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령(孝霊)황제는 휘가 굉(宏)으로 

1)익법(謚法)에 따르면, 영(靈)은 어지러움이 줄지 않는다는 뜻이다. 굉(宏)은 크다[大]는 뜻이다. 

숙종의 현손 (玄孫, 증손자의 아들)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하간효왕 유개이고, 할아버지는 유숙이며, 아버지는 유장(劉萇)이다. 대대로 해독정후(解瀆亭侯)로 봉해졌으며 

2)유숙劉淑은 하간왕河間王의 왕자일 때 해독정후解瀆亭侯가 되었다. 유장劉萇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 때문에 “대대로”라고 한 것이다. 해독정解瀆亭은 지금(송나라 때)의 정주(定州)의풍현(義豐縣)동북쪽을 말한다

후작 직위를 물려받았다. 어머니는 동(董)부인이다.

환제(桓帝)가 붕어했을 때 자식이 없었다. 황태후와 그 아버지 성문교위(城門校尉)두무(竇武)가 궁중에서 계책을 정하여 수광록대부守光祿大夫 유숙(劉儵)에게 지절持節을 주고 좌우 우림군羽林軍을 이끌고 가서 하간河間에 이르러 맞이하게 하였다.

봄 정월 임오일 (壬午, 1월 30일), 성문교위城門校尉 두무竇武가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기해일 (己亥, 2월 16일), 영제가 하문夏門 바깥의 정자亭에 이르렀다. 

3)「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하문夏門 바깥 만수정萬壽亭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을 알현했다 한다. 

두무에게 지절을 주고, 왕이 타는 푸른 덮개 있는 마차 靑蓋車 로써 궁궐로 맞아들이게 했다.


경자일 (庚子, 2월 17일), 황제위에 올랐다.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연호를 바꾸어 건녕(建寧)이라 했다. 전에 태위太尉를 지냈던 진번陳蕃을 태부太傅로 삼고, 두무竇武와 사도司徒 호광胡廣에게 함께 녹상서사錄尙書事를 더했다.

호강교위護羌校尉 단경段熲에게 선령先零의 강족羌族을 토벌하게 했다.

2월 신유일 (辛酉, 3월 18일), 환제孝桓皇帝를 선릉宣陵에 장사지냈다. 

4)낙양洛陽 동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높이는 12장丈이고 둘레는 300걸음이다. 

종묘에 위종威宗으로 올렸다.

경오일 (庚午, 3월 27일), 고묘 (高廟, 한 고조 유방의 사당)를 참배했다.

신미일 (辛未, 3월 28일), 세조묘 (世祖廟, 광무제의 사당)를 참배했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백성들에게 작위와 비단을 내리되 사람마다 차이를 두었다.

단경段熲이 선령先零의 강족을 봉의산逢義山에서 

5)봉의산은 원주原州 (고)평현(高)平縣에 있다. 일설에는 도의산途義山이라고도 한다. 

크게 쳐부수었다.

윤 2월 갑오일 (甲午), 할아버지 유숙(劉淑)을 효원황(孝元皇)으로, 그 부인 하씨(夏氏)를 효원황후孝元皇后로 추존했다. 아버지 유장劉萇은 효인황孝仁皇이, 그 부인 동 씨董氏는 신원귀인慎園貴人이 되었다. 

6)신원慎園은 현재 영주瀛州 낙수현樂壽縣 동남쪽에 있으며, 속칭 이황릉爲二皇陵으로 불린다.

여름 4월 무진일戊辰, 태위太尉 주경周景이 죽었다. 사공司空 선풍宣 酆 을 면직하고, 장락위위長樂衛尉 왕창王暢이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5월 정미삭丁未朔, 일식日食이 일어났다. 조서를 내려 공경公卿 이하 관리들에게 봉사 (封事, 상소를 올릴 때 글을 검은 주머니 속에 봉하여 다른 사람이 미리 읽어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를 올리라고 명했으며, 각 군郡과 국國의 태수太守와 상相에게 지혜로운 선비有道之士를 각 한 명씩 추천하게 했다. 또 늙은 자사刺史들 중에서 청고清高에게는 이천 석으로써 은혜를 베풀었으며 무리觿를 이루어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모두 공용 수레公車를 타도록 했다. 又故刺史二千石清高有遺惠, 為觿所歸者, 皆詣公車

태중대부太中大夫 유거劉矩가 태위太尉가 되었다.

6월 수도에 비가 오다.

가을 7월 파강장군破羌將軍 단경段熲이 다시 선령先零의 강족을 경양涇陽에서 깨뜨렸다. 

7)경양涇陽은 현縣 이름으로 안정군安定群,에 속해 있다. 고성古城이 지금 원주原州 평량현平 涼 縣 남쪽에 있다.

8월 사공司空 왕창王暢을 면직하고, 종정宗正 유총劉寵을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9월 정해일(丁)[辛]亥, 중상시中常侍 조절曹節이 조서를 고쳐서 태부太傅 진번陳蕃을 주살하고, 대장군大將軍 두무竇武 및 상서령尙書令 윤훈尹勳,﹑시중侍中 유유劉瑜, 둔기교위屯騎校尉 풍술馮述 등을 그 종족과 함께 죽였다夷. 황태후가 남궁南宮으로 옮겼다. 

8)태후와 두무竇武는 몰래 조절을 죽이려고 모의했으나 들켜서 먼저 두무가 주살당하자 피해서 옮긴 것이다. 

사도司徒 호광胡廣이 태부太傅가 되었으며 녹상서사錄尙書事를 더했다. 사공司空 유총劉寵이 사도司徒가 되고, 대홍려大鴻臚 허허許栩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겨울 10월 갑진일 (甲辰)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천하에 영을 내려 죄를 저지른 자 중 미결인 것을 재물을 받고 사면하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令天下系囚罪未決入縑贖, 各有差.

11월 태위太尉 유거劉矩를 면직하고, 태복太僕 패국沛國 사람 문인습聞人襲을 태위太尉로 삼았다. 

9)성이 문인聞人이고 이름은 습襲으로 자는 정경定卿이다.

12월

선비鮮卑 및 예맥족濊貊이 유주와 병주幽並를 노략질했다.

건녕 2년(169년) 봄 정월 정축일丁丑,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3월 을사일乙巳, 신원慎園 동董 귀인貴人을 효인황후孝仁皇后로 올렸다.

여름 4월 계사일癸巳, 큰 바람이 불고 우박이 쏟아졌다. 조서를 내려 공경公卿 이하 각각에게 봉사封事를 올리게 했다.

5월 태위太尉 문인습聞人襲을 파직하고, 사공司空 허허許栩를 면직했다.

6월 사도司徒 유총劉寵을 태위太尉로, 태상太常 허훈(許訓)(1)사도司徒로, 태복太僕 장사(長沙) 사람 유효劉囂(2)사공司空으로 삼았다. 

1)허훈은 자가 계사季師이며 평여平輿 사람이다. 2)유효는 자가 중녕重寧이다.


가을 7월 파강장군破羌將軍 단경段熲이 선령先零의 강족을 사호새외곡射虎塞外谷에서 크게 쳐부수었다. 이로써 동쪽의 강족이 남김없이 평정되었다.

9월 강하江夏의 오랑캐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군州郡에서 토벌하여 평정했다. 단양丹陽의 산월적山越賊이 태수太守 진인陳夤을 포위했으나, 진인이 공격하여 쳐부수었다.

겨울 10월 정해일丁亥, 중상시中常侍 후람侯覽이 풍(諷, 사물에 비유하여 간하다.)으로 유사有司에 상주上奏하여 전前 사공司空 우방虞放, 태복太僕 두밀杜密, 장사소부長樂少府 이응李膺, 사예교위司隸校尉 주우朱(瑀), 영천태수穎川太守 파숙巴肅, 패국沛國의 상相 순습荀(翌), 하내태수河內太守 위랑魏朗, 산양태수山陽太守 적초翟超 등을 구당鉤黨으로 

3)구鉤는 서로 끌어당기고 끌어 주는 것을 말한다. 

