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종(胡綜)은 자가 위칙(偉則)이고 여남군(汝南) 고시(固始)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난을 피해 강동(江東)으로 갔다. 손책(孫策)이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임할 때, 호종은 14세로 문하순행(門下循行)이 되었고, 오군(吳)에 남아 손권(孫權)과 함께 독서를 했다. 손책이 세상을 떠나고 손권이 토로장군(討虜將軍)이 되자, 호종을 금조종사(金曹從事)로 임명했다. 호종은 황조(黃祖) 토벌에 참가하여 악현(鄂)의 장(長)으로 임명되었다.

손권이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되어 경(京)에 수도를 정하자, 호종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여 서부(書部)로 임명하고, 시의(是儀)ㆍ서상(徐詳)과 함께 군사와 국정의 기밀 사항을 처리하도록 했다.

유비劉備가 (병사를 이끌고) 백제白帝까지 내려오자, 손권은 신변에 있는 병사가 적었기 때문에 호종에게 각 현으로 가서 병사들을 선발하도록 하여 6천 명을 얻게 되었으며, 두 개의 해번병(解煩)을 설치하여 서상이 좌부독(左部督)으로 삼고 호종(綜)이 우부독(右部督)을 겸임하도록 했다. 오(吳)나라 장수(將) 진종(晉宗)이 모반하여 위(魏)나라로 귀순하자, 위나라에서는 진종을 기춘태수(蘄春太守)로 임명했다.

진종의 근거지는 장강으로부터 수백 리 떨어진 곳으로 자주 오나라 변방 지역을 침입하여 해를 끼쳤다. 손권은 호종과 하제(賀齊)에게 갑자기 습격하도록 하여 진종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호종은 건무중랑장(建武中?將)을 더하게 되었다. 위나라에서 손권을 오왕(吳王)으로 임명했을 때, 호종(綜)ㆍ시의(儀)ㆍ서상(詳)을 모두 정후(亭侯)로 봉했다.

황무(黃武) 8년(229) 여름, 황룡(黃龍)이 하구(夏口)에서 출현했다. 이 때문에 손권은 황제를 칭하고, 이 길조에 따라 연호를 바꾸었다. 또 황룡을 그린 큰 아기(牙)를 만들어 항상 본 진영에 두었으며, 모든 군대의 나아감과 물러남(進退)은 이 깃발이 향하는 쪽을 보고 행동하도록 했다. 그리고 호종에게 부(賦)를 짓도록 명령했다. 호종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건(乾)과 곤(坤)이 막 분화되고,
삼재(三才)가 생겨났다.
낭성(狼)과 호시성(弧)의 징조를 나타내고 있는데,
실재로는 강한 병사이다.
성인(聖人)은 하늘의 형상을 보고본받고 경영하여
처음으로 병기를 만들어공일 이루기를 구했다.
황제(黃)와 신농(農)은 창업하여
황가(皇)의 근본을 다졌으며,
위로는 하늘의 마음에 순응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재앙을 멈추게 했다.
신(高辛)은 공공(共)을 주살하고,
우순(舜)은 유묘(有苗)를 토벌하였으며,
하계(?)는 감(甘)에서 싸웠으며,
성탕(湯)은 명조(鳴條)로 출정했다.
주대(周)에는 목야(牧野)가 있고,
한대(漢)에는 해하(垓下)가 있어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공업의 기초를 정한 때는 없었다.
밝게 빛나는 위대한 오(吳)는
실재로 하늘로부터 덕을 내렸고,
신령스런 무예로 사업을 바르게 하며
오직 황천(皇)의 법칙만을 취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황제(黃)와 우 씨(虞)를 시조로 하여
다섯 조대를 지나
대대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때에 응하여 천명을 받아
남쪽 땅에서 대업을 시작하여
장차 바른 길을 회복하고
우리 중원(夏)을 개혁하려고 한다.
그래서 하늘의 시운을 준수하여
신령스러운 군대를 만들고,
태일(太一)에서 형상을 취해
오장삼문(五將三門)을 두었다.
빠를 때는 번개 같고,
릴 때는 구름 같으며,
나아가고 멈춤에 있어 절도가 있고,
간략하고 번잡하지 않다.
네 가지 영물이 배치되고,
황룡(黃龍)이 그 중간에 놓인다.
일월(日月)을 주재하는 것은
사실 태상(太常)이라고 한다.
태상은 높이 우뚝 서 있으므로
육군(六軍)이 바라보게 된다.
신선(仙人)은 위에 있으면서
사방을 살펴보고,
신령은 확실히 사자로 가서
나라를 위해 길상을 내린다.
대군(軍)이 전향하려고 할 때,
황룡(黃龍)이 먼저 이동하고,
종이나 북을 울리지 않고
숙연히 변화를 행한다.
은연중에 만일 신의 도움이 있다면
신비하고 기이하다고 할 수 있다.
옛날 주(周)나라 왕실에서는
붉은 까마귀가 편지를 물어왔고,
오늘 위대한 오(吳)에서는 황룡이 부(符)를 토해냈다.
이러한 것은 하도(河)와 낙서(洛)에 부합되며,
행동은 도(道)와 함께 하고,
하늘이 도와 사람들이 화합하도록 하였으니,
모두 길한 징조라고 한다.

