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등(孫登)은 자가 자고(子高)이고 손권(權)의 장남이다.

위(魏)나라 황초(黃初) 2년(221)에 손권(權)을 오왕(吳王)으로 임명하고, 손등을 동중랑장(東中郎將)으로 임명했으며, 만호후(萬戶侯)로 봉했다. 그러나 손등은 작위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 해, 손등을 세워 오왕의 태자(太子)로 삼고 사부(師傅)를 선정해 두고 우수한 인재를 정선하여 그의 빈객(賓)과 친구가 되도록 했다. 그래서 제갈각(諸葛恪)ㆍ장휴(張休)ㆍ고담(顧譚)ㆍ진표(陳表) 등이 선발되어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들은 손등 곁에서 시서(詩書)를 익혔으며, 밖으로 나가면 함께 말타고 활쏘기를 했다. 

손권은 손등에게 한서(漢書)를 읽혀 근대의 역사를 숙지하도록 했다. 장소(張昭)는 한서에 대해서는 가르치는 기초가 있었지만, 다시 그를 번거롭고 수고롭게 해야만 되었기 때문에 장휴(休)로 하여금 장소(昭)로부터 학습하고 궁궐로 돌아와 손등에게 전하도록 명령했다. 손등은 곁에서 모시는 관속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평민의 예절을 사용하게 했고, 제갈각, 장휴, 고담 등과는 간혹 같은 수레에 타기도 했으며, 같은 침상에 누워 자기도 했다. 태부(太傅) 장온(張溫)이 손권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서자(中庶子)라는 관직은 태자와 가장 친밀하며, 태자 가까이에 있으면서 모든 질문에 대답해야 하므로 마땅히 덕행이 걸출한 사람을 이용해야만 됩니다.”

그래서 진표 등을 임용하여 중서자로 삼았다. 이후에 또 서자(庶子 : 태자의 관속)들이 군주와 신하의 예절에 구애되자 또 두건을 쓰고 곁에서 모시도록 명령했다.

황룡(黃龍) 원년(229), 손권이 황제를 칭해자, 손등을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았으며, 제갈각(恪)을 좌보(左輔)ㆍ장휴(休)를 우필(右弼)ㆍ고담(譚)을 보정(輔正)ㆍ진표(表)를 익정도위(翼正都尉)로 삼았는데, 이들은 사우(四友)라고 했다. 그리고 사경(謝景)ㆍ범신(范慎)ㆍ조현(刁玄)ㆍ양도(羊茞) 등은 모두 손등의 빈객이 되었다. 이 때문에 동궁에는 인재가 많다고 알려졌다. (주1)


(주1) 오록(吳錄): 범신(范慎: 206-274)은 자가 효경(孝敬)이고 광릉 사람이다. 자신을 인정하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고, 우수한 친구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해다. 범신은 20편의 논(論)을 지어 ≪교비(矯非)≫라고 했다. 이후에 시중으로 임명되고, 지방으로 나가 무창(武昌)의 좌부독(左部督)이 되어 군대를 정돈되게 다스렸다. 

손호는 수도를 옮기고는 그의 존재를 꺼려하여

"범신은 공훈과 덕행이 모두 성대하므로 짐이 공경하고 의지하고 있다. 마땅히 상공(上公)의 지위에 오르게 하여 사람들의 기대에 부합해야 한다."

라는 조서를 내려 태위(太尉)로 임명했다. 범신은 자신이 오랫동안 무장(武將)으로 있었던 것이 한스러웠으므로 늙고 쇠약해졌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그가 떠날려하자 그의 병사들은 그를 그리워해, 모든 장병들이 눈물을 흘렸다. 봉황(鳳凰: 272-274) 3년에 죽었고, 아들 범요(范耀)가 그를 이어받았다.

조현((刁玄)은 단양(丹楊)사람이고, 양도(羊衜)는 남양(南陽) 사람이다.

오서에서 이르길: 양도(羊衜)가 처음에 중서자(中庶子)가 되었을때 나이가 20이었다. 당시에 정위감(廷尉監) 은번(隱蕃)이라는 자가 호걸들을 불러모아 위장군(衞將軍) 전종(全琮)등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傾心] 경대(敬待: 삼가 공경(恭敬)하여 대접(待接)함---)하였는데, 오로지 양도와 선소랑(宣詔郎)이었던 예장(豫章) 사람인 양적(楊迪)만이 은번과 교제하기를 거부하고, 그와 함께 하지 않아,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은번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자 왜 양도가 그랬는지 알게 되었다.

