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孫和)는 자가 자효(子孝)이고 손려의 동생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왕씨(王)에게 총애를 받았으므로 손권의 사랑을 받았다. 14세 때에는 그를 위해 궁위(宮衛)를 두었고, 중서령(中書令) 감택(闞澤)으로 하여금 경전과 육예(藝)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였고 선비들에게 예의를 갖추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들었다.


적오(赤烏) 5년(242), 그는 태자(太子)로 세워졌으며, 당시 19세였다. 감택이 태부(太傅)로 임명되고, 설종이 소부(少傅)로 임명되었으며 채영(蔡穎)ㆍ장순(張純)ㆍ봉보(封보)ㆍ엄유(嚴維) 등은 모두 곁에서 배행하며 따랐다.


吳書曰:和少岐嶷有智意,故權尤愛幸,常在左右,衣服禮秩雕玩珍異之賜,諸子莫得比焉。好文學,善騎射,承師涉學,精識聰敏,尊敬師傅,愛好人物。穎等每朝 見進賀,和常降意,歡以待之。講校經義,綜察是非,及訪諮朝臣,考績行能,以知優劣,各有條貫。後(諸葛豐)〔諸葛壹〕偽叛以誘魏將諸葛誕,權潛軍待之。 和以權暴露外次,又戰者凶事,常憂勞憯怛,不復會同飲食,數上諫,戒令持重,務在全勝,權還,然後敢安。張純字元基,敦之子。吳錄曰:純少厲操行,學博才 秀,切問捷對,容止可觀。拜郎中,補廣德令,治有異績,擢為太子輔義都尉。


오서에 이르길 : 손화는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므로 손권이 더욱 총애하여 항상 주변에 있게 하면서 의복의 등급이나 하사품 등이 여러 아들과 비교할 수 없었다. 문학을 좋아하고 말타고 활쏘는 것을 잘했으며 스승을 따라 배우되 견식이 정밀하고 명민하였고 스승을 존경하고 인물을 애호하였다. 채영 등이 매번 조정에 나가 하례를 드릴 때 손화는 항상 뜻을 낮춰 기쁘게 대접하였다. 경의를 강론하면서 시비를 종합하여 고찰하고 조신들을 방문해 자문을 구하는 와중에 행동과 능력을 살펴서 우열을 알고 각자 계통이 있었다. 이후에 제갈일이 가짜 반란을 일으켜 이로써 위나라 장군 제갈탄을 유인하고자 하였는데 손권이 군대를 잠복시키고 기다렸다. 손화는 손권이 바깥에서 작전을 하고 또한 전쟁은 흉한 일이라 항상 걱정하여 다시는 같이 모여서 밥을 먹지 못할까 슬퍼하였으니 수차례 간언을 올려 움직임을 신중히 하여 완전히 이길 수 있는 전투에 힘쓰라고 하였다. 손권이 돌아오고 나서야 감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장순의 자는 원기(元基)로 장돈()의 아들이다.    


오록에 이르길 : 장순은 어려서부터 행동을 연마하여 공부가 넓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절실히 묻고 민첩하게 대답하여 행동이 가히 볼 것이 있었다. 낭중에 임명되고 광덕령에 보해졌는데 다스리는데 특수한 업적이 있어 태자보의도위로 탁용되었다.


이 당시는 담당 관리가 안건을 만들어 그 일의 집행 여부에 관해 질문하는 일이 많았다. 손화는 이것은 간사하고 요망한 사람들이 일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뜻을 섞어서 재앙을 일으킨 마음을 싹틔우게 하는 것으로 오랫동안 지속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두절되어야 함을 나타냈다. 또 도독(都督) 유보(劉寶)가 서자(庶子) 정안(丁晏)을 고발하였고, 정안 또한 유보를 고발했다. 손화는 정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인(文)과 무인(武)으로 맡은 직책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오. 틈이 벌어져 가리는 부분을 당겨 끌어내며 서로 위해하려고 기도하면서, 어찌 복이 있겠소?”

