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황제(明帝)는 휘를 예(叡), 자를 원중(元仲)이라고 하며, 문제(文帝)의 태자이다. 태어나자 태조는 그를 매우 사랑했으며, 항상 자신의 옆에 있도록 명령했다.(1) 

[1] 위서(魏書) - 명제는 태어난 지 5, 6년 후부터 수려한 풍모를 지니고 있어서 무황제(武皇帝 : 무제 조조)는 “나의 기반은 너에 이르러 3대째가 된다.”고 하면서 종의 연회 때 동행하였고, 명제를 시중(侍中)ㆍ측근(近臣)들과 함께 있게 할 정도였다. 명제는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하였으며, 법리(法理)에 남다른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명제는 열다섯 살 때 무덕후(武德侯)에 봉해졌다.

황초 2년(221) 제공(齊公)이 되었다.

3년(222) 평원왕(平原王)이 되었다. 그의 생모 견씨가 부친 문제에게 주살 당했으므로 뒤를 이을 황태자로 세워지지 않았다. (2)

[2] 위략(魏略) - 문제는 곽후(郭后)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조서를 내려 명제를 그녀의 아들로서 삼아 양육하도록 했다. 명제는 어머니가 보통 이상의 온 정성을 쏟았기 때문에 내심으로는 편안하지 못했다. 나중에 할 수 없이 곽태후(郭后)를 존경스럽게 섬기고, 아침저녁으로 여관장(女官長)을 모시고 기거를 물었다. 곽태후 또한 아들이 없었으므로 자애롭게 보살폈다. 문제는 처음에는 명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다른 부인(徐姬)의 아들인 경조왕(京兆王 : 曹禮)을 후사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태자(太子)를 세우지 않았다.

위말전(魏末傳) - 명제가 문제를 따라 사냥을 나갔을 때 어미 사슴과 아기 사슴이 함께 있는 것을 봤다. 문제는 이걸보고 어미 사슴을 쏴 죽였고 명제로 하여금 아기 사슴을 쏴 죽이게 했다. 명제가 따르지 않으며 울며 말하길

"폐하께서는 이미 그 어미를 쏘았습니다. 신은 차마 그 자식을 쏘지는 못하겠습니다."

문제는 즉시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겼으며 명제를 세우기로 심었다.

7년(226) 여름 5월 문제는 병세가 위중하자, 곧바로 명제를 황태자로 삼았다. 

17일, 황제에 즉위하여 대사면을 행하고, 황태후에게 존칭을 주어 태황태후(太皇太后)라 하고, 황후를 황태후(皇太后)라고 했다. 여러 신하들의 봉작에도 각기 차등을 두었다.(3)

[3] 세어(世語) - 명제는 신하들과 본래부터 접촉이 없었으므로 즉위한 이후부터는 신하들이 그의 풍채를 상상만 했다. 며칠이 지난 시점에서 유독 시중(侍中) 유엽(劉曄)만이 알현하여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였다. 사람들은 옆에서 듣다가 유엽이 나오자 

“어떻습니까?”

라고 물으니, 유엽은 

“진시황(秦始皇)과 한효무(漢孝武)의 범주이지만 자질은 미약하여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오.”

라고 했다.

6월 14일, 생모 견부인(甄夫人)에게 문소황후(文昭皇后)의 시호를 추증했다. 23일, 동생 조정(蕤)을 양평왕(陽平王)으로 삼았다.

8월 손권이 (형주) 강하군을 공격했지만, 태수 문빙文聘이 굳게 지켰다. 조정에서 의논하여 구원하는 군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명제가 말했다.
 
“손권은 수전에 익숙한데, 감히 배에서 내려 뭍에서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엄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공격이란 수비하는 세력보다 두 배는 있어야 하므로,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이보다 앞서 치서시어사 순우를 보내 변방(병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순우가 도착하여, 강하군에서 지나가는 현마다 징발한 군사 및 따르는 보병과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산에 올라 횃불을 들자[병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는 것] 손권은 물러나 달아났다.

12일, 아들 조경(曹冏)을 내세워 청하왕(淸河王)으로 삼았다. 오(吳)나라의 장군 제갈근(諸葛瑾)과 장패(張覇) 등이 양양(襄陽)을 침공했지만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격파시키고 장패를 참수하였으며,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조휴(曹休)도 별동 부대의 대장을 심양(尋陽)에서 격파시켰다. 이들의 공적을 논하고 상을 주는데 각기 차등을 주었다.

겨울 10월, 청하왕 조경이 서거했다.

12월, 태위(太尉) 종요(鍾繇)를 태부(太傅)로,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조휴(曹休)를 대사마(大司馬)로, 중군대장군(中軍大將軍) 조진(曹眞)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사도(司徒) 화흠(華歆)을 태위(太尉)로, 사공(司空) 왕랑(王郞)을 사도(司徒)로,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진군(陳群)을 사공(司空)으로,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사마선왕(司馬宣王)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태화 원년(227) 봄 정월, 명제는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데 무황제(태조)를 함께 제사지내고, 모든 종족이 명당 -정당(政堂)- 에서 문제를 상제와 짝지어 제사지냈으며, 강하군의 남부를 분할하였고 강하의 남부에 도위((都尉)를 설치했다. 서평군(西平郡)의 국영(麴英)이 반란을 일으켜 임강령(臨羌令)과 서도(石) 등의 지방 관원을 살해하였으므로, 장군 학소(郝昭)와 녹반(鹿磐)을 파견하여 그를 토벌하고 참수시켰다.

2월 5일, 명제는 직접 적전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15일, 문소황후(견부인) 영묘를 업성에 건립하고, 21일, 동교(東郊)에서 태양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1일, 다시 오주전(五鑄錢)을 발행했다. 

19일, 처음으로 종묘를 건축했다.

가을 8월, 서쪽 교외에서 달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4일, 동쪽 교외에서 열병식을 거행했다. 언기의 왕이 아들을 조정으로 들여보내자, 명제는 그들의 작위를 두 등급 승진시켰으며, 홀아비, 과부, 자식 없는 노인, 고아와 같이 자립할 수 없는 자들에게 양식을 나눠주었다.

12월, 모황후의 부친 모가(毛嘉)를 열후로 봉했다. 신성(新城)태수 맹달(孟達)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표기장군 사마선왕에게 조칙을 내려 토벌하도록 했다. (4)

삼보결록(三輔決錄)에서 이르길: [[맹타전]]으로 분할

위략(魏略)에 이르길, 맹달(孟達)이 연강(延康:220)원년에 부곡 4천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에 귀순했을 때 조비는 처음 왕위에 막 올랐을 때였다. 조비는 전부터 맹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어서 잘 알고 있었는데, 맹달이 귀순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기뻐했다. 먼저 사람을 잘 볼 줄 아는 고위 관리를 [貴臣] 보내 과연 맹달을 만나 보게 했다. 그 관리가 돌아와 보고했다. 

"장수(將帥)의 재목입니다", 

다른 관리는 또 말했다. 

"재상의 그릇입니다.".

문제(文帝: 조비)가 더욱 맹달을 흠모해 그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이윤(伊摯)은 상(商)나라를 배신하고 주(周)나라에 귀순해 주나라를 크게 흥성하게 했고 악의(樂毅)는 모국인 조(趙)나라를 떠나 연(燕)나라의 아경(亞卿)이 되어 연나라를 전국 칠웅의 하나로 만들었다.

近日有命,未足達旨,何者?昔伊摯背商而歸周,百里去虞而入秦,樂毅感鴟夷以蟬蛻,王遵識逆順以去就,皆審興廢之符效,知成敗之必然,故丹青畫其形容,良史 載其功勳。聞卿姿度純茂,器量優絕,當騁能明時,收名傳記。今者翻然濯鱗清流,甚相嘉樂,虛心西望,依依若舊,下筆屬辭,歡心從之。昔虞卿入趙,再見取 相,陳平就漢,一覲參乘,孤今於卿,情過於往,故致所御馬物以昭忠愛。"

맹달이 초(譙)에 이르러 조비를 만났는데, 여유롭고 우아한 풍모에, 재주와 변설이 보통 사람 이상이었다. 조비도 작은 수레에 같이 타고서 외출할 때, 맹달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경은 혹시 유비가 보낸 자객은 아니겠지요?"

조비는 맹달과 함께 연을 타고 갔다. 조비는 맹달을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고 신성태수(新城太守)를 겸직하게 해 서남(西南)지방의 일을 위임했다. 신하들 중 어떤 사람은 그를 대접하는 것이 태람(太濫: 太猥)하여, 지나치게 분수를 넘는다고 여겼고, 또 그에게 한 지방의 임무를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조비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에게 다른 뜻이 없는 [無他] 것을 보증합니다. 만약 있다해도, 호전(蒿箭: 호시(蒿矢): 쑥의 화살)로 쑥을 찌르는 정도일 뿐입니다."

조비는 맹달을 위해 상용, 서성, 방릉을 합쳐 신성군을 신설했다.

맹달은 문제의 총애를 받았고, 또 환계(桓階)와 하후상(夏侯尚)과 친교를 맺었다. 문제가 죽자, 환계와 하후상도 모두 죽어, 이때부터 자신은 변방(疆埸)에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심히 괴로워했다.

제갈량(諸葛亮)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은밀히 맹달을 유도하면서 맹달과 서신을 교환하며 같이 움직일 준비를 했다. 위흥태수 신의(申儀)는 맹달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맹달이 은밀하게 촉과 밀통하고 있다는 표를 황제에게 올렸는데, 황제는 그 표를 믿지 않았다. 사마선왕(사마의)가 참군(參軍)인 양기(梁幾)를 파견해 맹달을 살피게 하고, 맹달에게 입조할 것을 권하자, 맹달은 놀라서 모반했다.

간보진기(幹寶晉紀): 맹달이 신성(新城)에 처음 입성했을 때 백마새(白馬塞)에 올라 탄식하며 말한 적이 있었다.

“유봉(劉封)과 신탐(申耽)은 금성천리(金城千里)를 점거하고도 남에게 빼앗겼구나!”

2년(228) 봄 정월, 사마선왕은 신성을 공격하여 토벌하고, 맹달을 참수하여 그의 머리를 보내왔다.(5) 

[5] 위략(魏略) - 사마선왕(宣王)이 맹달(達)의 대장 이보(李輔)와 맹달의 조카 등현(鄧賢)을 유인하자, 등현 등은 성문을 열고 군대를 맞아들였다. 맹달을 포위한 지 16일 만에 패배시키고, 낙양(洛陽)의 번화한 길에서 머리를 불태워 버렸다.

본래 신성군에 속했던 상용(上庸), 무릉(武陵), 무현(巫縣)을 떼어 내어 새로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하고, 석현(錫縣)을 새로 석군(錫郡)이라 했다.

촉나라의 대장 제갈량이 국경을 침입하자 천수(天水), 남안(南安), 안정(安定) 삼군(三郡)의 관리와 민중이 위나라에 모반하고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6) 

[6] 위서(魏書) - 이렇게 되자 조정의 신하들은 무슨 계책을 세워야 할지 몰랐는데, 명제가 말하기를 

“제갈량(亮)은 산을 거점으로 굳게 지키다가 지금은 스스로 왔으니, 이는 병서(兵書)에서 말하듯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과 합치되오. 하물며 제갈량은 삼군(三郡 : 천수, 남안, 안성)을 탐하여 전진할 줄만 알고 물러날 줄을 모르니, 이제 이때를 이용한다면 그를 쳐부수는 것은 필연적이오.”

