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처사군님의 블로그


오서吳書 1

 

삼국지三國志 46

 

손파로토역전孫破虜討逆傳 제 1

 

반미潘眉가 이르길 : 오서에는 본기가 있었기에, 손호孫晧는 부친 손화孫和를 위해서 본기를 세우고자 했으나, 위소韋昭가 손화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기에, 의당 전傳으로 지칭해야 한다고 견지했다. 진수陳壽가 지志를 집필하며, 도리어 모두 전으로 고쳤다.

 

유함흔劉鹹炘이 이르길 : 상씨尚氏가 이르길 : 손견孫堅이 황건黃巾을 토벌하며 공이 컸고, 만약 장온張溫이 손견이 동탁董卓을 주살하려는 것을 들어줬다면, 한漢은 어지러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여러 군郡에서 손견처럼 동탁을 토벌했다면, 장안長安에는 이르며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진수가 손파로라고 쓰고, 그가 의병을 일으킨 것, 화친을 거부한 것, 한의 능을 보수한 여러 일을 상세히 서술하며, 충직하고 웅장함이 대단했다고 평하였다. 살피건대 : 손견은 진실로 응당 표창해야하나, 파로라고 쓴 것은 이 때문이 아니다. 손견, 손책孫策은 오에서 본래 제왕의 추호追號가 있었으나, 이 책에서는 쓰지 않았고, 손권 孫權, 손량孫亮 등은 황제였으나, 또한 그 이름을 바로 쓰지 않고 주主라고 칭했기에, 손견, 손책의 경우 또한 그들의 생전의 관직을 적은 것이다. 만약 상씨의 말과 같다면, 손책은 토역이라고 썼는데, 또한 무슨 공이 있었다는 것인가?  

 

심군창沈君玱이 이르길 : 이미 오서라고 이르나, 무열武烈제, 환왕桓王 모두 책 전체에서 이름을 칭해, 신하와 한결같으니, 예가 아닌듯하다. 표제標題와 같이 파로, 토역이라고 칭하는 것이, 아마도 오히려 옳다. 

 

손견의 자는 문대文台로, 오군吳郡 부춘富春 사람이고,

 

한서 漢書 지리지 地理志 : 회계군會稽郡 부춘이다.

 

군국지 郡國志 : 양주揚州 오군 부춘이다.

 

손권전 : 황무黃武 5년 동안군東安郡을 설치하며, 군郡에선 부춘을 치소로 삼고, 전종全琮을 태수로 삼았다가, 7년 동안군을 없앴다.

 

송서 宋書 주군지 州郡志 : 오군태수에서, 부양령 富陽令 은, 한漢의 옛 현으로, 본래는 부춘이라고 했는데, 진晉 간문簡文제의 정태후鄭太後의 휘가 춘 春 이라서, 효무孝武제가 부양으로 고쳤다.

 

수경주 水經注 점강수주 漸江水注 : 절강浙江은 다시 동북으로 부양현에 유입되니, 과거 부춘이다. 진후晉後의 이름이 춘이라서, 부양으로 고쳤다. 절강은 다시 동북으로 부춘현 남쪽을 경유하는데, 강의 남쪽에 산이 있으니, 손무황孫武皇의 선조가 매장된 곳이다. 한漢 말, 묘 위에 빛이 있었는데 운기雲氣가 하늘에 이어진 것 같았다. 황무 5년, 손권이 부춘을 동안군으로 삼았다. 절강은 다시 동북으로 정산亭山 서쪽을 경유하는데, 산 위에 손권의 부친 무덤이 있다.

 

원화지 元和志 : 부양현은 동북으로 항주杭州와 73 리 떨어져 있으니, 본래는 한의 부춘현으로, 진 효무제 태원太元 중에 정태후의 휘를 피하여, 춘을 양이라고 고쳤다.

 

일통지 一統志 : 옛 성은, 지금의 절강 항주부 부양현의 치소 서북쪽 구석이다.

 

양수경楊守敬이 이르길 : 수경 점강수주에서 “산 위에 손권의 부친 무덤이 있다”라고 일렀는데, 권 權 자는 견 堅 자가 와전된 것이다. 만약 손권의 부친이었다면, 바로 손견의 무덤이라고 칭했을 것이니, 대략 손종孫鍾의 이름은 희미해도 손견의 이름은 자자했었다.

 

노필盧弼이 살피길 : 손책전 : 손견이 죽고, 돌아와 곡아曲阿에서 장사 지냈다. 오록 吳錄 에서 이르길 : 손견의 묘호를 시조始祖로 높이고, 묘를 고릉高陵이라고 했다. 손권전 : 태원 원년, 오의 고릉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모두 뽑혔다. 진양추 晉陽秋 : 혜제惠帝 원강元康 중, 오령吳令 사순謝詢이 손씨 두 군주의 묘를 위해 묘지기 5 명을 배치하는 것을 상표하였다. 오지기 吳地記 : 반문盤門 동북쪽 2 리에 손견과 손책의 무덤이 있다. 일통지 : 손왕孫王의 묘는 강소江蘇 소주부蘇州府 오현 남쪽에 있다. 살피건대 각각의 책에서 실은 바에 근거하니, 문대는 처음에 곡아에서 장사 지내고, 후에 오로 이장됐다. 양씨가 수경 점강수주에서 응당 손견의 부친의 무덤이라고 써야 한다고 이른 것은, 참으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옳은 것이다.  

 

아마도 손무孫武의 후손이다.

 

사기 史記 손무전 : 손자孫子 무武는, 제齊 사람이다. 병법을 오왕吳王 합려阖闾에게 보여주니, 합려가 장수로 삼아, 서로는 강한 초楚를 격파해, 영郢에 들어가고, 북으로는 제, 진 晉 을 위협하며, 제후에게 이름을 알린 데는, 손자가 참여하며 공적이 있었다. 

 

배인裴骃이 이르길 : 월절서 越絕書 에서 이르길 : 오현 무문巫門 밖의 큰 무덤은, 손무의 무덤으로, 현에서 10 리 떨어져 있다.

 

노필이 살피길 : 손무의 후손이 오월吳越에 전해짐은, 응당 이에 의거한다. 호종전 胡綜傳 에 상호 보인다.

 

송서 宋書 부서지符瑞志 상에서 이르길 : 손견孫堅의 조부 이름은 손종孫鍾으로, 집은 오군吳郡 부춘富春이였고, 홀로 모친과 함께 살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흉년이 들어, 오이를 심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돌연히 세 소년이 손종에게 이르러 오이를 구하니, 손종이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세 사람이 손종에게 이르길 : “이 산 아래가 훌륭하여, 무덤을 만들 만하니, 여기에 매장하면, 응당 천자가 나올 것입니다. 군께서 산에서 내려가 백 보 정도 가셔서, 돌아보면 우리가 떠나는 것을 보실 것이니, 바로 매장해도 될 곳입니다.” 손종이 30 보를 가서, 곧 뒤를 돌아보니, 세 사람이 나란히 백학을 타고 날아서 떠나는 것을 봤다. 손종이 죽고, 곧 그 땅에 매장했다. 땅이 현의 성 동쪽에 있었는데, 무덤 위로 자주 신기하고 괴이한 현상이 있어, 운기雲氣가 오색으로 위로 하늘과 이어졌고, 수 리에 퍼졌다. 부로父老가 서로 이야기하길 : “이는 평범한 기운이 아니라, 손씨가 장차 흥할 것이다.”

 

어람 禦覽 권 559에서 인용한 유명록 幽明錄 에 실린 손종의 일도 거의 같다.

 

반미潘眉가 이르길 : 진지 陳志 에선 파로의 부친과 조부의 이름이 상세하지 않고, 배주裴注 또한 이를 생략했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장습공 張習孔 의 운곡와여 雲谷臥余 에서 이르길, 유경숙 劉敬叔 의 이원 異苑 에선 손견의 부친 이름이 손종으로, 오이를 기이한 이에게 베풀어서 명당을 얻었다고 실었다. 유경숙은 유송劉宋 때 사람이나, 송서에선 손종을 손견의 조부라 여겨, 유명록과 같다. 나 조일청이 상고하건대 : 이 전에선 부친의 이름을 칭하지 않았는데, 응당 이원에 의거해 손종을 손견의 부친으로 여긴 듯하다. 환우기 寰宇記 권 93에선 손견이 양평산陽平山에 살았는데, 그의 조부 손종이 이곳에 오이를 심었다고 일렀다. 군현지 郡縣志 에서 손견이 그의 현손이라고 이른 것은, 아마도 옳지 않다.

 

정소년鄭蘇年이 이르길 : 아마도 손무의 후손이라는 것은, 바로 의문의 어투를 표현한 말로, 위무기 魏武紀 의 앞에선 “조참曹參의 후손이다”라고 이르고, 뒤에선 “그의 출생본말生出本末을 살필 수 없다”라고 이른 것과 동일한 의도다. 

 

유함흔劉鹹炘이 이르길 : 왕王씨가 이르길 : 개蓋는, 의문의 어투를 표현한 말이다. 상尚씨가 이르길 : 이는 위무기와 동일하게 의심스러운 점을 전한 것으로, 만일 선주先主의 세계世系가 밝히기 어려웠다면, 또한 필시 “그의 선조는 아마도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다”라고 일렀을 것이다. 

 

오서에서 이르길 : 손견은 대대로 오에서 벼슬하였고, 집은 부춘에 있으며, 성 동쪽에 매장하였다. 무덤 위에 자주 신기하고 괴이 한 현상이 있었으니, 운기가 5색으로, 위로 하늘과 이어졌고, 수 리에 길게 늘어졌다. 무리는 모두 가다가 분명히 봤다. 부로 가 서로 이르길 : “이는 비범한 기운이라, 손씨가 장차 흥할 것이다!” 모친이 손견을 임신하고, 꿈에서 창자가 나와 오의 창문昌 門을 둘러쌌는데, 잠에서 깨고 이가 두려워, 이웃의 노부인에게 고했다. 이웃의 노부인이 이르길 : “길한 징조가 아닐지 어찌 알겠 소?” 

 

송서 부서지 : 손견의 모친이 손견을 낳았는데, 꿈에서 창자가 나와 오의 창문을 둘러싸서, 이웃의 노부인에게 고했다. 이웃의 노부인이 이르길 : “경사가 날 조짐이 아닐지 어찌 알겠소?” 창문은, 오의 외성 문이다.

 

조일청이 이르길 : 창문은, 본래 창합문阊阖門이라고 하고, 또한 창문阊門이라 한다.

 

손견이 태어나니,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천성이 활달하며, 뛰어난 절조를 좋아하였다.

 

어려서 현리縣吏가 됐다.

 

당시는 한영제漢靈帝 건녕建甯 4년이다.

 

17세에, 부친과 함께 배를 타고 전당錢唐에 이르니,

 

한서 지리지 : 회계군會稽郡 전당은, 서부도위西部都尉의 치소다.

 

진서 晉書 지리지 : 오군 전당이다.

 

일통지 : 전당의 옛 성은, 지금의 절강 항주부 전당현錢塘縣 서쪽이다. 진시황秦始皇 37년, 동으로 유람해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 에 이르렀다. 한漢 때 서부도위의 치소였는데, 후한後漢 때 없앴다. 중평中平 2년, 주준朱雋을 전당후로 봉했으니, 아마 도 이 때 다시 설치한 것이다. 손책이 회계에 들어가, 정보程普를 오군도위吳郡都尉로 삼고 전당을 치소로 삼게 했다.

 

오증근吳增僅이 이르길 : 전당은, 중흥한 후 없앴다. 오지 吳志 감택전 阚澤傳 에서 “전당장錢唐長에 제수되다”라고 함은 건안建安 초년이니, 아마도 한 말에 다시 세운 것으로, 오군남부도위吳郡南部都尉의 치소다.

 

사종영謝鍾英이 이르길 : 전종전 全琮傳 : 전종은, 오군 전당 사람이다. 황무黃武 원년, 전당후에 봉했다.

 

왕선겸王先謙이 이르길 : 수隋 이전에는 모두 전당 錢唐 이라 썼는데, 당唐이 되고 글자가 국호와 관련돼, 토 土 를 더해서 전당 錢塘 이 됐다.

 

노필이 살피길 : 수경 점강수주 : 절강은 다시 동으로 영은산靈隱山을 경유하는데, 산 아래에 전당의 옛 현이 있고, 절강이 그 남쪽 을 경유한다. 전당기 錢唐記 에서 이르길 : 바닷물을 막는 큰 당塘이 현 동쪽 1 리 정도에 있으니, 군의 의조議曹 화신華信의 집 에서 이 당을 세워서 바닷물을 막는 것을 의논해, 처음 공개적으로 모집하며, 1 곡斛의 흙을 나를 수 있는 자는, 바로 전錢 1천 을 줬다. 달포 사이에, 온 이가 구름같이 모였는데, 당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으나 채용하지 않아, 이에 흙과 돌을 인 자들은 모 두 버리고 떠났고, 당은 이것들로 완성됐기에, 전당錢塘이라고 개명했다. 범서 範書 주준전 : 전당후錢塘侯에 봉했다. 장회주章懷注에 서 인용한 전당기, 어람 권 74에서 인용한 유도진劉道真의 전당기에서, 실은 바가 모두 같다. 이에 즉 당 이전에도 이미 전당錢塘 이란 명칭이 있었으니, 왕씨의 설은 믿을 수 없는 듯하다.   

