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한(東漢) 영제 중평(中平) 4년(187) 겨울 위(魏)나라 문제(文帝)는 휘(諱)를 비(丕)라 하고, 자(字)를 자환(子桓)이라고 하며, 무제(武帝) 태조의 맏아들로 초현에서 태어났다.(1)

(1) 위서(魏書) - 문제가 태어날 때, 푸른 색 운기(雲氣)가 둥근 모양으로 수레 덮개처럼 걸쳐 있다가 하루 만에 없어져 버렸는데, 이것을 바라본 자들은 지극히 존귀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조비는 나이 여덟에 이미 글을 잘 지었고, 뛰어난 재주가 있어 경전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꿰뚫었다. 또한 말 타기와 활쏘기에도 뛰어났고, 검술을 좋아하였다. 무재(茂才 : 秀才)에 추천되었으나 나가지는 않았다.

건안 16년(211)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에 임명되었고, 부승상(副丞相)이 되었다.

22년(217) 위나라의 태자에 옹립되었다.(2) 

(2) 위략(魏略) - 태조가 생각지도 않은 시기에 태자를 세웠으므로 조비는 스스로 의아해했다. 그 당시 관상을 잘 보는 고원려(高元呂)라는 사람이 있어 불러서 물어보자, 


“그 고귀함은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수명은 얼마나 되오?”

라고 물으니, 고원려는 

“그의 수명은 40세 때 작은 고통이 있겠지만, 이때를 지나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 결국 40세 때 죽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그 자리를 이어받아 승상이 되었고 위왕이 되었으며, 자신의 모친 왕후(王后) -태조의 비(妃), 변후(卞后)를 가리킴- 를 왕태후(王太后)라고 했다.(3)

(3) 원굉(袁宏)의 한기(漢紀)에 한나라 황제의 조서를 기재하여 이르길 - 「위 태자 조비 : 옛날 황천이 그대의 현고(顯考:亡父, 즉 조조)에게 나의 황가를 돕도록 하여 마침내 군흉을 물리치고 구주를 평정하였으니 드넓은 공적이 무성히 쌓여 우주에 빛나 짐이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공손히 모아 병풍에 의지하여 정치한 것이 20여년이다. 하늘은 노인 한 명 남겨두어 나 한명을 영원히 보전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 일찍이 세상을 뜨게 하였으니 슬프고 마음 아프구나. 조비는 누대가 명망을 누려왔으니 응당 문무를 겸비하여 조상의 업적을 이어 밝혀야 할 것이다. 지금 사지절 어사대부 화흠으로 하여금 책조를 받들어 조비에게 승상의 인수와 위왕의 도장을 내리고 기주목에 봉한다. 바야흐로 지금 바깥으로는 남은 도적이 있고 멀리 있는 이민족이 복속하지 않았으며 변경에 전투 깃발과 북소리가 상존하고 간과가 그 칼날을 감추지 못했으니 이때가 바로 위대한 공업을 파양하여 공을 세우고 이름을 드리우는 시기이다. 어찌 양암(諒闇)의 예법을 얻어 지켜 증자와 민자건의 뜻을 다하겠는가? 조비는 공경히 짐의 명령에 복종하여 우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바야흐로 다만 이로써 뭇 공업을 밝히어 이로써 짐의 뜻에 부합하도록 하라. 아~! 가히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건안 25년(220) 연강 원년(延康元年)으로 바꾸었다.

연강 원년(220) 2월 16일(4) 태중대부(太中大夫) 가후를 태위로, 어사대부(御史大夫) 화흠(華欽)을 상국(相國)으로 삼았고, 대리(大理) 왕랑(王郞)을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했다. 

(4)위서에 기제된 경술庚戌일의 령

과 나루는 상인과 여행객이 통하기 위함이고, 연못과 동산은 기근(災荒=灾荒)을 막기 위함인데, 금령을 세우고 세금을 무겁게 하니,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 아니노라. (제왕의 정원)의 금령을 없애고, 관과 나루의 세금을 가볍게 하여, 모두 십분의 일로 되돌리도록 하라.”


신해辛亥, 제후왕, 장수, 재상은 이미 아래 장수에게 조 만곡萬斛, 비단 천필千匹,금은金銀을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사자使者로 군국郡國을 돌아다니도록 보내어, 이치를 벗어나는 과한 조세를 부당하게 부과한 횡포하고 잔악한 사람이 있으면, 그 죄를 들어냈다.


아울러 산기상시(散騎常侍)와 시랑(侍郞)을 각각 네 명씩 두고, 환관 중에서 벼슬을 하는 자는 각 부서의 령(令) 이상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런 명령을 황금으로 된 간책에 기록하게 하여 돌로 된 방에 보존케 하였다.

이전 한나라 희평(熹平) 5년(176) 황룡(黃龍)이 초현에 출현하자, 광록대부(光祿大夫) 교현(橋玄)이 태사령(太史令) 단양(單颺)에게 물었다.

“이는 무슨 상서로운 조짐이오?”

단양이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 나중에 반드시 왕 노릇하는 자가 일어날 것이니, 50년이 채 못 되어 활용이 당시 한 번 출현할 것입니다. 하늘이 안배한 일은 반드시 예견된 조짐이 있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뜻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내황(內黃) 은등(殷登)은 말없이 듣고는 이 말을 기억해 두었다. 이로부터 4,50년이 지나서도 은등은 여전히 생존해 있었다.

3월 황룡이 초현에 출현하자, 은등은 소식을 듣고서 말했다. 

“단양의 말이 이렇게 증명되는구나.”(5)

(5) 魏書曰:王召見登 謂之曰,

위서(魏書)에서 가로되 : 왕(조비)이 소견(召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내어 만나 봄)하고자 하여 (은등殷登이) 나아갔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옛날 성풍(成風)이 초구(楚丘)의 점괘(繇而)를 듣고 계우(季友)를 경사(敬事)하였고, 


[춘추점례 春秋占例] - 成季(성계:魯나라 季友)가 출생하려 할 때 그 부친인 桓公(환공)이 卜楚丘(복초구:점복을 관장하는 대부)의 아비(父)에게 점을 치게 했다. 복초구의 아비는 점괘를 얻고 난 뒤 이같이 풀이했다.


“사내아이로 그 이름은 友라고 하는데(계우가 태어났을 때 그의 손바닥에 무늬가 있었는데 과연 友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우’로 지었다고 한다) 군주의 오른편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양사(兩社:주사周社와 박사亳社. 박사는 은나라 토지신을 모신 사당) 사이에 머물며 공실(公室)의 보필이 될 것입니다. 계씨 집안이 망하게 되면 노나라는 번창하지 못할 것입니다.”


季友: 성계(成季)라고도 전하며 환공(桓公)의 아들이며 장공(莊公)의 동생이다. 두 형 경보(慶父)와 숙아(叔牙)의 횡포에 도망다니다가 장공의 아들 신(申)을 세우니, 그가 희공(僖公)이다.

成風: 희공(僖公)의 어머니

楚丘: 거북점을 치는 노나라의 점복관 복초구(卜楚丘)의 이름

敬事: 공경하여 섬김


등신(鄧晨)은 채소공(蔡少公)의 말을 믿고 나아가 광무(光武:광무제 유수(劉秀)의 시호)를 몸소 받아들였습니다.


[십팔사략 제3권十八史略卷之三] - 왕망이 화폐를 개혁하여 화천이라하자, 어떤사람이 그 글자를 백수진인(白水眞人/貨泉을 파자)이라하였다.


수는 결국 남수향에서 일어났다. 코뼈가 우뚝하고 이마가 중앙이 볼록하게 일어나 뿔과 같았다.또 상서를 배워서 대의를 통하였다.


일찍이 채소공의 집을 지나다가 들렀는데, 소공이 도참을 배웠으므로 말하여,


"유수는 마땅히 천자가 될것이다"하였다. 다른자가 말하기를,


"국사공 유수인가"하자 유수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내가 아닌 줄 아는가"​


나아가 몹시 늙어 점술(占術)을 복응(服膺)하여, 천도(天道)를 기록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은등에게) 곡식 300곡을 주어 나아가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3월 3일 전장군 하후돈을 대장군에 임명하였다. 예맥(濊貊)과 부여(夫餘)의 선우(單于) 언기(焉耆), 우전(于闐)의 왕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6)

(6)위서(魏書) - 병술(丙戌), 영사관이 상주를 올려 중, 려, 희, 화의 직을 복구하여 호천을 공경하고 역상, 일월, 성신으로 하늘의 때를 받들자고 하였다.  신 송지가 생가건대 : 위서에 이런 말이 있지만 그런 직책이 있단느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해일의 조령에 이르길 : 「전 상서복야 모개(毛玠), 봉상 왕수(王脩), 양무(涼茂), 낭중령 원환(袁渙), 소부 사환(謝奐), 만잠(萬潛), 중위 서혁(徐奕), 국연(國淵)등이 모두 조정에 충직하고 인의를 실천하였으나 더불어 일찍 세상을 떠나 자손들이 능지하니 측연이 이를 안타까워 하노라. 그들의 아들 모두를 낭중에 봉하도록 하라.」

여름 4월 12일 요안현(饒安縣)에 흰 꿩이 나타났다는 말이 있었다.(7)

(7)위서魏書에서 말하길

요안饒安현의 전답의 조세을 덜어주었고, 발해군勃海郡의 백가구당 소와 술을 하사하심이 3일간 되었다.
태상太常이 태뢰(太牢: 나라 제사를 위해 소,양,돼지를 바치는 것)로 종묘宗廟에 제사지냈다.

 

# 百戶牛酒 : 史记사기 封禅书봉선서에 나오는 말로 효무제가  백성들에게 백 가구당 소 한 마리와 술 10석을 내렸다.


25일대장군 하후돈이 서거했다.(8)

(8)위서(魏書) - 이때 문제는 흰 상복을 입고 업성(鄴)의 동쪽 성문까지 행차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손성(孫盛)이 말하길 - 그러나 예법에 의하면 같은 성씨를 가진 경우에는 종묘의 문 밖에서 곡을 해야 하는데, 성문까지 나가서 곡을 한 것은 예법에 어긋난 것이다.

5월 3일 천자(헌제)는 위왕에게 명령하여 황조(皇祖)의 태위(조숭)를 추존하여 태왕(太王)이라고 일컫게 했으며, 그의 부인 정씨(丁氏)를 태왕후(太王后)라고 일컫게 했고, 위왕의 아들 조예(曹叡 : 명제)를 무덕후(武德侯)에 봉했다.(9) 

(9)위략魏略에서 말하길

시중侍中 정칭鄭稱을 무덕후(조예)의 스승(武德侯傅)으로 임명하였다. 을 내려 말하길


"용연龍淵(고대명검)과 태아太阿(고대명검)는 곤오昆吾의 금에서 나오고, 화씨의옥和氏之璧은 정리井里의 밭에서 얻었으며, 숫돌에 연마하고 갈아서 (명검 용연과 태아가 되었고) 다른 산에서 나는 나쁜 돌을 숫돌로 써서 옥을 갈아 (화씨의옥이 되었으니) 이런 연고로 능히 값어치가 비싼 물건(連城之價)에 이르렀음이니, 시대에 뛰어나고 유명한 보배가 되었음이다. 배우는 것 또한 사람을 연마하는 것이다. 학문에 충실한 대학자를 불렀으니, 경학經學 격려하여 무덕후를 돕도록 하고 마땅히 아침 저녁으로 들어와 황제를 뵙고, 그 뜻을 널리 알리도록 하라."


같은 달에 풍익(馮翊)의 산적 정감(鄭甘)과 왕조(王朝)가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오자, 모두 열후에 봉했다.(10)

(10)위서(魏書) - 당초에 정감(鄭甘), 왕조(王照)와 노수호(盧水胡)가 그 부속들을 이끌고 항복하니 왕이 항서를 얻어 이를 조정의 신하들에게 보이며 말하길 :


「전에 나로 하여금 선비를 토벌하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쫓지 않았고 항복하였소. 또한 나로 하여금 이번 가을에 노수호를 토벌하게 하라고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듣지 않았고 지금 다시 항복하였소. 옛날 위무후는 한번 모략을 세워 맞아 떨어지니 스스로 자만하는 기색이 있어 이괴에게 기롱을 당하였소. 지금 내가 이를 기뻐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올바르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한낱 앉아 있기만 했는데 항복시켜 그 공이 군대를 움직인 것 보다 크기 때문이오.」

주천군(酒泉郡)의 황화(皇華)와 장액군(張掖郡)의 장진(張進) 등은 각기 태수를 잡아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금성태수(金城太守) 소칙(蘇則)이 장진을 토벌하고 그를 참수했다. 황하가 항복했다.(11)

(11)황하(華)는 후에 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되었는데, 이 기록은 왕릉전(王淩傳)에 보인다.

6월 7일 동쪽 교외에서 열병(閱兵) 의식을 거행했다.

(12)위서(魏書) - 이 의식은 삼공(公)과 구경(卿)이 돕고, 왕은 화려한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종과 큰 북소리에 따라 행진하는 군대를 열병하는 것이다.

26일 마침내 남방 정벌을 떠났다.(13)


(13) 위략(魏略) - 왕이 장차 출정하려 하자 탁지중랑장 신평 곽성(霍性)이 상소를 올려 간하길 :


「신이 문왕과 주의 일을 듣기로 당시 천하는 별다른 해가 없어 모든 군자들이 주왕의 죄를 묻고자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대왕은 천지의 법칙을 체인하고 사방의 언로를 열어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각자가 자신의 건의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선왕의 공덕은 이와는 비견할 수 있는게 없다고 여기는데 지금 능히 말을 할 수 있는 부류들은 덕을 칭하고 있지 않습니다. 옛날 성인이 말하길 『백성의 환심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병사에 이르길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다.』이로써 육국이 힘써 전쟁을 하자 강진이 그 폐단을 탔고 빈왕이 싸우지 않자 주나라의 도가 흥성하였습니다. 저는 말하건데 대왕은 또한 마땅히 본조를 중하게 여겨 암컷의 자리를 지키고 위엄을 유지하되 호랑이처럼 엎드린다면 공업을 가히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 기초를 창업하고 있는데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면 군대는 흉물이요, 반드시 걱정거리를 반들게 되며 걱정거리는 생각을 어지럽히고 난리가 의외의 곳에서 튀어나올 것입니다. 신이 말하건대 이 위험은 달걀을 여러 개 쌓아 올린 것 보다 더욱 위태롭습니다. 옛날 하나라의 계는 3년동안 신위를 숨겼으니 주역에는 『멀지 않아 되돌아 온다.』고 하였고 논어에는 『고치는 걸 꺼리지 않는다.』라 하였습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대왕이 옛날과 지금을 헤아려 고찰해 심모원려를 가지고 3공과 그 장단을 계산하시길 바랍니다. 신은 선왕의 우대를 받았고 또한 정권이 바뀐 초기에 다시 중임을 받아 비록 말이 용의 비늘에 저촉되는 것을 알지만 가까운 복에 아부하고 평소 공부한 바를 꺾는 것은 위태롭더라도 하지 않고자 합니다.」


상주가 문제에게 통하자 황제는 분노하여 감찰관을 보내 고핵하도록 하였고 끝내 그를 죽였다. 얼마 후 후회하고 사면을 하고자 하였으나 이르지 못했다.

