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요(韋曜)는 자가 홍사(弘嗣)이며, 오군(吳郡) 운양(雲陽)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문장 쓰는 능력이 있었다. 승상연(丞相掾)으로부터 서안현(西安)의 령(令)으로 승진했으며, 또 상서랑(尚書郎)이 되었고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승진했다.


위요()의 본명은 위소()로 사학자들이 진(사마소)을 피휘해 고쳐 기록했다.


그 당시 채영(蔡穎) 또한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성품상 바둑 두기를 좋아했다. 태자(太子) 손화(和)는 이것이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위요에게 명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위요는 글로써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제가 듣기로는 군자(君子)는 젊었을 때 공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세상을 떠나 명성을 남기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하기 때문에 학문이 만일 제때에 미치지 못한다면 기회를 잃을까 걱정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 때문에, 고대의 뜻있는 선비들은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슬퍼하고 명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면려하고 지조를 갈았으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편안히 휴식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몇 달이 지나면 약간의 공적이 나날이 쌓이게 됩니다. 용월(甯越)처럼 근면하고 동생(董生)처럼 독실하면 점점 도덕과 인의의 연못에 진입하고, 마음을 다해 경전과 법술의 영역을 주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백(西伯)의 성스러움과 희공(姬公)의 재간에 의지해 밤부터 낮까지 노력하기 때문에 주왕조(周)의 도통을 융성하게 일으킬 수 있고 이름을 억대까지 전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일반 신하에 있어서야 다할 수 있습니까?

고금(古今)을 통해 공명을 세운 선비들을 보면, 모두 특이한 사적을 풍부하게 쌓았으며, 신체를 수고스럽게 하며 부지런히 사색하고, 한가하게 있으면서 자신들의 학업을 방치하지 않았고, 공궁함이 그들의 뜻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복식(卜式)은 농사짓고 말을 기르면서 뜻을 세웠고, 황패(黃霸)는 감옥에서 도의를 받아 결국에는 영예에 혁혁한 복이 있게 되었으며 불후의 이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산포(山甫)는 주야로 근면하였고 오한(吳漢)은 관소의 문을 떠자니 않았는데, 어찌 그들에게 유희의 타성이 있었겠습니까?

지금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경전과 법술에는 노력하지 않고 바둑두는 놀이를 좋아하여, 사업을 폐기시키고 잠자는 것과 먹는 것을 잊으면서 온종일을 전부 소모하고는 촛불을 밝혀 계속합니다. 그들은 대국에 임해 다투며 자웅이 결정되지 않았을 때는 정신을 몰두하여 몸과 마음이 수고롭고 피곤해져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처리하지 않으며 방문한 손님은 잊고 접대하지 않으니, 비록 태뢰(太牢)의 음식이 있고 소하(韶夏)의 음악이 있을지라도 있을 틈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복과 물건을 훔치게 되면 바둑 두는 목적을 바꾸고 행사 원칙을 바꾸고 부끄러운 생각을 느슨하게 하며 분노하는 기색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들이 뜻한 바는 바둑판 하나의 범위를 넘지 않고, 힘쓰는 것은 방형 격자의 거리를 넘지 않으며, 적을 이겨도 작위에 봉해지는 상은 없고 땅을 얻어도 토지를 겸병하는 실질이 없습니다. 이런 기예(技)는 육예(六藝)가 아니며, 재능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몸을 세우는 자는 그 기술을 차용하지 않고, 인재를 선발하는 사람은 그 길을 통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병법의 의미를 구해도 손무(孫)나 오기(吳)의 무리가 아니며, 그곳으로부터 도의와 법술을 고찰해도 공씨(孔氏 : 공자)의 문하는 아닙니다. 바둑은 변화나 사기를 수단으로 하는데, 충직하고 신실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겁주고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 것은 어진 자의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겁주고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 것은 어진 자의 뜻이 아닙니다. 헛되이 시간을 낭비하며 사업을 황폐하게 하는 것은 결국 도움도 이익도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나무를 심어 치고, 돌을 놓고 던지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군자는 집에 있을 때는 신체를 부지런히 움직여 보양하고, 조정에 있을 때는 생명을 다해 충심을 바치며, 긴급한 상황에 임해서는 밥 먹는 것을 미루는데, 어떻게 바둑 두는 일에 빠지겠습니까? 이렇다고 한다면, 효도하고 우애있는 품행을 수립하고, 정조가 있는 순수한 명성을 드날려야 합니다.

