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번虞翻은 자가 중상(仲翔)이고, 회계군 여요 사람이다. 태수 왕랑이 그를 공조로 임명했다.

吳書曰:翻少好學,有高氣。年十二,客有候其兄者,不過翻,翻追與書曰:「僕聞虎魄不取腐芥,磁石不受曲鍼,過而不存,不亦宜乎!」客得書奇之,由是見稱。    

오서(呉書)에서 말하길: 우번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고상한 기운이 있었다. 나이 12세에 손님이 그 형을 보러왔다가 우번에게 들르지 않았는데 우번이 따라가서 편지를 주어 말하길 「저는 호박은 먼지를 취하지 않고 자석은 굽은 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나가도 머무르지 않는 것도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손님이 편지를 얻어 기이하게 여겼고 이로 말미암아 칭해지게 되었다.


손책이 회계를 정벌하려고, 했을 때 우번은 부친상을 당했는데 상복을 입은 채 군부의 문 앞까지 왔다. 왕랑(王朗)이 그를 맞이하려고 하자 우번은 곧 상복을 벗고 왕랑을 만났다. 그는 왕랑에게 손책을 피하도록 권유했다. 왕랑은 그의 권유를 쓸 수 없었으므로 손책을 맞아 싸우다가 참패하여 바다를 표류 하였다. 

우번은 그의 뒤를 쫓아가 보호하여 동부 후관까지 이르게 되었다. 후관의 장은 성문을 닫고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번이 가서 그를 설득시키자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吳書曰:翻始欲送朗到廣陵,朗惑王方平記,言「疾來邀我,南岳相求」,故遂南行。既至候官,又欲投交州,翻諫朗曰:「此妄書耳,交州無南岳,安所投乎?」乃止。   

오서에 이르길 : 우번은 처음에 왕랑을 광릉까지 보내려고 하였는데 왕랑이 왕방평(
王方平)의 글에 미혹되어 「빨리 와서 나를 맞이하라 남악이 서로 구할 것이다.」라 말하고는 끝내 남쪽으로 갔다. 이미 후관에 이르러 다시 교주에 몸을 맡기고자 하였다. 우번이 왕랑에게 간하여 말하길 「이것은 망령된 책입니다. 교주에는 남악이 없는데 어디에 몸을 맡기려 하시는 것입니까?」라 하니 마침내 멈추었다.

왕랑이 우번에게 말했다. 

"그대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소."

翻別傳曰:朗使翻見豫章太守華歆,圖起義兵。翻未至豫章,聞孫策向會稽,翻乃還。會遭父喪,以臣使有節,不敢過家,星行追朗至候官。朗遣翻還,然後奔喪。而傳云孫策之來,翻衰絰詣府門,勸朗避策,則為大異。

번별전에 이르길 : 왕랑은 우번을 시켜 예장태수 화흠(
華歆)을 만나보게 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우번이 예장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손책이 회계를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돌아왔다. 아버지의 상을 만났지만 신하된 사람이 사신으로 부절을 지니고 있기에 감히 집을 지날 수 없었고 급히 달려 왕랑을 좇아 후관에 이르렀다. 왕랑이 우번을 보내 돌아온 연후에야 상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런데 본전에 이르길 손책이 오자 우번이 상복을 입고 부문에 이르렀고 왕랑에게 손책을 피하도록 권했다고 하는데 곧 (내용이 번별전과) 크게 다른 것이다.


우번은 회계로 돌아왔다. 손책은 우번을 공조로 임명하고 친구로서 예로서 대우했고 직접 우번의 집을 방문했다.

江表傳曰:策書謂翻曰:「今日之事,當與卿共之,勿謂孫策作郡吏相待也。」

강표전에 이르길 : 손책이 우번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길 「오늘날의 일은 응당 경과 더불어 해야 하는데 손책을 군의 관리로 여기고 서로 대하지 말았으면 하오.」

손책은 말을 달려 사냥 놀이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우번은 그에게 이렇게 충고 했다. 

"명부께서는 까마귀 떼 같은 병졸들을 사용하고 흩어졌다가 모인 병사들을 달리게 하여 모두 그들의 사력을 얻고 있으니 비록 한고제라고 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가볍게 무장하고 외출하여 은밀히 행동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수행하는 관리들이 경비할 틈도 없으니 관리나 병졸들은 이 때문에 항상 고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군주가 된 자는 장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백룡이 물고기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면 예차의 화살을 눈에 맞아 곤란하게 되고 백제의 아들인 뱀이 스스로 방종하였으므로 유계(한고조)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원컨대 다소나마 유의하십시오." 

손책은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소. 그렇지만 나는 때때로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단정히 앉아 번뇌하오. 춘추시대 정나라 대부인 비심처럼 들녘에서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에 나가는 것이오."

오서에서 이르길: 손책이 산월을 토벌하여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가신들에게 나누어 적을 쫒아가라 빠짐없이 명하곤 단기로 우번을 만나 산중에서 노닐었다. 우번이 가신들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손책이 말하길,

"모두 적을 쫒으러 갔소."

하니, 우번이

"큰 일이 아닙니까!"

하며 손책에게 말에서 내리라 했다.

"여긴 풀숲 깊은 곳이라 졸지에 화급한 일이 생기면 말새퀴로는 진영에 다다를 수 없으니 다만 끌고 가야 합니다. 시위에 활을 먹이고 걸어가십시오. 이 우번이 창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바, 청컨대 앞서 가게 해주십시오." 

평지가 나오자, 손책에게 말에 오르라 권했다. 손책이

"경은 말도 없이 어찌하려오?"

하자 답하길,

"이 우번이 (또) 걷는데는 도가 터 하루에 300리도 딛습니다. 정토에 나선 이래로 이졸 가운데서도 이 사람에게 미친 자가 없었습니다. 명부께서 시험삼아 말을 달려보십시오. 이 우번은 걸음으로 말(馬)을 따라가며 말소리(音聲)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달려가다보니 큰 길에 다다러 관리 하나를 만났는데 손책이 뿔나팔을 취해 불어제끼니 마을에서 소리를 알아듣고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나왔다. 마침내 주선하는 일을 따르며 3군을 평정했다.

