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처사군님의 블로그



촉서蜀書 1 
 

고사손高似孫이 이르길 : 유비劉備 부자가 촉에서 40여 년 있었으나, 시종 한漢이라고 했는데, 어찌 촉을 명칭으로 삼을 수 있는가? 그가 촉이라고 함은, 일시적으로 유행하던 습속의 말일 뿐이다. 진수陳壽가 올바른 칭호를 버리고 유행하는 습속을 따라, 사서의 공법公法, 나라의 정통을, 문득 모두 놓쳐버렸다. 
 

황진黃震이 이르길 : 촉은, 지명으로, 국명이 아니다. 소열昭烈제는 한을 명칭으로 삼고, 일찍이 촉을 명칭으로 삼지 않았으며, 손씨孫氏의 맹서盟書에서 또한 한, 오吳라고 하여, 천하에서 일찍이 촉을 명칭으로 하지 않았다. 또한 국가에 칭호가 있음은, 사람에게 성씨가 있는 것과 같아, 사람의 성씨를 고쳐 책에 쓴 적이 없듯이, 또한 국호를 고쳐 사서에 쓴 적이 없다. 구석의 땅을 점유했다고 여긴 것인가? 유연劉淵이 스스로 한이라고 이르나,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한이라고 일렀다. 중흥할 수 없었다고 여긴 것인가? 원제元帝가 남으로 건너니, 세속에서 또한 진晉이라고 일렀지, 그가 오에 머문 것을 듣고 오라고 이른 적은 없다. (황씨일초 黃氏日鈔 권 48에 보인다.) 
 

장학성章學誠이 이르길 : 황동발黃東發이 삼국 때 한을 촉이라고 칭함은, 
 

동발은, 황진의 자다. 
 

조조曹操가 얕잡아보고 억누르는 속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일렀고, 또한 진수에게 연좌시키며, 명칭을 붙임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일렀는데, 이쪽은 옳다. 후세의 문사가, 또한 다수 이를 따르나, 얕잡아보고 억누르는 속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략 삼국에서 군을 일으키고부터, 한헌제漢獻帝가 아직 존재했고, 그 후 소열제가 양梁, 익 益 을 차지해, 형세가 양한兩漢과 함께 논함은 수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조정의 인사가 서쪽을 촉이라고 가리켜, 곧 분별함을 취한 것이지, 애초에 땅을 얕잡아보고 억누른 것은 아니다. 얕잡아보고 억눌렀다면 위한僞漢이라고 칭했지, 필시 촉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씨유서 章氏遺書 지비차기 知非劄記 에 보인다.) 
 

유함흔劉鹹炘이 이르길 : 장씨가 이른 “명칭을 따르나, 얕잡아보고 억누르지는 않았다”가, 옳으나, “함께 논함이 꺼려졌기 때문”이라고 이른 것은, 옳지 않다. 소열제가 즉위할 때, 위魏가 이미 찬탈했는데, 어찌 함께 논함을 꺼렸겠는가? 위가 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았다고 칭해, 자연히 다시 한이 있다는 것은 수용되지 못하기에, 서쪽을 촉이라고 가리킨 것이지, 또한 겨우 분별하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인이 한이라고 통칭함은, 그 증거가 매우 많아, 오직 맹세하는 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가 한이라고 칭하나 위 홀로 한이라고 칭하지 않았으니, 속뜻이 있었음이, 명백하다. 승조承祚의 뜻을 헤아리니, 아마도 위가 이미 정통을 차지해, 두 방면은 자연히 국호로써 이를 대할 수 없었기에, 지명으로 칭한 것이다. 하나의 중국이 정립하고 분할됨은, 본래 이전에는 이러함이 아직 없어서, 따를 만한 예가 없었다. 삼국지라고 책을 이름 짓고, 각자 책을 만든 것은, 그들이 서로 일정한 통제 아래에 속하지 않았다는 실상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오, 촉이라고 지칭함은, 본래는 하나의 온전한 중국이었음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진이 이미 위를 계승해, 또한 필시 한이 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승조가 당시 사람의 뜻을 따라, 또한 자연히 감히 한이라고 칭하지 못한 것으로, 이는 진실로 얕잡아보고 억누르려는 속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위를 정통으로 삼았음은 명백하다. 
 

반미潘眉가 이르길 : 선주先主가 황제로 즉위해 한의 계통을 계승하며, 촉을 국호로 삼지 않았다. 강표전 江表傳 에 오주吳主가 이른 “전에 서쪽을 촉이라고 지칭함은, 한제漢帝가 아직 존재했기 때문일 뿐이다. 지금 한이 이미 폐해졌으니, 자연히 명칭을 한중왕漢中王이라고 할 수 있다”가 실렸고, 후에 황제가 돼서는, 마침내 한이라고 칭했기에, 그 맹세하는 글에서 “오늘 한, 오가 맹세한 후부터, 서로 힘을 모아 한 마음이 된다”라고 했으니, 진지 陳志 에서 한을 촉이라고 고친 것은, 뜻에 있어 부당하다. 
 

주수창周壽昌이 이르길 : 승조가 한이라고 칭하면 혼란스러워지기 쉽기에, 촉이라고 지칭해 삼국의 면목을 나눈 것이나, 각각의 글 안에서는 혹 한이라고 칭하거나, 촉한이라고 칭해, 그 진실을 보전했으므로, 모두 한을 촉이라고 고친 것은 아니다. 제갈諸葛씨가 과조科條를 갖추며, 또한 스스로 촉과 蜀科 라고 했지, 한과 漢科 라고는 칭하지 않았다.  
 

명산존고 名山存稿 에서 이르길 : 황룡黃龍 원년, 맹서에서 나란히 한, 오라고 칭했으니, 이는 오가 한이라고 칭한 것이다. 관구검전 毌丘儉傳 의 배주裴注에서 문흠文欽이 곽회郭淮에게 보낸 서신에서 “목숨을 의탁하며 한에 귀부하다”라고 했으니, 이는 위가 한이라고 칭한 것이다. 
 

어떤 이가 이르길 : 촉지 蜀志 가 오, 위와 비교해 간략하나, 또한 연구하고 단련함은 상세하고 세밀하다. 진수가 부친이 죽은 사정 때문에 이런 것이라고 이름은, 천박한 견해다. 혹 나라가 작고 재능있는 이가 모자라서거나, 혹은 기주記注가 세워지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고 의지할 바가 없어서였을까? 주에서 양희楊戲가 여러 공을 기린 것을 보니 알 만하다.

 

 

삼국지三國志 31 
 

유이목전劉二牧傳 제 1

 

사통 史通 편차편 編次篇 에서 이르길 : 진승 陳勝, 항적項藉은 고조高祖의 뒤에 엮어졌고, 외효 隗囂, 공손술 公孫述은 광무光武제의 앞에 나열되지 않았으나, 진수陳壽의 촉서 蜀書 에선 두 주목을 처음 기록하고, 선주先主를 이어서 나열해, 유언 劉焉, 유장 劉璋 을 이어받으니, 어찌 촉이 위조僞朝라고 여기고, 마침내 일반적인 사례를 따르지 않은 것인가?

 

어떤 이가 이르길 : 이미 정족이라서 지 志 를 세웠다면, 이 지에선 의당 선주를 처음에 두고, 두 주목은 비자전 妃子傳 뒤에 둬, 위지 魏志 의 동董씨, 원 袁 씨와 같게 해야, 옳다.  

 

하작何焯이 이르길 : 두 주목이 동씨, 원씨 군웅의 예를 따르지 않고, 촉지의 처음에 나열됨은, 할거에서 소열昭烈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왕이 흥업할 때는, 먼저 구제함이 있고, 평에서 “경사가 두 사람의 군주에게 모이다”라고 이름은, 바로 한가漢家의 고사로 황실의 세계가 돌아가는 바를 밝힌 것으로, 하늘이 진짜 임금을 도우니, 즉 두 주목은 오히려 찬탈을 몰래 계획할 수 없었을 뿐인 것이다. 그 문장은 패국霸國의 글과 같고, 그 뜻은 천자의 일이 아닌 게 없으니, 유신遺臣과 옛 임금을 그리워함이 깊은 것이로다.

 

또한 이르길 : 오의 일을 서술하며 정례正禮는 토역討逆보다 앞에 있지 않고, 한의 계통과 연계해선 두 주목은 도리어 창업한 임금보다 앞에 있다. 그 관례를 바꾸고, 그 글을 따르기에, 뒤에 머무는 사람은 자연히 뒤섞여 고르지 못하고 잘못에 미혹된 가운데에서 그 뜻을 만나므로, 당시에 헤아리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청식李清植이 이르길 : 유언, 유장은 동종同宗의 방계인 친족이나, 몰래 찬탈하려는 뜻을 은밀히 품어, 한제漢帝가 이미 일찍이 그의 두 자식을 잡아 죽였으니, 즉 또한 반란을 일으킨 여러 자들과 함께 한다. 촉지의 처음에 두 주목이 있기에, 선주가 익益을 취한 것을 밝히며, 뜻에 있어 옳게 되고, 또한 동부董扶가 이른 “익주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가 말대에 성하게 흥하며 천명을 받은 징조가 되는 것이니, 하작의 견해는 확실하나, 충분하지는 못했다. 

