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처사군님의 블로그


유장劉璋의 자는 계옥季玉으로,

 

유장의 조모는 황씨黃氏로, 황완黃琬이 유장의 조모의 조카임은, 내민전 來敏傳 에 보인다. 유장의 모친 비씨費氏는, 비의전 費祎傳 에 보인다.

 

이미 유언劉焉의 직위를 이었으나, 장로張魯가 점점 교만하고 방자해져, 유장의 명을 순순히 따르지 않아, 유장은 장로의 모친과 그의 동생을 죽여, 마침내 원수가 됐다. 유장은 자주 방희龐羲 등을 파견해 장로를 공격하나 격파됐다.

 

관본 官本 고증 考證 에서 이르길 : 통감 通鑒 에선 “장로를 공격하다” 아래에 “다수 되다” 두 자가 더 있다.

 

장로의 부곡이 다수 파서巴西에 있었기에,

 

파동 巴東, 파서는, 위지 魏志 무기 武紀 건안建安 20년과 장합전 張郃傳 에 상세히 보인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속군국지 續郡國志 의 파군 巴郡 주에서 인용한 초주谯周의 파기 巴記 에서 이르길 : 초평初平 6년, 조위趙韪가 파를 2 군으로 나누고, 파의 옛 이름을 얻고자 하였기에, 군은 점강墊江을 치소로 삼았고, 안한安漢 이하는 영녕군永甯郡이 됐다. 건안 6년, 유장이 파를 나눠, 영녕을 파동군으로 삼고, 점강을 파서군으로 삼았다. 조일청이 살피길 : 여기서 인용한 파기에는 탈오가 있으니, 이 때문에 삼파三巴의 설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전씨조망全氏祖望이 이르길 : 초평 6년, 조위가 파를 둘로 나눴다. 건안 6년, 건윤蹇胤의 논쟁으로, 파를 셋으로 나눠, 영녕은 파동으로, 낭중阆中은 파서로, 점강은 파군으로 삼았으니, 이가 바로 삼파가 나눠 설치된 차례다. 다만 초평은 겨우 4년이라, 6년이라고 이름은, 오자일 뿐이다. 또한 유장이 자리를 이으며, 조위가 정동征東이 돼, 흥평興平 원년이, 바로 파를 나눈 해이다. 이를 초평으로 잘못 쓴 것이다. 건안 6년에 이르러 조위가 주살됐기에, 다시 파를 나눴을 뿐이다.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장로를 막게 했다.

 

장로는, 기사가 위지 장로전에 보인다.

 

범서 範書 언전 焉傳 : 장로는 유장이 어리석고 겁이 많으며 줏대가 없어, 명을 순순히 따를 수 없었다. 유장이 노해, 장로의 모친과 그의 동생을 죽이고, 그의 장수 방희 등을 파견해 장로를 공격하나, 자주 격파 당했다. 장로의 부곡이 다수 파 위에 있었기에, 방희를 파군태수로 삼았는데, 장로가 이를 습격해 취하여, 마침내 파, 한 漢 에서 웅걸이 됐다.

 

화양국지 華陽國志 : 유장이 유약하고 결단력이 적어, 장로는 점점 한중에서 교만해졌고, 파이巴夷 두호杜濩, 박호 樸胡, 원약袁約 등이 배반해 장로에게 이르렀다. 유장이 노해, 장로의 모친과 동생을 죽이고, 화덕중랑장和德中郎將 방희를 파견해 장로를 토벌하게 하나, 이기지 못했다. 파인들이 나날이 배반해, 방희를 파군태수로 삼아, 낭중에 주둔해 장로를 막게 하니, 방희가 의당 병위兵衛가 필요하다고 해서, 번번이 한창漢昌의 종賨 백성을 불러 병사로 삼았다.

 

영웅기 英雄記 에서 이르길 : 방희와 유장은 구의 舊誼 가 있었고, 또한 유장의 여러 자식이 난에서 면하였기에, 유장은 방희를 우대하며 고맙게 생각했는데,

 

모본 毛本 에선 희 羲 를 의 義 라 썼는데, 오자로, 아래도 같다.

 

방희를 파서태수로 삼으니, 마침내 권세를 전횡했다.

 

후에 방희와 유장의 정이 깊던 사이가 나빠졌고, 조위가 거병해 안으로 향하여, 무리는 흩어지고 살해됐으니, 모두 유장이 명확히 판단을 내림이 적고 밖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화양국지 : 어떤 이가 방희를 유장에게 음해해, 유장과 그의 정이 깊던 사이는 나빠졌다. 조위가 자주 간언을 올리나, 따르지 않아, 또한 원망하였다. 건안 5년, 조위가 수만을 기병하여, 장차 유장을 공격하려는데, 유장이 역격했다. 다음 해, 조위가 패하여, 방희는 두려워, 사자 정욱程郁을 파견해 (통감에선 욱 郁 을 기 祁 라 썼다.) 정욱의 부친 한창령漢昌令 정기程畿에게 뜻을 밝히며, 익益의 종賨의 군을 요구했다. 정기가 이르길 : “군에서 부곡을 합침은, 본래 난을 위해서가 아니고, 설령 참소나 아첨이 있더라도, 중요한 것은 정성을 다함에 달려 있습니다. 마침내 다른 뜻을 품음은, 들어서 알 바가 아닙니다.” 방희가 정욱에게 거듭 가게 하니, 정기가 이르길 : “나는 주목의 은혜를 입어, 응당 절의를 다해야 한다. 너는 군의 관리이니, 응당 충성을 다해야 한다. 불의한 일에는, 두 정의가 있을 수 없다.” 방희가 이를 원망해, 사람을 보내 고하길 : “태수를 따르지 않으면, 집에 장차 화가 미칠 것이오.” 정기가 이르길 : “과거 악양樂羊이 자식을 먹었으나, 부자의 은혜는 없지 않았으니, 대의가 그러하오. 지금 비록 자식을 끓여도, 나 정기는 이를 먹을 것이오.” 방희가 이에 유장에게 두터이 사죄하니, 유장이 정기를 훌륭하다 여겨, 강양태수江陽太守로 승진시켰다.

