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손전]]에서 분리


육항(陸抗)의 자는 유절(幼節)이고, 손책의 외손(外孫)이다. 육손이 245년 죽었을 때 그는 20세였으며, 건무교위(建武校尉)로 임명되어 육손의 병사 5천 명을 인솔했다. 그는 부친의 영구를 동쪽으로 돌려보내면서 도성으로 가서 손권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손권은 이 당시 양축(楊笁)이 고발한 육손에 관한 20가지 일을 가지고 육항을 문책하고 있었다. 손권은 그의 빈객들의 왕래를 금지시키고, 환관을 육항이 있는 곳으로 보내 힐문했다. 육항은 돌이켜 물어볼 것도 없이 모든 일에 대해 조리있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손권의 의심은 점점 풀렸다.


적오 9년(246), 육항은 입절중랑장(立節中郞將)으로 승진했고, 제갈각과 임지를 바꿔 시상(柴桑)에 주둔했다. 육항은 임지로 갔을 때, 모두 성벽을 다시 보수하고 살고 있는 집의 담장과 가옥을 수선했으며, 오두막집에 살면서도 뽕나무ㆍ과일나무는 임의로 훼손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갈각이 주둔지로 돌아왔을 때는 새 것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갈각이 과거에 주둔했던 시상은 매우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으므로 아주 부끄럽게 여겼다.

태원 원년(251), 육항은 도성에 도착하여 질병을 치료했다. 질병에 차도가 있어 돌아가려고 하자, 손권은 눈물을 흘리며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전에 참언을 듣고 그것을 믿어 그대의 부친과의 군신(君臣)간의 대의(大義)가 돈독하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그대를 등졌었소. 앞뒤로 하여 당신을 힐문했던 글은 전부 불태워 없애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하시오.”

건흥 원년(252), 육항은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임명됐다. 


태평 2년(257), 위나라 장수 제갈탄(葛誕舉)이 수춘(壽春)을 바치고 투항했다. 육항을 시상독으로 임명하고 수춘으로 가도록 했다. 육항은 위나라의 아문장(牙門將)과 편장군(偏將軍)을 무찔렀으며, 정북장군(征北將)으로 승진했다.


영안 2년(259), 육항은 진군장군(鎮軍將軍)으로 승진했으며, 서릉(西陵)도독이 되어 관우뢰(關羽瀨)로부터 백제성까지의 군사적인 일을 관리했다.


3년(260), 육항은 가절을 받았다. 손호(孫皓)가 즉위하자, 육항에게 진남대장군을 더했으며, 익주목(益州牧)을 겸임하도록 했다.


건형 2년(270), 대사마 시적이 세상을 떠나자, 육항을 신릉(信陵), 서릉(西陵), 이도(夷道), 낙향(樂鄉), 공안(公安)의 군사 임무를 총괄하는 직책에 임명하였으며, 관소를 낙향(樂鄉)에 두었다.


육항은 조정의 정령(政令)에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을 듣고 깊이 우려하고, 장래의 일을 생각하여 곧 상소를 올렸다.

― 신이 듣기로는, 군주의 덕행이 고르면 많은 수의 사람이 적은 수를 이기고, 무력이 서로 같으면 안정된 국가가 혼란한 국가를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육국(六國)이 강력한 진(秦)나라를 이긴[兼并:겸병] 까닭이며, 서초(西楚)가 한고조에게 패배한 원인인 것입니다. 지금 적국은 사방 변방 지역을 차지하고 있고, 단지 관우(關右) 지역만이 아닌데, 구주(九州)를 할거하며 어찌 다만 홍구(鴻溝) 서쪽 지역만을 점령하겠습니까? 우리 나라는 밖으로는 동맹국의 구원이 없고, 안으로는 서초와 같은 강성함이 없어 모든 정사가 정체되어 있고, 백성들은 안정되어 있지 못합니다. 논의하는 자들이 견지하고 있는 것은, 단지 긴 하천이나 험준한 산이 우리 나라의 변방 지역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나라를 지키는 말초적인 일이지 지혜로운 자가 우선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항상 멀리로는 전국시대의 존망(存亡)의 원인을 기억하고, 가까이로는 유씨(劉氏)의 멸망한 징조를 보고 이러한 일들을 전적(典籍)을 이용하여 고증하고 실제적인 일로써 징험하며 한밤 중에도 베개를 어루만지며 잠들 수 없었고 식사할 때는 먹는 것을 잊었습니다. 옛날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을 때, 곽거병(霍去病)은 그의 부서를 사직하고 떠났고, 한왕조의 치도(治道)에 병폐가 있자, 가생(賈生 ; 賈誼[가의])은 슬피 울었습니다. 


