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서강(西羌)의 근본은 삼묘(三苗)에서 나왔으며 강성(姜姓)의 한 갈래이다. 그 나라는 남악(南岳) 가까이에 있었다. 순(舜)이 사흉(四凶)을 내칠 때 그들을 삼위(三危)로 내쫓았는데, 하관(河關) 서남쪽 강족(羌族)이 살던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그 땅은 사지(賜支) 땅의 가장자리에서 [사지하]의 상류10)에 이르기까지 천 리나 이어져 있었다. 사지는 『상서(尙書)』 「우공(禹貢)」편에서 말하는 석지(析支)로, 남쪽으로는 촉군(蜀郡)과 [광(廣)] 한군(漢郡) 변경 밖의 만이(蠻夷)와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선선(鄯善)과 거사(車師) 등 여러 나라와 접하였다. [그들은] 거주지가 일정하지 않았고, 물과 풀의 상태를 보고서 옮겨다녔다. 그 땅에는 오곡(五穀)이 적게 생산되었으며, 목축을 주업으로 삼았다. 그들의 습속에는 씨족의 명칭을 따로 정하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이나 어머니의 성으로 종족의 이름을 삼기도 했다. 12대가 지난 후에는 서로 혼인할 수 있었으며,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은] 계모를 처로 삼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과부가 된 형수를 취하였으므로 나라 안에는 홀아비와 과부가 없어 종족은 번성하였다. 국군(國君)과 신하를 정하지 않았고,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도 않았다. [세력이] 강성해지면 종족을 갈라서 [각각] 추호(酋豪)가 되었고, 세력이 약해지면 다른 종족에 부속된 부락이 되었다. 서로 약탈하거나 만행을 저지르고, 힘이 센 자를 우두머리로 삼았다. 사람을 죽이면 목숨으로 보상하였으며 다른 법령은 없었다. 그 나라 병사들은 산과 골짜기에서는 싸움을 잘했으나 평지에서는 그렇지 못하였고, 지구전에는 능하지 못했지만 돌격에는 과감하였다. 그들은 싸우다 죽는 것을 길하고 이롭다고 여기고, 질병으로 죽는 것을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추위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마치 짐승들과 같았다. 결혼한 여자가 아이를 낳더라도 바람과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들의] 성격은 매우 굳세고 강하며 용감하고 사나웠는데, 서쪽 금행(金行)의 기운을 얻었기 때문이다.


왕이 정사를 잘 펼치면 외국에서 찾아와 복종하고, 도덕과 교화를 그르치면 외적이 쳐들어와 난리를 일으킨다. 옛날 하나라 군주인 태강(太康)이 나라를 잃어 버리자 사이(四夷)가 배반했다. 후상(后相)이 즉위함에 미쳐서 이에 견이(畎夷)를 치니, 7년 후 조공을 바치러왔다. 후설(后泄)에 이르러 비로소 [견이에게] 작(爵)을 봉(封)하고 직(職)을 수여하니 이때부터 복종하였다. 후걸(后桀)의 정사가 어지러워지자 견이가 빈(邠)과 기(岐) 사이로 들어와 거주하였다. 성탕(成湯)이 나라를 세우고 그들을 쳐서 물리쳤다.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제이(諸夷)가 모두 배반하였다. 무정(武丁)에 이르러 서융(西戎)·귀방(鬼方)을 쳐서 3년 만에 이겼다. 그래서 『詩經』에는 “저족(氐族)과 강(羌)에 이르기까지 모두 와서 왕으로 섬기네.”라고 하였다.


무을(武乙)이 포학해지자 견융(犬戎)이 변경을 노략질하니 주인(周人)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양산(梁山)을 넘어서 기산(岐山) 아래로 피하였다.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季歷)에 이르러 드디어 서락귀융(西落鬼戎)을 쳤다. 태정(太丁) 때 계력은 다시 연경(燕京)의 융을 쳤지만, 융인이 주(周)의 군대를 크게 물리쳤다. 2년 후 주인(周人)이 여무(余無)의 융을 이기니 이에 태정은 계력을 목사(牧師)로 삼았다. 이 이후 다시 시호(始呼)와 예도(翳徒)의 융을 쳐서 모두 이겼다. 문왕이 서백(西伯)이 되었을 때 서쪽에는 곤이(昆夷)의 우환이, 북쪽에는 험윤(獫狁)의 근심이 있었는데, 드디어 문왕이 융적(戎狄)을 물리치고 그곳을 지키니 복종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이에 [문왕이] 서융을 이끌고 은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나라를 침으로써 주왕(紂王)을 섬겼다.


