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출처/번역: 고원님의 블로그史랑방


제갈량(諸葛亮)의 자는 공명(孔明)이고, (서주) 낭야(琅邪)군 양도(陽都)현 사람이다. 한(漢) 사례교위 제갈풍(諸葛豐)의 후예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자가 군공(君貢)이고 한(漢) 말 태산군승(太山郡丞-연주 태산군 군승)을 지냈다. 제갈량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종부(從父-백부, 숙부를 통칭)인 제갈현(諸葛玄)은 원술(袁術)에 의해 예장(豫章)태수로 임명되자, 제갈량과 제갈량의 동생 제갈균(諸葛均)을 데리고 부임했다. 때마침 한나라 조정에서 다시 주호(朱皓)를 (예장태수로) 뽑아 제갈현을 대신하게 했다. 제갈현은 평소 형주목 유표(劉表)와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주1)

(주1) [헌제춘추]獻帝春秋 – 당초, 예장태수 주술(周術)이 병으로 죽자, 유표는 제갈현을 올려 예장태수로 삼고 남창(南昌-양주 예장군 남창현)을 다스리도록 했다. 한나라 조정에서 주술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주호(朱皓)를 보내 제갈현을 대신하게 했다. 주호는 양주태수 유요(劉繇)에게 군사를 청해 제갈현을 공격했다. 제갈현은 물러나 서성(西城)에 주둔하고, 주호는 남창으로 들어왔다. 건안 2년(197년) 정월, 서성의 백성이 반기를 들어 제갈현을 죽이고, 그 수급을 유요에게 보냈다. / (주석자 배송지의 말) 이 책(헌제춘추)에서 말하는 바는 본전(제갈량전)과 다르다.

제갈현이 죽자 제갈량은 몸소 밭이랑에서 농사지었으며, 양보음(梁父吟)을 부르기 좋아했다. (주2) 

(주2) [한진춘추]漢晉春秋 – 제갈량의 집은 남양(南陽)의 등현(鄧縣)에 있었다. 양양성 서쪽 20리 되는 곳으로 융중(隆中)이라 불리었다.

신장 8척으로 늘 자신을 관중(管仲), 악의(樂毅)에 비교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오직 친한 벗으로 지내던 박릉(博陵-기주 박릉군)의 최주평(崔州平), 영천(潁川-예주 영천군)의 서서(徐庶) 원직(元直) 만이 참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했다. (주3)

(주3) [최씨보]崔氏譜에 의하면, 최주평(崔州平)은 태위 최열(崔烈)의 아들이고 최균(崔均)의 동생이다.

[위략]魏略 – 제갈량은 형주(荊州)에 있었는데, 건안 초, 영천(潁川)의 석광원(石廣元-석도石韜), 서원직(徐元直-서서), 여남(汝南-예주 여남군)의 맹공위(孟公威-맹건孟建) 등과 함께 유학(遊學)했다. 이 세 명은 정숙(精熟-정밀하고 숙지함)에 힘썼으나 제갈량은 홀로 대략(大略-큰 줄거리. 대요)을 살폈다. 매양 새벽부터 밤까지 종용(從容-차분하고 침착함)하게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크게 읊조리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경(卿) 세 사람이 벼슬하면 가히 자사(刺史)나 군수(郡守)에까지 오를 것이오.” 

세 사람이 제갈량 자신은 어떠한지 묻자 다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맹공위가 향리(鄕里-고향)를 그리워하며 북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중국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어찌 필히 고향에서 오유(遨遊-노닐다)하려 하시오!” 

 /신 송지가 보건대, [위략]의 이 말은 제갈량이 맹공위를 위해 말한 계책이라 하는 것은 가하다. 만약 겸하여 자신을 위한 말이라고 한다면 그의 진심을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노씨(老氏-노자)는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자신을 아는 것은 밝음’ (知人者智 自知者明)

이라 했으니 무릇 현달(賢達)한 이들은 실로 이 두 가지(남과 자신을 아는 것)를 겸하는 것이다. 제갈량의 감식(鑒識)으로 어찌 스스로 자신을 헤아리지 못했겠는가? 무릇 높게 읊조리며 때를 기다릴 때 그의 뜻이 말에서 나타나고 지기(志氣-의지와 기개)가 드러났으니, 이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졌던 것이다.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용광(龍光–뛰어난 재주)을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씨(魏氏-위나라)에 위질(委質-몸을 맡김. 복무함)해 그 기능(器能-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陳長文-진군陳群)이나 사마중달(司馬仲達-사마의)도 능히 힐항(頡頏-서로 대등하게 겨룸)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공업을 이루고 도를 행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으며, 비록 뜻이 우주(宇宙)처럼 넓었으나 끝내 북쪽을 향하지 않은 것은, 권어(權禦)가 이미 옮겨가고 한조(漢祚)가 장차 기울어지려 하므로 바야흐로 종걸(宗傑-종실의 인걸)을 도와 미약해진 것을 흥하게 하고(興微), 끊어진 것을 있고(繼絶), 이겨서 다시 회복하는 것(克復)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어찌 변비(邊鄙-궁벽한 변경)에서의 구구한 이익 때문이겠는가! 이는 사마상여가 말한바 ‘봉황새와 대붕이 이미 멀리 날고 있는데, 사냥꾼은 여전히 늪과 못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맹공위의 이름은 건(建)이고 위나라에 있으면서 또한 귀하게 현달되었다. 

이때 선주(先主-유비)가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서서(徐庶)가 선주를 만나보자 선주가 그를 중히 여겼다. 서서가 선주에게 말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누워있는 용)입니다.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보고자 하십니까?” (주4)

(주4) [양양기]襄陽記 – 유비가 사마덕조(司馬德操-사마휘)에게 세사(世事)에 관해 물었다. 덕조가 말했다, 

“(저 같은) 유생(儒生) 속사(俗士)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俊傑) 중에 있으며 이런 준걸에는 복룡(伏龍)과 봉추(鳳雛)가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유비가 묻자 덕조가 말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방사원(龐士元)입니다.”

선주가 말했다, 

“군(君-그대)이 데리고 오시오.” 

서서가 말했다, 

“이 사람은 가서 만나볼 수는 있으나 몸을 굽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의당 몸을 낮추시고 방문하셔야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선주가 제갈량을 방문했고 세 번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선주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했다, 

“한실(漢室)이 무너지고 간신이 천명을 훔쳐 주상(主上)께서 몽진 길에 오르게 되었소. 나는 스스로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했으나 지술(智術-지모)이 얕고 부족해 창궐(猖蹶-실패, 좌절)하다 오늘에 이르렀소. 그러나 뜻은 여전히 버리지 않았으니, 장차 어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겠소?” 

 제갈량이 대답했다. (※ 융중대隆中對 or 초려대草廬對)

“동탁 이래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 주(州)를 타넘고 군(郡)을 연결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조조는 원소에 비하면 명성은 미약하고 그 군사는 적었으나 마침내 원소를 이겨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천시(天時) 만이 아니라 또한 인모(人謀-사람의 꾀)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백만 군사를 거느린 채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므로(挾天子而令諸侯) 실로 그와 쟁봉(爭鋒)할 수 없습니다. 손권은 강동을 점거해 차지한 지 이미 3대가 지났고, 나라는 험하며 백성들은 귀부하고 현능한 이들이 쓰이고 있으니, 가히 동맹으로 삼을지언정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荊州)는 북쪽으로 한수, 면수에 의지해 그 이익이 남해(南海)에 다다르고, 동쪽으로 오회(吳會-오, 회계)와 연결되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과 통하니 이는 용무지국(用武之國-용병할 요충지)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능히 지킬 수 없어, 이는 거의 하늘이 장군께 주려는 것이니 장군은 취할 뜻이 있으십니까? 

익주(益州)는 험색(險塞-험준하고 막혀있음)하며 옥야(沃野-기름진 들판) 천리의 천부지토(天府之土-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한 땅)로, 고조(高祖-한고조 유방)께서 이에 의지해 제업(帝業)을 이루었습니다. 유장이 암약(闇弱-어리석고 나약함)하여 장로가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민은국부(民殷國富-백성은 넉넉하고 나라는 부유함)하나 백성들을 다독일 줄 모르니 지혜롭고 재주 있는 선비들은 명군(明君) 얻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제실(帝室-황실)의 후예인데다 사해에 신의(信義)를 떨쳤으며, 영웅들을 총람(總攬)하며 현인 그리워하는 것을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 하십니다. 만약 형주, 익주를 타넘어 차지해 그 엄조(巖阻-험조)함에 기대고, 서쪽으로 제융(諸戎-여러 융족들)과 화친하고 남쪽으로 이월(夷越)을 어루만지며, 밖으로는 손권과 결호(結好-화친을 맺음)하고 안으로는 정리(政理-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을 때 한명의 상장(上將)에게 명해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완(宛), 낙(洛-낙양)으로 향하게 하고 장군께서는 몸소 익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천(秦川)으로 출병하신다면, 단사호장(簞食壺漿-대나무 그릇에 담은 밥과 호리병의 국)으로 장군을 영접하지 않을 백성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실로 이처럼 한다면 가히 패업(霸業)이 이루어지고 한실(漢室)이 흥할 것입니다.”

선주가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이에 제갈량과의 정이 날로 깊어졌다. 관우, 장비 등이 불쾌한 기색을 보이자 유비가 다독이며 말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원컨대, 제군들은 이에 관해 다시 말하지 말라.” 

이에 관우, 장비가 불평을 멈추었다. (주5) 

(주5) [위략]魏略 – 유비는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조공(曹公-조조)이 이제 막 하북을 평정했으니 제갈량은 형주가 그 다음차례로 적을 맞이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유표는 성정이 굼뜨고(緩) 군사(軍事)에 밝지 못하니 이에 제갈량은 북쪽으로 가서 유비를 만났다. 

유비는 제갈량과 교분이 없고 또 그의 나이가 어리므로 여러 유생 중 한 명으로 짐작하고 그를 대접했다. 모임이 끝난 후 뭇 빈객들이 모두 떠났으나 제갈량은 홀로 남아 있었는데, 유비 또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유비는 평소 결모(結毦-짐승털이나 새깃으로 장식품을 짬)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때마침 어떤 이가 유비에게 소꼬리 털을 주었으므로 직접 손으로 짜고 있었다. 이에 제갈량이 진언했다, 

“명장군(明將軍)께서 또한 원대한 뜻이 있다고 하더니 다만 결모(結毦) 하는 것이었습니까!” 

유비는 제갈량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짜던 것을 내던지고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내 잠시 근심을 잊으려던 것뿐이오.” 

그러자 제갈량이 말했다, 

“장군께서 헤아리기에 유진남(劉鎭南-진남장군 유표)을 조공에게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미치지 못하오.” 

제갈량이 또 말했다, 

“장군 스스로는 어떻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마찬가지요.” 

제갈량이 말했다, 

“지금 모두 미치지 못하는데다, 장군의 군사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니, 이 군사로 적을 기다리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유비가 말했다, 

“나 또한 이를 근심하고 있소. 어찌해야 되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지금 형주에 백성이 적은 게 아니고 호적에 실린 자가 적을 뿐이며 (이를 기초로) 평소대로 발조(發調-인력, 물자 등을 거둠)하니 인심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남(鎭南-유표)께 말해 국(國) 중의 유호(遊戶)를 모두 올려 충실히 하면 이로써 군사들을 늘릴 수 있습니다.” 

유비가 이 계책에 따르니 마침내 그 무리가 강성해졌다. 이로 말미암아 유비는 제갈량이 영략(英略-뛰어난 지략)을 갖추었음을 알고 그를 상객으로 예우했다. [구주춘추]九州春秋의 말이 또한 이와 같다.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의 표(表-즉, 출사표)에서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어 신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시고 당세의 일을 물으셨다’

고 했으니, 즉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 분명하다. 비록 듣고 본 것이 서로 달라 이런 저런 말이 각각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 어긋나고 위배되는 점이 이 정도에 이르니 또한 실로 괴이한 일이로다.

유표의 장자 유기(劉琦) 또한 제갈량을 매우 중시했다. 유표는 후처(後妻)의 말을 받아들여 작은 아들인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不悅) 유기는 매양 제갈량과 더불어 스스로 안전할 수 있는 방책(自安之術)을 꾀하려 했으나 제갈량은 번번이 이를 거절하며 더불어 처획(處畫-상의하거나 계획함)하지 않았다. 이에 유기는 제갈량을 데리고 후원을 산책하다 함께 높은 누각에 올라 연회를 베푸는 사이 사람을 시켜 사다리를 치우게 했다. 

그리고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오늘은 위로는 하늘에 이르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닿지 않으니, 말이 그대 입에서 나와 제 귀로 들어갈 뿐입니다.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신생(申生)이 안에 있다가 위험해지고 중이(重耳)가 밖에 있다가 안전해진 것을 보지 못하셨소?” (※)

※ 신생(申生)은 진헌공(晉獻公)의 태자로 여희(驪姬)의 참소를 받아 자살하고, 중이(重耳)는 신생의 동생으로 나라 밖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지고, 오랜 세월 방랑하다 다시 돌아와 즉위함, 춘추5패의 하나인 진문공(晉文公)이 바로 중이입니다.

유기는 깨닫는 바가 있어 밖으로 나갈 것을 은밀히 꾀했다. 때마침 황조(黃祖)가 죽자 밖으로 나가 강하(江夏)태수가 되었다.  