 

영웅기에서 이르길 : 이전에, 남양 南陽, 삼보三輔의 사람이 익주에 수만 가가 유입돼, 거둬서 병사로 삼으며, 동주병東州兵이라고 지칭했다. 유장의 천성은 너그럽고 연약하며, 위세와 모략이 없어, 동주 사람들이 옛 백성들을 침범해 포악하게 행동하나, 유장은 금할 수 없었고, 정령政令은 이지러짐이 많아, 익주에선 자못 원망하였다. 조위가 본디 인심을 얻어,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 조위는 유언을 따라 촉에 들어갔고, 유장 또한 조위가 세운 바라, 익주의 고관이었다.

 

유장은 그에게 위임했다. 조위는 백성의 원망을 이용해 모반하여, 곧 형주荊州에 재물을 후하게 주고 화친을 청하고,

 

호삼성이 이르길 : 형주는, 유표劉表다.

 

은밀히 주 안의 대성大姓을 모아, 함께 기병하여, 도리어 유장을 공격했다. 촉군 蜀郡, 광한 廣漢, 건위犍爲가 모두 조위에게 호응했다. 유장이 성도성成都城으로 달려 들어가 지키니, 동주 사람들은 위세를 두려워해,

 

위 威 는 응당 위 韪 라 써야 한다.

 

모두 동심으로 협력해 유장을 도와, 모두 죽음을 결심하고 싸우니, 마침내 반란군을 격파하고, 나아가 강주江州에서 조위를 공격했다.

 

군국지 郡國志 : 익주 파군의 치소는 강주다.

 

일통지 一統志 : 강주의 옛 성은, 지금의 사천四川 중경부重慶府 파현 서쪽이다.

 

조위의 장수 방락龐樂, 이이李異가 배반해 조위군을 죽이고, 조위를 참살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 조위는 유언을 따라 촉에 들어가, 장차 부귀를 도모하나, 끝내 자신을 죽였다. 위험한 곳에 가서 행복을 바라는 것은, 편안한 곳에 머물며 천명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한헌제춘추 漢獻帝春秋 에서 이르길 : 한조漢朝는 익주의 난을 듣고,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 우단牛亶을 파견해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고, 유장을 징소해 경卿으로 삼으나,

 

호삼성이 이르길 : 경은, 구경九卿이다.

 

이르지 않았다.

 

유장은 조공曹公이 형주를 정벌했고, 이미 한중漢中을 평정함을 듣고,

 

하작何焯이 이르길 : “이미 한중을 평정하다” 네 자는 이해할 수 없으니, 아마도 탈문이 있다.

 

양장거梁章钜가 이르길 : 조조曹操가 한중을 평정하고, 장로가 달아남은, 건안 20년으로, 오히려 이로부터 수 년 후다.

 

왕명성王鳴盛의 설도 같다.

 

전의길錢儀吉이 이르길 : 이 때 유종劉琮이 조공에게 항복하고, 조공이 선주를 당양當陽에서 추격했고, 한漢을 건너, 적벽赤壁에 이르러 패해 목숨을 건지려고 달아나서, 한중에 이를 연고가 없다.

 

하내河內의 음부陰溥를 파견해 조공에게 경의를 표했다.

 

범서 언전 : 13년, 조조는 친히 장차 형주를 정벌하려 해, 유장이 이에 사자를 파견해 경의를 표했다.

 

화양국지 : 10년, 유장은 조공이 장차 형주를 정벌하려 함을 듣고, 중랑장中郎將 하내의 음부를 파견해 경의를 표했다.

 

노필이 살피길 : 범서에선 이 일을 건안 13년으로, 화양국지에선 10년으로 썼다. 건안 10년을 살피니 조공은 한창 기주冀州를 평정하고, 북으로 유幽, 병 並 을 정벌해, 남으로 형주에 이를 틈이 없다.

 

유장에게 진위장군振威將軍을 더해주고, 형 유모劉瑁는 평구장군平寇將軍으로 삼았다.

 

반미潘眉가 이르길 : 유언의 네 자식은, 유범 劉範, 유탄 劉誕, 유장과 소자小子 유모다. 유모는 바로 유장의 동생으로, 형 유모라고 칭함은, 잘못된 것이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유장의 자는 계옥季玉이니, 즉 유장은 바로 유언의 막내로, 유모가 유장의 동생이라고 갑자기 이를 수는 없는 듯하다. 범사範史에서 또한 형 유모라고 칭했는데, 소자라고 칭함은, 혹 서얼인 자식인지도 모른다.

 

유모는 정신병으로 죽었다.

 

한서 漢書 소무전 蘇武傳 : 선우單于가 소무의 관속을 불러 모으니, 이전에 항복하고 죽어서, 무릇 소무를 따라 돌아간 이는 9 명이었다.

 

사고師古가 이르길 : 물고 物故 는 죽음을 이른 것이다. 그가 귀신과 함께 해 죽은 것을 말한다. 일설에는, 척언斥言하고 싶지 않아, 다만 그가 복용한 물건이 모두 이미 오래됨을 말하는 것일 뿐이나, 말하는 이가 망령되이 물物을 물勿로 고치고자 한 것은, 옳지 않다.

