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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太祖) 무황제(武皇帝)는 패국(沛國) 초(譙)현 사람이다. 성은 조(曹), 휘는 조(操), 자는 맹덕(孟德)으로, 한나라 상국(相國) 조참(曹參)의 후손이다. [1]

[1] [조만전]曹瞞傳 – 태조의 다른 이름은 길리(吉利)이고 어릴 때 이름은 아만(阿瞞)이다. 

/왕침(王沈)의 [위서]魏書 – 태조의 선조는 황제(黃帝)로부터 나왔다. 고양제(高陽帝) 때에 육종(陸終)의 자식 중에 안(安)이 있었는데 그가 조(曹)를 성(姓)으로 삼았다. 주 무왕이 은(殷)을 이기고 선대의 후손들을 보존하면서 조협(曹俠)을 주(邾) 땅에 봉했다. 춘추시대에 함께 회맹하였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초(楚)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자손이 흩어져 일부가 패(沛)에 일가를 이루었다. 한고조가 거병할 때 조참(曹參)이 공을 세워 평양후(平陽侯)에 봉해져 작위와 봉토를 세습했는데, 그 뒤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고 지금에 이르러 적사(適嗣-적자)가 용성(容城)에서 봉국을 이어받았다. 

환제(桓帝) 때 조등(曹騰)이 중상시(中常侍) 대장추(大長秋)에 임명되고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졌다. 

[2] <속한서>[[조등전]]으로 분할

조숭(曹嵩)을 양자로 맞아 후사를 잇게 했는데 (조숭의) 관직은 태위(太尉)에 이르렀으나 그 출생의 본말은 상세히 알 수 없다. [3] 조숭이 태조를 낳았다.

[3] [속한서] – 조숭(曹嵩)의 자는 거고(巨高)이다. 성정이 돈신(敦愼-돈독하고 삼가함)하여 충효가 있었다. 사례교위에 임명되고 영제(靈帝) 때 대사농, 대홍려로 발탁되었고, 최열(崔烈)을 이어 태위가 되었다. (위문제) 황초(黃初) 원년(220년), 조숭을 추존해 태황제(太皇帝)라 했다. 

/오나라 사람이 지은 [조만전]과 곽반(郭頒)의 [세어]世語 에서 아울러 이르길 – 조숭은 하후씨(夏侯氏)의 자손으로 하후돈의 숙부다. 태조는 하후돈에게 있어 종부형제(從父兄弟)가 된다. 
 
태조는 어려서 기경(機 警-기지가 있고 총명함)하고 권수(權數-권모술수. 임기응변의 재주)가 있었으며 임협방탕(任俠放蕩-협기가 있고 방탕함)하여 행업(行業-덕행과 학업)을 닦지 않았기에 세인들이 그를 기재로 여기지 않았다. [4] 

[4] [조만전] – 태조는 어려서 매를 날리고 개를 달리게 하는 것(사냥)을 좋아했다. 방탕무도(遊蕩無度)하여 그의 숙부가 이에 관해 여러 번 조숭에게 말하자 태조가 이를 근심했다. 그 뒤 길에서 숙부를 만나자 거짓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삐뚤어지게 했다. 숙부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갑자기 악풍(惡風-심한 풍병)에 걸렸습니다.”

고 태조가 말하자 숙부가 이를 조숭에게 고했다. 조숭이 경악하여 태조를 불렀는데 태조의 입모양이 예전과 같았다. 조숭이 물었다, 

“네 숙부가 말하길 네가 풍에 걸렸다고 하는데 이미 나았느냐?” 

태조가 말했다, 

“애초에 풍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숙부의 사랑을 잃었으니 이 때문에 무함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에 조숭이 (숙부의 말에) 의심을 품게 되었고 이후로 숙부가 고하는 일이 있어도 끝내 다시 그 말을 믿지 않으니 태조는 더욱 제멋대로 굴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양국(梁國)의 교현(橋玄)과 남양의 하옹(梁國)만이 그를 남다른 인물로 여겼다. 교현이 태조에게 말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지면 일세의 재주가 아니면 이를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능히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은 군(君-그대)에게 달려 있소!” [5] 

[5] [위서] – 태위 교현(橋玄)은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인물인데, 태조를 보고는 그를 남달리 여기며 말했다, 

“내가 천하의 명사(名士)들을 많이 보았으나 군(君-그대)과 같은 사람은 본 적이 없소! 군은 스스로를 잘 보중하시오. 나는 늙었으니 내 처자를 부탁하오.” 

이로 말미암아 (태조의) 명성이 더욱 중해졌다.

/[속한서] – 교현의 자는 공조(公祖)인데, 엄명(嚴明-엄격하고 공정함)하면서도 재략(才略)이 있었고 인물평에 뛰어났다. 
 
/장번(張璠)의 [한기]漢紀 – 교현은 안팎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는데 강단이 있다고 칭해졌고 아래로는 겸손하게 선비들을 대하고 왕작(王爵-왕의 작위 ; 높은 직위)이라도 사사로이 친하지 않았다. 

광화(光和: 178-183. 영제) 연간에 태위에 임명되었는데 오래된 병을 이유로 직책을 파하고 태중대부에 임명되었다가 죽었다. 집안이 가난하고 산업(産業-가산)이 부족해 시신을 염할 널이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명신(名臣)이라 칭했다. 

/[세어] – 교현이 태조에게 말했다, 

“군(君)이 아직 명성을 얻지 못했으니 자장(子將-허소)과 교류하시오.” 

이에 태조가 자장을 방문하니 자장이 그를 받아들였고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 손성(孫盛)의 [이동잡어]異同雜語 – 태조가 일찍이 중상시 장양(張讓)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장양에게 발각되었다. 그러자 뜰에서 수극(手戟)을 휘두르다 담을 넘어 달아났다. 무재(才武)가 남들보다 뛰어나니 능히 (그를) 해칠 수 없었다. 

여러 책들을 널리 읽었는데 특히 병법(兵法)을 좋아해 제가(諸家)의 병법을 초집(抄集)해 이를 접요(接要)라 명명했다. 또한 손무(孫武) 13편(손자병법)에 주(注)를 달았으니 이 모두가 세상에 전한다. 일찍이 허자장(許子將)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오?”

라고 물었으나 자장이 대답하지 않았다. (태조가) 계속 묻자 자장이 말했다, 

“그대는 치세(治世)의 능신(能臣)이고 난세(亂世)의 간웅(姦雄)이오” 

태조가 크게 웃었다. 

나이 20세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郎)이 되었다. 낙양(洛陽) 북부위(北部尉)에 제수되었다가 돈구령(頓丘令-연주 동군 돈구현의 현령)으로 승진했고,[6] (경도로) 불려와 의랑(議郎)에 임명되었다. [7]
 
[6] [조만전] – 태조가 처음 (북부)위(尉)의 관청으로 들어가서 네 문(門)을 수리했다. 5가지 색깔의 봉(棒)을 만들어 문의 좌우에 각각 10여 매 씩 걸어 두고 금령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호강(豪强-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자)을 피하지 않고 모두 봉으로 때려 죽였다. 

몇 달이 지난 후 영제가 총애하던 소황문 건석(蹇碩)의 숙부가 밤에 나다니자 곧 그를 죽였다. 경사(京師-수도) 사람들이 종적을 감추고 감히 금령을 범하는 자가 없었고, 근습(近習-임금의 측근), 총신(寵臣-임금이 총애하는 신하)들이 모두 태조를 미워했으나 해칠 수는 없었다. 이에 사람들이 함께 태조를 칭찬하고 천거했으니 이 때문에 승진하여 돈구령(頓丘令)에 임명되었다.
 
[7] [위서] – 태조의 종매부(從妹夫-종매의 남편. 종매는 보통 사촌누이를 말함)인 은강후(隱彊侯) 송기(宋奇)가 주살되자 이에 좌죄되어 면관(免官)되었다. 그 뒤 옛 학문에 능하고 밝다는 이유로 다시 불려 와 의랑에 임명되었다. 

예전에 대장군 두무(竇武)와 태부 진번(陳蕃)이 엄관(閹官-환관)을 죽이려 하다 도리어 해를 입었었다. 태조가 상서하여, 진무(陳武) 등이 정직한데도 해를 입었고 간사한 자들이 조정에 가득 차고 착한 이들은 옹색(壅塞-막혀서 통하지 않음)하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했으나 영제(靈帝)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 조서를 내려 삼부(三府-삼공인 태위, 사도, 사공 아래에 설치된 부서)에 명하기를, 주현(州縣)을 다스리는데 성과가 없거나 백성들이 요언(謠言-유언비어)을 짓는 일이 있으면 상주하여 그 관원을 파면하도록 했다. 삼공(三公)이 사특하여 조령에 의해 임용되는 자가 드물고 뇌물이 횡행하였다. 강자는 원망을 사도 고발되지 않고 약자는 도의를 지켜도 모함을 받는 일이 많았다.

그 해 재이(災異)가 있자 널리 득실에 관한 의견을 물었는데 이에 (태조가) 다시 글을 올려 간절히 간언하기를, 삼공이 상주한 것은 오로지 귀척(貴戚-제왕의 척족)들의 뜻을 회피한 것이라 했다. 상주문이 올라가자 천자가 감격하여 깨닫고 삼부(三府)에 보여주며 꾸짖으며 요언(謠言)으로 불려 온 자들을 모두 의랑으로 삼았다. 그 뒤에도 정교(政敎)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호활(豪猾-세력 있고 교활한 자)들이 더욱 번성하여 여러 사람들이 꺾이고 비방 받았다. 태조는 이를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다시는 진언하지 않았다.
 
광화(光和: 178-183) 말, 황건(黃巾)이 봉기하자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영천(潁川)의 적(賊)을 토벌했다. 승진하여 제남상(濟南相-청주 제남국의 국상)이 되었다.

(제남)국에는 10여 개의 현이 있었는데 장리(長吏)들 다수가 귀척(貴戚)들에 아부하며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니 이에 그 중 8명을 상주하여 면직시켰다. 음사(淫祀-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제사. 민간 무속 행위)를 금하여 끊고 간사한 자들은 달아나 숨으니 군(郡)의 경내가 숙연해졌다. [8] 

[8] [위서] – 장리(長吏)들이 탐욕스럽게 수취하며 권세가들의 위세에 의지했으나 예전 상(相)들은 이들을 처벌하지 못했다. 태조가 도착해 모두 면직되리라는 것을 듣고 크고 작은 관리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고 간사한 도적들은 달아나서 다른 군(郡)으로 숨어들었다. 정교(政敎-정치와 교화)가 크게 행해지자 일 군(郡)이 청평(淸平)되었다.

당초, 성양(城陽)의 경왕(景王) 유장(劉章)이 한(漢)에 공을 세웠으므로 이 때문에 그 국(國)(→성양국) 에 사당을 세웠는데, 청주(靑州)의 여러 군(郡)에 전해져 서로 흉내 내었고 제남(濟南)에서 특히 심해 6백 여 사당에 이르렀다. 고인(賈人-상인)들이 때로는 2천 석 관원의 수레와 의복으로 꾸며 도종(導從)하고 창악(倡樂)을 연주하게 하는 등 사치가 날로 심해지니 백성들은 앉아서 빈궁해졌으나 역대 장리들 중 감히 금절(禁絶)하는 자가 없었다. 

태조가 당도하자 사당 건물을 모두 부수고 관리와 백성들이 제사지내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태조가) 정사를 장악하여 간사한 귀신을 섬기는 일을 제거하니 이로 인해 세간의 음사(淫祀)가 마침내 끊어지게 되었다.
 
그 뒤, (경도로) 불려 돌아가 동군태수(東郡太守)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병을 칭탁하고 향리로 되돌아갔다. [9]

[9] [위서] – 이때 권신(權臣)들이 조정을 오로지하고 귀척(貴戚)들이 전횡하자 태조가 도를 위배한 채 용납할 수 없어 여러 차례 거역했다. 집안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마침내 숙위(宿衛)로 남겨 주길 청했다. 의랑에 임명되었으나 늘 질병을 칭탁하고 번번이 향리로 돌아간다고 고했다. 성 밖에 집을 짓고 봄, 여름에는 서전(書傳)을 습독(習讀-글을 익히며 읽음)하고 가을, 겨울에는 사냥 다니며 스스로 즐겼다.

얼마 후 기주자사 왕분(王芬), 남양의 허유(許攸), 패국의 주정(周旌) 등이 호걸들과 연결하여 영제(靈帝)를 폐위하고 합비후(合肥侯)를 세울 계획을 꾸미고 이를 태조에게도 알렸으나 태조는 거절했다. 왕분 등이 결국 실패했다. [10]
 
[10] 사마표(司馬彪)의 [구주춘추]九州春秋 – 이때 진번(陳蕃)의 아들 진일(陳逸)과 평원사람인 술사(術士) 양해(襄楷)가 분좌(芬坐)에서 회합했다. 양해가 말하길, 

“천문이 환자(宦者-환관)들에게 이롭지 못하니, 황문, 상시들은 실로 멸족될 것이오.”

라 하니 진일이 기뻐했다. 왕분이 말하길, 

“만약 그러하다면 나 왕분은 이들을 쓸어 없애기를 원하오.”

라 하고는 허유 등과 결모했다. 영제가 북쪽으로 하간(河間)의 구택(舊宅)으로 순행하려 하자(※ 영제의 증조부인 유개는 하간효왕이고 조부 이래로 해독정후였는데 환제가 죽은 후 황제로 추대됨) 왕분은 이를 틈타 작난하려 꾸미고, 상서하여 흑산적이 군현들을 공겁(攻劫-공격해 약탈함)하니 군사를 일으키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때마침 북방에 붉은 기운이 있어 동서로 하늘에 멀리 퍼졌다. 태사가 상언하길, 

“응당 음모가 있을 것이니 북행해서는 안 됩니다.”

고 하자 황제가 그만두었다. 왕분에게 명해 군사들을 파하게 하고 갑자기 그를 소환하자, 왕분이 두려워하며 자살했다. 
 
/ [위서] - 태조가 왕분의 제안을 거절하며 말했다, 

“무릇 폐립(廢立)하는 일은 천하에 지극히 상서롭지 못한 일입니다. 옛 사람 중에 성패(成敗)를 저울질하고 경중을 헤아려 행한 이로는 이윤(伊尹), 곽광(霍光)이 그러합니다. 이윤(伊尹)은 지극히 충성스러운 마음을 품고 재신(宰臣-재상)의 위세에 의거하고 관사(官司-관부)의 가장 위에 위치했기에 진퇴(進退) 폐치(廢置)함에 계책에 따라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곽광(霍光)은 탁국지임(託國之任-나라를 부탁하는 대임)을 받았고 종신(宗臣)의 지위에 의거했으며, 안으로는 태후(太后)로 인해 중요한 정사를 장악하고 밖으로는 뭇 경들이 (그와) 함께 하고자 하는 위세가 있었습니다. 

(※ 참고 - 이윤은 은나라 때 재상으로, 태갑이 포악하자 추방하고 직접 정사를 돌보다 이후 태갑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보좌함. 곽광은 전한 때 대신으로, 소제가 죽은 뒤 무제의 손자인 창읍왕을 옹립했다가 27일 만에 폐위시키고 선제를 세움 

창읍(昌邑-창읍왕)이 즉위한 지 일천(日淺-날수가 얼마 되지 않음)하여 귀총(貴寵)이 아직 없었고 조정에 당신(讜臣-직언하는 신하)이 부족했으며 의논이 은밀히 가까이에서 나왔기 때문에 계획이 순조롭게 행해지고 썩은 나무를 꺾듯이 일이 쉽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제군(諸君)들은 지난 일들의 쉬운 점(曩者之易)만 보고 오늘날의 어려움을 보지 못합니다. 

제군들이 스스로 헤아려 보기에 무리를 모으고 당을 연결한 것이 어찌 칠국만 하겠습니까? 합비후의 귀함이 오(吳), 초(楚)만 합니까? (전한 초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킨 오, 초 등을 가리킴) 비상한 일을 꾸미면서 반드시 이기기를 바라니, 또한 위태롭지 않습니까!”
 
금성(金城)의 변장(邊章), 한수(韓遂)가 자사(刺史), 군수(郡守-군 태수)를 죽이고 모반하여 그 무리가 10여 만에 이르니 천하가 동요했다. 태조를 불러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삼았다. 

(서원팔교위의 하나로 188년의 일) 때마침 영제가 붕어하자 태자가 즉위하고 태후(하태후)가 조정 일을 맡았다. 대장군 하진(何進)은 원소(袁紹)와 함께 환관들을 주살할 것을 모의했으나 태후가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하진이 동탁을 불러 태후를 위협하려 했으나 [11]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하진은 죽임을 당했다. 
 
[11] [위서] – 태조가 이 일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엄수(閹豎)의 관원들(=환관)은 예나 지금이나 의당 있는 것으로 다만 세주(世主-당대의 군주)가 부당하게 권총(權寵-권력과 총애)을 내린 것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미 그 죄를 다스리기로 했으면 응당 원악(元惡-원흉)을 주살하면 되는 것으로 이는 옥리(獄吏) 한 명으로도 족하다. 그런데 어찌 분분(紛紛)하게 바깥의 장수를 부른다는 것인가? 그들을 모두 주살하고자 하면 일이 필시 드러날 것이니, 나는 그 일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겠구나.”

동탁이 도착하자 황제를 폐위하여 홍농왕(弘農王)으로 삼고 헌제(獻帝)를 세워 경도(京都-수도)에 큰 혼란이 일었다. 동탁이 표를 올려 태조를 효기교위(驍騎校尉)로 삼고 함께 대사를 의논하려 했다. 이에 태조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샛길을 따라 동쪽으로 돌아갔다. [12] 

[12] 위(서) – 태조는 동탁이 필시 패망할 것이라 여겨 끝내 취임하지 않고 향리로 달아났다. 수 기(騎)를 좇아 옛 친구인 성고(成皐)의 여백사(呂伯奢)를 방문했다. 여백사는 집에 없었는데, 그의 아들이 빈객들과 함께 태조를 겁박하여 말과 재물을 뺏으려 하니, 태조가 손수 칼로 쳐서 여러 명을 죽였다. 

/[세어] – 태조가 여백사를 방문했는데, 여백사는 출행 중이었고 다섯 아들이 모두 집에 있어서 빈주례(賓主禮)를 준비했다. 태조는 스스로 동탁을 저버린 일로 자신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의심하여, 밤중에 손수 칼을 휘둘러 8명을 죽이고 떠났다. 

/손성(孫盛)의 [잡기]雜記 – 태조는 식기 소리를 듣고 이를 자신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생각해 밤중에 그들을 죽였다. 그 뒤 처창(悽愴-몹시 처량하고 구슬픔)하게 말하길,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

고 하고는 길을 떠났다.

관(關)을 나와 중모(中牟-하남군 중모현)를 지나다가 정장(亭長)의 의심을 받아 붙잡혀 현으로 보내졌는데, 읍인 중에 몰래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자 그에게 청하여 풀려났다. [13] 

[13] [세어] – 중모(中牟)에서 (태조를) 도망자로 의심하여 현에 구금되었다. 이때 연(掾-하급 관원)들이 이미 동탁의 글을 받아 보았으나 오직 공조(功曹)만이 내심 이 사람이 태조임을 알아보았다. 세상이 바야흐로 어지러워지는데 천하의 웅준(雄俊)을 구금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현령에게 아뢰어 태조를 풀어 주었다.
 
마침내 동탁이 태후와 홍농왕을 죽였다. 태조가 진류에 도착해 가재(家財)를 흩어 의병(義兵)을 모아 장차 동탁을 주살하려 했다. 겨울 12월, 처음으로 기오(己吾-연주 진류군 기오현)에서 군사를 일으키니 [14] 이 해가 중평(中平) 6년(189년)이었다.

[14] [세어] – 진류의 효렴(孝廉)인 위자(衛茲)가 가재(家財)를 태조에게 내어주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니 그 무리가 5천 명이었다.
 
초평(初平) 원년(190년) 봄 정월, 후장군(後將軍) 원술(袁術), 기주목 한복(韓馥)[15], 예주자사 공주(孔伷)[16], 연주자사 유대(劉岱)[17], 하내태수 왕광(王匡)[18], 발해태수 원소(袁紹), 진류태수 장막(張邈), 동군태수 교모(橋瑁)[19], 산양태수 원유(袁遺)[20], 제북상 포신(鮑信)[21]이 동시에 함께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 무리가 각각 수 만에 이르렀고 원소를 추대해 맹주(盟主)로 삼았다. 태조는 분무장군(奮武將軍) 직을 대행했다.
 
[15] [영웅기]英雄記 – 한복(韓馥)의 자는 문절(文節)이고 영천 사람이다. 어사중승이 되었다가 동탁이 천거해 기주목이 되었다. 이때 기주민이 부유하고 번성하여 병량(兵糧-군량)이 풍족했다. 원소는 발해에 있었는데 한복은 그가 군을 일으킬까 두려워 여러 부의 종사(從事)들을 보내 이를 막아 동요하지 않도록 했다. 동군태수 교모(橋瑁)가 경사(京師-수도) 삼공(三公)의 이서(移書-공문서의 일종)를 거짓으로 꾸며 주군(州郡)에 돌리고 동탁의 죄악을 진술하며 이르길, 

‘핍박을 받았으나 스스로 구할 길이 없으니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환난을 풀어주길 바란다’

고 했다. 

한복이 이서를 받아보고 여러 종사(從事)들을 불러 물었다, 

“지금 원씨를 도와야겠소? 아니면 동탁을 도와야겠소?” 

치중종사 유자혜(劉子惠)가 말했다, 

“지금 군을 일으켜 나라를 위하는 일에 어찌 원씨나 동탁을 말하십니까?” 

한복은 스스로의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부끄러운 낯빛을 띄었다. 유자혜가 다시 말했다, 

“병(兵) 은 흉사(凶事)이니 선두에 서면 안 됩니다. 지금은 의당 다른 주(州)를 살펴보아, 먼저 움직이는 자가 있으면 그 연후에 이에 응하십시오. 기주가 다른 주들에 비해 약하지 않으니, (선두에 서지 않더라도) 다른 주의 공(功)이 기주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복이 이를 옳게 여겼다. 이에 원소에게 서신을 보내 동탁의 악행을 말하고 거병하기를 기다렸다. 
 
[16] [영웅기] – 공주(孔伷)의 자는 공서(公緖)이고 진류 사람이다. 

/ 장번(張璠)의 [한기]漢紀 – 정태(鄭泰)가 동탁을 설득하며 말했다, “공공서(孔公緖)는 청담고론(淸談高論-청아하고 고상한 이야기. 공리공담)과 허고취생(噓枯吹生-고목에 입김을 불어넣어 소생시킴. 말재주가 있음을 비유)에 능합니다”
 
[17] 유대(劉岱)는 유요(劉繇)의 형이다. 이 일은 오지(吳志)에 보인다. (※[삼국지] 오서 유요전)
 
[18] [영웅기] – 왕광(王匡)의 자는 공절(公節)이고 태산(泰山-연주 태산군) 사람이다.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베풀기를 좋아해 임협(任俠)으로 유명했다. 대장군 하진 부(府)의 진부사(進符使)로 징초되자 왕광은 서주(徐州)에서 강노(强弩)병 5백을 일으켜 서쪽으로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때마침 하진이 패하자 왕광은 고향으로 돌아가 집안을 일으켰고 하내태수로 임명되었다.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 – 왕광은 어려서부터 채옹(蔡邕)과 친하게 지냈다. 그 해 동탁군에게 패하자 태산으로 달아났다. 경용(勁勇-굳세고 용맹함)한 자를 불러 모아 수천 명을 얻었고 장막(張邈)과 합치고자 했다. 왕광이 먼저 집금오 호모반(胡母班)을 죽이자 호모반의 친속(親屬)들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태조와 합세해 함께 왕광을 죽였다.
 
[19] [영웅기] – 교모(橋瑁)의 자는 원위(元偉)이고 교현(橋玄)의 족자(族子-일족 형제의 아들)다. 일찍이 연주자사가 되었는데 심히 위혜(威惠-위엄과 은혜)가 있었다.
 
[20] 원유(袁遺)의 자는 백업(伯業)이고 원소의 종형(從兄-사촌형)이다. 장안령(長安令-경조군 장안현의 현령)을 역임했다. 일찍이 하간(河間)의 장초(張超)가 태위 주준(朱俊)에게 원유를 추천했는데, 그를 칭찬하며 말했다, 

“관세지의(冠世之懿-출중하게 훌륭함)와 간시지량(幹時之量-시대에 부합하는 기량)을 갖추었으며 그 충윤(忠允-충성스럽고 공정함), 양직(亮直-마음이 밝고 곧음)함은 실로 하늘이 내린 바입니다. 만약 재적(載籍-서적)을 포괄하여 망라한다면 백씨(百氏-제자백가)에 통달하고 등고능부(登高能賦-높은 곳에 오르며 능히 부를 지음)하며 도물지명(睹物知名–사물을 보고 이름을 알다?)할 것이니 오늘날 찾아보매 누구도 비견될 자가 없습니다.” 

이 일은 장초집(張超集)에 있다. 

/ [영웅기] – 그 뒤 원소는 원유를 양주(揚州)자사로 삼았는데 원술에게 패했다. 

/ 태조가 칭찬하기를 ‘장대(長大)하면서 능히 학문에 부지런한 자는 오직 나와 원백업(袁伯業) 뿐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문제(文帝-조비)의 전론(典論)에 있다.
 
[21] 포신(鮑信)의 일은 그 아들인 포훈(鮑勛)의 전(傳)에 보인다. (※ 삼국지 권12 포훈전)
 
2월, 동탁은 (원소 등이) 군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천자를 옮겨 장안에 도읍했다. 

동탁은 낙양에 남아 주둔하며 궁실(宮室)을 불태웠다. 이때 원소는 하내(河內)에, 장막, 유대, 교모, 원유는 산조(酸棗-진류군 산조현)에, 원술은 남양(南陽-형주 남양군)에, 공주는 영천(潁川-예주 영천군)에 주둔하고 있었고 한복은 업(鄴-기주 위군 업현)에 있었다. 동탁군이 강하여 원소 등은 감히 앞장서서 진군하지 못했다. 
 
태조가 말했다, 

“의병을 일으킨 것은 폭란(暴亂)을 징벌하고자 한 것이오. 대군이 이미 모였는데 제군들은 어찌 의심하시오?  만약 동탁이 산동병(山東兵)이 봉기했다는 것을 듣고 왕실의 중함에 의지하고 이주(二周-서주와 동주; 장안과 낙양)의 험고함에 기대어 동쪽으로 향해 천하에 임했다면 비록 무도(無道)하게 이를 행했다 하더라도 족히 근심거리가 되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겁박해 천도해서 해내(海內-천하)가 진동하여 돌아갈 곳을 모르니 이는 하늘이 그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오.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를 평정할 수 있으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장차 성고(成皐-하남군 성고현)를 점거하려 했다. 장막이 장수 위자(衛茲)에게 군사를 나누어 주어 태조를 뒤따르게 했다. 

형양(滎陽-하남군 형양현)의 변수(汴水-황하의 지류)에 도착해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과 조우하여 싸웠으나 불리(不利)하여, 죽거나 다친 사졸들이 매우 많았다. 태조는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타고 있던 말이 상처를 입었는데, 종제(從弟)인 조홍(曹洪)이 태조에게 말을 주어 밤중에 달아날 수 있었다. 서영은 태조가 이끄는 군사가 적은데도 온종일 역전(力戰-힘써 싸움)하는 것을 보고 산조(酸棗)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고 여겨 또한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태조가 산조(酸棗)에 도착했는데, 여러 군의 군사가 10여 만에 이르렀으나 날마다 술을 내어 성대한 주연을 베풀며 진격하려 하지 않았다. 태조가 이를 질책하며 계책을 제시했다, 
 
“제군(諸君)들은 내 계책을 들어보시오. 발해(勃海-발해태수 원소)는 하내의 군사를 이끌고 맹진(孟津)에 임하게 하고, 산조(酸棗)의 제장들은 성고(成皐)를 지키며 오창(敖倉-형양 북서쪽에 있던 양식저장창고)을 점거하고 환원(轘轅), 태곡(太谷)을 틀어막아 험요지 전부를 제압하며(※환원, 태곡은 낙양 남동쪽의 요충지), 원장군(후장군 원술)은 남양의 군사를 이끌고 단(丹-남양군 단수丹水현), 석(析-남양군 석현)에 주둔하여 무관(武關)으로 들어가게 해 삼보(三輔-장안 일대)를 뒤흔드는 것이오. 

모두 보루를 높이고 벽을 깊게 파 더불어 싸우지 않으며, 의병(疑兵-속이는 군사)을 두어 천하에 형세를 과시하며 순(順)으로 역(逆)을 토벌한다면 가히 평정할 수 있소. 지금 군사가 의(義)로 일어났으나 의심을 품은 채 진격하지 않아 천하의 바람을 저버리고 있으니 삼가 생각컨대 제군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하오.” 

장막 등은 이 계책을 쓸 수 없었다.
 
태조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하후돈(夏侯惇) 등과 함께 양주(揚州)로 가서 모병하니 (양주)자사 진온(陳溫), 단양태수 주흔(周昕)이 군사 4천 여 명을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용항(龍亢-예주 패국 용항현)에 당도하자 사졸들이 다수 모반했다. [22] 질(銍-패국 질현), 건평(建平-패국 건평현)에 이르러 다시 군사 천 여 명을 모으고 진군하여 하내에 주둔했다.

[22] [위서] – 군사들이 모반하여 밤중에 태조의 장막을 불태우자 태조가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고 나머지가 모두 패하여 흩어지자 영(營)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반하지 않은 자는 5백 여 명이었다.

유대와 교모가 서로 미워하여 유대가 교모를 죽이고, 왕굉(王肱)으로 하여금 동군태수를 겸하게 했다.
 
원소는 한복과 함께 유주목 유우(劉 虞)를 황제로 세우려고 모의했는데 태조는 이를 거절했다. [23] 

[23] [위서] – 태조가 원소에 대답하며 말했다, 

“동탁이 죄를 지어 사해(四海)에서 난폭하자 우리가 대군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는데,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에 응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우리가 의(義)로써 움직였기 때문이오. 지금 어린 주인이 미약하여 간신들에게 제압당하였으나 창읍(昌邑-전한 초 창읍왕)과 같은 망국지흔(亡國之釁-망국의 허물)은 아직 없소. 그런데 하루아침에 바꾼다면 천하인 중 누가 안심하겠소? 제군들이 (유우를 향해) 북면(北面)한다면 나는 (황제를 향해) 서향(西向)하겠소.”