이 일에 대해서는 유숙劉淑과 이응李膺의 전傳에 나와 있다. 몰아 투옥했다. 이때 죽은 자만 100여 명으로, 그 처자식은 변방으로 유배했으며, 무릇 부화하여 그들을 따른 자들도 모두 고 (錮, 평생 관직에 나가지 못하게 함.)및 오속五屬에 처했다. 

4)오속五屬은 장례 때 오복五服을 입을 정도로 가까운 친척을 말한다. 오복이란 참최斬衰, 재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를 이른다.
제압하는 조서를 내려 주州나 군郡에 이르기까지 크게 구당鉤黨을 찾아 올렸으므로 이에 천하 호걸과 유학자 중에서 의를 행하는 자는 모두 묶여 당인黨人이 되었다.

경자일(庚子)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11월 태위太尉 유총劉寵을 면직하고, 태복太僕 곽희郭禧가 태위太尉가 되었다. 

6)곽희는 자가 공방公房으로 부구扶溝 사람이다. 

선비족이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 해에 장락태복長樂太僕 조절曹節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다가 100여 일 만에 파직되었다.

건녕 3년(170년)

봄 정월 하내河內에서 부인이 남편을 잡아먹고, 하남河南에서 남편이 부인을 잡아먹는 일이 벌어졌다.

3월 병인일丙寅 그믐에 일식이 일어났다.

여름 4월 태위太尉 곽희郭禧를 파직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문인습聞人襲을 태위太尉로 삼았다.

가을 7월 사공司空 유효劉囂를 파직했다.

8월 대홍려大鴻臚 교현橋玄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9월 집금오執金吾 동총董寵을 하옥해 죽였다.

겨울 제남濟南에서 도적이 일어나 동평릉東平陵을 공격했다.

1)동평릉東平陵은 현 이름으로 제남국濟南國에 속했다. 고성古城이 지금 제주齊州 동쪽에 있다.

울림鬱林 오허烏滸의 2)허오烏滸는 남방 오랑캐를 이르는 말이다. 「광주기廣州記」에 이르기를 “그 풍속은 사람을 잡아먹고 코로 물을 마시며 입에서 항상 무언가를 씹는다口中進噉如故.”라고 하였다. 백성이 서로 이끌고 들어와 귀순했다.

건녕 4년 (171년)

봄 정월 갑자일甲子, 영제가 원복 (元服, 예전에 남자가 스무 살, 곧 성년에 달하여 비로소 어른의 의관(衣冠)을 착용하던 의식. 하지만 영제의 경우는 열 살이다.)을 치르면서 천하에 대사면을 행했다. 공경公卿 이하 각 사람들에게 차이를 두어 하사했으나 오직 당인黨人들만 사면되지 않았다.

2월 계묘일癸卯, 지진이 있어 바닷물이 넘쳤으며 황하의 물이 맑아졌다.

3월 신유삭辛酉, 朔에 일식이 있었다.

태위太尉 문인습聞人襲을 면직하고 태복太僕 이함李鹹을 태위로 삼았다. 

1)이함李鹹은 자가 부탁符卓이며 여남군汝南郡 서평현西平縣 사람이다.

조서를 내려 600석에 이르는 공경公卿에게 각자 봉사封事를 올리게 했다.

큰 전염병이 돌았다. 중알자中謁者를 시켜 순행하면서 의약품을 나누어 주게 했다.

사도司徒 허훈許訓을 면직하고, 사공司空 교현橋玄을 사도司徒로 삼았다.

여름 4월 태상太常 내염來艷 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2)내염來 艷 은 자가 계덕季德이며 남양군南陽群 신야현新野縣 사람이다.

5월 하동河東에 땅이 갈라지고, 우박이 쏟아졌으며, 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가을 7월 사공司空 내염來艷 을 면직했다.

계축일, 귀인貴人 송 씨宋氏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 

3)귀인貴人 송 씨宋氏는 집금오執金吾 송풍宋 酆 의 딸로 그 전해에 액정掖庭에 들어와 귀인貴人이 되었다.

사도司徒 교현橋玄을 면직했다. 태상太常 종구宗俱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4)종구宗俱는 자가 백려伯儷이며, 남양군南陽郡 안휴현安 觿 縣 사람이다. 

전 사공司空 허허許栩가 사도司徒가 되었다.

겨울 선비족이 병주并州를 노략질했다.

희평熹平 원년(172년)

봄 3월 임술일壬戌, 태부太傅 호광胡廣이 죽었다.

여름 5월 기사일己巳, 천하에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희평熹平으로 고쳤다. 장락태복長樂太僕 후람侯覽이 죄상이 드러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월 낙양에 많은 비가 내렸다. 계사일癸巳, 황태후皇太后 두씨竇氏가 죽었다. 가을 7월 병인일甲寅, 환사황후桓思皇后를 장례 지냈다.

환관들이 간하여 사예교위司隸校尉 단경段熲이 관련된 태학생太學生 천여 명을 체포했다.

겨울 10월 발해왕渤海王 유리劉悝가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정해일丁亥에 처자식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1 월 회계會稽 사람 허생許生이 스스로 월왕越王을 칭하고 주변의 군현郡縣을 노략질했다. 

1)「동관기東觀記」에 이르기를 “회계會稽에서 허소許昭가 무리들을 모아 스스로 대장군大將軍을 칭하고, 아버지 허생許生을 월왕越王이라 하여 군과 현을 여러 군데 공격하여 깨뜨렸다.”라고 했다. 

양주자사楊州刺史 장민臧旻, 단양태수丹陽太守 진인陳夤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여 쳐부수었다.

12월 사도司徒 허허許栩를 파직하고, 대홍려大鴻臚 원외袁隗를 사도司徒로 삼았다. 선비족이 병주并州를 노략질했다.

이 해에 감릉왕甘陵王 유회劉恢가 죽었다.

희평 2년(173년)

봄 정월 역병이 크게 돌아서 사자로 하여금 순행巡行하면서 의약품을 나누어 주게 했다. 정축일丁丑, 사공司空 종구宗俱가 죽었다.

2월 임오일壬午,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광록훈光祿勳 양사楊賜가 사공司空이 되었다.

3월 태위太尉 이함李鹹을 면직했다.

여름 5월 사예교위司隸校尉 단경段熲을 태위太尉로 삼았다.

패국沛國의 상相 사천師遷이 국왕을 모함하고 헐뜯는 죄를 범해 하옥하여 죽였다. 

1)이때 국왕이란 진민왕陳愍王 유총劉寵을 말한다. 「진경왕전陳敬王傳」에 이르기를, “나라의 상相 사천師遷”이라 되어 있고, 또 「동관기東觀記」에는 “진국陳國의 상相을 대행하는 사천師遷이 패국沛國의 상相 위음魏愔은 전前 진국陳國의 상相으로 진왕陳王 유총과 더불어 교통한다고 주상奏上했다.”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패국沛國의 상相은 위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천師遷이 패국沛國의 상相으로 나오는 것은 잘못이다.

6월 북해北海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동래東萊와 북해北海의 바닷물이 넘쳤다. 

2)「속한지續漢志」에 “이때 큰 물고기가 두 마리 나왔는데, 각각 길이 89장丈에 너비가 2장이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가을 7월 사공司空 양사楊賜를 면직했다. 태상太常 영천穎川 사람 당진唐珍이 사공司空이 되었다.

겨울 12월 일남 (日南, 오늘날 베트남의 후에順化 일대) 외요(外徼)에서 통역과 함께 와서 공물을 바쳤다.

태위太尉 단경段熲을 파직했다.

선비족이 유주幽州와 병주並州를 노략질했다.

계유일癸酉 그믐, 일식이 일어났다.

희평 3년(174년)

봄 정월 부여국夫餘國에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2월 기사일己巳,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상 진탐陳耽이 태위가 되었다. 

1)진탐은 자가 한공漢公이며, 동해군東海郡 사람이다.

3월 중산왕中山王 유창劉暢이 죽었다. 자식이 없어 나라를 없앴다.

여름 6월 하간왕河間王에 유리劉利를, 아들 유강劉康을 제남왕濟南王으로 봉했다. 효인황의 사당에 제를 올렸다.

가을 낙수洛水가 넘쳤다.

