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게으른 사냥꾼님의 이글루 알토란 삼국지, 養愚님의 블로그, dragonrz님의 블로그


[[진사왕식전]]에서 분리


<전략典略>에 이르기를 양수(楊脩)의 자는 덕조(德祖)이며, 태위(太尉)인 양표(楊彪)의 아들이다. 겸손(謙遜)하고 윗사람을 공경(恭敬)하며, 재주가 있어 건안(建安: 196-220) 시절 효렴(孝廉)에 응시하여 낭중(郎中)벼슬을 하던 중 승상(丞相: 曹操)가 청하여 창조(倉曹)에 속한 주부(主簿)가 되었다. 그때, 나라가 전쟁을 하고 있어 일이 많았는데, 양수(楊脩)가 총명(總名)하여 내외(內外)일을 두루 알고 (승상의) 의중을 잘 헤아려 일을 처리하였다. (그리하여) 태자(太子: 曹丕))이하 뭇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교류하였다. 이때, 임치후(臨菑侯) 조식(曹植)이 재주가 있어 승상(丞相)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후(來) 양수와 의기투합하여 수차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단지 며칠 보지 못하였는데도, 그대를 생각함(思子)이 勞役이 되었습니다. 그대를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想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思와 想의 차이를 주목) 제가 어려서부터 사부(詞賦: 운자(韻字)를 달아 지은 한시(漢詩)의 총칭(總稱)---)를 좋아해 어언 25년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볼 때) 오늘날 사부(詞賦)의 작자(作者)는 대략 다음과 같이 줄여 말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仲宣(왕찬(王粲))은 한남(漢南)을 獨步하고, 진림((陳林)은 하삭(河朔)에서 이름이 드높고, 위장(偉長(徐幹))은 청토(青土)에서 위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공간(公幹(劉楨))은 해우(海隅)에서 필명을 떨치고, 덕련(德璉(應瑒))은 大魏에서 立身出世(發跡)하였고, 그대는 京師에서 문필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사람마다 靈蛇之珠를 가지고 있고, 집집마다 荊山之玉(좋은 재능)을 간직하고 있다 하니, 吾王(曹操)께오서 天網을 설치하여 온 세상에서 (좋은 인재를) 두루 구하시니, 오늘날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모을 인재가 없어질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 중 몇몇은 한번에 천리를 날아, (구름위로) 종적을 감출 정도의 大鵬은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진림의 재주로는 辭賦에 익숙치 않는데도 수차례 스스로 칭하기를 사마상여(司馬相如: BC 179-117)와 同等한 品格을 지니고 있다 하니, (그 사마상여를 흉내내어 쓴 글을 보면) 그것은 마치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 것과 같은 형국이라, 이전에 제가 편지를 써 이를 비웃은 바 있는데, 진림은 오히려 제가 그를 칭찬하였다고 지어내어(作論) 떠든바(盛道) 있습니다.


대저, 종자기(鍾子期)가 오늘날 까지 칭송받는 이유는 백아(伯牙)의 음악을 이해할 줄 아는 이목(耳目)이 있음이니, 저도 감히 망녕되이 진림을 칭찬할 수 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릇되이 그를 칭찬하면) 후세의 사람들이 (제가 보는 眼目이 없다고) 저를 비난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저술(著述)에는 결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사람들이 제가 쓴 글을 보고 비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좋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즉시 이를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정경례(丁敬禮: 정이(丁廙) 경례(敬禮)는 자)가 소문(小文)을 지은 적이 있는데, 저를 보고 글을 고쳐 멋있게(潤飾) 해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저의 글재주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 생각하여 고사(固辭)하였더니, 정이가 말하기를, 경은 어찌하여 (남의 글 고치는 것을)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이 좋고 (나쁨은) 결국 제가 得할 바 인바 (제 책임인 바), 후세 사람들 누가 (당신이) 제 문장을 고친 者인지 알겠는지요?” 저는 이때부터, 이 말을 좋아하여 美談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전에 공자(孔子)께서 글을 지으실 때도 남과 의견을 나누고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공자께서 지으신) 춘추(春秋)를 편집함에 이르러서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游夏] 등 제자들은 (문장이 워낙 완벽해) 감히 한자도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춘추(春秋)를 제외하고는(過此), 결점이 없는 문장을 저는 아직까지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남위(南威: 중국 춘추 시대진(晋)나라 미인(美人): 晉의 文公이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함: 南之威)정도의 미모가 있어야, 여인의 아름다움을 논할 수 있고, 용연검(龍淵劍)의 예리함이 있어야 칼날이 서있음을 논할 수 있는 법이나,