江表傳曰:策討黃祖,旋軍欲過取豫章, 特請翻語曰:「華子魚自有名字,然非吾敵也。加聞其戰具甚少,若不開門讓城,金鼓一震,不得無所傷害,卿便在前具宣孤意。」翻即奉命辭行,徑到郡,請被 〈衤冓〉葛巾與(敵)〔歆〕相見,謂歆曰:「君自料名聲之在海內,孰與鄙郡故王府君?」歆曰:「不及也。」翻曰:「豫章資糧多少?器仗精否?士民勇果孰與 鄙郡?」又曰:「不如也。」翻曰:「討逆將軍智略超世,用兵如神,前走劉揚州,君所親見,南定鄙郡,亦君所聞也。今欲守孤城,自料資糧,已知不足,不早為 計,悔無及也。今大軍已次椒丘,僕便還去,明日日中迎檄不到者,與君辭矣。」翻既去,歆明旦出城,遣吏迎策。策既定豫章,引軍還吳,饗賜將士,計功行賞, 謂翻曰:「孤昔再至壽春,見馬日磾,及與中州士大夫會,語我東方人多才耳,但恨學問不博,語議之間,有所不及耳。孤意猶謂未耳。卿博學洽聞,故前欲令卿一 詣許,交見朝士,以折中國妄語兒。卿不願行,便使子綱;恐子綱不能結兒輩舌也。」翻曰:「翻是明府家寶,而以示人,人倘留之,則去明府良佐,故前不行 耳。」策笑曰:「然。」因曰:「孤有征討事,未得還府,卿復以功曹為吾蕭何,守會稽耳。」後三日,便遣翻還郡。臣松之以為王、華二公於擾攘之時,抗猛銳之 鋒,俱非所能。歆之名德,實高於朗,而江表傳述翻說華,云「海內名聲,孰與於王」,此言非也。然王公拒戰,華逆請服,實由孫策初起,名微眾寡,故王能舉 兵,豈武勝哉?策後威力轉盛,勢不可敵,華量力而止,非必用仲翔之說也。若使易地而居,亦華戰王服耳。按吳歷載翻謂歆曰:「竊聞明府與王府君齊名中州,海 內所宗,雖在東垂,常懷瞻仰。」歆答曰:「孤不如王會稽。」翻復問:「不審豫章精兵,何如會稽?」對曰:「大不如也。」翻曰:「明府言不如王會稽,謙光之 譚耳;精兵不如會稽,實如尊教。」因述孫策才略殊異,用兵之奇,歆乃答云當去。(此說為勝也)翻出,歆遣吏迎策。二說有不同,〔此說為勝也〕。

강표전에 이르길 : 손책이 황조(
黃祖)를 토벌하면서 군대를 돌려 지나는 길에 예장을 취하고자 하여 특별히 우번을 청하여 말하길 「화자어는 명성이 있지만 나의 적은 아니오. 더하여 듣기로 전쟁물품이 심히 적은데 만약 문을 열고 성을 양보하지 않아 전고가 한번 울리면 상해가 없을 수 없으니 경께서 앞서 나의 뜻을 갖춰 전해주기 바라오.」우번은 곧 명을 받들어 고별하고 예장군에 도착하였는데 갈건을 쓰고 화흠과 더불어 만나길 청했는데 화흠에게 말하길 「그대께서 스스로 해내의 명성을 헤아려봐서 비군의 왕부군과 비교해서 누가 뛰어나다고 여기십니까?」 화흠이 대답하길 「(제가) 미치지 못합니다.」 우번이 말하길 「예장의 물자, 군량이 얼마나 됩니까? 병장기는 예리합니까? 사민들의 용기가 비군과 비교해서 어떤 쪽이 더 낫습니까?」또 말하길 「(그 쪽만) 못합니다.」우번이 말하길 「토역장군은 지략이 출중하고 병사를 다루는 것이 신기에 가까운데 일전에 유양주(유요)를 쫓아 낸 것은 그대가 친히 본 것이고 남쪽으로 비군을 점령한 것 역시 그대께서 들으신 바입니다. 지금 고성을 지키고자하면서 스스로 헤아려 물자와 군량이 이미 부족한지 알면서도 일찍 그를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후회가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대군이 이미 초구에 주둔하고 있으니 저는 곧 돌아가니 내일 일중에 영접하는 격문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그대와는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우번이 돌아가고 화흠은 날이 밝는대로 성에서 나가 사절을 보내 손책을 영접하였다. 손책이 예장을 평정하고 군대를 이끌고 오로 돌아와 장사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논공행상을 하고자 하여 우번에게 말하길 「내가 옛날 다시 수춘에 이르렀을 때 마일제와 중주의 사대부들과 모인적이 있었는데 말하길 우리 동방의 사람들은 재주가 많지만 학문이 넓지 못한게 안타깝다 하였는데 말하는 와중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네. 내 생각에도 미진한 부분이 있었는데 경은 박학다식하니 그런 이유로 전에 경으로 하여금 한번 허창에가서 조정의 선비들과 교유하여 중국의 말을 함부로 하는 아이들을 꺾고자 하였소. 경은 움직이길 원하지 않아서 장자강(子綱=장굉)을 시켰는데 혹시나 장자강이 아이들의 혀를 묶어놓지 못할까 걱정이오.」

우번이 말하길 「저는 명부의 가보인데 이로써 사람들에게 보인다면 사람들이 오히려 남겨두고 싶어할 것이니 이는 곧 명부의 훌륭한 보좌를 떠나는 것인 즉 앞서 가지 않은 것입니다.」손책이 웃으며 말하길 「그렇소.」 인하여 말하길 「나는 정벌의 일이 있어 부로 돌아오지 못하니 경께서 다시 공조로 나의 소하가 되어 회계를 지켜주시오.」3일 뒤에 곧 우번을 보내 군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왕랑, 화흠 2 공은 전란의 시기에 용맹한 예봉에 대항하는 것은 더불어 잘하는 바가 아닙니다. 화흠의 명덕이 실로 왕랑보다 높은데 강표전에서 우번의 화흠에 대한 말을 서술하여 말하길 「해내의 명성이 왕랑과 비교하여 어떻느냐」는 말은 틀린 것 입니다. 그러나 왕공이 대항하는 전쟁을 하고 화흠이 오히려 복종하길 청한 것은 실로 손책이 처음 일어났을 때 이름이 없고 무리가 적었기 때문에 왕랑이 능히 거병한 것이지 어찌 무예로 우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손책이 이후에 위력이 도리어 강성해지고 시세상 대적할 수 없었기에 화흠이 역량을 헤아려 멈춘 것이지 반드시 우번의 말을 썼기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입장을 바꿔 있으라고 했다면 또한 화흠이 싸우고 왕랑이 항복했을 것입니다. 오력에 우번이 화흠에게 한 말의 기재를 보건대 이르길 : 「듣기로 명부와 왕부군이 중주에서 이름을 나란히 하며 해내에서 추앙받는데 비록 동쪽의 변두리에 있으나 항상 앙모하고 있었습니다.」화흠이 답하길 「저는 왕회계만 못합니다.」 우번이 다시 묻길 「예장의 정병이 회계에 비해 어떠한 지 잘 모르겠습니다.」대답하길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우번이 말하길 「명부가 왕회계만 못하다고 하는 것은 겸손하여 빛이 나는 말에 불과하지만 정병이 회계만 못하다는 것은 실로 가르침과 같습니다.」하고는 이로 인해 손책의 재략의 특수함과 용병의 기이함을 진술했는데 화흠이 답하길 응당 가겠다고 하였다. 우번이 나가고 화흠은 사자를 보내 손책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두 가지의 이야기가 다른데 이 이야기가 더 나은 거 같습니다.

