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새로운나님의 이글루스


장패臧霸의 자는 선고宣高로, 태산泰山 화華 사람이다.

 

화현은, 무기 武紀 초평初平 4년에 보이며, 또한 조인전 曹仁傳 에 보인다.

 

잠연당금석문발미 潛研堂金石文跋尾 에서 이르길 : 한지 漢志 에선 태산군에 화현이 있으나, 속한지 續漢志 에는 없고, 방여기요 方輿紀要 에선 병합해 비현費縣에 편입시킨 거라 여긴다. 삼국지 三國志 를 상고하니 장패가 태산 화 사람이라고 칭했고, 태산도위공주비 泰山都尉孔宙碑 에서 또한 태산 화를 적은 것이 있으니, 그런즉 후한에선 원래 화현이 있었으나, 아마도 병합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설치한 것일 뿐이다.

 

양장거梁章钜가 이르길 : 홍량길 洪亮吉 의 보삼국강역지 補三國疆域志 에선 태산군에서 현 11을 거느리나, 아울러 화현은 없으니, 그가 빠뜨린 것이다.

 

노필 盧弼 이 살피길 : 홍씨는 진지 晉志 를 따라 화현이 낭야군琅邪郡에 속한다고 여긴 것이니, 양씨가 꼼꼼하게 조사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주수창周壽昌이 이르길 : 한漢 말 아직 태산 화현이 있었는데, 군국지 郡國志 에서 혹 이를 마침 빠뜨린 것일지도 모른다. 뱡여기요에서 병합하여 비현에 편입시킨 거라고 여긴 것은, 아마도 진晉 이후의 일이다.

 

부친 장계臧戒는, 현의 옥연獄掾이었는데, 법에 의거해 태수가 사사로이 죽이고자 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태수가 대노하여, 장계를 잡아 부府에 이르게 했는데, 당시 호송하던 이가 백여 명이었다. 장패의 나이는 18이었는데, 객 수십 명을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 비費 서산西山 안에서 기다리다가 빼앗으니,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서산은, 바로 몽산蒙山으로, 비현 서북쪽 50리에 있다.

 

호송하던 이는 감히 움직이지 못해서, 부친과 함께 동해東海로 망명해, 이로 인해 날래고 씩씩하다고 알려졌다. 황건黃巾이 기의해, 장패는 도겸陶謙을 따라 이를 격파하고,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됐다. 마침내 서주徐州에서 병사를 거두며, 손관孫觀, 오돈 吳敦, 윤례尹禮 등과 함께 무리를 모아, 장패가 우두머리가 돼, 개양開陽에 주둔했다. 

 

낭야국의 치소 개양은, 무기 흥평興平 원년에 보이고, 또한 변후전 卞後傳 에 보인다.

 

태조가 여포呂布를 토벌할 때, 장패 등은 군을 거느리고 여포를 도왔다. 여포를 사로잡고 나서, 장패는 스스로 도피했다. 태조가 불러모으며 찾아 장패를 얻고는,

 

풍본 馮本 에선 모 募 를 막 幕 이라고 썼다.

 

보고 기뻐하며, 장패에게 오돈, 윤례, 손관, 손관의 형 손강孫康 등을 부르게 하니, 모두 태조에게 이르렀다. 태조는 장패를 낭야상琅邪相으로 삼고, 오돈은 이성利城, 윤례는 동관東莞, 손관은 북해北海, 손강은 성양태수城陽太守로 삼으며,

 

무기 : 건안 3년, 낭야, 동해, 북해를 나눠 성양, 이성, 창려군 昌慮郡 으로 삼았다.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 성양은, 서한 때는 왕국이었는데, 광무光武제가 없애고, 병합해 낭야에 편입시켰다. 이성, 창려 두 현은 모두 동해에 속하는데, 이는 대략 여러 둔수屯帥가 머물러서 나눠 군으로 삼은 것이다.