하물며 신은 왕실 출신으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며, 몸과 명성의 훼손이나 명예 여부는 국가와 운명을 같이 했고, 삶과 죽음이나 헤어지고 만남은 도의를 따르고 구차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생각은 극까지 이르러 마음이 처참했습니다. 무릇 군주를 받드는 대의는 직간(直諫)을 범하고 속이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의 신하된 자의 절개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군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여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지금 마땅히 해야만 되는 열 일곱 가지를 왼쪽과 같이 삼가 진술합니다. ―

이 열 일곱 가지는 이미 산실되었기 때문에 싣지 않는다.


이 당시 하정(何定)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환관들이 조정의 정사에 간여했다. 그래서 육항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신이 듣기로는, 국가를 창건하고 가업을 계승하려면 소인을 임용하지 않으며, 소인의 참언에 안주하고 사악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요(堯)나라 시대의 서적에서도 경계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상한 사람들이 원망하고 풍자하는 시를 지었고, 중니(仲尼 ; 공자)가 이 때문에 탄식했습니다. 춘추시대 이래로 진(秦)ㆍ한(漢)에 이르기까지 각 조대의 기울고 엎어지는 징조는 이 점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소인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에 밝지 못하고, 식견이 얕기 때문에 비록 마음을 다하고 절개를 다할지라도 오히려 임용되기에는 부족한데, 하물며 평소 간사한 마음이 지속되고 애증(愛憎)의 감정이 쉽게 바뀜에 있어서야 어떠하겠습니까? 만일 그들을 잃는 것을 걱정한다면 임용할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천자의 귀와 눈을 밝히는 임무를 위임하고, 독단적으로 전횡할 수 있는 권력을 주고서는 즐거운 세상이 출현하고 사회 기풍이 맑아지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이것은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현재 직무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들은 특수한 재능을 갖고 있는 자가 비록 적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이는 왕실이나 귀족의 후대로 어려서부터 도덕 교화에 물들었고, 어떤 이는 청렴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자립할 수 있는 자로서 그들의 자질과 재능은 임용하기에 충분하므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재능에 따라 관직을 주고 소인들을 억누르고 폐출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 연후에 사회 풍속은 맑아질 수 있고, 모든 정치적인 사무에는 오점이 없게 될 것입니다. ―


봉황 원년(272), 서릉독(西陵督) 보천(步闡)이 성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고는 사자를 진(晉)으로 파견해 투항하려고 했다. 육항은 이 소식을 듣고 그날 즉시 각 군대에 명령을 내려 장군 좌혁(左奕)ㆍ오언(吾彦)ㆍ채공(蔡貢) 등에게 직접 서릉으로 달려가도록 했다. 그는 각 군영에게 포위벽을 다시 공고하게 구축하도록 명령하고, 적계(赤谿)로부터 고시(故市)까지 이르게 하여, 안으로는 보천을 포위하고 밖으로는 이것으로 적군을 방어하려고 했다. 육항은 이 일을 밤낮으로 재촉하여 진행시켰는데, 마치 적군이 벌써 이른 것 같이 했고, 병사들은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간했다.


“현재 삼군(三軍)의 정예로 보천을 신속하게 공격한다면, 진나라의 구원병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보천을 틀림없이 공략시킬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포위벽을 구축하는 일을 하여 병사들과 백성들의 힘을 피로하게 하십니까?”

육항이 말했다. 


“서릉성이 있는 곳의 지세는 견고하고 식량 또한 충분하며, 게다가 수선하는 방어 공사와 기계는 모두 내가 이전에 계획했던 것이오. 지금 몸을 돌려 공격한다면, 즉시 공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구원병이 틀림없이 이르게 될 것이고, 그들이 도착했는데 우리들이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팎으로 어려움을 받을 것이오. 어떻게 감당하겠소?” 


