로 삼아(為) 보내며(遣), 양양(襄陽)을 의지하여(據) 진군했다(進).

장창(張昌)은 군사(軍)를 아울러(并) 완(宛)을 포위했는데(圍), 조양군(趙驤軍)이 패하자(敗), 유홍(弘)은 퇴각하여(退) 양(梁)에 주둔하였다(屯).

도간(侃)ㆍ피초(初) 등(等)이 연달아 싸워(累戰) 장창(昌)을 격파하니(破), 전후(前後)로 참수(斬首)한 것이 수만급(數萬級)이었다.

(유홍이) 관청(官)에 이르자(及到), 장창(昌)은 두려워하여(懼而) 달아났는데(逃), 그(其) 무리(眾)가 모두(悉) 항복하였고(降), 형주(荊土)는 평정되었다(平).




初,弘之退也,范陽王虓遣長水校尉張奕領荊州。弘至,奕不受代,與兵距弘。弘遣軍討奕,斬之,表曰:「臣以凡才,謬荷國恩,作司方州,奉辭伐罪,不能奮揚雷霆,折衝萬里,軍退於宛,分受顯戮。猥蒙含宥,被遣之職,即進達所鎮。而范陽王虓先遣前長水校尉張奕領荊州,臣至,不受節度,擅舉兵距臣。今張昌姦黨初平,昌未梟擒,益梁流人蕭條猥集,無賴之徒易相扇動,飆風駭蕩,則滄海橫波,茍患失之,無所不至,比須表上,慮失事機,輒遣軍討奕,即梟其首。奕雖貪亂,欲為荼毒,由臣劣弱,不勝其任,令奕肆心,以勞資斧,敢引覆餗之刑,甘受專輒之罪。」詔曰:「將軍文武兼資,前委方夏,宛城不守,咎由趙驤。將軍所遣諸軍,剋滅群寇,張奕貪禍,距違詔命。將軍致討,傳首闕庭,雖有不請之嫌,古人有專之之義。其恢宏奧略,鎮綏南海,以副推轂之望焉。」張昌竄于下雋山,弘遣軍討昌,斬之,悉降其眾。

애초에(初), 유홍(弘)이(之) 퇴각(退)했는데(也), 범양왕(范陽王) 사마효(虓)가 장수교위(長水校尉) 장혁(張奕)을 영형주자사(領荊州)로 보냈다(遣).

유홍(弘)에게 이르었는데(至), 장혁(奕)의 대리(代)를 받아들이지(受) 않자(不), 병사(兵)와 함께(與) 유홍(弘)과 떨어졌다(距).

유홍(弘)은 군사(軍)를 보내(遣) 장혁(奕)을 토벌해(討), 참수하였고(斬之), 표문을 올려(表) 말했다(曰).

“신(臣)은(以) 범재(凡才)인데, 사리에 맞지 않게(謬) 국은(國恩)을 입어(荷), 지방 주(方州)를 맡기에(司) 이르어(作), 말씀(辭)을 받들고(奉) 죄인(罪)을 토벌하고자 했지만(伐), 천둥번개(雷霆)를 떨치는 것(奮揚)을 못하였고(不能), 만리 밖에서(萬里) 적을 꺽고(折衝), 군사(軍)를 완(宛)으로(於) 물렸고(退), (명령을) 나누어(分) 받아(受) 죄인을 죽였습니다(顯戮). 외람되나(猥) 너그러움(宥)을 품(含) (일을) 덮어(蒙), 관리(職)에게 이불(被)을 보내면(遣之), 곧(即) 임지(所鎮)에서 편지를 올릴 것입니다(進達). 또한(而) 범양왕(范陽王) 사마효(虓)는 먼저(先) 앞에(前) 장수교위(長水校尉) 장혁(張奕)을 영형주자사(領荊州)로 보냈는데(遣), 신(臣)에게 이르어(至), (신의) 절도(節度)를 받지(受) 않고(不), 멋대로(擅) 병사(兵)를 들어(舉) 신(臣)과 떨어졌습니다(距). 지금(今) 장창(張昌)의 간사한(姦) 무리(黨)가 비로소(初) 평정되었지만(平), 장창(昌)을 포획해(擒) 효수하지(梟) 못했으며(未), 익주(益)ㆍ양주(梁)의 방랑자(流人)들은 쓸쓸하게(蕭條) 뒤섞이고(猥) 모여있으니(集), 無賴之徒易相扇動,(미번역)회오리바람(飆風)이 소란스럽게(駭) 일어났으며(蕩), 곧(則) 큰 바다(滄海)가 흔들렸으며(橫波), (형주를) 잃는 것(失之)을 걱정하는게(患) 심했으며(茍), 無所不至,比須表上,(미번역)일(事)의 기회(機)를 잃을까(失) 걱정하였고(慮), 이에(輒) 군사(軍)를 보내(遣) 장혁(奕)을 토벌하고(討), 즉시(即) 그(其) 머리(首)를 효수했습니다(梟). 장혁(奕)은 비록(雖) 반란(亂)을 자초했지만(貪), 해독(荼毒=반란의 처리)를 하고자 하였으며(欲為), 신(臣)보다 열약(劣弱)하여서(由), 그(其) 임무(任)에서 이기지(勝) 못했고(不), 가령(令) 장혁(奕)이 방자한(肆) 마음(心)이었다고 해도, 자질(資)과 힘(斧)으로 노력하였으니(以勞), 감히(敢) 맡은(引)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覆餗之) 형벌을 받았지만(刑), 저(專輒)의(之) 죄(罪)를 달게(甘) 받겠습니다(受).”

