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주(譙周)는 자가 윤남(允南)이고, 파서군(巴西郡) 파충국(巴充國) 사람이다. 부친 초X(譙초영시.png)은 자(字)가 영시(榮始)이며 상서(尙書)를 배웠고, 아울러 각종 경전(經) 및 도위(圖緯: 신비한 예언서)에도 정통했다. 주(州: 익주)나 군(郡: 파서군)에서 그를 초빙했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주(州: 익주)에 임관하여 사우종사(師友從事)의 직책을 역임하기도 했다.


초주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동복 형과 함께 살았다. 성장한 이후에는 고서에 묻혀 학문에 정진했고, 집은 가난했지만 일찍이 산업(產業: 가난한 집안 상황)에 관한 질문을 한 적이 없었으며, 경전을 통독할 때는 혼연히 홀로 미소를 지으며 잠자는 일과 먹는 일을 잊었다. 육경(六經)을 정심하여 연구했는데, 특히 편지를 쓰는 일에 탁월했다. 그는 천문에 매우 밝았지만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제자백가의 문장에도 관심이 없었으므로 전부 읽지 않았다. 그의 신장은 8척이나 되었고, 풍모는 소박하였으며, 성격은 진실되고 꾸미지 않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건흥(建興) 연간,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은 익주목(益州牧)을 겸임하면서, 초주를 권학종사(勸學從事)로 임명했다.


촉기(蜀記)에서 이르길: 초주가 처음 제갈량을 뵜을 때,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旣出,법 집행 담당자는 비웃은 자들을 처벌해야 된다고 청하였다. 제갈량이 말하길


"그만두시오 그만둬. 나도 못 참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소!"


제갈량이 전쟁터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초주는 집에서 이 소식을 듣고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곧이어 그곳으로 가는 것을 금지하는 조서가 내려졌지만, 초주만은 신속하게 가서 도달했다.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이 익주자사(益州刺史)를 겸임할 때, 초주는 전학종사(典學從事)로 임명되어 주(州)의 학자들을 총괄했다. 후주가 태자(太子)로 세워지자, 초주를 복야(僕射)로 임명했으며, 후에 가령(家令)으로 전임시켰다.


당시 유선은 자주 유람을 나가며 노래부르는 자와 악단을 늘려나갔다. 초주가 상소를 올려 간언했다.

─ 옛날 왕망(王莽) 정권이 무너지자, 호걸들이 동시에 일어나 주(州)와 군(郡)을 차지하고 신기(神器: 제왕의 옥새)를 갖기를 원했었습니다. 이때 현명하고 재능있는 선비들은 돌아가 의탁할 만한 사람을 그리고 희망했는데, 반드시 그 세력의 넓고 좁음을 근거로 하지 않고 오직 덕의 얕음과 두터움만을 보았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당시의 경시(更始: 경시제 유현劉玄) 및 대중을 갖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세력면에서는 이미 넓고 컸지만, 쾌락을 추구하고 욕망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착한 일을 함에 있어서는 게을렀으며, 유람하며 사냥하고 먹고 마시면서 백상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하북(河北)에 진입했을 때, 풍이(馮異) 등이 그에게 권유하기를 '응당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자들을 재심하여 처리하는데 노력했으며, 음식을 절약하고, 법률과 제도에 따라 행동하였으므로 북쪽의 주(州)에서는 칭송의 노래를 부르고 감탄하였고, 명성은 사방 먼 곳 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등우(鄧禹)는 남양(南陽)에서부터 그를 따랐고, 오한(吳漢), 구순(寇恂)은 세조를 알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그의 덕행을 전해듣고 임기응변의 계책을 사용하여 어양(漁陽)과 상곡(上谷)의 돌격 기병대를 들어 광아(廣阿)에서 세조를 맞이했습니다.

이 밖에 세조의 덕망을 흠모한 자로는 비융(邳肜) 경순(耿純) 유식(劉植)의 무리로부터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관을 지고 오거나 강보의 어린이를 등에 엎고 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고, 왕랑(王郞)을 멸망시키고 동마(銅馬)를 평정하고 적미(赤眉: 반란집단인 적미군)를 무찔러 제왕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낙양(洛陽)에 도착한 후, 세조는 일찍이 잠깐 외출하려고 거마를 준비시켰는데, 요기(銚期)가 간언하여 말하기를, '천하는 아직 안녕되지 못한 상태인데, 신은 폐하께서 자주 외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즉시 수레를 돌렸습니다.