그러나 장수들은 모두 보천을 공격하려고 했고, 육항은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 의도태수 뇌담(雷譚)의 말이 지극히 간절하였으므로 육항은 모든 사람들을 복종시키려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 번 공격하도록 했다. 공격은 과연 불리했고, 포위벽의 공사는 비로소 완성됐다. 진나라의 거기장군 양호(羊祜)가 군대를 이끌고 강릉으로 향했다. 장수들은 모두 육항에게 상류로 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육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강릉성은 견고하고 병사들이 충분하므로 걱정할 것이 없소. 설령 적군이 강릉을 공략할지라도 반드시 지킬 수 없을 것이므로 우리들의 손실은 작소. 만일 서릉의 어떤 사람이 적과 결탁한다면 남쪽 산악지대의 이민족들은 모두 소란을 피우고 동요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우려할 일은 말로 다하기 어렵소. 나는 차라리 강릉을 버리고 서릉으로 달려갈 것인데, 하물며 강릉이 견고하니 어떻겠소?” 


당초 강릉의 지세는 평탄하고 도로 소통이 원활하였는데, 육항은 강릉독 장함(張咸)에게 거대한 제방을 만들어 물을 막아 평야를 물로 채워 도적의 반란을 근절시키도록 명령했다. 양호는 물을 막아놓은 곳을 이용해 배를 띄워 식량을 운반하고 제방을 파괴하여 보병을 지나가게 할 것이라고 선전하게 했다. 육항은 이 소식을 듣고 장함에게 즉시 제방을 파괴하도록 했다. 장수들은 모두 의문스러워 하며 여러 차례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다. 양호는 당양(當陽)에 도착해 제방이 파괴되었다는 말을 듣고 배 대신 수레로 식량을 운반하였으므로 큰 힘을 소비하게 되었다. 진나라의 파동감군(巴東監軍) 서윤(徐胤)이 수군을 인솔하여 건평(建平)에 도착했고, 형주자사 양조(楊肇)는 서릉에 이르렀다. 육항은 장함에게 성을 굳게 지키도록 명령하고, 공안독(公安督) 손준(孫遵)에게는 남쪽 해안을 따라 양호를 제어하도록 했으며, 수군독(水軍督) 유려(留慮), 진서장군 주완(朱琬)에게는 서윤을 막도록 하고, 육항 자신은 삼군을 인솔하여 포위담에 기대 양조에게 대항했다. 장군 주교와 영도독(營都督) 유찬(兪贊)이 양조에게로 달아났다. 육항이 말했다. 


“유찬은 우리 군대 안에서 옛날부터 관리로 있었으므로 우리 군의 허실을 알고 있는 자이다. 나는 항상 이민족의 병사들이 평소 정련되지 못하여 만일 적군이 공격하여, 포위한다면 반드시 우선적으로 이곳부터 손에 넣을 것이라고 걱정해왔다.” 


그는 즉시 밤에 이민족 백성들을 이동시키고 모두 노장들로 대체시켰다. 이튿날, 양조는 과연 과거 이민족 병사들이 지키던 곳을 공격했다. 육항은 반격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돌과 화살은 비내리듯 했다. 양조의 병사들 가운데 부상을 입거나 죽은 자는 계속 나왔다. 양조는 서릉에 도착한 지 1개월이 지나 계획이 좌절되자 밤을 이어 퇴각했다. 육항은 이들을 추격하려고 했지만, 보천이 역량을 집중시켜 요충지를 빈틈을 타 공격할 것이 걱정되었으며, 병사들은 분산시키기에는 부족했으므로 단지 북을 울려 병사들을 경계시키며 추격하려는 것과 같이 했다. 양조의 부하들은 떠들썩해지고 두려워하며 모두 무기를 풀어놓고 도주했다. 육항은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에게 뒤에서 추격하도록 했다. 


양조는 크게 패배했고, 양호 등은 모두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갔다. 육항은 서릉성을 함락시키고 보천의 가족과 그 수하의 대장, 관리들을 죽였으며, 이 이하부터는 사면을 요청하여 받은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육항은 서릉의 성벽과 진지를 수리하고 낙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모습은 교만한 기색이 없었으며 평상시와 같이 겸허했다. 때문에 장사들의 환심을 얻었다.


