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史랑방


주의: 이 전은 다른 집해와는 달리 집해의 일부만이 번역된 상황입니다.

장완(蔣琬)은 자(字)가 공염(公琰)이고 영릉(零陵) 상향(湘鄕) 사람이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외제(外弟,외삼촌의 아들로 외종동생)인 천릉(泉陵)사람 유민(劉敏)과 더불어 이름이 알려졌다. (장)완은 주서좌(州書佐,관직이름)로서 선주(先主)(→촉한의 1대 황제 유비劉備)를 수종하여 촉(蜀)으로 들어가 광도장(廣都長)(→촉군 광도현의 현장縣長)에 제수되었다. 선주(先主)가 일찍이 유관(游觀,유람)하다 돌연 광도(廣都)에 당도한 일이 있는데 (장)완의 뭇 사무들이 처리되지 않은 것을 보았고 또한 그때에 (장완이) 술에 취해있으니 선주가 대노하여 장차 죄륙(罪戮)을 가하려 하였다. 군사장군(軍師將軍) 제갈량(諸葛亮)이 청하며 말했다,

“장완(蔣琬)은 사직(社稷)의 그릇으로, (고작) 백리(百里)(→현縣을 비유함)를 다스릴 재주가 아닙니다. 그가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안민(安民)을 근본으로 삼지, 수식(脩飾,외적인 형식에 치중함)을 우선하지는 않으니 원컨대 주공(主公)께서 더욱 잘 살피십시오.”

선주는 평소 (제갈)량을 공경하였으므로 이에 (장완에게) 죄를 가하지는 않고 창졸(倉卒)간에 단지 면관(免官)만 하였다.

 

(장)완이 추궁당한 뒤(→면관된 뒤) 밤에 꿈을 꾸었는데 소머리(牛頭) 하나가 문 앞에 있는데 피를 질펀하게 흘리고 있으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겨 점몽(占夢,해몽)하는 사람인 조직(趙直)을 불러 이에 관해 물어보았다.  (조)직이 말했다,

“무릇 피를 본다는 것은 사리가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소뿔과 코에는 공(公)이란 글자의 형상이 있으니 필시 그대의 지위가 공(公)에 이른다는 것으로 대길(大吉)의 징조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십방령(什邡令)(→광한군 십방현의 현령)에 임명되었다.


선주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장)완은 (수도로) 들어와 상서랑(尙書郎)에 임명되었다. 건흥(建興) 원년(=223년)에 승상(丞相) (제갈)량이 개부(開府,부府를 개설함,여기선 승상부)하자 (장)완을 벽소(辟召)하여 동조연(東曹掾)으로 삼았다. 무재(茂才)로 천거되자 (장)완은 유옹(劉邕), 음화(陰化), 방연(龐延), 요순(廖淳)에게 굳게 (무재를) 양보하니 [집해1] (제갈)량이 다음과 같이 교답(敎答)하였다,

“생각컨대 친하다고 해서 배척하고 덕있는 사람을 버린다면 백성들을 해치고 뭇 사람들이 마음으로 불안할 것이며 실로 또한 멀고 가까운 이들로 하여금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의당 자신의 공적과 거행을 드러내어 이 천거의 청중(清重,공정하고 중요함)함을 밝히도록 하십시오.”

참군(參軍)으로 올랐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이 한중(漢中)에 주둔하니 (장)완은 장사(長史) 장예(張裔)와 함께 유부(留府)(→성도에 남은 승상부)의 사무를 통할하였다.

 
(건흥) 8년(=230년), (장)예를 대신하여 장사(長史)로 임명되었고 무군장군(撫軍將軍)이 더해졌다. (제갈)량이 수차례 바깥으로 출정할 때에 (장)완은 늘 식량과 병사를 풍족하도록 공급하였다. [집해2] (제갈)량이 늘 말했다,

“공염(公琰)(→장완)은 충아(忠雅,충성스럽고 올바름)에 뜻을 두고 있으니 응당 나와 더불어 왕업(王業)을 도울 사람이다.”