외효(隗囂)를 정벌했을 때, 영천(潁川)의 도적들이 봉기했습니다. 세조는 낙양으로 돌아와 단지 구순(寇恂)을 파견하여 가도록 했는데, 구순이 말하기를, '영천에서는 폐하께서 원정을 하였기 때문에 간사한 자들이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돌아온 것을 아직 모르고 있으니, 때에 맞춰 항복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그곳으로 가면, 영천의 도적들은 반드시 항복할 것입니다' 라고했습니다. 그래서 세조는 영천으로 갔고, 그 결과 구순의 말처럼 되었습니다. 때문에 긴급한 일이 아니면 잠시 외출하는 것조차 과감히 하지 않고, 긴급한 일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안위도 생각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옛날의 제왕들은 좋은 일을 하려는 것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때문에 경전에서는 '백성들은 이유없이 돌아가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그들은 덕행을 우선한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액운을 만나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졌으며, 영웅과 지혜로운 선비들이 현명한 군주를 그리워하고 바라는 때입니다. 폐하께서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3년간의 상을 마쳤는데,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등 증민((曾閔 : 증삼(曾參)과 민자건(閔子騫) 둘 다 공자(孔子)의 제자로 효성이 지극했다.))이라도 당신을 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을 존경하고 재능있는 자를 임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힘을 다하도록 하는 점에서는 주(周)나라의 성강[成康: 성왕(成王), 강왕(康王)]을 능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내는 한마음으로 협력하고, 나이 많은 자와 적은 자가 힘을 내니, 신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큰 소원을 억제할 방법이 없으니, 그것은 폐하께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널리 하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수레를 끄는 자는 큰 힘을 내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고, 커다란 곤란을 제거하는 자는 널리 좋은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묘(宗廟: 선대 황제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를 이어 섬기는 자는 헛되이 복을 구하지 않고, 백성들을 솔선하여 하늘을 존경해야만합니다. 호수나 숲에서 즐기시고, 어떤 때는 빈번하게 출동하시니, 신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워 사사로이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무릇 걱정이나 책임을 몸에 지고 있는 사람은 향락을 다할 틈이 없습니다. 선제의 뜻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향락을 다할 때가 아닙니다. 원컨대 악관(樂官: 음악을 담당하는 관리)을 줄이시고 후궁이 증착하여 만든 관을 감소하고, 단지 선제께서 펴시던 일만을 받들어 시행하고, 아래로는 자손들을 위해 절검을 보이십시오. ─

초주는 후에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임명되었지만, 여전히 태자(太子)를 모셨다. 당시 군대가 여러 차례 출전하여 백성들은 초췌해졌다. 초주는 상서령(尙書令) 진지(陳祗)와 형세의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논의하고 조정에서 물러나 글을 써서 그것을 구국론(仇國論)이라고 했다. 그 문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 인여국(因餘國)은 약소하고 조건국(肇建國)은 강대하지만 함께 천하를 다투어 구적이 되었다. 인여국에 고현경(高賢卿)이라 하는 자가 있었는데 복우자(伏愚子)에게 묻기를 '지금 국가의 대사는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내심 걱정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일에서 약한 것으로써 강한 것을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떤 방법을 이용했습니까?' 라고 했다. 복우자가 말하기를, '나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대국의 입장에 있으면서 걱정이 없는 자는 항상 대부분 오만하고, 약소국의 입장에 있으면서 걱정이 있는 자는 항상 착한 행동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오만하면 동란을 낳게 되고, 착한 행동을 사모하면 천하를 태평스럽게 하게 되는데, 백성들을 양육하여 적은 수를 갖고 많은 수를 취했고, 구천((勾踐: 춘추시대 월(越)나라 왕))은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약소국으로써 강대국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그 방법입니다' 라고 했다. 고현경은 '과거 강대한 항우(項羽) 와 약소한 한((漢: 유방(劉邦)의 세력))이 서로 다투어 싸웠으므로 하루라도 편안히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항우는 한나라와 맹약하여 홍구((鴻溝 : 하남성(河南省)의 가로하(賈魯河))를 경계로 삼아 각기 돌아가 백성을 쉬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장량(張良)은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정해졌다면 형세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주장하고 군대를 이끌고 항우를 추격하여 끝내는 항우를 타도했습니다. 어찌 문왕의 일을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조건국에는 마침 환란이 있으니, 나는 그 틈을 타서 그 나라의 변방 지역을 함락시키고 그 환란이 가중되어 나라를 소멸시키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라고 했다. 복우자가 말했다. '은(殷), 주(周)의 교체기에는 왕후는 대대로 존경되었고, 군신 관계는 오래도록 공고했으며, 백성들은 군주의 통치에 습관이 되어 있었는데, 뿌리가 깊은 것은 뽑기 어렵고, 공고함에 의지한 것은 옮기기 어렵습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비록 한고조일지라도 어떻게 칼을 쥐고 말에 채찍질을 하여 천하를 취할 수 있었겠습니까? 진(秦)나라가 봉후를 폐지하고 군수를 설치한 후, 백성들은 진나라의 노역으로 지치고, 천하의 토지는 붕괴되는 듯했으며, 어떤 때는 해마다 군주를 바꾸고, 어떤 때는 달(月)마다 공을 바꾸었으므로 새나 짐승조차도 놀라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호걸들이 일제히 다투며, 호랑이나 이리가 확득물을 찢어 나누듯이 영토를 분열하였는데, 신속하게 공격한 자가 가장 많이 얻었고, 행동이 느린 자는 병탄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와 조건국은 모두 새 군주에게 나라를 인도했고 시대는 바뀌어 진나라 말기 같은 혼란한 시대가 아니라 실로 육국이 동시에 할거하는 형세가 있습니다.