 

송기宋祁가 이르길 : 물物은 응당 몰歾로 써야 하며, 음은 몰沒이다.

 

왕염손王念孫이 이르길 : 석명 釋名 : 한漢이래로 죽음을 물고라 이르니, 그의 여러 물건이 모두 썩고 오래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기 史記 장승상전 張丞相傳 의 집해 集解 에서 인용한 고당륭高堂隆이 위조魏朝의 물음에 답하길 : 물 物 은, 없다고, 고 故 는, 일이다. 일에서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왕염손이 살피길 : 송씨의 설이 이에 근접한다. 물 物 과 몰 歾 은 같다. 설문에서 “몰 歾 은, 끝나다다”라고 하며, 혹 몰 殁 이라 쓴다. 몰 歾, 물 物 은 소리가 비슷하며 글자가 통한다. 지금 오吳인들이 물 자를 말하며, 소리가 몰沒과 같은데, 말에 경중輕重이 있는 것일 뿐이다. 물고는, 사망을 말하는 것과 같다. 초원왕전 楚元王傳 에서 “물고하고 유리流離함이 십만수十萬數”라고 일렀고, 하후승전 夏侯勝傳 에서 “백성이 유리하고 물고함이 과반”이라고 일러, 물고와 유리는 대문對文으로, 모두 두 자가 나란히 놓인다. 여러 학자가 모두 물物이 몰 歾 의 차자借字임을 알지 못했기에, 이를 더욱 깊은 곳에서 구하며, 더욱 먼 곳에서 놓친 것이다.

 

노필盧弼이 살피길 : 곽광전 霍光傳 : 곽광이 좌우에게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길 : “숙위宿衛를 조심스럽게 해야 하니, 별안간 물고나 자재自裁가 있으면, 내가 천하에 빚지며, 임금을 죽인 명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사고가 이르길 : 물고는 죽음이다. 자재는 자살이다. 이는 즉 물고와 자재는 서로 연속해 이를 말하는 것이다.

 

신 배송지裴松之가 상고하건대 : 위魏의 대台에서 물고의 뜻을 물으니, 고당륭이 답하길 : “선사先師께 이를 물으니, 물은 없다고, 고는, 일로, 일에서 다시 할 수 있는 바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서 유림전 儒林傳 모장전 牟長傳 의 주에서 이를 인용해 “죽은 이는 사고事故에서 다시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말한다”라고 썼다.

 

강발상康發祥이 이르길 : 지금 사람은 사람의 죽음을 물고라고 하니, 이것에 근거한다.

 

유장이 다시 별가종사別駕從事 촉군의 장숙張肅을 파견해 수병叟兵 3백 명과

 

이현李賢이 이르길 : 한대에는 촉蜀을 수叟라고 일렀다. 공안국孔安國이 상서 尚書 에 주를 달길 : 촉은, 수다.

 

후한서 後漢書 유언전 관본 官本 고증 考證 에서 이르길 : 공영달 孔穎達 의 상서소 尚書疏 에서 이르길 : 수란, 촉이蜀夷의 별명으로, 한대에는 곧 촉을 수라고 이르지 않았다. 광무기 光武紀 안의 주에서 인용한 상거常璩의 화양국지에서 이르길 :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 수이叟夷가 반역해, 장군 곽창郭昌이 이를 토벌해 평정해서, 익주군益州郡을 개척했다. 이에 촉인들은 그들의 서남쪽의 노심勞深, 미막靡莫 여러 이夷를 수라고 일렀으니, 바로 지금의 운남雲南 땅이다.

 

혜동惠棟이 이르길 : 화양국지에서 이르길 : 이인夷人은 큰 종족은 곤昆이라고 하고, 작은 종족은 수라고 하니, 모두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의 목이木耳로, 고리는 철로 꾸며져 있다.

 

아울러 여러 어물禦物을 조공에게 보내니, 조공이 장숙을 광한태수廣漢太守로 임명했다. 

 

광한군의 치소는 낙雒으로, 앞에 보인다. 화양국지에선 이를 12년의 일로 실었고, 아울러 “장숙을 연掾으로 임명했다”고 일렀다.

 

유장이 다시 별가別駕 장송張松을 파견해 조공에게 이르게 하나, 조공이 당시 이미 형주를 평정했고, 선주를 달아나게 해, 다시 장송을 살피며 취하지 않아, 장송은 이로 인해 원망하였다.

 

장송의 일은 선주전 先主傳 주에서 인용한 익부기구잡기 益部耆舊雜記 에 보인다.

 

화양국지에서 이르길 : 13년, 여전히 장숙의 동생 장송이 별가가 돼 공에게 이르렀다. 공이 당시 이미 형주를 평정하고, 유주劉主를 추격하며, 장송을 살피며 예우하지 않았고, 거기다 겉모습이 부족하여, 다만 월수越嶲의 비소령比蘇令으로 임명해, 장송이 이 때문에 공을 원망했다.

 

때마침 조공의 군이 적벽에서 불리했고,

 

적벽은, 위지 무기 건안 13년에 상세히 보인다.

 

아울러 전염병으로 죽었다. 장송이 돌아와, 조공을 헐뜯고, 유장에게 스스로 단절하라 권하며,

 

한진춘추 漢晉春秋 에서 이르길 : 장송이 조공을 만나나, 조공은 한창 정벌을 스스로 자랑하며, 장송을 살피며 취하지 않았다. 장송이 돌아와, 이에 유장에게 스스로 단절하길 권했다.