겨울 10월 계축일癸丑,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11월 양주자사楊州刺史 장민이 단양태수 진인을 통솔하여 회계군에서 허생을 크게 쳐부수고 그 목을 베었다.

임성왕任城王 유박劉博이 죽었다.

12월 선비족이 북지군北地群을 노략질하므로, 북지태수北地太守 하육夏育이 쫓아가 싸워 쳐부쉈다. 선비족이 또 병주를 노략질했다.

사공 당진을 파직하고, 영락소부永樂少府 허훈을 사공으로 삼았다.

희평 4년(175년)

봄 3월 조서를 내려 여러 유학자에게 오경五經의 문자를 바로잡게 하고, 돌에 새겨 태학太學의 문 밖에 세웠다.

하간왕에 유건劉建을 봉하고,(1) 그 아들 유타劉佗를 임성왕으로 삼았다.

1)유건은 환제桓帝의 동생이다.

여름 4월 일곱 군국郡國에 큰물이 들었다.

5월 정묘일丁卯,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연릉원延陵園에 (2) 화재가 났다. 지절을 주고 사자使者를 보내 연릉延陵에 제사를 올렸다.

2)성제릉成帝陵을 말한다. 지금의 함양현咸陽縣 서쪽에 있다

선비족이 유주를 노략질했다.

6월 홍농弘農과 삼보三輔에 명충螟蟲이 들끓었다.

염감鹽監의 (3) 수궁령守宮令을 보내 거 (渠, 운하)를 파서 백성들을 이롭게 했다. 

3)『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와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모두 [염]감[鹽]監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 포주蒲州 안읍군安邑郡 서남쪽에 염지鹽池[監]가 있다.

군국郡國에 영을 내려 재해를 입은 백성들의 전조 (田租, 농지세)를 반으로 줄이게 했다. 또 피해 규모가 4할 이상인 자는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했다.

겨울 10월 정사일丁巳,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충제沖帝의 어머니 우 미인虞美人을 헌원귀인憲園貴人으로(4) 삼고, 질제質帝의 어머니 진부인陳夫人을 발해효왕渤海孝王의 비妃로 삼았다.(5)
4)순제順帝의 우 미인虞美人이다. 헌원憲園은 낙양洛陽 동북쪽에 있다.
5)발해효왕渤海孝王 유홍劉鴻의 부인이다.

평준平准을 고쳐 중준中准으로 했다. (6) 환관들로 하여금 영令으로 삼아 내서內署에 들게 했다. 이때부터 여러 부서가 다 엄인閹人, 거세된 남자이 승丞 또는 영令이 되었다.

6)『한서漢書』 「관의官儀」에 따르면, “평준령平准令 한 사람이 질 (秩, 녹봉)육백 석이다.”

희평 5년(176년)

여름 4월 계해일癸亥,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익주군益州郡의 오랑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태수太守 이옹李顒이 토벌하여 평정했다.

숭고산崇高山의 이름을 다시 숭고산嵩高山으로 고쳤다. 

1)『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따르면, 무제가 중악中岳에 사당을 세우고, 숭고산嵩高山의 이름을 숭고산崇高山으로 바꾸었다. 『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중랑장中郎將 당계전堂溪典이 기우제를 지낸 후, 바꾸자고 소를 올려, 그 이름을 숭고산嵩高山으로 했다.”라고 한다. 당계전은 당계堂溪가 성이고, 전典은 이름이다. 자는 자도子度로, 영천군潁川郡 사람이다. 서악현西鄂縣의 장長을 지냈다.

크게 기우제를 지냈다. 시어사侍御史로 하여금 옥정부獄亭部에 가서 조서를 내려 원왕 (冤枉, 원통하게 입은 죄)을 바로잡고, 가벼운 죄는 용서하였으며, 죄수들을 쉬게 했다.

5월 태위 진탐을 파직하고, 사공 허훈을 태위로 삼았다.

윤5월 영창태수永昌太守 조란曹鸞이 당인黨人에 대한 송사를 방치하자 기시 (棄市, 사지를 찢어 죽여 시체를 각각 사대문에 걸어 두는 형벌.)했다. (2) 조서를 내려 당인黨人의 제자, 옛 부하 관료, 아버지, 형제, 자식 중에서 직위가 있는 자는 모두 파면하고 금고 (禁錮,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함.)에 처했다.

2)송訟이란 신리 (申理,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너무 곧았기 때문에 영제는 화가 났고 함거檻車로 괴리현槐裡縣의 감옥에 보내 베어 죽인 것이다.

6월 임술일壬戌, 태상 남양군南陽群 사람 유일劉逸이 사공이 되었다. 

3)유일은 자가 대과大過이며, 안휴현安 觿 縣 사람이다.

가을 7월 태위 허훈을 파직하고, 광록훈 유관劉寬이 태위가 되었다.

겨울 10월 임오일壬午, 어전御殿 뒤의 홰나무槐樹가 저절로 뽑혀 거꾸로 넘어져 뿌리가 드러났다.

사도 원외袁隗를 파직했다.

11월 병술일丙戌, 광록대부光祿大夫 양사가 사도가 되었다.

12월 감릉왕 유정劉定이 죽었다.

나이 예순 살을 넘긴 태학생 백여 명에게 시험을 보아 낭중郎中, 태자사인太子舍人, 왕가王家의 랑郎으로 뽑아 (4) 군국郡國의 문학리文學吏로 삼았다.

4)『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태자사인太子舍人, 왕가王家의 낭중郎中은 모두 질秩 이백 석인데, 해당 관원은 없다.”

이 해 선비족이 유주를 노략질했다.

패국 초현譙縣에서 누런 용黃龍을 보았다는 말이 올라왔다.

희평 6년(177년)

봄 정월 신축일辛丑,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남궁南宮 평성문平城門과 무고武庫 동쪽 담과 건물이 스스로 무너졌다. 

1)평성문平城門은 낙양성洛陽城 남문南門을 말한다. 채옹蔡邕은, “평성문平城門은 정양지문正陽之門으로 궁련宮連과 함께 성 밖에서 제사를 받들 때 황제의 가마가 들고 나는 문이다. 그러므로 문 가운데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고武庫는 귀한 병기를 소장해 둔 곳이다. 동쪽 담은 무고의 바깥 담장이다. 『역전易傳』에 이르길, “소인小人이 재위하면, 요망한 일이 들끓으면서 성문이 스스로 무너진다.”라고 했다.

여름 4월 큰 가뭄이 들고 일곱 주七州에 메뚜기 떼가 들끓었다.

선비족이 삼변三邊을 노략질했다. 

2)삼변이란 동쪽, 서쪽, 북쪽 변방을 말한다.

장사꾼市賈民으로 선릉효자宣陵孝子가 된 사람 수십 명을 모두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사공 유일劉逸을 면직하고, 위위衛尉 진구陳球를 사공으로 삼았다.

8월 파선비중랑장破鮮卑族中郎將 전안田晏을 보내 운중雲中으로 나가게 하고, 흉노중랑장匈奴中郎將 장민으로 하여금 남선우南單于와 더불어 안문鴈門으로 나가게 하고,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하육夏育을 고류高柳로 나가게 하여 함께 선비족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안田晏 등이 크게 패하였다.

겨울 10월 계축삭癸丑朔, 일식이 일어났다.

태위 유관劉寬을 면직했다.

영제가 벽옹辟雍으로 행차했다.

신축일辛丑, 낙양에 지진이 일어났다.

신해일辛亥,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11월 사공 진구陳球를 면직했다.

12월 갑인일甲寅, 태상 하남河南 출신 맹역孟戫이 태위가 되었다. 

3)맹역은 자가 숙달叔達이다.

경진일, 사도 양사를 면직했다. 태상 진탐이 사공이 되었다.

선비족이 요서군遼西郡을 노략질했다.

영안태복永安太僕 왕민王旻을 하옥해 죽였다. 

4)영안궁永安宮의 태복太僕을 말한다.

광화光和 원년元年(178년)

봄 정월 합포合浦, 교지交址의 오랑캐 오허烏滸가 반란을 일으켜 구진九眞, 일남日南의 백성들을 꾀어 끌어들인 후 여러 군현을 파괴했다.

태위 맹역孟戫을 파직했다.

