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史랑방


 

후주전

후주(後主)는 휘가 선(禪), 자는 공사(公嗣)로 선주(先主=유비)의 아들이다. 
 
건안 24년(219년), 선주가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후주를 세워 왕태자(王太子)로 삼았다. 
 
존호를 칭하고 책문을 내렸다
 
- “때는 장무 원년(221년) 5월 신사일, 황제가 말하노라. 태자 유선(劉禪)아, 짐은 한(漢)의 천운이 간난에 처하고 적신(賊臣)이 찬도(簒盜)해 사직에 주인이 없을 때를 만나, 격인군정(格人群正-천도를 아는 이와 뭇 바른 이들)들이 밝은 천명으로 받들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제 유선을 황태자로 삼으니 종묘를 잇고 사직을 엄숙히 공경하라. 사지절(使持節) 승상(丞相) 제갈량을 시켜 인수를 주게 한다. 사부(師傅)의 말을 경청하고, 한가지 일을 행하여 세가지 선을 모두 얻도록 하라.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주1) 

(주1) [예기]에서 “한가지 일(一物)을 행하여 세가지 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세자(世子)일 뿐이니, 그가 태학에서 나이 따짐을 일컫는 것이다”고 하고, 정현은 (이를 注하여) “物은 事와 같다”고 했다. 
 
장무 3년(223년) 여름 4월, 선주(先主)가 영안궁(永安宮)에서 조(殂)했다.
 
5월, 후주(後主)가 성도(成都)에서 제위를 이었는데 이때 나이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로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이 해가 위나라 황초 4년(223년)이다. (주2)
 
※ 참고 - 진수 [삼국지]는 위진정통론에 따라 조위에 본기를 두고(무제기,문제기 등) 촉과 오는 모두 열전의 형식입니다. 죽음과 관련된 표현도 이에 입각해 표기했는데 조위 황제들의 죽음은 붕(崩)(조조는 황제가 아니었지만 조조도 포함), 그외 촉, 오는 모두 훙(薨)으로 적었음. 단, 유비의 경우는 조(殂)로 구별해서 적고 있는데, 자치통감 삼국지에서 신동준 씨의 해설에 따르면 조 또한 극존칭이긴 하나 붕 보다는 약간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주 2) [위략]魏略 – 당초 유비가 소패에 있을 때 뜻하지 않게 조공(曹公-조조)이 당도하자 황거(遑遽-황급)하여 가속들을 버렸고 그 뒤 형주로 달아났다. 유선은 이때 몇 살(數歲)의 나이로 달아나 숨었는데, 다른 이를 따라 서쪽으로 한중으로 들어왔다가 팔려 넘어갔다. 건안 16년(211년), 관중(關中)에서 난이 일자 부풍사람 유괄(劉括)이 난을 피해 한중으로 들어왔다 유선을 사 들였는데, 그가 양가(良家)의 자식임을 물어서 알고는 그를 기르며 자식으로 삼고 처를 얻어주니 아들 한 명을 낳았다. 처음 유선이 유비와 서로 헤어졌을 때 (유선은) 자기 부친의 자가 현덕(玄德)임을 알고 있었다. (유비의) 사인(舍人-문객,측근) 중에 간(簡)씨 성을 쓰는 자가 있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얻자 간씨를 장군으로 삼았다. 유비가 간씨를 한중으로 보내자 간씨는 도저(都邸)에 머물렀다. 이에 유선이 간씨를 방문했는데, 간씨가 서로 물어서 검증해보니 일들이 모두 들어맞았다. 간씨가 기뻐하며 장로(張魯)에게 말하자, 장로가 씻겨서 익주로 보내주었고 이에 유비가 그를 태자로 세웠다. 당초 유비는 제갈량을 태자(太子) 태부(太傅)로 삼았는데, 유선이 즉위하자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고 제반 사무를 맡겼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정치는 갈씨(葛氏)에게서 비롯되고 제사는 과인(寡人)이 맡겠소.”(政由葛氏, 祭則寡人)


제갈량 또한 유선이 정치에 익숙치 않다 여겼으므로 마침내 안팎을 총괄했다.
  
/ 신 송지가 보건대,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선주,후주의 부인과 자식들의 열전. 삼국지 권34)에서 


“후주는 형주에서 태어났다”

고 하고 후주전에서 


“처음 제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17세”

라 하니 즉 건안 12년(207년) 생이다. 건안 13년(208년)에 장판(長阪)에서 패하자 유비가 처자를 버리고 달아났고 조운전에서 이르길, 

“조운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화를 면했다”

고 하니 즉 (이 어린아이가) 후주다. 이와 같다면 유비는 일찍이 유선과 서로 헤어진 적이 없다. 또 제갈량은 유선이 즉위한 다음 해 익주목을 겸하고(영 익주목) 그 해에 주부(主簿) 두미(杜微)에게 보낸 서신에서

“조정께서 금년에 18세”

라고 했으니 유선전(후주전)과 상응하고 이치에 맞아 헛점이 없다. 그런데 어환(魚豢-위략의 지은이)은 유비가 소패에서 패했을 때 유선이 막 태어났다고 하고 (유비가) 형주로 달아났을 때 능히 그 부친의 자가 현덕임을 알았다고 하니 5-6세는 되어야 한다. 유비가 소패에서 패했을 때는 건안 5년(200년)이고 유선이 처음 즉위한 때는 앞뒤로 24년이니 유선은 응당 20세를 넘는게 된다. 이 일들을 서로 증험해보면 이치에 맞지 않다. 이는 즉 위략의 망설(妄說-그릇된 말)인데 2백여 자에 이르니 괴이하구나! 또 여러 서(書), 기(記)와 제갈량집을 살펴보면 제갈량은 또한 태자 태부가 된 적이 없다.
 