주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칠 때 강(羌)족과 무(髳)족이 군사를 이끌고 목야(牧野)에서 모였다. 주목왕(周穆王) 때에 이르러 융적(戎狄)이 공물을 바치지 않자 목왕은 서쪽으로 견융을 쳐서 그곳의 다섯 왕을 사로잡고 백록(白鹿) 네 마리와 백랑(白狼) 네 마리를 얻었으며, 주목왕은 드디어 융을 태원(太原)으로 내쫓았다. 이왕(夷王) 때 [주나라가] 쇠약해지자 황복(荒服)이 입조하지 않으니 이왕이 괵공(虢公)에게 육사(六師)를 이끌고 가 태원의 융을 치도록 명하니, 괵공은 유천(兪泉)에서 말 천 필을 노획하였다. 여왕(厲王)이 무도(無道)하자 융적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다가 견구(犬丘)로 들어와 진중(秦仲)의 일가를 살해하였다. 여왕이 융을 치도록 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한 지 4년(전824)에 진중으로 하여금 융을 치도록 하였으나 그는 도리어 융에게 살해당하였다. 선왕이 이에 진중의 아들 장공(莊公)을 불러서 병사 7천을 주니, [장공이] 융을 쳐서 패배시키자 이로부터 융은 점차 물러갔다. 27년 후(전797), 선왕이 군대를 보내 태원의 융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년 후(전792), 선왕이 조융(條戎)과 분융(奔戎)을 쳤으나 왕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2년 후(전790), 진인(晉人)71)이 분수(汾水) 일대 낮고 습한 땅[汾隰]에서 북융(北戎)을 패배시키자 융인은 강후(姜侯)의 읍락을 멸하였다. 다음 해(전789), 선왕은 신융(申戎)을 쳐서 패배시켰다. 10년 후(전779), 유왕(幽王)은 백사(伯士)에게 육제(六濟)의 융을 치도록 명하였으나 백사의 군대는 패하고 그는 전사하였다. 같은 해 융이 견구를 포위하여 진양공(秦襄公)의 형인 백보(伯父)를 사로잡았다. 이때 유왕은 어리석고 사나워 사이(四夷)가 번갈아 가며 침략하였다. [유왕은] 신후(申后)를 폐하고 포사(襃姒)를 왕후로 삼았다. 신후(申侯)가 노하여 융과 함께 주왕실을 노략질하여 여산(酈山)에서 유왕을 살해하니, 주나라는 이리하여 동쪽 낙양으로 천도하고, 진양공은 융을 공격하여 주나라를 구하였다. 2년 후, 형후(邢侯)가 북융(北戎)을 크게 격파하였다.


