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억張嶷은 자가 '백기'(伯岐)이고 파군 남충국 사람이다. 약관의 나이에 현의 공조가 되었다.

장의로 읽어야한다는 설이 있지만
嶷는 대부분의 경우 억으로 읽힙니다. 특별히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주석이 안 달려있기에 억으로 읽는 것이 맞아 보이며 또한 자에 해당하는 백기伯崎崎자가 "험할 기"짜기에 嶷자의 "산이름 의"와 "높을 억" 중 높을 억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됩니다.

유비가 촉군을 평정할 때 산속의 도적들이 현을 공격하자 현장(현의 관리)은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 장억이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현장의 아내를 보호해 주어 그녀는 재난을 면했다.
 
장억은 이로부터 이름이 났으며 주에서 불러 종사로 삼았다. 그때 군 안의 관리 '공록(龔祿)'과 '요주(姚伷)'는 2000석(봉록의 단위 : 쌀 6천 가마) 지위에 있고 명성이 높았는데 모두 장억과 사이가 좋았다. [주]

[주] 익부기구전에서 이른다. : 억은 빈천한 집에서 나왔으나 어려서 활달하고 씩씩한 절개가 있었다.
 
건흥 5년(227년)  승상 제갈량(諸葛亮)이 북쪽 한중에 주둔했을 때 광한, 면죽의 산적 '장모(張慕)'등이 군자금을 훔치고 관리와 백성을 겁주고 재물을 빼앗았다. 장억이 도위 신분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러 갔다. 장억은 그들이 새처럼 흩어져 싸우므로 사로잡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곧 거짓으로 화친을 맺고 시간을 정해 술자리를 열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장억은 직접 수하의 사람들을 이끌고 장모 등 오십여 명의 목을 베어 산적 우두머리를 모두 없앴다. 장억이 그 남은 무리들을 찾아내어 열흘 만에 말끔히 평정했다. 
 
나중에 장억이 중 병에 걸렸는데 집이 평소에 궁핍했다. 광한 태수인 촉군의 '하지(何祗)'는 인정이 후하기로 이름나 있었으므로 장억은 예전에는 그와 사이가 멀었지만 직접 수레를 타고 하지 집으로 가서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는 재산을 기울여 가며 장억을 치료해 주었고 몇 년이 지나자 병이 다 나았다. 그가 도리에 통한 이를 친구로 삼고 의리가 두터운 사람을 신뢰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장억은 아문장으로 임명되어 마충(馬忠)에게 예속되었다. 북쪽으로 문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족을 토벌하고 남쪽으로 네 군의 만족을 평정했는데 대체로 장억이 세운 작전에 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주]

[주] 익부기구전에 이르길 : 

장억은 병마 300인을 받아, 마충을 따라 모반한 강족을 토벌했다. 장억은 별도로 수영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가서, 타리에 이르렀다. 마을은 높고 험준한 곳에 있었기에, 장억은 산을 따라 4~5리를 올라갔다. 강족은 요액에 석문을 만들고, 석문 위에 상을 편 다음, 돌을 그 위에 쌓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은 돌을 떨어뜨려 때려죽이니, 당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억은 공격할 수 없으리라 여겨, 사자를 보내 그들을 타일러 말하길 

"너희 문산의 여러 종족이 모반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상해하니, 천자께서 장수들에게 명하시길 악한 무리들을 토멸하라 하셨다. 너희들이 만약 머리를 숙이고 군대를 지나게 하고, 군량과 군비를 보태 준다면, 복록은 영원히 융성할 것이고, 그 보답은 (너희가 베푼 것의) 100배에 이를 것이다. 만약 기어코 따르지 않는다면, 대병이 이르러 주멸할 것이고, 번개가 치듯 공격할 것이니,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또한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강족의 장로는 명을 받고는, 즉시 장억에게 왔고, 군량을 제공하고 군을 통과시켰다. 

