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종전]]에서 분리


설후(薛)의 동생 설영(瑩)은 자가 도언(道言)이고, 처음에는 비부중서랑(祕府中書郎)으로 임명되었지만, 손휴(孫)가 즉위한 후 산기중상시(散騎中常侍)로 임명되었다. 몇 년 후, 질병으로 인해 사직했다. 손호는 처음에 좌집법(左執法)으로 임명되었다가 선조상서(選曹尚書)로 승진했으며, 태자(太子)로 세워졌을 때 소부(少傅)를 겸임했다.

건형(建衡) 3년(271), 손호는 설영의 부친 설종(綜)이 남긴 문장을 읽고 찬탄하였으며, 그리고 설영에게 명하여 이어서 짓도록 했다. 설영은 다음과 같은 시를 바쳤다.


이전의 조상들은   惟臣之先

옛날 한나라 관리로서   昔仕于漢

혁혁한 세상을 대대로 이어   奕世綿綿

자못 대관(臺觀)까지 올랐지만   頗涉臺觀

나의 아버지 설종에 이르러   暨臣父綜

어려운 시대를 만났다.   遭時之難

유씨 왕실은 통제력을 상실하고, 卯金失御

국가는 파괴되고 혼란스럽게 되었으니,   邦家毀亂

좋은 땅을 찾아 후사를 남기기를 바란다.

하늘은 그 마음을 열어

동남쪽에 의히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표류하며 떠돌다가

만족의 변방에서 곤궁에 빠졌었다.

대황제(손권)가 기업을 열어

먼 곳까지 은덕을 베풀었고,

특별히 부름의 명을 받아

더러운 진흙 속에서 나오게 되었다.

두건을 풀고 옷을 벗어버리고

관직을 받고 부절을 새겼다.

합포를 지키는 임무 맡아

바다의 끝에 있다가,

승진하여 경성으로 들어와

중추의 관직에 올랐다.

마른 고목이 다시 무성해지고

끊어진 후사는 계통을 회복했다.

미천한 데서 나와 귀하게 되는 것은

처음에 원했던 것이 아니다.

오직 두터운 총애와 예우에

마음속으로 만족한다.

다시 문황(황제 손화)을 세우고

동궁이라 부르자

곧 소부가 되어

영화는 더욱더 융성해졌다.

영명한 성사군(손호)은

덕망이 지극하고 겸손하고 고상하고

예우는 다방면으로 폈으며

정말 두텁고도 풍부하다.

애석하게 고인이 된 신하는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어도

넓은 은혜에 보답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버리고 갔다.

아! 나는 비천하여

오직 형과 동생이 있을 뿐이다.

다행히 태어나고 자라서

설종이 남긴 몸에 의탁하여

정원을 지나며 훈시를 받았으나,

완고한 어둠은 열기 어렵고

남긴 일을 완수할 수 없었으며,

뜻은 농경에 있었다.

어찌 알겠는가, 성명한 조정에

은택이 가득 흐르고 있음을,

이전 신하를 추기하고

완성시킬 자 없음을 아쉬워한다.

그들을 도와 발탁하여

특별한 영광을 준다.

설후는 천리를 더하고

명을 받아 남쪽으로 출정했는데,

깃발에는 의지가 갖추어져 있고

금 갑옷과 투구는 환성을 날린다.

신에 이르러 이처럼 비루하고

실제로는 무지하고 정녕 우매하지만

선친의 직책에 올라

인재 선발의 중추를 맡았고,

또 동궁소부로 임명되어

선친의 광휘를 이어 받게 되었다.

재능은 선친에 미치지 못하거늘

성은을 입어 부끄럽다.

하늘의 덕은 넓고 아름다워

문아함을 가장 귀중하게 여긴다.

옛 신하를 추도하여

남긴 것에 마음 담기를 희망했다.

어찌하여 어리석은 자손은

일찍이 닮은 점이 없었는가!

그의 옛날 총애를 바라보고

나의 우매함을 본다.

어찌 부끄러움을 참으며

내가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으랴.

아침 저녁으로 뒤척이며 불안해하고

마음에 새겨 스스로 비평한다.

부모 자식 형 동생이

몇 대에 걸쳐 은혜를 입어

죽어서는 풀을 묶어 보답하고

살아서는 몸을 바칠 것을 맹세한다.

설사 재가 되어 없어지더라도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리.


