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先主)는 성이 유(劉), 휘가 비(備)이고, 자(字)는 현덕(玄德)이다.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으로,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원수(元狩) 6년(B.C 117)에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탁현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주금(酎金) 문제에 좌죄되어 [주; 주금이란 매년 8월 천자가 종묘에 제사지낼 때, 제후왕이나 열후들이 부조형식으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봉헌하는 황금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한 무제 때(원수가 바로 무제 때의 연호중 하나입니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고 전제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주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거나 정해진 양에 모자란다는 죄목으로 많이 이의 작위를 빼앗습니다. 유비의 조상도 이 때 걸린 것입니다] 후작을 잃고 이로 인해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주1) 

(주1)[전략]典略 - 유비는 본래 임읍후(臨邑侯)의 지속(枝屬-지파, 방계친척)이다.
 
[원래 유비 조상은 효경제 후손이고, 광무제로 대표되는 후한의 황실과는 크게 연관성이 없는 걸로 아는데, 찾아보니까 광무제의 형인 유중(劉仲)의 후사를 이은 자가 북해 정왕(北海 靖王) 유흥(劉興)이고, 이 흥의 아들이 임읍후 유복(劉復)으로 되어 있네요. 그런데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揚)의 동생 또한 임읍후인데 이름은 유양(劉讓)입니다. 유복과 유양이 어떤 인척관계인지 더 살펴보지는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후한서』의 주석에는 이 유양이 경제의 7대손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봐서 『전략』에서 말하는 임읍후란 유양(劉讓)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선주(先主)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東郡范令-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선주(先主-유비)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신발을 팔고 자리 엮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집 남동쪽 모퉁이 울타리 위에 뽕나무가 높이 자라 다섯 장(丈) 남짓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잎과 가지가 무성하여 마치 거개(車蓋-수레덮개)[蓋車 ; 황태자나 황자(皇子)는 안거(安車)를 타고, 황손(皇孫)은 연거(緣車), 공·열후는 안거를 탑니다. 황자가 왕이 되면 왕청(王靑) 개거를 탑니다. 어디서 개거가 황제가 타는 수레라고 하던데, 적어도 한대에는 그런 의례는 없군요.] 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치 않게 여겼으며, 어떤 이는 이 집에서 응당 귀인(貴人)이 나올 것이라 했다. (주2) 

(주2) [한진춘추]漢晉春秋 – 탁군 사람 이정(李定)이 말했다, 

“이 집에서 필시 귀인이 나올 것이다.”

선주가 어릴 때 종중(宗中)의 여러 아이들과 함께 나무 아래에서 놀면서 말했다,

“나는 꼭 이렇게 깃털로 장식된 덮개가 있는 수레에 탈거야.” 

숙부 유자경(劉子敬)이 말했다, 

“너는 허튼소리 말거라. 우리 가문을 망치겠구나!”
 
15 세가 되자 모친이 학문을 익히도록 하자, 동종(同宗)인 유덕연(劉德然), 요서(遼西) 사람인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예전에 구강(九江)태수를 지낸 같은 군(郡) 출신의 노식(盧植)을 섬기게 되었다. 유덕연의 부친인 유원기(劉元起)는 항상 선주에게 비용을 대어주어 유덕연과 똑같이 대했다. 
 
유원기의 처가 말했다, 

“각자가 따로 일가를 이루고 있는데 어찌 항상 이처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유원기가 말했다, 

“우리 종중의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오.” 

공손찬과 깊이 교우를 맺었는데 공손찬의 나이가 더 많았으므로 선주는 그를 형으로 섬겼다. 
 
선주는 책 읽는 것은 아주 즐기지는 않고,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을 좋아했다. 신장은 7척 5촌에 (※)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에 닿았고 눈을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 후한 때 1척≒23cm. 즉 7척 5촌은 약 172.5cm)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며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표정에 드러내지 않았고, 호협(豪俠)들과 교우를 맺는 것을 좋아하니 젊은이들이 다투어서 그를 따랐다. 
 
중산(中 山-기주 중산국)의 대상(大商)인 장세평(張世平)과 소쌍(蘇雙) 등은 재산이 누천금(累千金)이었는데, 말 장사하러 탁군을 돌아다니다 선주를 보고는 그를 남다르게 여겨 많은 돈과 재물을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선주는 많은 무리들을 모을 수 있었다.
  
영제(靈帝:168-189) 말, 황건(黃巾)이 봉기하자 주군(州郡)에서 각각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선주는 그 부속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鄒靖)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安喜尉-중산국 안희현의 현위)에 제수되었다. (주3) 

(주3) [전략] – 평원 사람인 유자평(劉子平)은 유비가 무용(武勇)이 있음을 알았다. 이때 장순(張純)이 반란을 일으키자 청주에서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게 되었다. 종사(從事-주목이나 군수의 속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장순을 토벌하게 했는데, 평원을 지나다 유자평이 유비를 추천하니 이에 함께 뒤따르게 되었다. 들판에서 적을 만났는데, 유비가 상처를 입어 죽은 척 하자 적들이 뒤쪽으로 떠났고 이 때문에 그를 수레에 태워 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뒤 군공(軍功)을 세워 중산(中山)의 안희위(安喜尉)에 임명되었다.
  
독우(督郵-군郡의 감찰관) [督郵;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독우라는 관직은 『연의』의 묘사처럼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직이 아닙니다. 원래 군수의 보좌관으로 관리의 규찰이나 소속 현의 위법행위에 대한 감독을 맡은 관직입니다. 1개 군의 2~5개의 부(部)로 나눠서 각 부마다 1명의 독우를 둡니다]가 공적인 일로 (안희)현에 도착했다. 선주가 그를 만나기를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곧바로 들어가 독우를 묶고 장(杖) 2백 대를 때렸다. 그리고 인끈을 풀어 그의 목에 걸고는 그를 말뚝(馬枊)에 묶어두고 관직을 버린 채 달아났다. (주4) 
 
(주 4) [전략] – 그 후 주군(州郡)에서 조서를 받으니, 군공을 세워 장리(長吏)가 된 자들을 응당 사태(沙汰-선별하여 추려냄)하라는 것이었다. 유비는 자신이 쫓겨날 것으로 의심했다. 독우가 현에 도착하여 유비를 내쫓으려 했는데, (독우는) 유비가 평소에 알던 사람이었다. 유비는 독우가 전사(傳舍-객사)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날 것을 청했으나 독우는 병을 칭하며 만나려 하지 않았다. 유비는 이를 한스럽게 여겨 치소로 되돌아가서는, 다시 이졸(吏卒)을 거느리고 전사(傳舍)로 와서 문 안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나는 부군(府君-태수)의 밀교를 받아 독우를 체포하러 왔다.” 

이에 상(床-좌탑)을 가져와 그를 묶고는 (현의) 경계까지 끌고 갔다. 스스로 인끈을 풀어 독우의 목에 걸고,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 백여 대를 매질해 죽이려 했는데, 독우가 애걸하자 그를 풀어주고 떠났다.
 
얼마 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단양(丹楊)으로 가서 모병하게 했다. 선주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下邳)에 이르러 적(賊)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다.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고당위(高唐尉-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주5) 

(주5) [영웅기]英雄記 –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수도)에 있다가 그 뒤 조공(曹公-조조)과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때마침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었는데, 유비 또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공손찬은 표를 올려 (선주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자 잠시 평원령(平原令-평원국 평원현의 현령)을 맡고 그 뒤 평원상(平原相-평원국의 국상. 태수급)을 겸했다. 
 
군민(郡民)인 유평(劉平)이 평소 선주를 깔보며 그 아래에 있음을 수치스러워 하여, 객(客-문객, 노객)을 보내 선주를 찔러 죽이게 했다. 객(客)이 차마 찌르지 못하고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나니, 그가 인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주6)

(주 6) [위서]魏書 – 유평이 객(客)으로 하여금 유비를 찌르게 했는데, 유비는 그 일을 모르고 그 객(客)을 심히 후대하자 객이 그 일을 털어놓고 떠났다. 이때 인민들이 굶주리자 떼 지어 모여 노략질하고 사납게 굴었다. 유비는 밖으로 도둑질을 막고 안으로 재물을 풍성하게 베풀었다. 사(士-선비 or 병졸?) 중의 아랫사람이라도 필히 자리를 같이하고 같은 그릇으로 함께 먹으며 가리거나 고르는 일이 없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부했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자 선주는 전해와 함께 동쪽으로 가서 제(齊 -청주 제국)에 주둔했다. 

조공(曹公-조조)이 서주(徐州)를 정벌하자(194년의 일) 서주목 도겸(陶謙)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선주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선주는 스스로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 오환(烏丸)의 잡다한 호기(胡騎-이민족 기병)를 거느리고 있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丹楊兵) 4천을 선주에게 보태어주자 마침내 전해를 떠나 도겸에 귀부했다. 도겸은 표를 올려 선주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했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별가(別駕) 미축(麋竺)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州)의 백성들을 이끌고 선주를 영접했으나 선주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비의 진등(陳登)이 선주에게 말했다, 

“지금 한실(漢室)이 능지(陵遲-쇠퇴)하고 해내(海內-천하)가 뒤집어지려 하니, 공을 세우고 대사를 이루는 것은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서주는 풍요롭고 호구(戶口)가 백만이니, 부디 사군(使君-주자사에 대한 경칭)께서 뜻을 굽혀 이 주(州)를 맡아 주십시오.” 
 
선주가 말했다, 

“원공로(袁公路-원술)가 가까이 수춘에 있소. 그는 사세오공(四世五公-4대에 걸쳐 삼공을 다섯 명 배출함)의 명문이고 해내가 그에게 귀부하고 있으니 가히 그에게 맡길 만하오.” 
 
진등이 말했다, 

“공로(公路)는 교호(驕豪-교만)하여 난을 다스릴만한 주인이 아닙니다. 지금 사군(使君)을 위해 보기(十萬) 10만을 모으려 하니, 가히 위로는 군주를 도와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 오패(五霸)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할지(割地-땅을 나누어 차지함)하여 변경을 지키며 공(功)을 죽백(竹帛)에 남길 만합니다. 만약 사군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 진등도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이 선주에게 말했다, 

“원공로가 어찌 우국망가(憂國忘家-나라를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음)할 자겠소? 무덤 속에 있는 (원씨 조상의) 고골(枯骨-해골)을 어찌 개의한단 말이오? 오늘의 일은 백성이 유능한 이에게 맡기자는 것이니,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고 뒷날 후회해도 늦을 것이오.”

이에 선주가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주7) 

(주7) [헌제춘추]獻帝春秋 – 진등 등이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했다, 

“하늘에서 재려(災沴- 재앙, 자연재해)가 내리고 화(禍)가 저희 주(州)에 미치니 주(州)의 장수가 죽어 생민(生民)들에게 주인이 없게 되었습니다. 간웅(姦雄)이 하루아침에 이를 틈타 맹주(盟主-원소를 가리킴)께 일측지우(日昃之憂-해가 기울 때까지 근심함)를 끼칠까 두려워, 이에 옛 평원상 유비 부군(府君)을 함께 받들어 종주(宗主)로 삼아, 백성들로 하여금 오래도록 귀의할 곳이 있음을 알게 하였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도적들이 종횡하여 갑옷을 벗을 겨를도 없어 삼가 하리(下吏-하급관리)를 보내 집사(執事-귀하, 그대)께 고합니다.” 

원소가 대답했다, 

“유현덕(劉玄德)은 홍아(弘雅-고아)하고 신의(信義)가 있소. 지금 서주(徐州)가 그를 즐거이 추대하니 실로 내 소망에 부합하오.”
 
원술이 와서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우이(盱眙-하비국 우이현.=盱台), 회음(淮陰-하비국 회음현)에서 이를 막았다. 조공(曹公-조조)이 표를 올려 선주를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삼고 의성정후(宜城亭侯)에 봉하니, 이 해가 건안 원년(196년)이다. 
 