조서(詔)를 내려 말하였다(曰).

“장군(將軍)은 문무(文武)의 자질(資)을 겸하였고(兼), 앞서(前) 한 지방(方夏)을 맡겼으며(委), 완성(宛城)을 지킬수(守) 없던 것은(不), 잘못(咎)이 조양(趙驤)으로 인한 것이다(由). 장군(將軍)이 제군(諸軍)을 보내(所遣), 도적(寇)의 무리(群)를 이겨(剋) 멸망시켰는데(滅), 장혁(張奕)이 화(禍)를 자초하여(貪), 조서(詔)의 명(命)을 어기고(違) (장군과) 떨어졌다(距). 장군(將軍)이 토벌하기에(討) 이르었고(致), 수급(首)을 조정(闕庭)에 보내니(傳), 비록(雖) 의심하였지만(嫌) 묻지(請之) 않았고(有不), 고인(古人)은 오로지(專之) 의(之義)가 있다 했다(有). 그(其) 너그러운 관대함(恢宏)으로 깊게(奧) 다스린다면(略), 남해(南海)를 편안히(綏) 지킬 것이며(鎮), 추곡(推轂)의(之) 바람(望)에 알맞은(副)것(以)이리라(焉).”

장창(張昌)이 하준산(下雋山)에(于) 숨었는데(竄), 유홍(弘)이 군사(軍)를 보내(遣) 장창(昌)을 토벌하여(討), 참수하니(斬之), 그(其) 무리(眾)가 전부(悉) 항복하였다(降).




時荊部守宰多闕,弘請補選,帝從之。弘迺敘功銓德,隨才補授,甚為論者所稱。乃表曰:「被中詔,敕臣隨資品選,補諸缺吏。夫慶賞刑威,非臣所專,且知人則哲,聖帝所難,非臣闇蔽所能斟酌。然萬事有機,豪釐宜慎,謹奉詔書,差所應用。蓋崇化莫若貴德,則所以濟屯,故太上立德,其次立功也。頃者多難,淳朴彌凋,臣輒以徵士伍朝補零陵太守,庶以懲波蕩之弊,養退讓之操。臣以不武,前退於宛,長史陶侃ㆍ參軍蒯恆ㆍ牙門皮初,戮力致討,蕩滅姦凶,侃恆各以始終軍事,初為都戰帥,忠勇冠軍,漢沔清肅,實初等之勳也。《司馬法》『賞不踰時』,欲人知為善之速福也。若不超報,無以勸徇功之士,慰熊羆之志。臣以初補襄陽太守,侃為府行司馬,使典論功事,恆為山都令。詔惟令臣以散補空缺,然沶鄉令虞潭忠誠烈正,首唱義舉,舉善以教,不能者勸,臣輒特轉潭補醴陵令。南郡廉吏仇勃,母老疾困,賊至守衛不移,以致拷掠,幾至隕命。尚書令史郭貞,張昌以為尚書郎,欲訪以朝議,遁逃不出,昌質其妻子,避之彌遠。勃孝篤著於臨危,貞忠厲於強暴,雖各四品,皆可以訓獎臣子,長益風教。臣輒以勃為歸鄉令,貞為信陵令。皆功行相參,循名校實,條列行狀,公文具上。」朝廷以初雖有功,襄陽又是名郡,名器宜慎,不可授初,乃以前東平太守夏侯陟為襄陽太守,餘並從之。陟,弘之婿也。弘下教曰:「夫統天下者,宜與天下一心;化一國者,宜與一國為任。若必姻親然後可用,則荊州十郡,安得十女婿然後為政哉!」乃表「陟姻親,舊制不得相監。皮初之勳宜見酬報。」詔聽之。

당시(時) 형주자사부(荊部)의 수재(守宰=수령)가 조정(闕)에 많이 있어(多), 유홍(弘)이 보선(補選=보충)하기를 청하니(請), 황제(帝=아마 사마염?)가 좇았다(從之).

유홍(弘)은 이에(迺) 공로(功)의 차례(敘)와 덕(德)으로 선발하니(銓), 따르는 관리(隨才)가 채워져(補授), 논하는 자(論者)들에게 깊이(甚) 칭송(所稱) 되었다(為).