또한 원소가 일찍이 옥인(玉印-옥 도장) 하나를 얻었는데 태조와 함께 앉아 있는 자리에서 팔꿈치를 향해 들어 보였다. 이 때문에 태조가 그를 비웃고 미워했다. [24]
 
[24] [위서] – 태조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 말을 듣지 않겠소.” 

원소가 다시 사람을 보내 태조를 설득하며 말하길, 

“지금 원공(袁公)의 세력이 번성하며 군사가 강하고 2명의 아들이 이미 장성했으니 천하 군웅 중에 누가 원공에 비견되겠소?”

라고 했으나 태조는 응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더욱 원소를 바르지 않다 여기게 되고 그를 주멸(誅滅)할 뜻을 품었다.
 
초평 2년(191년) 봄, 원소와 한복이 마침내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 했으나 유우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름 4월, 동탁이 장안으로 돌아왔다.
 
가을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해 기주를 차지했다. 
 
흑산적 우독(于毒), 백요(白繞), 휴고(眭固) 등 10여 만 무리가 위군(魏郡-기주 위군), 동군(東郡-연주 동군)을 침략했다. 왕굉(王肱)이 이를 막지 못하자 태조가 군을 이끌고 동군(東郡)으로 들어가 복양(濮陽-동군 복양현)에서 백요를 격파했다. 이에 원소가 표를 올려 태조를 동군태수로 삼으니 동무양(東武陽-동군 동무양현)을 치소로 삼았다.
 
초평 3년(192년) 봄, 태조가 돈구(頓丘-동군 돈구현)에 주둔하자 우독 등이 동무양을 공격했다. 이에 태조가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산으로 들어가 우독 등의 본둔(本屯-본영)을 공격했다. [25] 

[25] [위서] – 제장들은 모두 응당 (동무양으로) 돌아가 구원해야 한다고 하자 태조가 말했다, 

“손빈(孫臏)은 조(趙)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魏)나라를 공격했고 경엄(耿弇)은 서안(西安-청주 제국 서안현)을 패주시키고자 하여 임치(臨菑-제국 임치현)를 공격했소. 적이 우리 군이 서쪽으로 간다는 말을 들으면 (본둔으로) 돌아올 것이니 무양의 어려움은 저절로 풀릴 것이오.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우리 군이 능히 그들의 본둔을 깨뜨릴 수 있고, 적은 결코 무양을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는 이를 실행했다.
 
(※ 참고 : [후한서] 경엄열전 중 – 이때 장보(張步)는 극(劇-청주 북해국 극현)에 도읍하고 있었다. 동생인 장람(張藍)에게 정병 2만을 이끌고 서안을 수비하게 하고 여러 군의 태수들을 합쳐 만 여 명으로 임치를 수비하게 했는데 (서안과 임치는) 서로 40리 떨어져 있었다.

 경엄은 두 성의 중간인 획중으로 진군했다. 경엄은 서안성이 비록 작으나 견고한데다 장람의 군사가 정예하였고, 임치가 겉으로는 비록 크나 실제로는 공략하기 쉬운 것을 보고 5일 후에 서안을 공격하라 명했다. 장람이 이 일을 듣고 밤낮으로 경계하며 지켰다. 

기일이 되어 밤중에 경엄은 제장들에게 침상에게 밥을 먹게 하고는 날이 밝자 임치성으로 진군했다. 호군 순량(荀梁) 등이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서안을 속히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경엄이 말했다, 

“그렇지 않소. 서안에서는 우리가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밤낮으로 대비했소. 임치에서는 우리가 불시에 당도하자 필시 크게 놀랐을 것이니 우리 군이 공격하면 하루 만에 임치성을 떨어뜨릴 수 있소. 임치가 함락되면 서안은 외로워지고 장람은 장보와 격절되어 필시 그 또한 달아날 것이니, 이것이 소위 하나를 공격해서 둘을 얻는 것이오. 

만약 서안을 먼저 공격하여 급히 함락하지 못한다면 견고한 성을 공격하느라 사상자가 필시 많을 것이오. 설령 함락한다 하더라도 장람은 군을 이끌고 임치로 달아나 세력을 합칠 것이니 허실을 보건대 우리 군이 적지에 깊이 들어온 셈이라 후에 군량을 수송할 길이 없으니 10일이 지나면 싸우지 않고도 곤란에 빠질 것이오. 제군들의 말은 좋은 의견이 아니오.” 

그리고는 임치를 공격해 반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입성하여 거점으로 삼았다. 장람이 이를 듣고 크게 놀라 마침내 군을 이끌고 극(劇)으로 달아났다. )

우독 등이 이 일을 듣고 (동)무양을 버리고 되돌아왔다. 태조는 휴고를 요격(要擊-도중에서 차단하여 공격함)하고 또한 흉노 어부라(於夫羅)를 내황(內黃-위군 내황현)에서 공격해 모두 대파했다. [26]
 
[26] [위서] – 어부라(於夫羅)는 (흉노) 남선우(南單于)의 아들이다. 중평(184-189) 중, 흉노병을 징발하자 어부라가 이들을 이끌고 한(漢)나라를 도왔다. 때마침 본국에 반란이 일어나 남선우를 죽이자 어부라는 마침내 그 군사들을 이끌고 중국(中國)에 머물렀다.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서하(西河)의 백파적(白波賊)과 합쳐 태원, 하내를 깨뜨리고 여러 군(郡)들을 약탈했다.
 
여름 4월, 사도 왕윤(王允)이 여포와 함께 동탁을 죽였다. 동탁의 장수 이각(李傕), 곽사(郭汜) 등이 왕윤을 죽이고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는 싸움에 져 동쪽으로 달아나 무관(武關)을 벗어났다. 이각 등이 조정을 농단했다.
 
청주 황건의 무리들 백만 명이 연주로 들어와 임성상(任城相-연주 임성국의 국상) 정수(鄭遂)를 죽이고 진로를 돌려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으로 들어왔다. 유대(劉岱)가 이를 공격하려 하자 포신(鮑信)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무리가 백만이라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떨고 사졸들은 투지가 없으니 대적할 수 없습니다. 적의 무리들이 서로 뒤따르는 것을 살펴보건대 군에 치중(輜重)이 없고 오로지 약탈로 조달하니, 군사들의 힘을 비축하여 먼저 굳게 지키는 것이 낫습니다. 만약 저들이 싸우고자 해도 싸우지 못하고 또한 공격하려 해도 공격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세력이 필시 흩어질 것이니, 그 후 정예병을 뽑아 요해지를 점거하고 들이친다면 가히 격파할 수 있습니다.” 
 
유대가 이를 따르지 않고 끝내 더불어 싸웠으나 과연 죽임을 당했다. [27] 

[27] [세어] – 유대가 죽고 난 후 진궁(陳宮)이 태조에게 말했다, 

“지금 주(州) 에 주인이 없고 왕명(王命)이 단절되었습니다. 저 진궁이 가서 주(州) 사람들을 설득케 하시고, 명부(明府-주목, 태수 등에 대한 존칭)께서는 뒤이어 와서 주목에 오르시어 천하를 거두는데 바탕으로 삼으십시오. 이는 패왕(霸王)의 업(業)입니다.” 

진궁이 (연주의) 별가, 치중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었는데 주(州)에 주인이 없소. 조동군(曹東郡-동군태수 조조)은 명세지재(命世之才-세상을 바로 잡을 인재)이니 만약 그 분을 맞아들여 주목으로 삼는다면 필시 생민들을 평안케 할 것이오.” 

포신 등이 또한 이를 옳다고 여겼다.

이에 포신은 주리(州吏-주의 관리) 만잠(萬潛) 등과 함께 동군으로 가서 태조를 맞이해 연주목을 겸하게 했다. 그리고는 진병하여 수장(壽張-동평국 수장현) 동쪽에서 황건적을 공격했다. 포신은 힘써 싸우다 전투 중에 죽었고 가까스로 이들을 격파했다. [28] 

[28] [위서] – 태조가 보기 천여 명을 이끌고 전지(戰地)를 시찰하다 갑자기 적의 둔영에 맞닥뜨려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죽은 자가 수백 명에 이르니 군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적이 뒤이어 전진했다.

황건은 도적이 된지 오래고 여러 차례 승세를 탔으므로 병사들이 모두 정예하고 사나웠다. 태조의 군사들은 구병(舊兵-오래된 군사)이 적고 신병(新兵)들은 제대로 훈련 받지 못했기에 전군이 모두 두려워했다. 태조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친히 장사(將士-장병)들을 순시하며 상벌을 분명히 권하니 군사들이 다시 기세를 떨쳤다. 그 기세를 이어 토격(討擊)하자 적들이 점차 꺾이어 물러났다. 이에 적이 태조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예전에 제남(濟 南)에서 신단(神壇)을 허물어뜨렸을 때는 그 도(道)가 중황태을(中黃太乙)과 같아 그대가 도를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 다시 미혹(迷惑)되었구려. 한(漢)의 운수가 이미 다하고 황가(黃家)가 설 것이니, 하늘의 대운(大運)은 군(君-그대)의 재능과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 

태조가 격서(檄書)를 읽고는 이를 꾸짖으며 욕했다. 여러 차례 항복할 길을 열어 보여 주고는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을 설치했다. 밤낮으로 어울려 싸워, 싸울 때마다 번번이 포로로 사로잡히자 이에 적들이 퇴주(退走)했다.

포신의 상(喪)을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자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포신의 형상처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곡(哭)을 했다. 황건적을 추격해 제북(濟北-연주 제북국)에 도착하자 (황건적들이) 항복을 청했다.
 
겨울, 항복해 온 병졸 30여 만과 남녀 백여만 명 중에서 정예(精銳)한 자를 거두어 청주병(靑州兵)이라 불렀다.
 
원술이 원소와 서로 틈이 벌어지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손찬은 유비를 고당(高唐-청주 평원군 고당현)에, 선경(單經)을 평원(平原-평원군 평원현)에, 도겸을 발간(發幹-연주 동군 발간현)에 주둔하게 하여 원소를 핍박했다. 태조가 원소와 만나 이를 공격해 모두 격파했다.
  
초평 4년(193년) 봄, 견성(鄄城- 연주 제음군 견성현)에 주둔했다. 형주목 유표(劉表)가 원술의 양도(糧道-군량 수송로)를 끊자 원술이 군을 이끌고 진류로 들어와 봉구(封丘-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고, 흑산적의 남은 무리와 어부라 등이 그를 도왔다. 원술은 장수 유상(劉詳)을 광정(匡亭)에 주둔하게 했다. 
 
태조가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그를 구원하니 더불어 싸워 대파했다. 원술은 봉구(封丘)로 물러나 지켰고 이에 봉구를 포위했는데 맞붙어 싸우기도 전에 원술은 양읍(襄邑-진류군 양읍현)으로 달아났다. 이를 추격하여 태수(太壽)에 당도하자 수로의 물을 터뜨려 성에 물을 끌어들였다. (원술은) 영릉(寧陵-예주 양국 영릉현)으로 달아났고 또다시 추격하자 구강(九江-양주 구강군)으로 달아났다. 
 
여름, 태조가 정도(定陶-제음군 정도현)로 환군했다. 하비의 궐선(闕宣)이 무리 수천 명을 모으고 천자(天子)를 자칭했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그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태산군의 화(華)현, 비(費)현을 차지하고 임성(任城)을 공략했다.
 
가을, 태조가 도겸을 정벌해 10여 성을 함락시켰으나 도겸은 성을 지킬 뿐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해, 손책이 원술의 명을 받아 장강을 건넜는데, 여러 해 만에 마침내 강동(江東)을 차지하게 되었다.
 
흥평(興平) 원년(194년) 봄, 태조가 서주(徐州)에서 돌아왔다. 당초 태조의 부친 조숭은 관직을 떠나 초(譙)로 돌아갔었는데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낭야(瑯邪)로 피난했다가 도겸에게 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태조는 원수를 갚기 위해 동쪽을 정벌한 것이다. [29]

[29] [세어] – 조숭은 태산군 화현(華縣)에 있었다. 태조가 태산태수 응소(應劭)에게 명해 집안사람들을 연주로 보내도록 했는데 응소의 군사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도겸이 은밀히 수천 기를 보내 그들을 붙잡았다. 조숭의 집안은 응소가 영접하는 것으로 생각해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 도겸의 군사가 도착하여 태조의 동생 조덕(曹德)을 문 가운데에서 죽였다. 조숭이 두려워하여 뒷담을 뚫어 먼저 그의 첩을 내보내려 했으나 첩이 비대하여 적시에 벗어나지 못했다. 조숭은 측간으로 달아났으나 첩과 함께 해를 입었고 온 집안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응소가 이를 두려워하여 관직을 버리고 원소에게로 갔다. 그 뒤 태조가 기주를 평정했을 때 응소는 이미 죽은 뒤였다. 

/ 위요(韋曜)의 [오서]吳書 – 태조가 조숭을 영접할 때 치중(輜重-짐수레)이 백 여 량이었다. 도겸은 도위 장개(張闓)를 보내 2백기를 이끌고 이를 호송하게 했다. 장개는 태산군의 화현, 비현 사이에서 조숭을 죽여 재물을 빼앗고는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태조는 이를 도겸의 허물로 돌리고 이 때문에 그를 정벌했다.
  
여름, 순욱(荀彧), 정욱(程昱)에게 견성을 지키게 하고 다시 도겸을 정벌하여 다섯 성(城)을 함락시키니 공략한 땅이 동해(東海-서주 동해군)에까지 이르렀다. 돌아오는 길에 담(郯-동해군 담현)을 지나는데 도겸의 장수 조표(曹豹)가 유비와 함께 담(郯) 동쪽에서 태조를 요격했다. 태조가 이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분(襄賁-동해군 양분현)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지나는 길에 잔륙(殘戮-살륙)한 곳이 많았다. [30]
 
[30] 손성(孫盛)이 말했다 – 무릇 죄악을 정벌하여 백성을 위로하는 것은 예로부터 아름다운 법도이다. 그러나 도겸의 죄로 말미암아 그 속부(屬部)를 잔륙한 것은 과오이다.
 
때마침 장막(張邈)이 진궁(陳宮)과 함께 여포(呂布)를 맞아들이자 군현들이 모두 호응했다. 순욱과 정욱은 견성을 보전하고 범(範-동군 범현), 동아(東阿-동군 동아현) 2현을 굳게 지키니 이에 태조가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여포가 당도하여 견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서쪽으로 가서 복양(濮陽)에 주둔했다. 
 
태조가 말했다,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 
 
그리고는 진군하여 여포를 공격했다. 여포가 출병하여 싸웠는데 먼저 기병으로 청주병을 공격했다. 청주병이 달아나 태조의 진영이 어지러워지자 (태조는) 말을 달려 불길을 벗어나다 말에서 떨어져 왼쪽 손바닥에 화상을 입었다. 사마 누이(樓異)가 태조를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하고 이끌고 빠져나왔다. [31] 

[31] 원위(袁暐)의 [헌제춘추]獻帝春秋 – 태조가 복양을 포위하자 복양의 대성(大姓)인 전씨(田氏)가 내통하여 태조는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문을 불태워 돌아갈 뜻이 없음을 보였는데, 싸움이 벌어지자 군이 패했다.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붙잡았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물었다, 

“조조는 어디에 있는가?” 

태조가 말했다, 

“황마(黃馬)를 타고 달아나는 자가 조조입니다.” 

이에 여포의 기병이 태조를 놓아주고는 황마를 탄 자를 뒤쫓았다. 성문의 불길이 여전히 거세었으나 태조는 불길을 뚫고 빠져나왔다.
 
(태조가) 둔영에 도착하기 전 제장들은 태조가 보이지 않자 모두 두려워했다. 이에 태조가 친히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속히 공구(攻具-공성 무기)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다시 여포를 공격하여 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 황충(蝗蟲-누리)이 일어 백성들이 크게 굶주리고 여포의 양식 또한 소진되니 각각 군을 이끌고 물러났다.
 
가을 9월, 태조가 견성으로 돌아갔다. 여포는 승씨(乘氏-연주 제음군 승씨현)에 이르러 그 현 사람인 이진(李進)에게 격파되자, 동쪽으로 가서 산양(山陽-연주 산양군)에 주둔했다. 이때 원소가 사람을 보내 태조를 설득하여 화친을 맺고자 했다. 태조는 이제 막 연주(兗州)를 잃었고 군식(軍食-군량)이 다하였으므로 이를 허락하려 했다. 그러나 정욱이 태조를 저지하니 이에 따랐다. 
 
겨울 10월, 태조가 동아(東阿)에 이르렀다.
 
이해, 곡식 1곡(斛)이 50여만 전에 이르렀고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이에 관원과 군사 중에 새로 모집한 자를 파(罷)했다. 도겸이 죽고 유비가 이를 대신했다.
  
흥평 2년(195년) 봄, 정도(定陶-제음군 정도현)를 습격했다. 제음태수 오자(吳資)가 남성(南城)을 지키니 함락시키지 못했다. (※ 태산군에 남성현이 있지만 지리적으로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그냥 보통명사로서 (정도현의) 남쪽 성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때마침 여포가 도착하자 또한 여포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여름, 여포의 장수 설란(薛蘭), 이봉(李封)이 거야(鉅野-연주 산양군 거야현)에 주둔했다. 태조가 이를 공격하자 여포가 설란을 구원했는데, 설란은 패하고 여포는 달아났고 마침내 진란 등을 참수했다. 
 
여포는 다시 동민(東緡-산양군 동민현)에서부터 진궁과 함께 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싸웠다. 이때 태조의 군사들이 적었는데 복병을 설치하고 기병(奇兵-기습부대)을 풀어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니[32] 여포는 밤중에 달아났다. 

[32] [위서] – 이때 군사들이 모두 보리를 수확하러 나가 있어 남아 있는 자는 천명도 안 되었고 둔영은 견고하지 못했다. 이에 태조가 부인(婦人)들에게 영을 내려 비(陴-성가퀴. 성 위에 쌓은 낮은 담)를 수비하게 하고 남아 있는 전군으로 여포에 맞섰다. 둔영 서쪽에 큰 둑이 있었는데 그 남쪽 숲이 매우 깊었다. 여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서로 말하기를,

 “조조는 속임수가 많으니 복병 가운데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고 하며 군을 이끌고 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 주둔했다. 다음 날 여포가 다시 오자 태조는 둑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군사는 둑 밖에 두었다. 여포가 점차 진격하자 영을 내려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싸움을 걸게 했다. 서로 맞부딪치자 복병들이 일제히 둑 위로 오르며 보기(步騎-보병과 기병)가 함께 진격하여 여포군을 대파하고 북과 수레를 노획했다. 여포군의 둔영에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태조는 다시 정도(定陶)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을 나누어 여러 현들을 평정했다. 여포는 동쪽으로 유비에게로 달아났는데, 장막은 여포를 뒤따르면서 동생인 장초(張超)에게 가속들을 이끌고 옹구(雍丘-진류군 옹구현)를 보전하도록 했다.
 
가을 8월, 옹구를 포위했다.
 
겨울 10월, 천자가 태조를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했다.
 
12월, 옹구가 무너지고 장초는 자살하였고 장막의 삼족을 멸했다. 장막은 원술에게로 가서 구원을 청하려다 그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연주가 평정되자 동쪽으로 진(陳-예주 진국)의 땅을 공략했다. 
 
이 해 장안에 난이 일어나 천자가 동천(東遷)했다. 조양(曹陽)에서 (이각군에게) 패하자 황하를 건너 안읍(安邑)으로 행차했다.
 
건안 원년(196년) 봄 정월, 태조군이 무평(武平-예주 진국 무평현)에 임하자 원술이 임명한 진상(陳相-진국의 국상) 원사(袁嗣)가 항복했다. 
 
태조가 장차 천자를 영접하려 하자 제장들 중에 간혹 의심하는(반대하는) 자가 있었으나, 순욱, 정욱이 권하자 조홍(曹洪)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천자를 영접하도록 했다. (그러나) 위장군(衛將軍) 동승(董承)이 원술의 장수 장노(萇奴)와 함께 험준한 곳을 막고 있었으므로 조홍은 진군할 수 없었다.
 
여남과 영천의 황건적 하의(何儀), 유벽(劉辟), 황소(黃邵), 하만(何曼) 등은 각각 그 무리가 수만에 이르렀는데, 처음에 원술에 호응했다가 다시 손견에 붙었었다. 2월, 태조가 진군하여 이를 토파(討破)하고 유벽, 황소 등을 참수하자 하의의 무리가 모두 투항했다. 천자가 태조를 건덕장군(建德將軍)으로 임명했다.
 
(※ 유벽(劉辟)을 참수했다고 하나 유벽은 이후 건안 5년 기사에도 버젓이 등장합니다. <연의>에서처럼 관도전투 때 원소에 호응해 유비와 함께 조조의 후방을 괴롭히죠. 혹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나 활동 지역이나 행적이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이 기사 글자의 오류로 생각됩니다)
 
여름 6월,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하고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졌다. 
 
가을 7월, 양봉(楊奉), 한섬(韓暹)이 천자를 모시고 낙양으로 돌아왔고, [33] 양봉은 따로 양(梁-예주 양국)에 주둔했다. 

[33] [헌제춘추]獻帝春秋 – 천자가 처음 낙양에 도착했을 때 성 서쪽에 있는 예전 중상시였던 조충(趙忠)의 저택으로 행차했다. 장양(張楊)에게 궁실을 수리하게 하고 이를 양안전(揚安殿)이라 명명했다. 8월, 황제가 (양안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침내 태조가 낙양에 당도해 경도(京都)를 호위하자 한섬은 달아났다. 천자가 태조에게 절월(節鉞)을 내리고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았다. [34] 

[34] [헌제기]獻帝紀 – 또한 사례교위(司隷校尉)를 겸했다

낙양이 잔파(殘破)되었으므로 동소(董昭) 등은 태조에게 허(許-예주 영천군 허현)에 도읍할 것을 권했다. 
 
9 월, 거가가 환원(轘轅)을 나와 동쪽으로 갔다. 태조를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무평후(武平侯)에 봉했다. 천자가 서쪽으로 천도한 이래 조정이 날로 어지러워지다 이때에 이르러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제도가 비로소 바로 세워졌다. [35]

[35] 장번(張璠)의 [한기]漢紀 – 당초 천자가 조양(曹陽)에서 패하여 황하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내려가려 하니 시중 태사령 왕립(王立)이 말했다, 

“지난 봄 이래 태백(太白-금성)이 우두(牛斗-별자리 28수에서 북궁 7수 중 우수와 두수)에서 진성(鎭星-토성)을 범하고 천진(天津)을 지났고, 형혹(熒惑-화성)이 또한 역행하여 북하(北河)를 지키니 이를 거슬러서는 안 됩니다.” 

이로 인해 천자가 끝내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지 않고 장차 지관(軹關) 동쪽으로 나가려 했다. 
 
왕립이 다시 종정(宗正) 유애(劉艾)에게 말했다, 

“예전에 태백이 천관(天關)을 지키며 형혹과 만났습니다. 금(金), 화(火)가 서로 만났으니 이는 혁명(革命)의 상(象)입니다. 한조(漢祚-한의 제위)는 끝났고 필시 진(晉), 위(魏)에서 흥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 뒤 왕립은 여러 번 황제에게 말하길, 

“천명(天命)에는 거취(去就-오고 감)가 있고 오행(五行)은 늘 번성하는 것이 아니니 화(火)를 대신할 것은 토(土)입니다. 한(漢)을 이을 자는 위(魏)이고 능히 천하를 평안케 할 자는 조(曹) 성(姓)입니다. 오로지 조씨(曹氏)에게 위임하십시오.”

라 했다. 공(公-조조)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왕립에게 말했다, 

“공(公-그대)이 조정에 충성하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천도(天道)는 심원(深遠)한 것이니 많은 말 하지 말기를 바라오.”
 
천자가 동쪽으로 향하자 양봉은 양(梁) 에서부터 이를 요격하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겨울 10월, 공(公-조조. 쭉 태조로 호칭하다가 헌제를 영접한 이때부터 공公으로 표기)이 양봉을 정벌하니 양봉은 남쪽으로 원술에게로 달아났고 마침내 양봉의 양(梁)에 있던 둔영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원소는 태위에 임명되자 그 반열이 공(公-조조)의 아래에 있음을 수치로 여겨 직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공(公)이 대장군 직을 고사(固辭-굳게 사양함)하고 원소에게 양보했다. 천자가 공(公)을 사공(司空), 행(行)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했다. 
 
이 해, 조지(棗祗), 한호(韓浩) 등의 의견을 채용해 처음으로 둔전(屯田)을 일으켰다. [36]
 
[36] [위서] – 황난(荒亂-기근)을 만난 이래 양곡이 부족했다. 제군(諸軍)이 함께 봉기하여 종세지계(終歲之計-한 해를 지탱할 계획)를 마련하지 못하고 굶주리면 도적질하고 배가 부르면 남은 곡식을 버리니 와해, 유리되어 적을 만나지 않고도 스스로 무너진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원소는 하북(河北)에 있었는데 그 군인들이 뽕나무와 그 열매를 먹었고, 원술은 강(江), 회(淮)에 있었는데 부들과 고둥을 먹었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주리(州里)가 쓸쓸해졌다. 공이 말했다, 

“무릇 나라를 바르게 하는 것은 군사를 강하게 하고 충분히 먹이는데 있다. 진(秦)나라는 농사를 급무로 해 천하를 아울렀고 효무제는 둔전으로 서역(西域)을 평정했으니 이는 선대의 좋은 본보기이다.” 

이해, 백성을 모집해 허현 아래에 둔전하여 곡식 백만 곡을 수확했다. 이에 주군(州郡)에서 전례에 따라 전관(田官)을 설치하고 각 소재지에 곡식을 쌓았다. 사방(四方)을 정벌하는데 군량 운반에 들이는 노고가 없어지니 마침내 뭇 적들을 멸하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다.

여포가 유비를 습격하여 하비를 차지하자 유비는 달아나 공에게로 왔다. 정욱(程昱)이 공(公)을 설득하며 말했다, 

“살펴보건대 유비는 웅재(雄才)가 있고 민심을 크게 얻었으니 끝내 남의 아래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공(公)이 말했다, 

“이제 바야흐로 영웅들을 거두어들일 때인데, 한 사람을 죽이고 천하인의 마음을 잃는 것이니 불가하오.” 

장제(張濟)가 관중(關中)에서 남양(南陽)으로 달아났다. 장제가 죽자 그 종자(從子-조카)인 장수(張繡)가 그 무리를 거느렸다. 
 
2년(197) 봄 정월, 공(公)이 완(宛-형주 남양군 완현)에 이르자 장수가 항복했는데 그 뒤 이를 후회하여 다시 모반했다. 공(公)이 더불어 싸웠으나 군이 패하고 날아온 화살에 맞았고, 장자(長子-큰 아들) 조앙(曹昂), 제자(弟子-동생의 아들. 즉 조카) 조안민(曹安民)이 해를 입었다. [37] 

[37] [위서] – 공(公)이 타고 있던 말의 이름은 절영(絶影)인데, 날아온 화살에 맞아 뺨과 다리에 상처를 입었고 아울러 공의 오른쪽 팔에도 화살이 적중했다. 

/ [세어] – 조앙(曹昂)이 말을 탈 수 없어 공에게 말을 바치니 공은 위험을 면했으나 조앙은 해를 입었다.

이에 공은 군을 이끌고 무음(舞陰-남양군 무음현)으로 돌아갔는데,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와서 노략질하자 공이 이를 격파했다. 장수는 양(穰-남양군 양현)으로 달아나 유표와 합쳤다. 
 
공(公)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수 등을 항복시켰으나 실수로 인질을 잡아 두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소. 내가 패한 이유를 알만 하오. 제경(諸卿)들은 이를 잘 살펴 지금 이후로 다시 패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리고 허도로 돌아왔다. [38] 

[38] [세어] – 옛 제도에 삼공(三公)이 군사를 거느리고 입견할 때에는 모두 극(戟)의 갈래를 목에 교차시키고 앞으로 나아갔다. 당초, 공이 장수를 토벌하려 하여 천자를 배알할 때 다시 이 제도를 부활시켰었다. 이후로 공이 다시는 조현(朝見)하지 않았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행군을 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 군사들이 모두 갈증에 시달리자 이렇게 말했다.

"저 앞에 매화나무 숲이 있는데, 매실이 많이 열렸으므로 갈증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군졸들이 그 소리를 듣고 입에서 침이 나와 물이 있는 곳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원술이 회남(淮南)에서 칭제(稱帝)하려 하며 사람을 보내 여포에게 고했다. 여포가 사자를 붙잡고 그 서신을 (조정에) 올렸다. 원술이 노하여 여포를 공격했으나 여포에게 격파되었다. 
 
가을 9월, 원술이 진(陳-예주 진국)을 침략하자 공이 동쪽으로 가서 정벌했다. 원술이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군(軍)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인 교유(橋蕤), 이풍(李豊), 양강(梁綱), 악취(樂就)를 남겼다. 공이 도착하여 교유 등을 격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원술이 달아나 회수를 건넜다.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공이 무음(舞陰)에서 돌아온 후 남양(南陽), 장릉(章陵)의 여러 현들이 다시 모반하여 장수(張繡)에게 붙자 공이 조홍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으나 불리했다. 돌아와 섭현에 주둔했는데 여러 차례 장수와 유표의 침공을 받았다. 
 
겨울 11월, 공이 친히 남쪽으로 정벌하여 완에 도착했다. [39] 유표의 장수 등제(鄧濟)가 호양(湖陽-남양군 호양현)을 점거하니 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등제를 사로잡자 호양이 항복했다. 무음(舞陰)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39] 위서 – 육수(淯水-한수의 지류)에 임해 죽은 장사(將士-장병)들에 제사지냈는데,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자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고 애통해했다.
 
3년(198년) 봄 정월, 공이 허도로 돌아와 처음으로 군사좨주(軍師祭酒)를 두었다. 
 
