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지인이의 블로그 , 게으른 사냥꾼님의 이글루 알토란 삼국지, dragonrz님의 블로그


[[최염전]]에서 분할


공융(孔融)은 자가 문거(文舉)이다.


속한서에서 이르길: 공자의 20대 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공상(孔尚)은 거록태수(鉅鹿太守)였고, 아버지 공주(孔宙)는 태산도위(太山都尉)였다.


어려서 유별난 재능이 있었다. 당시에 하남윤(河南尹)이었던 이응(李膺)은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으므로 그의 문하에는 많은 빈객들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당대의 영웅이나 현자, 또는 가문 등 당세에 이름나지 않은 집안의 자손들은 방문하지도 못했다. 공융은 그때 열살 정도였는데, 이응이라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서 이응의 문도가 되려고 했다. 이응의 집에 도착한 공융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군(李君)의 가문과 통했던 사람의 자손이오.”


이응이 공융을 만나서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고명하신 조상님께서 일찍이 나와 교제를 하신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저의 선군이신 공자와 군의 조상이신 이노군(李老君)께서는 덕과 의를 나란히 하셨으며, 함께 사우로 지내셨습니다. 그러니 저 공융과 군은 대대로 통하는 집안이었습니다.”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기이한 동자라고 했다. 태중대부 진위(陳煒)가 나중에 오자 같이 앉아 있던 사람이 그 사실을 알렸더니 진위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영리하다고 커서까지 반드시 그렇겠는가?”


공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군께서도 어렸을 때 총명했겠습니다.”


이응은 크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명하고 장대하니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


산음(山陰) 출신인 장검(張儉)은, 올곧은 성품 때문에, 중상시 후람(侯覽)으로부터 밉상을 받고 있었다. 후람은 간장(刊章)을 파견하여 주군(州郡)의 관리들에게 장검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장검과 공융의 형 공포(孔褒)는 친구였다. 장검은 공포를 찾아왔다. 공포가 외출을 하고 없어서 장검은 공융이 16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장검은 그 사실을 공융에게 알리지 않았다. 공융은 장검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지금 집에 계시지 않으니, 제가 혼자서 군을 위해 주인 노릇을 하며 대접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장검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다. 나중에 그 사실이 드러나자 국상(國相)은 몰래 명을 내려 잡아들이라고 했다. 장검이 도주하자 공융과 공포가 대신 감옥에 갇혔다. 공융은 말했다.


“집안으로 받아들여 숨겨 준 것은 저이니 제가 벌을 받겠습니다.”


“나에게 도움을 바라고 왔으니 죄는 나에게 있지 아우의 잘못은 아니다. 당연히 내가 벌을 받아야지.”


형제가 서로 죽으려고 다투자, 군현에서는 어떻게 처리를 할지 몰라서 상부로 보고했다. 상부에서는 공포에게 죄를 물으라는 조서가 내려왔다. 이 일로 멀리까지 공융의 명성이 자자했다.


평원(平原) 출신인 도구홍(陶丘洪), 진류(陳留) 출신인 변양(邊讓)은 공융과 더불어 인재로 이름을 날렸으며, 나중에 함께 관직으로 진출했다.


공융은 논리를 전개하거나 이치를 따지는 측면에서는 변양 등에 비해 부족했지만, 창의성과 박학에서는 그들보다 뛰어났다.


사도대장군(司徒大將軍)이 그의 재능을 보고 불렀고, 북군중후(北軍中候)가 되었으며, 호분중랑장(虎賁中郎將), 북해상(北海相)이 되었는데 이때가 28살이었다.


황건의 잔당이 모두 격파되고 성읍이 수복되자 학교와 상서(庠序)를 세우고 현명한 인재를 천거하여 유학자들이 세상에 진출하도록 했다.


팽구(彭璆)를 방정(方正)으로, 병원(邴原)을 유도(有道)로, 왕수(王修)를 효렴(孝廉)으로 추천했다. 고밀현(高密縣)에 고하여 특별히 정현(鄭玄)을 위한 마을을 하나 세워서 정공향(鄭公鄕)이라 부르기로 했다.


