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전량(滇良)은 소당(燒當)의 현손이다. 왕망 말에 사이(四夷)가 [신나라를] 침입하고, 왕망이 패하자 여러 강족이 돌아와 서해(西海)를 근거로 도적이 되었다. 경시제(更始帝)와 적미(赤眉)의 난 때 강족이 드디어 꺼리는 것이 없이 멋대로 굴면서 금성군 · 농서군을 노략질 하였다. 외효(隗囂)는 비록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을 토벌할 수 없어서 이에 [그들에게] 가서 위로해서 받아들이고 그 무리를 징발해서 한나라와 서로 대치하게 하였다. 광무제 건무(建武) 9년(33), 외효가 죽자 사도연(司徒掾) 반표(班彪)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 양주부(涼州部)에는 모두 항복한 강족입니다. 강호(羌胡)는 머리를 풀고 오른쪽 섶을 왼쪽 섶 위에 여미는 옷을 입고서 한나라 사람들과 섞여 살고 있으니 풍속이 원래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자주 소리(小吏)나 약삭빠른 사람들에게 침탈당하여 가난해지고 화가 나지만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무릇 만이의 노략질과 소란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옛 제도에는 익주부(益州部)에 만이기도위(蠻夷騎都尉)를 설치하였고, 유주부(幽州部)에 영오환교위(領烏桓校尉)를 설치하였으며, 양주부(涼州部)에 호강교위(護羌校尉)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지절(持節)을 가지고 그들을 관리 보호하며, 맺힌 원한을 다스려 주며, 세시(歲時)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질병과 고통을 물어 주었습니다. 또한 자주 사역(使驛)을 보내 그곳의 동정을 살피고, 변경 밖의 강이(羌夷)로 하여금 관리의 눈과 귀 노릇을 하게 하니, 주군(州郡)은 이로 인해 미리 위급한 일을 방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마땅히 옛날처럼 회복한다면 위엄과 방비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광무제는 반표의 말을 따라서 우한(牛邯)을 호강교위로 삼고, 옛날처럼 지절을 지니도록 하였다. 우한이 죽자 호강교위를 폐지하였다. 광무제 건무 10년(34), 선령종의 추호가 여러 종족과 서로 결탁하여 다시 금성군과 농서군을 침략하였다. [한나라는] 중랑장(中郞將) 내흡(來歙) 등을 보내어 그들을 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일은 「내흡전」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 광무제 건무 11년(35) 여름, 선령종이 다시 임조현을 노략질하자 농서태수 마원(馬援)이 그들을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훗날 모두 와서 복종하니 한나라는 이들을 천수군(天水郡) · 농서군(隴西郡) · 부풍군(扶風郡) 등 3郡으로 나누어 옮겨 배치하였다. 다음 해, 무도군(武都郡)에 살던 삼랑강(參狼羌)이 반란을 일으키니 마원이 또 그들을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이 일은 「마원전」에 기록되어 있다.


소당(燒當)부터 전량(滇良)까지 대대로 황하 북쪽의 대윤곡(大允谷)에서 거주했는데, 종족은 적고 사람들은 가난하였다. 그런데 선령종(先零種) · 비남종(卑湳種)은 모두 강성하고 부유해서 자주 그들을 침범하였다. 전량 부자는 계속 모멸을 당하자 분노하였으며, [그들은] 평소 종족 가운데 은덕과 신의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에 부락과 여러 종족을 모아 대유곡(大楡谷)을 따라 들어가 선령종 · 비남종을 엄습하여 크게 무찔러 3,000인을 죽이고, 재물과 가축을 빼앗고, 대유곡에 살고 있던 그들의 땅을 빼앗아 거주하였다. [전량은] 이로부터 비로소 강성해졌다.