그리고는 두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하여 두터운 왕래를 하도록 했다. 손화는 항상 당대의 재학지사들은 응당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무예를 훈련하고 익혀서 그 시대의 사무를 주제해야 되는데, 단지 바둑두는 것으로 교유하여 사업을 방해하므로 나아가 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에 여러 관료들이 그의 연회에 출석하여 바둑에 관해 논의할 때도 손화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것은 일을 훼방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실제 쓰임에는 이익이 없으며, 정력을 수고롭게 하고 사고력을 손상시키지만 결국 이루는 바가 없으며, 덕행에 매진하고 공업을 닦아 공적을 쌓는 방법이 아니다. 그리고 뜻있는 선비들은 시간을 아끼고 정력을 아끼며, 군자가 최대로 흠모하는 자는 높은 산과 큰 길처럼 천하 만인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그 대열에 들지 못함을 치욕스러워 한다. 천지는 장구하고 인간은 그 사이에 있으므로 광음이 틈 사이를 지나는 것 같다는 비유가 있게 되었다. 사람은 한 번에 늙고, 영화는 반복되지 않는다. 무릇 사람의 병폐는 인간의 정욕을 끊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만일 진실로 이익이 없는 정욕을 끊어 도덕과 인의의 길을 받들 수 있고, 긴급하지 않은 사무를 버리고 공업의 기초를 닦을 수 있다면, 사람의 명예와 품행에 있어서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감정에 유희나 오락이 없을 수는 없지만, 유희나 오락의 오묘함은 또한 술 마시고 연회를 열어 금슬을 타고 책을 읽으며 활쏘기나 말타기를 하는 사이에 있는 것이지, 하필 바둑은 둔 연후에 즐거워하겠는가?”

그리고는 곁에서 모시고 있는 자들 가운데 여덟 명에게 각기 바둑에 관한 의론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보충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중서자(中庶子) 위요(韋曜)는 물러나 논(論)하여 상주하였고, 손화는 그것을 빈객들에게 보여주었다. 당시 채영(蔡穎)이 바둑을 좋아하여 그의 관서에서 직접 일하는 자들 중 그에게 바둑을 배우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 방법으로 그를 풍자한 것이다.

이 이후 왕부인(王夫人)과 전공주(全公主) 사이에 틈이 생겼다. 손권은 일찍이 질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으므로 손화가 종묘에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손화의 비(妃)의 숙부인 장휴(張休)가 종묘 근처에 살고 있었으므로 손화를 초청하여 머물도록 했다. 전공주는 사람을 시켜 은밀히 감시하도록 하고는, 태자가 종묘 안에 있지 않고 오로지 비의 집으로만 가서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또 왕부인은 황상이 질병으로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다고 말했다. 손권은 이 일로 인해 노여워했다. 왕부인은 근심하다 죽었고, 손화의 총애는 점점 줄어들어 폐출될 것을 두려워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육손(陸遜)ㆍ오찬(吾粲)ㆍ고담(顧譚) 등은 적자와 서자의 이치에 관해 여러 차례 진술하여 태자의 지위는 정리(理)에 따라야지 탈취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전기(全寄)와 양축(楊竺) 등은 노왕(魯王) 손패(霸)의 무리가 되었고, 이들의 모함은 나날이 심해져 갔다. 오찬은 결국에는 하옥되어 주살당했고, 고담은 교주(交州)로 쫓겨났다. 손권은 몇 년 동안 이 일을 유예시켰지만, 이후 마침내 손화를 유폐시켰다. [주]


[주] 은기통어(殷基通語)에서 이르길: 애초에 손권이 손화를 태자로 삼고, 손패를 노왕으로 삼고, 그들에게 같은 궁궐에 살면서, 그들의 각각의 예법에는 따로 구별을 두지 않았다. 그러자 많은 대신들이 태자와 국왕은 마땅히 위아래의 서열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예법을 다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때문에 따로 궁궐을 나눠 살게 했는데, 이때부터 분열이 시작되었다. 시어(侍御)와 빈객(賔客)들이 두패로 갈라지고, 나중에는 대신들까지 두패로 갈려졌다.

