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dragonrz님의 블로그


[[종회전]]에서 분리


弼字輔嗣。 何劭為其傳曰:弼幼而察慧,年十餘,好老氏,通辯能言。父業,為尚書郎。時裴徽為吏部郎,弼未弱冠,往造焉。徽一見而異之,問弼曰:「夫無者誠萬 物之所資也,然聖人莫肯致言,而老子申之無已者何?」弼曰:「聖人體無,無又不可以訓,故不說也。老子是有者也,故恆言無所不足。」尋亦為傅嘏所知。于時何晏為吏部尚書,甚奇弼,歎之曰:「仲尼稱後生可畏,若斯人者,可與言天人之際乎!」正始中,黃門侍郎累缺。晏既用賈充、裴秀、朱整,又議用弼。時丁謐與 晏爭衡,致高邑王黎於曹爽,爽用黎。於是以弼補臺郎。初除,覲爽,請閒,爽為屏左右,而弼與論道,移時無所他及,爽以此嗤之。時爽專朝政,黨與共相進用, 弼通雋不治名高。尋黎無幾時病亡,爽用王沈代黎,弼遂不得在門下,晏為之歎恨。弼在臺既淺,事功亦雅非所長,益不留意焉。淮南人劉陶善論縱橫,為當時所 推。每與弼語,常屈弼。弼天才卓出,當其所得,莫能奪也。性和理,樂遊宴,解音律,善投壺。其論道傅會文辭,不如何晏,自然有所拔得,多晏也,頗以所長笑人,故時為士君子所疾。弼與鍾會善,會論議以校練為家,然每服弼之高致。何晏以為聖人無喜怒哀樂,其論甚精,鍾會等述之。弼與不同,以為聖人茂於人者神明也,同於人者五情也,神明茂故能體沖和以通無,五情同故不能無哀樂以應物,然則聖人之情,應物而無累於物者也。今以其無累,便謂不復應物,失之多矣。弼注 易,潁川人荀融難弼大衍義。弼答其意,白書以戲之曰:「夫明足以尋極幽微,而不能去自然之性。顏子之量,孔父之所預在,然遇之不能無樂,喪之不能無哀。又 常狹斯人,以為未能以情從理者也,而今乃知自然之不可革。足下之量,雖已定乎胸懷之內,然而隔踰旬朔,何其相思之多乎?故知尼父之於顏子,可以無大過 矣。」弼注老子,為之指略,致有理統。著道略論,注易,往往有高麗言。太原王濟好談,病老、莊,常云:「見弼易注,所悟者多。」然弼為人淺而不識物情,初 與王黎、荀融善,黎奪其黃門郎,於是恨黎,與融亦不終。正始十年,曹爽廢,以公事免。其秋遇癘疾亡,時年二十四,無子絕嗣。弼之卒也,晉景王聞之,嗟歎者累日,其為高識所惜如此。

왕필(王弼)의 자는 보사(輔嗣)이다. 하소가 그의 전을 지어 이르길 : 왕필은 어렸을 때부터 지혜로워 10여세에 노자를 좋아하여 능히 그 이치에 관해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인 왕업()은 상서랑이었다. 당시 배휘(裴徽)가 이부랑이 되었고 왕필은 약관도 되지 않았는데 가서 (그를) 만났다. 배휘가 한번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왕필에게 묻길


「무릇 무(無)라는 것은 만물을 이루게 하고 사물이 바탕하고 있는 바인데 어찌하여 성인은 말하지 않았는데 노자는 끝없이 언급한 것인가?」


하니 왕필이 대답하길


「성인은 무를 체득하였고 무는 또한 말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노자는 유(有)의 단계에 머물렀기에 항상 (자기가) 부족한 무에 관해 말한 것입니다.」


얼마 후 또한 부하(傅嘏)가 알아주었다. 당시에 하안(何晏)은 이부상서였는데 왕필을 굉장히 기이하게 여겨 탄식하며 말하길


「중니(仲尼)께서 후생이 두려워할만 하다고 하였는데 만약 이 사람 같으면 더불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고 말하였다.