전량의 아들 전오(滇吾)가 즉위하였다. 광무제 중원(中元) 원년(56), 무도군(武都郡)에 살던 삼랑강(參狼羌)이 반란을 일으켜 관리와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태수가 그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농서 태수(隴西太守) 유우(劉盱)가 종사(從事) 신도(辛都), 감군연(監軍掾) 이포(李苞)를 보내니, 이들은 오천을 이끌고 무도군으로 가서 강족과 싸워 그 추호(酋豪)를 참하고 천여 인을 사로잡거나 참하였다. 이때 무도군의 군대 역시 강족을 격파하여 천여 급을 베니, 나머지 강족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당시 전오의 부락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항상 여러 강족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매번 변경을 노략질하려는 자가 있으면 전오가 방법과 재략(才略)을 가르쳐 주니 그들의 수령이 되었다. 광무제 중원 2년(57) 가을, 소당강(燒當羌) 전오가 동생 전안(滇岸)과 함께 보병과 기병 오천을 이끌고 농서군(隴西郡)의 변경으로 쳐들어오니, 유우가 부한현(枹罕縣)으로 군대를 보내 그들을 치도록 했으나 이기지 못하였으며, 또 연계현(允街縣)에서 싸웠으나 강족에 패하고 오백여 명이 죽었다. 그래서 변경을 지키던 여러 강족이 모두 다시 서로 이끌어 도적이 되었다. 알자(謁者) 장홍(張鴻)을 보내 여러 군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치도록 했는데, 연아현(允吾縣)·당곡성(唐谷城)에서 싸웠으나 패하고, 장홍과 농서장사(隴西長史) 전삽(田颯)은 전사하였다. 또, 천수군(天水郡)의 군대가 백석현(白石縣)에서 뇌자종(牢姐種)에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때 소하종(燒何種)의 추호에게 비동겸(比銅鉗)이라 불리는 부인이 있었는데, 나이가 백살이 넘었고, 지혜와 산술이 뛰어나 종족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다. [종족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취하는 계책을 따랐다. 노수호(盧水胡)가 쳐들어 왔을 때, 비동겸은 무리를 이끌고 와 군현(郡縣)에 의지하였다. 종족 가운데 법을 어긴 자들이 제법 있었는데, 임강(臨羌)의 우두머리가 [그런 이유로] 비동겸을 체포하여 가두고 그녀의 종족 6~700명을 주살하였다. 현종(顯宗)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 제환공(齊桓公)이 융을 치면서 어질고 은혜롭지 못했다. 그래서 『春秋』에서 폄하하여 말하기를 ‘제인(齊人)’이라 하였다. 지금 국가가 덕이 없어 은혜가 멀리까지 미치지 못하니 약한 자가 무슨 죄가 있길래 목숨까지 바쳐야 한단 말인가! 무릇 장평(長平)의 포악함은 제왕된 자의 일이 아니라 태수와 장리(長吏)가 함부로 잔혹하게 살육한 것이므로 이를 꾸짖었던 것이다. 만일 비동겸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녀가 있는 곳에 약을 보내서 돌보도록 하고, 그녀의 종족 사람들을 불러오도록 하라. 옛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후하게 [물품을] 주어서 보내도록 하라. 그 작은 종족(種族)이 만약 무기를 버리고 스스로 와서 전력을 다해 공을 세우고자 한다면 그 죄를 면해 주도록 하라. 만약 역모를 꾀하다 관리에게 체포된 자들이 있다면 죄상이 아직 판결되지 않았어도 유공자들에게 전부 하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명제(明帝)] 영평(永平) 원년(58)에 중랑장(中郞將) 두고(竇固)·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 등을 다시 보내 서감(西邯)에서 전오(滇吾)를 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 일은 이미 마무 등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전오는 멀리 도망가고 나머지 무리는 전부 흩어지거나 항복하니 7,000여 명을 삼보(三輔)로 옮겼다. 알자(謁者) 두림(竇林)을 호강교위(護羌校尉)에 임명하고 적도현(狄道縣)에 거주하게 했다. 두림이 강족들에게 신임을 얻자 전안이 드디어 그를 방문해서 항복하였다. 두림이 하리(下吏)에게 속아서 전안을 대추호라고 거짓 상주하고, 황제의 뜻을 받들어 전안을 귀의후(歸義侯)에 봉하고, 한대도위(漢大都尉)라는 명호를 수여하였다. 