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史랑방
후주전
후주(後主)는 휘가 선(禪), 자는 공사(公嗣)로 선주(先主=유비)의 아들이다.
건안 24년(219년), 선주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후주를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존호를 칭하고 책문을 내렸다
- “때는 장무 원년(221년) 5월 신사일, 황제가 말하노라. 태자 유선(劉禪)아, 짐은 한(漢)의 천운이 간난에 처하고 적신(賊臣)이 찬도(簒盜)해 사직에 주인이 없을 때를 만나, 격인군정(格人群正-천도를 아는 이와 뭇 바른 이들)들이 밝은 천명으로 받들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제 유선을 황태자로 삼으니 종묘를 잇고 사직을 엄숙히 공경하라. 사지절(使持節) 승상(丞相) 제갈량을 시켜 인수를 주게 한다. 사부(師傅)의 말을 경청하고, 한가지 일을 행하여 세가지 선을 모두 얻도록 하라.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주1)
(주1) [예기]에서 “한가지 일(一物)을 행하여 세가지 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세자(世子)일 뿐이니, 그가 태학에서 나이 따짐을 일컫는 것이다”고 하고, 정현은 (이를 注하여) “物은 事와 같다”고 했다.
장무 3년(223년) 여름 4월, 선주(先主)가 영안궁(永安宮)에서 조(殂)했다.
5월, 후주(後主)가 성도(成都)에서 제위를 이었는데 이때 나이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로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이 해가 위나라 황초 4년(223년)이다. (주2)
※ 참고 - 진수 [삼국지]는 위진정통론에 따라 조위에 본기를 두고(무제기,문제기 등) 촉과 오는 모두 열전의 형식입니다. 죽음과 관련된 표현도 이에 입각해 표기했는데 조위 황제들의 죽음은 붕(崩)(조조는 황제가 아니었지만 조조도 포함), 그외 촉, 오는 모두 훙(薨)으로 적었음. 단, 유비의 경우는 조(殂)로 구별해서 적고 있는데, 자치통감 삼국지에서 신동준 씨의 해설에 따르면 조 또한 극존칭이긴 하나 붕 보다는 약간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주
2) [위략]魏略 – 당초 유비가 소패에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조공(曹公-조조)이 당도하자 황거(遑遽-황급)하여 가속들을 버렸고 그
뒤 형주로 달아났다. 유선은 이때 몇 살(數歲)의 나이로 달아나 숨었는데, 다른 이를 따라 서쪽으로 한중으로 들어왔다가 팔려
넘어갔다. 건안 16년(211년), 관중(關中)에서 난이 일자 부풍사람 유괄(劉括)이 난을 피해 한중으로 들어왔다 유선을 사
들였는데, 그가 양가(良家)의 자식임을 물어서 알고는 그를 기르며 자식으로 삼고 처를 얻어주니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처음 유선이
유비와 서로 헤어졌을 때 (유선은) 자기 부친의 자가 현덕(玄德)임을 알고 있었다. (유비의) 사인(舍人-문객,측근) 중에
간(簡)씨 성을 쓰는 자가 있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얻자 간씨를 장군으로 삼았다. 유비가 간씨를 한중으로 보내자 간씨는
도저(都邸)에 머물렀다. 이에 유선이 간씨를 방문했는데, 간씨가 서로 물어서 검증해보니 일들이 모두 들어맞았다. 간씨가 기뻐하며
장로(張魯)에게 말하자, 장로가 씻겨서 익주로 보내주었고 이에 유비가 그를 태자로 세웠다. 당초 유비는 제갈량을 태자(太子)
태부(太傅)로 삼았는데, 유선이 즉위하자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고 제반 사무를 맡겼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정치는
갈씨(葛氏)에게서 비롯되고 제사는 과인(寡人)이 맡겠소.”(政由葛氏, 祭則寡人)
제갈량 또한 유선이 정치에 익숙치 않다 여겼으므로
마침내 안팎을 총괄했다.
/ 신 송지가 보건대,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선주,후주의 부인과 자식들의 열전. 삼국지 권34)에서
고 하고 후주전에서
건흥(建興) 원년(223년) 여름, 장가(牂牁)태수 주포(朱褒)가 군(郡)을 끼고 모반했다. (주3)
(주 3) [위씨춘추]魏氏春秋 – 당초 익주 종사 상방(常房)이 소속 부를 순행하다(行部)하다 주포(朱褒)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 주부(主簿)를 붙잡아 심문하고는 죽였다. 주포가 분노해 상방을 공격해 죽이고는 (상방이) 모반했다고 무고했다. 제갈량은 상방의 여러 자식들을 주살하고 그의 동생 네 명을 월수(越嶲) 로 귀양보내 주포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주포는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마침내 군(郡)을 들어 모반하여 옹개(雍闓)에게 호응했다.