평왕(平王) 말에 이르러 주나라가 쇠퇴하자 융(戎)이 제하(諸夏)를 침노하니, 농산(隴山) 동쪽에서 이수(伊水) · 낙수(洛水)에 이르는 곳에 이따금 융이 있었다. 이로부터 위수(渭水)의 상류 적현(狄縣) · 환현(䝠縣) · 규현(邽縣) · 기현(冀縣) 등지에 융이 있었으며, 경수(涇水)의 북쪽에는 의거(義渠)라는 융이, 낙천(洛川)에는 대려(大荔)라는 융이, 위수 남쪽에는 여융(驪戎)이,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는 양거(楊拒)와 천고(泉皋) 등의 융이, 영수(潁水)의 상류 이서(以西)에는 만씨(蠻氏)라는 융이 있었다. 춘추시기에는 간간이 중국에서 제하(諸夏)와 더불어 맹회(盟會)을 가졌다. 노장공(魯莊公)이 진(秦)을 쳐서 규(邽)와 기(冀) 지역의 융을 취하였다. 10년 후, 진(晉)나라가 여융(驪戎)을 멸하였다. 이때 이수와 낙수에 있던 융이 강성하여 동으로 조(曹)나라와 노(魯)나라를 침범하였다. 19년 후, 마침내 이들은 [주나라의] 왕성을 침입하였다. 그래서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융을 쳐서 주나라를 구하였다. 2년 후, 이들이 다시 경사(京師)를 노략질하므로 제환공(齊桓公)이 제후들을 불러모아 주나라를 지켰다. 9년 후, 육혼융(陸渾戎)이 과주(瓜州)에서 이천(伊川)으로 옮겨오고, 윤성융(允姓戎)이 위수와 예수(汭水) 일대로 옮겨와 동쪽으로 환원(轘轅)까지 미쳤다. 황하 이남에서 대산(大山) 이북에 걸쳐 있는 자들을 음융(陰戎)이라 불렀으며, 음융의 종족은 더욱 증가하였다. 진문공(晉文公)이 패업을 회복하고자 하여 융적(戎狄)에게 뇌물을 주고 길을 열어 [주나라] 왕실을 바로잡았다. 진목공(秦穆公)은 융인 유여(由余)를 얻어 드디어 서융(西戎)을 강제로 점령하여 천 리나 되는 땅을 개척하였다. 진도공(晉悼公) 때 위강(魏絳)을 시켜 여러 융과 화합하게 하여 다시 패업을 회복하였다. 이때 초(楚)나라와 진(晉)나라가 강성하여 여러 융을 위력으로 복종시키니, 육혼(陸渾) · 이(伊) · 낙(洛) · 음융은 진(晉)나라를 섬기고, 만씨(蠻氏)는 초나라를 따랐다. 뒷날 육혼융이 진(晉)나라를 배반하자 진(晉)나라는 순오(荀吳)를 시켜 그들을 멸하였다. 44년 후, 초나라는 만씨를 사로잡고 그 사람들을 모두 가두어 버렸다. 이때 의거(義渠)와 대려(大荔)가 가장 강하였는데, 수십 개의 성을 쌓아 모두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주정왕(周貞王) 8년(전461)에 이르러, 진여공(秦厲公)이 대려(大荔)를 멸하고 그 땅을 취하였다. 조(趙)나라도 또한 대융(代戎)을 멸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북융(北戎)이다.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는 다시 함께 점차 이(伊) · 낙(洛) · 음융을 물리치고, 그들을 멸하였다. 여기서 벗어난 자들은 모두 도주하여 서쪽으로 견산(汧山)과 농산(隴山)을 넘어갔다. 이때부터 중국에는 융의 노략질이 없었으며, 오직 의거종(義渠種)만이 남아 있었다. 주정왕(周貞王) 25년(전444), 진(秦)나라가 의거를 쳐서 왕을 사로잡았다. 14년 후(전429), 의거는 진(秦)을 침범하여 위음(渭陰)에 이르렀다. 대략 백여 년이 지난 후 의거는 낙수(洛水)에서 진(秦)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4년 후(전334), 의거국에서 난리가 일어나자 진혜왕(秦惠王)이 서장(庶長) 조(操)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가 그들을 평정하도록 하니, 의거가 드디어 진(秦)나라에 신하를 칭하였다. 8년 후(전330), 진(秦)나라는 의거를 쳐서 욱질(郁郅)을 취하였다. 2년 후, 의거는 이백(李伯)에서 진(秦)나라 군사를 물리쳤다. 다음 해 진(秦)나라는 의거를 쳐서 도경(徒涇)의 25성을 취하였다. 진소왕(秦昭王)이 즉위하자 의거왕은 진나라에 입조하고, 마침내 진소왕의 모(母) 선태후(宣太后)와 통정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주난왕(周赧王) 43년(전272), 선태후가 감천궁(甘泉宮)으로 의거왕을 유인하여 살해하니 [진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의거를 멸하고 비로소 농서군(隴西郡)·북지군(北地郡)·상군(上郡)을 설치하였다.


융은 본래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하말(夏末)과 상(商) · 주(周) 때 간혹 후백(侯伯)의 정벌에 따라가 공적을 세우니 천자는 그들에게 작을 주어 번복(藩服)으로 삼았다. 춘추 때 육혼 · 만씨융은 자작(子爵)을 칭하였다. 전국 때 대려와 의거는 왕을 칭하였다. 이 나라들이 쇠퇴하여 망하자 나머지 종족은 모두 옛날로 돌아가 추호(酋豪)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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