갑자기 유표가 죽고, 유종은 조공이 와서 정벌한다는 것을 듣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선주는 번(樊)에서 이 일을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왔다. 제갈량은 서서와 함께 뒤따랐는데 조공이 추격해 격파하고 서서의 모친을 붙잡았다. 서서는 선주에게 이별을 고하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본래 장군과 함께 왕패(王霸)의 업을 도모하려 한 것은 이 방촌지지(方寸之地-사방 1촌의 땅. 가슴을 가리킴)에서였습니다. 지금 노모를 잃어 방촌(方寸)이 어지러워 일에 도움이 될 수 없으니 이에 작별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조공에게로 갔다. (주6: 위략 서서전)

선주가 하구(夏口)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일이 급합니다. 명을 받들어 손장군(孫將軍-손권)에게 구원을 청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때 손권은 군을 거느리고 시상(柴桑-양주 예장군 시상현)에 있으면서 성패(成敗)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했다, 

“해내(海內)에 대란이 일자 장군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강동을 점거해 차지하고 유예주(劉豫州-예주목 유비)께서는 또한 한수 남쪽에서 군사를 거두어 조조와 천하를 다투었습니다. 지금 조조는 큰 어려움을 제거하고 대략 평정을 끝냈습니다. 마침내 형주까지 격파하여 위세를 사해(四海)에 떨쳐 영웅들이 용무(用武-용병)할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예주께서 둔도(遁逃-도피)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역량을 헤아려 대처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吳), 월(越)의 군사로 중국(中國)과 능히 맞설 수 있다면 (중국과) 일찍 관계를 끊느니만 못합니다. 만약 능히 당해낼 수 없다면 어찌 안병속갑(案兵束甲-무기를 내버리고 갑옷을 묶어 둠. 무장해제)하고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께서는 겉으로는 복종의 명목을 내세우며 내심으로는 망설이십니다. 일이 급한데 결단하지 못하니 머지않아 화(禍)가 닥칠 것입니다!” 

손권이 말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유예주는 어찌 끝내 조조를 섬기지 않는 것이오?” 

제갈량이 말했다, “전횡(田橫)은 제나라의 장사(壯士)이나 오히려 의(義)를 지키며 모욕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 

※ 초한전 때 한신, 관영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제왕 전광(田廣)을 사로잡자 숙부인 전횡(田橫)이 제왕에 오릅니다. 그 후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5백 여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달아났는데,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한 유방이 투항을 권유하며 위협합니다. 이에 응해 낙양으로 오던 도중 “나는 처음에 한왕(漢王-유방)과 함께 남면하며 고라 칭했는데(같은 왕이었다는 말) 이제 한왕은 천자가 되고 나는 도망친 포로 신세가 되어 북면하여 그를 섬겨야 하니 이 치욕은 너무 심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합니다. [사기] 권94 전담열전 참조 (전담田儋은 전횡의 종부從父로, 진나라 말 최초로 제왕齊王을 칭함)

하물며 유예주께서는 왕실의 후예로, 영재(英才-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덮어 뭇 선비들이 모앙(慕仰-앙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듯 하는 분이니,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곧 하늘의 뜻일 뿐, 어찌 남의 아래에 들어가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하며 말했다, 

“나는 오(吳) 땅 전부와 10만 군사를 들어 남에게 제어당할 순 없소. 내 계책은 이미 정해졌소!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소. 그러나 예주(豫州-유비)가 이제 막 패한 직후니 이 어려움에 어찌 대처해야 하겠소?” 

 제갈량이 말했다, 

“예주(豫州-유비)의 군이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했으나 지금 돌아온 전사(戰士-병사)와 관우의 수군(水軍)이 정갑(精甲-정병) 만 명이고, 유기(劉琦)가 합한 강하의 전사 또한 최소한 만 명입니다. 조조의 군사는 멀리 와서 피폐해졌고, 제가 듣기로 예주(豫州-유비)를 추격해 경기(輕騎-경기병)로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왔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노(强弩-강한 활, 쇠뇌)가 끝에 이르러서는 노나라의 명주 천도 뚫을 수 없다’(强弩之末, 勢不能穿魯縞)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병법에서 이를 꺼려 ‘필히 상장군(上將軍)을 꺾이게 하다’(必蹶上將軍)고 했습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들은 물싸움에 익숙지 않고 또한 조조에 귀부한 형주민은 병세(兵勢-군세, 병력)에 핍박당한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실로 맹장(猛將)에 명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예주와 협력하여 힘을 모으면 필히 조조 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조조군 이 격파되면 틀림없이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형(荊), 오(吳)의 세력이 강해져 정족(鼎足-솥발)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패의 계기는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주유(周瑜), 정보(程普), 노숙(魯肅) 등 수군 3만을 보내 제갈량을 따라 선주에게로 나아가 힘을 합해 조공에 맞서게 했다.(주7) 

(주7) [원자]袁子 – 장자포(張子布-장소張昭)가 손권에게 제갈량을 추천했으나 제갈량은 머물기를 거절했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제갈량이 말했다, 

“손장군은 가히 인주(人主-군주)라 할 수 있소. 그러나 그 도량을 보면 나를 어질게 대할 수는 있으나 내 기량을 다하게 할 수는 없으니, 이 때문에 나는 머물 수 없소.” 

/신 송지가 보건대, 원효니(袁孝尼-원자를 지은 원준袁準. 원환袁渙의 아들로 위, 진 때 인물)는 글을 짓고 변론을 세우면서 제갈량의 사람됨을 심히 중하게 평가했으나 여기에 이르러 그 말이 매우 멀리 어긋났다. 

제갈량의 군신(君臣-군주와 신하, 즉 유비와 제갈량)이 서로 만난 것은 가히 세상에 드물도록 생사와 화복을 함께하는 관계라 할 만하니 누가 그 틈에 끼어들 수 있겠는가? 어찌 단금(斷金-쇠를 자를 정도의 단단한 신의)을 거슬러 주인을 고르는 마음을 품었을 것이며, 설령 손권이 그 기량을 다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거취를 뒤집었겠는가? 제갈량이 태어나 행기(行己-입신하여 처세함)함에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관우가 조공에게 사로잡혀 심히 후대 받았고 가히 그 쓰임을 다하게 했다 할 만하나, 오히려 (관우는) 의로써 그 근본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어찌 공명이 운장(雲長-관우)만도 못하단 말인가!

조공은 적벽(赤壁)에서 패하자 군을 이끌고 업(鄴)으로 돌아갔다. 선주는 마침내 강남(江南-장강 남쪽)을 거두고, 제갈량을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3군을 감독하며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실(軍實-군대의 무기와 양식)을 채우게 했다. (주8)  

(주8) [영릉선현전]零陵先賢傳 – 제갈량이 이때 임증(臨烝)에 머물렀다. (※ 손권이 기존의 장사(長沙)군을 나누어 형양(衡陽)군, 상동(湘東)군을 새로 설치했는데, 임증현은 상동군(상수 동쪽)에 속한 현이었고 진나라에 이어짐)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이 법정(法正)을 보내 선주를 영접하고 장로(張魯)를 공격하게 했다. 제갈량은 관우와 함께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가맹(葭萌-익주 광한군 가맹현)에서 돌아와 유장을 공격하니, 제갈량은 장비, 조운 등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현들을 나누어 평정하고, 선주와 함께 성도를 포위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고 좌장군부(左將軍府)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서좌장군부사 署左將軍府事) 선주가 밖으로 출병하면 제갈량은 늘 성도를 진수하며 식량과 병사를 대었다. 

건안 26년(221년), 군하(群下-뭇 수하)들이 선주에게 존호를 칭할 것을 권하자 선주는 허락지 않았다.  

제갈량이 설득했다, 

“옛날 오한(吳漢), 경엄(耿弇) 등이 처음 세조(世祖-후한 광무제 유수)께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니 세조께서 사양한 것이 앞뒤로 네 번쯤 됩니다. 그러자 경순(耿純)이 진언하길, ‘천하 영웅들이 우러러 따르며 소망하는데, 만약 의견에 따르지 않는다면 사대부들은 각각 돌아가 주인을 찾을 것이고 공을 따르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라 하니, 세조께서 경순의 말이 심히 지극함에 감격하시어 마침내 허락하셨습니다. 

지금 조씨(曹氏)가 한(漢)을 찬탈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유씨(劉氏)의 묘족(苗族-일가 피붙이)으로 세계(世係)를 계승해 몸을 일으켰으니 지금 제위에 오르심이 마땅합니다. 대왕을 따라 오랫동안 근고(勤苦-부지런히 힘씀)한 자들이 또한 경순의 말처럼 척촌(尺寸-일척 일촌. 작고 사소함)의 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에 선주가 제위에 오르고 제갈량을 승상(丞相)으로 삼으며 책문(策文)에서 말했다, 

“짐은 황실이 불행을 만나 대통(大統)을 봉승(奉承)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며 감히 스스로 강녕(康寧-건강하고 편안함)함을 꾀하지 않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하려고 하나 능히 그럴 수 없을까 두렵도다. 아! 승상 제갈량은 짐의 뜻을 다하여, 짐의 허물을 보좌하는데 태만하지 말고, 중광(重光-누세의 성덕)을 선양하는 것을 도와 천하에 비추도록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錄尙書事), 가절(假節)로 삼았다. 장비가 죽은 후 사례교위를 겸하게 했다. (영사례교위 領司隷校尉) (주9) 

(주9) [촉기] - 진나라 초 부풍왕(扶風王) 사마준(司馬駿)이 관중을 진수할 때, (※ 사마준은 사마의의 아들로 사마염에겐 숙부이며, 진 태시 6년(270년) 이래 진서대장군 도독옹량주등제군사(都督雍凉等州諸軍事)로 관중을 진수함) 사마 고평(高平)사람 유보(劉寶), 장사 형양(滎陽)사람 환습(桓隰) 등 여러 관속 사대부들이 제갈량에 대해 함께 논했다. 

이때 논의하는 자들 다수는, ‘제갈량이 잘못된 곳에 몸을 맡겨 촉 백성들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적으면서 계획만 거창했으니 자신의 덕과 역량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비웃었다. 

금성(金城)사람 곽충(郭沖)은 ‘제갈량의 권지(權智-임기응변과 지혜), 영략(英略-뛰어난 지략)이 관중, 안영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나 공업(功業)을 이루지 못해 논자들이 미혹되었다’고 하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관한 다섯 가지 일(이른바 곽충5사)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유보 등이 또한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부풍왕은 개연(慨然)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의 남다른 훌륭함이라면 실로 듣고 싶은 바이나, 곽충의 말은 모두 의심스러우니 삼가 각 일화의 뒤에서 비판하려 한다. (※ 제갈량전의 각각 관련되는 부분에서 다섯 가지 일화들을 소개하고 곧바로 배송지의 반박이 이어짐)

곽충이 말한 첫 번째일 (곽충1사):

제갈량의 형법(刑法)이 준급(峻急-엄하고 급함)해 백성을 각박(刻剝-가혹하게 다룸)하자 군자부터 소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원망하고 한탄했다. 법정이 간언했다, 

“옛날 고조께서 관(關)으로 들어와 약법삼장(約法三章-법을 3장으로 간략히 함)하니 진(秦)나라 백성들이 그 덕을 알았소. 지금 그대는 위력(威力)을 빌려 한 주(州)를 걸터앉아 점거하고 처음 그 국(國)을 소유했으나 은혜를 베풀어 위무하지 않았소. 게다가 주인과 손님의 의(義)로 보아도 의당 서로 낮추어야 하니, 형(刑)을 느슨하게 하고 금(禁-금령)을 늦추어 그들의 원망을 달래십시오.” 

제갈량이 대답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오. 진(秦)나라는 무도하고 정치가 가혹해 백성들이 원망하니 필부의 함성에 천하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고, 고조가 이로 인하여 널리 구제할 수 있었소. 유장(劉璋)은 암약(暗弱)하고 유언(劉焉) 이래 누대에 걸쳐 은혜를 베풀어, 문법(文法-문서로 된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서로 승봉(承奉-아첨)하니, 덕정(德政)이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위형(威刑-위엄과 형벌)도 엄숙하지 못했소. 촉 땅 인사들이 전권(專權-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름)하며 스스로 방자하게 되자 군신(君臣)의 도가 점차 쇠퇴했소. 지위로써 총애하니 지위가 극에 다다르면 (주인을) 얕보게 되고, 은혜로써 순종시키니 은혜가 고갈되면 교만해졌소. (금일의) 폐단이 실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오. 

이제 내가 법으로 위엄을 세울 것이니 법이 행해지면 은혜로움(恩)을 알 것이고, 작위에 한도를 둘 것이니 작위가 더해지면 영예로움(榮)을 알 것이오. 영(榮)과 은(恩)이 아울러 다스려지면 위아래에 절도가 있게 되니, 다스림의 요체는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오.”

/(이하 배송지의 비판) 비판한다. 

고찰컨대 법정이 살아 있을 땐 유주(劉主-유비)가 죽기 전이었으니, 여기서 법정이 간언했다는 것은 유주(劉主)가 살아있을 때의 일이라는 말이다. 

제갈량의 직분은 고굉(股肱)이고, 일은 원수(元首-우두머리, 즉 유비)에게 귀속되는 것이다. 또한 유주(劉主)가 살아있을 때 제갈량은 익주를 다스리지 않았으니 경상형정(慶賞刑政-포상과 형벌)이 그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다. 그러나 곽충이 서술한 제갈량의 답변을 보면 스스로 그 일을 임의로 할 수 있는 듯하다, 이는 신하가 의당 스스로 처해야 할 본분에 위배되는 것으로, 제갈량의 겸순(謙順)한 몸가짐으로 볼 때 필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또한 제갈량의 형법이 준급(峻急)하고 백성을 각박(刻剝)했다 했는데, 선정(善政)을 두고 각박(刻剝)이라 칭하는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곽충이 말한 두 번째일 (곽충2사):

조공(曹公)이 자객(刺客)을 보내 유비를 만나게 했다. 바야흐로 서로 만나 위나라를 정벌하는 형세에 관해 논하기 시작하자 심히 유비의 심계에 들어맞았다. (자객이) 좀 더 가까이 가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제갈량이 들어오자 위나라 자객의 안색에 놀라고 당황한 빛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제갈량이 그를 살펴보고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얼마 후 자객이 측간에 가자 유비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좀 전에 기사(奇士-뛰어난 선비)를 얻었으니 족히 그대를 도와 보좌할 만하오.” 