 

때마침 해적 호옥胡玉 등이 포리匏裏에서부터 올라와 상인의 재물을 약탈하고,

사종영이 이르길 : 포리는 의당 전당에 가깝다.

한창 언덕 위에서 이를 나누니, 여행자는 모두 멈췄고, 배는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손견이 부친에게 이르길 : “이 도적은 공격할 만하니, 토벌하길 바랍니다.” 부친이 이르길 : “네가 도모할 바가 아니다.” 손견이 칼자루를 쥐고 언덕에 올라, 손으로 동서로 지휘하니, 사병을 나눠 파견해 도적을 차단하는 형상과 같았다. 도적이 멀리서 보고는, 관병이 그들을 잡으려는 것으로 여겨, 바로 재물을 내버려두고 흩어져 달아났다. 손견이 추격해, 수급 하나를 참살해 얻고 돌아오니, 부친이 매우 놀랐다. 이로 인해 두드러지며 알려져, 부府에서 징소해 임시로 위尉를 대행하게 했다. 회계의 요적妖賊 허창許昌이 구장句章에서 일어나,

군국지 : 양주 회계군의 치소는 산음山陰이다. 회계산은 남쪽에 있어, 위에 우禹의 무덤이 있고,절강浙江이 있다.

호삼성이 이르길 : 구장현은 회계군에 속한다. 십삼주지 十三州志 : 구천句踐의 땅은 남으로 구무句無에 이르는데, 그가 후에 오를 병합하고, 여기에 성을 크게 쌓아서, 패자의 공을 드러내며 자손에게 보였기에, 구장이라 했다. 구 句 는, 음이 장구章句의 구다.

반미가 이르길 : 사소 史炤 의 통감석문 通鑒釋文 에선 구는, 음이 구鈎라고 했고, 호삼성은 경전석문 經典釋文 에 근거해 음은 구九와 구具의 반절이라 했고, 여순 如淳, 위소韋昭는 모두 음이 구拘라고 했다. 그러나 감인阚骃의 십삼주지를 살피니, 사소의 음이 옳다.

일통지 : 산음의 옛 성은, 범려範蠡가 쌓은 곳으로, 월절서 越絕書 에 보이고, 지금의 절강 소흥부紹興府 산음현의 치소다. 구장의 옛 성은, 지금의 절강 영파부甯波府 자계현慈溪縣 서남쪽이다.

양명황제陽明皇帝라 자칭하고,

영제기 靈帝紀 에서 이르길 : 허창은 그의 부친을 월왕越王으로 삼았다.

풍본 馮本 에서 왕 王 을 주 主 라고 씀은, 오자다.

그의 자식 허소許韶와 더불어 여러 현을 선동하니, 무리가 만을 넘었다.

범서 영제기 : 희평熹平 원년 11월, 회계 사람 허생許生이 월왕을 자칭하고, 군현을 침범했다.

장회주章懷注에서 인용한 동관기 東觀記 에서 이르길 : 회계의 허소許昭가 무리를 모아 대장군이라 자칭하고, 부친 허생을 월왕으로 세우고, 군현을 공파했다.

하작이 이르길 : 허생은, 오지에서 허창이라고 썼다. 허소許昭는 허소 許韶 라고 썼다.

혜동惠棟이 이르길 : 천문지 天文志, 장홍전 臧洪傳 에서 모두 허생이라고 썼다. 진晉에서 소 昭 를 피했기에, 소 韶 라고 썼다.

반미가 이르길 : 창 昌, 소 韶 자는 오자다. 토역전 討逆傳 의 주에서 “엄백호嚴白虎는 노虜 안에서 허소許昭에게 의지했다”라고 하며, 또한 소 韶 라고 쓰지 않았으니, 증명할 수 있다.

노필이 살피길 : 범서 주준전에서 “회계태수 윤단尹端이 허소許昭를 토벌하나 패했다”라고 하여, 또한 허소라고 썼다.

손견이 군사마郡司馬로서 정예에 용감한 이들을 모집해, 천여 명을 얻고는, 주군州郡과 합쳐 그들을 토벌해 격파했다.

호삼성이 이르길 : 백관지 百官志 에서 군에 승丞, 장사長史는 있으나 사마는 없으니, 아마도 이 때 도적들이 일어나, 사마를 둬 병사를 주관한 것이다.

이 해가, 희평 원년이다.

이 해 손견은 18세였다.

자사 장민臧旻이 구체적인 공적을 나열해 올리니,

장민의 일은 위지 장홍전의 주에서 인용한 사승謝承의 서 書 에 상세히 있다.”

범서 영제기 : 희평 원년, 양주자사 장민, 단양태수 진인陳夤 (통감에선 인 寅 이라고 썼다.)을 파견해 토벌하여 격파하였다. 3년 11월, 허생을 회계에서 대파하고, 그를 참살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함순임안지 鹹淳臨安志 : 황보암皇甫岩은 어잠於潛 동쪽 15 리에 있으며, 평월성平越城에 가깝다. 구지舊志에선 황보숭皇甫嵩이 요적 허생을 이곳에서 격파하였기에 이름지어졌다고 일렀다. 황보숭전을 살피니, 단지 황건 장각張角을 토벌한 일만 실었고, 허소의 일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찬贊 안에서 “주준은 진陳, 영 颍 에서 승리하고, 또한 우월于越에서 제거했다”라고 일렀는데, 이 때 진국陳國, 영천颍川에서 각각 도적이 일어나, 주준과 황보숭이 함께 이를 평정했으니, 황보숭이 이전에 이 곳에 주둔했으나, 사서에서 그르치고 싣지 않은 것인지는, 또한 알 수 없다. 

노필이 살피길 : 황보숭, 주준전 찬의 주 : 허소를 평정함을 이른 것이다.

조서로 손견을 염독승鹽渎丞으로 제수하고,

군국지 : 서주徐州 광릉군廣陵郡 염독이다.

일통지 : 염독의 옛 성은, 지금의 강소江蘇 회안부淮安府 염성현鹽城縣 서북쪽이다.

수 해 뒤 우이승盱眙丞으로 전임시켰고,

풍본에서 이 眙 를 해 咍 라고 씀은, 오자다.

군국지 : 서주 하비국下邳國 우이다.

일통지 : 우이의 옛 성은, 지금의 안휘安徽 사주泗州 우이현 동북쪽이다.

손책이 희평 4년에 태어났는데, 손견의 나이는 21 세로, 응당 우이승일 때다.

다시 하비승으로 전임시켰다.

군국지 : 하비국의 치소는 하비다.

일통지 : 하비의 옛 성은, 지금의 강소 서주부 비주邳州 동쪽 3리다.

손견이 하비승일 때, 손권을 낳음은, 권전 權傳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 江表傳 에 보인다. 이 해는 광화 5년으로, 손견의 나이는 28세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손견은 3 현을 두루 보좌하며, 있던 곳마다 칭송됐고, 관리와 백성이 가까이하고 의지하며 따랐다. 향리의 오랜 벗, 타인을 돕는데 열심인 젊은이 등, 왕래하는 이가 항상 수백 명이었는데, 손견은 대접해 어루만지며 보양함이, 자제와 같았다.


 

중평中平 원년,

이 해는, 손견의 나이 30 세로, 자식 손익孫翊이 태어났다.

황건의 적수賊帥 장각이 위군魏郡에서 일어나, 신령神靈이 있다고 빙자하고, 8 사자를 파견해서 선도善道로 천하를 교화하나, 몰래 서로 연결돼, 황천태평黃天泰平을 자칭했다. 3월 갑자일, 36만이 하루아침에 모두 일어나니, 천하가 향응하여, 군현을 불사르고, 장리長吏를 살해했다.

범서 範書 영제기 靈帝紀 : 중평 원년, 거록钜鹿 사람 장각이 황천을 자칭하고, 그의 부사가 36만이었는데, 모두 황건을 두르고, 같은 날 모반했다.

황보숭전 : 거록의 장각이 대현량사 大賢良師 라 자칭하고, 황黃, 노老의 도를 받들어 섬기며, 제자를 모아 길러, 무릎 꿇고 절하고 스스로 동의해 과실을 설명하고, 부수符水로 주문을 외워 병을 치료했는데, 장각은 이를 이용해 제자 8 명을 파견해 사방에 사자로 가게 하여, 선도로 천하를 교화해, 더욱더 서로 기만하여 미혹시켰다. 10여 년간, 신도 무리가 수십만으로, 군국이 연결돼, 청青, 서 徐, 유 幽, 기 冀, 형 荊, 양 揚, 연 兖, 예豫 8주의 사람은, 모두 응하지 않음이 없었다. 마침내 36 방方을 설치했는데, 방은 장군호와 같은 것이다. 대방大方은 만여 명, 소방小方은 6, 7천으로, 각각 거수渠帥를 세웠다. 창천蒼天은 이미 죽어, 황천黃天이 응당 설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말을 하고, 일시에 모두 일어났는데, 모두 황건을 둘러서 다른 이들과 구별하게 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를 황건이라 이르고, 또한 아적 蛾賊 이라 지칭했다.

하작이 이르길 : 36 방은, 무엇으로 인하여 베낀 것을 따르다 만 萬 이 됐는지 알 수 없다.

혜동이 이르길 : 원굉 袁宏 의 기 紀 에서는 방 坊 이라고 썼는데, 방 方 과 방 坊 은 고자古字가 통하니, 아마도 장각이 부서를 36 방坊으로 분리하며, 각각 갑을甲乙이 있어서 이를 나눈 것이다.

헌제춘추 獻帝春秋 에서 이르길 :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을 칭했고, 장각의 동생 장보張寶는 지공장군地公將軍을 칭했고, 장보의 동생 장량張梁은 인공장군人公將軍을 칭했다.

통감고이 通鑒考異 에서 이르길 : 사마표 司馬彪 의 구주춘추 九州春秋 에서 이르길 : 장각의 동생은 장량이고, 장량의 동생은 장보다. 원기 袁紀 에서 이르길 : 장각의 동생은 장량, 장보다.

노필이 살피길 : 황보숭전에서는 “장각의 동생은 장보고, 장보의 동생은 장량이다”라고 썼고, 영제기에서 또한 “장각의 동생 장량을 잡았다”라고 일렀다.

한이 거기장군車騎將軍 황보숭, 중랑장中郎將 주준을 파견해 병사를 거느리고 토격하게 했다.

범서 황보숭전 : 황보숭을 좌중랑장左中郎將, 지절 持節 로 삼아, 우중랑장右中郎將 주준과 더불어 각각 일군을 통솔하게 하여, 함께 영천의 황건을 토벌했다.

전대흔錢大昕이 이르길 : 황보숭은 북지태수北地太守로 좌중랑장이 돼, 주준과 함께 황건을 토벌했다. 황건이 평정되고 나서, 이에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으로 임명됐다.  이 때는 아직 거기가 아니었으니, 아마도 열전에 오류가 있는 것이다.

주준이 상표하여 손견을 좌군사마左軍司馬로 삼길 청하니,

송본宋本에서는 좌군 佐軍 이라고 썼고, 산양공재기 山陽公載記 에서도 좌군 佐軍 이라고 씀은, 뒤의 주에 보이고, 강표전 주에서 또한 좌군 佐軍 이라고 씀은, 손책전 주에 보인다. 주준은 회계 상우上虞 사람으로, 손견과 주리州裏가 같다.

향리의 젊은이 중 하비에서 따르던 이들은 모두 따르길 원했다. 손견이 다시 여러 상인과 여객, 회淮, 사泗의 정병을 모으니, 합쳐 천 명 정도가 돼, 주준과 힘을 합쳐 분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막을 이가 없었다.

오서에서 이르길 : 손견은 승세를 타고 깊이 들어가, 서화西華에서 패했다.

군국지 : 예주豫州 여남군汝南郡 서화다.

일통지 : 서화의 옛 성은, 지금의 하남河南 진주부陳州府 서화현 남쪽이다.

손견은 상처를 입고 말에서 떨어져, 풀숲 안에 넘어졌다. 여러 군사가 분산돼, 손견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손견이 타던 총마가 달려 영으로 돌아가, 땅을 밟으며 울어,

풍본에서 踣를 倍라 씀은, 오자다.

장사들은 말을 따라가 풀숲 안에서 손견을 얻었다. 손견은 영에 돌아온 지 십수 일이 지나, 상처가 조금 나으니, 곧 다시 출전하였다.

여 汝, 영颍의 적은 몹시 곤란해, 달아나 완성宛城을 지켰다.

군국지 :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의 치소는 완이다.

일통지 : 완현의 옛 성은, 지금의 하남 남양부 남양현 치소다.

손견이 몸소 한 방면을 주관해, 성에 올라 먼저 들어가니, 무리가 개미떼처럼 한마음으로 따라, 마침내 대파하였다.

범서 주준전 : 남양의 황건이 수만으로, 군수를 죽이고, 완 아래에 주둔했는데, 적이 다시 조홍趙弘을 우두머리로 삼으니, 무리가 10여 만으로, 완성을 점거했다. 주준이 조홍을 공격해, 참살했다. 적의 나머지 우두머리 한충韓忠이 다시 완을 점거하고 주준을 막았는데, 주준이 다시 대파하여, 적은 마침내 흩어졌다.

