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삼국지 - 여대전

여대(呂岱)는 자가 정공(定公)이고 광릉군(廣陵) 해릉(海陵) 사람이다. 그는 군(郡)과 현(縣)의 관리(吏)로 임명되었지만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건너왔다. 손권이 정권을 총괄할 때, 여대는 막부(幕府)로 가서 손권을 알현했다. 손권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오현(吳)의 승(丞)으로 임명했다. 손권이 여러 현의 창고와 죄수들에 관한 것을 직접 처리했으므로 그때가 되면 각 현(縣)의 장(長)과 승(丞)은 모두 손권을 만났다. 여대의 법률 처리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손권의 뜻에 부합되었으므로 불러 녹사(錄事)의 일을 맡겼다. 또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여요현(餘姚)의 장(長)으로 보임되게 했다. 그는 건강한 자들을 불러 모아 천여 명을 얻었다. 회계(會稽)ㆍ동야(東冶) 등 다섯 현(縣)의 도적 여합(呂合)과 진랑(秦狼) 등이 소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여대를 독군교위(督軍校尉)로 임명하여 장군(將軍) 장흠(蔣欽) 등과 병사를 인솔하여 토벌하도록 했다. 그래서 여합(合)과 진랑(狼)을 체포했으며, 다섯 현은 평정되었다. 여대는 소신중랑장(昭信中郎將)으로 임명되었다.


오서 : 건안16년(211) 여대는 낭장(郎將)윤이(尹異)등을 통솔(督)하여 정병 2천여명으로 한흥(漢興) 건성(寋城)에 이르러, 한중의 장로를 서쪽으로 꾀어내고자 했으나, 장로가 이를 의심하여 길을 끊으니, 계책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 손권은 여대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건안(建安) 20년(215), 여대는 손무(孫茂) 등 10명의 장수를 인솔하여 장사(長沙)의 세 군(郡)을 취하는 일에 참가했다. 또 안성현(安成)ㆍ유현(攸)ㆍ영신현(永新)ㆍ다릉현(茶陵)의 관리가 모두 음산성(陰山城)으로 들어가 무리를 규합하여 여대에게 대항했다. 여대는 이들을 공격하여 즉시 항복시켰고, 세 군은 평정되었다. 손권은 여대를 남겨 장사를 지키도록 했다. 안성현(安成)의 장(長) 오탕(吳碭)과 중랑장(中郎將) 원룡(袁龍) 등이 관우(關羽)와 결탁하여 또 반란을 일으켰다. 오탕은 유현을 점거하고 있었고, 원룡은 예릉(醴陵)에 있었다. 손권은 횡강장군(橫江將軍) 노숙(魯肅)을 파견하여 유현을 공격하도록 했다. 오탕은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여대는 예릉(醴陵)을 공격하여 마침내 원룡을 붙잡아 참수시켰다. 그래서 여대는 여릉태수(廬陵太守)로 승진했다.

연강(延康) 원년(220), 여대는 보즐(步騭)을 대신하여 교주자사(交州刺史)가 되었다. 여대가 교주(州)에 도착하자, 고량(高涼)의 도적 괴수 전박(錢博)이 투항을 요청했다. 여대는 손권의 허락을 받아 전박을 고량서부도위(高涼西部都尉)로 임명했다. 또 울림(鬱林)의 이민족과 도적들이 군과 현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여대가 토벌하여 무찔렀다. 이때, 계양(桂陽)ㆍ정양(湞陽)의 도적 왕금(王金)이 남해(南海) 변장 지역에서 무리를 규합하여 먼저 난을 일으켜 피해를 입혔다. 손권은 또 여대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여대는 왕금을 사로잡아 경도(都)로 보냈으며,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여대는 안남장군(安南將軍)으로 승진했고, 부절(假節)을 받았으며, 도향후(都鄉侯)로 봉해졌다.

교지태수(交阯太守) 사섭(士燮)이 죽자, 손권은 사섭의 아들 사휘(徽)를 안원장군(安遠將軍)으로 임명하고 구진태수(九真太守)를 겸임하도록 했으며, 교위(校尉) 진시(陳時)에게 사섭의 직무를 대신하도록 했다. 여대는 표를 올려 해남(海南)의 세 군을 나누어 교주(交州)를 만들고 장군 대량(戴良)을 자사(刺史)로 임명했으며, 해동(海東)의 네 군을 광주(廣州)로 만들어 여대 자신이 그곳의 자사가 되었다. 그가 대량과 진시를 파견하여 남쪽으로 들어가도록 했지만, 사휘가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해구(海口)를 지키는 병사를 들어서 대량 등에게 대항했다. 여대는 그래서 상소를 올려 사휘의 죄행을 토벌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병사 3천 명을 지휘하여 밤낮으로 항해했다. 어떤 사람이 여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휘는 몇 대에 걸쳐 입은 은혜에 의지하고 있고, 한 주의 사람들이 귀순하였으므로 경시할 수 없습니다.”

