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고원님의 블로그



[[명제기(조예)]]에서 분할

 

[위략]에 이르길


그 이전에 장군 학소郝昭로 하여금 진창성陳倉城을 쌓게 했었다. 제갈량이 이르러 학소를 포위했으나 진창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조진전: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 응징 당했으므로 이후에는 필시 진창(陳倉) 쪽으로 출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장군 학소(郝昭), 왕생(王生)을 보내 진창을 수비하며 다스리게 했다. 다음 해 봄, 과연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으나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능히 이길 수 없었다.

환우기 30권: 진창은 상하 2성으로 서로 잇달아 연결되어 있는데, 상성(上城)은 진문공(秦文公)이 축성하고, 하성(下城)은 학소가 축성한 것이다.

방여기요 55권: 진창성은 보계현 동북 20리에 있다. 후한 흥평 2년(195년), 번조가 한수를 패하게 하여 진창까지 쫓아갔으니, 이것이 상성(上城)이다. 위나라 태화 2년(228년), 학소가 진창을 지켰으니 이는 (학소 본인이 쌓은) 하성(下城)이다.


학소의 자字는 백도伯道이고 태원(太原-병주 태원군) 사람으로 사람됨이 웅장雄壯했다. 젊어서 군軍에 들어가 부곡독部曲督이 되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잡호장군雜號將軍에 임명되어 하서河西를 10여 년 동안 진수鎭守 했는데 민이(民夷-중국민과 이민족)가 외복畏服 했다.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을 때 학소와 같은 고향 사람인 근상靳詳을 시켜 성 밖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학소를 설득하게 했다. 
 
학소가 망루에 올라 근상에게 말했다,


“위나라의 과법科法이 어떤지 경이 익히 알 것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아실 것이오. 나는 국은國恩을 크게 입어 문호門戶가 귀하게 되었으니 경이 말을 더할 것도 없이 오직 죽음을 각오할 뿐이오. 제갈량에게 돌아가 빨리 공격하라고 전해 주시오.”


<삼국지집해> 환우기 30권이 위략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태화 연간 위나라는 장군 학소를 보내 진창성을 쌓게 해서 빠르게 완공시켰다. 이 시기 제갈량이 와서 공격했는데 제갈량은 본디 진창성은 (상태가) 나쁘다고 들었지만, 이 때에 이르러 정돈된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가 학소가 그중에 있음을 들어 알게 되자 매우 깜짝 놀랐다. 제갈량은 학소가 서쪽에 있을때 위명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공격할 생각을 바꾸진 않았다. 당초, 태원의 근상은 어렸을적부터 학소와 가까이 서로 접하는 사이였는데 후에 촉이 그를 얻었다.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을때 그는 제갈량의 감군이었는데, 학소를 불러 (항복하라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학소는 망루에 올라 근상의 말에 대답하기를: "(투항자에게 가혹한) 위나라의 과법은 경도 알 것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경이 알 것이오. 예전에 고강(高刚)은 (제갈량이 기산을 공격하여) 기산을 수비할때 오로지 지키고자 하는 뜻이 없었으니 비록 종래에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지금도 비난과 책망이 그치지 않고 있소. 나는 (고강과 달리) 필시 죽을 뿐이오! 경은 제갈량에게 돌아가 고맙다고 해주시고 공격을 시작하라 해주시오."


근상이 학소의 말을 제갈량에게 고하자 제갈량은 다시 근상으로 하여금 재차 학소를 설득케 하여, 대적할 수 없는 군사로 헛되이 파멸을 자초하지 말라고 했다. 
 
학소가 근상에게 말했다,


“전에 한 말로 이미 정해졌소. 나는 경을 알아도 내 화살(箭)은 경이 누군지 모르리”


이에 근상이 물러났다. 
 