건흥(建興) 원년(223년) 여름, 장가(牂牁)태수 주포(朱褒)가 군(郡)을 끼고 모반했다. (주3)

(주 3) [위씨춘추]魏氏春秋 – 당초 익주 종사 상방(常房)이 소속 부를 순행하다(行部)하다 주포(朱褒)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듣고 그 주부(主簿)를 붙잡아 심문하고는 죽였다. 주포가 분노해 상방을 공격해 죽이고는 (상방이) 모반했다고 무고했다. 제갈량은 상방의 여러 자식들을 주살하고 그의 동생 네 명을 월수(越嶲) 로 귀양보내 주포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주포는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마침내 군(郡)을 들어 모반하여 옹개(雍闓)에게 호응했다.

/ 신 송지가 보건대, 상방은 주포에 의해 무고되었으니 집정(執政)함에 의당 맑게 통찰해야 하는 것인데, 어찌 망령되이 죄없는 자를 죽여 간특한 자를 기쁘게 했겠는가? 이는 그릇된 말이로다!

이 이전에 익주군(益州郡)의 대성(大姓-대족,호족) 옹개(雍闓)가 모반하여 태수 장예(張裔)를 오(吳)로 내쫓고 군(郡)을 점거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월수(越嶲)의 이왕(夷王) 고정(高定) 또한 배반했다. 

 
이해, 황후 장씨(張氏)를 세웠다. (장황후는 장비의 딸) 상서랑 등지(鄧芝)를 오(吳)에 보내 우호를 굳게 하자 오왕 손권이 촉과 화친하여 사자를 보내 방문하니, 이 해에 통호(通好-서로 통하여 우호를 맺음)하게 되었다.
 
건흥 2년(224년) 봄,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르고, 관문을 닫고 백성들을 쉬게 했다.
 
건흥 3년(225년) 봄 3월, 승상 제갈량이 남쪽으로 4군(四郡-장가,월수,익주,영창)을 정벌하여 모두 평정했다. 익주군(益州郡)을 건녕군(建寧郡)으로 바꾸고, 건녕군, 영창군(永昌郡)을 갈라 운남군(雲南郡)을 설치했다. (익주, 영창→ 건녕, 운남, 영창) 또한 건녕군, 장가군을 갈라 흥고군(興古郡)을 설치했다. 12월, 제갈량이 성도로 돌아왔다.
 
건흥 4년(226년), 도호(都護) 이엄(李嚴)이 영안(永安)에서 강주(江州)로 돌아와 머물고 큰 성을 쌓았다. (주4)
 
(주4) 지금 파군(巴郡)의 옛 성이 이것이다.
 
건흥 5년(227년) 봄, 승상 제갈량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하고, 면수 북쪽 양평(陽平) 석마(石馬)에 영채를 세웠다. (주5)
 
(주 5) [제갈량집]에 기재된 유선의 3월 하조(下詔) – 짐이 듣건대 천지(天地)의 도(道)는 인(仁)에 복(福)을 내리고 음(淫-음란,간사함)에 화(禍)를 내리니, 선을 쌓은 자는 창성하고 악을 쌓은 자는 망하는 것이 고금의 상수(常數-불변의 법칙)이다. 이 때문에 탕왕, 무왕은 덕을 닦아 왕이 되고, 걸왕, 주왕은 극도로 포악하여 망했도다. 

지난날 한조(漢祚)가 중도에 쇠잔해져 흉특(凶慝)한 자들을 그물에서 빠져나오게 하니 동탁이 난을 일으켜 경기(京畿)를 어지럽히고, 조조는 화란을 불러일으켜 천형(天衡-천자의 권위)을 훔쳐 틀어쥐고 해내(海內)를 잔박(殘剝)하며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었다. 그 아들 조비는 고수(孤豎-고아가 된 더벅머리아이?)로 감히 뒤이어 난을 일으키고 신기(神器-제위)를 도적질해 제왕의 성씨를 바꾸고 문물제도를 고쳐 대대로 그 흉악함을 드러내었다. 이때 황극(皇極-제왕의 법도)이 온통 어두웠고 천하에 주인이 없으니 우리 제명(帝命-천명)이 아래로 떨어졌다. 
 
소열황제(昭 烈皇帝-유비)께서는 명예(明叡-영명하고 식견이 원대함)한 덕을 갖추시어 문무(文武)를 빛내고, 건곤(乾坤)의 운행원리에 응하시어 출신(出身)해 난을 평정하고 사방을 경영하시니, 사람과 귀신이 함께 꾀하고 백성들이 현능한 이를 추천하고 조민(兆民-만백성)들이 즐거이 추대했다. 

부참(符讖)을 받들고 순응해 제위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하늘의 질서를 비승(丕承-크게 받듬)해 피폐해지고 쇠미해진 것을 돕고 일으켜 선조의 대업을 회복하고, 황강(皇綱-조정의 기강)을 이어받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만국(萬國)이 평정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도다. 

짐은 어린 나이에 홍기(鴻基-대업의 터전.왕업)를 이어 보부(保傅-태보,태부)의 가르침을 미처 익히기 전에 조종(祖宗)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육합(六合-천하)이 가로막히고 사직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으니 그 까닭을 길이 헤아리고 바로잡아 전서(前緖-선대로부터의 사업)를 빛내려 하나 아직 이룬 바가 없어 짐은 심히 두렵도다. 이 때문에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며 감히 자신의 안일을 바라지 않고, 매양 근검절약하여 나라에 도움을 주고 농사를 권하여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하고, 유능한 인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사사로움을 끊고 마음을 기울여 장사(將士)들을 길렀다. 이에 검을 휘두르며 장구(長驅-멀리 달려감)해 흉역(凶逆)을 토벌하려 했으나 주기(朱旗-붉은 기)를 들어올리기도 전에 조비가 죽고 말았으니 이는 이른바 땔나무에 불을 지피기도 전에 스스로 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잔류(殘類-잔당), 여추(餘醜-남아 있는 추악한 이)가 또 천화(天禍)를 계속하여 하수, 낙수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무력을 믿고 그치지 않는다. 
 