유계서(劉季緒: 유표(劉表)의 아들 유수(劉脩))는 자신의 재주가 글을 지은 사람에 미치지 못함에도 남의 글을 매도하거나 단점을 들추어 내기(利病)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전파(田巴)는 제(齊)나라의 수도(稷下)에서 궤변으로 삼황오제(三皇五帝)를 斷罪하고, 春秋五覇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유세하여 한번의 연설로 천명의 사람들을 감복 시켰으나, 노련(魯連)의 한마디 말로 인해 종신토록 함구(緘口)하였습니다.


유계서는 말재주가 과거 전파(田巴)에 미치지 못한 반면, 오늘날의 노련(魯連)은 구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유계서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대해서)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계서 따위의 입을 닫게 할 정도의 재주가 있는 사람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다는 뜻.)


사람마다 각기 嗜好가 다 다른 법이니, 난초와 혜초등의 향기를 사람들이 좋아하나 바닷가에는 (보통사람들이 꺼리는) 人臭를 좋아해 밤낮으로 이를 쫒아 다니는 사람이 있고, 함지(咸池)와 육영(六英)의 음악이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이를 즐기나 묵자(墨子)는 음악을 부정하였으니 어찌 (사람들이) 모두 같을 수 있겠습니까?


養愚생각: 曹植의 글을 유계서(劉季緒)가 자신의 주제도 모르고 비판한 것으로 추정 됨. 엄청 감정이 쌓여 있음.


이번 편지에 제가 어려서부터 지은 사부(詞賦)에 대한 소고(小考)를 보내, 그대의 의견을 구하고자 합니다.(一通相與: ‘昔尼父之文辭,與人通流’와 비교하면 뜻이 분명해 짐.) 대저 길거리에 떠도는 얘기도 아름다운 부분이 있고, 촌부(村夫)가 수레를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에도 詩經의 國風과 大雅, 小雅같은 아취가 있으니, 匹夫의 생각도 함부로 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가 비록 사부(辭賦)를 좋아하나) 사부(辭賦)는 小道라 大義를 宣揚하고 來世에 顯示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과거 楊雄은 執戟을 하고 궁정을 경호하는 先朝(漢을 일컬음)의 말단관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부(辭賦)는 壯夫가 할 바가 아니라”고 말 하였으니, (이는 지나친 말이 아니겠는지요?)


제가 비록 德이 없으나 藩侯의 지위에 있고, 힘을 다해 위로는 나라를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펴, 永世의 업적을 세워 金石에 새기고자 하는 바, 어찌 功勳이나 기록하기 위해 글을 지으며, 君子를 위해 辭頌을 짓는 무리이겠습니까? (사부(辭賦)를 좋아하는 저는 壯夫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 養愚생각: 사부(辭賦)를 좋아한다는 것은 유약하다는 이미지가 있다는 楊雄이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 강한 君主가 되어야 한다는 주위의 기대와 글에 대한 본인의 타고난 嗜好사이에서 갈등하는 25세 젊은이의 고뇌를 엿볼 수 있음. 평소 말이 통하는 인생의 선배인 楊脩에게 이러한 인생의 고뇌를 물어보는 것으로 이해됨)


만일, 제 뜻이 결과를 맺지 못하고, 제가 가려고 하는 길이 가로막힌다면(君主로서의 인생 행로를 말함), 저는 장차 史官의 입장에서 역사나 기록하고, 시대의 風俗을 비판하여 得失을 논하고, 仁義를 정의해 밝힘으로서 나 자신만의 견해(一家之言)를 이루고 싶습니다. (이렇게 제가 쓴 글은) 비록 사마천처럼 名山에다가 감추려고 하지는 않을 망정 저와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에게 나중에 전하고자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제가 老年에 이를때 까지 하려는 일이니, 어찌 오늘 다 論할수 있겠습니까? 이상의 제 말을 제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대에게 비판을 구함은), 마치 惠施가 莊子에게 유익한 조언을 해 준것 처럼 그대가 惠施의 역할을 나에게 해 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뵙겠습니다. 편지글로서는 저의 생각을 모두 실을수가 없군요.