그가 어디에 있냐고 제갈량이 묻자 유비가 말했다, 

“일어서 나간 이가 그 사람이오.” 

제갈량이 천천히 탄식하며 말했다, 

“객(客)의 안색과 거동을 살펴보니 두려워하며 시선을 아래로 깔고 자주 눈길을 피했습니다. 간사한 형상이 밖으로 드러나고 사악한 마음이 안에 숨겨져 있으니 필시 조씨(曹氏)의 자객입니다.” 

그를 추격했으나 이미 담을 넘어 달아난 뒤였다. 

/비판한다. 무릇 자객은 포호빙하(暴虎馮河-범을 맨손으로 때려잡고 황하를 걸어서 건넘)하며 죽을지언정 후회하지 않는다. (※)

※ [논어] 술이편(述而篇) 중 - 공자가 안연(顔淵-안회)에게 말했다, “나를 불러 쓰면 행하고, 나를 버리면 감출 것이니, 오로지 나와 너만이 이 도를 갖추었구나!” 자로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시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고 황하를 걸어서 건너며, 죽을지언정 후회하지 않는 자와는 나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필히 일에 임해 두려워하고, 즐겨 도모하여 일을 이루는 자와 함께 할 것이다. 

유주(劉主-유비)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견식이 있는데 이 자객에게 미혹되었으니 즉 이 자객이 필시 일세의 기사(奇士)라는 것이다. 또한 제갈량에게 이르길, ‘족히 그대를 도와 보좌할 만하다’고 했으니 또한 제갈량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무릇 제갈량에 견줄 만한 인물이 남을 위해 자객이 되는 것은 드문 일이고, 이때 그의 주인 또한 응당 그 기량을 아꼈을 것이니 필시 사지(死地)에 던져 넣었을 리 없다. 게다가 이 사람은 죽지 않았으니 위나라에서 반드시 현달(顯達)되었을 것인데, 필경 이 사람이 누구인가? 어찌 이처럼 적멸(寂蔑-소식, 기척이 없음)되어 알려지지도 않았겠는가!

장무 3년(223년) 봄, 선주는 영안(永安)에서 병이 깊어지자 성도에 있던 제갈량을 불러 뒷일을 부탁했다. 제갈량에게 말했다,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감히 고굉지력(股肱之力-신하로서의 헌신)을 다하고 충정지절(忠貞之節-충정의 절개)에 힘쓸 것이니, 죽기로 계속할 것입니다.” 

선주는 또 후주에게 조칙을 내렸다, 

“너는 승상과 함께 일을 처리하고 승상을 이 아비처럼 섬겨라.” (주10) 

(주10) 손성(孫盛)이 말했다 – 무릇 도의(道義)에 의거하고 신의와 순리를 근본으로 삼은 연후에 능히 군주를 돕고 공을 이루어 끝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바둑을 둘 때 둘 곳을 미리 정하지 않으면 상대를 이길 수 없다’고 했다. 하물며 군주의 재주를 헤아려 절의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강한 이웃을 꺾고 사해를 망라할 수 있겠는가? 

유비가 제갈량에게 명한 것은 심히 어지러운 말이로다! 세간에서 혹 유비는 부탁받은 이의 성심을 굳게 하고 또한 촉인 들의 뜻을 하나로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군주된 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君子曰, 不然) 만약 부탁받은 이가 충현(忠賢)한 자라면 이런 가르침은 필요 없고, 만약 그 사람됨이 아닌 자라면 찬역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니 적합지 않다. 이 때문에 옛날 고명(顧命-군주의 유언)을 남길 때는 필히 착한 말을 하고, 거짓된 말은 탁고(託孤)라 하지 않았다. 

다행히 유선(劉禪)이 암약(闇弱-어리석고 나약함)하여 시험(猜險-시기하고 음험함)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제갈량은 위략(威略-위엄과 꾀)을 갖추어 족히 이단(異端-서로 다른 틈? 불순한 뜻?)을 교정하고 방비할 수 있었으니 이 때문에 서로 다른 마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의심으로 불령(不逞)하는 허물이 생겼을 것이다. 이를 일러 위권(爲權)이라 하니 또한 미혹된 일이 아닌가!

건흥(建興) 원년(223년), 제갈량을 무향후(武鄕侯)에 봉하고 부서를 열어 정무를 처리하게 했다.(개부치사 開府治事) 얼마 후 또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영 익주목) 대소 정사(政事)를 막론하고 모두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남중(南中)의 여러 군(郡)이 아울러 반란을 일으켰는데, 제갈량은 이제 막 대상(大喪)을 당했으므로 곧바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또한 오(吳)에 사자를 보내 화친을 맺어 마침내 여국(與國-우호국, 동맹국)이 되었다. (주11)

(주11) [제갈량집] - 이 해, 위(魏)의 사도 화흠(華歆), 사공 왕랑(王朗), 상서령 진군(陳群), 태사령 허지(許芝), 알자복야 제갈장(諸葛璋)이 각각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천명과 인사(人事-인간사)를 진술하며 나라를 들어 칭번하게 하려 했다. 제갈량은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고, 정의(正議)를 지었다. 

“옛날 항우는 덕으로부터 일어서지 않아 비록 화하(華夏-중국, 중원)에 거처하고 제왕의 위세를 지녔으나 끝내 탕확(湯鑊-죄인을 끓여 죽이기 위한 가마솥)에 넣어졌으니 후대의 영원한 경계가 되었다. 위나라는 이를 살펴 본받지 않고 이제 그 뒤를 이으려 한다. 요행히 자신은 화를 면한다 하더라도 자손들에게는 깨우쳐야 할 것인데, 오히려 각각 기애(耆艾-耆는 60,艾는 50세)의 나이에 이른 몇몇(二三子) 늙은이가 거짓된 말을 받들어 서신을 보내왔다. 마치 진숭(陳崇)과 장송(張竦)이 왕망(王莽)의 공을 칭송한 것과 같으니 장차 큰 화가 닥치면 어찌 모면하려는가! 

옛날 세조(世祖-광무제 유수)께서 한나라 제업을 중흥하실 때, 이졸(羸卒-약졸) 수천을 분발해 왕망의 강려(强旅-강병) 40여 만을 곤양(昆陽) 교외에서 꺾었다. 무릇 도(道)에 의거하여 방탕한 적을 토벌하는 것은 무리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맹덕(孟德-조조)은 속임수를 써서 이기는 능력으로 수십만 군사를 이끌고 양평(陽平)의 장합(張郃)을 구원했으나, 세력이 궁하자 후회하다 겨우 자신의 몸을 빼쳐 달아날 수 있었고, 그 날카로운 군사들을 욕되게 하여 마침내 한중 땅을 잃고, 신기(神器)는 망령되이 빼앗을 수 없음을 알게 되어 군을 돌려 돌아가다 미처 도착하지도 못하고 해독을 입어 죽었다. 자환(子桓-조비)은 음일(淫逸-음란)하여 맹덕을 이어 찬탈했다. 

설령 몇몇 늙은이가 소진, 장의의 거짓된 헛소리를 한다 한들, 환두(驩兜-요순때 인물. 이른바 4대 악인 중 하나)가 도천(滔天-하늘에 차고 넘칠 정도로 죄악이 큼)하는 말로 당제(唐帝-요임금)를 무함하고 우(禹), 직(稷-후직)을 조롱하며 이간질하던 말을 받들어 올리는 격이니, 이른바 문조(文藻-글재주)를 헛되이 쓰고 한묵(翰墨-문한과 필묵)을 번거롭게 한다는 것으로 대인, 군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또한 군계(軍誡)에서 이르길 ‘만 명이 죽음을 각오하면 천하를 횡행(橫行)할 수 있다’고 하고, 옛날 헌원씨(軒轅氏-황제黃帝)는 군졸 수만을 정비해 사방을 제압하고 해내를 평정했다. 하물며 (우리는) 수십만 군사로 정도(正道)에 의거해 죄 있는 자들을 치려 하니, 이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건흥 3년(225년) 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고 (주12) 그해 가을에 모두 평정했다.

(주12) 조령으로 제갈량에게 부월(鈇鉞) 1구(具), 곡개(曲蓋-대가 굽은 일산) 하나, 우보(羽葆-새깃으로 장식된 일산) 고취(鼓吹-취주악대) 각 1부, 호분(虎賁-숙위군) 60인을 하사했다. 이 일은 [제갈량집]에 있다.

보충: 화양국지 [제갈량의 남정 정벌

군자(軍資-군수물자)가 이곳에서 나오니 나라가 부유하고 넉넉해졌다. (주13) 이에 치융(治戎-군무를 다스림), 강무(講武-무예를 강습함)하며 크게 군사를 일으킬 때를 기다렸다.

(주13) [한진춘추]漢晉春秋 – 제갈량이 남중(南中)에 도착해 싸우는 곳마다 이겼다. 맹획(孟獲)이라는 자에게 이인(夷人)과 한인(漢人)이 복종한다는 것을 듣고 그를 생포하도록 했다. 그를 붙잡은 후, 영진(營陳) 안을 살펴보게 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우리 군이 어떠하오?” 

맹획이 대답했다, 

“이전에는 허실을 몰랐기 때문에 패했소. 지금 허락을 받고 영진을 살펴보니 다만 이 정도라면 쉽게 이기겠소.” 

제갈량이 웃으며 그를 풀어주어 다시 싸웠다. 일곱 번 풀어주고 일곱 번 사로잡았는데(七縱七禽), 제갈량은 여전히 맹획을 보내주려 했다. 맹획이 떠나지 않으며 말했다, 

“공은 천위(天威)를 지닌 분이니, 우리 남인(南人)들은 다시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전지(滇池- 익주 익주군 전지현)에 도착했다. 남중이 평정되자 모든 곳에 그 거수(渠率=渠帥. 현지 군장)들을 임용했다. 어떤 이가 제갈량에게 간언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만약 외인(外人-남중 바깥의 사람, 즉 중국인)을 남겨두면 응당 군사도 남겨야 하는데, 군사를 남기면 먹을 것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어려움이요. 게다가 이인(夷人)들이 이제 막 상하고 격파되어 그 부형(父兄)들이 죽었는데, 외인들이 남아 있으면서 군사가 없으면 필시 재앙과 우환이 생길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요. 또한 이인들이 누차 폐살(廢殺)하는 죄를 지어 스스로 자신의 죄가 중함을 꺼림칙해 하는데, 만약 외인을 남겨두면 끝내 서로 믿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 어려움이오. 지금 나는 군사를 남기지 않아 운량(運糧)할 필요를 없애고, 강기(綱紀-기강, 법령)를 대략적으로만 정해 이인과 한인들이 대체로 편안케 하려 하오.”

건흥 5년(227년), 제군(率諸)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출병에 즈음하여 상소(上疏)했다. (※ 출사표 出師表) 

- “선제(先帝-이전 황제 즉 유비)께서 창업한 후 반도 이루시기 전에 중도에 붕조(崩殂-붕어)하시고,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고 익주는 피폐했으니 이는 실로 위급(危急), 존망(存亡)의 때입니다. 그러나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장수가 밖에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선제의 후은을 잊지 못해 폐하께 보답하고자 함일 것입니다. 실로 성청(聖聽-임금이 귀로 듣는 것)을 널리 열어 선제께서 남긴 덕을 빛내고 지사(志士)들의 의기를 넓히셔야 하며, 함부로 스스로를 비루한 사람이라 낮추고 대의를 잃은 비유를 들어 충간(忠諫)이 들어오는 길을 막으셔서는 안 됩니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관부)은 모두 한 몸이니 척벌장비(陟罰臧否-선행을 상주고 악행을 벌함)에 서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의당 유사(有司-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平明-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시중(侍中), 시랑(侍郎)인 곽유지(郭攸之), 비의(費禕), 동윤(董允) 등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헤아림이 충성스럽고 깨끗하니, 이 때문에 선제께서 이들을 뽑아 쓰고 폐하께 남긴 것입니다. 생각건대 궁중의 일은 크건 작건 모두 이들에게 물으시고 그 연후에 시행하신다면 필시 부족한 점을 보충해 널리 보탬이 될 것입니다. 장군 상총(向寵)은 성품과 행실이 맑고 공평하며 군사(軍事)에도 정통해 예전에 선제께서 처음 써 보시고 유능하다고 칭찬하셨고, 이 때문에 여러 사람과 의논하여 상총을 독(督)으로 삼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영중(營中)의 일은 모두 그에게 물으시면 필시 행진(行陳)을 화목(和睦)하게 하고 그 우열(優劣)에 따라 사람들을 적소에 둘 것입니다. 

현신(賢 臣)을 가까이 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한 것이 바로 선한(先漢-전한)이 흥륭(興隆-흥성)한 까닭이고,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신을 멀리한 것이 곧 후한(後漢)이 기울고 무너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생전에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하실 때마다, 일찍이 환제, 영제 때의 어지러움을 탄식하고 통한해 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시중(侍中), 상서(尙書), 장사(長史), 참군(參軍)은 모두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죽음으로 절의를 지킬 신하들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이들을 가까이 하고 믿으신다면 한실의 융성은 가히 날을 헤아리며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포의(布衣-무명옷; 평민)로 남양(南陽)에서 몸소 밭을 갈며 그럭저럭 난세에서 성명(性命-목숨)을 보전하려 할 뿐 제후에게 문달(聞達-이름이 알려져 등용됨)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신을 비루하다 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친히 몸을 낮추시고 신의 초려(草廬)를 세 번 찾아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에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를 위해 구치(驅馳-분주하게 힘씀)할 것을 약속드렸습니다. 그 뒤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傾覆)을 당하자 군이 패할 때 임무를 받아 위난(危難) 속에서 명을 받들었고 그 이래로(유비가 제갈량을 찾아온 이래) 21년이 지났습니다. (주14) 

(주14) 신 송지가 보건대, 유비는 건안 13년(208년)에 패하고 제갈량을 오(吳)에 사자로 보냈다. 제갈량이 건흥 5년(227년)에 북벌의 표를 올렸으니, 기울어져 뒤집히는 위험(傾覆)(당양의 패배 즉 208년)으로부터 이때까지는 20년이 된다. 그러한 즉 유비가 처음 제갈량과 서로 만난 것은 군이 패하기 1년 전(즉 207년)이다.