이듬해(59), 전오가 다시 항복해 오자, 두림은 다시 그가 첫째 추호라고 상주하고 그와 함께 궁궐로 가 명제를 알현하였다. 명제가 한 종족에 두 명의 추호(酋豪)가 있음을 이상하게 여겨 사실이 아님을 의심하여 두림에게 물었다. 두림은 말이 군색해지자 거짓으로 대답하기를 “전안이 곧 전오이니 농서의 말이 정확하지 않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명제가 끝까지 추궁하여 그 사실을 알고서는 노하여 두림을 면관(免官)시켰다. 마침 또 양주자사(涼州刺史)가 두림의 장죄(贓罪)를 상주하므로 그를 옥에 가두니 죽고말았다. 알자(謁者) 곽양(郭襄)이 두림을 대신해서 호강교위(護羌校尉)의 일을 맡았는데, 농서군에 도착하자 양주지역 강족의 강성함을 듣고서 다시 궁궐로 돌아오니 이 죄와 관련해서 형량을 따져 교위의 관직을 거두었다. 전오의 아들 동오(東吾)가 즉위하자 아버지(전오)가 한나라에 투항했으므로 변경의 요새 안으로 들어와 거주하며 스스로를 지키는 데 충실하고 행동을 삼갔다. 그러나 여러 동생들과 미오(迷吾) 등이 자주 노략질을 일삼았다.


숙종(肅宗) 건초(建初) 원년(76), 안이현(安夷縣) 현리(縣吏)가 강족 가운데 비남종(卑湳種)의 부녀를 약탈하여 처로 삼았다가 그녀의 남편에게 살해되니, 안이현의 장리(長吏) 종연(宗延)이 그를 쫓아 요새 밖으로 나오자234) 비남종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종연을 살해하고 늑자(勒姐) 및 오량(吾良) 두 종족과 결탁하여 도적이 되었다. 농서태수(隴西太守) 손순(孫純)이 종사(從事) 이목(李睦)을 보내 금성군(金城郡)의 군대와 화라곡(和羅谷)에서 만나서 비남 등과 싸우도록 하여 수백 명의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았다. 전도료장군(前度遼將軍) 오당(吳棠)에게 다시 호강교위(護羌校尉)의 일을 맡도록 하고, 안이현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숙종] 건초 2년(77) 여름, 미오가 드디어 여러 무리와 더불어 병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자 변경 밖으로 나갔다. 금성 태수 학숭(郝崇)이 그들을 추격하여 여곡(荔谷)에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학숭은 경기(輕騎)로 겨우 탈출하였으나 2,000여 명이 죽었다. 그래서 여러 종족과 속국 노수호(盧水胡)가 모두 서로 응하니 오당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고 이 일로 불려와 면직되었다. 무위태수(武威太守) 부육(傅育: ?~87)이 오당을 대신해서 교위가 되어 임강(臨羌)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 미오가 또 봉양종(封養種) 추호 포교(布橋) 등 5만여 명과 함께 농서군 · 한양군(漢陽郡)을 노략질하니, 행거기장군(行車騎將軍) 마방(馬防)·장수(長水) 교위 경공(耿恭)을 부장으로 삼아 그들을 토벌하여 격파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임조(臨洮) · 색서(索西) · 미오(迷吾)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마방이 이에 색서성(索西城)을 쌓고, 그들을 농서군으로 옮겨 남부도위(南部都尉)가 [이들을] 지키도록 하고, 여러 정(亭)과 후(候)를 모두 회복시켰다. 숙종 원화(元和) 3년(86), 미오가 다시 아우 호오(號吾) 및 여러 종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가을, 호오가 먼저 날쌘 병사를 이끌고 농서의 경계를 침략하니, 농서군(隴西郡)의 독봉연(督烽掾) 이장(李章)이 이들을 추격하여 호오를 생포하였다. 이장이 막 군에 다다랐을 때 호오는 “나만 죽이고 강족에게 피해를 주지 말기 바랍니다. 만일 살아서 돌아간다면 반드시 군대를 파하고 다시는 변경을 범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농서 태수 장우(張紆)가 임시방책으로 놓아 주니, 강족이 즉시 해산하여 각각 옛 땅으로 돌아갔다. 미오는 물러가 하북(河北)의 귀의성(歸義城)에 거주하였다. 부육은 신의를 저버리면서 그들을(강족) 치기를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여러 강호(羌胡)에서 싸울 사람을 모집했다. 강호는 오히려 기꺼워하지 않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변경 밖으로 나가서 다시 미오에게 의지하였다.