은밀히 후주(後主)(→촉한의 2대 황제 유선劉禪)에게 표(表)를 올려 말했다,

“신이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하면 뒷일은 의당 (장)완에게 맡기십시오.”

 
[집해1] 유옹(劉邕)가 자(字)가 남화(南和)로 (그에 관한 기사가)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 보인다. 음화(陰化)는 등지전(鄧芝傳)에 보인다. 요순(廖淳)은 곧 요화(廖化)로 종예전(宗預傳)에 보인다. 방연(龐延)은 미상(未詳)이다.

[집해2] 공염(公琰)이 식량과 병사를 풍족하도록 대었는데 무후(武侯)(->제갈량)는 어찌하여 여러 차례 군량이 다해 퇴군하였는가?


(제갈)량이 죽자 (장)완을 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가 곧 행도호(行都護), 가절(假節), 영 익주자사(領益州刺史)를 더하고 대장군(大將軍),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올리고 안양정후(安陽亭侯)에 봉했다.

 
당시 이제 막 원수(元帥)(→제갈량)를 잃어 멀고 가까운 이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다. (장)완이 출류발췌(出類拔萃, 평범한 부류들 가운데서 매우 출중함)하여 뭇 신료들의 가장 윗자리에 처하고는 비통해하는 안색도 없고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신수거지(神守舉止,안색과 행동거지)가 평소 때와 다름없으니 이로 말미암아 뭇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며 점차 복종하게 되었다.

 
연희(延熙) 원년(=238년), (장)완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도적의 난이 아직 그치지 않고 조예(曹叡)가 교흉(驕凶,교만하고 흉포함)하니 요동(遼東)의 3군(三郡)(→요동군,현도군,낙랑군을 가리키는 듯)이 그 포학(暴虐)함에 고통받다 마침내 서로 규결(糾結,얽히어서 결탁함)하여 그와 더불어 서로 이격(離隔,사이가 갈라짐)하게 되었는데 (조)예가 도리어 중역(衆役,많은 군졸)을 크게 일으켜 서로 공벌(攻伐)하였다. 옛날 진(秦)나라가 망할 때에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앞장서서 난을 일으켰는데 지금 이러한 변화가 생기니 이것이 바로 천시(天時)로다. 그대(君)는 제군(諸軍)을 치엄(治嚴), 총수(總帥)하여 한중(漢中)에 주둔하다가 오(吳)나라가 거동(舉動)하기를 기다려 (그들과 더불어 조위를) 동서(東西)로 기각(掎角,군을 나누어 적을 협공함)함으로써 그 빈틈을 노리도록 하라.”

또한 (장)완에게 개부(開府)하도록 명하였고(→아마도 대장군부大將軍府인 듯) 이듬해(=239년)에는 곧이어 대사마(大司馬)로 삼았다.


동조연(東曹掾) 양희(楊戲)가 평소 성정이 간략(簡略,꼼꼼하지 못하고 거침)하여 (장)완이 그와 더불어 언론(言論)할 때에 종종 (장완의 말에) 응답(應答)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양)희를 무함하고자 하여 (장)완에게 말했다,

“공(公)이 (양)희와 대화하는데 응답을 듣지 못하니 (양)희가 윗사람을 거만하게 대하는 것이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장)완이 말했다,

“사람의 마음이 같지 않은 법이라 이는 그 얼굴들이 서로 제각각인 것과 같으며, 면전에서 복종하고 뒤에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을 옛사람들은 경계하였습니다. (양)희가 나에게 찬성한다면 이는 곧 그의 본심이 아니고(→본심과 다른 말을 하게 되는 것이고) 만약 내 말에 반대한다면 이는 곧 나의 그릇됨을 드러내는 것이 되니 이 때문에 그가 묵연(默然,침묵)한 것으로 이는 (양)희의 통쾌한 점입니다.”