라고 했다. 그래서 병마를 정비하고,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동원하여 제갈량을 막아냈다.

명제는 대장군 조진을 파견하여 관우(關右 : 관중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일제히 군대를 진격하도록 했으며, 우장군 장합(張郃)을 파견하여 가정(街亭)에서 제갈량을 크게 격파시켰다. 제갈량이 패배하여 도주하자, 삼군이 평정을 되찾았다.

2월 18일, 명제는 순시하여 장안에 이르렀다. (7)

[7] 위략(魏略): 황제가 천하에 노포(露布)하고 익주(益州)에 반고(班告)해서 이르길(익주에 대한 일종의 포고문),

“유비는 은혜를 배신하고 스스로 파촉으로 숨어들었고, 제갈량은 부모의 나라를 저버리고 적의 잔당에 붙어 신인(神人)에 해독을 끼쳤다. 제갈량은 겉으로는 고아를 돌본다는 명분을 내세우나 실제로는 국정을 농단해 유승지(劉升之)의 형제는 빈 성을 홀로 지킬 뿐이었다.(유선의 아명이 아두이므로 두(斗)와 승(升)의 상관성을 들어 유승지=유선을 가리킨다고 봄. 즉, ‘승지’를 ‘공사’ 이외에 유선의 또 다른 자(字)로 보는 견해)

또한 제갈량은 익주 땅을 업신여기고 그 백성들을 학대하니 이랑(利狼), 탕거(宕渠), 고정(高定), 청강(靑羌)이 모두 와해되어 제갈량을 원수처럼 여겼다. 그러나 제갈량은 가죽옷을 입은 채 땔나무를 져서 털이 다 없어지는 격으로 살을 잘라 내고 뼈를 상하게 하면서도 스스로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하니, 이는 우물 안에서 용병하고 소발굽 위에서 노니는 격이었다.

짐이 즉위한 이래 3변이 무사했고 천하인들이 여러 차례 전란을 겪은 것을 애처로이 여기었다. 또한 사해의 노인들과 고아를 돌보고자 하여 먼저 예악의 기풍에 힘쓰고 차후 농사가 한가한 틈에 강무(講武)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이웅(李熊)의 어리석은 용맹을 본받을 뿐, 형감(荊邯)의 덕을 헤아린 깨우침을 생각지 않아, 관리와 백성들을 구략(驅略)하고 기산을 도둑질했도다.(이웅, 형감은 왕망 말 광무제와 천하를 다투었던 공손술 휘하 인물들) (그러나) 왕사(王師-왕의 군대)가 바야흐로 떨쳐지자 마속, 고상은 (왕사의) 깃발을 보자마자 패주해 달아났다. 범 같은 신하가 패한 군대를 축출하여 시체를 밟고 핏물을 건너자 제갈량은 소인배로서 짐의 군대에 놀라 펄쩍 뛰어 달아났다.

짐이 생각건대 모든 땅에 왕의 신민이 아닌 자가 없다. 군대가 이르는 곳에 형극(荊棘)이 생기는 것이므로 천실(千室)의 읍(큰 고을)에 충신정량(忠信貞良)한 자들이 음혼(淫昏)한 무리와 함께 도탄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리 포고하여 나라의 성심을 밝히려는 것이다. 사세의 변화를 생각하고 어지러운 나라에 머물지 말라. 제갈량에게 겁박 받은 파촉의 장리사민(將吏士民-장수, 관원, 선비, 백성)들이여, 공경 이하 모든 백성들은 스스로 손을 묶고 항복하도록 하라.

여름 4월 8일, 낙양궁으로 돌아왔으며,(8) 옥에 갇힌 사형수 이하의 죄인을 사면시켰다. 

[8] 위략(魏略) - 이 당시 명제가 붕어했다는 참언이 있어서 군신들은 옹구왕(雍丘王) 조식을 영접하려고 했다. 수도에서는 변태후와 여러 공(公)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명제가 돌아오자 얼굴을 살폈다. 변태후(卞太后)는 돌아온 것을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발설자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이에 명제는 말하기를, “세상의 말이 모두 이러하거늘 어찌하여 찾으려고 하시오?”라고 했다.

16일, 제갈량 토벌의 공훈에 따른 판정이 있었는데, 작위를 봉하고 영지를 증가시켜 주는 데 각각 차등을 두었다.

5월, 큰 가뭄이 들었다.

6월, 조칙을 내렸다.

- 유학을 존중하고 학문을 중시하는 것은 제왕 교화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면서 유학을 배운 관원 중에 경전에 정통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 성현의 도리를 널리 알릴 수 있겠는가? 그 중에서 박사를 잘 선발하여, 비로소 시중과 산기상시의 관직에 임명해야 된다. 각 군과 국에 널리 조칙을 내어 공사(貢士)에는 경학에 뛰어난 자를 우선적으로 추천하게 하라.

9월, 조휴가 여러 군대를 통솔하여 완성(睕城)에 도달하여 오나라 대장 육의(陸議)와 석정(石亭)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29일, 아들 조목(曹穆)을 세워 번양왕(繁陽王)이라고 했다.

10월 4일, 대사마 조휴가 죽었다.

겨울 10월, 공경과 측근의 가신들에게 조칙을 내려 뛰어난 대장을 한 명씩 추천하도록 했다.

11월, 사도 왕랑이 죽었다.

12월, 제갈량(諸葛亮)이 진창(陳倉)을 포위하였으므로, 조진은 장군 비요(費曜) 등을 파견하여 그와 싸우도록 했다.(9) 

[9] <위략>[[학소전]] 으로 분할

요동태수 공손공의 형의 아들인 공손연(公孫淵)이 공손경의 지위를 강탈하였으므로, 공손연을 요동태수로 임명했다.

태화 3년(229) 여름 4월, 원성왕(元城王) 조례(曹禮)가 세상을 떠났다.

6월 21일, 번양왕 조목이 죽었다. 26일, 고조부 대장추(大長秋) 조등에게 사후의 존호(尊號)를 주어 고황제(高皇帝)라 하고, 부인 오씨(吳氏)를 고황후(高皇后)라고 했다.

가을 7월, 조칙을 내렸다.

- 예법에 따르면 황후에게 후사가 없으면 서자를 선택하여 세워 정통을 잇도록 했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바른 혈통을 계승한 것으로 공적인 도의를 받들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사적인 친분을 생각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겠는가! 전한의 선제(宣帝)는 소제(昭帝)의 뒤를 이었지만, 망부(亡父 : 史皇孫)의 지위를 올려 도황고(悼皇考)라는 존호를 주었다.(10) 

[10] 보다 상세한 내용은 한서(漢書) 무오자전(武五子傳)에 있다.

원제(元帝)의 서손(庶孫)이었던 한나라 애제(哀帝)는 번왕의 신분으로서 황제를 옹립하고, 동굉(董宏) 등은 멸망한 진(秦) 왕조의 실례를 들고 나와 당시의 조정을 미혹시켜 잘못 인도하였으며, 애제의 망부 정도공왕(定陶恭王)에 대하여 공황(恭皇)이라는 존호를 주고 수도에 영묘를 건립하였다. (11) 

[11] 보다 상세한 내용은 한서(漢書) 애제기(哀帝紀)에 있다.

또 번왕 가까이에서 총애를 받은 자(애제의 어머니 丁妃)에게 은총을 주어 장신궁(長信宮 : 황태후를 가리킴)과 똑같이 취급하고, 전전(前殿)에서 부자가 황제라고 칭하는 것이 나타났고 아울러 네 명의 황태후가 후궁에 함께 있는 것은 참람되고 법도에서 어긋난 것이니, 이처럼 법도가 없어서 사람이든 신이든 신하 사단(師丹)이 그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애제는 충성스럽고 공정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죄를 뒤집어썼으며, 그 결과 정희(애제의 모친), 부태후(傅太后 : 애제의 조모)의 능묘가 불에 타 없어지게 하는 위급함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 이후, 출신이 유사한 제왕들이 이러한 일을 다투어 모방했다. 옛날에 노나라 문공은 -선대 희공을 대대로 민공보다도 높은 위치에서 제사지냈다- 제사 순서를 거슬렀지만, 그 죄는 하부에서 유래하고 있다. 송나라에는 임금을 후하게 장사지내는 것이 법도가 아니므로, 모두 그 책임을 화원(華元)에게로 돌렸다. 지금 공경과 담당 관리들은 이전 세대에 나온 일로써 깊이 경계를 삼아야 한다. 만일 후사가 제후 중에서 나와 입조하여 황실의 정통을 받들 경우에는 마땅히 황제 자리를 계승한 사람으로서의 대의를 명백히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자가 교묘한 말과 사악한 행위로써 그 당시 군주를 유도하고 아첨하여 함부로 정당한 칭호를 세워 황실의 정통을 범하고, 황제의 망부를 황(皇)이라 하고, 망모를 후(后)라고 부르면, 보좌하는 신하들이 그들을 주살해도 용서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이 조칙을 금책(金策 : 황금으로 만든 표찰)에 적어 종묘에 깊이 간직하고 법령에 기재하도록 하라.-

겨울 10월, 평망관(平望觀)을 청송관(聽訟觀)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명제는 항상 말했다.

“재판이란 천하의 생명에 관한 일이오.”

매번 큰 재판이 있을 때마다 항상 재판하는 곳에 와서 방청했다.

이전에 낙양의 종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조씨(曹氏) 선조들의 위패가 업성의 종묘에서 받들어졌다.

11월, 종묘가 비로소 완성되었으므로 태상 한기(韓曁)에게 부절을 주어 고황제(조등), 태황제(조숭), 무제, 문제의 위패를 업성에서 맞이하였다.

12월 10일, 낙양에 이르게 하여 종묘에 신주를 받들어 안치했다. [12]

[12]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按) - 황초(黃初) 4년, 이때 담당 관리는 이묘(二廟)를 세워야 한다고 상주했는데, 대장추(高皇帝), 태황제(太皇帝)와 문제의 고조를 일묘(一廟)로 하고, 태조의 묘를 특별히 세워야만 백대(百代)가 지나도 훼손되지 않으리라는 논지였다. 今此無高祖神主,蓋以親盡毀也。此則魏初唯立親廟,祀四室而已。경초(景初) 원년에 이르러, 칠묘(七廟)의 제도가 시행 되었다.

손성(孫盛) - 事亡猶存,祭如神在,迎遷神主,正斯宜矣.

12월 24일, 대월지국(大月氏國)의 왕 파조(波調)가 사자를 보내어 공물을 바쳤으므로, 파조를 친위대월지왕(親魏大月氏王)에 임명했다.

4년(230) 봄 2월 4일, 조서를 내렸다.

- 세상의 질(質 : 소박함을 존중한 문장)과 문(問 : 수식을 존중한 문장)은 왕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변화한다. 전란이 발발한 이래 경학 교육은 이미 폐지되어 끊어졌고, 나아가 젊은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려고 할 뿐, 경전을 학습하려 들지 않는다. 어찌 내가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 미흡하다고 하여 기용되는 자가 덕의에 따르지 않겠는가? 