[장제(章帝)] 장화(章和) 원년(87), 부육은 농서군 · 장액군(張掖郡) · 주천군(酒泉郡)에서 각각 5,000명을 징발해서 여러 태수가 이들을 거느리고, 부육 자신은 한양군(漢陽郡)과 금성군의 5,000명을 이끌어 모두 2만의 병력으로 여러 태수와 기일을 정해 그들을 치고자하여, 농서군의 병력은 황하의 남쪽에 웅거하고, 장액군과 주천군의 병력은 황하의 서쪽을 가로막도록 청하였다. 모두 모이기도 전에 부육이 단독으로 진격하였다. 미오가 그것을 듣고서 부락을 옮겨 떠나 버렸다. 부육은 날쌔고 용감한 기병 3,000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밤에 건위현(建威縣) 남쪽 삼두곡(三兜谷)에 이르러서는 그들과 거리가 몇 리로 좁혀지자 아침을 기다려 그들을 치고자 하여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미오가 복병 3백 명으로 밤에 갑자기 부육의 군영을 기습하였다. [부육의] 군영은 놀라고 무너져 [병사들은] 흩어져 달아나고, 부육은 말에서 내려 맨손으로 싸워 십여 명을 죽였으나 죽고 말았으며, 880명이 죽었다. 여러 군의 병력이 도착해서야 강족은 드디어 퇴각하였다. 부육은 북지군(北地郡) 사람으로, 현종(顯宗: 明帝) 초에 임강(臨羌)의 우두머리가 되어 포로장군 마무 등과 함께 강족 전오(滇吾)를 쳤는데, 부육의 전공은 여러 군대에서 으뜸이었다. [그가] 무위군(武威郡)에 있었을 때 그의 명성은 흉노까지 전해졌다. 나라의 녹을 먹은 지 수십 년 동안 받은 녹은 모두 다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니 그의 처자는 직접 살림을 해야만 했다. 숙종(肅宗)은 조를 내려 그 미덕을 널리 기렸으며, 그의 아들 부의(傅毅)를 명진후(明進侯)로 봉하였으니, 식읍은 칠백 호였다. 농서 태수 장우를 그를 대신해서 교위로 삼으니, 만여 명을 이끌고 임강현(臨羌縣)에 주둔하였다.