때문에 문왕은 될 수 있지만, 한고조는 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백성들이 피로하다면 소란의 징조가 생기고, 위가 오만하고아래가 포학하면 와해의 형세가 일어날 것입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화살을 여러 번 쏴서 적을 맞히기를 바라는 것은 신중하게 살피고 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총명한 사람은 작은 이익 때문에 눈을 옮기지 않고, 주관적으로 추측하여 계획을 바꾸지 않으며, 시기가 가능해진 연후에 행동하고 시운이 부합된 이후에 일어납니다. 과거 탕왕[湯王: 하(夏)를 멸하고 은(殷)를 창건]과 무왕[武王: 은(殷)을 멸하고 주(周)를 창건]의 군대가 두 번 싸우지 않고 이겼던 것은 진실로 백성들의 노고를 신중하게 보고 시기를 신중히 살폈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력을 다하여 몇 번이고 정벌하여 토지가 붕괴되는 형세가 생기고 불행히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면, 비록 총명한 사람이라도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을 종횡으로 기이한 계책을 내어 틈도 없이 군대를 출동시켜 파도를 뚫고 쉐가 가는 길을 끊고, 계곡을 지나고 산을 넘어 배와 노에 의지하지 않고 나루터를 건너간다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므로 실제로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

초주는 이후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진하여 구경(九列) 다음가는 지위가 됐다. 초주는 비록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아한 품행으로 존경을 받았고, 때때로 중대한 문제를 자문하러 오면 항상 경전에 근거하여 대답을 했다. 그리고 후진 중에서 지적 관심이 강한 자들은 또한 그에게 의심나는 문제를 자문했다.

경요(景耀) 6년(263년)겨울에 위의 대장군 등애가 강유를 격파하고 막힘없는 기세로 진군했다. 그런데 촉나라는 본래 적군이 곧바로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성을 수비하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등애가 이미 음평(陰平)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촉나라 백성들은 동요되어 불안해하며 모두 산과 들로 달아났고, 이를 막을 수 없었다. 유선은 신하들을 모아 상의했지만, 누구도 좋은 계책을 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촉은 본래 오와 동맹국이었으므로 오나라로 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남중((南中: 익주(益州)의 남부 지역))의 일곱 군이 험준하고 두절되어 있어 스스로 방어하기 쉬우므로 남쪽으로 도망 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단지 초주만이 이렇게 주장했다.

“옛날부터 다른 나라에 기탁하고 천자로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 만일 오나라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신하가 되어 복종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 규율에 차이가 없으면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합칠수도 있는데, 이것은 자연스런 이치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말하면, 위나라는 오나라를 병탄할 수 있어도, 오나라는 위나라를 병탄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똑같이 신하가 된다면, 작은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어떻게 큰 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과 비교하겠습니까? 오나라가 멸망한 후 다시 치욕을 받는 것이 어찌 한 차례 치욕을 받는 것과 비교하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남쪽으로 도주한다면, 일찍이 계책을 세운 연후에야 실현될 수 있일 것입니다. 지금 강대한 적군은 가까이 접근했고 재화와 멸망이 도래하려고 하니, 소인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남쪽으로 출발할 때에는, 뜻하지 않은 변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어떻게 남쪽으로 가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신하들 중에서 어떤 이가 초주를 비난하며 말했다.

“지금 등애는 멀리 있지 않고, 아마 위나라는 우리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초주가 말했다.

“현재 동오가 아직 위나라로 귀순하지 않고 있으니, 일의 추세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받아들인 후에는 대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위나라에 항복하여 위나라에서 토지를 분할하지 않고 폐하를 봉한다면, 저는 직접 경성으로 가서 고대의 도의로써 항복한 군주에 대해서 논쟁을 할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초주의 말의 이치를 바꿀 자가 없었다. 유선이 여전히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고 주저하자, 초주가 상서를 올려 말했다.