선주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守將) 조표(曹豹)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여포가 선주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자 선주는 군을 돌려 해서(海西)에 주둔했다. (주8) 

(주 8) [영웅기] – 유비는 장비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군을 이끌고 회음(淮陰) 석정(石亭)에서 원술과 싸웠으나 이기고 짐을 되풀이했다. 도겸의 옛 장수인 조표(曹豹)가 하비에 있었는데, 장비가 그를 죽이려 했다. 조표는 둔영을 견고히 하고 수비하면서 사람을 보내 여포를 불렀다. 여포는 하비를 차지하고 장비는 패주(敗走-패해서 달아남)했다. 유비가 이 일을 듣고 군을 이끌고 되돌아왔는데, 하비에 도착하자 군사들이 궤주했다.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어 동쪽으로 가서 광릉(廣陵)을 차지하고 원술과 싸웠으나 또 패했다.

양봉(楊奉), 한섬(韓暹)은 서주(徐州), 양주(揚州)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선주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선주는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고 여포는 선주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관우(關羽)를 보내 하비를 지키게 했다.
  
선주는 소패(小沛)로 돌아와 다시 군사를 합쳐 만여 명을 얻었다. (주9) 

(주9) [영웅기] – 유비가 광릉(廣陵)에 주둔할 때 기아(飢餓-굶주림)로 곤축(困踧- 곤궁하고 급박함)하여 대소 관원, 군사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곤궁과 굶주림이 핍박하자 소패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에 관원을 보내 여포에게 항복을 청했다. 여포는 유비를 서주로 돌아오게 하고 그 세력을 아울러 원술을 공격했다. 자사(刺史)의 거마(車馬-수레와 말)와 동복(童僕-수행 종자)을 갖추어 유비의 처자와 부곡, 가속들을 사수(泗水) 가로 보내자 길에서 맞이해 서로 즐거워했다. 
 
/ [위서]魏書 – 제장들이 여포에게 말했다, 

“유비는 여러 차례 반복(反覆-언행을 이리저리 고침)했으니 기르기 어렵습니다. 의당 조기에 도모해야 합니다.” 

여포가 들어주지 않고 이 일을 유비에게 말했다. 유비는 내심 불안하여 스스로 의탁할 것을 청하고, 사람을 시켜 여포를 설득해 소패에 주둔하기를 원했다. 이에 여포가 유비를 (소패로) 보냈다.
  
여포가 이를 꺼려 친히 출병해 선주를 공격했고 선주는 패주해 조공(曹公-조조)에게 귀부했다. 조공이 그를 후대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장차 패(沛)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조공은) 군량을 대어주고 군사들을 보태어 동쪽으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가 고순(高順)을 보내 이를 공격하자 조공은 하후돈(夏侯惇)을 보냈으나 능히 구원할 수 없었고 고순에게 패했으며, (고순은) 다시 선주의 처자를 사로잡아 여포에게 보냈다. 
 
조공은 친히 출병해 동쪽을 정벌하고 (주10) 선주를 도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다가 사로잡았다. 
 
(주 10) [영웅기] – 건안 3년(198년) 봄, 여포는 사람을 시켜 금을 지니고 하내(河內-사례 하내군)로 가서 말을 사오게 했는데, 유비의 군사들에게 약탈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여포는 중랑장(中郎將) 고순(高順), 북지태수(北地太守) 장료(張遼) 등을 보내 유비를 공격했다. 

9월, 마침내 패성(沛城)을 격파하자 유비는 홀몸으로 달아났고, (고순 등은) 그의 처자식을 사로잡았다. 

10월, 조공(曹公)이 친히 여포를 정벌했다. 유비는 양국(梁國-예주 양국) 경계에서 조공과 만났고 마침내 조공을 따라 함께 동쪽을 정벌했다.
 
선주는 다시 처자를 되찾고, 조공을 따라 허도로 되돌아왔다. 표를 올려 선주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삼고 예우가 더욱 중해지니 출행할 때는 같은 수레에 타고 앉을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원술이 서주를 지나 북쪽으로 원소에게 가려고 하자, 조공은 선주를 보내 주령(朱靈), 노초(路招)를 이끌고 원술을 요격(要擊)하게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선주가 출발하기 전, 헌제(獻帝)의 구(舅-장인)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董承)이 이르길, (주11) 황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공을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고 했다. 선주는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주11) 신 송지(→주석자인 배송지裴松之)가 보건대, 동승은 한(漢) 영제(靈帝) 모친인 동태후(董太后)의 조카이며 헌제(獻帝)에게는 장인(丈人)이다. (※ 동귀인은 동승의 딸) 옛날에는 장인이란 명칭이 없었으므로 이 때문에 그를 (장인이라 하지 않고) 구(舅)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조공이 선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과 나 조조뿐이오. 본초(本初-원소) 같은 무리는 족히 여기에 낄 수 없소.” 

선주는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비저(匕箸-수저)를 떨어뜨렸다. (주12) 

(주12) 화양국지(華陽國志) – 이때 곧바로 천둥벼락이 치자 유비가 조조에게 말했다, 

“성인(聖人)이 말하길, ‘빠른 천둥과 거센 바람에는 필시 낯빛을 고친다.’ 하셨으니 실로 그러합니다. 한바탕 벼락의 위세가 가히 이정도군요!”
 
마침내 동승, 장수교위 충집(种輯), 장군 오자란(吳子蘭), 왕자복(王子服-후한서에 의하면 왕복王服)등과 함께 공모했는데, 때마침 사명을 받게 되어 실행하지 못했다. 일이 발각되어 동승 등이 모두 복주(伏誅-처형)되었다. (주13)

(주13)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 – 동승이 유비와 모의하여 미처 실행하기 전에 유비가 출병하게 되었다. 동승이 왕자복에게 말했다, 

“곽다(郭多-곽사)는 수백의 군사로 이각(李傕)의 수만 명을 무너뜨렸으니 다만 족하(足下-귀하)와 내가 뜻을 함께하면 되지 않겠소! 옛날 여불위의 가문은 자초(子楚-진시황의 부친인 진秦의 장양왕)를 기다려 그 뒤에 높아졌으니 지금 나와 그대도 이에 따라야 하오.” 

왕자복이 말했다,

“감당하지 못할까 황망하고 두려우며 또한 군사도 적습니다.” 

동승이 말했다, 

“거사를 끝내고 조공의 군사를 얻으면 충분하지 않겠소?” 

왕자복이 말했다, 

“지금 경사(京師-수도)에 어찌 믿을만한 자가 있겠습니까?” 

동승이 말했다, 

“장수교위 충집(种輯), 의랑 오석(吳碩)이 내 복심(腹心-심복)으로 일을 처리할 자들이오.” 

마침내 계책이 정해졌다.
 
선주가 하비를 점거하고, 주령 등은 되돌아왔다. 이에 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관우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왔다. (주14) 

(주 14) 호충(胡沖)의 [오역]吳歷 – 조공이 여러 차례 친근한 자를 은밀히 보내 제장들이 빈객을 맞아 주연을 베푸는 자가 있는지 엿보게 하니, 번번이 이 일로 인해 장수들이 해를 입었다. 유비는 이때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을 거느리고 무청(蕪菁-식물의 이름. 순무)을 심고 있었는데, 조공이 사람을 시켜 문 안을 엿보게 했다. 그가 떠난 후, 유비가 장비, 관우에게 말했다, 

“내가 어찌 채소나 기를 사람이겠느냐? 조공이 필시 의심을 품었으니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그날 밤 뒤쪽 울타리를 열어 장비 등과 함께 경기(輕騎-가볍게 장비한 말)를 타고 떠나며, 하사받거나 선물 받은 의복을 모두 봉해 남겨두었다. 이에 소패로 가서 군사들을 거두어 합쳤다. 
 
/ 신 송지가 보건대, 위무제(魏武帝-조조)는 선주를 보내 제장들을 통솔해 원술을 요격하도록 하자 곽가 등이 아울러 간언했으나(유비를 보내는 것을 만류했으나) 위무제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 일이 명백히 그러하니 채소를 심다가 달아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호충(胡沖)이 말한 바는 그 괴벽(乖僻-어그러지고 치우침)함이 어찌 이토록 심하단 말인가!
 
동해(東海)의 창패(昌霸)가 모반하고 군현들 다수가 조공(曹公)을 배반하고 선주 편에 서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고, 손건(孫乾)을 보내 원소와 연화(連和-연결하여 화친함)했다. 조공이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0년), 조공이 동쪽으로 선주를 정벌하자 선주가 패적(敗績-대패)했다. (주15) 

(주 15) [위서] – 이 무렵, 공(公-조조)은 바야흐로 관도(官渡)에 위급한 일이 있어 제장들을 나누어 관도에 주둔시키고, 친히 정병(精兵)을 이끌고 유비를 정벌했다. 당초 유비는 공(公)이 대적(大敵)과 연접해 있으므로 동쪽으로 오지 못하리라 여겼는데, 후기(候騎-척후기병)가 갑자기 와서 조공이 친히 왔다고 말했다. 유비는 크게 놀라면서도 이를 믿지 않았다. 친히 수십 기를 이끌고 나가 공의 군대를 살펴보다가, 휘정(麾旌-대장기)을 보자 이내 군사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공은 그 군사들을 모두 거두고 선주의 처자를 붙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선주는 청주(靑州)로 달아났다. 청주자사 원담(袁譚)은 선주의 옛 무재(茂才)였기에 보기(步騎-보병과 기병)를 이끌고 선주를 맞이했다. 선주는 원담을 따라 평원에 도착했고 원담은 급히 사자를 보내 원소에게 고했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도로에서 봉영(奉迎-영접)하고 자신은 업(鄴)에서 2백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선주와 서로 만났다. (주16) 

(주16) [위서] – 유비가 원소에 귀부하자 원소 부자(父子)가 마음을 기울여(傾心) 공경하고 중히 대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흩어져 달아났던 사졸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조공이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자 여남(汝南)의 황건 유벽(劉辟) 등이 조공을 배반하고 원소에 호응했다. 원소는 선주를 보내 군을 이끌고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아래를 공략하게 했다. 관우는 달아나 선주에게로 돌아왔다. 

조공은 조인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원소군에게로 되돌아갔다.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하여, 원소를 설득해 남쪽으로 형주목 유표(劉表)와 연결하도록 했다. 원소는 선주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적(賊) 공도(龔都) 등과 합쳐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공이 채양(蔡陽)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선주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공이 원소를 격파한 후 친히 남쪽으로 선주를 공격했다. 선주는 미축(麋竺), 손건(孫乾)을 유표에게 보내 서로 소식을 전하자,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선주를 영접해 상빈(上賓)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에게 귀부하는 형주의 호걸(豪傑)들이 날로 많아지자 유표는 선주의 마음을 의심해 은밀히 그를 방비했다. (주17) 

(주 17) [구주춘추]九州春秋 – 유비는 형주에 여러 해 머물렀다. 일찍이 유표와 자리를 함께 했는데, 일어나 측간에 갔다가 넓적다리 안에 군살이 붙은 것을 보고 개연(慨然-분개함)히 눈물을 흘렸다. 자리로 돌아온 뒤 유표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유비에게 물었다. 유비가 말했다, 

“제 몸이 항상 말안장을 떠나지 않으니 넓적다리 살이 모두 없어져 버렸는데, 지금은 다시 말을 타지 않으니 넓적다리에 군살이 올랐습니다. 세월은 이처럼 빨리 흘러 장차 노인이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공업(功業)을 아직 세우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슬퍼했습니다.” 
 
/ [세어]世語 – 유비가 번성에 주둔할 때 유표가 그를 예우했으나 그 사람됨을 꺼려 깊이 신용하지는 않았다. 일찍이 유비를 청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괴월(蒯越), 채모(蔡瑁)는 이 기회를 틈타 유비를 해치려 했다. 유비가 이를 알아채고 거짓으로 측간에 가는 것처럼 하고는 몰래 달아났는데, 타고 있던 말의 이름이 적로(的盧)였다. 적로를 타고 달아나다 양양성 서쪽 단계(檀溪) 물에 떨어지니, 물에 빠져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비가 급하게 말했다, 

“적로야, 오늘 재앙이 닥쳤으니, 가히 힘쓸 만하지 않느냐!” 