촉(蜀)은 손권(權)이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이전의 우호관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호종(綜)이 맹약하는 글을 만들었는데, 문채와 내용이 매우 아름다웠다. 이 기록은 손권전(權傳)에 있다.

손권(權)이 건업(建業)에 수도를 정하자, 서상(詳)과 호종(綜)은 나란히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나아가 향후(?侯)로 봉해지고 좌우령군(左右領軍)을 겸임했다. 당시 위(魏)나라에서 투항해온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가 위나라 도독하북제군사(都督河北)ㆍ진위장군(振威將軍) 오질(吳質)이 자못 모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호종은 오질이 오나라에 항복하는 글 세 편을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 중 첫 번째 글에서 말했다.

- 하늘의 기강(綱 : 국법)은 파괴되어 끊어지고 사해(四海)는 분리되어 붕괴되었으며, 백성들은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인(士人)들은 도처로 떠돌아다니며, 병사들은 늘어나는 바가 없고 성읍에는 백성들이 살지 않으며, 풍진과 연기불은 어느 곳이든 볼 수 있습니다. 삼대(三代: 하ㆍ상ㆍ주) 이래로 큰 혼란이 극에 이르렀을 때도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습니다. 

신(臣) 오질(質)은 뜻이 천박하고 그 시대에 대처하는 방도도 없으며, 머물고 있는 토양에 국한되어 날개를 펴고 날 수 없어 결국 조씨(曹氏)를 위해 군사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멀리 하삭(河朔)에 있으면서 경사의 땅과 끊어져 비록 당신 나라의 바람을 바라보고 대의를 사모하며 천명을 의탁하려고 했지만, 인연이 없어 그 뜻을 펴지 못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오나라를 왕래하는 자에게 은밀히 그곳의 풍속과 교화에 관해 듣고서 폐하께서는 천지와 덕을 함께 하고 일월과 똑같이 빛나며, 신령스런 무예에 정통한 자태는 자연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하늘의 도를 펴서 만 리까지 교화를 흐르게 하여 장강 남쪽으로부터 가가호호 은택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웅(英雄)과 준걸(俊傑), 도를 얻은 인사들 가운데 마음속으로 노래하고 귀순을 즐겁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금년 6월 말, 길일이 있어 황룡이 일어나고 폐하께서 제위에 올라 광대한 도를 회복하고 국법을 온전하게 다스려서 유민들로 하여금 진정한 군주를 보도록 했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무왕(武)이 은(殷)나라를 토벌했을 때, 은나라 백성들은 창을 뒤집었고, 고조(高祖 : 한나라의 고조)가 항우(項)를 주살 할 때는 사방에 초나라 노래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형세와 비교하면 같은 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 오질은 호천(昊天)과 같은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고 삼가 신임하는 같은 군의 황정(黃定)을 파견하여 공손히 표를 받들도록 하고, 아울러 폐하께 의탁하여 항복하고 모반하기로 했습니다. 한가한 틈을 타서 이르기를 구합니다. 진술하려는 것은 뒤에 적어 열거하겠습니다.
-

두 번째 글에서 말했다.

