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是儀)는 자가 자우(子羽)이고 북해군(北海) 영릉(營陵) 사람이다. 그의 본래 성은 씨(氏)이다. 그는 처음에는 현(縣)의 관리(吏)로 임명되었다. 그 군의 상(相)으로 있던 공융(孔融)이 시의를 조롱하면서, “‘씨(氏)’자는 ‘민(民)’의 위쪽 부분이 없는 것이므로 ‘시(是)’로 바꿀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성을 바꾸게 된 것이다.


서중이 말하길 옛날에 성(姓)을 정할 때는, 태어난 땅의 이름을 취하거나 관직의 이름, 혹은 선조의 이름을 취하여 모두 의미있는 내용이 있어 씨족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춘추좌씨전》에서도 ‘하사받은 토지로써 명명하여 씨(氏)를 갖는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선왕의 규범이다. 때문에 근본을 명확히 하고 시작을 존중하며, 조상이 세운 공덕을 나타내어 자손들에게 잊지 않도록 했다. 여기서 공융이 문자를 분해하고 불길한 글자로 해석하여 씨의(氏儀)에게 그 성을 고치도록 한 것은 그 근본을 잊고 선조를 무함한 것으로 부당한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성을 바꾸도록 하고, 권유하는 자를 따라 종족을 바꾸는 것은 공융이 실수한 것이며, 시의 또한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후에 시의는 유요(劉繇)에게 의탁하였고, 전란(亂)을 피해 강동(江東)으로 갔다. 유요의 군대가 패하자, 시의는 회계(會稽)로 이주했다.

손권이 대업을 이어 관장하게 되자, 시의를 문필의 우수함 때문에 초빙했다. 시의는 손권이 있는 곳으로 도착하여 신임을 받았으며, 기밀사항을 전문적으로 처리하였고, 기도위(騎都尉)로 임명되었다.

여몽(呂蒙)이 관우(關羽)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손권은 시의에게 의견을 물었다. 시의는 여몽의 계획을 칭찬하고 손권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 그는 관우 토벌에 참가해 충의교위(忠義校尉)로 임명되었다. 시의가 사퇴 의사를 진술하자, 손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비록 조간자(趙簡子)는 아니지만, 당신은 어찌 자신을 굽혀 주사(周舍)가 되지 못하는 것이오?”

손권은 형주(荊州)를 평정한 후, 무창(武昌)을 수도로 하고 시의를 비장군(裨將軍)으로 임명했다. 이후에 시의를 도정후(都亭侯)로 봉했으며 시중(侍中)의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손권은 또 병권을 주려고 했지만, 시의가 자신에게는 장수의 재능이 없다면서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황무(黃武) 연간, 손권은 시의를 환현(皖)으로 파견해 장군 유소(劉邵)에게로 가서 조휴(曹休)를 회유하여 이르도록 했다. 조휴가 도착하자 크게 무찔렀다. 시의는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하고 궁궐로 들어가 상서(尚書)의 일을 담당했으며, 이밖에 각 관원을 총 관리했고, 송사 처리를 겸했다. 또 각 공자(公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황제의 대가(大駕)가 동쪽으로 옮기게 되면서, 태자(太子) 손등(登)을 무창(武昌)에 남겨 지키도록 하고, 시의로 하여금 태자를 보좌하도록 했다. 태자는 시의를 존경했으며, 어떤 일이 있으면 먼저 그에게 자문한 후에 시행했다. 나아가 시의를 도향후(都鄉侯)로 봉했다. 이후에 시의는 태자를 수행하여 건업(建業)으로 돌아왔으며, 또 시중(侍中)ㆍ중집법(中執法)으로 임명하여 모든 관리들의 일을 관리하고 이전과 같이 송사를 다스리도록 했다.


전교랑(典校郎) 여일(呂壹)은 강하태수(江夏太守) 조가(刁嘉)가 국가의 정치를 비방했다고 무고했다. 손권은 노여워하여 조가를 체포해 옥에 가두고 철저하게 심문했다. 그 당시 함께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여일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일제히 조가가 비방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는데, 시의 혼자만 들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의는 며칠간 궁문(窮)을 받게 되었고, 손권의 조서는 엄하게 바뀌었으며, 신하들은 시의 때문에 두려워하며 숨을 죽였다. 시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칼과 톱이 이미 신의 목에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조가를 위해 사실을 숨겨 스스로 멸망을 취하여 충성하지 않는 귀신이 되겠습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사람이 들어 아는 것에는 마땅히 본말(本末)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실에 근거하여 질문에 대답하고, 말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손권은 결국 그를 풀어 주었고, 조가 역시 사면시켰다.


徐眾評曰:是儀以羈旅異方,客仕吳朝,值讒邪殄行,當嚴毅之威,命縣漏刻,禍急危機,不雷同以害人,不苟免以傷義,可謂忠勇公正之士,雖祁奚之免叔向,慶忌 之濟朱雲,何以尚之?忠不諂君,勇不懾聳,公不存私,正不黨邪,資此四德,加之以文敏,崇之以謙約,履之以和順,保傅二宮,存身愛名,不亦宜乎!