이에 적로가 3장(丈)을 뛰어 올라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고 물에 떠올라 강을 건넜다. 중간쯤 떠내려갔을 때 추격하는 자들이 도착해 유표의 뜻이라며 사죄하며 말했다, 

“어찌 이토록 빨리 떠나십니까!” 
 
/ 손성(孫盛-동진 초의 학자)[孫盛; 손성은 여기 삼국지 주에 자주 인용되는 『위씨춘추』나 『진양추(晉陽秋)』, 『이동잡어(異同雜語)』를 지은 역사가이자, 삼국지에 대해서 많은 주석이나 논평을 달은 주석가이기도 합니다] 이 말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비는 이때 객지에서 머무는 나그네(羈旅)로 객(客)과 주인의 세력이 달랐다. 만약 이런 변고가 있었다면 어찌 유표가 죽을 때까지 서로 간에 틈이 생기지 않았겠는가? 이는 모두 세속의 망설(妄說-그릇된 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유표가 선주에게) 하후돈(夏侯惇), 우금(于禁) 등을 박망(博望-남양군 박망현)에서 막게 했다. 얼마 뒤, 선주는 복병(伏兵)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건안 12년 (207년), 조공이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자 선주는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도록 설득했으나 유표는 이 계책을 쓰지 않았다. (주18) 

(주18) [한진춘추] – 조공이 유성(柳城)에서 돌아오자 유표가 유비에게 말했다, 

“군(君-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이런 큰 기회를 놓쳤소.” 

유비가 말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어 날마다 간과(幹戈-전쟁)가 계속되고 좋은 기회는 또 올 것이니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만약 다음번 기회에 응한다면, 이번의 실기를 애석해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조공이 남쪽으로 유표를 정벌하자 때마침 유표가 죽고 (주19) 아들인 유종(劉琮)이 그를 대신해 서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주 19) [영웅기] – 유표가 병들자 유비를 올려 형주자사를 겸하게 했다. / 

[위서] 유표는 병이 깊어지자 나라를 유비에게 맡겼다. 유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아이들은 재주가 없고 제장들은 모두 영락(零落-죽거나 쇠락함)했으니 내가 죽거든 경이 형주를 맡도록 하시오.” 

유비가 말했다, 

“아드님들이 각자 현명하니 군(君-그대)은 병세나 걱정하십시오.” 

어떤 이가 유표의 말을 따를 것을 권하자 유비가 말했다, 

“이 사람이 나를 후하게 대우했는데, 지금 내가 그의 말을 따른다면 사람들이 필시 나를 야박한 사람이라 할 것이니 차마 그럴 수는 없소.” 
 
/ 신 송지가 보건대, 유표 부부는 평소 유종을 사랑하여 적자(유기)를 버리고 서자(유종)를 세우려는 뜻을 정한 지 이미 오래이니 죽을 때가 되어 형주를 들어 유비에게 넘겨 줄 까닭이 없다.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선주는 번(樊)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 (조공의 군이) 완(宛-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선주가 말했다,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주20) 

(주 20)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 – 유종이 항복을 청하고 감히 이 일을 유비에게 고하지 못했다. 유비 또한 이를 알지 못하다 얼마 뒤 알게 되자 친한 이를 보내 유종에게 물었다. 유종은 송충(宋忠)을 보내 유비에게 자기 뜻을 알렸다. 이 무렵 조공이 완(宛)에 있었으니 유비는 크게 놀라 송충에게 말했다, 

“경들은 이런 일을 저질러 놓고는 더 일찍 와서 말하지 않고, 이제 화(禍)가 닥쳐서야 비로소 내게 고하니 또한 너무 심하지 않은가!” 

도(刀)를 뽑아 송충을 겨누며 말했다, 

“지금 경의 목의 잘라도 분을 풀기에 족하지 않으나, 대장부가 헤어지는 마당에 경 같은 무리들을 죽이는 것 또한 수치스런 일이다!” 

송충을 보내주고는 부곡(部曲)을 모아 의논했다. 어떤 이는 유장과 형주의 관원, 군사들을 겁박하여 거느리고 곧바로 남쪽의 강릉으로 갈 것을 권했다. 유비가 대답했다, 

“유형주(劉荊州-형주자사 유표)가 죽을 때 내게 고아를 맡겼으니, 신의를 저버리고 스스로를 구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오. 죽은 뒤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만나겠소!”
 
이에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자 유종이 두려워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유종의 좌우(左右-주변인, 측근)와 형주인들 다수가 선주에게 귀부했다. (주21) 

(주21) [전략] – 유비가 유표의 묘에 들러 이별을 고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났다.
 
당양(當陽-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고 치중(輜重-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배 수백 척을 타고 가서 강릉(江陵-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 떤 이가 선주에게 말했다, 

“의당 신속히 행군해 강릉을 보전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나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만약 조공의 군사가 도착한다면 이를 어찌 막으려 하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 (주22)

(주 22) 습착치(習鑿齒-동진 때의 학자. 한진춘추에서 최초로 촉 정통론 제기.『양양기(襄陽記)』지은 사가)가 말했다 – 선주는 비록 전패(顚沛-넘어짐)하여 험난함에 처했으나 신의를 더욱 밝히고, 형세가 궁핍하여 사정이 위급한데도 그 말이 도(道)를 잃지 않았다. 경승(景升-유표)의 고명을 따르니 삼군(三軍)이 진정으로 감복하고, 부의지사(赴義之士-대의를 쫓는 선비)를 연모하니 그들이 기꺼이 패배를 함께 했다. 그가 뭇 사람들의 마음(物情)을 얻은 까닭을 살펴보자면, 어찌 다만 투료무한(投醪撫寒-술을 내버리고 백성의 빈한함을 어루만짐)하고 함료문질(含蓼問疾-여뀌를 머금어 그 쓴 맛을 감수하며 질병을 보살핌)한 데에 그치겠는가! 그가 끝내 대업을 이루었으니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 투료(投 醪-술을 내버림)는 [여씨춘추] 순민順民 편의 “월왕이 회계에서 치욕을 겪자 민심을 크게 얻어 그 백성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오나라와 싸우게 하고자 했다…달콤한 음식이 있어도 나누기에 부족하면 감히 먹지 않고, 술이 있으면 강에 쏟아 부어 백성들과 함께 마셨다(有酒流之江,與民同之)”에서 유래되어, 군주와 군민이 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 ; 함료문질도 유사한 뜻으로, 바로 이 대목의 습착치 논평이 함료문질의 출전입니다. 
  
조공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선주가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치중(輜重)을 내버려두고 경군(輕軍-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선주는 한진(漢津)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沔水-한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長子)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선주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결친했다. (주23) 

(주 23) [강표전]江表傳 – 손권은 노숙(魯肅)을 보내 유표의 두 아들에게 조문하고 아울러 유비와 결친하도록 했다. 노숙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조공이 이미 한진(漢津)을 건넜으므로 노숙이 앞으로 나아가 당양(當陽)에서 유비와 서로 만났다. 이에 손권의 뜻을 전하고 천하의 사세(事勢)를 의논하며 은근한 뜻을 드러냈다. 또 유비에게 물었다, 

“예주(豫州-예주목이던 유비를 지칭)께선 이제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유비가 말했다, 

“창오(蒼梧)태수 오거(吳巨)와 오랜 교분이 있으니 그에게로 가서 투탁하려고 하오.” 

노숙이 말했다, 

“손토로(孫討虜-토로장군 손권)께서는 총명, 인혜(仁惠-인자)하여 현인을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니 강표(江表-장강 이남)의 영호(英豪-영웅호걸)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했습니다. 이미 여섯 군(郡)을 점거하고 군사는 정예하며 군량이 많아 족히 대사를 이룰 만합니다. 지금 군(君-그대)을 위한 계책으로는, 복심(腹心-심복)을 보내 동쪽과 결친하여 연화(連和-연합)의 우호를 다지고 함께 세업(世業)을 이루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거에게 투탁하신다 하나, 오거는 범상한 인물로 먼 군(郡)에 치우쳐 있어 장차 남에게 병탄될 것이니 어찌 족히 의탁할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크게 기뻐했다. 진격하여 악현(鄂縣-강하군 악현)에 머물고는 제갈량을 보내 노숙을 따라 손권에게 나아가게 해 동맹의 서약을 맺었다.
  
손권은 주유(周瑜), 정보(程普)등 수군(水軍) 수만을 보내 선주와 힘을 합해, (주24) 조공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이를 대파하고 그 주선(舟船-배)을 불태웠다. 

(주 24) [강표전] – 유비는 노숙의 계책에 따라 악현(鄂縣)의 번구(樊口)로 나아가 머물렀다. 제갈량이 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때, 유비는 조공의 군이 내려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매일 척후관원(邏吏)을 물가로 보내 손권군이 오는지 살피게 했다. 관원이 주유의 배를 발견하고 말을 달려 가 유비에게 고했다. 유비가 말했다, 

“청주(靑州)나 서주(徐州)의 군이 아님을 어찌 알았느냐?” 

관원이 대답했다, 

“배를 보고 알았습니다.” 

유비가 사람을 보내 주유를 위로하자 주유가 말했다, 

“군임(軍任)을 맡고 있어 위서(委署-직무를 이탈함)할 수 없으니 만약 위엄을 굽혀 방문해 주신다면 실로 바라는 바에 부합할 것입니다.” 

유비가 관우, 장비에게 말했다, 

“저들이 나를 부르는데, 내가 지금 동쪽과 결탁(結託)해 놓고 방문하지 않는 것은 동맹의 뜻에 맞지 않다.” 

이에 홀로 배에 올라 주유를 만났다. 유비가 물었다, 

“지금 조공을 막으려면 치밀하게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오. 전졸(戰卒-병졸)들은 얼마나 있소?” 

주유가 말했다, 

“3만 명입니다.” 

유비가 말했다, 

“적은 것이 애석하오.” 

주유가 말했다, 

“이 정도면 부리기에 충분합니다. 예주(豫州)께서는 저 주유가 적을 격파하는 것을 보기나 하십시오.” 

유비가 노숙 등을 불러 대화하려고 하자 주유가 말했다, 

“명을 받았으니 함부로 위서(委署)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경(子敬-노숙)을 보려 하신다면 따로 가서 만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공명(孔明-제갈량)도 이미 함께 오는 중이니 사흘이나 이틀을 지나지 않아 도착할 것입니다.” 

유비는 비록 부끄러움을 느끼고 주유를 남다르게 여겼으나 내심 반드시 북군(北軍-조조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뒤에 남아 관우, 장비와 함께 2천 명을 이끌며 주유에 매이려 하지 않았으니 이를 진퇴(進退)의 계책으로 삼았다. 
 
/ 손성(孫盛)이 말했다 – 유비는 웅재(雄才)로, 필히 죽을 형편에 처하자 위급함을 오(吳)에 고해 도움을 얻어 달아날 수 있었으니, 다시 강변을 고망(顧望-형세를 관망하며 거취를 결정하지 아니함)하며 훗날의 계책을 품을 까닭이 없다. 강표전(江表傳)의 말은 응당 오인(吳人)들이 전미(專美-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함)하려는 말이다.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주25)

(주 25) [강표전] – 주유가 남군(南郡)태수가 되자 (장강) 남쪽 기슭의 땅을 갈라 유비에게 주었다. 유비는 따로 유강구(油江口)에 영채를 세우고 그 이름을 공안(公安)으로 고쳤다. 북군(北軍-조조군)에 복종한 유표의 관원, 병사 중 다수가 배반하고 유비에게로 와서 투항했다. 유비는 주유가 나누어 준 땅이 작아 백성들을 안돈하기에 부족하다 하여 다시 손권에게서 형주의 몇 개 군(郡)을 빌렸다.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주26) 여강(廬江)의 뇌서(雷緖)는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계상(稽顙-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함. 투항함)했다. 
 