 

유함흔劉鹹炘이 이르길 : 구제驅除란, 일대一代의 말미암은 바와 승리한 바다. 무릇 단대사서斷代史書에서, 말미암은 바와 승리한 바를 나열함은, 모두 열전의 앞에 있지, 제왕의 앞에 있던 적은 아직 없었다. 만약 하씨의 설과 같다면, 반서 班書의 진씨, 항씨는 응당 고기 高紀 의 앞에 있어야 하고, 범서 範書 의 경시 更始 제, 유분자劉盆子는 응당 광무제의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이씨의 설은 더욱 어긋나는 것으로, 앞에 나열해서 당시에 취한 것을 보이거나, 부참符谶을 빌미로 삼아 마침내 앞에 나열함은, 도리가 없는 것을 근거로 삼는 것이다. 유분자, 왕랑王郎은 모두 광무제가 당시에 취한 바인데, 어찌하여 앞에 나열하지 않았겠는가? 만약 동부의 말을 취해서 부명符命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당도當塗의 예언은, 원술袁術이 이미 이에 해당했으니, 조씨의 책을 지은 이는, 또한 원술을 조비曹丕의 앞에 나열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 오지의 유요劉繇, 사섭士燮과 같은 것은 오히려 손권孫權, 손량 孫亮, 손휴 孫休, 손호孫皓의 뒤에 나열해, 위서의 동씨, 원씨 여러 전과 같고, 이와는 같지 않아, 오히려 촉과 같은 경우는 외지고 먼 지방임을 보이나, 오에 관해선 정조正朝와 같으니, 이는 자연히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다. 아마도 계한季漢의 강토는 전부 두 주목의 것에 의거하나, 손씨가 유씨, 사씨에 관해서, 조씨가 원씨, 도陶씨에 관해선 그렇지 않기에, 두 주목의 나열이, 유씨, 사씨와 같지 않으며, 외지고 먼 지방임을 보였음이 더욱 명확하다. 하씨는 도리어 관례를 바꿔 천자의 일로 삼았으나, 뜻이 뒤섞여 고르지 못하고 잘못에 미혹된 가운데에 있게 됐다고 칭했는데, 과연 이러한 견해를 헤아린다면, 무릇 옛 역사에서의 기림은 모두 자신의 뜻에 의거해 폄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고, 낮춘 것은 모두 자신의 뜻에 의거해 높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명문이 옳지 않다고 이를 때, 나라면 이는 잘못에 미혹됐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다면, 세상에 오히려 진정한 시비是非가 다시 있겠는가?

 

 

유언劉焉의 자는 군랑君郎으로,

 

관본 官本 고증 考證 에서 이르길 : 다른 책에선 군랑 君朗 이라 썼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후한서 後漢書 에선 군랑 君郎 으로 썼다.

 

전의길錢儀吉이 이르길 : 화양국지 華陽國志 에선 군랑 君朗 으로 썼다.

 

강하江夏 경릉竟陵 사람이고,

 

군국지 郡國志 : 형주荊州 강하군 경릉이다.

 

일통지 一統志 : 경릉의 옛 성은, 지금의 호북湖北 안륙부安陸府 천문현天門縣 서북쪽이다.

 

한漢의 노공왕魯恭王의 후예인데,

 

한서 漢書 경십삼왕전 景十三王傳 : 효경황제孝景皇帝는 14 아들이 있었는데, 정희程姬가 노공왕 유여劉馀를 낳아, 처음에 회양왕淮陽王으로 세웠다가, 후에 옮겨 노魯에서 왕이 되게 했다. 궁실을 손질하길 좋아해, 공자孔子의 옛집을 허물어 그의 궁을 넓혔는데, 그 벽 안에서 고문경전古文經傳을 얻었다.

 

장제章帝 원화元和 중 경릉으로 옮겨 봉해져,

 

한서 노공왕전 : 애제哀帝 건평建平 3년, 다시 유민劉闵을 노왕魯王으로 세웠다. 왕망王莽 때 단절됐다.

 

제후왕표 諸侯王表 에서 이르길 : 왕망이 찬위하고, 유민을 공公으로 낮췄다. 다음해, 신서神書를 올리고, 열후로 봉하며, 왕王을 사성賜姓하였다.

 

후한서 광무기 光武紀 : 건무建武 13년, 조서로 종실과 봉국이 단절된 이 중 후侯로 봉한 이가, 무릇 137 명이다.  

 

이에 근거하면, 노공왕의 후예는, 서한 말 이미 봉국이 단절됐다가, 건무 때에 이르러 비로소 후에 봉해질 수 있었고, 장제 원화 중에 이르러 곧 경릉으로 옮겨 봉해졌다. 생각하건대 어느 땅에서부터 옮겨 봉해졌는지, 사문史文엔 실려있지 않으나, 노에서부터 옮겨 봉해진 것은 결코 아니니, 대략 노 땅은 이미 건무 2년에 광무제의 형의 자식 유흥劉興이 노왕에 봉해졌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서한의 왕자후王子侯는, 왕망 때 모두 봉국을 잃었고, 동한 초 계속 봉해진 이는 매우 적은데, 어찌 경릉에 옮겨 봉해진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범範씨가 숙종肅宗 때 경릉으로 옮겨졌다고 이르니 그 실상이라 여겨진다.

 

또한 이르길 : 범사 範史 : 성양공왕城陽恭王 유지劉祉는, 건무 11년 죽었다. 13년 유지의 적자 유평劉平을 채양후蔡陽侯로 봉했다. 영평永平 5년, 현종顯宗이 다시 유평을 경릉후竟陵侯로 봉했다. 유평의 후손은 4대 전해 내려왔다. 그런즉 경릉에 옮겨 봉해진 이는 바로 성양공왕의 후예이니, 혹 이 전에서 그릇된 글자가 있는 것일까?

 

지서支庶는 이곳에 가정을 이루었다.

 

어람 禦覽 559에서 인용한 성홍지盛洪之의 형주기 荊州記 에서 이르길 : 정향 鄭鄉 은, 바로 정성鄭城 땅이다. 언덕 남쪽에 유장사묘劉長沙墓가 있으니, 익주목益州牧 유언의 부친이다. 그 남쪽에 또한 한의 위군태수魏郡太守 황향黃香의 무덤이 있다.

 

유언은 어려서 주군州郡에서 시중들다, 종실로 중랑中郎에 임명됐고,

 

범서 範書 유언전에선 낭중 郎中 이라 썼다.

 

전의길錢儀吉이 이르길 : 한의 제도에서, 종실이 좌리佐吏가 되면, 전례를 따라 4백 석을 보충하나, 중랑은 비육백석比六百石이고, 낭중은 비삼백석比三百石이니, 아마도 응당 중랑으로 써야 한다.  

 

나진옥羅振玉이 이르길 : 어람에서 인용하며 또한 중랑이라 썼다.

 

후에 스승 축공祝公의 상 때문에 관직을 그만뒀다.

 

신 배송지裴松之가 살피건대 : 축공은, 사도司徒 축념祝恬입니다.

 

범서 환제기 桓帝紀 : 연희延熙 2년 8월, 광록대부光祿大夫 중산中山의 축념이 사도가 됐다. 3년 6월, 사도 축념이 죽었다.

 

장회주 章懷注 : 축념의 자는 백휴伯休로, 노노盧奴 사람이다.

 

양성산陽城山에 머물며,

 

한서 지리지 地理志 : 영천군颍川郡 양성이다. 양성산은, 유수洧水가 나오는 곳으로, 동남으로 장평長平에 이르러 영颍에 들어간다.

 

군국지 : 예주豫州 영천군 양성이다.

 

범서 당고전 黨锢傳 이응전 李膺傳 : 이응이 면직돼 향리로 돌아가, 양성산 안에 머물렀다.

 

진식전 陳寔傳 : 진식은 양성산 안으로 피해 숨었다. (이응, 진식은 모두 영천 사람이다.)

 

일통지 : 양성의 옛 성은, 지금의 하남河南 하남부 등봉현登封縣 동남쪽이다. 양성산은 등봉현 동북쪽에 있으며, 속세에선 차령산車嶺山이라 지칭한다.