이에(乃) 표문을 올려(表) 말하였다(曰).


중조(中詔)를 받았는데(被), 조서(敕)엔 신(臣)에게 즉시(隨) 자질(資)을 등급(品)을 가려(選), 모든(諸) 부족한(缺) 관리(吏)를 채우라 하셨습니다(補).

장정(夫)의 상과(賞) 형벌(刑威)을 내린건(慶), 신(臣)이 마음대로 한(專) 바(所)가 아니며(非), 또한(且) 사람(人)의 이치(則)에 밝은 것(哲)을 알기엔(知), 성스러운(聖) 황제(帝)께서는 어려우실 것이고(所難), 신(臣) 역시 숨김(闇蔽=숨은 재능?)을 짐작(斟酌)하는 것엔 능하지(所能) 않습니다(非).

그러하여(然) 만사(萬事)엔 틀(機)이 있듯이(有), 호리(豪釐=작은 차이)를 의당(宜) 삼가며(慎), 삼가(謹) 조서(詔書)를 받들어(奉), 남다른(差) 방법(所)을 응용(應用)하였습니다.

숭고함(崇)을 가리고(蓋) 변화시키는 건(化) 덕(德)을 존중하는 것(貴)보다 못하며(莫若), 이는(則) 이루기(濟) 어려운(屯) 이유인데(所以), 돌아가신(故) 태상(太上=황제)께서는 덕(德)을 세우고(立), 그(其) 다음으로(次) 공(功)을 세우셨(立)습니다(也).

요새(頃者) 난(難)이 많은데(多), 순박(淳朴)함이 널리(彌) 사라지니(凋), 신첩(臣輒)은 관리(士)인 오조(伍朝)를 징소(徵)하여(以) 영릉태수(零陵太守)로 삼았는데(補), 여러번(庶) 응징(懲)하여(以) 파탕(波蕩=불안정)한 것(之)을 끊으니(弊), 養退讓之操?(미번역).

신하(臣)로서(以) 자만(武)하지 않고(不), 앞서(前) 완(宛)에서(於) 물러난(退), 장사(長史) 도간(陶侃)ㆍ참군(參軍) 괴긍(蒯恆)ㆍ아문(牙門) 피초(皮初)는, 협력하여(戮力) 토벌(討)에 힘을 다해(致), 간흉(姦凶)을 모조리 없앴고(蕩滅), 도간(侃)ㆍ괴긍(恆)은 각각(各) 처음과 끝(始終)에 걸쳐(以) 군사적(軍) 일(事)을 하였고, 피초(初)는 도전수(都戰帥)가 되어(為), 충성스럽고(忠) 용맹한 것이(勇) 군(軍)의 으뜸이었으니(冠), 한수(漢)ㆍ면수(沔)가 깔끔히(清) 정리된 것은(肅), 진실로(實) 피초(初) 등(等)의(之) 공(勳)입니다(也).

《사마법(司馬法)》엔『상을 즉시 준다(賞不踰時)』고 했는데, 마땅히(欲) 사람(人)이 잘하는 것(善之)을 알게(知) 되었으면(為) 복을 부른다(速福)했습니다(也). ????(확실히 않음)

만약(若) 피초(超)에게 보답하지(報) 않으면(不), 공로(功)있는(之) 자(士)를 따라하라(徇) 권할(勸)수(以) 없으며(無), 곰(熊羆=웅장한)의(之) 뜻(志)을 울적해질 것입니다(慰).

신(臣)이 피초(初)로(以) 양양태수(襄陽太守)를 맡기며(補), 도간(侃)을 형주자사부(府)의 행사마(行司馬)로 삼고(為), 법(典)으로 논공(論功)하는 일(事)을 시키며(使), 괴긍(恆)을 산도(山都) 현령(令)으로 삼았습니다(為).

조서로(詔) 오직(惟) 신(臣)으로(以) 하여금(令) 빈(空) 결원(缺)을 나누어(散) 채우게 하셨는데(補), 그러하여(然) 시향(沶鄉) 현령(令) 우담(虞潭)이 충성(忠誠)스럽기가 굳세고(烈) 곧아(正), 앞서서(首) 의(義)를 주장하며(唱) 행할 것이고(舉), 행하는 것(舉)이 가르치기(教)에(以) 훌륭할 것이므로(善), 능하지(能) 않은(不) 자(者)에게 권할 터이니(勸), 신(臣)은 문득(輒) 특별히(特) 우담(潭)을 예장(醴陵) 현령(令)을 맡도록(補) 옮겼습니다(轉).

남군(南郡)의 청렴한 관리(廉吏)는 구발(仇勃)은, 모친(母)은 늙어(老) 병(疾)으로 괴로워해(困), 적(賊)이 이르어(至) 지키지(守衛) 못하고(不) 옮겨(移), 고문(拷掠) 당하기에 이르어(以致), 거의(幾) 운명(隕命=죽을뻔)에 이르었습니다(至).

