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리목鍾離牧은 자가 자간(子幹)이고 회계군 산음 사람으로 한왕조 시대에 노나라의 상으로 있던 종리의의 7대손이다.


會稽典錄曰:牧父緒,樓船都尉,兄駰,上計吏,少與同郡謝贊、吳郡顧譚齊名。牧童齔時號為遲訥,駰常謂人曰:「牧必勝我,不可輕也。」時人皆以為不然。    


회계전록 : 종리목의 아버지는 종리서(鍾離緒)이며, 누선도위(樓船都尉)이고, 형은 종리인(鍾離駰)이며 상계리(上計吏)이다. 어려서 같은군의 사찬(謝贊), 오군의 고담(顧譚)과 같이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종리목은 어렸을 때 지눌(遲訥)이라 불렸는데 종리인은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길 「종리목은 반드시 나보다 뛰어날 것이니 가볍게 보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어렸을 때는 영흥에 거주하면서 직접 밭을 개간하여 20여묘에 벼를 심었다. 벼가 익을 무렵, 현의 백성들 가운데 이곳이 자신의 토지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었다. 종리목은 이렇게 말했다.

"본래는 황폐한 밭이었기 때문에 개간했을 뿐이오."

그리고는 벼를 현 사람에게 주었다. 현의 장은 이일을 듣고 그 백성을 불어 옥에 가두고 법에 따라 처리하려고 했다. 종리목이 그를 위해 요청했다. 현의 장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승궁(承宮)을 흠모하여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하려고 하지만, 나는 백성들의 주인이므로 응당 법률에 따라서 아랫사람들을 통솔해야만 한다. 어떻게 국가의 법령을 버리고 그대의 의견을 따르겠는가?"

종리목은 말했다.

"이곳은 군의 경계에 있으며, 당신의 배려 때문에 잠시 와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적은 양의 벼로서 이 백성을 죽인다면, 어떻게 더 머물려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續漢書曰:宮字少子,琅邪人,甞在蒙陰山中耕種禾黍,臨熟,人就認之,宮便推與而去,由是發名,位至左中郎將、侍中。    


속한서(續漢書)에 이르길: 승궁(承宮)의 자는 소자(少子)이며 낭야(琅邪)사람으로, 일찍이 몽음산 중에서 벼와 기장을 농사지었는데 익을 때 즈음에 사람들이 와서 시비 걸면 승궁은 바로 넘겨주고 떠났으니 이로 인해 명성을 얻었고 지위가 좌중랑장, 시중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나와서 행장을 꾸려 산음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현의 장은 직접 가서 그를 만류하고 압송했던 백성을 풀어주었다. 백성은 부끄럽고 두려워, 처자식을 데려가 벼를 빻아 얻은 60곡의 쌀을 종리목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종리목은 문을 닫고 받지 않았다. 그 백성은 쌀을 길가에 놓아두었는데 그것을 가져가는 자가 없었다. 종리목은 이로부터 이름이 나게 되었다.


徐眾評曰:牧蹈長者之規。問者曰:「如牧所行,犯而不校,又從而救之,直而不有,又還而不受,可不謂之仁讓乎哉?」答曰:「異乎吾所聞。原憲之問於孔子曰: 『克伐怨欲不行焉,可以為仁乎?』孔子曰:『可以為難矣,仁則吾不知也。』『惡不仁者,其為仁矣。』今小民不展四體,而認人之稻,不仁甚矣,而牧推而與 之,又救其罪,斯為讓非其義,所救非人,非所謂惡不仁者。苟不惡不仁,安得為仁哉!蒼梧澆娶妻而美,讓於其兄;尾生篤信,水至不去而死;直躬好直,證父攘 羊;申鳴奉法,盡忠於君而執其父。忠信直讓,此四行者,聖賢之所貴也。然不貴蒼梧之讓,非讓道也;不取尾生之信,非信所也;不許直躬之直,非直體也;不嘉 申鳴之忠,非忠意也。今牧犯而不校,還而不取,可以為難矣,未得為仁讓也。夫聖人以德報德,以直報怨,而牧欲以德報怨,非也。必不得已,二者何從?吾從孔 子也。」