양수가 사죄하며 말씀드립니다. 며칠 모시지 못한 것이 마치 일년이 지난듯 합니다. 어찌 군후(君侯)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돌보는 마음으로 인해 저의 군후(君侯)를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더 깊어지겠습니까?(제가 군후(君侯)를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짐은 군후(君侯)께서 저를 아끼시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嘉命을 욕되이 하고보니(편지를 받고나니), 그 문장이 아름답기 이를데 없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어본즉, 비록 (詩經의) 雅와 頌篇이라 하더라도 (이 편지의 문장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仲宣(왕찬王粲)이 漢 땅에서 이름을 날리며, 진림(陳林)이 冀域에서, 서간(徐幹)과 유정(劉楨)이 청주(青)과 예주(豫) 땅에서 각기 명성이 드높은 것은 모두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는 采風의 소리를 듣고 높은 덕을 우러러 보기에도 바쁘고, 스스로 돌아다니며 보는바 마다 깨우칠 것 뿐인데 어찌 감히 “(사람들이 저를) 높이 본다”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군후(君侯)께서는 어려서부터 貴히 자라시고, 본래 周旦과 희발(姬發)의 자질을 타고나셨으며, 더하여 성인(聖人)과 선인(善人)의 가르침을 받으셨습니다. 멀리서나 가까이서 지켜본 자 모두 말하기를 漢나라 宣帝, 昭帝의 덕을 행할 분이시며 大業을 빛나게 하실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군후(君侯)께서 傳記및 古典을 널리 읽으시고 문장에 까지 뜻이 있으실 줄은 모두 모르고 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읽어본바) 이제 이미 문장이 왕찬(王粲)을 품고 진림(陳林)을 초월하셨으며, 그 외의 (앞서 언급한) 몇사람의 문인들 경지를 이미 넘어셨습니다. 보는 사람은 놀라서 눈을 씻을 지경이며, 듣는 자는 고개를 기울여 귀를 세울 지경입니다. 도데체 體通性達하여 날 때 부터 받은 재능이 아니라면, 그 누구가 이 경지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제가 일찍이 군후(君侯)께서 牘과 筆을 잡고 직접 글을 짓는 것을 본 일이 있는데, 마치 마음속에 글이 이미 완성되어 있어, 다만 손으로 글을 옮겨 적기만 하는 듯 잠시의 熟考함이 없었습니다. 공자(孔子)는 日月같은 존재라 뛰어 넘을 수 없는 바, 양수(楊脩)가 군후(君侯)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제가 일전에 (군후(君侯)가 지으신) 鶡賦를 보고 (돌아와) 며칠동안 씨름하며 暑賦를 지었으나 올리지 못한 바 있는데, 이것은 마치 (여인네가) 서시(西施)를 보고 돌아와 자신의 용모를 더욱 참괴(慙愧)함과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군후(君侯)께서는 이러한 줄을 모르시고 외람되게도 글을 주셔서 저에게 다듬고 고칠 것을 교지(敎旨)하셨습니다. 춘추(春秋)가 완성된 뒤에 그 누구도 더하거나 뺄 수 없었고, 주해서인 여씨춘추(呂氏春秋)와 회남자(淮南子)도 한자 한자가 천금과 같은 무게가 있음이니, 제자들이 함구(緘口)하고 市人들이 拱手함은 성현(聖賢)들이 卓越함이요, 그 재능이 平凡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賦頌은 그 뿌리가 古詩에서 유래하는 바, 공자(孔子)의 손을 다시 거치지 않더라도 風流와 雅趣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의 가문의 조상이신 양자운(楊子雲)은 나이 드시어 일에 밝지 않으신데도 굳이 글을 지으셨으나, (훗날) 그 글 지으신 것을 후회 하신 바 있읍니다. (그러나), 그와 같더라도, 중산보(仲山甫)와 주공단(周公旦)등 조상이 모두 틀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군후(君侯)께서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잊고, 한낱 비루한 가문의 조상의 한때 過言만을 기술하시는 것은, 저의 부족한 소견으로는 생각하시고 취하실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나라를 경영할 대의(大義)를 잊지 않으시면, 명성(名聲)이 천 년을 갈 것이며 景鍾에 이름을 새기고 竹帛에 이름을 남기실 것인즉, 이러한 것은 군후(君侯)의 타고난 度量이며, 平素에 蓄積된 자질인 바, 어찌 文章으로 인해 (이러한 대업성취가) 방해 받겠습니까? 갑자기 은혜를 받은바(편지글을 받은바), 속하는 다만 암송하여 외우기만 할 뿐 감히 惠施를 흉내내어 莊子를 욕보이는 짓(글을 고치는 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유계서(劉季緒)는 잔 재주의 사람이니, 언급할 가치도 없겠습니다. 창졸간에 答하느라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양수(楊脩)가 사죄드립니다.