상서령사(尚書令史)인 곽정(郭貞)은, 장창(張昌)이(以) 상서랑(尚書郎) 삼고자 했는데(為), 조정(朝)의 의논(議)을(以) 구하고자(訪) 하여(欲), 도망쳐(遁逃) (장창에게로) 나아가지(出) 않으니(不), 장창(昌)은 그(其) 처자(妻子)를 붙잡아(質), (곽정은) 멀리(彌遠) 피했습니다(避之).

구발(勃)의 효성(孝)이 두터운 것(篤)은 임지(臨)에(於) 나타나(著) 위태로웠으며(危), 곽정(貞)의 충성(忠)은 강하고 사나운 것(強暴)에 의지해(於) 힘쓰니(厲), 비록(雖) 각각(各) 4품(四品)이었지만, 모두(皆) 가히(可) 모범(訓獎)이 될(以) 신하(臣子)이니, 오래도록(長) 풍교(風教=백성을 가르침)을 더해야합니다(益).

신첩(臣輒)은 구발(勃)을(以) 귀향(歸鄉) 현령(令)으로 삼았고(為), 곽정(貞)을 신릉(信陵) 현령(令)으로 삼았습니다(為).

모두(皆) 공(功)을 이루는데(行) 서로(相) 관계되있고(參), 循名校實?,(미번역) 늘어선(列) 행동(行狀)이 통하니(條), 공문(公文)으로 상세히(具) 올립니다(上).



조정(朝廷)은 피초(初)가(以) 비록(雖) 공(功)이 있으나(有), 양양(襄陽)이 또한(又) 무릇(是) 이름난(名) 군(郡)이며, 이름난(名) 그릇(器)에게 의당(宜) 맡겨야 하니(慎), 피초(初)에게 줄(授)수 없었고(不可), 이에(乃) 전(前) 동평태수(東平太守) 하후척(夏侯陟)으로(以) 양양태수(襄陽太守)로 삼았으며(為), 그 나머지(餘)들은 나란히(並) 좇았다(從之).

하후척(陟)은, 유홍(弘)의(之) 사위(婿)이다(也).

유홍(弘)은 아랫사람에게(下) 가르치며(教) 말하였다(曰).

“사내(夫)란 천하사람(天下者)을 관리하며(統), 의당(宜) 천하(天下)와(與) 한마음(一心)이어야 하고;한 지방(一國) 사람(者)과 교화하고(化), 의당(宜) 한 지방(一國)과 함께(與)하여 맡겨야 합니다(為任). 이와같이(若) 반드시(必) 인척(姻親)을 연후(然後)에 쓴다면(可用), 형주(荊州)가 10군(十郡)이니(則), 어찌(安) 10(十)명의 사위(女婿)를 얻은(得) 연후(然後)에 (10군을) 맡겨야(政) 되(為)겠습니까(哉)!”

이에(乃) 표문을 올렸다(表).

“하후척(陟)은 인친(姻親)이니, 이전의 제도로는(舊制) 서로(相)의 경계(監)를 얻을수 없습니다(不得). 피초(皮初)의(之) 공(勳)은 의당(宜) 보상받아야 한다(酬報) 생각합니다(見).”

조서를 내려(詔) 받아들였다(聽之).




弘於是勸課農桑,寬刑省賦,歲用有年,百姓愛悅。弘嘗夜起,聞城上持更者歎聲甚苦,遂呼省之。兵年過六十,羸疾無襦。弘愍之,乃謫罰主者,遂給韋袍復帽,轉以相付。舊制,峴方二山澤中不聽百姓捕魚,弘下教曰:「禮,名山大澤不封,與共其利。今公私并兼,百姓無復厝手地,當何謂邪!速改此法。」又「酒室中云齊中酒ㆍ聽事酒ㆍ猥酒,同用曲米,而優劣三品。投醪當與三軍同其薄厚,自今不得分別。」時益州刺史羅尚為李特所敗,遣使告急,請糧。弘移書贍給,而州府綱紀以運道懸遠,文武匱乏,欲以零陵一運米五千斛與尚。弘曰:「諸君未之思耳。天下一家,彼此無異,吾今給之,則無西顧之憂矣。」遂以零陵米三萬斛給之。尚賴以自固。於時流人在荊州十餘萬戶,羈旅貧乏,多為盜賊。弘乃給其田種糧食,擢其賢才,隨資敘用。時總章太樂伶人,避亂多至荊州,或勸可作樂者。弘曰:「昔劉景升以禮壞樂崩,命杜夔為天子合樂,樂成,欲庭作之。夔曰:『為天子合樂而庭作之,恐非將軍本意。』吾常為之歎息。今主上蒙塵,吾未能展效臣節,雖有家伎,猶不宜聽,況御樂哉!」乃下郡縣,使安慰之,須朝廷旋返,送還本署。論平張昌功,應封次子一人縣侯,弘上疏固讓,許之。進拜侍中ㆍ鎮南大將軍ㆍ開府儀同三司。

유홍(弘)은 이(是)에(於) 농상(農桑) 배우기를(課) 권하며(勸), 형벌(刑)을 관대하게 하며(寬) 부세(賦)를 살펴(省), 여러해(有年)의 세용(歲用=한해의 세금)이 모이니, 백성(百姓)들이 사모하고(愛) 기뻐하였다(悅).