강표전: 손등(孫登)이 시중(侍中) 호종(胡綜)으로 하여금 빈우목(賔友目)을 만들게 했는데, 그곳에서 호종은

"영재탁월(英才卓越), 초유필부(超踰倫匹)하는 자는 곧 제갈각(諸葛恪)이요, 정식시기(精識時機)하고 달유구미(達幽究微)하는 것은 곧 고담(顧譚)이며, 응변굉달(凝辨宏達)하고 언능석결(言能釋結)하는 자는 곧 사경(謝景)이고, 구학견미(究學甄微)하고 유하동류(游夏同科)하는 자는 곧 범신(范慎)이다"

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양도는 호종을 꾸짖으며 말했다. 

"원손(元遜: 제갈각(諸葛恪)의 자)은 재능도 없고, 자묵(子嘿: 子黙: 고담(顧譚)의 자)은 정(精)이 사납고 비뚤어져 있고, 숙발(叔發: 사경(謝景)의 자)은 말이 뜬구름을 잡고 효경(孝敬: 범신(范慎)의 자)은 깊이가 없다."

고 하였고, 이말들은 모두들 지취(指趣)를 가진 말이었다. 그리하여 양도가 했던 이 말은 견계(見咎: 트집비슷한 말, 걸림돌?)가 되어, 양도는 죽을때까지도 제갈각과 친해지지 못했다. 나중에 이 네 사람이 모두 죽음을 당하자, 오나라 사람들은 양도의 말은 사실이 되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양도는 계양태수(桂陽太守)까지 관직이 올랐는데, 그때 죽었다.


손권은 수도를 건업(建業)으로 옮기게 되자, 상대장군(上大將軍) 육손(陸遜)을 불러 손등을 보좌하며 무창(武昌)을 지키고, 옛 수도의 궁전이나 관소의 남은 일을 겸임하도록 했다. 손등은 때대로 사냥을 하러 나가 마땅히 지름길을 경유해야 될 때도 항상 양전(良田)을 멀리 피하고 농가를 밟지 않았으며, 휴식을 취하는 곳에 이르러서도 공한지를 선택하였다. 


그가 일찍이 말을 타고 밖으로 나갔다가 몸 곁으로 탄환이 스쳐 지나가자 주위 사람들에게 탄환을 쏜 자를 찾도록 했다. 마침 탄궁(彈)을 손에 쥐고 탄환을 허리에 매고 있는 한 사람이 있자, 모두들 이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그를 심문했지만, 시인하지 않았다. 손등을 따르던 자들이 그에게 매질을 하려고 하자, 손등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자기 몸을 스쳐갔던 탄환을 찾도록 하여 그 사람의 탄환과 비교해 보자 같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풀어주었다. 또 한 번은 손등이 물을 담아놓은 금으로 된 그릇을 분실할 일이 있었다. 그것을 훔친 자를 색출하자 수하에 있던 자가 한 짓이었다. 손등은 차마 벌을 내리지 못하고 그를 여러 차례 불러 질책하고는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측근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 일에 관해 발설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이후에 손등의 동생 손려(慮)가 죽자, 손권은 신하들에게 식사를 줄이도록 명했다. 손등은 밤낮을 겸하여 가서 뇌향(賴鄉)에 도착하여 직접 통보했다. 손권은 즉시 그를 불러 만났다. 손등은 손권이 슬퍼하며 우는 것을 보고, 곤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손려가 질병으로 침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 것, 이것은 운명입니다. 지금 북쪽의 영토는 아직 통일되지 않았고, 사해(四海)는 구제되기를 우러러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폐하에게 명을 주었는데, 폐하께서는 아래 백성들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대신들의 음식을 줄였습니다. 이것은 예절을 넘어서는 요구입니다. 저는 사사로이 이 때문에 걱정되고 불안합니다.”

손권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그를 위해 음식을 늘렸다. 손등이 머문 지 열흘이 지나자 손권은 그를 서쪽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손등은 오랫동안 부모 곁을 떠나 있어 안부를 살필 수 없었던 것은 자식된 도리로 결함이 있는 것이라고 간절히 진술하고, 또 육손(陸遜)은 충성스럽고 근면하므로 돌아보고 걱정할 것이 없다고 진술했다. 손권은 그에게 머물러 있도록 했다.

가화(嘉禾) 3년(234), 손권은 신성(新城)으로 출정하면서 손등에게 남은 일을 모두 맡아 처리하도록 했다. 그해는 식량이 넉넉하지 못하여 도적들이 많았었다. 손등은 이와 관련된 법령을 제정하여 방어하였고, 그 법령으로 간사한 자들을 붙잡아 근절시키는 관건을 완전하게 얻었다.