진양추(晉陽秋):

육항은 양호와의 사이에는, 고대에 자산의 예전에 자산(子産)과 계찰(季札)처럼 서로 사귀었다 [僑札之好]. 한번은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왔고, 양호는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지않았다. 육항이 병이 들자 양호는 약을 보내왔고, 육항도 독살의 의심도 없이 그것을 먹었다. 그당시 사람들은 화원(華元: 송나라 정치가: 대략 BC 580년경)과 초의 장수 사마자반(司馬子反)이 오늘날 다시 나탔다고 여겼다. 


한진춘추(漢晉春秋): 양호는 전투에서 되돌아오자, 이전보다 더 덕과 신의[德信]로써 행동하며, 오나라 사람들을 감화시키려 했다. 육항은 기회가 있을때마다 국경 경비를 하는 병사들에게 "상대가 덕으로써 행동하고 있는데, 우리가 폭정을 한다면, 우리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해 버릴 것이다. 각자 맡은바를 올바르게 지키며, 작은 이득 같은 것에 연연하지 마라". 


이 당시 진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관계는 만약에 남은 쌀가마가 농지에 그대로 놓여 있어도 서로 빼앗아 가지 않았고, 소나말이 경계를 넘어 와도, 상대국에 그것을 알린 다음에야 그것을 포획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면(沔)수에서 오나라 사람들이 사냥을 할때는 진나라 사람들이 먼저 맞쳐서 잡은 사냥감을 얻은 경우엔 모두 다시 다되려 보내주었다. 한번은 육항이 병이들었는데, 영조에게 좋은 약을 요청했고, 양호는 약을 조제하면서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특효약으로, 최근 내가 먹을라고 만들었던 것인데, 아직 못 먹은 약입니다. 당신의 병이 급하다고 하여 이렇게 보냅니다." 육항은 이내 그 심부름꾼이보낸 약을 그대로마셨다. 부하들이 먹지 말라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육항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호(孫皓)는 이 둘의 이야기를 듣고, 육항을 꾸짖었는데, 육항이 대답했다.


"작은 마을, 작은 촌동네에서도 신의를 소중히 하는 인물이있지 않으면 안되는데, 하물며 큰 오나라에서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에 제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양호의 덕을 선명하게 드러낼 뿐, 그에게 아무 상처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양호와 육항이 신하의 본질을 잃었다면서 두 사람을 비난하기도 한다.


자산(子産): (?-BC 522) 중국 춘추 시대 정나라의 정치가.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교(僑).

계찰(季札): (?-?) 오나라 정치가. 성은 희(姫)


習鑿齒曰:夫理勝者天下之所保,信順者萬人之所宗,雖大猷旣喪,義聲乆淪,狙詐馳於當塗,權略周乎急務,負力從橫之人,臧獲牧豎之智,未有不憑此以創功,捨茲而獨立者也。是故晉文退舍,而原城請命;穆子圍鼓,訓之以力;冶夫獻策,而費人斯歸;樂毅緩攻,而風烈長流。觀其所以服物制勝者,豈徒威力相詐而已哉!自今三家鼎足四十有餘年矣,吳人不能越淮、沔而進取中國,中國不能陵長江以爭利者,力均而智侔,道不足以相傾也。夫殘彼而利我,未若利我而無殘;振武以懼物,未若德廣而民懷。匹夫猶不可以力服,而況一國乎?力服猶不如以德來,而況不制乎?是以羊祜恢大同之略,思五兵之則,齊其民人,均其施澤,振義網以羅彊吳,明兼愛以革暴俗,易生民之視聽,馳不戰乎江表。故能德音恱暢,而襁負雲集,殊鄰異域,義讓交弘,自吳之遇敵,未有若此者也。抗見國小主暴,而晉德彌昌,人積兼己之善,而己無固本之規,百姓懷嚴敵之德,闔境有棄主之慮,思所以鎮定民心,緝寧外內,奮其危弱,抗權上國者,莫若親行斯道,以侔其勝。使彼德靡加吾,而此善流聞,歸重邦國,弘明遠風,折衝於枕席之上,校勝於帷幄之內,傾敵而不以甲兵之力,保國而不浚溝池之固,信義感於寇讎,丹懷體於先日。豈設狙詐以危賢,徇己身之私名,貪外物之重我,闇服之而不備者哉!由是論之,苟守局而保疆,一卒之所能;協數以相危,小人之近事;積詐以防物,臧獲之餘慮;威勝以求安,明哲之所賤。賢人君子所以拯世垂範,舍此而取彼者,其道良弘故也。    


