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처사군님의 블로그


사섭 士燮은

원본 元本, 풍본 馮本, 오본 吳本 에서 섭 燮 을 섭 爕 이라 씀은 오자다.

자가 위언威彥으로, 창오蒼梧 광신廣信 사람이다.

교주交州 창오군의 치소는 광신으로, 지금 광서廣西 오주부梧州府 창오현 치소고, 위지 魏志 도겸전 陶謙傳 의 주에서 인용한 오서 吳書 에 보인다.

조일청趙一清이 이르길 : 방여기요 方輿紀要 권 108 : 오주부 창오현은, 한 때 광신현을 설치해, 지금 부치府治 동쪽에 광신의 옛 성이 있다.

그의 선조는 본래 노국魯國 문양汶陽 사람인데,

군국지 郡國志 : 예주豫州 노국 문양이다.

일통지 一統志 : 문양의 옛 성은, 지금의 산동山東 연주부兖州府 영양현甯陽縣 동북쪽이다.

왕망王莽의 난 때에 이르러, 교주로 옮겨 재앙을 피했다. 6대를 지나 사섭의 부친 사사士賜에 이르러, 환제桓帝 때 일남태수日南太守가 됐다.

교주 일남군의 치소는 서권西卷으로, 지금 월남越南의 귀인歸仁, 부안 富安, 광화 廣和, 평순平順 4도道고, 위지 진류왕기 陳留王紀 함희鹹熙 원년에 보인다.

사섭은 어려서 경사로 유학해, 영천颍川의 유자기劉子奇를 섬기며,

국본 局本 에서 천 川 을 주 州 라 씀은 오자다.

범 서 範書 유도전 劉陶傳 : 유도의 자는 자기로, 다른 이름은 유위劉偉였고, 영천 정릉定陵 사람이며, 제북정왕濟北貞王 유발劉渤의 후손이었다. 유도는 상서 尚書, 춘추 春秋 에 밝아, 이 때문에 주석을 달았다. 삼가三家의 상서와 고문을 이치를 미루어 깊이 생각하고 밝혀, 문자 3백여 개를 시정하고, 중문상서 中文尚書 라 지칭하였다. 영제靈帝가 조서로 유도에게 춘추조례 春秋條例 를 순서에 따라 배열하게 했다.

좌씨춘추 左氏春秋 를 배웠다.

석문 釋文 서록 序錄 : 사섭이 춘추경 春秋經 11권에 주를 달았다.

수서 隋書 경적지 經籍志 : 춘추경 13권은, 오吳의 위장군衛將軍 사섭이 주를 달았다.

당경적지 唐經籍志 : 춘추경 11권은, 사섭이 지었다.

당예문지 唐藝文志 : 사섭이 춘추경 11권에 주를 달았다.

후강 侯康 의 보삼국예문지 補三國藝文志 에서 인용한 미산眉山 이씨李氏의 고경후서 古經後序 에서는, 사섭이 춘추경에 주를 달았는데, 공 公, 곡 谷 의 권수와 서로 같으니, 아마도 공, 곡에 주를 달은 것이라고 일렀다.

요 진종 姚振宗 의 수지고증 隋志考證 에서 이를 논박하며 이르길 : 사섭은 환제, 영제 때 유도를 스승으로 삼아 좌씨춘추를 배웠으니, 본전에서 이를 말함이 매우 상세하다. 석문 또한 실으며 좌씨전가 左氏傳家 에 써서, 그 일은 본래 매우 분명하여, 수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었다. 수지 隋志 는 13권, 석문, 당지 唐志, 통지략 通志略 은 모두 11권으로, 서적의 분류가 일치하지 않았기에, 저록함도 또한 상호 같지 않았는데, 이는 항상 있는 일로, 또한 깊이 따질 필요가 없으며, 이 11권이 공, 곡의 경서라고 의심할 필요도 없다.

수지 : 양梁 때 사섭집士燮集 5권이 있었으나, 없어졌다.

효렴孝廉에 천거돼, 상서랑尚書郎을 보임하나, 공적인 일로 면직됐다. 부친 사사의 상을 마친 후,

결 阕 은 음이 결缺로, 끝나다, 그치다다.

무재茂才에 천거돼, 무령巫令에 제수됐고,

무현은, 지금의 사천四川 기주부夔州府 무산현巫山縣 동쪽으로, 촉지 蜀志 선주전 先主傳 장무章武 원년에 상세히 보인다.

교지태수交阯太守로 승진했다.

교지군의 치소 용편龍編은, 지금의 광서廣西 태평부太平府 빙상주憑祥州 남쪽 750 리로, 위지 진류왕기 함희 원년에 보인다.