- 옛날 이윤(伊尹)은 하(夏) 왕조를 버리고 상(商)으로 들어갔고, 진평(陳平)은 초(楚)나라를 등지고 한(漢)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들의 공적은 역사책에 실렸으며, 명성은 후대에 까지 전해졌습니다. 그 당시의 군주가 이들에게 배반 행위를 한 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천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옛날에 조 씨에게 받아들여져 표면적으로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 의탁했어도 안으로는 골육지친(骨肉)과 같았으며, 은혜와 정의는 깊고 두터워 합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 없었으므로 한 방면의 책임을 받아 황하 이북의 군대를 통솔했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제가 지향하는 것은 높고 컸으며, 영원히 조 씨와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하고, 공을 세우지 못하고 사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만을 걱정했었습니다. 조씨(曹氏)와 생사를 함께 하기로 하고, 공을 세우지 못하고 사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만을 생각했었습니다. 

조씨가 세상을 떠나고 후사가 자리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어린 나이로 정치를 통치하게 되어 참언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함께 관리로 있던 자들이 세력에 의지하여 서로 박해했고, 뜻을 달리하는 자들은 그들의 말로 이간시켰습니다. 그러나 신은 간략한 성격으로 평소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자를 계속 보게 되자 목적이 확실히 저를 넘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신의 과실입니다. 

결국에는 사악한 의론에 의해 침해를 받아 군주의 의심을 부르게 되었으며 신이 모반하려고 한다고 모함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진실을 아는 자들은 제 마음이 깨끗함을 보증했지만, 세상이 혼란하고 참언이 흥성하여 군주의 저에 대한 의심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하루아침에 억울함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으며, 근심스런 마음은 극도의 고통이 되어 마치 살얼음이나 재를 밟고 지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옛날 악의(樂毅)는 제(齊)나라에서 연소왕(燕昭王)을 위해 공을 세웠는데, 혜왕(惠王)이 즉위한 후 그를 의심하고 직위를 빼앗아 결국 연(燕)나라에 대해 덕을 저버리려고 했겠습니까. 그는 공명을 다시 세우지 못할 것이 두려웠고, 화가 장차 이를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옛날에 저는 위군(魏郡)의 주광(周光)을 파견하여 장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남쪽에 의탁하여 모반할 생각을 알리고 은밀한 계획을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그 당시는 창졸간이라 감히 곧장 장표(章表)를 만들지 못하고 주광에게 구두로 전하도록 했을 뿐이다. 저는 천하의 대체적인 추세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늘의 뜻이 있는 곳은 오나라가 아니면 또 누구이겠습니까? 

이곳의 백성들은 폐하의 신하와 종이 되려고 목을 길게 빼고 발꿈치를 들고 있으면서 오나라의 병사들이 더디 오는 것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성은을 내려 저에 대한 신임을 조금만 더한다면, 저는 반드시 황하(河) 북쪽의 영토로써 천자의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리며, 신의 한조각 충성심은 하늘의 태양이 비출 것입니다. 그러나 주광(光)이 남쪽으로 내려간 지 1년이 지났지만, 조그만 소식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이러한 마음이 결국 전달되지 못한 것이 아닌지요? 

저는 남쪽을 우러러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고 매일 매달 갈망하고 있는데, 노(魯)나라 사람이 고자(高子)를 바라던 것으로 어찌 신의 마음을 충분하게 비유하겠습니까! 

또 신이 현재 받고 있는 대우는 점점 엷어져 가고, 파리 떼의 참언하는 소리는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이화를 받게 될 것이며, 단지 일이 늦게 혹은 빠르게 진척되든가 하는 것뿐입니다. 신이 사사로이 헤아려 보면, 폐하가 아직 분명한 위로를 내리지 않은 것은 틀림없이 신 오질이 인의(仁義)의 도를 관철시키고 있어 이와 같은 일을 실행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주광이 전달한 것은 대부분 허위이고 실질이 적다고 말하였거나 혹은 이 안에는 다른 소식이 있다고 말하고 신 오질이 참언으로 의심을 받고 있으며 아마 큰 피해를 받게 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신 오질이 만일 죄가 있는 날이면 당연히 직접 가마솥으로 달려가서 자신의 몸을 구속하고 형 집행을 기다릴 것인데, 이것은 아마도 사람의 신하가 응당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오늘 저는 죄가 없는데 뜻밖의 참언과 훼방을 입어 장차 상앙(商)과 백기(白起)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일의 형세를 헤아려보고 위나라를 떠나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훼방으로 죽어 도의를 나타내지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떠나지 않겠습니까! 