 

전대흔錢大昕이 이르길 : 동관 또한 이 때 설치한 곳이다. 이성군은 언제 병합하고 없앴는지 자세히 밝힐 수 없다.

 

나머지는 무기 건안 3년 주에 상세히 보인다. 동관은, 하후현전 夏侯玄傳 에 보인다.

 

청青, 서徐 이주를 나눠, 이를 장패에게 맡겼다.

 

이통李通의 회淮, 여 汝, 장패의 청, 서, 더불어 종요鍾繇의 관중關中의 임무는 모두 중요한 것으로, 진실로 전체 국면에 관련된 것이며, 겨우 한쪽 구석의 득실이 아니다.

 

태조가 연주兖州에 있을 때, 서흡徐翕, 모휘毛晖를 장수로 삼았었다. 연주가 어지러워지니, 서흡, 모휘가 모두 배반했다. 후에 연주가 평정되고, 서흡, 모휘는 망명해 장패에게로 투항했다. 태조가 유비劉備에게 말하여, 장패에게 두 사람의 목을 보내게 하도록 말하라고 했다. 장패가 유비에게 이르길 : “저 장패가 자립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 장패는 공께서 생명을 보전해주시는 은혜를 입었기에,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왕패王霸의 군주라면 의義로 고할 수 있으니, 장군께서 이를 위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유비가 장패의 말을 태조에게 아뢰니, 태조가 탄식하고, 장패에게 이르길 : “이는 옛사람이 행하던 바인데 군이 이를 행할 수 있으니, 고가 바라던 바로다.” 이에 서흡, 모휘 모두를 군수郡守로 삼았다. 

 

장패의 이러한 거동은 우금于禁이 창희昌豨를 참살한 것보다 훌륭하다.

 

당시 태조가 한창 원소袁紹와 서로 대치하나, 장패가 자주 정병으로 청주에 들어갔기에, 태조는 원소에게 전념하며, 동방은 염려하지 않을 수 있었다. 태조가 원담袁譚을 남피南皮에서 격파해, 장패 등이 모여 하례했다. 장패가 이에 자제子弟와 여러 장수의 부형가속父兄家屬을 업邺에 이르게 하길 구하니, 태조가 이르길 : “제군의 충효가, 어찌 다시 이와 같겠는가! 과거 소하蕭何가 자제를 보내 들어가 모시게 하나, 고조高祖께서 거절하지 않으셨고, 경순耿純이 집을 불사르고 관을 실어 나르며 따르나, 광무제께서 거절하지 않으셨는데, 

 

모본 毛本 에선 무 武 를 조 祖 라 썼으니, 오자다.

 

내가 장차 어떻게 이를 어기겠는가!” 동주東州가 한꺼번에 어수선했는데, 장패 등이 정의를 굳게 지키며 포악한 이들을 정벌해, 해대海岱를 깨끗하게 평정하여, 공이 막대하였기에, 모두 열후로 봉했다. 장패는 도정후都亭侯가 됐고, 위로장군威虜將軍이 더해졌다.

 

홍이손洪饴孫이 이르길 : 위로장군은 한 사람으로, 제 5품이다.

 

다시 우금과 창희를 토벌했고, 하후연夏侯淵과 황건의 잔당 서화徐和 등을 토벌하며, 공을 세워, 서주자사徐州刺史로 승진했다. 패국공沛國公 무주武周가 하비령下邳令이 됐는데,

 

진경운陳景雲이 이르길 : 공 公 자는 연자다. 무주는, 패국 죽읍竹邑 사람으로, 호질전 胡質傳 의 주에 상세하다.

 

장패가 무주를 공경하며 우대해, 몸소 현령의 관사에 이르렀다. 부종사部從事가 급히 말하며 법을 어겨,

 

총동 謥詷 은, 정욱전 程昱傳 에 보인다.