제갈승상은 홍의충장(弘 毅忠壯-포부가 크고 굳세며 충성스럽고 장렬함)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니, 선제(先帝)께서 그에게 천하의 일을 맡겨 짐을 위해 힘쓰도록 하셨다. 이제 그에게 모월(旄鉞-백모와 황월. 군권을 상징)의 중임을 주고 전명(專命-임의로 명령함)하는 권한을 맡겨, 보기(步騎) 20만 군사를 통령하고 원융(元戎-병거)을 동독(董督-감독,통솔)해 천벌(天罰)을 행하게 하니, 우환을 제거하고 난을 평정해 옛 도읍을 회복하는 일이 이번 거행에 달려있도다. 옛날 항적(項籍-항우)은 강대한 군사를 거느리고 주(州)를 타넘어 땅을 차지해 크게 힘썼으나, 끝내 해하(垓下)에서 패하고 동성(東城)에서 죽어 종족들을 불태우고 천년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가 의롭지 못하고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에게 사납게 굴었기 때문이다.

지금 적(賊-조위)이 그 죄악을 본받아 하늘과 사람이 원망하니, 천시를 따라 의당 신속히 움직인다면 염정(炎精-불의 정기. 오행설에 따르면 한나라는 불火) 조종(祖宗) 위령(威靈)의 도움에 힘입어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오왕 손권은 함께 재난과 환난을 근심하니 잠군(潛軍-은밀한 군사)으로 합모(合謀-공모)하여 그 후방을 기각(掎角-적을 협공함)하고, 양주(涼州) 여러 나라의 왕들은 각각 월지(月支), 강거(康居)의 호후(胡侯-호인 제후)인 지부(支富), 강식(康植) 등 20여 명을 보내 절도(節度-지휘통제)를 받게 할 것이니, 우리 대군은 북쪽으로 출병하여 병마를 거느리고 창검을 휘두르며 선구(先驅-선도,선봉)가 되려 한다. 천명(天命)이 이미 이른데다 인사(人事) 또한 마련되었으니 군대를 엄정히 해 기세를 아우른다면 필시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무릇 왕자(王者)의 군대가 정벌함에는 싸움이 없고, 존귀하고 의로운 군사에는 감히 항거할 자가 없으니, 이 때문에 명조(鳴條) 싸움에서 은 탕왕의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목야(牧野) 싸움에서는 상(商-은나라)의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든 것이다. 지금 대장기가 향하여 지나는 곳마다 또한 궁병극무(窮兵極武-무력을 남용함)하지 않으려 한다. 사악함을 버리고 정의를 뒤쫓아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왕사(王師-천자의 군대)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나라의 상전(常典-상규)에 따라 각각 등급과 한도를 두어 크고 작은 봉총(封寵)을 내릴 것이다. 

위나라의 종족(宗族), 지엽(支葉), 중외(中外)도 능히 이해득실을 살피고 역순(逆順)의 도리를 헤아려 항복하는 자는 모두 사면할 것이다. 옛날 보과(輔果)는 지씨(智氏)와 관계를 끊어 온 종친이 복을 입었으며, 미자(微子)는 은나라를 떠나고 항백(項伯)은 한나라로 돌아와 모두 모토(茅土-띠와 흙. 제후의 봉토)를 받는 경사를 누렸으니, 이들은 전세(前世-전대)의 뚜렷한 증험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미혹되어 (정의로) 되돌아오지 않고 장차 난을 일으킨 자를 도우며 왕명(王命)을 본받지 않는다면 처자식까지 주륙하여 사면하지 않을 것이다. 은위(恩威-은혜와 위엄)를 널리 베풀어 그 원수(元帥-으뜸 장수)를 용서하고 피폐해진 백성을 위로하노라. 그 외 조서(詔書)와 율령(律令)은 승상이 천하에 노포(露布)하여 짐의 뜻에 부합하도록 할 것이다.
 
※ 명조 싸움 – 상(은) 탕왕이 명조(鳴條-산서성 운성현 안읍진 북쪽) 들판에서 하나라 걸왕을 물리친 전투 

/ 목야 싸움 – 주 무왕이 목야(牧野-하남성 기현 서남쪽)에서 상 주왕을 물리친 전투 

/ 보과(輔果) – 지과(智果)를 말함.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로, 지선자(智宣子)가 아들 지요(智瑤)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서자 지소(智宵)를 세우는 것이 합당하며 그렇지 않으면 지씨가 멸망할 것이라 함. 지선자가 말을 듣지 않자 성을 보(輔)로 고쳤는데, 뒤에 지씨가 멸족당한 뒤에도 보과의 일족은 살아남음 

/ 미자(微子) – 성은 자(子)이고 이름은 계(啓). 상(은) 주왕의 이복형제로 미(微-산동성 양산현 서북부)를 봉지로 받음. 상나라가 멸망할 것을 알고 여러 번 주왕에게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침. 상나라가 멸망하자 주(周)나라에 항복해 송(宋-하남성 동부와 산동,강소,안휘성 인접지역)을 봉지로 받았으며 상구(商邱-하남성 상구현 동쪽)에 도읍을 세움. 

/ 항백(項伯: ?~ B.C 192) – 이름은 전(纏)이고 자는 백(伯). 하상 사람으로 항우의 숙부. B.C 206년에 항우가 홍문의 연회를 열어 유방을 죽이려 하자, 유방의 모사이자 친구인 장량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줌. 다음날 연회석상에서 항장(項莊)이 칼춤을 추며 유방을 죽이려 하자 춤판에 끼어들어 유방을 보호. 전한이 건립되자 유씨 성이 주어지고 사양후(射陽侯)에 봉해짐. (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조희천 역] 역주에서 발췌)
 
건흥 6년(228년) 봄, 제갈량이 출병해 기산(祁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겨울, 다시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다가 군량이 다해 물러났다. 위나라 장수 왕쌍(王雙)이 군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한 후 한중으로 돌아왔다. 
 