선제께서는 신이 근신(謹愼-삼가고 조심함)함을 아시고 이 때문에 붕어하실 때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받은 바에 힘쓰지 못해 선제의 밝음을 상하게 될까 두려워하니, 이 때문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주15) 

(주15)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노유수(瀘惟水)가 장가(牂牁)군 구정(句町)현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제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병갑(兵甲-병기와 갑옷) 또한 넉넉하니 응당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노둔(駑鈍-미련하고 둔함)한 재주를 다해 간흉(姦凶)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해 구도(舊都-옛 수도, 즉 낙양, 장안)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신의 직분(職分-직책과 본분)이며, 손익(損益)을 헤아려 극력으로 충언을 올리는 것은 곽유지, 비의, 동윤의 임무입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하는 일을 신에게 맡기시고, 만약 성과가 없으면 신의 죄를 다스리고 선제의 영전에 고하십시오. 만약 덕을 흥하게 하는 말이 없으면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태만함을 꾸짖어 그 허물을 분명히 드러내십시오. 또한 폐하께서는 스스로 깊이 생각하시며 바른 도리를 물으시고, 좋은 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유조(遺詔)를 깊이 새겨 따르신다면, 신은 그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겠습니다. 이제 먼 길을 떠나며 표(表)를 올리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출병하여 면양(沔陽-익주 한중군 면양현)에 주둔했다. (주16)

(주16) 곽충3사(郭沖三事)"

제갈량은 양평(陽平-면양현에 속함)에 주둔하고, 위연(魏延)과 제군을 보내 군사들을 아울러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고는, 제갈량은 단지 만 명을 남겨 성을 지키고 있었다. 

진(晉) 선제(宣帝-사마의)가 20만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을 막았는데, 위연 군과 서로 길이 엇갈리고, 곧바로 도착해 제갈량으로부터 60리 앞에 이르렀다. 척후병이 선제(宣帝)에게 보고하길, 제갈량이 성 안에 있으며 군사가 적고 역량이 미약하다고 했다. 

제갈량 또한 선제가 거의 당도하여 서로 가까운 것을 이미 알고 있고 위연 군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종적을 뒤쫓아도 미치지 못하니 장사(將士-장졸)들이 놀라 얼굴빛이 변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제갈량의 의기(意氣)는 태연자약하며, 군중에 명해 모두 깃발을 눕히고 북치는 것을 멈추게 하고, 함부로 암만(菴幔-군막)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또한 영을 내려 네 성문을 활짝 열고 땅을 쓸며 물을 뿌리게 했다. 선제는 늘 제갈량이 지중(持重-신중)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갈량이) 함부로 약세를 보여주자 복병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이에 군을 이끌고 북쪽 산으로 향했다. 다음날 밥 먹을 때, 제갈량이 박수를 치며 크게 웃으며 참좌(參佐-막료)들에게 말했다, 

“사마의는 필시 내가 겁쟁이라 생각하고 장차 강한 복병이 있을 것이라 예상해 산을 따라 달아났을 것이다.”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니 과연 제갈량이 말한 대로였다. 선제가 뒤에 이를 알고 심히 한스러워했다. 

/비판한다. 고찰컨대, 양평은 한중에 있다. 제갈량이 처음 양평에 주둔할 때 선제(宣帝-사마의)는 형주도독으로 완성(宛城)을 진수하고 있었고, 조진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관중(關中)에서 제갈량과 서로 겨루었다. 위나라에서 일찍이 선제를 보내 완(宛)에서부터 서성(西城)을 거쳐 촉을 토벌하도록 했으나 장맛비를 만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이 있다. 이 앞뒤로는 다시 양평에서 교전한 일이 없다. 

곽충의 말대로라면 선제가 20만 군을 이끌었고 이미 제갈량의 군사가 적고 미약함을 알았으니, 만약 복병이 있으리라 의심했다면 바로 방어진을 설치하며 신중을 기해야지, 어찌 곧바로 달아난단 말인가? 

<위연전>에 의하면 ‘위연은 늘 제갈량을 수행해 출병할 때마다 군사 1만으로 제갈량과 다른 길로 진격해 동관에서 만날 것을 청했으나 제갈량이 이를 제지하고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위연이 제갈량을 겁쟁이라 하며 자신의 재능이 모두 쓰이지 못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위연에게만 명의 군사도 따로 통수하지 못하게 했는데, 곽충이 말대로라면 돌연 중병(重兵-대군)을 이끌게 하여 선두에 세우고, 자신은 가볍고 약한 군사로 수비했다는 말인가? 

게다가 곽충은 부풍왕과 함께 대화했는데, 선제의 단점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자식 앞에서 부친을 비방하는 것이라 이치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부풍왕이 개연히 곽충의 말이 옳다고 했다’하니, 고로 이 책(촉기)에서 인용한 말들이 모두 헛된 말임을 알 수 있다. 

건흥 6년(228년) 봄, 야곡도(斜谷道)를 거쳐 미(郿- 우부풍 미현)를 취하려 한다고 양성(揚聲-일부러 소문냄)하고 조운, 등지를 의군(疑軍-속이는 군사)으로 삼아 기곡(箕谷)을 점거하게 하자, 위(魏)의 대장군 조진(曹眞)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제갈량 자신은 제군(諸軍)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융진(戎陳-군진)이 정제(整齊-정돈되어 가지런함)되어 있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號令)이 분명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 세 군(郡)이 위(魏)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니 관중(關中)이 진동했다. (주17)  

(주17) [위략]魏略 – 당초, 국가(國家-위나라)에서는 촉(蜀) 중에 오직 유비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이미 죽고 여러 해 동안 조용하고 아무 소리가 없었으므로 거의 아무런 방비가 없었다. 그러다가 돌연 제갈량이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야(朝野)에서 몹시 두려워하고 농우(隴-농서), 기산(祁山)에서 특히 심했으니 이 때문에 세 군(郡)이 동시에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위(魏) 명제(明帝)는 서쪽으로 장안을 진수하고 장합(張郃)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두에서 제군(諸軍)을 이끌게 해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은 서현(西縣-천수군 서현)의 천여 가(家)를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주18)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다. 

(주18) 곽충4사(郭沖四事)"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 농서(隴西), 남안(南安)의 2군(郡)이 이때에 응해 항복했다. 천수를 포위하고 기성(冀城-천수군 기현)을 함락하여 강유(姜維)를 사로잡고, 남녀 수천 명을 구략(驅略-내몰고 약탈함)해 촉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제갈량에게 축하하자 제갈량이 정색한 채 근심하는 얼굴로 말했다, 

“널리 하늘 아래 한(漢)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 국가의 위력이 미치지 못해 백성들이 시랑(豺狼-승냥이와 이리)의 주둥이에서 고통 받도록 하고 있소. 한 사람이 죽어도 모두 나의 죄인데, 이 정도 일로 서로 축하한다면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소?” 

이에 촉인 들이 제갈량에게 위나라를 병탄하려는 뜻이 있으며, 단지 척경(拓境-국경을 넓힘)하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비판한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병탄하려는 뜻을 품은 지는 이미 오래이니, 이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리 없다. 게다가 이때 출병해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죽거나 다친 채 돌아온 자가 많았고, 세 군(郡)이 항복했으나 소유하지는 못했다. 강유는 천수의 필부일 뿐, 촉이 그를 얻었다고 해서 위나라에 어떤 손실이 있겠는가? 서현의 1천가를 뽑아 왔다고 해도 가정에서의 손실을 보충하지는 못하니, 어찌 이를 공(功)으로 삼아 촉인 들이 서로 축하한단 말인가?

상소를 올렸다, 

“신이 미약한 재주로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해, 직접 모월(旄鉞)을 잡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고 법을 밝히지 못해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 가정(街亭)에서는 명을 어기는(違命) 허물을 범하고, 기곡(箕谷)에서는 경계하지 못한(不戒)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줌에 있어 방법이 잘못된데 있습니다. 신이 명철하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휼사(恤事-일을 고려함)에 크게 어두웠으니, [춘추]에서 통수 자를 질책한다(責帥)라 함이 바로 신의 직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청컨대, 스스로 3등(等)을 깎아 그 허물을 꾸짖게 해 주십시오.”  

이에 제갈량을 우장군(右將軍), 행 승상사(行丞相事)(승상의 사무를 대행)로 삼고, 총통(總統)하는 바는 예전과 같게 했다. (주19)

[주19] [한진춘추] – 어떤 이가 다시 출병할 것을 권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대군(大軍)이 기산(祁山), 기곡(箕谷)에 있을 때 모두 적보다 그 수가 많았소. 그러나 능히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에게 격파되었으니 즉 이 과실은 군사가 적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 한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오. 이제 군사와 장수를 줄이고, 벌(罰)을 분명히 하고 과오를 반성하여, 장래에 능히 변통할 수 있는 방안을 헤아리려 하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비록 군사가 많다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소! 

지금 이후로 국가에 대해 충정을 갖춘 모든 이들은 단지 나의 허물을 부지런히 질책하면 대사가 이루어질 것이니, 적들이 소멸하고 공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히 발꿈치 들고 기다릴만하오.” 

이에 작은 공로를 살피며 장렬함을 선별하고, 허물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실수한 바를 천하에 포고하고, 여병(厲兵-무기를 날카롭게 감), 강무(講武)하여 뒷날을 도모하니, 융사(戎士-병사)들은 간련(簡練-간결하게 정련됨)되고 백성들은 그 패배를 잊을 수 있었다. 

제갈량은 손권(孫權)이 조휴(曹休)를 격파하니 위병(魏兵-위군)이 동쪽으로 내려가 관중(關中)이 허약하다는 말을 들었다.

11월, 상언(上言)했다. (※ 후출사표 後出師表) 

- “선제(先帝-유비)께서 통찰하시길, 한(漢-촉한)과 적(賊-조위)은 양립할 수 없고 왕업(王業)은 한 구석 땅에서 안거하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신에게 적을 토벌하라 당부하셨습니다. 선제의 명철함으로 신의 재주를 헤아려 보시고, 신이 적을 토벌하기에는 재주가 적고 적이 강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적을 토벌치 않으면 왕업 또한 망하게 되니, 앉아서 망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어찌 적을 토벌하는 것에 비기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에게 이 일을 맡기며 의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신이 명을 받은 뒤로 잠을 자도 편치 않고 밥을 먹어도 맛을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북정(北征)을 하려면 의당 먼저 남쪽을 평정해야 했기에,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가 하루 식량으로 이틀을 지냈습니다. 신이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왕업을 돌아볼 때 촉도(蜀都)에 편안히 있을 수 없어, 이 때문에 위난을 무릅쓰고 선제의 유지를 받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의논하는 자들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 적은 서쪽의 싸움으로 지쳐있는데다 동쪽의 싸움에서 힘을 쏟고 있습니다. 병법에서는 적이 수고로운 틈을 타라 했으니 지금이 급히 진격할 때입니다. 삼가 그 사정을 아뢰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제(高帝-한고조 유방)께서는 명철함이 해, 달과 같고 모신(謀臣)들의 지혜가 못처럼 깊었으나, 위험을 무릅쓰고 상처를 입으신 뒤에야 안정을 찾았습니다. 지금 폐하는 고제에 미치지 못하고 모신들 또한 장량(張良), 진평(陳平)보다 못한데, 장계(長計-장기적인 계책)로써 승리를 취하고 앉아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시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할 첫 번째 일입니다.  

유요(劉繇), 왕랑(王朗)은 각각 주군(州郡)에 웅거해 안위에 관한 계책을 논하면서 툭하면 성인(聖人)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의심이 뱃속에 가득하고 많은 어려움이 가슴을 짓누르는데도 금년에도 싸우지 않고 다음해도 출정치 않아, 손책으로 하여금 저절로 강해지게 하여 마침내 강동을 아우르게 했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할 두 번째 일입니다.  

조조의 지계(智計-지모)가 절륜하고 용병하는 것은 손자, 오자를 방불케 했으나, 남양(南陽)에서 곤란을 겪고 오소(烏巢)에서 위험에 처하고, 기련(祁連)에서 위태로움을 겪고 여양(黎陽)에서 핍박당하고, 북산(北山)에서 거의 패하고 동관(潼關)에서 거의 죽을 뻔한 뒤에야 겨우 한때의 거짓된 평정을 이루었습니다. 하물며 신의 재주는 미약한데 위태로움을 겪지 않고 평정할 것을 바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할 세 번째 일입니다. 

※ 남양(南陽)은 197년 장수와의 완성전투 / 오소는 200년 관도전투 / 여양(黎陽)은 202년 원담, 원상과의 여양전투 / 동관(潼關)은 211년 마초와의 위남전투 / 기련(祁連)에 관해서는 [삼국지]에 명시적인 기록은 없는데, <무제기>에 204년 조조가 업을 포위했을 때 원담을 공격하던 원상이 되돌아와서 구원하다 패한 후 기산(祁山)을 보전했다는 기사에 의거해 이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 있음. 그리고 북산(北山) 역시 확실하진 않은데 <조운전> 주 조운별전에서 219년 유비와 한중을 쟁탈할 때 북산 기슭에서 군량을 운반했다는 기사에 의거, 이 한중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조조는 창패(昌霸)를 다섯 번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소호(巢湖)를 네 번 건넜으나 성공치 못했으며, 이복(李服)을 임용했으나 이복은 조조를 도모하려 했고, 하후연에게 중임을 맡겼으나 하후연은 싸움에 지고 죽었습니다. 선제께서는 늘 조조를 유능하다고 칭찬했으나 오히려 이런 실패들이 있었는데, 하물며 신같이 둔하고 재주 없는 자가 어찌 반드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할 네 번째 일입니다.  