우번은 밖으로 나가 부춘현의 장이 되었다. 

손책이 세상을 떠나자 많은 관리들은 함께 임지를 나가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라고 했다. 이에 우번은 이렇게 말했다. 

"인근현의 산월백성들이 혹시 변란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멀리 성곽을 떠나는 것은 틀림없이 의외의 일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번은 임지에 머물며 상복을 입고 손책을 위해 복상했다. 여러 현에서는 모두 그를 모방하여 전부 안녕을 지켰다.

吳書曰:策薨,權統事。定武中郎將暠,策之從兄也,屯烏程,整帥吏士,欲取會稽。會稽聞之,使民守城以俟嗣主之命,因令人告諭暠。會稽典錄載翻說暠曰:「討 逆明府,不竟天年。今攝事統眾,宜在孝廉,翻已與一郡吏士,嬰城固守,必欲出一旦之命,為孝廉除害,惟執事圖之。」於是暠退。

臣松之案:此二書所說策亡之時,翻猶為功曹,與本傳不同。

오서에 이르길 : 손책이 죽고 손권이 사업을 통솔하였다. 정무중랑장 손고(孫
)는 손책의 종형인데 오정에 주둔하면서 관리와 병사들을 정돈하고 회계를 취하려 하였다. 회계에서 이를 듣고 백성들로 하여금 성을 지키면서 자리를 이어 받은 군주의 명령을 기다리고 이로 인하여 사람에게 시켜 손고에게 고해 타이르도록 하였다.  회계전록에 우번이 손고에게 한 말을 실어 이르길 「토역 명부께서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사무를 관리하고 무리를 통솔하는 것은 응당 효렴에게 있는데 우번은 이미 회계군의 관리, 병사들과 성을 고수하여 반드시 생명을 바쳐 효렴을 위해 해악을 제거하고자 하니 집사께서는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에 손고가 물러갔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두 책이 말한 손책이 죽은 때에 우번은 오히려 공조를 지내고 있었는데 본전의 내용과는 다릅니다.

후에 우번은 주에서는 무제로 추천되었고 한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시어사로 임명했고 조조는 그를 사공연으로 임명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吳書曰:翻聞曹公辟,曰:「盜跖欲以餘財污良家邪?」遂拒不受。

오서에 이르길 : 우번이 조공이 징벽한다는 소식을 듣자 말하길 「도척이 남는 재물로 훌륭한 집안을 더럽히고자 하는가?」하며 끝까지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우번은 소부 공융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아울러 자신이 지은 [주역주]를 보여주었다. 공융은 답장에 이렇게 말했다. 

- 춘추시대 오나라 연릉의 계찰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것을 들었고, 지금 당신의 [주역]에 대한, 연구를 보고서 비로소 동남쪽 지역의 아름다운 것이 비단 회계의 대나무와 화살뿐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구름을 통해 천상을 관찰하고 기온을 통해 운행을 살펴 그 안의 화복의 근원을 소급하면 음양변화에 규율과 완전히 부합하므로 심오한 이치를 탐색하고, 만물을 연구한 걸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회계동부도위 장굉이 또 공융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우중상은 이전에 자못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들었지만 우수한 품덕과 재능을 자질로 삼아 더욱더 연마해 광채를 더하였으므로 그러한 비난이 그를 손상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

손권은 우번을 기도위로 임명하였다. 우번은 손권의 뜻을 여러 차례 거역하면서 간언을 했다. 손권은 유쾌할 수 없었다. 또한 우번은 천성적으로 습속에 타협하지 못하여 매우 많은 비방을 받게 되었으므로 단양군 경현으로 좌천되었다. 

여몽은 관우를 취할 계획을 세우고 질병을 칭하여 건업으로 돌아왔는데 이때 우번이 의술에도 두루 정통하다는 이유로서 자신을 따르도록 할 것을 요청했으며 또한 이 방법으로 우번을 풀어주려고 한 것이다. 

이후에 여몽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서쪽으로 향하자 남군태수 미방이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했다. 여몽은 아직 군의 성을 정령하지 않았지만 성 밖의 광장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우번이 여몽에게 말했다.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뿐입니다. 성안의 사람들을 어찌 전부 믿을 수 있겠습니까 ?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습니까?" 

여몽은 즉시 그의 의견을 따랐다. 

그 당시 성안에는 어떤 자가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우번의 진언이 있었으므로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은 아래가 태이고 위가 감이고 오호가 변하여 임쾌가 되는 것을 얻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손권이 우번에게 말하길

"그대는 복희에게 미치지 못해도, 동방삭에는 견줄 만 하오." 

위나라 장수 우금이 관우에게 붙잡혀 구금되어 있었다. 손권은 강릉에 이르자. 그를 풀어주고 서로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그 후 어느 날 손권은 말을 타고 우금과 나란히 외출하게 되었다. 우번은 우금을 꾸짖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투항한 포로이거늘 어찌 감히 우리주군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느냐."

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채찍을 들고 우금을 때리려 하였다. 이때 손권이 질책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그 후 손권은 누선에서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열자 우금은 음악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우번이 또 말했다. 

" 당신은 거짓으로 사면을 구하려 하시오?" 

손권은 우번이 자신의 뜻과 같지 않아 원망하고 불평했다.

오서 왈, 손권이 위나라와 화친했으므로 뒤에 우금을 북쪽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우번이 다시 간언했다,

우금은 수만 군사를 패배시키고 자신은 항복한 포로가 되어 또한 죽지도 못했습니다. 북쪽(위나라)은 군정(軍政)에 익숙하니 우금을 되찾아도 필시 우리가 헤아린 바대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를 돌려보내도 비록 손해될 것은 없지만 (죄를 지은) 도적을 풀어주는 것이니, 그를 참수해 삼군을 호령하고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보여주느니만 못합니다.