2월 신해삭辛亥朔, 일식이 일어났다.

계축일癸丑, 광록훈 진국陳國 출신 원방袁滂이 사도가 되었다. 

1)원방은 자가 공희公喜이다.

기미일己未, 지진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홍도문鴻都門을 설치하고 학생學生을 두었다. 

2)홍도鴻都는 문 이름으로 그 안에 배우는 곳을 설치했다. 그때 학생들은 모두 주州, 군郡, 삼공三公이 召能爲 척독尺牘, 사부辭賦, 공서工書, 조전鳥篆을 능히 할 수 있는 자 중에서 서로 시험을 보아 뽑아 보냈는데, 그 수가 천 명에 이르렀다.

3월 신축일辛丑,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광화光和로 바꾸었다.

태상 상산常山 사람 장호張顥가 태위가 되었다. 

3)장호는 자가 지명智明이다. 『수신기搜神記』에 따르면, “장호가 양국梁國의 상相이었을 때 일이다. 첫 봄비가 온 후, 까치가 근처 땅 위를 빙빙 나는 것을 보고, 영을 내려 그곳을 파 보게 했다. 거기에 땅에 떨어져 둥글게 된 돌을 얻었다. 장호가 명을 내려 망치로 깨뜨리게 하여, 금으로 된 도장을 얻었는데 거기에 ‘충효후인忠孝侯印’이라고 파여 있었다.”

여름 4월 병진일丙辰, 지진이 일어났다.

시중사侍中寺의 암탉이 화하여 수탉이 되었다.

사공 진탐을 면직하고, 태상 내염을 사공으로 삼았다.

5월 임오일壬午,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덕양전德陽殿 문으로 들어왔으나 도망쳐 잡지 못했다. 

4)『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흰 옷 입은 사람이 ‘양백梁伯 하夏가 나에게 전殿에 오르라고 가르쳤다.’라고 중황문中黃門 환현桓賢과 더불어 말하고는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6월 정축일丁丑, 검은 기운黑氣이 황제가 있는 온덕전溫德殿 뜰 안에 내려앉았다. 

5)『동관기東觀記』에 따르면, “온덕전 뜰 안에 내려앉은 것은, 수레 지붕 높이로 솟아올라 빠르게 움직였는데, 오색 빛이었으며 머리가 있었다. 몸길이는 십여 장丈에 이르렀고, 형상은 용을 닮았다.”

가을 7월 임자일壬子, 푸른 무지개 青 虹가 옥당玉堂 후전後殿 뜰 안에서 보였다. 

6)낙양궁洛陽宮의 전殿 이름이다. 남궁南宮의 옥당玉堂에 전전前殿과 후전後殿이 있었다. 「양사전楊賜傳」에 따르면, 구름이 가덕전嘉德殿 앞에 내려앉았다.

8월 혜성이 천시원天市垣을 지나갔다.

9월 태위 장호張顥를 파직하고, 태상 진구陳球를 태위로 삼았다.

사공 내염이 죽었다.

겨울 10월 둔기교위 원봉袁逢이 사공이 되었다.

황후皇后 송씨宋氏를 폐하고, 뒤에 그 아버지 집금오 송풍宋酆 을 하옥해 죽였다.

병자일丙子 그믐, 일식이 일어났다.

11월 태위 진구陳球를 면직했다.

12월 정사일丁巳, 광록대부光祿大夫 교현이 태위가 되었다.

이 해에 선비족이 주천酒泉을 노략질했다.

낙양에서 말이 사람을 낳았다. 

7)『경방역전京房易傳』에 이르길, “제후諸侯가 서로 정벌하면, 요사한 일이 들끓어 말이 사람을 낳는다.”라고 했다.

처음으로 서저西邸를 열어 관직을 팔았다. 관내후關內侯, 호분虎賁, 우림羽林을 주고 돈을 받았는데 각각 차이가 있었다. (8) 좌우에 사사로이 영令을 내려 공경도 팔았는데, 공公은 1000만 전이었고, 경卿은 500만 전이었다. 

8)『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이르길, “관직을 팔 때 녹봉 2000석은 2000만 전을, 400석은 400만 전을 받았다. 덕으로써 뒤이어 응당 뽑힌 자는 그 반을 받았으며, 때로는 3분의 1을 받기도 했다. 서원西園에 창고를 세워 그 돈을 쌓아 두었다.”

광화 2년(179년)

봄 역병이 크게 돌았다. 상시常侍, 중알자로 하여금 순행하면서 의약품을 보내게 했다.

3월 사도 원방袁滂을 면직하고, 대홍려 유합劉合을 사도로 삼았다. 

1)유합은 자가 계승季承이다.

을축일乙丑, 태위 교현을 파직하고, 태중대부 단경을 태위로 삼았다.

경조京兆에 지진이 일어났다.

사공 원봉袁逢을 파직하고, 태상 장제張濟를 사공으로 삼았다. 

2)장제는 자가 부강符江이며, 세양細陽 사람이다.

여름 4월 갑술삭甲戌朔, 일식이 일어났다.

신미일辛巳, 중상시 왕보王甫와 태위 단경을 함께 하옥해 죽였다.

정유일丁酉,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당인黨人으로 금고禁錮에 처했던 자 중 소공小功 이하는 모두 풀어 주었다. 

3)이때 상록上祿의 장長 화해和海가 “당인黨人의 고錮 및 오족五族에 전훈典訓에 맞지 않는 바가 있습니다.”라고 아뢰자 영제가 그 말을 따랐다.

동평왕東平王 유서劉端가 죽었다.

5월 위위衛尉 유관劉寬을 태위로 삼았다.

가을 7월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郎將 장수張修에게 죄가 있어 하옥해 죽였다. 

4)이때 장수張修가 멋대로 선우單于 호미呼微의 목을 베고, 다시 강족의 거渠를 세워 선우單于로 삼았다. 이에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겨울 10월 갑신일甲申, 사도 유합劉合, 영락소부永樂少府 진구陳球, 위위衛尉 양구陽球, 보병교위步兵校尉 유납劉納이 환관을 주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새어나가 모두 하옥해 죽였다.

파군巴郡 판순板楯에서 만족들이 모반하자, 어사중승御史中丞 소원蕭瑗을 보내 익주자사益州刺史를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12월 광록훈 양사가 사도가 되었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 해에 하간왕 유리劉利가 죽었다.

낙양洛陽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팔이 넷이었다. 

5)『경방역전京房易傳』에 이르기를, “머리가 둘에 아래가 하나가 아니면, 요망함이 들끓어 사람이 머리 둘인 사람을 낳게 된다.”라고 하였다.

광화 3년(180년)

봄 정월 계유일癸酉,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공부公府 주가駐駕의 무廡가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1)공부公府는 삼공부三公府이고, 주가駐駕는 수레를 세워 두는 곳이며, 무廡는 낭옥 (廊屋, 복도 딸린 집)이다. 『속한지續漢志』에 따르면, “남북 40여 간이 무너졌다.”라고 한다.

3월 양왕梁王 유원劉元이 죽었다.

여름 4월 강하현에서 만족들이 모반했다.

6월 공경에게 조서를 내려 [고문古文] 상서尙書, 모시毛詩, 춘추좌씨전左氏春秋, 춘추곡량전谷梁春秋에 능통한 사람을 한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여 모두 의랑議郎으로 삼았다.

가을 표시현表是縣에 지진이 일어나 2)표시表是는 주천군酒泉郡에 속해 있는 현이다. 옛 성이 지금 감주甘州 장액현張掖縣 서북쪽에 있다. 물이 넘쳐흘렀다.

8월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하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겨울 윤달

낭성狼星, 호성弧星 사이에 혜성이 나타났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12월 기사일己巳, 귀인貴人 하씨何氏가 황후皇后가 되었다. 

3)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사람으로, 거기장군 하진何眞의 딸이다.

이 해에 필규원罼圭苑과 영곤원靈昆苑을 조성했다. 

4)필규원 罼 圭苑은 두 군데 있다. 동필규원東 罼 圭苑은 둘레가 1500걸음에 한가운데 어량대魚梁台가 있으며, 서필규원西 罼 圭苑은 둘레가 3300걸음이다. 둘 모두 낙양洛陽 선평문宣平門 바깥에 있다.