악의(樂毅)가 나라를 나오고, 오기(吳起)가 달아난 것에 대해 군자(君子)들은 그들의 불우함을 슬퍼했지 그들의 행위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옛 일로써 오늘의 일을 비교하여 신 오질을 의심하고 꾸짖지 말아 주십시오. 또 생각하면, 사람의 신하로서 죄를 지으면 마땅히 오원(伍員)처럼 자신을 받들어 스스로 힘을 다해야지, 요행히 사태를 이용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일은 마땅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의 형세는 같지 않습니다. 남쪽과 북쪽의 거리는 매우 멀고 강과 호수가 그 사이를 끊어 놓았으므로, 직접 군사를 들지 않는다면 어찌 화를 면하고 구제되겠습니까! 이 때문에 저는 뜻있는 선비의 절개를 잊고 공을 세우려는 뜻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 오질은 또 조씨의 후사는 천명을 받지 않았고 정치는 쇠약하고 형법은 혼란하며, 조정의 권력은 신하에게 빼앗기고, 많은 장수들이 궁궐 밖에서 위세를 남용하며 각자 정치를 하고 혹시라도 마음을 같이 하는 자가 없으며, 사졸들은 쇠약하고 피폐하며, 창고는 텅 비었고, 국법은 훼손되고 폐기되었으며 군주와 신하가 똑같이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앞뒤로 투항하는 반란자들을 많이 얻는다면 이런 소문을 모두 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약소한 자를 겸병하고 어리석은 군주를 공격하는 것은 응당 천시(天時)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는 확실히 폐하께서 나아가 취할 때이며, 이 때문에 감히 그 계획을 구차하게 바칩니다. 

지금 만일 병사들을 회수(淮)와 사수(泗)로 나아가게 하여 하비(下邳)를 차지한다면, 형주(荊州)와 양주(揚州) 두 주(州)에서는 이 소리를 듣고 움직여 응할 것입니다. 신이 황하(河) 북쪽으로부터 석권하여 남쪽으로 내려오고 형세가 하나로 이어진다면, 뿌리와 새싹이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관서(關西)의 군대는 촉나라에 대한 방위에 얽매어 있어 청주(?州)와 서주(徐州) 두 주(州)는 감히 수비를 철수시키지 못하며, 허창(許)과 낙양(洛)에 남아있는 병사들은 1만 명도 안 되니, 누가 동쪽으로 와서 폐하와 다투겠습니까? 이것은 실제로 천 년에 한 번 만나는 기회이니, 심각하게 사고하고 세세하게 계획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있는 곳은 보래 말이 많으며, 게다가 강인(羌)과 호인(胡)은 항상 3, 4월 중에 수초가 풍성할 때 말을 달려 왕래하므로 목전의 상황을 은밀히 헤아려 보면 3천여 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군대를 내보내 응당 이 시간을 이용한다면 많은 기사(騎士)를 데리고 와서 말을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제가 미리 알고 있는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여 제정한 것입니다. 양쪽의 군대는 상대방의 상황에 대해 서로 허실(虛實)을 철저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곳의 상황이 확실히 허약함을 알고 있으므로 쉽게 함락하여 평정할 수 있을 것이며, 폐하께서 거동을 하기만 하면 호응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위로는 위대한 사업을 확정하고 천하통일을 완성하며, 아래로는 신 오질로 하여금 평범하지 않은 공로를 세우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만일 저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 역시 하늘의 뜻인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

세 번째 글에서 말했다.