손권이 이를 듣지 않았다. 군신들이 우금을 전송할 때 우번이 우금에게 말했다,

경은 오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지 마시오. 내 계책이 때마침 쓰이지 못했을 뿐이오.

비록 우금이 우번에게 증오를 받았으나 도리어 우번을 매우 칭찬하니 위문제가 늘 우번을 위해 (조정에) 빈 자리를 만들어두었다.


손권은 연회가 끝날 무렵 직접 일어나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우번은 땅에 엎드려 취한 척 하고 술을 받지 않았다. 손권이 떠날 때쯤 우번은 일어나 앉았다. 손권은 이때 매우 노여워하며 직접 칼로 그를 찌르려 했다. 곁에서 모시던 사람이 모두 두려워했는데 오직 대사농 유기만이 일어나, 손권을 끌어안고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대왕께서는 술을 석잔 돌린 이후에 명망 있는 선비를 죽여야 합니다. 비록 우번에게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천하가 어찌 이것을 알겠습니까? 그리고 대왕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람들을 양육할 수 있기 때문에 사해 안에서는 대왕의 풍채를 양모하고 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이것을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손권이 말했다. 

"조맹덕은 오히려 공문거(공융)를 죽였는데 내가 우번을 죽이는 것이 어찌 합당하지 않소?" 

유기가 말했다. 

"맹덕은 재능 있는 선비를 가볍게 죽였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대왕께서는 몸소 덕행과 인의를 행하여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융성함을 비교하시려고 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맹덕과 견주십니까?" 

우번은 이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 손권은 이 기회를 통해서 주위사람에게 명해 자신이 술을 먹은 뒤 죽인다고 말할지라도 모두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우번은 일찍이 배를 타고 가다가 미방과 서로 만나게 되었다. 미방의 배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우번에게 자신들을 피하도록 하려는 앞에서 길을 여는 자가 소리쳤다.

"장군의 배를 피하십시오!" 

우번은 사나운 소리로 말했다. 

"충성과 신의를 잃고 어떻게 군주를 섬기시오? 사람들의 두성을 기울게 하고도 오히려 장군으로 칭하는 것이 옳은 것이요!" 

미방은 창문을 닫아 응하지 않고, 황급히 우번을 피해갔다. 

후에 우번은 또 미방의 진영 앞을 통과 하게 되었다.

미방의 관리들의 문을 닫아 우번의 수레는 통과하지 못하게 했다.우번은 다시 분노해서 이렇게 말했다. 

"마땅히 닫아야 할 문은 오히려 열어놓고 응당 열어야 할 문은 오히려 닫으니 어찌 일을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미방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우번은 성품이 소략하고 정직하여 술을 마신 후 여러 차례 실언을 하게 되었다. 손권이 장소와 신선에 관해 논의할 때. 우번은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모두 죽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신선을 말하고 있는데 세상에 어찌 선인이 있겠습니까?" 

손권은 우번에게 화가 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우번을 교주로 쫒아버렸다. 

그는 비록 죄를 지어 방축되었지만 가르치고 배움에 있어서는 피곤함을 몰랐으므로 언제나 문하생들이 수백 명씩 되었다.

翻別傳曰:權即尊號,翻因上書曰:「陛下膺明聖之德,體舜、禹之孝,歷運當期,順天濟物。奉承策命,臣獨抃舞。罪棄兩絕,拜賀無階,仰瞻宸極,且喜且悲。臣 伏自刻省,命輕雀鼠,性輶毫釐,罪惡莫大,不容於誅,昊天罔極,全宥九載,退當念戮,頻受生活,復偷視息。臣年耳順,思咎憂憤,形容枯悴,髮白齒落,雖未 能死,自悼終沒,不見宮闕百官之富,不睹皇輿金軒之飾,仰觀巍巍眾民之謠,傍聽鍾鼓侃然之樂,永隕海隅,棄骸絕域,不勝悲慕,逸豫大慶,悅以忘罪。」

번별전에 이르길 : 손권이 즉위하고 우번이 이로 인해 편지를 올려 이르길 : 「폐하께서 밝은 성인의 덕에 응하고 순, 우의 효성을 몸소 실천하시어 천운이 때에 맞으니 하늘에 순응하여 사물을 다스리셨습니다. 책명을 받드시니 신은 홀로 기뻐하며 춤을 출 정도입니다. 죄 때문에 버려져 서로가 끊어져 있으니 절하며 축하하려 하여도 계단이 없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신이 엎드려 반성해보니 생명은 참새나 쥐보다 가볍고 덕은 호리(毫釐:자 또는 저울 눈의 호와 리로써 아주 적은 분량)보다 가벼운데 죄악은 이보다 더 클 수 없어 주살당해도 용서받을 수 없으며 하늘처럼 넓고 끝이 없어 9년 동안 갇혀 있었으니 물러가 응당 주륙당하는 것을 생각해야하는데 매번 생명을 받아 다시 구차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신의 나이가 60으로 잘못을 생각하니 걱정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형용은 초췌하고 머리는 하얘졌으며 이는 빠져 비록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스스로 종국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궁궐, 백관의 부유함을 보지 못하고 황여, 금헌의 장식을 보지 못하여 드높은 민중의 가요를 듣고 옆에서 종과 북이 내는 강직한 음악을 듣고 영원히 바다의 모퉁이에 스러져 해골은 끊겨진 영역에 버려지게 되니 슬픔 감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한가롭게 커다란 경사를 만나 기쁨에 죄를 잊어버릴 지경입니다. 」


또[노자],[논어],[국어]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은 모두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翻別傳曰:翻初立易注,奏上曰:「臣聞六經之始,莫大陰陽,是以伏羲仰天縣象,而建八卦,觀變動六爻為六十四,以通神明,以類萬物。臣高祖父故零陵太守光, 少治孟氏易,曾祖父故平輿令成,纘述其業,至臣祖父鳳為之最密。臣亡考故日南太守歆,受本於鳳,最有舊書,世傳其業,至臣五世。前人通講,多玩章句,雖有祕說,於經疏闊。臣生遇世亂,長於軍旅,習經於枹鼓之間,講論於戎馬之上,蒙先師之說,依經立注。又臣郡吏陳桃夢臣與道士相遇,放髮被鹿裘,布易六爻,撓其三以飲臣,臣乞盡吞之。道士言易道在天,三爻足矣。豈臣受命,應當知經!所覽諸家解不離流俗,義有不當實,輒悉改定,以就其正。孔子曰:『乾元用九而天下治。』聖人南面,蓋取諸離,斯誠天子所宜協陰陽致麟鳳之道矣。謹正書副上,惟不罪戾。」 