건흥 7년(229년) 봄, 제갈량이 진식(陳式)을 보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공격하고 마침내 두 군(郡)을 평정했다. 겨울, 제갈량은 승상부와 군영을 남산(南山) 아래 평원으로 옮기고, 한성(漢城), 낙성(樂城)을 쌓았다. 이 해, 손권이 칭제하고 촉과 맹약하여 함께 천하를 나누기로 했다. 
 
건흥 8년(230년) 가을, 위나라가 사마의(司馬懿)는 서성(西城), 장합(張郃)은 자오(子午), 조진(曹眞)에게는 야곡(斜谷)을 지나게 해 한중을 공격하려 했다. 승상 제갈량이 성고(城固), 적판(赤阪)에서 이들을 기다렸는데, 큰 비가 내려 길이 끊기자 조진 등이 모두 돌아갔다. 이 해, 위연이 양계(陽谿)에서 위나라 옹주자사 곽회(郭淮)를 격파했다. 노왕(魯王) 유영(劉永)을 옮겨 감릉왕(甘陵王), 양왕(梁王) 유리(劉理)는 안평왕(安平王)으로 삼았는데, 노(魯)와 양(梁)이 모두 오나라의 분계(分界)에 있었기 때문이다. 
 
※ 229년 손권이 칭제하자 촉에서는 이를 승인하고 진진(陳震)을 사신으로 보내고, 이때 촉, 오가 서로 천하를 나누기로 맹약하는데, 서주, 예주, 유주, 청주는 오(吳)가 차지하고, 병주, 양주(凉州), 기주, 연주는 촉이 차지하되 사례주는 함곡관을 기준으로 양분하기로 약속합니다. (삼국지 오주전, 진진전) 유영, 유리의 기존 봉지인 노(魯)와 양(梁)은 예주 소속으로 이 맹약에 의하면 오나라의 영역이므로, 이 때문에 봉지를 감릉, 안평(기주 소속)으로 옮겼다는 뜻

 
건흥 9년(231년) 봄 2월, 제갈량이 다시 출군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木牛)로 운량했다. 위(魏)의 사마의, 장합이 기산을 구원했다. 여름 6월, 제갈량이 군량이 다해 군을 물렸는데, 장합이 추격해 청봉(靑封)에 이르러 제갈량과 교전하다 화살에 맞아 죽었다. 가을 8월, 도호(都護) 이평(李平-이엄)이 재동군(梓潼郡)으로 폐사(廢徙-관직을 폐하여 유배함)되었다. (주6)
 
(주6) [한진춘추] – 겨울 10월, 강양(江陽)에서 강주(江州)에 이르기까지 강남에서 강북으로 날아 건너려는 새가 있었는데, 건너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은 새가 천 마리를 헤아릴 정도였다.
 
건흥 10년(232년), 제갈량이 군사들을 쉬게 하며 황사(黃沙)에서 농사를 장려하고, 유마(流馬), 목우(木牛)를 완성하고, 교병(敎兵), 강무(講武)했다. 
 
건흥 11년(233년) 겨울, 제갈량이 제군(諸軍)을 시켜 쌀을 운반해 야곡구(斜谷口)에 쌓고 야곡의 저각(邸閣-창고)을 수리했다. 이 해, 남이(南夷) 유주(劉冑)가 모반하자 장군 마충(馬忠)이 이를 격파해 평정했다. 
 
건흥 12년(234년) 봄 2월, 제갈량이 야곡을 거쳐 출병하고 처음으로 유마로 운량했다. 가을 8월, 제갈량이 위빈(渭濱)에서 죽었다. 정서대장군 위연(魏延)이 승상 장사 양의(楊儀)와 권력을 다투어 불화해 군사를 이끌고 서로 공격하고 위연이 패주했다. 위연을 참수하고 양의는 제군을 이끌고 성도로 돌아왔다. 대사령을 내렸다. 좌장군 오일(吳壹)을 거기장군 가절 독한중(督漢中)으로 삼았다. 승상 유부장사 장완(蔣琬)을 상서령으로 삼고 국사(國事)를 총통하게 했다. 
 
건흥 13년(235년) 봄 정월, 중군사(中軍師) 양의(楊儀)가 한가군(漢嘉郡)으로 폐사(廢徙)되었다. 여름 4월, 장완의 지위를 대장군으로 올렸다. 
 
건흥 14년(236년) 여름 4월, 후주가 전(湔)에 이르러 (주7) 관판(觀阪-전망하기 좋은 언덕)에 올라 문수(汶水)의 물흐름을 보고 열흘 뒤에 성도로 돌아왔다. 무도(武都) 저왕(氐王) 부건(苻健)과 저민(氐民) 4백여 호를 광도(廣都-촉군 광도현)로 옮겼다. 

(주7) 신 송지가 살펴보건대, 전(湔)은 현 이름으로 촉군(蜀郡)에 속한다. 음은 翦 

건흥 15년(237년) 여름 6월, 황후 장씨(張氏)가 훙(薨-제후급의 죽음)했다. 
 
연희(延熙) 원년(238년) 봄 정월, 황후 장씨(張氏)를 세웠다. (이전 장황후의 여동생)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건흥 → 연희) 아들 유선(劉璿)을 태자로 세우고, 아들 유요(劉瑤)를 안정왕(安定王)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대장군 장완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했다. 
 
연희 2년(239년) 봄 3월, 장완의 지위를 대사마(大司馬)로 올렸다. 
 
연희 3년(240년) 봄, 월수(越嶲)태수 장의(張嶷)를 시켜 월수군을 평정했다.
 