정시(正始)연간에 황문시랑이 누차 결원됐다. 하안은 가충(賈充), 배수(裴秀), 주정(朱整)을 이미 쓰고 다시 왕필을 쓰는 것에 관해 의논하였다. 당시에 정밀(丁謐)이 하안과 더불어 다퉜는데 고읍의 왕려(王黎)를 조상(曹爽)에게 추천했고 조상은 왕려를 기용하였다. 이에 왕필을 대랑에 보하였다. 처음 제수됐을 때 조상을 만나 독대를 청했는데 조상은 좌우를 물렸고 왕필은 더불어 도를 논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도록 다른 화제로 옮기지 않아 조상은 이로 말미암아 왕필을 비웃었다. 당시에 조상이 조정의 업무를 오롯이 하여 당파가 더불어 같이 등용됐는데 왕필은 통달 준매하여 이름이 높은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얼마 후 왕려는 얼마 있지도 않고 병으로 죽었고 조상은 왕침을 왕려의 대체로 삼았다. 왕필은 마침내 문하에 있지 못하게 됐고 하안은 이 때문에 탄식하고 한스러워 했다.



왕필이 대성에 있던 시간이 적고 일을 해서 성과를 내는 것 역시 그가 잘하는 바가 아니었기에 더욱 뜻을 두지 않았다. 회남 사람 유도(劉陶)는 종횡가의 학설을 잘 이야기하여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매번 왕필과 이야기하면 항상 왕필을 굴복시켰다. 왕필은 하늘이 내려준 재주로 탁월하여 그가 얻은 것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천성이 온화하고 조리 있었으며 연회에서 노니는 것을 좋아하였고 음률을 이해하였으며 투호에 능했다. 그가 도를 논함에 있어 문장을 쓰는 것은 하안만 못했지만 자연히 얻은 심득에 있어서는 하안보다 많았다. 자못 자신의 장점으로 다른 사람을 비웃었기에 당시의 사군자들이 미워하는 바였다. 왕필과 종회가 친하게 지냈는데 종회는 논의를 함에 있어 정밀한 사고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매번 왕필의 고상한 식견에 굴복하였다. 하안은 성인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 논의가 굉장히 정밀하였고 종회 등이 논술하였다. 왕필은 더불어 동의하지 않고 성인이 다른 사람보다 무성한 것은 신명(神明)이고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은 오정(五情)이라고 여겼다. 신명이 무성하기 때문에 충화(沖和)를 체득하여 무(無)에 통하고 오정이 같기 때문에 슬픔과 기쁨으로 사물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즉 성인의 감정은 사물에 응하되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그 얽매이지 않음으로 바로 다시 사물에 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잘못이 많은 것이다. 왕필은 주역의 해설을 썼는데 영천 사람 순융이 왕필의 대연의를 비난하였다. 왕필이 그 뜻을 답하며 편지를 썼는데 희롱하며 말하길


「무릇 밝음이 족히 깊고 미묘한 곳을 찾고 끝까지 달할 수 있지만 자연의 본성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안자의 분량은 공자가 예측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만났을 때 기쁘지 않을 수 없었고 잃었을 때 슬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항상 그 사람(공자)을 협소하게 생각해 감정을 도리에 종속시켜 따르게 하지 못한다고 여겼습니다. 지금은 마침내 자연이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족하의 분량이 비록 가슴속에 정해졌다고 하나 한 달정도 못 보면서 어찌 그 서로 생각하는 마음이 이토록 많습니까? 그러므로 공자가 안자에 대한 것이 가히 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왕필은 노자의 해설을 쓰면서 노자지략을 지었는데 (노자를 해석하는데) 통일된 원리가 있었다. 도덕론을 저술하고 주역을 해설하는데 있어 왕왕 심오하고 아름다운 언사를 사용하였다. 태원의 왕제가 담론을 좋아하였는데 노자와 장자를 비난하였다. 항상 말하길