양수와 조식은 이렇게 왕래하였고, 그 차례 이러하였다.


건안24년(219년) 가을에, 조조는 양수가 예전부터 국가의 언교(言教)를 빼내고, 여러 제후들과 서로 왕래한다[交關]는 이유를 들어 양수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양수는 죽음을 당할때가 되자


"나는 예전에 죽었어야 했는데, 이때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다(?)"


했다. 왕수가 죽고, 100여일후에 조조가 죽었다. 태자 조비가 왕위에 오르고, 나중에 황제가 되었다. 예전에 왕수가 왕모(王髦)로부터 검을 얻어서, 태자 조비에게 주었다. 조비는 그것을 항상 차고 다녔다. 나중에 즉위한뒤에, 낙양에 머물렀는데, 감깐 출궁하게 되었는데, 왕수가 너무 아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칼을 휘둘르며, 수레를 멈추게 한뒤에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양덕조가 예전에 말했던 왕모의 검이다. 왕모는 지금 어디 살고 있는가?".


곧 그를 불러오게 하여, 그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했다.


지우문장지(摯虞文章志): 유계서(劉季緒)는 이름이 유수(劉脩)익 유표(劉表)의 아들이다. 관직이 동안태수(東安太守)에 이르렀다. 시(詩), 부(賦), 송(頌) 6편을 지었다.


세어: 양수(楊脩)가 25살이 되었을때 공자(公子)중에서 재능이 있다는 것이 알려져, 태조도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는데, 양수는 정의(丁儀)형제랑 같이 조식을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태자 조비는 이것을 걱정하였는데, 조비가 조가현(朝歌縣)의 조가장(朝歌長) 오질(吳質)을 내부로 끌어들일려고, 버리는 대나무 상자를 수레에 싣고 그 안에 오질을 넣고, 궁궐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양수가 이 일을 알고 조조에게 가서 고해 바쳐, 조조는 사람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다. 조비가 걱정을 하며, 오질에게 말하니, 오질이 말했다.


"무얼 걱정하십니까? 내일 대나무 상자에 비단을 가득 넣어 수레 안에 싣고 다시 수레를 궁궐 안으로 나가게 하십시오. 양수가 반드시 그 속에 어떤 사람이 들어있다고 의심해 다시 일러바칠 것입니다. 다시 일러바치게 되면 [重白] 반드시 검사가 이루어질 것이고, 검사를 해봐도 아무 것도 안 나오게 되면 오히려 저들이 거짓말을 한 게 됩니다."


조비는 그 말을 따랐고, 양수는 과연 또다시 일어 바쳤으나, 아무도 수레안에 없었고, 이때부터 태조는 양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양수는 가규(賈逵), 왕릉(王淩)과 함께 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조식과 친하게 지냈다. 조식을 만날 때마다 궁궐에 관련된 일에 대하여 태조의 의도를 미리 헤아려서, 예상되는 10여개의 예상 답변을 만들었고---답교십여조[答教十餘條], 답교[荅教]---, 만약에 조조가 어떤 일로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답변하라고 했고, 질문을 하자마자 답이 나오니, 태조가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조사를 해봤고 양수가 한 일이었음이 들통났다.