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방을 떠돌다가 죽은 사족들을 모두 나무로 만든 관에 넣어서 장례를 올려 주었다. 군민들 가운데 효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가 일찍 죽은 사람이 있으면 공융은 자신이 그를 돌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곧 현에서 사당을 지어주도록 했다. 현자에 대한 그의 예는 이와 같았다


군(郡)에 있은 지 6년만에 유비(劉備)가 영청주자사(領靑州刺史)로 삼아 달라는 표를 올렸다. 건안 원년에 헌제는 공융을 불러서 장작대장(將作大匠)이 임명했다가 소부(少府)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 조회를 할 때마다 그는 정론을 펼치며 의견을 주도했으며, 여러 경대부들도 대부분 그것을 인정했다.


사마표의 구주춘추에서 이른다 : 공융(孔融)은 북해에 있었는데 스스로 지혜와 능력이 우수하고 풍부하여, 재능이 넘처 세상에 이름남이, 당시 호걸과 준걸들이 모두 미치지 못한다 여겼다.  또 스스로 큰 뜻을 자부하였으며, 거기다 군을 들어 무력을 뽐냈고, 뭇 현인들과 공을 다투었으며, 해대에 뿌리를 내리고 한사코 평군군수로 가려하지 않았고, 방백으로 일하며, 정기적인 모임에만 나갈뿐 이었다.


그리고 그 임용에, 유별남을 좋아하고 다른곳을 취하는, 모두 경박한 재주였다.  단지 옛 일을 살피는 선비로 공경함을 가장할뿐, 비록 예는 갖췄으나 국정을 논하지는 않았다. 고밀의 정현을 정공이라 칭하며 자손의 예를 고집했다. 고담, 교령에 이르러서만 감각들이 차고 넘쳤으며 말투는 온아하고 가히 감상하고 욀줄 알았다. 일을 논하고 사실을 생각할때, 자세히 행하지 못했다. 단지 일을 끌어다 망라하는데 능할뿐, 그것을 스스로 처리하는데 심히 소홀했다. 조세와 부역을 적게 보냈으며, 하루 아침에 다섯차례 독우를 죽였다. 간사한 백성과 더러운 관리가 조시에서 난리를 피어워도 또 다스리지 못했다.

유주의 정병이 난을 일으며 서주에 이르러 병이 성 아래에 닿으니 전국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융이 곧바로 나서며 말하기를 명령에 다른 뜻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별교와 밤에 유주를 습격하기로 모의하여 유주군을 패배시키고, 그 무리를 전부 점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배반하여 도망쳤다.

황건의 장수가 도착했을 때, 융은 순주를 크게 마시고 친히 말에 올라 내수의 위에서 막아섰다. 도적은 상부에 영을 내려 융과 서로 맞서게 하고 양 날개는 물을 통과하여 직접 치성에 도달했다. 성이 무너지자 융은 들어갈 수 없었고, 돌려서 남현에 도착했은데 좌우가 조금 돌어섰다. 해를 이어 뒤집어지는 일을 이룰 수 없었고, 이에 사경을 보장하지 못했기에 군을 버리고 달아났다. 후에 서주에 도착하자 북해상으로 돌아와 령 청주자사로 군의 북방 변경을 다스렸다. 산동을 귀부시키고 밖으로 요동과 맞붙어 군사의 이득을 얻고자 하였으며, 한 구석에 홀로 기초를 세워 함께 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조, 원, 공손이 모두 함께 밀접했는데, 전사는 수백을 채우지 못했고, 곡식은 만두가 되지 않았다. 왕자법, 유공자는 우기길 잘하고 재주는 작은데 마음속 깊이 믿었다. 좌승조, 유의손은 청렴하고 뛰어난 선비였는데, 자리를 갖췃을 뿐 말처럼 재주를 사용할  수 없었다. 승조는 융에게 국경의 나라에 의탁하기를 권했는데 융은 듣지 않고 죽였다. 의손은 포기하고 떠났다. 원담의 공격에 당함에 따라, 봄부터 여름까지, 성은 작고 적은 무리졌으며, 유시는 비오듯 집중되었다. 이에 융은 자리에 기대어 독서하고 의논하며 태연자약했다. 성은 부서지고 무리는 죽었으며 가족은 담의 포로가 되었다.


장번한기(張璠漢紀)에 이르길: 공융은 군에서 8년있었는데,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황제가 허도에 있었는데, 의복제도를 간략하게하자고 제의했고. 조조가 금주령(禁酒)을 내리자 공융이 편지를 써서 조롱했다.