문대가 주준을 따라 힘써 싸움은 응당 이 때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주준이 스스로 정졸 5천을 거느리고 그들의 동북쪽을 엄습해, 성에 올라 들어간 것은, 바로 이 일이다. 범사範史에서 손견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주준에 의해 거느려졌을 뿐이라서다.

주준이 모두 장狀으로 위에 알려, 손견을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했다.

상 上 자는 응당 윗구두에 속하니,  뒤의 주에서 인용한 오록의 “장을 올리다”와 같다. 손견을 별부사마로 임명함은, 아랫글의 “손견을 의랑議郎으로 임명하다”와 같다. 진본 陳本 에서 상 자가 아랫구두에 속함은, 잘못된 거이다.

속백관지 續百官志 : 별도로 영속營屬을 거느림이 별부사마다. 

 

속한서 續漢書 에서 이르길 : 주준의 자는 공위公偉로, 회계 사람이다.

주준의 일은 대략 위지 魏志 무기 武紀 초평初平 원년에 보인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해, 군郡의 공조功曹가 됐고,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여, 진사進士로 선발했다.

하작이 이르길 : 사서에서 “진사로 선발하다”라고 말함은, 이곳에서 처음 보인다.

양장거梁章钜가 이르길 : 이와 후세 사람이 과거科舉 출신인  경우가 서로 비슷하다.

주수창周壽昌이 이르길 : 후한서에서는 준 儁 을 준 雋 이라 쓰고, “태수 서규徐珪가 주준을 효렴으로 천거했고, 다시 승진시켜 난릉령蘭陵令으로 제수했다”라고 일러, 주준의 출신을 썼다. 진사로 선발한 것과 같은 것은, 양한兩漢에서 이러한 제도가 없어, 바로 사마표司馬彪 때 또한 있을 수 없다. 진사 두 자는 아마도 고제 高第 의 오자다.

심가본이 이르길 : 양한에는 진사란 명칭이 없어, 이에 “진사로 선발하다”라고 이름은, 그 뜻이 분명하지 않다. 양씨가 지금의 제도로 이를 헤아리고자 했으나, 전혀 실상이 아니다.

한조漢朝에서 황건을 토벌한 공으로 인해,

요범姚範이 이르길 : 한조는 응당 본래 오인吳人이 기록한 것으로, 계통을 이은 책에서, 어찌 이와 같이 이를 수 있겠는가?

거기장군으로 임명했고, 점차 승진해 하남윤河南尹이 됐다. 동탁은 주준을 보고, 겉으로는 매우 친근하게 사귀었으나, 속으로는 그를 꺼렸고, 주준 또한 은밀히 이를 대비했다. 관동關東에 병란이 일어나, 동탁은 천도를 의논했으나, 주준이 번번이 동탁을 저지했다. 동탁은 비록 주준을 꺼렸으나, 그의 명성이 빛남을 탐내, 이에 상표하여 태복太仆으로 임명하여 자신을 보조하게 했다. 주준은 징소되나 임명되길 원치 않아, 진언하길 : “도읍은 의당 옮기지 말아야 하니, 필시 천하의 희망을 저버리고, 산동山東의 결속을 이룰 것이라,

범서 준전에서는 結을 釁이라 썼다.

신은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유사有司가 힐문하길 : “군을 징소해서 벼슬을 내리나 군께선 이를 거부하셨고, 천도하는 일은 묻지 않았는데도 군께선 이를 진술하시니, 어째서입니까?” 주준이 이르길 : “상국相國을 보좌하는 것은, 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천도라는 실책은, 신에게 급한 바입니다.

범서에서는 “천도하는 계책은 일에서 급한 바가 아니다”라고 썼다.

감당할 수 없는 바를 사양하고, 신에게 급한 바를 진언함은,

범서에서는 “급하지 않음을 말하다”라고 썼다.

신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유사가 이르길 : “천도하는 일은, 애초에 이러한 계획이 없었고, 가령 있더라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어찌 들으셨습니까?” 주준이 이르길 : “상국 동탁께서 신에게 이를 말씀하셨으니, 신은 이를 상국에게서 들었습니다.” 유사는 굽히게 할 수 없어, 조정에서는 칭찬하며 탄복했다. 후에 태위太尉가 됐다.

서주자사徐州刺史 도겸陶謙 등이 주준을 태사太師로 천거함은, 위지 도겸전 주에 보인다.

범서 주준전 : 초평 4년, 주충周忠을 대신해 태위, 녹상서사 錄尚書事 가 됐고, 다음해 면직됐다.

이각, 곽사가 서로 공격하며, 천자와 공경들을 협박하여 인질로 삼았는데, 주준은 천성이 강직하여, 곧 발병해 죽었다.

범서 주준전 : 헌제가 조서로 주준과 태위 양표楊彪 등 10여 명에게 곽사를 깨우쳐, 이각과 화해하게 하나, 곽사가 원치 않아, 마침내 주준 등을 볼모로 삼았다. 주준은 본디 강직해, 당일 발병해 죽었다.

진인석陳仁錫이 이르길 : 주준은 동탁에 의해서 죽지 않았으니, 그가 죽을 곳을 얻었다.

노필이 살피길 : 주준은 동탁에 의해서 죽지 않았으나, 곽사에 의해서 죽었는데, 어찌 다를 수 있는가? 진씨의 설은 사리에 맞지 않음이 심하다.  

 

변장 邊章, 한수韓遂가 양주涼州에서 난을 일으켰다.

변장, 한수의 일은 위지 무기 권수 卷首 에 상세히 보인다. 한수의 일은 또한 무기 건안 20년 주에서 인용한 전략 典略 에 보인다.

중랑장中郎將 동탁이 막으며 토벌하나 공이 없었다. 중평 3년,

앞에서 이미 중평 원년이라고 썼으니, 이 중평 두 자는 연자다.

사공司空 장온張溫을 파견해 거기장군車騎將軍을 대행하여, 서쪽으로 가 변장 등을 토벌하게 했다.

전대흔錢大昕이 이르길 : 후한서 영제기에서는 2년이다.

장온이 상표하여 손견이 군사軍事에 참여하길 청하고,

호삼성이 이르길 : 참군사參軍事란 관직은 비로소 여기서 보인다. 두우杜佑가 이르길 : 한영제 때 도겸이 유주자사幽州刺史로서 사공 거기장군 장온의 군사에 참여했는데, 당시 손견 또한 참군이었다. 진晉 때 군부에서 비로소 관원을 뒀다.

또한 이르길 : 참군사는 위, 진의 사이에 이르러선, 지위와 명망이 자못 무거웠다. 손초孫楚가 석포石苞에게 이르길 : “천자께서 나에게 경의 군사에 참여하라고 명하셨소.” 이로부터 이후에 지위와 명망이 가벼워졌다.

통감 62에서 “왕랑王朗을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로 삼았다”의 주에 보인다.

주수창周壽昌이 이르길 : 여참군사 與參軍事 는, 그의 군사에 참여하여 모의하게 함을 말한 것으로, 관직을 설치함을 칭한 것이 아니니, 당시 손견은 여전히 관직이 별부사마였다. 호씨 삼성이 참군이 관직으로 설치된 것의 시작이라 이르나, 아마도 옳지 않다. 또한 통전 通典 을 살피기론 한영제 때 도겸이 유주자사로서 사공 장온의 군사에 참여했다고 실었고, 두우는 진 때 비로소 관원을 뒀다고 일렀다. 나 주수창이 상고하기론, 삼국 때 바로 참군을 설치했으니, 양의楊儀, 마속馬谡과 같은 경우가 모두 제갈승상諸葛丞相의 참군으로, 다른 것은 진실로 상고할 틈이 없다. 진서 晉書 직관지 職官志 에서 여러 공公과 개부開府하여 지위가 공과 같은데 지절持節 도독都督이면, 참군을 늘렸고, 또한 군을 거느리고 출정하면 참군을 뒀다고 했다. 이에 이 관직은 때에 따라서 설치한 것으로, 정원이 없다. 또한 상고하기론 건안 19년, 오吳가 위魏의 참군 동화董和를 잡았으니, 이에 참군이 관직으로 설치됨은 응당 삼국 때로, 한漢 말에는 오히려 아직 제도를 정하지 않았다.

노필이 살피길 : 위지 조휴전 曹休傳 : 조휴를 조홍曹洪의 군사에 참여하게 하고, 태조太祖가 조휴에게 이르길 : “네가 비록 참군이나, 실제론 장수다.” 이가 권세가 대단했다는 증거다.

장안長安에 주둔했다. 장온이 조서로 동탁을 부르니, 동탁은 한참을 지나서 장온에게 이르렀다. 장온이 동탁을 꾸짖으나, 동탁의 대응이 불순했다.

송본에서는 대응을 응대라고 썼다.

손견이 당시에 자리에 있다가, 나아가 귓속말로 장온에게 이르길 :

호삼성이 이르길 : 이어 耳語 는, 귀에 가까이가 말하는 것이다.

“동탁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고 오만하게 굴며 큰 소리 치니, 의당 불러도 때맞춰 이르지 않은 것을 근거로, 군법을 말해 밝히고 그를 참살해야 합니다.” 장온이 이르길 : “동탁은 본디 농촉隴蜀의 사이에서 위명이 현저한데,

통감에서는 농촉을 하농 河隴 이라고 썼다.

오늘 그를 죽이고, 서쪽으로 가면 의지할 것이 없을 것이오.” 손견이 이르길 : “명공께서 친히 천자의 군사를 거느리고,

송본에서는 천 天 을 왕 王 이라고 썼고, 통감도 같다. 


위세가 천하를 뒤흔드는데, 어찌 동탁에게 의지하려 하십니까? 동탁이 말한 바를 보니, 명공께 이르지 않고, 윗사람을 가벼이 여기고 무례했으니, 이가 첫 번째 죄입니다. 변장, 한수가 날뜀이 해를 지나서, 응당 때맞춰 나아가 토벌해야 하나, 동탁은 할 수 없다고 일러, 군이 기가 꺾이게 하고 무리를 미혹시켰으니, 이가 두 번째 죄입니다. 동탁은 임무를 받고 공이 없는데도, 부름에 응하며 뒤로 미루고, 의기가 당당하며 스스로를 높이니, 이가 세 번째 죄입니다. 고대의 명장은, 황월黄钺을 손에 쥐고 무리에 임하며, 참살해서 위엄을 보이지 않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사마양저司馬禳苴는 장고莊賈를 참살했고,

사기 사마양저전 : 제경공齊景公 때, 안영晏嬰은 전양저田穰苴를 천거했다. 경공이 전양저를 불러 더불어 병사兵事를 말하여, 크게 기뻐하고는, 장군으로 삼았다. 전양저가 이르길 : “신이 본디 비천하니, 바라건대 임금의 신임을 얻은 총신이고, 나라에서 우러러보는 이로서, 군을 감독하게 하심이, 도리어 옳습니다.” 경공은 장고에게 가게 했다. 전양저와 장고가 약속하길 : “내일 정오에 군문에서 만납시다.” 전양저가 먼저 말을 달려 군에 이르고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설치해 시간을 계산하며 장고를 기다렸다. 정오가 돼서도 장고는 이르지 않았고, 저녁 때 비로소 이르렀다. 전양저가 군정軍正을 불러 묻길 : “군법에서 약속하나 후에 이르면, 어찌하라 이르는가?” 대답하길 : “응당 참살해야 합니다.” 마침내 장고를 참살해서 삼군에 알리니, 삼군의 병사들은 모두 진율했다.

위강魏绛은 양간楊幹을 욕보였습니다.

좌전 左傳 양공襄公 3년 : 진후晉侯의 동생 양간이 곡량曲梁에서 난잡한 행동을 하여, 위강이 그의 마부를 죽였다.

지금 명공께서 동탁에게 뜻을 굽히시니,

호삼성이 이르길 : 수의 垂意 는, 뜻을 굽힘을 말하는 것과 같다.

바로 형벌을 가하지 않아, 위엄있는 형벌을 손상시킴이, 여기에 있습니다.” 장온은 차마 거사하기가 어려워,

통감에서는 거 舉 자가 없다.

곧 이르길 : “군 또한 돌아가시오. 동탁이 장차 타인을 의심하겠소.”

전대소 錢大昭 가 이르길 : 장온은 파로가 말한, 바로 동탁을 참살하는 것을 듣지 않아, 직위가 난의 실마리가 되게 했으니, 작은 일을 견디지 못하면 큰 모의를 어지럽히는 것이다.

손견은 이로 인해 일어나 떠났다. 변장, 한수가 대군이 다가와 이름을 듣고는, 무리가 흩어져, 모두 항복을 구걸했다. 군이 돌아오고, 의논하던 이들은 군이 적을 대하지 않아서, 논공행상을 결단하지 못했으나,

심가본이 이르길 : 범사 範史 영기 靈紀 : 중평 2년, 장온이 북궁백옥北宮伯玉을 미양美陽에서 격파하고, 이어서 탕구장군蕩寇將軍 주신周慎을 파견해 추격하게 하여, 유중榆中을 포위했고, 다시 중랑장 동탁을 파견해 선령강先零羌을 토벌하게 하나, 주신, 동탁이 모두 이기지 못했다. 동탁전 : 3년 겨울, 장온을 징소해 경사로 돌아오게 했다. 그런즉 장온은 징소돼서 돌아간 것이지, 군이 이기고 돌아간 것이 아니고, 당시에 논공행상을 결단하지 못함은, 자연히 군이 나가서 공이 없어서지, 군이 적을 대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또한 그 때 장온이 미양에서 적을 격파했으니, 군이 적을 대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없으며, 변장, 한수가 유중으로 패주하여, 또한 무리가 흩어져 모두 항복을 구걸한 일은 없으니, 이 전과 범사가 전부 부합하지 못함은, 아마도 승조의 착오다.