앞으로는 관리들이 하나의 경전을 배워 통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박사들에게는 시험을 부과하여 그 중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은 자를 선발하여 즉시 등용하라. 품행은 떠 있고 화려하기만 하여 그 근본을 아는 데 힘쓰지 않는 자는 파면하여 물러나게 하라.-

10일, 명제는 태부(太傅)와 삼공(三公)에게 조서를 내려 문제가 지은 전론(典論)을 돌비석에 새겨 종묘 문 밖에 세우게 했다. 

15일, 대장군(大將軍) 조진(曹真)을 대사마(大司馬)로, 표기장군(驃騎將軍) 사마선왕(司馬宣王)을 대장군(大將軍)에,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연(公孫淵)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여름 4월, 태부 종요가 세상을 떠났다.

6월 11일, 태황태후가 붕어했다. 19일, 상용군을 군에서 없앴다.

가을 7월, 무선변후(武宣卞后 : 태왕태후)를 고릉(高陵 : 무제의 묘소)에 합장했다. 대사마 조진과 대장군 사마선왕에게 조칙을 내려 촉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8월 5일, 동쪽으로 순시를 했으며, 사자를 파견하여 희생인 소를 바쳐 중악(中岳 : 嵩山)에 제사지냈다.(13) 

[13] 위서(魏書) - 행차하는 도중 번창(繁昌)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집금오 장패(張覇)에게 태위(太尉)의 일을 대신하게 하고 희생을 받들고 제위를 받았던 제단을 제사지낸 것이다.

臣松之按:漢紀章帝元和三年,詔高邑縣祠即位壇,五成陌,比臘祠門戶。此雖前代已行故事,然為壇以祀天,而壇非神也,今無事於上帝,而致祀於虛壇,求之義典,未詳所據。


19일, 허창군으로 행차했다.

9월, 폭우가 내려 이수, 낙수, 황하, 한수가 범람하자, 조진 등에게 조칙을 내려 군대를 귀환시키도록 했다.

겨울 10월 11일, 명제가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16일, 명령을 내렸다. 범죄자 중에서 사형수를 제외한 자를 풀어 주는데, 보석금에는 각자 차등을 두었다. [14]

[14] 위서(魏書) - 처음에 제갈량(亮)이 출정했을 때, 대부분 제갈량의 군대에는 짐이 없고 군량미도 제공받을 수 없으니, 그를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므로 군사들을 수고롭게 출동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상규(上邽) 부근의 보리를 베어 버려 제갈량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 버려야 한다고 말했으나 명제는 모두 듣지 않았다. 다만 앞뒤로 군대를 파견하여 사마의(宣王)의 군대를 증원시키고 칙령을 내려 보리를 감시하도록 하며, 이 보리에 의지하여 군대의 식량을 확보하도록 지시했다.

11월, 금성이 목성 부근에 출현하였다.

12월 28일, 문소견황후를 조양릉(朝陽陵)에 이장시켰다. 

23일, 공경에게 재능과 인격이 우수한 현량을 추천하도록 조서를 내렸다.

5년(231) 봄 정월, 명제가 적전(籍田)에서 밭을 갈았다.

3월, 대사마 조진이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이 천수(天水)로 침공하였으므로 대장군 사마선왕에게 조칙을 내려 막도록 했다. 지난해 겨울 10월부터 이 달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9일에 비를 기원하는 성대한 행사를 거행했다.

여름 4월, 선비족 부의왕(附義王)과 가비능(軻比能)은 그들의 부족 사람과 정령(丁零) 대인(大人 : 부족의 실력자) 아선(兒禪)을 인솔하여 유주에 도착하여 좋은 말을 바쳤다. 다시 흉노를 보호하는 중랑장을 설치했다.

가을 7월, 6일에 제갈량이 퇴각하여 도주하자,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더함에 각기 차등을 두었다. 

15일, 태자 조은(曹殷)이 탄생하자 대사면을 내렸다.

8월, 조칙을 내렸다.

- 옛날에 제후를 조정에 참석시킨 것은 친족 간의 화목함을 증진시키고, 모든 나라들끼리 협력하고 융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선제(先帝)가 법령을 만들어 여러 왕을 수도에 머물지 않도록 한 것은 나이 어린 주상이 보위에 있을 때 그의 모후(母后)가 실제 정치(섭정)를 하였으므로 제후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으며, 이것은 모든 국가의 성장과 쇠퇴와 관계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왕은 12년간 모이지 않았으니 어찌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 왕 및 친족 공후(公侯)들은 각기 친아들 한 명을 조정에 참석시키도록 명령한다. 이후에 나이 어린 주상과 모후가 궁중에 있는 경우에는 선제의 명에 따라 행할 것이니, 이것을 법령 속에 기재하여 명확히 밝히도록 하라.-

겨울 11월 17일, 달이 헌원대성(軒轅大星)을 범했으며, 30일 회(晦 : 그믐), 일식이 있었다.

12월 6일, 달이 토성을 범했는데, 21일에 태위 화흠(華歆)이 죽었다.

6년(232) 봄 2월, 조칙을 내렸다.

- 옛날의 제왕이 제후에게 영지를 주어 다스리도록 한 것은 제후들이 힘을 합쳐 왕실을 지켜 주었기 때문이다. 시경에도 ‘덕을 품고 나라를 안정되게 하니, 종자(宗子 : 一族의 자제)가 성의 담장 같구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진나라와 한나라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계승했지만, 제후의 나라는 강하거나 약하여 모두 그 중심을 잃었다. 거대한 위나라가 건국된 이래 모든 왕은 제후국을 얻었지만, 시기의 적절함에 따라 봉했으며, 일정한 제도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히 후대의 규범이 되지 못한다. 지금 개정하여 제후나 왕에게 영지를 주어 모두 일군(一郡)을 갖게 하여 제후국을 다스리도록 하라.

3월 7일, 동쪽으로 순시하러 가는데, 지나는 곳마다 홀아비, 과부, 고아, 아들 없는 노인을 위문하고 곡물과 흰 비단을 하사했다. 

9일, 달이 헌원대성을 범했다.

여름 4월 6일, 허창궁으로 행차했다. 

28일, 처음으로 종묘에 신선한 과일을 바쳤다.

5월, 황자(皇子) 조은이 죽자, 영토를 추증하고 시조를 안평애왕(安平哀王)이라고 했다.

가을 7월, 위위(衛尉) 동소(董昭)를 사도로 삼았다.

9월, 마피(摩陂)로 행차하여 허창궁을 수축하고 경복전(景福殿)과 승광전(承光殿)을 건립했다.

겨울 10월, 진이장군(殄夷將軍) 전여(田予)가 군대를 인솔하여 오나라 대장 주하(周賀)를 성산(成山)에서 토벌하고 참수했다.

11월 4일, 금성이 대낮에 나타났으며, 혜성이 익(翼 : 별자리 이름)에 나타나, 태미성(太微星) 속 상장성(上將星)에 접근했다. 

28일, 진사왕 조식이 세상을 떠났다.

12월, 명제가 행차를 끝내고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청룡(靑龍) 원년(233) 봄 정월 23일, 청룡이 헙현(陜縣 : 北邙山) 마피의 집에 나타났다.

2월 6일, 황제가 마피로 행차하여 그 용을 보았으며, 그 결과 연호를 바꾸었다. 마피를 용피(龍陂)로 바꾸고, 남작(男爵)과 자작(子爵)에 대해서는 두 등급 작위를 주고, 홀아비, 고아, 아들 없는 노인에게는 그 해의 세금을 내지 말도록 했다.

3월 3일, 공경들에게 조칙을 내려, 재능과 인격이 우수하고 행동이 성실한 사람을 각자 한 명씩 추천하도록 했다.

여름 5월 12일, 조칙을 내려 지금은 고인이 된 대장군(大將軍) 하후돈(夏侯惇)ㆍ대사마(大司馬) 조인(曹仁)ㆍ거기장군(車騎將軍) 정욱(程昱)을 태조(太祖)의 종묘 정원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15) 

[15] 위서재조(魏書載詔) - “공신(功臣)에 대해서 옛날 선왕의 예법에서는 살아 있으면 작위와 봉록을 높여 주고, 죽으면 대증(大蒸 : 겨울 제사)의 날에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한 왕조의 공신들은 천자의 영묘(靈廟)가 있는 정원에서 제사지냈으며, 이러한 원칙은 위나라에 들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於是貳等配饗

18일, 북해왕(北海王) 조유(曹蕤)가 죽었다.

윤달 5월 1일, 일식이 있었다. 

8일, 제후왕의 딸 이외의 각 종실(宗室) 황족의 딸을 모두 읍주(邑主)라고 호칭했다. 여러 군국(君國)에 조칙을 내려, 사전(詞典 : 제사의 규정을 나타내는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산이나 냇물에 제사지내는 일을 금지했다.

6월, 낙양궁의 공차는 방(국실)에 불이 났다.

위나라에 귀순하여 변방을 보위하는 선비족 보도근이 이미 배반한 선비족 가비능과 함께 사통하여 내려오자, 병주자사 필궤(畢軌)가 표를 올려 보고하고 문득 자신도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가비능을 밖에서부터 위협하면서 안으로는 보도근을 진압했다. 명제는 표장(表章)을 본 이후에 말했다.

“보도근이 이미 가비능에 의해서 유인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의심이 든다. 지금 필궤가 출동하였는데, 마침 두 부락의 선비족이 놀라 함께 일어서게 된다면 어떻게 위협하고 진압할 수 있겠는가?”

즉시 필궤에게 조서를 내려 설령 군대를 출동시켰더라도 구주(九州)를 넘거나 변방을 멀리 넘지 말라고 명했다. 

이 조서가 도착할 무렵, 필궤는 군대를 전진시켜 음관(陰館)에 주둔시키고 장군 소상(蘇尙)과 동필(董弼)을 파견하여 선비족을 추격하도록 하였다. 

가비능이 아들에게 기병 1천 명을 인솔하게 하여 보도근의 부락민을 맞이하도록 하였으며, 이 부대는 소상, 동필과 만나 누번(樓煩)에서 싸웠는데, 위나라 군대는 패하고, 소상과 동필이 전사했다. 보도근의 부락민은 전부 반기를 들고 국경으로 가서 가비능과 합류하여 국경 지대를 침범했다. 교기장군 진랑(秦郞)을 파견하여 중군(中軍)을 통솔하여 이들을 토벌하자, 선비족은 사막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가을 9월, 안정군 국경 지대 수비를 하고 있던 흉노의 우두머리 호박거자직(胡薄居姿職)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사마선왕은 장군 호준(胡遵)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추격하고 격파하여 항복시켰다.

겨울 10월, 보도근 부락의 우두머리 대호아랑니(戴胡阿狼泥) 등이 병주에서 항복했으므로 효기장군 진랑은 군대를 인솔하여 돌아왔다.[17]

[17] <위씨춘추><헌제전><위략><세어>[[진랑전, 진의록전, 공계전]]으로 분할

12월, 공손연이 손권이 파견한 사자 장미(張彌)와 허안(許晏)의 머리를 베어 보냈으므로, 공손연을 대사마낙랑공(大司馬樂浪公)으로 임명했다.[18]

[18] 세어에 이르길 : 병주자사 필궤가 옛 한의 도요장군 범명우의 선비족 노예를 보내왔는데, 나이가 350세였는데도 말하고 먹고 마시는 게 일반인과 같았다. 노비가 말하길 

"곽현은 곽광의 어린 후처올시다. 범명우의 아내는 곽광의 전처의 딸입니다."