※ 창패(昌霸)는 <선주전>에서 199년 유비가 조조를 떠나 서주를 점거했을 때 유비 편에 섰다고 하고, 창희(昌豨)는 <무제기> <하후연전> <장료전> <우금전>등에 의하면, 당초 여포 편에 섰다가 198년 조조가 여포를 깨뜨린 후 하후연, 장료 등이 공격해 항복시키고, 그 뒤 유비가 서주를 점거했을 때 다시 배반했다가 공파 당했으며, 기주가 평정된 후 또 배반하자 하후연, 우금 등이 격파하고 결국 우금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창패(昌霸) = 창희(昌豨)인 것으로 보입니다. (장패와는 별개의 인물) / 소호(巢湖)는 합비 남쪽의 호수로, 조조가 손권을 정벌한 일을 가리킴 / 동승의 의대밀조 사건 때 공모한 인물 중 한 명인 왕자복(王子服)(삼국지 선주전)이 [후한서]에는 왕복(王服)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복(李服)은 이 왕복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자치통감 호삼성胡三省 주), 한편으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 하여 ‘후출사표 위작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합니다.

신이 한중(漢中)에 도착한 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으나, 조운(趙雲), 양군(陽群), 마옥(馬玉), 염지(閻芝), 정립(丁立), 백수(白壽), 유합(劉郃), 등동(鄧銅)과 곡장(曲長) 둔장(屯將) 70여 명, 돌장(突將), 무전(無前), 종(賨) 수(叟), 청강(靑羌), 산기(散騎), 무기(武騎) 1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규합한 사방(四方)의 정예로 한 주(州)에서 얻은 이들이 아닌데, 만약 다시 몇 년이 지나면 여기서 3분의 2를 잃을 것이니 장차 무엇으로 적을 도모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할 다섯 번째 일입니다.  

※ [삼국지] <조운전>에 의하면 조운은 229년에 죽었는데, 228년 11월의 후출사표에서 조운을 이미 죽은 걸로 기술하는 이 부분이 후출사표 위작설의 주요 근거로 거론됩니다. 한편으로는 조운전의 기사가 잘못되었고 실제로는 후출사표를 올리기 직전 가을, 겨울 무렵에 죽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죠. 그리고 양군, 마옥 등의 인물은 다른 전거를 찾을 수 없고, 염지의 경우는 유비가 효정에서 패했을 때 ‘파서태수 염지가 여러 현의 군사 5천을 일으켜 결손된 병력을 보충했다’는 기록이 있음(삼국지 마충전) / 곡장, 둔장은 부-곡-둔 편제에서 각각의 장령들 명칭 / 돌장(突將) 무전(無前)은 ‘돌격장으로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다’는 뜻 그대로 볼 수도 있고(어디에서 끊느냐에 따라, 조운 … 등이 돌장무전 or 돌장 무전할 종, 수, 청강…), 뒤에 이어지는 종, 수, 청강 등과 더불어 병종, 부대명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ex. 진부량의 역대병제) / 종(賨), 수(叟), 청강(靑羌)은 종민, 수족, 강족 등 이민족 출신 부대. 종(賨)은 판순만(板楯蠻)으로도 불리던 파군 일대에 거주하던 소수민족, 수(叟), 청강(靑羌)은 강족의 일종. 그리고 산기(散騎), 무기(武騎)는 기병부대의 명칭으로 추정됩니다.

지금 백성은 곤궁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으나 할 일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만둘 수 없다면 곧 머물러 있는 것이나 출정하는 것이나 노고와 비용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도모하지 않고 한 주(州)의 땅으로 적과 오래도록 대치하려 하니, 이것이 신이 이해하지 못할 여섯 번째 일입니다.  

무릇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일입니다. 지난날 선제께서 초(楚)에서 패하셨을 때 조조는 손뼉을 치며 천하가 평정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선제께서 동쪽으로 오, 월과 연합하고 서쪽으로 파, 촉을 취했으며 군을 이끌고 북쪽을 정벌해 하후연을 참수하셨으니, 이는 조조가 계책을 잘못 세워 한(漢)의 대사가 장차 이루어지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뒤 오(吳)가 다시 맹약을 어겨 관우(關羽)가 패하여 죽고 자귀(秭歸) 에서 일을 그르치니 조비(曹丕)가 칭제(稱帝)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세상일은 이처럼 미리 짐작키 어렵습니다. 다만 신은 국궁진력(鞠躬盡力-몸소 행하면서 힘을 다함)하여 죽은 뒤에야 그칠 뿐, 성패(成敗-성공과 실패), 이둔(利鈍-날카로움과 무딤; 일의 순조로움과 곤란함)은 신이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산관(散關)의 싸움이 있었다. 이 표(表)는 제갈량집에는 없고, 장엄(張儼)의 묵기(黙記)에는 나온다. 

겨울, 제갈량이 다시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다. 조진이 이를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여 퇴각했다. 위(魏)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

건흥 7년(229년), 제갈량이 진식(陳式)을 보내 무도(武都), 음평(陰平)을 공격했다. 위(魏) 옹주자사 곽회(郭淮)가 군을 이끌고 진식을 공격하려 하자 제갈량이 직접 출병해 건위(建威)에 도착했고 곽회가 퇴환하니 마침내 두 군(郡)을 평정하였다.  

제갈량에게 조책(詔策)을 내렸다. 

“가정 싸움의 허물은 마속에게서 비롯된 것이나 그대는 자신의 허물로 돌려 심히 스스로 폄억(貶抑-폄하하고 억제함. 벼슬을 내림)하니, 그대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그 청을 들어주었다. 지난해에 왕사를 빛내 왕쌍을 참수하고 올해도 정벌하여 곽회를 둔주(遁走-도주)케 했다. 

저(氐), 강(羌)을 항복시켜 모으고 2군(郡)을 회복했으며, 위엄은 흉포한 무리를 제압하고 공훈은 현연(顯然)하도다. 지금 바야흐로 천하가 소란스럽고 원악(元惡-원흉. 악행의 우두머리)이 아직 효수되지 않았고 그대는 대임을 맡은 나라의 기둥이니, 오래도록 스스로 읍손(挹損-겸손함. 벼슬을 내림)하는 것은 홍렬(洪烈-위대한 공업)을 크게 드날리는 바가 아니다. 이제 다시 그대를 승상으로 삼으니 사양치 말라.” (주20) 

(주20) [한진춘추] – 이 해, 손권이 존호를 칭하고, 그 신하들이 두 명의 황제(기존의 촉한 황제+손권)가 서게 된 사정을 와서 알렸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손권과 교류하는 것은 무익하고 명체(名體-명의, 명분)도 불순하므로 의당 정의를 밝혀 맹호(盟好-동맹, 우호)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손권이 찬역할 마음을 품은 지 이미 오래이나, 국가에서 그 흔정(釁情-죄악이 되는 마음)을 추궁하지 않은 것은 기각(掎角-군을 나누어 협공함)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소. 지금 만약 공개적으로 관계를 끊는다면 우리에 대한 원한이 필시 깊어질 것이니, 응당 군사를 옮겨 동쪽을 치고 그들과 더불어 힘을 겨루어 그 땅을 병탄한 후에야 비로소 중원토벌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오. 

저들은 아직 현명한 인재가 많고 장상(將相-장수와 재상)들이 화목하여 하루아침에 평정할 수 없을 것이니, 돈병(頓兵-군대를 주둔시킴)하고 서로 대치한 채 앉아서 늙기를 기다리며, 북적(北賊-북쪽의 적, 즉 조위)으로 하여금 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은 상책이 아니오. 

옛날 효문제는 흉노에게 비사(卑辭-겸손하게 말함)하고 선제께서는 오(吳)와 후한 조건으로 결맹했으니, 이 모두가 응권통변(應權通變-임기응변으로 변통함)하여 널리 먼 이익을 생각하신 것으로 필부의 분노와는 다른 것이었소. 

지금 의논하는 자들 모두가 손권은 솥발처럼 나눠진 형세가 유리하니 우리와 능히 협력할 수 없고, 게다가 그의 소망이 채워졌으니 상애(上岸-배를 떠나 뭍으로 오름. 여기서는 강북으로 진격한다는 말)할 뜻이 없다고 하오. 이 말들이 모두 옳게 보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소. 어째서 그렇겠소? 

손권은 그들의 지력(智力-지모와 역량)이 대등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장강을 한계로 스스로를 보존하며 장강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위적(魏賊-조위)이 한수를 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역량에 여유가 있으면서도 이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 대군(大軍)이 가서 (조위를) 토벌하면 저들은 그 땅(중원)을 분열(分裂)해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상책이 되고, 백성들을 약탈하고 국경을 넓혀 내부에 무력을 과시하는 것이 하책이 되니, 가만히 앉아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우리와 화목하면, 우리가 북벌할 때 동쪽을 돌아보며 근심할 필요가 없고, (조위는) 하남(河南-황하이남)의 군사를 모두 서쪽으로 돌릴 수 없으니, 이것이 우리에게 이로운 점이며 또한 그 이점은 큰 것입니다. 손권의 참람한 죄는 드러내놓고 따질 일이 아닙니다.” 

이에 위위(衛尉) 진진(陳震)을 보내 손권이 정호(正號-존호를 칭함)한 일을 경하했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이 다시 기산(祁山)으로 출병했다. 목우(木牛)로 운송했는데, (주21) 군량이 다 떨어져 퇴각하다 위(魏)의 장수 장합(張郃)과 교전해, 활을 쏘아 장합을 죽였다. (주22) 

(주21) [한진춘추] – 제갈량이 기산(祁山)을 포위하고 선비(鮮卑) 가비능(軻比能)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北地) 석성(石城)에 이르러 제갈량에 호응했다. 

이때 위(魏) 대사마 조진(曹眞)이 병이 들어,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이 형주에서 와서 입조했다. 위(魏) 명제(明帝)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張郃), 비요(費曜), 대릉(戴陵), 곽회(郭淮) 등을 이끌게 했다. 

선왕(宣王)은 비요,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상규(上邽-천수군 상규현)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祁山)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雍), 미(郿) 에 주둔시키려 하자 선왕이 말했다, 

“전군(前軍)이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초(楚)의 3군이 경포(黥布)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그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남겨두어 (기산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상규(上邽)에서 선왕을 역격하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선왕과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선왕이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鹵城)에 도착했다.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멀리 와서 우리에 맞서서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보아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게다가 기산에서는 대군이 가까이 도착했음을 알고 민심이 자연 안정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병(奇兵-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전진할 뿐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는 것은 의당 해서는 안 될 일로,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선왕이 이에 따르지 않고 제갈량을 뒤쫓았다.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賈栩), 위평(魏平)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선왕이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宣王病之)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 무당감(無當監) 하평(何平-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中道)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제갈량은 위연(魏延), 고상(高翔), 오반(吳班)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수(甲首-갑옷 입은 군사) 3천 급, 현개(玄鎧-철갑옷) 5천 령(領-벌), 각노(角弩) 3,100 장(張)을 노획했다. 선왕은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주 22) 곽충이 말한 다섯 번째일(郭沖五事): 

위(魏) 명제가 친히 촉을 정벌해 장안에 행차하고, 선왕을 보내 장합과 제군(諸軍), 옹(雍), 량(涼)의 경졸(勁卒-강병, 정병) 30여 만을 이끌고 은밀히 진격해 검각(劍閣)으로 향하게 했다. 제갈량은 이때 기산(祁山)에서 정기(旌旗-깃발)와 날카로운 병기로 험요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10분의 2를 교대해 내려 보내려 하고(十二更下) 남은 군사가 8만이었다. 

위군(魏軍)이 처음 진을 펼쳤을 때 깃발과 군사가 때마침 교체되자, 참좌(參佐)들은 모두 

‘적군이 강성하여 역량으로 능히 제압하지 못하니 의당 임기응변으로 군사를 내려 보내는 것을 한 달 동안 멈추어 성세(聲勢)를 아울러야 한다.’

고 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내가 군을 통수하고 용병한 이래 큰 신의를 근본으로 삼았고, ‘원(原)을 얻고 신의를 잃는 것’(得原失信)은 옛 사람도 꺼렸던 일이오.(※) 

※ [춘추좌전] 희공 25년(B.C. 635) 조 – 겨울, 진후(晉侯-여기선 진문공)가 원성(原城)을 포위하면서 사흘 분의 군량만 준비하도록 명했다. (사흘이 지나도) 원성이 항복하지 않자 퇴각하도록 명했다. 염탐꾼이 돌아와 ‘원성이 장차 항복하려 한다.’고 고했다. 군리들이 말했다, “이를 기다리길 청합니다.” 공이 말했다, “신(信)은 국가의 보배이니, 백성들을 비호하는 바이다. 원성(原城)을 얻어도 신의를 잃는다면(得原失信) 무엇으로 백성들을 비호하겠는가? 그리하면 잃는 것이 더 많다.” 일사(一舍-30리)를 물러나자 원성이 항복했다.

떠날 자들이 행장을 꾸리고 기일을 기다리며, 그 처자들은 학수고대하고 날짜만 헤아리는데, 비록 정벌에 임해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의(義)를 폐할 수는 없소.” 

그리고는 모두 조속히 보내주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떠날 자들은 감격하여 남아서 일전을 치룰 것을 원하고, 남을 자들은 분용(憤踴-분격)하여 죽기로 싸울 것을 다짐했다. 서로 말했다, 

“제갈공의 은혜는 죽음으로도 다 갚을 수 없다.” 

