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침(孫綝)은 자가 자통(子通)이고 손준(峻)과는 할아버지가 같다. 손침의 부친인 손작(綽)은 안민도위(安民都尉)를 역임했다.

손침은 처음에는 편장군(偏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손준이 세상을 떠난 후에 시중(侍中)ㆍ무위장군(武衛將軍)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총괄하였으며, 손준을 대신해 조정의 정사를 주관하였다. 여거(呂據)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여러 장수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공동으로 표를 올려 등윤(滕胤)을 승상(丞相)으로 추천하여 임명했다. 손침은 다시 등윤을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하고 여대(呂岱)를 대신해 무창(武昌)에 주둔하도록 했다. 여거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사람을 시켜 등윤에게 알리고 함께 손침을 폐출시키려고 했다. 손침은 이 소식을 듣고 당형 손려(慮)를 파견해 강도(江都)에서 여거를 공격하도록 하고, 천자의 사신을 보내 문흠(文欽)ㆍ유찬(劉纂)ㆍ당자(唐咨) 등에게 무리를 합쳐 여거를 공격하도록 명령했으며, 시중(侍中)ㆍ좌장군(左將軍) 화융(華融)과 중서승(中書丞) 정안(丁晏)을 파견하여 등윤에게 말해 여거를 잡도록 하고, 아울러 등윤이 마땅히 신속하게 떠나야 된다는 것을 깨우쳤다.

등윤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생각하여 화융과 정안을 구류하고 병사들을 이끌어 수비하도록 했다. 그리고 전군(典軍) 양숭(楊崇)과 장군(將軍) 손자(孫咨)를 불러 손침이 난리를 일으켰다고 말하고, 화융 등을 압박해 편지를 써서 손침을 힐난하도록 했다. 손침은 그 편지를 듣지 않고 표를 올려 등윤이 모반했다고 보고하고, 장군(將軍) 유승(劉丞)에게 작위로 봉할 것을 약속하여 보병과 기병을 인솔해 급히 등윤을 포위하도록 했다. 등윤은 또 화융 등을 협박하여 거짓 조서로 병사들을 출동시키도록 했다. 화융 등이 따르지 않자, 등윤은 모두 살해했다. 


文士傳曰:華融字德蕤,廣陵江都人。祖父避亂,居山陰蕋山下。時皇象亦寓居山陰,吳郡張溫來就象學,欲得所舍。或告溫曰:「蕋山下有華德蕤者,雖年少,美有令志,可舍也。」溫遂止融家,朝夕談講。俄而溫為選部尚書,乃擢融為太子庶子,遂知名顯達。融子諝,黃門郎,與融并見害。次子譚,以才辯稱,晉祕書監。    


문사전(文士傳)에 이르길: 화융(華融)의 자는 덕유(德蕤)로 광릉(廣陵) 강도(江都) 사람이다. 조부는 난리를 피해 산음현 예산(蕋山) 아래에 거처하였다. 당시에 황상(皇象) 또한 산음현에 살고 있었는데, 오군(吳郡)의 장온(張溫)이 와서 황상에게 배우면서 집을 얻기를 원했다. 어떤 사람이 장온에게 말하길: 「예산 아래에 화덕유라는 사람이 있는데 비록 나이가 어려도 아름다운 뜻이 있는 것을 훌륭하게 여기니 가히 거주할 수 있네.」하였다. 장온은 마침내 화융의 집에 머물렀고 조석으로 강론하였다. 얼마 후 장온은 선부상서가 됐고 이에 화융을 발탁하여 태자서자로 삼았는데 마침내 이름이 현저해졌다. 화융의 아들은 화서로 황문랑인데 화융과 더불어 해를 당했다. 차자는 화담인데 재치있는 언변으로 칭해졌고 진나라의 비서감을 지냈다. [주1]    


[주1] 삼국지집해를 보면 「조일청의 말에 “진서 화담전에 조부인 화융은 오나라의 좌장군, 녹상서사였다. 아버지인 화서는 오나라의 황문랑이었다. 이 전(문사전)에 의거하면 화담은 화융의 차자인데 정사와는 다르다.” 필(노필)이 생각건대 次子譚이라는 글자는 응당 諝子譚이 되어야 비로소 진서와 부합한다.」