손견이 동탁의 3 죄를 책망하고, 장온에게 그를 참살하길 권한 것을 듣고는,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국찬이 이르길 : 이 때 동탁의 역심은 아직 드러나지 않아, 탄식할 바가 없고, 또한 이미 탄식해놓고선, 어찌하여 훗날 다시 동탁을 징소했겠는가? 아마도 훗날의 일에 의거해 억지로 끌어다 붙인 글이다.

손견을 의랑議郎으로 임명했다. 당시 장사長沙의 도적 구성區星이 장군을 자칭했는데,

호삼성이 이르길 : 구는 조鳥와 후侯의 반절로, 성이고, 또한 여자如字다.

통감고이에서 이르길 : 범서에서는 관곡 觀鹄 이라고 썼다.

노필이 살피길 : 범서 헌기 獻紀 : 중평 4년 10월, 영릉零陵 사람 관곡이 평천장군平天將軍이라 자칭하고, 계양桂陽을 침범해, 장사태수 손견이 공격해 참살했다. 이를 살피니 바로 아랫글의 영零, 계桂에서 일어난 도적으로, 장사의 도적이 아니다. 고이에서 그르쳐 구성을 관곡으로 여긴 듯하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80 : 종무성鍾武城은 형주부衡州府 서쪽 80 리에 있으니, 한漢의 현으로, 영릉군에 속했고, 후한 때 중안重安으로 고쳤다. 초평 중, 도적 구성이 일찍이 이 곳을 점거해, 손견이 그를 토벌하여 평정했다. 삼국의 오에선 형양군衡陽郡에 속했다.

무리가 만여 명으로, 성읍을 공격하며 포위해서, 이에 손견을 장사태수로 삼았다.

군국지 : 형주荊州 장사군의 치소는 임상臨湘이다.

일통지 : 임상의 옛 성은, 지금의 호남湖南 장사부 장사현 치소다.

환우기 권 93 : 부춘현의 앞에 모래沙가 넘쳤는데, 손견이 군리郡吏가 돼, 부府로 향하여, 향인들이 그를 모래톱洲 위에서 전송했다. 부로가 이르길 : “이 모래는 조그마하나 기니長, 군이 장차 장사태수가 되는 것일까?” 후에 그의 말과 같아서, 손주孫州라고 지칭했다.

어람 69에서 인용한 오록 지리지 地理志 에서, 이르는 바가 이와 같다.

일통지 : 손주孫洲는 절강 항주부 부양현富陽縣 서남쪽 42 리에 있다.

노필이 살피길 : 손견이 장사태수가 됨은, 통감에서는 중평 4년에 편입시켰으니, 당시 손견의 나이는 33 세다. 손견이 장사의 환계桓階를 효렴孝廉으로 천거함은, 계전 階傳 에 보인다.

군에 이르러 친히 장사들을 거느리고, 방략을 실시하고 세워, 달포 사이에, 구성 등을 이기며 격파했다.

위서 魏書 에서 이르길 : 손견이 군郡에 이르고, 군 안에선 두려워 복종했으며, 훌륭한 관리를 임용했다. 관리에게 명하길 : “선량한 이들을 삼가 예우하고, 관조官曹의 문서를 다스림은, 반드시 질서정연하게 다스리고, 도적은 태수에게 맡기도록 하라.”

주조 周朝, 곽석郭石이 또한 무리를 거느리고 영, 계에서 일어나,

주치전 朱治傳 : 중평 5년, 주치가 손견을 따라 장사, 영, 계 3군의 도적 주조, 소마蘇馬 등을 토벌하며 공을 세웠다.

구성과 서로 호응했다. 마침내 경계를 넘어서 깊이 토벌하니, 3 군이 숙연해졌다.

장사, 영릉, 계양이다.

한조에서 전후의 공을 기록해, 손견을 오정후烏程侯로 봉했다.

군국지 : 양주揚州 오군 오정이다.

손호전 孫晧傳 의 보정寶鼎 원년 주에서 실린 손호의 조서에서 이르길 : 지금 오군吳郡의 양선陽羨, 영안 永安, 여항 餘杭, 임수臨水와 단양丹楊의 고장故鄣, 안길 安吉, 원향 原鄉, 어잠於潛 여러 현은, 지세와 물의 흐름의 편리함이, 모두 오정烏程으로 주입돼, 군을 세워서 산월山越을 진압하고, 또한 명릉明陵을 지키기에 이미 마땅하다. 시급히 이 9현을 나눠서 오흥군吳興郡으로 삼고, 오정을 치소로 삼도록 하라.

일통지 : 오정의 옛 성은, 지금의 절강 호주부湖州府 오정현 치소다.

양장거가 이르길 : 오는 오정후로 시작하여, 오정후로 끝났다.

노필이 살피길 : 이는 일이 우연히 일치하는 것으로, 한이 진류왕陳留王으로 끝나고, 위 또한 진류왕으로 끝난 것과 같은 것도, 일이 또한 서로 비슷하나, 천명과 역수曆數와는 조금도 관련된 것이 아니다. 만약 오흥으로 흥한 자는, 반드시 오흥으로 망한다고 이른다면, 의심하고 꺼려서 무술巫術로 남을 저주하는 일이 답습되며 생겨서, 참위谶緯와 술수術數가 마침내 그 기능을 과장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오록에서 이르길 : 이 때 여강태수廬江太守

군국지 : 양주 여강군의 치소는 서舒다.

노필이 살피길 : 이는 동한 말의 여강군 치소다.

일통지 : 서현의 옛 성은, 지금의 안휘安徽 여주부廬州府 여강현 서쪽이다.

위지 무기 건안 4년과 장패전 臧霸傳 에 상호 보인다.

오증근吳增僅이 이르길 : 후한의 여강군 치소는 서로, 건안 4년 유훈劉勳이 비로소 환皖으로 치소를 옮겼다. (오지 손책전) 통감의 호주 胡注 에선 “위魏의 여강 치소는 양천陽泉이다”라고 했고, 황여표 皇輿表 와 주씨周氏의 진략표 晉略表 에서 또한 “위의 여강 치소는 육안六安으로, 오吳가 평정되고, 양천으로 치소를 옮겼다.”라고 일렀다. 지금 여러 설을 살피니 모두 각각 한 때의 말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위지 만총전 滿寵傳 : 태화太和 6년, 오의 장수 육손陸遜이 여강으로 향했다. 만총이 이르길 : “적이 배를 버리고 2백 리를 와, 후미가 공허하고 동떨어졌습니다.” 군을 정돈해 양의구揚宜口로 달려가니, 적은 대군이 동으로 내려옴을 듣고, 바로 달아났다. 수경주에 근거하니, 양의구는 바로 양천수陽泉水의 출입구다. 이에 근거하면, 양천은 여강군의 치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지 손권전 : 가화嘉禾 6년, 전종全琮이 육안을 습격했다. 또한 주이전 朱異傳 : 위의 여강태수 문흠文欽이 육안에 주둔하여 지켰다. (당시는 정시正始 중이다.) 이에 근거하면, 육안 또한 위의 여강군 치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왕사탁 汪士铎 의 삼국여강군고 三國廬江郡考 에서 이르길 : 건안 19년, 오가 주광朱光을 격파하고, 환성을 함락해, 위의 여강태수는 마침내 양천을 치소로 삼았다. 삼가 의심하기론 건안 말 양천으로 치소를 옮겼다가, 제왕齊王 조방曹芳 때부터 다시 육안으로 옮겼다. 오가 평정되고, 다시 양천으로 옮겼다.

양수경楊守敬이 이르길 : 오군吳君이 위 태화 때 위의 여강군 치소가 양천이라고 일렀으나, 실상은 아니다. 육손이 여강으로 향해, 논자들이 의당 신속히 달려가야 한다고 여겼는데, 신속히 육안으로 달려감을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만총은 “여강이 비록 작으나, 장수는 굳세고 병사는 정예라, 지키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습니다.”라고 이르고, 곧 무리를 정돈해 양의구로 달려갔다. 양의구는 육안에서 오히려 백여 리 떨어져 있으니, 이에 그가 차분하고 침착하게 군을 정돈했음을 볼 수 있다. 만약 여강의 치소가 양천이라면, 만총은 이미 치소로 서둘러 간 것이라, 만총이 운운한 바와는 부합하지 못한다.

노필이 살피길 : 오씨, 양씨가 이른 바는, 위의 여강군 치소다. 일통지 : 양천의 옛 성은, 지금의 안휘 영주부颍州府 곽구현霍丘縣 서쪽이다. 육안의 옛 성은, 지금의 안휘 육안주六安州 북쪽이다.

홍량길洪亮吉이 이르길 : 여몽전 呂蒙傳 : 오가 환을 격파한 후, 곧 여몽을 여강태수로 임명하고, 돌아와 심양尋陽에 주둔했다. 즉 오의 여강군은 아마도 심양에서부터 요령遙領한 것이다.

사종영謝锺英이 이르길 : 건안 4년, 손책이 여강을 함락했고, (당시 여강의 치소는 환이다.) 5년, 손권이 이술李術을 환성에서 공격해, 이술의 목을 매달았고, 19년, 손권이 환성을 함락했고, 황무黃武 4년, 환구皖口에서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다고 말했고, 6년, 조휴가 오의 환 수장守將 심덕審德을 참살했고, 7년, 손권이 환구에 이르러, 육손에게 조휴를 석정石亭에서 격파하도록 했고, 가화 6년, 제갈각諸葛恪이 여강에 주둔했고, 적오赤烏 6년, 제갈각이 환에서부터 시상柴桑으로 옮겼다. 이에 오의 여강군 치소는 환으로, 홍씨가 요령이라고 이른 것은, 옳지 않다. 천기天紀 2년, 오인들이 환성에서 대규모로 둔전해, 왕혼王渾이 이를 공파했음은, 진서 혼전 渾傳 에 보인다. 이에 환성은 끝내 위대에는 오에 속했다.

노필이 살피길 : 홍씨, 사씨가 이른 바는, 오의 여강군 치소다. 일통지 : 환성의 옛 성은, 지금의 안휘 안경부安慶府 회녕현懷甯縣 치소다. 위지 명기 明紀 태화 2년에 상호 보인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26 : 호씨胡氏가 이르길 : “한문제漢文帝가 회남淮南을 나눠 여강국廬江國을 만들었으니, 강남에 있고, 반지 班志 에서는 여강군은 강북에 있으니, 대략 양한의 여강군은 모두 치소가 서다. 삼국 때, 오가 위의 여강을 공격해, 만총은 ‘손권이 배를 버리고 2백 리를 가, 현군懸軍으로 깊이 들어왔으니, 그들이 달아나 미치지 못할 것이 두려울 뿐이다’라고 했으니, 아마도 이 때 여강군에서 양천현으로 바꿔 치소로 삼은 것이다. 손씨 또한 여강군을 설치해 환을 치소로 삼았다.”

육강 陸康의

범서 육강전 : 육강의 자는 계녕季甯으로, 오군 오 사람이다. 육강은 어려서 군에서 벼슬했는데, 의기가 장렬하다고 칭송됐다. 자사 장민臧旻이 무재茂才로 추거했고, 징소돼 의랑에 임명됐다. 때마침 여강의 도적 황양黃穰 등이 4현을 공격해 함락해서, 육강을 여강태수로 임명했다. 육강이 상벌을 자세히 밝히고, 황양 등을 격파했다.

노필이 살피길 : 육강의 일은 손책전에 상호 보인다. 육강의 어린 자식 육적陸績은, 자신의 전이 있으니, 뒤에 보인다.

종자從子가 의춘장宜春長으로 일했는데,

군국지 : 양주 예장군豫章郡 의춘이다.

진서 지리지 : 형주荊州 안성군安成郡 의춘이다.

송서 주군지 州郡志 : 강주자사 江州刺史, 안성태수 安成太守. 손호가 예장, 여릉 廬陵, 장사를 나눠서 세우며, 의양宜陽을 거느렸는데, 본래 이름은 의춘으로, 예장에 속했고, 진효무제晉孝武帝 때 개명했다.

일통지 : 의춘의 옛 성은, 지금의 강서 원주부袁州府 의춘현 치소다.

노필이 살피길 : 이와 여남군汝南郡의 의춘은 동명의 다른 땅이다. 여남군의 의춘은, 전한에서는 의춘이라 했고, 후한에서는 북의춘北宜春이라 했다.

도적에게 공격당해, 사자를 파견해서 손견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견은 엄정하게 그를 구하였다. 주부主簿가 나아가 간하니, 손견이 답하길 : “태수에게는 문덕文德이 없어, 정벌로 공을 세우려고 하니, 경계를 넘어서 공격해 토벌하여,

장사군에서부터 에장군의 의춘현까지이기에, 경계를 넘는다고 했다.

다른 군국郡國을 보전할 것이오.