동생 사일士壹은, 처음에 군독우郡督郵였다. 자사刺史 정궁丁宮이 징소돼 경도로 돌아가는데,

정궁의 일은 위지 동탁전 董卓傳 의 주에서 인용한 헌제기거주 獻帝起居注 에 보인다.

사일이 받들고 전송하며 정성을 다하고 부지런히 힘써,

국본에서 시 侍 를 대 待 라 씀은, 오자다.

정궁이 이에 감동하여, 막 헤어지려 할 때 이르길 : “자사가 만약 삼사三事로 대죄待罪하면,

삼사는, 삼공이다.

응당 이끌어 벽소하겠소.” 후에 정궁이 사도司徒가 돼, 사일을 벽소했다. 이르니, 정궁은 이미 면직됐고, 황완黃琬이 대신 사도가 됐으나,

범서 영제기 : 중평中平 4년, 광록훈光祿勳 패국沛國의 정궁이 사공司空이 됐다. 5년, 사공 정궁이 사도가 됐다. 6년 7월, 사도 정궁이 면직됐다.

9월, 예주목豫州牧 황완이 사도가 됐다. (헌제기 獻帝紀 에 보인다.)

사일을 매우 예우하였다. 동탁董卓이 난을 일으켜, 사일은 향리로 피해 돌아갔다.

오서에서 이르길 : 황완과 동탁이 서로 훼방했는데,

범서 황완전 : 동탁이 장안長安으로 천도함을 의논하니, 황완과 사도司徒 양표楊彪가 함께 간하며, 따르지 않았다. 황완은 물러나서 박의駁議하니, 마침내 연좌돼 면직됐다.

사일은 황완에게 마음을 다하여, 대단한 명성을 가지게 됐다. 동탁이 그를 싫어해, 이에 교教를 쓰길 : “사도연司徒掾 사일은, 임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 해가 지나도 승진하지 못했다. 때마침 동탁이 조정에 들어와,

송본 宋本 에서는 궐 阙 을 관 關 이라 썼다.

사일은 이에 피해 돌아갔다.

교주자사 주부朱符가 이적夷賊에게 살해당해,

전 대흔錢大昕이 이르길 : 설종전 薛綜傳 : 옛 자사였던 회계會稽의 주부는 다수 향인鄉人으로 분별해 장리長吏로 삼아, 백성에게 침범하여 포학하게 행동했고, 백성에게 강제로 부세를 매겨 거둬서, 백성들이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켜, 산적과 나란히 나와서, 주군을 공격하며 돌격했습니다. 주부가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정처 없이 떠돌다 사망했습니다. 도적에게 살해당했다고 이르지 않았으니, 양쪽 전에 대략 상호 보인다.

주군이 요란했다. 사섭이 곧 상표하여 사일이 합포태수合浦太守를 겸하게 하고,

합포군의 치소 합포는, 지금의 광동 염주부廉州府 합포현 동북쪽으로, 위지 진류왕기 함희 원년에 보인다.

차제次弟 서문령徐聞令 사유士䵋가 구진태수九真太守를 겸하게 했고,

군국지 : 교주 합포군 서문이다.

삼국의 오가 바꿔 주애군珠崖郡에 속했다.

일통지 : 서문의 옛 성은, 지금의 광동 뇌주부雷州府 해강현海康縣 치소다.

환우기 寰宇記 : 옛 성은 해강현 남쪽 240 리에 있다.

방여기요 : 지금의 서문현 서북쪽이다.

구진군의 치소 서포胥浦는, 손호전 孫晧傳 건형建衡 3년에 보인다.

유䵋는 음이 우于와 비鄙의 반절로,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 유는 호胡와 무怃의 반절이다.

자림 字林 에 보인다.

동생 사무士武가, 남해태수南海太守를 겸하게 했다.

풍본, 오본, 관본 官本, 모본에서 남해 南海 를 해남 海南 이라 씀은 오자며, 통감 通鑒 에서는 남해라 썼다. 남해군의 치소 번우番禺는, 손호전 孫晧傳 천기天紀 3년에 보인다.

반미潘眉가 이르길 : 교주에는 해남군이 없다. 

 

사섭은 품성과 기량이 너그럽고 후해,

국본에서 기 器 를 기 氣 라 씀은 오자다.

겸허하게 자신을 낮춰 현인과 교제해, 중국의 사인이 와서 의부하고 난을 피함이 백 명을 넘었다.

촉지 허정전 許靖傳 : 손책孫策이 동으로 강江을 건너, 모두 교주로 달아나서 그 난을 피했다.

위지 원환전 袁渙傳 : 원환의 종제從弟 원휘袁徽는 유학자의 자질로 칭송됐는데, 천하의 난을 만나, 교주로 피난했다.

본지 설종전 : 어려서 족인族人에게 의지해, 교주로 옮겨 난을 피했다.