이 이전에 익주군(益州郡)의 대성(大姓-대족,호족) 옹개(雍闓)가 모반하여 태수 장예(張裔)를 오(吳)로 내쫓고 군(郡)을 점거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월수(越嶲)의 이왕(夷王) 고정(高定) 또한 배반했다.
이해, 황후 장씨(張氏)를 세웠다. (장황후는 장비의 딸) 상서랑 등지(鄧芝)를 오(吳)에 보내 우호를 굳게 하자 오왕 손권이 촉과 화친하여 사자를 보내 방문하니, 이 해에 통호(通好-서로 통하여 우호를 맺음)하게 되었다.
건흥 2년(224년) 봄,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르고, 관문을 닫고 백성들을 쉬게 했다.
건흥 3년(225년) 봄 3월, 승상 제갈량이 남쪽으로 4군(四郡-장가,월수,익주,영창)을 정벌하여 모두 평정했다. 익주군(益州郡)을 건녕군(建寧郡)으로 바꾸고, 건녕군, 영창군(永昌郡)을 갈라 운남군(雲南郡)을 설치했다. (익주, 영창→ 건녕, 운남, 영창) 또한 건녕군, 장가군을 갈라 흥고군(興古郡)을 설치했다. 12월, 제갈량이 성도로 돌아왔다.
건흥 4년(226년), 도호(都護) 이엄(李嚴)이 영안(永安)에서 강주(江州)로 돌아와 머물고 큰 성을 쌓았다. (주4)
(주4) 지금 파군(巴郡)의 옛 성이 이것이다.
건흥 5년(227년) 봄, 승상 제갈량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하고, 면수 북쪽 양평(陽平) 석마(石馬)에 영채를 세웠다. (주5)
(주 5) [제갈량집]에 기재된 유선의 3월 하조(下詔) – 짐이 듣건대 천지(天地)의 도(道)는 인(仁)에 복(福)을 내리고 음(淫-음란,간사함)에 화(禍)를 내리니, 선을 쌓은 자는 창성하고 악을 쌓은 자는 망하는 것이 고금의 상수(常數-불변의 법칙)이다. 이 때문에 탕왕, 무왕은 덕을 닦아 왕이 되고, 걸왕, 주왕은 극도로 포악하여 망했도다.
소열황제(昭 烈皇帝-유비)께서는 명예(明叡-영명하고 식견이 원대함)한 덕을 갖추시어 문무(文武)를 빛내고, 건곤(乾坤)의 운행원리에 응하시어 출신(出身)해 난을 평정하고 사방을 경영하시니, 사람과 귀신이 함께 꾀하고 백성들이 현능한 이를 추천하고 조민(兆民-만백성)들이 즐거이 추대했다.
제갈승상은 홍의충장(弘 毅忠壯-포부가 크고 굳세며 충성스럽고 장렬함)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니, 선제(先帝)께서 그에게 천하의 일을 맡겨 짐을 위해 힘쓰도록 하셨다. 이제 그에게 모월(旄鉞-백모와 황월. 군권을 상징)의 중임을 주고 전명(專命-임의로 명령함)하는 권한을 맡겨, 보기(步騎) 20만 군사를 통령하고 원융(元戎-병거)을 동독(董督-감독,통솔)해 천벌(天罰)을 행하게 하니, 우환을 제거하고 난을 평정해 옛 도읍을 회복하는 일이 이번 거행에 달려있도다. 옛날 항적(項籍-항우)은 강대한 군사를 거느리고 주(州)를 타넘어 땅을 차지해 크게 힘썼으나, 끝내 해하(垓下)에서 패하고 동성(東城)에서 죽어 종족들을 불태우고 천년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가 의롭지 못하고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에게 사납게 굴었기 때문이다.
무릇 왕자(王者)의 군대가 정벌함에는 싸움이 없고, 존귀하고 의로운 군사에는 감히 항거할 자가 없으니, 이 때문에 명조(鳴條) 싸움에서 은 탕왕의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목야(牧野) 싸움에서는 상(商-은나라)의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든 것이다. 지금 대장기가 향하여 지나는 곳마다 또한 궁병극무(窮兵極武-무력을 남용함)하지 않으려 한다. 사악함을 버리고 정의를 뒤쫓아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왕사(王師-천자의 군대)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나라의 상전(常典-상규)에 따라 각각 등급과 한도를 두어 크고 작은 봉총(封寵)을 내릴 것이다.