3월, 공이 양(穰-남양군 양현)에서 장수(張繡)를 포위했다. 
 
여름 5월, 유표가 군사를 보내 장수를 구원하며 군(軍)의 배후를 끊고자 했다. [40] 

[40] [헌제춘추] – 원소를 배반한 병졸이 공에게로 와서 말했다, 

“전풍(田豐)이 원소에게 허도를 빨리 습격하라고 하면서 만약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면 가히 사해(四海)를 지휘해 평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에 공이 장수(張繡)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공이 군을 이끌고 퇴각하려 하는데 장수의 군사들이 추격해 와 공의 군이 전진할 수 없자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했다. 공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적이 와서 우리 군을 추격해 와 비록 하루에 몇 리 밖에 행군하지 못하지만 내가 헤아려 보건대 안중(安衆-남양군 안중현)에 도착하면 반드시 장수(張繡)를 격파할 수 있소.”
 
안중(安衆)에 도착하자 장수가 유표의 군사와 합쳐 험지를 지키니 공의 군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가을 7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순욱이 공에게 물었다,

“이전에 적을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공이 말했다, 

“적이 귀사(歸師-퇴각하는 군사)인 우리 군을 막아서서 사지(死地)에서 맞붙어 싸우니, 이로써 나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할 줄 알았소.” 
 
(※ 참고 : 손자병법 군쟁편 歸師勿遏, 圍師必闕, 窮寇勿迫 (귀사(歸師)는 막아서지 말고, 적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활로를 열어두고, 궁지에 몰린 적을 쫓지 말라)과 구지편(九地篇) 疾戰則存, 不疾戰則亡者, 爲死地…死地則戰 (맹렬히 싸우면 생존하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 곳이 사지다…고로 사지에서는 싸울 수밖에 없다)의 대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단순히 패하여 궤주하는 군사가 아니라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갖춰 퇴각하는 자신의 군사를 억지로 막아서며 더욱 궁지로 몰아넣으니 아군의 투지를 떨치게 해 승산이 있었다는 말 )
  
여포가 다시 원술을 위해 고순(高順)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게 했다. 공이 하후돈(夏侯惇)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불리했고, 유비는 고순에게 패했다. 
 
9월, 공이 동쪽으로 여포를 정벌했다. 
 
겨울 10월, 팽성(彭城-서주 팽성국)을 함락하고 팽성상(相) 후해(侯諧)를 사로잡았다. 진격하여 하비(下邳)에 이르니 여포가 친히 기병을 이끌고 역격(逆擊)했다. 이를 대파하고 여포의 효장(驍將-맹장)인 성렴(成廉)을 사로잡았다. 추격하여 성 아래에 도달하자 여포가 두려워하며 항복하고자 했다. 진궁(陳宮) 등이 이를 막으며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고 여포가 출전하도록 권하니, 출전하여 싸웠으나 또 패했다. 이에 성으로 돌아가 굳게 지키니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때 공이 연달아 싸워 사졸들이 피폐해졌으므로 돌아가려 하다가, 순유(荀攸)와 곽가(郭嘉)의 계책의 써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의 물을 성에 끌어들였다. 한 달이 지나 여포의 장수 송헌(宋憲), 위속(魏續) 등이 진궁을 붙잡고 성을 들어 항복하니, 여포, 진궁을 사로잡아 모두 죽였다. 
 
태산의 장패(臧霸), 손관(孫觀), 오돈(吳敦), 윤례(尹禮), 창희(昌豨)가 각각 무리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여포가 유비를 격파하자 장패 등이 모두 여포를 좇았었다. 여포를 꺾고 장패 등을 사로잡자 공이 후하게 대접했는데, 마침내 청주(靑州), 서주(徐州)의 2주에서 바다에 가까운 곳을 맡기고 낭야(瑯邪), 동해(東海), 북해(北海)를 나누어 성양군(城陽郡), 이성군(利城郡), 창려군(昌慮郡)을 설치했다.
 
당초 공이 연주목이 되었을 때 동평(東 平)의 필심(畢諶)을 별가(別駕)로 삼았었는데, 장막이 모반하여 필심의 모친과 동생, 처자를 겁박했다. 공이 사례하며 그를 보내면서 말했다, 

“경의 노모가 저쪽에 있으니 가도 좋소.” 

필심이 머리를 조아리며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하니 공이 이를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여포가 격파되자 필심을 사로잡았는데 뭇 사람들이 필심에 대해 걱정하자 공이 말했다, 

“무릇 친자(親者-부모)에게 효도하는 자가 어찌 또한 군주에 충성하지 않겠는가! 내가 구하는 바다” 

이에 (필심을) 노상(魯相-예주 노국의 상)으로 삼았다. [41]
 
[41] [위서] – 원소가 오래전부터 전(前) 태위 양표(楊彪), 대장추 양소(梁紹), 소부 공융(孔融)과 틈이 벌어졌었는데, 공(公)으로 하여금 다른 과오를 들어 그들을 죽이게 했다. 공이 말했다, 

“지금 천하가 토붕와해(土崩瓦解-크게 무너짐)되고 영웅호걸들이 나란히 봉기해 군장을 서로 보좌(君長)함에 사람들이 원망을 품기도 하고 각자 자위지심(自爲之心)을 가지게 되니 이는 위아래가 서로 의심하는 때인 것이오. 비록 미워하는 마음 없이 대해도 오히려 두려움을 품고서 믿지 않는데, 만약 실제로 죽여 없앤다면 누군들 스스로 안전할 수 있겠소? 무릇 포의(布衣)에서 몸을 일으켜 진구(塵垢-먼지와 때) 사이에 있으며 용인(庸人-평범한 사람)에 의해 위해를 당하는데, 가히 그 원한을 이겨낼 수 있겠소! 고조께서 옹치(雍齒)에 대한 원한을 용서해 뭇 사람들을 안심시켰으니(※) 어찌 이 일을 잊겠소이까?” 

(※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후, 장량, 소하 등 큰 공신 20여 인을 봉하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봉상이 늦어지자 이에 군신들이 불만을 품었는데, 장량의 계책에 따라 평소 유방이 가장 미워했던 옹치(雍齒)를 제후로 봉하여 불만을 무마한 일이 있음.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 – 유후는 장량) 참고 )
 
원소는 공(公)이 겉으로는 공의(公義)에 의탁하지만 내심 실제로는 다른 뜻이 있다 생각하고 깊은 원망을 품었다. 

/신 송지가 생각건대, 양표 또한 일찍이 위무제(조조)에게 곤란을 겪어 거의 죽을 뻔 했고, 공융은 끝내 주멸(誅滅)됨을 면치 못했다. 어찌 먼저 그 같은 말을 해놓고 뒤에 이런 행동을 했단 말인가! 어려움은 앎이 아니라 행동에 있는 것이니, 실로 그러하구나. 
 
4년(199년) 봄 2월, 공(公)이 환군해 창읍(昌邑-연주 산양군 창읍현)에 이르렀다. 장양(張楊)의 장수 양추(楊醜)가 장양을 죽이자 휴고(眭固)가 양추를 죽이고는 그 무리들을 이끌고 원소에 붙어 사견(射犬-하내군 야왕현 일대)에 주둔했다.
 
여름 4월, 진군하여 황하에 임하고, 사환(史渙), 조인(曹仁)에게 황하를 건너 이를 공격하도록 했다. 휴고는 장양의 옛 장사(長史) 설홍(薛洪), 하내태수 무상(繆尙)을 남겨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영접하며 구원을 청하려 했다. 사환, 조인과 견성(犬城)에서 서로 조우해 교전하니 휴고군을 대파하고 휴고를 참수했다. 마침내 공(公)이 황하를 건너 사견(射犬)을 포위했다. 설홍, 무상이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하고 오창(敖倉)으로 환군했다. 위충(魏种)을 하내태수로 삼아 하북(河北)의 일을 맡겼다.
 
당초 공이 위충(魏种) 을 효렴으로 천거했었는데, 연주(兗州)가 모반하자 공이 말했다, 

“오직 위충 만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위충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공이 노하여 말했다, 

“위충이 남쪽으로 월(越)로 달아나지 않고 북쪽으로 호(胡)로 달아났을 것이니 너를 내버려두지 않으리라!” 

사견(射犬)을 함락시킨 후 위충을 사로잡자 공이 말했다, 

“오로지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다!“ 

이에 묶인 것을 풀어주고 그를 기용했다.
 
이때 원소는 공손찬을 병합하여 4개 주를 차지하고 군사는 10여 만으로, 장차 진군하여 허도를 공격하려 했다. 제장들이 원소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자 공이 말했다,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소. 뜻은 크나 지략이 부족하고 겉으로 사나운 척 하나 담력이 약하오. 질투심이 많고 각박해 위엄이 적고, 병사는 많으나 분획(分畫-부서와 임무의 구분)이 불분명하고, 장수들은 교만하여 정령(政令)이 통일되어 있지 않소. 비록 토지가 광대하고 양식이 풍족하나 오히려 우리에게 바치게 될 것이오.” 
 
가을 8월, 공이 여양(黎陽)으로 진군하여, 장패 등에게 청주로 들어가 제(齊), 북해(北海), 동안(東安)을 격파하게 하고 우금을 남겨 황하 가에 주둔시켰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오면서 군을 나누어 관도(官渡)를 지키게 했다.
 
겨울 11월, 장수(張繡)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자 열후에 봉했다.
 
12월, 공이 관도에 주둔했다.
 
원술은 진(陳) 에서 패한 이후로 점차 곤궁해지자 원담(袁譚)이 청주(靑州)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맞이했다. 원술이 하비를 통해 북쪽으로 가려 하자 공이 유비(劉備), 주령(朱靈)을 보내 이를 요격하게 했다. 때마침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정욱, 곽가가 공(公)이 유비를 보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말했다, “유비를 놓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이에 공이 후회하고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유비는 동쪽으로 가기 전에 은밀히 동승(董承) 등과 함께 모반했었는데 하비에 도착하자 마침내 서주자사 차주(車冑)를 죽이고 거병(擧兵)해 패(沛)에 주둔했다. 유대(劉岱), 왕충(王忠)을 보내 이를 공격케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42]

[42] [헌제춘추] - 유비가 유대 등에게 말했다, 

“설령 너희 같은 자 백 명이 온다 한들 나를 어찌 대적하겠느냐. 조공(曹公)이 직접 온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 [위무고사]魏武故事 – 유대(劉岱)의 자는 공산(公山)이고 패국 사람이다. 사공(司空) 장사(長史)로 정벌전을 수행해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 

/ [위략] 魏略 – 왕충(王忠)은 부풍 사람으로 젊어서 정장(亭長)을 지냈다. 삼보(三輔)에 난이 일고 기근이 들자 왕충은 사람을 잡아먹었고, 무리들을 뒤따라 남쪽으로 무관(武關)으로 향했다. 누자백(婁子伯-누규)이 형주(荊州)를 위해 사람을 보내 북방의 객인(客人)들을 영접하려 할 때 왕충은 가지 않으려 했고 이에 그 무리들이 거꾸로 들이쳐 그 군사들을 빼앗고 천 여 명의 무리를 모아 공(公)에게 귀부했다. 왕충을 중랑장으로 삼아 정토(征討)하는데 뒤따르게 했다. 오관장(五官將)이 왕충이 일찍이 사람을 잡아먹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문에 거가가 출행하는 것을 수행할 때 광대(俳)를 시켜 무덤 사이에서 해골을 가져와 왕충의 말안장에 매달게 해 웃음거리로 삼았다.

여강(廬江)태수 유훈(劉勳)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자 열후로 봉했다.

5년(200년) 봄 정월, 동승(董承) 등의 모의가 누설되어 모두 복주(伏誅-형벌을 받아 주살됨)되었다. 
 
공이 장차 친히 동쪽으로 유비를 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공과 천하를 다투는 자는 원소입니다. 지금 원소가 바야흐로 쳐들어오려 하는데 이를 내버려두고 동쪽으로 가시려 하니, 원소가 이를 틈타 우리 배후를 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공이 말했다, “무릇 유비는 인걸(人傑)이니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필시 후환이 될 것이오. [43] 

[43] 손성(孫盛)의 [위씨춘추]魏氏春秋 – 제장들에게 대답했다, 

“유비는 인걸이니 장차 과인(寡人)의 우환이 될 것이오.” 

/ 신 송지가 보건대, 사서에 기록된 말은 이미 다수 윤색되어 예전에 기재되어 서술된 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있고, 뒤에 지은 자가 또한 의도적으로 고쳐서 사실과 어긋나기도 하니 두루 까마득한 일이구나! 무릇 손성이 책을 지을 때 많은 부분에서 좌씨(左氏-좌씨전)를 채용해 원래 글을 고쳤으니 이런 것이 비단 한 부분이 아니다. 아! 후학들이 장차 어떤 곳을 취하여 믿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위무(魏武-위무제)는 바야흐로 천하에 뜻을 떨치려 하는데, 부차(夫差)가 곧 죽을 운명에 처해서 했던 말을 쓰니 더더욱 그 그릇됨이 비할 바가 아니다.
 
(※ 손성이 춘추좌씨전 애공 20년 조(B.C 475년) 기사를 취해 조조의 말을 임의로 고쳐 놓았음을 지적하는 말. (必爲後患→將生憂寡人) 그 2년 뒤인 B.C 473년에 월왕 구천에 의해 오나라는 멸망하고 오왕 부차는 자결함 )

원소는 비록 뜻은 크지만 사세를 살피는 일에 더디니 필시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곽가 또한 공에게 권하자 마침내 동쪽으로 유비를 쳐서 깨뜨리고 유비의 장수 하후박(夏侯博)을 사로잡았다.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의 장수 관우는 하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다시 진격하여 공격하니 관우가 투항했다. 창희(昌豨)도 유비 편에 서서 모반했었으므로 또한 이를 공파(攻破)했다. 공이 관도(官渡)로 돌아왔고, 원소는 끝내 출병하지 않았다.

2월, 원소는 곽도(郭圖), 순우경(淳于瓊), 안량(顔良)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동군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고, 원소 자신은 군을 이끌고 여양(黎陽)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했다.
 
여름 4월, 공이 북쪽으로 가서 유연을 구원했다. 순유(荀攸)가 공을 설득하며 말했다, 

“지금 군사가 적어 대적할 수 없으므로 적의 세력이 분산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크게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들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이에 원소는 황하를 건너 공의 군대를 추격하여 연진(延津) 남쪽에 이르렀다. 공은 군을 이끌고 남쪽 둑 아래에 주둔하고 군사를 시켜 망루에 올라 살펴보게 하니 ‘가히 5-6백기는 된다.’고 보고했다. 얼마 후 다시 ‘기병은 점점 많아지고 보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공이 말하길, “다시 보고하지 마라”고 하고는 기병들에게 영을 내려 말안장을 벗기고 말을 풀어놓게 했다. 이때 백마에서 치중(輜重)이 길을 떠났다. 제장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니 돌아가 둔영을 보전하는 게 낫다고 하였다. 순유가 말했다, 

“이는 적을 유인하려는 것인데 어찌 되돌아간다는 말이오!”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

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

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져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 

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안량, 문추는 원소의 명장이었으나 두 번 싸워 모두 죽임을 당하니 원소군이 크게 진동했다. 

공은 관도(官渡)로 돌아와 주둔하고, 원소는 진군해 양무(陽武-하남군 양무현)를 지켰다. 관우가 달아나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8월, 원소가 둔영을 연결하며 점차 전진해 모래언덕에 의지해 둔영을 세웠는데 동서로 수 십리에 이르렀다. 공 또한 둔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하고 합전(合戰-맞붙어 싸움)했으나 불리했다. [44] 
`
[44]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 – 허유(許攸)가 원소를 설득하며 말했다, 

“공께서는 조조와 서로 공격하지 마십시오. 급히 제군(諸軍)을 나누어 대치하게 하고, 곧바로 다른 길을 따라 천자를 영접한다면 대사를 이룰 것입니다.” 

원소가 이에 따르지 않으며 말했다, 

“나는 응당 먼저 그를 포위한 뒤에 취해야 하오” 

이에 허유가 분노했다.

이때 공의 군사는 만 명을 채우지 못하고 부상당한 자가 열에 둘, 셋이었다. [45] 

[45] 신 송지가 보건대, 위무(魏武-위무제)가 처음 군을 일으켰을 때 이미 군사 5천이 있었고 그 후로 백전백승하고 패한 것은 열에 둘, 셋뿐이었다. 단지 황건적을 한번 격파하여 항복해 온 병졸만 30여 만이었고 나머지 병탄한 것은 일일이 기재하지 못할 정도다. 비록 정벌전에서 손상된 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처럼 적은 숫자일 수는 없다. 무릇 둔영을 연결해 서로 지키는 것은 적의 예봉을 꺾고 결전하는 것과는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본기(本紀-무제기)에서 원소의 군사가 10여 만이고 그 둔영이 동서로 수십 리에 이르렀다고 하니, 위태조(魏太祖-조조)가 비록 기변무방(機變無方-임기응변에 뛰어남)하고 지략이 불세출이라고 하나, 수천 군사로 어찌 이때에 서로 대치하는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었겠는가? 이치로 말하자면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원소가 수십 리에 걸쳐 둔영을 세우자 공 또한 능히 둔영을 나누어 서로 대치했으니,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원소에게 만약 10배의 군사가 있었다면 이치상 응당 전력을 기울여 수비하며 출입을 단절해야 하나, 공은 서황 등을 보내 원소군의 군량운반 수레를 공격케 했다. 공 또한 친히 출전하여 순우경 등을 공격하고 깃발을 휘날리며 돌아오는데 일찍이 저지된 일이 없었다는 것은 원소의 역량으로 능히 제압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니,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여러 책에서 이르길 공이 파묻은 원소의 군사가 8만 또는 7만이라고 한다. 무릇 8만 명이 흩어져 달아나는데, 이들을 8천 명으로 능히 포박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원소의 대군이 모두 순순히 죽임을 당했으니 어떤 역량으로 그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런 군사가 심히 적을 수 없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다. 

기술하는 자가 적은 숫자를 적어 (위무제의) 뛰어남을 보이려 한 것이지, 실록(實錄-실제에 부합하는 기록)은 아니다. 종요전(鍾繇傳)에서 ‘공이 원소와 서로 대치할 때 사례(교위)인 종요가 말 2천 여 필을 보내 군에 공급했다’고 했다. 본기(→무제기)와 [세어]가 아울러 공이 이때 기마 6백 여 필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종요가 보낸 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원소가 다시 진격해 관도(官渡)에 임하여 토산(土山)을 세우고 땅굴을 팠다. 공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둔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이때 공의 군량이 적어 순욱(荀彧)에게 서신을 보내 허도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말했다, 

“원소는 모든 군을 관도에 집결시켜 공과 더불어 승패를 결정하고자 합니다. 공은 지극히 약한 것으로 지극히 약한 것을 감당해야 하는데, 만약 이를 능히 제압하지 못한다면 필시 저들이 이를 틈탈 것이니 이는 천하를 가름하는 관건입니다. 게다가 원소는 포의지웅(布衣之雄-평범한 사내)으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일에는 능하나 그들을 제대로 쓰지는 못합니다. 무릇 공께서는 신무명철(神武明哲)을 지니고 대순(大順)으로 보좌하는데,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공이 이 말에 따랐다.
 
손책은 공(公)이 원소와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허도를 기습할 것을 모의했으나, 출발하기 전에 자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여남의 항복한 적 유벽(劉辟) 등이 모반하여 원소에 호응하고 허도 주변을 공략했다. 원소가 유비를 도내 유벽을 돕게 하자 공이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격파했다. 유비는 달아났고 마침내 유벽의 둔영을 깨뜨렸다. 

원소의 군량운반 수레 수천 승이 도착하자 공(公) 은 순유(荀攸)의 계책을 써서 서황(徐晃), 사환(史渙)을 보내 이를 요격해 대파하고 수레를 모두 불태웠다. 공이 원소와 서로 대치한 지 여러 달이 되어 비록 전투를 치루고 적장을 베었으나 군사는 적고 군량은 소진되어 사졸들이 피폐해졌다. 공이 군량을 운반하는 자들에게 말했다, 

“보름 안에 너희들을 위해 원소를 격파할 것이니 다시는 너희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 
 
겨울 10월, 원소가 수레를 보내 곡식을 운반하며 순우경(淳于瓊) 등 5명에게 군사 만여 명을 이끌고 가 이를 호송하게 하니 원소의 둔영 북쪽 40리 되는 곳에서 숙영했다. 원소의 모신(謀臣)인 허유(許攸)가 재물을 탐내었으나 원소가 이를 능히 충족해주지 못하자, 달아나 공에게로 와서 순우경 등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좌우에서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 가후(賈詡)는 공에게 (이를 따르도록) 권했다. 이에 공은 조홍(曹洪)을 남겨 수비하게 하고는 친히 보기 5천을 이끌고 밤중에 길을 떠나 날이 밝을 무렵 도착했다. 
 
순우경 등은 공의 군사가 적은 것을 멀리서 보고 진문(陳門) 밖으로 출진했다. 공이 급히 들이치니 순우경은 물러나 둔영을 지켰고, 다시 이를 공격했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순우경을 구원하게 했다. 좌우에서 어떤 이가 말했다, 

“적 기병이 점점 접근하니 군사를 나누어 맞서십시오.” 

공이 분노하며 말했다, 

“적이 등 뒤까지 오거든 그때 말하라!” 

사졸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순우경 등을 대파하고 모두 참수했다. [46] 

[46] [조만전] – 공은 허유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맨발로 나가 맞이했는데,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했다, 

“자원(子遠-허유의 자), 경이 왔으니 나의 일은 이루어지겠구려!” 

(허유가) 들어와 자리에 앉은 후 공에게 말했다, 

“원씨의 군이 강성하니 이를 어찌 대적하시렵니까? 지금 얼마의 군량이 있습니까?” 

공이 말했다, 

“가히 1년은 버틸 만하오.” 

허유가 말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다시 말씀해 보십시오!” 

공이 다시 말했다, 

“가히 반년은 버틸 만하오.” 

허유가 말했다, 

“족하(足下-귀하)는 원소를 깨뜨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찌 사실을 말하지 않습니까?” 

공이 말했다, 

“이제까지 말은 희언(戱言)이오. 실은 한 달 치 밖에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허유가 말했다, 

“공은 외로운 군대로 홀로 지키는데 외부의 구원은 없고 양곡마저 이미 다했으니 위급한 상황입니다. 지금 원씨의 치중(輜重) 만 여 승이 고시(故市), 오소(烏巢)에 있는데 주둔군이 엄중히 방비하지 않습니다. 경병(輕兵)으로 이를 습격하여 불시에 당도해 쌓아놓은 양곡들을 불살라 버린다면 사흘을 넘지 못하고 원씨는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공이 크게 기뻐했다. 
 
이에 정예보기를 뽑아 모두 원소군의 기치(旗幟-군기)를 갖추게 하고 함매(銜枚-재갈)를 말 입에 물린 채 밤중에 사잇길을 따라 출병했고 사람들은 땔나무를 지니고 갔다. 지나는 길에 묻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하길, 

“원공이 조조가 후군을 초략할까 두려워해 군사를 보내 방비를 늘린다.”

고 했다. 묻는 자들이 이를 그대로 믿고 모두 태연자약했다. 

도착한 후 둔영을 포위하고 큰 불을 놓으니 영내의 군사들이 놀라 어지러워졌다. 이를 대파하고 양곡, 보화들을 모두 불사르고 독장(督將) 휴원진(眭元進), 기독(騎督) 한거자(韓莒子), 여위황(呂威璜), 조예(趙叡) 등을 참수했다. 장군 순우중간(淳于仲簡-순우경의 자가 중간)은 코를 자르고 죽이지는 않았다. 사졸 천여 명을 죽여 그들 모두의 코를 자르고 소와 말은 입술과 혀를 잘라 이를 원소군에 보여주니 (원소군의) 장사(將士-장병)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했다. 밤에 중간(仲簡-순우경)을 만나 장차 휘하로 나아오게 하고자 했다. 공이 말했다, 

“어쩌다가 이같이 되었소?” 

중간이 말했다, 

“승부(勝負-승패)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무엇 하러 묻는단 말이오!” 

공이 죽이지 않으려는 뜻을 품었으나 허유가 말하길, 

“내일 아침 거울에 비쳐 보면 (코가 잘린 원한을) 더욱 잊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를 죽였다.
 
처음 원소가 공이 순우경을 공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자(長子)인 원담(袁譚)에게 말하길, 

“저들이 순우경 등을 공격하니, 나는 저들의 본영을 공격해 함락시켜 돌아갈 곳이 없도록 만들겠다!”

고 하고는, 장합(張郃), 고람(高覽)에게 조홍을 공격하게 했다. 장합 등은 순우경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투항했다. 원소군이 크게 무너져 내리니 원소와 원담은 군을 버리고 황하를 건너 달아났다. 이를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했고, 원소군의 치중(輜重)과 도서(圖書), 진보(珍寶-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47] 

[47]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 – 공이 상언했다, 

“대장군 업후(鄴侯) 원소(袁紹)는 예전에 기주목 한복과 함께 전 대사마 유우(劉虞)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금새(金璽)를 만들고 전 임장(任長-거록군 임현 현장) 필유(畢瑜)를 유우에게 보내 명록(命錄)하기를 수차례 설득했습니다. 

또한 원소는 신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길, ‘가히 견성(鄄城)에 도읍할 만하니 응당 옹립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제멋대로 금인(金印), 은인(銀印)을 주조하니 효렴(孝廉), 계리(計吏)들이 모두 원소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원소의) 종제인 제음태수 원서(袁敍)는 원소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길, 

‘지금 해내(海內)가 무너지고 하늘의 뜻이 실로 우리 가문에 있어 신령이 감응하는 징조가 있으니 마땅히 존형(尊兄)에게 달려있는데, 남형(南兄-남쪽에 있는 형, 즉 원술)의 신하들이 즉위하기를 권하자 남형이 말하길, 나이로 보아도 북형(北兄)이 더 많고 지위로 보아도 북형이 더 중하다고 하고 곧 옥새를 (존형에게) 보내려 했으나 때마침 조조가 길을 끊었다’

고 했습니다. 원소의 종족(宗族)은 누대에 걸쳐 나라의 중은(重恩)을 입었으나 흉역 무도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병마를 이끌고 관도에서 어울려 싸웠는데, 성조(聖朝-조정)의 위엄에 힘입어 원소의 대장 순우경 등 8명을 참수하고 마침내 그들을 대파하여 궤멸시켰습니다. 원소와 그 아들 원담은 가벼운 차림으로 함께 달아났고 참수한 것이 모두 7만 여 급이고 (노획한) 치중과 재물은 거억(巨億-거액, 거량)입니다.”

공이 원소의 서신을 거두었는데, 허도와 군중(軍中) 사람들의 서신을 얻자 이를 모두 불태웠다. [48] 

[48] [위씨춘추] – 공이 말했다,  “원소가 강성할 때는 나도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뭇 사람들이겠느냐!”

기주(冀州)의 여러 군(郡)들 중 성읍(城邑)을 들어 항복한 곳이 많았다.
 
당초 환제(桓帝) 때 황성(黃星)이 초(楚), 송(宋) 자리에서 보인 일이 있는데, 요동(遼東)의 은규(殷逵)가 천문에 밝아 이르길, ‘50년 뒤에 진인(眞人)이 있어 양(梁), 패(沛) 사이에서 일어날 것이고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했었다. (그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대략 50년이 흘러, 공이 원소를 격파하니 천하에 이를 대적할 자가 없었다.
 
6년(201년) 여름 4월, 황하 일대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倉亭)에 있던 원소군을 쳐서 깨뜨렸다. 원소는 돌아가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거두고 반기를 든 여러 군현들을 공격해 평정했다.
 
9월, 공이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격파되기 전 유비를 보내 여남을 공략하게 했었는데, 여남의 적(賊) 공도(共都) 등이 이에 호응했다. 채양(蔡揚)을 보내 공도를 공격했으나 불리했고 공도에게 격파 당했다. 공이 남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공이 친히 온다는 것을 듣고 유표에게로 달아났고 공도 등은 모두 흩어졌다.
 
7년(202년) 봄 정월, 공이 초(譙-조조의 고향인 패국 초현)에 주둔하며 영을 내렸다 (※군초령 軍譙令)
 
- 내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천하를 위해 폭란(暴亂)을 제거했으나, 옛 땅의 인민(人民)들은 거의 다 죽거나 다쳐 국(國) 안을 온종일 다녀봐도 아는 얼굴을 만나지 못했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로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장사(將士-장졸)들 중에 후사가 끊어진 자는 그 친척들을 찾아 후사를 잇게 하고 땅과 밭을 주고 관(官)에서는 농사에 쓸 소를 공급하고 학사(學師-학관, 교사)를 두어 그들을 가르쳐라. 후손이 남아있는 자를 위해서는 묘(廟-사당)를 세워주어 그 선인(先人)에게 제사지낼 수 있게 하라. 혼령이 있다면 우리 백년 뒤에라도 어찌 한스러워하겠는가!
 
그리고 준의(浚儀-진류군 준의현)로 가서 수양거(睢陽渠)를 수리하고, 사자를 보내 태뢰(太牢-모든 희생을 갖추어 쓰는 정중한 제사)로써 교현(橋玄)에게 제사지내도록 했다. [49] 

[49] 포상령(褒賞令)에 기재된 공(公)의 사문(祀文-제문)  
  
- 전 태위 교공(橋公-교현)은 밝은 덕을 크게 펴고 널리 사랑하고 포용하였으니, 나라에서는 (교공의) 밝은 가르침을 유념하고 선비들은 아름다운 지모를 그리워하오. 영(靈)은 저승에 있고 몸은 쓰러졌으니 멀리 사라졌구나! 내가 유년(幼年)에 당실(堂室)에 오른 것은, 특히 미련하고 비루했음에도 대군자(大君子-교현을 가리키는 듯)에 의해 용납된 덕분이오. 영광이 더해지고 더욱 드러나게 된 것은 모두 (교공의) 장려와 도움에 말미암았으니, 중니(仲尼-공자)가 안연(顔淵-안회)을 칭찬하고 이생(李生)이 가복(賈復)을 후하게 찬탄한 것이 오히려 이 일만 못했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으며, 이를 가슴에 품은 채 잊지 않는 법이오. 