연희 4년(241년) 겨울 10월, 상서령 비의(費禕)가 한중에 도착해 장완과 함께 일의 계획을 의논하고, 연말에 돌아왔다.
 
연희 5년(242년) 봄 정월, 감군(監軍) 강유(姜維)가 편군(偏軍-한 무리의 군대)을 인솔해 한중에서 부현(涪縣)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연희 6년(243년) 겨울 10월, 대사마 장완이 한중에서 돌아와 부현에 머물렀다. 11월, 대사령을 내렸다.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연희 7 년(244년) 윤월, 위(魏) 대장군 조상(曹爽), 하후현(夏侯玄) 등이 한중으로 향하자 진북대장군 왕평(王平)이 흥세(興勢)주변에서 이를 막았다. 대장군 비의가 제군을 이끌고 가서 구원하자 위군(魏軍)이 퇴각했다. 여름 4월, 안평왕 유리(劉理)가 죽었다. 가을 9월,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연희 8년(245년) 가을 8월, 황태후가 훙(薨)했다. 12월, 대장군 비의가 한중에 도착해 수비군(圍守)를 순시했다.
 
연희 9년(246년) 여름 6월,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가을, 대사령을 내렸다. 겨울 11월, 대사마 장완이 죽었다. (주8)
 
(주8) [위략] – 장완이 죽자 유선이 스스로 국사(國事)를 관장했다.
 
연희 10년(247년) 양주(涼州)의 호왕(胡王) 백호문(白虎文), 치무대(治無戴)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자, 위장군(衛將軍) 강유(姜維)가 이들을 맞이해 안무하고 번현(繁縣-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이 해, 문산(汶山) 평강(平康) 이(夷)(문산군 평강현의 이족)가 모반하자 강유가 가서 격파해 평정했다. 
 
연희 11년(248년) 여름 5월, 대장군 비의가 출군해 한중에 주둔했다. 가을, 부릉속국(涪陵屬國)의 백성과 이(夷)가 모반하자 거기장군 등지(鄧芝)가 가서 공격해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연희 12년(249년) 봄 정월, 위나라에서 대장군 조상(曹爽) 등을 주살하자 우장군 하후패(夏侯霸)가 와서 항복했다. 여름 4월, 대사령을 내렸다. 가을, 위장군 강유가 출병해 옹주(雍州)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장군 구안(句安), 이소(李韶)가 위나라에 항복했다.
 
연희 13년(250년), 강유가 다시 서평(西平)으로 출병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희 14년(251년) 여름, 대장군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다. 겨울, 다시 북쪽으로 한수(漢壽-예전의 가맹)에 머물렀다.(※) 대사령을 내렸다.
 
※ 유비가 촉을 점거한 후, 광한군의 가맹, 부성, 재동, 백수 4현을 떼어내고, 가맹을 한수로 이름을 고치고, 또 한덕현을 새로 세워 (이들을 속현으로 해) 재동군을 설치 (劉備據蜀, 又分廣漢之葭萌、涪城、梓潼、白水四縣, 改葭萌曰漢壽, 又立漢德縣, 以爲梓潼郡 / [진서] 지리지) 
 

연희 15년(252년) 오왕 손권이 훙(薨)했다. 아들 유종(劉琮)을 세워 서하왕(西河王)으로 삼았다. 
 
연희 16년(253년) 봄 정월,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郭循)에 의해 한수(漢壽)에서 살해되었다. (※ 촉서 비의전에서도 곽순으로 되어 있으나, 위서 삼소제기, 촉서 장의전, 자치통감에서는 곽수(郭脩)로 표기) 여름 4월, 위장군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남안(南安)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연희 17년(254년) 봄 정월,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대사령을 내렸다. 여름 6월,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농서(隴西)로 출병했다. 겨울, (농서군의) 적도(狄道), 하관(河關), 임조(臨洮) 세 현의 백성을 뽑아 면죽(綿竹-광한군 면죽현), 번현(繁縣-촉군 번현)에 거처하게 했다. 
 
연희 18년(255년) 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여름, 다시 제군(諸軍)을 이끌고 적도(狄道)로 출병하고, 위(魏) 옹주자사 왕경(王經)과 조서(洮西-조수洮水 서쪽)에서 싸워 대파했다. 왕경은 물러나 적도성을 지키고 강유는 종제(鍾題-임조 남쪽, 조수의 서쪽)에 주둔했다. 
 
연희 19년(256년) 봄, 강유의 지위를 올려 대장군으로 삼고 융마(戎馬)를 지휘하도록 했다. 진서장군 호제(胡濟)와 상규(上邽-천수군 상규현)에서 만나기로 기약했는데 호제가 약속을 어기고 도착하지 않았다. 가을 8월, 강유가 위(魏) 대장군 등애(鄧艾)에게 상규에서 격파되었다. 강유는 군을 물리고 성도로 돌아왔다. 이 해, 아들 유찬(劉瓚)을 세워 신평왕(新平王)으로 삼았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희 20년(257년), 위(魏) 대장군 제갈탄(諸葛誕)이 수춘을 점거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낙곡(駱谷)으로 출병해 망수(芒水-위수의 지류)에 이르렀다. 이 해, 대사령을 내렸다.
 
경요(景耀) 원년(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연희 → 경요) 환인(宦人-환관) 황호(黃皓)가 처음으로 전정(專政-정사를 오로지함)했다. 오(吳) 대장군 손침(孫綝)이 그 주인인 손량(孫亮)을 폐하고 낭야왕 손휴(孫休)를 세웠다. 
 
경요 2년(259년) 여름 6월, 아들 유심(劉諶)을 북지왕(北地王), 유순(劉恂)을 신흥왕(新興王), 유건(劉虔)을 상당왕(上黨王)으로 삼았다. 
 
경요 3년(260년) 가을 9월, 고(故)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경요 4년(261년) 봄 3월, 고(故) 장군 조운의 시호를 추증했다. 겨울 10월, 대사령을 내렸다. 
 