※ 명조 싸움 – 상(은) 탕왕이 명조(鳴條-산서성 운성현 안읍진 북쪽) 들판에서 하나라 걸왕을 물리친 전투
건흥 6년(228년) 봄, 제갈량이 출병해 기산(祁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겨울, 다시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다가 군량이 다해 물러났다. 위나라 장수 왕쌍(王雙)이 군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한 후 한중으로 돌아왔다.
건흥 7년(229년) 봄, 제갈량이 진식(陳式)을 보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공격하고 마침내 두 군(郡)을 평정했다. 겨울, 제갈량은 승상부와 군영을 남산(南山) 아래 평원으로 옮기고, 한성(漢城), 낙성(樂城)을 쌓았다. 이 해, 손권이 칭제하고 촉과 맹약하여 함께 천하를 나누기로 했다.
건흥 8년(230년) 가을, 위나라가 사마의(司馬懿)는 서성(西城), 장합(張郃)은 자오(子午), 조진(曹眞)에게는 야곡(斜谷)을 지나게 해 한중을 공격하려 했다. 승상 제갈량이 성고(城固), 적판(赤阪)에서 이들을 기다렸는데, 큰 비가 내려 길이 끊기자 조진 등이 모두 돌아갔다. 이 해, 위연이 양계(陽谿)에서 위나라 옹주자사 곽회(郭淮)를 격파했다. 노왕(魯王) 유영(劉永)을 옮겨 감릉왕(甘陵王), 양왕(梁王) 유리(劉理)는 안평왕(安平王)으로 삼았는데, 노(魯)와 양(梁)이 모두 오나라의 분계(分界)에 있었기 때문이다.
※ 229년 손권이 칭제하자 촉에서는 이를 승인하고 진진(陳震)을 사신으로 보내고, 이때 촉, 오가 서로 천하를 나누기로 맹약하는데, 서주, 예주, 유주, 청주는 오(吳)가 차지하고, 병주, 양주(凉州), 기주, 연주는 촉이 차지하되 사례주는 함곡관을 기준으로 양분하기로 약속합니다. (삼국지 오주전, 진진전) 유영, 유리의 기존 봉지인 노(魯)와 양(梁)은 예주 소속으로 이 맹약에 의하면 오나라의 영역이므로, 이 때문에 봉지를 감릉, 안평(기주 소속)으로 옮겼다는 뜻
건흥 9년(231년) 봄 2월, 제갈량이 다시 출군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木牛)로 운량했다. 위(魏)의 사마의, 장합이 기산을 구원했다. 여름 6월, 제갈량이 군량이 다해 군을 물렸는데, 장합이 추격해 청봉(靑封)에 이르러 제갈량과 교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가을 8월, 도호(都護) 이평(李平-이엄)이 재동군(梓潼郡)으로 폐사(廢徙-관직을 폐하여 유배함)되었다. (주6)
(주6) [한진춘추] – 겨울 10월, 강양(江陽)에서 강주(江州)에 이르기까지 강남에서 강북으로 날아 건너려는 새가 있었는데,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새가 천 마리를 헤아릴 정도였다.
건흥 10년(232년), 제갈량이 군사들을 쉬게 하며 황사(黃沙)에서 농사를 장려하고, 유마(流馬), 목우(木牛)를 완성하고, 교병(敎兵), 강무(講武)했다.
건흥 11년(233년) 겨울, 제갈량이 제군(諸軍)을 시켜 쌀을 운반해 야곡구(斜谷口)에 쌓고 야곡의 저각(邸閣-창고)을 수리했다. 이 해, 남이(南夷) 유주(劉冑)가 모반하자 장군 마충(馬忠)이 이를 격파해 평정했다.
건흥 12년(234년) 봄 2월, 제갈량이 야곡을 거쳐 출병하고 처음으로 유마로 운량했다. 가을 8월, 제갈량이 위빈(渭濱)에서 죽었다. 정서대장군 위연(魏延)이 승상 장사 양의(楊儀)와 권력을 다투어 불화해 군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고 위연이 패주했다. 위연을 참수하고 양의는 제군을 이끌고 성도로 돌아왔다. 대사령을 내렸다. 좌장군 오일(吳壹)을 거기장군 가절 독한중(督漢中)으로 삼았다. 승상 유부장사 장완(蔣琬)을 상서령으로 삼고 국사(國事)를 총통하게 했다.