유기가 병들어 죽자 군하(群下-뭇 부하)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公安)을 다스렸다.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京-경구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기(恩紀-은정)를 주무(綢繆-끈끈히 얽어맴)했다. (주27) 

(주 26)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 – 김선(金旋)의 자는 원기(元機)이고 경조(京兆) 사람이다. 황문랑(黃門郎), 한양(漢陽)태수를 역임하고 (수도로) 불려와 의랑(議郎)에 임명되었다. 중랑장 영 무릉태수로 승진했다가 유비에게 공격받아 죽임을 당했다. 아들은 김의(金禕)인데, 그에 관한 일은 위무본기(魏武本紀)를 보라. (※ 삼국지 무제기-주106참조)

<※ 삼국지 무제기-주 106>

[106]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 – 이때 경조(京兆)에 김의(金禕)란 자가 있었는데 자(字)는 덕의(德禕)로 대대로 한(漢)의 신하였다. 김일제(金日磾-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 흉노 곤사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귀부할 때 끌려왔는데 그 뒤 한의 신하가 되어 김씨 성을 하사받음)가 망하라(莽何羅)를 토벌한 이래 충성(忠誠)이 현저(顯著)하고 누대에 걸쳐 명절(名節)을 드러냈다. 

한(漢)의 제위가 장차 옮겨가려 하는 것을 보고 가히 계흥(季興-중흥)해야 한다고 말하며 탄식하고 발분하여 마침내 경기(耿紀), 위황(韋晃), 길본(吉本), 길본의 아들 길막(吉邈), 길막의 동생 길목(吉穆)등과 결모했다. 

경기(耿紀)의 자는 계행(季行)이고 어려서 미명(美名)이 있었다. 승상연(丞相掾)이 되었는데 왕이 그를 심히 공경하고 남달리 여겨 시중(侍中)으로 올리고 소부(少府)를 맡겼다. 길막(吉邈)의 자는 문연(文然)이고 길목(吉穆)의 자는 사연(思然)이다. 
 
김의가 비분강개하니 김일제의 기풍이 있었고 또한 왕필(王 必)과 서로 친하니 이를 이용해 만약 왕필을 죽이면 천자를 끼고 위(魏)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유비를 도우려 했다. 

이때 관우(關羽)가 강성했는데, 왕이 업에 있으면서 왕필을 남겨 군무를 관장하며 허도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 문연(文然-길막) 등이 잡인(雜人)과 가동(家僮) 천여 명을 이끌고 밤중에 문을 불태우고 왕필을 공격하니, 김의가 사람을 보내 내응하여 활을 쏘아 왕필의 어깨를 맞혔다. 왕필은 공격하는 자가 누군지 몰랐고 김의와 평소 친했기에 김의에게로 달아나 의탁하려 했다. 

(김의의 집에 이르러) 밤중에 덕의(德禕)를 부르니 김의의 집에서는 그가 왕필인지 모르고 문연 등으로 착각하여 대답하길, 

“왕장사(王長史)는 이미 죽었습니까? 경들의 대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왕필이 다른 길로 달아났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왕필이 김의에게 몸을 맡기고자 하니 그의 장하독(帳下督)이 왕필에게 말하길 

“오늘 일이 누구 짓인지 아는데 거기에 의탁하려 하십니까?”

라고 하며 왕필을 부축해 남성(南城)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때마침 날이 밝았고 왕필이 여전히 건재하니 문연 등의 무리가 궤멸되어 패했다. 그 10여 일 뒤 왕필은 끝내 상처로 인해 죽었다. 
 
/ [헌제춘추] – 경기, 위황 등을 체포해 참수하려 하자 경기가 위왕(魏王)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내가 뜻을 살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끝내 아이 같은 것들 때문에 그르쳐졌도다!” 

위황은 돈수박협(頓首搏頰-직역하면 머리를 구부리고 뺨을 때린다인데, 머리를 땅에 내리찍었다는 말인 듯)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 [산양공재기] – 왕은 왕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해 한(漢)의 백관들을 불러 업으로 오게 했다. 불을 껐던 자를 왼쪽에, 끄지 않은 자를 오른 쪽에 서도록 명했다. 뭇 사람들이 불을 끈 자가 필시 무죄일 거라 생각하여 모두 왼쪽으로 붙었다. 이에 왕이 말하길, 

“불 끄러 나오지 않은 자는 난을 돕지 않은 자들이고, 불을 껐던 자가 실제로는 적(賊)이다.”

라 하고는 모두 죽였다.
 
(주 27)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 – 유비가 돌아와 좌우에게 말했다, 

“손거기(孫車騎-거기장군 손권)는 상체가 길고 하체가 짧으니 그의 아랫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나는 다시 그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밤낮으로 길을 서둘렀다. 
 
/ 신 송지가 보건대, 위서(魏書)에 기재된 유비와 손권의 말은, 촉지(蜀志)에 기술된 제갈량과 손권의 말과 서로 똑같다. 유비가 위군을 격파하기 전이 아니고 더욱이 (격파하기 전에는) 손권과 서로 만난 적이 없으므로 이런 말은 있을 수 없다. 고로 촉지(蜀志)가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배송지 논평 내용이 좀 이상하네요. 산양공재기-위서라고 표기한 것 둘 중 어느 쪽에 오류가 있거나, 편집이 잘못되어 배송지 논평이 엉뚱한 곳에 붙었거나, 또는 중간에 위서의 어떤 인용문이 누락된 것 같습니다)
 
손권은 사자를 보내 함께 촉(蜀)을 취하자고 했다. 어떤 이가 의당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吳)는 끝내 형(荊)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형주 주부(主簿) 은관(殷觀)이 진언했다, 

“만약 오(吳)의 선구(先驅-선두, 선봉)가 된다면, 나아가서는(進) 능히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는(退) 오(吳)가 이를 틈탈 것이니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지금 다만 그들이 촉을 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하되, 우리가 새로이 여러 군(郡)을 점거하여 군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 필시 오(吳)는 감히 우리를 넘어 홀로 촉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퇴지계(進退之計)를 이처럼 하면 가히 오(吳), 촉(蜀)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선주가 이에 따르자 손권은 과연 (촉을 칠) 계획을 그만두었다. 은관을 올려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삼았다. (주28)

(주 28) [헌제춘추] – 손권은 유비와 함께 촉을 취하고자 하여 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고했다. 

“미적(米賊-오두미도를 이끈 장로를 비하하는 말) 장로(張魯)는 파(巴), 한(漢) 땅에서 왕 노릇하며 조조의 눈과 귀가 되어 익주를 노리고 있소. 유장(劉璋)은 불무(不武-굳세지 못함. 장수의 재질이 없음)하여 능히 스스로를 지킬 수 없으니 만약 조조가 촉을 얻으면 형주가 위험해집니다. 지금 먼저 유장을 취하고, 진격하여 장로를 토벌하려 하니,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게 하고, 오(吳), 초(楚)를 하나로 한다면, 비록 10명의 조조가 있다한들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이오.” 

유비는 스스로 촉을 도모하고자 했으므로 이를 거절하며 말했다, 

“익주민은 부강(富彊)하고 토지는 험조(險阻)하니 유장이 비록 약하다 해도 스스로 지키기에는 족하고, 장로는 거짓으로 꾸미는 것으로 조조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요. 지금 촉(蜀), 한(漢)으로 무리하게 출병하면 전운(轉運)이 만 리에 이르니, 싸워서 이기고 공격해서 차지하고자 하면 비록 실리(失利)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이는 오기(吳起-오자)라 해도 정하지 않을 계책이고 손무(孫武-손자)라 해도 그 일을 잘 해낼 수 없을 것이오. 

조조가 비록 무군지심(無君之心-군주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으나 군주를 받든다는 명분(奉主之名)을 지니고 있소. 의논하는 자들이 조조가 적벽(赤壁)에서 실리(利於)하여 그 힘이 꺾이고 다시 멀리 올 뜻이 없다고 하나, 지금 조조가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장차 창해(滄海)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오회(吳會-오, 회계)에서 관병(觀兵-무력을 과시함. 열병)하려 하니 그가 어찌 가만히 앉아 지키며 늙기만을 기다리겠소? 

지금 동맹 사이에 까닭 없이 서로 공벌(攻伐)하여 조조에게 차추(借樞-대세의 관건을 넘겨줌)하는 것은 적들이 그 틈을 타도록 하는 것이니 장계(長計-장기적인 방책, 훌륭한 계책)가 아니오.” 

손권이 이를 듣지 않고 손유를 보내 수군(水軍)을 이끌고 하구(夏口)에 주둔하게 했다. 유비는 (손유)군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했다, 

“너희가 촉을 취하려 하면 나는 응당 머리를 풀어헤치고 입산(入山)할 것이니, 천하에 신의를 잃을 수는 없다.” 

관우를 강릉, 장비를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은 남군에 의거하게 하고 유비 자신은 잔릉(孱陵-무릉군 잔릉현)에 주둔했다. 손권이 유비의 뜻을 깨닫고 손유를 불러 돌아오게 했다.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은 조공이 장차 종요(鍾繇) 등을 보내 한중으로 향하여 장로(張魯)를 토벌한다는 것을 멀리서 듣고, 내심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별가종사 촉군(蜀郡)의 장송(張松)이 유장을 설득했다, 

"조공의 군사는 강하고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니 만약 장로의 물자를 이용해 촉 땅을 취하려 한다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유장이 말했다, 

“내가 이 일로 우려하고 있으나 아직 계책이 없소.” 
 
장송이 말했다,

“유예주(劉豫州)는 사군(使君)의 종실(宗室)이며 조공의 깊은 원수이고, 용병(用兵)을 잘하니 만약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한다면 필시 장로를 격파할 것입니다. 장로가 격파되면 익주가 강성해지니 비록 조공이 온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유장이 이를 옳게 여겼다. 법정(法正)을 보내 4천 명을 이끌고 선주를 맞도록 하고 앞뒤로 거억(巨億)의 선물을 보냈다. 이로 인해 법정은 (선주에게) 익주를 취할 계책을 진언했다. (주29) 
 
(주 29) [오서]吳書 – 유비는 예전에 장송을 만났었고 그 후 법정을 얻었는데, 그들 모두를 은의(恩意-은정)로 후대하고 은근(殷勤-정성스러움)함을 다해 환대했다. 이에 촉의 활협(闊狹-트이고 좁음, 허실), 병기(兵器), 부고(府庫-문서, 재물을 보관하는 창고), 인마(人馬)의 많고 적음과 여러 요해지의 길과 멀고 가까움을 묻자, 장송 등이 모두 말해 주었다. 또한 산천, 처소의 지도를 그려주니 이로 말미암아 익주의 허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선주는 제갈량, 관우 등을 남겨 형주를 지키게 하고는, 보졸(步卒-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부(涪-익주 광한군 부현)에 이르러 유장이 몸소 나와 영접하니 서로 만나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장송이 법정을 통해 선주에게 고하고 아울러 모신(謀臣) 방통(龐統)이 진언하길, 만난 자리에서 유장을 습격하도록 권했다. 선주가 말했다, 

“이는 큰일이니 창졸간에 할 수 없소.” 
 
유장은 선주를 행 대사마, 영 사례교위로 추천하고 선주는 또한 유장을 행 진서대장군, 영 익주목으로 추천했다. 유장은 선주의 군사를 늘려주어 장로를 공격하도록 하고 또한 백수군(白水軍-백수는 광한군 백수현)을 지휘하도록 했다. 선주의 군사는 통틀어 3만여 명에, 수레, 갑옷, 기계, 물자가 매우 많았다. 

이 해, 유장은 성도로 돌아갔다. 선주는 북쪽으로 가맹(葭萌-광한군 가맹현)에 도착하고, 즉시 장로를 치지 않고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중심(衆心-민심)을 거두었다.
  
다음해(212년),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자 손권은 선주에게 구원을 청했다. 
 