─ 어떤 자는 폐하께서 위나라 군대가 깊숙이 침입하도록 하기 위해 남쪽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데, 어리석은 저는 불안한 계책이라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남방은 먼 곳의 만족이 거주하는 땅으로 평상시 조정을 위해 세금을 바친 일이 없고, 오히려 여러 번 모반을 하였는데, 승상 제갈량이 남정하여 군대의 위력으로 그들을 핍박하자, 그들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귀순했습니다. 이 이후로 그들은 조정에 세금을 납부하였고, 그것을 취해 군사비용으로 제공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원수가 되어 국가를 해롭게 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지금 조정이 곤경에 처해 급박한 상황이므로 그곳으로 가서 의지하려고 하는데, 아마 반드시 또 모반할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북방의 군대가 이곳으로 오는 것은 비단 촉만을 취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남쪽으로 달아난다면, 반드시 사람들의 힘이 쇠미해진 시기를 타서 추격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설령 남방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밖으로는 적군을 막아야 하고 안으로는 의복, 수레를 공급해야 하므로 경비는 확대되게 될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다면 여러 만족들을 소모시키는 일은 틀림없이 심할 것이고, 심하면 반드시 빠르게 모반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옛날 왕랑(王郞)이 한단(邯鄲)을 근거로 하여 황제(皇帝)를 참칭하자, 당시 신도(信都)에 있던 세조(世祖: 광무제 유수(劉秀))가 왕랑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신도를 버리고 관중(關中: 장안(長安) 일대)으로 돌아가려고 했었습니다. 비융(邳肜)이 간언하기를, '명공께서 서쪽으로 돌아간다면, 한단성의 백성들은 부모를 버리고 성주를 배반하면서 천리 저쪽으로 당신을 보내는 것을 수긍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들의 도망과 배반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세조는 비융의 간언을 들어 한단을 격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북쪽 군대가 도착한다고 하여 폐하께서 남쪽으로 간다면, 진실로 비융의 말이 입증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일찍이 계획을 강구하면 작위와 토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결국 남쪽으로 가서 대세가 다하고서야 항복하면 그 화는 반드시 깊을 것입니다. <역>에서 말하기를, 항(亢)자가 말하는 것은 얻은 것은 알지만 잃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생존하는 것은 알지만 멸망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득실존망을 알면 중정을 잃지 않는데, 이것은 오로지 성인뿐이구나!'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성인은 운명을 알고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堯)와 순(舜)은 자식이 착하지 않자, 다른 사람에게 천자의 지위를 주려는 하늘의 뜻을 알고 천자가 될 만한 인물을 찾아 지위를 주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그릇감이 되지 못했어도, 재화가 아직 싹트기 전에 다른 사람을 맞이하여 제위를 주었습니다. 하물며 재앙이 이르렀음에야! 옛날 미자(微子)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형으로 직접 손을 묶고 죽은 자와 똑같이 옥을 입에 물고 무왕[武王: 주(周)나라 무왕인 희발(姬發)]에게 귀순했습니다. 어찌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부득이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선은 결국 초주의 건의를 따랐다. 유선이 근심이 없고, 한나라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얻은 것은 초주의 계책을 썼기 때문이다.


孫綽評曰:譙周說後主降魏,可乎?曰:自為天子而乞降請命,何恥之深乎!夫為社稷死則死之,為社稷亡則亡之。先君正魏之篡,不與同天矣。推過於其父,俛首而 事讎,可謂苟存,豈大居正之道哉!


손작이 평하여 이르길 : 초주가 후주에게 위나라에게 항복하자고 권한 것이 옳은 일인가? 말하길 : 자신이 천자가 되어 항복을 청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치욕인가! 무릇 사직을 위해서 죽으면 죽는 거고 사직을 위해서 망하면 망하는 거지 선군은 위나라의 찬탈을 바로잡고자 같은 하늘을 이지 않겠다하였는데 그 아버지에게 잘못을 미루고 머리를 조아려 원수를 섬기니 가히 구차하게 살아남았다고 할 만 하다. 어찌 올바름에 처하는 도리를 크게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孫盛曰:春秋之義,國君死社稷,卿大夫死位,況稱天子而可辱於人乎!周謂萬乘之君偷生苟免,亡禮希利,要冀微榮,惑矣。 且以事勢言之,理有未盡。何者?禪雖庸主,實無桀、紂之酷,戰雖屢北,未有土崩之亂,縱不能君臣固守,背城借一,自可退次東鄙以思後圖。是時羅憲以重兵據 白帝,霍弋以強卒鎮夜郎。蜀土險狹,山水峻隔,絕巘激湍,非步卒所涉。若悉取舟楫,保據江州,徵兵南中,乞師東國,如此則姜、廖五將自然雲從,吳之三師承 命電赴,何投寄之無所而慮於必亡邪?魏師之來,褰國大舉,欲追則舟楫靡資,欲留則師老多虞。且屈伸有會,情勢代起,徐因思奮之民,以攻驕惰之卒,此越王所 以敗闔閭,田單所以摧騎劫也,何為匆匆遽自囚虜,下堅壁於敵人,致斫石之至恨哉?葛生有云:「事之不濟則已耳,安能復為之下!」壯哉斯言,可以立懦夫之志 矣。觀古燕、齊、荊、越之敗,或國覆主滅,或魚縣鳥竄,終能建功立事,康復社稷,豈曰天助,抑亦人謀也。向使懷苟存之計,納譙周之言,何邦基之能構,令名 之可獲哉?禪既闇主,周實駑臣,方之申包、田單、范蠡、大夫種,不亦遠乎!