국國은, 군국이다.

이로 인해 죄를 얻어도, 어찌 해내에 부끄럽겠소?” 이에 진군하여 가서 구하니, 도적이 듣고 달아났다. 

 

영제가 죽고, 동탁은 조정을 차지해, 경성에서 제멋대로 막 했다. 여러 주군에서 나란히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고자 했다.

이는 헌제獻帝 초평初平 원년의 일로, 이 때 손견의 나이는 36세다.

강표전 江表傳 에서 이르길 : 손견이 이를 듣고는, 가슴을 치며 탄식하길 : “장공張公이 과거 나의 말을 따랐다면, 조정에선 지금 이러한 난이 없었을 것이다.”

손견 또한 거병했다. 형주자사 왕예王叡가 본디 손견을 대접하며 무례하여, 손견이 지나는 길에 들러 죽였다.

뒤의 주에서 인용한 오록에서 이르길 : 주우周㬂와 손견이 예주豫州를 다퉈, 손견이 몹시 분하여 탄식하길 : “함께 의병을 일으키나, 각각 이와 같구나!” 말하며 뜻을 밝히니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나 손견은 왕예와 또한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어찌 형주자사, 남양태수南陽太守를 함부로 죽였는가?

위지 유표전 劉表傳 : 유표가 왕예를 대신해 형주자사가 됐다.

왕씨보 王氏譜 를 상고하니, 왕예의 자는 통요通耀로, 진晉의 태보太保 왕상王祥의 백부다.

왕상의 일은 위지 고귀향공기 高貴鄉公紀 감로甘露 3년에 보이고, 또한 여건전 呂虔傳 과 주에 보인다.

오록에서 이르길 : 왕예는 이전에 손견과 함께 영, 계의 도적을 공격하나, 손견이 무관이라서, 말하며 자못 그를 경시했다. 왕예가 거병하여 동탁을 토벌하고자 하나, 본디 무릉태수武陵太守 조인曹寅과 서로 화목하지 못해,

군국지 : 형주 무릉군의 치소는 임원臨沅이다.

일통지 : 임원의 옛 성은, 지금의 호남 상덕부常德府 무릉현 서쪽이다.

응당 먼저 조인을 죽여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조인이 두려워, 안행사자案行使者 광록대부光祿大夫 온의溫毅의 격문을 거짓으로 지어서, 손견에게 전해, 왕예의 죄과를 말하며, 잡아서 형벌을 행하고, 장狀을 올리게 했다. 손견은 바로 격문을 받들어 군을 통솔해 왕예를 습격했다. 왕예는 군이 이름을 듣고, 망루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는, 사람을 보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손견의 선두부대에서 답하길 : “병사들이 오래도록 싸우며 수고하였으나, 얻은 상은, 의복을 만들기에도 부족하니, 사군使君께 이르러 다시 비용을 구걸하려는 것 뿐입니다.”

호삼성이 이르길 : 오록에 근거하면, 자치資直란, 옷감의 값이다.

왕예가 이르길 : “자사가 어찌 아끼는 바가 있겠는가? 바로 곳간을 열어, 스스로 들어가서 이를 봐, 남긴 바가 있는지를 알게 하라!” 병사들이 나아가 망루 아래에 이르렀는데, 왕예가 손견을 보고, 놀라 이르길 : “병사들은 상을 구하기 때문인데, 손사군孫使君은 어찌하여 그 안에 계시오?”

풍본에서 사 使 를 부 府 라 씀은 오자다.

고염무顧炎武가 이르길 : 부군府君이란, 한漢 때 태수의 칭호다. 손책인 예장豫章으로 진군했는데, 화흠華歆이 태수라, 손책은 화흠에게 이르길 : “부군의 연령과 덕행, 명성과 인망은, 멀고 가까운 곳에서 따르는 바입니다.”

손견이 이르길 : “사자의 격문을 받아 군을 주살하려 하오.” 왕예가 이르길 : “내가 무슨 죄가 있소?” 손견이 이르길 : “앉아만 있으며 아는 바가 없는 것이오.” 왕예는 몹시 곤궁하여, 금을 깎아 이를 마시고 죽었다.

호삼성이 이르길 : 도홍경陶弘景이 이르길 : 생금에는 독이 있어, 정제하지 않고 이를 마시면 사람을 죽인다.

남양에 이르니,

진본에서는 비 比 를 북 北 이라 썼다.

군국지 : 형주 남양군의 치소는 완이다.

지금의 하남 남양부 남양현 치소다.

무리가 수만 명이었다. 남양태수 장자張咨는 군이 이름을 들으나, 태연자약했다.

장자가 동탁에게 기용됐는데, 부임하고서,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함은, 범서 탁전 卓傳 에 보인다.

영웅기 英雄記 에서 이르길 : 장자의 자는 자의子儀로,

송본에서는 의 儀 를 의 議 라고 썼다.

주수창이 이르길 : 의 議 라고 씀이 옳다. 의 議 와 자 咨 는 의훈義訓이 서로 부합한다.

영천 사람이고, 또한 저명하였다.

헌제춘추 獻帝春秋 에서 이르길 : 원술袁術이 상표하여 손견을 가중랑장假中郎將으로 삼았다. 손견이 남양에 이르고, 태수에게 격문을 급히 돌려 군량을 청했다. 장자가 강기綱紀에게 물으니,

남양군의 강기다. 군의 강기는, 위지 유방전 劉放傳 에 보인다.

강기가 이르길 : “손견은 이웃 군의 이천석二千石이니, 징발에 응하지 마십시오.” 장자가 마침내 주지 않았다.

손견이 쇠고기와 술로 장자를 예우하니, 장자가 다음날 또한 보답하며 손견에게 이르렀다. 주연이 무르익었을 때, 장사의 주부가 들어와 손견에게 아뢰길 : “전에 남양으로 이동했으나, 도로가 정비되지 않아, 군용물자가 갖추어지지 못했으니, 주부를 잡아서 주장하여 일을 꾸민 연고를 추문하길 청합니다.”

강발상康發祥이 이르길 : 위의 주부는, 손견의 주부고, 아래의 주부는, 장자의 주부다. 

주수창이 이르길 : “장자를 잡길 청함을 주부에게로 돌린 것이다. 추 推 는 묻다다. 意 주장하여 일을 꾸밈이다. 고 故 는 일의 까닭이다.

장자가 크게 두려워 떠나고자 했으나, 병사들이 사방에 늘어서 나갈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주부가 다시 들어와 손견에게 아뢰길 : “남양태수가 의병을 멈추게 하고, 도적에게 때맞춰 토벌하지 못하도록 시켰으니, 잡아서 군법을 게시하고 처리하길 청합니다.” 곧 장자를 끌고가 군문에서 참살했다. 군郡 안에선 두려워 떨어, 구하면 얻지 못함이 없었다.  

 

홍매 洪邁 의 용재속필 容齋續筆 권 10에서 이르길 : 장사長沙는 형주荊州의 속부屬部로, 자사刺史 왕예王叡에게 감독 받는데, 손견孫堅은 사사로운 분노로 그를 죽였다. 남양태수南陽太守 장자張咨는, 이웃 군郡의 이천석二千石인데, 손견이 또한 그를 잡아 참살했다. 이는 떳떳하지 못하고 졸렬한 일개 군수면서, 한 때의 군의 위세를 이용하여, 쉽게 방백方伯과 이웃의 군수를 해친 것인데, 어찌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유표劉表는 형주荊州에 있으며, 왕실을 생각했고, 원술袁術은 역란逆亂에 뜻을 뒀는데, 손견은 도리어 그의 명을 받들고 공격해, 스스로 그의 죽음을 재촉했으니, 모두 문제 삼을 점이 있다. 

 

오력 吳曆 에서 이르길 : 애초에 손견이 남양에 이르고, 장자는 이미 군량을 공급하지 않았으며, 또한 손견을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손견은 진군하고자 했는데,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범서 원술전에서는 이 주를 인용하며 “후해後害가 될까 두려웠다”라고 썼다.

이에 갑작스런 병에 걸렸다고 속여, 전군은 몹시 놀라서, 무의巫醫를 맞이해 불렀고, 산천에 기도하며 제사를 지냈다. 가까운 이를 파견해 장자에게 말하게 하여, 병이 위독해, 병사를 장자에게 맡기고자 한다고 말했다. 장자가 이를 듣고는, 속으로 그의 병사를 탐하여, 바로 보기 5, 6백 명을 거느리고 영에 이르러 살폈다.

송본에서는 망 望 을 견 堅 이라 썼다. 범서 원술전에서는 “살폈다”를 “방문했다”라고 썼다.

손견은 누워서 더불어 서로 만났다. 오래지 않아, 갑자기 일어나서, 칼자루에 손을 대며 장자를 꾸짖고는, 마침내 그를 잡아서 참살했다.

이 이야기는 본전과 같지 않다.

나아가 노양魯陽에 이르러,

군국지 : 남양군 노양이다.

지금의 하남 여주汝州 노산현魯山縣의 치소로, 위지 유표전과 모개전 毛玠傳, 한기전 韓暨傳 에 상호 보인다.

원술과 서로 만났다. 원술이 상표하여 손견이 파로장군破虜將軍을 대행하고,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게 했다.

통감고이에서 이르길 : 범서 술전 術傳 에서 이르길 : 유표가 상서하여 원술을 남양태수로 삼았다. 표전 表傳 에서 이르길 : 원술이 가로막으며 노양에 주둔해, 유표는 형주에 이를 수 없었다. 위지 술전 : 손견이 장자를 죽이고, 원술은 남양을 점거할 수 있었다. 위무기 魏武紀 : 이 해 2월, 원술이 남양에 주둔했다. 아마도 원술은 처음에 노양으로 달아났는데, 이 해 봄에 손견이 남양을 취하여, 원술이 이에 이를 점거하고는, 여전히 노양을 치소로 삼은 것이다.

소여蘇輿가 이르길 : 이는 이미 자사가 목牧으로 바뀐 후인데, 이 전에서 여전히 자사라고 씀은, 아마도 군웅이 서로 다투어 일어나며, 조정의 제도가 하나가 되지 못해, 마침내 가지런하지 못함이 있던 것으로, 사서의 오류로 인한 것이 아니다.

마침내 노양성에서 군을 훈련시켰다. 곧 진군해 동탁을 토벌하려 하며, 장사長史 공구칭公仇稱을 파견해 군을 거느리고 주에 돌아가 군량을 감독하는 것에 종사하게 했다. 성 동문 밖에 장막을 펼치고, 조도祖道하며 공구칭을 전송해, 관속이 모두 모였다. 동탁이 보기 수만 명을 파견해 손견을 역격하게 하여, 경기병 수십 명이 먼저 이르렀다. 손견은 한창 술을 돌리고 담소하며, 부곡에게 군의 행렬을 정돈해, 망령되이 행동할 수 없도록 명했다. 후에 기병이 점점 늘어나, 손견은 천천히 자리를 그치고, 인도하여 성에 들어가며, 곧 좌우에게 이르길 : “지난번에 나 손견이 바로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군이 서로 짓밟아, 제군이 들어갈 수 없을까 두려웠던 것뿐이었다.” 동탁의 군은 손견의 병사들이 매우 가지런함을 보고, 감히 성을 공격하지 못하고, 곧 이끌고 돌아갔다.

영웅기 英雄記 에서 이르길 : 애초에 손견이 동탁을 토벌하며, 양현梁縣의 양인陽人에 이르렀다.

군국지 : 사례司隸 하남윤河南尹 양梁이다.

유소주 劉昭注 : 양인취陽人聚가 있다. 사기에서 이르길 : 진秦이 동주東周를 멸하고, 그 제사를 끊지 않아, 양인 땅을 주의 임금에게 하사했다.

수경 여수주 汝水注 : 여수는 다시 동으로 광성택수廣成澤水와 합쳐지는데, 물은 낭고산狼臯山 북쪽 못 안에서 나온다. 여수는 다시 동으로 노공수구魯公水口에 도달한다. 물은 위로 양인성 동쪽 노공피魯公陂를 받아들인다. 성은 고대 양의 양인취다. 진이 동주를 멸하고, 그 임금을 이곳으로 옮겼다.

호삼성이 이르길 : 양인취의 옛 성은 양현 서쪽이다.

일통지 : 양현의 옛 성은, 지금의 하남 여주 서쪽 40 리다. 양인취는, 지금의 여주 서쪽 85리다.

동탁 또한 병사 보기 5천을 파견해 그를 역격하게 했는데, 진군태수陳郡太守 호진胡轸이 대독호大督護가 됐고,

조일청이 이르길 : 후한서 동탁전의 주에서 인용한 구주춘추 九州春秋 에서 동군태수 東郡太守 라고 썼고, 속지 續志 에 진국陳國은 있으나, 진군은 없으며, 조위曹魏에서 처음에 국을 폐하고 군으로 삼았으니, 진 陳 은 바로 동 東 이 와전된 것이다.

여포呂布가 기독騎督이 됐으며, 기타 보기의 장교와 도독이 매우 많았다. 호진의 자는 문재文才로,

호진의 일은 위지 동탁전의 주에서 인용한 구주춘추에 보이고, 또한 장기전 張既傳 의 주에서 인용한 삼보결록주 三輔決錄注 에 보인다.

