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새로운나님의 이글루스


정봉丁奉의 자는 승연承淵으로, 여강廬江 안풍安豐 사람이다.

 

안풍은, 위지 魏志 제왕기 齊王紀 가평嘉平 5년에 보이고, 또한 왕기전 王基傳, 관구검전 毌丘儉傳 에 보인다.

 

어려서 용맹하여 소장小將이 돼, 감녕甘甯, 육손 陸遜, 반장潘璋 등에게 속했다. 자주 정벌에 따라가, 전투하면 항상 군에서 앞장섰다. 매번 장수를 참살하고 기旗를 뽑아 내며,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 점점 승진해 편장군偏將軍이 됐다. 손량孫亮이 즉위하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됐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위魏가 제갈탄諸葛誕, 호준胡遵 등을 파견해 동흥東興을 공격하니,

 

동흥은, 위지 제왕기 가평 4년에 보인다.

 

제갈각諸葛恪이 군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 여러 장수가 모두 이르길 : “적이 태부太傅께서 친히 오시는 것을 들었으니, 상륙하면 필시 달아날 것입니다.” 정봉이 홀로 이르길 :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그들의 경내를 움직여, 허許, 낙洛의 병사가 모두 크게 일어나서 왔으니, 필시 이미 정한 계획이 있을 것인데, 어찌 빈손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적이 이르지 않을 거란 것을 믿지 마시고, 우리들이 승리할 방법이 있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제갈각이 상륙하니, 정봉과 장군 당자唐咨, 여거 呂據, 유찬留贊 등은, 모두 산을 통해 서쪽으로 올라갔다. 

 

모본 毛本 에선 산 山 을 상 上 이라고 썼으니, 오자다.

 

정봉이 이르길 : “지금 여러 군의 행동이 더딘데, 만약 적이 유리한 지형을 점거했다면, 더불어 싸우기 어렵습니다.” 

 

통감 通鑒 에선 이 구절 아래에 “제가 빨리 걷길 바랍니다”란 4 자가 있다.

 

곧 여러 군을 불러 길에서 내려오게 하고,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 벽辟은 벽闢과 같이 읽는다. 여러 군을 불러, 길을 피하게 하고는 자신의 군이 전진한 것이다.

 

휘하의 3천 명을 거느리고 바로 나아갔다. 당시 북풍이 불어, 정봉은 돛을 들어서 2일이 지나 이르러, 마침내 서당徐塘을 점거했다.

 

통감에선 “2일이 지나 곧 동관東關에 이르러, 마침내 서당을 점거했다”라고 썼다.

 

호주 : 서당은, 아마도 동관과 가깝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방여기요 方輿紀要 권 26 : 서당은 유수수濡須水 동쪽에 있어, 또한 서알徐堨이라고 한다. 제갈탄전에서 오의 도적이 서알로 향하고자 한다”라고 했으니, 바로 서당이다. 아마도 동관의 동쪽에 있다.

 

위지 제갈탄전에 상호 보인다.

 

어떤 이가 이르길 : 서당은, 응당 도당 塗塘 이다. 손권전 孫權傳 : 군 10만을 파견해, 당읍堂邑에 도당을 만들어 북쪽 길을 잠기게 했다.

 

노필盧弼이 살피길 : 도당은 지금의 육합현六合縣 땅에 있고, 서당은 지금의 함산현含山縣 동남쪽에 있어, 진실로 두 땅이고, 글자의 형태가 비슷하다고 서로 섞일 수는 없으니, 어떤 이의 설은 잘못된 것이다.

 

날이 추워 눈이 내리는데, 적의 여러 장수는 술자리를 벌이고 성대하게 모여,

 

통감에선 “당시 하늘에서 눈이 내리며, 추웠는데, 호준 등이 바야흐로 술자리를 벌이며 성대하게 모였다”라고 썼다.

 

정봉이 그들의 선봉이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서로 이르길 : 

 

통감에선 “그의 부하에게 이르길”이라고 썼다.

 

“후작에 봉해지는 상을 취할 날은, 바로 오늘이다!” 곧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투구를 쓰고는, 단병短兵을 지니게 했다. 적들은 방종하며 비웃고, 

 

제갈각전 : 제갈각이 장군 유찬, 여거, 당자, 정봉을 파견해 선봉으로 삼았다. 당시 날이 추워 눈이 내렸는데, 위의 여러 장수는 모여서 음주하며, 유찬 등이 병사가 적은데다, 갑옷을 풀어두고, 모극矛戟은 지니지 않은 채, 다만 투구를 쓰고 칼과 방패만 들고, 알몸으로 둑에 오른 것을 보고, 크게 비웃었다.