翻又奏曰:「經之大者,莫過於易。自漢初以來,海內英才,其讀易者,解之率少。至孝靈之際,潁川荀諝號為知易,臣得其注,有愈俗儒,至所說西南得朋,東北喪朋,顛倒反逆,了不可知。孔子歎易曰:『知變化之道者,其知神之所為乎!』以美大衍四象之作,而上為章首,尤可怪笑。又南郡太守馬融,名有俊才,其所解釋,復不及諝。孔子曰『可與共學,未可與適道』,豈不其然!若乃 北海鄭玄,南陽宋忠,雖各立注,忠小差玄而皆未得其門,難以示世。」 

又奏鄭玄解尚書違失事目:「臣聞周公制禮以辨上下,孔子曰『有君臣然後有上下,有上下然後禮義有所錯』,是故尊君卑臣,禮之大司也。伏見故徵士北海鄭玄所注尚書,以顧命康王執瑁,古『月』似『同』,從誤作『同』,既不覺定,復訓為杯,謂之 酒杯;成王疾困憑几,洮頮為濯,以為澣衣成事,『洮』字虛更作『濯』,以從其非;又古大篆『丣』字讀當為『柳』,古『柳』『丣』同字,而以為昧;『分北三苗』,『北』古『別』字,又訓北,言北猶別也。若此之類,誠可怪也。玉人職曰天子執瑁以朝諸侯,謂之酒杯;天子頮面,謂之澣衣;古篆『丣』字,反以為昧。 甚違不知蓋闕之義。於此數事,誤莫大焉,宜命學官定此三事。又馬融訓註亦以為同者大同天下,今經益『金』就作『銅』字,詁訓言天子副璽,雖皆不得,猶愈於玄。然此不定,臣沒之後,而奮乎百世,雖世有知者,懷謙莫或奏正。又玄所注五經,違義尤甚者百六十七事,不可不正。行乎學校,傳乎將來,臣竊恥之。」翻放棄南方,云「自恨疏節,骨體不媚,犯上獲罪,當長沒海隅,生無可與語,死以青蠅為弔客,使天下一人知己者,足以不恨。」以典籍自慰,依易設象,以占吉凶。 又以宋氏解玄頗有繆錯,更為立法,并著明楊、釋宋以理其滯。 

臣松之案:翻云「古大篆『丣』字讀當言『柳』,古『柳』『丣』同字」,竊謂翻言為然。故「劉」 「留」「聊」「柳」同用此字,以從聲故也,與日辰「卯」字字同音異。然漢書王莽傳論卯金刀,故以為日辰之「卯」,今未能詳正。然世多亂之,故翻所說云。荀諝,荀爽之別名。


번별전에 이르길 : 우번이 처음 주역의 주석을 쓰면서 상주를 올려 말하길 「신이 듣기로 6경의 시작으로 음양만큼 큰 것이 없고 이로써 복희는 하늘에 매달린 상을 우러러 보아 8괘를 세우고 6효의 변동을 살피어 64괘를 지었으니 이로써 신명에 통하고 만물을 분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신의 고조부인 고 영릉태수 우광(虞
)은 어릴때부터 맹씨역을 공부하였고 증조부인 고 평여령 우성(虞)은 그 일을 이었고 신의 조부인 우봉(虞)에 이르러 가장 정밀했습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고 일남태수 우흠(虞歆)은 근본을 우봉으로부터 받았는데 가장 오래된 책이 많았으며 세세토록 그 학업을 전해 신에 이르기까지 5세가 되었습니다. 전대의 사람들은 경전을 통강하되 장구를 완미하는 일을 많이하고 비록 비설이 있다 해도 경전자체에는 소활하였습니다. 신은 태어나 난세를 만나 군중에서 자랐고 전쟁도구 들 사이에서 경전을 익혔으며 전투마 위에서 강론해 선사의 학설을 배워 경전에 입각하여 주석을 지었습니다. 또한 신의 군리 진도가 신과 도사가 서로 만나는 꿈을 꾸었는데 산발하고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주역의 6효를 펼쳐놨는데 그중의 3개를 흔들어 신에게 먹였고 신은 빌어전부 삼켰다고 합니다. 도사가 말하길 주역의 도리는 하늘에 있으니 3효만으로도 족하다 하였다 합니다. 어찌 신이 천명을 받고서 응당 경전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 학파의 해석을 보고 예부터 전해오는 것을 떠나지 않고 뜻에 있어 부실한 부분이 있거든 항상 전부 개정하여 올바른 것으로 나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공자께서 이르길 『건원이 9를 쓰면 천하가 다스려진다.』하였으니 성인이 남면하여 대체로 취한 것은 이괘이며 이는 진실로 천자가 응당 음양에 협조하여 기린과 봉황을 불러오는 도리입니다. 삼가 정사하여 곁들여 올리니 오직 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우번은 다시 상주를 올려 말하길 「경전 중에 큰 것으로 주역만한 것이 없는데 한나라 초기 이래로 해내의 영재들 중에 주역을 읽어 이해한 사람이 적었습니다. 효령연간에 이르러 영천의 순서가 주역을 안다는 명성이 있어 신이 그 주석을 얻어 보았는데 세속의 유생보다는 낫지만 서남쪽으로 친구를 얻고 동북쪽으로 친구를 잃는다는 부분에 이르러 전도되어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공자가 주역을 찬탄하여 말하길 『변화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귀신의 행한 바를 아는 것인가!』라 한것을 대연, 4상의 작품을 칭찬한 것으로 여겨 위에 올려 수장으로 삼은 것은 더욱 기괴하고 가소롭습니다. 또한 남군태수 마융은 준재의 명성이 있었는데 그가 해석한 것은 다시 순서에게도 미치지 못합니다. 공자가 말하길 『같이 배울 수는 있어도 같이 도에 나아갈 수는 없다.』는 말이 어찌 그러지 않겠습니까? 만약 마침내 북해의 정현, 남양의 송충같은 사람들은 비록 각자가 주석을 썼고 송충이 정현보다 약간 못하지만 모두 그 문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세상에 보이기 힘듭니다.」    