승상(丞相) 육손(陸遜), 대장군(大將軍) 제갈각(諸葛恪), 태상(太常) 고담(顧譚), 표기장군(驃騎將軍) 주거(朱據), 화계태수(會稽太守) 등윤(滕胤), 대도독(大都督) 시적(施績), 상서(尚書) 정밀(丁密) 등이 예법을 내세우며, 태자를 따랐고, 표기장군(驃騎將軍) 보즐(步隲), 진남장군(鎮南將軍) 여대(呂岱), 대사마(大司馬) 전종(全琮), 좌장군(左將軍) 여거(呂據), 중서령(中書令) 손홍(孫弘) 등이 노왕(魯王) 편을 들었고, 이곳 저곳의 장군 관료 대신들이 둘로 나누어졌다.

손권은 이를 크게 우려하여 시중 손준(孫峻)에게 명하여 

"아들들이 이렇게 서로 싸우고, 신하들도 나누어지니, 장차 원소의 원씨(袁氏)의 집안 꼴이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겠소. 자제들이 화목하지 않으면 신하들이 나뉘어져서 장차 원씨와 같이 실패함이 있게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만약 한 사람을 세놓게 된다면 어찌 혼란이 일어나지 않겠소?"

신 배송지가 여기건대 원소, 유표는 원상, 유종을 현명하다고 여겨, 본래 후사를 전할 뜻을 가져서, 손권이 이미 손화를 세우고서도 다시 손패를 총애하여, 앉아서 화란을 일으킬 실마리를 낳고, 스스로 집안의 재앙을 이룬 것과는 다르니, 이를 원소, 유표에 견주면, 어리석고 사리에 벗어남이 심합니다. 보즐步隲은 도덕과 기개가 저명하여, 오의 훌륭한 신하였으나, 손패에게 아부하고, 섬김이 양축楊笁과 같았으니, 어째서겠습니까? 손화가 이미 정당한 자리에 있어, 적자와 서자의 본분이 확정돼, 설령 재주와 덕행이 뛰어나지 못해도, 오히려 법도는 서자에 치우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손패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었고, 손화는 대를 이을 자식이었으니 어떻게 해야 됐겠습니까? 대저 마음이 간사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진 사람도, 어찌 모든 것에서 선함이 없겠습니까? 다만 한 번이라도 선하지 못함을 행하면, 많은 아름다운 덕행도 모두 없어질 뿐입니다. 보즐에게 만약 이러한 일이 있었다면, 그 나머지는 살필 가치도 없습니다! 여대 呂岱, 전종全琮의 무리는, 대략 논할 가치도 없을 뿐입니다.

이때 표기장군(驃騎將軍) 주거(朱據)ㆍ상서복야(尚書僕射) 굴황(屈晃)은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인솔하여 머리에 진흙을 바르고 스스로 결박하고는 연일 궁궐로 와서 솬화를 석방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손등은 백작관(白爵觀)에 올라 이 모습을 보고는 그들을 매우 증오하였으며, 주거와 굴황 등에게 쓸데없는 일을 찾는다며 질책했다. 손권이 손화를 폐하고 손량을 세우려고 하자, 무난독(無難督) 진정(陳正)ㆍ오영독(五營督) 진상(陳象)이 편지를 올려, 진헌공(晉獻公)이 신생(申生)을 죽이고 해제(奚齊)를 세웠기 때문에 진나라가 소란스러워진 예를 인용하여 말했고, 주거와 굴황 또한 간곡히 간언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손권은 매우 노여워하였고, 진정(正)ㆍ진상(象)의 일족을 모두 주살하도록 하고 주거와 굴황은 궁궐로 끌어다가 곤장 백 대를 때리도록 했다. [주]

[주] 굴황은 궁궐로 끌려 들어가자, 직접 손권에게 간언하여 이렇게 말했다. 

“태자는 어질고 총명하며, 온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분명하게 들어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세 방면의 정권이 버티고 있는데, 태자를 바꿔 사람들의 마음을 낳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 성스럽게 생각하십시오. 늙은 신하를 비록 죽더라도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고개를 떨구고 피를 흘렸지만, 말의 어기만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손권은 굴황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추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손호가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의 복야 굴황은 사직을 바로잡으려는 뜻이 있어 충심으로 간언하면서 자신을 버렸다. 굴황의 아들 굴서(屈緖)를 동양정후(東陽亭侯)로 봉하고, 동생 굴간(屈幹)과 굴공(屈恭)을 입의도위(立義都尉)로 삼으라’

라고 했다.