박물지에 이르길 : 이때 수도의 읍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성명은 전하지 않으나, 먹는 것이 10여명에 버금갈 정도여서, 결국 살이 쪄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 부친이 일찍이 먼 곳의 장리로 삼아 보냈는데, 관에서 그를 현까지 옮겨 주었고, 먹을 것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 1,2년 내에, 온 고을이 바로 굶주리게 되었다.

부자(傅子) - 이 외에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태원(太原)에서 묘를 파헤치고 관을 부수었는데, 관 속에서 살아 있는 한 여자가 나왔다. 그녀를 수도로 보내 자초지종을 물었으나 아무것도 몰랐다. 그 묘위에 심은 나무를 보니 30년이나 되었으므로, 이 여자는 30년 동안이나 땅속에서 살았다는 것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소생했을 때, 우연히 묘를 파헤쳤기에 나오게 된 것인가? 정녕 괴이한 일이었다.

2년(234) 봄 2월 10일, 태백성이 화성 부근으로 운행했다. 

18일, 명제가 또 조칙을 내렸다.

- 채찍질을 관리에 대한 형벌을 삼은 이유는 태만한 행위를 바로잡기 위함인데, 근래에 들어 무고하게 채찍질을 당하여 죽음에 이르는 자가 많으니, 채찍질과 곤장의 형벌 제도를 줄이고, 이를 법령에 기재하라.

3월 6일, 산양공(山陽公 : 한 헌제) 유협(劉協)이 세상을 떠났다. 명제는 상복을 입고, 유협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절을 가진 사자를 보내어 장례식을 치르도록 하였다. 

25일에 대사면이 있었다.

여름 4월, 유행병이 크게 발생했으며, 숭화전(崇華殿)이 불타 없어졌다. 

12일, 담당 관리에게 조칙을 내려 큰 소를 바치게 하고 문제의 제묘에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문제의 신주와 패위를 향하여 산양공의 죽음을 보고했다. 산양공의 시호를 추증하여 효헌황제(孝獻皇帝)라 하고, 한나라 황제의 예의 제도에 따라 안장시켰다.(19)

[19] 獻帝傳曰:帝變服,率群臣哭之,使使持節行司徒太常和洽弔祭,又使持節行大司空大司農崔林監護喪事。詔曰:「蓋五帝之事尚矣,仲尼盛稱堯、舜巍巍蕩蕩之功 者,以為禪代乃大聖之懿事也。山陽公深識天祿永終之運,禪位文皇帝以順天命。先帝命公行漢正朔,郊天祀祖以天子之禮,言事不稱臣,此舜事堯之義也。昔放勛 殂落,四海如喪考妣,遏密八音,明喪葬之禮同於王者也。今有司奏喪禮比諸侯王,此豈古之遺制而先帝之至意哉?今諡公漢孝獻皇帝。」使太尉具以一太牢告祠文 帝廟,曰:「叡聞夫禮也者,反本脩古,不忘厥初,是以先代之君,尊尊親親,咸有尚焉。今山陽公寢疾棄國,有司建言喪紀之禮視諸侯王。叡惟山陽公昔知天命永 終於己,深觀曆數允在聖躬,傳祚禪位,尊我民主,斯乃陶唐懿德之事也。黃初受終,命公于國行漢正朔,郊天祀祖禮樂制度率乃漢舊,斯亦舜、禹明堂之義也。上 考遂初,皇極攸建,允熙克讓,莫朗于茲。蓋子以繼志嗣訓為孝,臣以配命欽述為忠,故詩稱『匪棘其猶,聿追來孝』,書曰『前人受命,茲不忘大功』。叡敢不奉 承徽典,以昭皇考之神靈。今追諡山陽公曰孝獻皇帝,冊贈璽紱。命司徒、司空持節弔祭護喪,光祿、大鴻臚為副,將作大匠、復土將軍營成陵墓,及置百官群吏, 車旗服章喪葬禮儀,一如漢氏故事;喪葬所供群官之費,皆仰大司農。立其後嗣為山陽公,以通三統,永為魏賓。」於是贈冊曰:「嗚呼,昔皇天降戾于漢,俾逆臣 董卓,播厥凶虐,焚滅京都,劫遷大駕。于時六合雲擾,姦雄熛起。帝自西京,徂唯求定,臻茲洛邑。疇咨聖賢,聿改乘轅,又遷許昌,武皇帝是依。歲在玄枵,皇 師肇征,迄于鶉尾,十有八載,群寇殲殄,九域咸乂。惟帝念功,祚茲魏國,大啟土宇。爰及文皇帝,齊聖廣淵,仁聲旁流,柔遠能邇,殊俗向義,乾精承祚,坤靈 吐曜,稽極玉衡,允膺曆數,度于軌儀,克厭帝心。乃仰欽七政,俯察五典,弗采四嶽之謀,不俟師錫之舉,幽贊神明,承天禪位。祚(建)〔逮〕朕躬,統承洪 業。蓋聞昔帝堯,元愷既舉,凶族未流,登舜百揆,然後百揆時序,內平外成,授位明堂,退終天祿,故能冠德百王,表功嵩嶽。自往迄今,彌歷七代,歲暨三千, 而大運來復,庸命厎績,纂我民主,作建皇極。念重光,紹咸池,繼韶夏,超群后之遐蹤,邈商、周之慚德,可謂高朗令終,昭明洪烈之懿盛者矣。非夫漢、魏與天 地合德,與四時合信,動和民神,格于上下,其孰能至於此乎?朕惟孝獻享年不永,欽若顧命,考之典謨,恭述皇考先靈遺意,闡崇弘諡,奉成聖美,以章希世同符 之隆,以傳億載不朽之榮。魂而有靈,嘉茲弘休。嗚呼哀哉!」八月壬申,葬于山陽國,陵曰禪陵,置園邑。葬之日,帝制錫衰弁絰,哭之慟。適孫桂氏鄉侯康,嗣 立為山陽公。

이 달 제갈량이 사곡(斜谷)을 지나 위남(渭南)에 주둔하였으므로 사마선왕은 모든 군대를 이끌고 막고 있는데, 명제가 조칙을 내렸다.

- 단지 성벽을 굳게 지켜 촉나라 군대의 날카로운 기운을 꺾음으로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수 없게 하고, 물러나 싸울 수 없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 군량미가 부족할 것이다. 설령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반드시 군대를 물릴 것이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할 때는 아군을 안전한 상태에 놓고 오랜 시일 동안 피곤해진 적군을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한다.(20)

[20] 위씨춘추(魏氏春秋) - 제갈량은 자주 사자를 보내 편지를 전하고 또 머리 수건과 부인의 장식품을 보내 사마선왕을 노하게 했다. 사마선왕이 출동하려고 했을 때, 신비(辛毗)가 부절(杖節)을 갖고 조서를 받들어 사마선왕 및 군리(軍吏) 이하의 사람들이 진영으로 나가는 것을 중지시켰다. 

사마선왕은 제갈량의 사자와 회견할 때에는 단지 제갈량의 수면과 식사, 그 업무가 번잡한가 간단한가 만을 물었지 군사 일은 묻지 않았다. 단지 사자가 

“제갈공(諸葛公)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에 잠을 자므로 20장(杖) 이상의 형벌에는 반드시 스스로 설 수 있습니다. 식사도 얼마를 먹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니, 사마선왕은 

“제갈량의 몸은 무너졌거늘, 오래 살 수 있겠소?”

라고 했다.

5월, 태백성(금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손권이 거소호(居巢湖) 입구로 공격해 들어가 합비(合肥)의 신성을 향해 나아갔으며, 한편으로는 대장 육의와 손소에게 각각 1만 여명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여 회수와 오소로 들어가도록 했다.

6월, 정동장군 만총(滿寵)이 군대를 인솔하여 나아가 이들을 방어했다. 만총은 신성의 수비를 철거하고 적군을 수춘까지 유인하려 했는데, 명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한 광무제는 군대를 파견하여 멀리 약양(略陽)을 점거하고 끝내는 외효(隗囂)를 격파하였으며, 선제는 동쪽에 합비를 두고 남쪽에 양양을 지키게 하고 서쪽에는 기산(祁山)을 지키게 하였는데, 적군이 이 세 성 아래에서 격파된 원인은 이 세 성 모두가 반드시 다투는 요새이기 때문이오. 설령 손권이 신성으로 공격해 온다고 하더라도 함락시킬 수 없을 것이오.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니 수비를 굳게 하면 내가 장차 직접 가서 그들을 정벌할 것이지만, 내가 도착할 때면 손권은 아마도 도주했을 것이오!”

가을 7월 19일, 명제는 직접 용주(龍舟)를 타고 동쪽으로 정벌하러 갔다. 손권은 신성을 공격했지만, 장군 장영(張潁) 등이 성을 지키며 힘을 다해서 싸워 막았다. 명제의 군대는 합비성으로부터 거의 수백 리쯤 떨어져 있었으며, 손권은 도주하고 육의와 손소 등도 퇴각하였다.

대신들은 대장군 사마선왕이 제갈량이 이끄는 촉나라 군사와 대치하고 있어 승리가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명제에게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으로 가서 사마선왕을 후원해 줄 것을 건의하자, 명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손권이 도주했다면 제갈량은 담(膽)을 이미 격파했을 것이고, 대장군은 그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할 필요가 없소.”

그래서 명제는 군대를 진격시켜 수춘까지 행차하고, 여러 장수들의 공로를 기록하였는데, 봉작과 포상에는 각각 차등을 두었다.

8월 7일, 대규모의 열병 의식을 거행하고, 육군(六軍)의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으며,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파견하고, 합비와 수천의 여러 군사들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보내고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29일, 허창궁으로 돌아왔다.

사마선왕과 제갈량은 여러 날을 대치하면서 성채만 쌓은 지 수십 일이 지나도록 제갈량이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사마선왕은 성채를 굳게 지키고 대응하지 않았다. 때마침 제갈량이 질병으로 죽자, 촉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겨울 10월 14일, 달이 진성(鎭星 : 토성)과 헌원성 부근을 침범했다. 

27일, 달이 태백성 부근으로 운행했다.

11월, 수도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동남쪽으로 은은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지붕 위의 기와가 요동쳤다.

12월, 조서로 유사에게 대벽大辟에 관한 법률을 삭제하고 정리하게 하여, 사형에 처해야 할 죄를 줄이게 했다.

3년(235) 봄 정월 8일, 대장군 사마선왕을 태위에 임명했다. 

19일, 삭방군(朔方郡)을 다시 설치했다. 수도에 큰 전염병이 유행했다.

28일, 황태후(문제의 곽후)가 붕어했다. (21) 

[21] 고개지계몽주(顧愷之啟蒙注) - 어떤 사람이 주왕(周王)의 분묘를 열고, 순사자(殉死者)로 매장된 여자를 얻었는데, 며칠 뒤에는 호흡을 하고, 몇 개월 뒤에는 말을 할 수 있었는데, 나이는 스무 살 쯤 되었다. 그녀를 수도로 보내자, 곽태후는 그녀를 사랑하며 길렀다. 10여년 후, 곽태후(太后)가 죽자 그 여자는 비탄해하며 통곡하다가 1년여 만에 죽었다.

26일, 수광현(壽光縣)에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3월 11일, 문덕곽후(文德郭后)를 장사지내고, 수양릉(首陽陵) 계곡 서쪽에 능묘를 만들었는데, 문제가 생존하던 관례에 따라 철저히 진행되었다.