춘추를 열중해서 깊이 연구해, 이에 주해를 달았다. 진국陳國의 원휘가

원휘의 일은 위지 원환전에 보이고, 또한 촉지 허정전에 보인다.

상서령尚書令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길 : “교지의 사부군士府君은 이미 학문에 박식하고, 또한 정사를 처리함에 통달해, 대란 중에 처했는데도, 1군을 보전해, 20여 년 전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고, 백성은 실업하지 않았으며, 체류하는 무리는, 모두 그의 경사를 받았으니, 비록 두융窦融이 하서河西를 보전했어도, 어찌 이에 미치겠습니까?

범서 두융전 : 두융의 자는 주공周公으로,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이다. 장액속국도위張掖屬國都尉가 돼, 웅걸들을 위로하며 결탁했고, 강로羌虜를 초대해 모아서, 하서는 일치하여 그에게 귀부했다. 5군에서 함께 두융을 추천해 하서오군대장군사河西五郡大將軍事를 대행하게 했다.

관청의 일에 조금 여유가 생기면, 번번이 전적을 깊이 새겨보며 연구했고, 춘추좌씨전은 더욱 정밀하고 자세한 것을 취해서, 제가 자주 전 안의 여러 의문을 물으면, 모두 스승이 전수하는 설법이 있어, 뜻이 매우 자세했습니다. 또한 상서 尚書 는 고금에 나란히 통달해, 대의가 상세하고 완비됐었습니다. 듣기론 경사의 고금의 학문에서, 시비를 분쟁해, 지금 좌씨, 상서의 깊은 뜻을 조목으로 벌여놓아 이를 올리고자 한다고 합니다.” 그가 칭찬받음이 이와 같았다.

사섭 형제는 모두 여러 군수가 돼, 한 주를 제패했고, 만 리 밖에 치우쳐 있어서, 위엄이 최고였다.

호삼성이 이르길 : 천하가 혼란스러워, 사섭이 외지고 먼 주에 웅거하니, 사람들은 다만 위존威尊은 알았어도, 다시 천자가 있음은 알지 못했다. 장長은 지知와 양兩의 반절이다.

노필이 살피길 : 위존은 그보다 위인 자는 나타나지 못함을 말하는 듯하다.

출입할 때는 종과 경쇠를 울리며, 외경할만한 거동을 완비해, 호드기와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피리를 불었고, 수레와 말이 도로에 가득했으며, 호인胡人이 수레를 사이에 두고 향을 불태움이 항상 수십 명이었다. 처첩은 치병辎軿을 타고, 자제의 측근은 기병이라, 당시에 고귀하고 존엄함이, 여러 만蠻을 두려워 복종하게 하여, 위타尉他도 넘기에는 부족했다. 

사기 남월위타전 南越尉佗傳 : 남월왕 위타는, 진정真定 사람으로, 성은 조씨趙氏다. 위타는, 진秦 때 남해 용천령龍川令으로 기용됐다. 이세二世 때에 이르러, 남해위南海尉 임효任囂가 병이 났고 또한 죽어, 위타는 남해위의 일을 대행했다. 진이 이미 파멸돼, 위타가 자립하여 남월무왕南越武王이 되니, 동서로 만여 리였고, 좌독左纛이 있는 황옥黃屋을 타며, 칭제稱制하여 중국과 대등하였다.

장회주 章懷注 : 조타가 남해위를 대행하고, 마침내 왕이 돼 남월을 가졌기에, 위타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르길 : 타 他, 타 佗 는 고대에 비록 통용됐으나, 위타의 타 佗 자를 타 他 라 씀은 적당하지 않다. 

노필이 살피길 : 진서 晉書 지리지 : 임효, 조타趙他가 월을 공격해, 마침내 남월을 평정하고, 이에 남해위南海尉를 설치해 이를 관장했으니, 소위 동남일위東南一尉였다. 또한 조타 趙他 라고 썼으니, 어떤 이의 설은 잘못된 것이다.

갈홍 葛洪 의 신선전 神仙傳 에서 이르길 : 사섭이 일찍이 병사해, 3일이 지났는데, 선인 동봉董奉이 환약 하나를 줘 먹이고는, 물을 머금게 하고, 그의 머리를 잡고 흔드니,

이룡관李龍官이 이르길 : 요초 搖稍 두 자는 이해할 수 없으니, 초 稍 는 아마도 소 捎 를 쓴 것이다. 광운 廣韻 : 요소 搖捎 는 움직이다다. 아마도 그의 머리를 잡고 흔듬을 이른 것이다.

이자명李慈銘이 이르길 : 초는 응당 소라 써야 하니, 요소는 바로 소요消搖다.

얼마 안 돼서, 곧 눈을 뜨고 손을 움직였으며, 안색이 차츰 회복됐고, 한나절이 지나니 일어섰다가 앉을 수 있었으며, 4일이 지나니 다시 말을 할 수 있어, 마침내 평상시로 회복됐다. 동봉의 자는 군이君異로, 후관侯官 사람이다.