- 옛날 허자원(許子遠: 허유)은 원소(袁)를 버리고 조씨(曹: 조조)에게 나아가서 계책을 짜내고 이해관계를 분석하였는데, 그 의견이 모두 받아들여져 결국 원소 군대를 격파시켜 조조의 기업을 확정지었습니다. 만일 조 씨가 허자원을 신임하지 않고 의심을 품고 머뭇거리며 마음으로 결정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천하는 원 씨의 소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저는 변방에 있는 장수 염부(閻浮)와 조즙(趙楫)이 위대한 교화로 귀순하려고 했지만, 호응하는 것이 신속하지 않아 실패하여 멸망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신은 충심으로 먼 곳에서 목숨을 바치는데, 만일 또 의심을 품어 때에 행동을 일으키지 않아, 신으로 하여금 고립되고 단절되게 하여 이처럼 무거운 화를 받게 한다면, 아마도 천하의 영웅과 장사들 가운데 공을 세우려고 하는 자들은 감히 또 폐하에게 목숨을 의탁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천지도 저의 말을 확실히 들었습니다. -

 
이 문장이 널리 유포된 후, 오히려 오질(質)은 벌써 조정으로 들어가 시중(侍中)이 되었다.황룡 2년(230), 청주(?州) 사람 은번(隱蕃)이 오(吳)나라로 귀순해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 신은 주(紂)가 무도(無道)를 행했을 때 미자(微子)가 먼저 나라를 나왔고, 한고조(高祖)가 관대하고 영명함을 시행했을 때 진평(陳平)이 먼저 들어왔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22세의 나이로 우리 국가를 버리고 도가 있는 군주에게 귀순하여 폐하의 신령스러움에 기대 평안하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곳에 도착하여 며칠 머물렀는데, 일을 주관하는 사람이 저를 투항한 사람과 동일시하여 정밀한 구별을 받지 못했으며, 신의 미묘한 말이 폐하께 전달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침울하며 항상 탄식하고 있으니 언제나 다하겠습니까? 삼가 궁궐로 와서 장(章)을 올리며 신의 소견이 받아들여지기만을 갈망할 뿐입니다.

손권은 즉시 은번을 불러 들어오도록 했다. 은번은 감사해 하고 손권(權)의 질문에 대답하였으며, 당시의 정무에 대해 진술하였다. 그의 말은 매우 식견이 있는 것이었다. 호종은 그 당시 곁에 앉아 있었는데, 손권은 은번의 말이 어떠한지 물었다. 호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은번이 올린 상소는, 과장된 언어는 마치 동방삭(東方朔) 같음이 있고, 교묘한 언어와 궤변은 마치 예형(?衡) 같음이 있지만, 재능에 있어서는 모두 이 두 사람에 미치지 못합니다.”

손권은 또 호종에게 은번이 어떤 관직을 감당할 수 있을지 물었다. 호종이 대답했다.

“그는 백성들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잠시 수도의 작은 직책을 맡게 해보십시오.”

손권은 은번이 형옥(刑獄) 문제에 대해 왕성하게 논의했으므로 그에게 정위감(廷尉監)을 담당하도록 했다. 좌장군(左將軍) 주거(朱據)와 정위(廷尉) 학보(?普)는 은번에게는 군용을 보좌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으며, 학보는 특히 그와 친밀하게 지내며 늘 은번의 재능이 꺾인 것을 원망하고 한탄했다. 이후 은번이 모반을 꾀했다가 일일 발각되어 주살 당했다.[주] 학보는 질책을 받고 자살했다. 주거는 연금되었다가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사면되었다. 손권은 호종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하고 좌집법(左執法)을 겸임하며 소송에 관한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요동(遼東) 사건 때, 보오장군(輔吳將軍) 장소(張昭)가 손권의 말이 지나치게 급하다고 간언하자, 손권 역시 매우 화를 냈다. 이들이 화합하고 틈이 생기지 않게 된 것은 호종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오록: 은번은 구변에 재능이 있었으므로 위나라의 명제는 그에게 거짓으로 모반하여 오나라로 가서 정위의 직책을 구하여 대신들의 죄를 취조해 그들 사이를 이간시키도록 명했다. 은번은 정위감이 되었고, 사람들은 주거나 학보가 은번과 친하게 지냈으므로 항상 거마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빈객들이 당에 가득찼다. 일이 발각되자, 은번은 달아났다가 체포되어 이 음모에 가담하 자들에 대해 고문을 받아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손권은 그를 데리고 들어오도록 하여 말하기를,


“어찌하여 육체의 고통을 직접 감당하시오?”