 

방비하지 않았다. 정봉이 병사를 풀어 이를 쳐서, 적의 선봉 둔屯을 대파하였다. 때마침 여거 등이 이르러, 위군은 마침내 무너졌다. 멸구장군滅寇將軍으로 승진했고,

 

멸구장군은 한 사람으로, 오吳가 설치했다.

 

도정후都亭侯로 진봉됐다.

 

진경운陳景雲이 이르길 : 정 亭 은, 응당 향 鄉 으로 써야 한다. 정봉은 이미 정후에 봉해졌었고, 다시 향후로 봉하기에, 이는 진봉이 될 뿐이다. 진무陳武, 시의是儀가 도향후로 진봉된 것과 같다.

 

반미潘眉가 이르길 : 전에 이미 도정후로 봉해졌으니, 이번에는 도향후다. 정 자는 오자다.

 

위의 장수 문흠文欽이 항복해 와, 정봉을 호위장군虎威將軍으로 삼아, 손준孫峻을 따라 수춘壽春에 이르러 영접하게 하여, 적의 추격군과 고정高亭에서 싸웠다. 

 

고정은, 손량전 오봉五鳳 2년에 보인다.

 

정봉이 말을 타고 모를 지니고, 그들의 진 안으로 돌입해, 수백을 참수하고, 그들의 병장기를 얻었다. 안풍후安豐侯로 진봉됐다.

 

본현本縣의 후에 봉한 것이다.

 

태평太平 2년, 위의 대장군大將軍 제갈탄諸葛誕이 수춘을 근거로 항복해 와, 위인들이 그를 포위했다. 

 

각각의 본에선 모두 “장군 제갈탄이 수춘을 근거로 항복해 와, 위인” 12 자가 빠져있고, 오직 원본元本만 이가 있다. 관본 官本 고증 考證 과 왕명성王鳴盛은 원元 때 송본宋本이 이 12 자를 가졌던 것을 수정했다고 일렀으나, 잘못된 것이다.

 

주이朱異, 당자唐咨 등을 파견해 가서 구원하게 했고, 다시 정봉과 여비黎斐에게 포위를 풀게 했다. 정봉이 먼저 올라가, 여장黎漿에 주둔하며, 힘써 싸워 공을 세워서, 좌장군左將軍으로 임명했다.

 

왕명성王鳴盛이 이르길 : 각각의 본에선 태평 2년 아래에 위가 그를 크게 포위했다라고 써서, 포위된 자는 바로 정봉인 듯한데, 아랫글에선 어찌 다시 정봉에게 포위를 풀게 했다라고 이른 것인가? 원 때 송판宋板의 “위대 魏大” 아래에 “장군 제갈탄이 수춘에 근거해 항복해 와, 위인” 무릇 12 자가 있는 것을 수정하고, 연후에 “그를 포위했다”를 붙이며 운운하며, 이가 빠졌기에, 풀이할 수가 없었다. 문선 文選 에서 육기 陸機 의 변망론 辨亡論 의 이선주李善注에서 인용한 오지 吳志 가 바로 송판과 같으나, 이선이 인용한 “정봉이 먼저 오르다”의 아래에, 바로 “여비黎斐가 힘써 싸워 공을 세워”라고 이르며 운운했으니, 이는 사서를 지은 이가 여비가 열전이 없었기에, 정봉전 안에 여비의 일을 붙여 서술한 것일 뿐이다. 


속인俗人이 새기며 “둔우 屯于” 두 자를 잘못 덧붙였고, 다시 비 斐 를 장 漿 이라고 잘못 새겨, 마침내 여장黎漿은 지명이 됐고, 힘써 싸워 공을 세우며 좌장군에 임명된 것은 모두 정봉의 일이 된 듯하다. 어찌 윗글에서 정봉이 이전에 편장군, 관군장군, 멸구장군이 됐고, 도정후에 봉해졌고, 다시 호위장군이 됐고, 안풍후로 진봉됨을 알 수 있는데, 어떻게 이 때 좌장군으로 임명하겠는가? 아랫글에서 건형建衡 원년에 싸운 일을 서술함이 끝나고, 바로 “3년 죽었다”라고 이르고, 그 아래에선 다시 “정봉은 공이 있어 교만하고 자부하다”라고 말하고 운운하며, 속인이 새기다 죽었다는 글자를 빠뜨려서, 또한 이해할 수가 없도다. 