「왕필이 해석한 주역을 보면 깨우치는게 많다.」


하였다. 그러나 왕필은 사람됨이 천박하고 물정을 몰라 처음에 왕려(王黎), 순융(荀融) 등과 더불어 잘 지냈는데 왕려가 그의 황문랑을 빼앗자 이에 왕려를 원망하였고 순융과도 또한 좋게 끝나지 않았다. 정시 10년 조상이 폐해지고 송사 문제로 면관당했다. 그해 가을에 온역 때문에 죽었으니 당시의 나이가 24세로 아들이 없이 후사가 끊겼다. 왕필의 죽음을 진 경왕(景王)이 듣고는 수일동안 탄식하였으니 그 식견이 높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孫盛曰:易之為書,窮神知化,非天下之至精,其孰能與於此?世之注解,殆皆妄也。況弼以傅會之辨而欲籠統玄旨者乎?故其敘浮義則 麗辭溢目,造陰陽則妙賾無聞,至于六爻變化,群象所效,日時歲月,五氣相推,弼皆擯落,多所不關。雖有可觀者焉,恐將泥夫大道。

손성이 말하길 : 주역이라는 책은 신비의 극에 이르고 (만물의) 변화를 아는 것으로 천하의 지극히 정밀한 사람이 아니면 누가 능히 이를 더불어 하겠는가? 세상의 해설이라는 것은 대체로 모두 망령되이 함부로 한것이다. 하물며 왕필같이 견강부회에 가까운 언변으로 불명확하게 대충 현묘한 뜻을 논하고자 함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그 대충의 뜻을 서술하는데 있어서는 화려한 언사가 눈에 가득차지만 음양에 나아가서는 심오한 도리가 들리지 않고 6효의 변화, 여러 상들의 본받은바나 일시, 세월, 5기가 서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있어서 왕필은 전부 생략하고 많이 관련되지 않았다. 비록 볼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아마 장차 큰 도에는 누가 될까 두렵다.

 

博物記曰:初,王粲與族兄 凱俱避地荊州,劉表欲以女妻粲,而嫌其形陋而用率,以凱有風貌,乃以妻凱。凱生業,業即劉表外孫也。蔡邕有書近萬卷,末年載數車與粲,粲亡後,相國掾魏諷 謀反,粲子與焉,既被誅,邕所與書悉入業。業字長緒,位至謁者僕射。子宏字正宗,司隸校尉。宏,弼之兄也。

박물기에 이르길 : 왕찬(王粲)과 족형 왕개()가 더불어 형주로 피난왔는데 유표(劉表)가 그의 딸을 왕찬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으나 그의 모습이 추하고 성격이 소략한 것을 꺼려해서 왕개가 풍모가 있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왕개와 결혼 시켰다. 왕개가 왕업을 나았으니 왕업은 유표의 외손자이다. 채옹(蔡邕)에게 책이 있어 거의 만 권에 이르렀는데 말년에 여러 수레에 실어서 왕찬에게 줬고 왕찬이 죽은 이후에 상국연 위풍(魏諷)이 모반을 일으켰는데 왕찬의 아들이 이에 연루되어 이미 주살당하자 채옹이 줬던 책은 모두 왕업에게 돌아갔다. 왕업()은 자가 장서(長緒)로 지위가 알자복야에 이르렀다. 아들인 왕굉()은 자가 정종(正宗)으로 사례교위를 지냈다. 왕굉은 왕필의 형이다.


魏氏春秋曰:文帝既誅粲二子,以業嗣粲。

위씨춘추에 이르길 : 문제가 이미 왕찬의 두 아들을 주살하고 왕업으로 왕찬을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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