당초, 손등의 생모는 신분이 미천하여, 손등이 어렸을 때부터 서부인(徐夫人)이 어머니로서 양육해준 은혜가 있었다. 후에 서부인은 질투 때문에 폐출되어 오군(吳)에서 살게 되었고, 보부인(步夫人)이 가장 총애를 받았다. 보씨(步氏)가 하사하는 것이 있을 때는, 손등은 감히 사양하지 않고 정중히 받았다. 서부인이 사람을 보내와 의복을 줄 경우에는 반드시 목욕을 한 후에 입었다. 손등은 태자로 세워졌을 때,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근본이 확립되고서 도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태자를 세우려면 마땅히 먼저 왕후(后)를 세워야 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너의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가?”

손등이 대답했다.

“오군(吳)에 있습니다.”

손권은 묵묵히 있었다.

吳書曰:弟和有寵於權,登親敬,待之如兄,常有欲讓之心。

오서에 이르길 : 동생인 손화는 손권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손등이 친밀하고 공경스럽게 대하여 대하길 마치 형과 같았고 항상 제위를 양보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손등은 태자로 세워진 지 총 21년, 그의 나이 3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종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 신은 현명하지 못하고 중병에 걸렸으며 스스로 반성해 보면 품행이 비루한데, 갑자기 죽음에 이를까 두렵기만 합니다. 신은 제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부모를 떠나 흙 속에 매장되어 다시는 영원히 궁궐을 받들어 우러러 보지 못하고, 해와 달과 함께 폐하와 왕후께 인사할 수 없으며, 살아서는 국가에 이익된 것이 없고 죽어서는 폐하께 깊은 슬픔만을 남기게 될 것을 생각하니, 이 때문에 비애를 느낄 뿐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죽음과 삶은 운명이 있으며, 장수와 요절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주진(周晉)이나 안회(顏回)는 뛰어난 지혜가 있던 인재였지만 오히려 요절했습니다. 하물며 신은 어리석고 비루한데도 나이는 그들의 수명을 넘었고, 살아서는 국가의 후가가 되었으며 죽어서는 존영의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니, 신에게 있어서는 이미 많은 것을 얻은 것인데 또한 어찌 슬퍼하고 한탄하겠습니까! 

지금 대사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체포할 도적들은 아직 토벌되지 않아 모든 나라의 사람들은 우러러 사모하여 운명을 폐하에게 걸고 있습니다. 위험에 처한 자는 안전을 갈망하고, 혼란에 처한 자는 태평스럽게 다스려 지기를 희망합니다.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몸을 잊어버리고 일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정감을 끊고 황제(黃)와 노자(老)의 방술(術)을 익혀 진심으로 정신을 보양하며 음식에 영양을 더하고 신성하고 영명한 사고를 널리 펼침으로써 무궁한 공업을 확립하십시오. 그러면 천하의 백성들은 다행스럽게도 의지할 곳이 있게 되고,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황자(皇子) 손화(和)는 어질고 효성스럽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덕행은 청명하고 풍부하므로 마땅히 일찍 세워 안배하여 백성들의 희망을 붙들어매야 합니다. 