 

후강侯康이 이르길 : 왕씨가 송본과 문선 주에서 보충한 12 자에 근거함은 옳으나, “둔우” 두 자를 연문으로 여기고, 여장을 여비로 고침은, 아마도 옳지 않다. 통감에서 또한 “나아가 여장에 주둔했다”라고 썼다. 수경 비수주 肥水注 에서 “작피독수芍陂渎水는 동으로 여장수黎漿水로 흘러 들어가고, 여장은 동으로 여장정黎漿亭 남쪽을 경유한다. 문흠의 배반 때, 오군이 북으로 들어가니, 제갈서諸葛緒가 여장에서 이를 막았다”라고 하니, 바로 이 물이다. 

 

(상고하길 : 이 일은 등애전 鄧艾傳 에 실려있다.)

 

동으로 비수에 흘러 들어, 이를 여장수구黎漿水口라고 이른다. 이에 여장은 진실로 땅이 있다. 또한 제갈탄전에서 제갈탄 등이 여장수를 건넜다고 칭했고, 진서 晉書 석포전 石苞傳 에서 


“제갈탄이 회남에서 거병하여, 오가 대장 주이, 정봉 등을 파견해 와 영접하게 하니, 제갈탄 등이 치중을 도륙都陸에 남겨두고, 경병輕兵으로 여수黎水를 건넜다”


라고 하니, 여수는 바로 여장수의 생문省文이다. 제갈탄이 이를 건넌 까닭은, 바로 정봉이 여장수에 주둔했기 때문이다. 여러 전을 참고하니, 증거가 명백하게 드러나, 선 選 주에서 바로 윗글의 여비와 관련돼 잘못된 것이므로, 저 단사單詞에 근거해, 구사舊史를 경솔하게 고칠 수는 없다. (손호전 孫晧傳 의 주에서 인용한 변망론과 진서 육기전에선 모두 종리비 鍾離斐 라고 썼으나, 하작何焯은 종리목 鍾離牧 의 오자라고 의심했다.)

 

노필이 살피길 : 왕씨가 원본에 근거해 빠진 글을 보충한 것과, 후씨가 왕씨의 설의 잘못을 변정함은, 모두 옳다. 오직 왕씨가 이른 좌장군으로 임명한 일에 대해선 논급論及하지 않았다. 살피기론 전후좌우장군前後左右將軍은 각각 잡호장군雜號將軍의 위에 있고, 정봉은 호위장군으로 힘써 싸워 공을 세웠기에 좌장군으로 승진한 것이라, 사서의 글이 잘못된 것은 없으니, 왕씨의 말은 적합하지 못하다. 여장은, 위지 제갈탄전에 보인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후씨가 여장을 상고함은 상세하나, 선의 주가 잘못됐다고 이른 것은, 아마도 그렇지 않다. 이선이 여비로 인해 오서를 인용한즉, 힘써 싸워 공을 세운 자를 말하며, 스스로 여비라고 일렀지, 정봉이라고 이르지는 않았다. 아마도 지금의 판본의 “여장에 주둔했다” 아래에, 여전히 누락된 글이 있어서 그런 것일 뿐이다.

 

손휴孫休가 즉위해, 장포張布와 모의하며, 손침孫綝을 주살하고자 하니, 장포가 이르길 : 


“정봉이 비록 관부의 문서에는 능하지 못하나, 계략이 타인을 뛰어넘어, 대사를 결단할 수 있습니다.” 


손휴가 정봉을 불러 고하길 :


“손침이 국가의 권위를 장악하고,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행하려 하여, 장군과 더불어 그를 주살하고자 하오.” 


정봉이 이르길 : 


“승상丞相 형제와 우당友黨이 매우 강성하고, 인심이 같지 않아, 병사로 제압할 수 없을까 두려우나, 납회臘會를 이용하면, 폐하의 병사로 그들을 주살할 수 있습니다.” 

 

통감에선 “폐병陛兵을 가지고 주살하다”라고 썼다.

 

호주 胡注 : 졸 卒 은, 졸 猝 로 읽는다. 폐병은, 숙위하는 병사로, 전폐殿陛를 사이에 두는 자니, 소위 폐극陛戟하는 병사다.

