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묵(尹黙)은 자가 사잠(思潛)이고, 재동군 부현 사람이다.
익부에서는 대부분 금문으로 된 경학을 중시하고 장구의 정확한 독음은 중시하지 않았다. 윤묵은 그러한 학문의 협소함을 알았으므로 멀리 형주로 유학하여 사마덕조(사마휘徽)(司馬德操), 송중자(송충忠)(宋仲子) 등과 함께 고문으로 된 경학을 학습했다.
윤묵은 여러 경서와 사서에 모두 통한 후에 또 좌씨의 《춘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유흠의 조례(《좌전》의 범례에 따라 서술한 것)로부터 정중, 가규 부자, 진원, 복건의 주석과 해설에 이르기 까지 모두 암송하여 두번 다시 책을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유비는 익주를 평정하고 주목을 겸임했을 때, 윤묵을 권학종사로 임명했다. 태자를 세운 후, 윤묵을 태자 복야로 임명하여 《좌씨전》을 유선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유선이 즉위하자, 윤묵은 간의대부로 임명됐다. 승상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고 있을 때, 초빙되어 군좨주가 됐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나자 윤묵은 성도로 돌아왔으며 태중대부에 임명되었고, 그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윤종이 그의 학문을 계승하여 박사가 되었다.
[주] 송중자(충)은 후에 위에 살았다.
《위략》에서 말하길, 그 아들(송충의 아들)은 위풍과 함께 반역을 꾀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위의 태자(조비曹丕)는 왕랑에의 반서에서 말한다. '옛적, [춘추시대] 석후가 주우(위衛의 공자公子)와 교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인 석작은 그가 반란에 가담할 것을 예지하고, [진의] 한자(한기)가 [진의 현인] 전소와 친했기 때문에 목자(한기의 형, 한무기)는 그가 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군자는 멀리 나갔을 때에는 반드시 규율을 유지하여, 집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훌륭한 사인(士人)을 따른다는 것이 정말로 마땅한 말이다.
아아, 송충에게는 석작의 선견지명이 없어, 노년에 이르러 이런 재화를 만났구나. [석작이 자신의 자식 석후를 모반의 이유로 살해한 것처럼] 이제 와서야 육친을 대하는 애정을 끊어버리고 자신의 자식을 처형해, 충신으로써의 절의를 세우려고 바란다고 해서, 어찌 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치쿠마본]
윤묵은 자를 사잠이라고 하며, 재동군 부현의 사람이다. 익부에는 금문의 학(진 이후의 신자체의 텍스트를 사용한 해석학)을 존중하는 사람이 많아, 자구의 정확한 훈독을 중시하지 않았다.
윤묵은 그러한 학문의 좁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멀리 형주에 유학하여, 사마덕조(휘), 송중자(충)등을 따라 고문의 학을 배웠다. 모든 경서/사서에 통효하였고, 《좌씨춘추》를 전문적으로 자세하게 연구하여, 유흠의 조례(《좌전》의 범례에 대해서 말한다)를 시작으로, 정중/가규부자(부친의 이름은 휘)/진원/복건의 주설에 이르기 까지, 거의 전부 암송하여, 두 번 다시 서책을 찾아 볼 필요가 없었다.
선주는 익주를 평정하여, 목을 겸무하자, 그를 권학종사에 임명하였다. 태자를 세울 때가 되자, 윤묵을 [태자]복으로 삼고, 《[춘추]좌씨전》을 후주에게 교수했다. 후자가 즉위하자 간의대부로 임명되었다. 승상 제갈량이 몰沒하자, 성도로 귀환하여, 태중대부로 임명되어, 죽었다. 아들인 윤종이 그 학문을 전하고, 박사가 되었다.
[주] 위와 동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