유홍(弘)이 일찍이(嘗) 밤(夜)에 일어났는데(起), 성(城) 위(上)를 지키는(持) 늙은(更)이(者)의 탄식(歎) 소리(聲)가 심히(甚) 괴로운(苦) 것을 들었는데(聞), 마침내(遂) 불러서(呼) 살펴보았다(省之).

병사(兵)의 나이(年)는 60(六十)을 넘었는데(過), 병들고 지쳤으며(羸疾) 옷(襦)조차 없었다(無).

유홍(弘)은 걱정하여(愍之), 이에(乃) 주인(主)인 자(者)를 꾸짖어 벌하고(謫罰), 마침내(遂) 가죽(韋)도포(袍)를 주고(給) 모자(帽)를 채워주니(復), 상(相)을 수여(付)하여(以) (직책을) 옮겼다(轉).

이전의 제도(舊制)엔, 현산(峴)ㆍ방산(方) 두 산(二山)의 못(澤) 에서(中) 백성(百姓)들이 고기(魚)잡이(捕)를 했다는 것을 듣지(聽) 못했는데(不), 유홍(弘)은 아랫사람(下)을 가르치며(教) 말하였다(曰).

“예법(禮)엔, 명산(名山)의 큰 못(大澤)은 봉지(封)로 할수 없고(不), 더불어(與) 그(其) 이로움(利)을 함께(共)했다. 지금(今) 공적으로(公) 사사로이(私) 겸병하니(并兼), 백성(百姓)이 다시는 손을 댈 수 없게 되었으니(無復厝手地),응당(當) 악하다(邪) 일컫어(謂) 꾸짖겠는가(何)!빨리(速) 이(此) 법(法)을 고쳐라(改).”

또한(又)

“술집(酒室)중(中)에 제중주(齊中酒)ㆍ청사주(聽事酒)ㆍ외주(猥酒)를 말하자면(云), 함께(同) 곡미(曲米)를 사용하는데(用), 하지만(而) 세 개(三)를 품평하면(品) 우열(優劣)하다. 술(醪)을 보내(投) 응당(當) 삼군(三軍)과(與) 그(其) 두께(薄厚)를 같게 하면(同), 저절로(自) 이젠(今) 분별(分別)할수 없을 것이다(不得).”

당시(時) 익주자사(益州刺史) 나상(羅尚)이 이특(李特)에게 패배(所敗)하였는데(為), 사신(使)을 보내(遣) 위급함(急)을 알리고(告), 양곡(糧)을 청하였다(請).

유홍(弘)은 넉넉히(贍) 보급(給)하도록 서신(書)을 보냈는데(移), 하지만(而) 운반로(運道)의 현(懸)이 멀(遠)고(以) 주부(州府)가 강기(綱紀)가, 문무(文武)관원에게 다 사라지니(匱乏), 영릉(零陵)의 쌀(一運米) 5천(五千)곡(斛)으로(以) 나상(尚)과 함께하고자(與) 하였다(欲).

유홍(弘)이 말하였다(曰).

“제군(諸君)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겠지만(未之思耳). 천하는 한 집안이라(天下一家), 서로 다름이 없으므로(彼此無異), 나(吾)는 지금(今) 보급해줄 터이니(給之), 곧(則) 서쪽(西)을 돌아볼 때(顧之) 걱정(憂)이 없게(無)하시오(矣).”

마침내(遂) 영릉(零陵)의 쌀(米) 3만(三萬) 곡(斛)을(以) 보급해주었다(給之).

나상(尚)이 이에 힘입어(賴以) 스스로(自) 굳게 지켰다(固).

당시(時)에(於) 유민(流人)이 형주(荊州)에 10여만(十餘萬) 호(戶)가 있었는데(在), 유랑자(羈旅)들은 가난하여 아무것도 없으니(貧乏), 다수(多)가 도적(盜賊)이 되었다(為).

유홍(弘)은 이에(乃) 그(其) 밭(田)의 씨(種)와 양식(糧食)을 주고(給), 그중(其) 뛰어난 자(賢才)를 뽑아(擢), 즉시(隨) 자질(資)에 따라서(敘) 기용했다(用).

당시(時) 모든(總) 장태악령(章太樂伶) 사람(人)은, 난(亂)을 피하여(避) 다수가(多) 형주(荊州)에 이르었는데(至), 누군가(或) 작악자(作樂者)를 받아들이도록(可) 권유했다(勸可).