선주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주30) 

(주30) [위서] – 이에 유비가 격노해 자신의 군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익주(益州)를 위해 강적(強敵)을 치느라 사도(師徒-사졸)들은 근췌(勤瘁-수고하고 지침)하고 편히 쉴 겨를도 없었다. 지금 창고에 재물을 쌓아놓고 포상에는 인색하면서, 사대부(士大夫)[士大夫; 물론 여기의 사대부는 후대의 사대부와 의미가 다릅니다. 일반 군사의 의미로 士와 관작이 있는 벼슬아치의 大夫의 합칭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가 출전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기를 바라니, 이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장송이 선주와 법정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어찌 이를 내버려두고 떠나려 하십니까!” 
 
장송의 형 광한태수 장숙(張肅)은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그 모의를 유장에게 고했다. 이에 유장이 장송을 붙잡아 참수하자, (유비와 유장 사이에) 혐극(嫌隙-서로 싫어해 벌어진 틈)이 처음 생기게 되었다. (주31) 

(주 31) [익부기구잡기]益部耆舊雜記 – 장숙(張肅)은 위의(威儀-위엄 있고 엄숙한 태도)가 있고 용모(容貌)가 매우 훌륭했다. 장송은 키가 작고 방탕하며 절조(節操)를 익히지는 못했으나, 식견이 뛰어나 정과(精果-총명하고 과단성 있음)하고 재간(才幹)이 있었다. 유장이 장송을 조공에게 보냈는데 조공이 그를 크게 예우하지는 않았다. 공의 주부(主簿) 양수(楊脩)가 그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공에게 그를 징소 하도록 권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양수는 공이 지은 병서를 장송에게 보여주었는데, 장송이 연회 중에 한번 보고 암송하니, 이로 인해 양수가 그를 더욱 남다르게 여겼다.
 
유장은 관문을 지키는 제장들에게 문서를 보내, 다시는 선주와 관통(關通-결탁하거나 내통함)하지 말도록 명했다. 
 
선주가 대노해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 양회(楊懷)를 불러 무례함을 질책하며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유장에게 향하도록 했다. 선주는 곧바로 관(關) 안으로 들어가 제장, 사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고, 황충, 탁응과 함께 군을 이끌고 부(涪)현으로 진격해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은 유괴(劉璝), 냉포(冷苞), 장임(張任), 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涪)에서 선주를 막게 했으나 (주32) 모두 격파되었고, 물러나 면죽(綿竹-광한군 면죽현)에 의지했다. 

(주32) [익부기구잡기] – 장임(張任)은 촉군(蜀郡) 사람으로, 그 집안은 대대로 한미한 가문이다. 어려서 담용(膽勇-담력과 용기)이 있고 지절(志節-지조와 절개)을 갖추니, 주(州)에 복무하여 종사(從事)가 되었다.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제군을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선주에게 항복했다. 선주의 군이 더욱 강성해지자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속현들을 평정했다.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白帝), 강주(江州), 강양(江陽)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진군하여 낙(雒-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수비했는데 공격을 받고 근 1년이 지났다.
 
건안 19년(214년) 여름, 낙성(雒城) 이 격파되었다. (주33) 

(33) [익부기구잡기] – 유장이 장임, 유괴를 보내 정병(精兵)을 이끌고 부(涪)에서 선주를 막게 했는데, 선주에게 격파되자 물러나 유장의 아들 유순과 함께 낙성(雒城) 을 지켰다. 장임이 군사를 이끌고 안교(雁橋)로 출전해 싸웠으나 다시 패하고 사로잡히게 되었다. 선주는 장임이 충용(忠勇)하다는 것을 듣고 군사들에게 명해 그를 투항하게 했다. 장임이 성내며 외쳤다, 

“노신(老臣)은 끝내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 

이에 그를 죽였는데, 선주가 탄식하며 애석해했다.
 
진군하여 성도(成都-촉군 성도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주34) 

(34) [부자]傅子 – 당초, 유비가 촉을 습격했을 때 승상연(丞相掾) 조전(趙戩)이 말했다, 

“유비가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용병에 서툴러 싸울 때마다 패하여 도망 다니기 바쁘니 어찌 남을 도모하겠습니까? 촉이 비록 작은 지역이나, 험고(險固)하고 사방이 막혀 있어 홀로 지킬 수 있는 곳이라 끝내 아우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징사(徵士) [徵士; 조정에 초빙된 선비] 부간(傅幹)이 말했다, 

“유비는 관인유도(寬仁有度-관대하고 어질면서도 법도가 있음)하며 사람을 얻는데 사력을 다합니다. 제갈량은 달치지변(達治知變-다스림에 통달하고 변화를 앎)하고 바르면서도 모략이 있으니 재상으로 삼을 만합니다. 장비, 관우는 용맹하면서도 의리가 있으니 모두 만인지적(萬人之敵-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용맹한 장수)으로 장수로 삼을 만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로, 유비의 지략에다 세 인걸이 그를 보좌하니 무엇을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 [전략] - 조전(趙戩)은 자가 숙무(叔茂)로, 경조(京兆) 장릉(長陵) 사람이다. 질박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말할 때는 시경과 서경을 거론하고 남을 사랑하고 긍휼함에 소원하고 친밀함을 가리지 않았다. 공부(公府-3공의 관부)에 징소되어 상서선부랑(尙書選部郎)에 임명되었다. 동탁이 사사로이 친한 이들로 대각(臺閣-상서)을 채우려 하자 조전이 이를 거절하며 들어주지 않았다. 동탁이 노하여 조전을 불러 죽이려 하자, 지켜보던 자들이 모두 조전이 두려워할 걸로 생각했으나 조전은 태연자약했다. 조전이 동탁을 만나 시시비비를 진술하니, 동탁이 비록 흉악하고 괴팍하나 스스로 굽혀 사죄했다. 

평릉령(平陵令)으로 승진했다. 고장(故將-옛 장수? 노장?) 왕윤(王允)이 해를 입자 감히 가까이가려는 자가 없었으나 조전은 관직을 버리고 시신을 거두어 염해 주었다. 

삼보(三輔)에 난이 일자, 조전은 형주로 갔고 유표는 그를 빈객으로 삼았다. 조공이 형주를 평정하자 조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서로 만나는 일이 어찌 이리도 늦었단 말이오!” 

이에 그를 불러 (승상)연(掾)으로 삼았다. 그 뒤 오관장사마(五官將司馬)가 되었다 상국(相國) 종요(鍾繇)의 장사(長史)가 되었다. 60여 세에 죽었다. (※ 장사, 사마는 속관의 명칭. 오관장은 오관중랑장 조비)

촉이 부유하고 풍성하니 선주는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촉성(蜀城) 중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또 익주목(益 州牧)을 겸했는데(영 익주목), 제갈량을 고굉(股肱-신임하는 중신), 법정을 모주(謀主-주요한 모사), 관우, 장비, 마초 등을 조아(爪牙-용맹한 무장), 허정(許靖), 미축(麋竺), 간옹(簡雍)을 빈우(賓友-빈객 같은 벗)로 삼았다. 동화(董和), 황권(黃權), 이엄(李嚴)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吳壹), 비관(費觀) 등은 또한 유장의 혼친(婚親-인척)이고, 팽양(彭羕)은 또한 유장에게 배척되었고, 유파는 예전에 기한(忌恨-증오하고 원망함)한 자이나, 이들 모두를 현임(顯任-현요직)에 두어 그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치고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건안 20년(215년), 손권은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고 통보했다. 선주가 말했다, 

“양주(涼州)를 얻으면 형주(荊州)를 주겠소.” 

손권이 분노하여, 여몽을 보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세 군(郡)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선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내려가고, 관우에게 익양(益陽-장사군 익양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선주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강주(江州-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황권을 보내 군을 이끌고 가서 장로를 맞이하게 했으나 장로는 이미 조공에 항복한 뒤였다. 
 
조공은 하후연, 장합을 한중에 주둔하게 하고, 여러 번 파(巴)의 경계를 침범했다. 

※ 파군(巴 郡)에 대해 – [후한서] 군국지에는, 파서, 파동의 명칭은 없고 파군만이 있습니다. [후한서] 주석 중 초주(譙周)의 파기(巴記)에 의하면, 초평 원년(190년)에 파군을 갈라 영녕군을 설치하고(파군-영녕군) 그 후 건안 6년(201년)에 유장이 파군을 갈라 영녕군을 파동군으로 삼고, (기존의 파군 속현인) 점강현으로 파서군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파군이 유지되었는지 아닌지 약간 모호한 측면이 있지만 이 무렵에 파군태수가 따로 존재하는 걸 볼 때(장비가 촉으로 들어올 때 막았던 엄안이 바로 파군태수임) 파군-파서-파동이 맞겠죠. [진서] 지리지의 설명도 이와 유사한데 [파기]의 이 기사를 참조한 것으로 보이며, 유비가 촉을 차지한 이래 속현 일부의 이동은 있지만 이 파-파서-파동(이른바 3파)의 체제는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전 글에서도 몇 번 얘기했었지만, 제가 본문 중에서 군현 명을 보충 설명할 때는 이런 것들을 엄밀히 구분하거나 상고하지 않고, 편의상 [후한서] 군국지 기준만으로 했음을 다시 한 번 밝혀둡니다. 혹시라도 각각 해당 기사 당시의 정확한 군현 명인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없기 바랍니다.

선주는 장비에게 명해 탕거(宕渠-파군 탕거현)로 진병하게 하자, 와구(瓦口)에서 싸워 장합 등을 격파했다. 장합은 군사를 거두어 남정(南鄭-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갔고, 선주 또한 성도로 돌아갔다.
  
건안 23년(218년), 선주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다. 장군 오란(吳蘭), 뇌동(雷銅) 등을 나누어 보내 무도(武都-양주 무도군)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두 조공의 군대에게 함몰되었다. 선주가 양평관(陽平關)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하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차지할 것이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사망자가 날로 많아졌다.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 이평= 이엄? :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할 230년 무렵 이엄이 이평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비록 이 219년은 이름을 바꾸기 전이지만, 다른 이평이란 인물-출정군 대장급으로 유봉, 맹달과 동시에 거론될만한-을 찾을 수 없고, 여기서 이평은 이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엄전에 의하면, 218년 유비가 한참 한중을 다툴 무렵, 광한군, 건위군 일대에서 내부반란이 일어나자 건위태수 이엄이 군병을 이끌고 이를 토벌했다고 하는데, 그 직후에는 별다른 기사가 없지만, 한중의 유비 본군에 합류했다가 상용 공격에 참여한 것으로 볼 수 있겠죠.
 