성격이 급해, 미리 선언하길 : “지금 이 거동은, 응당 청수青绶 한 명을 참살하면,

반미가 이르길 : 정부 丁孚 의 한의 漢儀 에서 이르길 : 이천석의 인끈 깃은 푸른 바탕에 도화표桃華缥다. 속한지 續漢志 에서 이르길 : 구경 九卿, 중이천석 中二千石, 이천석은, 청수다.

곧 정제될 뿐인 것이다.” 여러 장수가 듣고는 이를 싫어했다. 군이 광성廣成에 이르니,

군국지 : 하남윤 신성新城에, 광성취廣城聚가 있다.

방여기요 권 51 : 광성택廣城澤은 여주汝州 서쪽 40 리로, 광성취가 있는데, 영제가 하남 8관關의 하나를 설치했다.

양인성에서 수십 리 떨어져있었다. 날이 저물어, 병사와 말이 매우 피로해, 응당 머물러 자야 됐는데, 또한 본래 동탁의 절도節度로 광성에서 묵고, 말을 먹이고 먹고 마시고는, 밤에 진군하여, 새벽이 되면 성을 공격하라는 것을 받았었다. 여러 장수는 호진을 싫어하고 꺼려, 적이 그의 일을 실패시킴을 원해서, 여포 등은 “양인성 안의 적이 이미 달아나, 응당 이를 추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를 놓칠 것이다”라고 선언했고, 곧 밤에 진군하였다. 성안의 수비는 매우 온전해, 엄습할 수 없었다. 이 때에 관병은 굶주리고 목이 말라, 인마가 매우 지쳤고, 또한 밤에 이르러, 해자와 보루가 없었다. 갑옷을 풀고 휴식하나, 여포가 다시 선언하여 서로 놀라게 하며, 이르길 “성안의 적이 나왔다.” 군은 소란스러워져 황급히 달아나며, 모두 갑옷을 버리고, 안마鞍馬를 잃었다. 10여 리를 가서, 안정됐는데 적은 없고,

주수창이 이르길 : 정무적 定無賊 세 자는 문사의 함의가 부족하니, 아마도 정 위에 경 驚 자가 있었을 것이다.

때마침 날이 밝아, 곧 돌아와서, 병기를 주워서는, 나아가 공성하고자 했다. 성의 수비가 이미 견고했고, 해자를 팜이 이미 깊어서, 호진 등은 공격할 수 없어서 돌아갔다.

심가본이 이르길 : 이 주는 응당 아래의 “양인에서 접전하다”의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이 때 손견은 노양성에서 군을 훈련시켜, 아직 양인에는 이르지 않았다. 손견이 나아가 양인에 주둔함은 초평 2년으로, 범사의 기전에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노양에 있던 것과 이동해 양 동쪽에 주둔함은 모두 원년으로, 뒤섞여서 하나가 될 수 없다.
 

손견은 이동해 양梁 동쪽에 주둔하고, 크게 동탁군에게 공격받았는데, 손견과 수십 기가 적의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왔다.

심가본이 이르길 : 범사 탁전 卓傳 : 동탁이 먼저 장수 서영徐榮, 이몽李蒙을 파견해 사방에 나타나 약탈했는데, 서영이 손견과 양에서 조우해, 더불어 싸워, 손견을 격파하고, 영천태수颍川太守 이민李旻을 생포하고는, 그를 삶아 죽였다. 바로 이 일로, 당시는 초평 원년이다.

손견은 항상 붉은 계책罽帻을 썼는데,

속한지 續漢志 여복지 輿服志 에서 이르길 : 군직관원은 항상 적색두건을 써, 위엄을 갖추었다.

유소주劉昭注에서 인용한 독단 獨斷 에서 이르길 : 책 帻 은, 과거에 비천한 집사執事며 관을 쓰지 못하는 이가 쓰는 것이었다. 동중서 董仲舒 의 지우서 止雨書 에서 “집사는 모두 적색두건”이라고 하여, 관을 쓰지 못하는 이가 쓰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강발상康發祥이 이르길 : 책 帻 은, 음이 책責이다. 설문 說文 : 머리털에 두건을 두름을 책이라 한다. 계 罽 는, 음이 계猘다. 이아 爾雅 의 주 : 가는 털이라서 계 罽 다. 소 疏 : 털을 짜서 이를 만든다. 지금의 털로 된 구유氍毹와 같다. 붉은 계책은, 적색의 모직물을 두건으로 삼은 것을 이른다. 후한여복지 後漢輿服志 : 진秦에선 무장의 수식首飾을 더해 진홍색 두건을 이루었다. 동관한기 東觀漢記 : 단경段熲이 강羌을 멸하여, 조서로 적책대관赤帻大冠 1 구를 하사했다. 이와 비슷한 것이다.

곧 계책을 벗어서 친근한 장수 조무祖茂에게 이를 쓰도록 했다. 동탁의 기병이 다투어 조무를 쫓았기에, 손견은 샛길로 면할 수 있었다. 조무는 몹시 절박하여, 말에서 내려, 계책을 무덤 사이의 불탄 기둥에 덮고서,

풍본에서 주 柱 를 저 著 라 씀은 오자다.

어떤 이가 이르길 : 소주燒柱는, 아마도 화주 華柱 의 오자다.

풀 숲 안에 엎드렸다. 동탁의 기병이 멀리서 보고는, 수 겹으로 둘러싸, 확고해지고 나서 가까이서 이 기둥을 깨달아, 곧 떠났다. 손견이 다시 살피고 군을 거둬, 양인에서 접전하여, 동탁군을 대파하고, 그 도독都督 화웅華雄 등을 효수했다.

반미가 이르길 : 독 督 은, 응당 위 尉 가 되야 하고, 화 華 는, 응당 엽 葉 이 되야 한다. 광운 廣韻 29 엽에서 인용한 오지 손견전에 도위都尉 엽웅葉雄이 있어, 송본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으니, 금본今本의 오류다. 의당 광운을 따라야 한다.

이 때, 어떤 이가 원술에게 손견을 이간하여, 원술은 의심을 품고, 군량을 운송하지 않았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어떤 이가 원술에게 이르길 : “손견이 만약 낙洛을 얻으면, 다시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이리를 없애고 호랑이를 얻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술은 그를 의심하였다.

양인은 노양에서 백여 리 떨어졌었는데, 손견이 밤에 말을 달려 원술을 만나, 땅에 그림을 그리며 의논해, 이르길 : “헌신하며 꺼리지 않는 이유는, 위로는 국가를 위해 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개인적인 원수를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저 손견은 동탁과 골육의 원한이 없으나, 장군께선 오랜 참언을 받아들이시고,

통감에서는 “오랜 참언”을 “조금씩 적시는 말”이라 썼다.

호삼성이 이르길 : 조금씩 적시는 참언은, 말이 논어 論語 에서 나온다.

도리어 서로 꺼리며 미워하십니까!”

강표전에 실린 손견의 말 : “큰 공로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나 군량이 이어지지 않으니, 이가 오기吳起가 서하西河에서 탄식하며 운 이유이고,

오본 吳本 에서는 읍 泣 을 식 息 이라고 썼다.

사기 오기전 : 오기는 위衛 사람이다. 위문후魏文侯는 오기가 용병에 뛰어나, 서하수西河守로 삼으니, 진병秦兵은 감히 동으로 향하지 못했고, 한 韓, 조趙가 따랐다. 공숙公叔이 재상이 돼, 오기를 시기하니, 오기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 마침내 떠나 초楚로 갔다.

악의樂毅가 거의 성취되려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남긴 이유입니다.

풍본에서 성 成 을 수 戍 라 쓰고, 모본에서 무 戊 라 씀은, 모두 오자다.

사기 악의전 : 악의가 제齊의 70여 성을 함락해, 모두 군현으로 삼아 연燕에 속하게 하여, 오직 거莒, 즉묵即墨만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전단田單이 연에 반간反間을 부추겨, 연혜왕燕惠王은 기겁騎劫에게 장수를 대신하게 하며, 악의를 불러들였다. 악의는 주살될까 두려워, 마침내 서쪽으로 조에 투항했다.

장군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원술은 조심하며,

축적 踧踖 은, 스스로 안정됐다고 여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바로 군량을 징발해줬다. 손견은 주둔지에 돌아왔다. 동탁은 손견이 용맹하고 힘찬 것을 꺼려, 곧 장군 이각 등을 파견해 와서 화친을 구하게 하며, 손견에게 자제가 자사, 군수를 맡을 것을 배열해 분포하게 하고는, 상표하여 그들을 임용할 것을 약속했다. 손견이 이르길 : “동탁이 천명을 어기고 무도하며, 왕실을 흔들고 뒤집어서, 만약 너희 삼족을 멸해서, 사해에 매달며 보이지 못하면,

현 縣 은, 현懸이라고 읽는다.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인데, 어찌 장차 너와 더불어 화친하겠느냐?”

내 乃 는, 너다.

다시 대곡大谷으로 진군하니,

대곡은 한영제가 8관의 하나를 설치한 곳으로, 지금의 하남 낙양현 동남쪽에 있고, 위지 무기 초평 원년에 상세히 보인다.

장회주 章懷注 : 대곡구大谷口는 옛 숭양嵩陽 서북쪽 85 리에 있어, 북으로 나오면 낙양의 옛 성과 마주한다. 장형 張衡 의 동경부 東京賦 에서 “맹진盟津은 그 뒤에 도달하고, 대곡은 그 앞과 통한다”라고 이름이 이것이다. 

낙雒에서 90 리 떨어져 있었다.

거 拒 는, 범서 동탁전에서는 거 距 라 썼다.

장회주 : 거 距 는 이르다다.

산양공재기 山陽公載記 에서 이르길 : 동탁이 장사長史 유애劉艾에게 이르길 :

모본에서는 탁 卓 을 거 車 라 잘못 썼다.

“관동關東의 군은 기울어져가는 운수이고, 모두 고孤를 두려워해,

모본에서는 외 畏 를 위 謂 라 썼다.

할 수 있는 바가 없다. 오직 손견만은 어리석음이 적고,

설문 : 당 戆 은, 어리석다다.

음은 도都와 강降의 반절이다.

자못 용인술에 능하니, 응당 여러 장수에게 말하여, 그를 알고 꺼리게 하라. 고가 과거 주신周慎과 서정하여, 주신이 변邊씨, 한韓씨를 금성金城에서 포위했다. 고가 장온에게 말하여, 거느리는 병사들을 이끌고 주신을 위해 뒤에 머물기를 구했으나, 장온은 듣지 않았다. 고가 당시에 그 형세를 상언함은, 주신이 필시 이기지 못할 것을 알아서다. 대台에는 지금도 그때의 본말本末이 갖추어져 있다. 일에서 아직 응답이 없었는데, 장온은 다시 고에게 선령先零의 반란을 일으킨 강羌을 토벌하게 하며, 서방에서 일시에 난이 평정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고는 그렇지 않음을 모두 알았으나 멈출 수 없어서, 마침내 행하여, 별부사마 유정劉靖에게 보기 4천을 거느리고 안정安定에 주둔하도록 남겨서, 성세聲勢로 삼았다. 반란을 일으킨 강이 다시 돌아와,

송본에서는 경 更 을 편 便 이라 썼다.

돌아갈 길을 끊고자 했으나, 고가 조금 공격하니 번번이 열린 것은, 안정에 병사가 있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노虜는 안정에 응당 수만 명이 있을 거라 여기고, 오직 유정만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당시에 또한 장章을 올려 정황을 말했다. 그리고 손견은 주신을 따르며 행해, 주신에게 이르며 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금성에 가고, 주신에게 2만으로 뒤에 머무르는 것을 구했는데, 변씨, 한씨의 성중에는 저장한 식량이 없어서, 응당 밖에서 운송해야 하나, 주신의 대병을 두려워해, 감히 가벼이 손견과 싸우지 못했을 것이라, 손견의 병사는 그들의 운송로를 끊기에 충분했으니, 아이들이 들어줬다면 필시 강을 골짜기 안으로 돌려보내고,

통감에서는 “아이들이 그의 말을 들어줬다면”이라 썼다.

양주는 혹 평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장온이 이미 고를 쓸 수 없었고, 주신 또한 손견을 쓸 수 없어서, 스스로 금성을 공격하며, 그 바깥 담장을 무너트리고, 말을 달려 사자를 보내 장온에게 말하며, 스스로 단시간에 점령할 것이라고 여겼고, 장온도 당시에 스스로 헤아림이 맞다고 여겼다. 그러나 도요아渡遼兒들이 과연 채원蔡園을 끊어서,

범서 동탁전에서는 규원협 葵園狹 이라 썼고, 통감에서는 규원협 葵園峽 이라 썼다. 도요아는, 변장, 한수를 이른 것이다.

주신은 치중을 버리고 달아나, 과연 고의 예측과 같았다.

이 일은 영제 중평 2년에 있다.

범서 동탁전 : 변장, 한수가 유중榆中으로 패주해, 장온은 이에 주신을 파견해 3만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추격하여 토벌하게 했다. 장온의 참군사 손견이 주신을 설득하길 : “적의 성안에는 양곡이 없어, 응당 밖에서 양식을 옮겨야 합니다. 저 손견은 만 명을 얻어서 그들의 운송로를 끊길 바라는데, 장군께서 대병으로 뒤를 이으시면, 적은 필시 궁핍하나 감히 싸우지 못할 것이고, 만약 강羌의 속으로 달아나 들어가서, 힘을 합쳐 이를 토벌하면, 양주는 평정될 것입니다.” 주신은 따르지 않고, 군을 이끌고 유중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변장, 한수가 나뉘어 규원협에 주둔해, 도리어 주신의 운송로를 끊었다. 주신은 두려워, 곧 치중을 실은 수레를 버리고 물러났다.