미오는 이미 부육을 살해하고, 변경의 이익을 [탐하는 데] 버릇이 들어 있었다. 장화(章和) 원년(87), 다시 여러 종족과 함께 보병과 기병 7,000명으로 금성군(金城郡)의 변경을 침입하였다. 장우(張紆)가 종사(從事) 사마방(司馬防)을 보내 기병 1,000여 기와 금성군의 군대를 이끌고 목승곡(木乘谷)에서 싸우니 미오의 군대는 패해서 달아나고, [미오는] 역사(譯使)에게 부탁하여 항복하고자 하니 장우가 이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미오가] 종족 사람들을 이끌고 임강현(臨羌縣)에 도착하니, 장우는 병사를 갖추어 두고 크게 연회를 열었다. [장우는] 술에 독을 타 놓아 강족들이 마시고 취하자, 자신을 가격하는 것을 신호로 숨어 있던 병사들이 일어나 강족 추호 800여 명을 주살하였다. 미오 등 5명의 머리를 베어 부육의 무덤에서 제사를 지냈다. [장우는] 다시 병사를 풀어 산골짜기에 있던 강족을 쳐서 4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2,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미오의 아들 미당 및 그의 종족들은 요새를 향해서 소리쳐 울었다. 이들은 소하강(燒何羌) · 당전강(當煎羌) · 당전강(當闐羌) 등과 서로 결탁하여 자녀와 금은을 여러 종족에게 폐백으로 주어 원한을 풀고 인질을 교환하였으며, 5,000여 명을 이끌고 농서군(隴西郡)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농서 태수 구우(寇盱)와 백석현(白石縣)에서 싸우니, 미당은 불리하자 무리를 이끌고 대(大) · 소유곡(小楡谷)으로 돌아가 북쪽에 있던 속국(屬國)의 여러 호(胡)를 부르고, 부속한 부락을 한 곳으로 결집시키니 종족의 무리가 대단히 성하여 장우가 이를 토벌할 수 없었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원년(89), 장우가 죄에 연루되어 소환되고, 장액(張掖) 태수 등훈(鄧訓)이 그를 대신해서 교위가 되어 차츰 상과 뇌물로 그들 사이를 이간질하니 이로 인해 여러 종족이 점차 작아지거나 해체되었다.


동오(東吾)의 아들 동호(東號)가 즉위하였다. 이때 호오(號吾)가 종족 사람을 이끌고와 항복하였다. 교위 등훈(鄧訓)이 군대를 보내 미당(迷唐)을 치니, 미당은 대 · 소유곡을 떠나 파암곡(頗巖谷)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


화제(和帝) 영원(永元) 4년(92), 등훈이 병으로 죽으니 촉군(蜀郡) 태수 섭상(聶尙)이 대신해서 교위가 되었다. 섭상은 전임자들이 누차 [미당을] 쳤으나 이기지 못함을 보고서 문교의 힘으로 그들을 복속시키고자 하여 역사(譯使)를 보내 미당을 불러서 다시 대 · 소유곡으로 돌아가 거주하도록 하였다. 미당이 이미 돌아와 조모 비결(卑缺)을 보내 섭상을 알현하도록 하니, 섭상은 친히 배웅하고자 요새 아래에 이르러서 [그녀를] 위해서 조도(祖道)를 베풀고, 역인(譯人) 전사(田汜) 등 5인을 시켜 [비결]을 호송해서 부락(部落)에 이르도록 했다. 미당은 이를 계기로 배반하고, 여러 종족들과 더불어 전사 등을 산 채로 찢어죽이고, 그들의 피로써 맹세하며, 다시 금성군(金城郡)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화제 영원 5년(93), 섭상은 죄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거연도위(居延都尉) 관우(貫友)가 대신해서 교위가 되었다. 관우는 미당에게 덕과 감화를 사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반란을 일으키니, 역사를 보내 여러 종족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재화로 그들을 유인하니 [여러 종족이] 흩어졌다. 관우가 이에 군대를 보내 변경 밖으로 나가 대유곡과 소유곡에서 미당을 공격하니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이가 800여 명이 되었으며, 보리 수만 곡(斛)을 거두워들였다. 드디어 봉류대하(逢留大河)를 끼고 성과 오(塢)를 쌓고, 큰 배를 만들고, 다리를 만들어 군대를 건너가게 해서 미당을 치고자 하였다. 미당은 이에 부락을 이끌고 멀리 사지하곡(賜支河曲)에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화제 영원 8년(96), 관우가 병으로 죽자 한양(漢陽) 태수 사충(史充)이 대신해서 교위가 되었다. 사충이 이르자 황중(湟中)의 강호(羌胡)를 징발하여 변경을 나가 미당을 치니, 강족은 사충의 군대를 맞이하여 싸워 패퇴시키고 수백 명을 죽였다. 이듬 해, 사충은 죄에 연루되어 소환되고 대군(代郡) 태수 오지(吳祉)가 대신해서 교위가 되었다. 그 해 가을, 미당이 8,000명을 이끌고 농서군을 노략질하여 수백 명을 살해하고, 승기를 타 깊숙이 쳐들어가 변경 안의 여러 강족들을 위협하여 함께 도적이 되게 하니, 여러 강족들이 다시 모두 함께 서로 호응하여 보병과 기병이 3만이 되어 농서군의 군대를 격파하고 대하(大夏)의 우두머리를 살해하였다.