유홍(弘)이 말하였다(曰).



옛날(昔) 유경승(劉景升=유표)은 세상이 어지러우니(以禮壞樂崩), 두기(杜夔)에게 명하여(命) 천자합악(天子合樂)을 하게 하였는데(為), 노래가 끝나니(樂成), 조정(庭)을 만들고자(作之) 하였다(欲).

두기(夔)가 말하기를(曰)

『천자합악(天子合樂)과(而) 조정(庭)을 세우려(作之) 한다면(為), 아마(恐) 장군(將軍)의 본래(本) 뜻(意)이 아닐 것입니다(非)。』

라고 하였는데 나(吾)는 이를 듣고 항상(常) 탄식(歎息)하였다(為之).

지금(今) 주상(主上=아마 사마업)은 몽진(蒙塵=도주)하였고, 나(吾)는 나아가(展) 신하(臣)의 절개(節)를 나타내는 것(效)이 가능하지 않은데(未能), 비록(雖) 가기(家伎=집안의 기생)가 있어도(有), 오히려(猶) 응당(宜) 듣지(聽) 않아야 하는데(不), 하물며(況) 어악(御樂=임금의 음악)에서야 말할것이 있겠는가(哉)!


이에(乃) 아래(下)의 군현(郡縣)에게, 편안하게 하고(安) 위로하도록(慰之) 시켰는데(使), 본래(須) 조정(朝廷)이 다시 일어나자(旋返), 본서(本署=건강?장안?)로 돌려(還) 보냈다(送).

장창(張昌)을 공격해(功) 평정한 것(平)을 논하니(論), 응당(應) 자작(子)의 다음(次)인 1인 현후(一人縣侯)에 봉해져야 하지만(封), 유홍(弘)은 상소(上疏)를 올려 굳게(固) 사양하니(讓), 허락하였다(許之).

진급하여(進) 시중(侍中)ㆍ진남대장군(鎮南大將軍)ㆍ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拜).




惠帝幸長安,河間王顒挾天子,詔弘為劉喬繼援。弘以張方殘暴,知顒必敗,遣使受東海王越節度。時天下大亂,弘專督江漢,威行南服。前廣漢太守辛冉說弘以從橫之事,弘大怒,斬之。河間王顒使張光為順陽太守,南陽太守衛展說弘曰:「彭城王前東奔,有不善之言。張光,太宰腹心,宜斬光以明向背。」弘曰:「宰輔得失,豈張光之罪!危人自安,君子弗為也。」展深恨之。

혜제(惠帝)가 장안(長安)에 갔는데(幸), 하간왕(河間王) 사마옹(顒)이 천자(天子)를 위협해(挾), 유홍(弘)에게 조서를 내려(詔) 유교(劉喬)랑 연결해(繼) 원조하고자(援) 하였다(為).

유홍(弘)은 장방(張方)이(以) 잔인하고 폭력적(殘暴)이니, 사마옹(顒)이 반드시(必) 패할 것(敗)을 알아(知), 사신(使)을 보내(遣) 동해왕(東海王) 사마월(越)의 통제(節度)를 받았다(受).

당시(時) 천하(天下)는 크게 어지러웠는데(大亂), 유홍(弘)은 오로지(專) 장강(江)ㆍ한수(漢)만 살펴(督), 위엄(威)이 남부(南服)에 드러났다(行).

이전(前) 광한태수(廣漢太守) 신염(辛冉)은 유홍(弘)에게 합종ㆍ연횡(從橫)의(之) 일(事)을(以) 하도록 설득했는데(說), 유홍(弘)이 크게(大) 노하여(怒), 참수하였다(斬之).

하간왕(河間王) 사마옹(顒)은 장광(張光)을 보내(使) 순양태수(順陽太守)로 삼았는데(為), 남양태수(南陽太守) 위전(衛展)이 유홍(弘)을 설득하여(說) 말하였다(曰).

“팽성왕(彭城王) 사마전(前)은 동쪽으로(東) 도망했고(奔), 말(言)을 잘하지 못합니다(有不善之). 장광(張光)은, 태재(太宰)의 심복(腹心)이니, 의당(宜) 장광(光)을 참수(斬)함으로서(以) 지지(向)와 반대(背)를 분명히(明) 해야합니다.”

유홍(弘)이 말하였다(曰).

“재상(宰輔)의 성공과 실패(得失)가, 어찌(豈) 장광(張光)의(之) 허물이겠느냐(罪)!위태한 사람(危人)은 저절로(自) 편안해지니(安), 군자(君子)가 할(為)일이 아니(弗)니라(也).”

위전(展)이 깊이(深) 한탄하였다(恨之).