가을 7월 6일 조비가 명을 내렸다.

- 화제 헌원(軒轅)은 명대(明臺)에서 정사를 의론하는 것을 들었고, 요임금 방훈(放勛)은 구실(衢室)에서 백성들이 하는 의론을 물었는데, 모두 광범위하게 아랫사람에게서 의견을 경청한 것이다.(14) 


(14)관자(管子) - 황제가 명대의 제도를 세운 것은 위에서 병사들을 보기 위함이요 ; 요 임금이 구실에서 물었던 것은 아래로 백성들의 말을 듣기 위함이요 ; 순 임금이 고선의 깃발을 둔 것은 군주가 가려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 우 임금이 조정에 건의할 수 있는 북을 만든 것은 소송을 대비 하기 위함이요 ; 탕 임금이 총가의 마당을 둔 것은 백성들의 비리를 보기 위함이요 ; 무왕이 영대의 전원을 소유한 것은 현자로 하여금 진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고대 성제, 명왕이 소유하되 잃지 않고 얻되 잊지 않은 이유이다.

조정의 문무 백관과 관원들은 자신들의 직무에 대해 바르게 놓고 해야 한다. 출정을 떠나는 장수들은 조법에 대해서 모두 진술해야 하고, 조정의 선비들은 제도를 밝히고, 주목(州牧)이나 군수들은 정무(政務)를 밝히며, 사대부들은 육예(六藝)를 고찰해야 한다. 짐은 장차 이것들을 자세하게 살필 것이다.

손권이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하는 물품을 바쳤다. 촉나라 장수 맹달(孟達)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투항했다. 무도(武都)의 저족(氐族) 왕 양복(楊僕)도 족인(族人)들을 이끌고 위나라에 복속하자, 그들을 한양군(漢陽郡)에 거주하게 했다.(15)

(15)위략재왕자수필령왈(魏略載王自手筆令曰) - 내가 전일 사자를 보내 국가의 위령을 선전하였는데 맹달이 즉시 왔다. 나는 춘추가 의부를 포숭한 뜻으로 곧 맹달을 전처럼 신성태수에 봉한다. 근래에 다시 늙은이와 아이를 데리고 왕교의 교화를 향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듣기로 옛날 숙사의 백성들은 스스로 그들의 군주를 포박하여 신농에게 귀의하였고 빈국의 무리들은 그 아이를 강보에 싸서 풍, 호에 들어갔으니 이것이 어찌 힘으로 몰고 협박해서 이룩한 것이겠는가? 마침내 풍화가 그들의 감정을 움직이고 인의가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켜 기쁜 마음이 안에서 발생하여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다. 이로부터 추측컨대 서남방의 만 리 이내에 (왕의 교화에서) 벗어난 지역이 없으니 손권과 유비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죽음을 지키겠는가?」

7월 20일 조비가 거느리는 대군이 초현에 머물게 되었는데, 조비는 성읍의 동쪽에 모든 병사와 초현의 장로(長老)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향연을 크게 벌였다.(16)

(16)위서(魏書) - 기락 백희를 베풀었다. 명령을 내려 말하길 :


「선왕은 모두 그가 태어난 곳을 기뻐하였으니 예에 이르길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현은 패왕의 고장이자 진인이 나온 곳이니 다시 초현이 조세 2년을 면제한다.」


삼로이민들이 장수를 빌었고 조석이 지나 파하였다. 병신일 친히 초릉에 제사지냈다. 


손성(孫盛)이 말하길: 昔者先王 之以孝治天下也,內節天性,外施四海,存盡其敬,亡極其哀,思慕諒闇,寄政冢宰,故曰「三年之喪,自天子達於庶人」;夫然,故在三之義惇,臣子之恩篤,雍 熙之化隆,經國之道固,聖人之所以通天地,厚人倫,顯至教,敦風俗,斯萬世不易之典,百王服膺之制也。是故喪禮素冠,鄶人著庶見之譏,宰予降期,仲尼發不 仁之歎,子頹忘戚,君子以為樂禍,魯侯易服,春秋知其不終,豈不以墜至痛之誠心,喪哀樂之大節者哉?故雖三季之末,七雄之弊,猶未有廢縗斬於旬朔之間,釋 麻杖於反哭之日者也。逮於漢文,變易古制,人道之紀,一旦而廢,縗素奪於至尊,四海散其遏密,義感闕於群后,大化墜於君親;雖心存貶約,慮在經綸,至於樹 德垂聲,崇化變俗,固以道薄於當年,風頹於百代矣。且武王載主而牧野不陳,晉襄墨縗而三帥為俘,應務濟功,服其焉害?魏王既追漢制,替其大禮,處莫重之哀 而設饗宴之樂,居貽厥之始而墜王化之基,及至受禪,顯納二女,忘其至恤以誣先聖之典,天心喪矣,將何以終!是以知王齡之不遐,卜世之期促也。

8월 석읍현(石邑縣)에 봉황이 모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겨울 10월 1일 명을 내렸다.

- 여러 장수들이 정벌을 할 때, 사망한 사병들 중에서 간혹 유해를 거두어 오지 못한 자가 있는데, 나는 이 점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각 군(郡)과 국(國)에 명령하니 작은 관을 갖추어 전사한 사병의 유해를 그 속에 넣어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17)

(17) 한서고조팔월령(漢書高祖八月令曰) - 「사졸들이 종군으로 죽으니 혜(槥)를 만들라.」 응소(應劭)가 이르길 : 「혜(槥)는 작은관으로 지금은 독(櫝)이라 부른다.」 응거의 백일시에 이르길 : 「혜거가 도로에 있고 정벌나간 남편은 휴식을 얻지 못하네.」 육기의 대묘부에 이르길 : 「세세한 나무를 보면 늦는 것을 걱정하고 넓은 함을 보면 혜(槥)를 생각하네.」

4일, 조비는 군대를 이끌고 곡려(曲려)까지 갔다.
 한 헌제는 모든 신하들이 위왕(조비)이 황제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대신들을 소집하여,(18) 고조(高祖 : 劉邦)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18)원굉한기재한제조(袁宏漢紀載漢帝詔曰)

짐이 재위한지 삼십년 동안 천하가 흔들리고 뒤집혔으나 다행히 조종(祖宗)의 혼령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 다시 존립했소. 그러나 이제 천상(天象)을 우러르고 민심을 굽어 살피니 화정(炎精)의 기수 이미 끝나고 행운(行運)이 조씨에게 있소. 이에 전왕(前王: 조조)은 이미 신무 (神武)의 공을 세우고 금왕(今王: 조비)도 명덕을 비춰 그 기대에 응했소. 역수(曆數)가 이렇게 분명하니 믿어 알 수 있소. 무릇 대도지행(大道之行: 대도가 행해짐)이면 천하위공(天下為公: 천하를 모두 향유하게 됨)이라 했소. 당요(唐堯: 요임금)는 아들을 위해서 삿되지 아니해 이름을 무궁히 전하소. 짐도 남몰래 이를 우러러 본받고자 했소. 이제 마땅히 요임금의 모범을 따라 승상 위왕에게 선위하니 위왕은 사양치 마시오!’

겸어사대부(兼御士大夫) 장음(張音)에게 부절을 주어 천자의 옥새와 수대(綬帶)를 위왕에게 바치게 하고 황제의 지위를 양위하고 조서에 말했다.

- 위왕(魏王)에게 고하노니, 옛날에 황제(帝) 요(堯)는 우순(虞舜)에게 양위했고, 순 역시 대우(大禹)에게 양위했으니 천명(天命)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오직 덕망이 있는 자에게로 돌아갈 뿐이다. 한나라의 도의는 점점 쇠미하여, 천하는 그 질서를 잃었으며, 나의 시대에 이르러 큰 변란이 세상을 뒤흔들고, 수많은 흉포한 자들이 제멋대로 천명을 거역하여 천하는 전복될 지경이 되었다. 다

행히 무왕(武王)은 신과 같은 용무(勇武)를 갖고 있어서 사방에서 일어나는 이 혼란을 구하고, 중화 땅을 맑게 다스리고, 우리 한나라의 종묘를 안전하게 보호하였으니, 나 한 개인만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것인가? 천하가 모두 실제로 그의 은덕을 받았으니 이제 왕은 선왕의 사업을 받아 계승하고, 덕을 빛내 문무 양쪽의 대업을 확충시켜 망부의 큰 업적을 발휘시킬지어다.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을 내리고, 사람과 신이 길조를 예견하였으며, 사람들은 큰 일을 밝히고 짐의 사명을 서술했다. 모든 태도는 우순과 같기 때문에 나는 상서(尙書) 요전(堯典)에 따라 황제의 위치를 공경스럽게 그대에게 주노라. 아! 하늘은 사명을 그대에게 주었으니 성실하게 중용의 도를 운용하면 하늘이 준 행복은 영원히 계속되리라. 그대는 공손하게 대례(大禮)를 따르고, 모든 나라를 다스림에 엄숙하게 천명을 받으라.(19)

(19)헌제전재선대중사(獻帝傳載禪代眾事曰) 

아, 너 위왕이여! 옛날에 당요(唐堯)는 우순(虞舜)에게 선위하셨고 순 역시 우(禹)에게 선위하셨다. 천명(天命)은 늘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덕 있는 이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한나라의 도통(道統)은 쇠약하여 세상이 그 질서를 잃더니 짐의 대에 이르러서는 큰 난리가 더욱 혼란해지고 흉악한 무리가 멋대로 반역을 하여 우내(宇內:천하)가 전복되려 하였는데 무왕(武王:조조)의 신무(神武)에 힘입어 사방(四方:나라)을 어려움에서 구해내고 구하(區夏:천하)를 안정시켜 나의 종묘(宗廟)를 평안하게 보호했으니 어찌 나 한 사람이 안정시킬 수 있었겠느냐? 

구복(九服:천하)은 실로 그가 주어 받은 것이다. 이제 왕은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덕을 밝히고 문무(文武)의 대업(大業)을 넓히며 네 아비의 큰 공업(功業)을 더욱 밝게 빛내어라. 황령(皇靈)이 상서를 내리고 인신(人神)이 징조를 알리니 모든 일을 순리로 풀라고 여러 사람이 말하여 짐은 명하는 것이다. 모두가 말하기를 ‘너는 우순의 극협(克協:조화를 이룸)을 헤아리라’ 하여 나는 당전(唐典:요의 법칙)을 써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니 삼가고 겸허하게 너의 위(位:자리)를 지켜라. 오! 하늘의 역수(曆數)가 너에게 있으니 성실하게 중도(中道)를 잡아 하늘이 주신 복록(福祿)을 영구히 누리라. 군(君)은 대례(大禮:선위 절차)를 공경하고 순종하여 만국(萬國)을 받고 엄숙하게 천명(天命)을 받들지어다.(정소문 삼국지)

- 左中郎將李伏表魏王曰:「昔先王初建魏國,在境外者聞之未審,皆以為拜王。武都李庶、姜合羈旅漢中,謂臣曰:『必為魏公,未便王也。定天下者,魏公子桓,神 之所命,當合符讖,以應天人之位。』臣以合辭語鎮南將軍張魯,魯亦問合知書所出?合曰:『孔子玉版也。天子曆數,雖百世可知。』是後月餘,有亡人來,寫得 冊文,卒如合辭。合長于內學,關右知名。魯雖有懷國之心,沈溺異道變化,不果寤合之言。後密與臣議策質,國人不協,或欲西通,魯即怒曰:『寧為魏公奴,不 為劉備上客也。』言發惻痛,誠有由然。合先迎王師,往歲病亡於鄴。自臣在朝,每為所親宣說此意,時未有宜,弗敢顯言。殿下即位初年,禎祥眾瑞,日月而至, 有命自天,昭然著見。然聖德洞達,符表豫明,實乾坤挺慶,萬國作孚。臣每慶賀,欲言合驗;事君盡禮,人以為諂。況臣名行穢賤,入朝日淺,言為罪尤,自抑而 已。今洪澤被四表,靈恩格天地,海內翕習,殊方歸服,兆應並集,以揚休命,始終允臧。臣不勝喜舞,謹具表通。」王令曰:「以示外。薄德之人,何能致此,未 敢當也;斯誠先王至德通於神明,固非人力也。」

  魏王侍中劉廙、辛毗、劉曄、尚書令桓階、尚書陳矯、陳群、給事黃門侍郎王毖、董遇等言:「臣伏讀左中郎將李伏上事,考圖緯之言,以效神明之應,稽之古 代,未有不然者也。故堯稱曆數在躬,璇璣以明天道;周武未戰而赤烏銜書;漢祖未兆而神母告符;孝宣仄微,字成木葉;光武布衣,名已勒讖。是天之所命以著聖 哲,非有言語之聲,芬芳之臭,可得而知也,徒縣象以示人,微物以效意耳。自漢德之衰,漸染數世,桓、靈之末,皇極不建,暨於大亂,二十餘年。天之不泯,誕 生明聖,以濟其難,是以符讖先著,以彰至德。殿下踐阼未期,而靈象變於上,群瑞應於下,四方不羈之民,歸心向義,唯懼在後,雖典籍所傳,未若今之盛也。臣 妾遠近,莫不鳧藻。」王令曰:「犁牛之駮似虎,莠之幼似禾,事有似是而非者,今日是已。睹斯言事,良重吾不德。」於是尚書僕射宣告官寮,咸使聞知。