이때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昭陽殿)과 태극전(太極殿)을 만들었으며, 총장관(總章觀)을 지었다. 백성들은 농업의 적기를 빼앗겼으며, 강직한 신하 양부(楊阜)와 고당륭(高堂隆) 등이 각각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하게 진언했는데(명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명제가 비록 권고를 듣지는 않았지만, 항상 대신들에게 매우 너그러웠다. (22)

[22] 위략(魏略) - 是年起太極諸殿,築總章觀,高十餘丈,建翔鳳於其上;又於芳林園中起陂池,楫櫂越歌;又於列殿之北,立八坊,諸才人以次序處其中,貴人夫人以上,轉南附焉, 其秩石擬百官之數。帝常游宴在內,乃選女子知書可付信者六人,以為女尚書,使典省外奏事,處當畫可,自貴人以下至尚保,及給掖庭灑掃,習伎歌者,各有千 數。通引穀水過九龍殿前,為玉井綺欄,蟾蜍含受,神龍吐出。使博士馬均作司南車,水轉百戲。歲首建巨獸,魚龍曼延,弄馬倒騎,備如漢西京之制,築閶闔諸門 闕外罘罳。太子舍人張茂以吳、蜀數動,諸將出征,而帝盛興宮室,留意於玩飾,賜與無度,帑藏空竭;又錄奪士女前已嫁為吏民妻者,還以配士,既聽以生口自 贖,又簡選其有姿色者內之掖庭,乃上書諫曰:「臣伏見詔書,諸士女嫁非士者,一切錄奪,以配戰士,斯誠權時之宜,然非大化之善者也。臣請論之。陛下,天之 子也,百姓吏民,亦陛下之子也。禮,賜君子小人不同日,所以殊貴賤也。吏屬君子,士為小人,今奪彼以與此,亦無以異於奪兄之妻妻弟也,於父母之恩偏矣。又 詔書聽得以生口年紀、顏色與妻相當者自代,故富者則傾家盡產,貧者舉假貸貰,貴買生口以贖其妻;縣官以配士為名而實內之掖庭,其醜惡者乃出與士。得婦者未 必有懽心,而失妻者必有憂色,或窮或愁,皆不得志。夫君有天下而不得萬姓之懽心者,尠不危殆。且軍師在外數千萬人,一日之費非徒千金,舉天下之賦以奉此 役,猶將不給,況復有宮庭非員無錄之女,椒房母后之家,賞賜橫興,內外交引,其費半軍。昔漢武帝好神仙,信方士,掘地為海,封土為山,賴是時天下為一,莫 敢與爭者耳。自衰亂以來,四五十載,馬不捨鞍,士不釋甲,每一交戰,血流丹野,創痍號痛之聲,于今未已。猶彊寇在疆,圖危魏室。陛下不兢兢業業,念崇節 約,思所以安天下者,而乃奢靡是務,中尚方純作玩弄之物,炫燿後園,建承露之盤,斯誠快耳目之觀,然亦足以騁寇讎之心矣。惜乎,舍堯舜之節儉,而為漢武之 侈事,臣竊為陛下不取也。願陛下沛然下詔,萬幾之事有無益而有損者悉除去之,以所除無益之費,厚賜將士父母妻子之饑寒者,問民所疾而除其所惡,實倉廩,繕 甲兵,恪恭以臨天下。如是,吳賊面縛,蜀虜輿櫬,不待誅而自服,太平之路可計日而待也。陛下可無勞神思於海表,軍師高枕,戰士備員。今群公皆結舌,而臣所 以不敢不獻瞽言者,臣昔上要言,散騎奏臣書,以聽諫篇為善,詔曰:『是也』,擢臣為太子舍人;且臣作書譏為人臣不能諫諍,今有可諫之事而臣不諫,此為作書 虛妄而不能言也。臣年五十,常恐至死無以報國,是以投軀沒命,冒昧以聞,惟陛下裁察。」書通,上顧左右曰:「張茂恃鄉里故也。」以事付散騎而已。茂字彥 林,沛人。

가을 7월, 낙양의 숭양전이 불에 타 버렸다.

8월 24일
황자 조방(曹芳)을 세워 제왕(齊王)이라 하고, 조순(曹詢)을 진왕(秦王)이라고 했다. 

11일,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숭화전(崇華殿)을 재건하게 하고, 구룡전(九龍殿)으로 명칭을 바꾸게 했다.

겨울 10월 3일, 중산왕 곤(袞)이 세상을 떠났다. 

26일, 태백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11월 22일, 허창궁에 도착했다. (23)

[23] 위씨춘추(魏氏春秋): 삼국(三國) 시대 위 명제(魏明帝) 청룡(靑龍) 3년 을묘(235)는 곧 촉한 후제(蜀漢後帝) 건흥(建興) 13년이다. 

이해 겨울 10월에 장액군(張掖郡) 산단현(刪丹縣)의 금산(金山) 현천(玄川)이 넘치면서, 그림이 아로새겨진 영귀(靈龜) 모양의 보석이 나왔는데, 너비는 1장(丈) 6척(尺)이고 길이는 1장 7척 1촌(寸)이며 둘레는 5장 8촌으로, 현천의 서쪽에 세워져 있었다. 

여기에는 석마(石馬) 일곱 필(匹)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필은 선인이 타고 있었고 또 한 필은 굴레가 씌워져 있었고 나머지 다섯 필은 형체는 있으나 모양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보석 앞에는 뚜껑 덮인 옥갑(玉匣)이 있고 위에는 옥자(玉字)ㆍ옥결(玉玦) 두 개와 황(黃) 하나가 있었다. 기린(麒麟)은 동쪽에 있고, 봉황(鳳凰)은 남쪽에 있고, 백호(白虎)는 서쪽에 있고, 희우(犧牛)는 북쪽에 있으며, 말[馬]은 가운데서부터 4면(面)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색깔이 모두 창백(蒼白)하였다. 그 남쪽에는 ‘상상삼천왕(上上三天王)’이란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고, 또 ‘술대금 대토조 금단취지 금립중 대금마일필재중 대길개수 차마갑인술수(述大金 大討曹 金但取之 金立中 大金馬一匹在中 大吉開壽 此馬甲寅述水)’라는 글이 적혀 있었는데, 무릇 중(中)자가 6자, 금(金)자가 10자나 들어 있었다. 그리고 팔괘ㆍ열성(列星)과 패성(孛星)ㆍ혜성(彗星)의 상(象) 같은 것이 있었다.

세어(世語) - 又有一雞象

수신기(搜神記) - 일찍이 한(漢)나라 원제(元帝)와 성제(成帝) 시절에 선각자가 살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위(魏)의 시대가 오면 서쪽 삼천여 리 떨어진 곳에서 돌이 열리는데 다섯 마리 말이 그러져 있고 ‘대토조(大討曹)’ 라는 문장 쓰여 있다.’고 예언했다.

급기야 위(魏)나라가 처음 일어설 무렵에 장액(張掖) 군의 유곡(柳谷)에서 돌이 열렸는데 건안(建安)연간에 처음으로 보이다가 황초(黃初)연간에 형태가 만들어지고 ,글씨는 태화(太和) 연간에 이르러서야 다 갖추어졌는데 둘레가 일곱 발에 높이가 한 길로 용마(龍馬), 기린(麒麟), 봉황(鳳皇)、신선 등의 형상이 찬연하게 드러나 있고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문장이 쓰여 있었다. 

그 문장 중에는 대사마(大司馬), 왕(王),대길(大吉),금당취지(金當取之) 등의 글자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유추해 보건대 위(魏)를 대신해 진(晉)이 일어날 것이라는 징조라 했다. 사마(司馬)씨가 왕이 되면 대길하다든가 금(金)이 당연히 취한다는 뜻은 토(土)덕인 위나라를 금(金)덕인 진나라가 당연히 취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 

오행설에 따르면 토생금(土生金)의 순서였다.

한진춘추(漢晉春秋) - 한진춘추(漢晉春秋)에 따르면 저지현(氐池縣) 대유곡구(大柳谷口)에 한밤중에 벼락같은 소리가 나며 격렬한 파도가 일어 물이 넘쳐흘렀는데 새벽이 되자 푸른 돌이 물 한가운데 섰는데 길이가 일장 육척이고 높이가 팔척이었다. 흰 돌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열세 마리의 말과 한 마리 소, 한 마리 새, 팔괘의 형상이었다. 그 돌이 다 융기하자 문장이 드러났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대토조(大討曹),적수중(適水中),갑인(甲寅).”

조예가 그 ‘토(討)’자를 싫어해 깎아 내서 ‘계(計)’ 자를 만들었다. 진(晉)나라 초에 이르자 ‘토(討)’라는 글자가 더욱 선명해졌으며 말 형상이 다 옥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4년(236) 봄 2월, 태백성이 다시 대낮에 나타났고, 달이 태백성 부근을 운행하였으며, 또 헌원성 부근으로 운행하였고, 태미성(太微星 : 사자자리 서쪽의 십성) 구역으로 진입하였다가 나왔다.

여름 4월, 숭문관(崇文館)을 설치하고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불러 임용하였다.

5월 13일, 사도 동소(董昭)가 세상을 떠났다. 

15일, 숙신(肅愼)이 호시(楛矢 : 호목으로 만든 화살)를 헌상했다.

6월 1일, 조서를 내렸다.

- 옛날, 우(虞)시대에는 화상(畵象 : 형벌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으므로 백성들은 법을 어기지 못하였고, 주대에도 형벌 제도를 설치하였지만 법을 어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많은 왕들의 뒤를 이어 과거의 풍속을 따르려고 생각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거리가 먼 것인가? 법령이 많으면 많을수록 법을 어기는 사람들 또한 많고, 형벌의 범위가 날마다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간사하고 사악함을 제지할 수 없도다. 이전에 사형에 관한 법령 조문을 검토하고 매우 많은 부분을 삭제한 것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각 군과 국에서 옥살이하는 자가 1년 사이에 수백 명을 넘는 것이 어찌 짐의 가르침이 충분하지 못하여 백성들에게 범죄를 가볍게 생각하도록 했거나, 가혹한 법이 여전히 존재하여 백성들에게 함정이 된 것이겠는가? 

담당 관리는 재판에 관해 논의하여 사형을 늦추고, 간략하고 관대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 은혜를 구걸하는 자라든지, 변명의 말을 하려는 자를 처벌하고 단죄하는 일은 도리를 추구하여 정을 다하는 수단이 아니다. 현재 재판과 형벌을 담당하는 정위 및 천하의 옥관에게 명하니, 죽을죄를 범한 자가 있다면 충분하게 재판하여 판결을 내리도록 하라. 

모반을 한 자와 직접 다른 사람을 죽인 자 이외에는 모두 그 친족들에게 연락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또 은전(恩典)을 구걸하는 자가 있다면 판결문과 해당 문서를 상주하면 짐은 완전히 사면할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천하에 이것을 포고하여 백성들이 짐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하라.-

가을 7월, 고구려(高句麗)의 왕 위궁(位宮)이 손권의 사자 호위(胡衛) 등을 참수하여 그들의 머리를 보냈고 유주(幽州)에 도착했다.

13일, 태백성이 헌원대성 부근으로 운행했다.

겨울 10월 10일, 명제는 낙양궁으로 돌아왔다. 