습착치가 말하길 : 이(理)에 편승해 승리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신의[信]에 의해서 행동하는 사람은 만인들이 우러러본다. 지금 대도를 이미 잃었고 신의도 오래토록 소멸했는데 간사한 사람이 대권을 장악하고 요직에 거해 권모술수로 급박한 사무를 처리하면서 자기 힘을 믿고 종횡하기도 하며 노비와 목동의 지혜를 가지고 있으니 이에 의지하여 공업을 이루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이를 버리면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진 문공이 군대를 물렸는데도 원성이 항복을 청했고 목자는 고성을 포위하고서도 힘서 싸울 것을 가르쳤으며 야부가 책략을 올리니 비 지방의 사람들이 귀순하였고 악의가 공격을 늦췄으나 공훈이 널리 이어졌다. 그 사물을 복종시키고 승리를 하게 된 이유를 본다면 어찌 다만 위력과 서로를 속이는 것뿐이었겠는가! 지금 세 집안이 정족의 형세를 이룬지 40여년인데 오나라는 회,면을 넘어 중국에 나아가 취하지 못하고 중국은 장강을 넘어 이익을 다투지 못하는 것은 힘이 균등하고 지혜가 비슷하며 도리는 서로를 기울게 하기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릇 저쪽을 잔혹하게 대하고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나를 이롭게 하고 잔혹한 짓을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며 무력을 떨쳐 사물을 두렵게 하는 것은 덕을 널리 하여 백성들이 그 은덕을 마음에 품게 만드는 것만 못하다. 필부도 힘으로 복종시킬 수 없거늘 하물며 하나의 나라이겠는가? 힘으로 복종시킬 수 있다하더라도 덕으로 오게 하는 것만 못한데 하물며 제압할 수 없는 상대임에랴? 이로써 양호는 대동의 책략을 품고 5병의 법칙을 생각해 백성들의 마음을 다스려 혜택을 고르게 하면서 정의의 그물을 떨쳐 오나라 영토를 덮고 겸애를 밝혀 흉폭한 풍속을 바로잡으며 백성들의 관점을 바꾸어 싸우지 않고 강표를 치달렸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문이 널리 퍼져 백성들이 운집하였으니 다른 나라를 국경으로 하고도 서로 널리 교통하였다. 오나라가 적을 만난 것으로부터 이런 적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육항이 보길 나라가 작고 군주가 포학하며 진나라의 덕이 날로 창성해지니 상대방은 쌍방의 장점을 쌓고 있는데 자기는 근본을 두터이 하는 규칙도 없으므로 백성은 엄한 적의 덕을 품고 경내는 군주를 버릴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민심을 진정시키고 내외를 평안히 하며 약한 것을 떨쳐 일어나게 하여 상국과 항형하고자 한다면 친히 이 도리를 행하여 이기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쪽의 덕이 우리에게 가해지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이 선량한 소문이 흘러 돌아와 방국을 무겁게 하고 멀리 있는 풍속을 널리 밝힌다면 이부자리 위에서도 적을 공격해 막을 수 있고 장막 안에서도 적에게 이길 수 있다. 적을 기울게 하는데 갑병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나라를 보전하는데 성지의 견고함으로 하지 않는 것은 신의가 적을 감동시키고 진심을 전날에 체감했기 때문이다. 어찌 속임수를 펼쳐 현명함을 위태롭게 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명성을 좇으며 바깥의 사물이 나를 무겁게 하는 것을 탐내 어리석게 이에 복종하여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는 부류와 같겠는가! 이로부터 논하건대 국부를 수비하고 강토를 보전하는 것은 한 명의 병졸이 능히 할 수 있는바 이고 술수를 부려 상대방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소인이 하는 일이며 거짓말을 쌓아 상대방을 방비하는 것은 노복의 방식이고 무위에 의지해 안정을 구하는 것은 명철한 사람이 천시하는 바이다. 현인군자가 세상을 구하고 법도를 드리울 수 있는 이유는 이를 버리고 저를 취하는데 있으니 그 도리가 진실로 드넓기 때문이다.