후관은 위지 왕랑전 王朗傳 의 동야 東冶 주에 상세히 보인다.

조일청이 이르길 : 환우기 권 128 : 행산杏山은 호주濠州 남쪽 60 리에 있다. 신선전 : 동봉이 오吳 때 이 산에 살았는데, 타인을 위해 병을 다스리며, 오직 살구나무 다섯 그루를 심게 했다. 수 년이 지나서, 살구나무가 만 그루가 됐다. 후에 행금단杏金丹을 복용해 신선이 됐다.
 

사무는 이전에 병사했다.

주부가 죽은 후, 한이 장진張津을 파견해 교주자사交州刺史로 삼았는데,

교지목交阯牧은 촉지 유언전 劉焉傳 에 상세히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사서에 의거하니, 가종賈琮부터 이전에는 모두 교지자사로, 아직은 교주가 될 수 없다.

후강侯康이 이르길 : 진서 지리지 하 : 건안 8년, 장진이 교지자사였고, 사섭은 교지태수였는데, 함께 주州로 세우길 상표하여, 이에 장진을 교주목으로 임명했다. 예문유취 藝文類聚 권 6에서 인용한 묘공苗恭의 교광기 交廣記 에서 이르길 : 건안 2년, 남양南陽의 장진이 교지태수였다. 사섭이 상표하여 말하길 : “엎드려 바라보건대 12주는 모두 주라고 칭하나, 교交만 홀로 교지자사이니, 어찌 천자의 은혜가 고르지 못하십니까? 만약 천하가, 12주가 될 수 있다면, 어찌 13주는 될 수 없습니까?” 조서로 답하며 허락해, 장진을 교주목으로 임명하고, 구석九錫을 더해주고, 동궁彤弓과 동시彤矢를 하사해, 예악禮樂과 정벌에 전념하게 하니, 위세가 남하南夏를 뒤흔들며, 중주中州의 방백方伯과 동등하게 됨은, 장진에서부터 시작됐다. 살피건대 두 책에서 실은 일은 같으나, 하나는 건안 8년이라 여겼고, (심약沈約 또한 8년이라 여겼다.) 하나는 2년이라 여겼다. 살피건대 손토역전 孫討逆傳 의 주에서 인용한 왕범王範의 교광춘추 交廣春秋 에서, 건안 6년 장진이 이미 교주목이었으니, 즉 8년이라 이름은 옳지 않다. 또한 이 전의 윗글에서 교주자사 주부라고 칭하는데, 이는 사관이 훗날의 칭호로 호칭한 것으로, 주부가 자사일 때는, 진실로 아직 주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양웅楊雄에게 교주잠 交州箴 이 있는데, 이는 바로 문인의 글로, 당시의 실록이 아니다.

심가본沈家本이 이르길 : 진 晉, 송宋 2지志는 모두 교주란 명칭이 건안 8년부터 바뀌었다고 하나, 양한지兩漢志를 가지고 이를 살피면, 반씨班氏는 남해, 욱림 郁林, 창오, 교지, 합포, 일남 6군에서, 모두 주를 달아 교주에 속한다고 했고, 오직 구진군九真郡은 교주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아마도 글이 없어진 것이다. 반씨가 의거한 바는 바로 원시元始 2년의 서책으로, 원시 때 이미 교주라고 지칭한 것이다. 양자운 楊子雲 의 십이주잠 十二州箴 에 교주가 있다. 요희전姚姬傳은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 5년 처음으로 자사를 설치하며, 13주를 나눴다고 여겼다. 진서 지지 地志 에서는 기冀, 유 幽, 병 並, 연 兖, 서 徐, 청 青, 양 揚, 형 荊, 예 豫, 익 益, 양涼과 삭방朔方, 교지가 13부部였다. 평제平帝 원시 3년에 이르러, 비로소 12주의 이름을 변경해, 군국의 소속의 경계를 나눴는데, 그 주의 이름은 사서에서 또한 상세하지 않고, 오직 자운의 잠箴에 의지해 이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대략 옹주雍州를 설치해 양주를 바꾸고, 삭방의 거느린 곳은 병주로 합쳤고, 교지는 교주라고 일렀다. 왕망王莽이 상주하여 주의 이름을 고치며, 한가漢家의 13주는, 주의 이름과 경계가 다수 경서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일렀다. 이 잠은 처음에 필시 우공 禹貢 을 인용했으니, 소위 경서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평제 원시 2년, 황지국黃支國에서 서우犀牛를 바쳤는데, 교주잠 내에 또한 서술함이 이에 미친다. 그런즉 그 글은 필시 평제 때 지은 것이다. 당시 왕망이 이미 주의 이름을 고쳐, 자못 그 일을 크게 떠벌여, 아마도 타인에게 지리서를 바로잡게 한 것으로, 지금의 한서 지지가 근거로 삼은 바다. 그러므로 지리지에서 호구를 쓰며, 오직 원시 2년을 제시했으니, 그것과 주잠이 동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가지고 말하자면, 후씨가 자운의 잠을 가지고 실록이 아니라고 여겨서, 경솔함을 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교주란 이름이 실제로 서한 말에 기원했음이, 진실로 확실하며 증거가 있다. 사마씨 司馬氏 의 속지 續志 에서 순제順帝 영화永和 5년의 서책에 근거해, 교주자사부交州刺史部라고 칭하니, 아마도 동한 초에 이미 원시의 제도를 이어서 썼던 것이다. 양한지와 진, 송지가 자못 서로 모순됨은, 혹 순제 이후 교주란 이름이 일찍이 고쳐 바뀌었기에, 다시 건안의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주수창周壽昌이 이르길 : 사섭이 교지를 교주로 바꾸길 청함은, 본전에서 모두 이러한 말이 없다. 또한 “사섭의 선조는 왕망의 난으로 인해, 교주로 옮겨 화를 피했다”라고 이르니, 서한 말 이미 교주라고 칭한 것이고, 한서 지리지에서 “교주에 속했다”라고 자주 썼으니, 반씨 때 오래도록 교주라고 칭한 것으로, 모두 건안 이전의 일이다.