 

지식을 쌓고 가르쳤는데,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천거돼, 사도부에 벽소됐고, 낙양령雒陽令, 기주자사 冀州刺史, 남양태수 南陽太守, 종정 宗正, 태상 太常 을 역임했다. 유언은 영제靈帝 때 정치가 쇠해 이지러지고, 왕실에 변고가 많음을 보고, 건의하길 : “자사, 태수가, 뇌물로 관리가 돼, 백성을 할박割剝해서, 인심이 떠나고 있습니다. 청명한 중신을 가려 목백牧伯으로 삼아, 중국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범서 유언전 : 당시 영제의 정치로 백성을 다스려 교화함이 쇠하고 이지러져, 사방에서 반적이 침입해 소요를 일으켰다. 유언은 자사의 위엄이 가벼워, 이미 금할 수 없고, 또한 마땅하지 못한 사람을 써서, 번번이 폭란을 늘린 거라 여겨, 이에 목백으로 바꾸어 둬, 중국을 안정시키고, 중신을 매우 정밀하게 골라, 그 임지에 머물게 하길 건의했다.

 

속백관지 續百官志 : 효무제孝武帝 초 자사 13 명을 뒀는데, 관질은 6백 석이었다. 성제成帝가 목牧으로 고치니, 관질은 2천 석이었다. 건무建武 18년, 다시 자사 12 명으로 삼으며, 각각 주 하나를 주관하게 했는데, 그 중 주 하나는 사례교위司隸校尉에게 속했다.

 

유소劉昭가 이르길 : 효무제 말 비로소 자사를 설치했는데, 불법을 살핌은, 6 조목을 넘지 않았고, 전거傳車로 두루 돌아다니며, 바로잡고 진정시킴은 없었고, 관질은 겨우 수백에, 위세와 명망은 가볍고 적어, 감찰하고 고발하는 직책은 있을 수 있어도, 무리하게 침범하는 허물은 아직 생기지 않았다. 성제가 목으로 바꾸고, 그 싹이 비로소 커졌는데, 이미 다스림을 아는 임금이 아니었기에, 얻은 게 없을 뿐이었다. 세조世祖가 중흥하고, 정본正本을 살펴, 다시 그 직분을 줄이며, 도리어 옛 제도를 따라, 직접 주사奏事함을 단절시키고, 들어오는 것을 살피며 번잡함을 애석하게 여겨, 점점 자중하는 도리를 얻었다. 이로부터 이후에, 시대에 두루 미치도록, 모후母後가 집권해, 주견을 견지할 수 없음이 많았고, 천지와 사방이 진동했고, 사해가 무너지고 쓰러지며, 재물과 힘이 바닥나고, 나라의 법도가 어지러워지고 손상되나, 팔방에서 들어와 침범할 수 없었고, 제후는 감히 들어와 치지 못했으니, 어찌 줄기가 강하고 가지가 약하며, 바탕이 무거운 것을 통제한 탓이 아니겠는가? 효령孝靈제가 재위할 때에 이르러, 재앙이 이미 이르러, 유언이 거짓을 구해, 스스로 자신을 위해 모의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없이, 오로지 이리가 웅거하는 책략을 품고, 어두운 세상에 대항해 논하며, 어리석은 임금에게 의견을 올려, 의당 목백을 무겁게 해야 한다고 성대하게 일컫고, 만 리를 억제하기에 충분하다고 일러, 간사함을 품고 계략을 세워, 진실로 한 때를 속인 것이니, 어찌 영원히 나라의 근본이며, 장기적인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겠는가? 대저 성군이 세상을 다스리며, 백성을 크게 덮지 않음이 없어, 그 공들여 계획함을 계승하고, 그 제도를 전하나, 오히려 일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겨, 혹 관통하지 못할 거라 일렀기에, 정복正服을 바꿔 고치고, 질문質文을 변천시키며, 작위를 3, 5 구분해, 거의 같지 않았다. 하물며 비루하고 어리석은 임금이, 간사한 신하를 끼고, 함께 처음 세운 것인데, 어찌 의지하겠는가? 주를 크게 일으키며 높이는 꾀로, 마침내 하루의 다스림도 없게 됐다. 그러므로 유언은 익益의 땅을 다스리며, 황제의 복식을 민아岷峨에서 만들었고, 원소袁紹는 기冀를 취하고, 제서制書를 연燕의 북쪽에 내렸고, 유표劉表는 남쪽을 제압하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고, 위조魏祖는 연兖을 점거해, 마침내 제왕의 사업을 이루었다. 한의 멸망은, 재앙이 이로 인한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선, 임무를 맡김이 더욱 넓어졌다. 방재邦宰의 명을 맡기고, 부월斧钺의 권력을 수여하고, 도독都督의 권세를 수여하고, 정벌의 계책을 열어줬다. 진晉 태강太康 초, 무제武帝가 또한 이와 같음을 의심하여, 조서로 주목을 없애게 했다. 비록 그 말이 있었으나, 끝내 힘쓰지 못해, 후사가 계승하며, 목의 진鎮은 더욱 무거워져, 땅을 점거하고 분쟁하다, 마침내 천하를 뒤엎었다.

 

유언은 내심 교지목交阯牧을 원해,

 

범서에선 내 內 를 음 陰 으로 썼다. 교주자사 交州刺史 는, 오지 吳志 사섭전 士燮傳 에 상호 보인다.

 

군국지 : 교주의 창오군蒼梧郡 치소는 광신廣信이고, 교지군 치소는 용편龍編이고, 남해군南海郡 치소는 반우番禺다.

 

유소주劉昭注에서 인용한 한관 漢官 에서 이르길 : 광신은, 자사의 치소다.

 

또한 왕범王範의 교광춘추 交廣春秋 를 인용해 이르길 : 교주의 치소는 이루현羸阝+婁縣이다. 원봉元封 5년, 치소를 창오 광신현으로 옮겼다. 건안 15년, 반우현을 치소로 삼았다. 조서로 주州가 중심에서 먼 지방이라서, 사지절 使持節 로, 7군을 아울러 모두 고취鼓吹를 수여하여, 무거운 위엄으로 진압했다.

 

진서 晉書 지리지 地理志 : 무제 원봉 중 교지자사를 설치했다. 순제順帝 영화永和 9년,

 

(노필盧弼이 살피길 : 영화는 6년에 그치므로, 9 자는 오자다.)

 

교지태수가 주州를 세우길 구하나, 조의朝議에선 불허하고, 곧 주창周敞을 교지자사로 임명했다. 건안建安 8년, 장진張津이 자사였고, 사섭이 교지태수였는데, 함께 주로 세우길 상표하니, 곧 장진을 교주목으로 임명했다. 15년, 반우로 거처를 옮겼다.

 

송서 宋書 주군지 州郡志 : 한무제 원정 6년, 백월百越을 개척해, 교지자사의 치소는 용편이었다. 헌제 건안 8년, 교주로 고치고, 창오 광신현을 치소로 삼았다. 16년, 남해 반우현으로 치소를 옮겼다. 광주廣州를 나눠, 치소는 반우로 하고, 교주는 용편으로 치소를 돌려보냈다.

 

마여룡馬與龍이 이르길 : 교주자사는, 전한의 치소는 광신이고, 중흥 후 용편으로 치소를 옮겼다. 건안 8년 이전에는 교지라고 했고, 교주라고 하지 않았다.

 

오증근吳增僅이 이르길 : 교주는, 한에선 본래 교지자사로 정하고, 주라고 칭하지 않았다. (군국지에서 교주라 쓰나, 도리어 교정한 이가 살피지 못한 것이다.) 건안 8년, 장진, 사섭이 상표해 청하여, 비로소 교주라고 칭했고, 치소는 광신이 됐다. 15년, 반우로 치소를 옮겼다.

 

일통지 : 광신의 옛 성은, 지금의 광서廣西 오주부梧州府 창오현 치소다. 반우의 옛 성은, 지금의 광동廣東 광주부廣州府 남해현 치소다. 용편의 옛 성은, 지금의 광서 태평부太平府 빙상주憑祥州 남쪽 750 리다.

 

추대균鄒代鈞이 이르길 : 지금의 월남越南 (법란서法蘭西의 영토) 하내도河內道 치소다.

 

세상의 난을 피하고자 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 교지가 한쪽으로 치우쳐 외지고 멀어서, 재화를 피할 수 있다.

 

상의하나 아직 즉시 행하지 않았는데, 시중侍中 광한廣漢의 동부董扶가 사사로이 유언에게 이르길 :

 

동부가 임안任安과 함께 학문과 덕행으로 나란히 찬양된 기사는, 뒤의 주에 보이고, 또한 진밀전 秦宓傳 의 주에서 인용한 익부기구전 益部耆舊傳 에 보인다.