다시 정현이 상서를 잘못 해석한 조목을 상주하여 이르길 「신이 듣기로 주공이 예법을 만든 것은 위아래를 분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공자가 말하길 『군신이 있은 연후에 위 아래가 있고 위 아래가 있은 연후에 예의를 둘 곳이 있게 된다.』그러므로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것은 예법의 큰 역할입니다. 엎드려 옛 징사(徵士: 학행은 높지만 출사하지 않은 은자) 북해의 정현이 해설한 상서를 보건대 고명편에서 강왕이 모(瑁)를 잡는 부분에서 옛날에 月자가 同자와 흡사하여 이로부터 同으로 잘못 써놓고 깨우쳐 바로잡지 않고 다시 술잔으로 해석하여 말하기 酒杯라 하였습니다. 성왕이 병이 있어 곤핍하여 안석에 기대었다는 부분에서 洮頮를 濯으로 여겨 옷을 세탁하는 일로 만드니 洮자를 헛되어 濯자로 바꾸어 그 잘못을 좇은 것입니다. 또한 옛날 대전에 丣자는 응당 (木丣)로 읽어야 하는데 옛날의 丣와(木丣)는 같은 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昧로 썼습니다. 『分北三苗』에서 北은 別의 옛날글자인데 뜻을 북으로 하고 말하길 北은 別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부류는 진실로 기괴합니다. 옥인직에 이르길 천자가 모를 잡고 제후와 조회한다고 했는데 이를 술잔이라 하고 천자가 얼굴을 씻는 것을 옷을 빤다고 하고 옛 전서에 丣라 된 것을 도리어 昧라합니다. 심히 모르는 것은 비워 놓는다는 의미에 위배됩니다. 이 몇가지 일은 오류가 큰 것으로 응당 학관에게 명하여 이 3가지 일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마융은 해석하길 同을 천하대동으로 여기고 지금의 경전에 金자를 하나 추가하여 銅으로 만들고 해석하길 천자의 부새라 하였으니 비록 모두 올바르지 못하나 오히려 정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는다면 신이 죽고 난 이후 백세가 지나 비록 세상에 아는 사람이 있다하여도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혹 상주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정현이 해설한 5경은 뜻을 위배한 것 중에서 더욱 심한 것이 167가지인데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행해지고 장래에 전한다면 신은 이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우번이 남방에 방축된 이후 말하길 「예절에 소략하고 일신이 아침하지 않아 주상을 범하여 죄를 얻어 바닷가의 한 모퉁에서 길게 파묻히고 살아서는 말할 사람이 없으며 죽어서는 파리들이 조문오는 것을 스스로 한스러워 한다. 만약 천하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안다면 족히 한스럽지 않다.」 전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주역에 의거해 상을 설치하고 이로써 길흉을 점쳤다. 또한 송씨가 태현경을 해석하는 것에 자못 오류가 많다고 여겨 다시 법도를 세우고 더불어 명양, 석송을 지어 그 막힌 곳을 해설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우번이 말하길 「옛날 대전에 丣자는 응당 (木丣)로 읽어야 하는데 옛날의 丣와(木丣)는 같은 글자」라 하였는데 저는 우번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劉」 「留」「聊」「柳」는 같이 이 글자를 사용하는데 소리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일진의 「卯」자와는 글자가 같을뿐 음이 다릅니다. 그러나 한서 왕망전에 묘금도를 논하면서 일진의 「卯」자로 여겼는데 지금은 상세히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많이 어지럽히므로 우번이 말한 것입니다. 순서는 순상의 별명입니다.

당초 산음의 정람이나 태말의 서릉은 현관의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우번은 이들을 한번보고 나서 곧 우정을 나누었으며 결국에는 모두 이름을 빛냈다.

會稽典錄曰:覽字孝連,八歲而孤,家又單微,清身立行,用意不苟,推財從弟,以義讓稱。仕郡至功曹,守始平長。為人精微絜淨,門無雜賓。孫權深貴待之,未及擢用,會病卒,甚見痛惜,殊其門戶。覽子固,字子賤,本名密,避滕密,改作固。固在襁褓中,闞澤見而異之,曰:「此兒後必致公輔。」固少喪父,獨與母居, 家貧守約,色養致敬,族弟孤弱,與同寒溫。翻與固同僚書曰:「丁子賤塞淵好德,堂構克舉,野無遺薪,斯之為懿,其美優矣。令德之後,惟此君嘉耳。」歷顯 位,孫休時固為左御史大夫,孫皓即位,遷司徒。皓悖虐,固與陸凱、孟宗同心憂國,年七十六卒。子彌,字欽遠,仕晉,至梁州刺史。孫潭,光祿大夫。徐陵字元大,歷三縣長,所在著稱,遷零陵太守。時朝廷俟以列卿之位,故翻書曰:「元大受上卿之遇,叔向在晉,未若於今。」其見重如此。陵卒,僮客土田或見侵奪,駱統為陵家訟之,求與丁覽、卜清[주1]等為比,權許焉。陵子平,字伯先,童齔知名,翻甚愛之,屢稱歎焉。諸葛恪為丹楊太守,討山越,以平威重思慮,可與效力,請平為丞,稍遷武昌左部督,傾心接物,士卒皆為盡力。初,平為恪從事,意甚薄,及恪輔政,待平益疏。恪被害,子建亡走,為平部曲所得,平使遣去,別為佗軍所獲。平兩婦歸宗,敬奉情過乎厚。其行義敦篤,皆此類也。    

회계전록에 이르길 : 정람(丁覽)의 자는 효련(
孝連)으로 8세에 고아가 되어 집 또한 한미했는데 몸을 깨끗하게 하고 명절을 닦았으며 생각하는 것이 구차하지 않아 재물을 흐트려 종제를 돕고 의롭게 양보하는 것으로 칭해졌다. 군에서 벼슬하여 공조에 이르렀고 수 시평장을 지냈다. 사람됨이 정미하고 깨끗하여 가문에 잡다한 빈객이 없었다. 손권이 심히 귀하게 여겨 대했으나 탁용하는데 이르지 못해 병을 만나 죽었고 심히 애통하여 그 문호를 특별하게 하였다.

정람의 아들인 정고(
)는 자가 자천(子賤)으로 본명은 정밀이다. 등밀(滕密)의 이름을 피해 정고로 고친 것이다. 정고가 아직 포대기에 쌓여 있을 때 감택(闞澤)이 보고서는 기이하게 여겨 말하길 「이 아이는 훗날 반드시 공보에 이를 것이다.」라 하였다. 정고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홀로 거처하였는데 집이 가난했는데도 검소하게 살면서 낯 빛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공손하게 대하였다. 족제도 외롭고 약하여 더불어 한서를 같이 하였다. 우번은 정고의 동료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 「정자천은 독실히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 부자가 더불어 들어 올려져 들판에 남는 땔감이 없으니 이것은 훌륭한 덕이요 아름다운 일입니다. 훌륭한 덕의 이후에 오직 이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여러 가지 현달한 자리를 거치고 손휴의 시대에 정고는 좌어사대부가 되고 손호가 즉위한 이후 사도로 옮겼다. 손호는 덕에 어긋나고 포학한 일을 했기에 정고와 육개(陸凱), 맹종(孟宗)은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다 나이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정미(
)는 자가 흠원(欽遠)으로 진나라에 벼슬하여 양주자사에 이르렀다. 손자인 정담(潭)은 광록대부이다.