※ 이생, 가복은 왕망 말 후한 초 인물. [후한서] 가복열전 중 – 이생은 가복을 높이 평가해 그의 문인들에게 이르길, “가군의 용모와 지기가 이와 같은데다 학문에 부지런하니 가히 장수나 재상의 그릇이다”고 했다. (李生奇之, 謂門人曰:「賈君之容貌志氣如此, 而勤於學, 將相之器也.」)
 
또한 차분하게 서약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길을 지날 때 말술과 한 쌍의 닭으로 술을 뿌리며 제사지내지 말라. 수레가 3보를 지나면 복통이 있을 것이니 괴이쩍게 여기지 말라!”

고 하였는데, 비록 그때에는 우스개삼아 한 말이지만 지친(至親)의 돈독함이 아니면 어찌 그런 말을 했겠소? 영(靈)이 분노한다고 하지 않고도 능히 자신이 근심하는 바를 전할 수 있었으니, 옛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슬플 뿐이오. 명을 받들어 동쪽을 정벌하다 향리에 머물며, 북쪽으로 귀토(貴土)를 바라보며 능묘(陵墓)를 그리워하오. 변변찮게나마 제사를 올리니 공께서는 상향(尙饗-‘제물을 받으시라’는 뜻으로 제문 끝에 쓰이는 관용구)하시라.

진군하여 관도에 주둔했다.
 
원소는 군이 격파된 이후로 병을 얻어 피를 토하다 여름 5월에 죽었다. 작은 아들 원상(袁尙)이 이를 대신했고, 원담(袁譚)은 거기장군을 자칭하며 여양(黎陽)에 주둔했다.
 
가을 9월, 공이 이를 정벌해 연달아 싸웠다. 원담, 원상이 여러 번 패하자 물러나 굳게 지켰다.
 
8년(203년) 봄 3월, 그 외성(郭)을 공격하자 (원담 등이) 출전했으나 이를 대파하니 원담, 원상은 밤중에 달아났다.
 
여름 4월, 업으로 진군했다.
 
5월, 허도로 돌아오며 가신(賈信)을 남겨 여양에 주둔하게 했다.
 
기유일, 영을 내렸다 (※ 패군령 敗軍令 or 엄패군령 嚴敗軍令)
 
- 사마법에서 ‘장군이 퇴각하면 사형에 처한다.’(將軍死綏)고 했으니 [50] 이 때문에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에 좌죄되지 않기를 빌었다. 

[50] [위서] - 綏(수)는 卻(각)이다. 한 척(尺)의 전진이 있어도 한 촌(寸)의 물러섬이 없다.

이는 옛 장수들은 군이 밖에서 패하면 안에서 그 집안이 죄를 받았다는 말이다. 장수들에게 정벌한 명한 이래 다만 공(功)에 대해 상을 내릴 뿐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국전(國典-나라의 전범)이 아니다. 출정을 명받은 제장들로, 패군(敗軍)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고 실리(失利)한 자는 관작(官爵)이 면탈될 것이다.[51]
 
[51] [위서]에 기재된 경신일의 령 (※ 중공덕령 重功德令 또는 논리사행능령 論吏士行能令)
 
- 의논하는 자들이 혹 군리(軍吏)가 비록 공이 있고 유능하다고 해도 덕행(德行)이 군국(郡國)에서 뽑혀 임무를 수행하는데 부족하다고 하니, 이른바 ‘함께 도(道)로 나아갈 수 있어도 함께 권도(權道)를 행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중(管仲)이 말하길, ‘현자(賢者)가 능력에 따라 녹을 받으면 윗사람이 존귀해지고 투사(鬪士)가 그 공(功)에 따라 녹을 받으면 (싸움에서)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되니, 이 두 가지를 나라에 세우면 천하가 다스려진다.’고 했다. 무능한 자와 싸우지 않는 군사가 모두 녹봉과 상을 받아 이로써 가히 공을 세우고 나라를 흥하게 했다는 것은 일찍이 듣지 못한 일이다. 이 때문에 명군(明君)은 공이 없는 신하에게 관직을 주지 않고 싸우지 않는 군사에게 상을 주지 않았으니, 천하를 평안하게 다스림에 덕행을 숭상하더라도 공과 재능에 상을 주었던 것이다. 논자들의 말은 모두 하나같이 대롱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管窺-좁은 식견을 비유) 듯 하도다.
 
※ 참고
1) 조괄(趙括)은 조(趙)나라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로, 적국의 이간책에 의해 염파를 대신해 장군으로 뽑혀 출전하지만 진(秦)나라의 백기에게 대패함(조군 40여 만이 학살당한 장평전투) 그가 출전하기 전 조괄의 모친이 조 효성왕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아들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조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연루되어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부탁함. 사기 권81 염파/인상여 열전 참조

2) 논어 자한편 :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여기서 권(權-권도)은 상도(常道)에 맞서는 말로, 경중을 따져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

3) 관자-법법(法法)편 : 使賢者食於能,鬥士食於功。賢者食於能,則上尊而民從;鬪士食於功,則卒輕患而傲敵. 上尊而民從,卒輕患而傲敵,二者設於國,則天下治而主安矣.
 
가을 7월, 영을 내렸다 (※ 건학령建學令 or 수학령脩學令)
 
- 상란(喪亂-전란) 이래 15년이 흘러 뒤에 태어난 자는 인의예양(仁義禮讓)의 기풍을 보지 못했으니 내가 이에 심히 상심하는 바이다. 이에 군국(郡國)에 영을 내리는 바, 각각 문학(文學)을 닦고 5백 호 이상의 현에는 교관(校官)을 두고 그 향(鄕)의 준조(俊造-준재)를 뽑아 교학(敎學)하도록 하라. 선왕(先王)의 도를 폐하지 않는다면 천하에 이로움이 있으리라.
 
8월, 공이 유표(劉表)를 정벌하여 서평(西平-예주 여남군 서평현)에 주둔했다. 공이 업을 떠나 남쪽으로 가자 원담과 원상이 서로 기주(冀州)를 다투었는데, 원담은 원상에게 패해 달아나 평원(平原)을 보전했다. 원상의 공격이 급해지자 원담은 신비(辛毗)를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제장들이 모두 이를 의심했으나 순유(荀攸)가 권하니 공이 이를 허락했다. [52] 이에 공이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52] [위서] – 공이 말했다, 

“내가 여포를 공격할 때 유표는 침범하지 않았고 관도전투 때에도 원소를 돕지 않았으니 유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自 守之賊)에 불과하므로 의당 뒷날 도모해야한다. 원담, 원상은 교활하니 마땅히 그들이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야 한다. 설령 원담이 간사한 마음을 품고 있어 끝내 항복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상을 격파하고 그 땅을 거두어들인다면 이로움이 절로 많을 것이다.” 

이에 (원담의 구원요청을) 허락했다.
 
겨울 10월, 여양(黎陽)에 이르러 아들 조정(曹整)과 원담의 딸을 결혼시켰다. [53] 

[53] 신 송지가 보건대, 원소가 죽고 이때에 이르기까지 다섯 달이 흘렀을 뿐이다. 원담이 비록 집안을 나와 백부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하더라도, 원소를 위해 3년 상을 치르지 않고 다시 아내를 맞이해 길례를 치르는 것은 도리에 어그러진 일이다. 혹 위무제가 임기응변으로 약속하길, ‘지금 결혼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올해 성례를 치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원상은 공이 북쪽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으로 돌아갔다. 동평(東平)의 여광(呂曠), 여상(呂翔)이 원상에 반기를 들어 양평(陽平-연주 동군 양평현)에 주둔했는데, 그 무리들을 이끌고 투항해오자 열후로 봉했다. [54]

[54] [위서] – 원담은 포위가 풀리자 은밀히 장군의 인수(印綬)를 여광에게 주었다. 여광이 받은 인수를 보내자 공이 말했다, 

“나는 원담에게 작은 계책이 있을 줄 알았다. 나로 하여금 원상을 공격하게 하고는 그 틈에 백성들을 노략해 무리들을 모으고 원상이 격파되면 가히 스스로 강성해져 내가 피폐해진 것을 틈타려는 것이다. (그러나) 원상이 격파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강성하니 무엇을 틈탈 수 있겠는가?”
 
9년(204년) 봄 정월, 황하를 건너고, 기수(淇水)를 막아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양도(糧道-군량수송로)를 통하게 했다.
 
2월, 원상이 다시 원담을 공격하며 소유(蘇由), 심배(審配)를 남겨 업(鄴)을 지키게 했다. 공이 진군해 원수(洹水-강이름)에 당도하자 소유는 항복했다. 도착한 후 업을 공격했는데 토산과 땅굴을 만들었다. 무안장(武安長-위군 무안현의 현장) 윤해(尹楷)가 모성(毛城)에 주둔하며 상당(上黨-병주 상당군)으로 양도(糧道)가 통하게 했다.
 
4월, 조홍(曹洪)을 남겨 업을 공격하게 하고, 공은 친히 군을 이끌고 윤해를 공격해 깨뜨린 후 돌아왔다. 원상의 장수 저곡(沮鵠)이 한단(邯鄲-기주 조국趙國 한단현)을 수비하니 [55] 또한 이를 공격해 무너뜨렸다. 

[55] 沮의 발음은 菹, 하삭(河朔) 사이에 지금도 이 성(姓)을 쓰는 이들이 있다. 저곡은 저수(沮授)의 아들이다.

역양령(易陽令-조국 역양현의 현령) 한범(韓範)과 섭장(涉長) 양기(梁岐)가 현을 들어 항복하니 이들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5월, 토산과 땅굴을 허물어버리고, 성을 둘러싸는 참호를 파고 장수(漳水)를 터뜨려 성 내로 끌어들이니, 성 중에 굶은 죽는 자가 절반을 넘었다.
 
가을 7월, 원상이 돌아와 업을 구원하자 제장들이 모두 이르길, 

“이들은 귀사(歸師-퇴각하는 군사)라서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피하는 것이 낫습니다.”

고 했다. 공이 말했다, 

“원상이 큰 길을 따라 온다면 응당 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서쪽 산을 따라 온다면 사로잡을 수 있다” 
 
원상이 과연 서쪽 산을 따라 와서 부수(滏水) 에 임해 둔영을 세웠다. [56] 

[56] [조만전] – 척후병을 여러 부(部)의 앞뒤로 보내 살피게 했는데 모두 말하길, 

‘서쪽 길을 따라왔고 이미 한단에 있다’

고 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제장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기주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오. 제군들은 이를 아시오?” 

모두 

“모릅니다.”

고 하자 공이 말했다, 

“제군들도 오래지 않아 알게 될 것이오.”

밤중에 군사를 보내 포위망을 침범하자 공이 역격(逆擊)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그 둔영을 포위했다. 어울려 싸우기 전에 원상이 두려워하여 전 예주자사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공이 이를 허락치 않고 포위를 더욱 급하게 했다. 원상은 밤중에 달아나 기산(祁山)을 보전했고 공이 이를 추격했다. 원상의 장수 마연(馬延), 장의(張顗) 등이 (공의) 진(陳)으로 와서 항복하자 원상군이 크게 허물어졌고 원상은 중산(中山-기주 중산국)으로 달아났다. 원상의 치중을 모두 노획하고 원상의 인수(印綬), 절월(節鉞)을 얻어 원상으로부터 항복한 자들을 시켜 그의 집안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성안의 사람들이 무너지고 기가 꺾이었다.
 
8 월, 심배의 형 심영(審榮)이 자신이 수비하던 성의 동문(東門)을 열어 군사들을 안으로 들였다. 심배가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심배를 사로잡아 참수하고 업을 평정했다. 공이 원소의 묘에 임해 제사를 지내고 곡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원소의 처를 위로하고 그 가인(家人)들과 보물을 되돌려 보내고, 잡다한 비단과 솜을 내리고 관에서 양식을 공급하도록 했다. [57]

[57] 손성이 말했다 - 옛 선왕(先王)들은 주상(誅賞-형벌과 포상)을 행해 장차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하여 길이 본보기로 삼았다. 원소는 당세의 어려움과 위태로움에 의거해 마침내 역모(逆謀)를 품고 위로는 신기(神器-제왕의 지위)를 의논하고 아래로는 국기(國紀)를 범했다. 제사를 (함부로) 올려 집안을 더럽히는 것은 옛 제도인데, 역신(逆臣)의 무덤에서 극진히 애도하고 탐욕스런 집안에 은혜를 더해 주었으니 위정(爲政)의 도가 여기에서 무너졌구나. 무릇 원망을 숨기고 벗을 사귀는 것은 옛 현인(前哲)들이 부끄러워하던 바이고 세참구관(稅驂舊館)() 하는 뜻은 헛되이 눈물 흘리지 않는 것인데 실로 도에 어그러져 끊어짐에 기뻐하면서 어찌 곡을 한단 말인가! 옛날 한고조가 항씨(項氏-항우)에게 한 실수를 위무제도 답습해 좇았으니 어찌 백려일실(百慮一失-백가지 생각 중에 한 가지 실수)이 아니겠는가!
 
(※ 세참구관(稅驂舊館)-참마를 구관에 풀어놓는다. [예기]에 보면, ‘구관의 어떤 이가 죽자 공자가 이를 조문하여 곡하고 나와서 참마(곁마)를 풀어 부의금으로 주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입니다 )
 
당초 원소가 공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을 때 원소가 공에게 물은 적이 있다. 

“만약 일이 순조롭지 못하면 어느 방면이 가히 의거할만 하겠소?” 

공이 말했다, 

“족하(足下)의 뜻은 어떠하오?” 

원소가 말했다, 

“나는 남쪽으로 황하를 점거하고 북쪽으로 연(燕), 대(代)에 의지해 융적(戎狄)의 무리를 아우르고 남쪽을 향해 천하를 다툴 것이니 이리하면 대략 성공할 것이오.” 

공이 말했다, 

“나는 천하의 지모와 역량을 써서 도(道)로써 이를 제어할 것이니 어느 방면이든 가(可)하오.” [58]
 
[58] [부자]傅子 – 태조가 또 말했다, “탕왕과 무왕이 어찌 같은 땅을 근거로 했겠소? 만약 험고한 땅을 기반으로 삼는다면 기회에 응하여 능히 변화할 수 없소.” 
 
9월, 영을 내렸다, 

“하북은 원씨의 난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니 올해 조부(租賦)를 내지 말도록 하라.” 
 
호강(豪强-권세가)들이 겸병(兼幷)하는 것에 관한 법을 엄중히 하자 백성들이 기뻐했다. [59] 

[59] [위서]에 기재된 공(公)의 영(令) (※ 수전조령 收田租令)
 
- 나라나 집안이나 모두, 부족함이 아니라 균등하지 못함을 근심하며 가난함이 아니라 안정되지 못함을 근심하는 법이다. 원씨가 다스릴 때 호강(豪强)들이 마음대로 방종하게 하고 친척들이 겸병하게 하니, 하민(下民)들은 가난하고 힘이 없는데도 대대로 조부(租賦)를 내느라 가재(家財)를 팔아도 충분히 명에 응하지 못했다. 

심배(審配)의 종족(宗族)은 죄인을 숨겨주고 도망한 자들의 주인이 되었다. 백성들이 친근하게 의지하기를 바라면서 갑병(甲兵)이 강성하니 어찌 가능하겠는가? 전조(田租)는 1무(畝-이랑)에 4승(升)을 거두고, 호(戶)당 비단 2필, 면 2근(斤)만을 내게 하며 달리 제멋대로 거두지 말라. 군국(郡國)의 태수와 상들은 이를 분명히 검찰(檢察)하고, 강민(强民)들이 숨기는 것이 없게 하고, 약민(弱民)들이 부(賦)를 겸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

천자가 공을 영(領-겸직의 의미) 기주목(冀州牧)으로 임명하자 공이 연주목은 반납했다. 
 
공이 업을 포위했을 때 원담이 감릉(甘陵), 안평(安平), 발해(勃海), 하간(河間)을 공략하여 차지했다. 원상이 패하여 중산(中山)으로 물러나자 원담이 이를 공격했고, 원상이 고안(故安-유주 탁군 고안현)으로 달아나자 (원담이) 그 무리를 아울렀다. 공이 원담에게 서신을 보내, 약속을 어긴 것을 꾸짖으며 혼인관계를 끊었고, 딸을 (원담에게로) 돌려보낸 뒤 진군했다. 원담이 이를 두려워하여 평원을 함락했다가 물러나 남피(南皮)를 지켰다. 
 
12월, 공이 평원으로 입성하고 여러 현들을 공략해 평정했다.
 
10년(205년) 봄 정월, 원담을 공격해 격파하고 원담을 참수하고 그 처자를 죽이니 기주가 평정되었다. [60] 

[60] [위서] – 공이 원담을 공격할 때 아침부터 시작해 한낮에 이르기까지 판가름 나지 않았다. 이에 공이 친히 북채와 북을 잡자 사졸들이 모두 분발했고 이때에 응하여 적을 격파했다.

하령(下令)하기를, 

“원씨와 함께 악을 저지른 자도 더불어 경시(更始-고쳐서 다시 시작함)하도록 하라”

고 했다. 백성들이 사사로이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고, 후장(厚葬-호화로운 장례)을 금하니 모두 법에 의거해 한결같이 하였다. 
 
그달에 원희(袁熙)의 대장 초촉(焦觸), 장남(張南) 등이 모반하여 원희, 원상을 공격하자, 원희, 원상은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에게로 달아났다. 초촉 등이 그 현을 들어 항복하자 열후에 봉했다. 
 
당초, 원담을 토벌할 때 얼음 깨는 일을 하지 않고 달아난 백성들이 있었는데 [61] 투항 해와도 받아들이지 말도록 영을 내렸다. 

[61] 신 송지가 보건대, 원담을 토벌할 때 하천과 수로의 물이 얼자 백성들에게 얼음을 깨어 배가 통하도록 했는데, 백성들이 이 노역을 꺼려서 도망한 것이다.

얼마 후 도망갔던 백성들이 군문으로 나아가 자수하자 공이 말했다, 

“너희들의 청을 들어주면 내가 영을 어기게 되고, 너희들을 죽이면 자수한 이를 죽이는 셈이 되는구나. 깊은 곳으로 돌아가 숨어서 관원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하라.”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났는데 그 뒤 결국 붙잡혔다.
 
여름 4월, 흑산적 장연(張燕)이 그 무리 10여 만을 이끌고 투항하니 열후에 봉했다. 고안(故安)의 조독(趙犢), 곽노(霍奴) 등이 유주자사, 탁군태수를 죽였다. 삼군의 오환이 광평(獷平)에서 선우보(鮮于輔)를 공격했다. [62] 

[62] 속한서(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따르면, 광평(獷平)은 현 이름이고 어양군(漁陽郡)에 속한다.
 
가을 8월, 공이 이를 정벌해 조독 등을 참수하고, 노하(潞河)를 건너 광평을 구원하자 오환이 새(塞) 밖으로 달아났다.
 
9월, 영을 내렸다 (※ 정제풍속령 整齊風俗令)
 
- 아첨하는 무리들이 파당을 짓는 것은 옛 성인들이 미워했던 일이다. 내가 듣기로, 기주(冀州)의 풍속은 아버지와 아들조차 부(部)를 달리하여 서로 비방한다고 한다. 옛날 직불의(直不疑-전한 초 인물)는 형이 없었으나 세인들은 그가 형수를 도둑질했다고 했고, 제오백어(第五伯魚-후한 초 인물인 제오륜第五倫)가 고아에게 세 번 장가들자 과부옹(撾婦翁-처를 강탈한? 노인)이라 했다. 왕봉(王鳳-왕망의 백부. 전한 때 대사마대장군으로 외척)이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자 곡영(穀永)은 그를 신백(申伯-주선왕 때 명신으로 외척)에 비유했고, 왕상(王商)이 충성스러운 말을 하자 장광(張匡)은 그가 도(道)를 그르친다고 했다. 이들 모두는 흰 것을 검은 것이라 하여 하늘을 기만하고 임금을 속인 것이다. 나는 풍속을 정제(整齊)하고자 하니 이런 네 가지 일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를 수치로 여길 것이다.
 
겨울 10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당초 원소는 생질인 고간(高 幹)을 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았었는데, 공이 업을 함락하자 고간이 투항했고 이에 고간을 (병주)자사(刺史)로 삼았다. 고간은 공이 오환을 토벌한다는 말을 듣고는, 주(州)를 들어 모반하여 상당태수를 붙잡고, 군사를 일으켜 호관구(壺關口)를 지켰다.
 
11년(206년) 봄 정월, 공이 고간을 정벌했다. 고간이 이를 듣고 그 별장(別將)을 남겨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흉노로 들어가 선우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선우는 거절했다. 공이 호관을 석 달 동안 포위해 함락했다. 이에 고간은 형주로 달아났으나 상락도위(上洛都尉) 왕염(王琰)이 그를 붙잡아 참수했다.
 
가을 8월, 공이 동쪽으로 해적(海賊) 관승(管承)을 정벌해 순우(淳于-북해국 순우현)에 도착했다. 악진, 이전을 보내 이를 격파하자 관승은 바다의 섬으로 달아났다. 동해(東海)군의 양분(襄賁), 담(郯), 척(戚)현을 떼어내 낭야(瑯邪)군에 더하고, 창려군(昌慮郡)을 없앴다. [63]

[63] [위서]에 기재된 10월 을해일의 영(令) (※ 구언령 求言令 or 구직언령求直言令)
 
- 무릇 세상을 다스리고 무리를 통어함에 보필할 자를 세울 때에는 면종(面從-보는 앞에서만 복종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시경]에서 칭하길, ‘내 계책을 들어서 쓴다면 큰 후회는 없을 것’(聽 用我謀, 庶無大悔)이라 했으니 이는 실로 군신(君臣)이 모두 간절히 구하는 바다. 내가 중임을 맡아 늘 실수할까 두려우나 해마다 좋은 계책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개연(開延-인재를 초빙하거나 언로를 염)하는데 부지런하지 못한 내 허물이겠는가? 지금 이후로 여러 연속(掾屬-속관)들과 치중, 별가는 매달 초에 잘못된 점을 진언하도록 하라. 내가 장차 읽어보리라. -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이 천하가 어지러워진 것을 틈타 유주(幽州)를 격파하고 한민(漢民-한나라 백성) 10여 만 호를 약탈해 소유했다. 원소는 그 추호(酋豪)들을 세워 선우(單于)로 삼고, 가인(家人)의 자식을 자기 딸로 삼아 그들에게 처로 주었다. 요서(遼西) 선우 답돈(蹋頓)이 특히 강성하여 원소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원상 형제들이 그에게 귀의했고 수차례 새(塞) 안으로 들어와 해를 끼쳤다. 
 
공이 이를 장차 정벌하고자 하여, 수로를 뚫어 호타(呼沱)로부터 고수(泒水)로 들어가게 하고 이를 평로거(平虜渠)라 명명했다. 또한 구하(泃河) 입구로부터 로하(潞河)로 들어가게 해 천주거(泉州渠)라 명명하고 바다로 통하게 했다. 
 
12년(207년) 봄 정월, 공이 순우(淳于)로부터 업으로 돌아왔다. 
 
정유일, 영을 내렸다 (※ 봉공신령 封功臣令)
 
- 내가 의병을 일으켜 폭란을 주살한 지 지금까지 19년이 흘렀는데, 정벌하여 반드시 이긴 것이 어찌 나의 공이겠는가? 이는 즉 현사(賢士) 대부(大夫)들의 공이다. 천하가 아직 모두 평정되지는 못했으니 나는 응당 현사 대부들을 맞아들여 함께 천하를 평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로를 나 혼자 누린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시급히 공을 정해 봉작을 행하도록 하라. -
 
이에 큰 공신 20여 인을 봉하여 모두 열후로 삼고, 그 나머지는 각각 순서대로 봉했으며, 전사한 자의 고아는 경중에 따라 각각 차등을 두어 보답했다. [64]
 
[64] [위서]에 기재된 공(公)의 영(令) (※ 분급제장령 分給諸將令 or 분조여제장연속령 分租與諸將掾屬令)
 
- 옛날 조사(趙奢), 두영(竇嬰)은 장수가 되어 천금을 하사받았는데, 하루아침에 이를 나누어주자 이 때문에 능히 큰 공을 세울 수 있었고 길이 명성을 남겼다. 내가 그 글을 읽고 일찍이 그 사람됨을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다. 여러 장사(將士) 대부(大夫)들과 함께 함께 융사(戎事-군사, 전쟁)에 종사함에, 현인에 의지해 그들의 계책을 쓰고 군사들은 있는 힘을 다했으니 이로써 험고함을 평탄케 하고 난을 평정했으나, 나만 큰 상을 홀로 차지하여 호읍(戶邑)이 3만에 이른다. 두영이 금을 나누어준 의로움을 추사(追思-추념)하여, 이제 내가 받은 조(租)를 제장, 연속(掾屬)들과 진(陳), 채(蔡)에서 복무했던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의 노고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큰 혜택을 나홀로 차지하지 않겠다. 순직한 자의 고아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전곡(租穀)을 줌이 마땅하다. 수확이 풍성해 쓰기에 부족함이 없고 조봉(租奉)이 모두 들어오면 장차 뭇 사람들과 더불어 크게 누리리라.
 
장차 북쪽으로 삼군의 오환을 정벌하려 하자 제장들이 모두 말했다, 

“원상은 도망간 적에 불과하고 이적(夷狄)들은 탐욕스러울 뿐 친애함이 없으니 어찌 원상이 이들을 능히 부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 깊이 들어가 정벌하면 유비가 필시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기습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고가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오직 곽가(郭嘉)만이 유표는 필시 유비를 신임하지 못하리라 헤아려, 공에게 원정하도록 권했다. 
 
여름 5월, 무종(無終-유주 우북평군 무종현)에 이르렀다. 
 
가을 7월, 큰 홍수가 나서 바다에 면한 길(傍海道)이 통하지 않았는데, 전주(田疇)가 향도(鄕導-길 안내자)가 되기를 청하자 공이 이를 따랐다. 군을 이끌고 노룡(盧龍)의 새(塞)를 나오니 새 밖의 길이 끊어져 통하지 않았다. 

이에 산을 파고 계곡을 메우며 500여 리를 가서 백단(白檀)을 거치고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정(鮮卑庭-선비족의 앞뜰, 영역이란 말로, 오환선비동이전에 의하면 당시 오원, 운중에서 동쪽으로 요수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선비정이라 부름)을 건너고 동쪽으로 유성(柳城)으로 향했다. (유성에 도착하기) 2백리 전에 적들이 이를 알아챘다. 원상, 원희는 답돈(蹋頓), 요서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과 함께 수만 기를 이끌고 맞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 올랐다가 졸지에 적과 조우했는데 그 무리들이 매우 많았다. 공의 거중(車重-치중)은 후방에 있고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좌우가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높은 곳에 올라 적의 진지가 정돈되지 못한 것을 보고는 이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며 장료(張遼)를 선봉으로 세웠다. 
 
적군이 크게 붕괴되니 답돈과 명왕(名王-관직명) 이하를 참수하고, 투항한 호인(胡人), 한인(漢人)이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요동 선우 속복환(速僕丸)과 요서, 우북평의 여러 호족들은 그 종인(種人-종족)들을 버리고 원상, 원희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났는데, 그 무리들이 수천 기에 이르렀다. 
 
당초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은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공이 오환을 격파하자 어떤 이가 공을 설득하기를, 끝까지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공이 말했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소.” 
 
9월, 공이 군을 이끌고 유성으로부터 돌아오자 [65] 공손강이 원상, 원희와 속복환 등을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다. 

[65] [조만전] – 이때 추위가 일찍 찾아왔고 2백리 간에 물이 없었으며 또한 군중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 말 수천 필을 죽여 양식으로 삼았는데, 땅을 30여 장 파서 물을 얻었다. 돌아온 뒤 이전에 (원정하지 말도록) 간언한 자에 관해 물으니, 뭇 사람들이 그 이유를 몰라 모두 두려워했다. 공이 이들 모두에게 후하게 상을 내리며 말했다, 

“내가 전에 원정을 행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란 것이오. 비록 성공했으나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니 상규로 삼을 수는 없소. 제군들이 간언한 것이 만안(萬安-만전)의 계책이었기에 이에 상을 내리니, 이후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말라.”

제장들이 혹 묻기를, 

“공이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고 하자 공이 말했다, 

“공손강은 평소 원상 등을 두려워했으므로, 내가 급히 공격하면 서로 힘을 합칠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서로 도모할 것이니, 형세가 그러했소.” 
 
11월, 역수(易水)에 이르자 대군(代郡) 오환의 행(行-대행의 의미) 선우 보부로(普富盧)와 상군(上郡) 오환의 행 선우 나루(那樓)가 그들의 명왕(名王)을 거느리고 와서 하례했다.
 
13년(208년)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와, 현무지(玄武池)를 만들어 주사(舟師-수군)를 조련했다. [66] 

[66] 肄는 以와 四의 반절음이다. 삼창(三蒼)에서 ‘肄는 習’이라 했다.

한(漢)나라에서 삼공(三公)의 관직을 폐지하고 승상(丞相), 어사대부(禦史大夫)를 두었는데, 여름 6월, 공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67]

[67] [헌제기거주] – 태상(太常) 서구(徐璆)를 시켜 즉시 인수(印綬)를 주게 했다. 어사대부는 중승(中丞-어사중승)을 거느리지 않고 장사(長史) 1인을 두었다. 
 
/ [선현행장]先賢行狀 – 서구(徐璆)의 자는 맹옥(孟玉)이고 광릉(廣陵) 사람이다. 젊어서 품행이 청상(淸爽-청아하고 시원스러움)했고 조정에 들어서는 정색(正色-엄중함)했다. 임성(任城), 여남(汝南), 동해(東海)의 3군을 역임하고(임성태수, 여남태수, 동해상) 가는 곳마다 교화를 행했다. 징소되어 돌아오려다 원술에게 겁박 당했다. 원술이 제호를 참칭하고 그에게 상공(上公)의 지위를 주려 했으나 서구는 끝내 이에 굴하지 않았다. 원술이 죽은 뒤 서구는 원술의 옥새를 얻어 한(漢) 조정에 바쳤고, 위위(衛尉), 태상(太常)에 임명되었다. 공이 승상으로 임명되자 그 지위(승상)를 서구에게 양보하려 했다.
 