손성이 말하길 : 춘추의 대의에 나라의 임금은 사직을 위해 죽고 경대부는 직위를 위해 죽는다고 했는데 하물며 천자라고 칭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을 수 있겠는가! 초주는 말하길 만승의 군주가 구차하게 생명을 훔쳐 죽음을 면하고 예법을 잃지만 이득을 구하길 바랐으며 미미한 영예를 기대하길 요구했으니 미혹된 것이다. 또한 일의 시세로부터 보자면 도리에 있어서도 다하지 못함이 있다. 무엇 때문인가? 유선이 비록 무능한 임금이기는 하나 실로 걸왕이나 주왕같은 가혹함이 없고 전투에서 비록 누차 패배하였으나 국토가 완전히 함락당한 것은 아니다. 만약 군신이 굳게 지켜 성을 배후에 두고 결사의 일전을 치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퇴각하여 동부에 진주하면서 이후를 도모해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 나헌이 중병으로 백제성에 거했으며 곽익이 강졸로 야랑에 진주하였다. 촉의 영토가 험난하고 산수가 격절됐으며 산은 가파르고 물은 격렬하여 보병들이 건널 수 있는바가 아니다. 만약 배들을 모두 취하여 강주를 보전하면서 남중의 병사들을 징집하고 동오에 군대를 요청하면 강유, 요화 5장이 자연히 구름처럼 몰릴 것이고 오나라의 군대가 명을 받들어 번개같이 달려오면 어찌 몸을 맡길 만한 곳이 없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위나라의 군대가 오는 것은 온 나라를 들어 움직이는 것이라 쫓고 싶어도 배가 없고 머무르고 싶어도 군대를 오래 주둔시키면 여러 가지 걱정할만한 일이 벌어지게 된다. 또한 굽히고 펴는 데에는 기회가 있고 정세는 번갈아가며 일어나는 것이니 서서히 떨쳐 일어나길 원하는 백성들로 인해 교만하고 나태한 병졸을 공격하는 것은 바로 월왕이 합려를 공격한 이유요 전단이 기겁을 꺾은 이유인데 어찌 총총히 급하게도 스스로 포로를 자처하여 견고한 벽을 적군에게 내리고 돌을 쪼개는 것 같은 지극한 원한을 남겼단 말인가? 갈생이 말하길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은 그럴 수도 있으니 그만둔다고 쳐다 어찌 능히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을 수 있겠는가!」비장하구나 그 말이여 가히 겁 많은 사람의 뜻을 세울 수 있다. 옛날의 연, 제, 형, 월의 패배를 보면 혹은 국가가 복멸하고 임금이 죽거나 혹은 물고기가 나무에 걸려 있고 새가 땅바닥에 굴을 파고 숨는 것 같은 상황이었으나 끝내 공을 세우고 일을 해결해 사직을 광복시켰으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람의 모략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구차하게 살아남고자 하는 계획을 품고 초주의 말을 받아 들였다면 어찌 나라의 기초를 능히 세우고 아름다운 명예를 얻을 수 있겠는가? 유선은 이미 혼암한 임금이고 초주는 실로 열악한 신하인데 신포서, 전단, 범려, 대부 종과 비교한다면 또한 차이가 크지 않겠는가!


당시 진문왕(晉文王: 사마소)이 위(魏)나라의 상국(相國: 승상(丞相)의 다른 명칭)으로 있었는데, 초주가 국가를 보존한 공로가 있어 양성정후(陽城亭侯)로 봉했다. 또 문서를 하달하여 초주를 초빙했다. 초주는 출발하여 한중(漢中)에 도착했지만, 질병으로 인하여 나아가지 못했다.

함희(咸熙)2년(265년) 여름에 파군(巴郡)의 문립(文立)이 낙양으로부터 촉(蜀)으로 돌아와서 초주를 방문했다.

초주는 대화중에 서판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문립에게 보여주었다.