방여기요 권 60 : 규원협은 난주蘭州 서쪽에 있다.

대台에서 이로 인해 고를 도향후都鄉侯로 봉했다.

위지, 범서 동탁전 모두 “태향후斄鄉侯에 봉했다”라고 썼다.

손견은 좌군사마佐軍司馬로, 소견이 타인과 같아서, 자연히 괜찮다고 여길 뿐이었다.”

통감에선 견 見 아래에 약 略 자가 있고, 아래 구절을 “여전히 괜찮다고 여겼다”라고 썼다.

호주 胡注 : 그의 재주가 쓸만함을 말한 것이다.

통감에서 또한 이르길 : 다만 까닭 없이 여러 원씨 아이들을 따르니, 끝내는 또한 죽을 뿐이다.

유애가 이르길 : “손견이 비록 때맞춰 계책을 보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각李傕, 곽사 郭汜 만 못합니다. 듣기로는 미양정美陽亭 북쪽에서,

미양은, 지금의 섬서陝西 건주乾州 무공현武功縣 서남쪽으로, 위지 동탁전에 보인다.

천 명의 보기를 거느리고 노와 합전해, 거의 죽을 뻔했고, 인수印绶도 잃어버렸다고 하니, 이에 유능하다고는 여기지 못하겠습니다.” 동탁이 이르길 : “손견은 당시 오합지졸에 자원해서 종군하던 이들이라, 병사들이 노의 정예로움만 못했고, 또한 전투에는 길흉이 있는 것이다. 다만 산동山東의 대세를 논하면, 끝내 미칠 바가 아닐 뿐이다.” 유애가 이르길 : “산동의 아이들이 백성을 몰며 약탈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예기가 타인만 못하고,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와 강노를 씀도 타인만 못한데, 또한 어찌 오래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동탁이 이르길 : “그렇다. 오직 이원二袁, 유표, 손견을 죽이면, 천하는 자연히 고에게 복종할 뿐인 것이다.”

동탁은 갑자기 서쪽으로 천도해 관으로 들어가며, 낙읍雒邑을 불태웠다.

위지 동탁전 : 초평 원년 2월, 천자를 옮겨 장안으로 도읍하며, 낙양의 궁실을 불태우고, 능묘를 모두 파내, 보물을 취했다.

어떤 이가 이르길 : 갑자기란 글자는, 손견의 핍박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손견이 곧 나아가 낙에 들어가서, 여러 능을 보수하고, 동탁이 파낸 곳을 평평하게 메웠다.

범서 동탁전 : 동탁이 친히 나와, 손견과 여러 능묘 사이에서 싸우나, 동탁은 패주해, 물러나 민지渑池에 주둔하여, 섬陝에서 병사를 모았고, 손견이 낙양 선양성문宣陽城門으로 나아가, 다시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도 깨져 달아났다. 손견이 이에 종묘를 청소하고, 여러 능을 평평하게 메우고, 병사를 나눠 함곡관函谷關에서 나와, 신안新安, 임지 사이에 이르러서, 동탁의 뒤를 끊었다.

어떤 이가 이르길 : 한복韓馥과 같은 무리에게 보이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죽게 하기에 충분하다.

강표전에서 이르길 : 옛 도읍은 공허해져, 수백 리 안에선 사람의 집에서 불 때는 연기가 없었다.

범서 탁전 : 낙양 사람 수백만 인구를 장안으로 모두 옮겼고, 궁묘宮廟와 관부官府, 거주하는 집을 모두 불살라, 2백 리 내에 다시는 단 하나라도 남아있는 게 없었다.

손견이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는,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오서에서 이르길 : 손견이 낙에 들어가, 한의 종묘를 청소하고, 태뢰太牢로 제사지냈다. 손견은 성남쪽 견관정甄官井 위에 진을 쳤는데,

견 甄 은, 음이 견堅으로, 주해가 위지 후비전 後妃傳 견후전 甄後傳 에 보인다.

문선 文選 38 구위제손치수총인표 求爲諸孫置守冢人表 : 견정甄井에서 신기神器를 구제했다.

이선주 : 견은 음이 진真이다.

엽수번葉樹藩이 이르길 : 이씨의 주는 잘못된 것이다. 진여교陳與郊가 이르길 : 생각하건대 견 甄, 견 堅 의 음이 맞았기에,  손견이 견정의 신기를 천명을 받은 증표로 삼았다. 손권이 오에서 임금이 되고 나서, 손견을 황제로 추존해, 강좌江左에서는 마침내 오의 휘諱가 됐다. 그 이후 진秦에서 부苻씨 때문에 피하고, 수隋에서 양楊씨를 위해 고치며, 전례를 따른 이래로, 마침내 견堅이라는 음독을 잊어버렸다. 송宋의 견철甄徹이 진사進士에 급제해, 임터林摅가 호명하며, 견甄을 견堅이라고 읽었는데, 황상이 진真의 음운으로 칭하여, 논쟁해 바로잡다 불손해서, 파면됐다.

호삼성이 이르길 : 견관서甄官署의 우물 안이다. 진직관지 晉職官志 에서 소부少府의 속관으로 견관령甄官令이 있었으나, 속한지에서는 이가 없으니, 아마도 다른 관서에 속했고, 아직 전관專官을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견관은, 돌을 다듬고 도기를 굽는 일을 관장했다.

방여기요 권 48 : 견관정은 옛 낙양성 안에 있다.

일통지 : 견관정은 낙양현 동남쪽에 있다.

아침에 오색 기운이 있어,

모본에서 단 旦 을 차 且 라 씀은 오자다.

관본 官本 고증 考證 에서 이르길 : 문선에서는 “매일 아침 오색 기운이 있었다”라고 썼다.

전군은 놀랍고 괴상하다고 여겨, 감히 물을 길음이 없었다. 손견이 사람에게 정에 들어가게 해, 한漢의 전국새傳國玺를 찾아 얻었는데,

범서 원술전의 주에서 인용한 오서에서 이르길 : 한실이 크게 어지러워져, 천자가 북으로 하河 위에 이르렀는데, 육새六玺를 몸에 지니지 않았고, 옥새를 관장하던 이가 우물 안에 던졌다. 손견이 북으로 동탁을 토벌해, 성 남쪽에 군을 머물게 했고, 견관서에 우물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오색 기운이 우물 안에서부터 나와, 타인에게 우물을 깊이 파내게 하여, 한의 전국옥새를 얻었다. (속한지 여복지의 주에서 인용한 오서와 이가 같다.)

“수명우천 受命于天, 기수영창 既壽永昌”이라는 인문印文이 있었고, 둘레가 4 촌에, 위의 인끈이 있는 곳에 다섯 용이 교차했는데, 위에 뿔 하나가 부족했다.

문선주에서는 상 上 자 위에 용 龍 자가 있다.

애초에, 황문黃門 장양張讓 등이 난을 일으켜, 천자를 위협해 도망갔는데, 좌우가 따로따로 흩어져서, 옥새를 맡은 이가 정 안에 던졌었다.

전국새의 일은 위지 무기 건안 13년의 주에서 인용한 선현행장 先賢行狀 에 상세히 보인다.
 


산양공재기에서 이르길 : 원술이 장차 참호하려는데, 손견이 전국새를 얻은 것을 듣고, 이에 손견의 부인을 잡아서 이를 빼앗았다.

범서 원술전 : 원술은 참역하려는 모의를 가졌고, 또한 손견이 전국새를 얻은 것을 듣고는, 마침내 손견의 처를 잡아서 이를 빼앗았다.

노필이 살피길 : 원술이 참호함은 건안 2년으로, 이 때는 손책이 이미 장수를 보내 부릉阜陵에 이르러 모친을 맞이해 곡아曲阿에 이르렀는데, 원술이 어찌 그녀를 잡을 수 있는가?

강표전에서 이르길 : 상고하건대 한헌제기거주 漢獻帝起居注 에서 “천자가 하河 위에서부터 돌아와, 육새를  각閣 위에서 얻었다”라고 일렀고, 또한 태강太康 초, 손호孫晧가 금새金玺 6 매枚를 보냈으나, 옥이 없었으니, 그것이 거짓임이 명백하다.

우희虞喜의 지림志林에서 이르길 :

진서 晉書 유림전 儒林傳 : 우희의 자는 중녕仲甯으로, 회계 여요余姚 사람이다. 우희는 박학했고 옛 것을 즐겼는데, 자주 징소되나 나서지 않고, 경전經傳에 전심했고, 아울러 참위谶緯를 봤다. 안천론 安天論 을 저술하고, 다시 모시략 毛詩略 을 해석했고, 효경 孝經 에 주를 달았고, 지림 30 편을 지었다. 무릇 주석을 단 수십만의 말은 세상에 유행했다. 향년 76에 죽었다.

수서 隋書 경적지 經籍志 유가류 儒家類 : 우희의 지림신서 志林新書 는 30권이고, 광림 廣林 은 24권, 후림 後林 은 3권이다.

지금은 마국한馬國翰의 집본輯本 지림 1권이 존재한다.

천자의 육새란, “황제지새 皇帝之玺”, “황제행새 皇帝行玺”, “황제신새 皇帝信玺”, “천자지새 天子之玺”, “천자행새 天子行玺”, “천자신새 天子信玺”라는 인문이 있다. 이 육새는 봉하는 일이 다르기에, 문자가 같지 않다.

아랫글의 헌제기거주와 응씨應氏의 한관 漢官 두 가지는, 풍본에서는 모두 1 격格 비웠고, 원본 元本, 모본에서는 헌제기거주가 1 격 비워졌다. 송본에서는 모두 이어져, 공란을 두지 않았다.

심군창沈君瑲이 이르길 : 글의 뜻을 살피니, 전후로 서로 이어져, 강표전의 옥새는 없다는 설을 논박했다. 배주는 모두 우희의 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 가지는 지림의 한 조항에 그치는 듯하나, 각본刻本에서 이를 잘못 나눴다.

헌제기거주에서 “하 위에서부터 돌아와, 육새를 각 위에서 얻었다”라고 이른 것이, 이를 이른 것이다. 전국새란, 바로 한고조漢高祖가 진황제秦皇帝의 옥새를 지닌 것으로, 대대로 전수해서, 전국새라 불렀다. 상고하건대 전국새는 육새의 수에 포함되지 않는데, 어찌 합쳐서 말할 수 있겠는가? 응씨의 한관,

풍본에서 관 官 을 궁 宮 이라 씀은 오자다. 아래도 같다.

수서 경적지 : 한관 5권은, 응소應劭가 주를 달았다. 한관의 漢官儀 10 권은, 응소가 지었다.

위지 왕찬전 王粲傳 주에 보인다.

황보 皇甫 씨의 세기 世紀 에서,

제왕세기 帝王世紀 는, 황보밀皇甫谧이 지은 것으로, 촉지 진밀전 秦宓傳 주에 보인다.

육새를 논하는데, 글의 뜻이 모두 부합한다. 한관에서는 전국새에, “수명우천, 기수차강 既壽且康”이라는 인문이 있다고 했다. 차강 且康, 영창 永昌, 두 자가 어긋나는데,

풍본에서는 아래에 차강 두 자가 없다.

양가의 어떤 것이 적합한지는 알 수 없다. 금옥金玉의 정제된 것은, 대체로 광기光氣가 있고, 게다가 신기비보神器秘寶라면,

모본에서 기 器 를 기 氣 라 씀은 오자다.

밝게 빛남이 더욱 뚜렷해, 일대의 기이한 광경, 장래의 기이한 소문을 압도할 것인데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이유 때문에, 강하게 이를 거짓이라 이르니, 또한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진수가 파로전 破虜傳 을 지으며 또한 이 설을 제거했으니, 모두 기거주 起居注 에 혹하여, 육새는 다른 이름이고, 전국새와 더불어 7 개가 됨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오 때는 옥을 조각할 수 없었기에,

조일청이 이르길 : 중화고금주 中華古今注 : 손문대가 청옥으로 된 안장을 얻었는데, 네거리를 빛을 내어 환하게 비췄다.

천자는 금으로 옥새를 만들었다. 옥새가 비록 금으로 만든 것이라도, 인문은 다르지 않았다. 오가 항복하며 옥새를 보냄은 천자의 육새를 보낸 것으로, 앞서 얻은 옥새가, 바로 옛 사람이 남긴 인새印玺로,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 천자의 옥새에 관해, 지금 힐난할 게 없다고 여기는 것은, 그 의미에 통하지 못한 자일뿐이다.

신 배송지가 여기건대 : 손견은 의를 일으킨 무리 중에서 가장 충렬하다는 명성이 있는데, 만약 한의 신기를 얻고 은밀히 감추며 말하지 않았다면, 이는 은밀히 다른 뜻을 품은 것이 되는데, 어찌 소위 충렬한 자겠습니까?

송본에서는 열 烈 을 신 臣 이라 썼다.