15일, 혜성이 대신성(大辰星) 부근에 출현하였는데, 16일, 또 동방에 나타났다.

11월 모일, 혜성이 환자천기성(宦者天紀星) 부근을 범했다.

12월 24일, 사도 진군이 사망했다. 명제는 행차했다가 26일, 허창궁에 도착했다.

경초 원년(237) 봄 정월 18일, 산임현(山荏縣)으로부터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때 담당 관리가 상주하여 위나라는 조대가 다시 바뀌는 삼통설(三統說) 중에서 지통(地統)을 얻었으므로 상나라 조대에 의거하여 12월을 정월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3월, 역법을 개정하고 연호를 바꾸어 맹하(猛夏 : 初夏)를 4월이라 칭했다.(24) 

[24] 위서(魏書) - 문황제(文皇帝)가 즉위하여 후한으로부터 제위를 받았을 때, 한 왕조의 역법을 따랐으며 개정하지 않았다. 

명제는 태자(東宮 : 태자를 의미함)로 있으면서 저술과 논문을 쓰고,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이란 비록 동일한 영기(靈氣)를 갖고 선조를 똑같이 할지라도, 서로 예를 답습하지 않았으므로 역법은 당연히 바뀌고 천명을 받았음을 밝혔다고 생각했다. 

제위에 즉위하자, 사관들이 다시 역법을 개정해야만 한다는 글을 지었다. 그래서 문제는 삼공(三公), 특진(特進), 구경(九卿), 중랑장(中郎將), 대부(大夫), 박사(博士), 의랑(議郎) 등에게 조서를 내려 널리 의론하였는데,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명제는 고전에 의거하여 3월 26일에 조서를 내려, 

“태극은 위로 삼신(三神)과 다섯 개의 혹성을 운행시키고, 원기(元氣)는 아래로 삼통(三統)과 오행을 돌아가게 하여, 올라가고 내려가며 순환시키니, 끝은 곧 시작이다. 때문에 공자는 춘추를 지어 만물이 움트는 달을 제외하고 매달 왕(王)이라 칭하고, 하은주 삼대(三代)의 정월이 번갈아가며 머리가 됨을 밝혔다. 지금 삼통의 순서를 추측하면 위는 지통(地統)을 얻어, 12월을 정월로 해야 한다. 이것에 의거하여 여러 경전을 살펴보면 그 뜻은 명확해진다. 고로 경초 원년 4월로 고치노라”

고 했다.

의복의 색은 황색을 숭상하여 사용하고 제사에 사용하는 희생에는 흰색 짐승을 사용하였으며, 군사가 행동할 때는 앞머리가 검은 백마를 타고 크고 붉은 기를 세웠으며, (25) 

[25]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按) - 위나라는 오행 중 토행(土行)에 해당하므로 옷의 색깔은 황색(黃)을 존중하였다. 은나라의 역법을 사용하여 12월을 정월이라 하였으므로, 희생이나 기는 모두 은나라의 예법을 따랐다.

예기운(禮記云) - 하후씨(夏后氏)는 검은 색(黑)을 존중했다. 때문에 군사용에는 검은색의 말을 타고, 희생에는 검은색 짐승을 사용하였다. 은나라 사람은 흰색을 존중하여 군사용에는 백마를 타고, 희생에는 흰색 짐승을 사용했다. 주나라 사람은 적색을 존중하여 군사용에는 적마를 타고 희생에는 붉은 색 짐승을 사용했다.

정현운(鄭玄云) - 「夏后氏以建寅為正,物生色黑;殷以建丑為正,物牙色白;周以建子為正,物萌色赤。翰,白色馬也,易曰『白馬翰如』。」周禮巾車職「建大赤以朝」,大白以即戎,此則周以正色之旗以朝,先代之旗即戎。今魏用殷禮,變周之制,故建大白以朝,大赤即戎。

조정의 회합에는 순백색의 큰 기를 세웠으며, 태화력(太和曆)을 바꾸어 경초력(景初曆)이라 했다. 춘하추동 및 매달의 맹(孟 : 사계절의 첫 번째 달), 중(仲 : 사계의 중간 달), 계(季 : 사계의 마지막 달)는 하(夏)왕조의 력(曆)과 달랐지만, 교사(郊祀 : 하늘 신에게 지내는 제사), 영기(迎氣 :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날에 천자가 각각 동서남북의 교외에서 사계의 氣를 맞이하는 의식), 약(礿 : 여름 제사), 사(祠 : 봄 제사), 증(蒸 : 겨울 제사), 상(嘗 : 가을 제사로 천자가 행함), 순수(巡狩 : 천자가 제후국을 시찰하는 것으로써, 3월에는 동쪽으로 5월에는 남쪽, 8월에는 서쪽, 11월에는 북쪽으로 감), 수전(蒐田 : 수렵, 봄과 가을에 행함), 분지(分至 : 춘분, 추분과 하지, 동지), 계폐(啓閉 : 啓는 입춘, 입하이고, 閉는 입추, 입동이다), 연간 행사의 포고, 24절기가 모두 하왕조의 역법에 따랐다.

5월 2일, 명제가 낙양궁으로 돌아왔으며, 22일에 대사면을 행했다.

6월 12일, 수도에 지진이 있었다. 

3일, 상서령 진교(陳矯)를 사도로, 상서우박사 위진(衛璡)을 사공으로 삼았다. 

11일, 위흥군(魏興郡)에서 위양현(魏陽縣)을, 석군(錫郡)에서 안부현(安富縣), 상용현(上庸縣)을 분할하여 상용군(上庸郡)이라고 했다. 석군을 없애고 석현을 위흥군에 귀속시켰다.

유사(有司)가 상주했다.

- 무황제는 혼란스런 세상을 다스려 바르게 하여 위태조가 되었으며, 음악에는 무시(武始)의 춤을 사용했습니다. 문황제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천명을 받아 위고조가 되었고, 음악에는 함희(咸熙)의 춤을 사용했습니다. 

폐하는 제도를 만들어 태평스러움을 장려해 위열조(魏列祖)가 되었고, 음악에는 장무(章碔)의 춤을 사용했습니다. 이 삼조의 제묘는 만세까지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네 선조의 제묘는 황제의 친속 관계가 소원해진 이후에 무너져 주왕조가 후직(后稷), 문(文), 무(武) 삼조(三祖)를 제사지내는 제도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27)

[27] 손성孫盛이 이르길 : 대저 시호로 행적을 드러내고, 묘호로 몸가짐을 세우니, 모두 죽고 난 연후에야 드러내기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근거로, 백세百世에 보이는 것이다. 당년에 제도를 거슬러 조종祖宗을 정하거나, 아직 죽지 않았는데 미리 스스로 높이며 이름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과거 화악華樂으로 후하게 염해 비웃음을 불러들였고, 주인周人이 미리 흉한 예를 베풀어 예를 어겼는데, 위의 군사群司는, 이로 인해 올바름을 잃었다.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길 : 군사는, 모든 일을 맡아서 관리하는 신하다.

 

또한 이르길 : 명제明帝가 보위에 있으나, 그의 아랫사람이 미리 묘호를 의정擬定했으니, 예에 어긋난다.

 

통감집람 通鑒輯覽 에서 이르길 : 조예曹叡가 한창 생존해 있으나, 미리 묘호를 정했으니, 어처구니없는 것에서 이를 넘어설 것은 없다!

 

전대소錢大昭가 이르길 : 예에서, 조祖는 공이 있는 것이고 종宗은 덕이 있는 것으로, 응당 죽은 후에 이를 정하는데, 어찌 살아있어 위주魏主가 되는데도, 유사는 마침내 미리 열조를 본뜬 것인가? 진교 陳矯, 위진衛臻의 무리가, 배우지 못하고 무식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 

 

왕명성王鳴盛이 이르길 : 손성은 위인魏人이 생존해 있으면서도 미리 묘호를 정한 잘못을 알았으나, 충분하지 못하다. 예에서, 조는 공이 있는 것이고 종은 덕이 있는 것으로, 이당李唐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종이라 칭하지 않음이 없어, 분수에 넘침이 극치에 달하나, 요컨대 위의 삼대와 같이, 계속 조가 된 경우는 아직 없으니, 오히려 태고이래로 들어보지 못했다. 조예가 이러한 명호를 칭할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조비 또한 부친의 대업을 이어받았는데, 무슨 공이 있다는 것인가! 삼소제기 三少帝紀 의 경초景初 3년 12월 조서와, 관녕전 管甯傳 의 도구일陶丘一의 상주에서, 모두 열조 명황제라고 칭했다. 고귀향공高貴鄉公이 즉위할 때의 조서에서는, 바로 삼조라고 칭했음이, 또한 유방전 劉放傳 에 보이고, 또 진서 晉書 예지 禮志 에 보인다. 진수陳壽가 무기 武紀 에서 태조 무황제라고 칭하나, 문文, 명明 2기紀에선, 다만 문황제, 명황제라고 쓰며, 그들의 조란 칭호를 숨겼으니,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팽손이彭孫贻가 이르길 : 명제는 위에서, 사람답지 못한 사람에게 고명顧命해, 사마씨가 이를 틈탈 수 있게 하여, 진실로 망국의 시초였는데, 어찌 훼손되지 못하는 조祖가 될 수 있겠는가! 자고로 스스로 조라 칭하고 하늘과 함께 제사를 지냄이 없었으니, 유사가 아첨하는 말을 고하나, 어리석고 변변치 못한 임금이 옳다고 대답하며, 돌아보지 않아 말세에 비웃음을 당했다. 가의賈誼가 문제 때에 고성顧成의 묘를 이르며, 태종太宗이라고 칭했으나, 가의는 임금을 선함으로 이끌며, 충성스럽고 정직했으며 꺼려서 숨김이 없었다. 위의 신하들은 아첨하며 억지로 제도를 만들었으니, 낯가죽이 두꺼움이 얼마나 심한가!


가을 7월 2일, 사도 진교가 세상을 떠났다. 

손권은 대장 주연(朱然) 등 2만 명을 파견하여 강하군(江夏郡)을 포위하였지만, 형주자사 호질(胡質) 등이 이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주연은 퇴각하였다. 

이전에 손권은 사자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하여 고구려와의 관계를 통하여 요동을 공략하려고 했었다. 위나라 측에서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여 여러 군대 및 선비, 오환(烏丸)의 군사를 통솔하여 요도 남쪽 경계에 주둔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천자의 도장을 찍은 조칙으로 공손연을 불렀다. 공손연은 출병하여 반역을 하였으므로, 관구검은 진군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때마침 열흘간 비가 계속 내려 요수(遼水)가 많이 불어났으므로 명제는 관구검에게 조서를 내려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했다. 

오한의 선우 구루돈(寇婁敦), 요서의 오환도독(烏丸都督) 왕호류(王護留) 등은 요동에 거주하였지만, 부족을 이끌고 관구검을 찾아와 귀순했다. 

14일, 조서를 내려 요동 장수, 군사, 병사, 서민들 중에서 공손연의 협박 때문에 항복하지 못한 자를 사면했다. 

26일, 태백성이 대낮에 나타났다. 공손연은 관구검이 돌아가자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일컬었고, 모든 관직을 설치하였으며, 연호를 소한 원년(紹漢元年)이라고 했다.

명제는 청주, 연주, 유주, 기주의 네 주에 명을 내려, 해선(海船)을 대규모로 만들도록 하였다.