 

습착치習鑿齒가 이르길 : 과거 제환齊桓공이 한 번 그의 공을 자랑해 배반함이 9 나라였고,

 

공양전 公羊傳 에서 이르길 : 규구葵丘의 회맹에서, 제환공이 위세를 떨치고 이를 자랑하니, 배반함이 9 나라였다.

 

조조는 잠시 스스로 교만해져 정벌하다

 

모본 毛本 에선 벌 伐 을 아 我 로 썼는데, 오자다.

 

천하가 삼분돼, 모두 수십 년 내에 이를 힘쓰다 굽어보고 쳐다보는 순간에 이를 돌보지 않았으니, 어찌 아깝지 않은가! 이 때문에 군자는 해가 저물 때까지 큰 공로가 있어도 겸손하고, 근심하며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을 낮추고, 공이 높아도 겸손함으로 이에 머물고,

 

감본監本에선 지 之 자가 없는데, 잘못된 것이다.

 

권세가 높아도 겸손하게 낮춤으로 이를 지킨다. 정情은 만물에 가깝기에, 비록 귀해져도 사람들은 그 중함을 싫어하지 않고, 덕은 모든 사람에게 두루 미치기에, 공이 넓어져도 천하가 그 경사를 더욱 기뻐한다. 대저 그러하기에, 부귀를 가지고, 공업을 보전하며, 당시에 고귀해지고 빛나고, 백세에 복을 전할 수 있는 것인데, 어찌 교만하고 자부함을 가졌던 것인가! 군자는 이로 인해 조조가 마침내 천하를 아우를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유장을 설득하길 : “유예주 劉豫州 는, 사군使君의 폐부肺腑로, 더불어 친교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유장이 모두 그러하다고 여겨, 법정法正을 파견해 선주와 친교를 맺게 하고, 이윽고 다시 법정과 맹달孟達에게 병사 수천을 보내 선주를 도와 적의 침입을 막게 해,

 

화양국지 : 장송은 부풍扶風의 법정이, 사자로 유주와 친교를 맺을 수 있다고 천거하여, 유장이 이를 따랐다. 다시 법정과 같은 군의 맹달을 파견해 병사를 거느리고 유주를 도와 막게 하니, 전후로 재물을 보냄이 끝이 없었다.

 

법정은 마침내 돌아왔다. 후에 장송이 다시 유장을 설득하길 : “지금 주 안의 여러 장수인 방희, 이이李異 등은 모두 공을 믿고 교만하며 멋대로 굴고,

 

 

호삼성이 이르길 : 배주裴注에 근거하면, 방희는 유장의 여러 자식을 난에서 면하게 했고, 이이는 조위를 죽였기에, 각각 공을 믿었다.

 

 

두 마음을 가지고자 하니,

 

호삼성이 이르길 : 그들의 뜻이 남을 따르고자 함을 이른 것이다.

 

예주를 얻을 수 없으면, 적은 밖을 공격하고, 백성은 안을 공격해, 필시 무너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장송, 법정이 유장에게 선주와 맺길 권함은, 선주전과 법정전에 상호 보인다.

 

화양국지 : 건안 16년, 유장은 조공이 장차 사례교위司隸校尉 종요鍾繇를 파견해 장로를 정벌하려 함을 듣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는데, 장송이 유장에게 선주와 맺길 설득했다.

 

선주전과 같다.

 

유장이 다시 이를 따라, 법정을 파견해 선주를 청했다. 유장의 주부主簿 황권黃權이 그 이해를 늘어놓고,

 

황권이 간해 유장이 선주를 맞이함을 막음은, 권전 權傳 에 상호 보인다.

 

종사從事 광한廣漢의 왕루王累가 스스로 주문州門에 거꾸로 매달려서 간하나, 유장은

 

화양국지에서 이르길 : 종사는 열렬하고 지극하여, 주군에게 간하며 스스로 목을 벴다. 왕루는, 광한 신도新都 사람이다. 주목州牧 유장이 별가 장송의 계책을 따라, 법정을 파견해 선주를 영접하니, 주부 황권이 받아들이지 말라고 간했고, 왕루는 종사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간하며, 주문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불가함을 밝혔다.

 

하나라도 받아들이는 게 없어, 가는 곳마다 선주를 모시게 하여, 선주가 경내에 들어감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화양국지 : 선주가 파군에 이르니, 파군의 엄안嚴顔이 가슴을 치며 탄식하길 : “이는 소위 궁벽한 산에 홀로 앉아, 호랑이를 풀어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선주가 강주江州에 이르러, 북으로 점강墊江의 수로를 통해

 

점墊의 음은 도徒와 협協의 반절이다.

 

군국지 : 파군 점강이다.

 

송서 宋書 주군지 州郡志 : 점강은, 한의 옛 현이다. 헌제獻帝 건안 6년 파서에 속했다. 유선劉禅 건흥建興 15년 복구했다.

 

일통지 : 지금의 사천 중경부 합주合州의 치소다.

 

한서 지리지 地理志 : 파군 점강이다.

 

맹강孟康이 이르길 : 음은 중첩重疊의 첩疊이다.

 

왕선겸王先謙이 이르길 : 응소應劭가 이르길 : 음은 도徒와 협浃의 반절이다. 설문 說文 : 첩 褺 은, 옷 위에 옷을 더하는 것으로, 부수는 의衣고, 집聲이 소리로, 파군에 점강현이 있다. 단옥재段玉裁가 이르길 : 첩강현 褺江縣 은, 가릉강嘉陵江, 거강 渠江, 부강涪江이 모여 합치는 땅으로, 물이 옷이 중복되는 것과 같기에, 첩강이라고 일렀다. 견문이 좁은 사람이 혼점昏墊의 점墊으로 잘못 썼다. 응씨, 맹씨의 말을 보면, 한서는 확실히 의衣가 부수임을 알 수 있다.