  辛亥,太史丞許芝條魏代漢見讖緯于魏王曰:「易傳曰:『聖人受命而王,黃龍以戊己日見。』七月四日戊寅,黃龍見,此帝王受命之符瑞最著明者也。又曰: 『初六,履霜,陰始凝也。』又有積蟲大穴天子之宮,厥咎然,今蝗蟲見,應之也。又曰:『聖人以德親比天下,仁恩洽普,厥應麒麟以戊己日至,厥應聖人受 命。』又曰:『聖人清淨行中正,賢人福至民從命,厥應麒麟來。』春秋漢含孳曰:『漢以魏,魏以徵。』春秋玉版讖曰:『代赤者魏公子。』春秋佐助期曰:『漢 以許昌失天下。』故白馬令李雲上事曰:『許昌氣見于當塗高,當塗高者當昌於許。』當塗高者,魏也;象魏者,兩觀闕是也;當道而高大者魏。魏當代漢。今魏基 昌于許,漢徵絕于許,乃今效見,如李雲之言,許昌相應也。佐助期又曰:『漢以蒙孫亡。』說者以蒙孫漢二十四帝,童蒙愚昏,以弱亡。或以雜文為蒙其孫當失天 下,以為漢帝非正嗣,少時為董侯,名不正,蒙亂之荒惑,其子孫以弱亡。孝經中黃讖曰:『日載東,絕火光。不橫一,聖聰明。四百之外,易姓而王。天下歸功, 致太平,居八甲;共禮樂,正萬民,嘉樂家和雜。』此魏王之姓諱,著見圖讖。易運期讖曰:『言居東,西有午,兩日並光日居下。其為主,反為輔。五八四十,黃 氣受,真人出。』言午,許字。兩日,昌字。漢當以許亡,魏當以許昌。今際會之期在許,是其大效也。易運期又曰:『鬼在山,禾女連,王天下。』臣聞帝王者, 五行之精;易姓之符,代興之會,以七百二十年為一軌。有德者過之,至于八百,無德者不及,至四百載。是以周家八百六十七年,夏家四百數十年,漢行夏正,迄 今四百二十六歲。又高祖受命,數雖起乙未,然其兆徵始于獲麟。獲麟以來七百餘年,天之曆數將以盡終。帝王之興,不常一姓。太微中,黃帝坐常明,而赤帝坐常 不見,以為黃家興而赤家衰,凶亡之漸。自是以來四十餘年,又熒惑失色不明十有餘年。建安十年,彗星先除紫微,二十三年,復掃太微。新天子氣見東南以來,二 十三年,白虹貫日,月蝕熒惑,比年己亥、壬子、丙午日蝕,皆水滅火之象也。殿下即位,初踐阼,德配天地,行合神明,恩澤盈溢,廣被四表,格于上下。是以黃 龍數見,鳳皇仍翔,麒麟皆臻,白虎效仁,前後獻見于郊甸;甘露醴泉,奇獸神物,眾瑞並出。斯皆帝王受命易姓之符也。昔黃帝受命,風后受河圖;舜、禹有天 下,鳳皇翔,洛出書;湯之王,白鳥為符;文王為西伯,赤鳥銜丹書;武王伐殷,白魚升舟;高祖始起,白蛇為徵。巨跡瑞應,皆為聖人興。觀漢前後之大災,今茲 之符瑞,察圖讖之期運,揆河洛之所甄,未若今大魏之最美也。夫得歲星者,道始興。昔武王伐殷,歲在鶉火,有周之分野也。高祖入秦,五星聚東井,有漢之分野 也。今茲歲星在大梁,有魏之分野也。而天之瑞應,並集來臻,四方歸附,襁負而至,兆民欣戴,咸樂嘉慶。春秋大傳曰:『周公何以不之魯?蓋以為雖有繼體守文 之君,不害聖人受命而王。』周公反政,尸子以為孔子非之,以為周公不聖,不為兆民也。京房作易傳曰:『凡為王者,惡者去之,弱者奪之。易姓改代,天命應 常,人謀鬼謀,百姓與能。』伏惟殿下體堯舜之盛明,膺七百之禪代,當湯武之期運,值天命之移受,河洛所表,圖讖所載,昭然明白,天下學士所共見也。臣職在 史官,考符察徵,圖讖效見,際會之期,謹以上聞。」王令曰:「昔周文三分天下有其二,以服事殷,仲尼歎其至德;公旦履天子之籍,聽天下之斷,終然復子明 辟,書美其人。吾雖德不及二聖,敢忘高山景行之義哉?若夫唐堯、舜、禹之蹟,皆以聖質茂德處之,故能上和靈祇,下寧萬姓,流稱今日。今吾德至薄也,人至鄙 也,遭遇際會,幸承先王餘業,恩未被四海,澤未及天下,雖傾倉竭府以振魏國百姓,猶寒者未盡煖,飢者未盡飽。夙夜憂懼,弗敢遑寧,庶欲保全髮齒,長守今 日,以沒於地,以全魏國,下見先王,以塞負荷之責。望狹志局,守此而已;雖屢蒙祥瑞,當之戰惶,五色無主。若芝之言,豈所聞乎?心慄手悼,書不成字,辭不 宣心。吾閒作詩曰:『喪亂悠悠過紀,白骨縱橫萬里,哀哀下民靡恃,吾將佐時整理,復子明辟致仕。』庶欲守此辭以自終,卒不虛言也。宜宣示遠近,使昭赤 心。」於是侍中辛毗、劉曄、散騎常侍傅巽、衛臻、尚書令桓階、尚書陳矯、陳群、給事中博士騎都尉蘇林、董巴等奏曰:「伏見太史丞許芝上魏國受命之符;令書 懇切,允執謙讓,雖舜、禹、湯、文,義無以過。然古先哲王所以受天命而不辭者,誠急遵皇天之意,副兆民之望,弗得已也。且易曰:『觀乎天文以察時變,觀乎 人文以化成天下。』又曰:『天垂象,見吉凶,聖人則之;河出圖,洛出書,聖人效之。』以為天文因人而變,至于河洛之書,著于洪範,則殷、周效而用之矣。斯 言,誠帝王之明符,天道之大要也。是以由德應錄者代興于前,失道數盡者迭廢于後,傳譏萇弘欲支天之所壞,而說蔡墨『雷乘乾』之說,明神器之存亡,非人力所 能建也。今漢室衰替,帝綱墮墜,天子之詔,歇滅無聞,皇天將捨舊而命新,百姓既去漢而為魏,昭然著明,是可知也。先王撥亂平世,將建洪基;至於殿下,以至 德當曆數之運,即位以來,天應人事,粲然大備,神靈圖籍,兼仍往古,休徵嘉兆,跨越前代;是芝所取中黃、運期姓緯之讖,斯文乃著於前世,與漢並見。由是言 之,天命久矣,非殿下所得而拒之也。神明之意,候望禋享,兆民顒顒,咸注嘉願,惟殿下覽圖籍之明文,急天下之公義,輒宣令外內,布告州郡,使知符命著明, 而殿下謙虛之意。」令曰:「下四方以明孤款心,是也。至于覽餘辭,豈余所謂哉?寧所堪哉?諸卿指論,未若孤自料之審也。夫虛談謬稱,鄙薄所弗當也。且聞比 來東征,經郡縣,歷屯田,百姓面有飢色,衣或短褐不完,罪皆在孤;是以上慚眾瑞,下愧士民。由斯言之,德尚未堪偏王,何言帝者也!宜止息此議,無重吾不 德,使逝之後,不愧後之君子。」

  癸丑,宣告群寮。督軍御史中丞司馬懿、侍御史鄭渾、羊祕、鮑勛、武周等言:「令如左。伏讀太史丞許芝上符命事,臣等聞有唐世衰,天命在虞,虞氏世衰, 天命在夏;然則天地之靈,曆數之運,去就之符,惟德所在。故孔子曰:『鳳鳥不至,河不出圖,吾已矣夫!』今漢室衰,自安、和、沖、質以來,國統屢絕,桓、 靈荒淫,祿去公室,此乃天命去就,非一朝一夕,其所由來久矣。殿下踐阼,至德廣被,格于上下,天人感應,符瑞並臻,考之舊史,未有若今日之盛。夫大人者, 先天而天弗違,後天而奉天時,天時已至而猶謙讓者,舜、禹所不為也,故生民蒙救濟之惠,群類受育長之施。今八方顒顒,大小注望,皇天乃眷,神人同謀,十分 而九以委質,義過周文,所謂過恭也。臣妾上下,伏所不安。」令曰:「世之所不足者道義也,所有餘者苟妄也;常人之性,賤所不足,貴所有餘,故曰『不患無 位,患所以立』。孤雖寡德,庶自免于常人之貴。夫『石可破而不可奪堅,丹可磨而不可奪赤』。丹石微物,尚保斯質,況吾託士人之末列,曾受教于君子哉?且於 陵仲子以仁為富,柏成子高以義為貴,鮑焦感子貢之言,棄其蔬而槁死,薪者譏季札失辭,皆委重而弗視。吾獨何人?昔周武,大聖也,使叔旦盟膠鬲于四內,使召 公約微子於共頭,故伯夷、叔齊相與笑之曰:『昔神農氏之有天下,不以人之壞自成,不以人之卑自高。』以為周之伐殷以暴也。吾德非周武而義慚夷、齊,庶欲遠 苟妄之失道,立丹石之不奪,邁於陵之所富,蹈柏成之所貴,執鮑焦之貞至,遵薪者之清節。故曰:『三軍可奪帥,匹夫不可奪志。』吾之斯志,豈可奪哉?」

  乙卯,冊詔魏王禪代天下曰:「惟延康元年十月乙卯,皇帝曰,咨爾魏王:夫命運否泰,依德升降,三代卜年,著于春秋,是以天命不于常,帝王不一姓,由來 尚矣。漢道陵遲,為日已久,安、順已降,世失其序,沖、質短祚,三世無嗣,皇綱肇虧,帝典頹沮。暨于朕躬,天降之災,遭無妄厄運之會,值炎精幽昧之期。變 興輦轂,禍由閹宦。董卓乘釁,惡甚澆、豷,劫遷省御,(太僕)〔火撲〕宮廟,遂使九州幅裂,彊敵虎爭,華夏鼎沸,蝮蛇塞路。當斯之時,尺土非復漢有,一夫 豈復朕民?幸賴武王德膺符運,奮揚神武,芟夷兇暴,清定區夏,保乂皇家。今王纘承前緒,至德光昭,御衡不迷,布德優遠,聲教被四海,仁風扇鬼區,是以四方 效珍,人神響應,天之曆數實在爾躬。昔虞舜有大功二十,而放勳禪以天下;大禹有疏導之績,而重華禪以帝位。漢承堯運,有傳聖之義,加順靈祇,紹天明命,釐 降二女,以嬪于魏。使使持節行御史大夫事太常音,奉皇帝璽綬,王其永君萬國,敬御天威,允執其中,天祿永終,敬之哉?」於是尚書令桓階等奏曰:「漢氏以天 子位禪之陛下,陛下以聖明之德,曆數之序,承漢之禪,允當天心。夫天命弗可得辭,兆民之望弗可得違,臣請會列侯諸將、群臣陪隸,發璽書,順天命,具禮儀列 奏。」令曰:「當議孤終不當承之意而已。猶獵,還方有令。」

  尚書令等又奏曰:「昔堯、舜禪於文祖,至漢氏,以師征受命,畏天之威,不敢怠遑,便即位行在所之地。今當受禪代之命,宜會百寮群司,六軍之士,皆在行 位,使咸睹天命。營中促狹,可於平敞之處設壇場,奉答休命。臣輒與侍中常侍會議禮儀,太史官擇吉日訖,復奏。」令曰:「吾殊不敢當之,外亦何豫事也!」

  侍中劉廙、常侍衛臻等奏議曰:「漢氏遵唐堯公天下之議,陛下以聖德膺曆數之運,天人同歡,靡不得所,宜順靈符,速踐皇阼。問太史丞許芝,今月十七日己 未直成,可受禪命,輒治壇場之處,所當施行別奏。」令曰;「屬出見外,便設壇場,斯何謂乎?今當辭讓不受詔也。但於帳前發璽書,威儀如常,且天寒,罷作壇 士使歸。」既發璽書,王令曰:「當奉還璽綬為讓章。吾豈奉此詔承此貺邪?昔堯讓天下於許由、子州支甫,舜亦讓于善卷、石戶之農、北人無擇,或退而耕潁之 陽,或辭以幽憂之疾,或遠入山林,莫知其處,或攜子入海,終身不反,或以為辱,自投深淵;且顏燭懼太樸之不完,守知足之明分,王子搜樂丹穴之潛處,被熏而 不出,柳下惠不以三公之貴易其介,曾參不以晉、楚之富易其仁:斯九士者,咸高節而尚義,輕富而賤貴,故書名千載,于今稱焉。求仁得仁,仁豈在遠?孤獨何為 不如哉?義有蹈東海而逝,不奉漢朝之詔也。亟為上章還璽綬,宣之天下,使咸聞焉。」己未,宣告群僚,下魏,又下天下。

  輔國將軍清苑侯劉若等百二十人上書曰:「伏讀令書,深執克讓,聖意懇惻,至誠外昭,臣等有所不安。何者?石戶、北人,匹夫狂狷,行不合義,事不經見 者,是以史遷謂之不然,誠非聖明所當希慕。且有虞不逆放勛之禪,夏禹亦無辭位之語,故傳曰:『舜陟帝位,若固有之。』斯誠聖人知天命不可逆,曆數弗可辭 也。伏惟陛下應乾符運,至德發聞,升昭于天,是三靈降瑞,人神以和,休徵雜沓,萬國響應,雖欲勿用,將焉避之?而固執謙虛,違天逆眾,慕匹夫之微分,背上 聖之所蹈,違經讖之明文,信百氏之穿鑿,非所以奉答天命,光慰眾望也。臣等昧死以請,輒整頓壇場,至吉日受命,如前奏,分別寫令宣下。」王令曰:「昔柏成 子高辭夏禹而匿野,顏闔辭魯幣而遠跡,夫以王者之重,諸侯之貴,而二子忽之,何則?其節高也。故烈士徇榮名,義夫高貞介,雖蔬食瓢飲,樂在其中。是以仲尼 師王駘,而子產嘉申徒。今諸卿皆孤股肱腹心,足以明孤,而今咸若斯,則諸卿遊于形骸之內,而孤求為形骸之外,其不相知,未足多怪。亟為上章還璽綬,勿復紛 紛也。」

  輔國將軍等一百二十人又奏曰:「臣聞符命不虛見,眾心不可違,故孔子曰:『周公其為不聖乎?以天下讓。是天地日月輕去萬物也。』是以舜嚮天下,不拜而 受命。今火德氣盡,炎上數終,帝遷明德,祚隆大魏。符瑞昭晳,受命既固,光天之下,神人同應,雖有虞儀鳳,成周躍魚,方今之事,未足以喻。而陛下違天命以 飾小行,逆人心以守私志,上忤皇穹眷命之旨,中忘聖人達節之數,下孤人臣翹首之望,非所以揚聖道之高衢,乘無窮之懿勳也。臣等聞事君有獻可替否之道,奉上 有逆鱗固爭之義,臣等敢以死請。」令曰:「夫古聖王之治也,至德合乾坤,惠澤均造化,禮教優乎昆蟲,仁恩洽乎草木,日月所照,戴天履地含氣有生之類,靡不 被服清風,沐浴玄德;是以金革不起,苛慝不作,風雨應節,禎祥觸類而見。今百姓寒者未煖,飢者未飽,鰥者未室,寡者未嫁;權、備尚存,未可舞以干戚,方將 整以齊斧;戎役未息於外,士民未安於內,耳未聞康哉之歌,目未睹擊壤之戲,嬰兒未可託於高巢,餘糧未可以宿於田畝:人事未備,至於此也。夜未曜景星,治未 通真人,河未出龍馬,山未出象車,蓂莢未植階庭,萐莆未生庖廚,王母未獻白環,渠搜未見珍裘:靈瑞未效,又如彼也。昔東戶季子、容成、大庭、軒轅、赫胥之 君,咸得以此就功勒名。今諸卿獨不可少假孤精心竭慮,以和天人,以格至理,使彼眾事備,群瑞效,然後安乃議此乎,何遽相愧相迫之如是也?速為讓章,上還璽 綬,無重吾不德也。」