등윤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으며, 평상시와 같이 웃으며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이 등윤에게 권하여 병사를 이끌고 창룡문(蒼龍門)으로 가서 장사들이 공이 나오는 것을 보게 한다면 반드시 모두 손침을 떠나 공에게로 올 것이라고 했다. 당시 밤이 벌써 깊었고, 등윤은 여거와 약속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군대를 일으켜 궁궐로 향하는 것은 곤란했으므로 수하의 병사들에게 경계를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여후(呂侯)가 부근의 길에 주둔했기 때문에 모두 등윤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떨어져 흩어지는 자가 없었다. 그 당시 태풍이 불고 날이 새려고 했지만 여거는 도착하지 않았다. 손침은 병사를 대규모로 집결시켜 결국 등윤과 그의 장사(將士) 수십 명을 죽이고, 등윤의 삼족을 멸했다.


신 배송지裴松之가 여기건대 손침孫綝이 비록 흉학하나, 등윤滕胤과는 본디 원한이 없었으니, 등윤이 만약 우선 손침의 뜻을 따라서, 나가 무창武昌을 지켰다면, 어찌 단지 당시의 화를 면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오히려 장차 오래도록 큰 복을 유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를 거슬러 재앙을 받아, 스스로 멸족됨을 취했으니, 슬픕니다!

손침은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했고, 부절(假節)을 받았으며 영녕후(永寧侯)로 봉해졌다. 그는 자신의 존귀함에 의지하여 매우 오만했으며, 항상 무례하게 행동했다. 당초 손준(峻)의 당제(弟) 손려(慮)가 제갈각(諸葛恪)을 주살하려는 음모에 가담했으므로 손준은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관직을 우장군(右將軍)ㆍ무난독(無難督)에 이르게 했고, 부절과 수레 덮개를 주었으며 아홉 관소의 일을 감독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손려에 대한 손침의 대우는 손준 때보다 얕았다. 손려는 장군(將軍) 왕돈(王惇)과 손침을 죽이려고 모의했다. 그 결과, 손침은 왕돈을 죽였고, 손려는 약을 먹고 죽게 되었다.

위(魏)나라 대장군(大將軍) 제갈탄(諸葛誕)이 수춘(壽春)을 들어 모반하고, 성(城)을 지키며 투항을 청했다. 오(吳)나라에서는 문흠(文欽)ㆍ당자(唐咨)ㆍ전단(全端)ㆍ전역(全懌) 등 병사 3만 명을 파견하여 구원하도록 했다. 위나라의 진남장군(鎮南將軍) 왕기(王基)가 제갈탄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문흠 등이 포위망을 뚫고 성으로 들어갔다. 위나라는 중앙과 지방의 군대 20여 만 명을 증원시켜 제갈탄을 포위했다. 주이(朱異)는 3만 명을 인솔하여 안풍성(安豐城)에 주둔하며 문흠의 세력이 되었다.

위나라 연주자사(兗州刺史) 주태(州泰)가 양연(陽淵)에서 주이에게 대항하자, 주이는 패하여 물러나며 주태의 추격을 받았으며,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2천 명이나 되었다.

손침은 이때 대규모로 부대를 출동시켜 확리(鑊里)에 주둔하며 또 주이를 보내 장군 정봉(丁奉)과 여비(黎斐) 등 5만 명을 인솔하여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하고, 군수물자를 도육(都陸)에 남겨 두었다. 주이는 여장(黎漿)에 주둔하며 장군 임도(任度)와 장진(張震) 등을 보내 용감한 사람 6천 명을 모집하여 주둔지 서쪽 6리에 부교를 만들고 밤에 건너서 반달 모양의 보루를 쌓도록 했다. 그러나 위나라 감군(監軍) 석포(石苞)와 주태에게 격파되자 군대를 퇴각시켜 높은 곳으로 나갔다. 주이는 또 무장한 거마를 만들어 오목성(五木城)으로 향했다. 석포와 주태는 주이를 공격했고, 주이는 패하여 돌아왔다.