 

부涪에 이르니,

 

음은 부浮다.

 

군국지 : 광한군 부다.

 

화양국지 : 부현은 자동군梓潼郡에 속해, 성도에서 350 리 떨어져 있다. 물은 파에 통하고, 촉에서는 동북의 중요한 곳이다. 촉 때 대장군大將軍이 이를 지켰다. 대사마大司馬 장완蔣琬은 이 곳에 매장했다. 대성大姓 양楊, 두 杜, 이 李 는, 인사人士가 기구전 耆舊傳 에 다수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파군의 치소는 강주고, 점강현은 파군에 속하고, 부현은 광한군에 속하니, 점강수墊江水는 아마도 부내수涪內水다.

 

유중옹庾仲雍이 이르길 : 강주현은 두 수구水口를 마주하니, 우측은 부내수고, 좌측은 촉외수蜀外水다. 

 

일통지 : 부현의 옛 성은, 지금의 사천 면주綿州 동쪽이다.

 

성도에서 360 리 떨어졌고,

 

송본 宋本, 원본元本에선 360 리라고 썼고, 각각의 본에선 삼백을 삼천이라고 모두 잘못 썼다.

 

관본 고증에서 노명해盧明楷가 이르길 : 등애전 鄧艾傳 : 한漢의 덕양정德陽亭을 지나 부로 향해, 검각劍閣의 서쪽 백 리로 출병하면, 성도에서 3백여 리 떨어져있다. 만약 부가 성도까지 3천여 리라고 일렀어도, 여기는 응당 이와 같이 멀지 않으니, 삼천은 혹 삼백이 와전된 것이다. 

 

전의길 錢儀吉, 이자명李慈銘의 설도 같다.

 

이 해는 건안 16년이다. 유장이 보기 3만여 명을 거느리니, 거승車乘의 휘장이,

 

호삼성이 이르길 : 승 乘 은 승繩과 증證의 반절이다. 만 幔 은 막莫과 반半의 반절로, 휘장이다.

 

찬란한 햇빛아래에서 광택이 났고, 가서 더불어 만나니,

 

범서 : 유비가 강릉에서부터 달려 부성에 이르니, 유장이 보기 수만을 거느리고 유비와 만났다.

 

선주가 거느린 장사들은, 교대로 서로 가고 맞이하며,

 

호삼성이 이르길 : 지 之 는, 가다다.

 

백여 일이나 즐겁게 연회를 벌였다. 유장이 선주에게 물자를 공급해주고, 장로를 토벌하게 한 연후에, 나뉘어 헤어졌다.

 

장송이 법정을 시켜 선주에게 아뢰도록 해, 곧 연회에서 유장을 습격하라고 함은, 선주전에 보인다.

 

오서 吳書 에서 이르길 : 유장은 쌀 20만 곡, 말 천 필, 수레 천 승, 증서缯絮와 금백錦帛을, 물자로 유비에게 보냈다.

 

다음 해, 선주가 가맹葭萌에 이르러,

 

한서 지리지 : 광한군 가명葭明이다.

 

응소가 이르길 : 음은 가맹家盲이다.

 

사고가 이르길 : 명 明 은, 음이 맹萌이다.

 

(전대흔錢大昕이 이르길 : 옛 음은 명이 맹盲과 같다.)

 

군국지 : 광한군 가맹이다.

 

화양국지 : 진수현晉壽縣은 본래 가맹성으로, 유씨가 한수漢壽로 고쳤다. 물은 파서로 통하고, 또한 한천漢川으로 들어가며, 촉의 대장군이 이를 지켰다. 대장군 비의가 이곳에 매장됐다.

 

호삼성이 이르길 : 촉왕蜀王이 그의 동생 가맹을 이 곳에 봉하여서, 이름을 읍으로 삼았다. 선주가 한수로 고쳤다.

 

일통지 : 지금의 사천 보녕부保甯府 소화현昭化縣 남쪽이다.

 

한수는 위지 제왕기 齊王紀 가평嘉平 5년에 상세히 보인다.

 

병사를 돌려 남으로 향해, 가는 곳마다 모두 이겼다.

 

화양국지에 선주가 유장에게 서신을 전해 만 명의 병사를 더해줘 손권을 구하길 원함을 실은 것은, 선주전에 보인다. 또한 방통龐統의 3 책략을 실은 것은, 통전 統傳 에 보인다. 언사가 대략 같아, 기록하지 않았다.

 

범서 언전 : 장송이 유비에게 연회에서 유장을 습격하길 권하나, 유비는 차마 하지 못했다. 다음 해, 출병해 가맹에 주둔했다. 장송의 형 광한태수 장숙이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장송의 모의를 유장에게 아뢰, 장송을 잡아 참살하고, 여러 관문과 성루에 다시 통함이 없게 하였다. 유비가 대노해, 군을 돌려 유장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싸워 이겼다.

 

19년, 나아가 성도를 포위하길 수십 일, 성 안에는 여전히 정병 3만 명이 있었고, 곡식과 비단이 2년을 버틸 수 있었고,

 

송본에선 이 二 를 일 一 로 썼고, 범서, 통감도 같다. 화양국지에선 “곡식이 2년을 버틸 수 있다”라고 썼다.

 

관리와 백성은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우고자 했다. 유언이 말하길 : “우리 부자가 주에 20여 년 있으며,

 

호삼성이 이르길 : 영제靈帝 중평中平 5년, 유언이 익주를 통치해, 이 때까지 27년이다.

 

은덕을 백성에게 베푼 적이 없다. 공격하며 싸우길 3 년,

 

건안 17년부터 19년까지다.