 

“경사가 장차 어지러워질 텐데, 익주의 분야分野에 천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통감 通鑒 의 호주胡注에서 채옹蔡邕의 월령장구 月令章句, 진서 晉書 천문지 天文志 를 인용해, 분야를 해석하나, 글이 복잡해 채록하지 않았다.

 

유언이 동부의 말을 듣고, 뜻이 익주로 바뀌었다. 때마침 익주자사 극검郤儉의

 

범서에선 극 郤 을 극 郄 이라고 썼다.

 

호삼성이 이르길 : 춘추春秋 때 진晉의 대부大夫 극씨다.

 

노필이 살피길 : 이와 위문제魏文帝의 전론 典論 에서 이른 극검은 별개의 인물이다.

 

조세 등을 매겨 거둠이 어지러워, 뜬 소문이 멀리까지 알려졌고,

 

화양국지 華陽國志 에서 이르길 : 자사 하남河南의 극검은, 조세 등을 매겨 거둠이 어지러워, 떠도는 말이 멀리까지 알려졌다.

 

극검은, 극정郤正의 조부다.

 

병주並州에서 자사 장익張益을 죽이고, 양주梁州에선 자사 경비耿鄙를 죽여,

 

화양국지에선 익 益 을 일 壹 이라 썼고, 양 梁 을 양 涼 이라 썼으니, 여기서 잘못 쓴 것이다. 경비의 일은, 마초전 馬超傳 의 주에서 인용한 전략 典略 에 보인다.

 

관본 고증에서 이르길 : 장익은, 송본宋本에선 장일 張壹 이라 썼고, 후한서에선 장의 張懿 라고 썼다. 양주 梁州 는, 후한서에선 양주 涼州 라고 썼다.

 

전대흔錢大昕이 이르길 : 후한서 영제기 靈帝紀 : 중평中平 5년, 휴도각休屠各의 호胡가 병주자사 장의를 공격해 죽였다. 여기서 장익이라 씀은, 아마도 진선제晉宣帝의 휘를 피해 고친 것이다. 기 紀 에서 또한 “중평 4년, 양주자사 경비가 금성金城의 도적 한수韓遂를 토벌하나, 경비의 군이 대패했다”라고 칭하며, 살해당했다고 말하지 않아, 이 전과 다르다. 한 때 양주梁州는 없으니, 여기서 양이라 칭함은, 음이 와전된 것이다.

 

전의길이 이르길 : 선주의 목황후穆皇後의 오라버니 오일吳壹은, 화양국지에선 의 懿 라고 썼다.

 

반미潘眉가 이르길 : 사서 안에서 의懿, 사 師, 소 昭, 염炎 자는 모두 피휘하지 않아, 응당 홀로 이 이름을 고치지는 않았을 것이니, 당연히 전사傳寫하다 잘못된 것이다.

 

유언의 모책은 실시될 수 있어,

 

원본 元本, 진본 陳本 에선 시 施 를 선 旋 이라 썼는데, 오자다.

 

파견되며 감군사자監軍使者가 돼, 익주목益州牧을 겸했고,

 

화양국지에서 이르길 : 한제漢帝가 장차 극검을 징소해 형벌을 가하려 하며, 유언을 감군사監軍使로 삼고, 이윽고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장회주章懷注에서 이르길 : 전서 前書 에선 임안이 감북군사자監北軍使者가 됐다.

 

양성후陽城侯에 봉해져,

 

양성은 앞에 보인다.

 

곧 극검을 잡아 죄를 다스리려 했다. 

 

반미가 이르길 : 여기서 조지诏旨가 이와 같으나, 사실이 아니다. 극검은 마상馬相에게 살해당했고, 극정전에서 또한 “도적에게 살해당했다”라고 일렀다.

 

속한서 續漢書 에서 이르길 : 이 때 유우劉虞를 유주幽州로, 유언은 익주로, 유표는 형주로, 가종賈琮은 기주冀州로 임용했다.

 

범서 가종전 : 가종의 자는 맹견孟堅으로, 동군東郡 요성聊城 사람이다. 중평 원년, 교지의 둔병이 반란해, 자사와 합포태수合浦太守를 잡았다. 영제가 특칙特敕으로 삼부三府에서 유능한 관리를 선정하게 하니, 유사가 가종을 교지자사로 천거했다. 가종이 부部에 이르러, 거수渠帥로 큰 해를 일으킨 자를 주살했다. 백성이 노래하길 : “가부賈父께서 늦게 오셔, 우리가 이전에 반란하게 했으나, 지금은 태평해졌고, 관리는 함부로 식사하지 못한다.” 3년을 재임하며, 13주에서 으뜸이라, 징소해 의랑議郎으로 임명했다. 당시 황건이 새로이 격파돼, 조서로 자사, 이천석 二千石 을 가려, 다시 청렴하고 능력있는 관리를 선발하게 해, 이에 가종을 기주자사로 삼았다. 구전 舊典 에선, 전거傳車와 참가骖駕는, 붉은 휘장을 드리우고, 주의 경계에서 영접했다. 가종이 부에 가며, 수레에 올라 말하길 : “자사는 응당 멀리 보고 널리 들어서, 아름다운 일과 추한 일을 규찰糾察해야 하는데, 어찌 도리어 휘장을 드리워, 스스로 덮어 막음이 있단 말인가?” 이에 수레를 모는 이에게 이를 걷어 올리도록 명했다.

 

유우 등은 모두 해내의 청렴하다는 명망이 있는 선비로, 혹 열경列卿이나 상서尚書로부터 목백으로 선발된 이는, 각각 본래의 관질로 임지에 머물렀다.

 

호삼성이 이르길 : 열경의 관질은 중이천석中二千石이고, 상서의 관질은 6백 석일 뿐이었다. 동도東都 이후로, 상서의 직무상의 임무는 열경보다 중요했다.

 

구전 : 전거와 참가參駕는, 붉은 휘장을 드러냈다.

 

혜동惠棟이 이르길 : 풍속통 風俗通 : 지금의 자사가 부에 가면, 전거라 부른다. 위지 魏志 에서 이르길 : 한의 자사는 전거라고 칭하고, 그의 관리는 종사從事라고 말하며, 일정하지 않은 치소에 머물렀다. 속지 續志 : 대사거大使車는 서서 타며 4필의 말을 몰고, 붉은 휘장이며, 부절을 가진 이는 이중으로 이끈다.

 

신 배송지가 살피건대 : 영제가 죽은 후, 의병이 일어날 때,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王叡를 죽였고, 연후에 유표가 형주가 됐으니, 유언과 동시기가 아닙니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후한서에선 “태복太仆 황완黃琬이 예주목豫州牧이 됐다”가 있고, 유표는 없다. 살피건대 : 표전 表傳 에선 이각李傕, 곽사郭汜가 장안長安에 들어가, 유표와 연합해 원군으로 삼고자 하여, 유표를 진남장군鎮南將軍, 형주목으로 삼았다고 일렀다. 배주裴注는 진실이다.

 

한영제기 漢靈帝紀 에서 이르길 : 황제가 유언을 불러 보며, 방략을 포고하고, 상사賞賜를 더해주며, 칙서로 유언을 익주자사로 삼길 : “전의 자사 유준劉雋, 극검은 모두 탐욕스럽고 흉악하며 절제가 없어,

 

관본에선 남 濫 을 일 溢 로 썼다.

 

수취함이 난잡하게 어지러워, 모든 백성이 속수무책으로, 큰 소리로 울부짖음이 들판을 채웠으니, 유언이 이르면 곧 통제하며 법을 살펴 일을 행해, 모든 백성에게 보여서, 누설되도록 하거나, 큰 종기가 짓물러 고름이 흐르게 하여, 나라에 재앙이 생기게 하지 마라.” 유언이 명을 받고 가나, 도로가 통하지 않아서, 형주 동쪽 경계에 머물렀다.

 

원본에선 이 항목의 주문注文에 그릇되고 잘못됨이 지극히 많기에, 열거하지 않았다.

 

동부 또한 촉군서부속국도위蜀郡西部屬國都尉가 되길 구했고,

 

속한지 백관지 : 중흥하고 건무 6년, 여러 군의 도위를 없애고, 오직 변방의 군에 때때로 도위와 속국도위를 뒀는데, 점점 분현分縣을 가져, 백성을 다스림이 군郡과 대등했다.

 

군국지 : 익주 촉군속국이다.

 

유소주 : 과거 서부도위에 속했다. 연광延光 원년, 속국도위로 삼아, 별도로 4 성을 거느리게 했다.

 

범서 서남이전 西南夷傳 : 무제 천한天漢 4년, 심려군沈黎郡을 촉과 병합해 서부로 삼아, 두 도위를 뒀는데, 하나는 모우旄牛에 머물며 외이外夷를 순찰함을 주관했고, 하나는 청의青衣에 머물며 한인漢人을 주관했다. 안제安帝 연광 4년, 촉군속국도위로 나눠 설치해, 4현을 거느리니, 태수와 같았다. 영제 때, 촉군속국을 한가군漢嘉郡으로 삼았다. 