싸우는 날에 이르자 칼을 뽑고 선두에 서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일당십(一當十)으로 싸워 장합을 죽이고 선왕을 물리쳤다. 한번 싸움으로 대승을 거두니 이는 제갈량의 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판한다.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이 예전 기산으로 출병했을 때(228년 1차 북벌) 위 명제가 몸소 장안에 도착했으나 이 해에 다시 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제갈량의 대군이 관(關), 농(隴)에 있는데 위인(魏人)들이 어찌 제갈량을 뛰어넘어 곧바로 검각으로 향할 수 있단 말인가? 제갈량이 전장에 머문 뒤로 본래 오래도록 주둔하는 법은 없었는데, 바야흐로 병사를 쉬게 하려고 촉으로 돌려보냈다니, 이는 모두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다. 

손성(孫盛), 습착치(習鑿齒)가 같고 다른 점을 수구(搜求-조사하여 찾음)해 빠뜨린 것이 없는데, 그들이 모두 곽충의 말을 기재하지 않았으니 그 말에 어그러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흥 12년(234년) 봄, 제갈량이 대군을 모두 이끌고 야곡(斜谷)을 거쳐 출병했다. 유마(流馬)로 운송하며 무공(武功) 오장원(五丈原)을 점거하고,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과 위남(渭南)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늘 군량이 이어지지 않아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므로 이에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경작하는 군사들이 위수 강변의 백성들과 섞여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히 지내고 군에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주23) 

(주23) [한진춘추] – 제갈량이 스스로 도착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다. 선왕(宣王-사마의) 또한 표를 올려 교전을 허락해주길 청하자, 위위(衛尉) 신비(辛毗)에게 부절을 지니고 가게 해 이를 제지했다. 강유(姜維)가 제갈량에게 말했다, 

“신좌치(辛佐治-신비)가 부절을 갖고 왔으니 적들이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말했다, 

“저들은 본래 싸울 뜻이 없었으나 굳이 (조정에) 싸움을 청한 까닭은 그의 군사들에게 굳셈을 보이려는 것이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군주의 명이 있어도 받지 않는 법인데, 만일 우리 군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길을 가서 출전을 청하겠소!” 

[위씨춘추] - 제갈량의 사자가 도착하자 제갈량의 침식(寢食-잠자고 먹는 것)과 사무의 번잡, 간결함에 관해 묻고 융사(戎事-군사)에 관한 일은 묻지 않았다. 사자가 대답했다, 

“제갈공께서는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드시고, 20대 이상의 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먹는 음식은 몇 승(升)도 되지 않습니다.” 

선왕이 말했다, 

“제갈량이 곧 죽겠구나.”

[진양추晉陽秋] 제갈량이 미 땅으로 진격하여 위수의 남쪽 둑에 진을 치자 위 명제가 조서를 내려 고조(사마의)에게 막도록 했다. 제갈량은 군대의 통솔에 뛰어났으며 군령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했다. 또한 군대가 멀리 원정 나왔고 군량을 운반하는 것이 어려워서 야전이 유리했다. 

위의 조정에서는 그(제갈량)가 출병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싸우지 않고 그를 굴복시키고자 했는데 고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대군을 거느림으로써 적의 업신여김을 막고자 했으며, 멀리서나마 겁먹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대세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말에게 먹이를 먹이는 동안에도 갑옷을 입고서 항상 집어삼킬 듯한 위세를 보였다. 

제갈량은 싸움을 걸면서 고조에게 건괵을 보냈는데, 건괵은 부녀자들의 두건이다. 제갈량은 그렇게 함으로써 고조를 격분시켜 조구의 이득(7)을 얻고자 했다. 위의 조정에서는 고조가 분을 이기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위위 신비가 강직한 신하였기 때문에 명제가 신비에게 절(8)을 내려 고조 군대의 사마로 삼았다. 제갈량이 과연 다시 싸움을 걸자 고조는 격분하여 당장 나가서 싸우려했다. 그러나 신비가 절을 들고 군문 중앙에 서 있자 고조는 출병을 그만두었다. 그 모습을 보고 들은 병사들은 사기가 더욱 높아졌다. 큰 책략의 심원함은 모두 이와 같은 류이다.

서로 대치한 지 백여 일이 지나 그해 8월, 제갈량이 질병으로 군중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54세였다. (주24) 

(주24) [위서] –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고 형세가 어려워지자 근심과 분노로 피를 토하고, 하룻밤에 진영을 불사르고 달아나다 계곡으로 들어섰을 때 도중에 발병하여 죽었다. 

[한진춘추] - 제갈량이 곽씨(郭氏)의 오(塢-촌락의 일종)에서 죽었다. / [진양추] - 끝이 뾰족한 붉은 별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제갈량의 진영에 떨어졌다. 세 번 떨어지고 다시 되돌아가니 올 때는 크고 돌아갈 때는 작았다. 갑자기 제갈량이 죽었다. 

/(위 위서 내용에 대한 배송지의 의견) 신 송지가 보건대, 제갈량이 위빈(渭濱)에 있을 때 위(魏)와 대치하여 그 승부의 형세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제갈량이 피를 토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제갈량이 스스로 패망한 것에 의거해 (위서에서) 스스로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무릇 공명(孔明)의 지략으로 어찌 중달(仲達-사마의) 때문에 피를 토했겠는가? 


유곤(劉琨)이 패해 군사들을 잃고 진(晉) 원제(元帝-동진의 창업군주)에게 보낸 전(箋-상주문; 서신)에서 

‘제갈량 군이 패하고 피를 토했다’

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을 인용한 말이라 할 것이다. 이 책(위서)에서 

‘계곡으로 들어간 뒤 죽었다’

고 한 것은, 촉인들이 계곡으로 들어간 뒤에야 발상(發喪)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이다.


군이 퇴각하자 선왕(宣王-사마의)이 그의 영루(營壘)와 처소(處所)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주25)

(주25) [한진춘추] – 양의(楊儀)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선왕(宣王)에게 급히 고했고 선왕이 이를 추격했다. 강유는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반대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여 선왕에게로 향하는 것처럼 하자, 선왕은 이내 물러나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發喪)했다. 

선왕이 퇴각하니 백성들은 속어(諺)를 지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를 선왕에게 고하자 선왕이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헤아려 대적할 수는 없다” 

제갈량은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 매장하도록 유언했는데, 산에 의지해 분묘를 만들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정도로만 하며, 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器物)을 쓰지 말도록 했다.  

조책(詔策)을 내렸다, 

“생각건대 그대의 체자(體資-천성, 품성)는 문무(文武)를 갖추고 명예(明叡-총명하고 지혜로움), 독성(篤誠-독실하고 성실함)하여, 탁고(託孤)의 유조를 받아 몸소 짐을 광보(匡輔-보필)하니, 끊어진 것을 잇고 쇠미한 자를 흥하게 하며 정난(靖亂-국난을 평정함)할 뜻이 있었다. 이에 육사(六師-육군. 황제의 군대)를 정돈해 정벌하지 않은 해가 없었고, 신무(神武)를 혁혁하게 빛내고 위엄을 팔황(八荒-온 천하)에 떨쳐 계한(季漢-촉한)에 큰 공을 세웠으니 이윤, 주공의 큰 공훈과 나란하도다. 

어찌 하늘이 보우하지 않아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병을 만나 죽게 되었는가! 짐은 상심하고 서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무릇 덕을 존중해 공의 순서를 세우고 행적을 기록해 시호를 명하니, 이로써 장래에 빛나게 하고 책에 기재해 불후(不朽)하게 하려 한다. 지금 사지절(使持節) 좌중랑장(左中郎將) 두경(杜瓊)을 시켜 그대에게 승상(丞相) 무향후(武鄕侯)의 인수와 충무후(忠武侯)의 시호를 내리노라. 혼령이 있으면 이 총영(寵榮-영예)에 기뻐하리라.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당초 제갈량이 스스로 후주(後 主-유선)에게 표를 올렸었다, 

“성도에 뽕나무 8백 그루가 있고 메마른 땅 열다섯 경(頃)이 있으니 자제들이 입고 먹기에는 스스로 넉넉합니다. 신이 밖에서 임무를 받들 때는 따로 조달할 것 없이 제 한 몸의 먹고 입는 것은 모두 관부에 의지했으므로 따로 치생(治生-생활의 방도를 차림)하여 척촌(尺寸-적은 양)을 보태지는 않았습니다. 신이 죽었을 때 안으로 여분의 비단이나 밖으로 남은 재산이 있어 폐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뒤에 보니 그 말과 같았다.  제갈량은 성정이 교사(巧 思-교묘한 구상)에 능하여 연노를 개량하고 목우, 유마가 모두 그의 생각에서 나왔다. 병법을 추연(推演-미루어 넓힘)하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 (주26) 제갈량의 말(言)과 교(敎-교령), 서(書-서신), 주(奏-상주문)에 볼만한 것이 많으므로 따로 하나의 집(集)을 만들었다. (※진수가 편집한 제갈량집 24편을 말함)

(주26) [위씨춘추] – 제갈량은 팔무(八務-8가지 힘쓸 일), 칠계(七戒-일곱 가지 경계할 일), 육공(六恐-6가지 겁낼 일), 오구(五懼-5가지 두려워할 일)를 지었는데 이 모두에 조(條)와 장(章)이 있고 신하들을 독려하는 교훈으로 삼았다. 또한 연노(連弩)를 개량해 이를 원융(元戎)이라 했다. 쇠로 화살을 만들고 화살 길이는 8촌이었고, 한번 노(弩)를 쏘면 10개의 화살이 함께 발사되었다.  

제갈량집에 기재된 목우(木牛), 유마(流馬)의 제작법 (※ 직역을 기본으로 하되 [와룡의 눈으로 세상을 읽다]에서 의역, 해설된 단어 일부를 괄호로 첨부했습니다) – 목우(木牛)는 배(腹-차체)가 방형이고 머리는 둥글다. 다리(脚-바퀴) 하나에 발(足-받침기둥)이 4개이고, 머리는 목(領-멍에) 안으로 들어가고, 혀(舌-제동장치)는 배(腹-차체)에 붙어있다. 많이 실으나 천천히 가므로 큰 짐을 싣기에 적합하고, 적은 짐을 싣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혼자서 가면 하루에 수십 리 가고, 떼를 지어 가면 하루에 20리 간다. 굽은 것은 소의 머리이고, 쌍으로 된 것은 소의 다리(脚)이다. 가로지른 것은 소의 목(領)이고, 굴러가는 것은 소의 발(足)이다. 덮은 것은 소의 등(背)이고, 방형으로 된 것은 소의 배(腹)이다. 드리워진 것은 소의 혀(舌)이고, 굽은 것은 소의 갈빗대(肋)이다. 깎아서 새긴 것은 소의 이빨(齒-손잡이 역할)이고, 바로 선 것은 소의 뿔(角)이다. 가느다란 것은 소의 가슴걸이(鞅)이고, 끌어당기는 것은 소의 추축(鞦軸-후걸이)이다. 소는 두 개의 끌채(轅)에 의존하는데, 사람이 6척(尺) 가면 소는 4보(步)를 간다. 한 사람의 1년 식량을 싣고 하루에 20리를 가도 사람이 지치지 않는다.

유마(流馬)의 치수는 다음과 같다. 갈빗대(肋)는 길이 3척 5촌, 넓이 3촌, 두께 2촌 2푼으로 좌우가 같다. 전축공(前軸孔-앞축 구멍)의 먹줄은 머리(頭)에서 4촌 떨어져 있고, 직경은 2촌이다. 전각공(前脚孔-앞다리 구멍)의 먹줄은 2촌이고, 전축공(前軸孔)에서 4척 5푼 떨어져 있고, 넓이 1촌이다. 전강공(前杠孔-앞 막대기 구멍)은 전각공(前脚孔) 먹줄에서 2척 7푼 떨어져 있고, 구멍의 길이는 2촌, 넓이는 1촌이다. 후축공(後軸孔-뒷축 구멍)은 전강(前杠)의 먹줄에서 1척 5푼 떨어져 있고 크기는 전과 같다. 후각공(後脚孔-뒷다리 구멍)의 먹줄은 후축공(後軸孔)과 3척 5푼 떨어져 있고, 크기는 전과 같다. 후강공(後杠孔-뒷 막대기 구멍)은 후각공(後脚孔)의 먹줄과 2촌 7푼 떨어져 있다. 뒷부분의 재극(載剋-제동장치)는 후강공(後杠孔)의 먹줄에서 4촌 5푼 떨어져 있다. 전강(前杠-앞 막대기)는 길이 1척 8촌, 넓이 2촌, 두께 1척 5푼이다. 후강(後杠-뒷 막대기)은 전강과 같다. 장방형의 나무상자는 둘이고 널판자의 두께는 8푼, 길이는 2척 7촌, 높이는 1척 6촌 5푼, 넓이는 1척 6촌이고, 각각의 나무상자에는 쌀 2곡(斛-1곡은 10두) 3두(斗)를 담을 수 있다. 위의 강공(杠孔-막대기 구멍)에서 갈빗대까지는 7촌이고, 전후가 같다. 위의 강공(杠孔)은 아래의 강공(杠孔) 먹줄에서 1척 3촌 떨어져 있고, 구멍(孔)의 길이는 1촌 5푼, 넓이는 7푼이고, 8개의 구멍(孔)이 모두 같다. 전후의 네 다리(脚)는 넓이 2촌, 두께 1촌 5푼이고, 형상은 코끼리 다리 같고, 길이는 4촌, 경면(徑面)은 4촌 3푼이다. 다리 구멍 안에 있는 세 각강(脚杠)은 길이 2척 1촌, 넓이 1촌 5푼, 두께 1촌 4푼으로, 강(杠)은 모두 같다.

경요(景耀) 6년(263년) 봄, 조령을 내려 제갈량을 위해 면양(沔陽-한중군 면양현)에 사당(廟)을 세웠다. (주27)

(주27) [양양기] – 제갈량이 처음 죽었을 때, 도처에서 각각 사당 세울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예질(禮秩-예의등급과 작록품계)을 따져 의논한 뒤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백성들은 시절(時節-사시 절기)에 맞춰 도로 위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간언하는 이 중에 어떤 이가 청을 들어주어 성도에 사당을 세우자고 했으나 후주는 따르지 않았다. 