 또 독농(督農) 양민(楊敏)이 일찍이 (장)완을 비방하여


‘일을 꾸미는 것이 궤궤(憒憒,혼란스럽고 흐리멍덩함)하여 실로 예전 사람(→제갈량)에 미칠 바가 아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이가 (장)완에게 이를 고하니 주자(主者,주관하는 관리,담당자)가 (양)민을 추치(推治,죄를 추궁하여 다스림)하도록 청하였다. (장)완이 말했다,

“내가 실제로 옛 사람만 못하니 추궁할(推) 게 없습니다.”

 주자(主者)가 중거청불추(重據聽不推)하면서도(※) (양민이 말한) 그 궤궤(憒憒)하다는 말의 진상에 관해 묻기를 청했다. (장)완이 말했다,

 만약 내가 예전 사람만 못하다면 곧 일을 꾸미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을 것이고 일을 꾸미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면 곧 궤궤(憒憒)한 것이니 또 무엇을 묻는단 말입니까?”

 뒤에 (양)민이 (다른) 사건에 좌죄되어 옥에 갇히자 뭇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 염려하였으나 (장)완의 마음에는 적막(適莫,무엇이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거나 무엇이 그르다고 강하게 주장함)이 없어 [집해3] 중죄(重罪)를 면할 수 있었으니, 그의 호오존도(好惡存道,좋아하고 미워함에 있어 도를 지킴)가 모두 이와 같았다.

 
[집해3]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가 이르길 “군자(君子)는 천하에 처하면서 적(適)이 없고 막(莫)이 없으며 의(義)를 따를뿐이다.”라고 하였다. 사현도(謝顯道)는 (이를 주석하여) “적(適)은 가(可)이고 막(莫)은 불가(不可)”라 하였다.


역자 주 重據聽不推 - 장완전 번역하면서 가장 난해한 대목이네요. 삼국지집해에도 아무런 주해가 없고 자치통감이나 화양국지에서 이 사건을 기술하면서도 이 대목만은 빼놓아서 참고해볼 수도 없구요.  ‘主者는 (장완이 말한) 근거를 중시하여 추궁하지 않는 것을 들어주면서도(동의하면서도)’정도의 뜻이거나, 어떤 탈오나 뒤집힌 글자가 있는 것으로 보면 ‘主者가 거듭 청하였으나 (據는 請 따위의 오류) 推(治)하는 것을 (장완이) 들어주지 않자(聽不推를 不聽推로 봄)’...정도의 뜻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장)완은 예전에 제갈량(諸葛亮)이 여러 차례 진천(秦川)을 노렸으나 [집해4] 길이 험하고 군량운반이 어려워 끝내 성공할 수 없었으니 강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주선(舟船,배)을 많이 만들고는 한수(漢水), 면수(沔水)를 따라 위흥(魏興), 상용(上庸)을 습격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옛 병이 연달아 도져 때맞춰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정의) 중론(衆論)에서는 모두 만약 (강을 타고 내려갔다가) 승리하지 못한다면 돌아오는 길이 매우 어려우므로 장책(長策,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에 상서령(尙書令) 비의(費禕), 중감군(中監軍) 강유(姜維) 등을 (장완에게) 보내 그러한 뜻을 알렸다. (장)완이 명을 받들고는 상소(上疏)하여 말했다,