가을 7월, 공이 남쪽으로 유표(劉表)를 정벌했다.
 
8월, 유표가 죽자 그 아들인 유종(劉代)이 대신해 양양에 주둔하고, 유비는 번(樊-양양성 북쪽의 한수 북쪽 연안)에 주둔했다.
 
9월, 공이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이르자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유입되는 입구)로 달아났다. 공이 강릉(江陵-형주 남군 강릉현)으로 진군하고, 형주의 관원과 백성들에 하령해 경시(更始-고쳐서 다시 시작함)하도록 했다. 
 
이 에 형주를 복종시킨 공을 논해 15명을 후(侯)로 봉하고, 유표의 대장인 문빙(文聘)을 강하(江夏)태수로 삼아 본래 군사들을 통솔하게 하고, 형주의 명사(名士)인 한숭(韓嵩), 등의(鄧義) 등을 발탁해서 임용했다. [68] 

[68] 위항(衛恆)의 사체서세(四體書勢)의 서(序) – 상곡(上谷)의 왕차중(王次仲)이 예서(隷書)를 잘 써서 처음으로 해법(楷法-본보기, 모범)이 되었다. 영제(靈帝)가 글쓰기(書)를 좋아하니 세상에는 이에 능한 자가 많았다. 그 중 사의관(師宜官)이 가장 나았는데, 자신의 능력을 심히 자랑스러워하여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찰(札-목간)을 깎고 불태우곤 했다. 이에 양곡(梁鵠)이 판(版)을 보태주고 술을 대접하면서 그가 술 취했는지를 살펴 그가 쓴 찰(札)을 훔쳐냈고, 열심히 연마하여 관직이 선부상서(選部尙書)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공(公-조조)이 낙양령이 되고자 했는데 양곡이 (공을) 북부위(北部尉)로 삼았다. 양곡은 그 후 유표에 의탁했다. 형주가 평정된 후 공이 양곡을 찾자 양곡이 두려워하며 스스로 결박하여 군문으로 나아갔다. 군가사마(軍假司馬-부部의 부관)로 서임했다가 비서(秘書-궁중의 도서를 관장하던 직책)에 두어 글을 관장하며 자효(自效-스스로 힘을 다해 노력함)하게 했다. 공이 일찍이 (양곡의 글씨를) 장막 안에 걸어두었다가 벽에다 못으로 박아두고 감상하며 사의관(師宜官)보다 낫다고 한 일이 있다. 

양곡의 자는 맹황(孟黃)이고 안정(安定) 사람이다. 위(魏)나라 궁전의 제서(題署-궁실의 기둥에 적은 글, 또는 현판에 부서명을 적은 것)는 모두 양곡이 쓴 것이다. 

주: <일사전> [[왕준전]]으로 분할

익주목 유장(劉璋)이 처음으로 징역(徵役-징발)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보내서 군에 공급했다.
 
12월, 손권이 유비를 위해 합비(合肥-양주 구강군 합비현)를 공격했다. 공이 강릉에서부터 유비를 정벌하여 파구(巴丘)에 이르렀고, 장희(張喜)를 보내 합비를 구원했다. 손권은 장희가 온다는 말을 듣고 이내 달아났다. 
 
공이 적벽(赤壁)에 이르러 유비와 더불어 싸웠는데 불리했다. 이때 큰 역병이 돌아 관원과 군사들 중 죽은 이가 많았으므로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유비가 마침내 형주(荊州)와 강남(江南-장강 남쪽)의 여러 군(郡)들을 차지했다. [69]
 
[69] [산양공재기] – 공의 선함(船艦-싸움배)이 유비에 의해 불태워지자 군을 이끌고 화용도(華容道)로부터 걸어서 귀환했는데, 진창을 만나 길이 통하지 않고 또한 하늘에선 큰 바람이 불었다. 지친 군사들까지 모두 풀을 짊어지고 진창을 메우게 하여 말이 지나갈 수 있었다. 지친 군사들 중에 말과 사람에게 밟히고 진창에 빠져 죽은 이가 매우 많았다. 군이 빠져나온 뒤 공이 크게 기뻐했다. 제장들이 묻자 공이 말했다,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부족하고 늦구나. 만약 일찍이 불을 놓았다면 내가 비견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잠시 후 유비가 불을 놓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 손성(孫盛)의 [이동평]異同評 – 오지(吳志-삼국지 오서 오주전)에서는 유비가 먼저 공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제기에서는 손권이 먼저 합비를 공격하고 그 후에 적벽전투가 있었다고 하니, 둘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오지(吳志)가 맞다. 

14년(209년) 봄 3월, 군이 초(譙)에 이르렀다. 경주(輕舟-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어 수군을 조련했다. 
 
가을 7월, 와수(渦水-회수의 지류)로부터 회수(淮水)로 들어가 비수(肥水)를 빠져나와 합비에 주둔했다. 
 
신미일, 영을 내렸다 (※ 존휼령 存恤令 or 존휼종군리사가실령 存恤從軍吏士家室令)
 
- 근래에 군이 수차례 정벌을 행하는 와중이나 혹은 역병을 만나, 관원과 군사들이 죽어 돌아오지 못해 집안에는 원망이 가득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떠도니, 어진이라면 어찌 이것이 즐겁겠는가? 부득이한 일일 뿐이다. 죽은 이들 중 집안에 기업(基業-기반이 되는 생업)이 없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가 있으면, 현(縣)의 관아에서는 양식을 대어주고 장리(長吏)들은 이들을 존휼(存恤-위문하고 구제함)하고 어루만져 내 뜻에 부합되게 하라.
 
양주(揚州)의 군현에 장리(長吏)를 두고 작피(芍陂)에 둔전(屯田)을 열었다.
 
12월, 군이 초로 돌아왔다.
  
15년(210년) 봄, 하령했다 (※ 구현령 求賢令) 
 
- 예로부터 천명을 받거나 중흥(中興)한 임금 중에서 현인(賢人), 군자(君子)를 얻어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일찍이 있었던가? 현인을 얻고자 함에 그들이 여항(閭巷-여염집)을 나오지 않는다면 어찌 요행히 서로 만날 수 있겠는가? 윗사람이 그들을 구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특히 현인을 급히 구해야 할 때이다. (논어 헌문편에서) 

“맹공작(孟公綽-춘추시대 노나라 대부)은 (진晉나라의) 조(趙)씨, 위(魏)씨의 로(老-가신들의 우두머리)가 되기에는 넉넉하나, 등(滕)이나 설(薛)의 대부(大夫)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고 했다. 만약 반드시 염사(廉士-청렴한 선비)인 연후에만 기용할 수 있다면 제환공은 어찌 패업을 이루었겠는가! 지금 천하에 갈옷을 입고 옥 같은 마음을 품은 채 위빈(渭濱)에서 낚시질하는 자가 없겠는가? (강태공 비유) 형수를 도둑질하고 금을 받고 아직 무지(無知-위무지)를 만나지 못한 자가 또한 없겠는가? (※ 진평 비유) 

(※ 진평陳平이 한고조 유방에게 투항하고 위무지魏無知의 추천으로 유방의 신임을 얻기 시작할 무렵, 진평이 형수와 사통하고 제장들에게서 금을 받아 챙겼다고 주발과 관영 등이 비방한 일이 있습니다. [사기] 진승상세가 참조)

그대들이 나를 돕고자 한다면, 측루(仄陋-출신이 한미함)한 자라도 오직 재주가 있으면 천거하여(唯才是擧) 내가 그들을 얻어 기용할 수 있도록 하라. -
 
겨울, 동작대(銅雀臺)를 만들었다. [70] 

[70] [위무고사]魏武故事 에 기재된 공의 12월 기해일의 영(令) (※ 술지령 述志令 or 명본지령 明本志令) 
 
– 내가 처음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을 때 나이는 어리고 스스로 바위굴에 사는 유명한 선비도 본래 아니었기에, 해내(海內-천하)의 사람들에게 범우(凡愚-범상하고 우매함)한 자로 보일까봐 두려워했으니, 한 군(郡)의 태수가 되어 정교(政敎)를 행해 명예를 세우고 세상에 내 이름을 알리려 했다. 옛날 제남(濟南)에 있을 때 비로소 잔예(殘穢)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평심(平心)으로 선거(選擧-인재를 뽑아 천거함)하니, 여러 상시(常侍)들을 거스르게 되고 강호(强豪-권세가)들의 원망을 사 그 화가 집안에 미칠까 두려웠으므로 이에 병을 칭하고 돌아갔다. 
 
관직을 떠난 후 나이는 아직 적고 그 해를 돌아보건대 나이 50에 이르러도 아직 노인이라 칭해지지는 않으므로 내심 스스로 뜻하길, 지금부터 20년 간 물러나 천하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려 한 즉 같은 해에 처음으로 천거된 자들과 더불어 어울렸을 뿐이다. 이 때문에 사시(四時)로 향리로 돌아가 초(譙)현 동쪽 50리 되는 곳에 정사(精舍)를 세워, 가을, 여름에는 독서하고 겨울, 봄에는 사냥하고자 했고, 밑바닥으로 내려가 진흙탕 물로 스스로를 가리고 빈객이 왕래하는 것을 끊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뒤 도위(都尉)에 징소되었다가 전군교위(典軍校尉)로 올랐는데, 마침내 국가를 위해 적을 토벌해 공을 세우려는 뜻을 세웠다. 후(侯)에 봉해지고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임명되어 그 뒤 내 묘도(墓道-묘 앞으로 난 길)에 “한(漢)나라 고(故) 정서장군 조후(曹侯)의 묘”라 쓰이길 바랬으니, 이것이 내 뜻이었다. 
 
그러다 동탁(董卓)의 난을 만나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이때 군사들을 많이 모을 수도 있었으나 늘 스스로 줄이고 많은 군사를 모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까닭은, 많은 군사로 강한 적과 싸우다보면 혹 이것이 재앙의 시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수(汴水) 싸움에서는 수 천 명이었고 뒤에 양주(揚州)로 돌아가 모병한 군사도 또한 3천을 넘지 않았으니 이는 본래 의도적으로 (군사의 수를) 한정한 것이다. 그 뒤 연주(兗州)를 다스리며 황건적 30만 무리를 격파해 항복시켰다. 또 원술이 구강(九江)에서 존호를 참칭하니 그 아랫사람들은 모두 칭신(稱臣)하고 문의 이름을 건호문(建號門)이라 이름 짓고 의복은 모두 천자의 제도에 따랐으며 두 부인들은 미리부터 황후의 자리를 다투었다. (제위에 오를) 뜻이 이미 정해졌음에도, 어떤 이가 원술에게 제위에 오르고 천하에 노포(露布-포고)할 것을 권하자 원술이 답하길, 

“조공(曹公)이 아직 건재하니 그럴 수 없다”

고 하였다. 그 후에 나는 원술의 장수 네 명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그 군사들을 포획하니 마침내 원술이 궁박해져 달아나 발병해 죽게 하였다. 
 
원소가 하북을 점거하게 되어 그 병세가 강성하니 나는 스스로 형세를 헤아려볼 때 실로 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다만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의(義)로써 몸을 던짐으로써 후세에 본보기가 되면 족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행히 원소를 격파하고 그의 두 아들을 효수했다. 또 유표는 스스로 종실(宗室)의 신분으로 간사한 마음을 품어 잠시 나아갔다 잠시 물러나며 세상일을 관망하면서 형주를 점거해 차지하니, 내가 다시 이를 평정하여 마침내 천하를 평안케 했다. 몸은 재상(宰相)이 되고 인신(人臣-신하)으로서 귀함은 이미 지극하니 내가 바라던 바를 이미 넘어섰도다. 
 
내가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자대(自大-스스로 뽐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사람들의 다른 말이 (다시) 없도록 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이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었다면 몇 사람이 칭제(稱帝)하고 칭왕(稱王)했을지 알 수 없다. 혹자가 내가 강성한 것을 보고 또 심성이 천명(天命)의 일을 믿지 못하여, 사심(私心)으로 서로 평하길 (내게) 불손(不遜)한 뜻이 있다고 하며 망령되이 (내 뜻을) 억측하니, 나는 이것이 늘 근심스럽다. 

제환공과 진문공이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것은 그 광대한 병세(兵勢)를 가지고 오히려 주 왕실을 받들어 섬겼기 때문이다. 논어(論語)에서 이르길,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도 은(殷)나라를 복종하며 섬겼으니 주(周)나라의 덕은 가히 지극한 덕이라 이를 만하다”

고 했으니, 무릇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능히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옛날 악의(樂毅)가 조(趙)나라로 달아났을 때 조나라 왕이 그와 더불어 연(燕)나라를 도모하려 하자 악의가 엎드려 울며 대답하길, 

“신이 소왕(昭王)을 섬긴 것은 천왕(天王)을 섬긴 것과 같습니다. 신이 죄를 얻어 다른 나라로 쫓겨났으니 그저 죽을 뿐, 조(趙)의 도예(徒隷-죄수, 노비)조차 차마 도모할 수 없는데 하물며 연(燕)의 후사(後嗣-연소왕의 뒤를 이은 연혜왕)겠습니까!”

라고 했다. 호해(胡亥-진秦의 2세 황제)가 몽념(蒙恬)을 죽이려 하자 몽념이 말하길, 

“저의 선인(先人) 때부터 자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진나라에 신의를 쌓았습니다. 지금 신은 3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그 위세로 족히 배반할 수도 있으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의(義)를 지키는 것은 감히 선인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여 선왕(先王)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했다. 나는 매번 이 두 사람의 글을 읽을 때마다 창연(愴然)히 눈물 흘리지 않은 적이 없다. 내 조부로부터 내 자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친중(親重)의 임무를 맡았으니 가히 신임을 받았다 할 만하고 자환(子桓-조비)의 형제에까지 3대에 이르렀다. 
 
내가 다만 제군(諸君)들에게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처첩(妻妾)들에게도 말하여 모두 마음 깊이 이 뜻을 알게 하였다. 또 말하길, 

“내 만년 뒤에라도 너희 조(曹)씨들은 모두 출가(出嫁)하게 되면 내 마음을 전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알리고 싶다”

고 했으니, 나의 이런 말은 모두 마음에서 우러난 참된 말(肝鬲之要)이다. 은근하고 정성스럽게 내 속마음을 서술하는 이유는 주공(周公)이 금등(金縢)에 글을 썼던 것을 보면 자명(自明)하니 사람들이 (내 뜻을) 믿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다. (※) 

(※ 주무왕이 병들자 주공은 ‘자신이 대신 죽을 테니 무왕을 살려 달라’고 선왕에게 빌고 그 기도문을 금등(쇠줄로 봉인한 궤짝)에 넣었는데, 무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한 후, 금등지서의 내용이 ‘무왕을 이어 주공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성왕이 금등을 열어 보고 주공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는 고사가 있음. [서경] 금등편 참고 )
 
그러나 내가 편하고자 하여 거느리던 군사를 버리고 집사(執事-직책. 공무)를 되돌린 채 무평후(武平侯-당시 조조의 봉작)의 국(國)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로 불가하다. 왜 그러한가? 내가 군사일을 떠나면 다른 사람에게 화를 입을까 실로 두렵기 때문이다. 내 자손들을 위한 계책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내가 패망하면 국가가 기울어져 위험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허명(虛名)을 탐해 실화(實禍)를 불러올 수는 없는 것이니, 이는(무평후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전조(前朝)에 은혜를 받아 3명이 후로 봉해졌으나 고사(固辭)하며 받지 않았는데 지금 이를 받고자 하는 것은 다시 영화를 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외원(外援)이 되어 만안(萬安-만전)의 계책을 세우려는 것이다. 내가 듣기로 개추(介推-개자추)는 진(晉)나라가 봉하려는 것을 피했고 신서(申胥)는 초나라에서 상 받는 것을 피해 달아났다고 하니, 일찍이 (이 일이 적힌) 책을 내던지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이로써 스스로를 반성했다. 
 
나라의 위령(威靈)을 받들어 장월(仗鉞-‘황월을 소지하다’는 말로, 천자를 대신해 군대를 통수함을 비유)하여 정벌함에, 약한 적을 제거하고 강한 적을 이겼으며 작은 무리로 큰 무리를 사로잡았고, 뜻을 두어 도모함에 일을 그르친 적이 없고, 마음을 두어 근심함에 성공치 못한 일이 없었다. 이에 마침내 천하를 탕평(蕩平-소탕하여 평정함)하고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가히 하늘이 한실(漢室)을 도왔다고 할 만하고, 사람의 힘으로 이룬 일이 아니다. 그러나 4개 현에 봉해져 식호(食戶)가 3만에 이르니 어떤 덕(德)으로 이를 감당하겠는가! 강호(江湖)가 아직 평정되지 못했으니 지위를 양보할 수는 없으나 읍토(邑土)는 사양할 수 있다. 이제 양하(陽夏), 자(柘), 고(苦), 세 현의 2만 호를 반납하고 다만 무평(武平)의 1만 호만을 식읍으로 할 것이니 이로써 비방을 줄이고 나에 대한 책망을 감소시키려 한다.  

16년(211) 봄 정월, [71] 천자가 공의 세자인 조비(曹丕)를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으로 삼고 관속(官屬)을 두어 승상을 돕도록 했다. 

[71] [위서] – 경신일, 천자가 이에 응답하여, (공이 반납한 2만 호 중에) 5천 호만 삭감하고 (나머지) 3개 현의 1만 5천호를 나누어 (태조의) 세 아들을 봉하니, 조식(曹植)을 평원후(平原侯), 조거(曹據)를 범양후(範陽侯), 조표(曹豹)를 요양후(饒陽侯)로 삼고, 식읍을 각각 5천 호로 하였다.

태원(太原)의 상요(商曜) 등이 대릉(大陵-병주 태원군 대릉현)에서 모반하자 하후연, 서황을 보내 이를 포위해 격파했다. 장로(張魯)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鍾繇)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關 中)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馬超)가 한수(韓遂), 양추(楊秋), 이감(李堪), 성의(成宜) 등과 함께 모반했다. 조인(曹仁)을 보내 이를 토벌케 했다. 마초 등은 동관(潼關)에 주둔했는데 공이 제장들에게 경계해 말하길, 

“관서(關西)의 군사들이 정예하고 사나우니, 견벽(堅壁)하고 더불어 싸우지 말라.”

고 했다. 
 
가을 7월, 공이 서쪽을 정벌하여 [72] 마초 등과 더불어 관(關)을 사이에 끼고 진을 쳤다. 

[72] [위서] – 의논하는 자들 여럿이 말했다, 

“관서(關西)의 군사들이 강하고 긴 모(長矛)를 쓰는데 익숙하니 정예를 선발해 선봉에 세우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이 제장들에게 말했다, 

“싸움은 나에게 달린 것이지 적에게 달린 것이 아니오. 적이 비록 긴 모에 익숙하다 하나 장차 우리를 찌를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니 제군들은 다만 지켜보도록 하시오.”

공은 급박하게 대치하는 한편, 몰래 서황(徐晃), 주령(朱靈) 등을 보내 밤중에 포판진(蒲阪津)을 건너 하서(河西)를 점거해 둔영을 세우게 했다. 
 
공이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다. 이에 교위 정비(丁斐)가 우마(牛馬)를 풀어 유인하자 적들이 우마를 취하느라 어지러워졌고 이에 공이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73]

[73] [조만전] – 공이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부대가 막 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했는데 공은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공을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황하의 물이 빠르고 세차 물에 들어가자 4-5리를 흘러갔고, 마초 등이 기병으로 추격하며 활을 쏘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데다 또한 공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공을)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공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하마터면 소적(小賊)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
 
황하를 따라 용도(甬道-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만들며 남쪽으로 진군했다. 적이 물러나 위구(渭口-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를 지켰다. 이에 공이 의병(疑兵-속이는 군사)을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渭水)로 들어가 부교(浮橋)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적이 밤중에 둔영을 공격하자 복병(伏兵)으로 이를 격파했다. 마초 등은 위수 남쪽에 주둔하며 서신을 보내 황하 서쪽을 떼어줄 것을 요구하며 화해를 청했으나 공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9월, 진군하여 위수를 건넜다. [74] 

[74] [조만전] – 공의 군대가 위수를 건널 때마다 매번 마초의 기병이 충돌(衝突)해 둔영을 세울 수 없었고, 또한 땅이 대부분 모래라 보루를 세울 수 없었다. 누자백(婁子伯)이 공에게 말했다, 

“지금 날씨가 차니 모래로 성을 만들어 물을 부으면 가히 하룻밤에 완성할 수 있습니다.” 

공이 이를 좇아, 비단주머니를 많이 만들어 물을 길어와 도강한 군사로 밤중에 성을 만들게 하니 날이 밝을 무렵 성이 세워졌다. 이에 공의 군대가 모두 위수를 건널 수 있었다. 

/ 혹 의심하기를 이때가 9월이니 아직 물이 얼 때가 아니라 한다. 신 송지가 [위서]를 보건대, 공의 군대가 8월에 동관에 도착해 윤월에 북쪽으로 황하를 건넜다 하니 즉 그 해의 윤 8월이고, 이때(그 후 남쪽으로 내려와 위수를 건넌 때)에는 가히 큰 추위가 있을 수 있다.

마초 등이 여러 번 싸움을 걸었으나 또한 응하지 않았다. 할지(割地)를 계속 청하며 자식들을 인질로 보낼 것을 제안하자, 공이 가후(賈詡)의 계책을 써서 이를 거짓으로 허락했다. 
 
한수가 공과 서로 만날 것을 청했는데 공은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한수와 같은 시기의 동년배였다. 이에 말(馬)을 마주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사(軍事)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경도(京都-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얘기하며 손뼉을 치며 환담했다.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공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한수가 말했다, 

“별 말 없었소” 

마초 등이 이를 의심하였다. [75] 

[75] [위서] – 공이 후일 다시 한수 등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제장들이 말했다, 

“공께서 적과 대화를 나누실 때 신중해야 하며, 목행마(木行馬-나무로 만든 장애물. 녹각)를 세워 방비하셔야 합니다.” 

공이 이를 옳게 여겼다. 적장들이 공을 만날 때 모두 말에 탄 채 배례했는데 진인(秦人), 호인(胡人)으로 이를 구경하는 자들이 앞뒤로 몇 겹을 이루어 뒤섞였다. 공이 웃으며 적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조공(曹公)을 보고 싶은가? 나 역시 사람일 뿐이다. 눈이 4개도 아니고 입이 두개도 아니나 다만 지모가 많을 뿐이다!” 

호인들이 앞뒤로 크게 구경했다. 또한 철기(鐵騎) 5천을 늘여 세워 10중의 진을 만드니 광채가 해처럼 빛나 적들이 더욱 놀라고 두려워했다.

뒷날, 공이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마초 등이 더욱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날짜를 정해 회전(會戰-어울려 싸움)했다. 먼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호기(虎騎)를 풀어 협격(夾擊)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한수, 마초 등은 양주(涼州)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安定)으로 달아나니 관중(關中)이 평정되었다. 

제장들 중에 어떤 이가 공에게 물었다, 

“당초 적이 동관을 지킬 때 위수 북쪽 길이 비어 있었는데, 하동(河東)으로부터 풍익(馮翊)을 치지 않고 도리어 동관을 지키다 시일을 끈 후에야 북쪽으로 강을 건넜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공이 말했다, 

“적이 동관을 지키는데 만일 내가 하동(河東)으로 들어가면 적은 필시 군을 이끌고 나루터들을 수비할 것인 즉 서쪽으로 황하를 건널 수 없었을 것이오. 나는 이 때문에 대군을 동관으로 향하게 한 것이오. 이에 적이 전군으로 남쪽을 지켜 황하 서쪽의 방비가 허술하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두 명의 장군(서황, 주령)이 서하(西河-황하 서쪽)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오. 그 뒤에 내가 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강을 건널 때 적이 우리 군과 서하(西河)를 다툴 수 없었던 것은 두 장군의 군이 있었기 때문이오. 수레를 연결하고 목책을 세워 용도(甬道)를 만들어 [76] 남쪽으로 진군한 것은 이길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군이 허약함을 일부러 내보인 것이오. 

[76] 신 송지가 보건대, 한고조 2년에 초와 더불어 형양(滎陽)의 경(京), 색(索) 사이에서 싸울 때 용도(甬道)를 쌓아 황하까지 이어 오창(敖倉)의 곡식을 취한 일이 있는데, 응소(應劭)가 (주하여) 이르길, 

“적이 치중을 노략질하는 것을 두려워해 이 때문에 담장을 쌓아 마치 길거리처럼 만들었다’

고 했다. 이때 위무제는 담장을 쌓지는 않고 다만 수레를 연결하고 목책을 세워 양면을 막은 것이다.

위수를 건너 보루를 견고히 한 채 적이 와도 출격하지 않아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으니, 이에 적은 영루(營壘)를 세우지도 않고 할지(割地)를 요구하게 된 것이오. 내가 순순히 이를 허락하여 그들의 뜻에 따른 이유는 스스로 안심시켜 방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소. 이틈에 사졸들의 힘을 축적해 하루아침에 들이치니 소위 ‘질풍 같은 천둥소리에는 미처 귀를 가리지 못한다’(疾雷不及掩)는 것이오. 전쟁의 변화(變化)에는 오로지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은 아니오.” 
 
당초, 매번 적의 한 부(部)가 도착할 때마다 공은 희색을 띄었었다. 적을 격파한 후 제장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공이 웃으며 말했다, 

“관중(關中)은 넓고 멀어서 만약 적들이 각각 험조한 땅에 의지했다면 이를 정벌하려 해도 1,2년 안에 평정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 그들이 모두 와서 집결해 그 무리가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서로 귀복(歸服)하지 못하고 군에는 마땅한 주인이 없어 일거에 멸하여 공을 세우기가 다소 쉬워졌으니 이 때문에 내가 웃었던 것이오.”
 
겨울 10월, 군(軍)이 장안으로부터 북쪽으로 양추(楊秋)를 정벌해 안정(安定)을 포위했다. 양추가 항복하자 그의 작위(爵位)를 되돌려주고 그를 (안정에) 남겨두어 그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했다. [77]
 
[77] [위략] – 양추(楊秋)는 황초(黃初) 중에 토구장군(討寇將軍)으로 승진하고 특진(特進)에 오르고 임경후(臨涇侯)에 봉해졌는데,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12월, 안정으로부터 환군하고, 하후연을 남겨 장안에 주둔하도록 했다.
  
17년(212) 봄 정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천자가 공에게 찬배불명(贊拜不名-천자를 배알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음), 입조불추(入朝不趨-입조할 때 종종걸음하지 않음), 검리상전(劍履上殿-칼을 차고 신발을 신고 어전에 오름)을 명하니 소하(蕭何)의 전례와 같았다. 마초의 남은 무리인 양흥(梁興) 등이 남전(藍田-경조 남전현)에 주둔하자 하후연에게 이를 쳐서 평정하도록 했다. 
 
하내(河內)군의 탕음(蕩陰), 조가(朝歌), 임려(林慮), 동군(東郡)의 위국(衛國), 돈구(頓丘), 동무양(東武陽), 발간(發幹), 거록(鉅鹿)군의 영도(廮陶), 곡주(曲周), 남화(南和), 광평(廣平)군의 임성(任城), 조(趙)국의 양국(襄國), 한단(邯鄲), 역양(易陽)현을 떼어내 위군(魏郡)에 덧붙였다.
 
겨울 10월, 공이 손권(孫權)을 정벌했다.
 
18년(213) 봄 정월, 유수구(濡須口)로 진군했다. 손권의 장강 서쪽 둔영을 공파(攻破)하고 손권의 도독(都督) 공손양(公孫陽)을 포획하고 이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조서(詔書)를 내려 14주를 아울러 다시 구주(九州)를 두었다. 
 
여름 4월, 업에 이르렀다.
 
5월 병신일, 천자가 어사대부 치려(郗慮)에게 절(節)을 지니고 가게 해 책명(策命)을 내려 공을 위공(魏公)으로 삼았다. [78] 

[78] [속한서] – 치려(郗慮)의 자는 홍예(鴻豫)이고 산양(山陽) 고평(高平) 사람이다. 어려서 정현(鄭玄)에게서 수업(受業)하고 건안 초에 시중이 되었다.

/ 우부(虞溥)의 강표전(江表傳) – 황제가 일찍이 치려와 소부(少府) 공융(孔融)을 특별히 친견한 일이 있는데, 황제가 공융에게 물었다, 

“홍예는 어떤 점에 뛰어난가?” 

공융이 말했다, 

“가히 더불어 도(道)로 나아갈 수는 있으나, 더불어 권도(權道)할 수는 없습니다.” 

(※ [논어] 자한편을 인용해 치려를 폄하한 것. 주[51]참조) 치려가 홀(笏)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난 날 공용이 북해에서 재상을 지낼 때 정치는 흐트러지고 백성들은 떠돌았으니 그대의 권(權)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이에 공융과 더불어 서로 장단점을 다투다 불목(不睦)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이 서신을 보내 그들을 화해시켰다. 치려는 광록훈을 지내다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책명은 다음과 같다.
 
- 짐이 부덕(不德)하고 어려서 흉한 재앙을 만나 서토(西土-장안을 지칭)로 넘어가 있다가 당(唐), 위(衛) 땅으로 옮겼다. 그때 당시에는 철류(綴旒-깃에 달린 술)와 같이 위태로운 처지로 [79] 종묘에는 제사가 끊기고 사직에는 지위가 없었다. 

[79] [공양전]公羊傳에서 

“君若贅旒然(군약췌류연. 임금이 마치 깃발에 꿰매어져 매달린 것 같다)”

고 하였고, 하휴(何休)가 (이를 주석하여) 이르길, 

“贅(췌)는 綴(철-꿰매다)이고 旒(류)는 旂旒(기류-깃발)이다. 아랫사람들에 의해 동서로 붙잡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고 했다.

