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13
황권(黃權)은 자가 공형(公衡)이고, 파서군 낭중현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군리가 되었으며, 주목 유장이 불러내 주부로 삼았다.
당시 별가 장송은 응당 유비를 영접해야만 되므로, 황권을 시켜 장로를 토벌하자고 건의했다. 황권이 간언하여 말했다.
"좌장군(유비)은 용맹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이르도록 요청하더라도 부하로서 그를 대우한다면, 그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고, 빈객으로 접대한다면, 주인은 계란을 쌓아 놓은 것 같은 위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단지 국경을 폐쇄하고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장은 황권이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사자를 파견하여 유비를 맞이하였으므로, 황권을 밖으로 내보내 광한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유비가 익주를 습격하여 탈취했을 때, 그의 장수들은 나누어 군현을 공격했으며, 군현은 그림자가 형제를 따르듯 유비에게 귀순했는데, 황권은 성을 닫고 견고하게 수비하다가 유장이 항복하는 것을 기다린 연후에야 비로소 유비에게 귀순했다. 유비는 황권을 임시로 편장군에 임명했다.
서중(徐眾)이 평하여 말하길 :
서중(徐眾)이 평하여 말하길 :
황권(黃權)이 이미 그 주인에게 충성스럽게 간언하였고 또 성을 닫아 굳게 방비하였으니 주군을 섬기는 예를 이룬 것이다. 무왕(武王)이 (은나라로 들어가) 수레에 내려 비간(比干)의 묘(墓)에 봉을 더하고, 상용(商容)의 마을에 표창한 것은 충현지사(忠賢之士= 충성스럽고 현명한 신하)에 대한 존중의 뜻을 명확히 밝히기 위함이었다. 선주는 임시로 황권을 장군으로 삼았으니 옳은 일이지만, 오히려 그 대우가 미비하고, 충의스러운 높은 절개를 기려 선행하는 자의 의지를 격려함에는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다.
조조가 장로를 격파하자 장로는 도주하여 파중현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황권이 간언했다.
"만일 한중을 잃게 된다면, 삼파는 힘이 약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촉군의 수족을 자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유비는 황권을 호군으로 임명하고,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장로를 영접하도록 했다. 장로는 벌써 남정으로 돌아가 북쪽으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두호, 박호를 격파하고, 하후연을 살해하고 한중을 점거했는데, 이는 모두 황권의 계획이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익주목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황권을 치중종사에 임명했다. 유비가 제라고 칭하며 동쪽으로 오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 황권이 간언하여 말했다.
"오나라 사람은 용감하여 전쟁을 잘하고, 또 촉의 수군은 물의 흐름을 따라 행동하므로, 전진하기는 쉬워도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적군의 허실을 살피고, 페하께서는 응당 뒤에서 지키시기를 청합니다."
유비는 황권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황권을 진북장군으로 임명해, 강북의 군대를 통솔하여 위나라 군대를 막도록 했으며, 유비가 직접 장강 이남으로 갔다.
오나라의 장군 육의(육손)가 물의 흐름을 타고, 갑자기 포위하자 강남의 촉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유비는 군대를 인솔하여 후퇴했다. 그러나 이때 길이 끊겼으므로, 황권은 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장수들을 이끌고 위나라로 투항했다.
담당 관리가 법을 집행하면서, 황권의 처자식을 체포해야 한다고 아뢰자 유비가 말했다.
"내가 황권을 져버렸지 황권이 나를 져버리지 않았다."
유비는 황권의 식구들을 이전과 똑같이 대우했다.
신 송지가 살펴 보건대 :
위문제가 황권에게 말했다.