육항은 관직을 더하여 도호로 임명됐다. 무창좌부독 설영이 죄를 지어 하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육항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재덕이 출중한 사람은 국가의 훌륭한 보배이며 사직의 귀중한 자본이고, 모든 정무를 조리있게 처리하며 사방을 화목하고 맑아지게 합니다. 때문에 대사농 누현(樓玄), 산기중상시 왕번(王蕃), 소부 이욱(李勖)은 모두 당대의 걸출한 인재들이며 한 시대의 저명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막 주상의 총애를 입고 종용하여 자리에 열입되었으나 모두 주살되었고, 어떤 이는 멸족되어 후대가 끊겼으며, 어떤 이는 황량한 변방 지역으로 버림받았습니다. 《주례》에는 현명한 자는 특별히 잘못을 용서해 준다는 규정이 있고, 《춘추》에는 선한 사람을 널리 용서한다는 이치가 있습니다. 《상서》에서 말하기를, ‘무고한 사람을 죽이느니 차라리 만들어진 법을 위반하고 잘못을 범하는 것이 낫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번 등의 죄명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는데 사형을 집행하고, 마음속에는 충의를 품고 있는데 몸은 극형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통한스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미 사형에 처해져 본인들에게는 본래 지각이 없겠지만, 사체를 불태우고 물에 떠내려보내 물가에 유기시킨 것은 선왕의 법전이 아니며, 아마도 보후(甫侯)가 법을 세울 때 경계한 것이므로 두렵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슬퍼하며 불안해 하고, 관리와 백성들은 매우 걱정합니다. 왕번과 이욱은 영원히 죽은 몸이 되었으므로 후회해도 역시 미치지 못하지만, 폐하께서 누현을 사면시켜 불러서 감옥에서 나오도록 하시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최근에 저는 설영이 갑자기 체포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설영의 부친인 설종(薛綜)은 선제 곁에서 납언(納言 ; 천자의 말을 신하들에게 전하거나, 반대로 신하들의 말을 천자에게 아뢰는 직책)으로 있었고, 문황제(文皇帝)를 보좌했으며, 설영은 그의 부친의 기업을 계승하여 수양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절조있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현재 그가 연루된 죄는 이러한 이유로 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신은 담당 관리들이 그 일에 대해 상세히 이해하지 못하여 다시 극형에 처한다면 더욱더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원컨대 성상께서 은혜를 펴서 설영의 죄를 용서하시고, 많은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고 형법을 분명하게 한다면 천하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


그 당시 군대의 출정이 빈번하였으므로 백성들은 피폐한 생활을 했다. 육항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신이 듣기로는, 《주역》에서는 시세에 순응하는 것을 중시하고, 《좌전》에서는 시기를 엿보아 공격하는 것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夏) 왕조의 죄악이 많아지자 은(殷)의 탕왕(湯王)이 병사를 사용했고, 주왕(紂王)이 음란하고 포악해지자 주무왕(周武王)이 부월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만일 시기가 미치지 않았다면, 걸왕(桀王)이 옥대(玉臺)를 세웠어도 은의 탕왕은 백성들을 걱정하고 슬퍼하는 걱정만 있었을 것이고, 맹진(孟津)에서 제후들이 모여 은의 수도로 공격해왔을지라도 주무왕은 깃발을 돌려 군대를 돌아오도록 했을 것입니다. 현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병사들을 강하게 하며 경작에 힘쓰고 식량을 축적하며 문무대신으로 재능있는 자에게는 그 능력을 한껏 발휘하도록 하고, 각 관직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각각의 직무를 홀시하지 않도록 하며, 직위의 강등과 승진 규정을 명확히 하여 모든 관리들을 격려하고, 형법과 포상을 신중히 살펴 권장하고 금지하는 일을 나타내며, 각 관리들의 교육은 도덕으로써 하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은 인의로써 한 연후에 천명에 순응하고 좋은 시기를 타서 천하를 얻는 데 힘쓰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장수들은 자신의 명성을 좇아서 병사들을 계속적으로 동원시켜 무덕(武德)을 더럽히고, 한 차례 동원될 때마다 수많은 비용이 소비되며, 사졸들은 초췌해져도 적군은 쇠락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벌써 크게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제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다투면서도 오히려 커다란 이익에 어두운 것은, 이 사람의 신하들의 간사하고 험악한 수단이지 국가를 위하는 훌륭한 계책이 아닙니다. 옛날 제나라와 노나라의 세 차례 싸움에서 노나라 사람들이 두 번 승리했지만 오래지 않아 멸망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두 나라 실력의 형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현재 병사들을 출동시켜 승리하여 얻은 것으로 잃은 것을 보충시키지 못함에랴! 그리고 병력을 의지하여 백성들을 잃는 것은, 고대에 분명히 경계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공격하여 조금 취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병사와 백성들의 역량을 비축하여 시기를 기다린다면, 대체로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


봉황 2년(273) 봄, 육항은 대사마로 승진하고 형주목이 되었다. 