 

손휴가 그의 계책을 받아들여, 납회를 이용해 손침을 청하니, 정봉과 장포가 좌우에게 눈짓해 그를 참살했다. 대장군으로 승진시키며, 좌우도호左右都護를 더해줬다. 영안永安 3년, 절節을 수여하고 서주목徐州牧을 겸하게 했다. 6년, 위가 촉蜀을 정벌해, 정봉은 여러 군을 거느리고 수춘으로 향하여, 촉을 구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촉이 망해, 군은 돌아왔다.

 

손휴가 죽어, 정봉은 승상 복양흥濮陽興 등과 만욱萬彧의 말을 따라, 함께 손호를 영접하여 세워, 우대사마右大司馬, 좌군사 左軍師 로 승진했다.

 

홍이손洪饴孫이 이르길 : 오에선 삼공三公으로써 이를 겸했고, 승상에 속하지 않았다.

 

보정寶鼎 3년, 손호가 정봉에게 제갈정諸葛靓과 합비合肥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정봉이 진晉의 대장 석포石苞에게 서신을 보내, 음해하고 이간하여, 석포는 징소돼 돌아갔다.

 

진서 석포전 : 제갈탄이 파멸하고부터, 석포가 곧 회남淮南을 진무鎮撫하니, 병마가 강성해졌다. 변경의 많은 일을, 석포는 여러 일에 대해 힘쓰고 나서, 또한 위엄과 은혜로 사람들이 진심으로 순종하게 했다. 회북감군淮北監軍 왕침王琛은 석포가 본디 미천하다고 업신여겼는데, 또한 동요에서 


“궁중의 큰 말이 거의 당나귀가 됐고, 큰 돌이 이를 눌러 편안할 수가 없구나”


라고 하는 것을 들어, 이로 인해 은밀히 상표하여 석포가 오인과 결탁했다고 하였다. 이전에 망기望氣하던 자가 “동남쪽에 대군이 일어남이 있습니다”라고 일렀는데, 왕침의 표가 이르러, 무제武帝는 매우 의심하게 됐다. 때마침 형주자사荊州刺史 호열胡烈이 상표하여 오吳인이 대규모로 출병해 침범하고자 한다고 하니, 석포 또한 오의 군이 장차 들어올거라고 들어, 이에 보루를 쌓고 물을 막아 스스로를 지켰다. 무제가 이를 듣고, 양호羊祜에게 이르길 : 


“오인이 매번 오면, 항상 동서로 서로 호응해서, 이와 같이 한쪽으로 치우칠 이유가 없으니, 설마 석포가 과연 불순한 마음을 가진 것인가?” 


양호가 이를 깊이 밝혀줬으나, 무제는 오히려 의심하였다. 때마침 석포의 자식 석교石喬가 상서랑尚書郎이 돼, 황상이 그를 불렀으나, 날이 지나도 이르지 않았다. 무제가 필시 배반하려 한다고 여기고, 석포를 토벌하고자 하면서 그 일을 숨기고, 마침내 조서를 내려 석포가 적의 세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보루를 쌓고 물을 막아, 백성을 고달프게 했다며, 그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태위太尉 의양왕義陽王 사마망司馬望을 파견해 대군을 거느리고 그를 징소하여, 비상사태를 방비하게 하고, 다시 칙서로 정동장군征東將軍 냥야왕琅邪王 사마주司馬伷에게 하비에서부터 수춘으로 모이게 했다. 석포는 연掾 손삭孫铄의 계책을 써서, 병사를 놓고 걸어 나와, 도정都亭에 가서 처벌을 기다렸다. 무제가 이를 듣고, 의심이 풀렸다. 석포가 조정에 이르니, 공公으로써 집에 돌아가게 했다. 석포는 스스로 임무를 맡고서 공이 없었음이 부끄러웠으나, 원망하는 낯은 없었다.

 

건형 원년, 정봉이 다시 무리를 거느리고 서당을 치소로 삼았다가, 진의 곡양谷陽을 공격했다.

 

군국지 郡國志 : 예주豫州 패국沛國 곡양이다.

 

일통지 一統志 : 지금의 안휘安徽 봉양부鳳陽府 영벽현靈壁縣 서남쪽이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21 : 곡양성은 숙주宿州 영벽현靈壁縣 서북쪽 75리에 있으니, 한漢의 현으로, 패군에 속했다. 응소應劭가 이르길 : “현은 곡수谷水의 북쪽에 있다.” 곡수는, 바로 수수睢水로, 진晉이 없앴다.

 

통감 : 진 태시泰始 6년 봄, 오의 정봉이 과구渦口로 들어왔다.