신 송지가 살펴 보건대 :
한무제(漢武帝)는 허망된 (거짓되고 왜곡된) 말을 들어, 이릉(李陵)의 집안을 멸하였고, 유주(劉主= 유비)는 담당 관리가 법을 집행하는 것을 막고 황권의 가족을 용서하였으니, 이 두 군주의 옳고 그름은 격하게 멀고 아득할 뿐이다. 시경(詩經)에서도 전하기를
‘즐거워라 군자여, 그대의 후손을 편안히 길러 주리라.’
하였으니, 이것은 유주를 일컫음이랴!
위문제가 황권에게 말했다.
"그대가 천의를 배반한 군주를 버리고, 천의에 순종하는 군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진평과 한신(진평과 한신은 항우를 버리고 한고조에게 갔던 인물)을 따르려는 것이오?"
황권이 대답했다.
"신은 유주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아 오나라에 항복하는 일은 없었는데, 촉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어서 귀순한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의 장수로서, 죽음을 면한 것은 다행스런 일인데 어찌 고인을 따라 흠모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황권의 대답에 감동하여 진남장군으로 임명하고, 육양후로 봉했으며, 시중의 관직을 더하고, 그로 하여금 수레에 함께 타도록 했다.
촉나라에 투항한 사람 중 어떤 이가 황권의 처자식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황권은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상을 치르지 않았다.
『한진춘추(漢魏春秋)』에 이르길 :
후에 상세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과연 황권이 말한 대로였다.
『한진춘추(漢魏春秋)』에 이르길 :
문제(文帝)가 발상(發喪)을 명하였다. 황권이 답하여 말하길:
“신에게 선주와
제갈량은 (서로를) 정성으로 대하고 서로 믿어 신의 진심을
(선주와 제갈량은) 명백히 알고 있습니다. 의혹은 사실이 아닐지언대, 청컨대 (자세한 내막을) 들은 후에 발상하겠습니다.”
후에 상세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과연 황권이 말한 대로였다.
유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위나라 신하들은 모두 기뻐했는데, 황권만은 그렇지 못했다.
위문제는 황권이 도량이 있다고 판명하여, 그를 놀래키려는 생각으로 주위 사람을 보내, 황권에게 출두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도착하기까지 사이에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 말을 탄 사자가 질주하여 길에서 교체했다. 황권 수하의 기종으로 혼비백산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황권의 행동거지와 안색은 태연자약했다. 후에 황권은 익주자사를 겸임하였고, 하남으로 거쳐를 옮겼다.
대장군 사마선왕은 그(황권)를 매우 중시했다. 사마선왕이 황권에게 질문을 했다.
"촉나라에는 그대와 같은 사람이 어느 정도나 됩니까?"
황권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명공께서 저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깊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사마선왕은 제갈량에게 주는 편지에서 말했다.
─ 황공형은 호방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
경초 3년(239), 즉 촉나라 연희 2년에 황권은 거기장군, 의동삼사로 승진했다.
촉기에 이르길: 위 명제(조방)가 황권에게,
촉기에 이르길: 위 명제(조방)가 황권에게,
"천하는 삼국정립의 상황인데, 어떤 국가를 정통으로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황권은
"천문에 따라 정통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형혹(熒惑: 화성)이 심성(心星)이 되어 문황제가 붕어했지만, 오와 촉의 군주에게는 어떠한 일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라고 했다.
다음해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경후라고 했다. 아들 황옹(黃邕)이 후사를 이었다. 황웅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작위는 끊겼다.
황권이 촉에 남겨 두었던 아들 황숭(黃嵩)은 상서랑이 되어 위장군 제갈첨을 수행하여 등애를 방어했다. 부현에 도착하자, 제갈첨은 주저하여 전진하지 못했다. 황숭은 제갈첨에게 응당 신속하게 가서 요충지를 점거하여 적군의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여러차례 권유했다. 제갈첨은 결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황숭은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다.
마침 등애가 신속하게 전진해 왔다. 제갈첨은 퇴각하면서 싸워 면죽까지 이르렀다. 황숭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필사의 각오로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사요님 번역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rexhistoria.net/99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