 

노필이 살피길 : 이에 근거하면 영제 때 이미 한가군으로 고쳐, 전문傳文에선 응당 “동부는 한가군수漢嘉郡守가 되길 구했다”라고 일러야 하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책에선 촉군서부속국도위가 되길 구했는가? 군국지를 살피니, 한가는 과거 청의로, 촉군서부는 본래 두 도위를 가졌는데, 하나는 오히려 군으로 고치나, 여전히 도위 한 명을 가졌다.

 

태창령太倉令 회會 파서巴西의 조위趙韪도 관직을 버리고, 함께 유언을 따랐다.

 

속백관지 : 태창령은, 한 사람으로, 군국郡國에서 전하는 운송하는 곡물을 받는 것을 주관했고, 대사농大司農에 속했다.

 

관본 고증에서 이르길 : 회 會 자는 아마도 연자다.

 

전대흔이 이르길 : 화양국지에는 회 자가 없으니, 태창 아래는, 응당 이를 따라야 한다.

 

파서는, 위지 무기 건안 20년에 보인다.

 

진수 陳壽 의 익부기구전 益部耆舊傳 에서 이르길 : 

 

진서 晉書 진수전 : 진수는 익부기구전 10 편을 지었다.

 

수서 隋書 경적지 經籍志 잡전류 雜傳類 : 익부기구전 14 권은, 진장수陳長壽가 지었다. 

 

구당지 舊唐志 : 익부기구전은, 14 권으로, 진수가 지었다.

 

신당지 新唐志 도 같다.

 

화양국지 권 11 후현지 後賢志 에서 이르길 : 익부益部는 건무로부터 후에, 촉군의 정백읍鄭伯邑, 태위太尉 조언신趙彥信과 한중漢中의 진신백陳申伯, 축원령 祝元靈, 광한廣漢의 왕문표王文表가, 모두 박학하고 서적에 두루 미쳐서, 파촉기구전 巴蜀耆舊傳 을 지었다. 진수는 멀리까지 헤아리기 부족하다고 여겨, 이에 파巴, 한漢을 병합해, 익부기구전 10 편을 지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문립표文立表가 그 전을 바쳐, 무제가 이를 훌륭하다고 여겼다.

 

또한 권 12 서지 序志 에서 이르길 : 진군陳君 승조承祚는 별도로 기구 耆舊 를 만들었는데, 한漢부터 시작해 위魏까지, 문장이 훌륭해 볼 만하다.

 

장종원 章宗源 의 수지고증 隋志考證 에서 이르길 : 한중사녀지 漢中士女志 에서 이르길 : 진술陳術이 있었는데 자가 신백申伯으로, 기구전 耆舊傳 을 지었다. 어리석은 내가 살피길 : 배송지, 안사고顔師古가 사서에 주를 달며, 모두 진수의 익부기구전을 인용하며, (다른 책에선 인용하며 다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진술을 인용함은 없었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수, 당지는 권 수가 증가했는데, 그 분석 식별하고 분류한 이유가 상세하지 않다. 수지에서 장수 長壽 라고 쓴 것은, 장 長 자를 더 쓴 거다. 촉지 이선전 李譔傳 : 당시에 또한 한중의 진술이 있었는데, 자가 신백으로, 익부기구전과 지 志 를 지었다. 이 책은 진수의 이전에 있었는데, 배씨가 이미 진수라고 칭했으니, 즉 인용한 바는 진술의 책이 아니다. 

 

황봉원黃逢元이 이르길 : 한서의 주, 촉지의 주, 수경 水經 강수주 江水注, 사기 史記 역서 曆書에서 또한 대완전 大宛傳 색은 索隱 에 인용함이 존재하고, 서초 書鈔, 초학기 初學記, 어람에서 자주 인용했다.

 

동부의 자는 무안茂安으로, 어려서 스승을 따라 배우며, 아울러 여러 경서에 통달했고, 구양歐陽의 상서 尚書 에 훌륭했고, 

 

한서 예문지 藝文志 : 구양장구 歐陽章句 는, 31 권이다.

 

유림전 儒林傳 : 구양생歐陽生의 자는 화백和伯으로, 천승千乘 사람이다. 복생伏生을 섬기고, 예관倪寬에게 전수했는데, 예관이 구양생의 자식에게 전수해, 대대로 서로 전하여, 이로 인해 상서에는 대대로 구양씨학歐陽氏學이 있다. 

 

또한 빙사聘士 양후楊厚를 섬기며,

 

양후는 진밀전의 주에서 인용한 익부기구전에 보인다.

 

범서 範書 양후전 : 양후의 자는 중환仲桓으로, 광한廣漢 신도新都 사람이다. 조부 양춘경楊春卿은, 도참학圖谶學에 훌륭해, 공손술公孫述의 장수가 됐다. 한漢의 군이 촉을 평정하고, 양춘경은 자살했는데, 임종 전에 자식 양통楊統에게 경계하길 : “나의 제질绨帙 안에는 선조께서 전해주신 비기秘記가 있어, 한가漢家에서 쓰일 테니, 너는 이를 익히거라.” 양후는 어려서 양통의 학문을 배웠고, 82 세에 집에서 죽었다. 책서로 제사를 지내게 했고, 향인들은 시호로 문부文父라고 했고, 문인門人들은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웠다.

 

도참을 깊이 연구했다. 마침내 경사에 이르러, 태학太學을 유람하고, 집으로 돌아와 강의하며 가르치니, 제자가 멀리서부터 왔다.

 

송본에선 “제자가 멀리서부터 이르렀다”라고 썼다.

 

범서 방술전 方術傳 : 동부는, 광한 면죽綿竹 사람으로, 어려서 태학에서 유학해, 향인 임안任安과 동등한 명망을 가졌고, 모두 같은 군의 양후를 섬기며 도참을 배워, 집으로 돌아와 강의하며 가르치니, 제자가 멀리서부터 이르렀다.

 

영강永康 원년, 일식이 있어, 조서로 현량방정賢良方正한 선비를 천거해, 득실을 책문策問하게 했다. 좌풍익左馮翊의 조겸趙謙 등이 동부를 천거하나,

 

범서 조전전 趙典傳 : 조전의 자는 중경仲經으로, 촉군 성도成都 사람이다. 조전의 형의 자식 조겸은, 자가 언신彥信으로, 초평 원년, 황완黃琬을 대신해 태위太尉가 됐다.

 

동부가 병으로 이르지 못하고, 멀리 장안에서 봉사封事를 올리고, 마침내 병이 위독하다고 칭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전후로 재상이 공무를 보는 곳에서 10 번 벽소하고, 공거公車로 3 번 징소하고, 다시 현량방정, 박사 博士, 유도 有道 로 천거돼나, 모두 이르지 않아, 명성이 더욱 무거워졌다. 대장군大將軍 하진何進이 상표하여 동부를 천거하길 : “자질은 자유子游, 자하子夏의 덕이 있고, 공씨孔氏의 풍도를 따르며, 안으론 초연수焦延壽, 동중서董仲舒가 재해를 제거하고 정상으로 회복한 재주를 품고 있습니다. 지금 병並, 양涼이 소란스럽고, 서융西戎이 꿈틀거리며 배반하니, 의당 칙서로 공거를 보내 특조特诏를 전해, 남다른 예로 대우하며, 기책을 토론하고 상담해야 합니다.” 이에 영제가 동부를 징소해, 곧 시중으로 임명했다. 조정에서 유종儒宗이라 칭해져, 매우 신임 받았다. 촉군속국도위가 되길 구했다. 동부가 나가고 일 년이 지나 영제가 죽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후에 관직을 그만두고, 82세에 집에서 죽었다. 처음에 동부가 말을 드러내며 항론하면, 익부益部에선 견줄 이가 적었기에, 치지致止라고 했으니,

 

반미潘眉가 이르길 : 치 致 는, 응당 지 至 라 써야 한다.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어, 이르면 말이 그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후에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진밀에게 동부의 장점을 물으니, 진밀이 이르길 : “동부는 아주 작은 선이라도 칭찬했고, 미세한 악이라도 폄하했습니다.”

 

하작이 이르길 : 조기 趙岐 의 맹자주 孟子注 에서 이르길 : 공자께선 아주 작은 선이라도 드러내셨고, 미세한 악이라도 폄하하셨기에, 춘추 春秋 에 모두 이를 기록했다. 두 이야기는 필시 경사經師의 성어成語다.