여대가 말했다.

“지금 사휘는 비록 마음속으로 반역할 계획을 품고는 있을지라도 우리들이 갑자기 이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고, 만일 우리들이 은밀히 진군하여 민첩하게 행동해 무방비 상태인 그를 엄습한다면 격파 시키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설사 행동이 느려 신속하게 할 수 없어 그들에게 경계의 마음을 갖게 할지라도 성을 둘러 고수하는 일곱 군의 소수 민족은 구름이 모여 소리에 호응하는 것 같을 것이고,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을지라도 누가 여기에 대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출발하였으며, 합포(合浦)를 지나서는 대량과 함께 진군했다. 사휘(徽)는 여대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과연 매우 두려워 떨었으며 나갈 바를 몰라 하다가 즉시 형제 여섯 명을 데리고 웃옷을 벗고 맨살을 드러내어 여대를 맞이하였다. 여대는 이들의 머리를 모두 베어 경도로 보냈다. 사휘의 대장 감례(甘醴)ㆍ환치(桓治) 등은 관리와 백성들을 인솔하여 여대를 공격했지만, 여대는 분투하여 크게 무찔렀다. 승진하여 반우후(番禺侯)로 봉해졌다. 이리하여 광주(廣州)는 폐지시켰으며, 교주(交州)는 이전과 같이 회복시켰다.

여대는 교주가 이미 평정되자, 또 나아가 구진(九真)을 토벌하여 참수하거나 포획한 수가 매우 많았다. 또 종사(從事)를 남쪽으로 파견해 국가의 교화를 알렸으며, 변방 밖의 부남(扶南)ㆍ임읍(林邑)ㆍ당명(堂明)의 각 왕에 이르러서는 각기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손권은 여대의 공을 칭찬하고, 승진시켜 진남장군(鎮南將軍)으로 임명하였다.

황룡(黃龍) 3년(231), 남쪽 영토가 맑고 안정되었으므로 여대를 불러 장사(長沙)의 구구(漚口)에 주둔시켰다. 마침 무릉(武陵)의 이민족들이 은근히 움직이려고 하였으므로 여대는 태상(太常) 반준(潘濬)과 공동으로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왕은교광기 : 오는 나중에 광주(廣州)를 다시 두었으며, 남양인 등수(滕脩)를 자사로 두었다. 어떤 사람이 등수에게 새우수염(蝦鬚) 이 一丈 이라 하자 등수는 믿지 않았다, 그 사람이 후에 동해에 이르러, 새우수염(蝦鬚)을 四丈四尺을 취하여 등수에게 보여주었더니, 등수가 그 말을 믿었다(服).


가화(嘉禾) 3년(234), 손권은 여대에게 명하여 반장의 병사들을 인솔해 육구(陸口)에 주둔하도록 하였으며, 이후에 포기(蒲圻)로 옮겼다.


4년(235), 여릉(廬陵)의 도적 이환(李桓)ㆍ노합(路合)ㆍ회계군(會稽) 동야(東冶)의 도적 수춘(隨春), 남해(南海)의 도적 나려(羅厲) 등이 일시에 나란히 일어났다. 손권은 또 여대에게 조서를 내려 유찬(劉纂)ㆍ당자(唐咨) 등을 지휘하여 병사를 나누어 토벌하도록 했다. 수춘은 즉시 투항했다. 여대는 수춘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하고 그의 부대를 인솔하도록 하여 결국에는 오나라 장수의 일원이 되게 했다. 이환과 나려 등은 모두 참수되어 머리는 경도로 보내졌다. 손권은 여대에게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려는 험난한 곳에 기대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머리가 잘리는 데로 이르게 되었고, 이환(桓)은 흉악하고 교활하며 이미 투항했었지만 또 모반했다. 앞뒤로 이들을 토벌하려고 했지만 여러 해 동안 붙잡지 못했었다. 그대의 계략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들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그대의 충성스럽고 용맹한 절개는 이 일에서 더욱 빛났다. 원흉은 이미 제거되었고 크고 작은 도적들은 두려워 떨고 있으며, 그 나머지의 작은 무리들은 땅을 쓸 듯 소멸할 것이다. 오늘 이후부터, 국가는 영원히 남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을 것이고, 세 군은 안정되어 걱정하다 놀라는 일이 없을 것이며, 또 복종하지 않던 백성들을 얻어서 부세와 노역을 공급받게 되었으니, 깊이 찬탄하고 감복할 만하다. 상은 그 달을 넘지 않는 것이 국가의 통상적인 규정이다. 적합한 법령을 만들어 그대가 결정하라.