  侍中劉廙等奏曰:「伏惟陛下以大聖之純懿,當天命之曆數,觀天象則符瑞著明,考圖緯則文義煥炳,察人事則四海齊心,稽前代則異世同歸;而固拒禪命,未 踐尊位,聖意懇惻,臣等敢不奉詔?輒具章遣使者。」奉令曰:「泰伯三以天下讓,人無得而稱焉,仲尼歎其至德,孤獨何人?」

  庚申,魏王上書曰:「皇帝陛下:奉被今月乙卯璽書,伏聽冊命,五內驚震,精爽散越,不知所處。臣前上還相位,退守藩國,聖恩聽許。臣雖無古人量德度身 自定之志,保己存性,實其私願。不寤陛下猥損過謬之命,發不世之詔,以加無德之臣。且聞堯禪重華,舉其克諧之德,舜授文命,采其齊聖之美,猶下咨四嶽,上 觀璿璣。今臣德非虞、夏,行非二君,而承曆數之諮,應選授之命,內自揆撫,無德以稱。且許由匹夫,猶拒帝位,善卷布衣,而逆虞詔。臣雖鄙蔽,敢忘守節以當 大命,不勝至願。謹拜章陳情,使行相國永壽少府糞土臣毛宗奏,并上璽綬。」

신유[19일] 급사중 박사 소림(蘇林), 동파(董巴)가 상주하여 아뢰길,

"하늘에 십이 성좌(차)가 있어 분야(성좌에 대응하는 땅의 지역)를 정하는데, 왕공의 국은 각기 속하는 바(성좌)가 있어 주는 순화에, 위는 대량에 있습니다. 세성(목성)은 십이 차(성좌)를 돌아지나는데 천자는 천명을 받고 제후는 (영토에) 봉해집니다. 주문왕이 처음 천명을 받을 때 세성이 순화에 있었고, 무왕이 주를 벌한지 13년에 이르러 목성이 다시 순화에 있었던 까닭에 춘추전(國語 周語 下)에 이르길, '무왕이 주를 벌할 때, 세성이 순화에 있었다. 세성의 소재지야말로 곧 우리 주의 분야에 있다.' 옛 광화7년(184년) 목성이 대량에 있으매 무왕께서 비로소 천명을 받으사 그때 장군으로 황건을 토벌하셨고 이 해에 연호를 고쳐 중평 원년으로 삼았습니다. 건안 원년(186년), 세성이 다시 대량에 있었는데 비로소 대장군이 되셨습니다. 13년(208년)에 다시 대량에 있었는데 비로소 승상이 되셨습니다. 지금 25년(220년)에 다시 대량에 있으니 폐하께서 명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위가 세성을 얻은 것이 주문왕이 천명을 받은 것과 상응합니다. 금년에 청룡(세성의 별칭)[의 위치가] 경자[년]에 해당하는데 '시위(詩緯)의 추탁재'에서 이르길, '경은 경(更 고친다, 바꾼다)이고, 자는 자(滋, 자라다)이니, 성인이 천명을 받아 천하가 다스려진다.' 또 이르길, '왕은 자년(子)에 덕을 펴고 축년(丑)에 정치를 완성한다.' 이는 금년 하늘이 다시 성인이 천하를 맡아 다스리고 백성들에 덕을 펴도록 명함을 뜻함입니다. 위나라가 천하를 바꿈이 시위(시경의 예언)과 합하는 것입니다. [고대 군주] 전욱이 천명을 받았을 때 세성이 시위에 있었고, 위(주나라의 일족 제후)가 그 땅에 있을 때 역시 [세성이] 시위에 있었던 까닭에 춘추전[좌씨전 소공 17년]에서 이르길, '위는 전욱의 옛터다.' 올해 시월에 (북두성이 가리키는) 월건이 곧 전욱이 천명을 받은 분양에 해당하므로 바야흐로 위로써 시월에 선양을 받는다면 이는 시조가 천명을 받을 때의 징조와 합치됩니다. 위나라의 씨족은 전욱으로부터 나왔으며 순과 조상을 같이하는 것이 춘추세가에 나타납니다. 순이 토덕으로 요의 화덕을 이었는데 지금 위 역시 토덕으로 한의 화덕을 이으니 오행의 운행은 요순이 주고 받는 때의 차례와 부합됩니다.

신이 듣기로 하늘의 거취는 본디 불변의 본분에 있고, 성인은 그 일을 맡으면 명확하여 의심하지 않사온데, 까닭에 요가 골육을 제쳐두고 우에게 선양하면서 전혀 아까워하는 모습이 없었고 순은 백성의 지위에서 일어나 천하에 군주가 되었으나 이전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그 지위를 받음에 전혀 공백없이 천하에 전해졌습니다. 천명에 조급히 [반응하는] 까닭은 천하에 하루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의 기운이 이미 끝났고 요상한 이변이 나타나 마지막임을 나타내는 것은 명백하니 폐하가 천명을 받으심은 상서가 거듭 충분히 반복해서 주도하게 아뢰었고 말로 설명했다 하더라도 그에 대신할 정도로 명백한 표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금 이미 조서가 발포되었는데 새수를 두르지 않고 위로는 천명을 거스르고 아래로는 백성의 바람을 어기십니다. 신은 삼가 옛 전적을 살피고 도위를 참고하니 위나라의 행운 및 천도가 소재한 바가 즉위할 징험이 이재 금년 이 달에 있음이 분명하옵니다. 모쪼록 폐하는 생각을 고치셔서 이제 즉위하시고 분명히 천제에게 아뢰고 천하에 포고하고 그 뒤에 해가 시작하는 달을 고치고, 의복 색을 바꾸고, 국호[大號]를 바로하시면 천하가 심히 행복하옵니다."

[위왕 조비가] 영하여 이르길, "무릇 이 모든 것이 성덕[이 있는 자]에게 어울리는 법이다. 까닭에 이르길,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는 헛되이 다니지 않는다.[역 번사전 하]' 하늘이 내린 상서가 비록 드러나더라도 반드시 덕이 있어야 비로서 빛난다. 내가 덕이 적은 몸으로 어찌 일을 맡기에 족하겠는가? 지금 사양하여 허락해주기를 바라니 안팎이 모두 들어 알도록 하라."


  壬戌,冊詔曰:「皇帝問魏王言:遣宗奉庚申書到,所稱引,聞之。朕惟漢家世踰二十,年過四百,運周數終,行祚已訖,天心已移,兆民望絕,天之所廢,有 自來矣。今大命有所厎止,神器當歸聖德,違眾不順,逆天不祥。王其體有虞之盛德,應曆數之嘉會,是以禎祥告符,圖讖表錄,神人同應,受命咸宜。朕畏上帝, 致位于王;天不可違,眾不可拂。且重華不逆堯命,大禹不辭舜位,若夫由、卷匹夫,不載聖籍,固非皇材帝器所當稱慕。今使音奉皇帝璽綬,王其陟帝位,無逆朕 命,以祗奉天心焉。」

  於是尚書令桓階等奉曰:「今漢使音奉璽書到,臣等以為天命不可稽,神器不可瀆。周武中流有白魚之應,不待師期而大號已建,舜受大麓,桑蔭未移而已陟帝 位,皆所以祗承天命,若此之速也。故無固讓之義,不以守節為貴,必道信於神靈,符合於天地而已。易曰:『其受命如響,無有遠近幽深,遂知來物,非天下之至 賾,其孰能與於此?』今陛下應期運之數,為皇天所子,而復稽滯於辭讓,低回於大號,非所以則天地之道,副萬國之望。臣等敢以死請,輒敕有司修治壇場,擇吉 日,受禪命,發璽綬。」令曰:「冀三讓而不見聽,何汲汲于斯乎?」

  甲子,魏王上書曰:「奉今月壬戌璽書,重被聖命,伏聽冊告,肝膽戰悸,不知所措。天下神器,禪代重事,故堯將禪舜,納于大麓,舜之命禹,玄圭告功;烈 風不迷,九州攸平,詢事考言,然後乃命,而猶執謙讓于德不嗣。況臣頑固,質非二聖,乃應天統,受終明詔;敢守微節,歸志箕山,不勝大願。謹拜表陳情,使并 奉上璽綬。」

  侍中劉廙等奏曰:「臣等聞聖帝不違時,明主不逆人,故易稱通天下之志,斷天下之疑。伏惟陛下體有虞之上聖,承土德之行運,當亢陽明夷之會,應漢氏祚終 之數,合契皇極,同符兩儀。是以聖瑞表徵,天下同應,曆運去就,深切著明;論之天命,無所與議,比之時宜,無所與爭。故受命之期,時清日晏,曜靈施光,休 氣雲蒸。是乃天道悅懌,民心欣戴,而仍見閉拒,于禮何居?且群生不可一日無主,神器不可以斯須無統,故臣有違君以成業,下有矯上以立事,臣等敢不重以死 請。」王令曰:「天下重器,王者正統,以聖德當之,猶有懼心,吾何人哉?且公卿未至乏主,斯豈小事,且宜以待固讓之後,乃當更議其可耳。」

  丁卯,冊詔魏王曰:「天訖漢祚,辰象著明,朕祗天命,致位於王,仍陳曆數於詔冊,喻符運於翰墨;神器不可以辭拒,皇位不可以謙讓,稽於天命,至於再 三。且四海不可以一日曠主,萬機不可以斯須無統,故建大業者不拘小節,知天命者不繫細物,是以舜受大業之命而無遜讓之辭,聖人達節,不亦遠乎!今使音奉皇 帝璽綬,王其欽承,以答天下嚮應之望焉。」

  相國華歆、太尉賈詡、御史大夫王朗及九卿上言曰:「臣等被召到,伏見太史丞許芝、左中郎將李伏所上圖讖、符命,侍中劉廙等宣敘眾心,人靈同謀。又漢朝 知陛下聖化通于神明,聖德參于虞、夏,因瑞應之備至,聽曆數之所在,遂獻璽綬,固讓尊號。能言之倫,莫不抃舞,河圖、洛書,天命瑞應,人事協于天時,民言 協于天敘。而陛下性秉勞謙,體尚克讓,明詔懇切,未肯聽許,臣妾小人,莫不伊邑。臣等聞自古及今,有天下者不常在乎一姓;考以德勢,則盛衰在乎彊弱,論以 終始,則廢興在乎期運。唐、虞曆數,不在厥子而在舜、禹。舜、禹雖懷克讓之意迫,群后執玉帛而朝之,兆民懷欣戴而歸之,率土揚歌謠而詠之,故其守節之拘, 不可得而常處,達節之權,不可得而久避;是以或遜位而不恡,或受禪而不辭,不恡者未必厭皇寵,不辭者未必渴帝祚,各迫天命而不得以已。既禪之後,則唐氏之 子為賓于有虞,虞氏之冑為客于夏代,然則禪代之義,非獨受之者實應天福,授之者亦與有餘慶焉。漢自章、和之後,世多變故,稍以陵遲,洎乎孝靈,不恆其心, 虐賢害仁,聚斂無度,政在嬖豎,視民如讎,遂令上天震怒,百姓從風如歸;當時則四海鼎沸,既沒則禍發宮庭,寵勢並竭,帝室遂卑,若在帝舜之末節,猶擇聖代 而授之,荊人抱玉璞,猶思良工而刊之,況漢國既往,莫之能匡,推器移君,委之聖哲,固其宜也。漢朝委質,既願禮禪之速定也,天祚率土,必將有主;主率土 者,非陛下其孰能任之?所謂論德無與為比,考功無推讓矣。天命不可久稽,民望不不可久違,臣等慺慺,不勝大願。伏請陛下割撝謙之志,脩受禪之禮,副人神之 意,慰外內之願。」令曰:「以德則孤不足,以時則戎虜未滅。若以群賢之靈,得保首領,終君魏國,於孤足矣。若孤者,胡足以辱四海?至乎天瑞人事,皆先王聖 德遺慶,孤何有焉?是以未敢聞命。」

  己巳,魏王上書曰:「臣聞舜有賓于四門之勳,乃受禪於陶唐,禹有存國七百之功,乃承祿於有虞。臣以蒙蔽,德非二聖,猥當天統,不敢聞命。敢屢抗疏,略 陳私願,庶章通紫庭,得全微節,情達宸極,永守本志。而音重復銜命,申制詔臣,臣實戰惕,不發璽書,而音迫于嚴詔,不敢復命。願陛下馳傳騁驛,召音還臺。 不勝至誠,謹使宗奉書。」

  相國歆、太尉詡、御史大夫朗及九卿奏曰:「臣等伏讀詔書,於邑益甚。臣等聞易稱聖人奉天時,論語云君子畏天命,天命有去就,然後帝者有禪代。是以唐之 禪虞,命在爾躬,虞之順唐,謂之受終;堯知天命去己,故不得不禪舜,舜知曆數在躬,故不敢不受;不得不禪,奉天時也,不敢不受,畏天命也。漢朝雖承季末陵 遲之餘,猶務奉天命以則堯之道,是以願禪帝位而歸二女。而陛下正於大魏受命之初,抑虞、夏之達節,尚延陵之讓退,而所枉者大,所直者小,所詳者輕,所略者 重,中人凡士猶為陛下陋之。沒者有靈,則重華必忿憤于蒼梧之神墓,大禹必鬱悒于會稽之山陰,武王必不悅于(商)〔高〕陵之玄宮矣。是以臣等敢以死請。且漢 政在閹宦,祿去帝室七世矣,遂集矢石於其宮殿,而二京為之丘墟。當是之時,四海蕩覆,天下分崩,武王親衣甲而冠冑,沐雨而櫛風,為民請命,則活萬國,為世 撥亂,則致升平,鳩民而立長,築宮而置吏,元元無過,罔于前業,而始有造于華夏。陛下即位,光昭文德,以翊武功,勤恤民隱,視之如傷,懼者寧之,勞者息 之,寒者以煖,飢者以充,遠人以(恩復)〔德服〕,寇敵以恩降,邁恩種德,光被四表;稽古篤睦,茂于放勛,網漏吞舟,弘乎周文。是以布政未期,人神並和, 皇天則降甘露而臻四靈,后土則挺芝草而吐醴泉,虎豹鹿兔,皆素其色,雉鳩燕雀,亦白其羽,連理之木,同心之瓜,五采之魚,珍祥瑞物,雜遝於其間者,無不畢 備。古人有言:『微禹,吾其魚乎!』微大魏,則臣等之白骨交橫于曠野矣。伏省群臣外內前後章奏,所以陳敘陛下之符命者,莫不條河洛之圖書,據天地之瑞應, 因漢朝之款誠,宣萬方之景附,可謂信矣(省)〔著〕矣;三王無以及,五帝無以加。民命之懸於魏〔邦,民心之繫於魏〕政,三十有餘年矣,此乃千世時至之會, 萬載一遇之秋;達節廣度,宜昭於斯際,拘牽小節,不施於此時。久稽天命,罪在臣等。輒營壇場,具禮儀,擇吉日,昭告昊天上帝,秩群神之禮,須禋祭畢,會群 寮於朝堂,議年號、正朔、服色當施行,上。」復令曰:「昔者大舜飯糗茹草,將終身焉,斯則孤之前志也。及至承堯禪,被(珍)〔袗〕裘,妻二女,若固有之, 斯則順天命也。群公卿士誠以天命不可拒,民望不可違,孤亦曷以辭焉?」

  庚午,冊詔魏王曰:「昔堯以配天之德,秉六合之重,猶睹曆運之數,移於有虞,委讓帝位,忽如遺跡。今天既訖我漢命,乃眷北顧,帝皇之業,實在大魏。朕 守空名以竊古義,顧視前事,猶有慚德,而王遜讓至于三四,朕用懼焉。夫不辭萬乘之位者,知命達節之數也,虞、夏之君,處之不疑,故勳烈垂于萬載,美名傳于 無窮。今遣守尚書令侍中(顗)〔覬〕喻,王其速陟帝位,以順天人之心,副朕之大願。」

  於是尚書令桓階等奏曰:「今漢氏之命已四至,而陛下前後固辭,臣等伏以為上帝之臨聖德,期運之隆大魏,斯豈數載?傳稱周之有天下,非甲子之朝,殷之去 帝位,非牧野之日也,故詩序商湯,追本玄王之至,述姬周,上錄后稷之生,是以受命既固,厥德不回。漢氏衰廢,行次已絕,三辰垂其徵,史官著其驗,耆老記先 古之占,百姓協歌謠之聲。陛下應天受禪,當速即壇場,柴燎上帝,誠不宜久停神器,拒億兆之願。臣輒下太史令擇元辰,今月二十九日,可登壇受命,請詔王公群 卿,具條禮儀別奏。」令曰:「可。」


그래서 문제를 위해 즉위식을 거행할 제단을 번양(翻揚)에 세웠다.