장진이 후에 다시 그의 장수 우경區景에게 살해당했고,

장진의 일은 촉지 허정전 許靖傳 과 배주裴注에 보인다.

본지 설종전 : 남양의 장진과 형주목荊州牧 유표劉表는 불화가 있었는데,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나, 해마다 군을 일으켜, 여러 장수가 싫어하여, 자유자재로 떠나거나 머물렀습니다. 장진은 단속하고 감독함이 적었고, 위세와 무력은 부족하여, 능멸당하다, 마침내 살해돼 죽었습니다.

또한 본지의 손책전의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 江表傳 : 손책이 이르길 : “과거 남양의 장진은 교주자사가 돼, 예전의 성인의 전훈典訓을 버리고, 한가의 법률을 폐하고는, 일찍이 진홍색의 말두帕頭를 두르고, 거문고를 타고 향을 피우고, 음란한 습속의 도서道書를 읽으며, 교화를 보조한다고 일렀으나, 끝내 남이南夷에게 살해당했소.”

호삼성이 이르길 : 우 區 는, 오烏와 후侯의 반절로, 성이고, 또한 휴虧와 우于의 반절이다.

주수창이 이르길 : 강표전에선 장진이 남이에게 살해당했다고 이르고, 여기서는 그의 장수에게 살해당했다고 이르니, 아마도 도로가 단절되고 병란이 일어나, 기술하며 전하는데 일치하지 않음이 생겼고, 사서를 쓴 이가 각자 소문에 따라서 이를 쓴 것이다.

형주목 유표가 영릉零陵의 뇌공賴恭을 파견해 장진을 대신하게 했다.

영릉은, 촉지 선주전 건안 13년에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성보 姓譜 : 뇌賴는 초楚에게 멸망당해, 자손이 나라를 씨로 삼았다. 풍속통 風俗通 : 한에 교지태수 뇌선賴先이 있었다.

전대소錢大昭가 이르길 : 뇌공은 선주의 진원장군鎮遠將軍이 돼, 관직이 태상太常에 이르렀다.

노필이 살피길 : 뇌공은 선주전, 감후전 甘後傳 과 양희楊戲의 계한보신찬 季漢輔臣贊 에서 왕원태 王元泰 주에 보인다.

이 때 창오태수 사황史璜이 죽어, 유표는 다시 오거吳巨를 파견해 그를 대신하게 하여,

전대소가 이르길 : 설종, 보즐전步骘傳에서 또한 오거라 썼는데, 오직 촉선주전 주에서 인용한 강표전에서 오신 吳臣 이라고 썼으니, 아마도 오자다.

뇌공과 함께 이르렀다.

설종전 : 영릉의 뇌공은 선배로 어질고 삼갔으나, 당시의 일에 환하지 못했습니다. 유표가 다시 장사長沙의 오거를 파견해 창오태수로 삼았는데, 오거는 용맹스런 사내로 날래고 용감하며 강했으나, 뇌공의 구역에서는 받아들여지지 못해, 서로 원한을 가져서, 뇌공을 축출했습니다.