"하늘에는 주기(酒旗)의---진서 (전문지)에 의하면 주기는 북두칠성의 북쪽에 있는 17개의 별인 헌원의 오른쪽 모서리 남쪽 방향의 세별을 술집 앞에 세우는 깃발인 주기라 하였는데, 주막의 깃발이다. 주연에서 음식을 제공한다고 하였다--- 별이 있고, 땅에는 주천(酒泉)이라---주천은 지금의 감숙성의 주천이다--- 이름지은 군들이 여럿이 있고, 사람에게는 술을 알 수 있는 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확실히 술이 나라를 멸한 것은 있습니다만, 그러면 왜 폐하는 여자를 금지하지 않습니까.주왕의 예를 아시는 바지요?」


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늘에는 주기지성(酒旗之星)이 있고 땅에는 주천군(酒泉郡)이 있으며 사람들은 술의 덕을 아름답다 칭찬합니다. 그러므로 요(堯) 임금도 천종(千鍾)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성스러움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걸주(桀紂)가 색을 좋아해 나라를 망하게 했는데 지금 영을 내려 혼인을 금지시키시지요.”


태조는 외부적으로는 공융에 너그러운 척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끙끙 앓고 있었다. 어사대부 치려(郗慮)가 이것을 알고 궁융을 면직시킨다. 그후 1년동안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지내고, 집에서 머물면서 세력을 잃었다. 이때 많은 빈객들이 공융집을 가득채웠는데, 모두 드나들었는데, 항상 그는 탁식하며 말했다.


"조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떨어지지 않으니 아무 걱정이없다"


했다. 병사 중에서 채옹(蔡邕)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에게는 항상 술을 따라주면서 같이 앉아서


"옛 신하들은 비록 없지만, 항상 그들의 옛 법은 남아있다".


그 선비를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속한서(續漢書)에서 이르길: 태위 양표는 원술과 사돈관계였고, 워술은 황제를 칭하려 하였으므로, 태조와 양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양표를 붙잡아 죽일려고 했다. 공융이 이 소리를 듣고 조복을 입지도 않고 태조를 만나서 말했다.


"양공은 4대에 걸쳐 밝고 바르게 천자를 섬겨 그 덕망을 모두가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주서(周書)는 "부자형제까지 죄는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좌전(左傳)이 말한다:「강고(康誥)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으며, 형이 아우를 우애하지 않고, 아우가 형을 받들지 않더라도, 그 죄는당사자에서 그치고 부자와 형제까지 미치지 않는다. 父不慈, 子不祗, 兄不友, 弟不恭, 不相及也. 』」 지금 원술 때문에 양공까지 죄를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주역에는 적선여경(積善餘慶), 즉 덕행(德行)을 많이 행한 집안은 그 자손(子孫)들이 그 덕을 누리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양표가 하옥되었다는 소리를듣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 귀를 위심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그것은 국가의 일이지, 내가 알바 아니오 (죄가 있고 없고는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오.)"


공융이 말했다. (번역자씀: 많이 첨가함)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나라 시대에 창업주이신 무왕(武王)이 귀국한 지 2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성왕(成王)이 등극 하고 무왕의 아우님이신 주공(周公)께서 섭정을 하셨습니다. 주공께서는 당신의 아우님인 소공(召公)과 의논하셔서 정사를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열 살도 안된 어린 성왕이 소공을 죽였다고 한다면, 주공의 입장에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천하의 대신들과 선비들 중에서 [纓緌搢紳之士] 명공(조조)을 우러러 보면서 따르는 자들은, 공의 총명(聰明)과 인지(仁智)로서, 한나라의 조정을 도와가며 다스리고 [輔相], 바른 자들을 천거하고 [ 舉直], 요상한 것을 버리고[厝枉] 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고[無辜]한 사람을 느듣없이 죽이는데[橫殺], 만약에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듣는다면, 도대체 누가 명공을 따르겠습니까?[解體: 흩어지다] 공융은 노국(魯國) 남자인데, 내일 옷을 벗고 되돌아가서, 두번 다시 조정에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조조도 어쩔 수 없이, 양표를 풀어주라고 하였다.