10월 경오일(28일)

앙은 제단에 올라 제위를 이었으며, 관위에 따라 백관을 배석시켰다. 의식이 끝나자 제단을 내려와서 섶을 불살라 하늘에 제사지내어 의례를 끝내고 궁전으로 돌아왔다. 연호를 연강에서 황초(黃初)로 바꾸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20)

(20) 헌제전獻帝傳曰: 신묘년에 위왕이 단에 올라 선양을 받을 때, 공경과 열후, 제장과 흉노의 선우, 네 오랑캐 사신 등 수 만인이 배위(陪位=배석陪席)하였는데, 천지와 오악(五嶽)(주석 1), 사독(四瀆)(주석 2)에 요제(燎祭)(주석 3)를 올리며 말하길,

 

황제와 신 조비가 감히 검은 소를 제물로 하여 황황후제께 소고(昭告)하옵니다.(주석 4) ()20하고도 4세를 지내었는데, 420하고도 6년의 세월을 지내와 사해(四海)는 곤궁하고, 왕강(王綱)은 제대로 서지 못하며, 오위(五緯)는 착행(錯行)하였으니, 영상(靈祥)은 서로 마주하였기에, 추술하여 운수를 뽑아 고도(古道)로써 그를 고려하여보니 모두 하늘의 역수(歷數)와 운이 이 대에 끝났다고 여겨지는 것이, 무릇 모든 징조와 백성과 신의 뜻이 비유컨대 한실(漢室)의 운수가 종극에 있다고 나타나 있으니 위가(魏家)가 하늘의 뜻을 받들고자 합니다. 한주(漢主=헌제)께서 신기(神器)로써 신에게 마땅히 내리셨으니 유우(有虞=제순)의 헌장을 따라 조비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하였습니다. 조비는 천명을 두려워하여 비록 편안하다 하더라도 편안치 않다 하였습니다.(주석 5) 뭇 제후들과 서윤(庶尹), 육사(六事)의 사람들, 외급(外及) 장사(將士), 만이(蠻夷)군장에게 이르기까지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천명은 절대 사양할 수 있는 바가 아니고, 신기는 절대 비워둘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군신은 절대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만기(萬機)에는 일정한 법통이 없을 수 없다.”(주석 6)라고 하였다. 조비에게 황상(주석 7)께서 공손히 승계하니, 감히 삼가 받들지 아니할 수 없었다. 수구(守龜=)(주석 8)로 점을 쳐 대횡(大橫, 가로로 크게 갈라진 무늬)의 조짐이 있으면 삼역(三易)의 점을 쳐서 큰 조짐이 있다 점쳐지면 원일(元日=길일)을 삼가 택하고, 군료들과 단에 올라 황제의 새수(璽綬)를 받들며, 이 나라의 대신(大神)에 고하였다. 그대에게 선양을 받으니 상향(尙饗)하시어 길함을 영원토록 하시고, 억조 만민이 바라는 대로 위가 세세도록 누림을 받길 바라나이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공에게 조서를 내리며


상고지시(上古之始)에 임금이 있어, 반드시 미풍양속(美風良俗)으로써 은화(恩化)시킴을 높게 하였느니, 그러한 연으로 백성이 가르침에 따르게 하고, 형륙(刑辟)은 그만두라. 오늘 짐이 제왕의 업을 계승하였기에, 그 연강(延康) 원년을 황초(黃初) 원년으로 삼고, 논의하여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을 바꾸며, 휘호(徽號)를 달리 하고, 도량(度量)을 법률과 같게 하여, 토행(土行)을 계승하며, 천하에 대사면을 시행하라. 주사(殊死=참수형)이하로 부터는 모두 사면할 수 없음이나, 모두 사면토록 하라.”


라고 하였다.



위씨한추(魏氏春秋)에 이르길: 황제가 승단(升壇)에서 예필(禮畢)하고, 돌아보며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제순과 제우의 고사는 짐도 알고 있노라.”


고 하였다.



간보(干竇)의 수신기(搜神記)이르길: 송나라 대부 형사자신(邢史子臣)은 천도에 밝아, 주 경왕(敬王)37년에 경공이 물어 말하길,


천도는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여 말하길


“5년 후 5월 정해에, 신이 장차 죽을 것입니다. 죽은 지 5년 이후, 5월 정묘에 오나라가 장차 망할 것입니다. 망한 5년 이후에 군께서 끝이실 겁니다. 끝나신 400년 이후에 주왕(邾王)의 천하입니다.”


하였다. 잠시 후 모두 그 말을 그러하다 여겼다. 주왕의 천하라는 것은 위()의 흥함을 일러 이른 바이다. ()는 조씨 성으로, 위 또한 조씨 성이다. 모두 주()의 이후이다. 그 세월을 셈한 즉 어긋남이 있으나, 미처 형사(邢史)가 그 운수를 놓친 것은, 장차 년대가 구원(久遠)하니 알지 못하였거나, 주기자(注記者)가 전하였으나 착오가 있는 것인가?


주석 1 : 五嶽은 유향이 지은 說苑에 따르면동악에 태산(泰山), 남악에 곽산(霍山), 서악에 화산(華山), 북악에 상산(常山), 중악에 숭고산(嵩高山)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또한 說苑에 따르면 당대에는 이 오악을 삼공(三公)처럼 여겼다고 한다.

 

주석 2 : 四瀆은 說苑에 따르면장강(長江), 황하(黃河), 회수(淮水), 제수(濟水)를 이른다고 한다또한 說苑에 따르면 당대에는 이 사독을 제후처럼 여겼다고 한다.

 

주석 3 : 는 나뭇단을 쌓아 물품을 태우는 모양으로물품 혹은 나뭇단을 태워 드리는 제사이다.

 

주석 4 : 敢用玄牡昭告于皇皇后帝詩經 탕편에 나오는 말이며논어 요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皇皇后帝는 皇祖后稷과 짝을 이루며황황후제는 보통 위대한 천제 혹은 상제를 칭하는 말이다.

 

주석 5 : 雖休勿休은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서 그 뜻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여기서는 비록 편안하다 할지라도 편안치 않다 하다.”로 번역하였으나다른 측면에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석 6 : 萬機不可以無統군장들이 말을 하는 대목은 대구를 이루고 있는데만기와 무통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부분이다.이곳에서는 일단 일정한 법통이라 하였으나시각에 따라서 정통성” 혹은 통치의 기틀” 등등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다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석 7 : 丕祇承皇象이 부분에서 황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중국인명사전에 나온 오나라의 명필인 황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아니면 통념상 황제로 받아들일 것인지 하는 문제인데문맥상 오나라 황상으로 하면 전반적인 해석에 문제가 되어 일단 황제로 보았다다른 해석으로는 조비에게 황제가 상을 기승하니가 있는데 문맥상으로는 이것이 보다 적합하다 싶으나 일단은 상기처럼 번역하였다.

 

주석 8 : 는 큰 거북이다寶龜라고도 하고 元龜라고도 하고 守龜라고도 하였다자잘한 일반 거북들과는 그 품격이 전혀 다르다옛날에 오직 천자와 제후만이 이 큰 거북을 둘 수 있었다. (출전논어집주박헌순 역한길사, 2008

 

대귀는 1척 2촌이니이른바 나라의 수귀(큰 거북)라는 것이니 항상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일정한 공물로 삼지 않고 만약 우연히 얻으면 위에 바쳐 올리게 하는 것이다납석이라고 말한 것은 아랫사람이 위에 올린다는 말이니그 일을 중히 한 것이다.

(출전서경집전 성백효전통문화연구회, 1998

황초 원년(220) 11월 1일 조비는 한 헌제 유협에게 하내군(河內郡) 산양현(山陽縣) 마을 1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으며, 한 헌제를 산양공(山陽公)이라고 하였다. 또 한나라 조정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하고 천자의 의례에 따라 하늘에 제사지내게 했으며, 상서를 올릴 경우에도 ‘신(臣)’이라고 칭하지 않게 하고, 수도에서 태묘에 제사를 행할 때에도 그에게 공물을 주었으며 공(유협)의 네 아들을 열후로 봉했다. 


황제의 조부 태왕(조숭)을 추존하여 태황제(太皇帝)라고 하였으며, 부친 무왕(태조)에게 무황제(武黃帝)의 칭호를 바쳤으며, 왕태후(王太后)를 존중하여 황태후(皇太后)의 칭호를 주었다. 천하의 남자 각각 작위를 한 등급씩 올리고, 부친을 이어 가장이 된 자,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을 존경하고 농사를 열심히 하는 자에게는 각기 작위를 두 등급씩 올려 주었다. 한나라의 제후왕을 숭덕후(崇德侯)에, 열후를 관중후(關中侯)에 봉했다. 

영음(潁陰)의 번양정(翻揚亭)을 번창현(繁昌縣)이라 하고, 조정 대신들 가운데 봉작, 관위의 승진을 사람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아울러 상국을 사도로, 어사대부를 사공(司空)으로, 봉상(奉常)을 태상(太常)으로, 낭중령(郎中令)을 광록훈(光祿勳)으로, 대리(大理)를 정위(廷尉)로, 대농(大農)을 대사농(大司農)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군이나 국의 현, 읍도 변경한 것이 많았다. 흉노 남선우호주천(南單于呼廚泉)에게 위나라의 옥새와 혁대를 수여하고, 청개거(靑蓋車), 승여(乘輿), 보검, 옥결(玉玦 : 한 곳이 끊어진 둥근 모양의 옥)을 하사했다.

12월 낙양궁을 수축하기 시작했다. 17일 낙양에 도착했다.(21)

(21)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案) - 여러 서적을 보면 이때 문제는 북궁(北宮)에 머물고 있었고, 건시전(建始殿)에서 많은 신하들을 만났고, 궁문의 이름을 승명(承明)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진사왕 조식의 시에 알제승명려(謁帝承明廬)라는 작품은 이런 것과 연관성이 있다. 명제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한의 남궁(南宮)인 숭덕전(崇德殿)이 있던 장소에 태극(太極)과 소양(昭陽)의 여러 궁전을 지었다.

위서(魏書) - 以夏數為得天,故即用夏正,而服色尚黃。

위략(魏略) - 詔以漢火行也,火忌水,故「洛」去「水」而加「佳」。魏於行次為土,土,水之牡也,水得土而乃流,土得水而柔,故除「佳」加「水」,變「雒」為「洛」。



이 해(220) 장수교위(長水校尉) 대릉(戴陵)은 문제가 사냥하러 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러 차례 건의하자, 문제는 크게 노하여 대릉에게 사형죄를 내렸다가 이보다 한 단계 낮은 형벌로 경감시켰다.

황초 2년(221) 봄 정월 문제는 교외로 나가 천지와 명당(明堂 : 정교의 전당)에 제사를 지냈다.

3일 나무로 만든 울타리로 짐승의 퇴로를 막고 사냥하기 위해 원릉(原陵)까지 가서 사자를 파견하여 태뢰(太牢 : 소, 돼지, 양 등 희생)를 받들고 한나라 세조(光武帝)에게 제사를 올렸다.

4일 동쪽 교외에서 태양에 제사지냈다.(22) 

(22)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 - 예법에 천자는 춘분(春分)에 태양에 제사지내고 추분(秋分)에 달에 제사 지낸다. 이 해 정월, 하늘에 제사지낸 것을 살펴보면 달은 있었지만 해는 없었고, 을해일에 태양을 제사지낸 경우, 해는 있지만 달은 없었다. 명제가 태양에 제사지내고 달에 제사지낼 때의 일을 조사하면 예(禮)의 문장과 같다. 그러므로 이 본기(本紀)가 착오가 있는 것이다.

최초의 법령에서는 군국의 인구가 10만 명일 경우, 1년마다 효렴 한 명씩을 추천하게 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우수한 인재가 있으면, 인구 수에 한정되지 않았다.

10일 삼공의 식읍으로부터 한 부분씩 떼어낸 토지로써 봉지(封地)로 삼았다.

11일 선제가 의병을 일으켰던 영천군(潁川郡)에 1년간 토지세를 면제하였으며,(23) 허현(許縣)을 허창현(許昌縣)이라고 바꾸었다. 위군(魏郡)의 동쪽 지역의 경계를 양평군(陽平郡)으로, 서쪽 지역의 경계를 광평군(廣平郡)으로 바꿨다.(24)

(23) 위서재조(魏書載詔曰) - 「潁川,先帝所由起兵征伐也。官渡之役,四方瓦解,遠近顧望,而此郡守義,丁壯荷戈,老弱負糧。昔漢祖以秦中為國本,光武恃河內為王基,今朕復於此登壇受禪,天以此郡翼成大魏。」    


위서에 실린 조(詔)에 이르길 「영천(潁川)은 선제께서 군대를 일으키고 정벌할 수 있었던 기초였다. 관도의 전역으로 사방이 와해하여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정세를) 관망하기 바빴는데 이 군(영천군)은 의로움을 지켜 장정들은 무기를 메고 노약자들은 식량을 이면서 (지원하였다.) 옛날 한고조는 관중지역을 국가의 근본으로 여겼고 광무제는 하내에 의지해 왕업의 기초로 삼았으니 지금 짐이 다시 이곳에서 단에 올라 선양을 받는 것은 하늘이 이 군으로써 대위(大魏)를 보좌하고자 하는 것이다.」

(24) 위략(魏略) - 장안(長安), 초(譙), 허창(許昌), 업(鄴), 낙양(洛陽)을 오도(五都)로 바꾸고 돌로 표지를 세웠다. 서쪽은 의양(宜陽)을 경계로 하고, 북쪽은 태행(太行)산맥에 이어져 있고, 동북쪽은 양평(陽平)을 경계로 하고, 남쪽은 노양(魯陽)에 이어져 있으며, 동쪽은 담(郯)을 경계로 하여 중도(中道)지역으로 정했다. 천하 사람들에게 이 안으로 이주할 것을 허락하고, 5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었는데, 나중에 또 면제기간을 연장했다.