위나라 태산태수(太山太守) 호열(胡烈)은 기병 5천 명으로써 은밀한 길로부터 도육을 습격하여 주이의 물자와 식량을 전부 불태웠다. 손침은 병사 3만 명을 주어 주이로 하여금 사력을 다해 싸우도록 했지만, 주이는 따르지 않았다. 손침은 확리에서 그의 목을 베고 동생 손은(恩)을 보내 구월하도록 했는데, 마침 제갈탄이 패배하였으므로 손은은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손침은 제갈탄을 구출할 수 없었고 병사들로 하여금 참패를 맛보도록 하였으므로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손침은 손량(孫亮)이 직접 정사를 처리하기 시작한 이래로 비난과 힐문을 많이 받게 되자 매우 두려워했다. 그는 건업(建業)으로 돌아온 후, 질병을 핑계로 손량을 알현하지 않았으며, 주작교(朱雀橋) 남쪽에 궁실을 지어 동생 위원장군(威遠將軍) 손거(據)에게 창룡문(蒼龍) 안에 있는 숙위(宿衛)로 들어가도록 하고, 동생 무위장군(武衛將軍) 손은(恩)ㆍ편장군(偏將軍) 손간(幹)ㆍ장수교위(長水校尉) 손개(闓)를 여러 진영에 나누어 주둔시켜 조정의 정치를 차단시키고 자신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손량은 내심 손침을 경계하였으므로 노육(魯育)이 살해된 본말(本末)에 대해 취조하고, 호림독(虎林督) 주웅(朱熊)과 주웅의 동생이며 외부의 독인(督) 주손(朱損)이 손준의 악행을 바로잡지 못한 것을 질책하고 노여워하며 곧 정봉에게 명령하여 호림에서 주웅을, 건업에서 주손을 죽였다. 손침이 들어와 간언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손량은 결국 공주(公主) 노반(魯班)ㆍ태상(太常) 전상(全尚)ㆍ장군(將軍) 유승(劉承)과 손침을 주살하기로 모의하였다. 손량의 비(妃)는 손침의 사촌 누나의 딸이었으므로 이 음모를 손침에게 알려주었다. 손침은 병사들을 인솔해 밤에 전상을 습격하고, 동생 손은을 보내 창룡문 밖에서 유승을 죽이고 황궁을 포위했다.

강표전:

선휴는 전상(全尚)의 아들인 황문시랑(黃門侍郎)이었던 전기(全紀)를 불러 몰래 모의하며 말했다.


"손침(孫綝)이 권세를 전횡하며 고를 가볍고 어리게 취급한다. 고가 전에 그에게 칙령을 내려서 속히 호수의 언덕으로 올라가게 하고, 당자(唐咨) 등을 위하여 후원하도록 하였으나, 호수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한 걸음도 언덕으로 오르지 아니하였다. 또 죄를 주이(朱異)에게 뒤집어씌우고 공신들을 멋대로 주살하면서 먼저 표문을 올려 보고도 아니하였다. 주작교의 남쪽에 큰 집을 짓고 조회에 나와서 알현을 하지도 아니하였다. 이러한 것은 그 스스로 마음대로 하는 것이고 더 이상은 두려운 것이 없다는 것이니 오래 참을 수 없고, 이제 그를 잡아들여야 하겠다. 경의 아버지는 중군도독(中軍都督)이니 비밀리에 엄하게 병사와 군마를 정비하게 하여 고가 마땅히 나아가서 주작교까지 갈 터이니 숙위하는호기(虎騎)와 좌우의 무난(無難)금군을 인솔하여 일시에 그곳을 포위하고 판조(版詔)를 만들어 손침이 거느리는 것을 모두 해제시키도록 조서를 내려서 손을 들지도 못하게 하라.


바로 이와 같이 하면 자연스럽게 당연히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경은 가되 다만 마땅히 비밀로 하라! 경은 경의 아버지에게 이 조령을 알리고 경의 어머니도 모르게 하라. 여인이란 대사를 잘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손침의 사촌 언니이니 만나서 누설이라도 하게 되면 고를 잘못되게 하는 것이 적지 않게 될 것이다."


전기는 조서를 받고서 전상에게 알렸다. 전상이 멀리 생각하지 못하고, 전기의 어머니에게 말을 하니 어머니가 몰래 손침에게 말하였다. 손침은 밤중에 병사를 가지고 손량을 폐하기로 하고,날이 밝을 때쯤에 드디어 궁궐을 포위하였다. 손량은 대단히 화가 나서 말 위에 올라 활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고는 대황제(大皇帝)의 적자이며 황제의 자리에 이미 5년이나 있었는데, 누가 감히 좆지 않는가?"


시중(侍中)과 가까운 신하들과 유모가 함께 붙잡으며 말에 오르는 것을 저지하였다. 나갈 수 없게되자 탄식하고 비통해 하며 이틀동안 먹지도 아니하면서 부인(전황후)을 욕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아버지는 바보 같아서 나의 큰일을 실패하게 했다!"