한이 장진의 죽음을 듣고는, 사섭에게 새서玺書를 내리길 : “교주는 지극히 먼 땅이고, 남으로는 강과 바다를 두르고 있어, 황상의 은혜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아랫사람의 도리가 가로막혀 격리됐으며, 역적 유표가 또한 뇌공을 파견해 남쪽 땅을 엿봄을 알게 됐으니, 지금 사섭을 수남중랑장綏南中郎將으로 삼아, 7군郡을 감독하게 하며,

남해, 창오, 욱림, 합포, 교지, 구진, 일남, 무릇 7군이다.

교지태수는 이전과 같이 겸하게 하노라.”

어떤 이가 이르길 : 아래에서 “도로가 단절됐다”라고 이르니, 이 새서는 바로 사섭이 사칭하여 자신의 신분을 강화한 것이다.

노필이 살피길 : 허정전에서 또한 “교부交部의 역사驿使가 단절됐다”라고 이르나, 생각하건대 이 전의 아랫글에서 또한 “사섭이 장민張旻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게 하여, 특별히 다시 조서를 내렸다”라고 일러서, 도로는 여전히 통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속군국지 續郡國志 보주補注에서 인용한 왕범의 교광춘추에서 이르길 : 교주의 치소는 이루현羸阝+婁縣이다. 원봉 5년, 치소를 창오 광신현廣信縣으로 옮겼다. 건안 15년, 번우현으로 치소를 삼았다. 조서로 주가 중심에서 먼 지방이라서, 사지절 使持節 로, 7군을 아울러 모두 고취鼓吹를 수여하여, 무거운 위엄으로 진압했다. 나 조일청이 상고하길 : 이는 한조가 사섭에게 명하며 조서를 보낸 것으로, 보즐에게 조서를 보낸 것이 아니다. 송서 주군지 州郡志 에선 “16년, 번우로 치소를 옮겼다”라고 하여, 교광춘추와 차이가 1년 초과한다. 또한 송지에선 교지태수가 거느리는 현은 오흥吳興, 군평 軍平, 무녕 武甯, 무안 武安 이 있어, 모두 오가 세웠다고 했다.

후에 사섭이 관리 장민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며 경도에 이르게 했는데, 이 때 천하의 상란으로, 도로가 단절됐으나, 사섭은 공물을 그치지 않아, 특별히 다시 조서를 내려 안원장군安遠將軍으로 임명하며, 용도정후龍度亭侯로 봉했다.

후에 오거가 뇌공과 서로 틀어져, 거병하여 뇌공을 쫓아내니, 뇌공은 달아나 영릉으로 돌아갔다. 건안 15년, 손권이 보즐을 파견해 교주자사로 삼았다. 보즐이 이르니, 사섭은 형제를 데리고 절도節度를 받들었다. 그러나 오거가 다른 마음을 품어, 보즐이 그를 참살했다.

보즐전 : 건안 15년, 보즐은 파견되며 파양태수鄱陽太守를 겸했고, 그 해 안에 교주자사로 전임됐다. 유표가 둔 창오태수 오거가 겉으로는 따르며 속으로는 멀리해, 보즐은 뜻을 굽히며 유혹해, 서로 보길 청하고는, 참살하고 이를 돌려 보였다. 사섭 형제가 연이어 명을 받들어, 남쪽 땅이 복종함은, 이로부터 시작됐다.

손권은 사섭에게 좌장군左將軍을 더해줬다. 건안 말년, 사섭이 자식 사흠士廞을 파견해 볼모로 집어넣으니, 손권이 그를 무창태수武昌太守로 삼았고, 사섭, 사일의 여러 자식 중 남쪽에 있는 이는 모두 중랑장中郎將으로 임명했다. 사섭이 다시 익주益州의 호성豪姓 옹개雍闿 등을 유도해, 군의 인민을 데리고 멀리서 동으로 귀부하게 해서,

요 搖 를, 송본, 원본, 관본에서는 요 遙 라 썼으니 옳다. 익주는 서쪽에 있었기에 동으로 귀부한다고 했다.

보즐전 : 익주의 대성大姓 옹개 등이 촉이 태수로 대행하게 한 정앙正昂을 죽이고, 사섭과 서로 통보해, 내부하길 구했다. 보즐이 승제承制하여 사자를 파견해 황제의 은덕을 선양하고 위무하며 불러들였다.

손권은 그를 더욱 기리며, 위장군衛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용편후龍編侯에 봉했으며, 동생 사일은 편장군偏將軍, 도향후 都鄉侯 로 삼았다. 사섭은 매번 사자를 파견해 손권에게 이르게 하며, 여러 향료와 정교한 갈포葛布를 보냄이, 번번이 천을 넘었고, 명주 明珠, 대패 大貝, 유리 流離, 비취 翡翠, 대모 玳瑁, 무소, 코끼리와 같은 보배,

반미潘眉가 이르길 : 유리流離는 바로 유리瑠璃로, 고자古字가 통한다. 한서 서역전 西域傳 : 주기 珠玑, 산호 珊瑚, 호박 虎魄, 푸른 유리. 사고가 위략을 인용해 이르길 : 대진국에서는 적백흑황청녹표감홍자赤白黑黃青綠缥绀紅紫 10종의 유리가 나온다.