 

혜동이 이르길 : 사승 謝承 의 서 書 에서 이르길 : 이함李鹹이 상주하길 : “춘추의 의義에선, 미세한 악이라도 폄하헸고, 아주 작은 선이라도 채집했습니다.”

 

이 때, 양주涼州의 역적

 

반미가 이르길 : 범서에선 익주라고 썼다. 아래에서 “면죽에서 합쳐 모으다”라고 일렀으니, 즉 익주에서이므로, 양주는 오자다.

 

마상 馬相, 조지趙祗 등이 면죽현에서 황건黃巾이라 자호하고,

 

군국지 : 익주 광한군 면죽이다.

 

일통지 : 면죽의 옛 성은, 지금의 사천 면주 덕양현德陽縣 북쪽이다.

 

현은 고대부터 부涪에서 성도로 들어가며 반드시 지나는 중요한 길이었고, 또한 부강涪江이 경유하던 곳이니, 응당 지금의 나강羅江, 덕양德陽의 사이에 있다.

 

질역疾疫인 백성을 합쳐 모으니,

 

질역을, 송본에선 피역 疲役 이라 썼다.

 

반미가 이르길 : 질역은, 응당 후한서에서 쓴 피역을 따라야 하며, 요역에 의해 고달파 원독怨毒이 생긴 것을 이른 것이다. 

 

1, 2일 안에 수천 명을 얻어, 먼저 면죽령綿竹令 이승李升을 죽였더니, 관리와 백성이 모여,

 

관본 고증에서 이르길 : 감본監本에선 흡습 翕習 이라 잘못 적어, 지금 개정한다.

 

노필이 살피길 : 송본 또한 흡습이라 썼다.

 

모두 만여 명이라, 곧 나아가 낙현雒縣을 격파하고,

 

군국지 : 익주 광한군 낙주雒州는, 자사의 치소다.

 

제소남齊召南이 이르길 : 각각의 주자사의 치소는, 대개 주 州 자가 없으니, 이 주 자는 연자다.

 

일통지 : 낙의 폐현廢縣은 지금의 사천 성도부 한주漢州 북쪽에 있다.

 

익주를 공격해 극검을 죽이고는,

 

주수창周壽昌이 이르길 : 앞에서 “곧 극검을 잡아 죄를 다스리려 했다”라고 이르나, 거의 먼길이 막혀서,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앞에서 극검을 잡았다고 이름은, 허사虛辭에 그친다. 그래서 극검은 여전히 익주에 있으며 자사였기에, 도적에게 살해당했다.

 

심가본이 이르길 : 범씨는 “낙현으로 진공해, 극검을 죽였다”라고 일렀고, 동한의 익주자사의 치소는 낙으로, 낙현, 익주는 두 땅이 아니다. 이 글에서 이미 격파했다고 이르며, 또한 공격했다고 이르니, 말의 뜻이 중복된 것이다.

 

혜동이 이르길 : 화양국지에서 이르길 : 중평中平 2년, 양주의 황건 역적 마상, 조지 등이 면죽에서 무리를 모으며, 요역 때문에 원망하는 백성을 모으니, 1, 2일 만에 수천 명을 얻었다. 왕요王饒, 조파趙播 등을 파견해 낙성으로 진공하게 하여, 자사 극검을 죽였다. 극검의 종사사從事史 연빈燕邠 자는 원후元侯가 가맹葭萌에 사자로 있었는데, 종사 동복董馥, 장윤張胤과 동행했다. 변고를 듣고 슬프고 가슴 아파, 동복, 장윤에게 가서 위난을 구하자고 설득하나, 두 사람은 할 수 없었다. 연빈이 탄식하길 : “사군 使君 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홀로 죽었다. 유언이 그를 기려, 학궁學宮에 초상화를 그리고, 동복 등을 주살했다.

 

다시 촉군, 건위 犍爲 에 이르러,

 

군국지 : 익주 촉군의 치소는 성도다. 건위군의 치소는 무양武陽으로, 팽망취彭亡聚가 있다.

 

장회주 : 잠팽岑彭이 죽은 곳이다. 남중지 南中志 에서 이르길 : 현의 남쪽 20 리에 팽망산彭望山이 있다. 익주기 益州記 에서 이르길 : 현에 왕교王喬가 신선이 된 곳이 있다. 왕교의 사당은 지금 존재한다. 현 아래에 팽조彭祖의 무덤이 있고, 위에는 팽조의 사당이 있다.

 

일통지 : 성도의 옛 성은, 지금의 사천 성도부 성도, 화양華陽 두 현의 치소다. 무양의 옛 성은, 지금의 사천 미주眉州 팽산현彭山縣 동북쪽이다.

 

화양국지 : 한의 태초太初 4년, 익주자사 임안任安이 무양에 성을 쌓아, 후에 마침내 군의 치소가 됐고, 성도에서 150 리 떨어져있다. 

 

환우기 寰宇記 : 무양성은, 진혜왕秦惠王 때 장의張儀가 쌓은 곳이라고 대대로 전한다.

 

한 달 사이에, 3 군을 파괴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수경주 : 익주에선 과거 촉군, 광한, 건위가 삼촉三蜀이었다. “한 달 사이에, 3 군을 파괴했다”고 이른 것이다.

 

마상이 천자를 자칭하니, 무리가 만수萬數였다.

 

심가본이 이르길 : 범서에선 “무리가 10여 만 명에 이르렀다”라고 썼다. 상고하건대 마상이 3 군을 파괴하며, 무리는 필시 만수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니, 아마도 이 글에 잘못이나 탈루가 있다.

 

주종사州從事 가룡賈龍이 본디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며

 

병사를 거느리다를, 화양국지에선 “가병家兵을 거느리다”로 썼다.

 

하작이 이르길 : 소 素 자는 연자다.

 

건위 동쪽 경계에 있었는데,

 

화양국지에선 “건위의 청의青衣에서”라고 썼다.

 

관리와 백성을 모으니, 천여 명을 얻어, 마상 등을 공격해, 수 개월이 지나 격파하고 패주시켜,

 

송본에선 월 月 을 일 日 로 썼다. 화양국지에선 “파멸시켰다”라고 썼다.

 

주의 경내가 안정됐다.

 

송본에선 정 淨 을 정 靜 으로 썼다.

 

가룡이 이에 관리와 졸병을 선발해 유언을 영접했다. 유언이 면죽으로 치소를 옮기고,

 

하작이 이르길 : 동한에선 익주자사의 치소가 낙현인데, 유언이 극검이 피살됐기에, 치소를 면죽으로 옮겼다. 면죽은, 서한 때 도위의 치소다.

 

이반한 이들을 어루만지며 거두고,

 

범서 유언전 : 유언이 이르러, 가룡을 교위校尉로 삼고, 면죽으로 옮겨 머무니, 가룡이 이반한 이들을 어루만지며 거뒀다.

 

황산黃山이 이르길 : 용 龍 자는 오자나 연자로, 여기서 유언의 일을 서술함은, 가룡과 관련이 없다.

 

힘써 너그러움과 은혜를 행하나,

 

화양국지에선 “힘써 작은 은혜를 행하다”라고 썼고, 아래에는 “당시 남양南陽, 삼보三輔의 백성 수만 가가, 재앙을 피해 땅을 옮겨 촉으로 들어와서, 유언은 그들을 마음대로 용서하고, 끌어들여 당여黨與로 삼으니, 동주사東州士라 불렀다.”

 

호삼성이 이르길 : 유언이 익주를 마음대로 처리하는 근원이 됐다.

 

은밀히 법도에서 벗어난 계책을 도모했다. 장로張魯의 모친은 처음에 귀도鬼道가 있고, 또한 동안이라,

 

소용 少容 은, 위지 방기전 方伎傳 화타전 華佗傳 의 주에서 인용한 문제文帝의 전론 典論 에서 “감시甘始는 늙어서도 소용이 있었다”라고 이른 것에 보인다.

 

하작이 이르길 : 소위 소용이란, 대략 늙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후한서에선 “자색姿色이 있다”고 썼는데, 아마도 범씨가 창피를 주고자 하여, 그 말이 지나쳤던 것일 뿐이다.

 

항상 유언의 집을 왕래했기에, 유언은 장로를 파견하며 독의사마督義司馬로 삼아,

 

독의사마는, 위지 장로전에 보인다.

 

한중漢中에 머물며,

 

군국지 : 익주 한중군의 치소는 남정南鄭이다.

 

일통지 : 남정의 옛 성은, 지금의 섬서 한중부 남정현성 동쪽이다.

 

한중, 남정은, 위지 무기 건안 16년과 장로전에 상호 보인다.