 

무주가 그의 죄를 깨닫고는, 바로 잡아 고문함이 극에 달했으나, 장패는 더욱 무주를 옳게 여겼다. 손권을 토벌하는데 종군하여, 선봉이 돼, 다시 소호巢湖에 들어가,

 

원화군현지 元和郡縣志 : 소호는 합비현合肥縣 동남쪽 64리에 있으니, 본래는 거소현居巢縣 땅으로, 후에 함몰돼 호湖가 됐다.

 

일통지 一統志 : 합비현 동남쪽 70리에 있고, 서성현舒城縣 동북쪽 130리며, 소현巢縣 서쪽 10리다. 둘레는 4백여 리고, 작은 물길은 대소 360 개가 있어, 여러 물을 받아들여 대강大江으로 흐른다.

 

거소를 공격하여,

 

거소는, 무기 건안建安 22년에 보인다.

 

그들을 격파했다. 장료張遼가 진란陳蘭을 토벌할 때, 장패는 별도로 파견돼 환皖에 이르러, 오吳의 장수 한당韓當을 토벌해, 손권孫權이 진란을 구할 수 없도록 하였다. 한당이 군을 파견해 장패를 맞이해, 장패는 봉롱逢龍에서 더불어 싸웠고, 한당이 다시 군을 파견해 협석夾石에서 장패를 맞이하나,

 

육기 陸機 의 변망론 辨亡論 에서 이르길 : 봉롱蓬籠의 전투에서, 자수子輸는 돌아오지 못했다.

 

환우기 寰宇記 권 125 : 봉롱성逢龍城은 환수皖水의 북쪽에 있어, 마침내 환성이라고 불렀다.

 

요범姚範이 이르길 : 봉롱은, 지금의 안경성安慶城의 집현관集賢關이다. 협석은, 바로 동성桐城 북협관北峽關이다.

 

사종영謝鍾英이 이르길 : 봉롱은 응당 협석과 서로 가깝다. 협석은, 지금의 동성현 북쪽 47리 북협관이다.

 

본지의 장제전 蔣濟傳, 오지 여몽전 呂蒙傳, 주환전 朱桓傳 에 상호 보인다.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는, 돌아와 서舒에 주둔했다. 손권이 수만 명을 파견해 배를 타고 서구舒口에 주둔하여,

 

호삼성이 이르길 : 서는 오, 위의 국경에 있어, 버려져 농사짓지 못했고, 서구와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방여기요 권 26 : 서성은 지금의 여주부廬州府 서성현 치소로, 한漢 때 여강군廬江郡 치소가 됐고, 삼국 때 폐해져 국경지대가 됐다. 서구는 바로 소호구巢湖口다.

 

사종영이 이르길 : 응당 지금의 파양하巴洋河는 소호구로 들어간다.

 

군을 나눠 진란을 구하게 했으나, 장패의 군이 서에 있음을 듣고, 달아나 돌아왔다. 장패는 밤에 이를 추격하여, 새벽이 됐을 때는, 백여 리를 가서, 적을 맞아 전후로 공격하였다. 적은 몹시 급해, 배에 오를 수 없어, 물에 뛰어든 이가 매우 많았다. 이로 인해 적은 진란을 구할 수 없었고, 장료는 마침내 그를 격파했다. 장패는 유수구濡須口에서 손권을 토벌하는데 종군해, 장료와 더불어 선봉이 됐는데, 가다가 장마를 만나서, 대군이 먼저 이르렀고, 물이 마침내 늘어나, 적의 배가 점점 전진해,

 

관본 官本 고증 考證 에서 이르길 : 태평어람 太平禦覽 에선 “먼저 이르다”를 “먼저 돌아가다”로 썼고, “점점 전진하다”를 “점점 가까워지다”로 썼다.

 

장사는 모두 불안해했다. 장료가 떠나고자 하니, 장패가 그를 막으며 이르길 : “공께서 승리와 패배에 밝으신데, 어찌 우리들을 기꺼이 버리시겠소?” 다음날 과연 영이 있었다. 장료가 이르러, 이를 태조에게 말했다. 태조가 이를 훌륭하다고 여겨, 양위장군揚威將軍,

 

배 拜 아래에는 응당 패 霸 자가 있어야 한다.