건흥 13년(235년) 봄 정월, 중군사(中軍師) 양의(楊儀)가 한가군(漢嘉郡)으로 폐사(廢徙)되었다. 여름 4월, 장완의 지위를 대장군으로 올렸다.
건흥 14년(236년) 여름 4월, 후주가 전(湔)에 이르러 (주7) 관판(觀阪-전망하기 좋은 언덕)에 올라 문수(汶水)의 물흐름을 보고 열흘 뒤에 성도로 돌아왔다. 무도(武都) 저왕(氐王) 부건(苻健)과 저민(氐民) 4백여 호를 광도(廣都-촉군 광도현)로 옮겼다.
(주7) 신 송지가 살펴보건대, 전(湔)은 현 이름으로 촉군(蜀郡)에 속한다. 음은 翦
건흥 15년(237년) 여름 6월, 황후 장씨(張氏)가 훙(薨-제후급의 죽음)했다.
연희(延熙) 원년(238년) 봄 정월, 황후 장씨(張氏)를 세웠다. (이전 장황후의 여동생)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건흥 → 연희) 아들 유선(劉璿)을 태자로 세우고, 아들 유요(劉瑤)를 안정왕(安定王)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대장군 장완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했다.
연희 2년(239년) 봄 3월, 장완의 지위를 대사마(大司馬)로 올렸다.
연희 3년(240년) 봄, 월수(越嶲)태수 장의(張嶷)를 시켜 월수군을 평정했다.
연희 4년(241년) 겨울 10월, 상서령 비의(費禕)가 한중에 도착해 장완과 함께 일의 계획을 의논하고, 연말에 돌아왔다.
연희 5년(242년) 봄 정월, 감군(監軍) 강유(姜維)가 편군(偏軍-한 무리의 군대)을 인솔해 한중에서 부현(涪縣)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연희 6년(243년) 겨울 10월, 대사마 장완이 한중에서 돌아와 부현에 머물렀다. 11월, 대사령을 내렸다.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연희 7 년(244년) 윤월, 위(魏) 대장군 조상(曹爽), 하후현(夏侯玄) 등이 한중으로 향하자 진북대장군 왕평(王平)이 흥세(興勢)주변에서 이를 막았다. 대장군 비의가 제군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자 위군(魏軍)이 퇴각했다. 여름 4월, 안평왕 유리(劉理)가 죽었다. 가을 9월,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연희 8년(245년) 가을 8월, 황태후가 훙(薨)했다. 12월, 대장군 비의가 한중에 도착해 수비군(圍守)를 순시했다.
연희 9년(246년) 여름 6월,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가을, 대사령을 내렸다. 겨울 11월, 대사마 장완이 죽었다. (주8)
(주8) [위략] – 장완이 죽자 유선이 스스로 국사(國事)를 관장했다.
연희 10년(247년) 양주(涼州)의 호왕(胡王) 백호문(白虎文), 치무대(治無戴)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위장군(衛將軍) 강유(姜維)가 이들을 맞이해 안무하고 번현(繁縣-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이 해, 문산(汶山) 평강(平康) 이(夷)(문산군 평강현의 이족)가 모반하자 강유가 가서 격파해 평정했다.
연희 11년(248년) 여름 5월, 대장군 비의가 출군해 한중에 주둔했다. 가을, 부릉속국(涪陵屬國)의 백성과 이(夷)가 모반하자 거기장군 등지(鄧芝)가 가서 공격해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연희 12년(249년) 봄 정월, 위나라에서 대장군 조상(曹爽) 등을 주살하자 우장군 하후패(夏侯霸)가 와서 항복했다. 여름 4월, 대사령을 내렸다. 가을, 위장군 강유가 출병해 옹주(雍州)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장군 구안(句安), 이소(李韶)가 위나라에 항복했다.
연희 13년(250년), 강유가 다시 서평(西平)으로 출병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희 14년(251년) 여름, 대장군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겨울, 다시 북쪽으로 한수(漢壽-예전의 가맹)에 머물렀다.(※) 대사령을 내렸다.
※ 유비가 촉을 점거한 후, 광한군의 가맹, 부성, 재동, 백수 4현을 떼어내고, 가맹을 한수로 이름을 고치고, 또 한덕현을 새로 세워 (이들을 속현으로 해) 재동군을 설치 (劉備據蜀, 又分廣漢之葭萌、涪城、梓潼、白水四縣, 改葭萌曰漢壽, 又立漢德縣, 以爲梓潼郡 / [진서] 지리지)
연희 15년(252년) 오왕 손권이 훙(薨)했다. 아들 유종(劉琮)을 세워 서하왕(西河王)으로 삼았다.