노필이 살피길 : 나머지는 모두 위지 동이전 東夷傳 주에서 인용한 위략 서융전 西戎傳 에 보인다.

기이한 물건과 진귀한 과실, 초 蕉, 야 邪, 용안龍眼과 같은 류는,

야 邪 는, 바로 야자다.

광아 廣雅 에서 이르길 : 익지 益智 는 용안이다.

사승 謝承 의 후한서에서 이르길 : 교지 7군에서 용안을 바쳤다.

광지 廣志 에서 이르길 : 용안나무의 잎은 여지荔枝와 비슷하고, 널리 퍼져 나무를 따라 자라며, 열매 크기는 멧대추 같고, 색은 기이하며, 순수하게 달며 신맛이 없었다.

교주기 交州記 에서 이르길 : 용안나무는 높이가 5, 6장으로, 여지와 비슷하나 작았다.

광주기 廣州記 에서 이르길 : 용안열매는 여지와 비슷해, 7월에 여문다.

해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사일은 당시 말을 무릇 수백 필 바쳤다. 손권은 번번이 서신을 써, 두터이 총사寵賜를 더해줘서,

국본에서는 사 賜 를 사 錫 라 썼다.

그들에게 답례하며 위로했다. 사섭은 군에 40여 해 있다,

사섭은 대략 영제 중평 때 교지태수가 됐다.

황무黃武 5년, 향년 90으로 죽었다.

손권은 교지의 거리가 아득히 멀어, 이에 합포이북을 나눠서 광주로 삼고, 여대呂岱를 자사로 삼았으며, 교지이남은 교주로 삼고, 대량戴良을 자사로 삼았다. 또한 진시陳時를 파견해 사섭을 대신해 교지태수가 되게 했다.

여대전 : 연강延康 원년, 여대는 보즐을 대신해 교주자사가 됐다. 교지태수 사섭이 죽어, 손권은 사섭의 자식 사휘를 안원장군으로 삼고, 구진태수를 겸하게 하며, 교위 진시에게 사섭을 대신하게 했다. 여대는 상표하여 해남 3군을 나눠 교주로 삼아서, 장군 대량을 자사로 삼고, 해동海東 4군을 광주로 삼아서, 여대 자신이 자사가 되길 청했다.

여대는 남해에 머물렀고, 대량과 진시는 모두 나아가 합포에 이르나, 사섭의 자식 사휘士徽가 스스로 교지태수를 대행하며, 종병宗兵을 발동해 대량을 막았다.

호삼성이 이르길 : 한 말의 난으로부터, 남방의 사람들은 종족을 거느리며 모여, 병사가 돼 스스로를 지켰다.

대량은 합포에 머물렀다. 교지의 환린桓鄰은, 사섭이 발탁한 관리인데, 머리를 조아리고 사휘에게 대량을 영접하라고 간하니, 사휘가 노하여, 환린을 때려죽였다. 환린의 형 환치桓治의 자식 환발桓發이 다시 종병을 모아서 사휘를 공격하니, 사휘가 문을 닫고 성에 의거해 지켜, 환치 등은 공격한지 수개월이 지나서도 함락할 수 없어서, 곧 화친을 협정해, 각자 휴전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여대가 사휘를 주살하라는 조서를 받아, 광주에서부터 군을 거느리고 주야로 질주해 들어가, 합포를 지나며, 대량과 함께 나아갔다. 사일의 자식 중랑장 사광士匡과 여대가 구의舊誼가 있어, 여대는 사광에게 사우종사師友從事를 대행하게 하며,

사우종사는, 촉지 주군전 周群傳 에 보인다.

호삼성이 이르길 : 사우종사란, 종사를 대행하게 하며 스승과 벗의 예로 대우하는 것이다.

먼저 서신을 교지로 보내, 화복을 알리고, 다시 사광을 파견해 사휘를 보게 하여, 죄에 대한 형벌을 복종하여 받도록 설득하며, 비록 군수는 잃어도, 다른 근심은 없을 거라고 보증하게 했다. 여대가 사광의 뒤를 이어 이르니, 사휘의 형 사지士祗, 동생 사간士幹, 사송士頌 등 6 명이 웃통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고 영접하였다. 여대는 사의를 표하고 다시 옷을 입게 하고는, 나아가 군 아래에 이르렀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장막을 설치하고, 사휘 형제에게 차례대로 들어오도록 청하니, 빈객이 가득 앉았다. 여대가 일어나, 절節을 가지고 조서를 읽으며, 사휘의 죄과를 책망하니, 좌우에서 양손을 뒷짐결박시키고서는 나와, 바로 모두 형벌로 주살하고, 수급을 무창에 전했다.