 

살가죽이 초야를 적심은, 나 유장 때문인데, 어찌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성을 열고 나와 항복하니,

 

화양국지 : 유장이 마침내 장예張裔를 파견해 사명을 받들고 유주에게 이르게 하니, 유주는 장예가 그의 주군을 예우함을 허락해 백성을 안정시켰다. 유주가 다시 종사중랑 탁군涿郡의 간옹簡雍을 파견해 유장을 설득하게 하니, 유장은 본디 간옹을 공경하여, 마침내 같은 수레를 타고 나와 항복했다.

 

신하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선주가 유장을 남군南郡 공안公安으로 옮기고,

 

군국지 : 형주 무릉군武陵郡 잔릉孱陵이다.

 

유소주劉昭注에서 인용한 위씨춘추 魏氏春秋 에서 이르길 : 유비가 형주에서 도읍한 곳으로, 공안으로 고쳤다.

 

선주전 : 유기劉琦가 죽고, 신하들은 선주를 형주목으로 추거해, 공안을 치소로 삼았다.

 

강표전 江表傳 : 주유周瑜가 남군태수가 돼, 남안 땅을 나눠 유비에게 줘, 유비는 별도로 유강구油江口에 영을 세우고, 공안으로 개명했다.

 

수경 水經 강수주 江水注 : 강수는 다시 동으로 가, 오른쪽으로 유구油口와 합쳐져, 다시 동으로 공안현 북쪽을 경유한다. 유비가 강릉으로 달려가, 쌓아서 이를 지키게 했다. 

 

일통지 : 잔릉의 옛 성은, 지금의 호북湖北 형주부 공안현 남쪽이다. 공안의 옛 성은, 지금의 공안현 동북쪽이다.

 

노필이 살피길 : 잔릉, 공안은 본래 두 현으로, 만약 위씨춘추에서 이른 바와 같다면, 잔릉을 공안으로 고친 것이다. 선주가 고친 곳은 알 수 없는데, 만일 유강구를 공안으로 고쳤다면, 잔릉을 공안으로 고친 것은 아니다. 잔릉은 지금의 공안 서남쪽이고, 공안은 지금의 공안 동북쪽으로, 삼국의 오에선 모두 남군에 속했기에, 이 전에선 남군 공안이라고 일렀다. 어떤 이는 장회주章懷注에서 인용한 촉지 蜀志 에서 “선주가 유장을 공안 남쪽으로 옮겼다”라고 일렀다며, 이 전에서 남 南 자는 잘못돼 거꾸로 된 것이고, 또한 군 郡 자는 연자인 듯하다고 일렀다. 그러나 화양국지에서 “유장을 남군의 공안으로 옮겼다”라고 일러, 이 전과 같다.

 

그의 재물,

 

범서에선 재보라고 썼다.

 

예전에 두르던 진위장군振威將軍 인수는 모두 돌려줬다. 

 

감본, 관본에선 고 故 위에 급 자가 있다.

 

하작이 이르길 : 송본에서 고 자는 패 佩 자 아래에 있다. 장회주에서 인용한 촉지에선 “여전히 차다”라고 썼다.

 

호삼성이 이르길 : 조공이 이전에 유장에게 진위장군을 더해줬기에, 그 인수를 여전히 찬 것이다.

 

손권孫權이 관우關羽를 죽이고, 형주를 취해서,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고, 자귀秭歸에 주둔시켰다. 

 

자귀는, 위지 문기 文紀 황초黃初 3년에 상세히 보이며, 지금의 호북 의창부宜昌府 귀주歸州 치소다.

 

유장이 죽고,

 

화양국지 : 유주가 동으로 정벌할 때, 유장은 오에서 죽었다.

 

남중南中의 세력이 뛰어난 우두머리 옹개雍闿가 익군益郡을 방어하며 반란을 일으켜, 오를 따랐다. 

 

후주전 後主傳 : 건흥建興 원년, 이전에 익주군益州郡에서 대성 옹개가 배반했다.

 

군국지에 익주군이 있는데, 여기선 주 州 자가 없다.

 

통감 : 황초黃初 4년 초, 익주군의 사나운 우두머리 옹개가 태수 정앙正昂을 죽이고, 사섭士燮을 통해 오에 귀부하길 구했다.

 

손권이 다시 유장의 자식 유천劉闡을 익주자사로 삼아, 교交, 익의 경계인 중요한 곳에 머물게 했다.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남쪽 땅을 평정하고,

 

후주전 : 건흥 3년, 승상 제갈량이 4군으로 남정해, 4군은 모두 평정돼서, 익주군을 건녕군建甯郡으로 고쳤다. 

 

유천은 오로 돌아가, 어사중승禦史中丞이 됐다.

 

오서에서 이르길 : 유천의 또 다른 이름은 위緯로, 사람됨이 공손하고 삼가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를 사모해, 자애로운 마음에 겸양하는 풍도가 있었으나, 후에 질병으로 집에서 죽었다.

 

애초에, 유장의 장자 유순劉循의 처는, 방희의 딸이었다. 선주가 촉을 평정하고, 방희는 좌장군사마左將軍司馬가 됐는데,

 

선주는 당시 좌장군이었다.

 

유장이 당시 방희의 아뢴 글을 따라 유순을 남겼었고, 선주가 그를 봉거중랑장奉車中郎將으로 삼았다.

 

홍이손洪饴孫이 이르길 : 봉거중랑장은, 한 사람으로, 건안 말 촉이 설치했다.

 

이로 인해 유장의 두 자식의 후손은, 오, 촉에 나뉘어 있게 됐다.