“전오(典午)는 갑자기 월유(月酉)에 죽는다.”

전오(典午)란 '사마(司馬)'를 뜻하고 월유(月酉)는 '8월(月)'을 의미한다. 8월에 이르러 문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華陽國志曰:文立字廣休,少治毛詩、三禮,兼通群書。刺史費禕命為從事,入為尚書郎,復辟禕大將軍東曹掾,稍遷尚書。蜀并于魏,梁州建,首為別駕從事,舉秀才。晉泰始二年,拜濟陰太守,遷太子中庶子。立上言:「故蜀大官及盡忠死事者子孫,雖仕郡國,或有不才,同之齊民為劇;又諸葛亮、蔣琬、費禕等子孫流徙中畿,各宜量才敘用,以慰巴、蜀之心,傾吳人之望。」事皆施行。轉散騎常侍,獻可替否,多所補納。稍遷衛尉,中朝服其賢雅,為時名卿。咸寧末卒。立章奏詩賦論頌凡數十篇。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이르길:문립(文立)의 자는 광휴(廣休)로 어려서부터 모시, 삼례를 공부하고 여러 책에 겸하여 통하였다. 자사 비의가 명을 내려 종사로 삼았고 들어가 상서랑이 됐으며 다시 비의의 대장군 동조연으로 징벽되고 점차 상서로 옮겼다. 촉이 위나라에 병합되고 양주를 세웠는데 먼저 별가종사가 되고 수재로 천거됐다. 진 태시 2년에 제음태수가 되고 태자중서자로 옮겼다. 문립은 상소를 올려 말하길 「옛날 촉의 대관과 충의지사들의 자손들 중에 비록 군국에서 관리로 있는 사람도 있지만 혹은 재능이 없어 일반백성들과 똑같이 살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제갈량, 장완, 비의 등의 자손들은 중원을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으니 응당 재주를 헤아려 서용해 파,촉의 인심을 위로하고 오나라 사람의 희망을 기울게 만들어야 합니다.」하니 일이 모두 시행되었다. 산기상시로 옮기고 여러 가지 개혁할 문제를 올렸는데 많이 채납되었다. 점차 위위로 옮겼는데 중조의 신료들이 그 현명함에 감복하고 당시의 이름난 경상이 되었다. 함녕 연간 말에 죽었다. 문립의 장주, 시, 부, 논, 송이 무릇 수십 편 전해진다.


진(晉)왕실이 제위에 오르자,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초주를 빨리 입궐하도록 했다. 초주는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태시 3년(泰始: 267) 낙양에 도착했다. 초주가 질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자, 그의 집으로 가서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했다. 초주는 자신이 공로가 없는데 봉토를 받았으므로 작위와 봉토를 돌려주려고 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태시(泰始) 5년(269)에 나(삼국지의 저자 陳壽)는 일찍이 본군(파서군巴西郡)의 중정(中正)을 맡고 있었는데, 인물을 평가하는 일을 마치고 휴가를 요청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초주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별을 했다. 초주가 나에게 말했다.

“옛날 공자(孔子)는 72세로 유향(劉向)과 양웅(楊雄)은 71세로 세상을 떠났네. 지금 나의 나이는 70세를 넘었네. 줄곧 공자(孔子)의 유풍을 흠모하여 유양(劉揚)과 궤를 함께 할 수 있었네. 아마 다음해를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영원히 떠나게 될 것이므로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것이네.”

나는 초주가 미래의 일을 아는 기술이 있음을 의심했는데, 그는 공자 등의 말을 빌려 서술했을 뿐이었다.

초주는 태시6년(270년) 가을에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지만, 질병이 심해 임명을 받지 못했고, 겨울이 되자 세상을 떠났다.


晉陽秋載詔曰:「朕甚悼之,賜朝服一具,衣一襲,錢十五萬。」周息熙上言,周臨終屬熙曰:「久抱疾,未曾朝見,若國恩賜朝服衣物者,勿以加身。當還舊墓,道險行難,豫作輕棺。殯斂已畢,上還所賜。」詔還衣服,給棺直。


진양추에 조서를 실어 이르길 「짐이 심히 슬퍼하니 조복 한 구, 옷 한 벌, 금전 15만을 내린다.」초주는 초희가 상언하는 것을 멈추게 했는데 초주가 임종에 이르러 초희에게 부탁하길 「오랫동안 병을 앓아 일찍이 조정에 나가 조회한 적이 없는데 만약 나라에서 은혜로 조복이나 옷가지 등을 내린다면 몸에 입히지 말라. 응당 구묘로 돌아갈 텐데 길이 험난하니 미리 가벼운 관을 준비하라. 빈렴이 끝나면 받은 것들을 위로 돌려보내도록 하라.」하니 조서를 내려 의복을 되돌리고 관목을 마련할 비용을 주었다.