서릉(
徐陵)은 자가 원대(元大)로 3현의 장을 역임했다. 있는 곳에서 정적이 칭해졌기에 영릉태수로 옮겼다. 당시 조정에서 열경의 자리로 기다렸기에 우번이 편지를 보내 말하길 「서원대가 상경의 대우를 받으니 숙향이 진나라에 있더라도 오늘날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그가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 이와 같았다. 서릉이 죽고 동객이나 전토가 혹 침탈을 당했기에 낙통(駱統)이 서릉의 집안을 위해 다투어 정람, 복청 등과 대비할 수 있기를 구했는데 손권이 허락하였다.

서릉의 아들은 서평(
)인데 자가 백선(伯先)이다. 어릴때부터 명성이 있어 우번이 아주 아꼈는데 누차 칭찬하였다. 제갈각(諸葛恪)이 단양태수가 되어 산월을 토벌할 때 서평이 위엄이 무겁고 사려가 깊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 청하여 서평을 승으로 삼았고 차츰 옮겨 무창 좌부독이 되었는데 마음을 기울여 다른 사람과 교제했기에 사졸들이 모두 힘을 다하였다. 서평이 제갈각을 위해 종사했는데 뜻이 심히 박하였고 제갈각이 보정하는데 이르러 서평을 대하는 것이 더욱 소활하였다. 제갈각이 해를 입고 아들인 제갈건(諸葛)이 도망쳤는데 서평의 부대에게 잡혔지만 서평은 그냥 가게 해주었고 다음에 다른 부대에 의해 잡혔다. 서평은 결혼한 여자형제가 있었는데 종가에 돌아왔고 공경하고 봉양하는 정이 아주 두터웠다. 그 행동이 돈독하고 신실하기가 모두 이러했다.   

 [주1]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복청(卜清)은 혹 복정(卜靜)의 오기가 아닌가 하는데 복정의 내용은 고소전에 보인다.


우번은 남쪽에서 10년간 있었고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吳書曰:翻雖在徙棄,心不忘國,常憂五谿宜討,以遼東海絕,聽人使來屬,尚不足取,今去人財以求馬,既非國利,又恐無獲。欲諫不敢,作表以示呂岱,岱不報, 為愛憎所白,復徙蒼梧猛陵。

江表傳曰:後權遣將士至遼東,於海中遭風,多所沒失,權悔之,乃令曰:「昔趙簡子稱諸君之唯唯,不如周舍之諤諤。虞翻亮直,善 於盡言,國之周舍也。前使翻在此,此役不成。」促下問交州,翻若尚存者,給其人船,發遣還都;若以亡者,送喪還本郡,使兒子仕宦。會翻已終。

오서에 이르길 : 우번이 비록 귀양을 갔지만 마음은 나라를 잊을 수 없었고 항상 오계를 응당 토벌해야 함을 걱정했으며 요동은 절해의 지역이고 그들의 사신이 와서 종속해도 오히려 취할만하지 못한데 지금 사람을 보내 재물로 말을 구하니 이미 나라의 이익이 아니고 아마 얻는 것도 없을 것이라 여겼다. 간언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고 표를 지어서 여대(
呂岱)에게 보였는데 여대는 답을 하지 않고 안좋은 마음으로 일러 바쳐 다시 창오군의 맹릉으로 옮겼다.    

강표전에 이르길 : 후에 손권이 장사를 보내 요동에 이르도록 했는데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많이 죽거나 사라졌고 손권은 참회하여 마침내 명령을 내려 이르길 「옛날 조간자가 말하길 그대들의 아부하며 따르는 말이 주사의 올곧은 비판보다 못하다고 했다. 우번은 올 곧은 신하로 말을 남김 없이 하는데 뛰어났는데 나라의 주사이다. 전날 우번이 이곳에 있었다면 이 역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는 교주에 하문하도록 재촉하고 우번이 만약 살아 있다면 배를 주어 보내 수도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고 만약 죽었다면 본군에 돌아가 상을 치를 수 있게 하고 아들로 하여금 벼슬하도록 했다. 도착했을 때 우번은 이미 죽었다.


그의 영구는 고향으로 돌아와 안장되었고, 처자식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회계전록(會稽典錄)에 이르길: [[주육전]]으로 분할

우번에게는 11명의 아들이 있었고, 넷째 아들 우사(虞汜)가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영안 초에 그는 선조랑 에서 상기중랑시로 임명되었고 이후에 감군사자가 되어 부엄을 토벌할 때 질병으로 죽었다.

會稽典錄曰:汜字世洪,生南海,年十六,父卒,還鄉里。孫綝廢幼主,迎立琅邪王休。休未至,綝欲入宮,圖為不軌,召百官會議,皆惶怖失色,徒唯唯而已。汜對曰:「明公為國伊周,處將相之位,擅廢立之威,將上安宗廟,下惠百姓,大小踴躍,自以伊霍復見。今迎王未至,而欲入宮,如是,群下搖蕩,眾聽疑惑,非所以永終忠孝,揚名後世也。」綝不懌,竟立休。休初即位,汜與賀邵、王蕃、薛瑩俱為散騎中常侍。以討扶嚴功拜交州刺史、冠軍將軍、餘姚侯,尋卒。    

회계전록(會稽典錄)에 이르길:우사(虞汜)의 자는 세홍(世洪)으로 남해(南海)에서 태어났다.열여섯 살 때 아버지가 죽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손침(
孫綝)이 유주를 폐하고 낭야왕 손휴()를 맞아들여 옹립하고자 하였다. 손휴가 이르지 않았는데 손침이 궁에 들어가 불궤한 짓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백관의 회의를 소집해도 모두들 두려워 실색해서 예예거리고 말뿐이었다. 우사가 대하여 말하길 「명공께서 나라의 이윤과 주공이 되어 장상의 위치에 처하여 폐립의 위용을 마음대로 하면서 장차 위로는 종묘를 안정시키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어 대소의 사람들이 모두 뛰어다니며 스스로 이윤과 곽광을 다시봤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영접하는 왕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궁에 들어가려 하시니 이렇다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동탕하게 되고 무리들은 이를 듣고 의혹을 가지게 될 것이니 충효를 영구히 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리는 도리가 아닙니다.」하니 손침이 불쾌하게 여겼으나 끝내 손휴를 세웠다. 손휴가 당초에 즉위할 때 우사와 하소(賀邵), 왕번(王蕃), 설영(薛瑩) 등이 더불어 산기중상시가 되었다. 이후에 부엄(扶嚴)을 토벌한 공로로 교주자사, 관군장군, 여요후에 임명됐는데 얼마 뒤에 죽었다.