여대전 : 대량과 진시를 파견해 남으로 들어가게 하나, 사휘가 명을 받들지 않고, 거병해 해구海口를 지켜서 대량 등을 막았다. 여대는 이에 상소하여 사휘의 죄를 토벌하길 청하고,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새벽과 밤에 바다에서 배를 탔고, 합포를 지나며, 대량과 함께 나아갔다. 사휘가 형제 6명을 데리고 웃통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 여대를 영접하나, 여대는 모두 참수해서 그 수급을 보냈다.

손성孫盛이 이르길 : 대저 먼 곳의 백성을 화목하게 하여 따르게 하며 능이能迩함에는, 신용보다 훌륭한 것이 없고, 높은 자리에 안전하게 머물며 공업을 건립함에는, 정의보다 훌륭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제환齊桓공이 기반을 창립함은, 가柯의 회맹에서 덕을 드러냄에 있었고,

공양전 公羊傳 장공莊公 13년 : 공이 가에서 제후齊侯의 회맹에 참가했다. 조자曹子가 이르길 : “문양汶陽의 농토를 원합니다.” 관자管子가 돌아보며 이르길 : “주군께선 허락하십시오.” 환공이 이르길 : “허락하오.” 조자가 맹세하길 청하니, 환공은 내려가 그와 더불어 맹세했다. 맹세하고 나서, 조자는 검을 버리고 떠났다. 힘으로 강제로 맺은 맹세는 무시할 수 있으나, 환공은 속이지 않았다. 조자를 원망할 수 있으나, 환공은 원망하지 않았다. 환공의 신용이 천하에 드러남은, 가의 회맹에서부터 시작됐다.

두예杜預가 이르길 : 가는, 지금의 제북濟北 동아東阿다.

진문晉文공이 패자로 시작됨은, 원原을 정벌할 때에 의를 드러냄에 있다.

좌전 左傳 희공僖公 25년 : 진후晉侯가 원을 포위하며, 3일의 양식을 준비하라 명했다. 원이 항복하지 않아, 떠나도록 명했다. 첩자가 나와 이르길 : “원이 장차 항복할 것입니다.” 군리 軍吏 가 이르길 : “이를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공이 이르길 : “신의는, 국가의 보배고, 백성이 의지하는 바요. 원을 얻어도 신의를 잃으면, 어찌 의지하겠소? 잃는 바가 더 많을 것이오.” 30리를 물러나니 원이 항복했다.

그러므로 여러 번 회맹해 바로잡게 할 수 있어, 대대로 하맹夏盟을 주관하며, 오랜 시간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고, 역대제왕에게 모범을 남겼다. 여대는 사광을 사우로 삼아, 신용있는 맹세를 알리게 하여, 사휘 형제는 웃통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 정성을 다해 대하며 목숨을 맡겼는데도, 여대는 그들을 멸함으로써, 공명과 이득을 원했으니,

호삼성이 이르길 : 요 要 는 요邀라 읽는다.

군자는 이로써 손권은 먼 곳까지 경략할 수 없고, 여씨의 복은 장구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됐다.

호삼성이 이르길 : 여대의 자손은 알려진 바가 없다.

사일, 사유, 사광은 후에 나와서, 손권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섭의 질자質子 사흠과 더불어, 모두 면직시키고 서인으로 삼았다. 수 해가 지나, 사일, 사유는 범법해 죄를 지어 주살됐다. 사흠은 병사했는데, 자식이 없고, 처는 과부로 지내, 조서로 머무는 곳에서 매월 봉미俸米를 공급하게 하며, 전 40만을 하사했다.

조일청이 이르길 : 수서 경적지에 교주잡사 交州雜事 9권이 있으니, 사섭, 도황陶璜의 일을 기록했다.

평하길 : 유요劉繇는 명성과 품행을 연마했고, 좋고 나쁨을 비판하는 것을 좋아하고 숭상했으나, 소란스러운 시대에 이르러, 만 리의 땅을 점거함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태사자太史慈는 신의가 있고 성실하며 너그럽고 강직해, 옛사람의 지조가 있었다. 사섭은 남월을 다스리며, 평생을 편안하고 한가하게 지냈으나, 자식은 부주의하여, 스스로 재앙을 남겼으니, 대략 평범한 재주로 부귀함을 탐하며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그들이 이와 같이 되게 했다.

송본에서는 험 險 위에 조 阻 자가 있다.

학경郝經이 이르길 : 사섭의 자제는 모두 한실의 목수牧守로, 손권이 여대를 파견해 꾀어내서 그들을 멸했으니, 즉 사씨는 한실에 충성해서, 죄는 손권에게 있다. 승조承祚가 그들을 비웃음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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