9월, 네 주의 백성들이 수재를 당하자, 시어사(侍御史)를 파견하여 순찰하도록 하고 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과 재산을 잃은 사람에 대해서는 각기 경우에 따라 관의 창고를 열어 구제하도록 했다. 

16일, 황후 모씨(毛氏)가 죽었다.

겨울 10월 13일, 달이 화성 부근으로 운행했다. 

19일, 도모후(悼毛后)를 만릉(愍陵)에 매장시켰다. 

21일, 낙양 남쪽에 있는 위속산(委粟山)에다 단구(丹丘 : 동짓날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를 만들었다. (28)

[28] 위서재조(魏書載詔曰) - 「蓋帝王受命,莫不恭承天地以章神明,尊祀世統以昭功德,故先代之典既著,則禘郊祖宗之制備也。昔漢氏之初,承秦滅學之後,采摭殘缺,以備郊祀,自甘泉后土、 雍宮五畤,神祇兆位,多不見經,是以制度無常,一彼一此,四百餘年,廢無禘祀。古代之所更立者,遂有闕焉。曹氏系世,出自有虞氏,今祀圜丘,以始祖帝舜 配,號圜丘曰皇皇帝天;方丘所祭曰皇皇后地,以舜妃伊氏配;天郊所祭曰皇天之神,以太祖武皇帝配;地郊所祭曰皇地之祇,以武宣后配;宗祀皇考高祖文皇帝於 明堂,以配上帝。」至晉泰始二年,并圜丘、方丘二至之祀於南北郊。

12월 19일, 동짓날에 처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24일, 양양군에서 임저현(臨沮縣), 의성현(宜城縣), 정양현(㫌陽縣), 기현(邔縣)의 네 현을 분할하여 양양남부도위(襄陽南部都尉)를 설치하였다. 

26일, 담당 관리가 문소황후(견씨)의 제묘를 세우자고 상주하였다. 양양군에서 약엽현(鄀葉縣)을 분할하여 의양군(義陽郡)에 귀속시켰다. (29)

[29] 위략(魏略) - 이해에 장안(長安)에 있던 모든 종우(鍾虡), 낙타(駱駝), 동인(銅人), 승로반(承露盤)들을 (낙양궁으로) 옮겼다. 승로반은 꺾였고 (큰 소리가 수십 리까지도 들렸다). 동인은 무거워서 옮길 수 없었기 때문에, (장안(長安) 동편) 패성(霸城)에 남겨 놓았다. 구리들을 많이 모아 새롭게 동인(銅人) 2개를 주조하고, 옹중(翁仲)이라고 이름을 붙인 뒤에, 낙양의 사마문(司馬門) 밖에 배치했다. 황룡(黃龍), 봉황(鳳皇)을 하나씩 만들었는데, 황룡은 높이가 4장, 봉황은 높이가 3장이었고, 궁전 앞에 설치했다.

또 방림원(芳林園) 서쪽 구석에 흙산을 세우고, 공경 대신들 모두에게 흙을 짊어지고 나르게 하고, 산을 만들게 하고, 나무와 소나무들과 대나무, 잡목들과 좋은 풀들을 그곳에 심었고, 산에 사는 짐승과 새들을 잡아 그곳에 풀어놓았다.

한진춘추(漢晉春秋) - 승로반을 옮기는데, 승로반이 구브러졌고,그 소리가 수십리에 퍼졌다. 금적(金狄: 동인(銅人)이라고도 하데, 진시황(秦始皇)이 만들어 함양(咸陽 장안)에 세워 두었던 것이다)

위략: 사도군의연(司徒軍議掾) 하동(河東) 동심(董尋)의 표가 실려있다.

「臣聞古之直士,盡言于國,不避死亡。故周昌比高祖於桀、紂,劉輔譬趙后於人婢。天生忠直,雖白刃沸 湯,往而不顧者,誠為時主愛惜天下也。建安以來,野戰死亡,或門殫戶盡,雖有存者,遺孤老弱。若今宮室狹小,當廣大之,猶宜隨時,不妨農務,況乃作無益之 物,黃龍、鳳皇,九龍、承露盤,土山、淵池,此皆聖明之所不興也,其功參倍于殿舍。三公九卿侍中尚書,天下至德,皆知非道而不敢言者,以陛下春秋方剛,心 畏雷霆。今陛下既尊群臣,顯以冠冕,被以文繡,載以華輿,所以異于小人;而使穿方舉土,面目垢黑,沾體塗足,衣冠了鳥,毀國之光以崇無益,甚非謂也。孔子 曰:『君使臣以禮,臣事君以忠。』無忠無禮,國何以立!故有君不君,臣不臣,上下不通,心懷鬱結,使陰陽不和,災害屢降,凶惡之徒,因間而起,誰當為陛下 盡言事者乎?又誰當干萬乘以死為戲乎?臣知言出必死,而臣自比於牛之一毛,生既無益,死亦何損?秉筆流涕,心與世辭。臣有八子,臣死之後,累陛下矣!」將 奏,沐浴。既通,帝曰:「董尋不畏死邪!」主者奏收尋,有詔勿問。後為貝丘令,清省得民心。

2년(238) 봄 정월, 조칙을 내려 태위 사마선왕에게 군대를 통솔하여 요동을 공격했다.(30)

[30] 간두진기(干竇晉紀) : 황제가 사마선왕에게 말했다. 

"공손연(公孫淵)이 어떤 방법으로 공에게 대항할 것 같습니까?"

선왕이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계(上計-상책)입니다. 요수(遼水)에 의지해 대군(大軍)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次計)입니다. (그러나) 만약 앉아서 양평(襄平)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오직 현명한 자만이 능히 자신과 상대방(의 역량)을 깊이 헤아려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遼水)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위명신주재산기상시하증표(魏名臣奏載散騎常侍何曾表曰) -「臣聞先王制法,必於全慎,故建官授任,則置假輔,陳師命將,則立監貳,宣命遣使,則設介副,臨敵交刃,則參御右,蓋以盡謀思之功,防安危之變也。是以在險當 難,則權足相濟,隕缺不預,則才足相代,其為固防,至深至遠。及至漢氏,亦循舊章。韓信伐趙,張耳為貳;馬援討越,劉隆副軍。前世之跡,著在篇志。今懿奉 辭誅罪,步騎數萬,道路迴阻,四千餘里,雖假天威,有征無戰,寇或潛遁,消散日月,命無常期。人非金石,遠慮詳備,誠宜有副。今北邊諸將及懿所督,皆為僚 屬,名位不殊,素無定分,卒有變急,不相鎮攝。存不忘亡,聖達所戒,宜選大臣名將威重宿著者,盛其禮秩,遣詣懿軍,進同謀略,退為副佐。雖有萬一不虞之 災,軍主有儲,則無患矣。」毌丘儉志記云,時以儉為宣王副也。

2월 11일, 태중대부 한기(韓耆)를 사도로 삼았다. 

21일, 달이 심거성(心距星) 부근을 운행했고, 또 심(心 : 별자리 이름)의 중앙에 있는 대성(大星) 부근으로 운행했다.

여름 4월 9일, 사도 한기가 죽었다. 

11일, 패국에서 소(簫), 상(相), 죽읍(竹邑), 부리(符離), 기(鵸), 질(銍), 용항(龍亢), 산상(山桑), 문(文), 홍(虹)의 십 현을 떼어내어 여음군(汝陰郡)을 만들었다. 송현(宋縣)과 진군(陳郡)의 고현(苦縣)을 모두 초군(譙郡)에 귀속시켰다. 패(沛), 서추(楈秋), 공구(公丘), 팽성군(彭城郡)의 풍국(豊國), 광척(廣戚)의 다섯 현을 합병하여 패왕국(沛王國)이라 했다. 

19일, 대사면을 단행했다.

5월 15일, 달이 심거성 부근을 운행하고, 또 중앙의 대성 부근을 운행했다.(31)

[31] 위서재무자조(魏書載戊子詔曰) - 「昔漢高祖創業,光武中興,謀除殘暴,功昭四海,而墳陵崩頹,童兒牧豎踐蹈其上,非大魏尊崇所承代之意也。其表高祖、光武陵四面百步,不得使民耕牧樵採。」

6월, 여양군(漁陽郡)에서 호노현(狐奴縣)을 떼어 다시 안락현(安樂縣)을 설치하였다.

가을 8월, 요당(燎當)의 강왕(羌王) 망중(芒中)과 주지(注脂) 등이 모반을 일으켰으므로 양주자사는 여러 군대의 병사를 통솔하여 토벌하고 왕예의 머리를 베었다. 

24일, 혜성이 장숙(張宿)의 구역에 출현했다. (32)

[32] 한진춘추(漢晉春秋) - 史官言於帝曰: 「此周之分 野 也 , 洛 邑 惡 之 。 」 於 是 大 脩 禳 禱 之 術 以厭 焉 。
 
위서(魏書): 9월 촉(蜀)의 음평태수(陰平太守) 요돈(廖惇: 요화의 본명인 요순의 오기로 알려짐)가 반란을 일으켜, 수선강후(守善羌侯) 석심(宕蕈)의 진영을 공격했다. 옹주자사(雍州刺史) 곽회(郭淮)가 광위태수(廣魏太守) 왕윤(王贇), 남안태수(南安太守) 유혁(遊奕)이 병사들을 이끌고 요둔을 격파했다.

곽회가 표를 올려 말했다. 

"왕빈, 유혁이 군사를 나누어 산의 동서를 둘러쌌고 포위하여 적의 외면을 함락시켰으니, 이제 적을 격파하는 것은 아침 아니면 저녁이 일입니다." 

위의 황제 조예(曹叡)는 

"군대는 분산을 피해야 한다"

하면서, 별동대 중 필요 없는 자들은 돌아가 수비에 힘쓰도록 유혁에게 전하라고 칙명을 내렸다. 칙명이 도착하기 전에 요화는 서혁군을 물리쳤고, 왕윤은 화살에 맞아 숨졌다.

9월 10일, 사마선왕이 양평(襄平)에서 공손연을 포위하여 요동군을 대파하고, 공손연의 머리를 수도로 전하여 해동(海東 : 요동)의 제군(諸郡)을 모두 평정하였다.

겨울 11월, 공손연을 토벌한 공적을 기록하고, 태위 사마선왕 이하의 장사들에게 봉토와 작위 등의 상을 주었는데, 각기 차등이 있었다. 

이전에 명제는 대신들과 상의하여 사마선왕을 파견해 공손연을 토벌하게 하고 병사 4만 명을 내주려고 했는데, 의론에 참여한 대신들은 모두 4만 명을 보내는 것은 너무 많으며 싸움에 소용되는 비용을 제공해주기가 어렵다고 주장하자, 명제는 이렇게 말했다.

“4천 리 멀리 적군을 토벌하러 가는데, 비록 뛰어난 계책을 사용한다고 말하지만, 그 역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야 마땅하니 전쟁 비용을 계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는 4만 명을 출정시켰다. 

사마선왕이 요동에 도착할 무렵, 폭우가 계속 쏟아져 즉시 공격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가운데에는 사마선왕이 공손연을 빨리 격파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명령을 내려 사마선왕을 귀환시키도록 하자는 자가 있었으나, 명제는 말했다.

“사마선왕은 위기를 만나면 변화에 대응하여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니, 공손연을 사로잡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명제의 예측과 같았다.