연희 16년(253년) 봄 정월,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郭循)에 의해 한수(漢壽)에서 살해되었다. (※ 촉서 비의전에서도 곽순으로 되어 있으나, 위서 삼소제기, 촉서 장의전, 자치통감에서는 곽수(郭脩)로 표기) 여름 4월, 위장군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남안(南安)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희 17년(254년) 봄 정월,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대사령을 내렸다. 여름 6월,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농서(隴西)로 출병했다. 겨울, (농서군의) 적도(狄道), 하관(河關), 임조(臨洮) 세 현의 백성을 뽑아 면죽(綿竹-광한군 면죽현), 번현(繁縣-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연희 18년(255년) 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여름, 다시 제군(諸軍)을 이끌고 적도(狄道)로 출병하고, 위(魏) 옹주자사 왕경(王經)과 조서(洮西-조수洮水 서쪽)에서 싸워 대파했다. 왕경은 물러나 적도성을 지키고 강유는 종제(鍾題-임조 남쪽, 조수의 서쪽)에 주둔했다.
연희 19년(256년) 봄, 강유의 지위를 올려 대장군으로 삼고 융마(戎馬)를 지휘하도록 했다. 진서장군 호제(胡濟)와 상규(上邽-천수군 상규현)에서 만나기로 기약했는데 호제가 약속을 어기고 도착하지 않았다. 가을 8월, 강유가 위(魏) 대장군 등애(鄧艾)에게 상규에서 격파되었다. 강유는 군을 물리고 성도로 돌아왔다. 이 해, 아들 유찬(劉瓚)을 세워 신평왕(新平王)으로 삼았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희 20년(257년), 위(魏) 대장군 제갈탄(諸葛誕)이 수춘을 점거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낙곡(駱谷)으로 출병해 망수(芒水-위수의 지류)에 이르렀다. 이 해, 대사령을 내렸다.
경요(景耀) 원년(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연희 → 경요) 환인(宦人-환관) 황호(黃皓)가 처음으로 전정(專政-정사를 오로지함)했다. 오(吳) 대장군 손침(孫綝)이 그 주인인 손량(孫亮)을 폐하고 낭야왕 손휴(孫休)를 세웠다.
경요 2년(259년) 여름 6월, 아들 유심(劉諶)을 북지왕(北地王), 유순(劉恂)을 신흥왕(新興王), 유건(劉虔)을 상당왕(上黨王)으로 삼았다.
경요 3년(260년) 가을 9월, 고(故)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경요 4년(261년) 봄 3월, 고(故) 장군 조운의 시호를 추증했다. 겨울 10월, 대사령을 내렸다.
경요 5년(262년) 봄 정월, 서하왕 유종(劉琮)이 죽었다. 이 해, 강유가 다시 군을 이끌고 후화(侯和)로 출병했다가 등애에게 격파되고, 돌아와 답중(沓中-음평군 음평현)에 주둔했다.
경요 6년(263년) 여름, 위나라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정서장군 등애(鄧艾), 진서장군 종회(鍾會), 옹주자사 제갈서(諸葛緖)에 명해 여러 길로 나아가 아울러 공격하게 했다. 이에 좌우거기장군 장익(張翼), 요화(廖化), 보국대장군 동궐(董厥) 등을 보내 이를 막았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호를 염흥(炎興)으로 고쳤다.
겨울, 등애가 위장군 제갈첨(諸葛瞻)을 면죽(綿竹)에서 격파했다. 광록대부 초주의 계책(譙周)을 채용해 등애에게 항복하며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 “장강, 한수로 한정되고 나뉘어서 깊고 멀리 떨어지고, 촉 땅에 의지해 한쪽 구석에 두절되니, 천운을 범하며 점점 여러해를 지나 마침내 경기(京畿)와 만리나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늘 생각건대 황초(黃初) 중에 문황제(文皇帝-조비)께서 호아장군(虎牙將軍) 선우보(鮮于輔)에 명해 따뜻하고 친밀한 조서를 전해 3가지 좋은 은덕을 베풀며 문호를 열어보여 주시어 대의가 분명했으나, 부덕(否德)하고 암약(暗弱)한 저는 선대의 유업을 탐하여 여러 해 동안 면앙(俛仰-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봄.그럭저럭 처신함)하며 큰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천위(天威)가 진동하자 사람과 귀신이 재능있는 자에게 귀부하고 왕사(王師)는 두렵고도 놀라워 이르는 곳마다 신무(神武)하니, 어찌 감히 혁면(革面-얼굴이나 태도를 고침)해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이날, 북지왕 유심(劉諶)이 망국에 비통해하며 먼저 처자식을 죽인 후 자살했다. (주9) 장소, 등량은 낙현(雒縣)에서 등애와 만났다. 등애는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내 답장을 쓰고 (주10) 장소, 등량을 먼저 돌려보냈다.