광화 4년(181년)

봄 정월 처음으로 녹기구승騄驥廄丞을 설치하고, 군국郡國에서 조마調馬를 받아서 다루었다. 

1)녹기騄驥는 좋은 말을, 조調는 골라서 보냈다는 뜻이다. 호우 (豪右, 부유층)들이 이를 고각辜搉했는데, 말 한 필이 무려 200만 전에 달했다. 『한서漢書』 「음의音義」에 따르면 고辜는 가린다障는 뜻이다. 각搉은 독차지한다專는 뜻이다. 장障은 다른 사람에게 매매하여 그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2월 군국郡國에서 진귀한 꽃과 풀을 올렸다.

여름 4월 경자일庚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교지자사交址刺史 주준朱雋이 교지交址와 합포合浦의 오허烏滸 오랑캐를 토벌하여 깨뜨렸다.

6월 경신일庚辰, 비와 우박이 쏟아졌다. 

2)『속한서續漢書』에 “우박이 커서 달걀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가을 7월 하남군河南郡 신성현新城縣에서 봉황鳳皇을 보았다는 말이 있었다. 우조 腢 鳥가 봉황의 뒤를 따랐다는 말도 있었다. 신성현新城縣의 영令과 삼로三老에게 땅과 비단을 내리되 각자 차이를 두었다.

9월 경인삭庚寅朔, 일식이 일어났다.

태위 유관劉寬을 면직하고, 위위衛尉 허역許 戫 을 태위로 삼았다.

윤달閏月

신유일辛, 북궁北宮 동액정東掖庭의 영항서永巷署에 불이 났다. 

3)영항永巷은 궁중의 부서 이름이다. 『한관의漢官儀』에 따르면, “영令 한 사람을 두었다. 환관이 그 자리에 임명되고 질秩 600석을 받으며 하는 일은 궁비宮婢의 시사侍使이다.

사도 양사가 파직되었다.

겨울 10월 태상 진탐이 사도가 되었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 해에 영제가 후궁後宮에 열사列肆를 지어 변녀釆女들로 하여금 물건을 판매하게 하니, 더욱 서로 몰래 훔치고 도둑질하여 싸우고 다투었다. 영제는 물건을 팔고 값을 흥정하고 연회를 열어 마시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또 서원西園에서 개와 함께 희롱하면서 개에게 진현관進賢冠을 씌우고 띠를 두르고 인끈을 달게 했다. (4) 또 네 마리 나귀를 수레에 달고 영제가 친히 고삐를 들어 힘차게 달려 한 바퀴 도니 낙양이 서로 돌아가면서 방효放效했다.(5)

4)『삼례도三禮圖』에 이르길, “진현관進賢冠은 문관의 복장으로 앞은 높이가 7촌寸이고 뒤는 높이가 3촌이며, 길이는 8촌이다.” 『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길, “영제靈帝는 편시 (便嬖, 미천한 신분으로 귀인의 총애를 받는 자)의 자제들을 총애하여 썼으므로, 이들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 끌어당겨 관내후關內侯를 500만 전에 팔았다. 이렇게 자리를 얻은 영令과 장長 중에서 심한 자는 탐욕스럽기가 승냥이나 이리와 같았고, 약한 자도 대략 짐승과 같았으니, 실제로 개가 관을 쓴 것 같다.”라고 했다. 이는 창읍왕昌邑王이 개에게 방산관方山冠을 씌운 걸 보고 공수 (龔遂, 한나라 남평양南平陽 사람으로 자는 소향少鄕이며 발해태수渤海太守를 지냈다.)가 “왕의 좌우가 다 관을 쓴 개로구나.”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5)『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기를, “당나귀는 무거운 것을 멀리까지 잘 이르게 하므로 아래위가 산과 골짜기인 야인野人들 땅에서 용이한 것이다. 어찌 제왕과 군자가 참마 (驂馬, 곁마.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서 바깥의 두 말.)로 수레를 끈단 말인가! 천의약天意若에 말하기를, 나라에 장차 큰 난리가 있어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함께 넘어지니 뭇 집정자執政者가 다 나귀 같다고 했다.”

봄 정월 신미일辛未,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역병이 크게 돌았다.

3월 사도 진탐을 면직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다.

태상 원외袁隗가 사도가 되었다.

5월 경신일庚申, 영락궁永樂宮에 화재가 났다. 

1)『속한지續漢志』에 따르면, “덕양전전德陽前殿 서북쪽 문으로 안에 있는 영락태후궁永樂太后宮 관서에서 화재가 있었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원太微垣에 나타났다.

파군巴郡 판순板楯의 만족들이 군에 이르자 태수太守 조겸曹謙이 항복했다.

계유일癸酉,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했다.

8월 영제가 아정도阿亭道 에 400척 높이로 관람대를 짓게 했다.

겨울 10월 태위 허역許 戫 을 파면하고, 태상 양사를 태위로 삼았다.

상림원上林苑에서 사냥을 하고,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광성원廣成苑에서 다시 사냥을 했다.

12월 영제가 궁으로 돌아와 태학太學으로 행차했다.

광화 6년(183년)

봄 정월 일남군日南郡에서 외국을 돌아徼外國 여러 번 통역을 거쳐 공물을 바쳤다.

2월 장릉현長陵縣을 다시 복구해 풍현豐縣, 패현沛縣에 견주었다.

3월 신미일辛未,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가을 금성군金城郡에서 강물이 넘쳤다. 오원군五原郡에서 산과 언덕이 무너졌다.

처음으로 포유서圃囿署를 설치하고, 환관에게 그 영令이 되게 했다.

겨울 동해군東海郡, 동래군, 낭야군琅邪郡의 우물물이 한 자 넘게 얼었다.

이 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중평中平 원년元年(184년)

봄 2월 거록현鉅鹿縣 사람 장각張角이 스스로 ‘황천黃天’을 칭하고, 그 부하 행수 아래 36방方을 둔 후, 모두 누런 수건黃巾을 쓰고, 같은 날 반란을 일으켰다. (1) 안평安平과 감릉甘陵 백성들이 각각 응하여 그 왕을 잡았다.(2)

1)『속한서續漢書』에 따르면, “36만 명이 넘었다.”

2)안평왕安平王은 유속劉續이고, 감릉왕은 유충劉忠이다.

3월 무신일戊申, 하남윤河南尹이던 하진何進을 대장군으로 삼아 장병將兵을 도정都亭에 주둔하게 하고, 팔관도위八關都尉를 두었다. 3)도정都亭은 낙양洛陽에 있다. 팔관八關이란 함곡函谷, 광성廣城, 이궐伊闕, 대곡大谷, 환원轘轅, 선문旋門, 소평진小平津, 맹진孟津을 말한다.

임자일壬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당인黨人과 그들을 따르다 귀양 갔던 자들을 모두 돌아오게 했으나 (4) 오직 장각만은 사면하지 않았다. 공경에게 조서를 내려 말과 활을 공출하고, 열후列候와 장군將軍의 자손 및 관리와 백성들 중에서 전쟁과 진법에 밝은 자를 천거하게 하고 공거(公車)를 보냈다. 북중랑장北中郞將 노식盧植을 보내 장각을 토벌하게 하고, 좌중랑장左中郞將 황보숭皇甫嵩, 우중랑장右中郞將 주준朱雋으로 하여금 영천군의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하게 했다.

4)이때 중상시 여강呂強이 영제에게 “당고黨錮가 오래 쌓여, 만약에 황건적黃巾賊과 더불어 같이 계책을 꾸미면, 뉘우쳐도 구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영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모두 사면했다.

경자일庚子, 남양군南陽郡의 황건적 장만성張曼成이 태수 저공褚貢을 공격하여 죽였다.

여름 4월 태위 양사를 면직하고, 태복 홍농군弘農郡 사람 등성鄧盛을 태위로 삼았다. 

5)등성은 자가 백능伯能이다.

사공 장제張濟를 파직하고, 대사농大司農 장온張溫을 사공으로 삼았다.

주준이 황건적 파재波才에게 패하였다.