문제는 조칙을 내렸다.

- 옛날에 공자는 위대한 성인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제왕의 도량을 품고 있었으나, 쇠락해가는 주나라의 말기에 처하여 천명을 받을 운세가 없었다. 그는 노나라와 위나라에 살면서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유역에서 처량하고 황공해하면서 자신을 굽혀 천도를 보존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신분을 낮춤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에 각 나라의 왕이나 제후들은 결국 그 누구도 그를 임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물러나 오대(五代 : 唐, 虞, 夏, 殷, 周)의 예법을 연구하고 제위에 있지 않았던 왕들의 일을 수찬하고자 생각하여, 노나라의 역사 기록에 기초하여 춘추를 편찬하고, 태사(太師 : 약관의 우두머리)에 나아가 아송(雅頌 : 시경 중의 하나)을 바로잡았으므로, 천 년이 지난 이후에도 모두 그의 문장에 의거하여 창작하고, 그의 성스러운 도리를 우러러보고 모략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 정녕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성인이며, 억만 년 스승의 표상이다. 천하에 큰 혼란을 만나서 각종 제사가 타락하고 훼손되어 버렸고, 그가 옛날에 살던 묘당이 훼손되었어도 고칠 사람이 없다. 그의 후예는 일찍이 한나라 조정에서 포성후(褒成侯)에 봉해졌으나, 지금은 이런 작위도 계승할 사람이 없다. 그의 고향 궐리(闕里)에는 경서를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매년 사계절에도 제사를 치를 사람이 없으니, 이 어찌 예를 중시하고 공훈에 보답하는 것이며, 위대한 은덕을 세운 사람을 백 세대 이후라도 반드시 제사지낼 수 있음인가? 의랑(議郞) 공선(孔羨)을 종성후(宗聖侯)에 봉하였고, 1백 호의 봉토를 누리게 하여 공자의 후예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할 뿐이다.

문제는 노군(魯郡)에 명령을 내려 공자의 옛 묘당을 새로 개수하고, 1백 호의 관리와 병졸을 두어 그것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제묘의 바깥을 넓혀 방을 만들고 학자들이 살면서 학습하도록 했다.

봄 3월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공(公孫恭)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을 겸하도록 했다. 처음으로 오주전(五鑄錢)을 부활시켰다.

여름 4월 거기장군(車騎將軍) 조인(曹仁)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하였다.

5월 정감(鄭甘)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을 파견하여 토벌하고 그를 참수시키도록 했다.

6월 1일 처음으로 오악(五嶽)과 사독(四瀆)에 제사지내기 시작했고, 모든 제사의 규칙을 제정했다.(25)

[25] 위서(魏書) - 甲辰,以京師宗廟未成,帝親祠武皇帝于建始殿,躬執饋奠,如家人之禮。

28일 부인 견씨가 세상을 떠났다.

29일 일식이 나타나자, 담당 관리가 태위를 면직시켜야 한다고 상주하니 조칙을 내렸다.

- 재해나 이변이 출현하면 그 우두머리를 견책하는 것이거늘, 신하들에게 허물을 돌리는 것은 어찌 우임금이나 탕임금이 자신들에게 죄를 물은 의로움과 부합되겠는가? 지금 명하노니 백관들은 각자 자신의 직무를 다할 것이며, 이후에 천지의 재난이 있어도 다시 삼공을 탄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을 8월 손권이 사자를 파견하여 표장(表章)을 상주하고 아울러 우금(于禁) 등을 보내어 돌아오게 했다.

19일 문제는 태상 형정(邢貞)에게 부절을 갖게 하여 강동에 이르러 손권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오왕을 책봉했으며 구석(九錫)을 하사했다.

겨울 10월 양표(楊彪)에게 광록대부의 직책을 주었다.(26) 


[26] 위서(魏書) - 己亥,公卿朝朔旦,并引故漢太尉楊彪,待以客禮,詔曰:「夫先王制几杖之賜,所以賓禮黃耇褒崇元老也。昔孔光、卓茂皆以淑德高年,受茲嘉錫。公故漢宰臣,乃 祖已來,世著名節,年過七十,行不踰矩,可謂老成人矣,所宜寵異以章舊德。其賜公延年杖及馮几;謁請之日,便使杖入,又可使著鹿皮冠。」彪辭讓不聽,竟著 布單衣、皮弁以見。續漢書曰:彪見漢祚將終,自以累世為三公,恥為魏臣,遂稱足攣,不復行。積十餘年,帝即王位,欲以為太尉,令近臣宣旨。彪辭曰:「嘗以 漢朝為三公,值世衰亂,不能立尺寸之益,若復為魏臣,於國之選,亦不為榮也。」帝不奪其意。黃初四年,詔拜光祿大夫,秩中二千石,朝見位次三公,如孔光故 事。彪上章固讓,帝不聽,又為門施行馬,致吏卒,以優崇之。年八十四,以六年薨。子脩,事見陳思王傳。
곡물의 가격이 폭등하였으므로, 오주전의 사용을 폐지했다.

11월 13일(27) 대장군 조인을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했다.

[27] 위서에 이르길 : (221년) 11월 신미일, 진서장군 조진이 여러 장수와 주,군의 병사들에게 명하여 모반한 호(胡)를 공격하여 노수, 봉상 등을 토벌하고, 5만여급을 참하였으며, 10만의 포로와 양 111만 마리, 소 8만 마리를 얻으니, 하서가 마침내 평정되었다.

처음에 문제가 호(胡)가 물을 끊어 현미(무위군 현미현)에 댄다는 얘기를 듣고, 좌우의 제장에게 말하길 '옛날 외효가 약양에 물을 대었기에, 광무제가 그 피폐해진 것을 보고 병사를 진군시켜 그를 멸했소. 지금 호(胡)가 현미(顯美)에 물을 대었으니, 그 일이 참으로 서로 비슷하여, 호(胡)를 파했다는 것이 이제 오래지 않아 이를 것이오.'

10일 쯤 뒤, 호(胡)를 파한 것을 고하는 격문이 이르자, 주상이 크게 웃으며 말하길 '나는 유막(帷幕=휘장) 안에서 책략을 세우고, 제장(諸將)들은 만리의 밖에서 분전하는데, 상응하는 것이 부절이 들어맞는 것과 같구려. 전후로 전쟁에 이기고 적을 사로잡은 것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소.'


12월 동쪽 지역을 순시했다.

이해(221) 능운대(陵雲臺)를 수축했다.

3년(222) 봄 정월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5일, 허창궁으로 행차했으며 조칙을 내렸다.

- 지금의 계리(計吏)와 효렴은 고대에는 공사(貢士 : 여러 지방에서 추천된 인물)였다. 그러나 10가구가 있는 마을에도 반드시 충성스럽고 믿음있는 선비가 있다. 만일 나이를 제한하여 인재를 취한다면, 여상(呂商)이나 주진(周晋 : 주나라 태자 晋)은 이전 시대에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명하노니, 군국에서 선발함에 있어서 늙음이나 젊음에 제한을 두지 말 것이며, 경학에 정통한 유학자와 법률에 통달한 관리는 즉시 전원 시험삼아 등용하라. 이 일에 관여한 사람 중에서 고의로 사실에 맞지 않게 추천을 한 자가 있으면 규탄하겠다.(28)

[28] 위서(魏書) - 癸亥,孫權上書,說:「劉備支黨四萬人,馬二三千匹,出秭歸,請往掃撲,以克捷為效。」帝報曰:「昔隗囂之弊,禍發栒邑,子陽之禽,變起扞關,將軍其亢厲威武,勉蹈奇功,以稱吾意。」

2월 서역의 도시 국가 선선(鄯善), 귀자(龜玆), 우전(于闐)의 왕이 각각 사자를 파견하여 헌상품을 바치니, 조칙에서 말하였다.

- 서방의 오랑캐족이 우임금에 귀의하고, 저족, 강족이 주나라 조정에 복종한 것은 시경과 상서에서도 크게 칭송했다. 최근에 서역의 외민족이 자주 변방에 와서 속국이 되기를 원하고 있으니,(29) 사자를 파견하여 그들을 위로하라.

[29] 응소한서주(應劭漢書注曰) - 款,叩也;皆叩塞門來服從。

이후, 서역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디었으며, 무기교위를 설치했다.

3월 1일 제공(齊公) 조예(曹叡)를 평원왕(平原王)으로 책봉하고 문제의 동생 언릉공(郾陵公) 조창 등 11명을 모두 왕으로 책봉했다. 봉왕(封王 :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왕)의 서자를 향공(鄕公)으로 봉했고, 사왕(嗣王)의 서자를 정후(亭侯)로, 공의 서자를 정백(停伯)이라고 하는 제도를 처음으로 정했다. 10일, 아들 조림(曹霖)을 하동왕(河東王)으로 봉했다. 30일, 양읍으로 행차했다.

여름 4월 14일 견성후(鄄城侯) 조식을 견성왕에 봉했다. 29일,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5월 형주와 양주의 강남에 있는 여덟 군을 모두 형주(荊州)라고 했는데, 손권이 주목(州牧)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주 강북으로 있는 여러 군을 영주(郢州)라고 했다.

윤달(태음력에서 날짜와 계절이 어긋나는 것을 막기 위해 때때로 더해주는 한 달) 손권이 유비를 이릉(夷陵)에서 격파시켰다. 그 이전에 문제(文帝)는 유비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면서 7백여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樹冊)를 세워 진영을 이었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유비는 병법을 이해하지 못하오. 어찌 7백여 리에 이르는 군영을 만들어 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고원, 습지, 험한 곳을 감싸고 군대의 진영을 구축하는 자는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이오. 이것은 병법에서도 금기하는 것이오. 전쟁에 대한 손권의 상주가 이제 도착할 것이오.”

그후 7일 만에 유비를 깨뜨렸다는 서신이 도착했다.

가을 7월 기주에서는 병충해의 피해가 심각하여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상서 두기(杜幾)에게 부절을 갖게 하고, 관의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8월 촉나라 대장 황권(黃權)이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30)

[30] 위서에 이르길 : 황권 및 영(領) 남군태수 사합 등 318명이 형주자사에게로 와서 가(假)인수, 계극, 당휘, 아문, 고거 등을 바쳤다. 황권 등이 행재소에 이르자, 문제는 주연을 준비하고, 승광전(承光殿)에서 (이들을) 보았다. 황권, 사합 등 은 각각 앞으로 나와 (항복한 사정을) 진술했으며, 문제는 군대의 승패와 진퇴에 대해 논설하니, 제장(諸將=위의 장수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권에게 금과 비단, 수레와 말, 옷과 갖옷, 휘장과 처첩을 하사하고, 편장, 비장에 이르기까지 하사하는 것에 차등을 두었다. 황권을 시중 진남장군에 배수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그날로 불러 참승(驂乘=수레에 배승하는 것)토록 하였다 ; 사합 등 42인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으며, 장군, 낭장이 된 것이 100여인이었다.

9월 3일 조칙에 말했다.

- 부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혼란의 근본이 된다. 지금부터 모든 신하들은 태후에게 일을 상주하지 마라. 황후의 일족은 정치를 보좌하는 임무를 할 수 없고, 또 이유 없이 영토를 갖지 못하며 작위를 받을 수 없다. 이 조칙을 후세에 전하라. 만일 이 조칙을 위반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가 함께 그 자를 주살할 것이다.(31)

[31] 손성(孫盛) - 夫經國營治,必憑俊哲之輔,賢達令德,必居參亂之任,故雖周室之盛,有婦人與焉。然則坤道承天,南面罔二,三從之禮,謂之至順,至於號令自天子出,奏事專 行,非古義也。昔在申、呂,實匡有周。苟以天下為心,惟德是杖,則親疏之授,至公一也,何至后族而必斥遠之哉?二漢之季世,王道陵遲,故令外戚憑寵,職為 亂階。(於)此自時昏道喪,運祚將移,縱無王、呂之難,豈乏田、趙之禍乎?而後世觀其若此,深懷酖毒之戒也。至于魏文,遂發一概之詔,可謂有識之爽言,非 帝者之宏議。

9일 황후 곽씨를 세웠다. 천하의 남자들에게 작위를 두 등급씩 주고, 홀아비, 과부, 중병에 걸린 사람, 빈궁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에게 곡물을 하사했다.

겨울 10월 3일 수양산(首陽山) 동쪽을 수릉(壽陵)을 만들 곳으로 지정하고, 장례제도를 제정하여 말하였다.