서중이 평하여 이르길 : 종리목이 장자의 법도를 실천하는구나. 물어보는 사람이 이르길 「종리목의 행동은 범하는 사람이 있어도 보복하지 않고 또한 따르고 구해주며 올곧으면서도 고집하지 않고 또한 돌려줘도 받지 않으니 인자의 양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답하길 「내가 듣던 것과는 다르구나. 원헌이 공자에게 묻길 『원망과 탐욕을 극복하여 행하지 않는 것을 가히 인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공자가 말하길 『가히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인(仁)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불인을 미워하는 것이 인(仁)이다.』 지금 소민이 몸을 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벼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하는 것은 불인이 심한 것인데 종리목은 미루어 준데다 그 죄를 구해줬으니 이는 도리에 맞지 않게 양보한 것이요 구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한 것으로 불인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실로 불인을 미워하지 않는 다면 어찌 인을 얻을 수 있겠는가! 창오요는 처를 얻어 아름다우니 형에게 양보했고 미생은 독실하게 믿어 물이 이르러도 떠나지 않았다 죽었으며 직궁은 올곧은 것을 좋아하여 아버지가 양 훔친 것을 증언했으며 신명은 법을 받들어 임금에게 충성하여 그 아버지를 붙잡았네. 충성, 믿음, 올곧음, 양보 이 4가지 행동은 성현이 존귀하게 여기는 바이네. 그러나 창오의 양보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양보의 도리가 아니요, 미생의 믿음을 취하지 않는 것은 믿을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직궁의 올곧음을 허여하지 않은 것은 올곧음의 본체가 아니고 신명의 충성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은 것은 충성의 본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네. 지금 종리목이 범하는 사람이 있어도 보복하지 않고 돌려줘도 받지 않은 것은 가히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인자의 양보는 아니네. 무릇 성인은 덕으로 덕을 갚고 올곧은 도리로 원한을 갚는데 종리목은 덕으로 원한을 갚고자 한 것이니 틀린 것이네. 반드시 부득이하다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을 좇아야 하는가? 나는 공자를 따르겠네. 」


적오 5년(242), 종리목은 낭중으로부터 태자보의도위로 임명되었다가 남해태수로 승진했다.



會稽典錄曰:高涼賊率仍弩等破略百姓,殘害吏民,牧越界撲討,旬日降服。又揭陽縣賊率曾夏等衆數千人,歷十餘年,以侯爵雜繒千匹,下書購募,絕不可得。牧遣使慰譬,登[주1]皆首服,自改為良民。始興太守羊衜與太常滕胤書曰:「鍾離子幹吾昔知之不熟,定見其在南海,威恩部伍,智勇分明,加操行清純,有古人之風。」其見貴如此。在郡四年,以疾去職。    


회계전록에 이르길 :고량의 도적 수령 잉노(仍弩) 등이 백성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여 이민들을 해쳤으므로 종리목이 경계를 넘어 토벌해 10일만에 항복하였다. 또 게양현의 도적 수령 증하(曾夏) 등 수천명이 10여년 동안 후작, 잡다한 사직물 천 필로 글을 내려 사 모으고자 했으나 절대 얻을 수 없었다. 종리목이 사절을 보내 위로하고 경고하니 모두 수복하고 스스로 양민으로 고쳤다. 시흥태수 양도(羊衜)가 태상 등윤(滕胤)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길 「종리자간을 내가 옛날에는 익숙하게 알지 못했는데 바로 그 남해에 있는 것을 보면 은혜와 위엄으로 부대를 다스리고 지혜와 용기가 분명하며 더하여 행실이 청순하여 고인의 풍모가 있습니다. 」하니 그 높이 보여진 것이 이와 같았다. 군에서 4년동안 있고 질병으로 직을 떠났다.    


[주1]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오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확실히 몰라서 해석하지 않음.