가을, 군하(群下)들이 선주를 올려 한중왕(漢中王)으로 삼고, 한나라 황제에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馬超), 좌장군(左將軍) 장사(長史) 영(領) 진군장군(鎭軍將軍) 신 허정(許靖),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龐羲),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주35) 

(주 35) [삼보결록주] – 사원(射援)의 자는 문웅(文雄)이고, 부풍(扶風) 사람이다. 그 선조의 본래 성(姓)은 사(謝)이며 북지군의 여러 사(謝)씨들과 동족이다. 시조인 사복(謝服)이 장군이 되어 출정했는데, 천자는 사복(謝服)이 좋은 이름이 아니라하여 (謝를) 사(射)로 고치니,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 謝服은 사죄하고 복종한다로 읽힐 수 있으나, 射服은 활을 쏘아 복종시킨다로 읽힘) 사원의 형 사견(射堅)은 자는 문고(文固)이고 어려서 미명(美名-아름다운 명성)이 있어 공부(公府-3공의 관부)에 징소되어 황문시랑(黃門侍郎)이 되었다. 헌제 초, 삼보(三輔)에 기근이 들자 사견은 관직을 버리고 동생 사원과 함께 남쪽으로 촉으로 들어와 유장에 의탁했고, 유장은 사견을 장사(長史)로 삼았다. 유비가 유장을 대신하자, 사견을 광한, 촉군태수로 삼았다. 사원 또한 어려서 명행(名行-명성과 바른 행실)이 있어 태위 황보숭(皇甫嵩)이 그 재주를 높이 보고 딸을 시집보냈다. 승상 제갈량이 사원을 좨주(祭酒)로 삼았고, 종사중랑으로 승진시켰는데, 재임 중 죽었다.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諸葛亮),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關羽),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張飛),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黃忠),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賴恭),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法正),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李嚴)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옛날 당요(唐堯-요임금)는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조정에 사흉(四凶-요임금 때 공공共工, 환두驩兜, 삼묘三苗, 곤鯀) 이 있었고, 주 성왕(周成王)이 어질고 현명했으나 4국(四國-주무왕의 아우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각각 봉해진 나라)이 작난(作難)했습니다. 고후(高后-한고조의 황후인 여태후)가 칭제(稱制)하자 여(呂)씨들이 천명을 훔치고, 효소제(孝昭帝)가 유충(幼沖-나이가 어림)하자 상관씨(상관걸上官桀)가 역모하였으니, 이들 모두가 세총(世寵-당대의 은총)을 빙자하여 국권을 짓밟고 극도로 흉악하게 난을 일으켜 사직을 위태롭게 하였습니다. 대순(大舜-순임금), 주공(周公), 주허(朱虛-주허후 유장劉章), 박륙(博陸-박륙후 곽광霍光)이 없었다면 이들을 유방(流放-내쫓음)하고 금토(禽討-사로잡아 주륙함)할 수 없어 위태롭고 기울어졌을 것입니다.
 
(※ 요임금 때 순이 사흉을 치고, 주공이 성왕을 보좌해 관숙 등의 반란을 진압함. 한고조 유방 사후 고후의 일족인 여씨들이 전횡했는데, 한 문제 때 여후가 죽은 후 여씨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평, 주발, 유장 등이 평정한 일이 있고, 한 무제가 죽은 후 어린 아들인 소제가 즉위하자 곽광이 보좌하며 상관걸의 역모를 막음. 유비의 한중왕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옛 고사들을 거론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제왕의 친척이 제후로 서서 보좌한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성덕(聖德)을 타고나 만방(萬邦)을 통리(統理)하시나 액운(厄運)을 만나 이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동탁이 먼저 난을 일으켜 경기(京畿)를 탕복(蕩覆-휩쓸고 뒤집어엎음)하고, 조조가 뒤이어 화(禍)를 일으켜 천형(天衡-천자의 권위)을 훔쳤습니다. 황후, 태자가 짐살(鴆殺)당했고, 천하를 박란(剝亂-찢고 어지럽힘)하며 민물(民物-백성과 만물)을 잔훼(殘毁)했습니다. 오래도록 폐하께서 몽진(蒙塵) 길에 올라 근심과 재앙을 뒤집어쓰게 하며 텅 빈 읍에 유폐시켰습니다. 사람과 신령에 주인이 없게 하여 왕명을 막아 끊고, 황극(皇極-제왕의 법도. 치우침 없는 중정中正의 도)을 싫어하여 가리며 신기(神器-제위, 정권을 비유)를 도적질하려 합니다. 
 
좌장군 영 사례교위 예, 형, 익 삼주목(豫荊益三州牧-예주목, 형주목, 익주목) 의성정후(宜城亭侯) 유비는 조정의 작질(爵秩-작위와 봉록)을 받아, 힘을 다하여 국난에 목숨을 바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일찍이) 그 조짐을 보고 혁연(赫然)히 분발(憤發-분격)하여 거기장군 동승과 공모하니, 조조를 주살해 장차 국가를 안정시키고 옛 도읍을 안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동승이 일을 다룸이 치밀하지 못해, 조조의 유혼(遊魂)이 마침내 악으로 자라나 해내(海內)를 잔민(殘泯-잔멸)케 했습니다. 신 등은 늘 왕실에 크게는 염락(閻樂)의 화나 작게는 정안(定安)의 변이 있을까 두려우니, (주36) 숙야(夙夜-아침저녁)로 췌췌(惴惴-두려워하는 모양)하고 전율(戰慄-두려워서 몸이 떨림), 누식(累息-숨을 죽이고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함)할 지경입니다. 
 
(주36) 조고(趙高)는 염락(閻樂)을 시켜 2세 황제(진시황의 아들인 호해胡亥)를 죽였다. 왕망(王莽)은 유자(孺子-전한 마지막 황제 유영劉嬰)를 폐하고 정안공(定安公)으로 삼았다.
 
옛날 우서(虞書-서경 우서편)에서 ‘敦序九族’(돈서구족-9족의 질서를 잡고 두텁게 대우함)이라 했고, 주나라 때는 2대(하, 은)를 본받아 동성(同姓)을 봉건(封建)했으며, [시경]에서 그런 뜻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한나라가 처음 흥하였을 때 강토를 나누어 자제들을 왕으로 올리니 이로써 여러 여씨들의 난을 꺾고 태종(太宗-전한 문제의 묘호)의 기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신 등이 보건대, 유비는 폐부(肺腑-허파. 친밀한 관계를 비유), 지엽(枝葉-방계일족)에 종자(宗子-종실 자제), 번한(藩翰-울타리와 기둥)으로, 국가를 염려하고 난을 그치게 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조를 한중에서 격파한 이래 해내의 영웅들이 명망을 우러르며 의부(蟻附-개미가 달라붙듯 많은 이들이 귀부함)하나, 작호(爵號)가 높지 않고 구석(九錫)이 더해지지 않으니 사직을 진위(鎭衛-진수하고 보위함)하여 만세(萬世)에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천자의 명을 받들려 해도 예명(禮 命-조정의 책명)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옛날 하서(河西)태수 양통(梁統) 등은 한(漢)이 중흥할 때에 이르러(왕망 말 후한 초) 산하(山河)에 가로막히고, 지위와 권한이 같아 서로 능히 통솔하지 못하자, 모두 함께 두융(竇融)을 추거해 원수(元帥)로 삼으니, 끝내 효적(效績-공적)을 세우고 외효(隗囂)를 격파했습니다. 지금 사직의 어려움은 농(隴), 촉(蜀) 때보다(농서의 외효와 촉의 공손술) 더 급박합니다. 조조는 밖으로 천하를 집어삼키고 안으로 뭇 신료들을 잔멸하여 조정에 소장지위(蕭牆之危-내부의 위험)가 있으니, 어모(禦侮-모욕을 막아냄)하지 않는다면 가히 천하인 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할 만 합니다. 
 
이에 신 등이 옛 제도에 의거해 유비를 한중왕으로 봉하고 대사마로 삼아, 육군(六軍)을 동제(董齊-영도)하고 동맹을 규합하여 흉역(凶逆)을 소멸(掃滅-소탕)하려 합니다. 한중(漢中), 파(巴), 촉(蜀), 광한(廣漢), 건위(犍爲)를 국(國)으로 삼고, 부서를 설치한 것은 한나라 초 제후왕의 옛 제도에 따랐습니다. 무릇 권의(權宜-임시적인 편의. 임시방편)의 제도가 실로 사직에 이롭다면 이를 임의로 했다해도 가합니다. 그 연후에 공(功)이 이루어지고 일이 세워지면 신 등은 물러나 교죄(矯罪-군주의 명을 가탁한 죄)를 받을 것이니, 설령 죽임을 당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면양(沔陽-한중군 면양현)에 단장(壇場-제단을 마련해놓은 곳)을 설치하여 군사들을 벌려 세우고, 뭇 신하들이 배위(陪位-배석)하여 상주문 읽기를 마친 후 선주에게 왕관(王冠)을 씌웠다.

선주가 한나라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 “신은 구신(具臣-수효만 채우는 변변찮은 신하)의 재주로 상장(上將)의 임무를 맡아 삼군(三軍)을 동독(董督-통솔)하고 바깥에서 명을 받들었으나, 도적을 쓸어 없애 왕실을 바로잡지 못해 오래도록 폐하의 성스러운 교화를 쇠미하게 하고 육합(六合-천하, 우주)의 내부가 막혀 통하지 않게 하니, 근심으로 반측(反側-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임)하고 열병을 앓는 듯합니다. 
 
지난 날 동탁이 난을 일으킨 이후 군흉(群 兇)들이 종횡하여 해내(海內)를 잔박(殘剝-해치고 찢음)했습니다. 폐하의 성덕(聖德), 위령(威靈)에 힘입어 사람과 신령이 함께 감응하니, 혹 충의로운 자가 떨쳐 일어나 토벌하고, 혹 상천(上天-하늘)이 벌을 내려 포역(暴逆-난폭하여 도리를 거스름)한 자들을 모두 죽여 얼음이 점차 녹듯 모두 사라졌으나, 오직 조조만이 오래도록 효제(梟除-제거)되지 않아 국권을 침천(侵擅-침범하여 농단함)하며 방자한 마음으로 극히 어지럽히게 되었습니다. 
 
신이 예전에 거기장군 동승과 함께 조조토벌을 도모했으나, 일을 다룸이 치밀하지 못해 동승은 해를 입게 되었고, 신은 거처를 잃고 파월(播越-외지로 망명함. 방랑함)하여 충의를 열매 맺지 못하니, 마침내 조조가 극히 흉역하게도 주후(主后-황후)를 육살(戮殺-살륙)하고 황자(皇子)를 짐독으로 해치게 하였습니다. 비록 동맹을 규합하고 힘을 떨치려 했으나 (신이) 나약(懦弱) 불무(不武)하여 여러 해를 지나도록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항상 이 몸이 죽어 국은(國恩)을 저버릴까 두려우니, 자나 깨나 길이 탄식하고 해가 저물도록 근심합니다. 
 
지금 신의 뭇 신료들이 이르길, 옛 우서(虞書-서경 우서편)에서 ‘敦敘九族, 庶明勵翼’(돈서구족 서명려익)이라 하고 (주37) 

(주37) 정현(鄭玄-후한의 학자)이 주(注)하여 이르길 - 庶(서)는 衆(중)이고, 勵(려)는 作(작)이며, 敘(서)는 次序(차서)이다. 구족(九族)의 순서를 정해 이들을 친근히 대하니, 여러 현명한 백성들이 보좌하는 신하가 되어 섬긴다는 뜻이다.
 
오제(五帝)는 여기서 빼고 더했지만 이 도를 폐하진 않았으며, 주나라는 2대(하, 은)를 본받아 희(姬)씨 들을 세워 실로 진(晉), 정(鄭)의 보필에 힘입었고, 고조(高祖)께서 용흥(龍興-용이 날아오름. 제왕이 흥기함을 비유)한 후 자제(子弟)들을 왕으로 높여 9국(國)을 크게 여니 끝내 여(呂)씨들을 베어 대종(大宗-적장자 계보; 황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하며, 지금 조조가 곧고 바른 것을 미워하고 그 무리가 실로 번성하여 화심(禍心-재앙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찬도(簒盜-제위를 도적질함)할 뜻이 이미 드러났으나, 종실(宗室)이 미약하고 제족(帝族-황족)들에게 지위가 없으니, 이에 옛 법식을 참조하고 권의(權宜-임시방편)에 잠시 의지한다 하여 신을 대사마(大司馬) 한중왕(漢中王)으로 올렸습니다. 
 
신이 엎드려 스스로 세 번 돌아보건대, 나라의 후은(厚恩)을 받아 일방(一方-한쪽 방면)에서 임무를 맡았으나, 힘을 써도 성과가 없고 얻은 바가 이미 지나치게 많은데, 다시 높은 지위를 욕되게 해 죄와 비방을 무겁게 함은 마땅한 일이 아니나, 뭇 신료들이 의(義)로써 신을 핍박합니다. 
 