행정서장군(行征西將軍) 유상(劉尙)을 주장으로, 월기교위(越騎校尉) 조대(趙代)를 부장으로 삼아 북군(北軍)의 오영(五營) · 여양(黎陽) · 옹영(雍營) · 삼보(三輔)의 적사(積射) 및 변경의 강호(羌胡) 군대 3만을 이끌고 가 그들을 토벌하였다. 유상은 적도현(狄道縣)에 주둔하고, 조대는 부한현(枹罕縣)에 주둔하였다. 유상이 사마(司馬) 구우(寇盱)를 보내 여러 군의 병사를 감독하도록 하고, 사면에서 동시에 회합하였다. 미당이 두려워하여 노약자를 버리고 달아나 임조군(臨洮郡)의 남쪽으로 들어갔다. 유상 등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높은 산에 이르니 미당은 궁지에 몰려 날래고 강한 정예병을 내세워 크게 싸웠다. 구우가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1,000여 명이 되었으며, 소와 말과 양 등 만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미당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고, 한나라 병사 역시 죽거나 다친 자가 많아서 다시 추격할 수 없었으므로 요새로 돌아왔다. 다음 해, 유상과 조대는 두려워하고 겁먹었다는 이유로 소환되어 하옥 면직되었다. 알자(謁者) 왕신(王信)은 유상의 병영을 이끌고 부한현에 주둔하고, 알자 경담(耿譚)은 조대의 병영을 이끌고 백석현(白石縣)에 주둔하였다. 경담이 상을 내걸어 다스리니 여러 종족이 자못 와서 내응하였다. 미당이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왕신과 경담은 항복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하고, 미당을 궁궐로 보냈다. 그 나머지 종족들은 채 2,000명이 되지 않았으며 굶주리고 군색하여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금성군(金城郡)으로 가서 거주하도록 했다. 화제는 미당에게 그 종족을 데리고 대유곡과 소유곡으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미당은 한나라가 다리를 놓는다면 군대가 수시로 올 것이므로 옛땅에 다시 거주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종족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핑계로 사양하고 멀리 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에 오지 등은 미당에게 많은 금백을 주어 곡식과 가축을 사서 변경 밖으로 나갈 것을 재촉하니 종족 사람들이 다시 의심하고 경계하였다.


화제 영원 12년(100) [미당이] 다시 배반하고, 황중(湟中)의 여러 종족을 위협하여, [이들을] 이끌고 노략질을 하고서는 달아났다. 왕신 · 경담 · 오지는 모두 죄에 연루되어 소환되고, 주천 태수(酒泉太守) 주유(周鮪)가 대신해서 교위가 되었다. 이듬 해, 미당은 다시 사지하곡(賜支河曲)으로 돌아갔다.