 

평하길 : 과거 위표魏豹가 허부許負의 말을 듣고 박희薄姬를 거둬 집에서 더불었고,

 

허부의 일은 위지 방기전 方伎傳 주건평전 朱建平傳 에 상세히 보인다.

 

사기 외척세가 外戚世家 : 박태후 薄太後 는, 부친이 오吳 사람으로, 성이 박씨인데, 진秦 때 옛 위왕魏王 종가의 딸 위오魏媪와 정을 통하여, 박희를 낳았다. 위표가 위왕으로 즉위했는데, 위온이 그녀의 딸을 위궁魏宮에 들였다. 위온의 허부가 관상을 봤는데, 박희의 관상을 보고는 이르길 : “응당 천자를 낳을 것입니다.” 위표가 허부의 말을 듣고, 속으로 홀로 기뻐하고, 한漢을 배반했다. 한이 조참曹參 등에게 공격하게 하여, 위왕 표를 사로잡고, 박희는 직실織室에 보내졌다. 한왕이 박희를 보니 용모가 아름다워, 조서로 후궁으로 들였고, 한 번 총애를 받고 남아를 낳았는데, 후에 효문황제孝文皇帝로 즉위했다.

 

공연 孔衍 의 한위춘추 漢魏春秋 에서 이르길 : 허부는, 하내河內 온현溫縣의 부인으로, 한고조漢高祖가 명자정후明雌亭侯에 봉했다.

 

신 배송지가 여기건대 : 지금의 동쪽 사람들은 모母를 부負라고 부르니, 공연이 허부를 부인으로 여김은, 유사함이 있는 듯하나, 한고조 때 모든 열후를 봉하며, 아직 향鄉, 정亭이란 작위는 없었으니, 아마도 이 봉작은 옳지 않습니다.

 

유흠劉歆이 도참圖谶의 글을 보고 이름을 고쳐 바꿨으나,

 

한서 유흠전 : 애초에, 유흠은 건평建平 원년 이름을 수秀로, 자는 영숙颍叔으로 바꿨다.

 

응소가 이르길 : 하도河圖 적복부赤伏符에서 이르길 : 유수劉秀가 발병해 무도한 이를 잡고, 사이四夷가 구름처럼 많이 모여 용이 들에서 싸우는 것 같고, 228년의 때에 불이 임금이 된다. 그러므로 개명해서 취했다.

 

끝내 그 자신들을 면하게 하지 못했고, 두 사람의 임금에게 경사가 모였다.

 

두 임금은, 한문제와 광무光武제를 이른 것이다.

 

이는 하늘과 땅의 신령에게는 헛된 요구를 할 수 없고, 

 

풍본 馮本 에선 허 虛 를 망 妄 이라고 썼다.

 

망령된 바람은 천명에 이를 수 없으니, 필연의 증험이다. 그러나 유언은 동부董扶의 말을 듣고 마음이 익의 땅에 있게 됐고, 관상가의 말을 듣고 오씨吳氏에게 구혼했으며,

 

이 일은 이주비자전 二主妃子傳 에 보인다.

 

급히 수레와 관복을 만들어, 신기神器를 훔치길 꾀했으니, 그의 미혹됨이 심하구나. 유장의 재주는 영웅이 아니나, 난세에 땅에 웅거했으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머물고 직무를 담당할 능력이 안돼 재앙을 불러일으킴은, 

 

역 易 해괘 解卦 의 말 : 짐을 지고 또한 타면, 도적이 이르니, 점을 쳐서 불길하여 그 일을 행하기 어려운 격이다. 상象에서 이르길 : 짐을 지고 또한 타는 것은, 또 부끄러울 만하다. 나로 인해 전투가 벌어졌는데, 또한 누구를 책망하겠는가?

 

정의 正義 에서 이르길 : 타는 것은, 군자의 기구다. 짐은 지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이를 사람에게 시행하면, 바로 수레나 말 위에서 물건을 진 것이다. 그러므로 도적들은 자신이 가질 바가 아님을 알아, 이에 다투어 이를 탈취하고자 하기에, “짐을 지고 또한 타면, 도적이 이른다”라고 한다.

 

자연의 도리로, 그가 탈취당함은, 불행이 아니다.

 

범울종範蔚宗이 논하길 : 유언은 당시 한창 어려움을 보고, 먼저 뒤에 망할 곳을 구하다, 견기見幾하고 행한 것에 가깝다. 대저 땅이 광할하면 거만하고 자존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재물이 넘치면 지나친 사치를 하려는 욕망이 행해지니, 진실로 또한 보통사람은 필시 이르는 뜻이다. 유장은 요해처를 막고 힘을 길러, 경계를 지키다 먼저 도모해, 오히려 세시歲時와 더불어 추이推移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히 이기利器를 보내고, 조용히 귀양가며 내쫓김을 당했으니, 소위 본질은 양인데 거죽은 호랑이었던 격으로, 승냥이를 보고 두려워, 호소했구나!