(주9) [한진춘추] – 후주가 장차 초주의 계책에 따르려 하자 북지왕 유심이 분노하여 말했다,
(주 10) 왕은(王隱)의 [촉기]蜀記 – 등애가 답장을 보냈다,
등애가 성 북쪽에 도착하자 후주는 여츤자박(輿櫬自縛-수레에 관을 싣고 스스로 몸을 묶음.항복의 의식)하고 군루(軍壘)의 문으로 나아갔다. 등애는 결박된 것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후주를 청하여 맞아들여 서로 만났다. (주11) 승제(承制-황제의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하여 후주를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수비군들은 모두 후주의 칙서를 받은 연후에 항복했다. 등애는 후주를 옛 궁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만났고, 물자는 엄정히 해두고 쓰지 않았다.
(주11) [진제공찬]晉諸公贊 - 유선은 노새가 끄는 수레(騾車)를 타고 등애에게 나아가니 망국(亡國)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다음해 봄 정월, 등애가 체포되었다. 종회(鍾會)는 부(涪)에서 성도에 이르러 난을 일으켰다. 종회가 죽은 뒤 촉(蜀) 중의 군사들이 초략(鈔略)하니 죽거나 다친 자가 낭자(狼籍-어지럽게 흩어짐)하였고 며칠 뒤에야 안집(安集-안정)되었다.
후주(後主)는 전가족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낙양에 도착한 뒤 책명(策命)을 내렸다.
- “때는 경원(景元) 5년(264년) 3월 정해일, 황제가 임헌(臨軒-어전 앞으로 나옴)하여 태상(太常)을 시켜 유선에게 가명(嘉命)하여 안락현공(安樂縣公)으로 삼는다. 아! 나아와 짐의 명을 듣도록 하라!
이 때 군걸(群傑-군웅)들이 범처럼 다투어 구복(九服)이 안정되지 못하자, 조원(阻遠-험하고 멀리 떨어짐)함을 틈타 용촉(庸蜀-촉 땅)을 점거하고 마침내 서쪽 모퉁이를 끊긴 땅이 되게 하고 방외(方外-이역, 경계 밖)를 막히게 하였다. 이때 이후로 전란이 그치지 않아 원원(元元)의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전하지 못한 지 거의 60년(五紀)이 되었도다. 짐은 오래도록 선조의 남긴 뜻을 생각해 사해를 평정하고 온나라 땅을 통일하고자 하여 이 때문에 육사(六師-육군, 황제의 군대)를 정돈해 양주(梁州), 익주(益州) 땅에 위엄을 떨쳤다.
그대는 덕과 도량을 존숭하고 대정(大正-중정.치우침이나 모자람없이 곧고 올바름)을 깊이 겸하여 몸을 굽혀 위질(委質-몸을 맡김. 항복)함을 꺼리지 않았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온전하게 함을 귀히 여긴 것이고, 마음을 바로잡고 생각을 되돌리며 기회에 응해 표변(豹變)하고 행실과 말에서 순리를 생각하니 그 좌우(左右)들이 무궁한 경사를 누리게 하였구나. 어찌 심오하지 않은가!
식읍 만 호, 비단(絹) 만 필, 노비 백 명을 하사하고 기타 물건은 이에 상응하게 했다. 그 자손 3명을 도위(都尉)로 삼았고, 후(侯)에 봉한 자는 50여 명이었다.
(주13) [촉기] – 시호를 내려 사공(思公)이라 했다. 아들 유순(劉恂)이 후사를 이었다.
평한다. 후주는 어진 재상에게 일을 맡길 때는 순리지군(循理之君-도리를 따르는 군주)이었으나 엄수(閹豎-환관)에게 미혹되자 혼암지후(昏闇之后-우매한 군주)였다. 전(傳)에서 이르길 “흰색 실은 일정한 색이 없고 오직 물들여지기에 달려있다.”고 했으니 확실히 그러하구나!
