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군(周群)은 자가 중직(仲直)이고, 파서군 낭중현 사람이다. 부친 주서(舒)는 자가 숙포(叔布)이고, 어려서부터 광한(廣漢)의 양후(楊厚)에게 도술(미래의 길흉을 기록한 신비한 예언법)을 배웠으며, 명망은 동부(董扶)나 임안(任安)에 버금갔다. 주서는 여러번 초빙되었지만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가 그에게 물었다.

"《춘추참》에 말하기를, 한나라를 대신하는 것은 `당도고(當塗高)`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주서가 말했다.

"당도고라는 것은 위(魏)입니다."

고향의 학자들은 사사로이 이 말을 전파시켰다. 주군은 어린 시절부터 주서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자연 그는 현상 등으로부터 미래의 징후를 탐구하는 학문에 전념했다. 그래서 정원 안에 작은 누각을 만들었다. 그는 집이 풍요로워 노비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항상 노비들에게 교대로 누각 위로 곧바로 올라가 천재(天災)를 관찰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기후의 미미한 변화가 나타나기만 해도 즉시 주군에게 알렸다. 그러면 주군은 누각 위로 올라가 그것을 관찰하였는데, 새벽이든 밤이든 관여치 않았다. 때문에 징후의 변화가 있으면 그것들을 보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말한 것은 대부분 적중했다. 주목 유장은 그를 초빙하여 사우종사로 임명했다. [주]


[주1] 속한서: 건안 7년, 월수군에 남자가 화(化)하여 여인이 되자 이때 사람들이 떠들기를 (전한의) 애제 때 또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장차 왕조가 바뀔 징조라 하였다. (건안) 25년에 이르러 헌제가 과연 산양에 봉해졌다. 12년 2월, 패성이 순미(鶉尾), (즉) 형주 분야에 나타나서 사람들[群]은 형주목이 곧 죽고 땅을 잃을 것이라 하였다. 다음 해 가을, 유표가 죽고 조공이 형주를 평정했다. 17년 12월, 패성이 5제후에 나타나니 사람들은 서방에서 토지를 점거하고 있던 자들이 모두 땅을 잃을 거라 하였다. 이때, 유장은 익주를 점거하고, 장로는 한중을 점거하고, 한수는 양주를, 송권은 포한을 점거하고 있었다. 다음 해 겨울, 조공이 편장을 파견 하여 양주를 평정했다. 19년, 송건은 잡혔고, 한수는 강중으로 도망쳤다가 살해당했다. 그 해 가을, 유장은 익주를 잃었다. 20년 가을, 조공은 한중을 공격했고, 장로는 항복했다.


유비가 촉군을 평정한 후에는 주군을 유림교위로 임명했다. 유비는 조조와 한중을 다투려고 할 때 이에 관해 주군에게 물었다. 주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땅은 얻을 수 있지만 그곳의 백성은 얻지 못합니다. 만일 일부의 군대만 출정시킨다면 틀림없이 불리한 것이니, 경계하고 신중을 기해야만 합니다."

당시 주의 후부사마였던 촉군의 장유(張裕) [주2] 또한 점술에 밝았으며 천부적인 재능은 주군을 뛰어넘었다. 그는 유비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주2] 장유의 자는 남화(南和)이다.

"조조와 한중을 다툴 수는 없습니다. 군세가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유비는 결국 장유의 의견을 듣지 않았는데, 과연 땅은 얻었지만 백성들은 얻지 못했다. 유비는 장군 오란, 뇌동 등을 파견하여 무도군으로 들어가도록 했는데, 전멸하여 돌아오지 못했으며, 전부 주군의 말처럼 되었다. 그래서 주군을 무재(茂才)로 천거했다.

장유는 또 사사로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경자년(220)에 천하는 조대가 바뀌고 유씨의 제위는 이미 다할 것이다. 주공이 익주를 얻은 이후부터 9년 뒤 인년(222)와 묘년(223) 사이에 그것을 잃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유비에게 장유의 말을 은밀히 보고했다. 당초 유비가 유장과 부현에서 만났을 때, 장유는 유장의 종사로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그 사람의 수염이 풍성했으므로, 유비가 조소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과거 내가 탁현에 살고 있을 때 모(毛) 성을 가진 자가 특히 많아 동서남북 모두 `모`라는 집이 많았었소. 탁현의 현령이 `수많은 털이 탁을 에워싸고 사는구나!` 라고 했소."

장유가 즉시 답변을 했다.

"과거에 상당군 노현의 장이 되었다가 탁현의 령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이 편지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노현이라고 기록하면 탁현을 무시한는 일이 되고, 탁현이라고 기록하면 노현을 무시하는 것이 되므로 `노탁군`으로 쓴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유비에게는 수염이 없었기 때문에 장유는 이런 방법으로 그를 개우친 것이다. 유비는 항상 장유의 불손함을 미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실언을 한 것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장유의 한장 쟁탈에 관한 직언이 효험이 없었음을 문제삼아 하옥시키고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제갈양이 표를 올려 그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주] , 유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 송본과 전본 삼국지 및 태평어람 권764에는 모두 '제갈량이 표를 올려 그 죄를 청하였다[諸葛亮表請其罪]' 하였고 초학기 권9에는 '제갈량이 죄를 청하였다[諸葛亮請罪]'라 되어있다. 그러나 이는 장유를 죽이려고 죄를 청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죄를 내리지 않도록 표를 올려 청하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태평어람 권983과 예문류취(藝文類聚) 권81에는 모두 이 문맥에 따라 '제갈량이 이를 구하려 했다[諸葛亮救之]'하고 축약하여 썼고, 유비의 비답 역시 윤허하는 말이 아니라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다.

"향기나는 난초가 문에 돋아난다면 부득이 베지 않을 수 없소." [주]

[주] 송본과 전본 삼국지 및 태평어람 권764에는 모두 '향기로운 난초라도 문 앞에 자라나면[芳蘭生門]'이라 하였으나 태평어람 권983과 예문류취 권81, 초학기 권9, 백공육첩(白孔六帖) 권101에는 모두 '향기로운 난초라도 문 앞을 막는다면[芳蘭當門]'이라 되어 있다.

장유는 결국 저자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훗날 위씨의 즉위나 유비의 붕어는 모두 장유가 예측한 것처럼 됐다. 장유는 또 관상술에 밝았으므로 항상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이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일찍이 땅에 거울을 던져 깨지 않은 적이 없었다.

주군이 죽자, 아들 주거가 그의 기술을 다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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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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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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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개구리

2013.05.02
22:57:14
(*.252.232.44)

'동도고'가 원문에는 當塗高로 되어있어 '당도고'로 바꾸었습니다.

두미전에 있던 주석을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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