시중 향허向栩, 장균張鈞이 환관에 대해 헛된 말을 하여 하옥해 죽였다. 

6)이때 장균이 상서上書하여 “지금 상시常侍를 참하여 그 목을 남쪽 성 밖에 걸고 천하에 알리면 즉시 병사들이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영제가 그 글을 상시常侍에게 보였으므로 하옥된 것이다.

여남군汝南郡의 황건적이 소릉현邵陵縣에서 7)소릉邵陵은 여남군汝南郡에 속한 현 이름이다. 옛 성이 지금의 예주豫州 언성현 郾城縣 동쪽에 있다. 태수 조겸趙謙을 패배시켰다. 광양군廣陽郡의 황건적이 유주자사幽州刺史 곽훈郭勳과 태수 유위劉衛를 죽였다.

5월 황보숭, 주준이 다시 파재波才 등과 더불어 장사현長社縣에서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

8)장사현長社縣은 현재의 허주현許州縣을 말한다. 옛 성이 장갈현長葛縣 서쪽에 있다.

6월 남양태수南陽太守 진힐秦頡이 장만성張曼成과 격돌하여 그 목을 베었다.

교지交址에 주둔하여 자사 및 합포태수合浦太守를 겸했던 내달來達이 스스로 ‘주천장군柱天將軍’을 칭하자 교지자사交址刺史 가종賈琮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했다.

황보숭, 주준이 여남군의 황건적을 서화현西華縣에서 (9) 크게 쳐부수었다. 조서를 내려 황보숭에게 동군東郡을, 주준에게 남양군南陽郡을 토벌하게 했다. 노식이 황건적을 쳐부수고, 장각을 광종廣宗에서 포위했다. 환관들이 노식을 무고하여 상주하니, 죄를 받았다. (10) 중랑장中郞將 동탁董卓을 보내 장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9)서화현西華縣은 여남군汝南郡에 속한 현 이름으로, 옛 성이 지금의 진주陳州 항성현項城縣 서쪽에 있다.

10)노식이 장각張角을 계속 쳐부순 이후에, 잠시 머물러 장차 치려고 했다. 소황문小黃門 좌풍左豐이 영제에게 “노 중랑장은 고루해서 군을 쉬게 하고 있으니, 그로써 하늘의 죄인 (天誅, 장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영제가 노하여 함거檻車를 보내 노식을 징계하였으나, 죽음만은 면하여 주었다.

낙양洛陽에서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 둘에 몸이 하나였다. 

11)『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길, “상서문上西門 바깥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다른 어깨가 함께 붙었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땅에 버렸다. 그 후 정치가 사문私門에 있었는데, 상하 구별이 없고, 머리가 둘인 형상 꼴이었다.”라고 했다.

가을 7월 파군巴郡에서 요사스러운 무당妖巫 장수張脩가 반역하여 군현을 노략질했다. 

12)「유애기劉艾紀」에 이르기를, “이때 파군巴郡의 무당巫人 장수張脩는 병을 고쳐 주고, 쾌유한 사람들에게 쌀 다섯 말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오두미사五斗米師’라고 불렸다.

하남윤河南尹 서관徐灌을 하옥해 죽였다.

8월 황보숭이 황건적과 창정현倉亭縣에서 싸워 그 장수를 체포했다. 

13)이때 장수는 복이卜已를 말한다. 창정현은 동군東郡에 있다.

을사일乙巳, 황보숭에게 조서를 내려 북으로 가서 장각을 토벌하게 했다.

9월 안평왕安平王 유속劉續의 죄를 물어 죽이고, 그 나라를 없앴다.

겨울 10월 황보숭이 황건적과 광종에서 싸워, 장각의 동생 장량張梁을 체포했다. 장각이 먼저 죽었으므로, 그 시체를 도륙했다. (14) 이로써 황보숭은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이 되었다.

14)관을 꺼내어 머리를 자르고, 말에 매달아 거리를 떠돌아다니게 했다.

11월 황보숭이 또다시 황건적을 하곡양下曲陽에서 크게 쳐부수고, 장각의 동생 장보張寶의 목을 베었다.

황중의종호湟中義從胡 북궁백옥北宮伯玉이 선령의 강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켜, 금성현金城縣 사람 변장邊章, 한수韓遂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게 하고 호강교위 영정伶征, 금성태수金城太守 진의陳懿를 공격하여 죽였다. 

15)영伶은 성이다. 두루 살펴보면 대부大夫 영주구伶州鳩가 있다.

계사일癸巳, 주준이 완성宛城에서 싸워 황건적 별수別帥 손하孫夏의 목을 베었다.

조서를 내려 태관太官이 바치는 음식 중에서 고기 하나를 줄였다. 좋은 말을 성 밖에서 제사 지내는 데 쓰지 말고 모두 군대에 나누어 주도록 했다.

12월 기사일己巳,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어 중평中平으로 했다.

이 해에 하비왕下邳王 유의劉意가 죽었다. 자식이 없어 나라를 없앴다. 군국郡國에 기이한 풀이 났는데, 그 모습이 용사조수龍蛇鳥獸의 형태를 갖추었다. 

16)「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역시 사람의 형상을 했는데, 병기나 쇠뇌를 들고 노는 것 같은데, 하나하나가 그 무기를 갖추었다.”라고 했다. 또 『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기를 “용사조수龍蛇鳥獸의 형상은 털과 깃털, 머리와 눈, 발과 날개가 모두 갖추어졌다. 이 해에 황건적黃巾賊이 일어나, 한나라가 미약해지기 시작했다.”

중평 2년(185년)

봄 정월 역병이 크게 돌았다.

낭야왕琅邪王 유거劉據가 죽었다.

2월 기유일己酉, 남궁南宮에 큰 불이 났다. 불은 보름 내내 타오르다가 마침내 꺼졌다. 

1)『속한지續漢志』에 이르기를, “이때 불이 영태전靈台殿, 낙성전樂成殿, 연궐延闕 및 북궐北闕을 태우고 길을 건너 서쪽을 향해 가덕전嘉德殿, 화환전和驩殿이 탔다.”

계해일癸亥, 광양문廣陽門 (2) 바깥의 집이 스스로 무너졌다. 천하의 밭田, 1묘畝에 10전錢씩 세금을 매겼다.(3) 

2)낙양성洛陽城 서쪽에 면面해 있는 남두문南頭門을 말한다.
3)궁궐을 보수하기 위해서였다.

흑산적黑山賊 장우각張牛角 등 10여 무리가 함께 일어나 그 주변으로 쳐들어가서 노략질했다.

사도 원외袁隗를 면직했다.

3월 연위廷尉 최열崔烈이 사도가 되었다.

북궁백옥北宮伯玉 등이 삼보三輔를 노략질했으므로 좌거기장군 황보숭皇甫嵩을 보내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여름 4월 경술일庚戌, 큰 바람이 불고, 비와 우박이 쏟아졌다.

5월 태위 등성鄧盛을 파직하고, 태복 하내河內 사람 장연張延을 태위로 삼았다.

4)장연은 자가 공위公威이며, 장흠張歆의 아들이다.

가을 7월 삼보三輔에 명충螟蟲이 들끓었다.

좌거기장군 황보숭皇甫嵩을 면직했다.

8월 사공으로 있던 장온張溫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북궁백옥北宮伯玉을 토벌하게 했다.

9월 특진特進 양사가 사공이 되었다.

겨울 10월 경인일庚寅, 사공 양사가 죽었다. 광록대부光祿大夫 허상許相이 사공이 되었다. 

5)허상은 자가 공필公弼이며, 평여平輿 사람으로 허훈의 아들이다.

전前 사도 진탐, 간의대부諫議大夫 유도劉陶가 직언을 하자, 하옥해 죽였다.

11월 장온張溫이 북궁백옥北宮伯玉을 미양美陽에서 쳐부수고, 이어서 탕구장군蕩寇將軍 주신周愼을 보내 추격하여 유중榆中에서 (6) 포위하였다. 또 중랑장中郎將 동탁董卓을 보내 선령의 강족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주신周愼과 동탁董卓이 모두 이기지 못하였다.