陳敏寇揚州,引兵欲西上,弘乃解南蠻,以授前北軍中候蔣超,統江夏太守陶侃ㆍ武陵太守苗光,以大眾屯於夏口。又遣治中何松領建平ㆍ宜都ㆍ襄陽三郡兵,屯巴東,為羅尚後繼。又加南平太守應詹寧遠將軍,督三郡水軍,繼蔣超。侃與敏同郡,又同歲舉吏,或有間侃者,弘不疑之。乃以侃為前鋒督護,委以討敏之任。侃遣子及兄子為質,弘遣之曰:「賢叔征行,君祖母年高,便可歸也。匹夫之交尚不負心,何況大丈夫乎!」陳敏竟不敢窺境。永興三年,詔進號車騎將軍,開府及餘官如故。

진민(陳敏)이 양주(揚州)를 노략질하고(寇), 병사(兵)를 인솔해(引) 서쪽으로(西) 올라가고자(上) 하였는데(欲), 유홍(弘)은 이에(乃) 남만(南蠻)을 분할하여(解), 앞서(前) 북군중후(北軍中候)이던 장초(蔣超)에게 주(授)어서(以), 강하태수(江夏太守) 도간(陶侃)ㆍ무릉태수(武陵太守) 묘광(苗光)을 통솔하여(統), 큰(大) 무리(眾)로(以) 하구(夏口)에(於) 주둔하게(屯) 하였다.

또한(又) 치중(治中)인 하송(何松)을 보내(遣) 건평(建平)ㆍ의도(宜都)ㆍ양양(襄陽) 3군(三郡)의 병사(兵)를 거느리고(領), 파동(巴東)에 주둔하게 하며(屯), 나상(羅尚)의 뒤(後)를 잇도록(繼) 하였다(為).

또한(又) 남평태수(南平太守) 응첨(應詹)에게 영원장군(寧遠將軍)을 더해주어(加), 3군(三郡)의 수군(水軍)을 독려하여(督), 장초(蔣超)를 잇도록 하였다(繼).

도간(侃)과(與) 진민(敏)은 같은 군(同郡)이고, 또한(又) 같은(同) 해(歲)에 관리(吏)로 천거되어(舉), 누군가가(或) 도간(侃者)이 다른마음(間)이 있다 했는데(有), 유홍(弘)은 의심하지(疑之) 않았다(不).

이에(乃) 도간(侃)을(以) 전봉독호(前鋒督護)로 삼아(為), 진민(敏)을 토벌(討)하는(之) 임무(任)를(以) 맡겼다(委).

도간(侃)은 아들(子)과(及) 조카(兄子)를 인질(質)로(為) 보내니(遣), 유홍(弘)은 (그들을) 돌려보내며(遣之) 말하였다(曰).

“현명한(賢) 숙부(叔=도간)께서 정벌(征行)에 나서는데, 군(君)의 조모(祖母=도간의 어머니)의 연세(年)가 높으시니(高), 가히(可) 돌아가는게(歸) 맞다(便)(也). 필부(匹夫)의(之) 부친(交)도 오히려(尚) 마음(心)에 짐을 지지(負) 않는데(不), 하물며(何況) 대장부(大丈夫)의 경우에서야(乎)!”

진민(陳敏)은 끝내(竟) 감히(敢) 국경(境)을 도모하지(窺) 못했다(不).

영흥(永興) 3년(三年), 조서로(詔)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올랐으며(進號), 개부(開府)와(及) 나머지(餘) 관직(官)은 이전(故)과 같았다(如).




弘每有興廢,手書守相,丁寧款密,所以人皆感悅,爭赴之,咸曰:「得劉公一紙書,賢於十部從事。」及東海王越奉迎大駕,弘遣參軍劉盤為督護,率諸軍會之。盤既旋,弘自以老疾,將解州及校尉,適分授所部,未及表上,卒于襄陽。士女嗟痛,若喪所親矣。

유홍(弘)은 매번(每) 흥폐(興廢=잘되고 안되고)가 있어(有), 손수 편지를 써(手書) 도움을(相) 청했는데(守), 분명히(丁寧) 정성(款)이 깊어(密), 사람(人) 모두(皆)가 기쁨(悅)을 느낀(感) 것으로(所以), 나아가(赴之) 싸우니(爭), 모두(咸) 말하였다(曰).

“유공(劉公)의 한 장의 편지(一紙書)를 받으면(得), 10(十)개의 부(部)에서(於) 현명한 사람(賢)이 종사(從事)한다.”

동해왕(東海王) 사마월(越)이 대가(大駕=황제)를 영접(奉迎)하자(及), 유홍(弘)은 참군(參軍) 유반(劉盤)을 독호(督護)로 삼아(為) 보내며(遣), 제군(諸軍)을 모아(會之) 거느리게(率) 하였다.

유반(盤)이 이윽고(既) 돌아왔는데(旋), 유홍(弘)이 스스로(自) 늙어서(以老疾), 장차(將) 주(州=형주자사)와(及) 교위(校尉=남만교위)를 벗어(解), 마땅히(適) 거느린(部) 것(所)을 나누어(分) 주려(授) 하는데, 표문(表)이 위(上)에 이르지(及) 못하고(未), 양양(襄陽)에서(于) 죽었다(卒).