경요 5년(262년) 봄 정월, 서하왕 유종(劉琮)이 죽었다. 이 해, 강유가 다시 군을 이끌고 후화(侯和)로 출병했다가 등애에게 격파되고, 돌아와 답중(沓中-음평군 음평현)에 주둔했다.
 
경요 6년(263년) 여름, 위나라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키고, 정서장군 등애(鄧艾), 진서장군 종회(鍾會), 옹주자사 제갈서(諸葛緖)에 명해 여러 길로 나아가 아울러 공격하게 했다. 이에 좌우거기장군 장익(張翼), 요화(廖化), 보국대장군 동궐(董厥) 등을 보내 이를 막았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호를 염흥(炎興)으로 고쳤다. 
 
겨울, 등애가 위장군 제갈첨(諸葛瞻)을 면죽(綿竹)에서 격파했다. 광록대부 초주의 계책(譙周)을 채용해 등애에게 항복하며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 “장강, 한수로 한정되고 나뉘어서 깊고 멀리 떨어지고, 촉 땅에 의지해 한쪽 구석에 두절되니, 천운을 범하며 점점 여러해를 지나 마침내 경기(京畿)와 만리나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늘 생각건대 황초(黃初) 중에 문황제(文皇帝-조비)께서 호아장군(虎牙將軍) 선우보(鮮于輔)에 명해 따뜻하고 친밀한 조서를 전해 3가지 좋은 은덕을 베풀며 문호를 열어보여 주시어 대의가 분명했으나, 부덕(否德)하고 암약(暗弱)한 저는 선대의 유업을 탐하여 여러 해 동안 면앙(俛仰-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봄.그럭저럭 처신함)하며 큰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천위(天威)가 진동하자 사람과 귀신이 재능있는 자에게 귀부하고 왕사(王師)는 두렵고도 놀라워 이르는 곳마다 신무(神武)하니, 어찌 감히 혁면(革面-얼굴이나 태도를 고침)해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즉시 장수들에게 명해 과(戈)를 내던지고 갑옷을 벗도록 하고, 관부에 저장된 물건은 조금도 훼손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들에 흩어져 논두렁에는 (수확하지 못하고) 남은 곡식이 있으니 훗날 은혜를 입어 원원(元元-백성)의 목숨이 보전되길 기다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위(大魏)가 덕을 펴고 교화를 베풀며, 재보(宰輔-재상)는 이윤, 주공과 같아 함복장질(含覆藏疾-악을 감싸 덮어줌)합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시중 장소(張紹), 광록대부 초주(譙周), 부마도위(駙馬都尉) 등량(鄧良)을 보내 인수(印綬)를 받들게 하고, 청명(請命-하명을 청함)하며 성심을 고하고 충관(忠款-충성과 정성)을 공경히 바치니, 존망(存亡-생사) 칙사(敕賜-임금의 하사)가 모두 그대에게 달려있습니다. 수레에 실어놓은 관(輿櫬)를 가까이 두고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날, 북지왕 유심(劉諶)이 망국에 비통해하며 먼저 처자식을 죽인 후 자살했다. (주9) 장소, 등량은 낙현(雒縣)에서 등애와 만났다. 등애는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내 답장을 쓰고 (주10) 장소, 등량을 먼저 돌려보냈다. 

(주9) [한진춘추] – 후주가 장차 초주의 계책에 따르려 하자 북지왕 유심이 분노하여 말했다, 

“만약 계책과 힘이 다하여 화패(禍敗-화란과 실패)가 임박했다면, 응당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이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사직을 위해 함께 죽고 (저승에서) 선제(先帝)를 만나는 것이 옳습니다.” 

후주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마침내 새수(璽綬-옥새)를 보냈다. 이날, 유심은 소열(昭烈-소열제 유비)의 묘(廟)에서 곡하고는 먼저 처자식을 죽이고 그 뒤 자살하니 좌우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주 10) 왕은(王隱)의 [촉기]蜀記 – 등애가 답장을 보냈다, 

“왕강(王綱-천자의 기강)이 도를 잃어 군영(群英-군웅)들이 아울러 일어나고 용이 싸우고 호랑이가 다투었으나 끝내 참 주인에 귀의했으니 이는 아마도 천명(天命)이 거취(去就)하는 도인가 보오. 옛 성제(聖帝) 때부터 한(漢), 위(魏)에 이르기까지 천명을 받아 왕이 된 자는 중토(中土-중원)가 아니면 없었소. 

황하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에서 서(書)가 나와(하도 낙서) 성인이 이를 본받아 홍업(洪業)을 흥하게 했으니, 여기(중토)에서 비롯되지 않은 자로서 일찍이 무너지지 않은 자가 없었소. 외효(隗囂)는 농(隴)에 의지했다 망하고 공손술(公孫述)은 촉을 점거했다 멸망했으니 이는 모두 전세의 복거지감(覆車之鑒-후대에 경계가 되는 앞시대의 본보기)이오. 

성상(聖上)께서는 명철하고 재상(宰相)은 충현(忠賢)하고 장차 황헌(黃軒-황제 헌원?) 때처럼 융성하려 하여 그 공이 지난 날과 가지런하오. 명을 받들고 와서 정벌하며 좋은 소식 듣기 바랬는데 과연 번거로이 사신을 보내와서 덕음(德音)을 고하니 이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가르침이구려! 

옛날 미자(微子)는 주나라에 귀부하여 실로 상빈으로 대우받았으며, 군자표변(君子豹變-표범 털빛깔이 변하는 것처럼 군자는 잘못을 고쳐 혁신한다는 말)이란 뜻이 대역(大易-주역)에 있소. 와서 고하는 말이 겸손하고 여츤(輿櫬)의 예를 올리니, 이는 모두 지난날 명철한 이들이 천명에 귀의하는 법식이었소. 나라를 온전히 하는 것이 상책이고 나라를 격파하는 것은 그 다음이니(全國爲上, 破國次之 / 손자병법 모공편), 스스로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가 아니었다면 어찌 왕자(王者)의 뜻을 보였겠소!” 