제갈량은 자신의 병력은 수 만인데 학소의 병력은 겨우 천 여 명에 불과하고 또 동쪽으로부터 구원군이 급히 도착할 수 없다 생각해, 진병進兵하여 학소를 공격했다.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로 성에 다가가자 학소는 불화살(火箭)을 쏘아 운제를 불태웠고 사다리 위에 있던 군사가 모두 불타 죽었다. 또 학소는 밧줄로 석마(石磨-돌절구)를 묶어 충차에 떨어뜨리자 충차가 두동강 났다. 
 
이에 제갈량은 백 척 높이의 정란井闌을 만들어 성 안으로 활을 쏘게 하고, 흙으로 참호를 메꾸고는 곧바로 성을 기어오르게 했다. 이에 학소는 성 안에 이중으로 담장을 쌓았다. 
 
제갈량이 다시 땅을 파 성안으로 뛰어들려 하자 학소는 성 안에 가로로 땅을 파 이를 막았다. 
 
밤낮으로 서로 공격하여 20여 일을 겨루었는데 제갈량이 더 이상 방책이 없었고 (위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군을 이끌고 퇴각했다. 조서를 내려 학소가 성을 잘 지켜낸 것을 치하하고 작위를 내려 열후列侯에 봉했다. 
 
수도로 돌아가자 황제가 학소를 접견하여 노고를 위로했는데, 중서령中書令 손자孫資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경의 향리鄕里에 그대들과 같은 쾌인快人 들이 있어 장수로 활약해 이토록 빛나니 짐이 또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이에 학소를 크게 중용하고자 했다. (※ 손자孫資도 학소와 같은 태원 출신)
 
병에 걸려 죽을 때 유언을 남겨 그 아들인 학개郝凱에게 말했다, 
 
“나는 장수로 살았으나 그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음을 깨달았구나. 여러번 남의 무덤을 파헤쳐 나무를 취해 싸움도구로 썼었기에, 후장厚葬하는 것이 죽은 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너는 반드시 나를 평소 입던 옷으로 염斂하거라. 사람이 살아있을 때 처소處所가 있을 뿐 죽은 이가 따로 어디에 있으리? 내 묘는 동서남북 어디든 네가 마음대로 정하도록 하거라”

분류 :
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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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12

2020.07.22
15:40:54
(*.59.29.86)
삼국지집해는 "위나라의 과법科法이 어떤지 경이 익히 알 것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아실 것이오. 나는 국은國恩을 크게 입어 문호門戶가 귀하게 되었으니 경이 말을 더할 것도 없이 오직 죽음을 각오할 뿐이오. 제갈량에게 돌아가 빨리 공격하라고 전해 주시오."라는 학소의 말 다음에 환우기가 인용한 위략 주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배송지가 인용한 위략과는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환우기 30권이 위략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태화 연간 위나라는 장군 학소를 보내 진창성을 쌓게 해서 빠르게 완공시켰다. 이 시기 제갈량이 와서 공격했는데 제갈량은 본디 진창성은 (상태가) 나쁘다고 들었지만, 이 때에 이르러 정돈된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가 학소가 그중에 있음을 들어 알게 되자 매우 깜짝 놀랐다. 제갈량은 학소가 서쪽에 있을때 위명을 들었지만 그렇다고 공격할 생각을 바꾸진 않았다. 당초, 태원의 근상은 어렸을적부터 학소와 가까이 서로 접하는 사이였는데 후에 촉이 그를 얻었다.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을때 그는 제갈량의 감군이었는데, 학소를 불러 (항복하라는) 뜻을 전하게 하였다. 학소는 망루에 올라 근상의 말에 대답하기를: "(투항자에게 가혹한) 위나라의 과법은 경도 알 것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경이 알 것이오. 예전에 고강은 (제갈량이 기산을 공격하여) 기산을 수비할때 오로지 지키고자 하는 뜻이 없었으니 비록 종래에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지금도 비난과 책망이 그치지 않고 있소. 나는 (고강과 달리) 필시 죽을 뿐이오! 경은 제갈량에게 돌아가 고맙다고 해주시고 공격을 시작하라 해주시오."

