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곽준전]]에서 분리



양양기(襄陽記)에서 이르길- 


나헌(羅憲)의 자(字)는 영칙(令則)이다. 그의 부친인 나몽(羅蒙)은 난을 피해 촉으로 왔는데 관직이 광한(廣漢)태수에 이르렀다. 나헌은 어려서 재능과 학문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13세에 능히 문장을 짓기도 했다.

후주(後主=유선)가 태자로 세워지자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임명되었고, 서자(庶子), 상서이부랑(尙書吏部郎)으로 관직이 올랐다. 선신교위(宣信校尉)로 임명되어 두 차례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오나라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기도 했다.

황호(黃皓)가 국정에 개입할 때 대다수 사람들이 황호에 붙었지만 나헌은 함께 하지 않았다. 이에 황호의 미움을 사 파동(巴東)태수로 좌천되었다. 우 대장군(右大將軍) 염우(閻宇)가 파동을 도독(都督)할 때 영군(領軍)으로 임명되었고, 후주는 나헌을 염우의 부이(副貳:부관)로 삼았다.

위나라가 촉을 토벌할 때 염우를 소환해 서쪽으로 돌아오게 했는데, 염우의 군사 2천명을 남겨 나헌으로 하여금 영안성을 수비하게 했다.

그 후 성도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여 강변의 관원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나헌이 성도의 변란을 떠들고 다니는 자 한명을 참수하자 백성들이 평정을 되찾았다. 후주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휘하던 군사들을 이끌고 사흘 동안 도정(都亭)으로 나아가 사흘을 머물렀다.

오나라는 촉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나아갔는데 겉으로는 촉을 구원한다 칭했으나 내심 나헌을 기습하고자 했다.

나헌이 말하길, “본조(本朝)가 무너졌는데 오나라는 순치(脣齒)의 동맹국이면서도 우리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탐하니, 이는 맹약을 저버리고 약속을 어기는 짓이다. 게다가 한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오나라도 오래 버틸 수 없다. 어찌 오나라의 항로(降虜-항복한 포로)가 되겠는가?”라 하고는, 성을 보수하고 병기를 수선하며 장병들에게 절의를 다할 것을 맹세하자 명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오나라는 종회와 등애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각 성에 주인이 없는 셈이니 이에 촉을 겸병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러나 나헌이 파동을 고수하니 군사가 통과할 수 없었기에 보협(步協)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게 했다.

나헌은 강으로 가서 이에 맞섰으나 능히 막아낼 수 없자 참군(參軍) 양종(楊宗)을 보내 포위를 돌파하여 북쪽으로 가서 안동장군 진건(陳騫)에게 위급함을 고하게 했다. 또한 문무관료의 인수(印綬)를 전하고 자식을 볼모로 맡겨 진왕(晉王-진왕 사마소)에게 보냈다.

보협이 성을 공격하자 나헌이 출전하여 보협군을 대파했다. 손휴(孫休)가 분노하여 다시 육항(陸抗) 등을 보내 3만 군사를 이끌고 나헌에 대한 포위를 더욱 강화하게 했다. 성을 공격당한 지 무릇 6개월이 되었는데도 구원군이 도착하지 않고, 성 안 사람 중 태반이 병에 걸렸다.

어떤 이가 나헌에게 달아갈 것을 권하자 나헌이 말했다, “무릇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으면서, 위태로움을 능히 평정시키지 못하고 위급하다 하여 그들을 버리는 것은 군자의 할 도리가 아니오. 나는 이곳에서 목숨을 다할 것이오.”

진건이 진왕에게 보고했고 이에 형주자사 호열(胡烈)을 보내 나헌을 구원하게 하자 육항 등이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진왕은 나헌에게 이전의 임무를 그대로 맡겼고, 능강장군(凌江將軍)에 임명하고 만년정후(萬年亭侯)에 봉했다. 무릉의 4개 현이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를 배반하자, 나헌을 무릉태수 파동감군(巴東監軍)으로 삼았다.

태시(泰始-진무제 사마염 건국연호) 원년(265), 서악현후(西鄂縣侯)로 고쳐 봉했다. 나헌은 처자를 보내 낙양에서 거주하게 했는데, 무제(武帝-진무제 사마염)는 나헌의 아들 나습(羅襲)을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했다.

태시 3년(267) 겨울, 조정에 들어와 관군장군(冠軍將軍) 가절로 벼슬이 올랐다.

태시 4년(268) 3월, 황제를 수행해 화림원(華林園)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했는데, 황제가 촉의 대신 자제 중에 마땅히 서용(敍用)할 만한 자를 물었다.

이에 나헌이 촉군(蜀郡)의 상기(常忌), 두진(杜軫), 수량(壽良), 파서(巴西)의 진수(陳壽), 남군(南郡)의 고궤(高軌), 남양(南陽)의 여아(呂雅), 허국(許國), 강하(江夏)의 비공(費恭), 낭야(琅邪)의 제갈경(諸葛京), 여남(汝南)의 진유(陳裕)를 천거하자, 이들이 모두 서용되어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나헌은 임지로 돌아가 오나라의 무성(巫城)을 습격해 빼앗았고 이에 오나라를 토벌할 계책을 상주했다.

나헌은 방량(方亮), 엄정(嚴正)하고 선비를 대우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재물을 가벼이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고 따로 재산을 관리하지 않았다.

태시 6년(270)에 죽었다. 안남장군으로 추증하고 열후(烈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아들인 나습이 작위를 이었고 능강장군에 임명되어 부곡을 이끌었으나 일찍 죽었다. 광한태수로 추증했다. 나습의 아들인 나휘(羅徽)는 순양내사(順陽內史)로 영가(永嘉) 5년(311)에 왕여(王如)에게 죽임을 당했다.

/ 여기(양양기)에는 헌(獻)으로 적혀 있어 그 이름이 본전(삼국지 곽준전)과 서로 다른데, 어느 쪽이 맞는지 상세히 알지 못한다.

분류 :
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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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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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2
11:12:10
(*.0.203.45)

나헌은 진서에 자신의 열전이 따로 있고 번역도 되어있습니다.

KM학생

2013.07.28
20:20:37
(*.226.158.233)
아마 올드캣님이 그거 번역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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