주: 사통(史通)에서 유지기가 말하길, 진씨(陳氏-진수)가 삼국지에 후주전을 세워(지어) 이르기를
제갈량이 비록 위정(爲政)에 통달했으나 무릇 이와 같은 일에는 주밀하지 못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도록(經載十二) 연호를 바꾸지 않고(年名不易)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켰으나 함부로 사면하지 않았으니(赦不妄下) 또한 탁월하지 않은가! 제갈량이 죽은 뒤로 이런 제도는 점차 이지러져(茲制漸虧) 우열(優劣)이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다. (주14)
(주 14) [화양국지] – 승상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 제갈량에게 사면에 인색하다고 하는 자가 있자 제갈량이 답했다,
/신 송지가 보건대(진수 평에 대한 배송지 논평) ‘함부로 사면하지 않았다’(赦不妄下)는 것은 실로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年名不易)는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통달하지 못한 점이 있다. 건무(建武-후한광무제 25-55), 건안(建安-후한헌제 196-220)의 연호는 모두 오랫동안 바꾸지 않았으나 전사(前史)에서 이를 미담으로 여기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12년이 지났다’(經載十二)는 것으로 어찌 족하겠는가? 어찌 따로 다른 뜻이 있어 이를 구하다 이르지 못한 것이겠는가! 제갈량이 죽은 후 연희(延熙)의 연호가 20년을 채웠으니, ‘이런 제도가 점차 이지러졌다’(茲制漸虧)는 말 또한 맞지 않다.
서영
- 2019.12.27
- 17:09:37
- (*.39.158.184)
http://sillok.history.go.kr/id/wda_11505015_001 우선 세종실록에서 '布野'는 '人畜布野'의 뜻으로 쓰여 '사람과 짐승이 들에 펴졌으며'라고 써서 들에 사람과 짐승이 널리 퍼짐을 뜻하는 말입니다. 뒤에 붙은 '餘糧棲畝'의 뜻은 더욱 확실한데 한전(漢典)에 인용된 '초학기(初學記)'에 따르면 https://www.zdic.net/hans/%E6%A3%B2%E7%95%9D '棲畝'의 뜻은 남은 곡식이 밭이랑이 있음을 뜻하며 풍년의 성세를 칭송하였다는 말이고 네이버 한자사전에 따르면 https://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hty.top&where=nexearch&query=%E6%A3%B2%E7%95%9D&oquery=%E5%B8%83&tqi=UlTzJdprvN8ssZbeU1RssssssFK-219201 남은 곡식이 밭이랑에 가득히 쌓여 있다는 뜻으로, 풍년이 들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문구는 '백성들은 들에 널리 퍼져있고,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은 밭이랑에 가득히 쌓여 있으니 (풍년이 들었습니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서영
- 2019.12.28
- 13:09:46
- (*.39.156.44)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VF5C4q0lFT8J:www.saohua.com/shuku/zhongguolishi/mydoc032.htm+&cd=1&hl=ko&ct=clnk&gl=kr
그리고 중국전사 위진남북조경제사에서도 이 구절을 촉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해석으로 보고 있더군요(본의 아니게 502 배드 게이트웨이가 떠 저장된 페이지로 링크합니다) 대략 구절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诸葛亮死后,蒋琬、费祎相继执政,继续执行诸葛亮的既定国策,重视内部安定,没有轻易出兵攻魏。因此,蜀中农业生产在这一时期能持续稳定发展。直至蜀末,犹谓 男女布野,农谷栖亩,农业也未受到根本损伤。
제갈량의 사후에 장완, 비의가 잇따라 집권하여, 제갈량의 기정 국책을 계속 집행하고, 내부 안정을 중시하여, 쉽사리 출병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촉중의 농업생산은 이 시기에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촉한 말기까지 여전히 칭하기를 '남녀(백성)들은 들에 퍼져있고 농사지은 곡식은 들판에 널려있다'고 할 정도로 농업에도 근본적인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라고 합니다. 즉, 삼국지전역의 번역인 '백성들은 사방의 들에 분포되어 있고, 여분의 식량은 경작되는 땅에 놓여져 존재합니다' 라는 해석은 원문 '棲畝'이 나타내는 풍년에 대한 비유, 당시 촉의 상황이 여유롭다는 수사적인 표현으로 봐야지 등애가 쳐들어온게 추수철이라 추수를 못해서 발생한 일이라고 보기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dragonrz
- 2019.12.28
- 19:32:37
- (*.67.125.237)
dragonrz
- 2019.12.28
- 20:05:39
- (*.67.125.237)
여기서도 본문과 비슷한 표현인 男女布野,農糓栖畒이 나오는데 이는 진짜 백성과 곡물이 거기 있기 때문에 적군이 들어와서 유린당하면 안된다는 뜻이지 문학적으로 인구의 풍성과 풍년을 표현하는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닐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님이 말하신것처럼 이런 문구를 보고 풍년이라고 받아들이는것은 가능하겠지만 굳이 원문의 해석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제 의견을 피력한겁니다.