씨춘추에서 이르길: 원소가 패하자,공융은 태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무왕은 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妲己)를 주공에게 주었습니다.” //조비가 원희의 처를 가로챈 것을 비아냥


그러나 조조는 깨닫지 못했다. 조조는 나중에 그 사실이 어느 경전에서 나왔느냐고 물었다. 공융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랬을 것 같았다고 대답했다. 건안 13년(208년), 손권(孫権)의 사자에게 조조를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는 발언을 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공융은 처자와 함께 처형당했다. 공융에게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두 명의 아이가 바둑을 두고 있던 도중에 아버지가 체포당했으나, 두 명 모두 꿈쩍도 안했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아버님이 잡혀가는데, 어째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는 겁니까?」


라고 묻자,


「둥지가 무너지면, 알만 깨지지 않고 남아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라고 답했다. 그것을 보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遂俱見殺。融有高名清才,世多哀之。太祖懼遠近之議也,乃令曰:「太中大夫孔融旣伏其罪矣,然世人多採其虛名,少於核實,見融浮豔,好作變異,眩其誑詐,不復察其亂俗也。此州人說平原禰衡受傳融論,以為父母與人無親,譬若缻器,寄盛其中,又言若遭饑饉,而父不 肖,寧贍活餘人。融違天反道,敗倫亂理,雖肆市朝,猶恨其晚。更以此事列上,宣示諸軍將校掾屬,皆使聞見。」   


마침내 더불어 살해당했다. 공융은 높은 명성과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많이 슬퍼하였다. 태조는 원근의 의론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명령을 내려 이르길 :


「태중대부 공융은 이미 그 죄로 처벌됐으나 세상 사람들이 많이 그 허명을 채납하여 실질은 적게 따지고 공융의 부화한 문사를 보고 변이를 좋아하며 미친 사기에 눈이 머니 다시는 그것이 풍속을 어지럽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 주(예주)의 사람들은 말하길 평원의 예형(禰衡)이 공융의 논설을 전하는데 부모와 그 사람은 전혀 친함이 없는 것이 비유하면 도자기에 물이 가득 들어 있는 것과 같다고도 하며 또한 말하길 만약 기근을 만난다면 아버지가 불초하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을 구하여 살리는게 낫다고도 하였다. 공융이 천도를 어기고 윤리를 어지럽히는 것이 비록 죽인다음 시체를 시장바닥에 버린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 늦음을 한스러워 해야 한다. 다시금 이 일을 위에다 나열하여 여러 군대의 장교, 연속들에게 보여 모두 보고 보고 듣게 하라.」


世語曰:融二子,皆齠齓。融見收,顧謂二子曰:「何以不辭?」二子俱曰:「父尚如此,復何所辭!」以為必俱死也。  


세어에 이르길 : 공융에게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영재였다. 공융이 체포당할 때 두명의 아들을 돌아보며 말하길


「어찌하여 피하지 않는가?」


하니 두 아들이 더불어 말하길


「아버지께서 오히려 이러하신대 다시 어찌 피하겠습니까!」


라고 하여 반드시 더불어 죽고자 하였다.


臣松之以為世語云融二子不辭,知必俱死,猶差可安。如孫盛之言,誠所未譬。八歲小兒,能玄了禍福,聦明特達,卓然旣遠,則其憂樂之情,宜其有過成 人,安有見父收執而曾無變容,弈棊不起,若在暇豫者乎?昔申生就命,言不忘父,不以己身將死而廢念父之情也。父安猶尚若茲,而況於顛沛哉?盛以此為美談, 無乃賊夫人之子與!蓋由好竒情多,而不知言之傷理。    


신 송지는 세어에서 공융의 두 아들이 피하지 않고 반드시 더불어 죽을 것을 알았다는 것이 오히려 약간 타당해보입니다. 만약 손성의 말과 같다면 진실로 이해가되지 않습니다. 여덟살의 아동이 능히 화복을 깊이 깨달아 총명이 특히 통달하여 탁연히 멀리까지 나갔다면 슬프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마땅히 성인을 뛰어넘었을 텐데 아찌 아버지가 체포되는 것을 보고도 일찍이 안색 하나 안변하고 바둑을 두면서 일어나지도 않고 마치 미리 예견한 사람인듯 하겠는가? 옛날 신생이 명령을 받듬에 있어서 말하는데 아버지를 잊지 않았으니 자신의 몸이 곧 죽는다고 하여 아버지를 염려하는 정을 폐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안녕해도 오히려 이러할 진데 하물며 전패의 상황에 있어서랴? 손성은 이것으로 미담을 삼으니 마침내 다른사람의 자식을 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기괴한 것을 좋아하는 심정이 많은지라 말이 도리를 해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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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1
20:51:37 (*.131.108.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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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1
17:20:27
(*.0.203.174)
구주춘추 등록

코렐솔라

2015.12.30
18:59:13
(*.46.94.101)
dragonrz님의 번역을 더해 미번역의 대부분을 채워넣고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기록을 지우고 출처는 상단에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해당 문서에서 미번역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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