[한나라] 초기 누자종(累姐種)이 한나라에 의지하니 미당이 그것을 원망하여 마침내 누자종의 추호를 때려죽였으므로 여러 종족과 원수가 되어 동류의 도움은 더욱 소원해졌다. 그해 가을, 미당이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의] 변경으로 향하자 주유(周鮪)가 금성 태수 후패(侯覇)와 함께 여러 군의 병사와 속국(屬國) 황중(湟中) 월지(月氏)의 여러 호(胡)들과 농서군의 뇌자강(牢姐羌) 병사, 도합 3만 명으로 변경을 나가 연천(允川)에 이르러 미당과 싸웠다. 주유는 병영으로 돌아와 지키고, 후패만이 [미당의] 진중을 함락하여 400여 명을 베었다. 강족 다수는 다치거나 죽어 종족 사람들은 와해되고, 항복한 자가 6,000여 명이었으며, 한양군(漢陽郡) · 안정군(安定郡) · 농서군(隴西郡)으로 나누어 옮겨졌다. 미당이 드디어 약해지고, 그 종족 무리는 1,000명이 채 되지 않아 멀리 사지하의 상류를 넘어서 발강(發羌)에 의지하여 거주하였다. 다음 해, 주유는 두려워하고 겁먹었다는 이유로 소환되고 후패가 대신해서 교위가 되었다. 안정군에서는 항복한 강족인 소하종(燒何種)이 여러 강족 수백 인을 위협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안정군의 군대가 그들을 쳐서 멸하고 약한 자들을 모두 관으로 거두워들여 노비로 삼았다.


이때 서해군(西海郡)과 대·소유곡 좌우에 다시는 강족 도적이 없었다. 유미(隃麋)의 상(相) 조봉(曹鳳)이 상언하여 말하기를 


“서융(西戎)이 해로운 것은, 앞 시대에도 근심이 된 바이지만 신은 옛 일을 상고할 수 없으므로 가까운 시일의 일로 그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광무제 건무(建武) 이래 법을 어기는 자는 항상 소당종(燒當種)을 따라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들이 대 · 소유곡에 거주하고, 토지는 비옥하고 변경과 가까이 있으며, 여러 종족은 쉽게 불법을 저지르지만 공벌(攻伐)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남으로는 종존종(鍾存種)을 얻어서 그 무리를 넓히고, 북으로는 험준한 대하(大河)로 인해서 견고하며, 또한 서해가 있어 고기와 소금의 이익이 있으며, 푸른 산과 가까이에 물이 있어서 전지(田地)와 목축을 늘려갔으므로 능히 강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항상 여러 종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용맹을 믿고서 강호(羌胡)를 불러서 꾀었습니다. 지금은 쇠락하고 곤궁하여, 같은 무리의 원조도 끊어지고, 친속도 떠나서 배반하고, 나머지 무리마저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병력이 수백 명에 지나지 않으며, 도망가 숨어 지내기도 하고, 멀리 발강에게 의지하기도 합니다. 신의 우매한 생각으로는 지금 이 시기에 마땅히 다시 서해에 군현을 설치하여 대유곡과 소유곡의 구획을 정해서 봉쇄하고, 널리 둔전(屯田)279)을 설치하여 강호(羌胡)가 교류하는 길을 멀리 떨어져 막히도록 하여, 반란자들의 분에 맞지 않는 욕구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곡식을 잘 길러 변경을 부유롭게 하여 운송의 요역을 줄이면 국가는 서방의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봉을 금성서부도위(金城西部都尉)280)에 제수하고, 사민(徙民)과 병사를 이끌고 용기현(龍耆縣)에 주둔하게 했다. 그 뒤 금성장사(金城長史) 상관홍(上官鴻)이 귀의현(歸義縣)·건위현(建威縣)에 둔전 27구역을 개척해서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며, 후패가 다시 동서의 감수(邯水) 위에 둔전 5구역을 설치하고, 유(留)와 봉(逢) 2구역을 늘려 설치할 것을 건의하니 화제가 모두 받아들였다. 황하를 끼고 펼쳐져 있는 둔전이 모두 34 구역이었으니 그 공은 두드러지고 확고했다. 안제(安帝) 영초(永初: 107~113) 연간에 여러 강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둔전을] 파하였다. 미당은 자신의 무리를 잃어버리고 병으로 죽었다.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항복해 왔는데, 호(戶)가 수십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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