또 승상장사가 되었으며, 사직으로 바꿔 임명되었고, 중서령으로 승진했다. 마침, 건안, 파양,신도 세 군의 산월족들이 난을 일으켰으므로 종리목을 감군사자로 임명하여 내보내 이들을 평정하도록 했다. 도적의 우두머리 황란과 상구 등은 또 그의 부대를 내어 병역을 충원하도록 했다. 그래서 종리목은 진정후로 봉해지고 월기교위로 임명됐다.

영안 6년(263), 촉이 위에 병탄되자, 무릉군 오계의 이민족들은 촉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하는 논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리목을 평위장군으로 임명하고 무릉태수를 겸임하도록 하여 그 군으로 가도록 했다. 위에서는 한가현의 장 곽순을 보내 무릉태수로 임명해 보내고, 부릉에 주둔하며 각 이민족의 우두머리를 회유하도록 했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일어나 곽순에게 호응했으며, 곽순은 또 서양현으로 진격했으므로 군내는 두려워 떨었다. 종리목은 군의 관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서쪽의 촉이 기울어 엎어지고 변방 지역은 침입을 당했는데, 이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모두들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 이 두현의 산세는 험준하며 각 이민족들이 병마로써 지키고 있으므로 군대를 이용하여 놀라게 하고 소란스럽게 할 수 없으며, 그들을 놀라고 소란스럽게 한다면 각 이민족들이 서로 결탁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서서히 위로하여 은혜와 신의가 있는 관리들을 보내서 가르침을 나타내고 위로해야만 합니다."

종리목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국경 밖에서 안으로 침범하여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므로 응당 그들의 근본이 깊지 않을 때 공격하여 취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불을 구함에 있어 신속한 정세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는 신속하게 출동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고 관리들 중에서 이에 반대하는 자는 군법에 따라 처리했다. 무이장군 고상이 종리목을 설득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반태상(반준)은 병사 5만 명을 지휘한 연후에 오계의 이민족을 토벌했습니다. 이 당시 유씨는 우리와 연맹을 맺고 있었고 각 이민족들은 교화에 따랐습니다. 지금은 이미 지난날의 원조가 없으며, 곽순은 벌써 천릉을 차지하고 있는데, 당신은 3천 명의 병사로 깊숙이 들어가려고 하시니, 저는 이 일의 유리함을 보지 못합니다."

종리목은 이렇게 말했다.

"비상시의 일을 어찌 옛일과 따라하겠습니까?"

종리목은 즉시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밤낮으로 길을 나아갔다. 산 속의 험준한 곳을 따라 행군하여 2천 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변방지역으로 달려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사악한 백성의 우두머리 백 여 명과 잔당 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곽순 등은 흩어지고, 오계는 평정됐다. 종리목은 공안독, 양무장군으로 승진했고 도향후로 봉해졌으며 유수독으로 옮겼다.


會稽典錄曰:牧之在濡須,深以進取可圖,而不敢陳其策,與侍中東觀令朱育宴,慨然歎息。育謂牧恨於策爵未副,因謂牧曰:「朝廷諸君,以際會坐取高官,亭侯功 無與比,不肯在人下,見顧者猶以於邑,況於侯也!」牧笑而答曰:「卿之所言,未獲我心也。馬援有言,人當功多而賞薄。吾功不足錄,而見寵已過當,豈以為 恨?國家不深相知,而見害朝人,是以默默不敢有所陳。若其不然,當建進取之計,以報所受之恩,不徒自守而已,憤歎以此也。」育復曰:「國家已自知侯,以侯 之才,無為不成。愚謂自可陳所懷。」牧曰:「武安君謂秦王云:『非成業難,得賢難;非得賢難,用之難;非用之難,任之難。』武安君欲為秦王并兼六國,恐授 事而不見任,故先陳此言。秦王既許而不能,卒隕將成之業,賜劍杜郵。今國家知吾,不如秦王之知武安,而害吾者有過范睢。大皇帝時,陸丞相討鄱陽,以二千人 授吾,潘太常討武陵,吾又有三千人,而朝廷下議,棄吾於彼,使江渚諸督,不復發兵相繼。蒙國威靈自濟,今日何為常。向使吾不料時度宜,苟有所陳,至見委以 事,不足兵勢,終有敗績之患,何無不成之有?」