24일, 사공 위진을 사도로, 사예교위 최림(崔林)을 사공으로 삼았다.

윤달, 달이 심(心)의 중앙 대성 부근을 운행했다.

12월 8일, 명제는 예상치 못한 질병으로 병상에 있었다. 

24일, 곽씨로 황후를 세웠다. 천하의 남자들에게 작위를 두 등급씩 주고,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에게 곡물을 하사했다. 연왕 조우(曹宇)를 대장군에 임명했지만, 27일에 파면시키고, 무위장군 조상으로서 그 자리를 대신했다. [33]

[33] 한진춘추(漢晉春秋): 명제는 연왕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고, 영군장군(領軍將軍) 하후헌(夏侯獻), 무위장군(武衛將軍) 조상(曹爽), 둔기장군(屯騎校尉) 조조(曹肇), 효기장군(驍騎將軍) 진랑(秦朗)에게 섭정하도록 했다. 

중서감(中書監) 유방(劉放)과 손자(孫資)는 오랫동안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혹시 진랑 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하여 조우 세력을 제거할려고 몰래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조우가 황제 곁에 있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갑신(甲申)일에, 황제의 의식이 혼미해지자 조우는 조조(曹肇)와 상의할 일이 있다며 궐 밖으로 나가서 안 들어왔고, 황제는 얼마 동안은 오로지 조상(曹爽)하고만 같이 있게 되었다. 유방은 이것을 알고 손자와 불러서 음모를 꾸몄다. 손자가 말했다. 

"지금 나서는 것은 불가합니다."

유방이 대답했다. 

"함께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어찌 불가능한 게 무엇이 있겠소?" 

하고는 곧바로 황제 앞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

“폐하께서 이처럼 쇠약하시니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장차 천하를 누구에게 부탁하시렵니까"

황제가 말했다. 

"경은 연왕을 대장군으로 임용한 사실을 듣지 못했는가"

유방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제의 조칙을 잊으셨습니까? 선제께서는 번왕(籓王)은 정사를 보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막 병이 심해지시자 조조(曹肇)와 진랑(秦朗) 등이 곧바로 입궁해 궐내의 재인(才人)을 데리고 놀고 병수발을 드는 궁녀들을 말로 희롱했습니다.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또 연왕(燕王)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남면하고는 조신들은 전각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고(趙高)와 마찬가지로 국권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황태자께서 유약하시어 정사를 통할할 수 없는데 바깥에는 강하고 난폭한 도적들이 있고 안에는 노역으로 인해 원망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멀리 존망을 생각하시지 아니하시고 옛정과 온정에 얽매여 조종의 기업을 이 두세 사람에게 위탁하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앓아누우신지 며칠 동안 안팎에 차단되어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이나 이를 알지 못하시니 이는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까닭입니다.”

황제는 유방의 말을 듣자 크게 노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누가 태자를 보필할 만하오?"

유방과 손자는 이내 조상(曹爽)이 조우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했다. 

"마땅히 사마선왕을 불러들여서 상의하십시오."

황제는 이 말에 따르기고 했고, 유방과 손자는 밖으로 나왔다.

조조가 다시 황제에게 와서 울면서 간하였고, 황제는 다시 조조에게 명하여, (방금 전에 행했던) 칙서를 정지시키도록 하였다. 조조가 물러갔다.

유방과 손자가 다시 재빨리 들어와 황제를 다시 설득했다. 황제가 다시 유방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유방은 황제에게 말했다. 

"마땅히 친필로 쓴 칙서를 만드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나는 힘이 없어서 만들 수 없소."

유방이 즉시 천자의 침상 위로 올라가 조예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조서를 쓰게 했다. 유방은 조서 쓰기를 마치자 옥새를 내와 조서에 찍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연왕(燕王)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라는 조서가 있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이렇게 하여, 조우, 조조, 하후헌, 진랑등은 모두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이전에 청룡 3년, 수춘의 농민 아내가 스스로 하늘의 신에 의해 지상으로 내려와 등녀(登女 : 선녀)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하고, 위나라 왕실을 보호하고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고 만복을 바쳤다. 그녀는 병든 사람에게 물을 먹이고, 물로 환자의 상처 부위를 깨끗이 씻어 주었는데, 치유된 자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명제는 그녀를 위하여 오어전의 중앙에 관사를 짓고, 조서를 내려 그녀의 효험을 칭찬하고 대단히 후한 대접을 했다. 이때 명제는 병상에 있었으므로 그녀가 바친 물을 마셨으나 효능이 없자 그녀를 죽였다.

3년 봄 정월 1일,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에서 돌아와 하내에 도착하였고, 명제는 역마(驛馬)를 이용하여 조서를 전하여 즉시 낙양으로 오도록 명령하였다. 사마선왕이 급히 도착한 후, 명제의 침실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고, 명제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병세가 심하여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그대는 조상과 어린 자식을 보필해 주시오. 짐은 그대를 보았으니, 어떠한 유한도 없구려.”

사마선왕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34] 

[34] 위략(魏略) - 명제는 유방(劉放)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사마선왕을 불러오기로 했고, 조서를 자기 스스로 만들고, 그를 임명했다. 그리고는 궁중에서 급사 역할을 하는 자를 불러 말했다. 

"벽사(辟邪: 호칭 이름: .(고대 전설 중에 요괴와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신령스러운 짐승을 뜻하기도 함)는 빨리 오거라. 그대는 나의 이 조서가 태위에게 전달되도록 하라."

벽사는 달려갔다. 이때 연왕(燕王) 조우(曹宇)는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관중(關中)에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면서, 사마선왕으로 하여금 마땅히 하내(河內)를 거쳐 지름길로 서쪽으로 가 관중으로 돌아가라 했다. 선왕은 다시 황제가 보낸 조서를 받았다. 곧 이어 또다시 명제 조예가 친필로 쓴 조서를 받았고, 곧 선제는 수도에 무슨 변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수도에 가서, 황제를 만났다.

노문(勞問: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치하함)이 끝나자, 제왕(齊王: 조방)과 진왕(秦王: 조순(曹詢))을 불러오게 하여, 사마의에게 만나게 한 뒤에, 조방을 가리키며 사마의에게 말했다.

"이 아이, 그대가 잘 이끌어 주오. 착오가 없도록 하시오!"

조예는 어린 조방에게 사마의를 안아주라고 지시했다. 조방은 타박타박 걸어 나와 사마의의 목을 끌어안았다.

조방은 신년을 맞이해 막 여덟 살이 되었다. 진왕(秦王) 조순도 아홉 살에 불과했다. 조예가 사마의의 손을 잡고 조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짐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그대를 기다리느라 죽음을 참고 견디었소. 그대는 조상과 함께 이 아이를 보좌해 주시오.”

사마의가 말했다.

“폐하께옵서는 선제께서 신께 폐하를 부탁한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날 명제는 가복전(嘉福殿)에서 붕어했으며,[35] 

[35] 위서(魏書) - 장사 지내기 전에 시신을 구룡전(九龍前)의 거처에 모셨다.

당시 나이가 36세였다. (36) 

[36] 신(臣) 송지(松之)의 의견(按) - 위무제(魏武)가 건안(建安) 9년 8월, 업성(鄴)을 평정하였을 때, 문제가 견후(甄后)를 처음으로 맞아들였으므로, 명제는 건안 10년에 태어났으며 이 해 정월까지를 계산하면 34세가 된다. 그 당시 역법이 개정되어, 전년 12월을 그 해 정월로 삼았던 것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35세는 될 수 있지만 36세는 잘못된 계산이다. 

27일, 고평릉(高平陵)에 안장시켰다. (37)

[37] 위서(魏書) - 명제(帝)는 용모가 빼어나며 위엄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명제는 황태자(東宮)의 신분이었을 때부터 조정의 신하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으며, 정치 문제에도 무관심하고, 오직 생각을 깊이하고 서적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러나 즉위하고 부터는 대신을 예우하고 공적을 세운 자나 유능한 자를 선발하며, 진실과 허위를 바꾸지 않고, 경박함이나 참언의 시초를 끊으려고 노력하였다. 또 군대를 출동시키거나 논의를 통해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에는 지략이 있는 신하, 장군, 대신들이 모두 명제의 계략에 따랐다. 

명제는 선천적으로 기억력이 탁월해 옆에서 모시는 신하들의 신상, 성격과 행위, 과거의 행동 또 그 부형자제의 성격 등에 이르기까지 한번 보고를 들으면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특히 굴욕을 가슴에 담아 참아 내고, 직언을 잘 받아들이며, 신분이 낮은 관리나 백성들의 상소를 받아들였다. 한 달에 수천 봉서(封書)가 이르렀는데, 문장이 비루하더라도 끝가지 읽어 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 평하여 말한다.

명제는 침착하고 굳세며 결단력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며, 마음에 임하여 행동하고, 백성들에게는 군주의 지극한 기개를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하고 온 천하는 분열되었으나, 명제는 선조의 빛나는 대업을 먼저 생각하거나, 왕업의 기틀을 다지지 않고 진시황이나 한 무제를 급히 모방하여 궁전을 지었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관점으로서 헤아리면 이는 아마도 중대한 결함일 것인저!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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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13.05.03
11:16:44 (*.148.47.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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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솔라

2013.07.11
10:05:29
(*.52.89.212)
중복되는 주석 삭제

코렐솔라

2013.07.11
10:18:24
(*.52.89.212)
색깔 없는 주석을 입히고 새로 추가된 번역을 옮겼습니다.

코렐솔라

2013.07.15
11:49:40
(*.0.203.172)
http://cafe.naver.com/sam10/399679에 따라

요동치게 했다. 12월, 조서로 유사에게 대벽大辟에 관한 법률을 삭제하고 정리하게 하여, 사형에 처해야 할 죄를 줄이게 했다.

로 수정했습니다.

코렐솔라

2013.08.01
10:43:25
(*.0.203.41)
27번 주석은 처사군님의 주석입니다.

코렐솔라

2013.08.26
14:38:18
(*.104.28.55)
조비가 맹달에게 보내는 편지 추가 뭔가 빠진 내용이 많은 것 같군요. 近日有命,未足達旨,何者? 앞에 이것도 빠졌고

코렐솔라

2013.09.09
13:39:35
(*.0.203.44)
요둔->요돈으로 오타 수정

무명

2013.10.15
15:07:02
(*.102.90.79)
여기도 공손경을 공손공으로 고쳐야 할 것 같고

코렐솔라

2013.10.15
15:17:48
(*.0.203.147)
넵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3.12.03
18:35:06
(*.52.91.73)
27번 주석의 번역은 처사군님의 번역입니다. http://blog.naver.com/kyspert/110173260228

처사군님 감사합니다!

코렐솔라

2013.12.04
16:01:18
(*.0.203.43)
맹타전 게시자 이름을 구다라님으로 돌려놨습니다.늦어서 죄송합니다.

코렐솔라

2014.01.20
02:05:18
(*.52.91.73)
황초5년->2년으로 고치고 견후가 죽었다는 것을 3년뒤의 기사로 순서 원래대로 돌렸습니다.

출사표

2014.02.02
19:05:20
(*.177.238.59)
처음에 "문제가 처음에 신하들과 접촉이 없었으므로"에서 문제가 아니라 명제인 것 같습니다.

재원

2014.02.03
03:36:38
(*.148.42.188)
제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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