굴서는 나중에 상서복야까지 관직이 올라갔다. 굴황은 여남(汝南)사람이다. 見胡沖荅問

오서(吳書): 장순(張純)도 극렬히 손권에게 간하였다가 처형되어 시장바닥에 시체가 버려졌다.

결국 손화는 고장(故鄣)으로 유배되었고, 신하들 가운데 이 일에 연루되어 간언을 올리다가 주살되거나 좌천된 자는 수십 명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억울하게 됐다고 느꼈다.

오서(吳書): 손권은 병들어 누워있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서 손화를 다시 불러와 태자로 삼을 생각이었으나, 전공주(全公主)와 손준(孫峻), 손홍(孫弘) 등이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그만 두었다.

태원(太元) 2년(252) 정월, 손화를 남양왕(南陽王)으로 봉하고 장사로 보냈다. [주]

[주] 손화(孫和)가 장사로 가는 도중에 무호를 지날 때, 손화가 타고 있는 배의 돛에 까치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옛날 관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걱정하고 참담해졌다. 돛 끝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이것은 손화가 오랫동안 안정되지 못할 징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이는 ≪시경≫<작소(鵲巢)>의 시에 있는 ‘덕행을 쌓고 공을 쌓아 작위에 이르렀다’라는 문구를 말하고, 지금 남양왕은 최고의 덕을 갖추고 있고 행동이 무성하며, 또 봉국을 받았으므로 신령스런 무리로써 사람들에게 고해 알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4월, 손권이 세상을 떠나고, 제갈각(諸葛恪)이 정권을 잡았다. 제갈각은 손화의 비(妃) 장씨(張)의 외숙이다. 손화의 비는 황문(黃門) 진천(陳遷)을 건업(建業)으로 가도록 하여 궁궐에 상소를 올리고, 아울러 제갈각에게 안부를 묻도록 했다. 진천이 달려왔을 때, 제갈각은 진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위해 비에게 전하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뛰어넘게 해줄 것이라고 하시오.”

제갈각의 이 말은 누설되었다. 또 제갈각은 천도(都)하려는 뜻이 있어 무창궁(武昌宮)을 손질하였으므로, 민간에서 어떤 이는 그가 손화를 영접하려고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갈각이 주살되자, 손준(孫峻)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손화의 옥새와 인수를 빼앗았으며, 손화를 신도(新都)로 옮기고, 또 사자를 보내 죽음을 내렸다. 손화는 비 장씨에게 이별의 말을 했다. 장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일이든 흉한 일이든 간에 저는 당신을 따라야만 합니다. 끝까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장씨도 역시 자살했다. 사람들은 나라를 들어올릴 정도로 슬퍼했다.

손휴(孫休)가 즉위하자, 손화의 아들 손호(皓)를 오정후(烏程侯)로 봉하고 신도로부터 본래의 봉국으로 돌아오도록 하였다. 손휴가 세상을 떠나자 손호가 황제(皇帝)로 즉위했다. 그해, 아버지 손화를 추증하여 시호를 문황제라고 했으며, 명릉(明陵)으로 이장하고 원읍(園邑) 2백 호를 배치했으며, 영(令)과 승(丞)을 두어 받들도록 했다. 다음 해 정월, 또 오군(吳郡)과 단양(丹楊)의 아홉 현을 분할하여 오흥군(吳興郡)을 만들었으며 오정(烏程)에 관소를 두고 태수(太守)를 배치하여 사계절마다 제사를 받들었다. 담당 관리는 마땅히 경읍(京邑)에 묘를 세워야 한다고 상주했다.

보정(寶鼎) 2년(267) 7월, 수대장(守大匠) 설우(薛珝)에게 능묘 옆에 제사를 담당하는 당(堂)을 만들어 세우도록 하고 청묘(清廟)라고 했다. 12월, 수승상(守丞相) 맹인(孟仁)과 태상(太常) 요신(姚信) 등을 보내 관료와 중군(中軍)의 보병과 기병 2천 명을 준비하여 임금의 시신을 태우는 수레로, 동쪽 명릉으로 가서 손화의 영혼을 맞이하도록 했다.