“더러운 무리를 베고 난(難)을 그치게 하는 것이 신의 직책이 관장하는 바입니다. 신이 한중(에 주둔하라는) 말씀을 받든 이래 이미 6년이 지났으나 신이 암약(闇弱,어리석고 미약함)한데다가 질진(疾疢,질병)에 시달리어 규방(規方,계획과 방략)을 이룬 바가 없으니 밤낮으로 근심스럽고 참담합니다. 지금 위(魏)나라가 9주(九州)를 차지하여 [집해5] 그 근체(根蔕,뿌리와 꼭지.토대나 기반을 비유)가 점점 더 퍼져 평제(平除,평정하여 제거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약 동서(東西)로 힘을 아우르고 수미(首尾,머리와 꼬리)로 (위나라를) 기각(掎角)한다면 비록 뜻대로 (위나라 평제를) 속히 이루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위나라 땅을) 분열잠식(分裂蠶食)하고 그들의 지당(支黨)을 우선 꺾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오나라와 두세차례 (위나라를 기각하기로) 기약하였으나 연달아 실행하지 못하니 부앙(俯仰,아래를 굽어보는 것과 위를 쳐다보는 것.일거일동,거동을 뜻함)이 여전히 어려워 (걱정으로) 실로 침식(寢食)을 잊을 정도입니다. 매번 비의(費禕) 등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량주(涼州)는 호새(胡塞,호胡가 있는 변경지역)의 요충이라 진퇴(進退)에 있어 의존할만하고 적(賊)이 아끼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게다가 강(羌), 호(胡)는 한나라를 그리워하기를 목마른 사람처럼 하며 또한 예전에 (우리의) 편군(偏軍)이 강(羌)으로 들어갔을 때 곽회(郭淮)가 파주(破走,격파되어 달아남)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장단(長短)을 헤아려볼 때 (량주 점령은) 사수(事首,우선되어야 할 일)라 여겨지니 의당 강유(姜維)를 량주자사(涼州刺史)로 임명해야 합니다.[집해6] 만약 (강)유가 정행(征行,출정)하여 하우(河右=하서河西)에서 함지(銜持,대치)한다면 신은 군을 통수하여 (강)유를 위하여 (뒤에서) 진수하며 뒷받침하겠습니다.(鎭繼) 지금 부(涪)(→익주 광한군 부현)는 수륙(水陸)으로 잘 뚫려 있어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 잘 대응할 수 있으니 만약 동북쪽에 근심거리가 생긴다면 난(難)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가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장)완은 마침내 부(涪)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질병이 점차 심해져 (연희) 9년(=246년)에 죽었다. 시호를 내려 공(恭)이라 하였다.


[집해4] 호삼성(胡三省) 왈, 관중(關中) 땅은 옥야천리(沃野千里)로 진(秦)나라의 옛 땅이므로 이를 진천(秦川)이라 일컬었다.

[집해5] 사예, 예주, 기주, 연주, 서주, 청주, 량주, 병주, 유주를 합쳐 모두 아홉 주이다. 그러나 위나라는 당시에 양주(揚州) 및 형주(荊州)의 절반을 소유하고 또한 옹주(雍州)와 진주(秦州)를 분치했으니 아홉 주에 그치지 않는다.

[집해6] 호삼성(胡三省) 왈, 량주(涼州) 땅을 촉(蜀)은 오직 무도(武都), 음평(陰平)의 2군(郡)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아들인 (장)빈(蔣斌)이 후사를 이었고 수무장군(綏武將軍), 한성호군(漢城護軍)[집해7]에 임명되었다. 위나라 대장군(大將軍)[집해8] 종회(鍾會)가 한성(漢城)에 도착한 뒤 (장)빈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파촉(巴蜀)에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문무지사(文武之士)가 많아 족하(足下,귀하)와 제갈사원(諸葛思遠)(→제갈첨諸葛瞻)은 초목(草木)에 비유될 지경이며 (그대들은) 바로 나의 기류(氣類,동류同類)입니다.(※) 상재(桑梓,고향 또는 (고향에 계신) 어버이를 가리킴)를 공경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돈독히 여기는 바입니다. (그래서) 서쪽에 도착하면 존대군(尊大君,상대방 부친에 대한 경칭) 공후(公侯)[집해9]의 묘(墓,무덤)를 찾아뵙고 분영(墳塋,분묘,무덤)을 깨끗이 청소한 뒤 제사를 올리며 치경(致敬,경의를 표함)하려 합니다. 원컨대 (부친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십시오.”