제갈각(諸葛恪)의 재략은 넓고 통달하였으며, 기량은 시정(時)을 보필하는 직책에 임명할 만합니다. 장휴(張休)ㆍ고담(顧譚)ㆍ사경(謝景)은 모두 기민하고 식견이 있으므로, 궁궐로 들어오면 측근의 심복으로 임명하는 것이 마땅하고, 지방으로 나가면 수족으로 삼을 만합니다. 범신(范慎)과 화융(華融)은 일반 사람들보다 무용이 뛰어나고 웅장하고 절개가 있으며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습니다. 양도(羊茞)는 변설이 민첩하여 독자적으로 응대할 재능이 있습니다. 조현(刁玄)은 성정이 우수하고 넓으며, 지향하는 것은 도통(道)의 진의를 실천합니다. 배흠(裴欽)은 식견이 넓고 기억력이 있으며, 문채는 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장수(蔣脩)와 우번(虞翻)의 뜻과 절개는 분명합니다. 무릇 이런 여러 신하들은, 어떤 자는 조정의 신하로 임명해야 하고 어떤 이는 장수로 임명해야 하는데, 이들은 모두 시사(時事)에 밝고 법령을 분명하게 익혔으며, 신용을 지키고 도의를 견지하고 있으며, 빼앗을 수 없는 뜻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폐하께서 해와 달처럼 광채가 빛나고 신의 관리로 선발하여 안배시켜 저로 하여금 이들과 함께 정사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들의 정회를 상세히 알게 되었기에 감히 폐하께 아룁니다. 신이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현재 밖에는 일이 많고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으므로 응당 육군(六軍)을 면려하여 나아가 취할 것을 도모해야만 합니다. 군대는 사람들로 무리를 만들고, 이 무리들은 재화를 오물로 여깁니다. 신이 듣기로는, 군(郡)이나 현(縣)에는 황폐한 곳이 많아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하고 간사함과 환란이 싹트며, 이 때문에 법령은 복잡하게 늘어나고 형법은 더욱 가혹해진다고 합니다. 신은 정사를 잘하려면 백성들의 뜻에 순종해야만 하고, 법령은 시대의 추이와 함께 변화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진실로 장상(將相) 대신들과 그 시대에 알맞은 것을 자세하게 선택하고, 사람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며,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며, 노역을 적당히 조절함으로써 백성들의 희망에 순응해야 합니다. 육손(陸遜)은 당시의 정치에 있어서는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몸을 바쳐 나라를 걱정하고 마음을 다하여 공적인 일을 했으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 절개가 있습니다. 제갈근(諸葛瑾)ㆍ보즐(步騭)ㆍ주연(朱然)ㆍ전종(全琮)ㆍ주거(朱據)ㆍ여대(呂岱)ㆍ오찬(吾粲)ㆍ감택(闞澤)ㆍ엄준(嚴畯)ㆍ장승(張承)ㆍ손이(孫怡)는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에 통달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현재 알맞은 방법을 바쳐 진술하도록 하여 가혹하고 복잡한 정책을 제거하고 병사와 말을 아끼고 길러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5년 이후, 10년 이내에 먼 곳에 있는 자가 귀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자가 힘을 다하여 병기에 선혈을 묻히지 않고도 대사를 확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새가 죽으려고 하면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으려 하면 말이 선량하다.’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때문에 자낭(子囊)이 임종하기 전에 시정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남겼으며, 군자(君子)는 그가 충성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하물며 신 손등이 어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폐하께서는 저의 의견에 유의하여 듣고 취하십시오. 신은 비록 죽더라도 살아 있을 때와 같습니다. -

손등의 목숨이 끊어진 후에야 이 상소문이 보고되었다. 손권은 더욱더 슬퍼하였으며, 손등에 관한 말만 하면 눈물을 흘렸다. 이 해가 적오(赤烏) 4년(241)이다.

사경(謝景)은 그 당시 예장태수(豫章太守)를 맡고 있었는데, 슬픔을 이기지 못해 관직을 버리고, 자신을 탄핵하는 표를 올렸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는 태자(太子)를 수행하여 정사를 다스렸으므로 다른 관리와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는 궁궐 안에 있는 사자에게 그를 위로하도록 하고 다시 본래의 직책에 복직시켜 그를 군(郡)으로 돌려보냈다. 손등의 시호는 선태자(宣太子)라고 했다.

吳書曰:初葬句容,置園邑,奉守如法,後三年改葬蔣陵。

오서에 이르길 : 처음에 구용에 장사지내고 원읍을 설치하고는 항상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후 3년만에 장릉으로 개장하였다.

손등의 아들 손번(璠)과 손희(希)는 모두 요절했으므로 차남 손영(英)이 오후(吳侯)로 봉해졌다.

오봉(五鳳) 원년(254), 손영은 대장군(大將軍) 손준(孫峻)이 정권을 잡자 손준을 주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일이 발각되어 자살했으므로 봉읍은 취소되었다.

≪오력(吳歷)≫에서는 이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손화가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죽임을 당하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격분하고 탄식했다. 전사마(前司馬) 환려(桓慮)는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에 편승하여 장수와 관리들을 규합해 손준을 죽이고 손영을 세우기로 공모했다. 그러나 일이 발각되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손영은 사실 이 일을 알지 못했다.

사경(謝景)은 자가 숙발(叔發)이고 남양(南陽) 완현(宛) 사람이다. 그는 군(郡)의 태수로 있으면서 치적이 있었다. 관리와 백성들은 그를 칭찬하여 이전에는 고소(顧劭)가 있었고 이후에는 사경이 있다고 했다. 몇 년 후, 관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진수의 평: 손등(孫登)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고, 아주 아름다운 덕행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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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13:26:23 (*.148.5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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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0
16:07:17
(*.104.141.18)
본문에 주석이 색깔만 바뀌어서 들어가있던 점을 수정하고 한문주석을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6.05.29
17:30:29
(*.196.74.143)
손화에게 물려줄 생각이 있었다는 내용과 개장 관련 내용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6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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