吳書曰:比仁還,中使手詔,日夜相繼,奉問神靈起居動止。巫覡言見和被服,顏色如平(生)日,皓悲喜涕淚,悉召公卿尚書詣闕門下受賜。


오서에 이르길 : 맹인이 돌아오는 때에 이르러 조정의 사절이 조서를 들고 주야를 이어 신령의 기거, 동지를 살폈다. 무당이 말하길 손화를 봤는데 의복을 입고 안색이 살아있을 때와 같다고 하니 손호가 슬픔과 기쁨에 눈물을 흘리며 공경, 상서를 불러 궐문의 아래에 이르러 하사를 받도록 하였다.


손호는 맹인을 불러 보고 직접 정원으로 정중히 전송했다. 상여(輿)가 도착하려고 할 때, 승상(丞相) 육개(陸凱)를 시켜 세 가지 희생인 소ㆍ양ㆍ돼지로 근교에서 제사를 올리도록 했으며, 손호는 금성(金城) 밖에서 노숙했다. 다음날, 동문 밖에서 상여에 배례를 했다. 그 다음날, 청묘에서 배알하고 제사를 바쳤으며 슬피 울었다. 이레가 되었을 때는 이미 제사를 세 차례 지냈고 창기들이 밤낮으로 연주하여 즐겁게 했다. 담당 관리가 상주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제사는 너무 빈번하지 않아야 합니다. 빈번하면 장중하지 않게 됩니다. 마땅히 예의로써 감정을 끊어야 합니다.

이 말이 있은 연후에 중지했다. [주]

[주] 오력에 이르길: 손화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손호(孫皓), 손덕(孫德), 손겸(孫謙), 손준(孫俊)으로 손휴가 제위에 오르자, 손덕은 전당후(錢唐侯)에 봉하고, 손겸은 영안후(永安侯), 손준은 기도위(騎都尉)에 봉하였다. 손호는 ---264년에 황제에 오르고, 265년에 무창(武昌)으로 수도를 옮기고--- 266년에 무창(武昌)에 황제로 있을때, 오흥군(吳興郡)의 시단(施但)이라는 사람이, 자기 백성들이 고달파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1만여명의 백성들을 이끌고, 손호의 이복동생인 손겸(孫謙)을 협박하여, 장차 말릉(秣陵: 건업(建業))으로 가서, 그곳에서 손겸을 황제로 세울려고 했다.

30리가 남았을때 길일(吉日)을 선택해, 시단은 사자를 정고(丁固)와 제갈청(諸葛靚)에게 파견하여, 손겸의 명령을 내렸다. 제갈청은 즉각 그 사자를 목베어 죽였다. 시단은 곧 앞으로 9리를 나아갔고, 정고와 제갈청이 출격하여 시단을 격파했다. 시단의 병사들은 벌거숭이에다 갑옷도 없어서, 전투에 임하자마자 모두 도망쳐 버렸다. 손겸은 소레에 혼자 남아고 곧 사로 잡혔다. 정고는 감히 그를 죽일 수 없어서, 손호에게 보고했고, 손호는 그를 독살하였고, 그의 모자 모두 죽였다. 손준(孫俊)은 장승(張承)의 외손자였는데, 총명하여 말재주도 뛰어나, 멀리서까지 칭찬이 자자했으나, 손호는 그도 죽였다.

진수의 평: 손려(慮)와 손화(和)는 모두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고 엄격하게 자신을 연마했지만, 어떤 사람은 단명하여 일찍 죽었고, 어떤 사람은 부득이 죽게 되었으니, 애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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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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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6
14:57:22
(*.0.203.140)
얼라 배주 추가했는데 리플 안 달았네

코렐솔라

2013.09.09
19:09:08
(*.166.245.166)
손패 디스하는 것은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75742270

코렐솔라

2016.05.29
17:27:17
(*.196.74.143)
오서에 담긴 손화와 장순에 대한 내용과 손호가 눈물 흘렸다는 내용은 dragonrz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6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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