 

상거가 기리길 : 유언의 그릇은 영걸이 아니었는데, 요행을 쏴 맞추길 도모했고, 유장의 재주는 영웅이 아닌데, 난세에 땅을 웅거하다, 탈취당해서, 진자陳子는 불행이 아니라고 여겼다. 과거 제후齊侯가 진晉, 노魯의 사자를 비웃고, 도리어 업신여겨지는 괴로움을 당했다. 위군魏君이 공숙公叔의 시인侍人을 경시하다, 또한 땅을 할양하는 치욕을 당했다. 재주를 헤아리며 멀리까지 생각함이, 진실로 군자의 옛 슬기였다. 유장, 조공이 법정, 장송을 업신여김을 보니, 두 한을 품은 사람이 불리고 나서, 함께 원망하며 서로 도와, 혹 국가가 멸망하거나, 천하가 삼분됐으니, 옛 사람이 일궤십기一饋十起하고, 머리 감는 것을 그치고 발을 씻던 물을 뿌림은, 진실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장번張璠이 이르길 : 유장은 어리석고 약하나 좋은 말을 지켰으니, 이는 또한 송양공宋襄公, 서언왕徐偃王의 무리로,

 

좌전 左傳 희공僖公 22년 : 송공宋公이 초인楚人과 홍泓에서 싸웠다. 송의 군이 패해, 나라 사람들은 모두 공을 책망했다. 공이 이르길 : “군자는 다친 이를 또 다시 해치지 않고, 머리가 희끗한 노인을 사로잡지 않는다. 고대의 군은, 험하고 좁은 곳을 이용하지 않았다. 과인이 비록 망국의 후손이나, 대열을 이루지 못한 이에게 북을 치지는 않는다.”

 

사기 조세가 趙世家 : 서언왕徐偃王이 모반해, 목왕缪王은 하루에 천리마를 빨리 몰아, 서언왕을 공격해, 대파하였다.

 

후한서 동이전 東夷傳 서 序 : 서이徐夷가 참호했는데, 목왕穆王은 그들이 한창 성함이 두려워, 이에 동방의 제후를 나눠, 서언왕이 이를 주관하도록 명했다. 서언왕은 황지潢池 동쪽에 머물렀는데, 땅은 둘레가 5백 리로, 인의를 행했고, 육지이면서 문안함이 36 나라였다. 목왕이 후에 천리마의 수레를 얻어, 이에 조보造父에게 거느리고 초楚에 고하여, 서徐를 정벌하게 하니, 하루가 지나 이르렀다. 이에 초문왕楚文王이 크게 거병해 이를 멸했다. 서언왕은 어질지만 임기응변이 없어, 차마 그 사람들과 싸우지 못했기에, 패배했다.

 

시자 屍子 에서 이르길 : 서언왕은 근육은 있으나 뼈가 없었기에, 언偃이라 했다.

 

박물지 博物志 에서 이르길 : 서왕徐王은 요사스럽고 괴상했으며 예사롭지 않았는데, 언왕偃王이라고 자칭했다. 목왕이 초에게 그를 정벌하게 하나, 서언왕은 어질어, 차마 싸우지 못해, 초에게 패배하였다.

 

한서 인표 人表 : 서은왕 徐隱王.

 

사고가 이르길 : 바로 언왕이다.

 

노필이 살피길 : 서언왕의 일은, 이야기가 다수 상식에 맞지 않고, 초주谯周가 이미 변정辯正함이 있으니, 진봉횡陳逢橫의 죽서기년집증 竹書紀年集證 권 29, 양옥승 梁玉繩 의 인표고 人表考 권 6에 상세히 보인다.  

 

무도한 군주가 되지는 않았다. 장송, 법정은, 비록 군신의 의로는 옳지 않으나, 진실로 명분을 쌓고 귀순해 신복했기에, 나아가 사세를 명확히 말하지 못함은, 한숭韓嵩, 유광劉光이 유표를 설득함과 같고,

 

반미가 이르길 : 유표전에선 유광을 유선 劉先 이라고 썼다. 살피길 : 유선은 자가 시종始宗이라, 응당 이름은 선이 되니, 이 광 자는 오자다.

 

물러나며 마침을 고하지 않고 달아남은, 진평陳平, 한신韓信이 항우項羽를 떠남과 같으나, 두 사람이 두 마음을 품고, 불충함을 모의함은, 죄에 버금간다.

분류 :
촉서
조회 수 :
5979
등록일 :
2013.08.16
20:06:51 (*.131.108.250)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commentary/33739/8dd/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33739

코렐솔라

2013.10.19
11:08:13
(*.166.245.168)
처사군님의 경우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현재 중국음을 반영하여 재동->자동으로 바꾸신다고 합니다. 왕망이 잠시 자동으로 바꾼 적이 있지만 왕망은 음도 바꿨기에 별 참고도 안 되고 강희자전을 따르겠다고 하시더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삼국지집해 삼국지집해 목차 코렐솔라 2013-07-24 12684
공지 삼국지집해 삼국지집해의 도움말입니다. [2] 코렐솔라 2013-05-04 11515
57 오서 손익전 코렐솔라 2013-11-18 4758
56 오서 사섭전 코렐솔라 2013-11-18 5156
55 오서 손견전 [2] 코렐솔라 2014-01-17 5894
54 촉서 제갈량전1 코렐솔라 2013-11-18 6500
53 위서 무제기4 코렐솔라 2013-11-18 5063
52 오서 조달전 [6] 코렐솔라 2013-10-08 4670
51 촉서 동화전 [1] 사마휘 2013-10-05 4083
» 촉서 유장전 [1] 코렐솔라 2013-08-16 5979
49 촉서 유언전 코렐솔라 2013-08-09 5820
48 위서 등애전 코렐솔라 2013-07-09 7397
47 오서 여몽전 코렐솔라 2013-07-07 6285
46 위서 조충전 코렐솔라 2013-06-28 4590
45 위서 조삭전 코렐솔라 2013-06-28 4487
44 위서 조앙전 코렐솔라 2013-06-28 4587
43 촉서 장완전 코렐솔라 2013-05-26 5333
42 위서 여건전 코렐솔라 2013-05-23 4536
41 위서 장패전 [1] 코렐솔라 2013-05-23 5566
40 오서 정봉전 코렐솔라 2013-05-08 4368
39 오서 반장전 코렐솔라 2013-05-08 4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