회계전록에 이르길 : 종리목이 수유에 있으면서 깊이 앞으로 나아가면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 계책을 감히 진술할 수 없었다. 시중 동관령 주육(朱育)과 연회를 더불어 하며 개연히 탄식하였다. 주육은 종리목이 계책과 작위가 부합하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 한다 하고는 이로 인해 종리목에게 말하길


「조정의 여러 사람들은 기회를 만나 앉은 채 고관을 얻어서 정후정도면 공이 비할 데가 없어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고자 하지 않고 보는 사람들도 오히려 숨을 짧게 하니 하물며 후이겠습니까!」


종리목이 웃으면서 답하길


「경의 말이 저의 마음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마원의 말에 사람은 응당 공이 많아도 상이 박해야한다 하였습니다. 저는 공이 부족한데도 응당 받아야할 총애를 넘어 지나치게 받고 있으니 어찌 한스러워 하겠습니까? 국가가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해 조정에 해를 당하니 이로써 묵묵히 감히 진언하지 못한 것 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응당 진취의 계책을 건의하여 이로써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다만 스스로 지키고 있지 않을 텐데 이로 인해 분노하고 한탄하는 것입니다. 」


하니 주육이 다시 말하길


「국가는 이미 스스로 후를 알고 후의 재주로 이루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 품은 생각을 펼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니 종리목이 말하길


「무안군이 진왕에게 말하길 『사업을 이루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현자를 얻는 것이 어렵고 현자를 얻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쓰는 것이 어렵고 쓰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맡기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라 하였는데 무안군은 진왕이 여섯 나라를 병합하는데 있어 혹시 일을 맡기고도 전적으로 믿지 않을까봐 먼저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진왕이 이미 그렇게 하겠노라 허락하고도 그러지 못했으니 끝내 장차 이루어지려한 사업을 망치고 두우에 (자살할) 검을 내렸습니다. 지금 국가가 저를 아는 것이 진왕이 무안군을 아는 것과 같지 않고 저를 해치려 하는 사람은 범수를 해치려는 사람을 뛰어넘습니다. 대황제 시기에 육승상이 파양을 토벌하며 저에게 2000명을 줬고 반태상이 무릉을 토벌하면서 저에게 다시 3000명을 주었는데 조정에서 결론을 내려 저를 저기서 버리고 장강의 여러 도독들로 하여금 다시는 병사를 발하여 서로 잇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국가의 위령에 힘입어 일을 해결하였지만 오늘날 어찌 항상 있는 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로 하여금 때를 헤아려 마땅함을 짐작하게 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계책을 늘어놓아 일을 맡긴다고 하더라도 병세가 부족하여 끝내 패배의 근심이 있거늘 어찌 이루지 못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종리목은 이전 장군의 신분으로 부절을 받았고 무릉태수를 겸임했다. 그는 임지에서 죽었다.

그의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고, 관리와 백성들은 그를 그리워 했다. 아들 종리의(鍾離禕)가 작위를 계승하여 병사를 통솔했다.


會稽典錄曰:牧次子盛,亦履恭讓,為尚書郎。弟徇領兵為將,拜偏將軍,戍西陵,與監軍使者唐盛論地形勢,謂宜城、信陵為建平援,若不先城,敵將先入。盛以施績、留平,智略名將,屢經於彼,無云當城之者,不然徇計。後半年,晉果遣將脩信陵城。晉軍平吳,徇領水軍督,臨陳戰死。