또 사람을 보내어 전기를 불렀더니 전기가 말하였다.


"신의 아버지가 조서를 받들면서 삼가지 못하여 황상에게 죄를 지었으니, 다시 뵐 면목이 없습니다."


이어서 자살하였다.


孫盛曰:亮傳稱亮少聰慧,勢當先與紀謀,不先令妻知也。江表傳說漏泄有由,於事為詳矣。


손성이 말하길 : 손량전에 칭하길 손량이 어려서부터 총명했다고 하는데 시세상 응당 먼저 전기와 도모해야지 처로 하여금 먼저 알게 해서는 안됐다. 강표전에서 누설된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하였는데 사실관계에 있어 상세하다.


손침은 광록훈(光祿勳) 맹종(孟宗)을 시켜 종묘에게 고하여 손량을 폐출시키도록 하고, 신하들을 불러 상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 황제는 황음하고 어리석어 황제의 자리에 있을 수 없소. 종묘에 제사를 지내 벌써 황제의 폐위에 대해 고했소.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동의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다른 의견을 제시하시오.”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장군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손침은 중서랑(中書郎) 이숭(李崇)을 파견하여 손량의 옥새와 인수를 빼앗고, 손량의 죄상을 각지에 알리도록 했다. 상서(尚書) 환이(桓彝)가 서명을 거부하자, 손침은 노여워 그를 죽였다.

한진춘추: 환이(桓彝)는 위나라 상서령(書令階) 환계(桓階)의 동생이다.

오서: 진무제(사마염)가 설영(薛瑩)에게 오나라의 유명한 신하에 대해 묻자, 설영은 환이가 충절을 가진 신하라고 했다.

전군(典軍) 시정(施正)이 손침에게 낭야왕(琅邪王) 손휴(休)를 불러 세우도록 권하자, 손침은 이 의견에 따라 종정(宗正) 손해(楷)를 보내 손휴에게 편지를 바치도록 하였다. 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저는 얕은 재능으로써 대임을 받게 되어 폐하를 보좌해 인도할 수 없었습니다. 몇 달 이래 매우 많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폐하께서 신임하여 가까이 하는 유승은 미색을 좋아하여 관리와 백성들의 부녀자들을 불러 그 중 아름다운 자들을 뽑아 궁궐 안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의 자제 가운데 18세 이하인 자 3천여 명을 선발하여 어원(苑) 속에서 훈련시키기를 밤낮 계속하였으므로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소리를 지르게 되었고, 창고 속에 숨겨놓은 창 5천여 매를 파괴하여 놀이기구로 사용했습니다. 주거(朱據)는 선제(先帝)의 오래된 신하(舊臣)이며, 그의 아들 주웅(熊)과 주손(損)은 모두 부친의 본성을 이어 충성과 도의로써 자립하였습니다. 옛날 작은 공주를 살해했던 것은 본래 큰 공주가 만든 것이었습니다.그런데 폐하께서는 그 일의 본말을 다시 자세하게 조사하지 않고 곧바로 주웅과 주손을 죽였습니다. 폐하에게 간언했지만 쓰이지 않았으므로, 그 수하의 사람들 가운데 몰래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황제는 궁궐 안에서 작은 배 3백여 척을 만들었는데, 금이나 은으로 이루어졌으며 장인들은 낮이든 밤이든 쉬지 못했습니다. 태상(太常) 전상(全尚)은 대대로 은총을 입었지만 여러 종친(宗親)들을 감독 할 수 없었으므로 전단 등이 성을 버리고 위(魏)나라로 갔던 것입니다. 전상의 지위는 지나치게 무거웠고 일찍이 폐하에게 한마디의 간언도 하지 않았는데, 적과 왕래하여 나라의 소식을 저달하도록 해 틀림없이 사직(社稷)을 기울여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과거의 전제(舊典)를 따르고 운세가 대왕(大王)에게 모아졌으므로 이달 27일에 전상을 붙잡고 유승을 참수했습니다. 그리하여 천자로 하여금 회계왕(會稽王)으로 삼도록 하여 손해를 보내 받들어 영접하게 했습니다. 백관(百)들은 우러러 사모하며 길 옆에 서 있습니다.-