반준(潘濬)이 죽은 후, 여대는 반준을 대신해 형주(荊州)의 공문서를 결재하였으며, 육손(陸遜)과 함께 무창(武昌)에 있으면서 여전히 포기를 다스렸다. 오래지 않아 요식(廖式)이 반란을 일으켜 성읍을 공격해 포위하였고, 영릉(零陵)ㆍ창오(蒼梧)ㆍ울림(鬱林) 각 군이 소란을 피웠다. 여대는 곧장 출병할 것을 요구하고 밤과 낮을 겸하여 길을 갔다. 손궈은 사자를 파견하고 여대를 교주목(交州牧)으로 임명했으며, 당자 등 여러 장수를 보내 이어지게 하였다. 공격하여 토벌에 나선 지 1년 만에 무찌르고, 요식과 그가 관위를 주어 각지로 파견한 임하태수(臨賀太守) 비양(費楊) 등을 참수하고, 아울러 그의 무리를 제거했으며, 군(郡)과 현(縣)은 모두 평정되었다. 여대는 무창(武昌)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그는 벌써 80세나 되었지만, 신체는 여전히 정력적이고 근면하며 직접 직무를 처리했다. 분위장군(奮威將軍) 장승(張承)이 여대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옛날 주공단(旦)과 소공석(奭)이 주(周)왕조를 보좌하여 시경 이남(二南 : 주남과 소남)에서는 그들을 칭송하는 노래를 지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당신과 육손이 그렇습니다. 충성과 근면함에 있어서는 서로 앞을 다투고, 공로와 존귀함에 있어서는 서로 양보합니다. 당신들의 공업은 권위에 기대 완성되었고, 교화는 도의와 부합됩니다. 군자들은 당신들의 덕행을 찬탄하고, 소인들은 당신들의 선량함을 좋아합니다. 게다가 문서 처리가 번잡하고 빈객들이 온종일 있지만, 피로해도 일을 놓지 않으면 고달파도 피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말을 탈 때에는 직접 달려가지 양쪽에 걸쳐 밟는 것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는 당신은 염파(廉頗)를 충분히 뛰어넘습니다. 당신이 일을 함에 있어 사람들의 응수를 얼마나 받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의에 있어서는 공경함을 말하고, 덕행에 있어서는 풍성함을 말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여 이 미덕을 전부 갖고 있습니까!

육손이 세상을 떠난 후, 제갈각(諸葛恪)이 육손을 대신하게 되었다. 손권(權)은 무창(武昌)을 나누어 두 부분으로 만들고, 여대(岱督)에게 우부(右部)를 통솔하도록 하여 무창 상류로부터 포기까지 관할하게 했다. 여대는 상대장군(上大將軍)으로 승진했고, 그의 아들 여개는 부군교위(副軍校尉)로 임명되어 포기에서 병사들을 감독하였다. 손량(孫亮)이 즉위한 후, 여대를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했다.

여대는 청렴한 몸으로 공무를 받들었으며, 지나친 곳마다 칭송할 만한 업적이 있었다. 처음에 교주(交州)에 있을 때는 여러 해 동안 집안을 보살피지 않아 처자식들이 굶주리고 궁핍하게 되었었다. 손권은 이 사실을 듣고 탄식하였으며, 신하들을 질책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대는 만리 먼 곳에서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느라고 가정 생활이 곤란해졌지만, 나는 이 사실을 일찍 알지 못했다. 여러분들은 나의 팔 다리이며 귀와 눈이니, 책임 있소.”

그리고 여대의 집에 돈, 쌀, 베, 비단을 하사하여 해마다 고정적으로 보내주었다.

당초 여대는 오군(吳郡)의 서원(徐原)과 친근하게 지냈다. 서원은 강개하며 재능과 지향하는 것이 있었다. 여대는 그가 일을 이룰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두건과 옷을 내렸으며, 그와 함께 문제를 토론하였다. 이후에 그를 천거하여 관직이 시어사(侍御史)까지 이르게 했다. 서원의 성품은 충성스럽고 용감했으며 직언을 좋아했다. 여대가 과실을 범한 일이 있자, 서원은 간언하여 논쟁하였으며, 또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여대에게 보고하자, 여대는 찬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내가 덕연(德淵)을 중시한 이유이다.”