초주가 저술하거나 편찬한 것으로는 법훈(法訓)ㆍ오경론(五經論)ㆍ고사고(古史考) 등 1백여 편이 있다.


益部耆舊傳曰:益州刺史董榮圖畫周像於州學,命從事李通頌之曰:「抑抑譙侯,好古述儒,寶道懷真,鑒世盈虛,雅名美跡,終始是書。我后欽賢,無言不譽,攀諸前哲,丹青是圖。嗟爾來葉,鋻茲顯模。」

익부기구전에 이르길 : 익주자사 동영(
董榮)이 초주의 상을 주학에 그려놓고 종사 이통으로 하여금 송을 짓도록 하였는데 송에 이르길 ; 「근신한 초후여! 고대 성현의 덕을 좋아하고 유학을 전술하며 도리를 보배처럼 여기고 진솔함을 품었네. 세속의 성쇠를 명찰하고 고아한 명성과 아름다운 행적이 시종 책에 적혀있네. 우리 후배들은 현자를 존경하여 찬예하지 않는 말이 없고 여러 전대의 철인을 따라잡아 그림을 그렸네. 아~! 앞으로 올 사람들이여 이 현저한 모범에 교훈을 얻기 바라네.」


초주에겐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초희(譙熙), 초현(譙賢), 초동(譙同)이다. 어린 아들인 초동(譙同)은 초주의 학업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또한 충의와 질박함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석현(錫縣)의 현령(縣令)으로 제수했는데, 동궁세마(東宮洗馬)로 승진시켜 불렀지만 취임하지 않았다.


초주의 큰 아들은 초희(譙熈)의 아들은 초수(譙秀)인데, 자는 원언(元彥)이다.


周長子熙。熙子秀,字元彥。晉陽秋曰:秀性清靜,不交於世,知將大亂,豫絕人事,從兄弟及諸親里不與相見。州郡辟命,及李雄盜蜀,安車徵秀,又雄叔父驤、驤 子壽辟命,皆不應。常冠鹿皮,躬耕山藪。永和三年,安西將軍桓溫平蜀,表薦秀曰:「臣聞大朴既虧,則高尚之標顯;道喪時昏,則忠貞之義彰。故有洗耳投淵以 振玄邈之風,亦有秉心矯跡以惇在三之節。是以上代之君,莫不崇重斯軌,所以篤俗訓民,靜一流競。伏惟大晉應符御世,運無常通,時有屯蹇,神州丘墟,三方圮 裂,兔罝絕響於中林,白駒無聞於空谷,斯有識之所悼心,大雅之所歎息者也。陛下聖德嗣興,方恢天緒。臣昔奉役,有事西土,鯨鯢既縣,思宣大化;訪諸故老, 搜楊潛逸,庶武羅於羿、浞之墟,想王蠋於亡齊之境。竊聞巴西譙秀,植操貞固,抱德肥遁,揚清渭波。于時皇極遘道消之會,群黎蹈顛沛之艱,中華有顧瞻之哀, 幽谷無遷喬之望;凶命屢招,姦威仍偪,身寄虎吻,危同朝露,而能抗節玉立,誓不降辱,杜門絕跡,不面偽庭,進免龔勝亡身之禍,退無薛方詭對之譏;雖園、綺 之棲商、洛,管寧之默遼海,方之於秀,殆無以過。于今西土,以為美談。夫旌德禮賢,化道之所先,崇表殊節,聖哲之上務。方今六合未康,豺狼當路,遺黎偷 薄,義聲弗聞,益宜振起道義之徒,以敦流遁之弊。若秀蒙薄帛之徵,足以鎮靜頹風,軌訓囂俗;幽遐仰流,九服知化矣。」及蕭敬叛亂,避難宕渠川中,鄉人宗族 馮依者以百數。秀年八十,眾人以其薦老,欲代之負擔,秀拒曰:「各有老弱,當先營救。吾氣力自足堪此,不以垂朽之年累諸君也。」後十餘年,卒於家。