흉악한 무리들이 개유(覬覦- 분수에 넘치는 것을 욕심냄)하여 제하(諸夏-중국)를 분열시켜 온 천하의 백성들 중 짐이 다스리는 백성은 하나 없으니, 즉 우리 고조(高祖)의 천명이 장차 땅에 떨어지려 하였다. 그래서 짐은 아침 일찍 잠이 깨고 옷을 입은 채 잠이 들며, 그런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이르길, 

“조상들이시여, 고굉(股肱-신임하는 중신) 선정(先正)들 중 그 누가 능히 짐을 돌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80] 

[80] 문후지명(文侯之命-[서경] 문후지명 편)에서 “亦惟先正(역유선정)”이라 했는데, 정현이 (이를 주석하여) 이르길, “先正(선정)은 先臣(선신)으로 공경대부(公卿大夫)를 일컫는다”고 했다.

이에 하늘의 속마음을 이끌어내 승상을 낳고 길러, 우리 황가(皇家)를 보전하고 널리 간난(艱難-고난)에서 구제하게 하였으니, 짐이 실로 이에 의지했도다. 이제 그대)에게 전례(典禮)를 주려하니 짐의 명을 경청하라.
 
지난 날 동탁이 처음으로 국난(國 難)을 일으키자, 뭇 제후들이 지위를 내어놓고 왕실을 위해 모의함에 [81] 그대가 앞장서서 융행(戎行)을 이끌었으니, 이는 그대의 본조(本朝)에 대한 충성이다. 

[81] 좌씨전(左氏傳)에서 “諸侯釋位以閒王政(제후석위이한왕정)”이라 했는데 복건(服虔)이 (이를 주석하여) 이르길, “제후가 사사로운 정무를 내어놓고 왕실을 도왔다는 말이다”고 했다.

그 뒤 황건적이 천상(天常-하늘의 도리)을 거슬러 나의 3주를 침범하여 그 화가 평민(平民)들에게까지 미쳤으나 또 그대가 이를 무찔러 동하(東夏-중국 동쪽)를 안녕케 했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한섬, 양봉이 위명(威命)을 제멋대로 남용한 즉 그대가 나아가 토벌하여 그 난을 물리치고 마침내 허도로 천도하여 나를 위해 경기(京畿-수도 및 그 주변지역)를 만들고 주고, 관직을 설치해 제사를 지내고 옛 문물을 잃지 않게 하여 천지귀신이 평온을 얻었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원술이 참람하게 반역하여 회남(淮南)에서 방자하게 굴었으나 그대의 위용을 두려워했고, 크고 빛나는 지모를 써서 기양(蘄陽)의 싸움에서는 교유(橋蕤)의 머리를 베고, 능위(稜威-존엄한 위광)가 남쪽으로 미치자 원술이 무너져 내렸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군대를 돌려 동쪽을 정벌하니 여포는 주륙 당했고, 수레에 올라 장차 돌아가려하니 장양(張楊)은 쓰러져 죽고 휴고(張楊)는 복죄(伏罪)되고 장수(張繡)는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했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원소(袁紹)가 천상(天常)을 거슬러 사직을 모위(謀危-해치려고 모의함)함에 그 무릿수가 많음을 믿고 의지해 칭병(稱兵-거병)하여 조정을 업신여겼으나, 그 당시에 왕사(王師-왕의 군대)는 미약하고 천하인들의 마음은 얼어붙어 굳센 뜻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대는 큰 절의와 백일(白日-태양)을 꿰뚫는 정성으로, 무력과 분노를 떨치며 신묘한 책략을 써서, 관도(官渡)로 나아가(致屆官渡) [82] 더러운 무리들을 크게 섬멸하여 나의 국가를 위험에서 건져 올렸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82] [시경]에서 “致天之屆, 於牧之野 (치천지계 어목지야)”라 했는데 정현이 (이를 주석하여) 이르길, “屆(계)는 極(극)”이라 했고, 홍범(鴻範)에서 “鯀則殛死(곤즉극사-곤이 죽임을 당했다)”라고 했다.

군을 이끌고 홍하(洪河-황하)를 건너 4주를 개척하여 평정하고 원담(袁譚), 고간(高幹)을 모두 효수(梟首)하였고 바다의 도적들은 달아나고 흑산적은 순종했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오환3 종(烏丸三種)이 2대에 걸쳐 난을 일으키고 원상(袁尙)이 이에 의거해 새북(塞北-새 북쪽)을 핍박하고 점거했으나, (그대가) 속마현거(束馬縣車-말발굽을 싸매어서 미끄러지지 않게 하고 수레를 서로 매달아 뒤떨어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으로, 험한 산길을 지나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하여 한번 정벌해 멸했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유표가 배신하고 속여 공직(貢職-직공, 공물)을 바치지 않자 왕사(王師)로 앞서서 길을 나서매, 위풍(威風)이 먼저 미쳐 백 개의 성(城)과 여덟 군(郡)이 교비(交臂-두 손을 뒷짐지어 결박함)하고 무릎 꿇었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마초(馬超), 성의(成宜)가 악행을 저지르며 서로 도와 황하와 동수(潼水) 주변을 점거하고 욕심을 이루려 하자, 위수 남쪽에서 이들을 죽여 헌괵(獻馘-적의 머리나 왼쪽 귀를 베어서 조정에 바침)한 것이 1만에 이르렀고 마침내 변경을 평정하고 융적(戎狄)들을 위무했으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선비(鮮卑), 정령(丁零)이 거듭 통역하여 이르고 선우(單于), 백옥(白屋)이 관원에게 솔직(率職-조공)을 청하니, 이 또한 그대의 공이다. 
 
(이처럼) 그대는 천하 평정의 공을 세움에 명덕(明德-밝은 덕)으로써 이를 거듭했고, 해내(海內)의 질서를 바로잡아 아름다운 풍속을 선양하고, 부지런히 교화를 베풀고 형옥(刑獄)을 신중히 하니, 관원들은 가혹한 정치를 하지 않고 백성들은 사특한 마음을 품지 않게 되었다. 제족(帝族)을 두텁게 존중하고 끊어진 대를 잇도록 표를 올려, 옛 덕(德)과 이전의 공(功)이 모두 그 순서가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비록 이윤(伊尹)(의 공덕)이 황천(皇天-하늘)에까지 다다르고 주공(周公)이 사해(四海)에 빛났다 하더라도 이에 견주면 보잘것없다 할 것이다.
 
짐이 듣기로 선왕(先 王)들은 명덕(明德)을 가진 자를 아울러 세워 토지와 백성을 나눠 주고, 은총을 드러내고 예물(禮物)을 갖추어주었기에 이에 왕실을 번위(藩衛-울타리가 되어 보위함)하고 그 시대를 보좌할 수 있었다 한다. 주(周) 성왕 때 관숙(管叔), 채숙(蔡叔)이 정결치 못하자, 난을 징벌하고 공을 세우기 바라는 마음으로, 소강공(邵康公-소공 석)을 시켜 제(齊) 태공(太公)(태공망 여상)에게 토지를 하사하니,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황하, 남쪽으로는 목릉(穆陵),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기까지 오후(五侯-공, 후, 백, 자, 남)와 구백(九伯-구주九州의 장)을 모두 정벌하고, 대대로 태사(太師) 직을 맡아 동해(東海)에서 드날렸다. 그리고 양왕(襄王) 때에 이르러 초(楚)나라 사람들이 왕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자 또한 진(晉) 문공(文公)을 후백(侯伯)에 오르도록 명하고 2로(輅-천자의 수레), 호분(虎賁-근위병), 부월(鈇鉞-의장용 도끼), 거창(秬鬯-제사용 울창주), 궁시(弓矢)를 내리니, 남양(南陽)을 크게 열고 세세토록 맹주(盟主)가 되었다. 주 왕실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이 두 나라에 의지한 때문이었다. 
 
지금 그대가 높고 밝은 덕으로 짐의 몸을 보전하고 천명에 봉답(奉 答)하며 맹렬히 도양(導揚-고취)하여 9역(九域)을 편안케 함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莫不率俾) [83] 공(功)은 이윤, 주공보다 높은데 상(賞)은 제(齊)나라, 진(晉)나라보다 못하니 짐이 심히 부끄럽도다. 

[83] 반경(盤庚-[서경] 반경편)에서, “綏爰有衆(수원유중)”이라 했는데, 정현이 (이를 주석하여) 이르길, 

“爰(원)은 於(어)이고, 그 무리들을 편안케 했다는 뜻”

이라 했다. 군석(君奭-[서경] 군석편)에서 “海隅出日, 罔不率俾 (해우출일 망불솔비)”라 했는데, 率(솔)은 循(순-좇다)이고 俾(비)는 使(사-부리다)이니, 사해의 모퉁이에서 해가 떠올라 환히 비추니 가히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짐은 변변찮은 몸으로 만백성의 주인이 되어, 그 어려움을 늘 생각해보면 마치 연못 위의 얼음을 밟고 지나는 것과 같았으니, 그대가 돕지 않았다면 짐은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대를 기주(冀 州)의 하동(河東), 하내(河內), 위군(魏郡), 조국(趙國), 중산(中山), 상산(常山), 거록(鉅鹿), 안평(安平), 감릉(甘陵), 평원(平原) 도합 10군(郡)에 봉해 위공(魏公)으로 삼는다. 그대에게 현토(玄土-북방을 상징하는 검은 흙)를 흰 띄로 감싸서 내리니 거북점을 쳐 보고 총사(塚社-사직)를 세우도록 하라. 옛날 주 왕실에서는 필공(畢公), 모공(毛公)이 입조해 경(卿)이 되어 보좌했고, 주공(周公)과 소공(邵公)은 (안에선) 태사와 태보로, 밖으로 나가서는 이백(二伯)이 되었다. 안팎의 직임을 의당 그대가 맡아야 하니, 승상으로서 기주목을 겸임함은 예전과 같이 하라. (승상 영 기주목) 
 
또한 그대에게 구석(九錫)을 내리니 짐의 명을 경청하라. 그대는 예율(禮律)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그들이 편안하게 업에 종사하며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이에 그대에게 대로(大輅), 융로(戎輅) 각 한 대와 검은 숫말 2사(駟-1사는 네마리)를 내린다. 그대는 직분에 맞는 일을 권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여(穡人昏作) [84] 곡식과 비단이 쌓이고 이로써 대업(大業)이 흥했으니, 이에 그대에게 곤면(袞冕-곤룡포와 면류관)의 복식과 적석(赤舃-붉은 가죽신) 부언(副焉-‘적석부언’과 ‘규찬부언’은 종종 함께 붙여서 사용되는데, 1 set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을 내린다. 

[84] 반경에서 “墮農自安, 不昏作勞 (타농자안 불혼작노)”이라 했는데, 정현이 (이를 주석하여) 이르길, “昏(혼)은 勉(면-힘쓰다)”이라 했다.

그대는 겸양(謙讓)을 두텁게 숭상해 백성들의 바른 품행을 일으키고 젊은이와 늙은이 간에 예의가 있게 하고 위 아래가 모두 화합하게 했으니, 이에 그대에게 헌현지악(軒縣之樂-저택에 걸어두는 악기. 악현樂縣)과 육일무(六佾舞-6열, 6행으로 추는 춤)를 내린다. 
 
그대의 보좌로 풍화(風 化-교화)를 선양하고 사방에서 일으켜, 멀리 있는 자들은 낯빛을 바꿔 일신하고 화하(華夏-중국)는 충실해졌으니, 이에 주호(朱戶-붉은 칠을 한 대문 또는 저택)를 내려 거처하도록 한다. 그대는 명철(明哲)을 궁구하고 황제가 처한 어려움을 생각하여 재능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현자에게 일을 맡기며 뭇 착한 이들을 반드시 천거했으니, 이에 그대에게 납폐(納陛-섬돌)를 내려 오를 수 있도록 한다. 그대는 나라를 다스림에 정색처중(正色處中-엄정한 태도로 중용을 지킴)하고 한 올의 악이라도 물리치지 않는 일이 없었으니, 이에 그대에게 호분(虎賁) 군사 3백 명을 내린다. 
 
그대는 천형(天 刑-하늘의 법)을 공경히 살펴(糾虔天刑) [85] 죄악을 분명히 드러내고 기강을 범한 자는 주살하지 않는 법이 없었으니, 이에 그대에게 부월(鈇鉞) 각 하나씩을 내린다. 

[85] ‘糾虔天刑 (규건천형)’은 국어(國語)에서 나온 말인데, 위소(韋昭)가 이를 주석하기를 “糾(규)는 察(찰-살피다)이고, 虔(건)은 敬(경-공경하다)이고 刑(형)은 法(법)”이라 했다.

그대는 용양호시(龍驤虎視-용이 머리를 쳐들고 호랑이가 노려봄)하여 팔유(八維-팔방)를 두루 살피고, 역적을 토벌하여 사해(四海)를 절충(折衝-적을 제압하여 승리함)했으니, 이에 동궁(彤弓-붉은 활) 1개, 동시(彤矢-붉은 화살) 100개, 노궁(玈矢-검은 활) 10개, 노시(玈矢-검은 화살) 1,000개를 내린다. 그대는 온화함과 공손함을 바탕으로 효행과 우애로 덕을 행하여 그 밝음이 진실로 두텁고 정성스러워 짐을 감동시켰으니, 이에 그대에게 거창(秬鬯) 1유(卣-술통의 일종)와 규찬(珪瓚-백옥으로 장식한 주걱) 부언(副焉)을 내린다. 
 
위국(魏國)에는 승상(丞相) 이하 군경(群卿), 백료(百寮-백관)를 두어, 모두 한나라 초 제후왕(諸侯王)의 제도와 같이 하라. 가서 공경히 하고 짐의 명을 삼가 받들라! 너의 무리들을 정성스레 보살펴 때에 맞춰 공을 밝혀 드러내고 너의 현덕(顯德)을 완성해 우리 고조(高祖)의 휴명(休命-아름다운 천명)을 드날리도록 하라! [86]
 
[86] (이 책명은) 후한의 상서좌승(尙書左丞) 반욱(潘勗)이 지은 글이다. 반욱의 자는 원무(元茂)이고 진류군 중모현 사람이다. 

/ [위서] – 공이 영을 내리길, 

“무릇 구석(九錫)을 받은 것은 널리 토우(土宇-강토)를 개척한 주공(周公)이고, 한나라 때 이성(異姓) 8왕(八王)은 고조와 더불어 포의(布衣)에서 함께 일어나 왕업(王業)을 열어 그 공이 지대하니, 내가 어찌 이들에 비견되겠는가?”

하고 앞뒤로 세 번 사양했다. 
 
이에 중군사(中軍師) 육수정후(陸樹亭侯) 순유(荀攸), 전군사(前軍師) 동무정후(東武亭侯) 종요(鍾繇), 좌군사(左軍師) 양무(涼茂), 우군사(右軍師) 모개(毛玠), 평로장군(平虜將軍) 화향후(華鄕侯) 유훈(劉勳), 건무장군(建武將軍) 청원정후(淸苑亭侯) 유약(劉若), 복파장군(伏波將軍) 고안후(高安侯) 하후돈(夏侯惇), 양무장군(揚武將軍) 도정후(都亭侯) 왕충(王忠), 분위장군(奮威將軍) 악향후(樂鄕侯) 유전(劉展), 건충장군(建忠將軍) 창향정후(昌鄕亭侯) 선우보(鮮于輔), 분무장군(奮武將軍) 안국정후(安國亭侯) 정욱(程昱), 태중대부(太中大夫) 도향후(都鄕侯) 가후(賈詡), 군사좨주(軍師祭酒) 천추정후(千秋亭侯) 동소(董昭), 도정후(都亭侯) 설홍(薛洪), 남향정후(南鄕亭侯) 동몽(董蒙), 관내후(關內侯) 왕찬(王粲), 부손(傅巽), 좨주(祭酒) 왕선(王選), 원환(袁渙), 왕랑(王朗), 장승(張承), 임번(任藩), 두습(杜襲), 중호군(中護軍) 국명정후(國明亭侯) 조홍(曹洪), 중령군(中領軍) 만세정후(萬歲亭侯) 한호(韓浩), 행(行) 효기장군(驍騎將軍) 안평정후(安平亭侯) 조인(曹仁), 영호군장군(領護軍將軍) 왕도(王圖), 장사(長史) 만잠(萬潛), 사환(謝奐), 원패(袁霸)등이 권하며 진언했다. 
 
“옛 삼대(三代-하, 은, 주) 이래로 신하에게 토지를 주고 천명을 받아 중흥하면 관작을 내려 보좌케 한 것은 모두 공덕을 포상하여 나라의 번위(藩衛)로 삼기 위함입니다. 지난날 천하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지자 뭇 흉호(凶豪)들이 일어나 전월(顚越-넘어뜨림)하고 발호(跋扈-제멋대로 날뜀)한 위태로움은 차마 다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명공(明公)께서 몸소 떨쳐 일어나 목숨을 내어놓고 그 난을 다스려, 두 원씨(원소, 원술)의 찬도지역(簒盜之逆)을 주살하고 황건적과 같이 난을 일으킨 무리들을 멸하였고, 반역의 수괴를 모두 죽이고 황예(荒穢-거칠고 더러움)한 자들을 베느라 서리와 이슬을 맞은 지 20여 년이니, 글이 쓰인 이래 일찍이 이런 공을 세운 자는 없었습니다. 
 
옛날 주공(周公)이 문왕과 무왕의 발자취를 이어 이미 이룩된 왕업을 받아 베개를 높이고 묵으로 글을 써서 군후(群后)들에게 공손히 읍(揖)하니 상(商), 엄(奄)이 부지런했으나 2년을 넘기지 못했고, 여망(呂望)이 천하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8백 제후의 세력에 의거하여 잠시 부월(旄鉞)을 쥐고 한 때 지휘하였으니 이들이 모두 토우(土宇)를 크게 열고 한 주(州)를 넘어 국(國)을 겸하였습니다. 주공의 여덟 아들은 모두 후백(侯伯)이 되어 흰 소와 붉은 소로 천지(天地)에 교사(郊祀)를 지내고 전책(典策-법령 제도), 비물(備物-의례, 제사 등에 쓰이는 기물)이 왕실을 본땄으니 영장총성(榮章寵盛-영예를 드높이고 은총이 흥성함)이 이처럼 컸습니다. 

한(漢)나라가 흥한 때에는 좌명(佐命)한 신하로 장이(張耳), 오예(吳芮)는 그 공이 적었지만 또한 성(城)을 연결해 땅을 열고 남면(南面)하여 고(孤)를 칭했습니다.(※넓은 봉토를 받아 이성제후왕으로 봉해졌다는 말) 이는 모두 명군(明君), 달주(達主)가 위에서 행하고 현신(賢臣) 성재(聖宰)가 아래에서 받은 것으로 3대의 영전(令典-훌륭한 전범)이요, 한(漢) 황제의 밝은 제도입니다. 
 
지금 공로를 (명공에) 견주자면 주공, 여망이 빛을 잃고, 공을 헤아리자면 장이, 오예가 더 미약하고, (허용받은) 제도를 논하자면 제(齊), 노(魯)가 더 중하고, 토지를 말하자면 장사(長沙)가 더 많습니다. (※ 주공, 여망의 봉지가 각각 노, 제이고, 오예는 장사왕) 그러한 즉 위국(魏國)과 구석(九錫)의 영예는 하물며 옛 상(賞)에 비해서도 오히려 옥을 품고서 갈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게다가 열후 제장들 중에 요행히 용기(龍驥-용과 천리마로 군왕을 비유. 여기선 조조를 가리킴)에 매달려 작은 공훈을 훔쳐 자주색 패옥을 차고 황복을 걸친 이가 대략 수백에 이르고 또한 이로 인해 장차 만세에 전하게 되었는데, 명공께서 홀로 위에서 상(賞)을 사양하시니 장차 아랫사람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위로는 성조(聖朝)의 환심(歡心)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지극한 바라던 관대(冠帶-관과 띠. 관원의 정복)를 잃게 하니, 대업을 보필한 것을 잊으시고 필부(匹夫)의 세행(細行)을 드러내실까, 순유 등은 크게 두렵습니다.”
 
이에 공이 바깥사람들을 타이르고 장(章)을 올려 다만 위군(魏郡) 만을 받았다. 이에 순유 등이 다시 말했다, 
 
“엎드려 생각건대 당초 위국에 봉한 것은 성조(聖朝)께서 고심하시고 뭇 신료들이 상의한 연후에 책명을 내린 것인데, 명공께서 오래도록 상(上)의 뜻을 위배하니 이는 대례(大禮)가 아닙니다. 지금 공경히 조명(詔命)을 받들고 뭇 사람들의 바람에 따르면서, 또한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만을 감당하려 하시어 아홉을 사양하고 하나만을 받으시니, 이는 오히려 한조(漢朝)의 상(賞)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며 순유 등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제(齊) 와 노(魯)의 봉지는 동해(東海)에 이르고 강역의 정부(井賦-전부田賦)(를 내는 호구수)가 4백만 가호에 이르러 기업이 융성하고 넓었기에 쉽게 공을 세웠고, 이 때문에 능히 익대(翼戴-받들어 추대함)하는 공훈을 이루고 일광(一匡-천하를 다스려 바로잡음)하는 공적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위국(魏國)이 비록 명목상 열개 군(郡)이나 오히려 곡부(曲阜-노나라 도읍)보다 적어 그 호수(戶數)를 헤아려보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왕실을 번위(藩衛)하며 담장을 세워 둘러싸기에는 오히려 부족합니다. 게다가 성상(聖上)께서는, 멸망한 진나라에 보좌하는 제후가 없어 화를 입은 일(亡秦無輔之禍)을 보시고 지난날 진탕(震蕩-뒤흔들리고 휩쓸림)했던 고난을 경계하시어, 충현(忠賢)에게 맡기고 이들을 세워 폐추(廢墜-부서지고 무너짐)된 것을 대신하려는 것이니, 원컨대 명공께서는 황제의 명을 공손히 받들어 조금이라도 거스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이에 공이 명을 받들었다.
 
/ [위략] – 공이 상서(上書)해 사례했다, 
 
“신(臣) 은 선제(先帝)의 후은(厚恩)을 입어 지위가 낭서(郎署)에 이르렀으나 천성이 게으르고 의망(意望-소망)한 바는 모두 충족되었기에 감히 고위직을 희망하거나 현달(顯達)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동탁이 난을 일으키니 의(義)로 보면 마땅히 사난(死難-국가의 위기에 목숨을 바침)해야 하기에 이 때문에 떨치고 일어나 목숨을 내어놓고 (적의) 예봉을 꺾고 군대를 거느렸으니 천년의 운을 만나 지금까지 봉역(奉役-복무)했습니다. 

두 원(袁)씨가 염비침모(炎沸侵侮-불이 타오르고 물이 끓듯 왕성하게 침범하고 업신여김)하자 폐하께서는 신과 더불어 두려워하며 함께 근심하셨습니다. 이에 경사(京師-수도)를 뒤돌아보며 진격하여 맹적(猛敵)과 맞서며, 항상 군신(君臣-군주와 신하)이 함께 범 아가리에 떨어지고 실로 스스로 머리와 목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했으나, 조종(祖宗)의 신령한 도움을 입어 더러운 무리들을 멸하였으니, 보잘것없는 신이 그 틈에 명성을 훔치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은총을 더해 상상(上相-재상)의 지위를 내리시고 작위에 봉하고 은총과 녹을 주심이 풍성하고 두터워, 평생을 원해도 실로 다 바라지 못할 바였습니다. 입과 마음으로 함께(성심으로) 꾀하길, 다행히 장차 대죄(待罪)하고 열후(列侯)에 보지(保持-유지)되어 자손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성세(聖世)에 의탁할 뿐 영원히 중책을 맡는 일은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폐하께서 두터운 정을 발하시어 국(國)을 열고 구석(九錫)을 갖추어 어리석은 신에게 하사하셨는데, 그 봉토는 제(齊), 노(魯)에 비견되고 예의는 번왕(藩王)과 같으니, 아무런 공이 없는 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정성껏 말씀 올렸으나 청이 허락되지 못하고, 엄중한 조령이 간절히 이르러 실로 신이 마음을 굽혀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엎드려 스스로 돌아보건대, 대신의 반열에 서서 왕실에 매인 목숨이라 몸이 저의 소유가 아니니 어찌 감히 사사로이 하겠습니까? 저의 얕은 소견으로 보건대, 장차 출퇴(黜退-파면)되어 설령 초복(初服-벼슬하기 전의 복장, 신분)으로 나아가게 되더라도, 지금은 강토(疆土)를 받들어 변변찮으나마 수를 채워(備數) 번한(藩翰-울타리와 기둥, 즉 왕실을 보위하는 제후나 중신)이 되고, 감히 오래도록 이어 후세에 근심을 남기지는 않겠습니다. 아비와 아들이 서로 종신토록 맹세하는 것과 같이, 몸이 재가 되고 죽음에 이르도록 후은에 보답하겠습니다. 천위(天威-군주의 위엄)가 산처럼 높으니, 송구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조령을 받듭니다.”

가을 7월, 처음으로 위(魏)나라의 사직(社稷)과 종묘(宗廟)를 세웠다. 천자가 공(公)의 세 딸을 맞아들여 귀인(貴人)으로 삼았는데, 막내딸은 국(國)에서 장성하기를 기다리도록 했다. [87] 

[87] [헌제기거주] – 사지절(使持節) 행(行) 태상(太常) 대사농(大司農) 안양정후 왕읍(王邑)을 시켜 벽(璧-고리모양의 둥근 옥), 백(帛-비단), 현훈(玄纁-검고 분홍색을 띈 비단), 견(絹-명주) 5만 필을 업(鄴)으로 가져가 맞아들이게 하니, 개자(介者-사자, 수행원?) 5명이 모두 의랑(議郎)으로 대부(大夫)의 사무를 행했고 부개(副介)는 1명이었다.
 
9월, 금호대(金虎臺)를 만들었다. 수로를 뚫고 장수(漳水)를 끌어들여 백구(白溝)로 들어가게 해 황하와 통하게 했다. 
 
겨울 10월 위군(魏郡)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고 도위(都尉)를 두었다. 
 
11월, 처음으로 상서(尙書), 시중(侍中), 육경(六卿)을 두었다. [88] 

[88][위씨춘추] – 순유(荀攸)를 상서령(尙書令)으로, 양무(涼茂)를 (상서)복야(僕射)로, 모개(毛玠), 최염(崔琰), 상림(常林), 서혁(徐奕), 하기(何蘷)를 상서(尙書)로, 왕찬(王粲), 두습(杜襲), 위기(衛覬), 화흡(和洽)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마초가 한양(漢陽)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해악을 일으키자 저왕(氐王) 천만(千萬)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興國)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19년(214) 봄 정월, 처음으로 적전(籍田)을 갈았다. 남안(南安)의 조구(趙衢)와 한양(漢陽=천수)의 윤봉(尹奉) 등이 마초를 토벌해 그 처자(妻子)를 효수했고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다. 

한수(韓遂)는 금성(金城)으로 옮겨 저왕(氐王) 천만(千萬)의 부(部)로 들어갔는데, 강족과 호인 1만 여 기를 이끌고 하후연과 싸웠다. 하후연이 이를 대파하자 한수는 서평(西平)으로 달아났다. 하후연이 제장들과 더불어 흥국(興國)을 공격해 함락했다. 안동군(安東郡), 영양군(永陽郡)을 없앴다.
 
안정태수 관구흥(毌丘興) 이 장차 임지로 나아가려 할 때 공이 경계하여 말했다, 

“강(羌-강족), 호(胡-흉노)가 중국과 교통하고자 하면 마땅히 스스로 사람을 보내야 할 것이나 이를 꺼리며 그러지 않소. 착한 사람은 얻기 힘든 법이니, 필시 장차 강, 호를 시켜 망령되이 요구하게 하고 이를 틈타 스스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오. 이런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풍속이 다른 저들의 마음을 잃게 되고, 따른다 하더라도 이익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관구흥이 도착하여 교위 범릉(範陵)을 강(羌)으로 들여보냈는데 과연 범릉이 강(羌)으로 하여금 자신을 속국도위(屬國都尉)로 삼아주도록 요구하게 했다. 공이 말했다, 

“응당 그러리라는 것을 내가 미리 안 것은 성인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런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오.” [89]

[89] [헌제기거주] - 행 태상사 대사농 안양정후 왕읍(王邑)을 시켜 종정(宗正) 유애(劉艾)와 더불어 모두 지절(持節)하고, 개자(介者) 5인과 속백(束帛-가례 때 예물로 쓰던, 끝을 서로 묶은 비단) 사마(駟馬-네 마리 말 또는 그 말이 끄는 수레)를 지니고,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郎), 액정승(掖庭丞), 중상시(中常侍) 2명과 함께 두 귀인(貴人)을 위공국(魏公國)에서 영접하게 했다. 

2월 계해일, 또한 위공(魏公)의 종묘에서 두 귀인에게 인수(印綬)를 주었다. 갑자일, 위공의 궁 연추문(延秋門)으로 나아가 귀인들을 영접해 수레에 오르게 했다. 위(魏)에서 낭중령(郎中令), 소부(少府), 박사(博士), 어부승황구령(禦府乘黃廐令), 승상 연속(掾屬)을 보내 귀인을 모시고 전송하게 했다. 

계유일, 두 귀인이 유창(洧倉)에 도착하자 시중 단(丹)을 보내 용종(冗從-중황문 용종?), 호분(虎賁)을 이끌고 낙역(駱驛)으로 가서 영접하도록 했다. 

을해일, 두 귀인이 입궁하자 어사대부와 중(中) 2천 석의 장군, 대부, 의랑들이 어전 중에 모였고 위국(魏國)의 두 경(卿)과 시중, 중랑 2명이 한(漢)의 공경들과 함께 어전에 올라 연회를 즐겼다.
 
3월, 천자가 위공(魏公)을 제후왕(諸侯王)의 위에 두게 하고, 다시 금새(金璽-금으로 된 도장), 적불(赤紱-붉은 인끈), 원유관(遠遊冠)을 주었다. [90]
  
[90] [헌제기거주] – 좌중랑장 양선(楊宣), 정후(亭侯) 배무(裴茂)를 시켜 절을 지니고 가서(持節) 도장(印)을 주도록 했다.
 
가을 7월, 공이 손권을 정벌했다. [91]

[91] [구주춘추] – 참군(參軍) 부간(傅幹)이 간언했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크게 갖추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으니 문(文) 과 무(武)입니다. 무(武)를 써서 먼저 위엄(威)을 보이고 문(文)을 써서 먼저 덕(德)을 베풀어 위덕(威德)이 서로 도우면 그 뒤에 왕도(王道)가 갖추어질 수 있습니다. 