 

홍이손이 이르길 : 양위장군은, 한 사람으로, 제 4품이다.

 

가절 假節 로 임명했다. 후에 손권이 항복을 빌어, 태조가 돌아가며, 장패와 하후돈夏侯惇 등을 남겨 거소에 주둔하게 했다.

 

문제文帝가 왕위에 오르고, 진동장군鎮東將軍으로 승진했고, 작위가 무안향후武安鄉侯로 올랐으며, 도독청주제군사 都督青州諸軍事 가 됐다.

 

장패가 이름을 나열하며 오르길 권함은, 상존호주 上尊號奏 에 보인다.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고, 개양후開陽侯로 진봉시켰고, 양성후良成侯로 전봉시켰다. 조휴曹休와 오의 도적을 토벌해, 여범呂範을 동포洞浦에서 격파했고,

 

호삼성이 이르길 : 동구포洞口浦는 역양曆陽의 강변에 있다.

 

일통지 : 지금의 안휘安徽 화주和州에서 서남쪽으로 강에 임한다. 

 

징소돼 집금오執金吾, 직위는 특진特進이 됐다. 매번 군의 일이 있으면, 황제는 항상 그에게 상의했다.

 

위략 魏略 에서 이르길 : 장패의 또 다른 이름은 노구奴寇였다. 손관은 영자嬰子라고 했다. 오돈은 암노黯奴라고 했다. 윤례는 노아盧兒라 했다. 건안 24년, 장패가 별군別軍을 낙洛에 파견했다. 때마침 태조가 죽으니, 장패가 거느리던 이들과 청주병青州兵은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거라고 여겨, 모두 북을 쳐서 울리며 멋대로 떠났다. 문제가 즉위해, 조휴를 도독청서都督青徐로 삼았는데, 장패가 조휴에게 이르길 :

 

모본에선 위 謂 를 위 爲 라고 썼으니 오자다.

 

“국가國家께선 아직 장패 만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한, 위에선 모두 천자를 국가라고 칭했으니, 범서 範書 풍이전 馮異傳 : “신이 지금 또한 국가께서 하북河北의 어려움을 잊지 않으시길 바라옵니다.”

 

만약 저 장패에게 보기 만 명을 내려주신다면, 반드시 강표江表에서 가는 곳마다 적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조휴가 이를 황제에게 말하나, 황제는 장패의 군이 이전에 멋대로 떠난 것을 의심해, 지금도 씩씩한 것이 이와 같을 거라고 헤아렸다. 마침내 동으로 순행해, 장패가 와서 뵙는 것을 이용해 그의 군을 빼앗았다.  

 

장패는 본래 망명했던 무리로, 위무제가 이미 죽으니, 뒷일을 염려하고 꺼리는 바가 없어져서, 감히 마음대로 했기에, 위문제가 그의 군을 긴급히 빼앗은 것은, 아무런 까닭이 없던 것이 아니다.

 

명제明帝가 즉위해, 식읍 5백을 늘려, 전과 합쳐 3천 5백 호가 됐다. 죽으니, 시호는 위후威侯라 했다.

 

정시正始 4년, 장패는 태조의 묘당에 배향됐다.

 

자식 장애臧艾가 대를 이었다.

 

위서 魏書 에서 이르길 : 장애는 어려서 재치있는 생각이 있다고 칭찬받았고, 황문랑黃門郎이 됐으며, 군수를 역임했다.

 

장애의 관위는 청주자사, 소부 少府 에 이르렀다. 장애가 죽어, 시호를 공후恭侯라 했다. 자식 장권臧權이 대를 이었다. 장패가 전후로 공이 있어, 자식 3 명을 열후로 봉하고, 한 명에겐 작위 관내후關內侯를 하사했다.

 

장패의 또 다른 자식 장순臧舜은, 자가 태백太伯으로, 진晉의 산기상시散騎常侍였음이, 무제백관명 武帝百官名 에 보인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이 책은 수隋, 당지唐志에 적혀있지 않다.