- 예(禮)에 따르면 한 나라의 임금이 즉위하여 관을 만드는 것은 살아있는 중에도 죽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32) 

[32]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按) - 禮,天子諸侯之棺,各有重數;棺之親身者曰椑。

옛날에 요(堯)임금은 곡림(穀林)에 매장되었지만 사방에 나무를 심었으며, 우(禹) 임금은 회계(會稽)에 매장되었지만 농민들은 묘를 만들기 위해서 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산림에 매장하면 산림과 부합되어야 한다.(33) 

[33] 여씨춘추(呂氏春秋) : 堯葬于穀林,通樹之;舜葬于紀,市廛不變其肆;禹葬會稽,不變人徒。

묘를 만들고 나무를 심는 제도는 상고에 없었으므로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나의 묘는 산세에 의지하는 것을 주체로 삼아야지, 흙을 쌓아 놓은 언덕을 만들고 사방에 나무를 심지 말 것이며, 침전(寢殿 : 전시분묘위의 정전)을 건축하고 원읍(園邑 : 능을 지키는 촌락)을 만들며 신도(神道 : 분묘로 향하는 길)를 뚤흔 것은 하지 마라. 무릇 안장이라는 것은 몸을 감추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죽은 자의 뼈에는 통증이나 가려움 따위의 지각도 없고, 부묘에는 정신이 깃들 만한 자리도 없다. 예법에 따라 분묘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를 더럽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관곽(棺槨 : 내관과 외관)을 만들어도 뼈는 썩기 마련이며, 의복과 피륙이 있어도 살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릉 중에서도 아무것도 성장할 수 없는 땅을 선택하여 분묘를 만들고, 조대가 바뀐 후에는 그 장소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희망한다. 분묘에는 갈대나 석탄을 놓지 말고, 그 속에 금, 은, 동, 구리를 감춰두지 말며, 한결같이 질그릇을 사용하고, 도거(塗車 : 진흙 수레), 추령(芻靈 : 띠풀로 만든 인마)을 사용하는 고대의 제도에 부합되도록 하라. 관은 칠(漆)을 사용하여 판 이음매 세 곳을 칠하고, 입에 넣는 주옥(珠玉)을 사용하지 말며, 구슬을 입혀 만든 옷을 옥갑 속에 가득히 넣지 마라. 이것은 어리석고 우매한 사람이 만든 것이다. 계손(季孫)이 허리에 차는 아름다운 옥을 상자에 넣어 묻으려고 할 때, 공자는 급히 계단으로 올라와 그것을 구하며, 그 거동이 죽은 자의 유골을 들녘에 드러내는 것에 비유했다. 송나라 임금이 후한 장례를 지내려고 하자, 식견있는 사람들은 화원(華元), 낙영(樂營)이 신하로써의 도리를 못하여 주군을 악의 한가운데로 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나라 문제의 묘가 들춰지지 않은 것은 패릉(覇陵 : 문제의 능)에 도적들이 욕심내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무제의 묘가 파헤쳐진 것은 원릉(原陵)에 흙을 많이 쌓고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패릉이 보존된 것은 장석지(張釋之)의 공적이고, 원릉이 파헤쳐진 것은 명제(明帝 : 광무제의 아들)에게 그 죄가 있다. 그것은 장석지는 충성으로써 주군에게 이익을 주었고, 명제는 애정으로써 부모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충신과 효자는 당연히 공자, 좌구명, 장석지의 말을 생각해야 하고, 화원, 낙영, 명제의 잘못된 교훈에 비추어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임금과 부모의 유골을 안정되게 하고 죽은 자의 영혼이 만년이 될 때까지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바로 성현이 충성하고 효도하는 원칙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파헤쳐지지 않은 분묘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동한이래 한 왕실의 여러 능묘는 모두 파헤쳐졌으며, 심지어 신체에 감는 옥갑과 그것을 잇는 금실을 불사르고 취하여 유해도 모두 타 없어졌다. 이렇게 태워버리는 것은 마치 분형(焚刑)을 가하는 것과 같은데, 어찌 격한 침통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재난은 장례를 후하게 하고 분묘 주변에 나무를 심는 데서 비롯된다. 장례를 후하게 한 전한의 신하 상홍양(桑弘羊)과 곽우(霍禹)는 나의 교훈이 된다고 한 장연수(張延壽)의 말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황후로부터 귀인(貴人 : 문관의 지위)이하 비빈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아들을 따라 영국(領國)으로 가지 않고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모두 낙양에 붙어있는 윤수(潤水) 서쪽에 매장할 것이므로 이전에 또 그곳을 묘지로 지정해두었다. 때문에 순임금은 창오(蒼梧)에 매장되었지만, 두 명의 비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고, 연릉(延陵)의 계자(季子), 오나라 공자(公子)는 아들을 멀리 영(贏), 박(博)에 매장했다. 영혼이 존재한다면 갈 수 없는 곳이 없으니, 일한(一澣)의 거리가 결코 멀다고 할 수는 없다. 만일 지금의 이 조칙을 누군가 위반한 후 변경하여 조작한다면, 내가 사후에 땅속에서 주검을 찢기고, 찢긴 후에 또다시 찢기게 되는 것이다. 신하나 아들로서 이금이나 아버지에 대하여 치욕과 죽음을 가중시키는 것은 불충이요, 불효다. 죽은 자가 만일 지각을 갖고 있다면, 그런 자에게 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 조칙을 종묘에 넣어두고, 베낀 조칙을 상서(尙書), 비서(秘書), 삼부(三府)에 놓으라.

이 달, 손권이 다시 모반하였다. 영주(郢州)를 회복하여 형주(荊州)라고 했다. 문제가 허창으로부터 출정하여 남방의 손권을 정벌하러 나섰으며, 여러 군대의 병사들이 나란히 진격하니, 손권은 장강을 앞에 두고 저항했다.

11월 11일 문제의 군대가 완(宛)성에 도착했다. 30일, 일식이 나타났다.

이 해(222) 영지지(靈芝池)를 팠다.

황초 4년(223) 봄 정월 조치을 내렸다.

- 동란 이래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천하 사람들은 서로를 잔혹하게 죽였다. 이제 천하가 겨우 평정되었는데, 이후에 감히(다른 사람에게) 사사로이 복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씨족을 모두 죽일 것이다.

완성에 남순대(南巡臺)를 구축했다.

3월 8일 완성에서 궁으로 돌아왔다. 15일, 달이 심수(心宿) 중앙의 대성(大星)을 침범하여 운행했으며,(34) 19일, 대사마 조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 달 역병이 크게 유행했다.

[34] 위서재병오조(魏書載丙午詔曰) : 「孫權殘害民物,朕以寇不可長,故分命猛將三道並征。今征東諸軍與權黨呂範等水戰,則斬首四萬,獲船萬艘。大司馬據守濡須,其所禽獲亦以萬數。中軍、征南,攻圍江陵,左將軍張郃等舳艫直渡,擊其南渚,賊赴水溺死者數千人,又為地道攻城,城中外雀鼠不得出入,此几上肉耳!而賊中癘氣疾病,夾江塗地,恐相染污。昔周武伐殷,旋師孟津,漢祖征隗囂,還軍高平,皆知天時而度賊情也。且成湯解三面之網,天下歸仁。今開江陵之圍,以緩成死之禽。且休力役,罷省繇戍,畜養士民,咸使安息。」    


손권이 백성들을 해치니 짐은 도적들의 기세가 늘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고로 맹장에게 3갈래 길로 나누어 더불어 정벌하도록 명령한다. 지금 동쪽을 정벌하는 여러 군대와 손권의 무리인 여범(呂範)등이 수전을 치러 4만 명의 머리를 베고 1만 척의 배를 노획하였다. 대사마가 유수(濡須)에 머물러 지키면서 그 노획한 바도 또한 만으로 헤아린다. 중군, 정남이 강릉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좌장군 장합(張郃) 등이 수군을 이끌고 직접 강을 건너 남저(南渚)를 공격하니 적중에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이 수 천 명이었다. 또한 지하도를 만들어 성을 공격해 성중에서는 참새나 쥐조차 바깥에 나갈 수 없도록 하였으니 이는 상 위의 고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적중에 전염병이 퍼져 강안을 휩쓸었으므로 전염되는 것이 두려웠다. 이전의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정벌할 때 맹진(孟津)에서 군사를 돌렸고 한조(漢祖 : 광무제 유수)가 외효를 정벌할 때 고평(高平)에서 군대를 돌렸으니 모두 하늘의 때를 알고 적의 정황을 헤아린 것이다. 또한 성탕(成湯 : 은나라 탕왕)이 3면의 그물을 해제하니 천하가 인자(仁者)에게 돌아갔다. 지금 강릉의 포위를 열어 이로써 다 죽은 짐승을 살려주고자 한다. 또한 노역을 쉬게 하고 변방의 병역을 파하여 백성들을 길러 모두 안식을 얻도록 하라.

여름 5월 사다새가 영지지에 모이자, 조칙을 내렸다.

- 이곳은 시인들이 말하는 오택(汚澤)이 있다. 시경 조풍(曹風)의 시(후인의 서문)에 ‘공공(恭公)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는 것을 풍자했다’고 했지만, 지금 어찌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비가 낮은 관직에 머물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새는 무슨 이유로 날아왔겠는가? 그것은 고상하고 빼어난 재능을 갖춘 인물과 품행에 돈독한 군자를 천하에 널리 추천함으로써 조나라 사람의 풍자에 답하기 위한 것이다.(35)

[35] 위서(魏書) - 辛酉,有司奏造二廟,立太皇帝廟,大長秋特進侯與高祖合祭,親盡以次毀;特立武皇帝廟,四時享祀,為魏太祖,萬載不毀也。

6월 17일 임성왕(任城王) 조창(曹彰)이 수도 낙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27일, 태위 가후가 죽었으며,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이달, 폭우가 내려 이수와 낙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을 익사시키고 가옥을 파괴했다.(36)

[36] 위서(魏書) - 七月乙未,大軍當出,使太常以特牛一告祠于郊。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按) :
魏郊祀奏中,尚書盧毓議祀厲殃事云:「具犧牲祭器,如前後師出告郊之禮。」如此,則魏氏出師,皆告郊也。

가을 8월 11일 정위 종요(鍾繇)를 태위로 임명했다.(37) 

[37] 1 위서(魏書) - 有司奏改漢氏宗廟安世樂曰正世樂,嘉至樂曰迎靈樂,武德樂曰武頌樂,昭容樂曰昭業樂,雲(翻)〔翹〕舞曰鳳翔舞,育命舞曰靈應舞,武德舞曰武頌舞,文(昭)〔始〕舞曰大(昭)〔韶〕舞,五行舞曰大武舞。

15일, 영양(榮陽)에서 목책을 만들어 사냥을 하고, 동쪽으로 순시했다. 손권을 정벌한 공적을 논하였고, 여러 장수 이하는 각각 공적에 따라 구분하여 작위를 승진시키고 식읍도 증가시켜 주었다.

9월 19일 허창궁에 도달했다.(38)

[38] 위서(魏書) - 十二月丙寅,賜山陽公夫人湯沐邑,公女曼為長樂郡公主,食邑各五百戶。是冬,甘露降芳林園。

신(臣)송지(松之)의 의견(按) - 芳林園即今華林園,齊王芳即位,改為華林。

5년(224) 봄 정월 반역한 것과 대역죄의 경우는 밀고하여도 좋지만, 그 밖의 경우는 듣거나 다스리지도 않을 것이며, 감히 다른 사람을 무고하는 자가 있으면, 밀고당한 자의 죄를 가지고 밀고한 자를 단죄하겠다고 처음으로 명을 내렸다.

3월 허창에서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여름 4월 태학(太學)을 세우고 오경(五經)의 시험방법을 제정하였으며,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강의하는 박사를 두었다.

5월 담당관리는 공경이 1일과 15일에 황제를 알현하여 의문나는 일을 상주하고, 정치에 관한 중대사를 청취하여 판단하며, 득실에 따라 논의하고 분별한다고 했다.

가을 7월 동쪽으로 순시하러 나가 허창궁에 도착했다.

8월 수군을 만들었고 천자는 직접 어용주(禦龍舟)에 탔으며, 채수(蔡水), 영수(潁水)를 따라 회수(淮水)로 들어가 수춘(壽春)에 도달했다. 양주 경내에 있는 장병과 백성들 중에서 5년 이하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자들을 모두 사면시켰다.

9월 광릉까지 가서 청주와 서두 두 주에 사면령을 내리고, 수비하는 여러 장수들을 바꾸었다.

겨울 10월 16일 태백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허창궁으로 돌아왔다.[39]

[39] 魏書載癸酉詔曰 : 「近之不綏,何遠之懷?今事多而民少,上下相弊以文法,百姓無所措其手足。昔太山之哭者,以為苛政甚于猛虎,吾備儒者之風,服聖人之遺教,豈可以目翫其辭,行違其誡者哉?廣議輕刑,以惠百姓。」

11월 11일 기주가 기근에 빠졌으므로 사자를 파견하여 관의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였다. 9일, 일식이 출현했다.

12월 조칙을 내렸다.

- 선왕이 제사의 예법을 정한 것은 효도를 밝히고 조상을 섬기기 위함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교(郊)와 사(祀)이고, 그 다음은 선조에게 제사지내는 종묘(宗廟) 제사다. 삼신(三神 : 日, 月, 星), 오행(五行 : 木, 化, 土, 金, 水), 명산대천에 제사지내는 것은 예법의 종류가 아니므로 경전에 기록해야 되는 제사가 아니다. 말세에 이르면 쇠미하고 혼란스러워지므로 무사(巫史)를 숭배하고 믿어, 궁전 안과 창문 사이에 술을 뿌리고 귀신에게 제사지내니 심하도다! 그 미혹됨이여! 지금부터 감히 제사지낼 수 없는 제사를 진행하고, 무당의 말을 사용하는 자에 대해서는 모두 사악한 도를 받드는 것으로 논할 것이니, 이런 규칙을 법전에 기술하라.

이 해(224) 천연지(天淵池)를 팠다.

6년(225) 봄 2월 사자를 파견하여 허창 동쪽에 있는 패군(沛郡)의 모든 지역을 순시하고 질곡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을 위문하였으며,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곡식을 내어 구제하였다.[40]

[40] 위략재조(魏略載詔曰) - 「昔軒轅建四面之號,周武稱『予有亂臣十人』,斯蓋先聖所以體國君民,亮成天工,多賢為貴也。今內有公卿以鎮京師,外設牧伯以監四方,至於元戎出征,則軍中宜 有柱石之賢帥,輜重所在,又宜有鎮守之重臣,然後車駕可以周行天下,無內外之慮。吾今當征賊,欲守之積年。其以尚書令潁鄉侯陳群為鎮軍大將軍,尚書僕射西 鄉侯司馬懿為撫軍大將軍。若吾臨江授諸將方略,則撫軍當留許昌,督後諸軍,錄後臺文書事;鎮軍隨車駕,當董督眾軍,錄行尚書事;皆假節鼓吹,給中軍兵騎六 百人。吾欲去江數里,築宮室,往來其中,見賊可擊之形,便出奇兵擊之;若或未可,則當舒六軍以遊獵,饗賜軍士。」

3월 소릉(召陵)에 행차하여 토로거(討虜渠 : 운하 이름)를 개통했으며, 28일,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병주자사 양습(梁習)이 선비족 가비능(軻比能)을 토벌하고 격파했다.

윤달 3월 24일 문제가 수군을 정비하여 동쪽으로 손권을 정벌하러 나섰다.

5월 2일 초현에 도착했다. 16일, 화성이 태미성(太微星) 구역으로 들어갔다.

6월 이성군(利成郡)의 병사 채방(菜方) 등이 군을 점령하고 모반하였으며, 태수 서질(徐質)을 살해했다. 따라서 둔기교위 임복(任福)과 보병교위 단소(段昭)를 파견하여 청주자사(王凌)와 협력하여 그들을 토벌하고 평정하도록 했다. 그들에게 협박당하여 난을 일으키자 도망한 자는 모두 죄를 면해주었다.

가을 7월 문제가 아들 조감(曹鑒)을 동무양왕(東武陽王)으로 세웠다.

8월 문제가 수군을 통솔하여 초현을 출발해 와수(渦水)를 지나 회수로 들어갔으며, 육로를 지나 서주에 도착했다.

9월 동순대(東巡臺)를 만들었다.

겨울 10월 광릉 고성(古城)에 도달하여 장강가에서 열병 의식을 진행하였다. 병졸은 10여 만 명이었고, 군기가 수백 리에 이어 펄럭였다.[41]

[41] 위서(魏書)에 실린 황제()가 말위에서 지은 시에 이르길:


"관병이 강가에 이르니,

강물은 호호탕탕하게 흐른다!