촉군은 전진하여 남은 강족을 토벌했고, 남은 종족은 타리가 이미 항복했다는 얘기를 듣고, 모두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어떤 자들은 군을 맞아들여 나아가 항복하고, 어떤 자들은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들었는데, 병사를 풀어 공격하니, 촉군은 크게 이겼다. 

후에 서남이 유주가 다시 모반하자, 마충은 내항독이 되어 유주를 토벌했는데, 장억은 다시 (마충에게) 속하여, 항상 관군의 으뜸으로 싸웠고, 마침내 유주를 참했다. 남쪽을 평정하는 일이 끝나자, 장가, 흥고의 료족이 다시 모반하여, 마충은 장억에게 뭇 영채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장억은 초항하여 2천명을 얻었고, 모두 한중으로 가도록 하였다.
 
건흥 14년(236년)/  무도의 저왕(氐王) '부건(苻健)'이 항복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장군 '장위(張尉)'를 보내 가서 맞이하도록 했는데 약속한 날이 지나도 이르지 않자 대장군 장완(蔣琬)이 매우 걱정했다. 장억은 이 일을 평론하여 말했다. 
 
"부건이 항복을 요청함이 매우 진지하고 간절했으니 틀림없이 다른 변고는 없을 것입니다. 평소 부건의 동생이 교활하고 또 만족 중에 부건이 항복하려는 데 동조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들었으니 분열이 일어난 듯합니다."
 
이 때문에 부건의 동생은 정말 400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로 갔고 부건만이 투항하러 온다고 했다. 

이전에 월수군(越嶲郡)에서는 승상 제갈량이 '고정(高定)'을 토벌한 뒤 수이()이 자주 반란을 일으켜 태수 '공록(龔祿)'과 '초황(焦璜)'을 죽였다. 이때부터 태수는 감히 군으로 가지 못하고 군으로부터 800여 리(320km) 떨어진 안상현(〔安上〕縣)에 머물렀으므로 그 군은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여론은 옛 군을 되찾기를 바랐으므로 장억을 월수 태수로 제수하였다. 장억은 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 군으로 가서 은혜와 신의로써 이끌므로 만이(蠻夷)들은 모두 복종하여 매우 많은 사람이 와서 항복하고 귀순했다. 
 
북쪽 국경의 촉마(捉馬)족은 가장 용맹하여 촉나라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있었다. 장억은 곧 가서 토벌하고 그 우두머리 '위랑(魏狼)'을 사로잡았다가 또 풀어 주며 깨우쳐 주고 나머지 사람들을 불러 회유하도록 했다. 장억은 표를 올려 위랑을 읍후(邑侯)로 임명하고 부족 3000여 호는 모두 토지를 안정시켜 자기 직책을 지키도록 했다. 각 부족들이 이 소문을 듣고 대부분 항복했다. 장억은 이 공로로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소기(蘇祁)의 읍군(고을의 수령)'동봉(冬逢)'과 동봉의 동생 '외거(隗渠)'등이 항복했다가 다시 모반했다. 장억은 동봉을 죽이고 동봉의 아내는 모우왕(旄牛王)의 딸이므로 계략상 그녀를 사면시켰다. 그리고 외거는 서쪽 경계로 달아났다. 외거는 강인하고 용맹하여 날래므로 많은 부족 사람이 그를 매우 두려워하며 꺼렸다. 외거는 측근 두 명을 보내 거짓으로 장억에게 항복시키고 실제로는 소식을 얻으려 했다. 장억은 이 사실을 알아내어 그들에게 후한 상을 약속하고 반대로 계획을 실행하도록 했다. 이 두 명은 함께 모의하여 외거를 죽였다. 외거가 죽자 각 부족은 모두 안정되었다. 또 사도(斯都)의 우두머리 이구승(李求承)은 예전에 공록을 직접 죽인 자인데 장억은 현상금을 걸어 잡아들여서 그의 지난 악행을 일일이 열거한 뒤에 죽여 버렸다. 
 