(장)빈이 서신에 답하여 말했다,

“오로지 취미(臭味,동류同類)로서 그리워하는 마음이 융성하여 아름다운 뜻으로 통류(通流,내왕,교제)를 부탁함을 잘 알겠으니 래위(來謂,서신을 보내서 말한 바?)를 거절하지 못하겠습니다. 망고(亡考,선친)께서는 예전에 질진(疾疢,질병)에 걸려 부현(涪縣)에서 돌아가셨는데 점을 쳐보니 그곳이 길하다 하여 마침내 그곳에 안조(安厝,안장安葬)하였습니다. 그대가 서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는데 뜻밖에 어렵게 행차하여(屈駕) (선친의) 분묘(墳墓)에 수경(脩敬,치경致敬)하려 하시는군요. 제 부친 보기를 (그대의) 부친과 같이 하니 이는 안자(顏子)의 어짊(仁)이라 그 말을 듣고 감창(感愴,감동하여 슬픔)하여 정사(情思,정과 생각)가 더합니다.”

(종)회가 (장)빈의 답신을 받아보고는 그 의의(意義,내용)에 가탄(嘉歎,가상히 여기며 감탄함)하고 부(涪)에 도착하자 (자기가 보낸) 서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였다.

 

[집해7] 한성(漢城)은 곧 한락2성(漢樂二城)(->한성, 낙성) 중의 한성(漢城)이다. 후주전 건흥5년 조에 보인다. (※건흥 7년의 오기임)

[집해8] (大將軍 중의) 軍 자가 연자(衍字,잘못 들어간 군더더기글자)이거나 大자가 연자다. (※ 권28 종회전에 따르면 촉한을 정벌할 당시 종회는 대장군이 아니라 진서장군(鎭西將軍)이었음.)

[집해9] 公(공)은 恭(공)으로 적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장완은 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역자주 제갈첨, 종회는 각각 제갈량, 종요(鍾繇)의 아들임.
 

후주(後主)가 등애(鄧艾)에게 항복한 뒤 (장)빈이 부(涪)에 있던 (종)회에게로 나아가자 (종회는 그를) 교우(交友)의 예(禮)로 대우하였다. (종)회를 따라 성도(成都)로 갔다가 난병(亂兵)에게 죽임을 당했다. (장)빈의 동생 (장)현(蔣顯)은 태자복(太子僕)을 지냈으며 (종)회가 또한 그의 재학(才學,재주와 학문)을 사랑하였는데 (장)빈과 함께 같은 때에 죽었다.



(장완의 外弟인) 유민(劉敏)은 좌장군(左護軍), 양위장군(揚威將軍)으로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왕평(王平)과 함께 한중(漢中)을 진수하였다. 위나라가 대장군 조상(曹爽)을 보내 촉(蜀)을 습격하였을 때 의논하는 자들 중 어떤 이가 ‘단지 수성(守城)하면서 성을 나가 적과 맞서지 않는다면 필시 (적군은) 스스로 군을 이끌고 퇴각할 것’이라고 하였다. (유)민은 남녀가 들에 퍼져 있고 농곡(農穀,농사지은 곡식)이 전답에 그대로 쌓여있으니 만약 적이 들어오도록 허용한다면 대사(大事)가 어그러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이 거느리는 병사를 통수하여 (왕)평과 함께 흥세(興勢)를 점거하고는 기치(旗幟,깃발)를 많이 펼쳐놓아 백여리까지 뻗쳤다. 때마침 대장군 비의(費禕)가 성도(成都)로부터 도착하자 위군(魏軍)이 이내 퇴각하였다. (유)민은 이 공(功)으로 운정후(雲亭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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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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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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