서월이 죽자, 여대는 곡을 하며 매우 슬퍼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덕연은 나 여대의 유익한 친구인데, 오늘 불행을 당했으니 나 여대는 또 어느 곳에서 허물을 듣겠는가?”

담론하는 자들은 여대의 이런 모습을 찬미했다.

태평(太平) 원년(256), 여대는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들 여개(凱)가 후사를 이었다. 그는 유언을 남겨 장례는 옻칠을 하지 않은 소박한 관으로 하고, 거친 두건과 마로 된 옷을 입어, 절약하고 검소함을 따라 하도록 힘쓰라고 했다. 여개는 모든 것을 유언대로 행했다.

진수의 평: 여대는 청명하고 공손하게 공적인 일을 위했다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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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13:29:58 (*.148.5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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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3
01:22:49
(*.52.89.88)
손원->손권으로 수정

코렐솔라

2013.07.03
01:26:01
(*.52.89.88)
수비게 경시할 에서 비교하니 수비게를 없애야 하는 것 같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0
09:55:22
(*.52.89.212)
한문 주석 추가

구라뱅뱅

2013.07.25
18:25:40
(*.49.168.253)
漢中 賊帥張魯 到 漢興 寋城

이게 떡밥 이라 몇일을 후벼팠던 기억이 나네요.

코렐솔라

2013.07.25
18:39:33
(*.52.89.88)
여대는 뭔가 다른 놈들 전에 나왔는데 여기에만 묘사된 게 꽤 많은지라(시의 같이요) 떡밥이 많다고 봐요.

구라뱅뱅

2013.07.26
16:10:59
(*.49.168.253)
한흥 건성 떡밥 관련 글을 썼던 것.
http://blog.naver.com/sw100529/10152173061
http://blog.naver.com/sw100529/10152173078

코렐솔라

2013.07.26
17:04:03
(*.52.89.88)
그런데 또 오범전을 보면 여대가 서촉을 갔다왔다는 말이 있어서 영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한중 주위로 간게 맞다면 좀 웃기게 되지만요.(음? 손권은 사실 여대를 보내 유비의 서촉 정벌을 도왔다? 뭐지 이런 느낌?)

코렐솔라

2013.07.26
17:05:08
(*.52.89.88)
한 번 처사군님께 삼국지집해에 뭐라고 이 사건을 적고 있는지 질문을 드려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구라뱅뱅

2013.07.26
18:03:01
(*.49.168.253)
삼국지 집해에는
「汉兴郡,见《魏志?张既传》注引《三辅决录注》。寋,音蹇,见《尔雅》。」
이리 나왔으며, 이 내용은 간략하게, 위지 장기전에 나온다가 끝이네요.

코렐솔라

2013.07.26
18:03:25
(*.52.89.88)
으익, 완벽한 떡밥이 되기 좋군요. 과연 손권이 들어간 것이냐 아니냐 ㅋㅋㅋ

구라뱅뱅

2013.07.26
16:09:03
(*.49.168.253)
吳書曰:建安十六年,岱督郎將尹異等,以兵二千人西誘漢中賊帥張魯到漢興寋城,魯嫌疑斷道,事計不立,權遂召岱還。
오서 : 건안16년(211) 여대는 낭장(郎將)윤이(尹異)등을 통솔(督)하여 정병 2천여명으로 한흥(漢興) 건성(寋城)에 이르러, 한중의 장로를 서쪽으로 꾀어내고자 했으나, 장로가 이를 의심하여 길을 끊으니, 계책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 손권은 여대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구라뱅뱅

2013.07.26
16:14:01
(*.49.168.253)
王隱交廣記曰:吳後復置廣州,以南陽滕脩為刺史。
왕은교광기 : 오는 나중에 광주(廣州)를 다시 두었으며, 남양인 등수(滕脩)를 자사로 두었다.

구라뱅뱅

2013.07.26
16:20:44
(*.49.168.253)
或語脩蝦鬚長一丈,脩不信,其人後故至東海,取蝦鬚長四丈四尺,封以示脩,脩乃服之。

이건 번역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좀 내용이 ㅎㅎ)

어떤 사람이 등수에게 새우수염(蝦鬚) 이 一丈 이라 하자 등수는 믿지 않았다, 그 사람이 후에 동해에 이르러, 새우수염(蝦鬚)을 四丈四尺을 취하여 등수에게 보여주었더니, 등수가 그 말을 믿었다(服).

재원

2013.07.26
16:28:03
(*.67.12.154)
감사합니다. 반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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