유선은 또한 태상 장준(張峻), 익주별가 여초(汝超)를 보내 절도(節度)를 받게 하고, 태복 장현(蔣顯)을 보내 강유에게 칙명을 전했다. 또한 상서랑 이호(李虎)를 보내 사민부(士民簿)를 전하니, 영호(領戶-거느린 민호) 28만, 남녀구(男女口) 94만, 대갑장사(帶甲將士-무장병) 10만 2천, 리(吏-관원) 4만 명, 쌀 40여만 곡(斛), 금은 각 2천 근(斤), 금기채견(錦綺綵絹) 각 20만 필이었으며 나머지 물건들은 이에 상응했다.

등애가 성 북쪽에 도착하자 후주는 여츤자박(輿櫬自縛-수레에 관을 싣고 스스로 몸을 묶음.항복의 의식)하고 군루(軍壘)의 문으로 나아갔다. 등애는 결박된 것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후주를 청하여 맞아들여 서로 만났다. (주11) 승제(承制-황제의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하여 후주를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수비군들은 모두 후주의 칙서를 받은 연후에 항복했다. 등애는 후주를 옛 궁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만났고, 물자는 엄정히 해두고 쓰지 않았다. 

(주11) [진제공찬]晉諸公贊 - 유선은 노새가 끄는 수레(騾車)를 타고 등애에게 나아가니 망국(亡國)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다음해 봄 정월, 등애가 체포되었다. 종회(鍾會)는 부(涪)에서 성도에 이르러 난을 일으켰다. 종회가 죽은 뒤 촉(蜀) 중의 군사들이 초략(鈔略)하니 죽거나 다친 자가 낭자(狼籍-어지럽게 흩어짐)하였고 며칠 뒤에야 안집(安集-안정)되었다.
 
후주(後主)는 전가족이 동쪽으로 옮겨졌다. 낙양에 도착한 뒤 책명(策命)을 내렸다.
 
- “때는 경원(景元) 5년(264년) 3월 정해일, 황제가 임헌(臨軒-어전 앞으로 나옴)하여 태상(太常)을 시켜 유선에게 가명(嘉命)하여 안락현공(安樂縣公)으로 삼는다. 아! 나아와 짐의 명을 듣도록 하라! 

대저 하늘을 다스리고 만물을 싣는 것(統天載物)은 함녕(咸寧-모두 편안함)을 대법으로 삼고 천하를 크게 소유함에는 시옹(時雍-백성들이 화합함)을 크게 여기니, 고로 뭇 생명들을 품어 기르는 것은 군인(君人-군주)의 도이고 하늘에 순응하여 받드는 것은 곤원(坤元-땅)의 의(義)로다. 위아래가 서로 뒤섞여 통한 연후에 만물이 협화(協和)하고 서류(庶類-만물)가 안정되는 법이다. 예전에 한씨(漢氏-한나라)가 통치의 도를 잃자 육합(六合-천하)이 진동하고 어지러워졌다. 우리 태조(太祖-조조)께서 제운을 이어 용흥(龍興-용이 날아오름.제왕이 흥기함을 비유)해 팔극(八極-온세상)을 널리 구제했으니, 이로써 하늘에 응하고 백성에 순응하여 구하(區夏-중국)를 무유(撫有-어루만지고 차지함)했도다. 
 
이 때 군걸(群傑-군웅)들이 범처럼 다투어 구복(九服)이 안정되지 못하자, 조원(阻遠-험하고 멀리 떨어짐)함을 틈타 용촉(庸蜀-촉 땅)을 점거하고 마침내 서쪽 모퉁이를 끊긴 땅이 되게 하고 방외(方外-이역, 경계 밖)를 막히게 하였다. 이때 이후로 전란이 그치지 않아 원원(元元)의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전하지 못한 지 거의 60년(五紀)이 되었도다. 짐은 오래도록 선조의 남긴 뜻을 생각해 사해를 평정하고 온나라 땅을 통일하고자 하여 이 때문에 육사(六師-육군, 황제의 군대)를 정돈해 양주(梁州), 익주(益州) 땅에 위엄을 떨쳤다. 
 
그대는 덕과 도량을 존숭하고 대정(大正-중정.치우침이나 모자람없이 곧고 올바름)을 깊이 겸하여 몸을 굽혀 위질(委質-몸을 맡김. 항복)함을 꺼리지 않았으니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온전하게 함을 귀히 여긴 것이고, 마음을 바로잡고 생각을 되돌리며 기회에 응해 표변(豹變)하고 행실과 말에서 순리를 생각하니 그 좌우(左右)들이 무궁한 경사를 누리게 하였구나. 어찌 심오하지 않은가! 

짐은 그대를 가상히 여겨 길이 높은 복록을 내린다. 옛 가르침을 살펴 국(國)을 열고 봉토를 내리니 옛 법식에 따라 양자(鍚茲-당노로 장식한?) 검은 소를 백모(白茅)로 싸서 내리고 길이 위나라의 번보(藩輔-제후)로 삼는다. 가서 공경히 처신하도록 하라! 그대는 짐의 명을 삼가 받들고 덕심(德心)을 넓혀 종신토록 열렬하게 드러내도록 하라” 
 
식읍 만 호, 비단(絹) 만 필, 노비 백 명을 하사하고 기타 물건은 이에 상응하게 했다. 그 자손 3명을 도위(都尉)로 삼았고, 후(侯)에 봉한 자는 50여 명이었다. 