오의 사관이 이로써 국가의 위광으로 삼고자 했으나, 손견의 아름다운 덕을 해침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참말이라면, 자손에게 전한 것이 되는데, 설령 육새의 수에는 포함되지 않아도, 요컨대 일반인이 소장할 바가 아니며, 손호가 항복할 때, 또한 다만 육새를 보내며, 전국새는 보배롭게 여겨 잘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는데, 어찌 귀순한 이의 집에서 취하겠습니까! 만약 우희의 말과 같다면, 이 옥새는 지금도 손씨 집안에 있게 됩니다. 필부가 벽璧을 품어도, 오히려 죄가 있다고 이르는데, 하물며 이러한 물건은 어떻겠습니까!

조일청이 이르길 : 손견은 우물 안에서 전국새를 얻었다. 손견이 죽고, 원술이 그의 부인을 핍박해서 이를 탈취했다. 원술이 죽고, 군이 무너져, 서구徐璆가 얻고는 이를 바쳤다. 후한서 서구전에서 이른 “그가 국새를 훔친 것을 얻고는, 허許로 돌아와, 이를 바쳤다”가 이것이다. 장회주에서 손견의 일을 인용해서 이를 증명하나, 배세기裴世期는 오히려 오가 망할 때 이 옥새가 보이지 않는 모습을 가지고 힐난했으니, 하나를 얻으나 둘을 소홀히 했다고 이를 수 있다.

또한 이르길 : 북제서 北齊書 신술전 辛術傳 : 신술이 옮겨 광릉廣陵을 지키다, 전국새를 얻고는, 업邺에 보냈다. 이 옥새가 바로 진秦이 제조한 것으로, 둘레가 4 촌이고, 위의 인끈이 있는 곳에 반룡盤龍이 교차하며, “수명우천, 기수차창 既壽且昌”이라는 인문이 있었다. 이한二漢이 대대로 전했고, 다시 위魏, 진 晉 에 전해졌다. 회제懷帝가 유총劉聰에게 패망하고, 유총은 석씨石氏에게 패망했다. 석씨가 패망하고, 진목제晉穆帝 영화永和 중, 복양태수濮陽太守 대승시戴僧施가 이를 얻어, 독호督護 하융何融을 파견해 건업으로 보냈다. 송宋, 제 齊, 양 梁 을 거쳤다. 양이 패망하고, 후경侯景이 이를 얻었다. 후경이 패망하고, 시중 조사현趙思賢이 옥새를 가지고 후경의 남연주자사南兖州刺史 곽원건郭元建에게 투항해, 신술에게 보냈기에, 신술이 이를 바쳤다. 위서 魏書 태무기 太武紀 : 태평진군太平真君 7년, 업성에서 오층불단五層佛圖을 철거했는데, 흙으로 된 불상 안에서 옥새 둘을 얻었으니, “수명우천, 기수영창”이라는 인문이 모두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옆에 새겨지길 : “위가 받은 한의 전국새”

일을 끝내고, 군을 이끌고 돌아가, 노양에 머물렀다.

오록에서 이르길 : 이 때 관동의 주군에서는, 서로 겸병하여 스스로 강대해지는데 힘썼다. 원소가 회계의 주우 周㬂 를 파견해 예주자사로 삼으며, 와서 주를 습격해 탈취하게 했다. 손견이 원통하고 몹시 분해 탄식하길 :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장차 사직을 구하려 했다. 역적이 거의 격파됐으나 각자 이와 같으니, 나는 응당 누구와 힘을 합쳐야 하는가!” 말하며 뜻을 밝히니 눈물이 떨어졌다. 주우의 자는 인명仁明으로, 주흔周昕의 동생이다.

회계전록 會稽典錄 에서 이르길 : 애초에 조공曹公이 의병을 일으켜, 사람을 보내 주우를 원하니, 주우는 곧 군대를 거둬 합쳐서, 2천 명을 얻고는, 공을 따라 정벌하여, 군사軍師로 삼았다. 후에 손견과 예주를 다투었는데, 자주 싸우나 패했다. 때마침 둘째 형 구강태수九江太守 주앙周昂이 원술에게 공격당해, 주우는 가서 그를 도왔다. 군이 패해, 향리로 돌아가나, 허공許貢에게 살해당했다.

통감 : 초평 2년, 원소가 회계의 주앙을 예주자사로 삼아, 손견의 양성陽城을 습격해 탈취하게 했다.

전대흔, 조일청이 모두 그 잘못을 밝힘은, 위지 공손찬전 公孫瓒傳 에 보이는데, 지금 다시 각각의 책에서 보이는 것을 아래와 같이 열거하여, 참조가 될만한 증거를 제공한다. 단양태수丹陽太守 주흔이 위무제의 군을 도왔다. (위지 무기 초평 원년에 보인다.) 원술이 오경吳景에게 단양태수를 겸하게 하며, 옛 태수 주흔을 토벌하게 하여, 마침내 그 군을 점거했다. (오지 비빈전 嫔妃傳 에 보인다.) 왕랑王朗이 옛 태수 주흔을 파견해 손책과 더불어 싸우나, 손책이 주흔을 격파하고, 참살했다. (오지 손정전 孫靜傳 과 주에서 인용한 회계전록에 보인다.) 이가 주흔의 일의 전말이다. 원술이 손견을 파견해 양성에 주둔하여 동탁을 막게 하니, 원소가 주앙에게 그의 거처를 탈취하게 하여, 원술, 손견이 주앙을 공격했다. (위지 공손찬전에 보인다.) 원소가 회계의 주앙을 구강태수로 기용해, 원술이 손분孫贲을 파견하여 음릉陰陵에서 주앙을 공파하고, 원술이 상표하여 손분에게 예주자사를 겸하게 했다. (오지 손분전에 보인다.) 이가 주앙의 일의 전말이다. 그러나 손분이 주앙을 공격함은 손견의 사후다. 주우의 일에 관해선, 본전의 배주에서 인용한 오록과 회계전록에 보인다. 세 사람의 사적이 분명하여, 각각 연관되지 않았다.

초평 3년, 원술이 손견에게 형주를 정벌하게 하여, 유표를 공격했다. 황조黃祖를 파견해 번樊, 등鄧의 사이에서 역격하게 했다.

번, 등은 모두 호북湖北 양양성 북쪽에 있다. 번성은, 위지 무기 건안 13년에 보인다. 등현은, 촉지 제갈량전 諸葛亮傳 에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등현은, 남양군에 속한다. 번성은, 주周의 중산보仲山甫의 읍으로, 한수漢水 북쪽에 있다. 두우杜佑가 이르길 : 번성은, 지금의 양주襄州 안양현安養縣이다. 유구劉昫가 이르길 : 등성현 鄧城縣 은, 한의 등현으로, 예전에 번성이었다. 송宋이 안양현으로 고쳤다. 천보天寶 원년, 임한현臨漢縣으로 고쳤다. 정원貞元 21년, 현을 옛 등성으로 옮겨서, 곧 등성현으로 고쳤다.

조일청이 이르길 : 번은, 번성이다. 등은, 등성이다. 방여기요 권 79 : 번성은 양양부성襄陽府城 북쪽 한강漢江 위에 있어, 양양성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니, 후한 말 지키던 곳이다. 등성은 양양부 동북쪽 20리에 있어, 당唐 정원 말 임한현으로 옮겨, 옛 등성을 치소로 삼아 마침내 등성현이 됐다. 또한 원화지 元和志 : 등새鄧塞의 옛 성은 임한현 동남쪽 22리에 있어, 남으로 완구宛口에 임하고, 작은 산 하나에 의거해, 등새라 불렀다. 손견이 황조를 이 산 아래에서 격파했다. 위가 일찍이 이곳에서 주함舟艦을 정비해 오를 정벌했다. 육사형 陸士衡 의 변망론 辯亡論 의 “위씨가 등새의 배를 띄우며, 한음漢陰의 무리를 사용하다”가, 이를 이른 것이다.

등새는, 손호전의 주에서 인용한 육기陸機의 변망론에 보인다.

손견이 그를 격파하고, 추격해 한수를 건너서, 마침내 양양을 포위했다. 단기로 현산岘山에 가,

호삼성이 이르길 : 현산은 양양에서 10 리 떨어져있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79 : 현산은 양양부성 남쪽 7리에 있어, 또한 남현南岘이라 하고, 또한 현수산岘首山이라 한다.

황조의 군사들에게 사살당했다.

통감고이에서 이르길 : 범서 : 초평 3년 봄, 손견이 죽었다. 오지 손견전 또한 이르길 : 초평 3년이다. 영웅기에서 이르길 : 초평 4년 5월 7일 죽었다. 원기 袁紀 : 초평 3년 5월이다. 산양공재기에서 실은 손책의 표에서 이르길 : 신의 나이 17에, 의지할 바를 상실했습니다. 배송지가 살피길 : 손책은 건안 5년에 죽으며, 당시 나이 26이었다. 손견의 죽음을 헤아리면 손책은 응당 18이어야 하나, 이 표에서 17이라 일러, 즉 부합하지 못한다. 장번 張璠 의 한기 漢紀 와 호충胡沖의 오력에서 모두 손견이 초평 2년에 죽었다고 여기니, 이가 옳고 본전이 잘못된 것이다. 지금은 이를 따른다.

반미가 이르길 : 배주에서 파로가 초평 2년에 죽었다고 여김이, 옳다. 이 전에서 3년이라 이르고, 영웅기에서 4년이라 이르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노필이 살피길 : 주유전에서 건안 3년, 주유의 나이는 24이었고, 주유와 손책은 동년배라, 초평 2년을 헤아리면, 진실로 17세가 된다. 손책의 표에서 “17에 아버지를 여의었다”라고 일렀으니, 손견의 죽음이 진실로 초평 2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전략 典略 에서 이르길 : 손견은 그의 모든 무리로 유표를 공격해, 유표는 문을 닫고, 밤에 장수 황조를 파견해서 은밀히 나가 병사를 징발하게 했다. 황조가 병사를 데리고 돌아가려는데, 손견이 역격해 더불어 싸웠다. 황조가 패주해, 현산 속으로 숨었다. 손견은 승세를 타고 밤에 황조를 추격했는데, 황조의 부하 병사가

통감에서는 부곡병 部曲兵 이라 썼다.

대나무와 나무 사이에서부터 손견이 방비하지 않은 것을 틈타 쏴서, 죽였다.

위지 환계전 桓階傳 :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나, 전사했다. 환계는 화를 무릅쓰고 유표에게 이르러 손견의 시신을 구걸하니, 유표가 의롭다고 여겨 그에게 줬다.

오록에서 이르길 : 손견의 당시 나이는 37이었다.

손견의 죽음을 초평 2년으로 헤아리면, 응당 환제桓帝 영수永壽 원년에 태어났다. 손견이 죽을 때 손책의 나이는 17세였고, 손권은 11세로, 손책이 손권보다 6세 연장자였다.

영웅기에서 이르길 : 손견은 초평 4년 정월 7일에 죽었다.

또한 이르길 : 유표의 장수 여공呂公이

후한서 유표전의 주에서는 공 公 을 개 介 라 썼고, 아래도 같다.

병사를 데리고 산을 통해 손견에게 향했는데, 손견은 경기병으로 산을 탐색하며 여공을 토벌했다. 여공의 병사가 돌을 떨어트리니, 손견의 머리에 적중해, 바로 뇌수腦髓가 나오며 죽었다.

물고 物故 의 주해는 촉지 유장전 劉璋傳 에 보인다.

그 이야기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위지 유표전 : 손견은 유시에 적중돼 죽었다.

형의 자식 손분은, 장사들을 거느리고 원술을 따라, 원술이 다시 상표하여 손분을 예주자사로 삼았다.

손견의 4 자식은, 손책, 손권, 손익 孫翊, 손광 孫匡 이다. 손권이 존호를 칭하고 나서, 손견에게 무열황제武烈皇帝란 시호를 올렸다.

오록에서 이르길 : 손견의 종묘를 시조始祖로 존칭하고, 무덤을 고릉高陵이라 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방여기요 권 25 : 단양현의 치소는 곡아로, 오릉吳陵은 현 서쪽 15 리에 있으니, 손견은 이곳에 매장됐다.

노필이 살피길 : 손견의 묘가 오에 있음은, 설이 앞에 보인다.

지림에서 이르길 : 손견에게는 다섯 자식이 있었으니, 손책, 손권, 손익, 손광은, 오씨吳氏의 소생이었고, 막내아들 손랑孫朗은, 첩의 소생으로, 다른 이름은 손인孫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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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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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룡

2014.01.17
02:02:48
(*.229.34.94)
처사군께는 꼭 차 한잔 대접하고 싶네요. 코렐솔라님도 수고 많으십니다. ^^

코렐솔라

2014.01.17
02:25:45
(*.166.245.152)
저도 늘 저희들을 읽을 수 있게 번역해주시는 승룡님과 처사군님께 말로밖에 할 말이 없는게 아쉽습니다. 이런 단순 노가다만 하고 감사를 받다니 제가 다 부끄럽구뇽.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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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촉서 장완전 코렐솔라 2013-05-26 5333
42 위서 여건전 코렐솔라 2013-05-23 4536
41 위서 장패전 [1] 코렐솔라 2013-05-23 5566
40 오서 정봉전 코렐솔라 2013-05-08 4368
39 오서 반장전 코렐솔라 2013-05-08 4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