손침은 장군(將軍) 손탐(孫耽)을 파견하여 손량(亮)을 보내 봉국(國)으로 가도록 하고, 전상을 영릉(零陵)으로 쫓아내고, 전공주(公主)를 예장(豫章)으로 옮겼다. 손침은 마음속으로 득의양양하여 백성들이 숭배하는 신을 모욕하고 대교(大橋) 근처의 오자서(伍子胥)의 사당을 불태웠으며, 또 불교 사원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참수하였다. 손휴(休)가 즉위한 후, 손침은 자칭 초망신(草莽臣)이라고 하고 궁전으로 가서 편지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신이 사사로이 제 자신을 반성하고서야 재능은 국가의 근간이 되지 못하지만 천자의 측근이기 때문에 지위가 신하들의 위에 있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와 같아 작위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천자의 명성을 훼손시켜 신의 죄가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죄악을 생각할 때마다 매일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신이 듣기로는, 천명은 변함없이 반드시 덕행을 갖추고 있는 자에게 간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유왕(幽)과 여왕(厲)이 법도를 잃자, 주선왕(周宣)이 중흥했던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성한 덕을 갖고 있어 제위를 계승하였으므로 마땅히 훌륭한 보좌를 받아 협조하여 즐거운 국면이 오도록 해야만 합니다. 비록 요(堯)와 같이 위대한 군주일지라도 직(稷)과 설(契) 같은 자를 구하여 영명하고 성스런 덕을 보좌해야만 합니다. 옛 사람들은, ‘능력을 펼쳐 관직을 맡고, 능력이 없는 자는 물라난다.’고 했습니다. 신은 비록 힘을 다해 자신의 능력을 펼쳤지만, 여러 가지 정무에는 이익이 없었으므로 삼가 인수(印綬)와 부절(節)과 월(鉞)을 바치고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현인(引)의 길을 걷겠습니다.-

손휴는 그를 불러서 만나서 위로하고 계도했다.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짐은 부덕한 몸으로 지방에서 변방을 지키게 되었는데, 마침 기화가 닿아 여러 왕공 대부(公卿士)들이 짐에게 와서 종묘를 받들도록 했다. 짐은 이러한 일에 직면하자 깊은 연못이나 얇게 언 물 위를 건너는 것과 같았다. 대장군(大將軍)은 충성스런 계획을 짜내어 위급한 상황을 붙들어 바로 잡아 사직을 안정시켰으며, 공훈은 혁혁히 빛났다. 옛날 한(漢)나라 효선(孝宣)이 제위에 올랐을 때, 곽광(霍光)은 존귀해지고 빛났다. 덕행을 포상하고 공로를 상주는 것은 옛날과 지금(古今)의 보편적인 이치인 것이다. 때문에 대장군을 승상(丞相)ㆍ형주목(荊州牧)으로 임명하고 식읍으로 다섯 현(縣)을 주는 것이다.-

손은은 어사대부(御史大夫)ㆍ위장군(衛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손거(據)는 우장군(右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모두 현후(縣侯)가 되었다. 손간(幹)은 잡호장군(雜號將軍)ㆍ정후(亭侯)가 되었다. 손개(闓) 역시 정후(亭侯)로 봉해졌다. 손침(綝)의 가문에서 다섯 명이 후작(侯)이 되었고, 모두 금위군(禁兵)을 관장하였으며, 권력은 천자를 기울게 할 정도였다. 이것은 오(吳)나라 조정 대신들 중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손침은 손휴가 있는 곳으로 가서 쇠고기와 술을 바쳤지만, 손휴는 받지 않았다. 손침은 좌장군(左將軍) 장포(張布)가 있는 곳으로 가서 술을 마시고 원망하는 말을 꺼냈다.

“처음 어린 군주(少主)가 폐출되었을 때, 대부분 나에게 직접 황제가 되도록 권했습니다. 나는 폐하가 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맞이한 것입니다. 황제는 내가 아니었다면 즉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예물을 바쳤다가 거절당하였는데, 이것은 일반 신하들과 나를 차이두지 않은 것입니다. 응당 다시 계획을 바꿔야 할 뿐입니다.”