 

이 백관명은,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모두 제목이 있어, 장순을 “재주가 빼어나고 유창하며, 식견과 천거함이 당시 사정에 알맞았다.”고 칭했다.

 

그리고 손관 또한 청주자사, 가절에 이르렀는데, 태조를 따라 손권을 토벌하며,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죽었다. 자식 손육孫毓이 대를 이었는데, 또한 청주자사에 이르렀다.

 

위서에서 이르길 : 손관의 자는 중대仲臺로, 태산 사람이다. 장패와 함께 기의해, 황건을 토벌하고, 기도위로 임명됐다. 태조가 여포를 격파하고, 장패에게 손관 형제를 부르게 해, 모두 후대하였다. 장패와 함께 싸우며 정벌했는데, 손관은 항상 선봉이 돼, 청, 서의 도적떼를 정벌해 평정하며, 공이 장패에 버금가, 여도정후呂都亭侯로 봉해졌다.

 

조일청이 이르길 : 여도는, 전한서 前漢書 지리지 地理志 에선 제음군濟陰郡에 속했고, 후한 때는 없앴다. 지금 손관을 봉한 것은, 아마도 현은 폐해졌으나 성이 존재했던 것일 뿐이다. 

 

손강 또한 공으로 인해 열후에 봉해졌다. 태조와 남피에 모였을 때, 자제를 업에 들어가 살게 하여, 손관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하고, 청주자사로 승진시켰다. 손권을 유수구에서 정벌하는데 종군했고, 절節을 수여받았다. 손권을 공격하다, 유시에 적중돼, 왼쪽 다리가 다쳤으나, 힘써 싸우며 돌보지 않아, 태조는 그를 위로하길 : “장군이 상처를 입음이 매우 심한데도, 매우 사나운 기세로 더욱 분격했으나, 응당 국가를 위해 목숨을 아껴야 하지 않겠소?” 진위장군으로 전임됐으나, 상처가 심해, 마침내 죽었다.

분류 :
위서
조회 수 :
5565
등록일 :
2013.05.23
18:38:34 (*.52.89.88)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commentary/6939/103/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6939

코렐솔라

2013.07.01
21:28:42
(*.52.89.88)
손관의 자를 중태->중대로 바꿉니다. 처사군님께도 보고하였고 간체 때문에 생긴 실수더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삼국지집해 삼국지집해 목차 코렐솔라 2013-07-24 12684
공지 삼국지집해 삼국지집해의 도움말입니다. [2] 코렐솔라 2013-05-04 11515
57 오서 손익전 코렐솔라 2013-11-18 4758
56 오서 사섭전 코렐솔라 2013-11-18 5156
55 오서 손견전 [2] 코렐솔라 2014-01-17 5894
54 촉서 제갈량전1 코렐솔라 2013-11-18 6500
53 위서 무제기4 코렐솔라 2013-11-18 5063
52 오서 조달전 [6] 코렐솔라 2013-10-08 4669
51 촉서 동화전 [1] 사마휘 2013-10-05 4082
50 촉서 유장전 [1] 코렐솔라 2013-08-16 5979
49 촉서 유언전 코렐솔라 2013-08-09 5820
48 위서 등애전 코렐솔라 2013-07-09 7397
47 오서 여몽전 코렐솔라 2013-07-07 6285
46 위서 조충전 코렐솔라 2013-06-28 4590
45 위서 조삭전 코렐솔라 2013-06-28 4487
44 위서 조앙전 코렐솔라 2013-06-28 4587
43 촉서 장완전 코렐솔라 2013-05-26 5333
42 위서 여건전 코렐솔라 2013-05-23 4536
» 위서 장패전 [1] 코렐솔라 2013-05-23 5565
40 오서 정봉전 코렐솔라 2013-05-08 4368
39 오서 반장전 코렐솔라 2013-05-08 4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