이 해, 하정(何定)이 성계(聖谿)를 뚫어 장강과 회수를 통하게 하자는 건의를 했다. 손호는 설영에게 명하여 1만 명을 인솔하여 가도록 했는데, 결국에는 큰 돌이 너무 많아 시공이 어려웠기 때문에 공사를 멈추고 돌아왔으며, 지방으로 나가 무창좌부독(武昌左部督)으로 임명되었다. 후에 하정이 주살되자, 손호는 성계의 일을 추적하여 조사하고 설영을 옥에 가두었다가 광주로 쫓아냈다. 우국사(右國史) 화핵(華覈)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신이 듣기로는 오제삼왕(五帝三王)은 모두 사관(史官)을 세워 공훈이 탁월한 자를 기록하여 그 명성을 영원히 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한나라 때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모두 이름이 한 세대의 위대한 재능을 덮었으며, 편찬한 것은 정미하고 오묘하여 육경(六經)과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오는 천명을 받아 남쪽 땅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대황제(大皇帝 : 손권) 말년, 태사령(太史令) 정부(丁孚)와 낭중(郎中) 항준(項峻)에게 명하여 오서(吳書)를 편찬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와 항준은 모두 사학적 재능이 없었으므로 그들이 편찬하여 지은 것은 기록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소제(少帝) 때 이르러서는, 다시 위요(韋曜)ㆍ주소(周昭)ㆍ설영(薛瑩)ㆍ양광(梁廣) 및 신하 다섯 명을 더 파견하여 과거의 일을 찾아 구하도록 했는데, 그들이 함께 산정한 것은 본말(本末)을 갖추었습니다. 주소와 양광은 먼저 죽었고, 위요는 황은을 입었지만 죄를 범했고, 설영은 지방으로 나가 장수가 되었다가 또 과실로 인해 유배되었으므로, 이 책의 편찬이 멈추게 되어 지금까지 편찬되었다고 보고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재능이 우매하고 열등하여 설영 등은 위해 보충하여 기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일 저에게 자료들을 엮어 완성하도록 한다면, 반드시 정부와 항준의 자취를 따를 것인데, 대황제의 공을 빠뜨려 당대의 융성함과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게 될까 두렵습니다. 설영은 학문이 넓고 그의 문장은 매우 오묘하여 동료들 가운데 설영을 으뜸으로 치고 있습니다. 현재 관리가 된 자들 중에는 비록 경학자시가 많지만 기술하는 재능이 설영만한 자는 적습니다. 이 때문에 간절히 나라를 위해 이 인재를 아끼는 것입니다. 실재로 최근에 이루어진 공을 이전의 역사서 끝에 놓으려고 합니다. 표를 올린 후, 저를 산 웅덩이 속에 묻는다고 하더라도 또 한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손호는 그래서 설영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고, 좌국사(左國史)로 임명했다. 오래지 않아, 선조상서(選曹尚書)이며 같은 군의 무위(繆禕)가 사견을 고집하며 바꾸지 않아 소인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형양태수(衡陽太守)로 좌천되었다. 그는 관직에 임명된 후, 또 직무상의 일로 인해 힐책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표를 올려 잘못을 시인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길을 따라가서 설영을 만났는데, 또 사람들에 의해 무위는 죄를 두려워하지않았으며, 많은 빈객을 설영의 집에 모이도록 청했다고 조정에 보고되었다. 그래서 무위는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며, 계양(桂陽)으로 유배당했다. 

설영은 광주(廣州)로 돌아가려고 했다. 설영이 광주에 도착하기 전에 불러서 돌아오도록 하여 복직시켰다. 이 당시 법령과 정무에는 오류가 많았고, 취한 정책은 복잡하고 가혹했다. 설영은 항상 편리하고 타당한 건의를 하고, 형법을 느슨히 하고 부역을 간단히 할 것을 진술함으로써 백성들을 구제하고 양육하였다. 그의 의견 가운데 어떤 것은 시행되었다. 광록훈(光祿勳)으로 승진했다.

천기(天紀) 4년(280), 진(晉)나라 군대가 손호(皓) 정벌에 나섰다. 손호는 사마주(司馬)ㆍ왕혼(王渾)ㆍ왕준(王濬)에게 편지를 받들어 항복을 요청하도록 했는데, 그 투항 편지는 설영이 만든 것이다. 설영이 낙양(洛陽)에 도착하자, 진나라 황제는 특별히 먼저 불러 보고 장려했으며,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했다. 설영이 질문에 대답하거나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모두 조리가 있었다.

간보干寶의 진기晉紀에서 이르길 : 무제武帝가 조용히 설영薛瑩에게 묻길 : “손호가 망한 이유는 무엇이오?” 설영이 대답하길 : “귀명후歸命侯 신하 손호가 오에서 주군일 때, 소인을 가까이하고, 형벌을 함부로 가하며, 대신과 대장은, 가까이 여기며 신임하는 바가 없어, 사람들은 각각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각자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못했으니, 위망의 발단은, 진실로 이로 인한 것입니다.” 황제가 마침내 오의 선비 중 생존하거나 죽은 이들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물으니, 설영은 각각 있는 그대로의 사정과 형편을 근거로 대답하였다.  

진나라 태강(太康) 3년(282)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신의(新議)라는 8편의 저작이 있다.

왕은(王隱)의 진서(晉書): 설영의 아들 설겸(薛兼)의 자는 영장(令長)이다. 청렴하고 기우(器宇: 외모. 풍채. 용모)와 자망(資望: 자질(資質)과 인망(人望))이 있어서, 상국(上國)처럼 생겨서 오나라 사람 같지 않았다. 이궁(二宮)의 승상장사(丞相長史)를 역임했다. 원제(元帝)가 이어받자 단양윤(丹楊尹)이 되고 상서(尚書)가 되었으며,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다. 설종에서 설겸(薛兼)까지 삼대가 동궁에서 부(傅)를 역임했다.

- 평하여 말한다.

장굉(張紘)은 문리가 통하고 생각이 바르며, 이 시대의 영재이다. 손책(孫策)이 장소(張昭)에 버금가게 그를 대우했던 것은 진실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엄준(嚴)ㆍ정병(程)ㆍ감택(闞)은 한 시대의 유림이었다. 엄준이 자신의 영달을 버리고 옛 친구를 구한 것 또한 뛰어난 것이 아닌가! 설종(薛綜)의 학문과 지식은 전범으로 칭해졌고, 오(吳)나라의 훌륭한 신하가 되었다. 설영이 부친의 사업을 계승한 것에 이르면 확실히 선친의 풍모가 있었다. 그러나 잔혹하고 포학한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군자들의 의심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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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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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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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0
14:48:02
(*.104.141.18)
설영이 설명하는 손호가 망한 이유에 대한 주석은 처사군님의 번역으로 원글 주소는 http://blog.naver.com/kyspert/110187814907 이곳이며 CCL에 따라 이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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