처음 군의 성곽이 무너져 버리자 장억은 다시 작은 성벽을 쌓았다. 재임한 지 3년이 지난 뒤에 원래 군으로 돌아와 성곽을 보수할 때 이민족(夷種)의 남녀가 모두 노동력을 제공했다.
 
정작(定莋), 대등(臺登), 비수(卑水) 세 현은 군으로부터 300여 리(120km)떨어져 있는데 옛날에는 소금과 철과 옻을 산출했지만 만족이 살고 있는 국경 지대에서는 오랫동안 자신들이 독점하여 썼다. 장억은 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빼앗아 군의 고관에게 관리를 맡기려고 했다. 장억이 정작(定莋)에 이르렀다. 
 
정작(定莋)의 두목 '낭잠(狼岑)'은 반목왕(槃木王)의 외숙으로서 만이(蠻夷)들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장억이 자신들의 산업을 빼앗으려는데 화가 나 직접 와서 만나지 않았다. 장억은 장사 수십 명을 시켜 곧장 가서 잡아 오게 해 때려죽여 시체를 그 마을로 돌려보내고 상을 후하게 주어 낭잠의 악행을 알리고 아울러 말했다. 
 
'경거망동 하지 마시오. 움직이면 곧바로 죽게 될 것이오."  
 
부족들은 모두 면전에서 결박하고 사죄했다. 장억은 소를 잡아 잔치를 열고 두터운 은덕과 신의를 보였다. 그래서 소금과 철을 얻게 되고 필요한 도구가 풍부해졌다. 
 
한가군(漢嘉郡)의 경계에는 모우이(旄牛夷) 부족 4000여 집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낭로(狼路)'는 고모부 동봉(冬逢)의 원수를 같기 위해 작은아버지 '낭리()'에게 동봉의 부하들을 이끌고서 형세를 살펴보도록 했다. 
 
장억은 일이 있기 전에 측근에게 고기와 술을 갖고 그곳으로 가 위로하게 하고 낭리는 상을 받고 아울러 그 누이를 만났으며 누이와 동생은 즐거워 수하의 부족민들을 이끌고 장억을 만났다. 장억은 그들에게 두터운 상을 주고 잘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모우이 부락은 이 뒤로 줄곧 반란이 없었다. 
 
군에는 모우이 마을을 지나 성도에 이르는 옛날 길이 있었는데 평탄하기도 하고 가까웠다. 모우이에서 길을 끊은 뒤부터 백여 년이 되었고 대신 안상을 지나게 되었는데 험하고 멀었다. 

장억은 측근들을 보내 낭로에게 재물과 비단을 주고 다시 낭로의 고모에게 그의 뜻을 설명하도록 했다. 낭로는 곧 형제와 처자식을 데리고 모두 장억을 배알했다. 장억은 그와 맹세하고 옛길을 개통했으며 천 리 길을 조용하고 깨끗하게 하여 옛날의 역참을 회복시켰다. 상주하여 낭로를 모우구비왕(旄牛㽛毗王)으로 임명하고 사자를 보내 낭를 유선에게 인사시키고 조공을 바치도록 했다. 그래서 유선은 장억에게 무융장군(憮戎將軍)을 더하고 전처럼 군 태수를 겸하게 했다.
 
장억은 처음 비의(費禕)가 대장군이 되어 호방한 성정에 따라 널리 사랑을 베풀어 새로 귀순하는 이들에게 후히 대접하고 신임하는 것을 보고 편지를 써서 경계시켰다.

"옛날에 잠팽(岑彭)은 군대를 이끌었고, 내흡(來歙)은 절을 쥐고 있었으므로 모두 자객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의 지위는 존경스럽고 권력은 무거우니 마땅히 지난날의 일을 경계로 삼아야만 하는데, 경계하는 것이 적다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비의는 정말로 위나라에 항복한 사람 '곽수(郭脩)'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오나라 태부 '제갈각(諸葛恪)'(제갈량 조카)이 처음으로 위나라 군대를 무찌르고는 대군을 동원하여 위나라를 쳐서 취하려는 계획을 짰다. 촉의 시중 제갈첨(諸葛瞻)은 승상 제갈량의 아들이며 제갈각의 사촌 동생이었다. 장억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동쪽 오나라의 군주는 방금 붕어하였고, 황제는 사실 유약합니다. 태부 제갈각은 어린 군주의 위탁의 중책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또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황족으로써 빼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주공(周公)에게는 오히려 관숙(叔)과 채숙()이 전파한 유언이 있었고, (※) 곽광(霍光)이 임무를 받았을 때에는 (※) 또 연왕(燕王 旦)과 악읍개주, 상관걸 등의 음모와 반란이 있었습니다. 