지금 위대한 오(大吳)나라는 천명을 받았고 해내(海內)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며, 성스런 조정은 마음을 다하여 인재를 얻는 일에 노력하고 있으므로, 용감하고 지략이 있는 선비라면 무장의 중임을 받았으며, 학문이 깊고 아정한 무리이면 문관의 직책에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동시에 포용하고 문무를 함께 추구하여 우수한 인재를 널리 선발하고, 영웅과 준걸을 분명하게 임용하며, 고시 과목을 세우고 관작으로 상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사실 천 년마다 있는 좋은 기회이며, 백대의 양호한 대우인 것입니다. 당대의 선비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사고하여 도의에 이르고 공업을 애호하고 역량을 아껴 광명한 시대를 보좌하여 이름을 역사책에 적히도록 하고, 공로는 맹부(盟府)에 기록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군자의 최고 목표이며, 현재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하나의 나무 바둑판을 어찌 1방(方)의 나라 봉읍과 비교하겠습니까? 무지한 바둑알 3백 개를 어찌 1만 명과 비교하겠습니까? 비룡을 수놓은 의복(袞龍之服)ㆍ금석(金石)의 음악(樂)은 바둑의 즐거움을 포용하고 바둑 두는 유희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세상의 선비들이 바둑 두는 힘을 시서(詩書)에 사용한다면, 안회(顏)와 민손(閔)의 뜻이 있을 것이고, 지략에 사용하면 장량(良)과 진평(平)의 사려가 있을 것이며, 물자와 재화에 쓰면 의돈(猗頓)의 부유함이 있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쓰면 장수의 지위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으면 공명이 세워져 비천함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

손화(和)가 폐출된 후, 위요는 황문시랑(黃門侍郎)이 되었다. 손량(孫亮)이 즉위한 후 제갈각(諸葛恪)이 정치를 보좌하자, 표를 올려 위요를 태사령(太史令)으로 임명했으며, 오서(吳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화핵(華覈)과 설영(薛瑩) 등이 모두 이 일에 참여했다. 손휴(孫休)가 제위에 오르자, 위요를 중서랑(中書郎)ㆍ박사좨주(博士祭酒)로 임명했다. 손휴는 위요에게 명해 유향(劉向)의 옛 일에 의거하여 모든 서적을 교감하여 바로잡도록 했다. 또 위요에게 시강(侍講)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런데 좌장군(左將軍) 장포(張布)는 손휴가 총애하는 신하로서 하는 일마다 오점이 매우 많았으므로 위요가 유사(儒士)들에게 시강하는 것을 꺼려했다. 또 위요의 성정이 명확하였으므로 장포는 위요가 고금의 사례로써 손휴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불가능하다며 강력히 다투었다. 손휴는 장포를 매우 원망하였다. 이에 관한 말은 ‘손휴전(休傳)’에 있다. 그러나 위요는 결국 저지되어 궁궐로 들어가지 못했다.

손호(孫皓)가 즉위한 후, 위요는 고릉정후(高陵亭侯)로 봉해졌고, 중서복야(中書僕射)로 승진했으며, 이후에 직위가 강등되어 시중(侍中)에 임명되었고, 장기간 좌국사(左國史)를 겸임했다. 당시 손호의 뜻을 이어 여러 곳으로부터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손호는 이 일을 위요에게 물었고, 위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일 뿐입니다.”

또 손호(皓)가 부친 손화(和)를 위해 기(紀)를 만들려고 하자 위요는, 손화는 제위에 오르지 못했으므로 마땅히 명칭을 전(傳)으로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와 같은 일이 한 번이 아니었으므로 위요는 점점 손호의 질책과 노여움을 받게 되었다. 위요는 더욱더 걱정되고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쇠로하였으므로 시중(去侍)과 좌국사(史) 두 관직을 사직하기를 요청했으며, 편찬중에 있는 책을 완성시킨 후 이 직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손호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위요는 질병이 있어 약을 복용하고 간호를 받게 되었으므로 더욱더 긴급하게 사직을 요청했다.