창과 방패는 산림처럼 가득하고,

검은 갑옷은 햇빛에 반짝인다.

사나운 장수들은 분노를 가슴에 품고,

기세등등하게 늘어서 있다.

누가 강물이 넓다 하는가,

갈대 하나로도 건널 수 있는 것을,

움도 없이 적노(敵虜)를 굴복시켜,

집병(戢兵)함을 현량(賢良)하다 칭찬하노라.

고공(古公; 주나라 태왕)이 기읍(岐邑)에 거주하니,

행적이 시작되어 은상(殷商)을 멸망시켰노라.

맹헌(孟獻)이 호뢰(虎牢)를 건설하니,

정나라(鄭) 사람들이 두려워 계상(稽顙)하는구나.

조충국(趙充國)이 밭갈고 재배에 힘쓰니,

선령(先零)은 스스로 파망(破亡)했구나.

회수(淮) 사수(泗)사이에 농업을 일으키고,

집을 지어 서주(徐)를 도읍으로 삼으리라.

권략(權略)의 사용을 헤아려 좋도록 하니,

육군이 모두 기뻐하며 편안해 하는구나;

어찌 동산시(東山詩)와 같을 것이며,

침착하고 여유로 두터워 우상(憂傷)하구나."

이 해(225) 독한 추위로 수로가 얼어 배를 장강으로 들여보낼 수 없었으므로,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왔다.

11월 동무양왕 조감이 세상을 떠났다.

12월 초현을 출발하여 양나라를 방문하였으며, 사자를 파견하여 태뢰(太牢)를 바쳐 한나라 태위 교현에게 제사지냈다.

7년(226) 봄 정월 허창에 도착하려고 할 때, 허창성의 남쪽 문이 이유도 없이 저절로 무너져 내렸다. 문제는 마음속으로 불길하게 생각하고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10일, 낙양궁으로 돌아갔다.

3월 구화대(九華臺)를 세웠다.

여름 5월 16일 문제는 위독하여 중군대장군 조진(曹眞), 진군대장군 진군(陳群), 정동대장군 조휴(曹休), 무군대장군 사마의(司馬懿)를 불렀다. 그들은 유조(遺詔)를 받아 장차 황위를 이을 어린 임금 조예를 보좌했다. 후궁 숙원(淑媛)과 소의(昭儀) 이하 궁녀를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17일, 문제는 가복전(嘉福殿)에서 붕어하니 이때, 향년 40세였다.[42]

[42] 위서(魏書) - 시신을 숭화전(崇華) 앞에 두었었다.

6월 9일 수양릉에 편안히 묻혔다. 빈(殯 : 매장하기 전에 관에 넣어 안치하는 것)으로부터 매장하기까지 모두 그가 생전에 안배한 규정에 따라 집행했다.[43]

[43] 1 위씨춘추(魏氏春秋曰) - 명제(明帝)가 장의(葬儀)의 출발을 전송하려고 할 때, 조진(曹眞), 진군(陳群), 왕랑(王郞) 등이 더위를 이유로 나가지 말 것을 강력히 간언했으나 명제는 듣지 않았다.

손성(孫盛) - 夫窀穸之事,孝子之極痛也,人倫之道,於斯莫重。故天子七月而葬,同軌畢至。夫以義感之情,猶盡臨隧之哀,況乎天性發中,敦禮者重之哉!魏氏之德,仍世不基 矣。昔華元厚葬,君子以為棄君於惡,群等之諫,棄孰甚焉!鄄城侯植為誄曰:「惟黃初七年五月七日,大行皇帝崩,嗚呼哀哉!于時天震地駭,崩山隕霜,陽精薄 景,五緯錯行,百姓呼嗟,萬國悲傷,若喪考妣,(恩過慕)〔思慕過〕唐,擗踊郊野,仰想穹蒼,僉曰何辜,早世殞喪,嗚呼哀哉!悲夫大行,忽焉光滅,永棄萬 國,雲往雨絕。承問荒忽,惛懵哽咽,袖鋒抽刃,歎自僵斃,追慕三良,甘心同穴。感惟南風,惟以鬱滯,終於偕沒,指景自誓。考諸先記,尋之哲言,生若浮寄, 唯德可論,朝聞夕逝,孔志所存。皇雖一沒,天祿永延,何以述德?表之素旃。何以詠功?宣之管絃。乃作誄曰:皓皓太素,兩儀始分,中和產物,肇有人倫,爰暨 三皇,實秉道真,降逮五帝,繼以懿純,三代制作,踵武立勳。季嗣不維,網漏于秦,崩樂滅學,儒坑禮焚,二世而殲,漢氏乃因,弗求古訓,嬴政是遵,王綱帝 典,闃爾無聞。末光幽昧,道究運遷,乾坤迴曆,簡聖授賢,乃眷大行,屬以黎元。龍飛啟祚,合契上玄,五行定紀,改號革年,明明赫赫,受命于天。仁風偃物, 德以禮宣;祥惟聖質,嶷在幼妍。庶幾六典,學不過庭,潛心無罔,抗志青冥。才秀藻朗,如玉之瑩,聽察無嚮,瞻睹未形。其剛如金,其貞如瓊,如冰之潔,如砥 之平。爵公無私,戮違無輕,心鏡萬機,攬照下情。思良股肱,嘉昔伊、呂,搜揚側陋,舉湯代禹;拔才巖穴,取士蓬戶,唯德是縈,弗拘禰祖。宅土之表,道義是 圖,弗營厥險,六合是虞。齊契共遵,下以純民,恢拓規矩,克紹前人。科條品制,褒貶以因。乘殷之輅,行夏之辰。金根黃屋,翠葆龍鱗,紼冕崇麗,衡紞維新, 尊肅禮容,矚之若神。方牧妙舉,欽於恤民,虎將荷節,鎮彼四鄰;朱旗所剿,九壤被震,疇克不若?孰敢不臣?縣旌海表,萬里無塵。虜備凶徹,鳥殪江岷,權若 涸魚,乾腊矯鱗,肅慎納貢,越裳效珍,條支絕域,侍子內賓。德儕先皇,功侔太古。上靈降瑞,黃初叔祜:河龍洛龜,淩波游下;平鈞應繩,神鸞翔舞;數莢階 除,系風扇暑;皓獸素禽,飛走郊野;神鍾寶鼎,形自舊土;雲英甘露,瀸塗被宇;靈芝冒沼,朱華蔭渚。回回凱風,祁祁甘雨,稼穡豐登,我稷我黍。家佩惠君, 戶蒙慈父。圖致太和,洽德全義。將登介山,先皇作儷。鐫石紀勳,兼錄眾瑞,方隆封禪,歸功天地,賓禮百靈,勳命視規,望祭四嶽,燎封奉柴,肅于南郊,宗祀 上帝。三牲既供,夏禘秋嘗,元侯佐祭,獻璧奉璋。鸞輿幽藹,龍旂太常,爰迄太廟,鍾鼓鍠鍠,頌德詠功,八佾鏘鏘。皇祖既饗,烈考來享,神具醉止,降茲福 祥。天地震蕩,大行康之;三辰暗昧,大行光之;皇紘絕維,大行綱之;神器莫統,大行當之;禮樂廢弛,大行張之;仁義陸沈,大行揚之;潛龍隱鳳,大行翔之; 疏狄遐康,大行匡之。在位七載,元功仍舉,將永太和,絕跡三五,宜作物師,長為神主,壽終金石,等算東父,如何奄忽,摧身后土,俾我〈煢,去冖〉〈煢,去 冖〉,靡瞻靡顧。嗟嗟皇穹,胡寧忍務?嗚呼哀哉!明監吉凶,體遠存亡,深垂典制,申之嗣皇。聖上虔奉,是順是將,乃創玄宇,基為首陽,擬跡穀林,追堯慕 唐,合山同陵,不樹不疆,塗車芻靈,珠玉靡藏。百神警侍,來賓幽堂,耕禽田獸,望魂之翔。於是,俟大隧之致功兮,練元辰之淑禎,潛華體於梓宮兮,馮正殿以 居靈。顧望嗣之號咷兮,存臨者之悲聲,悼晏駕之既脩兮,感容車之速征。浮飛魂於輕霄兮,就黃墟以滅形,背三光之昭晰兮,歸玄宅之冥冥。嗟一往之不反兮,痛 閟闥之長扃。咨遠臣之眇眇兮,感凶諱以怛驚,心孤絕而靡告兮,紛流涕而交頸。思恩榮以橫奔兮,閡闕塞之嶢崢,顧衰絰以輕舉兮,迫關防之我嬰。欲高飛而遙憩 兮,憚天網之遠經,遙投骨於山足兮,報恩養於下庭。慨拊心而自悼兮,懼施重而命輕,嗟微驅之是效兮,甘九死而忘生,幾司命之役籍兮,先黃髮而隕零,天蓋高 而察卑兮,冀神明之我聽。獨鬱伊而莫愬兮,追顧景而憐形,奏斯文以寫思兮,結翰墨以敷誠。嗚呼哀哉!」

처음의 문제는 문학을 애호하여 저술을 의무로 삼았으며, 그 자신이 지은 작품이 거의 1백 편에 달했다. 모든 유학자들에게 경전을 편찬하도록 하여 분류법에 따라 배열하였는데, 모두 1천여 편이며, 황람(皇覽)이라는 책이름을 붙였다.[44]

[44] 위서(魏書) - 帝初在東宮,疫癘大起,時人彫傷,帝深感歎,與素所敬者大理王朗書曰:「生有七尺之形,死唯一棺之土,唯立德揚名,可以不朽,其次莫如著篇籍。疫癘數起,士 人彫落,余獨何人,能全其壽?」故論撰所著典論、詩賦,蓋百餘篇,集諸儒於肅城門內,講論大義,侃侃無倦。常嘉漢文帝之為君,寬仁玄默,務欲以德化民,有 賢聖之風。時文學諸儒,或以為孝文雖賢,其於聰明,通達國體,不如賈誼。帝由是著太宗論曰:「昔有苗不賓,重華舞以干戚,尉佗稱帝,孝文撫以恩德,吳王不 朝,錫之几杖以撫其意,而天下賴安;乃弘三章之教,愷悌之化,欲使曩時累息之民,得闊步高談,無危懼之心。若賈誼之才敏,籌畫國政,特賢臣之器,管、晏之 姿,豈若孝文大人之量哉?」三年之中,以孫權不服,復頒太宗論于天下,明示不願征伐也。他日又從容言曰:「顧我亦有所不取于漢文帝者三:殺薄昭;幸鄧通; 慎夫人衣不曳地,集上書囊為帳帷。以為漢文儉而無法,舅后之家,但當養育以恩而不當假借以權,既觸罪法,又不得不害矣。」其欲秉持中道,以為帝王儀表者如 此。胡沖吳曆曰:帝以素書所著典論及詩賦餉孫權,又以紙寫一通與張昭。

※ 평하여 말한다.

문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소질이 있었으니,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고, 넓은 지식도 갖추고 있었고, 기억력이 탁월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었다.[45] 


[45] 전론제자서(典論帝自敘曰): [[전론제자서]]로 분리

博物志曰:帝善彈棋,能用手巾角。時有一書生,又能低頭以所冠著葛巾角撇棋。

만일 여기에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면, 옛날의 군왕이 어찌 그로부터 멀리 있었겠는가!
분류 :
위서
조회 수 :
10194
등록일 :
2013.05.03
11:16:24 (*.148.47.205)
엮인글 :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853/055/trackback
게시글 주소 :
http://rexhistoria.net/1853

코렐솔라

2013.07.09
16:54:15
(*.104.141.18)
원문을 옮기면 한자 마다 띄어쓰기가 하나씩 되어 있는 형상이 되어 있어 그 부분만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7
18:17:44
(*.52.89.88)
주석 20번의 경우 사마휘님의 번역입니다 http://cafe.naver.com/sam10/355346

코렐솔라

2013.08.08
13:48:53
(*.0.203.42)
맨 밑에 박물지가 빠져 있어서 추가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10.25
15:44:41
(*.166.245.168)
주석 4번은 구라뱅뱅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67233

코렐솔라

2013.10.30
17:54:19
(*.0.203.41)
7번의 요안현 흰꿩도 구라뱅뱅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68828

코렐솔라

2013.10.30
18:36:47
(*.0.203.41)
9번도 구라뱅뱅님의 번역입니다 http://rexhistoria.net/68843

소림 동파의 상소문은 승룡님 번역입니다. http://cafe.naver.com/sam10/449387

5번 주석은 하트개미님의 번역이며 http://rexhistoria.net/community_free/150525 역주인 춘추점례는 http://blog.naver.com/pluto613/90157826021
십팔사략은 http://ewwiz.blog.me/220307198843 이곳 출처입니다.

코렐솔라

2015.12.28
06:25:07
(*.234.104.49)
3번 6번 10번 13번 14번, 15번 16번 17번 주석은 삼국지 갤러리의 안녕님 번역입니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amgugji&no=343195&page=1&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B%B2%88%EC%97%AD

23번은 http://blog.naver.com/dragonrz/220277665827 34번은 http://blog.naver.com/dragonrz/220197898076 dragonrz님의 번역입니다. dragonrz님은 한문과 국역을 병용한 형태를 부탁하셨기에 한문밑에 국역이 있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촉서 촉서 목차 링크 재원 2013-07-08 136018
공지 위서 위서 목차 링크 [1] 재원 2013-06-29 139499
공지 오서 오서 목차 링크 [3] 재원 2013-06-28 96601
150 위서 문덕곽황후전(조비의 부인) [2] 견초 2013-05-03 6197
149 위서 문소견황후전(문소진황후, 조비의 부인) [7] 견초 2013-05-03 7182
148 위서 무선변황후전(조조의 부인) [3] 견초 2013-05-03 6435
147 위서 진류왕전(조환전) [1] 견초 2013-05-03 4965
146 위서 고귀향공기(조모전) [2] 견초 2013-05-03 5884
145 위서 제왕기(조방전) [5] 견초 2013-05-03 6776
144 위서 <배송지주>진랑전, 진의록전, 공계전 [2] 재원 2013-05-03 4235
143 위서 <배송지주>학소전 재원 2013-05-03 4980
142 위서 명제기(조예전) [13] 견초 2013-05-03 10321
» 위서 문제기(조비전) [7] 견초 2013-05-03 10194
140 위서 <배송지주>왕준전 재원 2013-05-03 3799
139 위서 <배송지주>조등전(조조의 할아버지) 재원 2013-05-03 4451
138 위서 무제기(조조전) [3] 재원 2013-05-03 40725
137 촉서 장익전 [3] 견초 2013-05-03 5792
136 촉서 등지전 [12] 견초 2013-05-03 5940
135 촉서 장완전 견초 2013-05-03 5878
134 촉서 장억전(장의) [4] 견초 2013-05-03 5945
133 촉서 왕평전 [1] 견초 2013-05-02 7319
132 촉서 마충전 [4] 견초 2013-05-02 5199
131 촉서 여개전 [1] 견초 2013-05-02 3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