초주의 장자는 초희이다. 초희의 아들은 초수인데 자가 원언이다. 진양추에 이르길 : 초수는 성격이 청정하여 세상 사람들과 교우하지 않았는데 장차 대란이 생길 것을 알아 미리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어 종형제와 여러 친족들과도 더불어 보지 않았다. 주군의 징벽과 이웅(李雄)이 촉을 도적질하여 점거한 이후 안거로 초수를 징벽하였고 또한 이웅의 숙부인 이양()과 이양의 아들인 이수()의 부름에도 모두 응하지 않았다. 항상 사슴가죽으로 만든 관을 쓰고 산 속에서 농사지었다. 영화 3년 안서장군 환온(桓溫)이 촉을 평정하고 표를 올려 초수를 천하여 이르길 : 「신이 듣기로 큰 나무가 일그러져야 고상한 표식이 드러나고 도리가 없어진 어두운 시대가 도래 하여야 충정한 사람의 정의가 표창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귀를 씻고 심연에 투신하여 혼탁한 풍기를 떨치고자 한 사람이 있었고 또한 진심으로 행적을 바로잡아 부모, 스승, 임금에 대한 법도를 돈후하게 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상대의 군주들은 이 궤적을 중시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기에 풍속을 독실하게 하고 백성들을 가르쳐 한 가지 길로 가도록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진이 운명에 응하여 세상을 다스리는데 있어 운수가 항상 통할 수는 없고 궁색한때가 있는데 신주는 구허가 됐고 세 방향이 붕괴하니 토끼 잡는 그물 소리는 숲속에서 끊어졌고 백구가 텅 빈 계곡에 있다는 소리도 들어 보지 못했으니 이는 유식한 사람들이 슬퍼하는 바요 덕이 높은 사람이 탄식하는 바입니다. 폐하께서 제위를 이으시고 성덕을 부흥시키며 하늘이 부여한 사업을 바야흐로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신이 옛날 명령을 받들어 서토를 정벌하였는데 적의 목숨이 이미 다하였으므로 큰 교화를 펼치고자 하여 여러 유로를 방문하여 은둔하고 있는 인재를 찾아 무라가 예와 한착의 폐허에 있으며 왕촉이 망한 제나라의 경역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듣기로 파서의 초수는 절조가 올바르고 굳세며 덕을 품고 은거하여 위수의 물결이 흩날릴 수 록 더욱 맑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지금 황극이 도가 소멸해가는 시기에 처해있고 백성들이 전패유리의 어려움에 처해있으며 중화에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슬픔이 있고 유곡에는 교목을 옮길 만한 희망이 없습니다. 흉악한 운명이 누차 오고 간사와 위력이 잇달아 핍박하니 몸을 호랑이의 주둥이에 넣고 위태로움이 아침의 이슬과 같은 때에 능히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으며 치욕스럽게 항복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문을 걸어 잠그고 행적을 끊으며 가짜 조정을 섬기지 않음은 나아가서 공승이 몸을 망친 화를 면할 수 있으며 물러나서는 설방이 궤설로 응대하였다는 기롱이 없으니 비록 동원공과 기리개가 상락에 처하거나 관녕이 요해로 가서 은거한 것도 초수와 비교해 본다면 거의 초과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 서토에는 미담으로 삼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 현자를 예우하는 것은 교화의 먼저 할 바이고 특수한 절개를 숭상하고 드러내는 것은 성철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방금 천하가 태평하지 못한데 시랑이 길에 있으니 남겨진 백성들은 천박하여 의로운 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더욱 응당 도의가 있는 무리를 진흥시켜 이로써 유속의 폐단을 다스려야 합니다. 만약 초수가 예법에 맞는 부름을 받는다면 족히 퇴폐한 풍기를 진정시키고 부화한 풍속을 가르칠 수 있을 테니 먼 곳에 은거하는 사람들이 풍류를 앙모하고 구복의 원방에서 교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라 하였다. 소경(蕭敬)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이르러 탕거천으로 피난 갔는데 향인, 종족 중에 의부한 사람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초수가 80이 되자 여러 사람들은 그가 아주 늙었기 때문에 부담을 대신하고자 하였지만 초수가 거절하여 말하길 : 「각자가 모두 노약자가 있는데 응당 먼저 구해야 한다. 내 기력은 스스로 이를 감당할 만하니 세상을 떠나는 시기에 이르러 여러분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다.」라 하였다. 이후 10여년이 지나 집에서 죽었다.

분류 :
촉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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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2
15:31:20 (*.125.6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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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23
18:40:09
(*.52.89.88)
주석 추가

코렐솔라

2013.12.21
11:33:41
(*.166.245.165)
초주 부친의 이름을 초병->초X로 수정하고 이름 관련은 링크 대체함

코렐솔라

2013.12.25
18:37:24
(*.52.91.73)
초영시의 한자 코드는 http://rigvedawiki.net/r1/wiki.php/%F0%A1%B8%AB 여기 참고해주세요. 이 사이트에 입력하면 터져버리네요;;

코렐솔라

2016.07.19
10:36:18
(*.196.74.143)
손작의 평, 손성의 평, 화양국지의 문립, 진양추의 조서,익부기주전의 동영, 초수에 대한 해당하는 주석들은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이걸로 초주전의 모든 번역이 완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156670

또한 초수의 자를 원안에서 원언으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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