보병교위(步兵校尉) 습융(習隆), 중서랑(中書郎) 상충(向充) 등이 함께 표(表)를 올렸다, 

“신이 듣기로 주나라 사람들은 소백(召伯-주 소공)의 덕을 기려 감당(甘棠-팥배나무)을 베지 않았고, 월왕(越王)은 범려(範蠡)의 공을 생각해 금을 주조해 그 형상을 보존했다 합니다. 한나라가 흥한 이래 작은 선행과 덕으로도 그 형상을 그려 사당이 세워진 자가 많습니다. 

하물며 제갈량의 덕은 멀고 가까운 곳에 모두 본보기가 되며 그 공훈이 계세(季世-말년)를 덮으니,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실로 이 사람에 힘입었습니다. 그런데 증상(蒸嘗-봄가을의 제사)을 사문(私門-가문)에서만 지내게 하고 묘상(廟像)을 빠뜨린 채 세우지 못하게 하여, 백성들은 길거리에서 제를 올리고 융이(戎夷)들은 들판에서 제사지내게 하니, 이는 덕을 보존하고 공을 기리는 바가 아니며 옛 사람들이 술추(述追)하던 바도 아닙니다. 

지금 만약 민심에 모두 따른다면 어그러져 전범에 맞지 않고, 경사(京師-수도)에 세우면 또한 종묘(宗廟)에 가까우니, 이것이 성회(聖懷-임금의 마음)가 꺼리는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제갈량의 묘에 가까운 면양(沔陽)에 사당을 세워 친속으로 하여금 때마다 제를 올리게 하고, 무릇 그 신하나 옛 관원으로 제사를 올리려는 자는 모두 그 사당에서만 지내도록 한정하여 사사로운 제사를 끊는 것이 정례(正禮-올바른 예법)를 존숭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비로소 그 말에 따랐다.

가을, 위(魏) 진서장군(鎭西將軍) 종회(鍾會)가 촉을 정벌해 한천(漢川)에 도착하자 제갈량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군사들에 명해 제갈량의 묘 근처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거나 땔나무를 캐지 못하게 했다. 제갈량의 동생인 제갈균(諸葛均)은 관직이 장수교위에까지 이르렀다.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이 작위를 이었다. (주28) 

(주28) [양양기] – 황승언(黃承彥) 은 고상(高爽), 개열(開列)하여 면남(沔南-면수 남쪽)의 명사였다. 제갈공명에게 말했다, 

“그대가 부인을 고른다고 들었소. 내게 못난 딸이 있는데, 노란 머리에 얼굴이 검지만(黃頭黑色) 그 재주가 서로 배필이 될 만하오.” 

공명이 허락하자 곧 그녀를 실어 보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웃음거리로 삼고 향리인 들이 속어(諺)를 지어 말했다, 

“공명이 부인 고르는 것은 배우지 마라. 아승(阿承-황승언의 애칭)의 못난 딸을 얻으리라.” 

제갈씨집(諸 葛氏集-제갈량집)의 목록은, 개부작목(開府作牧) 제1, 권제(權制) 제2, 남정(南征) 제3, 북출(北出) 제4, 계산(計算) 제5, 훈려(訓厲) 제6, 종핵(綜覈) 상(上) 제7, 종핵 하(下) 제8, 잡언(雜言) 상 제9,잡언 하 제10, 귀화(貴和) 제11, 병요(兵要) 제12, 전운(傳運) 제13, 여손권서(與孫權書-손권에서 보낸 서신) 제14, 여제갈근서(與諸葛瑾書) 제15, 여맹달서(與孟達書) 제16, 폐이평(廢李平-이평(이엄)을 폐함) 제17, 법검(法檢) 상 제18, 범검 하 제19, 과령(科令) 상 제20, 과령 하 제21, 군령(軍令) 상 제22, 군령 중 제23, 군령 하 제24로, 모두 24편에 총 글자 수는 104,112 자이다. 

(※ 이하 진수의 상소문. 274년 제갈량집을 지으며 올린 자신의 상소문을, 이후에 [삼국지]를 지으면서 제갈량전에 포함시킴) 

신 진수 등이 말씀 올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著作郎)으로 있을 때 시중(侍中) 영중서감(領中書監) 제북후(濟北侯) 신 순욱(荀勖), 중서령(中書令) 관내후(關內侯) 신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으로 하여금 예전 촉 승상 제갈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험조한 곳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말을 기록하고 부끄럽고 착한 말을 남겨두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 지덕함이 무궁하게 끼친 것으로 자고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서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 모두 24편으로 만들었고 편명은 앞에 적은 대로입니다. 

제갈량은 어려서 출중한 재주와 영패(英霸)의 기량을 갖추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남다르게 여겼습니다. 한나라 말 혼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피난 가서, 몸소 밭갈이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량이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하여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니,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결탁)했습니다. 

위무제(魏武帝-조조)가 남쪽으로 형주를 정벌하고 유종이 주(州)를 들어 투항하자, 유비는 세력을 잃고 군사는 적었으며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나이 27세로 기책(奇策-기묘한 계책)을 세우니, 직접 손권에게 사자로 가서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복앙(服仰-탄복하고 우러름)한데다가, 또한 제갈량의 기아(奇雅-뛰어나고 고아함)함을 보고 그를 매우 경중(敬重-공경하고 중히 여김)하여, 곧 군사 3만을 보내 유비를 도왔습니다. 이에 유비가 힘을 얻어 무제와 교전해 그 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타 크게 이겨 강남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그 뒤 유비는 또한 서쪽으로 가서 익주를 취하고 익주가 평정된 뒤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았으며, 유비가 존호를 칭하자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그 사자(嗣子-대를 이은 아들, 즉 유선)가 유약(幼弱)하여,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량이 전담했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결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하며 융려(戎旅-군대, 군무)를 정리하고, 기계에 능하고 교묘한 재주가 있어 이를 극도로 연구하고, 과교(科敎-법과 교령)를 엄명히 해 상벌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당시 제갈량의 본뜻은, 나아가서는 용양호시(龍驤虎視-용이 머리를 들고 범이 노려봄)해 사해(四海)를 포괄하고, 물러나서는 변경에 걸터앉아 우내(宇內-천하)를 진탕(震蕩-뒤흔듦)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에는 능히 중원을 짓밟고 상국(上國-위나라)에 맞설 자가 없다고 여겼기에 이 때문에 용병을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주는 치융(治戎-군사를 다스림. 군 통수)에는 능하나 기모(奇謀-기이한 모략)는 부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理民之幹)이 장략(將略-장수로서의 지략)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적한 이 중에는 혹 인걸(人傑)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므로,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했습니다.  

옛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정치)에 능하니 또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234년) 봄,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무공(武功)으로 나와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가 그해 가을 병으로 죽으니, 일반 백성들이 그를 기리어 그 말이 입에 가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양주(梁州),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제갈량을 찬탄하여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비록 감당(甘棠-시경 감당편)에서 소공(召公)을 읊고, 정나라 사람들이 자산(子産-정나라 정치가)을 노래했다고 하나 먼 과거의 비유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맹가(孟軻-맹자)가 말하길,

“편안히 하는 도리로 사람을 부리면 비록 수고스러워도 원망하지 않고,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

고 했으니 실로 옳은 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의심하기를, 제갈량의 문채(文彩-문장, 문사)가 아름답지 않고 정녕주지(丁寧周至-여러 번 반복하며 꼼꼼함)함이 지나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요(咎繇-순임금 때 명신)는 대현(大賢)이고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인데, 상서(尙書-서경)를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결하고 우아하나 주공의 가르침은 번잡하고 상세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고요는 순(舜), 우(禹)와 함께 말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과 더불어 말한 이들은 모두 뭇 평범한 이들이라 이 때문에 그 문장의 뜻이 심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과 남긴 말은 모두 경사종물(經事綜物)하여 공정하고 성실한 마음이 그의 문묵(文墨-문장)에 드러나 족히 그 의리(意理-뜻과 이치)를 알 만하며 지금에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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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 번건전]으로 분할

평한다. 제갈량은 상국(相國)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의궤(儀軌-예법의 본보기)를 보이고, 관직을 간략히 하여 권제(權制-임시 제도)에 따르고, 성심을 열어 공도(公道)를 베풀었다. 충성을 다하고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주고, 법을 어기고 태만한 자는 비록 친한 자라도 반드시 벌주었다. 죄를 인정하고 실토한 자는 비록 중죄라도 반드시 풀어주고, 헛된 말로 교묘히 꾸미는 자는 비록 가벼운 죄라도 반드시 죽였다. 선행이 작다 하여 상주지 않는 일이 없고, 악행이 작다 하여 문책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련(精練)히 하여 그 근본을 다스리고, 명분에 따라 그 실질을 책임지우며(명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게 했다는 말) 헛된 것은 입에 담지도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 모든 이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애하고, 비록 형정(刑政)이 준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그 마음 씀이 공평하며 권하고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가히 다스림을 아는 빼어난 인재(識治之良才)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應變) 장략(將略)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주35)

(다음은 모두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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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원자, 묵기, 촉기의 제갈량 평이 이어집니다. [원자]를 지은 이는 원준(袁準)이고, 자는 효니(孝尼)입니다. 삼국지 위서에 입전되어 있는 원환의 아들로, 위, 진에 걸치며 진수와 거의 동시대 인물입니다. / [묵기]를 지은 장엄은 오나라 말 인물로, 266년 진나라에 사자로 갔다 돌아오는 중에 죽었음 / 아래 [촉기]는 동진 초의 인물인 왕은王隱의 책으로, 서진 혜제 영흥 연간에 이흥李興이 지은 제갈량찬문을 자신의 책에 수록한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까다롭지 않은 글이 없습니다만, 특히 이 글은 독특한 장르라 수사적인 표현으로 일관하고 고사 인용이 많아 특히 난감하네요. 달리 참고할 만한 자료나 보주도 없는 상태에서 대충 직역과 의역을 뒤섞어서 거의 소설을 쓰며-_- 억지로 구색만 맞추었습니다. 틀린 부분이 꽤 많을 테니 읽으시는 분들이 꼭 감안해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35) [원자] – 어떤 이가 제갈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원자(袁子)가 말했다, 

“장비, 관우가 유비와 함께 일어나 조아(爪牙) 복심(腹心)의 신하로 모두 무인(武人)이었고,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이로써 좌상(佐相-보좌하는 재상)으로 삼았소. 이에 뭇 신하들이 기뻐하고 탄복했는데, 유비는 족히 믿을만하고 제갈량은 족히 중시할 만했기 때문이오. 

그러다 6척의 고아(작고 어린 고아 즉 유선)를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專權)했으나 예(禮)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國人)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했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進退)하고 군사가 출전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人心)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召公)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옹(雍)은 가히 임금 노릇할 만하다’고 했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또 물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郡)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官兵-위나라 군)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中國-위나라)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으나(勇而能鬪) 세 군(郡)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그가 말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가정(街亭)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 리 떨어져 있었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이 행군(行軍-용병)할 때 안정(安靜)하고 견중(堅重)했는데, 안정(安靜)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易動) 견중하면 가히 진퇴(進退)할 수 있소. 제갈량의 법령이 밝고 상벌에 신의가 있어 사졸들이 명을 받으면 험지에 뛰어들면서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는 그가 싸움에 능했다는 것이오.”

그가 말했다, 

“제갈량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일으키고 세운 것이 수십만의 공력과 같으니 기이한 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측간, 울타리, 장새(障塞)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인들이 경박하니(輕脫) 이 때문에 견고히 하며 부린 것이오.”  

그가 말했다, 

“그랬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았으며, 뜻이 크고 원대해 가까운 공을 급히 취하는 것을 구하진 않았소.(非求近速者)”  

그가 말했다, 

“제갈량은 관부(官府), 차사(次舍), 교량, 도로를 짓기 좋아했으나 이는 급무(急務)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소국에 현명한 인재가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존엄을 높이고자 함이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朝會)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 취한 사람이 없었소. 무릇 본(本)이 세워지면 말(末)이 다스려지고, 여력이 남은 후에야 작은 일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그 공을 권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가 말했다, 

“그대가 제갈량을 논하는 데는 증험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재주로 보면 그 공이 적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지본(持本-근본을 중시?)하는 자로 응변(應變)은 그의 장점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감히 그 단점을 쓰지 않은 것이오.”  

그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그를 칭찬하는 건 왜입니까?” 

원자가 말했다, 

“본래 현자(賢者)란 심원한 것이니 어찌 완비함을 기준으로 책망하겠소? 무릇 능히 단점을 알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의 위대함이오. 단점을 알면 즉 장점도 아는 것이오. 무릇 전식(前識-원래 생각?)이라도 더불어 말해보고 맞지 않으면 제갈량은 쓰지 않았으니 이로써 내가 (현자로 칭하기에?) 가하다고 한 것이오. 

 // 오(吳)의 대홍려(大鴻臚) 장엄(張儼)이 묵기(黙記)를 지었는데, 그 술좌편(述佐篇)에서 제갈량이 사마선왕에게 보낸 서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 한조가 기울고 천하가 붕괴되자 호걸들이 다투어 신기(神器)를 탐내었다. 위씨(魏氏)는 중토(中土)를 차지하고 유씨(劉氏)는 익주를 점거하니 아울러 해내에서 칭병(稱兵-거병)하며 당대의 패주(霸主)가 되었다. 제갈, 사마 두 재상은 이때에 이르러 명주(明主)에게 몸을 맡겨 혹 촉한에서 공을 세우고 혹 이수, 낙수에서 책명(冊名-사책에 이름을 남김. 공을 세움)하고, 조비와 유비가 죽고 난 뒤 후사가 대를 잇자 각각 보아(保阿-보육, 보필)의 임무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필하며 연낙(然諾-승낙)한 성심을 저버리지 않고 또한 일국의 종신(宗臣)으로 패왕(霸王)을 어질게 보좌했다. 전대를 살펴 근래의 일을 보면 두 재상의 우열은 가히 상세히 알 수 있다.  