남녀(士女) 탄식하고(嗟) 애석히 여겨(痛), 어버이(親)의(所) 상(喪) 같았(若)다(矣).




初,成都王穎南奔,欲之本國,弘距之。及弘卒,弘司馬郭勱欲推穎為主,弘子璠追遵弘志,於是墨絰率府兵計勱,戰於濁水,斬之,襄沔肅清,初,東海王越疑弘與劉喬貳于己,雖下節度,心未能安。及弘距穎,璠又斬勵,朝廷嘉之。越手書與璠贊美之,表贈弘新城郡公,謚曰元。

애초에(初), 성도왕(成都王) 사마영(穎)이 남쪽(南)으로 달아나(奔), 본국(本國=성도)으로 가고자(之) 했는데(欲), 유홍(弘)이 막았다(距之).

유홍(弘)이 죽(卒)자(及), 유홍(弘)의 사마(司馬) 곽려(郭勵)는 사마영(穎)을 추대하여(推) 주군(主)으로 삼고자(為) 하였다(欲).

유홍(弘)의 아들(子)인 유번(璠)이 유홍(弘)의 뜻(志)을 추존(追遵)하여, 이(是)에(於) 검은 상복(墨絰)으로 부(府)의 병사(兵)를 인솔해(率) 곽려(勵)를 꾀해(計), 탁수(濁水)에서(於) 싸워(戰), 참수하니(斬之), 양양(襄)ㆍ면수(沔)가 엄숙하고(肅) 맑아졌다(清).

애초에(初),동해왕(東海王) 사마월(越)은 유홍(弘)과(與) 유교(劉喬)가 자신(己)에게(于) 두마음을 품는다(貳) 의심하였는데(疑), 비록(雖) 아래(下)에 두고 통제(節度)했지만, 마음(心)은 능히(能) 편안치(安) 않았다(未).

유홍(弘)이 사마영(穎)을 막(距)고(及), 유번(璠)이 또한(又) 곽려(勵)를 참수하니(斬), 조정(朝廷)이 칭찬하였다(嘉之).

사마월(越)은 손수(手) 편지를(書) 주어(與) 유번(璠)을 칭찬하며(贊美之), 표문을 올려(表) 유홍(弘)을 신성군공(新城郡公)으로 추증하며(贈), 시호(謚)를 원(元)으로 했다(曰).




以高密王略代鎮,寇盜不禁,詔起璠為順陽內史,江漢之間翕然歸心。及略薨,山簡代之。簡至,知璠得眾心,恐百姓逼以為主,表陳之,由是征璠為越騎校尉。璠亦深慮逼迫,被書,便輕至洛陽,然後遣迎家累。僑人侯脫ㆍ路難等相率衛送至都,然後辭去。南夏遂亂。父老追思弘,雖《甘棠》之詠召伯,無以過也。

고밀왕(高密王) 사마략(略)이 (유홍을) 대신하여(代) 진수(鎮)하였는데(以), 도적(寇盜)을 억제할(禁)수 없어(不), 조서(詔)를 내려 유번(璠)을 기용해(起) 순양내사(順陽內史)로 삼아(為), 장강(江)ㆍ한수(漢)의(之) 사이(間)를 흡연(翕然)하여 따르게 하였다(歸心).

사마략(略)이 죽(薨)자(及), 산간(山簡)이 대신하였다(代之).

산간(簡)이 이르자(至), 유번(璠)이 무리(眾)의 마음(心)을 얻은걸(得) 알아(知), 백성(百姓)이 핍박하여(逼) (유번을) 주군(主)으로(以) 하는걸(為) 두려워하여(恐), 표문으로(表) 진술하여(陳之), 이로(是) 말미암아(由) 유번(璠)을 불러(征) 월기교위(越騎校尉)로 삼았다(為).

유번(璠) 역시(亦) 핍박(逼迫)을 심히(深) 걱정해(慮), 명을 받아(被書), 편하고(便) 가볍게(輕) 낙양(洛陽)에 이르어(至), 연후(然後)에 (사람을) 보내(遣) 가족(家累)을 맞이하였다(迎).

여행자(僑人)인 후탈(侯脫)ㆍ노난(路難) 등(等)이 서로(相) 호위(衛)를 거느려(率) 도읍(都)에 가도록(至) 배웅하고(送), 연후(然後)에 말을 올리고(辭) 떠났다(去).

남부(南夏=남중국)가 마침내(遂) 혼란해졌다(亂).

부로(父老)가 유홍(弘)을 추념(追思)하였는데, 비록(雖)《감당(甘棠)》에서(之) 소백(召伯)을 노래했다 해도(詠), 이보다 나은(過) 것이(以) 없었(無)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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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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