3년(274) 여름, 육항은 질병이 들자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서릉과 건평은 국가의 변방 장벽인데, 이곳은 장강 하류에 위치하여 두 적국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배를 띄워 물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며, 천 리에 걸쳐 배를 이어 번쩍이는 유성처럼 신속하게 달려 순식간에 도달한다면, 다른 곳의 구원병이 와서 위급한 상황을 풀어주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사직의 안위(安危)의 관건이지, 단순히 변방 지역이 침해를 받는 사소한 손해가 아닙니다. 신의 부친인 육손은 옛날 서쪽의 변방 지역에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릉은 국가의 서쪽 문으로, 비록 수비하기는 쉽지만, 또한 잃는 일도 쉽습니다 만일 이곳을 지키지 못한다면 한 군을 잃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형주는 오나라의 소유가 되지 못합니다. 만일 이곳에 예측하지 못한 일이 있게 된다면 마땅히 전국의 병력을 기울여 싸워야만 합니다.’ 신은 과거 서릉에 있으면서 육손의 사적을 보고 앞서와 같이 정예병사 3만 명을 얻기를 요구했습니다만, 군사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일상적인 규칙에 따라 병사를 보내고 많은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보천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부터 군대는 더욱더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 신이 통치하고 있는 천 리는 사방으로 적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외부로는 강대한 적을 방어해야 하고, 내부로는 각 종족들을 어루만져야 하는데, 위로부터 아래까지 수하에 있는 병사는 수만 명이고, 이 병사들도 늙고 피로해진지 오래되어 변란에 대처하기는 곤란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각 왕들의 나이가 어려 아직은 국사를 관리할 수 없으므로 부상(傅相 ; 궁궐에서 보육을 맡은 벼슬아치)을 세워 우수한 자질을 도와 이끌어 내도록 해야지 병마를 사용하여 대사를 방해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또 황문(黃門)의 환관들이 지원병 모집 제도를 개설했는데, 병사들과 백성들은 부역을 원망하여 환관 문하로 달아나고 있습니다. 청컨대 특별히 조서를 내려 지원병들을 점검하여 일체 새로 안배함으로써 적군의 압력을 항상 받고 있는 변방 땅에 보충시키고, 신의 부하로 하여금 합쳐 8만 명을 채우도록 하여 번다한 사무를 감소시키고 공로가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준다면, 비록 한신(韓信)이나 백기(白起)가 다시 소생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기교를 펼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병사를 증원시키지 않고 궁중의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서 대사를 성취시키려고 한다면, 이것은 신이 깊이 우려하는 일입니다. 만일 신이 죽는다면, 그 이후에는 폐하께서 서쪽의 변방 지역에 마음을 기울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폐하께서 신의 말을 고려하시기 원합니다. 그러면 신은 죽어도 영원할 것입니다. ― 


이 해 가을, 육항은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육안(陸晏)이 뒤를 이었다. 육안과 동생 육경(陸景), 육현(陸玄), 육기(陸機), 육운(陸雲)은 육항의 병사를 나누어 통솔했다. 육안은 비장군ㆍ이도감(夷道監)으로 임명됐다. 


천기 4년(280), 진나라 군대가 오나라로 공격해왔는데, 용양장군(龍驤將軍) 왕준이 물의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으며 이르는 곳마다 승리하여 결국에는 육항이 우려했던 것과 같이 되었다.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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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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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6
16:42:22
(*.0.203.140)
몇 개 정리

코렐솔라

2013.09.03
16:40:20
(*.0.203.51)
휴 다행이 이것에는 문제 없는 듯.

코렐솔라

2016.05.29
17:35:39
(*.196.74.143)
육항과 육손에 대한 습착치의 평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6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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