회계전록에 이르길 : 종리목의 차자는 종리성(鍾離)인데 역시 공손과 겸양을 실천하였으며 상서랑이 되었다. 동생 종리순(鍾離)은 군대를 이끄는 장군이었는데 편장군에 임명되어 서릉을 지켰다. 감군사자 당성(唐盛)과 지형의 형세를 논하다 응당 신릉에 성을 쌓아 건평의 구원이 되게 해야 하며 만약 먼저 성을 쌓지 않으면 적이 장차 먼저 들어올 것이라 말하였다. 당성은 시적(施績), 유평(留平)도 지략이 있는 명장인데 누차 저곳을 지나면서도 응당 성을 쌓아야 된다고 말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종리순의 계책을 틀렸다고 여겼다. 반년 후에 진나라가 과연 장수를 보내 신릉성을 건조하였다. 진나라 군대가 오나라를 평정할 때 종리순은 령 수군독으로 전진에 임해 싸우다 죽었다.

※ 평하여 말한다. - 산월 사람들은 반란을 조성하기 좋아하며 안정시키는 일은 어려워도 동요시키는 일은 쉬웠다. 이 때문에 손권은 외부의 적을 대함에 있어서 정력적이지 못했고 낮은 언사로 위씨를 대했다.무릇 이런 여러 신하들은 모두 내란을 평정하여 국내의 안정에 노력한 인재들이다. 여대는 청명하고 공손하게 공적인 일을 위했고, 주방은 상대방을 속이는 책략과 탁월한 재능이 있었으며, 종리목은 훌륭한 인물의 선례를 답습하고, 전종은 당대의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에 귀중함을 받았지만 자식의 사악한 행동을 살피지 못해 비평을 받고 명예가 훼손되었다.

분류 :
오서
조회 수 :
4473
등록일 :
2013.05.01
14:46:49 (*.125.69.142)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043/e0c/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1043

코렐솔라

2013.07.10
10:02:35
(*.52.89.212)
한문 주석 추가

구라뱅뱅

2013.07.26
16:31:53
(*.49.168.253)
會稽典錄曰:牧父緒,樓船都尉,兄駰,上計吏,少與同郡謝贊、吳郡顧譚齊名
회계전록 : 종리목의 아버지는 종리서(緒)이며, 누선도위(樓船都尉)이고, 형은 종리인(駰)이며 상계리(上計吏)이다. 어려서 같은군의 사찬(謝贊), 오군의 고담(顧譚)과 같이 이름을 알렸다.

코렐솔라

2013.07.26
16:57:15
(*.52.89.88)
감사합니다. 반영했습니다.

코렐솔라

2016.05.20
15:20:33
(*.196.74.143)
종리목에 아버지, 형에 대한 주석, 숭궁에 대한 얘기, 서중의 평, 잉노 등 도적 퇴치하는 얘기 주육과 대화 종리목 아들에 대한 주석은 dragonrz님의 번역으로 이것으로 종리목에 대한 주석 번역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1745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72096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79919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130641
70 오서 육개전 [3] 견초 2013-05-01 4785
69 오서 반준전 [7] 견초 2013-05-01 5255
» 오서 종리목전 [4] 견초 2013-05-01 4473
67 오서 주방전 [10] 견초 2013-05-01 4270
66 오서 여대전 [14] 견초 2013-05-01 5381
65 오서 전종전 [4] 견초 2013-05-01 5678
64 오서 하제전 [10] 견초 2013-05-01 5513
63 오서 손분전(오서 14권, 손패의 동생) [1] 견초 2013-05-01 3827
62 오서 손패전 [1] 견초 2013-05-01 3694
61 오서 손화전 [3] 견초 2013-05-01 4944
60 오서 손려전 [2] 견초 2013-05-01 3899
59 오서 손등전 [2] 견초 2013-05-01 5152
58 오서 육경전(육손의 손자들) [3] 견초 2013-05-01 4961
57 오서 육항전 [3] 견초 2013-05-01 7413
56 오서 육손전 [27] 견초 2013-05-01 12937
55 오서 주거전 [2] 견초 2013-05-01 4153
54 오서 오찬전 [2] 견초 2013-05-01 3819
53 오서 육모전 [2] 견초 2013-05-01 3859
52 오서 낙통전 [2] 견초 2013-05-01 4090
51 오서 장온전 [3] 견초 2013-05-01 4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