또 조조가 조비와 조식 둘에게 각각 업성문을 나갔다 오라고 이르고는 한편으로 가만히 사람을 시켜서 문지기에게 그들을 내어보내지 말라고 분부해 놓고는 어떻게 하는지 살폈다. 조비가 먼저 성문에 갔지만 나가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양수가 조식에게 말했다.


"만일에 문지기가 막고 나가시지 못하게 한다면, 공은 지금 왕명을 받들고 나가시는 터이니, 그를 참해 마땅하오리다."


조식이 양수의 말대로 그래도 했다. 이 때문에 양수는 제후(조조의 아들)들과 밀통한다는 [交搆] 이유 때문에 처형되었다.


양수(楊脩)의 아들 양효(楊嚻)이고, 양효의 아들은 양준(楊準)인데, 모두들 진(晉)나라 때에 이름이 있었다. 양효는 태시(泰始: 265-274) 초기에 전위장군(典軍將軍)이 되었으며, 심려(心膂, 심장과 등뼈: 중요한 신하)의 하나가 되었으나, [心膂之任] 빨리 죽었다. 양준의 자는 시구(始丘)이인데, 진혜제(晉惠帝) 말기에 기주자사(兾州刺史)가 되었다.


荀綽冀州記曰:準見王綱不振,遂縱酒,不以官事為意,逍遙卒歲而已。成都王知準不治,猶以其為名士,惜而不責,召以為軍謀祭酒。府散停家,關東諸侯議欲以準 補三事,以示懷賢尚德之舉。事未施行而卒。準子嶠字國彥,髦字士彥,並為後出之俊。準與裴頠、樂廣善,遣往見之。頠性弘方,愛嶠之有高韻,謂準曰:「嶠當 及卿,然髦小減也。」廣性清淳,愛髦之有神檢,謂準曰:「嶠自及卿,然髦尤精出。」準歎曰:「我二兒之優劣,乃裴、樂之優劣也。」評者以為嶠雖有高韻,而 神檢不逮,廣言為得。傅暢云:「嶠似準而疏。」嶠弟俊,字惠彥,最清出。嶠、髦皆為二千石。俊,太傅掾。


순작(荀綽)의 기주기(冀州記)에 이르길 : 양준(楊準)은 왕의 정치가 떨치지 못함을 보고는 마침내 술을 탐닉하고 조정의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소요하며 해를 보낼 뿐이었다. 성도왕은 양준이 쓰이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오직 그가 명사라는 이유로 아까워하며 책망하지 않고 불러다 군모좨주로 삼았다. 막부가 해산된 이후에 집에 머물렀는데 관동의 제후들이 의논하여 양준을 3공에 보하여 현자를 품고 덕을 숭상하는 행동을 보이고자 하였다. 일이 시행되기도 전에 (양준이) 죽었다.


양준의 아들 중 양교(楊嶠)는 자가 국언(國彥)이고 양모(楊髦)는 자가 사언(士彥)이었는데 더불어 후진의 준걸이었다. 양준은 배외와 악광과 더불어 친했는데 ( 두 아들을) 보내 만나보게 하였다. 배외는 성격이 호방해서 양교의 고상한 풍격을 좋아해 양준에게 말하길


「양교는 마땅히 그대에게 미치겠지만 양모는 약간 모자란 점이 있소.」


악광은 성격이 맑고 순박했기에 양모의 청렴한 절조를 좋아해 양준에게 말하길


「양교는 자연히 그대에게 미치겠지만 양모는 더욱 정출하오.」


양준은 탄식하며 말하길


「내 두 아이의 우열은 곧 배외와 악광의 우열이구나.」


평하는 사람들은 양교는 비록 고상한 풍격이 있으나 청렴한 절조의 부분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하므로 악광의 말을 타당하다고 여겼다. 부창(傅暢)이 말하길


「양교는 양준과 닮았지만 성글다.」


양교의 동생은 양준(楊俊)으로 자가 혜언(惠彥)이며 재능이 뛰어났다. 양교와 양모는 모두 2000석의 관리를 지냈다. 양준은 태부연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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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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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6.01.01
00: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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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의 후손 관련은 dragonrz님의 번역으로 출처는 상단에 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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