공명(孔明)은 파, 촉 땅에서 일어나 1주(州)의 선비에 의지하니 대국에 비하면 그 전사(戰士-군사), 인민(人民)이 9분의 1 정도에 불과했으나, 대오(大吳-오나라)에 예물을 바치면서도 북적(北敵-북쪽의 적, 즉 조위)과 맞서고, 밭 갈고 싸우며 대오를 갖춰 형법이 엄정, 가지런하고, 보졸 수만을 거느리고 기산(祁山)으로 장구(長驅-멀리 달려감)하니, 개연히 하수, 낙수에서 말에게 물 먹일 뜻이 있었다. 

중달(仲達)은 천하에 열 배의 땅에 의거하여 겸병지중(兼幷之衆)을 거느리고도, 견고한 성을 점거하고 정예를 끼고는 적을 사로잡을 뜻이 없고 스스로 보존하는데 힘쓸 뿐 공명이 스스로 오고 가게 만들었다. 

만약 이 사람(제갈량)이 죽지 않았다면 끝내 그 뜻을 펼치며, 해를 이어 궁리하고 바삐 다그치며 모략을 일으켰을 것이니 즉 옹주, 양주는 갑옷을 벗지 못하고 중국은 안장을 풀 수 없어 승부의 형세는 또한 이미 결정되었다 할 것이다. 지난날 자산(子産)이 정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들이 감히 군사를 내지 못했고 촉상(蜀相)이 이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사마의에 비하면 또한 뛰어나지 않은가! 

어떤 이가 말했다, 

“병(兵)은 흉기(凶器)이고 전(戰)은 위사(危事-위태로운 일)인데, 경내를 지키며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데 힘쓰지 않으면서, 토지를 넓히고 천하를 정벌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제갈승상이 실로 광좌지재(匡佐之才)이나 외롭고 끊어진 땅에 거처해 전사(戰士)는 5만을 채우지 못하니, 스스로 관문을 닫고 험지를 지키면 군신이 무사했을 것입니다. 헛되이 군사를 이끌고 매년 정벌하지 않는 해가 없었으나 지척의 땅으로도 진격하지 못하고 제왕의 기업도 넓히지 못했으면서, 국내를 황폐하게 만들고 서토(西土)는 그 역조(役調-부역과 조세)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위나라 사마의(司馬懿)의 용병하는 재주는 쉬이 가볍게 볼 수 없고, 적을 헤아려 진격하는 것은 병가에서 신중히 살피는 바입니다. 만약 승상이 이를 미리 헤아렸다면 탄연히 공훈을 세웠다 할 수 없고(則未見坦然之勳)(?), 만약 이를 헤아리지 않고 결정했다면 명철(明哲)이라 일컬을 수 없습니다. 해내(海內)가 그에게 기우는 뜻에 관해, 저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듣기로 탕왕은 70리, 문왕은 백리 땅으로 천하를 차지했으니 모두 정벌하여 천하를 평정한 것이고, 읍양(揖讓-예의로 사양함)하여 왕위에 오른 자는 오직 순(舜), 우(禹)가 있을 뿐이오. 

이제 촉, 위가 적이 되어 싸우는 나라로 사세상 함께 왕이 될 수 없고 조조, 유비 이래로 강약이 현격하게 달랐으나 유비는 오히려 양평으로 출병하여 하후연을 붙잡고 관우는 양양을 포위하여 장차 조인을 항복시키려 하고 우금을 사로잡았소. 당시 북변에 크고 작은 근심거리가 있었으나 맹덕이 몸소 남양으로 출병하고 악진, 서황 등이 구원했으나 포위는 즉시 풀리지 않았소. 이 때문에 장자통(蔣子通-장제蔣濟)이 그때 허도를 옮겨 황하를 건너려는 계책에 관해 말한 것이고, 때마침 국가(國家-즉 오나라)가 남군을 습격해 취하자 관우가 철병했소. 

현덕과 조조는 지력(智力-지모와 역량), 사중(士衆-군사)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고 용병(用兵) 행군(行軍)의 도(道)도 같다 할 수 없는데, 오히려 (현덕이) 잠시 승리를 취했으며 또한 이때에는 대오(大吳)가 기각(掎角-양쪽에서 협공함)한 형세도 아니었소. 

이제 중달(仲達)의 재주는 공명(孔明)보다 못하며 당시의 세력은 지난날과 다르니, 현덕이 적과 맞섰는데 공명이 어찌 출군하여 적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 옛날 악의(樂毅)는 약소한 연나라 군사로 다섯 나라의 군사를 겸하여 강국인 제나라로 장구(長驅)해 70여 성을 떨어뜨렸소. 지금 촉한의 병졸은 연나라 군보다 적지 않고, 군신간의 결속은 악의 때보다 더 신의가 있소. 게다가 우리 국가와 순치(脣齒)의 도움이 되어 동서로 상응하고 뱀처럼 머리와 꼬리가 되면 형세가 중대해져 다섯 나라의 군사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저들을 꺼리어 불가하단 것이오? 

무릇 병(兵)은 기(奇)로써 승리하고 지(智)로써 적을 제압하는 것이니, 토지의 넓고 좁음이나 인마(人馬)의 많고 적음에만 편벽하게 의지해서는 안 되오. 내가 그의 치국한 형체를 보면 당시에 이미 엄숙하고 가지런했고 그 가르침이 뒤에도 남았으며, 그 말에 이르러 간절하고 진취(進取)의 뜻을 진술하여 충모(忠謀-충성스러운 계책)가 건건(謇謇-충직)하여 주인에 대한 의(義)가 드러나니 비록 옛날 관중, 안영이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촉기] - 진(晉) 영흥(永興: 혜제 304-305) 중, 진남장군 유홍(劉弘)이 융중(隆中)에 도착해 제갈량의 옛 집을 살펴보고 갈(碣-위가 둥근 비석)을 세워 표려(表閭-공덕을 현창함)하고, 태부연(太傅掾) 건위(犍爲) 사람 이흥(李興)에 명해 글을 짓게 했다. 

“천자께서 내게 명해 면(沔)의 양(陽)에 이르게 하니(양陽은 보통 산의 남쪽, 물의 북쪽이라는 의미로 쓰이니 ‘면수(한수)의 북쪽’이 되는데, 보통 생각되는 융중의 위치와 좀 다른 것 같아서 그냥 원문그대로 적습니다) 북소리 들으며 뭇 선철(先哲)들이 남긴 빛을 길이 생각하며 융산(隆山)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수레앞턱 가로나무가 제갈(諸葛)의 고향이로다. 

대저 신물(神物)이 응기(應機)하고 대기(大器) 무방(無方)하나 사람에 통해 쓰러지고 막혀 대덕(大德)은 늘 한결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골바람이 불면 추우(騶虞-상상의 동물)가 울고, 운뇌(雲雷)가 성하면 잠린(潛鱗)이 뛰어오른다.

이지(伊摯-이윤)는 세 번 초빙함에 갈옷을 벗고 중니(中尼-공자)는 부름을 받자 옷을 걷었고, 관중(管仲)은 명을 받자 표변(豹變)하고, 공우(貢禹)는 감격(感激)하여 회장(回莊)했다. 남다른 서생(徐生-서서?)이 보배를 들추어내어 깊이 감추어둔 와룡을 풀어 놓으니, 유씨(劉氏)가 기울어져 뒤집힐 때 가상하게도 그대가 주행(周行)했도다. 

무릇 자기를 알아주는 주인이 있으면 목숨을 다하는 어진 이가 있는 법, 이에 우리 한나라를 셋으로 나눠 우리 변방에 걸터앉고, 우리에 맞서 북면하고 우리 위나라 지경으로 말달렸다. 영명하구나. 그대여! 홀로 천령(天靈)을 품으니 어찌 신(神)의 지(祗)고(豈神之祗)(?) 어찌 사람의 정(精)이겠는가? 생각 깊고 덕이 맑음이여! 다른 세상에 있어 꿈에서 만날 뿐 같은 세상에 있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그대의 팔진(八陳)을 미루어보면 손자, 오자 때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고,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미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비요(祕要)한가! 옛날 전, 요(주문왕을 보좌한 태전泰顚과 굉요閎夭)가 명성이 있어 뒤쫓을 자 없다 하나 그 누가 그대의 뛰어나고 기묘한 주획(籌畫)만 하겠는가. 장문(臧文-장문중臧文仲?)이 죽고 말로써 칭찬받았으나 또한 그대와 같이 언행을 아울러 밝히지 못했다. 이오(夷吾-관이오 즉 관중)가 반점(反坫- 술잔을 되돌림)하고 악의가 끝내 절의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그대의 명철(明哲)과 수충(守沖)에 비견되겠는가. 임종하여 맡길 때 사양함은 허유(許由-요임금의 선양을 거부한 인물)보다 낫고, 정무를 맡아 일에 임함에 백성들의 말이 떠돌지 않았다. 

형벌은 정나라보다 공정하고 교화는 노나라보다 아름다우니, 촉민들이 수치를 알게 되고 하수, 위수가 안거했도다. 고요(皋陶-순임금의 신하)가 아니면 이윤에 비견되니 어찌 관중, 안영에 그치겠는가. 강개하고 탄식할 뿐이로다! 옛적 그대가 은거했던 이 집을 생각하면, 어질고 지혜로운 거처했던 곳으로 규곽(規廓)이 없구나. 해가 있다가도 달이 떠서 때가 되면 떨어져 저녁이 되니 누가 능히 죽지 않겠냐만 귀한 이에겐 남긴 격식이 있도다. 

그대의 공훈을 생각하면 풍속을 고쳐 후세에 이르렀고, 남아있는 전범을 읊고 노래하면 게으르고 나약한 이를 장려한다. 멀고도 멀어 그 법규가 높으니, 무릇 그대와 같은 자는 가히 헤아리기 어렵다. 주석(疇昔-그리 오래지 않은 옛적)에 어그러져 만 리 길을 달리하니, 이제 내가 와서 그대를 그리며 옛 터를 바라본다. 한고조의 혼이 풍, 패로 돌아가고 태공(太公-강태공)의 5대가 주나라로 돌아가 묻혔으니 망량(罔兩)이 방불(髣彿)하여 영향(影響)이 남았기를 바라노라 (?) 영혼이 있다면 어찌 그가 이를 알아보겠는가!”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이흥(李興)은 이밀(李密)의 아들로 다른 이름은 안(安)이다.

//제갈충무기에 이르길: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하였는데 제갈무후가 (생존하였을) 때 소사(小史)를 지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어 나이가 1백여 세였다. 환온이 묻기를 

“제갈승상은 지금의 누구와 더불어 비교 할 만한가?” 

하니 자신과 비교할 만하다 여겨 마음으로 자못 자긍(自矜)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갈공께서 계실 때에는 또한 남다름을 깨닫지 못하였사온데, 공께서 돌아가신 후부터는 그분과 비교할 만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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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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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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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할 것은 없고 링크만 구축합니다.

미백랑

2013.08.06
17:14:43
(*.233.63.81)
겨울, 제갈량이 다시 산관(散關)을 나와 진창(陳倉)을 포위했다. 조진이 이를 막았고 제갈량은 군량이 다하여 퇴각했다. 위(魏)의 장수 왕쌍(王雙)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추격하니 제갈량이 더불어 싸워 격파하고, 왕쌍을 참수했다.

11월, 상언(上言)했다.

이 부분이 빨간색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까지나 주석이고 본전인지 잘 구분이 안 갑니다. 수정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코렐솔라

2013.08.06
17:51:44
(*.52.91.73)
제갈량전은 재원님이 아주 초창기에 작업하시고 고원님 출처라 제가 안 건드렸기에 틀린 부분이 꽤 있을 겁니다.(한 번만 본 것이니까요) 발견하는대로 말해주세요 수정하겠습니다.
엥, 지금보니 뭔가 이상하게 됐군요,. 수정하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08.06
18:01:05
(*.52.91.73)
해당 부분이 아예 이상한 부분으로 가 있었군요.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재원님이 본문을 주석 사이에다가 끼워놨네요;;;

견습기사

2015.01.08
16:10:29
(*.229.96.70)
제갈량이 죽은 시기는 8월입니다. 제갈량전 한문 쪽을 확인해보니 8월로 적혀 있네요. 9월은 오타 아닐까 합니다.

코렐솔라

2018.11.19
10:48:49
(*.46.174.40)
고원님께 댓글을 달았는데 반응이 없으시네요. 너무 명확한 요소라 8월로 수정해두었습니다

추가: 2020년 8월에 다시 생각나서 보고하면 2020년 3월에 고원님이 확인하고 수정했다고 댓글을 다셨네요.

서영

2019.12.20
23:44:18
(*.181.216.110)
주석 원자에서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원문은 官兵相接,又徐行인데 相接은 '서로 접하다'에 가깝습니다. 당연히 실제 제갈량이 가정에 있었던게 아니니 원자의 해당서술은 제갈량이 아니라 마속과 수리 떨어져 있던 왕평이 장합과 접했을 때를 원준이 착각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왕평전에 따르면 왕평은 북을 울리며 제자리를 지키니 장합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해 접근하지 않았고, 이에 왕평은 병사들을 수습해 천천히 귀환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따라서 '관병과 서로 접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로 해석하는게 맞지 않나 합니다.

서영

2020.01.03
19:43:01
(*.181.216.91)
제갈량이 1차 북벌이 실패하고 유선에게 올린 표문 중에 '그 허물은 모두 신이 함부로 임무를 준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부분의 원문은 '咎皆在臣授任無方'인데 '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줌에 있어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가 좀 더 매끄럽지 않나 생각합니다.

dragonrz

2020.01.04
10:02:25
(*.67.125.237)
말씀하신 부분을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줌에 있어 방법이 잘못된데 있습니다. '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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