6)현 이름이다. 옛 성이 현재 난주蘭州 금성현金城縣 동쪽에 있다.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이 해에 서원西園에 만금당萬金堂을 지었다.

낙양洛陽에서 한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팔이 넷이었다.

중평 3년(186년)

봄 2월 강하현에서 군졸 조자趙慈가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南陽太守 진힐秦頡을 죽였다.

경술일庚戌,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태위 장연張延을 파직했다. 거기장군 장온張溫을 태위로 삼고, 중상시 조충趙忠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옥당玉堂의 전殿을 다시 보수했다. 쇠를 부어 구리 인간銅人 넷, 누런 종黃鐘 (1) 넷, 그리고 천록天祿, 하마蝦蟆를 만들고, 다시 쇠를 부어 출문전出文錢 넷을 만들었다. (2)

5월 임신일壬辰 그믐, 일식이 일어났다.

6월 형주자사荊州刺史 왕민王敏이 조자趙慈를 토벌하여 그 목을 베었다.

거기장군 조충趙忠을 파직했다.

가을 8월 회릉懷陵(3) 위에 참새 만여 마리가 내려앉아 슬피 울면서 서로 싸워서 죽였다.

1,2,3 주석 없음

겨울 10월 무릉군武陵群에서 만족들이 모반하여 군계 (郡界, 군의 경계 지대)를 노략질했는데 군의 병사郡兵들이 토벌하여 쳐부수었다.

전前 태위 장연張延이 환관들을 무고하자, 하옥해 죽였다.

12월 선비족이 유주와 병주를 노략질했다.

중평 4년(187년)

봄 정월 기묘일己卯,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영양군滎陽郡의 적도들이 중모현中牟縣의 영令을 살해했다.

1)중모현中牟縣은 지금의 정주현鄭州縣이다.

기해일己亥, 남궁南宮 내전內殿의 부시罘罳 가 스스로 무너졌다. 

2)『전한서前漢書』 「음의音義」에 “부시罘 罳 는 궐闕 사이의 높은 전각曲閣을 말한다.”라고 했다.

3월 하남윤河南尹 하묘何苗가 영양군滎陽郡의 적도들을 토벌하여 쳐부수었다. 그 공으로 하묘何苗를 거기장군으로 임명했다.

여름 4월 양주자사 涼州刺史 경비耿鄙가 금성현金城縣의 적도 한수韓遂를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했다. 한수는 마침내 한양군漢陽群을 노략질했으며, 한양태수漢陽太守 부섭傅燮은 싸우다 죽었다. 부풍군扶風郡 사람 마등馬騰, 한양군漢陽郡 사람 왕국王國이 함께 모반하여 삼보三輔를 노략질했다.

태위 장온張溫을 면직하고, 사도 최열崔烈을 태위로 삼았다.

5월 사공 허상許相이 사도가 되고, 광록훈 패국 사람 정궁丁宮이 사공이 되었다.

3)정궁은 자가 부웅符雄이다.

6월 낙양洛陽의 백성이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에 몸이 하나였다. 

4)「유애기劉艾紀」에 따르면, “상서문上西門 바깥에 사는 유창劉倉의 처가 낳았다.”

어양군漁陽郡 사람 장순張純이 같은 군의 장거張擧와 더불어 병사를 모아 모반하여 우북평태수右北平太守 유정劉政, 요동태수遼東太守 양종楊終, 호오환교위護烏桓校尉 공기조公綦稠 등을 공격해 죽였다. 장거張擧는 스스로 천자를 칭하고 유주와 기주冀州 두 주를 노략질했다.

가을 9월 정유일丁酉, 천하에 영을 내려 죄수 중 아직 형을 마치지 않은 자는 재물을 받고 사면해 주도록 했다.

겨울 10월 영릉군零陵郡 사람 관곡觀鵠 이 스스로 ‘평천장군平天將軍’을 칭하고, 계양군桂陽郡을 노략질하자 장사태수長沙太守 손견孫堅이 공격하여 목을 베었다.

11월 태위 최열崔烈을 파직하고, 대사농大司農 조숭曹嵩을 태위로 삼았다.

12월 휴도각休屠各의 호족胡族들이 모반했다.

이 해에 관내후關內侯를 팔 때,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주고 후세에 전할 수 있게 하면서 500만 전을 받았다.

중평 5년(188년)

봄 정월 휴도각休屠各의 호족胡族이 서하군西河郡을 노략질하고, 군수郡守 형기邢紀를 죽였다.

정유일丁酉,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혜성이 자궁紫宮을 지나갔다.

황건적黃巾賊 잔당 곽태郭泰 등이 서하군西河郡 백파곡白波谷에서 일어나 태원군太原郡과 하동군을 노략질했다.

3월 휴도각休屠各의 호족胡族들이 병주자사并州刺史 장의張懿를 공격해 죽이고, 마침내 남흉노南匈奴 좌부左部의 호족胡族들과 합쳐서 그 선우單于를 죽였다.

여름 4월 여남군汝南郡 갈피현葛陂縣의 황건적黃巾賊이 공세를 펼쳐 군현을 파괴했다.

1)갈피현葛陂縣은 현재 예주豫州 신채현新蔡縣 서북쪽에 있다.

태위 조숭曹嵩을 파직했다.

5월 영락소부永樂少府 번릉樊陵을 태위로 삼았다.

2)번릉은 자가 덕운德雲이며, 호양胡陽 사람이다. 

6월 병인일丙寅, 큰 바람이 불었다.

태위 번릉樊陵을 파직했다.

익주益州의 황건적黃巾賊 마상馬相이 자사刺史 치검郗儉을 공격해 죽이고, 스스로 천자天子를 칭하고 나서 다시 파군巴郡을 노략질하고 군수郡守 조부趙部를 죽였다.

익주종사益州從事 가룡賈龍이 마상馬相과 맞서 싸워 그 목을 베었다.

군국郡國 일곱에 큰물이 들었다.

가을 7월 사성교위射聲校尉 마일제馬日磾 가 태위가 되었다.

8월 처음으로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를 두었다. 

3)악자樂資가 쓴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에 이르기를, “소황문小黃門 건석蹇碩을 상군교위上軍校尉로,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원소袁紹를 중군교위中軍校尉로, 둔기교위 포홍鮑鴻을 하군교위下軍校尉로, 의랑議郎 조조曹操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조융趙融을 조군좌교위助軍左校尉로, 풍방馮芳을 조군우교위助軍右校尉로, 간의대부諫議大夫 하모夏牟를 좌교위左校尉로, 순우경淳于瓊을 우교위右校尉로 삼았다. 그리고 팔교위 모두를 건석蹇碩에게 지휘하게 하였다.”라고 한다.

사도 허상許相을 파직하고, 사공 정궁丁宮을 사도로 삼았다. 광록훈 남양군南陽郡 출신 유홍劉弘이 사공이 되었다. 위위衛尉 동중董重이 표기장군票騎將軍이 되었다.

4)유홍은 자가 자고子高이며, 안휴현安 觿 縣 사람이다.

9월 남선우南單于가 모반하여 백파적白波賊과 더불어 하동군을 노략질했다.

중랑장中郎將 맹익孟益을 보내 기도위騎都尉 공손찬公孫瓚을 이끌고 가서 어양군漁陽郡의 적도 장순張純 등을 토벌하게 했다.

겨울 10월 청주青州와 서주徐州의 황건적黃巾賊이 다시 일어나 군현을 노략질했다.

갑자일甲子, 영제가 스스로 ‘무상장군無上將軍’이라 칭한 후, 평락관平樂觀에서 요병(耀兵, 무력 시위)을 벌였다.

5)평락관平樂觀은 낙양성洛陽城 서쪽에 있다.

11월 양주 涼州의 적도 왕국王國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자 우장군右將軍 황보숭皇甫嵩이 구했다.

하군교위下軍校尉 포홍鮑鴻을 보내 갈피현葛陂縣의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하게 했다.

파군巴郡 판순板楯에서 만족들이 모반하자, 상군별부사마上軍別部司馬 조근趙瑾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게 했다.