서중이 평하여 이르길 : 시의는 다른 지방에서 와서 손님으로 오나라에 벼슬하였는데 참언이 행해지고 황제의 위엄을 당하여 목숨이 누각에 달렸으며 재앙이 급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뇌동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구차하게 정의를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가히 충성스럽고 용감하며 공정한 선비라고 할만하다. 비록 기해가 숙향을 풀려나게 하고 경기가 주운을 구한 것이라도 어찌 이보다 뛰어나겠는가? 충성스러우면서 군주에게 아첨하지 않고 용감하면서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고 공의로우면서 사심을 남기지 않고 정당하면서 간사한 무리와 교통하지 않으니 이 4가지 덕에 더하여 문사와 명민함이 있고 겸약을 숭상하며 화순함을 실천하니 2궁의 보부가 되고 몸과 명예를 보전하였다. 또한 훌륭하지 않는가!


촉(蜀)나라 승상(相) 제갈양(諸葛亮)이 세상을 떠나자, 손권은 서쪽에 위치한 주(州)에 마음을 두고, 시의를 사자로 보내 동맹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공고히 하도록 했다. 시의는 사자의 임무를 받들어 손권의 마음에 부합되게 하여 이후에 상서복야(尚書僕射)로 임명되었다.

남양왕(南)과 노왕(魯)의 두 궁궐이 처음 세워졌을 때, 시의는 본래의 직책 위에서 또 노왕의 부상(傅)을 겸임하였다. 시의는 두 궁의 지위가 근사함을 꺼려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신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노왕은 천부적인 미덕을 갖추고 있고 문무의 자질을 겸하고 있으며, 현재의 상황에 근거하여 적절한 것은 마땅히 사방을 지키도록 하여 국가의 방어를 돕도록 해야만 합니다. 노왕에게 아름다운 덕행을 선양하고 권위있는 명성을 널리 빛내도록 하는 것, 이것이 국가의 훌륭한 법도이며, 사해 안의 사람들이 우러러 바라는 것입니다. 다만 신의 언사가 조잡하고 거칠어 생각을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뿐입니다. 저는 두 궁은 지위에 있어 높음과 낮음의 차이가 있어 상하의 질서를 바르게 하여 교화의 근본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의 표를 서너 번 올렸다. 그는 노왕의 부상으로 있으면서 충성을 다하고 항상 간언을 했다. 그리고 군주를 섬김에 있어 근면하고 사람들과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사귀었다.

시의는 산업을 다스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은혜를 베푸는 것을 받지 않았으며, 집과 방은 그 자신을 받아들일 만큼의 크기로 만들었다. 그의 이웃집에 큰 저택을 짓는 자가 있었다. 손권은 궁궐에서 나와 멀리서 바라보더니, 큰 집을 짓는 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주위에 있던 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시의의 집 같습니다.”

손권이 말했다.

“시의는 검소하니, 반드시 그의 집이 아닐 것이다.”

물어본 결과 과연 다른 사람의 집이었다. 시의가 인정받고 신임받은 것은 이와 같았다.

시의는 옷에 있어서 정밀하고 섬세함을 구하지 않았고, 음식에 있어서 많은 요리를 구하지 않았으며, 항상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여 집에는 쌓아놓은 것이 없었다. 손권은 이 일을 듣고 시의의 집으로 행차하여 거친 음식 보기를 구하고 직접 먹어보고는 이에 대한 탄식을 하였으며, 즉시 봉록과 상을 늘려주고 밭과 주택을 더해 주었다. 시의는 이것을 누차 사양하고, 은혜가 걱정된다고 하였다.

시의는 때때로 손권에게 나아가 건의를 올리면서 일찍이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한 적은 없었다. 손권은 항상 시의를 책망하며 구체적인 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한 태도가 없다고 했다. 시의는 대답하여 말했다.

“성스런 군주가 위에 있고, 신하가 직책을 지키면서 두려워하는 것은 직무를 빛내지 못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감히 어리석은 신하의 의견으로써 군주의 귀를 어지럽히지 못합니다.”

그는 국가를 섬긴 지 수십 년 동안 일찍이 허물이 있은 적이 없었다. 여일(呂壹)이 장군(將)ㆍ재상(相)ㆍ대신(大臣)을 탄핵하자, 간혹 한 사람이 네 번씩이나 죄행을 고발당하기도 했는데, 유독 시의만은 고발되지 않았다. 손권은 찬탄하며 말했다.

“만일 사람들이 모두 시의만 같다면, 어찌 법령을 사용하겠는가?”

시의는 질병으로 누워있게 되자, 미리 유언을 남겨 옻칠을 하지 않은 관을 사용하고 평상복으로 염을 하여 절약에 힘쓰도록 했다. 그는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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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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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15:10:27 (*.252.2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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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개구리

2013.05.01
23:36:05
(*.252.232.44)

'그래서 성을 바꾸게 된 것이다.[1]'의 주석을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6
16:20:24
(*.0.203.140)
주석 하나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6.05.29
17:09:14
(*.196.74.143)
여일에 일에 대한 서중의 평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56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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