우사의 동생 우충(
虞忠)은 이도태수이며

會稽典錄曰:忠字世方,翻第五子。貞固幹事,好識人物,造吳郡陸機於童齔之年,稱上虞魏遷於無名之初,終皆遠致,為著聞之士。交同縣王岐於孤宦之族,仕進先至宜都太守,忠乃代之。晉征吳,忠與夷道監陸晏、晏弟中夏督景堅守不下,城潰被害。

忠子譚,字思奧。晉陽秋稱譚清貞有檢操,外如退弱,內堅正有膽幹。仕晉,歷位內外,終於衛將軍,追贈侍中左光祿大夫,開府儀同三司。    

회계전록(會稽典錄)에서 이르길:우충(虞忠)의 자는 세방(世方)으로,우번의 다섯째 아들이다. 올곧고 일을 잘 처리하며 인물을 알아보는 것을 좋아해 오군의 육기를 어릴 때 만났고 상우의 위천을 무명시절의 초기부터 칭하였는데 모두 끝내 오래 간 저명한 선비가 되었다. 동현의 왕기를 미관들 중에 사귀었는데 벼슬이 먼저 나아가 의도태수에 이르자 우충은 마침내 대신하도록 하였다. 진나라가 오나라를 정벌하자 우충과 이도감 육안(
陸晏), 육안의 동생인 중하독 육경()이 성을 굳게 수비하고 항복하지 않았는데 성이 무너지고 살해당했다. 

우충의 아들 우담(虞譚)의 자는 사오(思奧) 이다. 진양추에 우담이 고결하고 올곧아 절조가 있으며 바깥으로 유약해보여도 마음속은 굳고 올 곧아 담이 있었다고 칭한다. 진나라에 벼슬하여 내외의 자리를 역임하며 위장군으로 끝나고 시중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에 추증되었다.


우용(聳)은 월기교위로 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정위가 되었고 상동하간태수가 되었다.

會稽典錄曰:聳字世龍,翻第六子也。清虛無欲,進退以禮,在吳歷清官,入晉,除河間相,王素聞聳名,厚敬禮之。聳抽引人物,務在幽隱孤陋之中。時王岐難聳,以高士所達,必合秀異,聳書與族子察曰:「世之取士,曾不招未齒於丘園,索良才於總猥,所譽依已成,所毀依已敗,此吾所以歎息也。」聳疾俗喪祭無度,弟昺卒,祭以少牢,酒飯而已,當時族黨並遵行之。    

화계전록(會稽典錄)에서 이르길:우용(虞聳)의 자는 세룡(世龍) 우번의 여섯째 아들이다. 청허하고 욕심이 없어 진퇴를 예법에 맞추었는데 오나라에서 청관을 역임하다 진나라에 들어가 하간상에 제수되었고 왕은 본래부터 우용의 이름을 들었던지라 후하게 예를 갖춰 대하였다. 우용은 인물을 끌어 올릴 때 은미하고 고루한 사람들 중에서 추천하길 애썼다. 당시에 왕기가 우용을 나무라며 높은 선비가 달하는 바는 반드시 특이하고 빼어나야 한다고 했는데 우용이 족자인 우찰(
)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길 「세상에서 선비를 취하는것에 있어 일찍이 구원의 어린사람을 부르지 않고 우글거리는 무리에서 훌륭한 인재를 찾고자 하니 칭찬하는 것은 이미 성공한 것이고 훼방하는 것은 이미 실패한 것이라 이것이 내가 탄식하는 이유이다.」라 하였다. 우용은 세속의 상제에 정도가 없음을 싫어하여 동생인 우병이 죽자 소뢰로 제사를 지내고 음식과 반찬이외는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족당들이 더불어 이를 준행하였다.

우병(虞昺)은 정위상서 제음 태수가 되었다.

會稽典錄曰:昺字世文,翻第八子也。少有倜儻之志,仕吳黃門郎,以捷對見異,超拜尚書侍中。晉軍來伐,遣昺持節都督武昌已上諸軍事,昺先上還節蓋印綬,然後歸順。在濟陰,抑彊扶弱,甚著威風。    

회계전록(會稽典錄)에서 이르길:우병(虞昺)의 자는 세문(世文)으로 우번의 여덟째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초탈한 뜻이 있어 오나라에 임관해 황문랑이 되었다가 민첩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우수하게 보여 파격적으로 승진해 상서시중에 임명되었다. 진나라 군대가 와서 정벌하자 조병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무창이상의 제군사를 감독하게 했는데 조병은 먼저 부절을 위로 돌려보내고 인수를 상자에 넣은 다음 귀순하였다. 제음에 있으면서 약한 자는 일으키고 강한 자는 억눌러 위풍이 심히 현저하였다.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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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0
등록일 :
2013.05.01
13:21:43 (*.148.5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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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31
14:15:57
(*.0.203.45)
"호박과 같이 아름다운 보석은 썩은 먼지를 흡수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네요.

코렐솔라

2013.06.23
16:26:48
(*.52.89.88)
우금과 우번의 이야기 주석 추가 http://blog.naver.com/krighty21/50026131831

코렐솔라

2013.07.11
15:48:03
(*.0.203.174)
한문 주석 추가 회계 전록에 이름과 자만 매칭해놓았습니다.

코렐솔라

2013.10.04
10:36:46
(*.166.245.168)
창을 잘 쓰고 잘 걷는 것은 글라우룽님 번역입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297159&page=

코렐솔라

2016.05.20
15:08:23
(*.196.74.143)
우번전의 모든 주석이 번역 완료되었습니다. 한문이 달린 것들은 dragonrz님의 번역으로 해당하는 항목들은 우번의 어릴적 얘기, 왕방평에 현혹된 왕랑,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얘기, 우번에게 보내는 손책의 편지, 화흠을 설득하는 우번, 반란을 막는 우번, 조조를 도척이라 욕하는 우번, 손권 즉위를 축하하는 우번, 주석 다는 우번, 우번이 추천한 사람들에 관련된 주석, 요동과 우번이 관련된 주석, 아들들에 대한 주석은 모두 dragonrz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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