지난 날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위아래가 질서를 잃으니 명공께서 무(武)를 써서 이를 물리쳐 열에 아홉은 평정되었고, 지금 왕명을 받들지 않는 것은 오(吳)와 촉(蜀)입니다. 오(吳)에는 장강의 험난함이 있고 촉(蜀)에는 숭산(崇山)의 험조함이 있으니, 위복(威服-위력으로 복종시킴)하기는 어려우나 덕으로 품기는 쉽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생각건대, 장차 갑옷을 놓아두며 전쟁을 그치고, 군을 쉬게 하며 군사를 기르고, 땅을 나누어 봉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한다면 이로써 안팎의 마음이 굳어지고 공이 있는 자를 격려하게 되니 천하가 그 제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점차 학교를 흥하게 해 이로써 착한 성품으로 인도하고 의절(義節)을 기르십시오. 

공의 신무(神武)가 (이미) 사해(四海)를 흔들었으니 만약 문(文)을 닦아 이들을 구제한다면 널리 천하에 불복하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십만의 군사를 일으켜 장강 가에 두었다가, 만약 적이 패한 후 깊은 곳을 견고히 방비하며 숨어버린다면 (우리) 군사와 말이 능히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기변(奇變)에는 임기응변이 소용없을 것이니, 큰 위엄에 (겉으로) 굴복하더라도 능히 적의 마음을 복종시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오직 우순(虞舜-순임금)이 간척지무(干戚之舞-방패와 도끼를 들고 추는 춤으로, 문덕文德이 갖추어졌음을 노래하는 것)를 춘 뜻을 생각하시어 위엄을 보전하고 덕을 길러 도(道)로써 제승(制勝-승리)하십시오.”  

공이 이에 따르지 않았는데 끝내 군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부간(傅幹)의 자는 언재(彥材)이고 북지(北地) 사람이다. 승상 창조속(倉曹屬)을 지내다 죽었다. 아들이 있었는데 부현(傅玄)이라 했다. 

당초 농서(隴西)의 송건(宋建)이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자칭하고 포한(枹罕-양주 농서군 포한현)에서 무리를 끌어모아 연호를 고치고 백관(百官)을 두어 30여 년이 흘렀다. 하후연을 보내 흥국(興國)으로부터 이를 토벌하게 했다. 
 
겨울 10월, 포한을 함락하고 송건을 참수하니 양주(涼州)가 평정되었다.
 
공이 합비로부터 돌아왔다.
 
11월, 한(漢) 황후 복씨(伏氏)가 부친인 전 둔기교위(屯騎校尉) 복완(伏完)에게 예전에 보낸 서신에서 ‘황제가 동승(董承)이 주살된 일 때문에 공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고 했는데 그 언사가 심히 추악하여 발각되자 폐출되어 죽고 그 형제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92]

[92] [조만전] – 공이 화흠(華歆)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황후를 잡아오게 했다. 황후는 문을 닫고 벽 속에 숨었는데 화흠이 문을 부수고 벽을 열어 황후를 끌어냈다. 이때 황제가 어사대부 치려(郗慮)와 함께 앉아있었는데 황후가 머리가 풀어헤쳐진 채 맨발로 걸어 지나가다 황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시 살아날 수 없겠습니까?” 

황제가 말했다,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오.” 

황제가 치려에게 말했다, 

“치공,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소!” 

마침내 장차 황후를 죽이려 하였고, 복완과 그 종족으로 죽은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12월, 공이 맹진(孟津)에 이르렀다. 천자가 공에게 명해 모두(旄頭-황제의 의장행렬 선두에 세우던 소꼬리 털로 장식한 깃발)를 두게 하고 궁전에 종거(鍾虡-종을 매다는 틀)를 설치하게 했다. 
 
을미일, 영을 내렸다 (※ 거사령 擧士令 or 칙유사취사무폐편단령 敕有司取士毋廢偏短令)
 
- 무릇 품행이 뛰어난 선비(有行之士)가 반드시 진취(進取-적극적으로 나아가 일을 이룩함)하는 것이 아니며 진취한 선비가 반드시 품행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진평(陳平)이 어찌 독실하게 처신한 인물이며 소진(蘇秦)이 어찌 신의를 지킨 인물이란 말인가? 그러나 진평은 한(漢)의 대업을 정했고 소진은 미약한 연(燕)나라를 구했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선비가 편단(偏短-한쪽으로 치우친 단점)이 있다 하여 어찌 폐(廢)하겠는가! 유사(有司-담당관원)들은 이 뜻을 밝게 생각해 선비가 유체(遺滯-인재가 발탁되지 않고 방치됨)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관에서는 그 업을 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 말했다 (※ 신형령 愼刑令 or 선군중전옥령 選軍中典獄令)
 
- 무릇 형(刑)이란 것은 백성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러나 군중에서 옥(獄)을 관장하는 자 중에는 혹 그 사람됨이 아닌 자가 있어 그에게 삼군의 생사에 걸린 일을 맡기니 나는 이점을 심히 두려워한다. 법리(法理)에 밝게 통달한 자를 뽑아 그로 하여금 형(刑)을 관장하게 하라.
 
이에 이조(理曹) 연속(掾屬)을 두었다.
 
20년(215) 봄 정월, 천자가 공의 둘째 딸을 황후(皇后)로 세웠다. 운중(雲中), 정양(定襄), 오원(五原), 삭방군(朔方郡)을 없애고 그 군들에 (각각) 1현을 두어 백성들을 거느리게 하고 이를 합쳐서 신흥군(新興郡)을 설치했다. (※ ex. 운중군 → 신흥군 운중현)
 
3월, 공이 서쪽으로 장로(張魯)를 정벌해 진창(陳倉)에 이르렀는데, 장차 무도(武都)로부터 저(氐)로 들어가려 했다. 저인(氐人)들이 길을 막자 먼저 장합(張郃), 주령(朱靈) 등을 보내 공파(攻破)했다. 
 
여름 4월, 공이 진창으로부터 산관(散關)을 나와 하지(河池)에 도착했다. 저왕(氐王-저족의 왕) 두무(竇茂)의 군사 만여 명이 험한 지세에 의지한 채 복종하지 않았다.
 
5월, 공이 이를 공격해 무찔렀다. 서평(西平), 금성(金城)의 제장들인 국연(麴演), 장석(蔣石) 등이 함께 한수(韓遂)의 수급을 베어 보내왔다. [93]

[93] [전략] – 한수(韓遂)의 자는 문약(文約)이고 처음 같은 군(郡)의 변장(邊章)과 함께 서주(西州-양주)에서 명성을 드러내었다. 변장은 독군종사(督軍從事)가 되었고 한수는 계부(計簿-군의 호구, 부세 등을 적어 중앙에 보고하던 장부)를 받들어 경사(京師)로 나아갔다. 하진은 예전부터 한수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특별히 접견했다. 한수는 하진을 설득하며 엄인(閹人-환관)들을 주살하라고 했으나 하진이 따르지 않자 이에 귀향하기를 청했다. 때마침 양주(涼州)의 송양(宋揚), 북궁옥(北宮玉) 등이 반란을 일으켜 변장, 한수를 추대해 주인으로 삼았다. 얼마 후 변장이 병들어 죽자 한수는 송양에 의해 겁박 받아 부득이하게 거병해 난을 일으켰고, 그 후 32년이 흘러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는 70여 세였다. / 유애(劉艾)의 [영제기]靈帝紀 – 변장(邊章)의 다른 이름은 변윤(邊允)이다.
 
가을 7월, 공이 양평(陽平)에 이르렀다. 장로(張魯)는 동생 장위(張衛)와 장수 양앙(楊昂) 등을 시켜 양평관(陽平關)을 점거하게 하고, 산을 가로질러 10여 리에 걸쳐 성을 쌓았는데,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왔다. 적은 대군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그 수비가 흐트러졌다. 이에 공이 은밀히 해표(解剽), 고조(高祚) 등을 보내 험한 곳을 오르도록 해 야습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인 양임(楊任)을 참수했다. 진격하여 장위를 공격하자 장위 등은 밤중에 달아나고 장로는 무너져 파중(巴中)으로 달아났다. 
 
공의 군대가 남정(南鄭)으로 들어가 장로의 부고(府庫)에 있던 진보(珍寶-진기한 보물)를 모두 얻었고, [94] 파(巴), 한(漢)이 모두 항복했다. 

[94] [위서] – 군이 무도(武都)로부터 산을 타고 천리를 행군하며 험조한 땅을 오르내리니 군사들이 피곤해하고 괴로워했다. 이에 공이 크게 잔치를 베풀어 그 피로를 잊도록 했다.

한녕군(漢寧郡)을 한중군(漢中郡)으로 다시 되돌렸다. 한중의 안양(安陽), 서성(西城)현을 갈라 서성군(西城郡)을 설치하고 태수를 두었다. 석(錫)현과 상용(上庸)현을 갈라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하고 도위(都尉)를 두었다. 
 
(※참고 - 맨 끝의 <分錫.上庸郡.置都尉>는 글자그대로 풀이하면 ‘석, 상용군을 갈라내어 도위를 두었다’ 입니다. 그러나 상용은 원래 한중군(한녕군) 소속의 ‘현’이고 그 당시에 상용'군’이란 게 존재했는지 의문인데, 아마 앞부분(分漢中之安陽、西城爲西城郡)과 똑같은 구조로서 서로 중복되니까 중간에 글자를 생략한 것 같습니다. 즉, 원래 分錫(上庸爲)上庸郡置都尉 의 형태이고, 끊어서 읽으면 이렇게 되겠죠 → 分/錫/上庸/爲上庸郡/置都尉. 이런 관점에 따라 위에서처럼 풀었습니다. 또한, [후한서] 군국지 중에 주석(원산袁山의 송서松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직접적으로 나옵니다. 建安二十年復置漢寧郡, 漢中之安陽、西城郡, 分錫、上庸爲上庸郡, 置都尉. )
 
8월, 손권이 합비(合肥)를 포위하자 장료(張遼), 이전(李典)이 이를 격파했다.
 
9월 파군(巴郡)의 7성(七姓)의 이왕(夷王) 박호(朴胡), 종읍후(賨邑侯) 두호(杜濩)가 파군의 이(夷)족, 종민(賨民- 이민족의 일종)을 들어 내부해왔다. [95] 

[95] 손성이 이르길, 朴의 발음은 浮이고, 濩의 발음은 戶라고 했다.

이에 파군을 나누어 박호를 파동(巴東)태수로, 두호(巴西)를 파서태수로 삼고, 모두 열후에 봉했다. 천자가 공에게 명해 승제(承制-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하여 제후(諸侯), 수상(守相-군의 태수와 국의 상)을 봉배(封拜)할 수 있도록 했다. [96]
 
[96] 공연(孔衍)의 [한위춘추]漢魏春秋 – 천자는 공에게 밖의 일을 맡겼는데, 일에 임해 상을 내리는데 혹 신속히 처리해야 할 때가 있었다. 이에 공에게 명해 승제(承制)하여 제후, 수상(守相)을 봉배(封拜)하도록 하며 조령을 내렸다, 
 
- 무릇 군(軍)의 대사(大事)는 상벌(賞罰)로 권선징악(勸善懲惡)하는데 달려있으니 마땅히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사마법(司馬法)에서 “상(賞)이 날을 넘겨선 안 된다(賞不逾日)”고 했으니, 이는 백성들이 신속히 그 선행의 이로움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옛날 (광무제가) 중흥할 때 등우(鄧禹)가 관(關)으로 들어온 뒤 승제(承制)하여 군좨주(軍祭酒) 이문(李文)을 하동태수로 임명했고, 내흡(來歙) 또한 승제하여 고준(高峻)을 통로장군(通路將軍)으로 삼았는데, 그 전(傳-후한서 권16 등구열전(등우, 구순))을 살펴보면 모두 먼저 (임명해 주기를 조정에) 청한 것이 아니라 일에 임해 (태수, 장군의) 인장을 새긴 것임에 분명하다. 이는 즉 세조(世祖-광무제)가 신명(神明-극히 지혜로움)하고 손익(損益)에 통달하여, 신속히 위회(威懷-위엄으로 복종시키거나 덕으로 회유함)를 보여 큰 공훈을 드러내려는 것이었으리라. 
 
춘추(春秋)의 뜻으로 보건대, 대부가 변방으로 나가면 전명(專命-임의로 명령함)하는 일이 있으니, 이는 실로 사직을 이롭게 하고 국가를 평안케 하려는 것일 뿐이다. 하물며 군(君-그대)은 이백(二伯)을 겸임하여 구유(九有-구주)를 다스리고, 실로 이하(夷夏-오랑캐와 중국)를 정벌해 경기(京畿) 바깥에서 군(軍)을 움직여 득실(失得)이 잠깐 동안의 사이에 달려 있으니, 포상하는 것을 멈추고 조령을 기다리며 세무(世務)를 지체시키는 것은 실로 짐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일에 임해 살펴볼 때 응당 총호(寵號-봉호)를 더할 자가 있으면 편의대로 인장(印章)을 새겨 내리도록 하여, 모든 충의(忠義)로운 자들이 장려(獎勵)되고 의심하는 바가 없게 하라.
 
겨울 10월, 처음으로 명호후(名號侯)에서 오대부(五大夫)에 이르는 작위를 두고, 예전의 열후, 관내후와 더불어 모두 6등(等)으로 군공(軍功)을 포상했다. [97]

[97] [위서] – 명호후(名號侯)의 작위 18급(級), 관중후(關中侯)의 작위 17급을 두었고 모두 금인(金印) 자수(紫綬-자주색 인끈)로 했다. 또한 관내외후(關內外侯)의 작위 16급을 두어 동인(銅印) 귀뉴(龜紐-거북모양의 손잡이) 묵수(墨綬-검은색 인끈)로 했다. 오대부(五大夫)는 15급으로 동인(銅印) 환뉴(環紐-둥근 고리모양의 손잡이) 묵수(墨綬)로 했다. 모두 식읍을 두어 조(租)를 받지는 않았다. 예전의 열후, 관내후와 더불어 모두 6등(等)이었다. 

/ 신 송지가 보건대 지금의 허봉(虛封)이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 명호후, 관중후, 관내외후, 오대부, 관내후, 열후…의 6등급)
 
11월, 장로(張魯)가 파중(巴中)으로부터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장로와 그 다섯 아들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유비가 유장(劉璋)을 습격해 익주(益州)를 차지하고 마침내 파중을 점거했다. 장합을 보내 이를 공격하게 했다.
 
12월, 공이 남정(南鄭)으로부터 돌아오며, 하후연을 남겨 한중에 주둔하게 했다. [98]
 
[98] 이 행차 때에 시중 왕찬(王粲)이 오언시(五言詩)를 지어 이 일을 찬미했다, 

“종군하여 고락(苦樂)이 있었으나 / 다만 누구를 뒤따랐는지 물어보라 / 신(神)하고도 무(武)한 이를 뒤따랐으니 / 어찌 오래도록 군을 수고시키겠는가 / 상공(相公)이 관우(關右-관서)를 정벌하여 / 혁노(赫怒)로 천위(天威)를 떨치매 / 일거(一擧)에 훈로(獯虜)들을 멸하고 / 재거(再擧)에 강이(羌夷)들을 굴복시켰도다 / 서쪽으로 변경의 적들을 수습함이 / 홀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것과 같았다 / 상을 베풂이 산악(山嶽)보다 높고 / 술과 고기가 개천을 넘칠 지경이니 /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 / 사람과 말이 모두 살이 오른 채 / 걷거나 수레를 타고 돌아오니 / 빈손으로 출발해 풍족히 돌아왔도다 / 3천리 땅을 개척함에 /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나는 것처럼 쾌속하고 / 노래하고 춤추며 업성(鄴城)으로 들어오니 / 바라던 것은 모두 어김없이 얻었구나"
 
21년(216) 봄 2월, 공이 업으로 돌아왔다. [99] 

[99] [위서] – 신미일, 유사(有司-해당 관원)가 종묘에서 태뢰(太牢)를 올려 고하고 책훈(策勳-공훈을 기록함)했다. 갑오일에 처음 춘사(春祠-봄 제사)를 지내며 영을 내렸다 (※ 춘사령春祠令)
 
- 의논하는 자들이 사묘(祠廟-사당)에서 전(殿)에 오를 때 응당 신을 벗어야 한다고 한다. 내가 석명(錫命-천자가 내린 명)을 받아 칼을 차고 신을 벗지 않은 채 어전에 오르는데(검리상전의 특전을 말함) 지금 종묘에서 일이 있자 신을 벗어야 한다고 하니, 이는 선공(先公-선조)을 존중하느라 왕명(王命)을 바꾸는 것이고, 부조(父祖-부친과 조부, 또는 조상)를 공경하면서 군주(에 관한 예)를 간략히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나는 감히 신을 벗고 전에 오를 수는 없다. 또한 제사에 임해 몸을 씻을 때, 의수(擬水-제사의식에서 씻는 동작을 흉내 내는 것)할 뿐 (실제로) 씻지는 않는다. 무릇 몸을 씻는 것은 청결히 하여 공경하는 것인데, 흉내만 낼 뿐 실제로는 씻지 않는 예법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으며 더욱이 ‘신(神)에게 제사지낼 때는 신이 곁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했으니 이 때문에 나는 친히 물을 받아 씻는 것이다. 
 
또 강신(降神)의 예를 마칠 때 섬돌 아래로 내려가 장막에 이르러 일어선 채 주악(奏樂)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이는 열조(烈祖)들과 함께 누리지 않으며 제(祭)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나는 앉은 채로 주악이 끝나 신(神)을 전송하기를 기다렸다 그 뒤 일어선 것이다. 제사지낸 고기를 얻어 소매에 넣어두었다가 시중(侍中)에게 준 것은 경모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친히 제사를 집전했으니 이 때문에 나는 친히 소매에 넣어두었다가 (제사가) 끝나고 난 뒤 이를 가지고 돌아간 것이다. 중니(仲尼-공자)가 이르길, ‘비록 뭇사람들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당 아래에서 절하겠다’(※)고 했으니 이 말이 실로 진실되구나.
 
※ [논어] 자한편 - 子曰, “麻冕, 禮也, 今也純, 儉, 吾從衆. 拜下, 禮也, 今拜乎上, 泰也. 雖違衆, 吾從下.” 
: 삼베관을 쓰는 것이 예의이나 지금 사람들이 명주관을 쓰는데 이는 검소한 것이므로 나도 뭇 사람들을 따르겠다. 당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의이나 지금 사람들은 당 위에서 절하는데, 이는 교만한 것이다. 비록 뭇 사람들과 어긋나더라도 나는 당 아래에서 절하겠다…예의의 본질에 부합하는 형식을 강조한 것으로, 위에 열거된 몇 가지 기존 예법에 어긋나는 자신의 행동들이 이런 취지였음을 말하기 위해 인용한 것.
 
3월 임인일, 공이 친히 적전(籍田)을 갈았다. [100] 

[100] [위서] – 유사(有司)가 상주했다., 

“사시(四時-네 계절)로 농사일 하는 틈에 강무(講武-무예를 강습함)해야 하나 한(漢)이 진(秦)의 제도를 이어받아 삼시(三時)에는 강무하지 않고 오직 10월에만 거마(車馬-병거와 기마)를 도시(都試-한나라 때 군사훈련을 겸해 무관을 뽑던 제도)하고 장수남문(長水南門)으로 행차해 오영(五營)의 군사들을 모아놓고 8진(八陳)을 짜고 진퇴(進退)하니 이를 승지(乘之)라 했습니다. 

지금 금혁(金革-전쟁)이 끝나지 않아 군사와 백성들이 평소에 무예를 익히니 지금 이후로 가히 사시에 강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가을이 되면 길일을 택해 거기(車騎-병거와 기마)를 크게 모으고 이를 치병(治兵)이라 하면, 위로는 예의와 명분에 부합하고 아래로는 한(漢)의 제도를 이을 수 있습니다.” 

상주한 것이 허락되었다.
 
여름 5월, 천자가 공의 작위를 올려 위왕(魏王)으로 삼았다. [101] (※ 이 이후로 조조를 왕으로 호칭) 

[101] [헌제전]獻帝傳 –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옛 제왕(帝王)들 이래로 비록 호칭이 변하고 작등(爵等)은 서로 같지 않았으나, 원훈(元勳-으뜸가는 공훈)을 기리고 높여 공덕(功德)을 세우고 그 씨성(氏姓)을 빛나게 열어 자손들에 이어지게 하고 뭇 성(姓)들과 더불어 친하게 함에 어찌 다른 점이 있겠는가?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천명을 받아 창업하여 기업을 열고 우리 구하(區夏-중국 땅)를 만들어 고금의 제도를 살펴 작등(爵等)의 차이를 두고 모두 산천(山川)에 봉해 번병(藩屛-울타리와 담장. 왕실을 수호하는 제후, 중신을 비유)으로 세움에, 이성(異姓-성씨가 다른 이들), 친척(親戚)들에게도 나란히 토지를 주어 국(國)에 의거해 왕(王)으로 삼았으니 이로써 천명(天命)을 보전하고 만대의 후사를 편안하고 굳건하게 했으며 대대로 이어져 신하와 군주가 무사(無事)했던 것이다. 세조(世祖-후한 광무제 유수)가 중흥하니 (이성제후왕이 모두 폐지된 직전의 제도를) 때때로 바꾸기 어려워 이에 수백 년 동안 이성(異姓) 제후왕(諸侯王)의 지위를 가진 이가 없었다. 
 
부덕(不德)한 짐이 홍업(弘業-대업)을 이어받자 영토가 나뉘어 무너지고 군흉(群兇-뭇 흉적)들이 제멋대로 해독을 끼치니, 서에서 동으로 이르기까지 그 고통이 실로 극심했으니, 이때에는 오직 난에 빠져들어 선제(先帝)의 성덕(聖德)을 더럽힐까 두려웠도다. 

황천지령(皇天之靈)의 도움으로 그대가 의(義)로써 몸을 떨치게 되어, 벼락같은 신무함(震迅神武)으로 짐을 간난(艱難-고난)으로부터 보위하고 종묘(宗廟)와 화하(華夏-중국)의 유민(遺民)들을 보존했으니, 함기지륜(含氣之倫-생기를 머금은 무리)으로 이에 힘입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대의 부지런함은 후직(后稷)과 우(禹)를 넘어서고 그 충성스러움은 이윤(伊尹), 주공(周公)과 나란하나 겸양과 공손함으로 이를 숨기는구나. 이에 지난 날 위국(魏國)을 열어 그대에게 토우(土宇-강토)를 내리려 할 때 그대가 명을 거스르고 고사(固辭-굳게 사양함)할까 우려하여, 이 때문에 (왕으로 삼으려는) 뜻을 품은 채 굽혀서 그대를 상공(上公)에 봉했으니, 이로써 높은 의를 공경하며 따르고 (더 큰) 훈적(勳績)을 기다리고자 했다. 
 
한수(韓遂), 송건(宋建)이 남쪽으로 파(巴), 촉(蜀)과 결탁하고 뭇 역도들이 합종(合從)하여 사직을 해치려 도모했으나, 그대가 다시 장수들에게 명해 용양호분(龍驤虎奮–용이 머리를 쳐들고 호랑이가 기세를 떨침)하여 그 우두머리를 효시하고 그들의 소굴을 도륙했다. 서쪽을 정벌할 때에 이르러서는, 양평(陽平)의 싸움에서 몸소 갑주(甲冑- 갑옷과 투구)를 입고 험조(險阻)한 땅으로 깊이 들어가, 버러지 같은 도적들을 베어 섬멸하고 그 흉하고 추한 무리들을 멸족시켰다. 서쪽 변경을 쓸어 평정하여 만 리 밖에까지 깃발을 나부끼고 성교(聲敎-교화)를 멀리 떨쳐 우리 구하(區夏-중국)를 편안하게 했다. 

대저 당(唐-요임금), 우(虞-순임금)가 성(盛)할 때는 3후(三后- 우禹, 설契, 후직后稷)가 공을 세웠고, 문왕, 무왕이 흥할 때는 단(旦-주공 단), 석(奭-소공 석)이 보좌했고, 2조(二祖-고조 유방, 광무제 유수)가 대업을 이룰 때는 여러 영웅호걸들이 좌명(佐命)했도다. 무릇 성철(聖哲)한 군주로서 일을 스스로 맡아서 할 때에도 땅을 내리고 서옥(瑞玉-제후를 봉할 때 신표로 주는 옥으로 만든 홀)을 나눠주어 공신(功臣)에 보답하는데, 덕이 부족하여 그대에 의지해 다스리는 짐이 상전(賞典-포상과 의전)을 풍성하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 신기(神祇-천지신령)에 응답하여 만방(萬方)을 위로하겠는가? 
 
이제 그대의 작위를 높여 위왕(魏王)으로 삼는다. 사지절(使持節) 행(行) 어사대부(禦史大夫) 종정(宗正) 유애(劉艾)로 하여금 책서(策書-죽간이나 목간에 적은 임명장)와 옥새, 현토지사(玄土之社)를 흰 띠로 감싸고, 금호부(金虎符) 제1에서 제5, 죽사부(竹使符) 제1에서 제10을 받들도록 한다. 그대는 왕위를 정(正)으로 하되 승상 영 기주목은 예전과 같이 하라. 위공(魏公)의 새수(璽綬-도장과 인끈)와 부책(符冊-부신으로 쓰던 죽간이나 목간)은 (반납하여) 올리라. 짐의 명을 공경히 따라 백성들을 성심으로 긍휼히 여기고 많은 공적으로 편안케 하여, 이로써 우리 조종(祖宗)의 휴명(休命-아름다운 천명)을 드날리도록 하라.”
 
위왕이 상서해 세 번 사양했으나 조서로 세 번 답장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또 손수 조서를 써서 명했다, 
 
“대성(大聖)은 공덕(功德)을 높고 아름답게 여기고 충화(忠和)를 가르침으로 삼는다. 그래서 창업하여 명성을 드리워 백세(百世)에 가히 보기 드물 정도로 하고, 도를 행하고 의리를 바로 세워 역행(力行-힘써 행함)이 가히 효험을 보게 하니, 이로써 훈열(勳烈)이 무궁토록 빛나고 무성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후직(后稷)과 설(契)은 원수(元首-우두머리, 군주)의 총명(聰明)에서 비롯되었고, 주공과 소공은 문왕과 무왕의 지용(智用)에 말미암았다. (군주의 식견으로 발탁되어 중용되었다는 말) 비록 뭇 관원들을 경영하고 있으나 우러러 탄식하고 곰곰이 생각하며 그들을 대해도 어찌 그대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짐이 생각건대 옛 사람들의 공(功)과 아름다움이 그대와 같고, 그대의 충근지적(忠勤之績-충성스럽고 근실한 공적)을 생각하면 이처럼 무성하니, 이에 매번 부신을 새기며 서옥(瑞玉)을 깎고 예(禮)를 베풀어 명책(命冊)하며, 스스로 수문(守文-선대의 덕을 이어받아 나라를 잘 다스림)을 잊은 부덕함을 자나 깨나 개연(慨然-분노하고 슬퍼함)해했다. 지금 그대가 거듭 짐의 명을 어기고 간절히 고사(固辭)하는 것은, 짐의 뜻에 부합하고 후세를 훈도하는 바가 아니다. 그 뜻을 눌러 억제하여 다시 고사(固辭)하지 말라.” 
 
/사체서세(四體書勢)의 서(序)에서 양곡(梁鵠)이 공을 북부위(北部尉)로 삼았다고 했는데(주[68] 참조), [조만전]에서는 『상서우승 사마건공(司馬建公-사마방)이 (공을 북부위로) 천거했다. 공이 왕이 되자 사마건공을 불러 업으로 오게 했다. 함께 환음(歡飮)하며 사마건공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다시 (북부)위가 되면 안 되겠소?” 

사마건공이 말했다, 

“예전에 대왕을 천거한 것은 가히 북부위가 되는 것이 적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이 크게 웃었다. 사마건공의 이름은 방(防)이고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의 부친이다』라고 했다. 
 
신 송지가 사마표(司馬彪)의 서전(序傳)을 살펴보건대, 사마건공은 (상서)우승을 지낸 적이 없으므로 의심컨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왕은(王隱)의 진서(晉書)에서 이르길, 『조왕(趙王-사마의의 아들인 사마륜司馬倫. 사마염의 아들인 혜제 때 외척인 가씨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고, 301년 찬위했다가 곧 쫓겨나고 혜제가 다시 복위)이 찬위하여 할아버지(즉, 사마방)를 황제로 추존하고자 하니, 박사 마평의(馬平議)가 ‘경조(京兆)의 부군(府君-죽은 부친이나 조부의 존칭)이 예전에 위무제(조조)를 북부위로 천거하자 적이 경계를 침범하지 못했으니 이러한 징험이 있었다”고 칭했다』한다. 
 
※ 맨 마지막 부분, 而王隱晉書云趙王簒位, 欲尊祖爲帝, 博士馬平議稱京兆府君昔擧魏武帝爲北部尉, 賊不犯界, 如此則爲有徵 에서 어디까지가 왕은의 [진서] 인용인지 애매한데, 진서 집본(원본은 전하지 않으나 다른 책들에서 인용된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것)에서는 賊不犯界 까지를 [진서]의 인용으로 보더군요. 그런데 如此則爲有徵 라는 말을 주석자인 배송지가 자기 의견으로 덧붙인다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냥 전부를 [진서]의 인용(즉, 마평의의 말)으로 보는 게 더 무난한 것 같아 그런 전제에서 풀었습니다.
 
대군(代郡)의 오환 행(行-대행의 의미) 선우 보부로(普富盧)와 그의 후왕(侯王)이 내조(來朝-와서 조알함)했다. 천자가 명해 왕(王-조조)의 딸을 공주(公主)로 삼고 탕목읍(湯沐邑)을 식읍으로 주었다. 
 
가을 7월, 흉노 남선우 호주천(呼廚泉)이 그의 명왕(名王)을 거느리고 내조(來朝)하자 그를 빈객의 예의로 대우하니 마침내 (호주천은) 위나라에 남아 머물며 우현왕 거비(去卑)로 하여금 그 나라를 감독하게 했다. 
 