신이 물러나 생각해보건대, 구적(寇賊-도적)을 효수하지 못하는 한 국난이 끝나지 않고, 종묘가 위태롭고 사직이 장차 무너지려 하니 실로 신이 쇄수(碎首-머리를 부숨. 죽음을 각오한 행동을 비유)해야 할 때이니, 만약 응권통변(應權通變-시의에 응해 변통함)하여 성조(聖朝)를 평안케 할 수 있다면 비록 불과 물에 뛰어드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양치 않을 것인데 감히 상의(常宜)를 염려해 후회를 방비하겠습니까. 이에 중의(衆議-중론)를 따라 인새(印璽-옥새)를 배수(拜受-공손히 받음)하여 나라의 위엄을 높이려 합니다. 
 
작호(爵號)를 우러러 생각하면 지위는 높고 은총은 두터우며, 보효(報效-힘써 보답함)할 일을 곰곰이 생각하면 근심은 깊고 책임은 중하니, 경포누식(驚怖累息-놀랍고 두려워 숨을 죽임)함이 마치 골짜기에 임한 듯합니다. 진력수성(盡力輸誠-힘을 다하고 정성을 쏟음)하여 육사(六師-육군六軍)를 독려하고, 뭇 의로운 이들을 이끌고 천시에 순응해, 흉역(凶逆)을 박토(撲討-토벌)하고 사직을 안녕케 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겠습니다. 삼가 배장(拜章-장章을 올림)하고 (※) 역(驛-역참)을 통해 좌장군, 의성정후의 인수는 반환해 올립니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스리고, 위연(魏延)을 뽑아 도독으로 삼아 한중(漢中)을 진수하게 했다. (주38) 

(주38) [전략] – 이에 유비는 관사(館舍-객사, 객관)를 세우고 정장(亭障)(※)을 쌓았는데, 성도에서 백수관(白水關)까지 4백여 구(區)에 이르렀다. (※)
 
※ 한나라 때 예의를 정하니, (문체에는) 장(章), 주(奏), 표(表), 의(議)의 4품이 있었다. 장(章)은 사은(謝恩-은혜에 감사함), 주(奏)는 안핵(按劾-일을 살펴 잘못을 아룀), 표(表)는 진정(陳情-청원), 의(議)는 집이(執異-이의제기)하는 것이다. (漢定禮儀,則有四品.一曰章,二曰奏,三曰表,四曰議.章以謝恩,奏以按劾,表以陳情,議以執異 / [문심조룡] 文心雕龍)
 
※ 관사, 정장은 고대 역참제도나 방어시설의 일종. [사기] 흉노열전 중 고윤(顧胤) 주 - “장(鄣)은 산 중의 작은 성이고, 정(亭)은 관측하고 조망하는 곳이다” (鄣,山中小城. 亭,候望所居也)

이때 관우가 조공의 장수 조인(曹仁)을 공격하고, 번(樊)성에서 우금(于禁)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손권이 관우를 습격해 죽이고 형주를 차지했다.
 
건안 25년(220년),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존호(尊號)를 칭하고 연호를 고쳐 황초(黃初)라고 했다. 혹 전해 듣기로 한나라 황제가 해를 입었다 하니, 이에 선주는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해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했다. 이 이후로 여러 곳에서 뭇 길조들이 있다고 말하여 해와 달처럼 서로 잇대었다.(日月相屬) 
 
이 때문에 의랑 양천후(陽泉侯) 유표(劉豹), 청의후(靑衣侯) 상거(向擧), 편장군 장예(張裔), 황권(黃權), 대사마 속(屬) 은순(殷純), 익주 별가종사 조작(趙莋), 치중종사 양홍(楊洪), 종사좨주 하종(何宗), 의조종사 두경(杜瓊), 권학종사(勸學從事) 장상(張爽), 윤묵(尹黙), 초주(譙周) 등이 상언했다
 
- “신이 듣기로 하도(河圖), 낙서(洛書), 오경참위(五經讖緯)는 공자가 살핀 것으로 험응(驗應-드러난 징조가 들어맞음)이 오래되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낙서견요도(洛書甄曜度)에서 

‘붉은 기운이 3일 나타나 덕이 창성하면 9세 때에 이르러 비를 만나고(會備-유비의 비 암시. 備는 갖추다로 보는 게 맞겠지만, 황제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기 위해 참위서를 인용하는 이들의 의도에 맞추어 풀었음. 이하 같음) 합해져 황제의 때가 된다.’

고 했고, 낙서 보호명(洛書寶號命)에서 

‘하늘이 제왕의 도를 헤아려 비(備)가 칭황(稱皇)하고 악계(握契)를 통솔하니, 백번 성공하고 실패하지 않는다.’ 

했고, 낙서녹운기(洛書錄運期)에서

‘아홉 제후와 일곱 호걸이 천명을 다투어 백성들이 취해(炊骸-해골을 삶아먹음. 기근의 참상을 형용)하고, 도로에서 사람의 머리를 밟고 다니니, 누가 주관하여 현(玄)하고(유비현덕의 현 암시) 위로하겠는가.’

라 했고, 효경구명결록(孝經鉤命決錄)에서 

‘제(帝)가 세 번 세워지고 아홉 번 비(備)를 만난다.’

고 했습니다. 
 
신의 아비들이 살아있을 때 말하길, 남서쪽에 여러 차례 누런 기운이 있어 몇 장(丈)이나 곧바로 선 것을 여러 해 동안 보았는데, 때때로 상서로운 구름과 바람이 선기(璿璣-선성과 기성. 북두칠성의 두 번째, 세 번째 별)에서 아래로 내려와 이에 호응했다 하니, 이는 괴이하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또한 건안 22년(217년) 중, 여러 차례 깃발 같은 기운이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르며 중천(中天-하늘의 한가운데)을 운행했는데, [하도], [낙서]에서는 

‘필히 천자가 그 방향에서 나온다.’

고 했습니다. 게다가 올해 태백(太白-금성), 형혹(熒惑-화성), 전성(塡星-토성)이 항상 세성(歲星-목성)을 따라 서로 뒤쫓았습니다. 가까이로는 한나라가 처음 흥할 때 오성(五星-수, 금, 화, 목, 토성)이 세성(歲星)을 따르며 꾀했는데, 세성(歲星)은 의(義)를 주관하며 한나라는 서쪽에 위치하고 의(義)의 위쪽 방위이니, (※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방위로 배치하면 각각 동서남북중앙, 즉 의義가 서쪽) 이 때문에 한나라 법에서는 항상 세성으로 인주(人主-군주)를 살폈던 것입니다. 응당 익주에서 성주(聖主-성스러운 군주)가 흥기하여 중흥할 것이나, 이때에는 허도에 황제가 살아 계시므로 군하(群下)들이 감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요즈음 형혹이 또 세성을 뒤쫓아 위(胃), 묘(昴), 필(畢) 자리에서 보였습니다. (※위, 묘, 필은 별자리 28수 중 서궁 7수에 속함), 묘(昴), 필(畢)은 천강(天綱-하늘의 벼리. 대강)이고 [역경]에서는 ‘제성(帝星)이 이곳에 있으면 뭇 사악한 것들이 소멸되고 패망한다.’고 했습니다. 성휘(聖諱-군주나 옛 성인의 이름자)가 미리 보이고(※앞에 낙서견요도 등을 인용하며 끌어다 붙인 ‘비’나 ‘현’ 자 등을 말하는 듯), 헤아림이 때에 이르러 증험되고 부합(符合)한 것이 여러 번이며, 이 같은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신이 듣기로 

‘성왕(聖王)은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에 거스르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를 따르는 것’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 역경)이라 하니, 이 때문에 때에 응하여 생겨나고 신(神)과 더불어 합치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하늘에 응(應)하고 백성에 순(順)하여 속히 대업을 펴시고, 이로써 해내(海內)를 안정시키십시오.”
 
태부(太傅) 허정(許靖), 안한장군(安漢將軍) 미축(糜竺), 군사장군(軍師將軍) 제갈량(諸葛亮), 태상(太常) 뇌공(賴恭), 광록훈(光祿勳) 황주(黃柱), 소부(少府) 왕모(王謀) 등이 상언했다.
 
- “조비(曹丕)가 찬역, 시해하여 한실(漢室)을 멸하고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하고는, 충량(忠良-충성스럽고 선량함)한 이들을 겁박하며 혹독 무도하니, 사람과 귀신이 모두 분독(忿毒-극히 분노하고 원망함)하여 모두 유씨(劉氏)를 그리워합니다. 지금 위로는 천자가 없어 해내가 황황(惶惶-몹시 두려워함)해하나 본받고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앞뒤로 상서한 군하(群下)들이 8백여 명으로, 이들이 모두 부서(符瑞-상서로운 징조)와 도(圖), 참(讖)이 명징(明徵)함을 진술했습니다. 
 
그 사이에 황룡(黃龍)이 무양(武陽-건위군 무양현) 적수(赤水)에서 보였다가 9일 만에 사라졌습니다. 효경원신계(孝經援神契)에서는 ‘덕(德)이 깊은 못에 이르면 황룡이 보인다.’고 했으며 용은 군주의 상징입니다. [역경]의 건(乾)괘 95에서 ‘飛龍在天’(비룡재천)이라 했고, 대왕께서는 용처럼 날아오르니 응당 제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또한 예전에 관우가 번, 양양을 포위했을 때 양양의 남자 장가(張嘉), 왕휴(王休)가 옥새(玉璽)를 헌상했는데, 옥새는 한수(漢水)에 잠겨 깊은 샘에 엎드려 있었으나, 대낮에도 찬란하게 빛나 신령한 광채가 하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무릇 한(漢)은 고조(高祖)께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한 국호인데, 대왕께서는 선제(先帝-이전 황제. 여기서는 고조 유방)의 발자취를 좇아 또한 한중(漢中)에서 흥하셨습니다. 지금 천자의 옥새에 신이한 광채가 먼저 보여 한수(漢水)의 끝인 양양에서 출현하고 대왕께서 그 하류에서 이를 받드시니, 이는 분명 대왕께 천자의 지위를 수여한다는 것이며 상서로운 길조와 천명이 서로 부합한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옛날 주나라에는 오어(烏魚)의 길조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경사로 여겼고, 2조(二祖-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가 천명을 받을 때는 [하도], [낙서]에서 미리 드러나니 이로써 징험(徵驗)이 되었습니다. 지금 상천(上天)이 상서로움을 알리고, 군유(群儒-뭇 유생), 영준(英俊-영웅준걸)들이 아울러 하도, 낙서, 공자의 참기(讖記)를 올리며 모두 갖추어 이르고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왕께서는 효경황제, 중산정왕의 후손으로, 본지백세(本支百世-본파와 지파가 오래도록 이어짐)하여 하늘과 땅이 복을 내리고, 성스런 자태가 석무(碩茂-크게 무성함)하여 신무(神武)함을 몸에 갖추고, 인(仁)으로 뒤덮고 덕을 쌓으며 애인호사(愛人好士-사람을 사랑하고 선비를 아낌)하니, 이로써 사방의 민심이 귀의하고 있습니다. 영도(靈圖-하도)를 살피고 참위서를 열어보니 신명(神明)이 나타나고 명휘(名諱-이름)가 밝게 드러나 있으니, 의당 제위에 올라 2조를 이어 소목(昭穆)을 계승한다면(※) 천하에 심히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 소목昭穆은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 시조가 중앙에 위치하고 그 왼쪽이 소, 오른쪽이 목. 여기에서 유래되어 ‘종족계보’라는 의미로도 쓰임)

신 등은 삼가 박사(博士) 허자(許慈), 의랑(議郎) 맹광(孟光)과 함께 예의(禮儀-예법과 의식)를 건립하고 좋은 날을 택해 존호(尊號)를 올립니다.”
 