공손찬公孫瓚이 장순張純과 더불어 석문산石門山에서 싸워 크게 쳐부수었다. 6)이때 오환족烏桓族이 도적 장순張純 등과 더불어 모반하고 반란을 일으켜 계중薊中을 공격했다. 공손찬이 그들을 추격하여 싸운 것이다. 석문산石門山은 현재 영주營州 서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 해에 자사刺史의 이름을 바꾸어 새로 목牧을 설치했다.

중평 6년(189년)

봄 2월 좌장군左將軍 황보숭皇甫嵩이 진창陳倉에서 왕국王國을 크게 쳐부쉈다.

3월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가 어양군漁陽郡의 도적 장순張純의 목을 베었다.

하군교위下軍校尉 포홍鮑鴻을 하옥해 죽였다.

여름 4월 병오삭丙午朔, 일식이 일어났다.

태위 마일제馬日 磾 를 면직하고,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태위로 삼았다.

병진일丙辰, 영제가 남궁南宮 가덕전嘉德殿에서 서른네 살 나이로 붕어했다.

무오일戊午, 황자皇子 유변劉辯이 열일곱 살 나이로 황제위에 올랐다. 황후皇后를 올려 황태후로 하고, 태후太后가 조회를 이끌었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쳐 광희光熹로 했다. 황제의 동생 유협劉協이 발해왕이 되었다. 후장군後將軍 원외袁隗가 태부가 되고, 대장군 하진何進과 더불어 녹상서사를 더했다. 상군교위上軍校尉 건석蹇碩을 하옥해 죽였다. 

1)이때 건석蹇碩은 발해왕 유협劉協을 제위에 올리려고 꾀하다가 발각되었다.

5월 신미일辛巳, 표기장군票騎將軍 동중董重을 하옥해 죽였다. 

2)동중董重은 효인황후의 오빠 아들이다.

6월 신해일辛亥, 효인황후 동 씨가 붕어했다.

신유일辛酉, 효령황제孝靈皇帝를 문릉文陵에 장사지냈다. 

3)문릉文陵은 낙양洛陽 서북쪽 20리에 있다. 능은 높이가 20장丈, 주변은 300걸음이다.

큰 비가 내렸다.

가을 7월 감릉왕 유충劉忠이 죽었다.

경인일庚寅, 효인황후를 하간신릉河間愼陵에 귀장 (歸葬, 다른 고장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고향으로 가져와서 장사 지냄.)했다.

발해왕 유협劉協을 옮겨서 진류왕陳留王으로 봉했다. 사도 정궁丁宮을 파직했다.

8월 무진일戊辰, 중상시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이 대장군 하진何進을 살해했다. 이를 본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원술袁術이 동궁東宮과 서궁西宮을 불태우고 환관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경오일庚午,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이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을 위협하여 북궁北宮 덕양전德陽殿으로 도망쳤다. 하진何進의 곡부장部曲將 오광吳匡이 거기장군 하묘何苗와 주작궐朱雀闕 아래에서 싸워 이겨 하묘何苗의 목을 베었다.

신미일辛未, 사예교위 원소袁紹가 억지로 병사들을 수습하여 가짜 사예교위 번릉樊陵, 하남윤河南尹 허상許相을 비롯하여 염인 (閹人, 환관)들을 나이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죽였다.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이 다시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을 협박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4) 상서尙書 노식盧植이 장양張讓, 단규段珪 등을 뒤쫓아 몇 사람을 베었으나, 그 나머지는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 유협劉協은 한밤중에 반딧불 빛에 의지하여 몇 리를 걷다가 민가에서 지붕 없는 수레를 얻어 함께 탔다.

4)소평진小平津은 현재 공현鞏縣 서북쪽에 있다.

신미일辛未, 소제少帝가 궁으로 돌아왔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쳐 소녕昭寧이라 했다.

병주목并州牧 동탁董卓이 집금오 정원丁原을 죽였다. 사공 유홍劉弘을 면직하고, 동탁董卓이 스스로 사공이 되었다.

9월 갑술일, 동탁董卓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홍농왕弘農王으로 봉했다.

6월부터 비가 내려, 이 달에까지 이르렀다.

논하여 말한다.

「진 시황 본기秦始皇本紀에(5) 조고趙高가 이세 황제를 속여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다指鹿爲馬는 말이 있다. (6) 조충趙忠, 장양張讓 역시 영제를 속여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니(7) 그 나라를 망치고 피폐하게 하는 자는 저지르는 바가 같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제靈帝가 영靈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이다. [그 이유가] 넘치는구나!

5)원문은 진본기秦本紀라고 되어 있으나 秦始皇本紀의 잘못이다.

6)『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조고趙高가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측근 신하들이 듣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에 먼저 시험해 보기 위하여 호해胡亥에게 손가락으로 사슴을 가리켜 말하기를 ‘말입니다.’라고 했다. 호해가 ‘승상丞相이 틀렸소.’라고 말하고는 좌우에 있는 측근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자는 말이라 하고 어떤 자는 사슴이라 하였는데, 조고는 그들을 모두 법으로써 음해했다. 이때부터 좌우에 감히 그렇게 말하는 자가 없어졌다.”

7)이때 환관들은 함께 궁궐을 모방하여 나란히 집을 지었다. 영제가 영안후대永安候臺에 올라 감상하려 하자, 환관들은 그 집들을 볼까 두려워했다. 이에 조충趙忠 등으로 하여금 간하여 말하기를, “인군 (人君, 임금)께서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부당합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백성들이 흩어져 떠나게 됩니다.” 이로부터 감히 대臺의 정자榭에 오르고자 하는 자가 없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환관전宦者傳」에 나온다.

찬贊하여 말한다.

영제靈帝는 짐을 지고 또 탔으면서負乘,(8) 그 몸을 환얼 (宦孽, 환관)에게 맡겼다. 망해 가는 징조가 이미 드러났으니, 소아 (小雅, 궁중 음악)는 없어졌다. (9) 미록麋鹿이 서리와 이슬에 젖어 마침내 궁에 살면서 지키게 되었다.(10)

8)『주역易』에 이르기를, “짐을 지고 또 타게 되면 마침내 도적이 온다.”라고 했다. 이 말은 소인이 황제가 되고, 그러나 수레는 군자지기君子之器이기에 쓰는 말이다.

9)『시경詩』 「소아小雅」에 이르기를, “없어지는구나, 네 오랑캐四夷가 교대로 침범해 오니 중국은 쇠약해지네.”라고 했다. 이때 부서짐缺은 곧 없어짐廢을 뜻한다.

10)『사기史記』에 이르기를,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에게 간했으나, 오왕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오자서가 ‘신은 지금 미록 (麋鹿, 사슴)이 고소대姑蘇臺에서 뛰놀고, 벼슬아치들은 형극荊棘을 지고, 이슬이 그 옷을 적시는 것을 봅니다.”라고 말했다. 황제가 정치로써 난리를 불러들이고, 맡기고 의지했으되 그 백성을 얻지 못하여, 헌제獻帝가 [지낼 곳을] 찾아서 옮기고 떠돌면서 낙양洛陽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런 연유로 미록麋鹿이 궁에 살면서 지킨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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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6
12:46:42 (*.104.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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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6
12:47:03
(*.104.28.52)

꼭대기로 가기를 지우면서 다른 것들도 정리하는 도중입니다. 특히 주석이요.

코렐솔라

2013.05.06
13:08:12
(*.104.28.52)

주석 처리 끝 색칠 안된 놈이나 문단 앞 띄어쓰기 고려 안 한 것 발견하면 지적해주세요.

venne

2014.04.19
11:11:12
(*.203.36.95)
동평양東平王 유서劉端가 죽었다.

동평양 -> 동평왕으로 수정요청합니다.

코렐솔라

2021.07.26
12:20:12
(*.46.121.71)
7)소릉邵陵은 여남군汝南郡에 속한 현 이름이다. 옛 성이 지금의 예주豫州 언성현 郾城縣 동쪽에 있다.

부분이 주석 처리가 안 되어 있어 주석 처리합니다.

코렐솔라

2021.07.26
16:53:04
(*.46.121.71)
3번도 주석처리합니다.

코렐솔라

2021.07.27
09:44:06
(*.46.121.71)
제목 괄호안에 영제->영제기로 수정해요. 딱히 고증 같은 것은 없고 편의성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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