※ 주무왕(周武王)이 죽고 주공 단(周公 旦)이 섭정이 되자, 무왕의 동생인 채숙은 형제들인 관숙, 곽숙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한무제(漢武帝)는 병이 위독하자 곽광(霍光)을 불러 새 황제를 보필할 것을 당부했다. 이후 어린 소제(昭帝)가 즉위했는데 당시의 조정 대사는 곽광이 결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상관걸은 곽광이 모든 권력을 쥐어 자신이 허수아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황제의 형인 연왕(燕王) 유단과 모의해 곽광을 모반죄에 엮으려 했고, 실패하자 또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모두 소제의 통찰력으로 인해 구원받게 되었다
.
다행히 성왕 소제의 명철함에 의지하여 이 재난을 면했습니다. 옛날부터 동쪽의 군주는 살생과 상벌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항상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동쪽의 군주는 (손권은) 살생(殺生)과 상벌(賞罰)의 권한을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항상 들었습니다. 지금 또 생명이 위급할 때 갑자기 태부를 불러 훗일을 위탁하려고 하니, 진실로 걱정할 만합니다. 게다가 오와 초의 사람들은 사납고 급하다고 과거의 책에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태부는 어린 군주를 떠나 적지로 들어가니, 아마 훌륭한 계획과 뛰어난 계산에 기초한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동쪽 나라는 기강이 엄숙하고 위와 아래가 화목할지라도 백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실패가 있다면, 총명한 사람의 사려는 아니겠지요? 과거의 것에 따라 현재를 판단하면 현재는 과거와 똑같이 될 것입니다. 그대가 태부에게 나아가 중언하는 것을 제외하고, 누가 또 말을 다할 자가 있겠습니까! 군사를 돌려 농업을 발전시키고, 은덕을 베푸는 일에 힘쓰고, 수년 이내에 동쪽 오와 서쪽 촉이 함께 병사를 일으켜도 확실히 늦지 않을 것입니다. 깊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제갈각은 결국 교만함으로 패배하였고 곧 처형당하면서 자신의 구족을 멸망시켰다. 장억의 식견은 대부분 이와 같았다. 

장억이 군에 부임한 지 15년이 되자 그 지역은 안정되어 평화로웠다. 여러 번 돌아가기를 요청하여 성도로 불려 가게 되었다. 만족 백성은 그를 아끼고 흠모하여 수레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모우이 마을을 지날 때 군장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나와 장억을 맞이했으며 촉군 경계에 이를 때까지 뒤를 따랐다. 연이어 서서 장억을 수행하여 조공한 두목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장억은 이르러 탕구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강개하고 장렬하므로 사대부가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주]

[주] 익주기구전에 이르길: 그 당시 거기장군 하후패(夏侯霸)가 장억에게 

"그대와는 소원하지만,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이 마음을 의탁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자, 장억은

"저는 아직 당신을 알지 못하고, 그대도 아직 저를 모릅니다. 우정의 커다란 도는 저쪽에 있습니다. 어찌 마음에 의탁한다고 하십니까! 원컨대 3년 후에 이 말씀을 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 그 당시 식견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말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장억은 일을 처리함에 마음대로 하고 예절이 부족하여 사람들은 이 때문에 그를 비난하기도 했는데 이 해가 연희 17년(254년)이다.
 