상서령 번건(樊建), 시중 장소(張紹), 광록대부 초주(譙周), 비서령 극정(郤正), 전중독(殿中督) 장통(張通)은 나란히 열후에 봉했다. (주12) 

(주 12) [한진춘추] – 사마문왕(司馬文王-사마소)이 유선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그를 위해 옛 촉의 기(技-가무)를 짓게 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으나 유선은 기뻐하고 웃으며 태연자약했다. 왕이 가충(賈充)에게 말했다, 

“사람이 무정(無情)하니 가히 이 지경에 이른 것이오! 비록 제갈량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능히 보필하여 오래 보전하지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강유(姜維)겠소?” 

가충이 말했다, 

“이와 같지 않았다면 전하께서 어찌 그를 아우를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날, 왕이 유선에게 물었다, 

“자못 촉이 생각나지 않으시오?” 

유선이 말했다, 

“여기가 즐거워 촉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극정이 이를 듣고 만나기를 청한 후 유선에게 말했다, 

“왕이 뒤에 묻거든 흐느끼며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선인들의 분묘가 멀리 농(隴), 촉(蜀)에 있어 마음이 서쪽을 향해있고 비감하니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십시오.” 

때마침 왕이 다시 묻자 그처럼 대답했다. 왕이 말했다, 

“어찌 극정의 말과 같단 말인오!” 

유선이 놀라서 쳐다보며 말했다, 

“참으로 존명(尊命-당신의 말씀)과 같습니다.” 

좌우에서 모두 웃었다.

공(公-유선)은 태시(泰始) 7년(271년) 낙양에서 훙(薨)했다. (주13)
 
(주13) [촉기] – 시호를 내려 사공(思公)이라 했다. 아들 유순(劉恂)이 후사를 이었다.
 
평한다. 후주는 어진 재상에게 일을 맡길 때는 순리지군(循理之君-도리를 따르는 군주)이었으나 엄수(閹豎-환관)에게 미혹되자 혼암지후(昏闇之后-우매한 군주)였다. 전(傳)에서 이르길 “흰색 실은 일정한 색이 없고 오직 물들여지기에 달려있다.”고 했으니 확실히 그러하구나!

예(禮)에서는 나라의 군주가 제왕의 지위를 이어받으면 해를 넘겨 개원(改元-연호를 고침)한다고 했으나, (유비가 죽은) 장무(章武) 3년에 곧바로 건흥(建興)으로 바꾸어 칭했으니 옛 뜻으로 보건대 이치에 어긋난 것이다. 또한 나라에 사(史-사관)를 두지 않아 주기(注記-기록)하는 관원이 없었으니 이로써 그 행사(行事-시행한 정사)가 다수 유실되고 재이(災異-자연재해와 드물게 보이는 자연현상)가 기록되지 못했다. (주)

주: 사통(史通)에서 유지기가 말하길, 진씨(陳氏-진수)가 삼국지에 후주전을 세워(지어) 이르기를 

“촉에는 사관(史官)이 없었는데, 그러므로 재이(災異)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라고 했다.(1) 생각건대 ‘누런 기운이 자귀에 나타나고(2), 새 떼가 강수(江水)에 떨어지며(3), 성도에 경성(景星)이 나타나고(4), 익주에 재상의 기운이 없다는 말을 했다(5)’ 하니, 만약 사관을 두지 아니하였다면 이 일들은 어떻게 기록된 것인가? 대개 (진수의)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곤형(髡刑-머리털을 밀어버리는 형벌)으로 치욕을 당한 까닭에 그러므로 이렇게 비방하여 논한 것이다.

제갈량이 비록 위정(爲政)에 통달했으나 무릇 이와 같은 일에는 주밀하지 못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도록(經載十二) 연호를 바꾸지 않고(年名不易)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켰으나 함부로 사면하지 않았으니(赦不妄下) 또한 탁월하지 않은가! 제갈량이 죽은 뒤로 이런 제도는 점차 이지러져(茲制漸虧) 우열(優劣)이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다. (주14)

 
(주 14) [화양국지] – 승상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 제갈량에게 사면에 인색하다고 하는 자가 있자 제갈량이 답했다, 

“세상을 다스릴 때는 큰 덕으로 해야지 작은 은혜로 해서는 안되오. 이 때문에 광형(匡衡), 오한(吳漢)은 사면하기를 원하지 않았소. 선제(先帝)께서 또한 말씀하시길, ‘내가 진원방(陳元方-진기陳紀), 정강성(鄭康成-정현鄭玄)과 교제할 때 늘 가르침을 받아 난세를 다스리는 도리를 배웠지만 일찍이 사면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없다’고 하셨소. 만약 유경승(劉景升-유표)과 계옥(季玉-유장) 부자처럼 해마다 사면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무슨 도움이 되겠소!” 
 
/신 송지가 보건대(진수 평에 대한 배송지 논평) ‘함부로 사면하지 않았다’(赦不妄下)는 것은 실로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연호를 바꾸지 않았다’(年名不易)는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통달하지 못한 점이 있다. 건무(建武-후한광무제 25-55), 건안(建安-후한헌제 196-220)의 연호는 모두 오랫동안 바꾸지 않았으나 전사(前史)에서 이를 미담으로 여기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12년이 지났다’(經載十二)는 것으로 어찌 족하겠는가? 어찌 따로 다른 뜻이 있어 이를 구하다 이르지 못한 것이겠는가! 제갈량이 죽은 후 연희(延熙)의 연호가 20년을 채웠으니, ‘이런 제도가 점차 이지러졌다’(茲制漸虧)는 말 또한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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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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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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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0
16:00:39
(*.104.141.18)
출처 추가

코렐솔라

2013.07.14
22:36:29
(*.52.89.87)
위략의 유선 벤허설이 빠져있어서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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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오서 등윤전 [2] 견초 2013-05-01 5006
76 오서 제갈각전 [10] 견초 2013-05-01 10099
75 오서 조달전 [6] 견초 2013-05-01 5210
74 오서 유돈전 [1] 견초 2013-05-01 4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