서영
- 2019.12.29
- 11:34:33
- (*.39.155.192)
서영
- 2019.12.29
- 12:02:53
- (*.39.155.192)
서영
- 2019.12.29
- 13:52:55
- (*.39.150.57)
성종 18년 8월 3일
予聞去己亥年軍士逆料速還, 齎糧故少, 竟有告飢者。 今使齎二十日糧, 而若得經還, 則(餘糧)亦不虛棄, 今不可減限也
내가 들으니, 지난 기해년 에는 군사들이 속히 돌아오게 될 것으로 미리 생각하고서 짐짓 양식을 적게 가지고 갔다가 마침내 굶주림을 고한 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 20일의 양식을 가지고 가도록 한다면 일찍 돌아가게 되더라도 (남은 양식)이 또한 헛되이 버려지는 것은 아니니, 지금 기한을 감할 수 없다.
성종 18년 8월 5일
보추가(報秋歌)를 부르기를,
'한 알을 심은 것이 만 개의 낟알이나 열매맺고 벼 한 알을 까면 쌀이 두 톨이나 나오리라. 마당에 방에 쌓아 두고 밥지어 먹으리라. 우리 (식량 남아돌아) 이랑에 두고서 다 못거두고 나라 저축도 남아돌아 민간에 두고 거두지 않으리라. 풍년든 경사 누군들 상농(上農) 아니랴. 임금인가 하늘인가 누구의 덕이 이리 많은가?'
《報秋歌》曰: "一粒種兮, 萬顆垂實; 單稃拆兮, 雙米抱出。 于場于室, 乃積乃餾。 我有(餘糧), 棲于畝而不收; 國有餘儲, 藏於民而不封。豐年之慶, 誰爲上農? 王耶天耶, 何德之隆!"
(여기서도 풍년에 식량이 남아돌아 밭이랑에 두었다(棲于畝)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중종 37년 3월 15일
전에 호송군(護送軍) 이 가지고 갔다가 (남은 쌀)로 모자와 가죽신을 무역해 온 일이 있었는데, 도사(都事)는 몰래 은냥을 싸갖고 가서 무역하였다고 생각하고 일제히 수색하여 잡아들였으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前日護送軍, 以其所持(餘糧), 貿帽子靴精而來, 都事以爲齎去銀兩而潛貿, 一切捉囚, 甚爲未便
선조 26년 2월 19일
강화에는 (여유 있는 양곡)이 수천 석 있는데 권징이 모두 사용(私用)했다 합니다.
江華有(餘糧)數千石, 權徵盡爲私用云云
선조 26년 3월 11일
상이 이르기를,
"적에게는 (남은 군량)이 있는가? 그들이 쌓아둔 것을 불태워버리는 것도 좋은 계책일 것이다."
上曰: "賊有(餘糧)乎? 圖焚其積聚, 則是善策也
선조 28년 2월 10일
또 나에게 서신을 보내어 행장에게 간접적으로 말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에는 (남은 양식)을 거두어 가지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가장 좋겠고...
且須送書于我, 轉說行長, 及其歸時, 收拾(餘糧), 以賑飢民, 最好...
광해 11년 10월 13일
신이 들으니, 요동과 광녕 지역에 해마다 풍년이 들어 (여분의 곡식)이 밭고랑에 쌓여 있으나 주민들이 뜻을 굳게 갖지 못하여 곡식은 천하게 여기고 보화(寶貨)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竊聞遼、廣之間, 比歲豐登, (餘糧)棲畝, 而民無固志, 賤穀貴貨云
(참고로 유선이 말한 '여분의 곡식이 밭고랑에 쌓여있다(餘糧棲畝)'는 표현은 여기서도 풍년이 든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숙종 7년 5월 23일
훈국(訓局)의 별대(別隊)에게 번(番)을 정지한다면, 반드시 (남는 양식)이 있게 될 것입니다.
訓局別隊停番, 則當有(餘糧)矣
이상의 기록들도 다 남은 양식, 여분의 양식, 쓰고 남은 양식, 잉여분, 저축분 등을 칭하는 용어로 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당 표현은 쓰고 남은 잉여의 곡식이 남아서 밭고랑, 밭이랑에 쌓여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야지 수확을 못했다는 표현이 한문 원문에 없는데도 굳이 수확하지 못해 남은 곡식이 있다고 해석하는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