위나라 적도(狄道)현의 장으로 있던 '이간(李簡)'이 밀서로 항복을 요청했다. 위장군 강유는 장억 등을 이끌고 이간의 물자에 기대어 농서로 출전했다. [주] 

[주] 익주기구전에 이르길: 장억은 지병을 안고 성도에 왔으므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지팡이를 짚고야 일어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간이 항복을 원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의심했지만 장억만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유의 출전에 그때 여론은 장억이 막 성도로 온데다가 다리가 불편하여 행군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억은 이 말을 듣고 중원에 마음을 두고 일신을 적진에 두기를 원했다. 출발할 즈음에 유선에게 이별을 고하며 말했다. 
 
"신은 총명한 폐하의 세상에 살면서 과분한 은총을 받았으며 몸의 질병이 심해져 늘 하루아침에 죽어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봐 늘 걱정했습니다. 하늘은 제 소원을 저버리지 않고 군사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만일 양주를 평정한다면 신은 국경 밖에서 지키는 일을 할 것입니다. 만일 이기지 못한다면 이 몸을 죽여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  
 
유선은 그 마음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강유와 장억이 적도에 이르자 이간은 성안의 백성을 이끌고 군대를 맞이했다. 군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여 위나라 장수 '서질(徐質)'과 싸우다가 장억은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그가 죽이거나 상처를 입힌 적은 배가 넘었다. 

장억이 죽은 뒤 맏아들 '장영()'을 서향후(西鄉侯)에 봉하고 작은 아들 '장호웅(護雄)'에게 그의 작위를 잇도록 했다. 

남쪽 땅 월수군의 백성 가운데 장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장억을 위해 묘당을 세워 사계절과 수재와 한재가 잇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장억의 행동거지와 용모, 그리고 언사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보면,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지만 계략(策略)을 세울 땐 충분히 검토를 거치고, 과단성 있고 굳센 모습은 충분히 위세를 드높이며, 신하로서 충성과 절개와 밝고 곧은 기풍이 있고, 옛 고사를 돌이켜 반드시 행하여, 후주는 이러한 것들로 (그를) 두텁게 여기고 존경하였다. 비록 옛날의 영사(英士: 영민한 선비)일지라도, 누가 (그를) 넘어서겠는가! 


 
평하여 말한다.  - '황이여마왕장' 전
 
황권은 학식이 넓고 아정하며 도량이 넓었고 이회는 공정하고 정직하며 공업에 뜻을 두었고 여개는 절개를 지켜 옮기지 않았으며 마충은 온순하지만 과감하게 결단했고

『상서() 이르길 :

 

순종하면서 내면은 견고하다(擾而毅).

정현(鄭玄)이 주석()을 달기를 :

 

이다. 공훈을 세운다(致果)는 말은 굳세고 용맹스럽다()는 말이다.



왕평은 충성스럽고 엄정했으며 장억은 식견이 뛰어나고 과단성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자신의 장점에 의지하여 명성을 날리고 자취를 나타낼수 있었던 그들을 필요로 하는 때를 만났기 때문이다.
분류 :
촉서
조회 수 :
11599
등록일 :
2013.05.03
10:51:39 (*.104.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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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804/411/track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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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5.06
11:42:29
(*.104.28.52)

장의에 관한 내용 추가

코렐솔라

2013.07.23
19:04:57
(*.52.89.88)
주석 추가

코렐솔라

2013.09.04
15:28:55
(*.0.203.174)
한자 추가하고 있는데 안상현이 (安定)〔安上〕縣 이렇게 되있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코렐솔라

2013.09.04
15:59:46
(*.0.203.174)
고유명사 고사 빼고 추가. 이민족 이름이 많아서 그런지 낯선 글자가 눈에 띄네요

맨 밑에 두 개는 사요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103798

코렐솔라

2018.08.14
10:51:09
(*.112.38.51)
http://rexhistoria.net/161532 에 따라 '백기(伯崎)'에서 '백기(伯岐)'로 수정합니다. 유래는 『시경』 「대아편」의 '극기극억(克岐克嶷)'으로 보인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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