손호는 매번 연회를 거행할 때마다 하루 종일 계속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주량이 어떠한지 개의치 않고 술 일곱 되를 최저 한도로 하였으며, 만일 전부 마시지 못하면 모두 강제로 부어서라도 다 마시게 했다. 위요는 평소 주량이 두 되에 불과했다. 처음 위요가 남다른 예우를 받았을 때는 항상 감량시켜 주었으며, 대로는 은밀히 술 대신 차를 내려주기도 했지만, 총애가 줄어들자 다시 억지로 술을 마시도록 했고, 그는 이 때문에 죄를 얻게 되었다. 또 손호는 술을 마신 후에는 측근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공경들을 힐란하고 모욕하도록 하여 조롱하고 능멸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은밀한 단점을 적발하여 즐거워했다. 이대 과실이 있거나 혹시 잘못하여 손호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면, 즉시 체포되어 묶이고, 심지어는 주살되기까지 했다. 위요는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여 손상시켜 내심 두려워하고 원망하도록 하는 것은 장중하지 못하며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단지 어려운 문제를 꺼내고 경전의 의의나 이론(論)에 대해 물었을 뿐이었다. 손호는 그가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앞뒤로 하여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쌓여 있었으므로 위요를 체포하여 감옥으로 보냈다. 이 해는 봉황(鳳皇) 2년(273)이다.

위요는 옥리를 통해 글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죄인은 은혜를 입고 아낌을 받음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자가 없었으나, 일찍이 황상에게 조금도 보답할 수 없었으며, 저는 황상(黃)의 은총을 욕되게 하여 스스로 최악의 죄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재가 되어 영원히 황천에 버려진다고 생각하니 저의 심정은 처참하고 고통스러우며, 사사로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있어 금령을 범하면서 황상에게 보고합니다.

죄인인 저는 옛날에 세간에 있던 고대 역법의 주석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기재된 것에는 허무한 것이 많았으며, 경전 서적의 기록과도 또 섞여 잘못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죄인이 경전의 기록을 찾아 고찰하여 이동을 살펴 대조하고, 또 보고 들어 이르게 된 재료를 모아 조사하여 동기(洞紀)를 만들었습니다. 포희(庖犧 : 복희)로부터 시작하여 진(秦)과 한(漢)에 이르기까지 총 3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황무(黃武) 이래로부터 시작하여 별도로 한 권을 더 만들었는데, 이것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또 유희(劉熙)가 지은 석명(釋名)을 보니 확실히 절묘한 곳이 많았지만, 사물의 종류가 많아 상세하고 고증하는 일은 어려웠기 때문에 항상 실수가 있었으며, 작위의 문제에 있어서는 또 정확하지 않은 곳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관작 무넺는 현재 긴급한 것이므로 잘못되게 해서는 옳지 않습니다. 죄인은 스스로 아주 미천한 신분임을 잊고 또 관직훈(官職訓)과 변석명(辯釋名) 각 한 권씩을 만들어 황상에게 바치려고 합니다. 처음 완성할 무렵에는 마침 저의 무례함으로 인해 압송되어 명령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마칠 때, 유감스럽게도 황상게 보고하지 못할 것을 생각하여 죽음에 앞서 삼가 상황을 나열합니다. 청컨대 황상께서 비부(祕府)에 알려 밖에서 가려 취하도록 하고, 저의 집에 있는 것을 바쳐 보도록 하십시오. 저는 자신이 미천하고 우매하여 쓴 것들이 황상의 뜻에 부합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마음속으로 떨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여삐 여기고 살펴보시기를 원합니다. -

위요는 이 방법으로 사면받기를 희망했지만, 손호(皓)는 그의 글에 허물이 있음을 질책했고, 이 때문에 또 위요를 힐문했다. 위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죄인이 이 책을 편찬했을 대, 사실 표를 올리려고 하면서 오류가 있음을 두려워하여 수차례 살펴보며 읽었지만 오점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힐문을 받게 되자, 벌벌 떨며 호흡조차 곤란해졌습니다. 삼가 사죄하며 오백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스스로 결박합니다.”