 

곡각谷閣을 단절하고,

 

반미가 이르길 : 곡각은, 야곡斜谷과 잔도를 이른 것이다. 삼진지 三秦志 에서 이르길 : 진秦에서부터 촉으로 들어가며 삼곡사도三谷四道가 있다. 삼곡은, 그 서남쪽은 포곡褒谷이라 하고, 남쪽은 낙곡駱谷이라 하여, 양洋에서부터 들어가고, 동남쪽은 야곡이라 하여, 미郿에서부터 들어간다. 그 향하는 곳은 모두 다르다. 구지 舊志 에선 처음과 끝이 하나의 골짜기라고 일렀는데, 옳지 않다. 그 잔도는 네 곳에서 나오는데, 성成, 화 和, 계 階, 문文에서부터 나오는 곳은 답중沓中의 음평도陰平道로, 등애鄧艾가 촉을 정벌하며 이를 경유했고, 양당兩當에서부터 나오는 곳은 고도故道로, 한고제漢高帝가 진창陳倉을 공격하며 이를 경유했고, 포褒, 봉鳳에서부터 나오는 곳은 연운잔도連雲棧道로, 한왕漢王이 남정에 가며 이를 경유했고, 성고成固, 양洋현에서부터 나오는 곳은 야곡낙도斜谷駱道로, 무후武侯가 위渭 위에 주둔하며 이를 경유했다. 이 사도삼곡은, 관남關南의 험액險阨인 곳으로, 공격하고 취하며 지내온 내력이 굳어진 것이다. 

 

한의 사자를 살해하게 했다. 유언은 상서하여 미적米賊이 길을 끊어서,

 

장로의 조부 장릉張陵이 도서道書를 지어서, 따르며 도를 배우는 이는 오두미五鬥米를 냈기에, 세상에선 미적이라고 불렀음은, 노전 魯傳 에 보인다.

 

다시 통할 수 없다고 말했고, 또한 다른 일을 핑계로 주 안의 권세가 있고 난폭한 왕함王鹹, 이권李權 등 10여 명을 죽여서, 위광과 형벌을 세웠다.

 

익부기구잡기 益部耆舊雜記 에서 이르길 :

 

이 책은 수지에는 적혀있지 않다.

 

신당지 : 익주기구잡전기 益州耆舊雜傳記 는 2 권이다.

 

장종원의 수지고증에서 이르길 : 촉지 유언전의 주, 선주전의 주, 양홍전 楊洪傳 의 주, 양희전 楊戲傳 의 주에서 모두 익주기구잡기를 인용한다. 초학기 初學記 인부 人部 의 “장송張松은 사람됨이 키가 작고 몸이 작았으나, 방탕하며 절개와 지조를 신경 쓰지 않았다”란 두 어구는, 익부잡기 益部雜記 라고 칭해, 기구 耆舊 두 자를 줄였다.

 

심가본이 이르길 : 신당지에 이 책이 실렸는데, 잡전 雜傳 두 자는 잘못돼 뒤집힌 것이다. 양희전 말에서 “익부기구잡기에 실린 왕사王嗣, 상파 常播, 위계衛繼 3 사람은, 모두 유씨가 촉에서 왕노릇 할 때 사람이기에, 이 편에 기록한다”라고 이르니, 이에 근거하면, 잡기는 진수의 이전에 있었기에, 진수가 이를 채집할 수 있었으니, 아마도 바로 진술陳術의 책일 것이다.

 

정국균丁國鈞이 이르길 : 화양국지에서 상관常寬이 진수의 기구전 耆舊傳 을 이어 양익편 梁益篇 을 지었다고 말하고, 신지 新志 에 익주기구잡전기 2 권이 있는데, 또한 바로 이 책이다.

 

오사감吳士鑒의 설도 같다.

 

노필이 살피길 : 심씨의 설이 옳고, 정씨, 오씨의 설은 잘못된 것이다. 대략 승조의 양희전에서 이미 이 책을 인용했으니, 결코 상관이 이어서 지은 양익편이 아니다.

 

이권의 자는 백예伯豫로, 임공장臨邛長이다.

 

군국지 : 익주 촉군 임공이다.

 

일통지 : 임공의 옛 성은, 지금의 사천 공주邛州의 치소다.

 

화양국지 : 진秦의 장의와 장약張若이 임공에 성을 쌓았는데, 성의 둘레는 6 리고, 높이는 5 장丈으로, 촉군 서남쪽 2백 리에 있다.

 

원화지 元和志 : 동관산銅官山은 임공현 남쪽 2리에 있으니, 등통鄧通이 봉해진 곳이다. 후에 탁왕손卓王孫이 사 도주陶鑄하는 곳으로 삼았다.

 

한서 사마상여전 司馬相如傳 에서 “사마상여와 탁문군卓文君이 함께 임공에 이르다”라고 했으니, 바로 이 곳이다.

 

자식은 이복李福이다. 건위의 양희의 보신찬에 보인다.

 

건위태수 임기任岐와 가룡이 이로 인해 유언에게 반역하며 공격하니, 유언은 임기, 가룡을 공격해 죽였다. 

 

화양국지 : 한헌제漢獻帝 초평初平 2년, 건위태수 임기와 가룡은 유언이 은밀히 법도에서 벗어난 계책을 도모하는 것을 꺼려, 거병해 유언을 공격하여, 성과 도읍을 불살랐다. 읍을 함락하고 저항하나, 동주東州 사람이 다수 진력하여, 마침내 임기, 가룡을 이겼다.

 

강신영姜宸英이 이르길 : 가룡은 도적을 격파하고 유언을 영접했다가, 유언이 역모를 꾸며 다시 유언을 공격해, 진실로 한 때의 준걸이었으니, 그가 세력을 잃음이 애석하구나.

 

영웅기 英雄記 에서 이르길 : 유언이 기병하여, 천하와 더불어 동탁董卓을 토벌하지 않고, 주를 보존하며 스스로를 지켰다. 건위태수 임기가 장군을 자칭하고, 종사 진초陳超와 거병해 유언을 공격하나, 유언이 이를 격파했다. 동탁이 사도司徒 조겸趙謙에게 

 

범서 헌제기 : 초평 3년 4월, 동탁을 주살했다. 6월, 이각李傕 등이 사도 왕윤王允을 죽였다. 전장군前將軍 조겸이 사도가 됐다.

 

조전전 趙典傳 에서 또한 이르길 : 조겸이 왕윤을 대신해 사도가 됐다.

 

이에 조겸이 사도라면, 동탁은 이미 전에 죽었으니, 이 “동탁이 사도 조겸에게 시키다”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병사를 거느리고 주로 향하게 했고, 교위 가룡을 설득해, 병사를 이끌고 유언에게 반격하게 하나, 유언이 청강青羌으로 출병해 더불어 싸웠기에, 격파해 죽일 수 있었다. 임기, 가룡 등은 모두 촉군 사람이다.

 

유언의 사욕은 점점 커져, 승여乘輿와 거구車具 

 

범서에선 구 具 를 중 重 이라 썼다.

 

장회주 : 중은, 치중辎重이다.

 

천여 승을 만들었다.

 

화양국지에선 “승여, 거복車服 천여를 만들며, 분수에 넘치게 지존에 견주었다”라고 썼다.

 

형주목 유표가 상표해 유언에게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서 성인으로 의심된 글과 비슷함이 있다고 하였다.

 

사기 중니제자열전 仲尼弟子列傳 : 공자가 죽고 나서, 자하는 서하에 머물며 가르쳤다.

 

예기 禮記 단궁편 檀弓篇 : 자하는 그의 자식을 잃고 그의 시력을 잃어, 증자曾子가 조문하니, 자하가 곡하길 :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다!” 증자가 노하여 이르길 : “상 商! 네가 어째서 무죄인가? 나와 너는 부자夫子를 수洙, 사泗의 사이에서 섬기다, 물러나 서하의 위에서 늙어갔는데, 서하의 백성이 너를 부자로 의심하게 했으니, 너의 첫 번째 죄다.”

 

호삼성이 이르길 : 유표는 아마도 유언이 촉에서 분수에 넘치게 윗사람에 견주어, 촉인들이 천자로 의심하게 한 것을 말한 것이다.

 

당시 유언의 자식 유범劉範은 좌중랑장左中郎將이었고, 유탄劉誕은 치서어사治書禦史, 유장劉璋은 봉거도위奉車都尉로, 모두 헌제를 따라 장안에 있었고,

 

영웅기에서 이르길 : 유범이 부친 유언이 익주목이 됐음을 들었을 때,

 

문 聞 자는 아마도 연자다.

 

동탁이 징발했으나, 모두 이르지 않았다. 유범 형제 3명을 잡아, 미오郿塢에서 형구를 채웠는데,  

 

미오는 동탁전에 보인다.

 

음옥陰獄을 지어서 구금했다.

 

감본에선 계 繋 를 격 擊 이라 썼는데, 오자다.