라고 하자, 은번은


“손군(孫君), 대장부가 일을 도모하면서 어찌 동반자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열사는 죽으면서 다른 사람을 연루시키지 않습니다.”


라며 끝까지 입을 다물고 죽었다.


吳歷曰:權問普:「卿前盛稱蕃,又為之怨望朝廷,使蕃反叛,皆卿之由。」    


오력에 이르길 : 손권이 학보에게 묻길 「경은 일전에 굉장히 은번을 칭찬했고 또한 그를 위해 조정을 원망하였는데 은번으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게 한 것은 모두 경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네.」


호종은 술을 좋아하였다. 그는 술을 마신 후에는 환호성을 질러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거나 혹은 술잔을 밀고 당기며 주위에 있는 사람을 때렸다. 손권은 그의 재능을 아꼈으므로 이를 질책하지는 않았다.

손권이 정치를 잡은 이래 각종 문서나 임명서, 이웃 나라로 보내는 편지는 거의 호종이 만들었다. 당초, 나라의 안팎으로 일이 많았으므로 특별히 법령을 정해 중요한 관원들이 상사를 만나도 모두 관직을 떠나지 못하도록 했는데, 법령을 여러 차례 위반하는 자가 있었다. 손권은 이를 걱정하며 조정의 신하들에게 상의하도록 했다. 호종의 건의는, 마땅히 법조문을 만들어 극형을 한 사람에게 시행한 이후로는 반드시 근절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호조의 말을 채용했다. 이로부터 관원들이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는 것은 끊겼다.

적오(赤烏) 6년(243)에 호종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호충(沖)이 작위를 계승했다. 호충은 성정이 온화하고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 그는 천기(天紀) 연간에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되었다.

吳錄曰:沖後仕晉尚書郎、吳郡太守。    

오록에 이르길 : 호충은 이후에 진나라에 사관하여 상서랑, 오군태수가 되었다.


서상(徐詳)은 자가 자명(子明)이고, 오군(吳郡) 오정(烏程) 사람이다. 그는 호종보다 먼저 죽었다.


- 평하여 말한다.

시의(是儀)ㆍ서상(徐詳)ㆍ호종(胡綜)은 모두 손권(孫權)의 시대에 사업을 일으키는 데 참여한 사람들이다. 시의는 청렴하고 삼가고 곧고 소박했으며, 서상은 여러 차례 사자로 나가 사명을 다했으며, 호종은 문채(文采)가 있고 재능이 있었기에 이들은 각기 신임을 받았다. 만일 큰 건물에 비유한다면, 이들은 서까래를 잇는 것처럼 군주를 도왔구나!
분류 :
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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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15:16:43 (*.125.69.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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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개구리

2013.05.01
23:44:36
(*.252.232.44)
'이후 은번이 모반을 꾀했다가 일일 발각되어 주살 당했다.[1]' 의 주석을 추가하였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6
16:23:27
(*.0.203.140)
배주 추가했습니다.

구라뱅뱅

2013.09.17
09:59:30
(*.49.168.253)
劉備下白帝 : 유비(劉備)가 백제(白帝)까지 공격해 내려왔을 때,
(삼국지전역 : 劉備進入白帝城)

현재 번역의 어감은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 같이 보이나, 당시 백제성은 촉 관할.

유비劉備가 백제白帝까지 내려오자
또는
유비劉備가 (병사를 이끌고) 백제白帝까지 내려오자

가 더 나을듯요.

구라뱅뱅

2013.09.17
10:00:47
(*.49.168.253)
손권이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임명되어 경(京)에 수도를 정하자,

京 은 손소전에 나오는 그 京 으로, 건업을 말합니다.

재원

2013.09.17
10:07:11
(*.148.42.15)
감사합니다. 모두 반영하였습니다.

구라뱅뱅

2013.09.17
10:16:34
(*.49.168.253)
아.. 이건 제가 잘못 본거네요. 京 이 정확하게 건업을 가르치는 건 아니네요. 이건 다시 원복해 주세요.

재원

2013.09.17
10:18:43
(*.148.42.15)
복구하였습니다.

코렐솔라

2016.05.29
17:16:52
(*.196.74.143)
학보를 질책하는 손권과 호충에 대한 내용은 dragonrz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6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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