그리고 화핵이 이어서 상소를 올려 위요를 구원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 위요의 운명은 천 년마다 한 번 있을 만한 기회를 만나 특별히 아낌과 인정을 받았으며, 그의 유학(儒學)에 기대 사관의 일에 참가하여 초선(貂蟬)을 머리에 쓰는 높은 지위를 얻어 측근에서 모시며 폐하의 질문에 응답하였습니다. 영명한 황상께서는 인자하고 돈후하여 죽은 자를 애도하고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위요는 어리석고 무지하여 대순(大舜)과 같은 폐하의 미덕(陛下)을 널리 나타낼 수 없었으며, 사관(史官)의 일에 얽매어 신성한 의지를 서술할 수 없었고, 최고의 덕행을 빛낼 수 없었으므로, 실제로 위요의 우매함은 죽어 마땅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고심하여 위요가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부지런히 하였으며, 비록 늙었을지라도 피곤해 하지 않으며, 경전의 뜻을 탐색하여 옛 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 것을 알았으며, 고금(古今)에 걸쳐 발생한 중대한 일을 마음속에 숙지하고 있어 조정 밖의 관리 중에서 위요를 뛰어넘는 자가 적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이릉(李陵)은 한(漢)나라 장수(將)로 임명되었지만, 군대가 패배한 이후에 돌아오지 않고 흉노(匈奴)에게 투항했습니다. 사마천(司馬遷)은 이에 대해 통한해 하지 않고 이릉을 위해 유세하였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사마천이 훌륭한 사관의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편찬하던 것을 완성시키도록 하려고 차마 주살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책이 완성되자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위요는 오(吳)나라에 있어서는 역시 한나의 사마천입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앞뒤로 하여 징조가 분명하게 나타났고, 신령스런 뜻과 하늘의 반응은 계속하여 여러 차례 나타났으니, 천하를 통일하는 시기는 아마 또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통일 대업이 완성된 후, 마땅히 시절을 관찰하여 제도를 세워야 합니다. 삼왕(三王)들은 서로 예의를 따르지 않았고, 오제(五帝)는 서로 음악을 잊지 않았습니다. 내용과 형식은 길을 달리했고, 구체적인 조문의 증감에는 구별이 있었으니, 마땅히 위요와 같은 사람들을 얻어 고대의 사상 원칙에 근거하여 고쳐 세우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한씨(漢氏)가 진(秦)을 계승했을 때에는 손숙통(叔孫通)이 한 조대의 예의를 정했는데, 위요의 재능과 학식 역시 한왕조의 숙손통에 버금갑니다. 또 오서(吳書)는 비록 이미 두각을 나타냈지만 서(敘)와 찬(贊) 부분은 아직 서술되지 않았습니다. 옛날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는 문사가 전아하였고, 이후 유진(劉珍)과 유의(劉毅) 등이 지은 한기(漢記)는 멀리 반고(固)의 책에는 미치지 못하였는데, 서(敘)와 전(傳) 부분이 특히 열등했습니다. 지금 오서가 편찬되어 천년 후까지 전해져 여러 역사책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후대의 재능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우열을 순서대로 평가하여 논의하게 한다면, 위요와 같은 훌륭한 재능이 아니고서는 확실히 불후의 작품이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신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진실로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위요는 이미 70세가 되었으니 남은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원컨대 그에게 죄를 한 등급 사면시켜 종신토록 노복이 되어 저술 사업을 완성하도록 해 영원히 후인들에게 전하고 백대에 전하도록 하십시오. 삼가 이 표를 바치며 머리를 백 번 조아립니다. -


손호(皓)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요(曜)를 주살시키고 그의 가족들을 영릉(零陵)으로 유배보냈다. 위요의 아들 위륭(隆) 역시 문학에 자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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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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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1
21:19:27 (*.52.8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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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1
21:19:55
(*.52.89.88)

잉에->이에 영어로 타이핑 된 오자 수정. 위요는 주석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추가될 내용은 없을 것 같아 보입니다.

코렐솔라

2013.06.28
16:09:36
(*.104.28.55)
위소를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0
17:02:57
(*.104.141.18)
주석 추가. 제가 번역 가능한 수준이라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기록. 배송지 주라 따로 출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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