 

주수창이 이르길 : 음옥은, 바로 위지 장제전 蔣濟傳 에서 이른 지옥으로, 음침한 곳에 옥을 설치해, 사람이 쉽게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오직 어린 자식 별부사마別部司馬 유모劉瑁가 평소 유언을 따랐다.

 

혜동이 이르길 : 화양국지에서 이르길 : 유언은 관상가가 진류陳留의 오의吳懿의 여동생은 응당 대단히 귀해질 거라는 것을 들어, 유모가 그녀에게 장가들었다. 그러므로 진수의 유언전에서 “관상가의 말을 듣고, 오씨에게 구혼했다”라고 평했다.

 

노필이 살피길 : 이 일은 이주비자전 二主妃子傳 에 보인다.

 

헌제가 유장에게 유언을 타이르게 하나, 유언은 유장을 남겨두고 보내지 않았다.

 

전략 典略 에서 이르길 : 당시 유언은 봉거도위로, 경사에 있었다. 유언이 질병을 핑계로 유장을 부르니, 유장이 스스로 유언을 찾아 뵙겠다고 상표했는데, 유언은 마침내 유장을 머무르게 하며 돌려보내지 않았다.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馬騰이 미에 주둔하며 반역해, 유언과 유범은 마등과 더불어 같이 모의하며, 군을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다. 유범의 모의가 누설돼, 괴리槐裏로 달아났고, 마등은 패해서, 물러나 양주로 돌아가니, 유범은 때 맞춰 살해당했고, 이에 유탄을 잡아 형을 집행했다.

 

마등, 유범의 일은 위지 동탁전에 상세히 보인다.

 

범서 언전 焉傳 : 흥평興平 원년, 정서장군 마등과 유범이 이각을 주살하길 모의해, 유언이 수병叟兵 5천을 파견해 이를 돕게 하나, 싸우고 패해, 유범과 유탄은 모두 살해당했다.

 

강발상康發祥이 이르길 : 두 책에서 기록한 바가, 하나는 모반이고, 하나는 근왕勤王으로, 말하는 기세가 매우 다르다.

 

진인석陳仁錫이 이르길 : 유범, 유탄이 피살됐으니, 유언의 견식은 해바라기만도 못했다.

 

심가본이 이르길 : 이 때 마등과 유범 등이 이각을 주살하길 모의한 것은, 모반이 아니다. 이는 승조가 옛 글의 잘못을 계승한 것으로, 범씨가 이미 바로잡았다.

 

영웅기에서 이르길 : 유범은 장안에서부터 마등의 영으로 도망쳐 가, 유언으로부터 병사를 구했다. 유언이 교위 손조孫肇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나, 장안에서 패했다.

 

화양국지 : 치중종사治中從事 광한의 왕상王商이 따르지 말라고 극진히 간했다. 모의가 누설돼, 유범, 유탄은 주살됐다.

 

의랑議郎 하남河南의 방희龐羲가 유언과 인척이라,

 

유장의 장자 유순劉循의 처가 방희의 딸임은, 장전 璋傳 에 보인다. 방희가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선비를 좋아함은, 등지전 鄧芝傳 에 보인다.

 

이에 유언의 여러 손자를 모아 데리고 촉으로 들어갔다.

 

호삼성이 이르길 : 장 將 은, 여자 如字 로, 거느리다, 이끌다, 몸에 지니다다.

 

당시 유언은 저절로 난 불로 성이 탔고, 거구는 탕진됐으며,

 

화양국지에선 구 具 를 승 乘 이라 썼고, 범서에선 중 重 이라 썼다.

 

민가까지 확장됐다. 유언은 옮겨 성도에 이르렀는데, 이미 그의 자식을 슬퍼하였고,

 

화양국지에선 기 其 를 이 二 라 썼다.

 

또한 하늘의 재앙을 느껴, 흥평 원년, 큰 종기가 등에 일어나 죽었다.

 

설문 說文 : 저 疽 는, 오래된 등창이다.

 

주의 고급관리 조위趙韪 등은  

 

화양국지에선 “주의 막하사마帳下司馬 조위, 치중종사 왕상 등”이라고 썼다. 왕상은, 허정전 許靖傳 주에 보인다.

 

유장이 온화하고 어짐을 탐내, 함께 유장을 익주자사로 올리니, 조서로 이를 따르며 감군사자監軍使者, 영익주목 領益州牧 으로 삼고, 조위는 정동중랑장征東中郎將으로 삼으며, 무리를 거느리고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

 

영웅기에서 이르길 : 유언이 죽고, 자식 유장이 자사를 대신했다. 때마침 장안에서 영천颍川의 호모扈瑁를 자사로 임명해, 한중으로 들어가게 했다. 형주의 별가別駕 유합劉阖은, 유장의 장수 심미沈彌, 누발 婁發, 감녕甘甯이 반역해, 유장을 공격했다.

 

반미가 이르길 : 이 감녕은 바로 감흥패甘興霸로, 본전에선 일찍이 유장을 섬긴 것을 실지 않았으나, 오서 吳書 에선 “감녕이 일찍이 파군에서 객으로 있다, 촉군승蜀郡丞에 보임됐고, 후에 유표에게 의탁했다”라고 칭했으니, 바로 이 때다.

 

노필이 살피길 : 감녕은, 파군 임강臨江 사람이다.

 

이기지 못하고, 형주로 달아나 들어갔다. 유장이 조위에게 형주로 진공하게 해, 구인朐月+忍에 주둔했다. 위는 준蠢이고, 아래는 여如와 진振의 반절이다.

 

구인은, 위지 진류왕기 陳留王紀 함희鹹熙 2년에 상세히 보인다.

 

범서 언전 : 이전에 형주목 유표가 상표하여 유언이 승여와 기물, 의복을 분수에 넘치게 윗사람에 견줬다고 해, 조위가 이 때문에 마침내 구인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유표를 방비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상준하여진반 上蠢下如振反, 이 6 글자는 배裴씨의 음주다. 사고師古가 이르길 : 구 朐 는 음이 구劬다. 방여기요 方輿紀要 권 69 : 만현 萬縣 은, 한의 구인현이다. 삼국지 : 한 건흥建興 8년, 남포현南浦縣을 설치했는데, 파동군巴東郡에 속했다. 심약沈約이 이르길 : 당시 익주목 염우閻宇가 상표하여 양거羊渠를 고쳐 현을 세웠으니, 이 남포는 본명이 양거로, 촉이 이전에 현을 설치한 곳이다.

 

반미가 이르길 : 구 朐 는 음이 구劬인데, 이는 옛 음이다. 장회의 오한전 吳漢傳 주에서 인용한 십삼주지 十三州志 : 음은 준春이다. 진서음의 晉書音義 에서 인용한 여순如淳이 이르길 : 음은 준蠢이다. 후에 다시 구朐를 준 月+旬 으로 고쳤다. 준은 이미 속자俗字고, 준蠢 또한 옛 음이 아니라, 따라서는 안 된다. 인月+忍 자 또한 의당 지리 地理, 군국 郡國 두 지를 따라 인 忍 이라 써야 한다.

 

유종진柳從辰이 이르길 : 구인 朐月+忍 은, 다른 곳에선 구인 朐忍 이라 썼고, 설문 說文 에선 준인 月+旬月+忍 이라 썼는데, 지금 전前, 속지續志를 살피니 모두 구인 朐忍 이라 썼다. 전지 前志 의 안주 顔注 에서 “구 朐 는 음이 구劬다”라고 했고, 장회의 오한전 주에서 이를 따랐다. 그러므로 인月+忍 또한 음은 인忍이었다. 아래에서 다시 십삼주지의 “구 朐 는 음이 준春이다. 인月+忍은 음이 윤閏이다”를 인용해, 이설이 나란히 존재했다. 장회의 유언전 주에선 “인 月+忍 은, 음이 여如와 윤尹의 반절이다”라고 하여, 비록 인忍 음을 따랐었으나, 구朐 음은 준蠢이라 하여, 또한 같지 않았다. 음이 구劬라면 글자는 본래 구句를 따라야 하고, 음이 준春, 준蠢이라면 글자는 응당 순旬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단옥재段玉裁는 십삼주지에 근거해 “그 땅 아래는 습하여, 구인충朐忍蟲이 많다”라고 하여, 글자는 구인朐忍을 따르며, 준인 月+旬月+忍 이라 쓰지 않았다. 설문신부 說文新附 에서 준인月+旬月+忍 두 자를 늘리며, 비록 근본인 것이 있으나, 단씨가 이미 그 잘못을 철저하게 논했다. 구朐 자는 허許씨의 서 書 에 명백히 보이고, 오음집운 五音集韻 에선 속자라고 일렀으니, 진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다.

 

심가본이 이르길 : 상준 上蠢 이하 여섯 글자는, 응당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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