이에 성도 무담(武擔)의 남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주39)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주 39) [촉본기]蜀本紀 – 무도(武都)의 장부(丈夫-사내)가 변해 여자가 되었는데 안색(顔色)이 아름다우니 아마도 산의 정기(山精)였던 것 같다. 촉왕(蜀王)이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는데, 물과 땅에 익숙지 않아 병이 생기자 본래 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촉왕이 머물게 하니 오래지 않아 죽었다. 촉왕이 군사를 일으켜 무도로 가서 흙을 떠메고 와서는(擔土), 성도 외곽에 매장하며 (그 흙으로) 수 묘(畝-이랑) 넓이로 땅을 덮고 그 높이가 10장(丈)에 이르렀는데, 이를 무담(武擔)이라 불렀다. (무도 담토 → 무담 이라는 설) 

/ 신 송지가 보건대, 무담(武擔)은 산 이름으로 성도의 북서쪽에 있고, (주역 8괘 중) 건(乾)의 방위가 북서쪽이니 이 때문에 이곳으로 나아가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 위의 촉본기와 비슷한 내용이 [후한서] 주석에서는 양웅楊雄의 [촉왕본기]로 인용되어 있으며 양웅은 전한 때 인물입니다.)
 
- “건안 26년(221년) 4월 병오일, 황제 유비는 감히 현모(玄牡-희생용 검은 소)를 써서 황천(皇天)의 상제(上帝)와 후토(后土-땅)의 신기(神祇-천신과 지신)에 밝게 고합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차지해 역수(歷數)가 무궁했으나, 일찍이 왕망이 찬역하자 광무황제가 진노하여 이를 주살하고 사직을 다시 보존했습니다. 지금 조조가 무력에 의거하여 안인(安忍-잔인한 짓을 예사로 저지름)하니, 주후(主后)를 육살(戮殺-살륙)하고 도천(滔天-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큼)하게 중국을 망치며 천현(天顯-하늘의 뜻)을 되돌아보지 않았고, 조조의 아들 조비는 흉역한 마음을 품고는 신기(神器)를 훔쳐 차지했습니다. 군신(群臣-뭇 신하), 장사(將士)들이 이르길, 사직이 무너지려 하니 저 유비가 응당 이를 닦아 2조의 대업을 잇고 천벌을 공행(龔行-봉행)해야 한다 했습니다. 
 
저 유비는 덕이 없어 제위(帝位)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 서민(庶民-백성)과 바깥의 만이(蠻夷) 군장(君長)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모두 말하길, ‘천명에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고, 조업(祖業-선조의 유업)은 오래도록 폐할 수 없으며, 사해(四海)에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며, 솔토(率土-온 나라 땅)가 저 유비 한 사람을 의지하며 바라봅니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또한 한조(漢阼-한나라의 제위)가 장차 땅에 떨어질 것을 근심하여, 삼가 원일(元日-길일)을 택해 백료(百寮-백관)들과 함께 단(壇)에 올라 황제의 새수(璽綬-옥새와 인끈)를 받듭니다. 번예(燔瘞-제사물품)를 마련해 천신(天神)께 고류(告類-황제나 황태자 즉위식 등 때에 행하는 제사의식)하니, 신들께서는 흠향하시고 한가(漢家)에 복을 주어 사해를 영원히 평안케 하소서!” (주40)

(주 40) [위서] – 유비는 조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연(掾) 한염(韓冉)을 보내 글을 받들고 가서 조문하게 하고 부증(賻贈-상가에 보내는 조의금이나 물품)의 예물을 보냈다. 문제(文帝-조비)는 (유비가 조공의) 초상을 빌미로 화친을 구하는 것을 미워하여 형주자사에 명해 한염을 죽이고 사명(使命)을 끊도록 했다. 

/ [전략] – 유비는 군모연(軍謀掾) 한염을 보내 글을 가지고 가 조문하고 아울러 비단과 베를 바치게 했다. 한염은 병들었다 칭하며 (더 나아가지 않고) 상용에 머물며 상용에서 그 글을 (위나라로) 보냈다. 때마침 (조비가) 수종(受終-제위를 이어받음)하고는 조서를 내려 보답(報答)하며 (유비에게) 오도록 하였다. 유비가 보서(報書-답서, 회신)를 받아보고는 마침내 칭제(稱制)했다.

장무(章武) 원년(221년) 여름 4월,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제갈량(諸葛亮)을 승상(丞相), 허정(許靖)을 사도(司徒)로 삼고, 백관(百官)을 두고 종묘(宗廟)를 세워 고황제 이하 선조들에게 협제(祫祭-멀고 가까운 선조를 함께 크게 제사지냄)했다. (주41) 
 
(주 41) 신 송지가 보건대, 선주가 비록 효경제로부터 나왔다 하나 세대 수가 아득히 멀어 소목(昭穆-종족계보)을 밝히기 어렵고, 한조(漢祚)를 계승해 어떤 황제를 원조(元祖)로 삼아 친묘(親廟)를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이때 영현(英賢-빼어나게 슬기로운 이)들이 보좌하고 유생들이 궁에 있었으므로 종묘에는 필시 헌장(憲章)이 있었을 것인데, 재기(載記-실어놓은 기사)에서 궐락(闕略-결락, 누락)되었으니 실로 애석한 일이로다!

5월, 황후(皇后) 오씨(吳氏)를 세우고 아들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삼았다.
 
6월, 아들 유영(劉永)을 노왕(魯王), 유리(劉理)를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거기장군 장비(張飛)가 좌우(左右-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당초 선주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 했었다. 이에 가을 7월, 마침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오(吳)를 정벌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선주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陸議-육손),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은 무(巫-형주 남군 무현),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巫)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攻破)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무릉(武陵)의 오계만이(五谿蠻夷)가 사자를 보내 군사를 청했다. 
 
(※ 오계만이 五谿蠻夷 - 무릉군의 웅계雄溪, 만계樠溪, 유계酉溪, 무계潕溪, 진계辰溪의 5계에 거주하던 소수민족) 

장무 2년(222년) 봄 정월, 선주군(先主軍)은 자귀로 돌아오고,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남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
 
2월, 선주가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남군 이도현) 효정(猇亭)에 주둔했다. 한산(佷山)에서 무릉으로 통하여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계만이를 위로하자, 이들이 모두 서로 잇따르며 호응했다. 진북장군 황권은 장강 북쪽의 제군을 감독하며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吳軍)과 서로 맞섰다. 
 
여름 6월, 누런 기운이 자귀에서부터 10여 리 되는 곳에서 보였는데 그 넓이가 수십 장에 이르렀다. 그 10여 일 뒤, 육의(陸議)가 선주군을 효정에서 대파하고, 장군 풍습(馮習), 장남(張南) 등이 모두 전몰했다. 
 
선주는 효정에서 자귀로 돌아와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收合-거두어 합침)하여 마침내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오(吳)에서는 장군 이이, 유아 등을 보내 선주군을 뒤쫓게 하여 남산(南山)에 주둔했다.
 
가을 8월, 군사를 거두어 무(巫)현으로 돌아왔다. 사도 허정이 죽었다.
 
겨울 10월, 승상 제갈량에게 조령을 내려 성도의 남북 교외에서 영건(營建)하도록 했다. (or 남교, 북교의 교제를 주관하다) 손권은 선주가 백제(白帝)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선주가 이를 허락하고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보명(報命-답례)했다.
 
겨울 12월, 한가(漢嘉)태수 황원(黃元)이 선주의 병이 깊다는 것을 듣고 군을 일으켜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다. (※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장무 원년 후한 때의 촉군속국 → 한가군)
 
장무 3년(223년) 봄 2월, 승상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영안에 도착했다.
 
3월, 황언이 진병하여 임공현(臨邛縣-촉군 임공현)을 공격했다. 장군 진홀(陳曶) 을 보내 황원을 토벌했다. 황원은 군이 패하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는데, 그 친병(親兵)에게 결박되어 산 채로 성도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선주는 병이 깊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탁고(託孤-고아를 맡김)하고 상서령 이엄(李嚴)이 이를 돕게 했다.
 
여름 4월 계사일, 선주가 영안궁(永安宮)에서 조(殂)했다. 그때 나이 63세였다. (주42)
 
(주 42) 제갈량집(諸葛亮集)에 기재된 선주가 후주에게 남긴 조칙(詔敕)

 – “짐이 처음에는 병이 다만 하리(下痢-이질)였는데 그 뒤 잡다한 병으로 옮겨 거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사람의 나이 50이면 요(夭-요절, 일찍 죽음)라 칭하지 않는데 내 나이 60여 세이니 또 무엇이 한스럽겠으며 스스로 애통해할 일도 아니다만, 다만 경(卿-유선을 가리킴)의 형제에게 마음이 쓰인다. 사군(射君-사원射援을 가리키는 듯)이 도착하여 말하길, 승상이 경의 지량(智量)을 칭찬하여 심히 크게 수양해 바라던 바를 넘어섰다 하니 실로 그러하다면 내가 또 무엇을 근심하리! 

힘쓰고 또 힘쓰거라! 악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말고, 선이 작다고 해서 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네 아비는 덕이 부족하니 나를 본받지 말라. 가히 한서(漢書), 예기(禮記)를 읽고, 여유가 있으면 제자(諸子)와 육도(六韜), 상군서(商君書)를 두루 읽어, 다른 이의 의지(意智-지혜, 지모)에서 도움을 얻도록 하라. 듣건대 승상이 신불해, 한비자, 관자, 육도를 모아 하나로 베꼈다가 미처 보내기 전에 도중에 잃었다 하니, 경이 직접 구해 들어서 통달하도록 하라.” 

임종할 때, 노왕(魯王)을 불러 말했다, 

“내가 죽은 후 너희 형제는 승상을 어버이처럼 섬기며,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도록 하라.”

제갈량이 후주에게 상언했다 
 
- “엎드려 생각건대, 대행황제(大行皇帝-대행은 제왕이 죽은 후 시호를 정하기 전 임시로 부르던 호칭)께서는 인(仁)에 힘쓰고 덕(德)을 세워 (인, 덕으로) 부도(覆燾-뒤덮고 널리 비춤)함이 무궁했으나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않아 오래도록 침질(寢疾-중병으로 앓아누움)하시더니 이번 달 24일에 홀연 승하(升遐)하셨습니다. 신첩(臣妾)들이 부르짖으며 우니 마치 죽은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이에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를 돌아보니, 상을 치르는 일에는 대종(大宗)을 염려해 그 동용(動容-거동과 몸가짐)에 더하고 뺌이 있었습니다. 백료(百寮-백관)들은 발상하여 사흘을 채우면 상복을 벗고 매장하는 날에 이르러 다시 예법에 따르게 하고, 군국(郡國)의 태수, 상(相), 도위(都尉), 현령, 현장들은 사흘이 지나면 상복을 벗으라 했습니다. 신 제갈량은 직접 칙계(敕戒)를 받았으므로 신령(神靈)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를 어길 수 없습니다. 신이 청컨대, 선하(宣下-조령을 내림)해 봉행(奉行)하시기 바랍니다.”
 
5월, 재궁(梓宮-임금의 관)이 영안에서 성도로 돌아왔고, 시호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했다.
 
가을 8월, 혜릉惠陵)에 매장했다. (주43)
 
(주 43)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 선인(仙人) 이의기(李意其)는 촉 사람이다. 여러 세대를 전하며 보였으니 한(漢) 문제(文帝) 때 사람이라 일컬어졌다. 선주가 오(吳)를 정벌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이의기를 맞이하도록 했다. 이의기가 도착하자 선주는 그를 예로써 공경하고 길흉에 관해 물었다. 이의기는 대답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청해, 군사, 말, 기구 그림을 수십 장 그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이것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찢어버리고는, 다시 대인(大人) 한명을 그리고는 땅을 파서 묻고 떠났다. 선주는 크게 기쁘지 않았다. 그리고 친히 군사를 내어 오를 정벌했다가 대패하고 돌아와 분노와 치욕으로 병을 얻어 죽었는데, 이에 뭇 사람들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대인을 그리고 땅에 묻은 것은, 즉 선주가 죽는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평한다.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2012년 11월 20일 출처서 주석 일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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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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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9.03
23:52:53
(*.166.245.166)
참고로 광릉에 있을 때 "대소 관원, 군사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는 과장, 비유의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배고파서 서로를 잡아먹었다는 의미입니다.

코렐솔라

2013.11.10
19:15:27
(*.166.245.132)
상체 하체 관련은 고원님이 확인하시고 수정하셨기에 저도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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