 

고이 考異 에서 이르길 : 오지 정봉전 : 건형 원년, 진의 곡양을 공격했다. 진제기 晉帝紀 에는 실려있지 않다. 본전에서 과구로 들어간 것을 말하지 않으니, 아마도 하나의 일이다.

 

곡양의 백성이 이를 알고, 떠나, 정봉은 얻은 바가 없었다. 손호가 노해, 정봉의 향도병 嚮導兵 을 참살했다. 3년 죽었다.

 

각각의 본에선 모두 졸 卒 자가 없다.

 

진경운陳景雲이 이르길 : 3년 아래에 각각의 본에선 모두 졸 자를 빠뜨렸다. 정봉이 건형 3년에 죽음은, 손호전에 보인다. (전대흔錢大昕의 설도 같다.)

 

조일청이 이르길 : 송서 宋書 오행지 五行志 : 손호 보정寶鼎 원년, 멧돼지가 우사마右司馬 정봉의 영에 들어갔다. 후에 정봉이 곡양을 공격하라고 파견당하나, 공이 없어, 손호가 노해, 그의 향도병을 참살했다. 대군을 일으켜 북으로 출병하고, 정봉이 만욱 등과 서로 이르길 : 


“만약 화리華裏에 이른다면, 각자 돌아가지 못할 수 없을 것이오.” 


이 모의가 누설됐는데, 정봉은 당시 오히려 이미 죽어서, 손호는 곡양을 토벌했던 일을 추궁해, 그의 자식 정온丁溫을 죽이고, 가속은 모두 멀리 귀양보냈다.

 

이 일은 또한 육개전 陸凱傳 주에 보인다.

 

정봉은 신분이 높고 공이 있어, 점점 교만하고 자부하여, 혹 비방하는 자가 있어서, 손호는 전에 출병해 얻은 바가 없었던 일을 추궁하여, 정봉의 가족을 임천臨川으로 귀양보냈다.

 

손호전 봉황 원년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 江表傳 에 상호 보인다. 임천은, 손량전 태평 2년에 보인다.

 

심가본이 이르길 : 만욱, 유평留平과 정봉이 같이 모의했으나, 정봉이 먼저 죽었기에, 손호의 독주는 오직 정봉에게 먹이지 못했다. 그러나 정봉의 가족이 귀양감은, 응당 이 때문으로, 어떤 이의 비방은, 아마도 그들의 밀담을 고한 것이다. 송서 오행지에서 또한 그 일을 실으며, 손호가 곡양을 토벌하던 일을 추궁해, 그의 자식 정온을 죽이고, 가속은 모두 멀리 귀양보냈다고 말했다. 이 전에서 자식 정온을 죽인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진씨陳氏가 빠뜨린 것이다. 또한 정봉과 육개, 정고丁固가 손호를 폐위시키는 것을 도모함이 실현되지 못한 것은, 기사가 개전 凱傳 에 보인다.

 

정봉의 동생은 정봉丁封으로, 관직은 후장군後將軍에 이르렀고, 정봉보다 먼저 죽었다.

 

항세준杭世駿이 이르길 : 송서 왕승작전 王僧綽傳 : 애초에, 태사太社 서쪽 공터 한 구역은, 오 때 정봉丁奉의 집이었으나, 손호가 그의 가족을 귀양보냈다. 강좌江左 초, 주의周顗, 소준蘇峻의 집이 됐었고, 그 후 원열袁悅의 집이 됐었고, 다시 장무왕章武王 사마수司馬秀의 집이 됐었으나, 모두 흉종凶終하였다. 후에 장도臧焘에게 줬는데, 또한 자못 재난을 만났기에, 흉지凶地라고 칭했다. 왕승작이 일찍이 정직하고 원대한 사람이라고 자처하며, 땅에는 길흉이란 게 없다고 여겨, 집으로 삼길 청했다. 비로소 지으나,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피살되는 화를 입었다.

 

평하길 : 무릇 이러한 여러 장수들은, 모두 강표江表의 용맹한 신하로, 손씨가 후하게 대접하였다. 반장은 수양하지 않았으나, 손권은 과실을 잊고 공을 기억할 수 있었으니, 그가 동남쪽에서 보위하며 웅거할 수 있었던 것도, 마땅하도다! 진표陳表는 장수의 집안의 서자이나, 주자胄子의 명인들과 날개를 나란히 하고 날며 가지런해, 같은 무리에서 뛰어남이 두드러졌으니,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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