8월, 대리(大理) 종요(鍾繇)를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102]

[102] [위서] – 처음으로 봉상(奉常), 종정(宗正)의 관직을 두었다.
 
겨울 10월, 군사들을 조련하고 [103] 마침내 손권(孫權)을 정벌하여 11월, 초(譙)에 이르렀다.
 
[103] [위서] – 왕이 친히 금고(金鼓-징과 북)를 들고 진퇴(進退)를 명했다.
 
22년(217년) 봄 정월, 왕이 거소(居巢)에 주둔했다. 
 
2월, 진군하여 장강 서쪽의 학계(郝谿)에 주둔했다. 손권은 유수구(濡須口)에 있으면서 성을 쌓아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는데, 마침내 이를 핍박해 공격하니 손권이 퇴주(退走)했다. 
 
3월, 왕이 군을 이끌고 돌아오며 하후돈(夏侯惇), 조인(曹仁), 장료(張遼) 등을 남겨 거소에 주둔하게 했다.
 
여름 4월, 천자가 왕에게 명해 천자의 정기(旌旗-깃발)를 세우게 하고, 출입할 때 경필(警蹕-제왕이 거동할 때 행인을 금하고 도로를 치워 경계하는 것)을 칭하도록 했다. 

5월, 반궁(泮宮-제후국에 설치한 학교)을 지었다. 
 
6월, 군사(軍師) 화흠(華歆)을 어사대부로 임명했다. [104]

[104] [위서] – 처음으로 위위(衛尉)의 관직을 두었다. 가을 8월, 영을 내렸다 (※ 구일재령 求逸才令 or 거현물구품행령 擧賢勿拘品行令)
 
- 옛날 이지(伊摯-이윤伊尹)、부열(傅說-은나라 때 재상)은 천인(賤人) 출신이었고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제환공)의 적이었으나 모두 등용하여 나라를 흥하게 했다. 소하(蕭何), 조참(曹參)은 현리(縣吏)였고 한신(韓信), 진평(陳平)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치욕을 겪었으나 마침내 왕업(王業)을 능히 성취하고 그 명성을 천재(千載-천년)에 드리웠다. 오기(吳起)는 장군 직을 탐해 아내를 죽여 자신을 믿게 하고(※) 금을 흩어 관직을 구하고 모친이 죽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나, 그가 위(魏)나라에 있을 때는 진(奏)나라가 감히 동쪽으로 쳐들어오지 못했고, 초(楚)나라에 있을 때는 삼진(三晉-조, 위, 한)이 감히 남쪽을 도모하지 못했다. 

(※ 오기(吳起)는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오기병법(오자병법)의 저자. 노나라가 제나라의 침공을 받을 때 오기를 장군으로 삼으려 했는데, 오기의 부인이 제나라 사람이라 의심을 받자 아내를 죽여 의심을 풀고 장군으로 임명됨. [사기] 권65 손자오기열전 참조)

지금 천하에 지덕(至德)한 자로 민간에 방치된 이는 없는가? 과감용맹하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果勇不顧) 적을 맞아 힘써 싸우는(臨敵力戰) 이는 어떠한가?  문속(文俗-예법을 고수하며 습속에 안주함)의 관리라도 높은 재능과 남다른 재질이 있어 혹 장수(將守-장수와 태수)직을 감당할 수 있는 자, 오명을 뒤집어쓰고 웃음거리가 되고 혹 불인불효(不仁不孝)하더라도 치국(治國) 용병(用兵)의 술(術)을 갖춘 자, 그들 각각을 천거하여 알리고 (민간에) 남겨두지 말라.
 
겨울 10월, 천자가 왕에게 명해 면류관에 12줄의 류(旒-면류관의 앞뒤에 드리운 주옥을 꿴 술. 천자가 12류)를 달도록 하고, 금근거(金根車)를 타며 6필의 말이 끌게 하고 오시부거(五時副車-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수행수레)를 두게 했다. 오관중랑장(五官中郎將) 조비(曹丕)를 위(魏) 태자(太子)로 삼았다.
 
유비가 장비(張飛), 마초(馬超), 오란(吳蘭) 등을 보내 하변(下辯)에 주둔하게 하니, 조홍을 보내 이에 맞서게 했다.
 
23년(218) 봄 정월, 한(漢) 태의령(太醫令) 길본(吉本)이 소부(少府) 경기(耿紀), 사직(司直) 위황(韋晃)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허도를 공격하고 승상장사(丞相長史) 왕필(王必)의 둔영을 불태웠다. [105] 

[105] [위무고사]魏武故事 에 기재된 영(令) – 

영(領) 장사(長史) 왕필(王必)은 내가 형극(荊棘-가시, 고난)을 헤치고 나올 때의 관리로, 충성스럽고 유능하며 일에 부지런하고 마음이 철석(鐵石)같은 나라의 좋은 관리이다. 일에 차질을 빚어 오랫동안 불러들이지 못했으니, 이는 천리마를 버려두고 타지 않으면서 허둥대며 (다른 데서) 이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교령을 내려 그를 불러들이니 적합한 곳에 서임하고 영 장사가 통수하는 일은 예전처럼 하라.

왕필은 영천(潁川)의 전농중랑장(典農中郎將) 엄광(嚴匡)과 함께 이들을 토벌해 참수했다. [106]

[106]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 – 이때 경조(京兆)에 김의(金禕)란 자가 있었는데 자(字)는 덕의(德禕)로 대대로 한(漢)의 신하였다. 김일제(金日磾- 흉노 휴도왕의 태자로, 흉노 곤사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귀부할 때 끌려왔는데 그 뒤 한의 신하가 되어 김씨 성을 하사받음)가 망하라(莽何羅)를 토벌한 이래 충성(忠誠)이 현저(顯著)하고 누대에 걸쳐 명절(名節)을 드러냈다. 

한(漢)의 제위가 장차 옮겨가려 하는 것을 보고 가히 계흥(季興-중흥)해야 한다고 말하며 탄식하고 발분하여 마침내 경기(耿紀), 위황(韋晃), 길본(吉本), 길본의 아들 길막(吉邈), 길막의 동생 길목(吉穆)등과 결모했다. 

경기(耿紀)의 자는 계행(季行)이고 어려서 미명(美名)이 있었다. 승상연(丞相掾)이 되었는데 왕이 그를 심히 공경하고 남달리 여겨 시중(侍中)으로 올리고 소부(少府)를 맡겼다. 길막(吉邈)의 자는 문연(文然)이고 길목(吉穆)의 자는 사연(思然)이다. 
 
김의가 비분강개하니 김일제의 기풍이 있었고 또한 왕필(王 必)과 서로 친하니 이를 이용해 만약 왕필을 죽이면 천자를 끼고 위(魏)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유비를 도우려 했다. 

이때 관우(關羽)가 강성했는데, 왕이 업에 있으면서 왕필을 남겨 군무를 관장하며 허도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 문연(文然-길막) 등이 잡인(雜人)과 가동(家僮) 천여 명을 이끌고 밤중에 문을 불태우고 왕필을 공격하니, 김의가 사람을 보내 내응하여 활을 쏘아 왕필의 어깨를 맞혔다. 왕필은 공격하는 자가 누군지 몰랐고 김의와 평소 친했기에 김의에게로 달아나 의탁하려 했다. 

(김의의 집에 이르러) 밤중에 덕의(德禕)를 부르니 김의의 집에서는 그가 왕필인지 모르고 문연 등으로 착각하여 대답하길, 

“왕장사(王長史)는 이미 죽었습니까? 경들의 대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왕필이 다른 길로 달아났다. 다른 일설에 의하면, 왕필이 김의에게 몸을 맡기고자 하니 그의 장하독(帳下督)이 왕필에게 말하길 

“오늘 일이 누구 짓인지 아는데 거기에 의탁하려 하십니까?”

라고 하며 왕필을 부축해 남성(南城)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때마침 날이 밝았고 왕필이 여전히 건재하니 문연 등의 무리가 궤멸되어 패했다. 그 10여 일 뒤 왕필은 끝내 상처로 인해 죽었다. 
 
/ [헌제춘추] – 경기, 위황 등을 체포해 참수하려 하자 경기가 위왕(魏王)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내가 뜻을 살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끝내 아이 같은 것들 때문에 그르쳐졌도다!” 

위황은 돈수박협(頓首搏頰-직역하면 머리를 구부리고 뺨을 때린다인데, 머리를 땅에 내리찍었다는 말인 듯)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 [산양공재기] – 왕은 왕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해 한(漢)의 백관들을 불러 업으로 오게 했다. 불을 껐던 자를 왼쪽에, 끄지 않은 자를 오른 쪽에 서도록 명했다. 뭇 사람들이 불을 끈 자가 필시 무죄일 거라 생각하여 모두 왼쪽으로 붙었다. 이에 왕이 말하길, 

“불 끄러 나오지 않은 자는 난을 돕지 않은 자들이고, 불을 껐던 자가 실제로는 적(賊)이다.”

라 하고는 모두 죽였다.
 
조홍이 오란(吳蘭)을 격파하고 그 장수 임기(任蘷) 등을 참수했다. 
 
3월, 장비,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음평(陰平)의 저(氐)족 강단(強端)이 오란을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왔다.
 
여름4월, 대군(代郡), 상곡(上谷)의 오환 무신저(無臣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을 보내 이를 토벌하여 격파하게 했다. [107]
 
[107] [위서]에 기재된 왕령(王令) – 지난 겨울 하늘이 역려(疫癘-역병)를 내려 백성들이 조상(凋傷-시들고 상함)하고 바깥에서 군을 일으켜 개간지가 감소하니 내가 이를 심히 우려한다. 이에 관원과 백성, 남녀에 명을 내리니, 여자 나이 70세 이상으로 남편이나 자식이 없는 자, 12세 이하로 부모형제가 없는 자,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없고 손으로 능히 경작할 수 없고 발로 나다닐 수 없는 자로 처자식과 아비 형제, 산업이 없는 자들에게 죽을 때까지 곡식을 대어주라. 어린 아이가 12세에 이르기까지 빈궁하여 스스로 부양할 수 없는 집은 그 수에 따라 급대(給貸)해 주라. 늙은이를 봉양해야 하는 자로 (그 노인의) 나이 90세 이상이면 가호당 1명 씩 사역을 면제하라. 
 
6월, 영을 내렸다.
 
 “옛날에 장사지낼 때는 반드시 척박한 땅에 묻었다. 서문표(西門豹-전국시대 위魏나라 정치가. 업령鄴令을 지냄)의 사당 서쪽 들판 위를 수릉(壽陵)으로 하여 그 높은 곳에 터를 잡고 봉분을 만들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 주례(周禮)에서는 총인(塚人)이 공(公)의 묘지를 관장하고 무릇 제후(의 무덤)를 좌우의 앞에, 경대부는 뒤에 둔다고 했고, 한나라 제도에서 또한 이를 배릉(陪陵)이라 일컬었다. 공경(公卿) 대신(大臣) 열장(列將)들 중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수릉(壽陵)을 배종하도록 하고(자신의 무덤 옆에 배릉으로 안장하라는 말) 그 크기를 넓게 잡아 조역(兆域-묘역)으로 삼기에 족하도록 하라.”
 
가을 7월, 군사를 조련하고 마침내 서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9월, 장안에 이르렀다.
 
겨울 10월, 완(宛)의 수장(守將) 후음(侯音) 등이 반란을 일으켜 남양태수를 붙잡고 관원과 백성들을 겁략(劫略)하여 완을 보전했다. 당초 조인(曹仁)이 관우(關羽)를 토벌하기 위해 번성(樊城)에 주둔했었는데 이 달에 조인에게 완을 포위하게 했다.

24년(219) 봄 정월, 조인이 완을 함락하고 후음을 참수했다. [108] 

[108] [조만전] – 이때 남양인들이 요역(繇役)에 고통스러워하자 후음이 태수 동리곤(東里袞)을 붙잡고 관원, 백성들과 더불어 모반하고 관우와 연합했다. 남양의 공조(功曹) 종자경(宗子卿)이 후음을 찾아가 설득하며 말했다, 

“족하께서 민심에 순(順) 하여 대사를 일으키니 원근에 그 풍채를 우러러 보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군(郡)의 장령들을 붙잡은 것은 역(逆)하는 것으로 무익한 일입니다. 어찌 그를 보내지 않으십니까? 내가 그대와 힘을 합치면 조공(曹公)의 군이 와도 겨룰 수 있고 관우군 또한 당도할 것입니다.” 

후음이 이 말을 좇아 태수를 풀어주었다. 종자경은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달아나 태수와 함께 남은 백성들을 거두어 후음을 포위했고, 때마침 조인군이 도착하자 함께 힘을 합쳐 후음을 멸했다.
 
하후연이 양평(陽平)에서 유비와 싸우다 유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3월, 왕이 장안으로부터 야곡(斜谷)을 나왔는데, 군(王)이 요지를 차단하며 한중에 임하여 마침내 양평에 도착했다. 유비는 험지에 의지해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다. [109]

[109] [구주춘추] – 이때 왕이 환군하고자 하여 ‘계륵(雞肋-닭갈비)’이라는 영을 내리니 관속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주부(主簿) 양수(楊脩)가 스스로 군장을 엄히 꾸리니 사람들이 놀라 양수에게 물었다, 

“이를 어찌 알았습니까?” 

양수가 말했다, 

“무릇 계륵(雞肋)은 버리기에는 아깝고 먹기에는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이를 한중(漢中)에 비유한 것이니 왕께서 환군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여름 5월, 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가을 7월, 부인 변씨(卞氏)를 왕후(王后)로 세웠다.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曹仁)을 도와 관우(關羽)를 공격하게 했다. 
 
8월, 한수(漢水)가 범람해 우금군에 물이 흘러들어 군이 수몰했다. 관우가 우금을 사로잡고는 이에 조인을 포위했다. 서황(徐晃)에게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9월, 상국(相國) 종요(鍾繇)가 서조연(西曹掾-승상 또는 상국의 속관) 위풍(魏諷)의 반란에 좌죄되어 면직되었다. [110]

[110] [세어] - 위풍(魏諷)의 자는 자경(子京)으로 패(沛)국 사람인데 사람들을 미혹하는 재주가 있어 업도(鄴都)를 경동(傾動)하니 이 때문에 종요가 그를 불러서 기용했다. 대군(大軍)이 돌아오기 전, 위풍은 몰래 도당(徒黨)을 결성하고 또한 장락위위(長樂衛尉) 진의(陳禕)와 함께 업도를 습격하기로 모의했다. 기일이 되기 전 진의는 두려운 나머지 이를 태자에게 고하니, 위풍은 주살되고 이에 연루되어 죽은 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 왕창(王昶)이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며 말할 때, ‘제음(濟陰)군의 위풍’(濟陰魏諷)이라 했는데(※ 왕창전에 나옴) 여기선 ‘패국 사람(沛人)’이라 하니, (어느 쪽이 맞는지) 상세히 알 수 없다.
  
겨울 10월, 군(軍)이 낙양으로 돌아왔다. [111] 

[111] [조만전] – 왕이 다시 북부위의 관아를 수리해 예전보다 더 지나치게 하였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상서(上書)하여, 관우를 토벌하는데 자효(自效-스스로 힘을 다해 노력함)할 것이라 했다. 왕이 낙양으로부터 남쪽으로 관우를 정벌했다. 미처 이르기 전에 서황이 관우를 격파하고 관우는 달아나니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렸다. 왕이 마피(摩陂)에 주둔했다. [112]

[112] [위략] – 손권이 상서하여 칭신(稱臣)하고 천명(天命)에 관해 진술했다. 왕이 손권의 글을 바깥에 보이며 말했다, “이 아이가 나를 화롯불 위에 걸터앉게 하려는 구나!” 
 
시중 진군(陳群), 상서 환계(桓階)가 상주했다, 

“한(漢) 안제(安帝) 이래로 정치가 공실(公室)을 떠나고 국통(國統)이 수차례 끊어져 오늘에 이르니 오직 명호(名號)만 남아 한 척의 땅과 한 명의 백성조차 모두 한(漢)의 소유인 것이 없습니다. 기운(期運-운수)은 오래전에 이미 다했고 역수(曆數)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으니 오늘에야 비로소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환제, 영제 사이에 여러 도위(圖緯-하도河圖와 위서緯書. 도참비기)에 밝은 자들이 모두 말하길, ‘한(漢)의 행기(行氣)가 다했으니 응당 황가(黃家)가 흥할 것”이라 한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그 때에 응하여(應期) 천하의 십분의 구를 차지하고도 복종하여 한(漢)을 섬기니, 뭇 생명들이 기대하며 우러르고 멀고 가까이에서 원망하면서도 찬탄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멀리 있는 손권이 칭신하니 이는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하여 이기제성(異氣齊聲–서로 다른 기운들이 같은 말을 함. 이구동성)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우(虞), 하(夏)는 겸손히 사양하지 않았고 은(殷), 주(周)는 주저 없이 주살하고 방벌했으니, 이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천명을 알았기에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위씨춘추] – 하후돈이 왕에게 말했다, 

“천하가 한조(漢 祚)가 이미 끝나고 다른 대(代)가 바야흐로 일어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능히 백성의 해악을 제거하여 백성들이 귀의하는 자가 곧 백성의 주인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30여 년간 군사들을 이끌어 그 공덕이 여서(黎庶-서민, 백성)에 드리웠고 천하가 (전하께) 귀의했으니 하늘과 백성에 순응할 뿐 어찌 다시 의심하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 (논어에서)『(효도와 우애가) 정치에까지 이르니 이 또한 정치하는 것(施於有政, 是亦爲政)』이라 했다. (※) 만약 천명이 내게 있다면 나는 주문왕(周文王)이 될 것이다.” 
 
(※ 논어 위정편 或謂孔子曰, “子奚不爲政?” 子曰, “書云,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 어떤 이가 공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정치를 하지 않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서경에서 이르길, ‘효로다! 오직 효도하고 형제에 우애하는 것이 정치에까지 이르는 것이다’고 했다. 이(효도와 우애) 또한 정치를 하는 것이니, 어찌 그것(보통 말하는 정치)만을 두고 정치라고 하겠는가?”)
 
 / [조만전]과 [세어]에서 함께 이르길 – 환계(桓階)가 왕에게 정위(正位)를 권하자, 하후돈은 의당 먼저 촉을 멸해야 하며 촉이 망하면 곧 오가 복종할 것이니 두 지역을 평정한 연후에 순(舜), 우(禹)의 궤범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왕이 이에 좇았다. 왕이 훙(薨-왕공, 귀인의 죽음)하자 하후돈은 예전에 했던 말을 상기하고 한스러워 하다 발병하여 죽었다. 

/ 손성(孫盛)이 이에 관해 평했다, 

“하후돈은 한(漢) 의 관리가 된 것을 수치스러워 하며 위(魏)의 인장을 구해서 받았다. 환계는 반듯하고 돈후한 인물로 의직지절(義直之節-의롭고 곧은 절의)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의 전기(傳記)(하후돈전, 환계전)를 살펴볼 때 [세어]의 말이 그릇된 것이다.”
 
25년(220) 봄 정월, 낙양에 이르렀다. 손권이 관우를 공격해 참수하여 그 수급을 보내왔다.
 
경자일, 왕이 낙양에서 붕(崩-천자의 죽음. 崩>薨)하니 그때 나이 66세였다. [113] 

[113] [세어] – 태조가 한중으로부터 낙양에 이르러, 건시전(建始殿)을 세우면서 탁룡사(濯龍祠)의 나무를 베어내자 피가 흘러나왔다. 

/[조만전] – 왕이 공(工-공인?) 소월(蘇越)을 시켜 아름다운 배나무를 옮기게 했는데, 이를 파내다 뿌리가 상처를 입자 피가 흘러나왔다. 소월이 정황을 보고하니 왕이 친히 가서 살펴보고 이를 꺼려하며 상서롭지 못하게 여겼는데, 돌아온 뒤 병으로 드러누웠다.

다음과 같은 영을 남겼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해 옛 법을 따를 수 없으니 장례가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도록 하라. 군을 이끌고 둔수(屯戍)하는 자는 그 둔부(屯部)를 떠나지 말고 유사(有司)들은 각자 직임을 다하라. 평상복으로 염(斂)하고 금옥진보(金玉珍寶)를 묻지 말라.” 

시호를 무왕(武王)이라 했다. 
 
2월 정묘일, 고릉(高陵)에 장사지냈다. [114]
 
[114] [위서] – 태조가 해내(海內)를 통어(統禦)한 이래 뭇 추악한 것들을 베어서 멸했는데, 행군(行軍), 용사(用師-용병)할 때는 대체로 손자, 오자의 법을 가늠해 이에 의거하고, 사안에 따라 기책을 세워 적을 속여 승리하니 변화가 신과 같았다. 스스로 병서(兵書) 10만 여 자를 지어 제장들이 정벌할 때 모두 이 신서(新書)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했다. 일에 임해 또한 손수 절도(節度-명령)를 내리니 영에 따르는 자는 승리하고 위배하는 자는 패배했다. 진을 치고 적과 대적할 때는 편안하고 한가로워 마치 싸우려 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결기승승(決機乘勝-결정적인 계기에 결단해 승세를 탐)할 때에는 그 기세가 용솟음치니, 이 때문에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겼고 군이 요행으로 이기는 일은 없었다. 
 
사람을 알아보고 잘 살펴 미혹하여 속이기 어려웠는데, 행진(行陳-군진) 사이에서 우금, 악진을 발탁하고 패망한 적들 중에서 장료, 서황을 취하니, 모두 좌명(佐命)하여 공을 세우고 명장(名將)으로 섰고 그 외 세미(細微)한 신분에서 발탁되어 목(牧)이나 태수에 오른 자는 일일이 헤아릴 수도 없다. 이로써 대업(大業)을 창조(創造)하고 문무(文武)를 아울러 베풀었는데, 어군(禦軍)한 지 30여 년 동안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낮에는 무책(武策)을 의논하고 밤에는 경전(經傳)을 생각했다.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부(賦)를 짓고 새로운 시(詩)를 지으면 여기에 관현(管絃)을 입혀 모두 악장(樂章)을 이루었다. 재력(才力)이 남보다 뛰어나 손수 활을 쏘아 나는 새를 맞추고 맹수를 사냥했으니 일찍이 남피(南皮)에서 꿩을 사냥해 하루에 63마리를 잡은 적도 있다. 궁실을 짓고 기계(器械)를 수리함에 이르러서는 법칙으로 삼지 않을 것이 없으니 모두 그 뜻을 다 펼쳤다. 
 
고아(雅) 한 성정으로 절검(節儉-검소)하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후궁(后宮)들은 금수(錦繡-수놓은 비단)를 입지 않고 시어(侍禦)하는 이들은 두 가지 이상으로 채색된 신을 신지 않았고, 휘장과 병풍이 헐어지면 기워서 쓰고 이부자리는 따뜻함을 취할 뿐 장식하는 일은 없었다. 성읍을 함락하여 미려(美麗)한 물건을 얻으면 이를 모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내리니, 훈노(勳勞-공훈과 노고)가 있는 자에게는 의당 상을 주며 천금을 아끼지 않았고, 공이 없으면서 시혜를 바라는 자에게는 한 오라기 털조차 나누어 주지 않았으며, 사방에서 헌어(獻禦-진상)한 물건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나누었다. 일찍이 말씀하시길 송종(送終-장례)의 제도에서 습칭(襲稱-수의)의 수가 번잡하여 무익하고 풍속에서도 또한 이를 허물로 여긴다 하시고, 이에 미리 스스로 죽은 뒤에 입을 의복을 만드셨으니 네 상자에 불과했다.
 
/ [부자] – 태조가 시집가고 장가갈 때의 사치하고 어그러짐을 우려하여 공녀(公女)를 시집보낼 때 따르는 계집종을 10명을 넘기지 않았다. 
 
/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 – 한나라 때 안평(安平)의 최원(崔瑗), 최원의 아들 최식(崔寔), 홍농의 장지(張芝), 장지의 동생 장창(張昶)이 모두 초서(草書)를 잘 썼는데 태조가 이들에 버금갔다. 환담(桓譚), 채옹(蔡邕)은 음악에 능하고 풍익(馮翊)의 산자도(山子道), 왕구진(王九眞), 곽개(郭凱) 등이 위기(圍棋-바둑)를 잘 뒀는데 태조가 이들과 동등하게 능했다. 또 양성법(養性法)을 좋아하고 방약(方藥)을 알아 방술지사(方術之士)들을 초빙하니, 여강의 좌자(左慈), 초군의 화타(華佗), 감릉의 감시(甘始), 양성의 극검(郤儉)을 끝내 이르게 했다. 또한 1척에 이르는 들의 칡을 먹었고, 또 적게 먹고 짐주(鴆酒)를 많이 마셨다.
 
/ [부자] - 한나라 말 여러 왕공(王公)들이 왕의 복장을 내버려두고 복건(幅巾)을 평상복(雅)으로 삼으니 이에 원소(袁紹), 최균(崔鈞) 같은 무리도 비록 장수(將帥)이지만 모두 겸건(縑巾-고운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위(魏) 태조는 천하가 흉황(凶荒)해 자재(資財)가 부족하다 하여 옛 피변(皮弁-흰 사슴 가죽으로 만든 고깔모양의 모자)을 본떠서 겸백(縑帛)을 재단해 갑(帢- 모자)으로 썼는데, 간편함을 따르던 시세에 부합하였고 그 색깔로 귀천(貴賤)을 구별할 수 있어 지금까지 시행되었으나 가히 군용(軍容)이라 할 것이고 국용(國容)은 아니다. (※ 군중에서나 사용될 복장이지 나라 안에서 두루 사용될 용모, 복식은 아니라는 말)
 
/ [조만전] – 태조는 그 사람됨이 경박하여 위중(威重-위엄과 무거움)이 없고 음악을 좋아해 창우(倡優-가무인)를 옆에 두고 항상 밤낮으로 즐겼다. 경초(輕綃-생사生絲로 만든 가벼운 옷)를 입고, 몸에는 작은 가죽주머니를 차고 수건이나 잡다한 물건들을 넣어 두었으며, 때로는 갑모(帢帽- 약식 모자의 일종)를 쓰고 빈객을 만나기도 했다. 매번 다른 이와 담론할 때는 농언(弄言-농담)을 즐겨 말하며 숨기는 것이 없었고, 크게 기뻐하며 웃을 때는 머리가 탁자에 처박혀 술안주와 반찬으로 건책(巾幘-두건 모양의 관모)이 더럽혀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경박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지법(持 法-법을 집행함)이 준엄하고 가혹해 제장들 중에 자신보다 뛰어난 계책을 내놓는 자가 있으면 법(法)을 들어 주살하고, 예전에 알던 사람으로 오래된 원한이 있으면 또한 모두 (죽여서) 남겨두지 않았다. 형살(刑殺)할 때에는 번번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하면서도 끝내 살려주지 않았다. 당초 원충(袁忠)이 패상(沛相)이었을 때 태조를 법으로 다스리려 했었고 또한 패국(沛國)의 환소(桓邵)가 태조를 업신여겼던 일이 있다. (태조가) 연주목이 되었을 때 진류의 변양(邊讓)이 자못 태조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자 태조가 변양을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하니 원충, 환소가 함께 교주로 피난 갔다. 태조는 사자를 (교지)태수 사섭(士燮)에게로 보내 그들을 모두 죽이도록 했다. 환소가 자수하여 와서 뜰에서 배사(拜謝-절하며 사죄함)하자, 태조가 말하길, 

“무릎을 꿇는다한들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라 하며 끝내 죽였다. 
 
항상 출군하여 보리밭을 가로질러 행군할 때는 영을 내리길, 

“사졸들은 보리를 망치지 말라.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

고 하니 기병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보리에 붙어서 서로 지탱했다. 그런데 태조의 말이 날뛰다 보리밭으로 뛰어들자 주부(主簿)에게 명해 그 죄를 논의하게 했다. 주부가 대답하길, 

“춘추의 뜻으로 볼 때 죄는 존귀한 자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고 했다. 태조가 말했다, 

“법을 제정해놓고 스스로 어겼으니 어찌 아랫사람들을 통수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군의 우두머리이므로 스스로 죽을 수는(自殺) 없으니 스스로 형을 받기를(自刑) 청한다.” 

그리고는 검을 쥐고 머리카락을 잘라 땅에다 두었다. 또한 총애하는 희(姬-첩)가 있어 태조가 낮잠 자는 것을 늘 수종했는데, 태조가 베개를 베고 누우며 말하길, 

“조금 있다가 나를 깨워라”

고 했다. 희(姬)는 태조가 편안히 잠든 것을 보고 깨우지 않았는데, 태조가 스스로 잠이 깬 뒤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항상 적을 토벌할 때 늠곡(廩穀-녹미와 양식)이 부족하였는데, 담당 관원에게 

“사정이 어떠한가?”

라고 은밀히 물었다. 담당관원이 말하길, 

“작은 곡(斛)을 쓰면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 升-斗-斛-石으로, 1곡은 10두)

라고 하자 태조가 

“좋다”

라고 말했다. 그 후 군중 사람들이 태조가 군사들을 속인다고 하니 태조가 담당 관원에게 말했다, 

“특별히 그대를 죽여 군사들을 진정시켜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참수하고 그 머리를 취해 이마에 글을 써놓길, 

“작은 곡(斛)을 써서 관곡(官穀)을 도적질했으니 군문(軍門)에서 참수했다”

고 했다. 그 혹학변사(酷虐變詐-혹독, 잔인하고 요리조리 속임)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평한다 ―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원소가 4주(四州)에서 호시(虎視-범처럼 노려봄)함에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우내(宇內-천하)를 편달(鞭撻-독려)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矯情任算)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皇機-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總禦)하고 홍업(洪業-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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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3
11:14:58 (*.148.4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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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9.30
14:31:15
(*.104.28.55)
도겸 측간->조숭 측간/ 장초 삼족->장막 삼족으로 수정합니다.

venne

2014.03.02
22:54:21
(*.111.16.211)
욍굉(王肱), 왕굉으로 수정요청합니다.

breathtaker

2014.03.23
13:01:31
(*.177.28.130)
"설란은 패하고 여포는 달아났고 마침내 진란 등을 참수했다."

원문에서는 이름만 나와 있는데(蘭), 문맥상 진란이 아니라 설란으로 보입니다. 수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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