◎《寰宇记》卷三十引《魏略》云:太和中,魏遣将军郝昭筑陈仓城,适讫,会诸葛亮来攻;亮本闻陈仓城恶,及至,怪其整顿,闻知昭在其中,大惊愕。亮素闻昭在西有威名,念攻之不易。初,太原靳详少与昭相亲,后为蜀所得。及亮围陈仓,祥为亮监军,使于城外呼昭喻之。昭于楼上应详曰:“魏家科法,卿所练也。我之为人,卿所知也。曩时高刚守祁山,坐不专意,虽终得全,于今诮议不止。我必死矣!卿还谢诸葛亮,便可攻也。”

코렐솔라

2020.07.22
17:15:20
(*.46.174.164)
넵 반영했습니다. 1차 때 고강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군여. 이름은 커녕 기산에 지키던 병력이 있었다는 것도 삭제된 ㅠㅠ 장특 때 보이는 100일 법률이 이것 때문에 생겼을지도 모르겠군여

서현12

2020.07.22
17:51:09
(*.59.29.86)
제갈량전에도 '제갈량 자신은 제군(諸軍)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공격했다'고 하니 정사도 기록은 하고 있는데 진수와 배송지는 굳이 이름을 적을 필요를 못 느꼈나 봅니다.ㅠㅠ

서현12

2020.07.22
19:06:40
(*.59.29.86)
좀 더 삼국지집해를 봤는데요. '그 이전에 장군 학소郝昭로 하여금 진창성陳倉城을 쌓게 했었다. 제갈량이 이르러 학소를 포위했으나 진창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다음에 다음과 같은 주석들이 붙습니다.

조진전: 조진은 제갈량이 기산에서 응징 당했으므로 이후에는 필시 진창(陳倉) 쪽으로 출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장군 학소(郝昭), 왕생(王生)을 보내 진창을 수비하며 다스리게 했다. 다음 해 봄, 과연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으나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으므로 능히 이길 수 없었다.

환우기 30권: 진창은 상하 2성으로 서로 잇달아 연결되어 있는데, 상성(上城)은 진문공(秦文公)이 축성하고, 하성(下城)은 학소가 축성한 것이다.

방여기요 55권: 진창성은 보계현 동북 20리에 있다. 후한 흥평 2년(195년), 번조가 한수를 패하게 하여 진창까지 쫓아갔으니, 이것이 상성(上城)이다. 위나라 태화 2년(228년), 학소가 진창을 지켰으니 이는 (학소 본인이 쌓은) 하성(下城)이다.

【◎《曹真传》:真亮惩于祁山,后出必从陈仓,乃使将军郝昭、王生守陈仓,治其城。亮果围陈仓,已有备而不能克。《寰宇记》卷三十:陈仓有上下二城相连,上城是秦文公筑,下城是郝昭筑。◎《方舆纪要》卷五十五:陈仓城在宝鸡县东北二十里。后汉兴平二年,樊稠败韩遂,追至陈仓,此上城也。魏太和二年,郝昭守陈仓,此下城也。】

코렐솔라

2020.07.22
22:01:38
(*.153.81.156)
넵 반영했습니다.

서현12

2020.07.22
22:55:13
(*.59.29.86)
약간 잘못 넣으신게 삼국지집해 원문에는 저기 첫 문장 다음에 조진전, 환우기, 방여기요를 붙였습니다. 붙여주신건 감사드리는데 붙이는 위치가 잘못되셨어요. 학소전 첫 문장인 '그 이전에 장군 학소郝昭로 하여금 진창성陳倉城을 쌓게 했었다. 제갈량이 이르러 학소를 포위했으나 진창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다음에 조진전, 황우기, 방여기요를 붙이셔야 합니다.

코렐솔라

2020.07.23
09:52:09
(*.112.38.50)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번역했을 거라고 어림짐작 했군여 ㅋ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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