장포는 이 말을 손휴(休)에게 알렸다. 손휴는 이 말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손침이 난리를 만들까 걱정스러워 여러 차례 상(賞)을 내렸으며, 또 다시 손은(恩)에게 시중(侍中)의 관직을 더하여 손침과 함께 문서를 살피는 일을 분담시켰다. 간혹 어떤 사람이, 손침이 원한을 품고 황상(上)을 모욕하여, 모반을 도모한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으면, 손휴는 이 사람을 붙잡아 손침에게 보냈고, 손침은 이 사람을 죽였다. 이로부터 손침은 더욱더 두려워하며, 맹종(孟宗)을 통해 지방으로 나가 무창(武昌)에 주둔하기를 원했다. 손휴는 이를 허락하고, 손침의 수하에 있던 정예 병사 1만여 명에게 명하여 모두 장비를 갖추어 따라가도록 하고, 갖고 있던 무기 창고 속의 병기는 전부 갖고 가도록 주었다.


吳歷曰:綝求中書兩郎,典知荊州諸軍事,主者奏中書不應外出,休特聽之,其所請求,一皆給與。


오력에 이르길 : 손침이 중서의 낭관 2명을 구해 형주의 군대를 관리할 수 있도록 청했는데 일을 주관하는 관원이 상주를 올려 중서의 관리는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하니 손휴가 특별히 (손침의 청을) 들어주고 그가 청구하는 것은 모두 주도록 하였다.


장군(將軍) 위막(魏邈)이 손휴를 설득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침이 외부에 머물게 되면 틀림없이 변란이 있을 것입니다.”

무위사(武衛士) 시삭(施朔) 또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손침에게는 모반하려는 징후가 있습니다.”

영안(永安) 원년(258) 12월 7일, 건업(建業)에서 연회 때 변고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손침은 이 말을 듣고 불쾌했으나 밤에 태풍이 불어 나무를 뽑고, 모래를 날리자 두려웠다. 8일, 연회를 거행했을 때, 손침은 질병을 핑계로 댔다. 손휴는 그에게 강력히 일어나도록 하고 사자 10여 명을 보냈다. 손침은 부득이 궁궐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저지했다. 손침이 말했다.

“국가의 명령이 여러 번 있었으므로 사양할 수 없습니다. 미리 병사들을 정돈시키시고 관소 안에서 불을 지르도록 하십시오. 이것을 이용하여 신속히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는 결국 궁궐로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관소에서 불이 났으므로 손침은 구하러 가려고 하였다. 이에 손휴가 말했다.

“밖에는 병사들이 본래 많은데, 승상(丞相)이 번거로울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나 손침은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했다. 정봉(奉)과 장포(布)가 곁에 있는 자에게 눈짓하여 손침을 묶도록 했다. 손침은 고개를 숙이고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교주(交州)로 유배보내십시오.”

손휴가 말했다.

“당신은 어찌하여 등윤(滕胤)과 여거(呂據)를 유배보내지 않았습니까?”

손침은 또 말했다.

“원하건대 관가의 노예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손휴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하여 등윤(胤)과 여거(據)는 노예(奴)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그의 목을 베었다. 손휴는 손침의 머리를 갖고 그의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 가운데 무기를 놓는 자는 손침과 함께 모의한 자라도 사면시켜 주겠다.”

무기를 놓은 자는 5천 명이나 되었다. 손개(闓)는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가서 투항하려고 했지만, 추격병에게 살해되었으며, 손침의 삼족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손준의 관을 다시 꺼내어 인수(印綬)를 탈취하고, 관의 나무를 부수고 나서 시체를 묻었다. 이는 그가 노육(魯育) 등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손침이 죽었을 때는 28세였다. 손휴는 손준(峻)ㆍ손침(綝)과 같은 집안 사람인 것이 부끄러웠으므로 특별히 집안 사람 중에서 그들의 이름을 말소시키고, 그들을 부를 때는 고준(故峻)ㆍ고침(故綝)이라고 했다. 손휴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각(諸葛恪)ㆍ등윤(滕胤)ㆍ여거(呂據)는 죄가 없는데도 손준(峻)과 손침(綝) 형제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신속히 이들을 모두 이장시키고 각각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갈각 등의 일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된 자들은 일체 불러 돌아오도록 하라."

진수의 평: 손준과 손침은 나쁜 습관이 가득하여 본래 논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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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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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09
18:38:19
(*.104.141.18)
한문주석 추가

코렐솔라

2013.07.31
22:27:35
(*.52.91.73)
전상의 삽질 번역본을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2.04
19:23:57
(*.166.245.165)
배송지가 슬프다고한 등윤과 손침의 관계는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80850949

코렐솔라

2016.05.29
17:13:39
(*.196.74.143)
화융에 대한 주석, 손량과 전기 관련된 손성의 주석, 형주로 나가기 위해 상주 올리는 오력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6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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